심령의 부활
에베소서 2:1~10
설교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다 죽었었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하면서 주 안에서 다시 새사람으로 살게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전적인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했다고 해서 절대로 자랑할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니라 주 때문에 이겼으므로 영광과 존귀 그리고 찬양을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 2장 1절을 같이 한 번 보십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과 죄’라는 말은 얼른 보면 비슷한 말입니다. 그러나 엄격히 구분을 하면 좀 다릅니다. 허물은 도덕적인 과실을 의미하고, 죄는 종교적인 과실을 의미합니다. 허물과 죄는 우리의 심령을 죽게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결국 우리의 심령은 다 죽었었습니다.
사람들이 범죄하는 과정을 보세요. 처음부터 무서운 죄를 짓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는 죄 지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됩니다. ‘어디 그럴 수가 있나?’하면서 벌벌 떱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고 나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 심령이 죽어서 그럽니다.
병이 처음 들었을 때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말 심해지면 고통을 별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병들어 아픈 것은 아직 희망이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합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그렇습니다. 가령 어떤 공무원이 관청에서 사무를 봅니다. 사무를 보려고 서류를 가지고 간 어떤 사람이 수속이 다 끝난 다음에 그 공무원에게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점심이라도 한 그릇 사 잡수세요”하면서 돈을 얼마 줍니다. 그러면 이 공무원은 사양합니다. 그러나 너무 권해서 받습니다.
이런 일을 오래 거듭하면 사람이 마음이 좀 달라집니다. 그 다음 단계에는 손님이 오게 되면 ‘이 손님은 서류가 끝나면 얼마나 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손님이 오면 절차를 밟기 전에 아예 찻집 같은 데 데리고 나가서 “내가 이 서류를 통과시켜 주면 얼마나 줄래요?”하고 미리 흥정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무 공무원이 세금 받아 나라 살림에 쓸 생각하지 않고 세금 핑계 삼아 자기 주머니에 돈 들어가는 것에 관심이 더 커집니다.
죄는 우리 심령의 이상(理想)을 죽게 해 버립니다. “바로 살아야겠다.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는 이상이 누구에게나 있는데, 죄는 이런 귀한 생각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보세요.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갔다가 어떻게 잘못 되어서 더러운 물방울이 몇 방울 튀게 되어 옷에 묻으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러나 지나가는 자동차 때문에 흙탕물을 콱 뒤집어쓰게 되면 그 다음엔 아예 포기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돼라” 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절망입니다. 불행입니다.
더구나 죄는 우리의 의지를 죽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우리의 행동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면 의지가 약해집니다.
몰핀 주사를 맞는 사람은 몸이 괴로워서 진통제로 맞습니다. 몰핀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동안 아픈 것을 잊게 하고 모르게 마취시킵니다. 기분이 개운합니다. 아픈 것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약 성분이 없어지면 또 아픔이 옵니다. 그러면 조금 전 아픔이 없던 때를 기억하게 됩니다. ‘아까 그 몰핀 주사를 맞았을 때 아픔이 없었는데’하면서 또 한 번 주사를 맞습니다.
여러 번 거듭하다 보면 ‘이러다가 중독이 되면 안 되는데’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몰핀의 습관이 의지를 누릅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하면서 결국 중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독이 되면 그 의지가 죽어 버리고 맙니다.
한 번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범죄 수사 프로를 보았습니다. 도박의 명수로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하던 전과 수십 범에게 어느 형무소 생활 후배가 찾아와 도박을 할 때 속이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때 거의 폐인처럼 된 이 도박의 명수가 하는 말이 “여보게, 아편은 중독이 되면 입원하여 혹시 고칠 수 있어. 그러나 이 버릇은 한 번 들여놓으면 고칠 약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칠 약이 없는 버릇, 습관, 이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고,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고,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 옳은 말입니다. 사실 어떤 행동, 어떤 습관은 사망에 이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나쁜 습관은 우리의 의지를 죽게 만듭니다.
그러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생활은 어떠했었습니까? 본문 2~3절을 보세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의 심령이 죽었던 때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첫째로,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들이 보통 행하는 것과 같이 그런 방법으로 행동하며 살아왔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미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옛날 풍습을 좇아 살았습니다. 세상을 믿고 살았습니다. 돈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내 지식만 믿고 살아왔습니다. 권력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신을 따라 살았었습니다. 심령이 죽은 사람은 움직인다고 해야 썩은 냄새밖에는 날 것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지시를 따라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게 사로 잡혀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 공중에는 악한 영들이 가득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것처럼 공중의 세력을 잡은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마귀에게 붙잡혀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꼼짝도 못하고 코가 꿰여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나실 사람으로 난 하나님의 사람 삼손은 인간의 생각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중의 세력을 잡은 마귀는 들릴라라는 블레셋 여인을 통해서 삼손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 종말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마귀에게 붙들리는 것처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셋째로,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귀의 생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순종입니다. 범사에 부정적입니다. 반항적입니다. 의심나게 합니다. 불평하게 합니다.
마귀가 하와를 찾아와서 처음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가 이것을 몰라서 하와에게 물었습니까? 아닙니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왜 물었어요? 인간의 마음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때 하와가 대답한 말을 들어보세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
바로 여기서 마귀는 인간을 타락시킬 조건을 찾았습니다. 여자의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있는 것을 잡았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너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셨고, “만지지도 말라”한 것은 여자가 붙인 말인데, 불평에서 나온 말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한 이 말은 의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죽을 둥 말 둥 하다”는 말입니다.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마귀는 반드시 시험합니다. 마귀의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불평, 불만,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꼭 시험합니다. 마귀의 특성은 불순종입니다. 반항하게 합니다. 거역하게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는 사람은 시험하려 해도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순종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넷째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자니 육체가 괴롭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려면 영혼이 살 수 없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15가지 죄목이 기록되었는데, 라이트훗은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성적인 죄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둘째는 종교적 죄로 우상숭배와 술수, 셋째는 형제 관계의 죄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넷째는 무절제의 죄로 술 취함과 방탕을 말했습니다.
첫째인 성적인 죄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같이 범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인 종교적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고, 셋째인 형제에 대한 죄는 사람에 대한 죄요, 넷째인 무절제의 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습니다.
다섯째,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의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우리에게 만 입이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우리는 이 사망의 길을 걷고 있던,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였습니다. 이것만이라면 우리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본문 2장 4절을 보세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고침을 받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큰 병원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방면에서 병들어 죽게 된 심령이 이 병원에 와서 참 의사 되시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못 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병자라야 병원엘 갑니다. 그러므로 의사 선생님들은 언제나 병들어 고생하는 환자만을 대해야 합니다. 아파서 죽겠다고 야단하는 환자를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도 “건강한 사람에겐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사람이라야 필요하다”고 하면서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자고 하면 “아,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갈 수 있나요?”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교회를 선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으로,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해서 그럽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좀 안 좋게 살던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눈이 둥그렇게 되어 가지고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교회엘 다 나오지?”하고 이상한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구나 다 나오는 곳입니다. 죄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죄인이 나와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이상과 새로운 의지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완전히 달라집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미워하던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범사에 부정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불평과 불만에 싸여 살던 사람이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게으르던 사람이 부지런해집니다. 더럽게 살던 사람이 깨끗이 살게 됩니다. 거짓되던 사람이 정직해집니다. 강퍅하던 사람이 양처럼 순해집니다. 남을 해치기만 하던 사람이 봉사하게 됩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 집니다.
변화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기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변화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 선생님 한 분은 세상 말로 해서 아주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주변의 직원들이나 학부모들이 “어떻게 저 사람이 선생이 되었을까?”라고 할 정도로 못 되게 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나서 그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학부모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정말 놀랍게 변화되어 주변 분들이 “아니, 사람이 달라져도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하게 되고, 학부모들이 이것을 보고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하면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7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8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9절에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노력으로, 내 행위로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고 자랑할 만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임하는데 내 믿음의 손을 벌리고 그 은혜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도 손을 벌리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그릇을 엎어놓으면 비 한 방울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그릇을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선물을 넘치게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감격할 것뿐이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삼층천에, 그러니까 천당에 가 본 분입니다. 높은 차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바울이 너무 부럽습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나 훌륭했으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지금 목사로서 단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저를 본받으시오”하고 말씀드릴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는 육신의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가 그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거시켜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했습니다. 그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지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셨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여기 선한 일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심령을 주님께 데리고 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심령을 구원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새 피조물이 된 우리가 할 지상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나,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여 전도의 일을 다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격려의 말씀도 그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고 만세 전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이 세상에 반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을 볼 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듯이 여길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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