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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엡1;15]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 박조준 목사

하나님아들 2016. 4. 19. 15:20

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에베소서 1:15~23

설교 : 박조준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에게 더욱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신령한 축복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축복이 얼마나 귀한가를 감사드리며, 그와 같은 신령한 축복이 더욱더 풍성할 것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신령한 복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신령한 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매우 좋게 생각했습니다. 본문 15~16절을 보세요.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저희가 기업을 보증으로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생각하기를 ‘이제 유업에 대한 보증을 받았으니 이제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이제는 더 염려할 것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필요도 없고 나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신 데 대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돼. 그래서 나도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 너희를 기억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릴 때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기를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더욱 더 풍성한 성령을 주실 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에 가서 사도 바울이 이런 기도의 부탁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8~20).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성도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이야 얼마나 다른 이의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왜 교회에서 교역자와 교회에 봉사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는지 아십니까?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이 없이는 무슨 일이든지 바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지금까지도 여러분께서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에베소의 성도들이 박해를 받는 데서 자유함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돈을 좀 많이 벌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세상 연락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말은 세상 학문을 배워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얻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일찍이 칼빈 선생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 중에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던 헬라의 아덴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신을 섬겼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면서 경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고 경배하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을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이 특별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면 안됩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복이 있습니다(단 11:32). 그냥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아니고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나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셨고, 나에게 믿음을 주셨고, 나를 매일 인도하시며, 나와 함께 계셔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이 지식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히브리 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의 눈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역사는 우리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세상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디매오는 이중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요, 남의 것을 빌어 먹어야만 하는 거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의 밑바닥에서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는 아마 여러 의사에게 가보았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소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치지 못하고 포기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바디매오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떤 이의 말이 나사렛에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이 여리고 같은 데 오실까? 만일 오신다고 해도 나같이 가난하고 눈 먼 거지를 만나시지는 않을 거야. 아마 여러 종교 지도자들이나 부자들이 그를 모시겠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누가 오십니까?” 그러나 그에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아무도 그의 물음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바디매오의 앞을 지나갑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누군지 모르나 어떤 사람의 옷을 꽉 붙들면서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바디매오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옷자락을 뿌리치면서 내뱉듯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

‘나사렛 예수! 아,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이 순간 바디매오는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를 구해주십시오! 예수님, 어서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바디매오는 바로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꼭 맞는 시간에 부르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만일에 그가 ‘이번에 내가 기다려야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만날 테니 나는 다음 기회에 만나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거기에 그대로 앉아 기다렸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바디매오는 잘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다시 그 길로 오실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예루살렘에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순간은 그의 온 생애에 있어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바쁘신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늙은 거지는 함께 이야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라”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바디매오야,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 어서 빨리 가봐!” 바디매오는 그가 걸치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지팡이를 팽개치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바디매오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바디매오는 흥분한 어조로 “주님, 보게 해주십시오” 했습니다. 그가 ‘주님’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영의 눈은 이미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보세요! “너의 지적인 이해가 너를 낫게 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재산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한 일이 너를 낫게 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 믿음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평생을 소경으로 늙은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가 평생 처음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장면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바디매오는 정말 바로 구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 내 옷이 너무 낡았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제가 다음에 먹을 끼니가 없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는 집 한 칸 없습니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에게는 보는 것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어떻습니까? 육신의 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의 눈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지는 않았습니까?

만일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기쁨, 감격, 평화, 만족에 대해,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럽니다.

이 어두운 눈은 고쳐야 합니다.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지금 우리의 심령의 어두운 눈을 밝혀 주시며,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현재만 보지 않고 장래를 보게 됩니다. 물질만 보지 않고 영혼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만 보지 않고 저 세상을 보게 됩니다.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질 때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기독교를 부름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부르심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소망하는 위대한 목표를 분명히 내다보고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늘나라의 기업이 준비되어 있고 이 세상에서도 기업이 있습니다. 이 영광을 경험으로 알며 신령한 생활의 능력과 기쁨과 원리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골 3:1~2).

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게 하는 지식을 누구나 갖기를 바라고 누구나 기쁨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그의 백성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된가 하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동행하고자 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십니까? 본문 20절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나니 마음 가운데 변화를 느끼게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앞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밝아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마련하신 샘물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 우리의 소망, 기업의 영광, 그 크신 능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코이네의 외침
글쓴이 : 코이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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