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엡1;3] 하늘의 신령한 복 / 박조준 목사

하나님아들 2016. 4. 19. 15:19

하늘의 신령한 복

에베소서 1:3~6

설교 : 박조준 목사



에베소서의 처음 두 절은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의 인사 부분입니다. 본래 이 편지의 원문에는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라는 표시가 없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써서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에 보냈었는데 회람 형식으로 이 교회에서 다 본 다음에 다른 교회로 돌려 보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에베소라는 이름을 써넣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편지는 어느 특정한 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니고 여러 교회에 보낸 일반적인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다가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의 본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의해서 사람을 택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교만한 가운데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에서 어디를 보아도 바울이 교만한 것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데 대하여 언제나 감격해하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를 보세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2~14).

바울은 자신을 불러 사도의 직분을 맡겨 주신 데 대하여 감격과 감사를 금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은 성도들에게 문안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먼저 ‘은혜’라는 말은 ‘Χάριꐠ’로, 헬라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 사이에는 흔히 인사할 때 ‘Χάρειν’ 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물론 ‘총애’ 또는 ‘호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울이 쓴 ‘Χάριꐠ’란 말은 신약성경에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Χάριꐠ’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주신 사실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값이 없습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엔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도 값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순간순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공기, 하루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귀한 물도 값이 없습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는 태양 광선도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거저입니다. 이 은혜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심판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 되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이 놀라운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거저 와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강’을 축원했습니다. 평강(εἱρήνη)은 은혜를 받은 결과요, 상태입니다. 이것을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말로서 ‘Shalom’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차원 높은 인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인사는 서양 사람들보다도 얼마나 고상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한국 사람은 이런 면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침이나 점심때나 저녁에나 언제나 만나면 “평안하십니까?”하고 인사하고, 헤어질 때는 “평안히 계십시오.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인사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아침에 만나면 “Good morning”(좋은 아침입니다)이라고 하는데 우리 인사말보다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훈하실 때 “어느 가정에 들어가든지 그 가정에 들어갈 때에는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제자들에게 평안을 비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면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1, 27)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안을 원합니다. 그런데 환경과 조건만 좋아지면 평안하리라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어 좋은 집에서 살고, 고급 자동차 타고 다니고, 좋은 옷 입고, 기름진 음식 먹으면 평안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까? 오히려 지위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불안해집니다.

세상의 환경이나 조건이 주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평안입니다. 외적인 평안입니다. 육신적인 평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환경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조건이 어떻게 달라진다고 하여도 변함없는 평강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다 물결은 출렁거립니다. 그러나 깊은 바다 속은 파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고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평안은 우리 심령의 평안입니다. 어느 평안이 참 평안입니까? 여러분, 육신의 평안을 원하십니까? 심령의 평강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마음의 평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마음속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만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귀한 생활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우리 인간을 화평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먼저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마음에 평강이 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 험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장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합니다. 옛날 모세도 여호수아도 중한 책임을 맡았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의 평안을 뺏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마음의 평화를 빼앗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 평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평강을 받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인 세상이요, 무신론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은 거추장스럽습니다. 성경도 산상보훈이나 황금률이면 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본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찬송할 일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찬송할 이유를 말합니다.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택한 일을 우리가 왜 찬송해야 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육신적인 것은 우리가 택할 수 있으나 영적인 면에는 선택권이 없어지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입니다(엡 2:1).


그런데 여기 우리를 선택해 주셨는데 누가 선택했어요? 사람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3절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하늘의 신령한 복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복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인 복과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면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자연적인 복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농사를 잘 짓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장사나 사업을 잘 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복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고를 준비해 놓으시고 “네가 노력해서 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력해서 얻는 복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축복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용서받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신령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어요?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 때문에 택하셨어요?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 하반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어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습니다.

여기 ‘거룩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άγίος)라고 말씀했는데 ‘하기오스’라는 말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성전(聖殿),’ ‘성일(聖日),’ ‘성도(聖徒).’ 이것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선택하셨어요?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때리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왜요? 저희들과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미워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한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둡게 살기를 원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밝게 살자고 하고 바르게 살자고 하니 도무지 거추장스러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했고 미워했고 핍박했습니다. 왜요? 자기들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마음에 가책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핍박했어요.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지 않습니다.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제는 예수 믿는 일이 보편화되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기오스’가 되지 못해서 그럽니다. 다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발전해 예수 믿는 사람의 수준에 올라와서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까? 물론 많이 올라 왔지요. 대신에 교회가 세상으로 많이 내려가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다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구별 됨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만 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을 더 좋아합니다. 세상 사람만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더 감투를 좋아합니다. 세상 사람만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거짓말을 썩 잘 합니다. 다른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일 까닭이 없습니다. 대신에 비방하고 조소합니다.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과 비난하고 조소하는 것은 다릅니다.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무서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하고 조소하는 것은 업신여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옛날 교회는 미움과 박해를 받았고 오늘의 교회는 비난과 조소를 받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셔서, 구별되게 살라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습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구약 시대의 제물에서 온 말입니다.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는 미리 검사관들이 조사를 하였습니다. 제물의 몸에 흠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통과가 되어야 제단에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선택하셨습니다. 여기 ‘흠이 없는 사람’이란 말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흠이 많고 죄가 많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결점과 과오가 많이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받으셨습니까? 세리의 기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섰기 때문입니다.

죄가 많은 것을 자각할 때 자연히 회개가 뒤따릅니다. 회개가 따를 때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을 때 구원을 얻게 되고, 구원 얻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사한 마음이 생겨 더 바로 살고 주를 위해 봉사하려는 생각과 노력이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흠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하신 목적 하나가 더 있습니다. 5절에 보세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 ‘아들들’이라는 말은 ‘양자 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5절에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하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고 우리를 사서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I am nobody but my father is the king). 이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의 아들이 아닙니다. 어느 재벌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합시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코이네의 외침
글쓴이 : 코이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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