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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엡1:7]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 / 박조준 목사

하나님아들 2016. 4. 19. 15:19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

에베소서 1:7~10

설교: 박조준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늘의 신령한 복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처녀들이 시집을 갈 때 보면 복 받기 원하는 마음에서 준비해 가는 물건마다 ‘복’(福)자가 다 새겨져 있습니다. 숟가락에도, 젓가락에도, 밥그릇에도, 이불에도, 베개에도, 옷장에도 어디에나 ‘복’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지,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복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세상적인 복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복과 영적이고 신령한 하늘나라의 복은 완전히 다릅니다.

가령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축복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육신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세상적인 복과 달라서 세상의 환경이나 조건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신령한 복을 찬송하게 된 이유는 많은 사람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셔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하게 구별되어 세상 사람과는 좀 다른 데가 있어야 할 것이며 흠없이 사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7~8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여기 ‘구속’(ἀπολύτρωδιꐠ, Redempt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했습니다(비교. 막 10:45).

‘대속물’이란 말은 ‘배상한다’는 말인데 ‘구속한다’는 말과는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구속이란 그 배상하는 일을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 되었던 사람을 돈을 지불하고 사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배경을 말하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하나님께서 해방시켜 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종 된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방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홍수가 나서 물에 밀려 사람이 떠내려갑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헤엄쳐 나올 수도 없고 헤엄칠 줄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인데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와서, 혹은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건져 주어서 죽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살아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힘으로 살아나고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살아나고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속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이 되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풀려나올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 사도 바울이 세례의 의미를 말하면서 설명한 부분을 보세요. 6절 이하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6~9)고 하였습니다.

구속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죄의 종노릇하여 내 힘으로는 살아날 길이 없고, 해방 받을 길이 전혀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피로 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살려 주시고, 죄의 종살이하던 데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구속을 받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을 잘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속 사업은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론 우리의 영혼이 구속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구속은 우리 기독교의 큰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았으니”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를 지은 사람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삽니다. “죄 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왜요? 무서워서 그럽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운데 여러 가지 신령한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그것은 죄사함을 받는 축복입니다.


인생 행로를 걸어가는 모든 사람의 정경을 보면 모두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환난의 짐, 근심의 짐, 걱정의 짐, 빈곤의 짐, 고독의 짐, 실패의 짐, 슬픔의 짐 등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지친 몸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무거운 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죄의 짐입니다. 더구나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치고 죄의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신령한 복을 받는 중에 제일 먼저 받는 복이 죄사함을 받는 축복입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우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어디 가나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꼭 받고야 맙니다. 그러기에 구약에 보면 “네 죄가 반드시 너를 찾아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한 뒤에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무서워서 숨었었습니다. 죄를 범하면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변해서 긍휼과 자비가 됩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았었지만 죄사함을 받게 되면 그 담이 무너져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고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다 아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사함 받으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는 항상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으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지고 우리 마음속에 참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을 때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하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장래에 대해서도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가 그대로 있을 때는 앞을 바라보아야 캄캄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죄인에게는 장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인의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낙담뿐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죄사함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롬 6:2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문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피는 누구의 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1.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3.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4. 거룩한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죄 속한 은혜의 찬송을

  기쁘게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후렴)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할 때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도를 보면 사람이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짐승을 희생의 제물로 드렸고 그 피로 사람의 죄가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가 만민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십자가 고난을 받으셔서 죽으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우리 앞에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 받는 것은 물론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공로로도 이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은혜요,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죄사함 받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으므로 누구든지 이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꼭 한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이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객관적인 조건이라면, 또한 우리가 죄사함 받는 주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가르치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와 신앙은 죄사함을 받는 주관적인 조건입니다. 아무리 대속의 사실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설교할 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외쳤습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였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5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했어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누구든지 죄가 나쁜 것을 알고 그 죄를 버리고, 잘못 걷던 길을 버리고 방향을 온전히 돌이켜서 주님께 돌아와서 예수를 구주로 온전히 믿으면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죄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다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아직도 죄의 사슬에 매여 종노릇하며 괴로워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온전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해 주시고 기쁨 가운데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아직도 완전히 회개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의 주로 받아 죄사함을 받는 기쁨의 축복을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혜와 총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혜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인생의 삶과 죽음,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 같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습니까? 예수 모르는 사람은 돈 많이 벌고 평안히 살다가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죽은 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전에 공자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우리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공자는 “이 사람들아, 사람이 살아 생전의 일도 다 모르고 사는데 어떻게 죽은 다음의 일까지 알 수 있겠나?”하면서 오히려 반문했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절을 보세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비교. 딤후 4:6~8) 여러분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이 분명합니까? 그러시다면 다 지혜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총명이란 무엇입니까? 플라톤은 “총명이란 우리가 하여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판단케 해주는 마음의 자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므로 총명은 우리 생활에서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전한 의식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보통 영원한 세상, 철학적인 면, 신앙적인 면에 대해서는 깊이 알고 있지만 현실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현실 생활에 대해서는 너무나 밝고 똑똑하게 살면서도 영혼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내세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전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며 영원한 세계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내세에 대한 것을 알 뿐만 아니라 현실을 올바르게 살아갈 줄 아는 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혜도 있어야 하고 총명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진리를 알게 하심과 동시에 역사를 이루는 매순간 일어나는 사건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구속, 죄사함 그리고 지혜와 총명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9~10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하신 경륜을 때가 차매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한 지혜와 총명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비밀이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밀이란 감추어져 있는 것, 뚜껑을 덮었던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헤쳐서 알게 했다는 말입니다.

무슨 비밀입니까? 이것은 복음이 이방 사람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만 아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 구속의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세계 인류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부터 이것을 계획했어요? 예정한 경륜입니다. 이제 때가 차매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륜이 무엇입니까?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의 요절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분열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헬라인과 야만인의 분열이 있습니다.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부자와 빈자의 분열이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투쟁, 분쟁, 전쟁이 있습니다.

개인에게도 분열이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정욕과 이성, 본능과 의지 사이의 분열과 싸움이 있습니다. 내적인 투쟁입니다(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민과 비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은 모두가 다릅니다. 그러나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향악단을 보세요. 악기는 각기 다른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훌륭한 지휘자에 의해서 각기 제소리를 낼 때 위대한 화음을 만들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하는 일이 다릅니다. 전도, 기도, 헌금, 교육, 봉사, 심방, 음악…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사람은 뒤에서 “잘한다, 못한다”라는 말이라도 하는 것으로 한몫 합니다.

은사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정신으로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면 위대한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구속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고, 지혜와 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출처 : 코이네의 외침
글쓴이 : 코이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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