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엡1:11]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 / 박조준 목사

하나님아들 2016. 4. 19. 15:20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

에베소서 1:11~14

설교 : 박조준 목사



본문 에베소서 1장 11~14절까지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화음을 이룰 때 아름다움이 있고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모두가 다르지만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잘 개발해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을 바로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다 함께 일하는 교회.”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만 일하고 다른 사람은 구경만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각 사람이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 그 은사대로 충성을 다해서 봉사할 때 교회가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습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습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고 여러 가지입니다. 발이 손과 다르다고 해서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귀가 눈과 다르다고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체는 여러 가지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더러 “내가 너는 쓸데없다”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보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영광을 같이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한 형제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사다리 위에 올라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밑에 있든 위에 있든 다른 사람을 높여 주면 나도 같이 올라갑니다. 반면에 남을 내리면 나도 같이 따라 내려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에서도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존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망의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이 세상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 우주와 창조,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보는 데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표나 목적 그리고 이유를 갖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철학의 특징입니다.

사도행전 2장 40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설교하는 중에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했는데, “패역한 세대”라는 말에는 ‘방향이 없는 세대,’ ‘맹목적으로 사는 세대’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이 세대의 특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고 그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죄인에게는 내일, 장래가 없습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보며, 모든 피조물에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마음 안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시기까지 감추어져있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변한 것도, 발전한 것도 아닙니다. 창세부터 하나님의 놀라우신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라 했어요? 에베소서의 요절입니다. 1장 10절 말씀이지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음악을 한 곡 작곡해도 거기에는 주제가 있습니다. 가령 베토벤의 바이올린 콘체르트는 하나밖에 없지만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주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제가 연주되다가는 좀 다른 데로 나가는 것 같다가 다시 주제로 돌아오고, 나갔다가는 돌아오고 하면서 주제가 반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에베소서 강해를 들으시면서 에베소서의 주제가 되는 1장 10절 말씀이 이런 면으로, 저런 면으로 거듭 다루어지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보세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목표는 시간과 생명과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우리가 눈으로 보며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장차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한정된 지식과 이성으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알게 되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짧은 인생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 보겠다고 애쓰는 그에게 잔인스럽다고 할 정도로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당신들은(인간은) 나를 해하려고 했으나(갖은 음모, 모략, 중상을 했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하고 의심할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의 결론을 보면 분명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매우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너무 보드랍게 갑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한 나라의 장래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아니 우리 개인의 모든 것도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의 자녀로 예정하셔서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목적이 절대로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우주, 온 세계, 인류의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주나 세상이나 우리 인간 하나 하나는 주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만물이 주에게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주님 밖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밖의 모든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밖에 있을 때 생명도 없고 존재의 목적도 없습니다. 주님을 떠날 때 우리에겐 희망도 없습니다.


첫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12절).

이 말은 헬라 원문에서도 매우 강조된 동사형입니다. ‘to be,’ ‘that we should be,’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질 때 피조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요, 축복의 약속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차피 한 번은 가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데, 그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죽음 후에 오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다른 세상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무덤 뒤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나타날까요? 아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 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이지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사람들은 돼지나 개와 같이 살다가 돼지나 개처럼 죽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대로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소위 ‘Nirvana,’ 열반을 믿습니다. 윤회사상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의 영이 어떤 짐승에게 들어가 세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동안 도를 닦고 극기의 생활을 하게 되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사람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은 무신론자와 마찬가지의 사고입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법칙에 의해서, 말하자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서 우주 안에 영원한 침묵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말은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공회, 말하자면 성도가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신령한 눈으로 하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 이하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광경입니다. 거기 있는 장로 중에 하나가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도 요한이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하니, 그때 그 장로가 하는 말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을 모아 감격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을 생각만 해도 좋은데 그 얼굴 뵙게 될 때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3.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둘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를 믿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여기 헬라어 낱말 중에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프로엘피조’(pro-elpizo)인데 ‘믿고 바란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는 이 신앙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의 목적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성취를 믿습니다. 우리의 영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 자유와 확신과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 그를 믿으며, 그를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그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막대기 자체는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사람의 손에 쥐어질 때 그 막대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들어 쓰실 때 나를 통해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룩하시거나 그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하나님을 믿으며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6장 28~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에녹에 대한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5~6)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모든 축복과 상급 그리고 간증의 기초가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례자인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도성,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보상으로 준비하신 곳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상을 받게 하는 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의문에 대답을 줍니다.


셋째로, 믿는 대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과 축복은 정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입을 넓게 여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 벌린 입에 가득 채워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큰 축복을 받읍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시다. 능력의 장중에 모든 것을 맡기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통해서 놀랍게 역사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출처 : 코이네의 외침
글쓴이 : 코이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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