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진품신앙과 짝퉁신앙 (롬2:17~29)

하나님아들 2012. 9. 5. 21:43

진품신앙과 짝퉁신앙

 

롬 2:17~29

 

 

   ‘호모 아파렌투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우리 한국인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호모 아파렌투스(Homo Apparentus)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말은 ‘겉모습 지향적 인간’이란 뜻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성형수술 많이 하고, 유행에 민감하고, 명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나라가 없다는 데서 붙여진 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일부 부유층들이 고가의 명품으로 사치도 하긴 하지만, 그래서 150억 원짜리 속옷도 팔린다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배 아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사람들도 명품을 선호합니다. “남들 가진 것, 나라고 못 가질소냐!” 최근 외국에서 들여온 대부분의 고가의 명품들이 가짜라고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자기 분수나 내면보다는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가를 더 중시하는 한국인의 사회 심리적 특성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런 병적 증상이 소위 ‘짝퉁’을 만들어 냅니다.

   짝퉁의 일류국가는 단연 중국입니다. 중국에서는 처자식 말고는 다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진짜와 너무 비슷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삼성 애니콜을 모방하여 애미콜이라 하고, 초코파이를 모방하여 코코파이로 만듭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리온 제과의 관계자에 의하면 “짝퉁과 진품의 맛에 차이가 나 한번 짝퉁을 먹어 본 소비자는 오리온 것만 사게 되어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보기는 비슷해 보여도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언젠가는 들통 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진품과 짝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모범적이고 나무랄 데 없는데, 그 이면에는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의 이런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책망하고 정죄하는 오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짝퉁 신앙이 어디서 생겼는지 보여줍니다.

 

 

1. 잘못된 선민의식에서 비롯됩니다.

 

   (17~20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 말씀은 액면 그대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너무나 율법을 의지한 나머지 법조항에 매여 살았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묶었습니다. 현대적으로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있어도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안 된다,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밥 솥에 쌀을 씻어 밥을 하는 것은 일이다, 바느질을 해도 바늘은 옮길 수 없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지독한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신 이방인들은 개나 짐승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들의 소유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자기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말이라면 하나님은 다 들어주신다며 은근히 자랑을 합니다. 겉보기에는 도덕적으로도 아주 건전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철저히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만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 우월감, 지나친 자긍심, 그것은 곧 교만이며 죄악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식보다는 사람의식하며 삽니다. 그런 삶은 남에게도 손해를 줄 뿐 아니라 자신도 망치는 인생을 삽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좋은 학벌 때문에 마땅한 직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나”하고 그만 둡니다. 어지간한 직장은 시시해서 못갑니다.

   텔레비전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나오면 “쟤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항상 내 밑에서 놀았는데...자식들!”하면서 늘 냉소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쓸데없는 긍지 붙잡고 사느라 아무 직장도 못갑니다. 평생 그 부인이 벌어 먹여 살립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알아줍니까?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정신병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다 최고랍니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왕이다.” “나 너를 왕으로 세운 적 없다.” 이런 착각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곧 유대인들이었습니다.

 

   20절 끝에 “스스로 믿으니...” 다시 말하면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자기들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심각하게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있으며,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하나님께 한방 맞을 것만 같아 보이는데도,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고집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나친 우월감, 과도한 자긍심, 쓸데없는 체면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고, 폼을 잡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겸손히 내려놓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껍데기를 벗고 진심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남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1~22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은밀한 곳에서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우상 숭배하는 등,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선생이었지만, 세상에서는 도둑놈, 범죄자였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 가르치느라 바빠서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봉사하는데 바빠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은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면 본질을 빼앗기고 짝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이 될까 조심했습니다. 말씀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남보다도 자신을 먼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위선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에게서 모독을 당합니다.

   (23~24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중적인 삶을 산다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의 전도를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주님을 욕하고 비방하고 모욕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 삼으신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영향력 있는 제자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가 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보다 목회자인 저와 직분 받은 자들에게 무겁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알고 있다고 또 복음은 위대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우리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기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이며, 희생하는 삶이며, 나누는 삶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복음과 우리 주님의 이름이 참으로 거룩하게 존귀하게 여겨질 줄 믿습니다.

 

 

3. 마음이 아닌 형식만 붙드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짝퉁은 겉보기에는 진품과 구별이 나지 않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애서 차이가 납니다. 사용해 보면 이내 드러납니다.

   이런 예를 25절 이하에서 할례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신 것은 언약의 백성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 언약의 백성들이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할례는 무효라고 말씀합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은 오늘 나의 진실한 내면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가문이나 혈통이나 형식으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십니까?”라고 전도하면 대답대신 “나 목사 아들이요.” “나 장로 딸이요.”라고 대답하지만 그것은 바른 고백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구원의 확신 있습니까?” “예, 저는 모태신앙이에요. 어머님이 권사님이시고, 지금까지 교회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걸랑요.” 이런 대답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지하고 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은 나 개인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세례만 받았다고 저절로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봉사 많이 한 것으로, 신앙 경륜으로, 직분으로 천국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목사 장로도 천국 갈 수 없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진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될 자격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배 참석 꼬박꼬박하지요, 십일조도 잘하지요, 금식도 잘 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어!”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29:13)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고,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나의 인생이 그분께 영광이 돌려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정결한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존할 때 무기력하고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린 것처럼 형식적인 교회 생활에 매달려 있는 신자들도 신앙생활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때로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하나의 액세서리요, 또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기 자랑이요, 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의미한 신앙의 형식과 타성에 젖어들기 쉽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껍질을 벗고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면역이나 타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며 새롭게 서야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단독자로 세우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새롭게 결단하고 다짐할 때 우리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시다가 근처에 교인집이 있어서 들렀답니다. 갑작스런 심방이지만 교인은 당황하면서도 반가이 맞았습니다. 목사님은 “왔으니까 말씀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 책 좀 주세요.”

   이때 그 교인은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잘 믿는지 이 때 보여줘야지”하는 생각으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 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 가져오너라.” 목사님 들으라고 크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책 한 권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책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신앙을 어떤 행동이나 형식이나 규범에 제한시키려고 할 때 믿음은 퇴색되는 것입니다. 본질에서 떠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말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고, 봉사하지 않을 수 없고, 전도하지 않을 수 없고, 헌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으로 다니지 말고 신자로 다녀야 합니다. 종교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십일조하고 새벽기도하고 금식했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 받고 구원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고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죄인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나아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말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수십만 명을 주님 앞에 인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할례라는 형식이나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의 법과 뜻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근본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존귀한 보혈만이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씻을 수 있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우리 죄를 씻으신 주님의 보혈을 찬양하며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 당하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육체로 할례 받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할례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 받은 자, 즉 마음 가죽을 벤 자,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고 중생한 자가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얼핏 보기에는 조화와 생화가 차이가 없어 보이고 심지어는 가짜가 더 좋아 보입니다. 보기만 좋습니까? 가격도 좋고요, 관리도 편합니다.

   그러나 조화와 생화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질적인 큰 차이가 있습니다. 생화에는 향기가 있지만 조회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생화에는 벌과 나비가 달라붙지만 조화에는 없습니다. 생화에는 열매가 맺지만 조화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열매가 없습니다.

   어떤 믿음이기를 원합니까? 모양만 있는 신앙이 아니라 삶이 있는 진품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예배 가운데 죄인으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도움을 의뢰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믿음,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 줄줄 달라붙는 사람, 때를 따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진품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바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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