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스크랩]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른 신앙의 요소들의 관계 4

하나님아들 2012. 9. 5. 14:18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른 신앙의 요소들의 관계 4


조우리 목사

 

 

4.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단어이고 주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에만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자들, 곧 성경에 성도라 하는 단어는 (하기오스) 그저 교회다니는 성도가 아니라 성령이 그 사람에게 접촉하신 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접촉의 결과 그 사람이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곧 성도란 거듭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출석하는 자 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렇게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과 교제하려 할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우리는 그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고 그 결과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성령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면 우리가 노력을 하되 성령안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으로 씻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서 우리의 육적인 자아, 죄를 지으려고 하는 타락한 본성 곧 육신을 죽여버리십니다.

그렇게 되어 성령은 우리를 통제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구속이라 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잡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은 구원 사건 다음의 것이며 성령의 임하심과 다스리심의 결과입니다.

구원은 성령의 임하심과 거듭나게 하심의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거룩하여 진다고 말씀하는데 그저 개념이나 소망이나 사상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없이 실천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실천적인 행동가인데 이는 그가 진리로 충만한 사역자 였습니다.

거짓이 숨어있거나 자리잡고 있으면 사람들은 행동가가 될 수 없습니다.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현실화하기에는 비현실적인 사상, 즉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사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자는 말만 하게 되는 것이며 진리를 말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안에서 능력주심안에서 실천을 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자가 하는 것이며 거짓을 말하는 자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것은 진리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말만 많은데 도무지 참과 거짓이 분별이 안되는 말을 하는 것은 아직 진리로 정결하게 씻겨지지 않은 사상체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실행하는 것은 없고 말만 한다.

사단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는 다른 길로도 가려고 할 수 있는데

성령안에 거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는 한 마디로 올바르고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안에 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우리를 성령안으로 이끌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는 완전할 수 없으나 성령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보실 때에는 완전하다 보십니다.

땅위에 흰 눈이 덮히면 희구나 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성령이 덮으실 때에 그래 잘 하는구나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으로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에게 먼저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은 자리에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완료이고 정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읽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A) 성령안에 거하려고 성경을 읽을 때에

(B) 그리고 성령안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올바르게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고 충만한 의미를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는 우리가 잘 알던 것이지만 (A)는 (B)에 비하여 그다지 많이 말하지는 않은 것이다.

즉 성령안에 거하려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비교적 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에도 (A)의 목적을 가지고 읽는다면 우리는 충만한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과 도우심을 구속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즉 내가 성령충만을 받으려고 성경을 읽는다면 성령충만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안에 거하려는 목적이 없이 말씀 기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시도할 때에 상상외로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이 말은 예를 들어서 말씀 기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나를 위한 성경연구, 위안의 방법, 나를 위한 예수님의 관계로 전락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말씀읽고 기도하고 주님을 불러도 성령충만을 받기가 힘듭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온전히 굴복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는 그때가 내가 성령이 오시면 온전히 굴복하리라 결심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 질서정연한 자세로 성령을 추구할 때에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임하시다가 거칠 것이 있으면 임하시지 않습니다. 임하시다가 그 죄인을 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려 하시다가 죄가 있다면 임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 죄를 찾아 회개할 때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마지막 죄가 무엇인지 우리는 통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 여쭈어보면 깨닫게 하시고 그 이전의 죄부터 계속 회개하고 결국 회개의 완료를 하면 예수님의 보혈을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뿌림은 결국 성령의 우리 위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있게 하여 우리로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뿌릴 때에 성령의 뚜렷한 역사는 시작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말씀이 있는 자라면 훨씬 빨리 죄를 깨달을 것입니다.

회개할 의지가 있는 자라면 속히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축복이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이 임하심 자체가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각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통된 것중에 자기가 선호하거나 잘 하는 방법인데 어떤 이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하며 어떤 이는 기도를 합니다.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에게 뿌려 적용하여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공통으로 체험합니다.

 

다시 위의 사항을 다시 언급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말씀 기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나를 위한 것으로 하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며 성령의 내게 오심에 대하여 완전순종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 준비되지 않은 자세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곧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합당한 준비라고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최초의 선포에서 이미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복음의 시작에서부터 이미 성령의 다스리심에 굴복하라 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바라면서도 우리는 성령의 오심과 다스리심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와 동시에 자기가 주인되어서 말씀 기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나타납니다.

나는 말씀읽고 기도하고 주님을 따라가려 한다 하지만 그의 숨은 깊은 동기는 내가 이익얻을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어서는 성령충만이 안됩니다.

내가 죽는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을 뿌려서 십자가가 나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죽습니다. 이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성령이 나를 주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을 뿌릴 때에 시작됩니다.

말씀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자들은 경건하면 나에게 이익이 된다 라는 사상으로 살아가는 기복신앙의 한 파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한 경건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경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그 틈새에 기복신앙이나 이단적 교리들이 숨어있습니다. 진리가 그들의 사상을 온전히 씻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경건에 대한 주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로 착념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실수를 하게 되고 성령의 지배하심이 없으니 분쟁이나 다툼을 일으키게도 됩니다.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파당을 이루게 되는데 새로운 분파가 되거나 일부의 이야기만을 하게 된다. 그들은 말씀을 해석해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성경해석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해석하였으되 육적인 것입니다. 즉 거룩이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고 다른 진리와 충돌하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를 위하여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자기를 다 드려 주님을 위하여 성경읽고 헌신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 것과 마음에서의 출발점도 다르며 결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행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되기 때문에 참된 믿음의 생산자이시고 믿음을 넣어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기도도 성령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충만한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내가 살아서 역사하고 있어서 성령충만에 최대 장애물이 되었구나를 보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국 내가 죄인임을 보게 하는 것이며

우리는 낮은 자리를 찾아 내려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는 것은 주 예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보혈을 찬송하되 영원히 찬송할 것입니다.

 

계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천국에서 이 노래가 불리워지는데 이 노래는 구속받은 자들만이 아는 깊이의 노래입니다. 왜 예수님의 보혈이 찬송의 대상인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최종 표현입니다. 더 이상의 표현이 없는 최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표현을 받아들일 때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더 이상 받을 것없이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보혈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더더군다나 마찬가지로 성령안에 거하려 할 때에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이는 곧 성령안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고 주인되심에 대하여’ 적극적인 의지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함과 성령을 영접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중대한 두 가지 실존입니다.

 

성령을 영접함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금 성령을 기다리라(사도행전 1:8),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장) 성령이 오시면 그가 하실 일을 소개하시는 것(요한복음 14-16)은 사실 성령을 환영하라고 외치시지는 않으실지라도 이미 이러한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충성하면서 환영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선물로서,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으로서 성령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주신다고 하시니 당연히 따르는 자들이 환영할 것을 기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환영하라는 메시지는 이미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신기하지만 성령에 대한 뚜렷한 메시지는 그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씻은 자의 눈에는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성경에 가득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라고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도 이미 확실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정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면 우리옆에 와계신 하나님이신 성령을 봅니다.

우리의 눈이 정결해지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이 보입니다.

욕심으로 보면 성령의 능력만 보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4

그[성령]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 하나만 해도 제자들은 귀가 확 열려야 하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귀가 열려야 하고 성령안에 충만히 거하는 체험을 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영광이란 예수님의 영광인데 지금 육신만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의 영광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미래형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따지지 않아도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는 바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시는 주권자는 예수님이신데 (요한복음 1:33)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보고 싶어하던 그 영광을 이제 제자들은 성령안에 있을 때에 보게 되니

우리의 삶이 성령안에 거할 때에 우리가 말씀만 붙잡는 삶보다 더욱 영광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요한복음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하 나님의 영광은 보는 자에게 먼저 넘칩니다. 보는 것은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셨으므로 우리가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입니까?우리를 택하신 바가 있으니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계시하시고 너희도 그 영광중에 들어오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에 기도할 때에,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라는 이 구절은 원어로 보자면 예수님의 영광을 도구로, 즉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도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보는 매일 매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광스러운 사역자가 됩니다. 능력의 사역자가 됩니다. 이는 같은 말입니다. 영광이 나타나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고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분입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는 자는 아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구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사단의 거짓 영광에 속아넘어가나요? 왜 분별력이 없나요?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경험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겉은 비슷해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과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에게 보여지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만드신다.

우리가 영광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영광을 사모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빛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사야 35장입니다.

 

이사야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무한한 영광이 비춰 나오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없어질 영광(영광도 아닌 것이...)을 보고 쫓아갑니다.

결국 벼랑에서 몰사당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것도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시는데 그 최초의 단계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도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희게 변화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를 감당치 못하므로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 제자는 늘 예수님을 볼 때마다 아 그때의 그 영광이 겹쳐져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억속에서 겹쳐져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영광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것을 잊지 않고 늘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우리 존재의 더할나위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사모함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영광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빛을 잃고 껍데기가 벗겨지고 그 안의 추한 몰골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니 우리는 환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성령님을 사모하고 동행하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끝.

출처 : 임박한 휴거 올바른 요한계시록
글쓴이 : 이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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