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설교자
- 신약에 나오는 몇몇 본문을 통해 설교의 능력을 위해서 성령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살피고 능력있는 설교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이 강의의 목적으로 한다.
1. 성령의 절대적 필요성과 자유로움의 요소
설교의 궁극적 목표가 정보의 제공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케 하는 일이 이상 우리 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절실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다운 반응은 성령의 사역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자연인은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령이 역사하기 까지는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하는 동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 자유로이 내맡겨야 한다. 성령의 역사 하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항상 자유로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 원고 없이도 매일 수 있지만 설 교자는 자신의 원고에 매여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설교하는 동안에도 영감을 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께서 계속적인 영감을 주실 여지가 마 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로이드존스는 "내가 설교한 말 중에 최상의 것 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 - 설교 준비 중에 생각도 못한 것이 실제로 설교 하는 가운데 주어졌다."고 고백한다. 영적 마음을 가진 성도들로부터 무엇 을 전달받을 수 있다. 성도들의 열심과 반응이 설교를 가끔 새롭게 살아나 게 만드는 것은 설교자의 일반적인 경험이다.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는 부흥기간 동안에는 쉽게 설교가 가능해지고, 눌변이 달변으로 바뀌기도 하는 비상한 자유를 설교자들이 누리기도 한다. 설교하는 도중 발전되는 설교는 놀람, 감사,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을 설교자에게 가져다 준다. 설교 하는 도중 성령님께 개방되어 있지 못하면 설교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런 경험을 놓칠 수도 있다. 설교 중에 역사 하시는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요단강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누가복음 3장 21-22절).
1) 누가복음 3장21-22절은 3장 1-20절, 즉 앞 문단의 클라이막스로 이해해 야만 한다. 시기적으로는 예수님과 요한의 사역은 서로 겹치지만(눅 7:19이하, 요 3:22이하) 누가는 이 사건을 요한이 한 모든 사역의 절정 뿐 아니라 그의 세례활동의 절정으로 기술한다(cf Marshall,1978:150). 다시말해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품으로 완성된다. 지금 세계요한에 의해서 준비를 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막 착수하시게 된다.
2) 이 부분을 흔히 예수의 세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는 상당히 적절하지만 누가복음에는 문장 구조상 실제 세례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는 완전히 그 사건은 사라지고 있다) 강조점은 세례에 뒤따른 하늘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에 놓여 있다.
주 문장은 세개의 등위에 부정사와 함께 주동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이 등위 부정사를 다루기 전에 부정사구와 함께 삽입시키므로 다음 행동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 두개의 분사로 구성된 속격 절대 구문을 삽입하고 있다. 마샬에 의하면 (Marshall,1978,54,152) 이러한 구조의 효과 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강조하는 반면 부수적인 지상사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기도하실 동안에 일어난 일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3) 주 문장에 나오는 세개의 등위 부정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여준다. 첫 부정사(열리며) 는 하나님의 계시가 곧 일어날 것을 표시하고 다른 두 부정사(강림하시더니,소리가 나기를)는 이들 초자연적인 현상의 두가지 측면을 설명한다.
4) 하늘이 열리므로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형체로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 이를 예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눅 4:18)으로 이해하셨고 초대교인들도 그 렇게 믿었으며(행4:27) 베드로 역시 그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 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행 10:38) 이 성령의 기름부음은 능력의 기름부음으로 예수님께 메시야로서 사역을 감당케 능력을 구비시킨 사건이다.
5)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늘의 음성과 동반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들과 유별 한 관계임을 강조하심으로 아들 되심을 입증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종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출발점에 서신 그를 향한 아버지의 계속적인 기쁨을 나타내심으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6) 요한의 세례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눅 7:29-30) 이상으로 주님의 경우에도 세례 받으심은 그를 향한 구체적인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세례 받음으로 주님께서 대속적인 구속을 이루실 백성 들과 하나되셨다. 그리하여 순종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특별한 기쁨이 표현되고 있다(cf Hend-riksen,1979:216-217,219).
7)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예수님은 또한 인치심으로 이해하시고 설교하셨다.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주님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보이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귀로 들리는 아버지의 선언으로 아들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인치셨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필요로 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관계와 그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아버지의 인정에 대한 이중확신(adouble assurance)이다. 이 인침에 의해 예수께서는 임무를 맡으셨을 뿐 아니라 구비되셨다.
8)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치심이 기도하는 순간에 일어났다.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 누가는 그런 상황에 "성도가 따라야 할 모범"(Marshall,1978:152)으로 특히 공사역을 수행할 설교자들을 위한 모범으로 암시하고 있다.
9) 누가의 계속된 기록을 보면 요단강으로부터 돌아오실 때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4:1) 을 입었고 "성령의 권능으로"(4:14)갈릴리사역을 감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나타나는 "권세"(4:32)로 인해서 놀랐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는 류의 반복되는 복은서에 기록된 반응은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를 요단강 성령강림 사건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3. 오순절 성령강림과 사도들의 설교의 능력
(행 1장 4-582장4절:33,38-39절을 중심으로) 우선 사도행전의 처음 두장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약속의 회상(1:4-11).
2) 약속의 고대(1:12-26).
3) 약속의 성취 (2:1-4).
4) 약속의 설명 (2:14-36).
5) 약속의 제시 (2:37-39).
이 부분 (행 1:4-2:42) 전체의 주제는 아버지의 약속 성취로서 이는 사도행전이 기록된 주요 목적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이 아버지의 약속 -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문단 (특히 행 1:4-8)에서 예수께서 (행 1:4-5)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눅 24:48,렘 32:36이하,33:6 이하 참조).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도록(1) 자신의 가르침(요14:15-31)과 (2) 요한의 증거를(눅 3:16이하,요 1:2633) 회상시키셨다. 한번 더 예수께서는 (행 1:7-8)그의 제자들에게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7절)보다 약속의 즉각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아서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에서부터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기를 엄숙히 명하신다.
둘째문단 (행 1:12-26)은 제자들이 약속 성취를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준다. 그들은 기도했고 또한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음으로 자신 들을 정결케 했다. 특별한 관심을 '마음을 같이 하여 '(14절)라는 단어에 쏟아야 한다. 현대 번역 성취를처럼 "그룹으로 기도한 것"(GNB)이나 "함께" (NEB,NIV)기도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마음으로"(KJV,NASB)기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여전히 더나은 번역으로, 이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의미 하고, 흔히 모든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행 4:24참조)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주어진 기도"를 의미한다. 이말로써 누가는 그들의 기도의 특성을 묘사 하려고 한다. 성령세계를 경험하기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되는 기도"(Calvin,1859:58,Nicoll.n.d:61)를 의미한다. 동시에 누가는 이 단어를 부 흥기의 성도의 교제의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행 2:465:1225 참조).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는 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눅24:49)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8절에 분명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세례는 중생이나 성화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셋째문단(행 2:1-4)에서 최소한 몇가지 점을 언급해야 한다. 외적 표시와 함께 (2-3절) 내적 실체로서 (4절) 성령은 임하셨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결과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잇따라 일어난 체험을 묘사하는데 항상 사용되고 있다(Marshall,1983:69).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할 때 권능(행1:8)은 나타났다. 성령으로 충만한 영향을 사도행전 4장 31절과 33절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성령세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권능은 구변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해야 한다. 또한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특정 임무를 위해서 새로운 충만이니 계속적인 충만을 받을 수 있다 "(Marshall 1983,69)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문단(행 2:14-36)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세 대지로 나눌 수 있다.
(1) 부정적으로 성령이 임한 현상은 인간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15절).
(2) 긍정적으로 이 현상은 성경적 약속 성취로 설명해야 한다(16-21절).
(3) 보다 정확히 말하면,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설명해야만 한다(22-36).
베드로가 한 설교의 핵심은 33절에서 발견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높아지신 예수의 행위로써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가 (1)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높아지신 후 (2) 아버지로부터 약속한 성령을 받은 다음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으니라" 마지막 문단의 핵심은 베드로의 대답(행 2:37-39)에서 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선포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문제의 핵심을 보는데 실패하고 있다. 때로는 성령의 선 물에 대해 아무런 설명조차 거의 하지 않고 있다.대표적인 경우로 그로사이드(Grosheide,1942:87-90)를 들 수 있다. 38절에 대해 거의 세페이지를 할 애해서 설명하면서도 성령의 선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질적 설명을 하지않고 있다. 상당히 많은 주석가들이 그들의 신학적인 편견에 의해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브루스는 한편으로는 오순절이 '단회적'(Bruce, 1976:76)이라고 생각하면 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한 두시간 전에 사도들 자신에게 부어진 (Bruce,1976:75) 성령의 선물을 베드로가 청중에게 받도록 제안했다고 바로 설명한다.
베드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성령의 선물을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청중들에게 받도록 제안하고 하고 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의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아버지의 약속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처음 120명의 성도들에서만 한정되거나 정경의 완성전에 살았던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오순절날 유효했던 것처럼 계속 유효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맨 마지막 사람에게까지도 역시 유효했다. 모든 성도는 물론 모든 설교자는 아버 지의 약속의 유효성을 인식해야만 참으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다. 틀림없이 오늘날 강단의 상태는 이 점을 분명히 보지 못한데 그 무기력한 원인이 있다.
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서 바울의 설교
(고전 2장 1-5절). 설교에 대한 바울의 엄숙한 결단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 설교의 내용에 대한 결단 1-2절.
(2) 설교의 전달에 대한 결단 3-5절
1절과 3절 초두에 나오는 같은 구절은 이런 구분이 타당한 것을 보여준다(cf De Klerk,1983:192).각 부분은 긍정과 부정을 이중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각 부분은 접속사를 두 번째 대조앞에 둠으로 첫 부분의 이유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설교의 내용에 대한 바울의 결단은
(1)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2)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기로 한
그 이유는
(1) 다른 아무 것도 설교하지 아니하고
(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전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아덴에서 그의 실패에 대한 부담 때문에 "(pace Grosheide,1979:59)그의 임무에 대한 재고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숙한 결단에 대한 보다 나은 이유를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고전 1:18-31) 사실에 입각해서, 바울은 세상 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선포키로 작정하였다. "하나님의 증거"(Van der Walt 1986,1986A:197)란 설교전반에 관한 바울의 정의이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바울이 내린 결단은 그가 어디서나 했던 결단은 그가 어디서나 했던 결단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의 설교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초를 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닦아둔터에 해당한다(고전 3:1016). 경우에 따라서 특정형태와 소재는 바뀔 수 있으나 그의 근본 메시지는 동일하다.
설교의 방법에 대한 바울의 결단:그의 말과 그의 설교가
(1)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2)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 뿌리를
(1)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2) 하나님의 능력에 내리도록 위함(5절 초두)이다.
바울은 1절 2절의 진리에 입각해서 3절의 설교 방법에 관한 엄숙한 결단을 내렸다. 그의 설교 내용에 일치하는 설교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설교 내용에 관한 지식과 그에게 맡겨진 임무에 중대함에 대한 인식이 그로하여금 두려워하며 심히 떨게 했다.그의 염려는 맡은 사역이 너무 큰 반면 자신의 무능함을 의식하는데서 나온 "(Ho-dge,1983:31) 것이다.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노력을 할 때 바울은 자신의 변론이나 설득 기술에 의뢰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있는 나타남"(Hodge, 1983:32)에 의지했다. 바울은 오직 설교에 성령의 강력한 나타남만을 굳게 믿었다. 그것만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 의존심은 자신을 의뢰하지 않는 것을 배우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갖게 된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는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도록 (벧전 4:11)하는 일이기 때문이다"(Van der Walt 1986A:193-4)
5. 성경적인 증거로 부터의 몇가지 고찰
성경적 증거의 연구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일반적이고 간접적인 고찰을 할 수 있다.
(1) "성령에 의한 세례"와 같은 것이 아니다. 흔히 "성령세례"를 고린도전저 12장 13절에 나오는 '성령에 의한 세례'로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로이드존스는 두가지를 서로 구분한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성령세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2장의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관한 주제입니다. 13절에서 그(바울)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성령으로 그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앞에 분쟁과 나뉨이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죽 위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정확히 똑 같이 그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혀 '성령세례'가 아닙니다.(1975D:314).
또한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1975D :314-315) 바울은 고린도전소 12장 13절에서 성령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 달리말해 바울이 다루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세례를 주었습니다'.그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세례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그리스도께로 결속시키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1979A:66)
그러나 성령세례는 세례요한이 예언했던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의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로이드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세례입니다. 그가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 자신이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몸 안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가르칩니다"(1975D:315).
로이드존스는 이 모든 혼란이 '세례를 준다'는 같은 말이 쓰여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1975d:315). 그러나 그 단어는 신약에서 여러가 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에 관여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에 그리스도아 연합시키는 세례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주로 우리에게 증인이 되는 능력을 주시는 우리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가끔 능력 세례라고도 불리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같은 구별을 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혼란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성령충만'과 다르다. 이 성령세례는 중생과 혼돈될 뿐만 아니라 성화와도 혼돈되고 있다. 성령세례와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충만과를 구별하는 로이드존스의 입장은 옳다.
성령세례는 항상 '성령충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이다. 로이드존스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분은 성령충만하게 되지 않고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않고도 성령충만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구별되고 구체적이고 특별한 경험인 반면에 충만은 계속적인 상태에 한 사람이 항상 처해있는 조건을 의미합니다(1975C:42).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점진적인 성화의 전과정속에 주어진 명령이요 권고이다. 그것을 로이드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에 취할 것인지 말지한 사람이 결정하고 통제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통제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1975C:49).
반면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이다.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빈다. 그가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1975C:49). 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커다란 차이는 이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반면에 성령세례에 대한 모든 구절은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며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 일입니다 "(1984A:77).
로이드존스가 하는 이 구별은 타당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세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중생이나 성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능력입니다. 증거하는 능력입니다 "(1982C:308). 이 점에서 판 데르발트가 했던 것처럼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Van derWalt,JJ.983A:15).
(3) "이상한 새 교리"로 여겨서는 안된다 성령세례는 '이상한 새 교리'나 오순절 계통에서 가르치는 '열광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해서 안된다. 신자의 삶에 구별된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나 성령의 인침은 흠정역 성경번역자들과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cf18장) 그 뿐만 아니라 로이드존스는 수많은 청교도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 경험에 대한 증인으로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 왜 신약서신서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에 주어져 있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정황의 빛 속에서 신약서신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사도들은 커다란 부흥의 상태에 있는 교회에 속했고 위대한 하나님이 방문을 받은 시대에 살았다. 그래서 그 구성원 대부분이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는 교회에서 편지를 썼다.
서신에서는 "....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기독교 메시지를) 저희와 함께 증거하시느니라"(히 2:4-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를 받은 소위 제2세대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당시의 교회들이 보편적인 상태엿다. 있는 교회들을 향해 편지를 쓸때는 성령세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사도행전(8:15,19-2)에는 특정한 그룹의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에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이 사도들의 관습이었다.
(4) 설교를 위한 특별한 능력의 수여이다.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할 때 요한일서 2장 20절이나 27절에서 말하는 기름부음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이 말로 설교를 위한 특별한 능력주심을 의미한다. 그는 이와같이 일반적인 정의를 한다.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설교자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이십니다. 그것은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설교자에게 인간의 노력을 능가한 위치로 향상시켜서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에 의해서 설교자가 사용하시는 도구가 됩니다(1982C:305).
로이드존스는 이 기름부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성경적, 역사적 증거들을 제공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세곳의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근거해서 그 논지를 살피고 있다.
6.성경적 증거로부터의 특별한 강조점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연구로부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나 '성령세례'나'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표현되든지 상관없이 설교를 참 설교로 만들고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메시야 예수의 경우나 사도들의 경우에 둘 다 성령의 능력주심은 설교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미리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바울의 경우에는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순간이 있었다(행 9:17). 자부쉬는 동일한 진리를 이와같이 묘사한다."여러분은 그 특별한 느낌을 체험해보았습니까? 그것은 '이상한 내적인 느낌'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의 경우에 그것이 그들의 설교사역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합니다"(Ja-busch,1981:104).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다 철저한 성령의 사역과 활동에 관한(cf 1984A:66) 일반적 연구와 성령의 능력주심에 대한 특별한 연구가 긴급하게 요청된다. 종교개혁 운동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활성과 신약의 행위를 회복하고자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지만 한정된 의미에서 신학적인 회복을 성취했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말하고 성경의 영감과 중생과 성화에 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아데에모가 입증한대로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Adeyemo,1982,10-11). 이면에 관한 아데예모의 종교개혁의 평가는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첫째, 성령의 오심이 비일상적이고 독특한 사건이라는 인식고, 이것이 창조하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불충분했다. 개혁자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가리키신다는 것과 또한 성령의 오심이 일련의 하나님의 능하신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 사건이라는데 대한 진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듯 하다.
둘째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구조적 경직으로부터 충분히 자유할 수 없었다. 로마교의 압제로부터 많은 일을 개혁자들이 했지만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고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그의 뜻을 수행하는 교회의 은사들을 회복시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셋째, 개혁자들은 성령의 은사적 선물(Charismata)에 대해 적절한 파악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칼빈의 태도이다.그는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적적인 능력과 놀라운 사역은 멈추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지속된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복음의 새로운 전파와 하나님의 새 왕국은 전에 듣지 못한 비일상적인 기적으로 밝히나타나고 확장되는 것은 필요했다. " 이런 태도가 바로 성령의 원시적 역동에 대한 맹점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Adeyemo,1982:10).
그러므로 구원과 성화에 관한 성령 역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삶에 능력을 주시는 일과 설교자에게 특별히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사역도 강조해야 한다. 설교의 내용과 관련해서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하는 것은 설교자가 성경을 매일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연구할 때 성취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만으로(sola SCreiptura)나 성경 전부로(tota Scriptura)라는 개혁자들의 구호는 다만 입으로만 하는 찬사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로마교 수도사의 경고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고도의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잘 받았고 많은 여행도 했고 풍부한 경험도 가지고 있으며 독서도 충분히 했습니다. 우리는 인류학자들과 성과학자, 정치가,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할지를 모릅니다(Kelly,1979:260).
우리의 마음은 다양한 이 세상의 '지혜'로 오염이 되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암 8:1) 기갈 상태에 많은 신자들이 처해 있다. 설교자들에게 가장 긴급한 임무는 성령을 통해서 성경 안에 있는 예수를 아는 일이다.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설교의 방법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지혜-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는 하나님의 능력-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만이 전달될 수 있다. 칼빈은 이 진리를 단순하게 표현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Calvin 1975A:499). 그러므로 보렌의 말은 주의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학은 성령의 고찰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Bohren,1974:72-73)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설교방법에 대한 긴박한 재검토를 해야 한다. 설교학에 관해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은 교회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방법이 우리의 강단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지배하는지 그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책들을 보면 경쟁이나 하듯이 세속적인 방법을 채용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방법을 따르도록 설득하고 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오늘날에도 바울이 했던 것과 동일한 결단을 해야 하는가? 이 결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무력하고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결단을 하기보다는 많은 설교학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반대적은 방법을 택하도록 잘못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7. 능력있는 설교를 위한 기도의 지원의 필요성(6장:18-20 분해).
(1)본문을 두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다.
1) 기도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 교훈(18a 018c) 기도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 부탁 18d
2) 설교를 위한 바울의 기도 부탁
(2) 에베소 성도를 향한 설교자로서 자신을 위한 기도 부탁을 보면 그의 설교관이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타난다.
1) Sermon 2) Preaching
(3) 바울의 생각 속에는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과정과 그 메시지를 청중하게 전달하는 과정이 구별된다. 바울은 이 양 과정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타남을 위해서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so that" God Will give me a message (GNB)
"and that" in prochaiming it I amy Speak boldly(NASB)
(4) "나로 입을 벌려" 말하는 순간에 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로서 이해한다. "What I begin to speak"(Zer-wick 1981) (가무가 1983).
바울은 결코 자신이 메시지를 통제한다고 감히 생각 못했다. 오히려 말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 실제로 설교하는 순간 그가 말한 최선의 것이 주어진다"는 로이드존스의 말은 바울로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5) 둘째 기도제목 중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란 단어는 자유롭게 확신 가운데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앞절에 같은 요소가 나왔다. "완전한 확신으로 말미암은 자유로움"은 매우 중요한 바울 역시 설교 전달 과정에서 이 자유로움을 주요 요인으로 강조한다.
(6) 기고의 일반저기 교훈과 비교해 보면 바울은 앞 부분의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에서 기도로 기도되게 하는 신적 요인(The divine agent) 인 성령을 언급한다. 뒷 부분 설교자를 위한 기도의 부탁에서는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신적 요인을 언급하는 대신 그런 설교의 특징-담대히-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만이 담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다. 바울 역시이 요인을 거듭강조하며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1) 성령 안에서 설교의 자유로움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선물로서 이해하고 있다.
(2) 기도의 응답으로 또한 설교원고 작성 때도 메시지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자신의 이를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성도들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평신도의 기도 지원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겸손히 섬기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8.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한 삶
(1) 순종의 삶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를 위한 지름길은 없다.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느냐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삶전반에 대한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설교의 기름부음을 위해서 설교자의 일상 생활에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훈련의 궁극적 목표는 순종이다. 일상생활의 경건 훈련이 먼저 되고 나서 설교에 임하는 특별한 기름부음의 간구가 바른 순서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힘든 연구와 준비의 대책물이 아니다 이것은 양자 택일이 아니고 상호 보완이다. 이 축복을 위한 기도는 지속적인 간구이며 간절하고 긴급한 간구이다(눅 11:5-13).
(2) 기도의 삶
설교의 기름부음은 기도를 통해 얻는 축복이다. 패커(Packer)는 성령 세례를 개별적 경험으로 보는데도 유보적 태도를 취하지만 이 문제에서만은 동 의한다. "이는 기도로서 구해지는 선물"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만 구해서는 안되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자해야 한다.
[ 결론 ]
참 설교를 위해서 성령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주의 설교자는 아무도 이것을 이론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에 잇어서 없어도 될 것처럼 설교하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론이든 실제에 있어서든 이를 부인할 때 참설교와는 멀어지게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설교에 잇어서 자유로운 요소가 강조되지 않으면 설교학의 다른 제 원리가 무효화 된다. 해석학적,강해적 원리는 능력있는 전달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노력과 설교학적 방법에는 신경을 쓰지만 거룩하고 간절한 기도에 얼마나 종사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중 앞에서 하는 연설은 숙련 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설교는 거룩한 삶으로부터 나온다.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 본문과 씨름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해야 한다. 능력 있는 설교는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사는 자에게서 기대될 수 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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