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사도행전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아들 2015. 12. 29. 16:31

 

 

사도행전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행 1:1-8 연구


김 정훈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신 일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를 시작으로 하여, 그가 승귀하신 후에 천상에서 자신의 사도들을 통해 행하신 일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 중점을 준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의 천상사역에 집중한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지상사역의 후속사역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리고자 한다(눅 1:1-4; 행 1:1-2).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십일 째 되던 날의 오순절 사건과 그 이후 사도들에 의해 전개된 선교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가, 오순절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진술하기 전에, 부활한 예수가 사십일 동안 지상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사실과(행 1:3) 바로 이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그의 제자들과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행 1:4-8). 혹자는 “하나님 나라”는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예수의 설교의 한 주제로 복음서에서 종지부를 찍은 이야기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하나님 나라”를 테마로 한 책들도 복음서만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동일한 저자가 복음서에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의미심장하게 “하나님 나라”를 거론하고 있다면 그것이 복음서에서 끝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누가는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언급함으로 그의 보도를 마무리한다(행 28:31). 이는 누가의 의도적인 기록행위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필자는 본고에서 사도행전도 복음서에서처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독법(讀法)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행 1:1-8을 비롯하여 8:12, 14:22, 19:8, 20:25, 28:23, 31 등 많은 구절들이 이 필요를 요청한다.1) 이 구절들 중에 필자는 특별히 1:1-8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본문은 사도행전 전체를 여는 서론부로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주제가 그 중심을 통과하고 있다. 이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필자는 행 1:1-8을 편의상 네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한 주해를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3절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 일관된 주제,” 4-5절과 관련하여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그 준비,” 6절과 관련하여 “오해된 ‘하나님 나라’,” 그리고 7-8절과 관련하여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그 실현”이라는 테마를 제시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 일관된 주제(행 1:3)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십일 간의 행적을 소개할 때 그 서두에서 “[그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λεγων τα περι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일에 역점을 두었는데2) 부활하신 후에도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가 그의 사역 전체의 목표였고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던(J.D.G. Dunn)은, “하나님 나라”가 사도행전에서도 그 중심테마로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사역이, 그 주안점에 있어서, 그의 지상에서의 사역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4)

던은 특별히 행 28:31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 본문은]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의 테마가 사도행전에서도 전장을 통해 근본 이슈가 되어 온 사실과 사도행전 이후에도 기독교의 핵심 이슈로서 지속된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 텍스트는 누가가 예수의 지상생애의 설교와 사도들의 선교 사이에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일관성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5)


“왕국”(βασιλεια)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언어에서는 영토를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는 하나님께서 지상의 왕들이 통치하듯이 통치하는 땅의 영역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주의 행위와 가르침에 의해 시작되고 주로 그의 이적에 의해 나타나게 된<cf. 막 1:15; 3:20-30; 4:26-29; 눅 10:23; 11:17-23; 마 11:44>) 에 대한 은혜로운 통치를 의미한다.6) 따라서 행 1:3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와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7)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 의미보다는 행 1:1-8의 문맥 속에서 3절의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누가는 이 개념을 교회론적8) 전망을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행 1:1-8을 분석해 보면 4-8절은, 3절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보도한 것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건을 부각시킨 내용으로 보인다. 즉, 4-8절도 그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4-5절은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에 전개될 것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교회론적 전개를 위해 약속된 성령의 오심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6절의 제자들의 반응도 4-5절이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6절 역시 교회론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6절에서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는다. 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개념은 분명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야 왕국에 관한 예언과 관련된다. 즉, 제자들은 4-5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의 때는 하나님의 판단에 달린 문제라고 대답하면서(7절) 그 궁극적 성취를 위해서는 교회론적 역사 과정이 필요하다는 암시를 준다(8절).

행 1:1-8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포아키스 잭슨(F.J. Foakes-Jackson)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그는 “부활하신 주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눈 담화의 주제는 왕국(Realm) 혹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이다”라고 주장한다.9) 포아키스 잭슨은 사도행전 처음 부분에서 누가가 교회론적 시각으로 하나님 나라를 중심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예수께서 교회 창설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대해 누가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연 누가복음의 속편으로서의 사도행전 전체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인지되시는 사회(society) 혹은 영역(Realm)을 확립하는 일과 관련하여, 그 첫 걸음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지구의 가장 먼곳까지 펼쳐질 제국(empire)의 핵심요원들이다.10)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부활하신 주의 40일 간의 지상 체재에 대한 보도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40이라고 하는 숫자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주제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분명 사실을 보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40이라고 하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11) 누가는 이 숫자와 함께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산에 있었던 것을 마음에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출 24:18). 모세가 40일을 시내산 꼭대기에 머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의 왕국(God's Realm)의 법이었다.12) 이 법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관찰을 통해 우리는 누가가 사도행전 전체를 위한 논거로서 행 1:3에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2.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그 준비(행 1:4-5)


행 1:4-5에서 누가는, 3절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는 보도와 관련하여, 예수께서 그 나라의 구체적 성취를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도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모였을 때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시면서 임박한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하신 사실을 의미있게 보도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아이디어(idea)가 내포된 제자들의 질문을 유발하게 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6절)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은 4-5절의 예수의 말씀이 역시 “하나님 나라”의 아이디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우리는 “같이 모이사”라고(4절) 하는 말에 “하나님 나라”의 아이디어가 내포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헬라어 συναλιζομενος라고 하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함께 소금을 먹다”라는 뜻이다.13) 그러나 고전 헬라어에서는 이 말이 보통 “회집하다”(to assemble)라는 의미로 쓰인다.14) KJV가 바로 이런 뜻을 계승하고 있으며(“being assembled”)15) 한글 개역성경도 동일한 뜻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라틴어 역본들은 “eating together”를 선호한다. 이와 비슷하게 NIV는 “eating with”로 번역한다. 필자는 συναλιζομενος가 눅 24:42의 식사를 언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함께 잡수실 [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복음서들이 부활하신 주께서 종종 식사 자리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심지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사실(막 16:14; 눅 24:30, 41-42; 요 21:9-12; 행 10:41)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브루스(F.F. Bruce)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잡수신 것은 아마 그가 성찬을 같이 하신 것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한다.16) 그는 “성찬은 새 시대가 동텄다고 하는 표식이며 엠마오에서 빵을 쪼개실 때 자기를 나타내셨던 것과 비교된다(눅 24:30-31, 35)”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συναλιζομενος는 제자들과 함께 성례전적 식사를 나누신 사건에 대한 보도로서 이 식사는 그들에게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징표(token)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점이다.17) 브루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만일 그의 해석이 옳다면 예수가 자기의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사는 하나님 나라의 여명을 알리는 식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부활의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18)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자. 포아키스 잭슨은 “사도행전에서 누가의 목적은 교회가 예루살렘에 세워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19)고 주장한다. 이 말이 옳다면, 예수의 당부는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고 거기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을 매우 강조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예수가 영아시절 부모의 품에 안겨 결례를 행하기 위해 갔던 곳이며(눅 2:22), 소년시절에 부모와 함께 방문했던 곳이며(눅 2:41),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을 받았던 곳이며(눅 4:9),20) 갈릴리 복음전파 사역(눅 4:14-9:50) 이후 마지막 지상사역을 마무리하기 위해 갔던 곳이다(눅 19:28-24:53).21) 바로 예루살렘에서 그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뒤에 부활의 영광을 경험했던 것이다. 부활 후 그의 현현은 모두 예루살렘 주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사실들 특히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인 사실을 입증한다.22) 그는 왕도(王都) 예루살렘에서 그가 메시야 왕국의 주권자인 사실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셨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루살렘은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이 그 절정에 이른 곳이라 할 수 있다. 부활의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시작한다는 것은 메시야 왕국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도모한다는 뜻을 함의한다.

이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예루살렘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 말씀과 맞물려 있다. 애링톤(F. Arrington)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 중 핵심적인 것은 성령의 약속이다”라고 주장한다.23)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눅 24:49에 근거해 보면 “위로부터 입히워질 능력”이다.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 능력을 입힘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거하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24)에 대해 제자들은 분명, 우선 예수가 지상생애 중에 그들에게 하셨던 성령의 약속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요 14-16에 있는 다섯 개의 잘 알려진 페시지의 내용들을 떠올렸을 것이다.25) 또 예수 자신도 자기가 했던 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로프트하우스(W.F. Lofthouse)는 “요 14-16에 나오는 5개의 페시지(passage)가 강조하는 것은 정확히 행 1-15장에 나오는 성령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이다”26)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잡히시던 날 밤 마지막 만찬을 축하한 후에 다락방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선물에 대해 말씀하셨다. 구약 예언에 의하면 성취의 날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광범위한 부으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 이전의 다락방 담화에서는 물론 행 1:4에서도 사 44:3, 겔 36:24-28, 39:29, 그리고 보다 넓은 문맥에서 욜 2:28-29과 같은 말씀들을 마음에 떠올렸을 것이다.27) 이 구약 본문들은 한결같이 메시야 왕국의 중심적 특징 곧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암시한다.

더욱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의해 이미 예고된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자들에게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크신 이는…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눅 3:16//막 1:8; 마 3:11; 요 1:33)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 요한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요한의 성령세례의 예언이 성취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의 물세례는 그의 청중들로 다가오는 심판을 준비케 하며 그들에게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성령세례를 바라보게 할 뿐이었다.28)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이다. 다른 말로 하여 성령이 그 중심적 특징을 이루는 메시야 왕국이 나타날 시기가 임박했다는 말씀이다(cf. 막 9:1; 마 16:28; 눅 9:27).29 부활하신 예수의 성령세례의 임박한 도래의 선언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통치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말씀이었다. 즉,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구원 사건 안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었다. 이미 새로운 시대의 여명은 밝아왔고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의 무한한 부으심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 강력한 실재가 될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누가가 행 1:8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론적 양상으로 전개될 것임을 분명히 할 때, 행 1:4-5의 말씀 역시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관한 말씀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 행 1:6에서 제자들이 4-5절의 예수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점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해 준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당사자들로서 그 나라의 권능의 원천인 성령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한 번 필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은 새로운 시대, 곧 성령의 권능에 의해 실현될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라고 못박고 싶다.


3. 오해된 “하나님 나라”(행 1:6)


교제의 식사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 그가 당장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것인지 물었다(행 1:6). 제자들의 이 질문은 행 1:4-5의 예수의 당부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다. 던이 옳게 지적하는 대로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29)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와(3절) 이에 관한 실제적인 내용으로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고 하신 말씀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고 하신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관한 말씀이라고 믿었다.30) 그리고 그들은 이 하나님의 통치가 당장 임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싶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반응과 관련하여 그들이 생각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개념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던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는 쉽게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적 통치는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졌고 또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보통 이스라엘 내에서 옛 영광에로의 이스라엘의 회복(즉, 영광 면에 있어 다윗에 의해 처음으로 통치되었던 왕국을 능가하는 다윗의 자손에 의해 통치되는 왕국)으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Sir. 48:10 - “to restore the tribes of Jacob”).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눅 12:32, 19:11-27, 그리고 22:29-30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제자들의 질문에는 이런 암시가 있다.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신 예수에 대한 경험과 그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은 그들로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려 한다는 것을 믿게 해주며 또한 그러한 그들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기대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소망(이스라엘의 회복)과 완전히 연속성 가운데 있으나 여전히 일찍이 제시되었던 소망 용어들(위 누가복음의 본문들 가운데 보이는 - 필자 주)에 의해 한정되고 있는 소망을 가리킨다.31)

던의 지적은 제자들의 왕국 개념은 선지자들의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과 연결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왕국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독립의 회복에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자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시대의 표징인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그들이 이것이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었던 것은 정치적 이스라엘 왕국이 이제 회복되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다른 많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믿었던 것 같다.32) 유대인들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어 선택된 민족인 자신들을 다른 민족들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왕국 개념과 관련하여 묵시론적 기대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유대 묵시사상에 있어서 성령의 부음은, 왕국의 완성이 목전에 와 있으며 또한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이스라엘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표징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가 완성된 모습으로 직접 도래할 것을 기대하였으며 이 시대가 도래하면 로마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민족적 승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일찍부터 새 시대의 회복된 질서 속에서 자신들이 권위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33)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게 되리라는 예수의 약속(눅 22:30)이 성취되기를 고대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의 핵심은 ‘이러한 자신들의 기대가 성취되는 때가 지금인가’ 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성령과 하나님 나라 간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고 믿었던 것은 옳은 일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성령에 의해, 성육하시고 승귀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도입되고 또한 시행되는 것이다.”34)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단순히 세상적 질서 개념으로 본 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이스라엘이 정치적 최고 위치를 누리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그 실현(행 1:7-8)


이 부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 나라” 교훈의 결정적 부분이다.35) 이 부분에서 예수는 행 1:6에 보이는 제자들의 그릇된 하나님 나라관을 교정해 주신다. 행 1:7에서는 우선 표면적으로 드러난 “때”의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그릇된 관심을 교정해 주고 행 1:8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 오해를 영적이고36)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교정해 준다.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왕국관에 대해 직접적인 부정을 하지 않으신다.37) 그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소망 그 자체에 대해 거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되어 뛰어난 독립 주권국이 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7절)라고 대답하신다. 이 부정적인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의 시기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지적하며38)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언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인지 추측하는 일을 허락지 않는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을 일축해 버리신다. 물론 이것은 문제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재확인해 주는 측면이 있다.39) 제자들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기대 자체는 문제시 될 것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직접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릇된 이스라엘의 회복관을 갖고 그것의 성취시기에 대해 집착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의 대답은, 때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 맡겨진 일이라는 것이다. 새 시대의 마지막 완성에 관한 문제는 오직 아버지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40)

이러한 대답은 또한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불가피하게 마지막 심판에 대한 암시를 동반한다(cf. 눅 22:29-30). 따라서 그것은 인간역사의 종말 혹은 격변에 대한 사변적 접근을 경고하는 효과도 나타내고 있다.41) 또한 예수의 대답에는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일어날 어느 한 시점의 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암시도 포함되어 있다. 즉,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당장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경과를 거친 후에 그것의 궁극적 실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브루스는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은 왕국이 최종적 완성에 이르기 전에 경과하게 될 시간과 왕국을 확립해 가는 중에 발생할 모든 중요한 사건들을 다 포괄한다”고 주장한다.42)

예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신 후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이스라엘의 회복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명하신다. 8절의 내용이 바로 이 언명에 속한다.

우리는 이 언명의 의미를 탐구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행 1:3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8절에 이르게 되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활의 주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메시야 왕국의 궁극적 성취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부활하신 예수는 바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였다. 그들은 당연히 메시야 왕국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이 성취된 메시야 왕국에서 높은 권세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그들의 기대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를 시기적절한 것으로 들리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성례적 식사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열망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말은 자연스럽게 그들로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게 했고 성령세례는 선지자들을 근거로 “회복” 개념을 생각하게 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메시야 왕국은 그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릇된 이스라엘 회복관을 가지고 있었으며(직접적으로 지적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읊 ˜ 에 대한 그들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때”의 문제에 대한 사변(思辨)을 금한 후에(7절)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의 본질에 대해 교회론적인 답변을 시도하시는 것이다(8절). 이 답변은 하나님 나라의 교회론적 현시에 대한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행 1:8 말씀에 집중해 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정치적 차원이 아닌 영적 차원에서, 다시 말하여, 교회론적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야 할 것을 언명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은 “이스라엘” 개념을 “교회” 개념으로 소화해 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관한 강력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행 1:8과 관련하여 포아키스 잭슨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자연스럽지만 다소 단순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주님은, 왕국이 땅의 지배(domination)에 관한 것도, 하나님의 재앙적 간섭에 의해 즉각적으로 초래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실 뿐 아니라 그것은, 사도들이 듣고 본 것의 증인들로서 활등하는, 보다 평화적인 과정에 의해 나타나야 할 것을 설명하신다. 주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잠재우고 그의 나라(Realm)가 세계를 - 즉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가 아닌 - 포함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그의 나라의 성장은 확실할 것이나 그것은 점진적일 것이다.43)

포아키스 잭슨의 설명은, 간단히 말하면, 8절 말씀이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8절에서의 예수의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시각, 즉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교회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44)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승리로운 복음의 행진과 함께 세계 도처에 교회가 세워진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 행 1:8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된 사실을 보여 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교회론적 양상으로 역사 속에 전개되고 있다는 내면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45) 세계적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 전체의 윤곽을 제시하는 행 1:8에 이미 예고되어 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5장),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고(6-12장),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13-28장).46) 이 마지막 말은 사도행전 내에서 보면 바울이 로마에까지 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세계적 선교를 염두에 둔 말씀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땅 끝까지”라고 하는 말은 사 49:6과 메아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cf. 눅 2:32; 행 13:47; 26:23). 바울이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설교한 것은 말씀을 땅 끝까지 전할 가능성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간적 단계이지 목표 그 자체는 아니었다. 여호와의 종의 “열방의 빛”으로서의 보다 넓은 소명(사 42:6-7;47) 49:6)은 로마를 넘어선 세계를 내다보는 것이었다.

여기에 다시 우리는 누가가 사도행전 끝 부분에서(28:31) 의도적으로 바울이 로마의 심장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개방되고 방해받지 않은 설교를 언급한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의 누가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은 행 1:3에서의 “하나님 나라” 언급과 에코(echo)가 있음이 분명하다. 즉, 누가는 자신이 사도행전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전망 가운데 기록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의 “하나님 나라” 언급은 행 1:8을 비롯한 사도행전 전체의 내러티브가 행 1:6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 대답을 통해 행 1:6에 제기된 문제가 닫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복음은 계속 행진하며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계속된다. 이스라엘의 소망과 선교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cf. 28:20).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참 이스라엘은 그것의 마지막 완성에 이를 때까지 교회론적 옷을 입고 역사 속에서 행진을 계속할 것이다.

행 1:8절은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있어 성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강조한다. 이 본문에 나타나는 “성령의 임하심” 개념은 4-5절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그리고 “성령의 세례”와 직결된 개념이다.48) 제자들은 이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될 때 성령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던은 성령을 “피조물과 인간의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49)이라고 정의한다. 성령은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한다. 성령의 충격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행 1:8의 경우, 주의 뜻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권능을 체험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50) 증인51) 사역은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권능에52) 의해서만 가능하다. 성령 강림 사건 이후의 보도에서 성령이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선교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시고 인간의 무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힘을 공급받을 때만 효과적으로53) 될 수 있다고 하는 누가의 확신 때문이다. .


나가는 말

어떤 사람들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통해 당시 교회의 임박한 재림의 기대에 대해 그것이 불확실한 미래의 일로 연기된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고 본다.54) 하지만 우리의 연구는 제자들이 가졌던 이스라엘의 임박한 회복의 기대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임박한 회복의 기대가 본래부터 그렇게 계획된 일에 근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오히려 누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임박에서 지연으로 변경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상생애 때부터 예고하셨던 대로,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초두 부분이 암시하는 것과 같은 스케쥴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 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는 누가의 보도는(행 1:3) 사도행전 처음 부분이 “하나님 나라”를 그 관점으로 삼고 있다는 암시를 준다. 더구나 행 1:1-8이 사도행전 전체의 서론임을 생각할 때, 이 책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테마에 정향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사도행전 말미의 “[바울이 로마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행 28:31)고 하는 누가의 해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행 1:4-5에 있는 예수의 당부 또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왕도일 뿐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예수는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왕이신 것을 입증해 보이셨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과 “성령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불가분적 관계에 있는 요소들이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으로서 예수는 지상생애 시에 제자들에게 새 시대가 개막되면 성령의 지배적인 활동이 그 특징을 이룰 것을 암시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 역시 성령의 무한량한 부음이 메시야 왕국의 주요 특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행 1:6은 예수의 당부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으로서 오해된 하나님 나라 개념을 구성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로 확대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으로 이해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리고 성령을 회복된 이스라엘과 연결시켜 생각한 것도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복 시기를 계산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정치적 메시야 왕국관을 가지고 그러한 시도를 한 것은 근본적으로 빗나간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의 응답도 그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직접적인 부정은 하지 않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오류를 교정해 준다(행 1:7-8).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 곧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문제이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정치적 왕국관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는 성령이 오실 것, 그들이 능력을 받을 것, 그리고 부활한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정치적으로 임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말해서 교회론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그 궁극의 완성에 이를 때까지 역사적 교회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드러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행 1:8의 근본된 뜻이라면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혹은 가시적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연장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누가가 행 1:1-8은 물론 사도행전 전장을 통해 강조하는 바로 이것이라고 믿는다.


천안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글라스고 대학 Ph.D.



1) 참고로, 복음서에서처럼 높은 빈도는 아니지만 서신서들에도 “하나님 나라” 내지는 이에 준하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하나님 나라”(롬 14:17; 고전 4:20; 6:9-10; 15:50; 갈 5:21; 골 4:11; 살후 1:5; cf. 약 2:5); “천국”(딤후 4:18); “왕”(고전 15:25; 딤전 1:17; 6:15; 딤후 2:12; cf. 히 7:1-2); “하늘”(빌 3:20; cf. 히 8:1); “나라”(고전 15:24; 엡 5:5; 골 1:13; 딤후 4:1; cf. 히 1:8; 12:28).

2) 누가는 사도행전의 전편인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 이후의 그의 전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관성 있게 가르치신 사실을 의미 있게 보도해 준다(e.g. 눅 4:43, 6:20, 7:28, 8:1, 10, 9:2, 11, etc.).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수많은 “하나님 나라”-용어들이 빈도 높게 나타난다: βασιλεια 46회;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των ουρανων 32회;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모든 구절들 32회; 그리스도/인자의 나라 4회(1:33; 22:29, 30; 23:42); βασιλευειν 3회; βασιλευς 11회(이 중 직접 예수께 적용된 것은 5회). I.H.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tr. 이 한수, 누가행전, 복음서 연구시리즈 3(서울: 엠마오, 1997), pp. 121-22를 볼 것.

3) Cf. F. Arrington, The Acts of the Apostles: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Peabody: Hendrickson, 1988), p. 4.

4) J.D.G. Dunn, The Acts of the Apostles(London: Epworth, 1996), p. 7은 이 근거로서 행 8:12, 14:22, 19:8, 20:25, 28:23, 31을 제시한다. Arrington, Acts, p. 4는 이 본문들 외에 본 논문이 다루고 있는 행 1:1-8에 포함된 한 절을 더 추가한다. 즉 그는 행 1:6도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본다.

5) Dunn, Acts, p. 7.

6) Arrington, Acts, p. 4. 신약의 “하나님 나라”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G. Vos, The Teaching of Jesus Concerning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Grace and Glory, tr. 원 광연,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p. 14-20; H.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tr. 오 광만, 하나님 나라(서울: 엠마오, 1987), pp. 11-53; G.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Grand Rapids: Eerdmans, 1986), pp. 3-68을 볼 것. 혹자는 구약에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구약과 무관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용어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구약에 “하나님 나라” 사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이브(naive)한 생각이다. 필자는 신약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그 뿌리가 구약에 있다고 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유대 묵시문학에 이르러서야 이 개념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로 인해 신약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유대 묵시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다. 도리어 유대 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구약의 메시야 왕국 사상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유대주의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해와 신약의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해가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차이는 본 논문이 집중하고 있는 행 1:1-8에도 암시되고 있다.

7) F.F. Bruce, The Book of the Acts: Revised, NICNT(Grand Rapids: Eerdmans, 1988), pp. 32-33.

8) 필자는 이 개념을 교회의 제도적 측면보다는 선교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즉 선교를 통해 성립된 영적 실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염두에 둔 개념으로 사용한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복음전파 활동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교회”인 사실을 분명히 한다.

9) F.J. Foakes-Jackson,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Moffatt New Testament Commentary(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8), p. 2.

10) Foakes-Jackson, Acts, p. 2.

11) Foakes-Jackson, Acts, p. 2.

12) Foakes-Jackson, Acts, p. 2.

13) Arrington, Acts, p. 5. Συναλιζομενος 대신 συναυλιζομενος(기숙하다, 함께 밤을 지내다)로 읽기도 하나 이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대문자체 사본들(uncial manuscripts)이 συναλιζομενος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셨다고 하는 기사는 누가복음은 물론 다른 어떤 복음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14) Foakes-Jackson, Acts, p. 2.

15) 여백에는 “eating together with them”이라고 표기함.

16) Bruce, Acts, NICNT, p. 34.

17) Bruce, Acts, NICNT, p. 34.

18) Foakes-Jackson, Acts, pp. 2-3: “예수의 나타나심에 대해 다른 설명들이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11제자가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주를 본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었다(16:7). 요한 복음에서는(21장, 보충장) 예수가 디베랴 바가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마가의 부차적 설명에서는(16:14-18), 예수가 식사자리에서 11명에게 나타나셨다고 한다(장소는 명시되지 않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부활 후 현현의 장면은 예루살렘이다”; cf. Dunn, Acts, p. 3. 필자는 행 1:4의 성례회합이 반드시 부활 직후의 일이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40일” 중 어느 한 날 - 다른 지역에 나타나신 이후 - 에 있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19) Foakes-Jackson, Acts, p. 2.

20) 복음서의 시험 기사 중에서 “예루살렘”이란 말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21) 눅 9:51-19:27은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기록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정 중에 이루어진 일의 기록이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예수의 여행 보고”(Reisebericht Jesu)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많은 누가만의 특수 자료가 들어 있다. 눅 9:51은 예루살렘 여행이 엄숙한 결단과 함께 시작된 것을 보여주며 수많은 본문들은 예수의 운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3:22, 33-34; 17:11; 18:31; 19:11).

22) Foakes-Jackson, Acts, p. 4은 “예수가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시어 자신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을 때 그들은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3) Arrington, Acts, p. 6.

24) Cf. NIV: “the gift my Father promised”; REB: “the gift promised by the Father”; “the promise of the Father.”

25) i.e. 요 14:15-17, 26; 15:26-27; 16:7-10, 12-15; F.W. Howard, Christianity According to St. John(London, 1943), pp. 71-80; idem., The Fourth Gospel in Recent Criticism and Interpretation(London, 1955), pp. 226-27.

26) W.F. Lofthouse, “The Holy Spirit in the Acts and the Fourth Gospel,” ExpT 52(1940-41), p. 336.

27) Cf. Robert H. Gundry, A Survey of the New Testament, tr. 김 일우, 신약개론(서울: 엠마오, 1997), p. 393. Dunn, Acts, p. 8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 예수에 의해 시작된 사역의 새 국면을 옛부터 진행해 온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결속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누가가 의심할 여지 없이 겔 36:27; 욜 2:28-29(행 2:16-21에 인용됨)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본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누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선교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일찍이 이루고자 하셨던 목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의 목적은 동일한 성력의 능력으로, 한 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예수의 사역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8) Arrington, Acts, p. 6.

29) 이 본문들은 재림 때의 광경을 묘사하는 막 14:62; 마 26:64; 눅 21:27과 구별된 것들로 성령 강림을 예언하시는 말씀으로 보인다. 이 견해가 옳다면, 예수는 성령 강림을 1단계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0) Cf. Dunn, Acts, p. 9.

31) Arrington, Acts, p. 8.

32) Dunn, Acts, p. 10.

33) Bruce, Acts, NICNT, p. 36: “그들이 전파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6절에서의 제자들의 질문은 그들이 중역을 맡은 임박한 신정정치에 대한 이전의 타오르는 기대의 마지막 흔적처럼 보인다.”

34) Cf. 막 10:35-45; 눅 22:24-27.

35) S.S. Smally and B. Lindars(eds), Christ and Spirit in the New Testament(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3), p. 64.

36) Dunn, Acts, p. 9.

37) 필자는 이 말을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정치적” 혹은 “물리적”이라고 하는 개념과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정치적 혹은 물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던 데 반해 예수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실현될 -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던 것이다(행 1:4-5, 7-8).

38) Bruce, Acts, NICNT, p. 35; Arrington, Acts, p. 10.

39) Bruce, Acts, NICNT, p. 35: “예수는 전에 아들 조차도 재림의 날 혹은 시를 알지 못한다고 했던 말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날과 시의 문제는 오직 아버지께만 보존되어 있다(막 13:32).”

40) Cf. Dunn, Acts, p. 10.

41) Bruce, Acts, NICNT, p. 35: “여기서 예수의 대답은 직접적인 ‘아니오’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의 시대가 오직 아버지의 유일의 판단 안에 있는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2) Dunn, Acts, p. 10.

43) F.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3rd Revised(Grand Rapids: Eerdmans, 1990), 70.

44) Foakes-Jackson, Acts, pp. 3-4.

45) Cf. Arrington, Acts, p. 10. 그는 행 1:8절이 세상에 대한 증인의 의무를 언급하는 내용으로서 “제자들의 관심의 방향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부터 교회의 선교로 돌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이스라엘을 위한 참된 축복의 상태는 분명히 올 것이다. ‘만물의 회복’(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cf. 마 24:14)”고 말한다. 이것은 3절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주제를 상실한 해설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주제가 “이스라엘의 회복으로부터 교회의 선교로” 전환되고 있다면 앞에서부터 중심적으로 다루어져 온 전자의 주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46) Bruce, Acts, NICNT, p. 36가 주장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물었던 제자들에게 대해서는 “한 때 그들의 야심찬 목표였던 정치적 권력 대신에 훨신 위대하고 존귀한 권세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의 역시 “교회론적 하나님 나라” 개념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Bruce는 또 다른 표현으로,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영적 왕국을 선포하고 섬기는 일에 자신들을 헌신하였다. 이 왕국으로는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들어가며 또 그 안에서는 주요 명예가 가장 충실하게 순종과 섬김과 고난의 길에서 그들의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속한다”고 진술한다. Arrington, Acts, p. 10도 행 1:8과 관련하여 비슷한 해설을 시도한다: “어떤 제자들은 왕국에서 통치자들이 될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권세가 아니라 섬김의 능력을 약속받았다. 지배권이 아니라 섬기는 능력 말이다. 5절의 성령세례는 섬김을 위한 능력의 초자연적 부여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47) Dunn, Acts, pp. 10-11. 사도행전을 학자들 마다 다소 다르게 분석한다. Bruce, Acts, NICNT, pp. 36-37의 경우는 예루살렘(1-7장), 유대와 사마리아(8-11장), 그리고 땅 끝(12-28장)으로 나눈다. Arrington, Acts, pp. 10-11의 경우는 예루살렘(1-7장), 유대와 사마리아(8-9장), 그리고 땅 끝(10-28장)으로 본다.

48) 이 본문은 행 26:18에서 인용되고 있다.

49) Cf. 눅 24:49.

50) Dunn, Acts, p. 11.

51) 사도행전 전장을 통해 누가는 일관성 있게 증인의 역할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1:22; 2:32; 3:15; 5:32; 10:41; 13:31; 22:15; 26:16 등을 볼 것.

52) Bruce, Acts, NICNT, p. 36: “한 구약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증인들이라고 불렀다(사 43:10; 44:8); 이스라엘이 성취하지 못한 임무가 완전한 여호와의 종 예수에 의해 취해졌으며 그에 의해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공유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라고 하신 것과 부활의 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 되리라’라고 하심으로 사명을 준 것 사이의 관계는, 바울이 행 13:47에서 사 49:6을 인용한 것의 의미를 숙고해 보면, 더 잘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53) 제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증인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수세 시에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공적 사역에 임했던 것과 동일한 패턴(pattern)을 보여 준다.

54) Bruce, Acts, NICNT, p. 36.

55) e.g. H. Conzelmann, Acts of the Apostles, Hermenia(Philadelphia: Fortress, 1987), pp. 95-136.

출처 : Only LORD
글쓴이 : 소 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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