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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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5. 8. 27. 11:19

G. E. Ladd의 하나님 나라와 그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3장~8장 요약

2006년 9월 17일 오후 3:29공개조회수 5 0

제 3 장 그 나라는 미래적이며 또한 현재적일 수 있는가?

우리는 천년기의 종말에 이르러서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는 것에 일치한다. 그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배제하는 천년기 해석에 아무런 논리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해답을 위해서 신약성경으로, 특히 우리 주님의 가르침들로 돌아가야 한다.

1. 그 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중심을 이룬다
1)세례 요한과 예수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
2)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 - 천국(하나님 나라)복음의 전파(마 4:23, 눅 4:43)
3)산상설교 - 그 나라의 시민 된 사람의 성격과 행실을 설명
4)제자들의 파송 - 이제 그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마 10:7, 눅 10:9)
5)시대의 흐름을 예고하심 - 이 천국 복음이 ....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2. 그 나라는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이다
1)그 나라의 현재적 실제 - 씨앗으로서 현재 인간의 마음에 뿌려짐(막 4:3-),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막 12:34), 감추어진 보화, 지금 획득할 수 있는 진주(마 13:44-46)
2)미래에 경험되어질 그 나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이 어느 날 들어갈 미래적 나라(마 7:21-23),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상속받는 하늘나라(마 25장)

3.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미래적이다
- 충만한 상태의 그 나라는 철저히 미래적이다
복음서의 자료에서 산상설교는 현재적 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현 세상을 사는데 필요함보다 그 미래적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전제(前提)로서 이해된다. 예수께서는 그 나라를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내셨으며, 계속적으로 인자가 영광 중에 돌아올 미래에 그 나라가 올 것을 기대하셨다. 현 시대는 그 나라가 충분히 오기 전까지는 그 경로를 달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는 오직 한 무리가 그리로 들어감을 얻을 것이다.

4. 미래적 나라의 성격
1)미래적 나라는 때때로 오는 시대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그 나라를 지상적 경험의 용어로 묘사한다.(마 5:5, 6:10, 8:11-12, 눅 19;11-)
2)예수께서 묘사하신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이다.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요구하는 이 통치는 그것의 주제성들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는 오직 오는 시대에서 완전히 실현될 궁극성을 예기(豫期)한다. 그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의 본질적 성격, 그 구성요소에 대한 그것의 요구, 그것이 요청하는 의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이며 완전한 완결에 관한 것이다.
3)주의 교훈에서 지상 왕국에 대한 분명한 암시가 없다 하더라도, 성경의 다른 구절이 그러한 나라를 가르친다면, 계시의 점진성은 신약 성경 자체 내에서도 내재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계시된 모든 진리가 말씀의 모든 부분들에서 동일하게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5. 그 미래적 나라가 어떻게 현재적일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종말론적 나라가 어떻게 현재의 영적 실재가 될 수 있는가, 미래적 나라가 일시적 지상 통치를 포함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둘 다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이며, 계시적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종말론적 나라와 현재의 영적 나라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천년주의냐 전천년주의냐의 문제와 같다.


제 4 장 미래와 현재의 나라의 문제에 대한 해결

1.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의 의미 - 신약 성경의 실례
신약성경에서 바실레이아, “나라”의 우선적 의미는 “왕국”이나 “백성”보다 “통치”(왕의 능력, 권세)의 개념이다. 이는 아람어 “말쿠트”에서도 발견되는데, 달만(Dalman)은 구약성경과 유대문헌의 용례를 들어 말쿠트가 영토가 아닌 왕적 통치의 의미임을 말하고 있다.
눅 19:11-27에서 바실레이아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 계 17:2에서도 이 단어는 “임금처럼 권세”를 받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5:10은 구속받은 백성인 이유를 왕의 백성이어가 아닌 왕의 능력에 참여하기 때문으로 기록한다.(계 17:17-18:추상적 의미)
이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위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이 추상적 의미가 결코 그 말의 내용을 다 덮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의미로도 나아간다. 정상적인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마 4:8, 막 6:23)
그러므로 바실레이아라는 단어의 순전히 언어학적 의미와 주로 그것의 비종교적 용례에 우리의 관찰을 너무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약 성경 자료에 대한 연구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에서 나타났고, 그가 통치하는 백성을 창조하며 그의 통치의 능력이 실현되는 영역들을 자아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이다.

2. 그 나라는 구원론적이다
신약 성경은 전반적(全般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서 세계가 생존하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적 역사에서 실제화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타락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은혜로운 통치의 경험으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도 전체에 걸쳐 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를 거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효과적인 회복이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인간이 멀어짐은 구속의 일대기(一代記)에서 끊임없는 후퇴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악한 자의 권세 안에 놓이게 되었다.(요일 5:19) 그리고 사탄은 그의 권세의 한계를 과장했다.(눅 4: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탄이 이 세상에서 매우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성경적 관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뜻은 지상에서 인간에 의해 실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도래할 때, 사탄과 모든 사탄적 영향들을 최종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구원론적 개념이다.
이 궁극적이며 환전한 하나님의 통치는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 후(계 19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기 통치 후(계 20:1-4) 오는 시대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천사들의 반역과 그 후 인간의 범죄에서 자의적(自意的)으로 그러나 일시적으로 버려졌던 하나님의 효과적 주권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왕적 능력의 측면에서 바라본 구속의 역사이다.
그 나라, 하나님의 그 왕적 능력은 예수의 본성과 그의 메시야적 활동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사역의 결과로서, 오늘날 인간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 나라의 능력과 축복을 누리는 구원의 영역이 뒤이어 일어났다.

3.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는 그 나라
복음서의 언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예수의 본성과 활동 안에서 인간에게 도래(到來)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결론을 강요한다.(마 12:22-30, 막 1:27-28) 사탄은 스스로 붕괴하지 않고는 사탄을 쫓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들과 사탄은 내어 쫓기고 있으며, 그의 나라는 무너지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예수의 본성 그 자체 안에서 사람사이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탄의 나라는 그 메시야 - 왕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의해 도전받아왔고 나아가서 전략적 패배를 겪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탄의 능력은 붕괴되고 하나님의 능동적인 구원의 능력으로서의 그 나라는 인간을 사탄의 나라로부터 구속하는 그리스도의 본성과 활동 안에서 세상에 들어왔다. 갈릴리 사역의 결말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눅 10:9-13)고 선포하게 하신 것은, 이러한 능력과 권능의 나타남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사탄의 떨어짐은 그의 나라의 종말이 시작됨을 말한다.(눅 10:17)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모든 곳에서 완전하게 실행되는 영역으로서의 그 나라는 신약 성경에서 철저하게 미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 안에서 도래하였다는 의미는 있는 것이다. 그 나라는 미래적 나라의 능력이 사탄의 패배를 가능케 한 메시야의 초자연적 사역을 통하여 역사와 인간 경험 속으로 벌써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나라는 그 능력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 도래하였다.

4. 구원으로서의 그 나라
예수의 치료는, 하나님께 고유한 이 특권이, 그가 인자(人子)이심으로 그의 것임을 확증하셨다. 그의 사역은 죄인을 회개함으로 초청하는 것에 지향되었다.(막 2:17) 그리고 사람들을 죄사함에로 부르는 것이었다.(눅 7:47, 막 2:10) 이제 예수는 새로운 시대가 그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고 있음을 확실히 의식하셨다.(눅 4:18-21) 미래의 종말론적 나라의 축복들은 메시야적 구원 안에서 벌써 인간에게 도래하였다. 그리고 이 구원의 충만함은 아직 받l지 못하였으나, 그것의 본질, 그것의 능력은 왔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였다.(요 3:3-5)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 생활에서 누릴 영역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골 1:13) 때문이다. 그 나라는 그것의 충만함에서 미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그 나라로 옮겨졌고 그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

5. 그 나라와 천년기
반드시 속히 될 일의 계시에서 예수는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계시하시기를,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후에 지상에서 천년 왕국이 뒤이어 일어날 것이라 하셨다.(계 20:1-6) 사탄의 능력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제한될 것이며, 민족적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되고, 결코 이루어진 적이 없는 구약 성경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은 그 때에 실현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인격적으로 통치하실 천년기 이전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뜻은 근접될 수 없다.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지상적 존재의 모든 형태(결혼, 가족, 정부, 사회, 예술, 교육)가 새롭게 되고 변형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 건너편에서가 아닌 역사 안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최종적, 궁극적 형태가 아닌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계속으로 실현될 것이다.
이제 그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조망하여 볼 때, 미래의 종말론적 측면은 궁극적 나라와 천년 왕국을 모두 포용하는 듯한데, 그것은 그 둘이 모두 재림 이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래 사건들의 여러 캔버스들을 한 그림으로 보이도록 하나 위에 다른 하나를 덧얹어 바라보는 예언적 조망의 한 예(例)이다. 세례 요한에게는 그가 선포한 두 사건이 하나였다. 주님께서도 동일한 조망법(眺望法)을 쓰시며, 여러 사실들 사이의 상세한 구별 없이 하나의 큰 드라마처럼 미래를 바라보신 것이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6. 요 약
이와 같이 그 나라는 점진적 방법으로 그리고 하나 이상의 영역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활동적 의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 인격적 행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 나라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 사탄은 그 앞에서 무력하였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사탄의 힘으로부터 구조되어도 그는 여전히 이 시대의 신이며, 그가 패배하였지만 그에 대한 승리는 완료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복종시키는 일을 완성하시는 기간인 천년기 동안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스러운 현현(顯現)이 뒤를 이을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실행될 것이다.



제 5 장 천국은 연기되었는가?

1. 천국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
예수께서 지상적 다윗왕국을 제공하신 것을 입증키 위해 마태는 두 용어를(천국, 하나님 나라) 사용했으나, 유대인들은 그 나라를 거절하였고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연기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천국은 항상 지상적인 반면 하나님 나라는 우주처럼 넓고 지상적인 것들을 포함한 것이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천국을 전포괄적(全包括的) 통치권으로 이해하지만,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영역이므로 볼 수 있는 외현적(外現的)인 것이다
요한은 이 나라를 유대주의적 지상적 형태로 전파했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도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스라엘 나라에게 지상적 다윗 왕국을 성실히 제공하신 것이며, 이것이 왕국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절하게 되자 이 복음은 전파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제 더 이상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약속한 그 나라가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자는 천국에 속한 것이다. 비록 그가 천국에서 독초일 뿐이라도 그는 여전히 거기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천국 이해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보훈의 해석에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설교는 기독교인의 생활이 아닌 미래의 지상 왕국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적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전가(轉嫁)하시는 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의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며 신성한 통치 제도에는 전혀 없는 요소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산상보훈에는 죄인을 위한 구원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유대주의적이며 메시야 왕국이 실현될 때의 지상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2. 연기된 나라 이론의 난제들
이 가장 중요한 예수의 교훈 부분을 기독교인의 직접적 적용에서 제외시킨 이 체계(세대주의)가 엄격히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한 예로 주기도문이 왕국시대를 위한 것이며 현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견해의 타당성을 엄밀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

1)언어학적 난제
먼저 주목할 것은 이 두 표현이 복음서에서 매우 교대적으로(交代的) 쓰였다는 점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으로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선언되었다. 산상보훈이 마태에서는 지상왕국의 법률이라면, 누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법률로 선포되었다. 비유들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나타내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젊은 부자 관원과의 이야기에서(마 19:23-24)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 기적이다. 특히 부자의 경우는 가난한 자보다 포기할 것이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적 역사가 더욱 분명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2)해석학적 난제
세대주의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마태복음 12장까지의 천국은 다윗의 지상왕국이며, 13장부터는 지상왕국의 제공 대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계의 “신비한 형태”로 천국이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18:3-4에서는 천국은 기독교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 국원 등과 동의어임은 매우 명백하다. 즉 천국은 중생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으며, 이는 회심을 의미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형태”가 기독교계라 해도 그것은 참 하나님 나라와 거의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기독교계는 부패와 잘못된 교훈으로 혼합될 수 있으나,참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3)신학적 난제
그러면 천국이란 단어가 복음서에서 지상 왕국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천국은 유대인들이 특별히 기대하였던 나라, 구약에 예언된 다윗의 지상왕국과 관계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구약은 종종 그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회복될 시기의 도래를 약속했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선포에 부여했던 의미도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종류의 나라를 제공하지 않으셨다. 만일 주께서 다윗의 지상왕국을 제공하셨다면 그들이 받아들였을 것이나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십자가는 왕관에 선행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영광의 권조에 오시지 않고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셨다”(슥 9:9)
우리는 유대인의 해석에 따라 메시야직을 해석할 의무가 없듯이, 유대인의 이해에 따라 예수의 왕국 제공을 해석할 의무도 없다. 우리의 안내자는 유대인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영감 된 기록인 것이다. 유대인은 메시야의 고난을 기대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다.(고전 1:23) 제자들조차도 부활 후 예수께서 그것을 해석해 주시기 전까지는 죽으심의 ks의미를 알지 못했다.(눅 24:27)
유대인이 메시야의 통치와 죽으심에 대한 구약의 분명한 예언들을 놓쳤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은 이것을 예언했고, 시편 22편은 이것을 묘사했다. 그들은 성경은 읽었으나 그것을 메시야에게 적용시키지는 않았다. 메시야는 항상 통치자여야 했고 결코 죽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약의 편협한 해석의 배경 안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신약의 기록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기 전에, 왕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기 위해 겸손히 사람 중에 오시는 하나님, 또 다른 왕권이 영적 영역에 나타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왕권의 충만한 계시에는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영광의 왕이 아니라 겸손한 구세주로서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제공한 나라는 외적 지상적 왕국이 아니라, 왕 자신이 사람에게 오신 형태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적절한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 6 장 “천국”의 언어학적 해석

1. “천국”의 배경
마태복음에 처음 나타난 “하늘나라”(天國), 천국이란 단어는 신약보다 앞선 것으로 알려진 유대문서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나라”의 개념은 계속 상기되었으나 그 관용어 자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두 표현은 신약시대에 들어서서야 아마 예수의 가르침을 매체로 일상 관용구가 된듯하다.

2. “천국”의 의미
유대인의 토착어는 아람어였으며 우리 주께서도 사역시에 이 언어를 사용하셨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능한 한 성호(聖號)의 사용을 피하고 다른 표현으로 대체했다. 가장 일반적인 대체어는 “하늘”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에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보다 “천국”을 더 사용하신 것 같다.
그러나 나머지 복음서에서는 이방인에게 “천국”보다 의미전달이 잘 될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이방인들의 귀에는 “천국”이 “하늘나라”(the kingdom of the skies)나 “구름나라”(the kingdom of the clouds)라고 들릴 것이다. 챤(Zahn)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 왕이 되시는 세계는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말미암고....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성립된다”(요 18:36)

3. 예수께서 전파하신 나라
하나님 나라는 격렬한 힘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위하여 격렬할 정도의 철저한 헌신의 결단을 요구한다.(눅 16:16)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된 영역이라는 의미로서 그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나라는 미래적이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라는 예수에 의해 가까이 온 것으로, 또한 이미 임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이 지상이나 장차 올 세상에서 그렇게 실현되기 전에 먼저 현재의 영적 실제로서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 그들의 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한다. 현재의 영적 나라는 미래의 영광의 나라의 준비이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한 한 나라이며 주권자이신 한 분 하나님의 통치이다.

4. 그 나라와 산상보훈
이것은 하나님의 왕적 능력을 체험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를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재 그들의 삶 속에서 통치하시는 자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자들은 새 의를 소유해야 한다. 그 나라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것이다.(마 5:20) 그 나라의 새 의는 사람의 동기를 다루고, 적당한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내적 의를 요구함으로써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것이다. 산상보훈이 다루는 것은 바로 이 의의 새 원칙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의 삶 속에 실현될 때, 그 통치는 새로운 내적 의, 하나님 자신의 바로 그 의를 맺게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그것은 그 안에서 통치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산상보훈은 더 나아가 현재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킨 자만이 미래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도 가르친다. 그러나 형식적인 외적 의만 소유하고 지상에서 그 나라의 참여권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쫓겨날 것이다.

5. 그 나라와 비유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약의 예언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고 그 나라도 완전한 능력 중에 즉시 나타나지 않을 것을 천국의 비밀로서 가르치셨다. 마지막 날에 메시야적 왕이 지상에서 가견적(可見的)으로 통치하겠으나, 그 전에 그 나라가 사람의 마음속에 영적 형태로 달리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진리의 내용이다.

1)씨 뿌리는 비유는 그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강압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받아들여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도 있다.
2)가라지의 비유는 그 나라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함께 즉시 도래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심판은 인자가 오실 미래에 있으나, 그 사이에는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함께 살 것이다.
3)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비록 그 나라가 현재에서 경험될 때는 단지 부분적으로 성공하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며, 그 모든 영역을 다 포괄(包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지들에게 가르친다.
4)보화와 진주장사의 비유는 이 나라가 새로운 시작에서는 미미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며 그것은 어떤 값을 치루고 라도 구해야 할 것임을 가르친다.
5)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간의 마지막 분리가 세상 끝까지는 이루어지지 않고 비록 연기된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선행(先行)될 것을 가르친다.

6. 요 약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분리하여 전자는 만유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로, 후자는 지상에 관계된 하나님의 통치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윗의 지상왕국이 연기되고 대신 천국의 신비한 형태가 생겼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무 것도 연기되지 않았다. 그 나라는 현재적이며 영적 실제이다. 또한 미래적 나라의 능력은 현재의 경험 속에서 맛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나 배경으로나 종교로나 “나라의 본 백성들”이 되었어야 했던 유대인들은 그 나라를 빼앗기고(마 8:12),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 나라가 요구하는 의를 나타낼 자들에게 주어졌다.(마 21:43) 이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헌신한 자들의 몸인 교회이다.
그 나라는 외적인 과시(誇示) 없이 미미하게 시작하였으며, 그것을 받아들인 자도 그것을 거부한 자와 완성시까지 섞여 살도록 되었다. 그 후 하나님 나라는 임할 것이며 마지막 상태는 하나님의 뜻이 도처에서 영원히 완전하게 실현되었음을 증거할 것이다.



제 7 장 계시록 20장의 나라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1. 진행 방법
1)신학적 접근 - 신학체계 안에서 그것의 의미와 위치를 묻는 문제
2)해석학적 접근 -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
해석학적 접근은 언제나 신학적 접근에 선행(先行)해야 한다. 아무도 종말론의 체계로 성경을 볼 수 없고, 또한 그 기록들을 자신의 체계에 맞출 수 없다. 언제나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라고 자문해야 하며, 이에 따른 답변에 기초해서 그의 신학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2. 해석학적 접근
조직신학이 일관성(一貫性)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이 적절한 해석학에 따라 해석되지 않는 곳에서도 명백한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를 수 있다. 우리가 결코 적절히 대답할 수 없을 문제들이 있는데 특히 예언서와 종말론의 부분에서 그러하다.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體系)가 손상되지 않도록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해석학은 언제나 신학에 선행해야 한다.

3. 해석학의 원리들
우리의 출발점은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서들을 볼 때, 일부분은 영적으로 해석되었지만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에서 성취된 대부분의 예언들은 놀랄 만큼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처럼 신약의 구약 해석법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영적, 상징적 해석의 획일적 원리는 없다. 어떤 예언들은 현재에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나, 미래에는 단순히 그 영적 의미의 폭넓은 적용으로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가까운 미래를 언급하는 예언들은 정확히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선험적(先驗的)으로 기대될 수 없을뿐더러 또한 먼 미래, 즉 완전히 변형된 상태의 새 시대에 관한 예언의 경우도 그러하다. 우리는 미래시대의 변형의 정도를 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구별의 타당성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약의 구약해석 연구에 의해 이끌어진 결론은 선험적 논리가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예언 연구에서는 영적이든 문자적이든 간에 단일한 해석법을 주장할 수 없다. 본문 자체에 상징적 해석을 요구하는 고유한 논리가 있거나 동등한 예언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한 다른 성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러운 문자적 해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미래적 나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세상과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면에서는 참으로 영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해석이 미래 사건의 문자적 실재를 무효시키지는 않는다.

4. 요한계시록 20:1-6의 주해
죽은 자의 부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전과, 그 이후의 부활이 그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천년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첫 단계 부활로 시작되는 기간인 것이다. 천년은 미래적이며 이 시대의 완성과 장차 올 종말의 영원한 시대의 중간기로 간주된다. 또 하나의 해석은 두 가지의 영적 해석이다. 한편은 천년왕국을 현 교회시대의 전(全)과정과 동일시하며, 다른 편은 천년이 시간적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며 단지 완료와 완성을 가리키는 순수한 상징적 양식이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견해라 불릴 수 있는 주장은 천년을 그리스도의 두 내림(來臨) 사이의 기간으로 이해한다. 죽은 영혼들이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다.(골 3:1 인용) 천년을 영해하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변형시켜 그 강조점을 신자의 영적 지상 생활에 두지 않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기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누릴 중간 상태의 축복에 강조점을 둔다.
계시록의 대부분은 상징적 개념으로 묘사된 것이 명백하다. 사실상 아무도 계시록을 전부 문자적 형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 아무도 네 종류의 다른 색의 말을 탄 자들이 이 세상을 달렸거나 달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계시록 13장의 짐승이 미래의 인격적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든 로마 교황을 의미하든 간에, 그것은 어떤 역사적 인물이나 조직체를 의미하며 단순히 영적 실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적 해석을 철저히 주장하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구약이 아닌 신약에서 시작하여 귀납적 주해를 해볼 때 미래 사건의 개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또한 그 첫째부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함께 통치할 장기간의 기간에 의해 죽은 자의 두 부활이 분리되어야 할 것을 발견한다. 이처럼 해석사를 살펴볼 때 계시록 20장에 대한 부자연스런 해석은 모두 귀납적 주해연구에서가 아니라 반(反)천년왕국적 성격의 신학적 가정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케이 엘 슈미트(K.L.Schmidt)는 계시록 20장의 두 시대 사이의 중간단계를 발견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본문에 대한 선입관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므로 본문에서 정확한 의미나 가치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 8 장 천년기적 해석에 대한 반대이론들

1. 천년기적 해석의 유대적 성격
교회사의 초두(初頭)에 지상나라가 건설되는 날이 있다고 가르치는 유대 묵시문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비기독교적 서적에 영향을 받아 비정경적 묵시문학의 견해에 비추어 계시록을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천년왕국의 진정한 의미는 상실되고 그 대신 유대적 지상왕국의 교리가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영적 해석은 계시록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반면에 문자적 해석은 계시록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1세기의 기독교인들이 유대 묵시문학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1)초대교부들의 천년왕국 해석
극히 소수의 교부들만이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부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전천년주의자인지 무천년주의자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종말론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언급될 때 그것은 언제나 미래 계시적 나라를 의미했다.
어거스틴 이전의 무천년주의는 부정적 색채가 강하다. 그 주장은 당시대의 천년왕국적 가르침에 대한 반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거스틴처럼 대체할 만한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다. 순교자 져스틴도 천년왕국의 교리가 거부된 근거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주후 170년경 알로기(Alogi)로 알려진 이단은 로고스 교리를 거부하면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케린투스(Celinthus)의 영지주의에 영향을 입은 책으로 돌렸다. 로마의 감독 카이우스(Caius)는 몬타누스파를 반대하면서 천년왕국의 교리가 성경에서보다 케린투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돌렸다. 이레니우스(Irnaeus)도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제거했다. 오리겐(Origen)은 예언의 문자적 해석을 부정하면서 그러한 문자는 “유대적”이라고 주장했다.
천년왕국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였다. 그는 자기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책의 언어 이면(裏面)에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기에 각 구절은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다소 감추어졌던 놀라운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초기 무천년주의자들이 천년왕국의 가르침을 반대한 것은 그것을 배제하는 철학적 견해에 동조했기 때문이거나, 동시대인들이 천년왕국을 가르치는 경향에 반작용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천년왕국주의자는 아니었음은 분명하나 반대자는 제한된 수였으며 그 교리는 널리 퍼져 있었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다른 적극적 해석이 없었으며, 영적 해석이 나타날 때에도 이는 묻혀 있던 가르침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견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2)유대 묵시문학에서의 천년왕국
모든 천년왕국주의자들은 중간 왕국의 길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의미, 즉 일시적 지상왕국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년왕국의 견해는 유대 묵시문학에 의해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교리는 신약 전시대(前時代)로 알려진 묵시문학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어떠한 종류이든 일시적 지상왕국의 개념은 단지 몇 군데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녹서는 불확정적인 일시적 나라, 에스라 4서는 사백년 동안 지속될 나라, 바룩의 묵시록은 일시적이나 지정되지 않은 기간의 그 나라, 그리고 에녹의 신비서 32:1-2은 천년왕국을 나타내는 유명한 구절이지만 그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고 지상나라에 대한 조잡하고 물질주의적이며 감각적인 유대주의적 해석을 가리키게 되었다.

3)기독교와 유대교의 천년왕국
초대교회에서는 그 나라의 성격이 가끔 유대 묵시문학의 빛 아래서 주로 물질적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천년왕국의 교리에 대해 최초의 반발이 야기(惹起)된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계시록 20장에서 기독교적 천년왕국 자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유대적 영향으로 말미암은 진리의 왜곡이란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들이 메시야 왕국을 그렇게 전적으로 물질적으로만 묘사한 데 대해 강력히 반박할 성경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물질세계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것이 근본적 문제점이다. 그 나라가 “조잡하고 물질주의적 유대주의적” 형태를 지니지 않고도 천년왕국의 지상적 지복(至福)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보스(Vos)는 그 나라의 능력이 제거한 물질적 악은 도덕적 영적 배경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의지에서도 다스리기에 육체적 영역에서 사탄에 대한 승리는 영적 영역에서의 유사한 승리를 상징한다. 마 24“30, 막 12:24은 곧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사역의 목적이 세계를 초자연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임을 보여주며 그 때에 모든 악이 정복을 당하고 영적세계와 같이 육적세계도 새롭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l
영적축복과 영적세계를 물질적 세계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헬라철학의 이원론에서 유래한 것이지 성경적 신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부활에 대한 신약의 개념은 영(靈)으로만 구성된 몸이 아니다. 기독교 종말론이 많은 점에서 유대교적 종말론과 공유한다고 할 때, 아무런 근본적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록hk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익명의 저서가 아니며,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구원론적이다.
몇몇 초기 기독교인들이 계시록 20장을 유대 묵시록의 빛 아래서 해석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결코 그것이 유대주의적이라는 이유로 계시록 20장의 자연스러운 해석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한다. 성경적 천년왕국이 유대적 교리에서 그 유사구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또한 일시적 나라의 교리가 유대적 종말론에 나타난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유사한 교리가 과연 무효화 될 수 있는가?

4)유대교와 기독교 종말론의 유사구
천년왕국의 기독교적 교리의 유사구를 유대 묵시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계시록 20장의 자연스런 해석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천년왕국의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 종말론의 교리 가운데서 유사구를 찾을 수 있다는 널리 인정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말론은 모두 구약에 근거하며 그 뿌리를 구약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약간의 상호관계가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 현상의 가장 중요한 예증은 두 시대의 개념이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 그것이다. 구속사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우리가 살고 있고 그리스도의 재림시 완성될 이 세상(막 24:3)과 우리 주께서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때 시작될 오는 세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명백히 대조적인 두 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 묵시문학이 완전히 발전된 형태, 특히 주후 1세기 경에 쓰여진 에스라 4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유사구는 너무 현저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과 유대 종말론적 사상 사이에서 어떤 상호 관계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시대에 관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명백한 관계성으로 말미암아 “유대적”이라는 이유로 계시록 20장의 자연스런 해석은 반대하는 힘을 완전히 무력(無力)하게 하였다.
사실상 신약의 종말론이 이 시대가 지나가고 오는 시대가 시작되는 단계, 즉 그리스도의 지상적 중간 통치의 섭리 단계에 대하여 유대적 종말론의 일부를 다시 구체화 시킨다면 일관된 반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기 통치의 유대적 성격에 대한 모든 문제는 실제로 계시록 20장의 해석과 무관하며 해석학의 원리를 그 구절에 적용하는 데도 무관하다. 천년왕국의 자연적 해석은 유대 묵시문학의 영향을 입어 창출된 것이라는 점이 아직 입증되어야 한다.


2. 다른 신약성경들의 침묵
천년왕국의 해석에 대한 두 번째 반대는 이 교리가 주님의 교훈과 서신서에도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책들의 침묵과 일치하게 계시록 20장을 무천년주의적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1)이 반대의 약점
신약에서 천년의 중간통치를 가르치는 책이 계시록 한 권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저자에 의해 오직 신약의 단 한 부분에서만 나타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반대는 지지받을 수 없다. 이것은 일관성 있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룩 비유에 대한 무천년주의자들의 일반적 해석도, 그 나라의 개념을 지지하는 데 사용된 단 하나의 증거적 본문이 누룩의 비유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침투하는 영향력으로서의 그 나라는 우리 주의 교훈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시작시는 실제로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게 나타났던 그 나라가 어느 날 그 전역을 다 덮게 된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위해 사용된 증거적 본문은 단 하나라는 것이다.

2)복음서의 증거
현대의 많은 무천년주의자들은 복음서에서 그 나라의 미래에 관한 계시적 말들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약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미래적 통치를 능력의 용어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다시 오실 때, 그는 열방을 철장(鐵杖)으로 통치하실 것이다.(계 19:15) 이것은 심판이며 또 그 이상이다. 이것은 확실히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세상의 남은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힘의 통치”를 확증한다.
바울은 빌 2:9-10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은 궁극적으로 모두가 자발적 복종은 아니나 모든 지적(知的) 존재를 그 발아래 꿇게 하고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중간 통치를 묘사한다. 그는 모든 원수를 정복하실 때까지 왕 노릇 하시고(고전 15:20-23), 결국은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이것이 천년 통치의 주목적들 중의 하나인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타당한 반대가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3)서신서의 증거
바울의 서신서에서 천년 통치를 배제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 많은 구절에서 그 나라는 현재의 영적실재인 반면, 대부분의 경우에 그 나라는 아직 상속받아야 할 미래 계시적인 것이다. 특히 한 구절에서 바울은 중간 통치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고전 15:22-25) 비록 바울은 천년 통치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는 미확정된 기간의 중간 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그가 최종적으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는 끝 이전에 그가 통치하실 어떤 기간이 재림 이후에 경과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통치는 현시대와 천년왕국의 시대를 당연히 포함하고 그 두 시대는 동일한 왕적 권세를 교회와 전체 세상의 두 다른 영역에서 행사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롬 14:17)는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골 1:13)이며, 또 미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모두 포함한다(엡 5:5). 사실상 이 용어에 대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그의 중보적 나라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4)점진적 계시
성경의 신적 계시는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漸進的)인 것이다. 점진적 계시의 의미는 언제나 신약과 구약의 관계와 또한 구약 내에서도 모세로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 선지자들까지의 움직임 안에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적용된다. 신약의 책들 안에서도 계시의 더 진전된 점진의 적용이 있을 수 없을 이유가 없다.

3. 결 론
구약성경은 주로 그것의 종말론적 완성의 용어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을 기대한다. 그러나 미래의 종말적 나라 그 두 단계는 구약에서 명백히 구별되지 않는다. 복음서에서도 지상나라와 영원한 나라 사이의 더 나은 구별은 거의 없다. 대부분에서 그 미래적 전망은 그것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 속에 나타난 그 나라의 궁극적 완성을 바라본다.
신약에서 유일한 예언서인 계시록에는 지상나라와 영원한 나라와의 관계가 명백해진다. 처음으로 성경은 일시적 지상나라인 중간 통치가 있을 것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하는 최종적 영원시대에 앞선다. 처음으로 부활은 천년기전의 구원받은 부활과 그것이 끝날 때의 구원받지 못한 자의 부활로 두 단계로 일어날 것이 명백하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완성을 바라보는 이 사건들의 관계가 오직 성경의 마지막 책의 마지막 절들에서 처음으로 명백해지는 사실은 점진적 계시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남아있다. 계시록 20장의 해석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다른 연구들은 이 구절의 해석에 보조적 도움이 되어야 한다.
- 이 상 -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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