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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고 사는 것을 좌우하는 힘 - 07년 2월 25일 주일설교

하나님아들 2012. 9. 4. 16:33
죽고 사는 것을 좌우하는 힘

구약성경 잠언 18장 20-21절

얼마 전에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토막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아내였습니다. 이혼하고 위자료를 받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병으로 남편의 머리를 때려서 죽이고 시체를 토막 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사건이 삼일에 한 건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에게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아내가 남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고 합니다. 한 일본인 학자가 부부관계의 갈등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처방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남편들이 매일 아내에게 이 두 마디 말을 하면 아내의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부부간의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ごめんね。愛してるよ。” 남편 분들, 제 명대로 사시려면 오늘부터 이 두 마디 말을 자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어 성경으로 보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혀의 힘의 지배를 받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우리 입술의 말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입술의 말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기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긍정적인 면에서, 그리고 부정적인 면에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살리는 말의 힘을 보겠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쓰신 책 ‘긍정의 힘’을 보면 목사님의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가 몸이 아파서 21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았는데 검사결과 간암이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몇 달도 아니고 몇 주 밖에 살 수 없으니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낙심하고 실망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조금의 요동함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할 거야.” 하루에도 수도 없이 어머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조엘 목사님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도대체 어떻게 죽지 않으시겠다는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는 조금의 주저함 없이 대답합니다. “얘야, 나는 주님과 그분의 권능 안에서 누구보다도 강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경을 열심히 뒤지면서 치유의 말씀 30-40개 정도를 찾아내 종이에 적고는 날마다 큰 소리로 선포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식욕이 돌아오고 몸무게가 불어났습니다. 몇 주가 지났지만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몇 달, 몇 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몇 주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고받았던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님은 그 후로부터 무려 20년 넘게 살아있습니다. (조엘 오스틴, 긍정의 힘, 두란노, pp. 150-152.)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살리는 권세가 혀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의 권세를 사용하여 마인드 컨트롤이니 언어 치료니 하는 것으로 놀라운 효과를 보고 있는데, 정작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교인들은 말의 권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별 생각 없이 쉽게 말을 내뱉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산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상징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문제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와 같은 불치병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의 문제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끊을 수 없는 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산을 만났을 때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산을 향해 ‘바다에 빠져라’ 명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믿는 것입니다. 절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믿음이 먼저입니까, 말이 먼저입니까? 네, 말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낙심이 되고 절망이 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나는 이제 끝났다, 망했어, 불가능해.” 이런 말을 내뱉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절망과 낙심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산을 향해서 믿음의 선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반드시 승리할 거야. 하나님이 도우시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거야. 이 문제로 인하여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거야.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비록 우리 마음에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반복해서 믿음의 말, 승리의 말, 기적의 말을 선포하다보면 그 말을 듣는 자신 안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말에는 이렇게 살리는 힘이 있는 것처럼 죽이는 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능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악평하며 자신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건을 볼 때 사건 그대로를 보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험과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있는 태도에 따라 그 사건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언제나 긍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땅, 똑같은 거민들을 보고 왔지만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달랐던 것입니다.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 안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와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갈등하며 대립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 믿음과 불신, 성공과 실패, 하나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언제나 이 두 가지가 우리 안에서 싸움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싸움은 2:10의 싸움입니다.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믿음보다는 불신이, 성공보다는 실패가, 하나님 생각보다는 사람의 생각이 훨씬 더 강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과거의 생각,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너무나 답답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어나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다.”(민14:8-9)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축복의 땅을 앞에 두고 저주의 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해 돌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입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는 교인들 안에서 이런 모습들을 자주 대면하게 됩니다. <힘내세요. 하나님께서 집사님께 다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절대 이 고난에 지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비록 속으로는 믿어지지 않아도 ‘아멘!’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런데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이런 말 앞에 <목사님, 이제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그냥 이러다가 끝나는 거지요. 목사님, 이제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인데, 정작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인데, 이와는 정반대의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민14:27-28)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이 없어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말한 대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느냐? 너희 말대로 해주겠다.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느냐? 너희 말대로 해주겠다. 너희는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너희가 한 말 그대로 너희에게 행하겠다.> 이것이 혀의 죽이는 권세입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죽이는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복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왜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실패의 말을 하면서 왜 자신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 실패의 말, 원망과 불평의 말, 불신앙의 말, 낙심의 말을 심어 놓고는 기쁨과 평안과 축복과 성공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제가 잠언을 읽으면서 말에 대한 것만을 뽑아서 노트에 적어보았습니다. 2페이지가 훨씬 넘을 만큼 잠언은 말의 힘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죽이는 말 살리는 말을 피를 흘리는 말과 사람을 구하는 말, 또는 칼과 양약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죽이는 말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죽이는 말의 첫 번째는 거짓말입니다.

흔히 거짓말을 사람에게 짓는 죄라고 생각하지만 잠언을 보면 거짓말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입니다.(6:17,12:22)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을 행하면서 잘 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0절에서는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잠언 19장에는 거짓말 하는 자는 벌을 면할 수 없고, 망할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흔히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당장의 부끄러움을 면하고자 함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숨기고자 함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에게 부끄러움 당하는 게 하나님께 부끄러움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짓된 것을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게 됩니다. 거짓말처럼 자신을 죽이는 말은 없습니다.

죽이는 말의 두 번째는 조롱하고 저주하는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비꼬는 말, 조롱하는 말, 멸시하는 말,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7장 5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고 가난하고 연약해서, 멸시하고 조롱하고 함부로 말해도 아무런 저항도 말대꾸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와 계산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향해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고용주는 고용인들을 향해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돈 없고 힘없고 오갈 데 없는 노부모를 향해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 앞에서,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 앞에서,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 앞에서,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조롱하고 멸시하고 욕하는 것에 대해서 더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당신이 함부로 말해도 될 것 같은 사람 앞에 있을 때일수록 말을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칼로 총으로만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혀의 죽이는 힘입니다.

죽이는 말의 세 번째는 비판하고 편을 가르는 말입니다.

거짓말은 자신을 죽이는 말입니다. 조롱하는 말, 화내는 말, 멸시하는 말, 저주하는 말은 상대편을 죽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죽이는 말로서 잠언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말은 비판하고 이간질 시키고 편을 가르는 말입니다. 비판하고 이간질 시키는 말은 자신도 죽이고 상대편도 죽이고 공동체를 죽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판하고 이간질 시키고 편을 가르는 말은 이웃을 망하게 하고 친한 친구 사이를 원수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비판하고 이간질 시키고 편을 가르는 말의 위력은 이정도가 아닙니다. 잠언 11장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악한 자 한 사람의 말이 한 성읍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험담하는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잠언20:19) 꽃집에 있으면 꽃향기가 배고 가죽집에 있으면 가죽 냄새가 배는 것처럼, 어느 대상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를 자꾸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도 죽이지 않고 상대방도 죽이지 않고 공동체도 죽이지 않는 방법은 일대일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고 문제를 해결하고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사단의 역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유일한 방법입니다.(마18:15-17)

마귀는 지금도 이 세 가지 말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망하게 하고, 상대방을 죽이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세 가지 말이 우리 입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돈을 빼앗기는 것, 우리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건강을 빼앗기는 것, 우리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시간을 빼앗기는 것, 우리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빼앗기는 것은 우리의 전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것이 바로 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말이 우리 입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최고의 방법은 살리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거짓말 대신 정직한 말을 하십시오. 상대방을 향해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목사님, 나에게는 축복의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요?> 자신을 향해 축복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축복하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반드시 승리할거야. 지금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비교도 할 수 없어, 그러니 힘을 내자. 주님은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거야.> 배우자를 향해, 자녀를 향해, 친구를 향해, 믿음의 가족들을 향해, 이웃을 향해, 나라를 향해 축복의 말을 선포하십시오.
비판하는 말, 약점과 실수를 꼬집어내는 말, 정죄의 말이 편을 가르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면 용서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은 하나 되게 하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합니다. 잠언 15장4절에서는 따뜻한 말이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말을 자꾸 듣다 보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인생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 말의 힘이 놀랍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도 살려내고, 쓸모없는 인생을 열매 맺는 인생으로 바꾸어 놓는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느 말보다 사람을 살리는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능력 있는 말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보배로운 말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보다 더 선한 말도 없습니다. 이 말은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용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포기한 흉악한 죄인도 회개시켜 새사람으로 만드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말입니다. 심지어 이 말은 죽음의 절망도 이기게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다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태산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악한 권세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달려듭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사단 마귀는 물러갑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첫째 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이 입을 열어 예수님을 부를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합니다. 친구에게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긍정의 말도, 위로의 말도, 축복의 말도, 칭찬의 말도 이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진정으로 살릴 수 있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우십시오.(골3:17)

이제부터 우리의 입술은 살리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 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죽이는 말을 할지, 살리는 말을 할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제부터는 살리는 말만 합시다. 정직한 말을 합시다. 믿음의 말, 축복의 말을 합시다. 화해와 용서의 말,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합시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말, 가장 복된 말, 가장 소망 넘치는 말, 가장 보배로운 말, 가장 권세 있는 말,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선포합시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리시고, 가정을 살리시고, 교회를 살리시고, 이 세상을 살리실 것입니다. 주께 영광!

2007년 2월 25일, 주일예배 설고 중에서
출처 : 치바영광교회
글쓴이 : 김성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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