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사전

[스크랩]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

하나님아들 2015. 9. 14. 23:50

 

가슴받이는 흉패(개역), 가슴패(현대인의 성경),

beastplate(KJV), breastpiece(NIV), chestpiece(NLT)로 번역되었다.

길이와 폭이 한 뼘 되는 장방형으로 두 겹으로 짜여 있다.( 39:9)

금실과 자줏빛, 붉은빛, 진홍빛 털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무늬를 놓은 화려한 주머니.(8)

이 주머니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고(레 8:8)

표면에는 네 줄로 열두 개의 보석을 물렸다(10)

 

이 가슴받이는 노끈 꼬듯 만든 두 금 사슬로 에봇의 두 어깨걸이 앞쪽에 매어 늘어지게 하고(15, 18)

에봇과 겹치는 양쪽 안깃과 에봇의 양쪽 옆구리 부분인 허리띠 바로 위를

자줏빛 털실로 꼰 줄로 에봇 띠보다 조금 위쪽에 옭아 매두어

가슴받이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19-21)

에봇은 예배복이었고 가슴받이는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되었다.

 

네 줄로 물린 열두 개의 보석은

첫째 줄에는 홍옥수(홍보석, 홍옥)와 황옥과 취옥(녹주옥, 녹주석)을,

둘째 줄에는 홍수정(석류석)과 청옥(남보석)과 백수정(금강석)을,

셋째 줄에는 풍신자석(호박)과 마노(백마노)와 자수정을,

넷째 줄에는 감람석과 얼룩마노(호마노)와 벽옥을 물렸다.(10-13)

보석은 모두 금테를 박았고 인장반지를 새기듯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각각 하나씩 새겨 넣었다(14)

 

이러한 열두 개의 보석은

에덴동산에 있던 여러 보석과 대체로 같은데( 28:13)

이는 인간이 아직 죄에 물들지 않았던 때에 에덴동산에서 취했던 보석을

열두 지파의 표상으로 붙임으로써

제사장이 열두 지파의 대행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속죄를 하나님 앞에 중보함을 나타내었다.

 

또한 제사장이 전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듯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의 중보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이름은 예수의 마음에 새겨져 하나님 앞에 드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흠과 실패를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입장에 주목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귀한 것이고,

갖가지 보석처럼 하나님의 빛에 의해 반짝이는 것이다.

 

그 보석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열두 지파가 한 틀에 새겨지지만 그것이 몰개성하지 않고 다양하다.

여러 다른 보석들이 규정된 틀 속에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개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지나친 다양함으로 공동체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보석에는 크든 작든 지파의 이름이 한 가지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죄나 실패가 어떠한 것이든, 그 징계나 벌이 어떠한 것이든,

아무것도 그들의 이름을 그 신성한 장소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반목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일치로 그곳에 있었다.

우리 교회가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가슴받이 작은 주머니에는 '우림과 둠밈'(빛과 완전)이 들어 있었다.( 28:30)

그들은 당시 흔히 알려져 있는 보석이나 돌이었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제비 뽑는 도구로 하나님 앞에서 결정할 때 사용되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우림은 부정, 둠밈은 긍정을 의미했으리라 한다.

가슴받이가 판결(심판) 흉패'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27:21).

일치와 다양함 속에서 하나님만이 답이다.

 

우리의 중보가 되어 주신 주님,

주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도 세상과 죄인들 앞에서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의 제사장으로 반목하는 세상 앞에 당당히 서게 하옵소서. 

 


 

우림과 둠밈은 자루모양으로 만들어진 흉패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은 항상 흉패와 함께 가슴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흉패에 12보석들이 있듯이 우림과 둠밈도 흉패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우림 =  기본 어근은 <히, 오르='빛나다'>(사역동사 '빛나게 하다') (문자적으로, 또 은유적으로) :- 새벽, 영광스러운, 밝히다, (밝다, 밝히다, 비추다, 비친, 밝혀진), 불붙이다, 빛나다에서 유래하여, 빛나는 것들이 모여서 복수가 되어 <히,우림 = 빛들>로 복수형이 되어졌습니다.

 

둠밈 = <히,투밈='완전>은 복수형임', '온전함'; 상징적으로 '번영'; 보통 (도덕적으로) '무죄':- 전부, 흠 없음, 완전함(한),   기본 어근 <히,타맘='완성하다>에서 유래' 좋거나 나쁜 의미에서,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타동사로나 자동사로(다음과 같이 사용됨):- 완수하다, 그치다, 완전히【지나가다】, 소모하다, 이루었다, 끝나다(그만두다), 실패하다, 충분하다, 없어지다, ×다 있다, 완전하다, 소비하다, 총계하다, 정직

 

흉패 = 기본 어근 '내포하다', 또는 '번쩍이다 ,

 

아마 (우림과 둠밈을 담은) '주머니', 또는(보석들이 박혀있는 것과 같이) '부요함', 대제사장의 '목에  거는 것'으로만 사용됨 :- 흉패

 

우림과 둠밈은 복수형으로 빛들과 완전한, 흉패는 내포하다, 번쩍이다로 그 해석이 되어져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보여 주는 글을 사용하여 그 말씀을 전달하게 되면 이렇게 말을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흉패를 두어서 흉패속에 우밈과 둠밈을 넣는 것으로요,

 

그런데 히브리어의 뜻을 살펴보면 우림은 기본 어근인 오르(빛나다)의뜻을 가지고 있는 복수형으로 빛들이(우림)어져 있음으로,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의 말씀은 각 사람의 내면의 의식속에 들어와서 그 말씀이 불꽃으로 되살아나서 마음의 밭을 태우게 될때는 옛 구습의 사건들이 빛나는 것들로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빛들의 말씀이 뭉쳐지면 내면의 의식은 새롭게 만들어져서 그것이 완성(둠밈)에 이를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



출 28:30-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 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
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찌니라-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의 에봇 위에 겹쳐 입은 겉옷인 휼패 주머니에는 반드시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보석을 넣었으며 우림은 빛이라는 뜻으로서 태초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신 예수님의 심령 속에서 나오는 즉 하늘로서 내려주시는 영과 생명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둠밈은 완전케 함이라는 뜻으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영과 생명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성령의 증거로 확증해서 완전케 해준다는 뜻으로서 그 영이 제자들에게 임하여 하신 일의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신 것인데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 제자들의 속에 획증해주시므로 완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제도에 충실했으므로 대제사장 직분을 승계한 사람이라는 표시로 반드시 대제사장의 옷과 우림과 둠밈이라는 보석을 소지해야 했는데 속세에서 어떤 제국의 왕이라는 증명으로 어인을 소지해
야 하며 대관식 때는 반드시 선왕이 사용했던 어인함을 모후나 태후가 간수했다가 문무대신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계해 주어서 이어지는 왕통이 정통임을 증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민 27:16-23-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우림과 둠밈의 보석은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 사용했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하여 사용했으며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울 때 이스라엘 앞에서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정통성 있는 후계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아 사역의 위임이 정통성을 인정받게 하기 위해서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런 율례의 전통에 따라 먼 후일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모은 후에 사울이 제비뽑히게 하였던 것입니다(삼상 10:17-27).

물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신앙적인 심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중범자를 색출할 때도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에 따라 제비를 뽑아 극형에 처했는데 아간의 범죄를 사실하여 공개로 재판할 때 여호수아가 우림
과 둠밈에 의한 판결법을 사용했으니 이는 모든 백성들에게 범죄의 엄중함을 주지시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수 7:14-21).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은 회중읕 대표하는 인도 직분자를 세울 때 하느님의 권위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공표하는 수단이었으며 모든 죄인들의 모든 범죄사실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때도 진리대로 판단하
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예표가 됩니다(롬 2:2-16).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
 
 

우림과 둠빔(URIM AND THUMMIM)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쓰이던 제비 (LOT)같은 도구로서, 문자적으로 '우림'(URIM)은 '빛을 발하다'라는 뜻이고, '둠빔'(THUMMIM)은 '완전하다', '바르다'을 뜻한다. 여기서 우림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장방형의 세마포를 두 겹으로 짜 맞추어 가로, 세로 22.5CM가 되게 만든 주머니로서, 그것의 표면에는 세로 네 줄로 이스라엘의 12지파 이름을 새긴 보석이 끼워져 있고, 그 가운데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두었슴.)사이에 넣은 일종의 제비(LOT)를 통해 "저주하다"는 뜻과 연결시켜 "부정적인 대답"으로 사용되었으며, 둠밈은 "완전케되다"라는 뜻과 연결시켜 "긍정적인 대답"으로 사용되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출애굽기 28장 30절).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한 판결을 하고자 할 때에는 이 우림과 둠밈이 박혀 있는 '판결 흉패'를 입은 제사장이 반드시 동석해 있어야 했다(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민수기 27장 21절). 이 말씀은 가나안 점령을 위해 모세의 후계자로 선택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지도자 임을 확인 시켜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委托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민수기 27장 18-20절)



1 . 우림과 둠밈이란?

* 히브리어로 우림(Urim)은 빛(lights)을, 그리고 둠밈(Thummim)은 완전함(Perfections)을 의미합니다.
* 우림과 둠밈을 어떠한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흉패에 넣으라고 지시하지만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출28:30)
* 우림과 둠밈은 자루모양으로 만들어진 흉패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은 항상 흉패와 함께 가슴에 있었습니다.
* 그러므로 흉패에 12보석들이 있듯이 우림과 둠밈도 흉패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2. 우림과 둠밈의 용도

우림과 둠밈은 흉패 안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흉패와 함께 항상 가슴에 두었습니다.(출28:3) 이러한 우림과 둠밈은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흉패를 성경은 판결흉패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름은 우림과 둠밈의 기능 또는 용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사용된 성경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7: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앞두고 그에게 어떻게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백성을 인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지시합니다. 그 때 사용하는 것이 우림의 판결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의도를 판단하는 것이 우림의 역할입니다.

* 사무엘상 28:5-6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 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무엘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영적인 공항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곡창지대이며 전략적 요충지인 이즈르엘 평원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 광경을 바라본 사울왕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찾았습니다. 사무엘 상 28장을 통해볼 때 우림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무엘상 30:7-8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좇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좇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아멜렉 사람들이 남방과 시글락을 치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 했습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고 아멜렉 사람들을 뒤쫓기 위해 에봇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여기에서 에봇을 가져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은 에봇에 있는 판결흉패를 이용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상 성경의 예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판결흉패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으로 사용된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이 모든 판결을 못하도록 하는 방어책이며 하나님의 판단법입니다. 리더는 자의대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오늘날 리더에게 허락한 성경을 통해서 밝은 영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 내리는 리더의 판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난처하게 만들며 성도들의 인생을 파멸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리더에게 우림과 둠밈은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3. 우림과 둠밈의 사용방법

우림과 둠밈을 사용한 예는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림과 둠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림은 빛(light)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둠밈은 완전(perfection)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은 빛과 완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성막으로 성경을 말한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1) 우림이면 둠밈이고 우림이 아니면 둠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판결 흉패를 가지고 물었을 때 우림(빛)이 나오면 둠밈(완전)이고 빛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판결하였다고 전하여 지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만든 영화 "다윗 대왕"에서 보면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갈 때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8명의 아들에게 하나 하나 우림과 둠밈을 대봅니다. 다윗의 형 7명에게 우림과 둠밈을 댔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댔을 때 빛이 환하게 되었습니다.
리더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이란 옳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빛을 찾아내어 판단을 했을 때 그 판단이 광명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을 구분하지 못하는 리더라면 진정한 리더가 아닙니다. 빛을 어둠으로 어둠을 빛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는 사람들을 함정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2) 우림은 흰 돌이고 둠밈은 검은 돌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볼 때에는 언제나 긍정과 부정의 양자택일 대답이 나오게 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가야 합니까? 물러서야 합니까?’라고 물으며 판결흉패에서 돌을 한 개만 꺼냅니다. 우림이 나오면 긍정이고 둠밈이 나오면 부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겠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을 해 놓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의도를 하나님께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견을 중시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3) 우림과 둠밈은 모두 넓적한 돌로서 긍정과 부정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앞면은 긍정이고 뒷면은 부정입니다. 하나님께 물은 후에 양 손을 넣어 우림과 둠밈을 집어내어 펴 봅니다. 양쪽 모두 긍정이면 긍정입니다. 양쪽 모두 부정이면 부정입니다. 그러나 양쪽이 서로 다르면 보류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은 말씀 한 번 보고 기도 한 번 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판단일수록 수없이 말씀에 비추어 보고 하나님께 물어야합니다. 하나님이 긍정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4) 히브리어 문자는 모두 22자입니다.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흉패의 12보석에 12 지파 이름을 새기는데 모두 72글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흉패의 72글자 가운데 중복되는 글자를 제외하면 오직 18개의 자음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불완전입니다. 4글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둠밈은 완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둠밈에 빠진 4글자를 적어 넣음으로 완전한 22자가 됩니다.

우림은 빛을 내는 본체였습니다. 하나님께 판결을 물을 때 둠밈은 꺼내어 놓습니다. 모두 13개의 보석이 됩니다. 우림(빛)은 흉패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은 글자에 빛을 주셨습니다. 빛나는 글자가 자꾸만 바뀝니다. 대제사장은 글자를 불이 켜지는 순서대로 적어 놓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판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리더

위에서 우리는 우림과 둠밈의 모양이나 사용방법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림과 둠밈의 용도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용도를 통해서 이것을 디자인하신 의도하심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림과 둠밈을 흉패에 넣어 가슴에 품도록 디자인 하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리더는 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판결흉패에 대한 오해의 소지에 대하여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흉패를 우리는 판결흉패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NIV성경에서는 결정을 위한 흉패(breastpiece for making decision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판결흉패나 결정하는 흉패로 번역할 때 이것을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판결" 또는 "결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무엇을 확정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즉 대제사장이 결정하고 판결하는 "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판결흉패는 점을 친다든가 요행을 바라거나 50%로의 확률 게임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하거나 뽑기를 통해서 결정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림과 둠밈을 주신 것은 대제사장 또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무엇을 결정하고 결단하도록 어떤 결정권이나 권위를 주기위해서도 아니며 우연이나 요행에 맡기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림과 둠밈을 주신 목적은
1)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키 위한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2).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개인의 인간적인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의 뜻이 배제됩니다. 우림과 둠밈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으면 대제사장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림과 둠밈을 디자인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철저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철저한 신본주의적 삶이 요구되는 것이 크리스천 리더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일반 리더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문제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며 준비된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 가장 먼저 취할 행동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따라 결단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리더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앞에서 크리스천 리더는 먼저 무엇이며 그 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면 데이터를 가지고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리더보다 훨씬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 리더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책임 맡은 사람입니다. 언제나 리더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리더를 크게 쓰시든지 작게 쓰시든지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리더가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고 모든 판단과 결정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그런 리더에게 하나님은 큰일을 맡기시고 위대한 사역을 이루실 것입니다. 리더는 우림과 둠밈의 흉패를 가슴에 품고 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론}***
나의 삶에 적용될 말씀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림과 둠밈 (Urim and Thummim)

 

 

 

 

우림과 둠밈 (Urim and Thummim)은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생겨서 여호와의 대답이 필요할 때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데 사용한 물품들입니다.

 

레위기 8:8에 기록되어 있듯이, 모세는 가슴받이를 아론에게 달아 준 뒤에 가슴받이 안에 우림과 둠밈을 넣었두었습니다. 여기에서 “안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가 “위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동일한 단어가 출 25:16에서는 두 돌판을 계약의 궤 안에 두는 것에 관해 말할 때 사용됩니다. (출 31:18)

 

어떤 사람들은 우림과 둠밈이 가슴받이에 붙어 있는 12개의 보석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점이, 제사장 취임 의식에서 12개의 보석을 꿰매 붙인 완성된 가슴받이를 아론에게 달아 주고, 그다음에 우림과 둠밈을 그 안에 넣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또한 출 28:9, 12, 30을 비교해 보면 우림과 둠밈이 대제사장의 에봇의 어깨받이에 붙어 있던 두 개의 줄마노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이론도 사실과 다름이 밝혀집니다. (출 28:9-14) 우림과 둠밈은 그와는 다른 물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사용

 

주목할 만한 점은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올” 때 우림과 둠밈이 그의 가슴 위에 있어야 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아론이 여호와께 문의할 때 지성소 칸의 휘장 앞에 있는 성소에 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아론의 가슴 위에’ 있다는 것은, 두 겹으로 접혀서 주머니 모양을 이룬 가슴받이 안에 우림과 둠밈을 넣어 두었음을 지적하는 듯합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질문, 따라서 나라 전체에 중요한 질문이 생겨서 여호와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어떤 문제에든 따라야 할 올바른 행로에 관해 대제사장에게 답을 주실 것이었습니다.―출 28:30.

 

다윗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려고 아비아달을 불렀습니다. 아비아달은 놉의 제사장들이 살육을 당하고 자신의 아버지도 죽임을 당할 때 도망쳐 나오면서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 왔었습니다. 이 에봇은 대제사장이 사용하던 바로 그 에봇이었을 것입니다.―삼상 22:19, 20; 23:6-15.

 

일종의 제비였을 가능성이 있다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물었던, 성경에 기록된 사례들을 보면, 질문이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는 대답이나 적어도 매우 간략하고 직접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제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경우에는(삼첫 28:6) 우림만 언급되어 있지만, 둠밈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우림과 둠밈이 제비였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모펏의 번역판은 출 28:30에서 그것들을 “신성한 제비”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나에는 “그렇다”는 말이, 하나에는 “아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에는 아무 말도 새겨져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것들을 꺼냈을 때 아무 말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 나오지 않는 한, 제시된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을 것이며, 아무 말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 나왔다면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림과 둠밈이 두 개의 납작한 돌로서 한 면은 흰색이고 다른 면은 검은색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닥에 던졌을 때 둘 다 흰 면이 위로 나오면 “그렇다”를 의미하고, 둘 다 검은 면이면 “아니다”를 의미하며, 흰 면과 검은 면이 하나씩 나오면 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한 경우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것인지에 대해 제사장을 통해 물었을 때, 그는 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 가운데 누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오 이스라엘의 하느님, 둠밈을 주십시오!” 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사울과 요나단이 선택되었고, 그다음에는 그 둘 사이에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 기록에서 “둠밈을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제비뽑기와는 관련이 없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삼상 14:36-42.

 

왕국과 제사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다

 

아론계 제사직은 신명기 33:8-10에 언급되어 있는데, “당신의 둠밈과 당신의 우림은 당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속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당신[여호와]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속해 있다고 한 것은, 아마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해서 증명된 레위 지파(아론계 제사직이 이 지파에서 나왔음)의 충성심을 암시하는 말일 것입니다.―출 32:25-2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우시게도 우림과 둠밈을 마련해 주셨고 그것들을 대제사장의 손에 두셨습니다. 이 마련은 왕이 제사직에 상당히 의존하게 만들어서, 너무 많은 권력이 왕의 손에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왕권과 제사직 사이에 협조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민 27:18-21)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리고 예언자들과 꿈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꿈은 특별한 경우에 사용된 듯하지만, 우림과 둠밈을 가진 대제사장은 언제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유다왕국이 멸망됨으로 사용이 중단되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우림과 둠밈의 사용은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왕 휘하의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황폐되고 그 성전이 파괴된 기원전 607년에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소타 48b) 이러한 견해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그 물품들에 관해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지지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제사장 혈통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공식 등록부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은, 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일어설 때까지는 제사직을 위해 공급되는 지극히 거룩한 것들을 먹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그 이후로 성서에는 이 신성한 물품들에 관한 언급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에스라 2:61-63; 느혜미아 7:63-65.

 

                         우림과 둠밈(출애3기 28 : 30)

   너는 우림과 등임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찌니라

 우림과 둠밈

              우림과 둠밈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신비는 우림과 둠밈입니다. 신비중 에 신비요 비밀중에 비밀입니다. 아직까지 우림과 둠밈의 신 비를 속시 원하게 해결하여 준 성서학자는 없습니다. 다만 우 림이라는 말은 "빛"이라는 뜻이고 둠밈이라는 말은 "완전"이 라는 뜻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책을 읽고, 영 화를 보고, 정리하여 본 것은 다음과 같은 수준일 뿐입니다.

1. 영화

  지난번 10기 성막공부 때 한 집사님이 '다윗대왕'이라는 비디오를 보라고 원하여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그 영화를 보았습 니다. 이스라엘에서 만든 영화인데 사무엘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을 고르라고 사무 엘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제외한 7아들들을 정결케한 다음에 사무엘 앞으로 나오게 하였습니 다. 그러나 우림과 둠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네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새는 말째가 있는데 양을 지키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단(삼상 16:11)‥‥다윗을 사무엘엘 앞으로 데리고 왔을 때 사무엘은 우림과 둠밈을 다윗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찬란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원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적 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이스라엘에서 고증을 거쳤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위트리스의 견해

  위트리스 리는 대제사장에 대하여 집중 연구한 분입니다.

그는 성 경적으로는 도저히 우림과 둠밈을 풀 수가 없었습니 다. 그래서 유대인 정통 랍비를 만나 보았습니다. 의외에도 그는 우림과 둠밈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림과 둠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아주 값진 보석입니다. 우림은 "빛"이라는 말이고 둠밈은 "완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두 보석은 완전한 빛을 내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 합리다.

   그리스도의 빛이 있어야 받아서 빛을 내는 것 뿐입니다. 달이 빛을 발하고 있지만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로부 터 빛을 받아서 빛을 내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 도 없는 우림과 둠밈은 쓸모없는 보석일 뿐입니다. 완전한 빛 을 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둠밈에는 4개의 히브리어 글자가 새기어져 있습니다. 히브 리어 글자는 모두 22자입니다. 그런데 12보석 위에 새겨진 12지파 이름을 쓸 때에는 18글자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글자가 부족한 데 이 부족한 4글자를 둠밈 보석에 적었습니다.

   만일 이 4글자가 없다면 히브리어는 완전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제사장이 흉패를 입고 성소에 들어 가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하나님은 글자 한자 한자씩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그 때 제사장은 그 글자를 차례로 적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 의 지시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었 습니다.

  이것이 위트리스 리가 만난 정통 이스라엘 랍비의 설명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증거가 없기에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 러나 성경으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대제사장 이 이 옷을 입고 들어 가기도 하고 나오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여졌다는 것만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자기들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판결 흉패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사울의 이야기 가운데 우림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 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습니다. 사울은 어떤 모양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 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 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 로 가서 고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삼상28:6-7) 우림으로도 응답이 없음은 우림은 빛인데 빛을 발하지 아니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사울에게는 제 구실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사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경건한 자 안에서만이 제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기직전에 레위를 축복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신 33:8)

   그래서 사울에게는 빛을 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이같은 근거로 위트리스 리는 우림과 둠밈은 빛이 발하여 완전하게 되는 판결 흥패라고 보고 있습니다.

  3. Charles W․Slemming의 견해

 찰스 슬레밍은 성막학 교수입니다. 특히 그는 대제사장의 옷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책 한권을 썼습니다.

그는 우림과 둠밈에 대하여 한 분야를 썼습니다. 슬레밍은 주 장하기를 우림과 둠밈은 횐 돌과 검은 돌이었다고 했습니다.

검은 돌은 부정을 나타내고, 횐 돌은 긍정을 나타냈습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횐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7)

   여기에 횐 돌도 이 돌이 아니었을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살인 죄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때에는 검은 모자를 쓰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죄수들에게 유죄 판결 을 내릴 때에는 검은 돌을 주고 무죄 판결을 내릴 매에는 횐 돌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중요한 보직의 사람을 뽑을 때는 가방 속에 한 개 의 흰 돌파 입후보자 수 만큼의 돌이 되도록 검은 돌을 넣었 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며 하나씩 집었습니다. 그래서 횐 돌이 집힌 사람이 당선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이 횐 돌과 검은 돌이 사용된 것은 흉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냐고 슬레밍은 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다윗의 군사가 많이 차출된 곳이 시글락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을 하다가 시글락에 돌아 왔더니 아말렉 군대들이 그곳을 침범하여 여자들과 아이들을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성은 다 불질러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엉엉 울었습니다.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잡혀 갔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쳐들어가야 할지 안 쳐들어가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 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 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삼상30:7-8)  응답을 받은 다윗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을 따라 가야 할지를 물을 때 에봇에서 두 돌 중에 하나를 꺼내는 데 흰 돌이 나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결이요 하나님의 지시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죽기 바로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안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세의 후계자로 삼으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백성들 앞에서 안수하기 전에 우림으로 판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

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27:21)

   그래서 엘르아살은 우림의 판결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흰 돌이 뽑혔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레밍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세가지 이론은 그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제하듯이 우림과 둠밈은 성경에서 최고의 신비에 속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성경에 합당한지는 각자 영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결론 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요셉 파커(Joseph Parker)박사의 견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우림과 둠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알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항상 빛과 완벽함 속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 주변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 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우림과 둠밈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다. 이것들을 마음에 새겨 두라. 그리고 매우 놀랍고도 다양한 표현과 교리 와 찬송과 영감과 모든 교육이 들어 있는 신구약성경에 정통하라.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이르는 곧은 길을 잃어  버리고 헤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는 엔들에 신접한 여인이나 마법사 또는 마술쟁이를 찾아 가지도 않으며 금지된 장소에서 질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에 우리의 전 생애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함께 읽혀져야 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다. 만일 이들이 분리되면 이들은 통일성과 음악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항상 우리와 함께 거하도록 하여야 한다. 영감으로 깨달은 말씀은 우리의 생애에 보탬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방황한다 할지라도 이는 빛이 부족한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좌우명을 "율법을 준수하고 성경의 말씀을 지키자"라고 정하자. 성경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영감과 섭리로, 우리의 생에 받아 들일만큼 가치있는 것이 못 된다. )

우림과 둠빔(출28:30)

O 삼상16:11 다웟대왕 영화 비디오에서 이새의 7아들을 성결케하고 이새 8덟째인 아들인      다웟을 볼 때 우림과 둠밈을 앞으로 내밀었다.

O 삼상28:6-7 사울왕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안되어 앤돌의 신접한여인을 데리     고오라고 했다. (타락한 사울)

O (신33:8)주의 우림과 둠밈이 주에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판결의 생활을 날마다 하라.

O (삼상30:7-8)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멜렉이 쳐들어와 자녀들과 부인들을 사로 잡아갔을 때 우림과 둠밈을 사용함)

O (민27:21)제사장 엘르아살이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할 때 그리고      안수할 때 사용함.

O 우림과 둠밈은 빛을 내는 보석 -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빛이 있어야 우림과 둠밈의 역할이 나타난다.

   우림과 둠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확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빛과 완전한 속에서 하나님 뜻과 목적을 나타냈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구약성서와 신약성경입니다,

 빛이 부족하면 어둡습니다,

O 경건-생활이다           경외-하나님께 대한 태도이다.

  경건의 비밀 - 예수 그리스도(딤전3:16)

O 경건의 삵-(눅10:25-37) - 선한 사마리아인은 경건한 사람이다.(딤후3:5)

  제사장.레위인-경건하지 못했다    

(※)(시32:6)-경건해야 주를 만남.홍수가 와도 아전함(꼭 심판면함)

구약에는 제사장의 흉패속 즉 제사장의 가슴속에 우림과 둠밈을 두어서 신비한 비밀을 하나님께 물러 보았으나 신약에는 우림과 둠밈은 성도의 마음속인 경겅한 생활속에서 나타난다.

         성막론(우림과 둠밈)

 1.우림과 둠밈(출28:30)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한 것은 우림과 둠밈입니다. 신비중에 신비요 비밀중에 비밀입니다

아직까지도 이부분은 확실하게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림은 “빛”이요 둠밈은“완전” 이라는 뜻입니다. 우림과 둠밈의 사용한 예는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중에서 이스라엘왕을 뽑아 기름을 부으라고 하실때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밖에 없습니다.(삼상16:1~13) 우림과 둠밈은 아주 값진 보석입니다. 우림은 “빛”이고 둠밈은 “완전”이라는 뜻입니다.그래서 이 두 보석은 완전한 빛을 내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있어야지 받아서 빛을 내는 것입니다. 또는 이것은 검은 돌과 흰 돌로 되 제비 뽑기 라고도 합니다. 우림과 둠밈은 경건한 자에게만 제구실을 합니다.(신33:8)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왕에게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삼상28:3~7)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전쟁을 하다가 돌아와 보니 아말렉의 군사들이 쳐들어와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물었습니다.(삼상30:1~15) 또 모세가 죽기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후계자로 삼으라고 할 때  우림으로 판결했습니다.(민27:12~23)

<우림과 둠밈의 의미>

1.신약성경과 구약성경--구약은 예언이요 신약은 성취이다.

2.말씀과 성령--말씀은 그리스도요 성령은 증거자 이십니다.

3.그리스도의 완전--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해답입니다.

 

 

 



요절: 출애굽기 28:30




대제사장의 의복 중 가슴 부위에 12개의 보석이 있고, 각
보석마다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판결의 흉패라고 불리는 이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넣어 두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석류인지 아니면 모양은 어떠한지, 어떻게 제작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림이란 말은 '빛'을
뜻하는 '우르'의 복수로 '빛들'이란 말입니다. '둠밈'은 '온전함'을
뜻하는 톰의 복수형으로 '완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를 '빛과 공의'라고 번역했는데,
현대 대부분의 번역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우림과
둠밈'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음역인데 우리
성경에서도 동일합니다. 이 물건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의해 비추어진다는 의미를 지닌 모든 인간사의 결정
도구였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시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결정해야 하며 이러한 결정이야말로 옳은
판단이라는 점입니다. 우림의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추어 주시는 계시라는 것으로 바로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빛임을 나타냅니다. 우림을 통해 주님의
뜻이 빛으로 계시되었습니다. 둠밈 역시 불완전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여 판결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를
나타내는데 진리 한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우림과 둠밈”이란 말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빛 가운데서 완전한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진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성경에 기록된 고대의 숱한 의문점들
가운데 하나가 우림과 둠밈의 정체입니다 고고학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어떠한 방식에 의해
쓰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매끈한 돌이나 혹은 금속으로 만든 주사위 모양 같았던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여러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도는 명확합니다.
대제사장을 통해서 뜻을 공개적으로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들은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어져 보관되다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 지을 때에 제비 뽑는 형식으로 뽑아 문제를 판결 짓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할 때
물으면 우림은 빛을 발하며 응답을 해 주었는데, 오늘날
만화 영화에서 마법의 구슬에게 무엇을 물으면 답을 주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만화나 공상 영화는 실제로 성경에 있던
역사적 사실이나 예언적 사실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림과
둠밈은 마법의 구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진정한 판결의 흉패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들어가야
가슴에 있는 12개의 흉패가 판결의 흉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우림을 통해
하나님 앞에 뜻을 구하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우림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주]께
여쭈었으나 [주]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대언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삼상28:6). 여기서 구약의
계시 방법이 잘 나옵니다. “꿈, 우림, 대언자” 이 셋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꿈은 개인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림은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판결할 때 주님이 주시는
방법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면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우림과 둠밈이 흑과 백의 돌로
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판결을 내릴
때에 이 돌로 제비를 뽑아 결정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좀 떨어집니다. 아무 돌이나 집으면 50%의
확률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랬다면 사울은 우림으로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흉패에는 12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으로 된 판결의 흉패에 새겨진 지파별
이름이 있는데,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문의할 때에, 이
보석에 새겨진 알파벳이 빛을 내면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계시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계시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글자로 계시된 것이나 다름없고 명확합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물었을 때 우림에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빛이 비치지도 않았다면 사울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중요한 판결이 있을 때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는 흉패를 입고 그곳에 참석하여 가부(可否)를 제비
뽑는 형식으로 뽑아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뜻인 '빛과 완전'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상통하는데 두
단어의 첫 자가 각각 히브리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자라는 점은 하나님이 자신을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계 1:8,17;21:6;22:13)이라고 계시하신 사실과 관련해 볼 때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계시를
주신다는 점에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계적인 방법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우림과 둠밈의
사용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출애굽 초기 역사와
이스라엘 왕조의 기틀이 세워질 때는 대언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 전역에 말씀을 받은
대언자들의 활동이 증대됨에 따라 점차 우림과 둠밈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주의 대언자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또한 율법 교육이
시행됨으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교육을 받은
장로들에 의해서 판단하면 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행하면 우리는 표적이나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신약의
교회 시대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우림과 둠밈에 해당하는 성령과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 만약 저와 여러분이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다면 그다지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목사를 초빙하는데 제비 뽑기로 결정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를 옮기거나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으로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우림과 둠밈’이 있어야 할 위치는
가슴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상
가슴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성도는 옳고 그름의 이상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많은 말씀은 법률적으로,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누가
나의 오른 뺨을 때리면 못 때리게 하든지, 맞서 싸우든지, 왜
때리느냐고 따지든지, 손해 배상을 청구하든지, 사과를
받아내든지 등이 합리적이고 법적으로도 옳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왼뺨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무너뜨리는 말씀 같습니다. 이성적인
처신이 아닙니다. 이런 판단은 머리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리는 판단입니다. 크리스천은 두 종류의 생활
원칙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읽은 책 내용을 기억합니다.
중국의 워치만 니 형제가 자신의 책에 소개한 내용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원칙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나는 벼 농사를 하고 있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은 산
중턱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논은 산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더울 때 낮에 논에 물을 대고 밤에는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논의 사람은 그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그들의 논둑에 고랑을 파서 자기 논에 물을 다 빼
가버렸습니다. 양수기로 겨우 퍼 올려 논에 물을 대면 아래
논 주인이 교묘하게 물을 빼 가버리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래 논 주인은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자기가 했다고 시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따지거나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각서를
받거나 경찰에 고발을 하거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옳고 그름,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판단입니다. 세상과 다른 성도들의 삶의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참고 용서했을 때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은혜가 넘치고 승리가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날마다 물을 채우고 남이 물을 훔쳐간 것을 허락하면서도
마음에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사역자에게 와서 이
일에 대해서 상담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 법정에
고소하지도 않았고, 남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동네에서 그
사람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 마음 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 방면에
체험이 많았던 사역자는 “그렇게 해서는 부족합니다.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형제님은 가서 형제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형제의 논에 물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나서 속에 평강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형제는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아래 논에 먼저 물을 채워 준 다음
자신의 논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의 논에
물을 채우는 반나절 동안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차 올랐습니다. 아래 논의 사람이 물을 훔치든
훔치지 않든 자신의 마음 속이 아주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 아래 논의 주인이 와서 자신이
지금까지 물을 훔쳤다며 잘못을 고백하고, “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참 놀랍습니다. 나도 가서 복음을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원칙을 넘어서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것을 은밀히 훔쳐가는 사람을 그냥 두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아닙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내하고 참는 일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마음 속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선악으로
말한다고 해도 이들은 매우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타당하고 족하면 옳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만으로 부족하고 생명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결코 세상 법, 세상의
이치, 옳고 그름이 잣대가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충족된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우림과 둠밈이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머리가 아닌 가슴이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데이빗 베런(David Baron)의 저서 「고대의
성경과 현대의 유대인(The Ancient Scriptures and Modern Jew)」에는
우림과 둠밈에 관한 글을 담고 있는 부록이 있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흉패 위에 있는 열 두 이름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스물 두 자 가운데 열여덟 자를 포함하였습니다.
나머지 네 자는 둠밈이라 부르는 부분품에 부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둠밈은 [완전케 하는 자들], 또는 [온전케
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둠밈이라 부르는 추가적인
부분품을 지닌 흉패 위에서 모두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을 볼 수 있습니다. 타자기 키위에 있는 스물 여섯
자의 영어 알파벳이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이나 단락을
형성하는 데 사용될 수 있듯이 흉패와 둠밈 위에 있는 스물
두 자의 히브리어 알파벳은 단어들이나 문장들을 판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글에 의하면 우림은
열 두 보석 아래 있는 흉패 안으로 삽입된 조명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우림이라는 단어는 빛을 뜻합니다. 데이빗
베런의 책에 있는 글은 우림이 연소를 위한 기름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과 이 기름을 태우는 데 사용된 불이
제단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글을 쓴 권위 있는 그
히브리 학자는 또한 흉패 위에 있는 각 보석 조각을 비추기
위하여 각 보석마다 하나씩, 열 두개의 조명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 투명한 보석들은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흉패에
더해질 때 가슴에 있는 보석들은 판결 흉패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없다면 가슴의 12개의 보석은
단지 아름다운 기념품이요 장식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모세를 통하여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방법인
직접적인 말씀하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입은
흉패 위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책무를 주고 네 존귀 중 얼마를 그에게 주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에 따라 [주] 앞에서 조언을 구할 것이며
그와 및 그와 함께한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에 따라 나가고 들어올 것이니라.] (민27:19~21).
하나님은 “우림의 판결에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림을 통해 판결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움직임에 관한 인도가 필요할 때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는 대제사장에게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조언을 주셨습니다.


성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는 아이 성에서 패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에서 패배
당하였습니다(수7장). 어떻게 아간의 죄가 발견되었습니까?
열 두 지파의 각 대표가 성막으로 와서 흉패를 착용하고
있던 대제사장 앞에 섰습니다. 갑자기 흉패 위의 열 두 조각
가운데 하나가 어두워졌고, 그것은 유다 지파의
보석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뽑혔습니다. 여호수아
7장 16절부터 18절은,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의 가족을 나아오게 하여 세라 족속의 가족을
뽑고 세라 족속의 가족을 각각 남자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집안을 각각 남자대로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에 속한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뽑혔더라.] (수7:16~18)고 말합니다.
흉패 위의 어떤 보석이 어두워짐으로 인해서 결국 가족과 그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흉패는 아간의 이름을
찍어 내는 하늘에 속한 영적 타자기와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


후에 여호수아는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였습니다(수 18:6-10).
우림과 둠밈을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삿1:1-12, 20:18, 27, 민 27:21). 더 나아가
사울 왕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에게 대답하려 하시지 않았습니다(삼상
28:6).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 아들들 중
한 사람이 다윗에게로 도망했으며 그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주님을 따랐습니다. 다윗은 에봇을 가져와
판결의 흉패를 향해 계속해서 주님께 물었고, 주님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후에 느헤미야는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의
출현을 기다렸습니다. [디르사다가 그들에게 말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스2:63).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이들은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없었고,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12개의 보석으로 된 흉패는
우림과 둠밈으로 인해 판결 흉패
불렸는데,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들인 레위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들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그분의 판결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레위에 관하여는
그가 이르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거룩한 자에게
있으리로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자기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녀들을 알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언약을
지켰음이니이다. 그들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가르치고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향을 드리고
온전히 번제 헌물을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신33:8~10).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들은 주의 법도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는 주 앞에 향을 드릴 수 있습니다.
향은 기도와 경배를 일컫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지닌 자는
온전히 번제 헌물을 주의 제단 위에 드립니다. 우림과
둠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판결의
흉패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12가지 보석 즉 열두 지파들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롬8:14).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있는 기록된 말씀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령은 성경의 글자들을 비추어서 우리로 하여금 읽게 해
줍니다. 성경의 해석자는 성령이십니다. 사울이 우림으로
조명을 받고자 했을 때 우림에는 아무런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조명도 없다면 우리는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들입니다. 우리 마음 판에는 주님이 글자를 새겨
두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추천하기
시작하겠느냐? 혹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너희에게
추천하는 서신을 보내거나 너희로부터 추천하는 편지를
받을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는 우리의 서신이니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고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3:1~3).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인데 저자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보석 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야 우림의 조명이 있을 때 글자가 드러나듯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을 때만이
우리가 그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됩니다. 보석들에 글자들이
새겨져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흉패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었듯이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이 그리스도로 새겨져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구속된 백성(자신의 편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니님은 사실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편지로서
우리 존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내용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안에 새겨진 문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3:3). [그것들을 네 손가락에
묶으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7:3). 하나님은 우리
마음 판에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풍성히 기록해 두면 둘수록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환하게
말씀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생각 속에 자신이 법을 기록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 주님은 돌 판에
십계명을 새기셨듯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의 법을
기록하심으로, 새 언약의 일꾼 삼으셨습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 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히10:16).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새겨진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구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3:5, 골로새서1:27, 갈라디아서 4:19절입니다.
이 구절들은 병행해서 보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알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전파의 대상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간증이요, 전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드러내야 합니다. 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우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1:27).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이 말씀에 따르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어린 자녀들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시기까지 산고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실제 문제는 자신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가 너무나 희미하여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
신성, 인격, 능력, 지혜 등이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보여지지 않을 정도라면
문제입니다. 더욱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그리스도로 새겨지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흉패에 놓인 보석들이
불투명하다면, 우림의 조명이 그것들을 비추지만 그것들은
그러한 불투명한 보석들을 통하여 빛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투명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하여 빛날 수 있는 길을 얻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하고, 투명해야 하며,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빛이
우리를 통해 빛나 다른 사람들이 편지, 즉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투명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새겨짐이 없고, 우리 안에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불투명한 보석들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주목해서 보는
사람들이라 해도 우리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편지를 전혀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30절을 보십시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의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주]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 위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아론은 [주]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판결을 항상 자기 가슴 위에
둘지니라.](30). 판결의 흉패는 주님 앞에 기념이었을 뿐만
아니라 판결의 판이었습니다. 우림과 둠밈이 흉패 안으로
더해진 후 그것은 판결 흉패가 되었습니다. 판결은
인도하심이나 안내의 의미보다 말 그대로 판결을 말합니다.
재판, 심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최종 판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규들은 항상 그분의 판결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우리에 대한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날마다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 우리의 육신,
우리의 잘못된 행위, 우리의 본성에 속한 일들은 모두
말씀으로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말씀
앞에서 냉철하게 심판함으로써 우림과 둠밈으로 예표되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출처 : 믿음의 노래 당신은 예수 믿어야 될 사람
글쓴이 : 믿음의 노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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