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 성소의 성물 성막문 1. 성막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막에는 오직 문이 하나 뿐입니다. 성막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새롭고도 산 길이 되셨습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였습니다. 친히 자신의 육신을 둘로 찢으심으로 새롭고도 산 길을 만드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새롭고도 산 길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께서 만드신 길을 만들 수 없습니다.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 성막문의 4가지 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성막문은 흰 베실과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로 짠 세마포 앙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7: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찌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청색은 생명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며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자색은 왕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의 인생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왕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명하신 일에 순종할 뿐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홍색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으며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흰색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고 승리하셨으니 우리 또한 가난과 역경과 고난과 질병의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3. 성막문은 아주 큰 문입니다. 성막문의 길이는 20규빗입니다. 오늘날의 길이로 계산하면 10미터입니다. 동편의 길이가 50규빗이기 때문에 성막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길이의 40%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막문은 통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듯 성막문이 매우 크게 만들어진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아버지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길은 매우 넓고도 쉬운 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 좁은 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가 되는 길은 좁은 길이지만 하나님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은 넓은 길입니다. 4. 성막문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막문은 오직 동쪽에만 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12개의 지파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쉽게 성막에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는 동서남북에 문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동쪽에만 문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해가 동쪽에서 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빛되신 주님을 만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 누구도 예외없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매일같이 지성소에 드나들었던 모세라 할지라도 성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지성소로 가기 위해서는 항상 성막문 → 번제단 → 물두멍 → 진설병 → 정금등대 → 분향단 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순서를 밟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5. 성막문은 문턱이 없습니다. 성막은 맨 땅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문턱이 없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쉽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성막에는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든 백성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여자와 어린아이도 들어갔으며 이방인과 노예까지도 성막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 12:12]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원하는 사람을 가로막는 자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특정한 나라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습니다. 소위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치 종교가 백성을 망치게 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는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습니다. 아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이 있으며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번제단 1.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7:1]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번제단은 길이가 다섯 규빗(2.5미터)이고 넓이가 다섯 규빗(2.5미터)이며 높이는 삼 규빗(1.5미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사해 주변이나 시내 반도에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러한 조각목은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수는 이미 70억을 넘었습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수많은 인간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는 인구는 50억 가까이 됩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수가 50억이나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시체'입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저들은 죽으면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조각목에는 가시가 많습니다. 가시가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늘 불평불만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가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다른 성도에게 상처를 가하며 교회 내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한 조각목은 매우 단단합니다. 이는 세상 환난과 고난을 많이 받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환난과 역경을 통과하는 가운데 우리의 심령이 딱딱히 굳어져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각목은 삐쩍 말라 있습니다. 이것은 바쁜 생활로 심신이 피곤하고 기쁨과 만족이 없는 우리들을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쁩니다.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자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렇듯 바쁜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느끼는 성도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보다는 그저 편하게 집에서 쉬거나 세상에 나가 유흥을 즐기려는 성도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조각목은 상처가 많습니다. 조각목에 있는 가시 때문에 바람이 불면 가지가 흔들려 서로 다른 가지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험난한 세상살이에 이리저리 휩싸이다 보면 자기 자신도 상처를 받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 번제단은 모두 네개의 뿔이 있습니다. "[출 27: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 번제단에 만들어진 뿔은 속죄를 상징합니다. 속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피로 인해 우리의 죄는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님의 흘리신 피의 공로는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원죄를 깨트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주님의 보혈은 그 사람을 원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보혈의 능력은 번제단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의 피는 번제단의 뿔에 발라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발라진 번제단의 뿔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번제단의 뿔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번제단의 뿔을 잡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두려워했을 때 하나님의 성막 안의 번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왕상 1: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3. 번제단의 조각목은 놋으로 싸졌습니다. "[출 27: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연하게 하고 그 단을 놋으로 쌀지며"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번제단이 불에 타지 않았던 것은 놋으로 감싸졌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을 감쌌던 놋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놋으로 감싸져 있지 않으면 조각목은 불에 타고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놋으로 감싸져 있기 때문에 타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각목을 감싼 놋은 모세가 치켜들었던 놋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임을 당하였을 때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은 놋뱀을 보기만 하면 죽임을 면하였습니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의 놋뱀은 곧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모세의 놋뱀처럼 들려져야 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치켜 들려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 나무 위에 메달린 것입니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치켜든 장대의 놋뱀을 바라볼 때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듯이 십자가에 메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누구든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4. 번제단은 놋그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7:4] 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출 27:5]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번제단에는 놋으로 된 그물을 설치했습니다. 이 그물은 번제단의 중간지점에 설치했습니다. 번제단 높이가 3규빗(1.5미터)이니까 1.5규빗(0.75미터)정도쯤에 그물이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번제로 바쳐지는 짐승은 바로 이 그물 위에 놓였고 이곳에서 불로 태워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짐승이 불에 태워져 죽게 되면 남는 것은 재 뿐입니다. 그물은 그러한 재를 걸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제물은 그물 위에 얹혀지듯이 모든 믿는 사람은 그물 위에 얹혀져야 합니다. 그물 위에 얹혀지지 않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할 때 그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그물로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서는 그물이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번제단의 그물에 얹혀질 때에 비로소 내게도 그물이 생겨지는 법입니다. 나를 먼저 그물에 얹히십시오. 그리고는 그렇게 드려지는 진정한 헌신을 통해 얻어진 그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오. 5. 번제단 네 모퉁이 기둥에 고리가 있습니다. "[출 27:4] 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넷을 만들고 [출 27:5] 그물은 단 사면 가장자리 아래 곧 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네 모퉁이 기둥에 놋고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놋고리는 번제단을 옮길 때 사용할 수 있는 채를 연결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놋고리가 없으면 번제단을 이동하기란 매우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놋고리는 믿는 성도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번제단과 운반하는 채를 연결하는 고리가 놋으로 만들어진 것은 우리는 주님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물을 통해 전도되어져 교회에 온 사람은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성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마땅히 성도된 우리는 전도하여 교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맞이하여 저들로 하여금 믿음의 장성한 분량의 성도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6. 번제단에는 채를 통해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출 27:6]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출 27:7]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 번제단에는 네 개의 고리가 모퉁이마다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놋고리에 두 개의 채가 연결되었습니다. 하나의 채는 두 개의 놋고리에 연결되어 제단을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채가 없으면 번제단을 손으로 받쳐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손으로 받쳐 들 때에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주변에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돕는 사람이 없으면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는 그 열의가 식어지고 힘이 빠져서 이내 낙담하거나 더 이상 헌신하지 않게 됩니다. 금식하는 사람을 위해 누군가 함께 해 주거나 몸보신을 위한 죽을 만들어 주는 것은 헌신하는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수고하는 사역자를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것도 돕는 일입니다. 이렇듯 돕는 사람이 많을 때 교회가 부흥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7. 번제단에는 재를 담는 통이 있습니다. "[출 27: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번제단에는 재를 담는 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번제단의 그물 위에서 번제로 드려지는 짐승의 재를 담기 위함입니다. 그물 위에서 태워진 짐승의 재는 그물 밑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번제단은 속이 비어지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출 27:8]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번제단은 단순히 정사면체의 통 안에 놋으로 된 그물이 걸쳐지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물 위의 짐승의 재는 고스란히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바닥에 떨어진 재는 부삽으로 긁어 통에 담아 버렸습니다. 만일 재를 담는 통이 없다면 번제단은 지저분해졌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재를 담는 통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교회가 깨끗해집니다.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교회 청소를 하는 성도는 재를 담는 통과 같은 성도입니다. 이런 헌신적인 성도가 있어야 비로소 교회가 깨끗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8. 번제단에는 부삽이 있습니다. "[출 27: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떨어진 짐승의 재를 긁어 모으는데 부삽이 필요합니다. 만일 부삽이 없으면 재를 긁어 모이기 힘들 것입니다. 재는 교회 부흥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번제단에 재가 많이 쌓이게 되면 불길이 강하게 타오르지 못합니다. 교회에 재가 많으면 오히려 교회 부흥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교회에는 부삽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 부흥을 방해하는 요소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9. 번제단에는 고기 대야가 있습니다. "[출 27: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번제단에는 고기를 담는 대야가 있었습니다. 제물이 되는 짐승은 번제소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곳에서 각이 떠졌습니다. 이렇게 각이 떠진 짐승의 사체를번제단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고기를 담는 대야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의 사체를 번제단까지 운반하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원하는 성도를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 성도에게 헌신하는 방법을 소개하지 않으면 헌신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처음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을 위해 안내자의 역할은 매우 큽니다. 안내자는 일반 성도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성경공부반이나 다른 훈련반에 인도하여서 성도로 하여금 영적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안내자의 몫입니다. 10. 번제단에는 고기 갈고리가 있습니다. "[출 27: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번제소에서 각이 떠진 짐승의 사체는 대야에 담겨져 번제단으로 옮겨졌습니다. 각이 떠진 짐승의 사체는 손으로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게도 상당했겠지만 피묻은 사체여서 표피가 미끄러워 손으로 잡기가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고기 갈고리입니다. 고기 갈고리를 통해 손쉽게 각이 떠진 사체를 번제단 위에 내려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헌신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는 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고기 갈고리는 이처럼 효과적으로 헌신자를 세워주는 지혜와 사랑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신학교를 안내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장로가 되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장로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안내해 줘야 합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장로가 되기 위한 과정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안내자입니다. 또한 안내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헌신자를 대할 때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헌신자에게 깊은 사랑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 번제단에는 불 옮기는 그릇이 있습니다. "[출 27:3]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번제단에는 불을 옮기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이 불은 번제단의 불을 태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1년 365일 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의 불이 항상 지펴져 있어야 했지만 특별히 제물이 바쳐질 때에는 그에 따른 불이 추가로 필요했을 것입니다. 불을 옮기는 그릇은 이렇게 번제단에 항상 피어 있는 불을 제물로 바쳐지는 각이 떠진 사체로 옮길 때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성령의 불은 또 다른 불을 만들어냅니다. 누군가 성령의 불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불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 한 사람의 성령의 불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을 전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불로 가득차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가진 성도가 많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 모든 질병이 치유함을 받고 모든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12. 반드시 제물로 쓰일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행했습니다. "[레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려지는 짐승에게는 반드시 안수가 행해졌습니다. 짐승을 데려온 주인이 직접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했습니다. 이는 짐승이 죽는 것처럼 자신 스스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시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제물을 가져온 당사자의 죄가 고스란히 짐승에게 전가되어 짐승이 죽음으로 인해 당사자의 모든 죄가 사함받는다는 것입니다. 13. 번제소에서 모든 짐승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레 4:29]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소에서 잡을 것이요" 번제물로 바쳐질 짐승은 번제소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번제소는 성막 뜰 안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단 북쪽'에서 짐승을 잡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 1:11]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모든 짐승은 번제소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죽지 않는 짐승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죽어야만 제물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제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지식과 의지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를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가 죽는 것을 자랑했던 것은 그래야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이 덜 죽어서 이리 저리 돌아 다닌다면 아마도 성막뜰은 매우 지저분해지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죽지 못하여서 우리의 혼과 육이 살아 있을 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14. 번제단에 쓰인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불을 사용했습니다. 번제단에 쓰여진 불은 세상의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스러운 불이었습니다. "[레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성령의 불은 성스러운 불입니다. 이 불은 세상의 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불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이여서 우리가 성령의 불을 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세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불이 함부로 취급되거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세상의 불을 가지고서 분향하였을 때 불이 그들을 삼켜 죽고 말았습니다.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 불은 우리 안에 지속합니다. 물론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불이 소멸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는 구절은 영어 NIV 성경에서는 '성령의 불을 소멸하지 말라(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고 번역되었습니다. 번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도록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의 불은 항상 피워져 있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도는 성령의 불이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각 가정도 성령의 불이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교회도 성령의 불이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1년 365일 항상 타올라야 합니다. "[레 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레 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물두멍 1. 물두멍은 물세례를 상징합니다. 번제단이 성령세례를 상징한다면 물두멍은 물세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지성소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제단을 먼저 거쳐야 합니다. 번제단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서약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단도 해야 합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단순히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 헌신을 서약하며 나아가는 단계는 번제단에서 이뤄집니다. 이러한 번제단의 과정은 성령세례의 과정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 순간부터 성령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러한 성령세례는 물세례보다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세례가 성령세례보다 먼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먼저되어야 합니다.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먼저인 것은 결혼하기 전에 먼저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약속한 후에 주변 사람들을 모아놓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물세례는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주님과의 사랑을 확인하고 평생토록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단한 후에 비로소 성도들 앞에 물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이 물두멍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38: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이 놋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죄를 씻게 하는 물두멍을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여인들의 거울은 다소 세상적인 냄새가 납니다. 여인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드려다 보는 것은 영적인 것보다는 세상적인 모습입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거울은 매우 필요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생활필수품인 거울을 하나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물두멍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입니다. 여인들의 이러한 헌신을 통해 물두멍이 만들어졌듯이 물두멍을 통해 모든 세상적인 욕구가 없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인을 매우 하찮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여인은 이방인이나 개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은 여인들의 거울을 통해 거룩한 물두멍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하찮은 사람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못나고 별볼일 없는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두멍의 재료가 되는 놋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에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3. 물두멍에서의 정결의식 "[출 30:19]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성막은 일반 땅과 똑 같았습니다. 성막 뜰이나 회막이나 할 것없이 모두 맨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맨 땅에서 의식을 수행했던 제사장들은 모두 맨 발이었습니다. 한결같이 모두 신을 신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신을 신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제사장들이 이처럼 성막에서 신을 신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노예와도 같은 신분을 지니겠다는 마음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앞에 서 있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성막의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신을 벗었다는 내용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출애굽기 28장의 내용에서 볼 때 대제사장의 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대제사장이 성막에서 신을 신었다면 분명히 성경에서는 신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속옷과 겉옷 뿐만 아니라 심지어 머리에 매는 띠까지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출 28:36]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출 28:37]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이처럼 구체적인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이 유독 신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은 성막에서의 신은 필요없는 것이었으며 제사장들은 모두 맨 발로 직무를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막의 뜰은 번제소가 있었고 번제단 밑에 짐승의 피가 쏟아졌기 때문에 매우 더러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 뜰에서 제사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경우엔 그들의 손과 발이 매우 더러워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제사장들로 하여금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고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손과 발을 씻지 않고 회막에 들어갈 경우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출 30:19]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회막 역시 맨 땅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곳 역시 깨끗한 곳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는 짐승이 죽임을 당하거나 피를 쏟지는 않았습니다. 지성소 휘장 앞에 짐승의 피를 약간 뿌리기는 하였지만 그 정도는 성막의 뜰에 비하면 매우 깨끗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차 있는 지성소 조차도 깨끗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이곳 역시 짐승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일 년에 속죄일 하루만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성소에 비해 깨끗한 곳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깨끗해야 합니다. 육신의 더러움과 마음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여야만 거룩한 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4. 물두멍의 규격이 없는 이유는? 성경은 물두멍의 규격이 어떠한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두멍의 규격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사람의 회개할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많이 필요한 사람은 더 큰 물두멍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할 것이 적은 사람은 작은 물두멍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회개할 것도 다르며 회개하는 정도도 각각 다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원죄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날마다 자범죄를 회개햐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정결해질 수 있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진설병 1. 진설병 제작 방법 (1) 진설병은 성소 오른쪽에 위치했습니다. "[출 26:35] 그 휘장 바깥 북쪽에 상을 놓고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할지며" 진설병상은 정금등대와 마주하게 놓여져야만 했습니다. 진설병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정금등대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소에 예수님과 성령님께 함께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참 경배자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거하시자만 여전히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던 주님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거할 때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주님을 뵙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진설병상과 정금등대와 함께 성소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성물은 분향단입니다.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분향단이 지성소의 휘장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은 성도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분향단을 통해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듯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진설병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5: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진설병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성물처럼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성물을 보면 번제단, 분향단, 언약궤가 있습니다. 또한 성막의 기둥이나 회막의 기둥 역시 모두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진설병의 크기는 길이가 2.5규빗(1.25미터), 넓이 1.5규빗(0.75미터), 높이 1.5규빗(0.75미터)로 만들어졌습니다. (3) 주변에 순금으로 둘러 싸고 테를 만들었습니다. "[출 25:24]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르고 [출 25:25] 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만들어진 진설상은 모두 순금으로 쌌습니다. 이는 언약궤를 순금으로 싼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게 했습니다. 또한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었습니다. 턱을 만든 이유는 물건이 쏟아지지 않도록 막기 위함입니다. 손바닥 넓이만한 턱은 대략 8cm 정도입니다. 이것은 한 규빗의 6분의 1의 길이와도 같습니다.
(4) 금 고리 넷을 만들어 채로 들 수 있게 했습니다. "[출 25:26] 그것을 위하여 금고리 넷을 만들어 네 발위 네 모퉁이에 달되 [출 25:27] 턱 곁에 달라 이는 상 멜 채를 꿸 곳이며 [출 25: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네 개의 모퉁이에 금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금 고리는 모두 턱 곁에 붙도록 했습니다. 이 네 개의 금 고리에 상을 멜 채를 연결하여 채를 통해 진설상을 메도록 했습니다. 이 채 또한 금으로 쌌습니다. 이는 언약궤의 채를 금으로 싼 것과 동일합니다. (5) 진설병은 12개가 준비되었습니다. 진설병은 모두 12개가 올려졌습니다. 12개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수입니다. 이는 곧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날마다 바쳐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진설병은 누룩없는 떡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세상의 정욕이 들어있지 않는 정결과 거룩함으로 만들어지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마땅히 성도는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오직 정결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6) 대접으로 떡을 받치도록 했습니다. "[출 25: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대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접을 통해 진설병이 놓여진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진설병이 두 줄로 각 줄마다 6개의 떡이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대접은 6개씩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레 24: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대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케아라>인데 이는 '큰 접시'나 '대접'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진설병을 받치는 대접이 정금으로 만들어졌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금은 전혀 불순물이 첨가되지 아니한 10% 순수한 정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진설병은 오직 정결하고 거룩하게 올려져야 했기에 하나님은 대접을 정금으로 만들라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정결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7) 숟가락으로 유향을 담았습니다. "[출 25: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진설병상의 부속품 중에는 숟가락이 있었습니다. 이 숟가락은 유향을 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각 줄에 진설된 떡 위에는 숟가락에 유향을 담아서 놓았습니다. 숟가락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숟가락'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카드>입니다. 이것은 숟가락이란 뜻보다는 오히려 '작은 냄비'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작은 스푼이 아니라 작은 공기 그릇정도 되는 크기의 냄비인 셈입니다. 이것을 진설병 위에다가 나란히 올려 놓았습니다. 숟가락에 담겨져 있는 유향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유향을 선사했습니다. 유향은 예수님의 시신과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향은 시체의 썩은 냄새를 없애주는 향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유황이 발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악취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세상의 악취가 없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진설한지 일주일이 지나서 진설병을 먹을 때 진설병 위에 올려져 있는 유향을 한 움큼 집어다가 불에 태웠다고 전해집니다. 제사장들이 태운 유향의 향기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화제로 올려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사장들은 유향을 집어 분향단의 향불에 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향단의 향불에 사용되었던 다섯 가지 향품에는 유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레 24: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포도주를 담는 병이 준비 되었습니다. "[출 25: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또한 진설병의 부속품으로 '병(jar)'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언급된 '병(jar)'은 히브리어로 <케소아>인데 이는 포도주를 드리기 위해 준비해 놓은 '병(jar)'이었습니다. 이 병에 담겨진 포도주는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 병 또한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는 지극히 정결하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9) 전제를 드릴 때 사용되는 잔이 만들어졌습니다. 진설병상에서는 전제 의식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전제 의식에 사용하는 잔이 준비되어져야 했습니다. 이 '잔'의 히브리어 단어는 <메나키아>인데 이는 전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잔을 의미합니다. '전제(Drink Offerning)'은 포도주를 붓는 의식입니다. 전제 의식은 독자적으로 드려지기 보다는 소제나 번제와 같은 제사와 함께 겻들어져 드려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삶을 살겠다는 서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온전히 목숨을 버리셨듯이 우리 또한 주님을 위해 온전히 목숨을 버리겠다는 서약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전제 의식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전제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잔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을 다짐하는 전제의식에 정금으로 만든 잔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가리켜 전제가 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포도열매가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갈아지면서 포도주가 된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위해 자기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 드려지는 포도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2. 진설병의 영적인 의미 (1)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사실은 구약시대 때부터서 보여진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주신 떡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떡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떡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떡되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 떡이 없어 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떡이 없어 죽습니다. 이는 저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을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배부름을 주십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육적인 배부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이 육적인 배고픔보다 더 진한 배고픔이며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은 영원히 죽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취하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2) 진설병은 주님의 살과 피를 취하는 성찬예식입니다. 진설병을 취하는 것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취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주님을 먹고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것은 성찬예식을 의미합니다. 성찬예식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의식은 '세례식'과 '성찬식' 뿐입니다. 이 두 가지 의식이야말로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살과 피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설병에 나아갈 때에 주님의 살과 피를 취하는 성찬의식을 거행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3) 진설병에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설병에서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아뢰야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지 않으면 누구에게 우리의 필요를 아뢰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우리의 간구를 기뻐 받으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먼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간구함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만 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한 다음에 우리의 필요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구하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구하는 것은 믿는 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들에게 간구의 순서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부모에게 좋은 것으로 대접해 드린 후에 비로서 우리의 먹을 것을 취하는 자녀가 되어야 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어떤 효도하는 자녀가 먼저 부모에게 좋은 것을 드리지 아니한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먼저 취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이치입니다.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간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간구한 모든 것이 다 이뤄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의 필요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전심전력을 다해 구하십시오. 필요하면 악이라도 쓰십시오. 큰 소리로 기도해도 좋습니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져야 비로소 사랑하는 자녀를 먹일 수 있고 따뜻한 보금자리를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러한 간구를 원하십니다. 전심전력으로 기도하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대해 걱정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은 더욱 걱정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구하십시오. 그런다음 당신의 가정을 위해 구하십시오. 필요한 재정을 채워달라고 구하십시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악한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테인데 어찌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최선으로 구하였지만 얻지 못한 것은 세상의 정욕대로 쓸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약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길 원한다면 당신은 전심전력으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간구한다고 해서 모두 얻어지고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간구에 권세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주님의 권세이며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권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 가장 강력한 권세자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은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권세보다 더 큰 권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권세로 간구해야 합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주님의 이름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기도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고 선포할 때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님께 간구할 때는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는 문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사용되는 문장은 명령문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자녀에게 병이 걸렸다고 했을 때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도는 이러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자녀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기도는 좀 더 강해져야 합니다. 당신의 기도는 간구하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간구에 선포가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당신이 선포해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사랑하는 자녀의 병은 치유될지어다!" 이러한 선포기도는 단순히 간구하는 기도보다 훨씬 강력한 응답을 얻게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니 자녀 또한 전지전능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녀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당신은 진설병에 나아갈 때마다 당신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미 간구하고 선포한 기도제목을 다 응답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당신이 기도한 내용이 다 이뤄졌음을 믿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기도제목이 다 이뤄졌음을 믿어야 하며 그러한 믿음은 충만한 감사로 변해질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기도제목이 응답받았다고 믿지 않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코 기도제목을 응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심령 안에 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하나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자는 결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4) 진설병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친교입니다.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날에 준비해서 안식일의 시작이 되는 금요일 저녁 때에 12개의 떡을 진설해 놓았습니다. 제사장들은 한 주일이 지난 후에 새로운 떡이 진설되기 전에 그 떡을 먹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일주일이나 지난 떡이 금방 만든 떡처럼 매우 신선하고 따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진설된 떡을 먹도록 명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출애굽을 한 후에 3개월쯤 지났을 때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셨고 하나님은 몇몇 사람을 시내산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포함한 이스라엘 70인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출 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만 하면 금새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는 당신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제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5) 진설병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지켜지며 그 언약은 말씀으로 채워졌습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말씀에 적혀진 대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역사가 당신의 삶에 그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렘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하나님은 말씀은 우리의 영혼육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만족감을 갖게 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십시오.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곧 진설병을 취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설병을 취하는 자는 배부를 것이며 만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6) 진설병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진설병의 히브리어는 <레헴 파님>입니다. <레헴>은 '떡'이란 뜻이고 <파님>은 '얼굴'이란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얼굴떡'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진설병을 1년 365일 두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성막의 모든 것이 1년 365일 존재해야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레 24:8]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번제단의 불이 1년 365일 타올라야 했으며 정금등대의 불도 1년 365일 타올라야 했습니다. 성막의 모든 것이 1년 365일 지속되도록 명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시도 쉼이 없으십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오직 우리들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 1년 365일 매일같이 진설병을 올려 놓으라고 하신 이유는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뵈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을 뵈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도리입니다. 이는 마치 날마다 자녀가 부모를 뵙고 안부인사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설병은 영어로 'Showbread'입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보여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보여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거짓된 진설병입니다. 진정한 진설병은 오직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였습니다. 잔치날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겠지만 오직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창피함도 없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동요받지 않게 되었기에 마리아는 담대하게 향유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지 않았다면 시집도 안 간 처녀로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7) 진설병은 매 안식일마다 올려졌습니다. "[레 24:8]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모든 성도는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배를 등한시 하거나 예배를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에 떡을 진설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전날에 떡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성도는 안식일 전날부터 안식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단지 육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영적인 준비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며 세상적인 정욕을 위한 그 어떠한 더러운 행위도 금해야 할 것입니다. "[사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 58: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8) 진설병은 매우 고운가루로 만들어졌습니다. "[레 24:5]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진설병은 매우 고운가루로 만들어졌습니다. 잘게 부서지지 않으면 좋은 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항상 잘게 부서져야 합니다. 진설병이 고운가루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성도는 고운가루처럼 겸손해져야 함을 뜻합니다. 성도는 날마다 스스로를 죽여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자아와 의지를 잘게 부서야 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죽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9) 진설병은 기름으로 잘 섞어 만들었습니다. "[레 2: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병을 드릴 것이요 [레 2:5]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성도는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해져야만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진설병은 변철에 구어졌습니다. "[레 2:5]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변철은 인생의 환난과 역경을 뜻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환난과 역경의 시험기간이 끝날 때 비로소 복이 찾아옵니다. 쉽게 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생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맛보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듯이 우리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져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떠한 환난과 역경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능히 헤쳐나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1) 진설병은 잘 뒤집어서 만들었습니다. 성도는 성경과 성령이 균형을 이뤄야 하며 사랑과 거룩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성경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성령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성령은 강조하면서도 말씀은 전혀 강조하지 않는 삶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도 있으시지만 정의로우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을 지우시는 거룩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무시한채 오직 사랑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며 오직 공의만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먹을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12)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진설병을 오직 제사장만이 진설병을 먹었듯이 오직 정결하고 거룩한 성도만이 생명의 떡을 취할 수 있습니다. "[레 24:9]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13) 진설병은 성소안에서 먹었고 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진설병을 오직 성소 안에서만 먹어야 했습니다. 진설병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도 안 되었으며 진설병으로 성막을 벗어나 가족들에게 갖다 줘도 안 되었습니다. 오직 성소 안에서만 먹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성소 안에서 진설병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앉아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소에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오직 성소에서 진설병을 먹어야 했듯이 성도는 거룩한 음식을 취해야 합니다. 더러운 장소에서 거룩한 음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술집이나 더러운 장소에서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거룩한 성도에게는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서서 진설병을 먹었듯이 성도는 항상 주님의 명령을 이행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면 곧 바로 주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흔히 목회자는 세 가지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죽을 준비', '설교준비', '이사준비'. 비단 이러한 세 가지 준비는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반드시 주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야 하고 항상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야 하며 주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준비가 돼있어야 할 것입니다. (14) 진설병은 누룩없는 떡으로 만들었습니다. "[레 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진설병은 누룩이 없는 떡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소제물이 누룩을 넣지 않은채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누룩없는 떡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죄가 없는 정결한 상태로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상징합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이 조금만 첨가되어도 떡이 부풀어지고 맙니다. 이는 죄로 인해 우리가 영적으로 부패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누룩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정금등대 1. 정금등대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출 26:35]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할지며" 하나님은 성소의 남쪽에 정금등대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정금등대는 진설병상과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설병상이 주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정금등대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는 주님과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됩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제 주님은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실 때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님의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요일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곧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주님의 지시하신 모든 내용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께서 거하시지만 우리를 성령 하나님과만 항상 동행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모두 영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성령 하나님도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영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육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2. 정금등대는 정금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출 25: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정금등대를 정금으로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성막에 쓰여지는 모든 정금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우바스 정금'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는 가장 좋은 정금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정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성도 역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정금등대는 100% 정금으로만 만들어졌습니다. 정금이라는 것은 0.1%도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금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세상의 그 어떠한 더러움도 지니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더러움은 곧 세상의 정욕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정욕에 빠지게 함으로써 더럽게 만듭니다. 모든 더러움은 세상으로부터 오며 모든 세상의 정욕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세상의 정욕을 가져 다 줌으로써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사도요한은 마귀의 세 가지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러워지도록 만듭니다. 육신의 정욕은 우리의 육신이 갖는 정욕을 통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다섯 가지의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육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육신의 감각들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렇게 육신의 감각으로 짓는 죄는 성욕, 식욕, 수면욕 등 육적인 정욕을 통해 일어납니다. 안목의 정욕은 우리의 혼적인 영역을 통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적인 영역에 속한 감각은 인식, 감정, 의지입니다. 이러한 혼적인 감각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명예욕이나 성취욕이나 승부욕 같은 욕망을 통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생의 자랑은 우리의 영적인 영역을 통해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게 만듭니다. 이것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며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섬기게 합니다.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재물은 아주 강력한 우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고 있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섬김으로써 미혹에 빠집니다. 재물은 이처럼 강력한 우상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3. 정금등대는 금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출 25: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정금등대는 정금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어떠한 틀을 만들어 금을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오직 정금을 쳐서 만들었습니다. "[민 8:4] 이 등대의 제도는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식양을 따라 이 등대를 만들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금을 쳐서 등대를 만들라 명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쳐서 만들어지지 않는 성도는 참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정금같이 나오는 성도가 참 성도인 것입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성도는 단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단련이 된 후에서라야 진정한 정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도가니를 통해 연단을 받은 금이라야 정금처럼 나오는 것처럼 연단을 통해 나온 성도야 말로 참 성도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단의 과정을 견디지 못한채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셨습니다. 주님은 씨를 비유로 사람을 몇 단계로 분류하셨습니다.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은 길 가에 뿌려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전혀 성도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도라고 하기에는 세상적인 사람같아 보이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들으려고 해도 말씀이 그 심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떨어진 말씀을 바로 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돌밭에 뿌려진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쁨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삶 가운데 뿌리가 내려지지 않아서 환난이나 어떤 박해가 왔을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넘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시떨기에 뿌려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도 잘 듣고 환난이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든든히 서있는 사람이지만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은 강력한 인생의 환난이나 박해가 있을 때는 신앙을 잃지 않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을 섬김으로써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정금과 같은 성도가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성도는 정금과 같은 성도입니다. 이렇듯 정금과 같은 성도는 부드럽습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성도는 부드럽습니다. 주님은 부드러우셨습니다. 성령 하나님 또한 부드러우십니다. 성도는 부드러워야 합니다. 부드러움은 겸손입니다. 성도는 겸손해야 합니다. 4. 정금등대는 한 덩이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출 25:31]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정금등대는 매우 복잡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살구꽃 모양의 받침도 있었고 모두 일곱 개의 등잔이 한 뿌리에서 펼쳐지듯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두 한 덩이의 정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한 달란트의 정금을 가지고서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정금등대를 만든 것입니다. "[출 25:39]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정금등대가 한 덩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 하나가 됩니다. "[요일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아버지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너무나 강하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아버지 안에서 하나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5. 정금등대는 가운데 줄기에 6개의 줄기가 붙어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요 15:4-5) "[출 25:32]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출 25:33] 이편 가지에 살구 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출 25: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출 25:35]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출 25: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정금등대의 등불은 모두 일곱입니다. 정 가운데 있는 등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세 개씩 놓여져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양쪽에 놓여진 여섯 개의 등불은 인간을 뜻합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험난한 이 세상을 헤쳐나갈 힘이 없습니다. 빛이 약합니다. 하지만 빛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온전해집니다. 연약함이 없어지고 강건함이 생기게 됩니다. 험난한 세상을 능히 헤쳐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정금등대의 등불을 갖추도록 명하신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6. 정금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5:33] 이편 가지에 살구 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출 25:34]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정금등대의 등불 줄기에는 여러 살구꽃 형상의 꽃받침과 꽃이 놓여져 있습니다. 각 줄기마다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 줄기에는 잔 넷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가운데 줄기가 다른 줄기에 비해 더 길다란 모양을 갖춘 것입니다. 살구꽃은 겨울이 지나 봄이 될 때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가장 먼저 핀다는 것은 가장 헌신된 성도를 말합니다. 가장 먼저 교회에 나오는 성도는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가장 먼저 오는 이유는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교를 위해 먼저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청소를 위해 먼저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는 모두 헌신된 성도입니다. 하지만 헌신되지 못한 성도는 먼저 오지 않습니다. 항상 늦게 옵니다. 교회에 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와야 할 예배 때도 오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살구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금등대에 수많은 살구꽃 형상을 갖추게 하신 이유는 오직 헌신된 자만이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살구나무가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실 때 그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살구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를 보여주시면서 선지자의 일을 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렘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살구나무'라는 단어는 <샤카드>라는 히브라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샤카드>라는 단어는 '지켜보다', '감시하다', '경계하다', '깨어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를 보여주신 것은 속히 하나님의 선지자 일을 행하라고 재촉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켜봐야 합니다. 늘 교회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지 감시해야 합니다. 악한 세력이 침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또한 살구꽃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하나님은 아론의 지팡이에서 살구꽃이 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죽은 나무가 다시금 소생케 되는 부활의 역사인 것입니다. "[민 17:6]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매 그 족장들이 각기 종족대로 지팡이 하나씩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 합이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민 17: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민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아론은 레위지파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가문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아론을 방해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2지파의 지팡이 중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살구꽃이 피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의미하십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죽음을 경험합니다. 희망이 죽기도 하고 소망이 죽기도 합니다. 기쁨이 죽기도 하고 재정적인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피어납니다. 생명의 움이 돋고 순이 나며 꽃이 피어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의 삶에는 부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며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에 부활의 생명을 없애려는 악한 세력을 주의하십시오. 그 어떠한 방해세력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단호히 물리치십시오. 주님의 보혈로 덮으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쫓아 내십시오. 7. 정금등대는 감람유를 통해 빛을 냅니다. "[출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하나님은 정금등대의 빛을 거룩한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금등대의 빛은 오직 감람유를 통해서 빛을 내게 하셨습니다. "[출 27: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하나님께서 감람유를 거룩한 기름으로 삼으셨습니다. 성소에서는 오직 감람유만 사용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수한 감람유만을 사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감람유는 곧 성령의 기름을 뜻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소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끊임없이 정금등대에 감람유를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감람유가 공급되어야만 정금등대의 빛은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자는 온전한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는 마땅히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8. 정금등대는 성소를 비추는 유일한 빛입니다. "[출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성소가 빛이 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오직 정금등대 때문이었습니다. 정금등대의 빛이 있었기 때문에 성소에 빛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금등대의 빛은 주님께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주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빛에 거하게 됩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은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는 우리를 건져 내시고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는 사람은 참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성도는 빛에 거해야 합니다. 성도가 빛에 거할 때 주님께서 더욱 빛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빛이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처럼 행동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는 주님의 빛을 증거하는 빛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주님을 증거하지 않을 때 주님의 빛은 어두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빛으로 켜져 있어서 주님의 보좌를 밝게 비추어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보좌 앞에 일곱 영이 항상 등불을 켜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빛을 밝히는 등불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9. 정금등대의 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출 27: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출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 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정금등대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정금등대의 빛 외에는 그 어떠한 빛도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금등대의 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혹자는 성소의 휘장을 열어 놓으면 햇빛이 들어와 얼마든지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의식을 집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소의 휘장은 그렇게 열어놓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성소의 휘장이 아무에게나 열려진 것이 아니듯 성소의 휘장 또한 그렇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하루종일 열려 있다는 것은 성막뜰에 있는 회중들로 하여금 성소의 내부를 모두 드려다 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성하고 거룩한 성소가 회중에게 공개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공개되십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함께 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다고 하실지라도 믿지 않는 자에게까지 성령님을 함께 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오직 회중은 성막뜰에만 거해야 하며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아무에게나 공개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성소의 정금등대가 저녁에는 꺼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녁에는 잠을 자기 위해서 불을 끕니다. 회사나 공장도 저녁에는 불을 끕니다. 직원을 쉬게 하고 기계를 쉬게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쉬지 않으십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아버지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주님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성소의 정금등대는 결코 꺼져 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사장들이 밤새도록 일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성소의 정금등대는 계속해서 불을 밝혀야 했습니다. "[레 24: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성소의 정금등대의 불이 아침에는 꺼지게 하고 저녁마다 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대하 13장 11절을 증거구절로 삼습니다. "[대하 13:11]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그러나 역대하 13장의 내용은 솔로몬 성전에서 집행되는 의식에 대한 설명임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모세의 성막에 비해 많은 부분이 다른 형태를 띠었습니다. 그 규모나 제작 방법에서도 많이 차이가 있지만 드려지는 의식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의 정금등대는 저녁마다 불을 켰지만 모세의 성막은 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항상 켜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손질하고 새롭게 하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출 30: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제사장은 아침에 등불을 손질해야 했으며 저녁에는 등불을 켜야만 했습니다. '손질하다'는 히브리어는 <야타브>인데 이는 '정리하다', '단장하다', '잘 되게하다' 외에 '기쁘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침마다 등불을 손질하는 것은 등불을 끈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등불의 심지를 깨끗이 하고 단정하게 하는 일련의 청소작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손질은 저녁에도 동일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등불을 켠다'고 언급되었는데 이는 저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루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녁 때에는 등불에 필요한 기름을 보충하는 일들을 하며 심지를 손질함으로써 온전히 정금등대의 등불로 성소를 밝힘으로써 하나님께 드려지는 등불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불을 켜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알라>인데 이는 '올라가다', '높여지다'의 뜻 외에 '바치다'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정금등대의 등불을 켤 때에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지는 의미로 의식을 집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소의 정금등대의 등불은 1년 365일 타올라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성소의 정금등대의 등불이 타오르듯이 우리 또한 항상 성령의 불로 타올라야만 합니다. 사무엘은 성소의 불이 타오를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매우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모든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잠든 시각은 늦은 밤입니다. 성도는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사무엘이 잠에 취해 잠들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항상 성령의 불로 타올라야만 합니다. 이는 성소의 등불이 항상 타오른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불로 태워지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의 불은 결코 꺼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가정도 성령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교회도 성령의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10. 정금등대의 불똥은 잘 정리되어야 했습니다. "[출 25:38]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제사장들이 정금등대의 불을 손질할 때에 맨 손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불을 맨 손으로 만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를 예쁘게 손질하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심지를 보기좋게 손질하지 않으면 그을림이 생기게 됩니다. 그을림은 정금등대를 더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성소 안의 공기를 더럽게 만듭니다. 제사장들은 불집게를 통해 등불의 심지를 예쁘고 단정하게 정리했으며 떨어진 불똥이나 심지에 붙어있는 불똥을 제거했습니다. 이러한 불똥을 제거하지 않으면 더 많은 그을림이 생기게 될 뿐더러 불빛이 밝게 빛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악한 세력의 공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한 세력을 제거해야 합니다. 불집게로 불똥을 집어 버리듯이 악한 세력을 집어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에 그을림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 그을림이 생기면 우리는 더러워집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럽게 만드는 것은 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럽게 만듭니다. 정금등대에는 불집게와 함께 불똥 그릇이 있었는데 불똥 그릇은 심지에 붙어있는 불똥과 떨어져 있는 불똥을 버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심지를 보기 좋게 정리하다 남은 버려진 심지를 버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불똥 그릇이 없다면 제사장은 옷이나 손으로 불똥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불똥을 옮기다보면 자연스레 손이나 옷이 더러워질 것입니다. 불똥 그릇이 있어서 우리가 더럽히지 않는 것처럼 불똥 그릇은 우리의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집어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불똥을 집어 던질 수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도 불똥을 버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불똥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똥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불똥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붙잡는 것입니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있는 불똥이 없어질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감동으로 찬양을 불러 보십시오. 당신에게 딱 붙어있는 불똥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더 이상 불똥이 당신 곁에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 있는 불똥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교회에 있는 불똥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깨끗해집니다. 오직 깨끗한 곳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분향단 1. 분향단은 조각목에다가 정금을 덮어 만들었습니다. "[출 30:1]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출 30:2]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이는 번제단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습니다. 성물 중에서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것은 번제단, 진설상, 언약궤 그리고 분향단이었습니다. 나머지 성물 중 정금등대와 속죄가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물두멍이 놋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분향단을 조각목으로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조각목은 죄많은 성도를 뜻합니다. 조각목에는 가시가 많고 매우 딱딱한 나무여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성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향단을 조각목으로 만들라 명하신 이유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자는 죄인이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자를 받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서야만 합니다. 이는 비록 우리가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조차 의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직 죄인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이러한 칭의의 사건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나타나야 합니다. 단순히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날마다 지은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보다 정결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주님께서 이렇듯 죄인의 모습으로 나온 우리들의 죄를 깨끗이 씻겨 주실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조각목에다가 정금을 입혀서 마치 정금의 인생처럼 보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면 정금과 같이 변화를 받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죄가 많아 조각목과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정금같이 변화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분향단은 가로 세로 각각 일규빗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30:1]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출 30:2]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조각목으로 분향단을 만들 때 가로 세로 각각 일규빗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상과 벌을 정확하게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선한 자에게 그에 맞는 상급을 주시지만 악한 자에게는 그만큼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모든 믿는 자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의 소원을 더 잘 들어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기도를 모두 응답해 주십니다. 3. 분향단에는 네개의 뿔이 있습니다. "[출 30:3] 단 상면과 전후 좌우면과 뿔을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를지며" 분향단에는 번제단과 같이 네 개의 뿔이 놓여져 있습니다. 뿔은 곧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주님께서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셨으니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아버지의 권세를 부여 받게 됩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자는 이 세상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 어떠한 일도 가능치 못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하시면서 "너희들도 나와 같은 능력을 행할 것이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약속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곧 왕의 권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의 후사인 우리는 하나님의 지니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할 때에 우리의 선포한 것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 하였습니다. 혹시 병든 자가 죄로 인해 병이 들었을지라도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의 죄를 사해주시고 병에서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4.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뜻합니다. 분향단에는 향불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향불은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피어졌습니다. 향불에서 만들어진 연기는 성소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분향단이 지성소 휘장 바로 앞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향불의 연기는 지성소 안으로도 스며 들어갔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 향불을 가지고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직 7월 10일 대속죄일 때에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대제사장은 향불의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게 했습니다. 이는 그가 속죄소를 바라봄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 16:12]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레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이처럼 향불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연기였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기도는 향불과도 같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연기입니다. "[계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우리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사람에게 드려지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만이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정욕대로 드려지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야말로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인간의 정욕대로 구하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또한 하나님께 어떠한 기도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제목이 응답될 수 있도록 우리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제목을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실 수 있도록 우리 역시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최선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5. 분향단은 지성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출 30: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분향단은 지성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는 지성소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지성소와 가장 가깝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강하게 임재하는 장소입니다. 그런 지성소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분향단이야 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분향단이 아예 지성소 안에 놓여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히브리서 기자가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위치해 있다고 언급한 것은 그가 천국의 성막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성막은 천국의 관점에서 성막을 바라보면서 쓴 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모든 성막에 관한 내용이 이 세상의 성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언급된 성막은 이 땅에 존재하는 성막을 바라보며 쓴 글이지만 히브리서의 성막은 천국의 시각으로 성막을 바라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분향단의 위치를 지성소 안에 있다고 언급한 까닭은 분향단이 지성소에 속한 성물이기 때문입니다.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4절)에서 '있고'라는 헬라어 단어가 <에코>인데 이는 '~에 속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금향로가 지성소에 속한 성물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분향단이 지성소 안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한 까닭은 천국에서도 '기도'는 끊이지 않고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주하게 될 천국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기도하지만 천국에서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천국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6. 분향단의 향불은 항상 지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매일 아침 저녁으로 분향단의 향불을 사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30:7]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출 30:8]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앞에 끊지 못할지며" 제사장은 분향단의 향불을 사르기 전에 먼저 정금등대의 불을 점검하였습니다. 정금등대의 불을 깨끗하게 손질한 후에 분향단에 올려져 있는 향불에 향료를 뿌림으로 향불이 타오르게 하였습니다. 향불이 향품을 태울 때에 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가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거룩한 연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금등대의 불이나 번제단의 불이 1년 365일 타올라야만 했듯이 분향단의 향불 또한 항상 지펴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도제목이 있을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기도제목이 없을 때 전혀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향불을 꺼트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연기로 예배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향불의 연기가 지속되어야 함은 성령님과 항상 동행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성도의 기도는 혼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님과 함께 기도를 드리십시오.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과 함께 드려지는 기도는 더욱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7. 분향단의 향은 특별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출 30: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출 30: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출 30:37]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분향단의 향불에 쓰여지는 향은 아무 것이나 사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도의 기도 역시 아무렇게나 드려져서도 안 됨을 뜻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란 말이 있듯이 정성어린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분향단에 쓰여진 향품으로는 소합향과 나감향, 풍자향과 유향, 그리고 소금이 사용되었습니다. 소합향은 향나무에서 저절로 나오는 향입니다. 억지로 뽑아내는 향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향이 분향단의 향불에 사용되었던 것은 성도의 기도는 결코 억지로 드려져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억지로 기도를 시키고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이러한 억지로 드려지는 기도나 강제적으로 기도하게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는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또한 '나감향'이 사용되었습니다. 나감향은 조개류의 껍질을 빻아서 만든 향입니다. 이는 껍질이 부서지듯이 우리의 자아가 부서지고 깨어지며 깨끗이 씻겨지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는 회개와 함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나 잘났소"를 외치는 바리새인적인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여, 죄인을 용서하소서"라고 고백했던 세리의 기도가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또한 풍자향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소독제로 사용되는 향입니다. 옷을 빨래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빨래를 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로 인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말합니다. 또한 유향이 사용되었습니다. 유황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시체에 바르는 향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이나 재앙을 제거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소금은 언약을 상징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고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8. 분향단에는 금고리가 있습니다. "[출 30:4] 금테 아래 양편에 금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편에 만들지니 이는 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분향단에는 금으로 만든 고리 두 개가 양쪽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분향단을 옮길 때 사용되는 고리였습니다. 고리가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할 때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매우 깊은 주의가 요구됩니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금새 기도의 불이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금고리가 정확하게 만들어지 않거나 이동하는 제사장이 소홀하였을 때 분향단 위의 향불은 엎어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한 때 열심히 하다가 시험과 환난이 닥칠 때 언제 그랬냐는듯이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밥을 먹지 않는 자녀처럼 기도를 하지 않는 성도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성도는 인생이 평탄하여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조심스럽지 않아서 향불을 엎어버릴 성도인 것입니다. 9. 분향단을 매는 채가 있습니다. "[출 30:5] 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분향단을 옮길 때 손으로 들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혼자서 들기엔 매우 벅찬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사람이 분향단을 이동할 수 있도록 채를 메달아 이동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온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동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기도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잘 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마치 분향단의 장소가 지성소 휘장 앞에 놓여져 있어야 했듯이 성도 또한 기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옮겨야 합니다. 성도는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릴 장소를 확보해야 합니다. 교회 예배당도 기도드리기 좋은 장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작은 방들도 기도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기도원 같은 곳의 기도굴도 기도하기 좋은 장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우리는 성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더럽고 추한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집중을 하게 될 때 교회 예배당과 같은 기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장소가 당신의 집이여도 좋습니다. 안방에서 기도한들 그것이 교회 예배당과 다를 이유는 없습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골방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에서 기도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먼저 골방을 찾으십시오. 골방이 없다면 만드십시오. 당신의 몸이 들어갈만한 장소면 족합니다. 옷장이라도 들어갈 수만 있다면 좋은 골방이 될 것입니다. 자동차 안이라도 좋은 골방이 될 것입니다. 장소가 더 좁을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강하게 임할 것입니다. 속죄소 1. 속죄소는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속죄소는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물 중에서 유일하게 정금등대와 속죄소 두 가지만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정금은 정결과 거룩을 상징합니다. 속죄소가 정금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속죄소가 주님의 임재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언약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속죄소를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에는 그 어떠한 불순물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불순물은 거룩함을 더럽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정결하고 거룩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어떠한 더러움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속죄소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2. 속죄소는 두둘겨 패서 만들어졌습니다. 속죄소는 주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두들겨 패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의미합니다. 만일 주님의 고난이 없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의 인생은 항상 두들겨 맞는 인생입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우리를 두들겨 팹니다. 재물문제로 두들겨 맞고 자녀문제로 두들겨 맞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항상 두들겨 맞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두들겨 맞음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생을 통해 그 누군가 생명을 얻으며 살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 받는 자들을 도와 주십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능히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3. 그룹은 속죄소와 붙어 있었습니다. 속죄소와 그룹은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속죄소를 만들 때 그룹과 함께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속죄소와 그룹이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는 것은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천사입니다. 또한 그룹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룹이 속죄소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듯이 천사들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돕듯이 천사들도 항상 우리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천사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천사는 항상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룁니다.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돕는 천사는 우리의 모든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 아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4. 그룹은 두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속죄소에 있는 그룹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습니다. "[출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의 그룹이 날개를 높이 폈습니다. 이는 활짝 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활짝 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심입니다. 이처럼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켜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룹의 날개는 모든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날개로 우리를 품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를 날개 아래 그늘에 쉬게 하시기도 하시고 우리를 날개에 올리시어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그룹은 속죄소를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룹은 날개를 활짝 편 상태에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였습니다. 그룹이 서로 마주 본 것이 아닙니다. 그룹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는 그룹의 겸손함을 뜻합니다. 그룹은 스스로의 능력을 뽐내지도 않았으며 자기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오직 주님 앞에서 겸손하며 주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는 경외함입니다. 또한 그룹이 속죄소를 향하여 고개를 고정시킨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 외에는 그 어떠한 부정한 것도 하나님께 얼씬 거리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의지입니다. 6. 속죄소에는 피가 뿌려졌습니다. 속죄소에 뿌려진 피는 속죄를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지은 죄를 사함 받습니다. 우리의 지은 죄가 사함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깨끗해져야 합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물론 죄를 짓지 않으면 좋겠으나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속죄소에 뿌려진 피는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는 주님의 피를 상징하였습니다. [출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을 잡아다가 양의 피로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양의 피, 곧 주님의 피로 인한 구원이었습니다. "[출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짓게 하실 때에 짐승의 피를 뿌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성막 전체에 수없이 많은 짐승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이 모든 뿌려진 짐승의 피는 곧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피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거룩해 집니다. 주님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7. 속죄소에는 오직 거룩한 자만을 받아 드립니다. 속죄소에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속죄소를 통과해야만 언약궤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로 들어가야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속죄소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속죄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면 결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거룩한 사람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하루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성소는 오직 일 년에 하루만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7월 10일 대속죄일 때만 지성소를 공개하셨는데 그것도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만을 속죄소를 통과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으면 주님의 보혈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히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속죄소는 거룩한 자만 받아 드리는 곳입니다. 속죄소 위의 그룹은 거룩하지 못한 자를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휘장을 둘로 쪼개심으로써 새롭고도 산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어서 오직 정결하고 거룩하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8. 속죄소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속죄소 앞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모세가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은 그가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속죄소가 언약궤의 두껑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세가 언약궤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는 언약궤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막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성소부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시작된 것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언약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모세는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보다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지성소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언약궤 1.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지성소 안이 밝았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빛을 낼 수 있는 그 어떠한 도구나 기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피뿌리는 의식을 행할 수 잇었던 것은 불기둥을 통해 지성소가 밝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빛이 있습니다. 근심, 좌절, 슬픔, 우울, 절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약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막이 이동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이동하였습니다. 성도는 반드시ㅏ 하나님과 함께 해야합니다. "[출 14: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출 14: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항상 언약궤와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언약궤와 함께 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체험될 수 있습니다.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2. 언약궤는 지성소의 핵심입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약궤로부터 시작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를 통해 나타납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가면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약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육신의 몸으로 언약궤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언약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막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막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막은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 몸이 성막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3. 언약궤는 천국의 언약궤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천국의 성막을 보여주시면서 성막을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만든 성막은 천국의 성막의 모형이며 그림자입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지성소에 놓여져 있는 언약궤는 천국에 있는 성막의 언약궤의 모형입니다. 천국의 성전에도 언약궤가 놓여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의 성전에 언약궤가 있음을 봤습니다. "[계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천국에서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천국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친히 우리 예배에 임하실 것이며 친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언약궤에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언약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 년에 하루밖에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궤에 들어간다는 것은 조금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루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속죄소와 언약궤의 모습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먼저 분향단의 향불을 지펴야만 했습니다. "[레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그만큼 하나님은 속죄소와 언약궤를 사람에게 내 보이시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정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통해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할지라도 정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언약궤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약궤는 오직 정결하고 거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5. 언약궤에는 세가지 성물이 있습니다. (1) 돌판 : 구약시대의 언약궤 안에는 오직 돌판만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크기가 커서 언약궤 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를 언약궤 옆에 안치하도록 명하셨으나 솔로몬 성전 때에 언약궤를 확인해 보니 그곳에는 오직 돌판만 들어 있었습니다. "[왕상 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돌판은 언약의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두 말씀에 담겨져 있습니다.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으며 그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지팡이 : 언약궤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3) 항아리 : 언약궤에는 금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만나 항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먹이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출 16: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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