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스크랩] ?<현대선교의 이해>중 제4장 선교의 역사적 발전 요약

하나님아들 2015. 8. 27. 11:25

<현대선교의 이해>중 제4장 선교의 역사적 발전 요약

2006년 9월 17일 오후 3:33공개조회수 17 0

제 4 장 선교의 역사적 발전

1. 초대교회의 선교(33-500)
이 시기는 오순절부터 로마제국 선교 종료까지 혹은 기독교가 공인(公認)된 31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선교는 성부께서 시작하시고 성자에 의해서 기초가 마련되어지고 성령을 통하여 실현되어진다.
1) 하나님의 섭리적 준비
①로마의 평화 시기(Pax Romana)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통일함으로, 부족간의 대립과 전쟁이 일시적으로 그친 평화의 시기가 아니었다면, 기독교가 로마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②로마의 교통망
로마는 각 지역간의 통상과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하여 도로를 건설하였다. 오늘날의 간선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이 도로들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었다.
③언어의 통일(Koine Greek)
코이네 헬라어가 공식 언어로 제국 내에서 통용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이는 복음의 지리적 전파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④유대인의 분산(diaspora)
바벨론 포로시기에도 유대인들은 이방민족과 혼혈되지 않고 집단거주지역을 형성하며 회당중심의 유대교를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였음을 전파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적 준비는 조직화되지 않았던 초기 교회를 지리적으로 팽창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2) 성령의 선교
①오순절
오순절에 모여든 사람들은 로마제국 동편 절반에 해당하는 각 지역 출신이었다. 사도들의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성령께서는 준비된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여 회심시켜서 각 지역에 교회개척의 씨를 뿌려 놓으신 것이다.
②핍박으로 인한 제자들의 흩어짐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의 핍박을 이용하여서, 지리적 팽창에 나서지 못한 제자들을 흩으시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다.
③예루살렘 종교회의
이방인들의 할례문제로 열린 이 종교회의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 혁명적인 신학적 도약(跳躍)을 이루었으며,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합리성을 형성했다. 이것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조그만 지역종교로서 존재하다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3) 초기 선교의 요인
①사도들의 선교활동
사도들의 활동은 바울을 중심으로 한 개척선교와 흩어진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선교역사에서 관심이 있는 영역은 개척선교 활동들이다. 바울은 주로 소아시아와 유럽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바돌로매는 지금의 아라비아 사막지역에, 도마는 인도 등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②예루살렘의 함락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함락되고 폐허가 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퍼져 나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스티븐 니일) 70년 이후로 기독교회는 이전의 지역적 중심점을 탈피하여 주님의 임재하심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③기독교 핍박
네로황제 시대로부터 시작되어진 핍박은 4세기 초의 디오클레산 황제 시기까지는 조직적인 핍박이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핍박은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지만, 오히려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 준 공헌이 있었다. 이 시기 선교의 특징은 첫째, 조직적이 아닌 자발적이고 비계획적이었다. 둘째, 무명의 선교사들(군인, 노예, 상인 등)에 의해 지리적 팽창이 이루어졌다. 셋째, 행함과 사랑으로 로마인들의 마음을 꿰뚫었다.
④기독교 공인
콘스탄틴은 313년에 밀란 칙령을 내려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키자 자유로운 선교가 가능해졌고, 제국 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회심체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교(異敎)신앙의 행습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복음의 순수성이 급속히 혼탁해지게 되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성직자 계급이 급속하게 형성되면서 제도화 되어갔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의 선교적 열정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⑤기독교 공인 이후
이 시기 선교의 특징은 첫째, 수도원 중심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둘째, 기독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로마제국이 불안정해지면서 교회가 안전과 안정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인정이 되어졌다. 셋째, 선교사들의 이적(異蹟) 행함으로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의 시기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시골지역의 미신들에 대항하여 많은 능력대결을 행하였다.(투어스의 마틴 등)


2. 중세교회의 선교(500-1492)
대략 500년경을 지나면서 로마제국은 퇴보하게 되고 천년 동안의 중세가 시작된다. 기독교회는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하는데 성공하지만 아직 세상의 나머지 부분은 미전도 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 중세 전기의 선교(500-800) - 중부 유럽지역의 기독교화
①아일랜드 선교 - 패트릭(Patrick, 389-461)
“거룩한 젊은이여, 이리로 와서 이전처럼 우리 사이를 거닐어달라”는 환상을 보고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30년 이상을 선교한다. 그가 세운 켈틱교회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로서 이후 중부유럽 선교의 기지가 된다.
②브리튼 선교 - 콜롬바(Columba,521-597)와 선교사 어거스틴
이들 선교의 특징은 첫째, 그룹으로 파송되었으며 경험이 많은 나이든 사람이 주를 이루었다. 둘째, 집단개종의 방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했다.(어거스틴) 셋째, 문화수용(accommodation)을 하여 이방문화적 요소를 기독교화했다.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있지만, 교회는 역사 가운데 상당한 문화수용을 허용했다.(크리스마스)
③프랑스 선교 - 클로비스(Clovis)
서원 후 전쟁에서 승리한 클로비스는 496년 전사 3,000명과 함께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프랑스 지역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④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 - 독일의 사도
애니미즘적 신앙이 팽배했던 독일에서, 그는 능력대결로 이교지역을 선교하였다. 그는 여자 수녀들을 선교에 최초로 참여시켰으며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⑤중국선교의 시작 -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알로펜(Alopen)
635년에 중국의 장안에서 당태종의 환영을 받고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기독교를 동양문화에 상황화시켜 보려는 시도로서 자신들을 승(僧)으로 불렀고, 연꽃 등을 경교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845년 도교의 신자였던 무종 이후로 선교의 세력은 꺾이게 되지만, 12세기경까지 중국 내에 명맥을 유지하며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몽골지역까지 선교지역을 넓히게 된다.
⑥이슬람의 발흥(發興)
모하메드(570-632)의 사후 이슬람은 732년 투어스 전쟁에서 유럽 중심부로의 진입을 저지당한다. 그러나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타인, 소아시아까지거대한 이슬람의 초생달(Islamic crescent)을 형성하게 된 이들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교회가 새로운 대륙선교에 나서지 못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중세 후기의 선교(800-1492) - 북부유럽과 러시아
①안스카(Anskar, 801-865) - 북구의 사도
그는 콜롬바가 세운 콜비 수도원 출신으로서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북유럽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중세전기와 같은 즉각적인 기독교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2세기까지의 긴 기간에 왕족들의 개종을 중심으로 서서히 이루어지게 된다.
②러시아 선교 - 동방교회의 주도
키릴(Cyril)과 메소디우스(Methodius)가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인 모라비아에 선교를 행한다. 이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예배에서 현지어를 사용했다. 이로부터 러시아와 폴란드 기독교화가 12세기까지에 걸쳐서 이루어지게 된다.
③모슬렘 선교 - 레이몬드 룰(Raymond Lull, 1235-1315)
그는 십자군 전쟁을 반대하며 모슬렘에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룰은 선교역사에서 최초의 선교학자로 인정된다. 그는 아랍어 학교를 세웠고, 문서상역의 중요성을 지적하였으며, 인내와 사랑의 끈질긴 전도를 요구하였다. 이 세 가지 사항은 오늘날에도 이슬람 선교에 적용된다.
④몽골제국의 진흥(振興)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자국의 문화진흥을 위해 교황에게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주기를 요청했지만 교황청은 이를 묵살했다. 칸이 죽은 후 몽테콜비뇨의 존이 1294년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티벳의 라마불교를 받아들인 후였다. 존은 1328년 죽을 때까지 약 10만 명의 개종자를 얻었지만, 명(明)에 의해서 몽골족이 축출된 1362년에 순교자를 내며 종료되었다.

3. 로마 가톨릭 선교의 황금기(1492-1793)
신대륙의 발견은 로마 가톨릭 선교에 대한 전기(轉期)가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은 유럽에서 세력을 잃게 되었지만, 신대륙 선교를 통하여 18세기말까지 300년 동안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1)로마 가톨릭 선교의 세 가지 요인
①로마 가톨릭의 교회관
가톨릭은 보편적, 우주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대륙도 당연히 가톨릭 교회의 교구가 되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대륙에 선교사와 사제들을 보내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②수도원 제도
수도사들은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을 함으로 자기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운 지역으로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순종은 주님께 대한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로마 교회의 교권에 대한 순종이었다. 특히 예수회와 같은 수도원은 군대와 같은 조직과 명령계통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은 사람들을 선발하고 파송을 명령하기만 하면 되었다.
③신대륙 발견과 빠트로나토(Patronato)
당시 로마교회의 가장 충성스런 두 기둥은 포르투갈이었다. 이들은 15세기까지 해상세력을 장악하면서 항상 사제나 수도사를 동선(同船)시켰다. 새로운 땅의 발견은 즉시로 교황청에 보고 되어졌고, 교황으로부터 독점 점유권을 받은 두 나라의 왕은 자신들의 경비로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임명하여 선교해야 한다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빠트로나토(Patronato)라는 제도는 로마 가톨릭의 신대륙 선교정책으로 발전되어 선교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2)가톨릭 선교사들
①프란시스 쟈비어(Basque Francis Xavier, 1506-1552)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인정된다. 그는 제수잇 선교사로서 1542년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여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일본인 야지로를 만나 1549년에 일본에 상륙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제수잇 선교사들을 통해 30만명의 개종자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을 떠나 고아로 돌아가던 중 그는 중국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죽는다.
②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
쟈비어가 죽던 해에 태어난 그는 1600년에 북경에서 사역을 행한다. 기독교의 상황화를 시도하던 릿치는 예수를 천주(天主)로 소개하였고, 이 개념은 중국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이해되고 수용되어졌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화수용으로 인해 일어난 교단간의 신학적, 정치적 싸움은 선교의 문을 닫게 만든다.
③로베르토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며 마테오 릿치와 같이 적극적으로 인도문화를 수용한 그는 로마인 부라만(Roman Brahmin)으로 불렸다. 노빌리의 뒤를 이은 제수잇 선교사들도 문화수용 정책을 사용하였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정죄를 당한다.
④레가스피(Legaspi)
어거스티니안 선교사로서 1565년에 필리핀에 도착한 그는 기독교에 필적할만한 종교가 없던 필리핀을 빠른 속도로 기독교화 시켰다. 선교 100년 이내에 200만의 개종자가 나온 필리핀은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3)아프리카와 남미대륙 선교
이 신대륙 선교에서는 개척 수도사들과 정치적 사제들 간의 교회관할권 문제가 부딪히게 된다. 원주민들을 착취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며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개척정복자들(conquistadores)과 타협한 사제들은 영적으로 타락하였고, 이는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런 와중에 라스 카사스(Bartholomew de Las Casas)는 남미 선교의 고질적 문제인 원주민 학대에 투쟁하여서, 1542년 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시킨다.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의 빠트로나토 선교에 의해서 기독교화 되어지지만 유럽인이 생존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과 노예상인들의 잔혹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가톨릭 선교의 열매가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4)로마 가톨릭 선교의 붕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에서 독점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면서 가톨릭 선교는 급속히 붕괴된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중국에서도 선교사들 간의 싸움에 황제의 총애를 잃게 된다. 그리고 교단들의 끊임없는 고소로 인해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칙령-Dominus ac Redemptor-을 발령하여서 제수잇 교단을 해체하고 3천명 가까운 선교사들이 선교지로부터 강제철수 된다. 이 일 이후로 신대륙 선교는 크게 위축되어지고 그 전성기의 막을 내리게 된다.

4. 개신교회의 선교의 도약기(1793-1945)
1) 긴 태만의 시기(great omission)의 요인들
①루터는 마 28장의 위임명령을 열한 제자에게 국한하여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루터의 신학적 과제는 로마 가톨릭을 성서적으로 비판하고 개신교회의 성서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사도 세습권이 이후의 교회에 연결되지 않도록 해석한 이 의도에는 이견(異見)이 없지만, 이는 당시 개신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적 책임에 대하여 등한시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②초기 개신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세계 가운데서 수적(數的)인 열세와 생존 자체에 급급했었다. 오랜 종교전쟁과 성서적,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집중된 관심은 이교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③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정보가 부족하였다. 주로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던 개신교의 외곽에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싸고 있었고, 또 그 외곽을 회교세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대륙이나 타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④효과적인 선교조직을 갖지 못하였다. 개신교회는 수도원 조직에 대응될 만한 어떤 대체물도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족과 재산이 있었고 교구를 책임지게 되었기 때문에 선교의 도전이 주어져도 선교지로 떠날 수가 없었다.

2) 윌리엄 케리 이전의 개신교 선교
①경건주의 운동
독일에서 필립 스펜서(Philip Spencer)를 중심으로 소그룹 기도모임과 성경공부의 새로운 영성에 중점을 둔 운동이 일어났다. 스펜서의 제자였던 어거스트 프랑케(August Franke, 1663-1727)를 위시한 할레대학 출신들은 이교지역에 대한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데니쉬 할레 선교부를 형성한다.
②모라비아 교도들의 선교
진젠돌프 백작은 모라비안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 이들을 자신의 영지인 헤른후트에 정착하게 한다. 그는 교회를 짓고 모라비안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할레대학의 설립자인 프랑케의 제자로서 세계선교에 투자하게 된다. 모라비안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선교적 도전에 순종하였다. 1732년 토기장이 레너드 도버와 목수 다이빗 니츠만을 첫 선교사로 파송한 이후 150년 동안에 2,15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오지에서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했는데, 자이스버거는 현지에서 62년을 섬겼다. 이 모라비안의 선교는 윌리엄 케리와 웨스레 부흥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3)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1761-1834)
- 네 가지 공헌
①당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연장시킨 일부 칼빈주의 신학이 선교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그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책임에 대한 질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하며, 지상위임명령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생각을 단호히 부인하였다.
②선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선교지에 대한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무지에 상당한 도전이 되었다.
③1792년에 침례교 선교회를 구성하고 그는 첫 선교사로 파송된다. 1795년에 런던 선교회가 구성되고 뒤를 이어 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이 번창하게 된다.
④성경번역과 보급 활동을 선교의 중요한 전략으로 확립시켰다. 이는 근대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윌리엄 케리의 공헌들로 인해서 18세기 말에 유럽의 교회들은 비로소 선교에 눈을 뜨게 되고 위대한 선교의 시기가 문을 열게 되었다.

4) 개신교 선교의 제1기 - 랄프 윈터의 분류
제1기는 윌리엄 케리에 의하여 시작되어진다. 그는 1793년에 인도의 쉬람포어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였다. 죠수아 매쉬맨, 윌리엄 워드와 “쉬람포어의 삼총사”를 이룬 그의 선교전략은 설교, 현지어로 된 성경의 번역과 보급, 교회개척, 타종교에 대한 연구, 사역자 훈련의 다섯 가지였다. 이 사역은 미국에서 “건초더미 기도모임”의 선교운동을 시작하게 하였다. 미국 해외선교회가 조직되고, 여성선교기도모임이 구성되어 1865년에는 독신여성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른다.
제1기 사역은 주로 유럽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해변(海邊)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헨리 마틴은 동인도 회사의 목사로 인도에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기 선교의 특징은 선교사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으로 빛을 발한 시기였으며, 선교전략에 대한 통찰력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세기 초반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평균 생존기간은 단 2년에 불과하였다. 10년 이상을 사역지에서 생존할 확률은 20명 중 1명뿐이었지만, 유럽 젊은이들의 아프리카로 향한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5) 개신교 선교의 제2기
제2기 선교의 시대는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서 해변에서 내지(內地)로 열리게 된다.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전염병과 풍토병에 대한 서구인들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중국내지선교를 목표로 한다.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의 신앙선교를 시작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공급받는 선교의 흐름은 그의 인품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서 800명에 달하는 선교사가 활동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는 리빙스톤이 출판한 “남아프리카 선교사 행적과 연구”를 통하여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에 생애를 헌신하게 된다.
제2기 선교는 제1기에 비교해서 느린 속도로 발전했다. 이는 “왜 새로운 선교기관을 구성해야 하는가”, “해변지역에도 선교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내지로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질문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학생자원선교운동이 일어나고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한다. 그리고 그 중 2만 명 이상이 선교사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2기 선교는 미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선교지 교회는 식민정부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므로 유리한 성장의 기회들을 누렸다. 그러나 또한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도 인식되어지게 되었다. 서구 선교사들에게는 부정적 선교개념이 생기게 되었고, 문화우월주의로 인한 현지문화의 서구화에 선교사들이 앞장서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이 시기는 “개신교 선교의 도약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5. 현대선교 시기(1945-현재)
6)개신교 선교의 제3기
이 시기는 종족단위의 선교시대로 들어가면서 미전도종족에 대한 선교의 시기이다. 제3기 선교시대의 문을 연 사람들은 카메론 타운젠드(Cameron Townsend)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이다. 1917년에 과테말라로 선교를 떠난 타운젠드는 토착어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그는 1934년에 캠프 위클리프를 설립하고 언어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하계언어학교와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가 되었다. 맥가브란은 인도선교부의 총무에서 교회개척선교사로 섬기면서 사회가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으로 구성된 종족그룹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선교는 국가단위로부터 벗어나 종족단위의 선교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첫째, 제2/3세계 교회와 서구교회의 동역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서부터는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이 철저하게 제3기 선교의 특징을 따라가며 긍정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로 다양한 학생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둘째로는 평신도, 단기, 전문인 선교 등의 다양하고 새로운 선교접근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국제적, 초교파적인 선교의 연합과 네트워킹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2000년의 교회 선교역사를 돌아볼 때,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선교의 종료라는 꿈이 점차 가까워지는 시대에 도달한 듯하다. 그러나 현 시대를 표현할 때 “혼란과 도전의 시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넘어야 할 과제와 도전은 산적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머지 선교역사의 장(章)을 채워야 하는 책임이 있는 때가 되었다.
- 이 상 -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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