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을 통해서 본 제자도의 본질
마가복음을 통해서 본 제자도의 본질
서 론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도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특징은 핍박에 노출된 상황 아래에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를 질 각오로 주님의 뒤를 좇아가는 모습이 바람직한 제자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적, 가르침, 수난을 통해 드러난 고난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깨닫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제자의 길을 성경 본문을 통해 살펴본다는 것은 오늘의 신학도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리고 사역자로서 이 이상 중요한 모델은 없기 때문이다.
본 론
<마가복음 8:34 ~ 37>
1. 무리들에게도 주신 제자도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즉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도가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의 도에 대해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함께 주셨다.
2. 자기 부인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 당국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만이 주(Lord)라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마가복음 9:33 ~ 50>
3. 겸손과 섬김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셨다.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다. 세상을 사랑을 받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주님은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섬김을 받음이 아닌라 오히려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신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길 원하는 자는 이러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막 10:43-45).
그리고 주님은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사단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인간은 저주를 받고 수치와 불안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4. 편협함과 배타심을 버림(지역주의, 이기주의)
요한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었다.
변화 산 아래에서 귀신을 내쫓지 못하던 제자들은 주님을 굳게 의지하거나 기도하지 못하여 귀신을 추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편협하고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움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은 참으로 친절한 행위였다. 어떤 사람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은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이러한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그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자기의 권위처럼 인정해 주셨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로마 군인들이 반역자의 지도자를 처형할 때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다(행 5:37). 이 사건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믿는 소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이것보다 더 엄중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는 요한의 그릇된 행동이 주님을 따르는 한 형제를 실족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은 주님을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의 배타적인 태도를 보고 실족할 수도 있었다. 그는 주님을 위해 귀신을 대적했으며, 귀신이 쫓겨 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제자들에게 책망을 받게 되면, 다시는 낙심하여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요한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하게 만든 장본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조심하도록 경고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제자의 범위를 12제자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주님을 믿고 복음 전파에 참여한 모든 숨은 사람들도 제자들로 인정해 주셨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 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선교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5. 죄에 대한 결단
일부 학자들은 이 교훈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장애자가 되고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록 로마 제국이 성도들의 지체(손, 발, 눈)를 잘라낸다고 해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마카비서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지체를 절단하고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교회사를 읽어보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고문 받고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손이나 발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기꺼이 포기했다.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불구자가 되거나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한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또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마가 당시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그들은 수족을 잘리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상황에 있는 제자들에게 로마가 가하는 위협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 더욱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로마 당국은 그들의 수족을 베고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어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잠시 세상에서 불구자로 사는 것이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배교자들이 갈 지옥은 구더기와 같은 생물도 죽지 않으며, 영원한 형벌의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생선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지옥에서 배교자들을 불을 가지고 소금을 칠 것이다.
이러한 형벌은 로마가 가하는 고문보다 수천 배나 더 크고 가혹한 형벌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경고는 순교와 박해의 위협 속에 있던 마가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교훈이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보다 영원히 지옥에서 우리를 형벌 하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세상을 선하게 만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듯이, 주님의 제자들도 이런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제자들도 쓸모가 없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과 희생과 화평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부패를 막아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오늘날도 제자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 하면 안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제자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결 론
제자도가 치르는 대가로서의 순종의 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한 최초의 그리고 최상의 교훈은 순종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단 한 순간의 순종은 그 후에 있을 무한한 추구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지혜와 육체의 에너지가 탈진한 정도일지라도 그에 대한 단 한 번의 순종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이 순종의 신앙이 필수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 이 세상의 물질을 조금 또는 거의 가지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더 명백하게 증명되는 사실은 이 땅의 재물과 안전에 둘러싸여 있는 풍요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책망인 것이다. 이 세상의 물질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서는 부자인 것이다. 제자라면 당연히 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자의 도는 완전무결을 추구한다. 기만과 부패가 그 특징이었던 거짓 선지자에 대한 계속적인 위헌 때문에 바울과 초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반복해서 자기들의 복음전도, 가르침, 목회 사역 등에 있어서 자신의 완전무결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오늘날에도 메시지를 전하는 자의 완전무결은 메시지의 권위와 변화케 하는 능력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은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비교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조건적 복종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의 옛 자아는 죽었다. 세상에 대한 매력 또한 죽어야 한다. 오늘날 오직 제자의 길은 관계로 인한 고통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는 교제에로 불렀으며, 동시에 그의 제자가 된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제에로 우리를 불렀다. 그러나 고통은 따른다. 하나님의 영광은 순종의 길, 십자가의 길, 관계의 고통의 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여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 이 상 -
서 론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제자도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특징은 핍박에 노출된 상황 아래에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를 질 각오로 주님의 뒤를 좇아가는 모습이 바람직한 제자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적, 가르침, 수난을 통해 드러난 고난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깨닫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제자의 길을 성경 본문을 통해 살펴본다는 것은 오늘의 신학도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리고 사역자로서 이 이상 중요한 모델은 없기 때문이다.
본 론
<마가복음 8:34 ~ 37>
1. 무리들에게도 주신 제자도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즉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도가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의 도에 대해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함께 주셨다.
2. 자기 부인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 당국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만이 주(Lord)라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마가복음 9:33 ~ 50>
3. 겸손과 섬김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여행 중에 벌인 열띤 논쟁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셨다. 이 질문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인 열띤 논쟁은 바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곧 로마를 정복하고 왕이 될 줄로 알았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종이 되라고 하셨다. 세상을 사랑을 받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주님은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섬김을 받음이 아닌라 오히려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신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길 원하는 자는 이러한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막 10:43-45).
그리고 주님은 참된 제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남보다 높아지려 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남보다 낮추는 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사단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유혹해서 자기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인간은 저주를 받고 수치와 불안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4. 편협함과 배타심을 버림(지역주의, 이기주의)
요한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그가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었다.
변화 산 아래에서 귀신을 내쫓지 못하던 제자들은 주님을 굳게 의지하거나 기도하지 못하여 귀신을 추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이 본 그 사람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그가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은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만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편협하고 그릇된 생각을 교정해 주셨다. 주님은 요한에게 그러한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후에 즉시 주님을 비방할 사람은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만일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되면 그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속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들을 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움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주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자도 반드시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팔레스타인과 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에게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은 참으로 친절한 행위였다. 어떤 사람이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가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자들을 대접한 것은 그들을 보내신 주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이러한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그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권위를 자기의 권위처럼 인정해 주셨다.
또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작은 사람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매우 엄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주님의 제자를 대접하는 것이 상급을 잃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로마 군인들이 반역자의 지도자를 처형할 때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진 일이 있었다(행 5:37). 이 사건은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을 믿는 소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이것보다 더 엄중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는 요한의 그릇된 행동이 주님을 따르는 한 형제를 실족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은 주님을 믿고 순수한 마음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요한의 배타적인 태도를 보고 실족할 수도 있었다. 그는 주님을 위해 귀신을 대적했으며, 귀신이 쫓겨 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제자들에게 책망을 받게 되면, 다시는 낙심하여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요한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하게 만든 장본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요한에게 이러한 일을 조심하도록 경고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제자의 범위를 12제자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주님을 믿고 복음 전파에 참여한 모든 숨은 사람들도 제자들로 인정해 주셨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교회, 또는 우리 교단이 아니면 안된다" 는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선교 사역을 비방할 때가 있다. 이러한 일은 특히 주님을 가깝게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믿고 한 성령으로 일하는 형제들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모든 형제들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5. 죄에 대한 결단
일부 학자들은 이 교훈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장애자가 되고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록 로마 제국이 성도들의 지체(손, 발, 눈)를 잘라낸다고 해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말한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마카비서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 지체를 절단하고 생명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교회사를 읽어보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고문 받고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손이나 발이 절단되고, 눈이 뽑히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기꺼이 포기했다. 마가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가 그들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손과 발을 굶주린 야수들의 발톱으로 찢었으며 그들의 눈을 뽑았다. 그러므로 마가 당시의 성도들은 불구자가 되거나 생명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
주님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성도들이 남을 정죄하고 이기적이 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면 수족을 베는 듯한 과감한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또한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마가 당시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그들은 수족을 잘리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상황에 있는 제자들에게 로마가 가하는 위협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 더욱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로마 당국은 그들의 수족을 베고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어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잠시 세상에서 불구자로 사는 것이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배교자들이 갈 지옥은 구더기와 같은 생물도 죽지 않으며, 영원한 형벌의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생선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지옥에서 배교자들을 불을 가지고 소금을 칠 것이다.
이러한 형벌은 로마가 가하는 고문보다 수천 배나 더 크고 가혹한 형벌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경고는 순교와 박해의 위협 속에 있던 마가 당시의 성도들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교훈이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보다 영원히 지옥에서 우리를 형벌 하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세상을 선하게 만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듯이, 주님의 제자들도 이런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상실한 제자들도 쓸모가 없다. 성령의 능력은 사랑과 희생과 화평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부패를 막아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오늘날도 제자들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을 비난하고 정죄 하면 안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제자들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데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을 되찾아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결 론
제자도가 치르는 대가로서의 순종의 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한 최초의 그리고 최상의 교훈은 순종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단 한 순간의 순종은 그 후에 있을 무한한 추구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지혜와 육체의 에너지가 탈진한 정도일지라도 그에 대한 단 한 번의 순종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이 순종의 신앙이 필수적이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 이 세상의 물질을 조금 또는 거의 가지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더 명백하게 증명되는 사실은 이 땅의 재물과 안전에 둘러싸여 있는 풍요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책망인 것이다. 이 세상의 물질이 없는 사람들이 신앙에 있어서는 부자인 것이다. 제자라면 당연히 이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자의 도는 완전무결을 추구한다. 기만과 부패가 그 특징이었던 거짓 선지자에 대한 계속적인 위헌 때문에 바울과 초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반복해서 자기들의 복음전도, 가르침, 목회 사역 등에 있어서 자신의 완전무결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오늘날에도 메시지를 전하는 자의 완전무결은 메시지의 권위와 변화케 하는 능력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은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비교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조건적 복종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의 옛 자아는 죽었다. 세상에 대한 매력 또한 죽어야 한다. 오늘날 오직 제자의 길은 관계로 인한 고통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는 교제에로 불렀으며, 동시에 그의 제자가 된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제에로 우리를 불렀다. 그러나 고통은 따른다. 하나님의 영광은 순종의 길, 십자가의 길, 관계의 고통의 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여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 이 상 -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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