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교사 교육

[스크랩] 올바른 교사교육 - 김동호목사

하나님아들 2015. 7. 18. 16:26

올바른 교사교육 - 김동호목사

교회성장을 주장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교회성장 신학의 맹점을 발견하고 보완하는 한편. 이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에 대해 합리적인 변호를 한 책으로서 앞으로의 한국교회가 성장하면서 주의할 점들을 지적해 주고 있다.

Ⅰ. 교회론적 측면

1. 교회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성장

교회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냐 하는 문제를 논구(論究)하려면 먼저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이 관계를 보는 시각을 대략 세 가지로서 완전한 일치나 완전한 분리 그리고 양자의 절충인 부분적인 일치로 보는 것들인데 이 중 세번째 견해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활 양식을 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스럽게 인정하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교인 명부에 올려 놓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와 일대일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교회가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의 집 (The household)이라고 묘사된다. 그 구성원들은 성도일(롬1:1)뿐만 아니라,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벧전2:9 불리운다. 그렇다면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완전히 결별시키는 것 또한 잘 못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만들어 내지만 그 역(逆)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그 나라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였으며 구원과 평화와 사랑 그리고 정의가 우리 안에서 실재가 되었다는 현재적인 증거와 함께 이 축복들이 지금은 불완전하며. 오늘 세대에야 나타나게 될 최종적이고 완전한 형태는 아직 아니라는 사실을 조화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의 해설자 (The interpreter)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른 대행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인지를

확인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교회의 성장에는 네 가지 영역이 있는데 숫자적인 성장. 유기적인 성장. 관념적인 성장 그리고 성육신적인 성장이 그것들이다. 가장 관심사인 첫번째 성장의 경우.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 오는 방식에 따라 세 가지고 분류된다. 생물학적인 성장―이웃의 다른 교회들로 부터 이적함으로서 교인수가 증가하는 성장―과 이동으로 인한 성장 그리고 회심에 의한 성장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가장 근접하는 교회성장 방식은 세번째 방식이다. 숫자적인 성장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교회성장이 교파의 교세 확장이나 인간적 제도의 보존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술한 네 가지 영역의 성장은 모두 고려해야 할 사항이지만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네번째 성장이다. 성육신적 성장은 문화 위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것은 한 신앙 공동체가 자신의 속해 있는 주변 사회의 삶과 문제들에 얼마나 참여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즉 교회가 빈곤. 착취. 기아. 범죄 그리고 절망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 행위의 촉매자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증거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가지 방식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편에서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심을 입증함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상활을 이해하도록 도와줌으로써이다. 이런 성육신적인 성장은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도전이다.

2. 교회성장과 교회의 사명

교회성장운동을 비판하는 학자들의 주장 가운데에는 성경이 교회성장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네슬리 뉴비긴 감독이나 칼 바르트 그리고 알 크라스 등이 이런 비판을 하는 데 그주요 내용은 서신서를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숫자적인 교회성장에 대한 관심을 전혀 표출되지 않으며. 또 정말 주님께서 교회가 성장하는것을 의도하섰는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비판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그런 견해가 전도 명령과 그 목표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춘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가령 로마서의 주제는 바울의 결론적인 단락으로 요약될 수 있는 바. “영원하신 하나님의명령이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그들에게 알려졌다”(롬16:26)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내가 전파하는 복음”(롬16:25)이라고 바울은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제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순종해야 할 세상의 30억 인구를 앞에 놓고 신학자들이 돌아앉아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토론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성장 지도자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복음을 듣고 믿어 순종하게 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전도 명령이 수행되고 남녀들이 믿어 순종케 될 때 기초 교회에 속한 신도들이 불어나며 교회들이 설립되는 현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지적할 것은 교회성장론자들과 비판자들 사이에 '교회'의 개념에 대한 이해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교회성장운동이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보다는너무나 교회 중심적이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제까지 교회성장학자들이 교회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성장사이의 관계를 등한시해왔던 것은 사실이며 또 충분히 그리스도 중심적이지도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것은 받아 들일만한 비판이다. 이제 교회성장운동은 그

들이 .교회.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를. 특히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회성장이 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일 수는 없다. 교회성장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궁극적인 과제이며 교회의 성장은 전도명령과 관련된 그 이전 (Penultimate)단계의 과제임에 비판자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 성경이 교회성장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이상의 비판이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전도의 사명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한편 교회가 성장하는데만 관심을 쓰느라고 사회적 책임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하나님 나라와 문화 위임의 관점에서 교회의 사회적인 사역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어느 정도까지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않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 사역의 정도가 교회의 성장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밝혀진 경험적인 사실은 사회봉사 (Social service)에 치중하는 교회가 사회참여 (Social action)에 치중하는 교회보다 새로운 신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징조들의 유형을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징조들은 사회 봉사와 관련된 것과 사회 참여에 관련된 것으로 분류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전자를 강조하셨다. 특별히 현대 그리스도 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인 후자는 예수님에 의해 구체적이며 명시적으로 제자들에게 명령된 적은 없다.

둘째. 사회 정치적인 해방과 구원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잔언약을 빌리면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사회참여가 곧 복음전도가 아니고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지만” 5항 이라고 못박고 있다. 1973년 “오늘날의 구원”이란 주제 하에 모인 WCC 대회에서 어떤 열광 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모택동의 업적을 우리 주님의 구속사역에 비기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세째. 교회의 일차적인 기능과 2차적인 기능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화 위임이 교회의 책임인 것은 분명하지만. 연구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형적인 기독 교회는 사회참여 보다는 사회봉사에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지성적인 견단을 내릴 수 있는 교회는 거의 없다. 사회참여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점은 확신하지만 그것에 알맞는 구조는 적어도 지역 교회는 아닌 것같다.

Ⅱ. 목회적 측면

1. 물량주의―양과 질

교회성장운동은 숫자 숭배 (numerolatry), 통계적 성공의 철학 (르네빠디야)이라든가 교회성장의 우상화 (W 마이클슨)라는 호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비판은 주로 문화 위임의 기치를 높이려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나왔는데. 과거에 교회성장 지도자들이 문화위임을 전도 명령만큼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음을 볼 때 당연한 것들이다.

이들 비판자들의 대부분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로서 전도 사명을 깊이 인식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값싼 은혜와 상업화된 복음의 만연이다. 교회성장론자들은 “숫자를 불린다는 목표가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충고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숫자와 통계의 사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교파의 교세 확장을 위한 성장이나 인격적 개인의 소외를 가져오는 성장 또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에만 속하는 성장이 아니라 교회성장 운동의 목표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장을 위해 쓰여질 또 하나의 비판은 선교 사역의 결과를 양적개념으로 평가하려는 강한 경향이 성공과 효율을 숭배하는 실용주의적이고 기술주의적인 미국의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사무엘 에스코바)이다. 이제까지 교회 성장 운동이 그 방법론에서 많은 미국적 가치들을 반영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류학자 에드원드 수튜어트가 지적한 대로 미국인에게 있어 본질적인 속성은 무엇이든 잴 수있다는 생각 (measurdbility)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적 가치관이 다른 어느 문화의 것에 비해 우월하다든가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중심주의를 인정해야 한다. 양으로 따지려는 미국적 경향으로 기우는 것이 무조건 양을 무시하는 경향보다 무조건 낫다거나 나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성장론자들도 교회성장에 있어서 질(質)을 반대하고 양(量)을 강조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여기며 그들중의 누구도 수준있는 (high―quality)교회의 필요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교회의 수준(질)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기준에 되는 척도가 사용되곤 하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양과 무관한 것은 없다. 가령. 정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 헌금하는 사람들의 비율. 문화 위임과 전도 명령을 위해 계획된 교회 예산의 비율 등이 그렇다. 랄프 윈터의 지적대로. 질은 양적 차원을 가지며 양을 질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숫자 놀음에는 관심이 없에 질적 수준에만 치중할 뿐이야”라는 말은 교인 수의 침체나 감소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2. 실용주의―성공과 성실

교회성장운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한다는 비판이 있다. 이른바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가령. 아이들을 주로 학교에 인도하기 위해 바나나 요리를 준다고 광고하는 것. 대형 버스를 이용해서 그 안에서 풍선껌이나 과자를 제공하는 것. 또는 무슨 무슨 대회를 개최하는것. 수정 유리의 대교회당 (Crystal cathe drals LA에있는 교회로서 로버트 슐러목사가 시무하고 있다)을 짓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나치게 실용주의적인 듯하다.

사전은 '실용주의적'이란 말을 “실제적인 결과나 가치에 관심을 두는”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교회성장론자들이 이말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람을 객체로서 다루거나 비인격화시키는 것도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교회적. 윤리적 원리들을 양보하는 것도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가치 중립적인 방법론에 한한 실용주의를 의미한다.

교회성장운동은 전도 명령에 치중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께 대한 복종'이 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전도 명령의 목표는 명백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가 이렇게 명백하기에 교회성장론자들은 '정당한' 실용주의적 방법으로 그 사명을 수행해야 할 과제에 직면한다. 도널드 맥가브란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교회를 배가시킬 것으로 기대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하는 방법들을 비판하면서. 그 자리에서 최선의 태도는 그 방법론들을 던져버리고 실제로 결과를 산출해내는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론을 취하라고 권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방법론에 관한 한 맹렬하게 실용주의적”이라고 단언하였다.

사실. 교회성장운동이 실용주의적 방법을 주장하는데에는 세 가지 근거가 있다. 문화적. 역사적. 신학적 근거이다.
사상이나 이론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미국 문화의 특징을 무조건 흉내내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여기서 방법론 적으로 민족 중심주의를 인정할 수 있다. 게다가 문화 위임을 강조하며 때로는 교회성장운동의 실용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들의 계획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실용주의적 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는 바울 시대의 로마교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동기의 문제를 말하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그리스도은 전파하나. 어쨌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므로 자신을 즐거워한다고 밝히고있다. 또 한 연구 결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동기는 대개 4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 세속적. 사회적 출생적 동기 들임을 보여준다.

성경이 또한 실용주의적 접근에 대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느헤미야는 그의 실용주의가 아니었다면 적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실용주의적이셨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죄 때문에 죽으시러 오신 분이다. 그분이 이 목표를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셨다. 그러나 이상의 교회 성장운동의 실용주의에 대한 변증은 여전히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지적은 성공보다는 성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지지해 주는 성경 구절을 고린도후서4장2절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성공 대신 성실을 주장하는 것은 청지기직에 대한 피상적인 견해라고 생각된다. 청지기직에 관한 성경 본은 중 하나인 마태복음 25장14절에서30절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자.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특별히 “성실하다”고 칭찬을 들고 까닭은 무엇인가. 단순히 그들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청지기직에 관한 일관적인 견해는 성공과 성실을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밀접한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몇 달란트가 맡겨졌느냐 하는 양의 문제는 주인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클수록 항상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형 교회에 대해 혐오감은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듯이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올란도 코스타스가 주창하는 바. '총체적 성장'을 지지한다. 교회성장이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람과 그들의 구조적인 생활 환경에 다같이 깊은 영향을 미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선교의 정당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신앙의 윤리성 문제―값싼 은혜와 제자도

교회성장의 촉진이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여기게 하며 제자로서의 윤리적인 삶을 뒷전으로 미루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결코 간과할 수없는 문제이다. 세례를 받았고 성도의 교제도 나누며 성경을 읽는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사회적 불의같은 문제들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는 헌신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만들어내는 전도 형식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윤리적인 헌신을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시키지 않고서도 진정한 제자삼는 사역이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비판들은 한결같이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사무엘 에스코바는 “매일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의 국면들 속에서의 제자도가 없는 영성은 종교성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사취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 때에는 그들의 이 행위를 회개하고 변화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란도 코스타스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교회성장신학이 윤리적인 변화의 문제를 회심 후의 단계로 밀어낸다면 회심에 대한 성경의 이해는 제한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구원. 회심 그리고 회개의 교리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편. 이러한 지적들이 지닌 위험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들이 값싼 은헤를 반대하면서 터무니없이 비싼 은혜를 주장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착취에 못지 않게 영적 착취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서 이것은 복음 전도를 어떤 정치적 견해를 선전하는 유용한 도구로 삼게 됨으로써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28장19절에서 20절의 대위임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아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여기서 '제자를 삼은 것'과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은 나누어질 수 없다.

이 구절에서 명령의 주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며 나머지 동사들은 분사 형태로서 그것 없이는 제자삼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들을 묘사하고 있다. 즉 불신자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4. 동질집단원리―문화적 단일성과 그리스도안의 다양성

동질집단원리는 논쟁이 되고 있는 교회 성장 원리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주제이다. 이 원리는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동질의 사람들이 교회를 이룰 때 교회가 성장한다는 현상학적 사실에 토대를 둔 원리인데 비판자들을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의문을 강하게 제시한다.

동질집단원리는 교회성장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전도 명령의 수행을 돕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도구이다. 교회성장운동의 본질적인 목표는 동질집단원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 명령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원리의 형성은 “사람들이 인종. 언어. 도는 계층의 장벽을 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맥가브란의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이 진술에서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로. 맥가브란의 이 진술은 기술적 (記述的)이지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현상학적이지 신학적 진술이 아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는 맥가브란의 주장은 타당하다.

둘째로. 맥가브란의 진술은 복음 전도에 관한 원리이지. 그리스도인의 양육에 관한 원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예수님과 성령님의 열매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인종적인 장벽을 넘으라는 요구와 함께 복음이 제시된다든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종교적이고 영적인 결단이자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인 결단이라고 말해질 때. 그들 대부분은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자기의 동족들과 함께 죄악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바깥에서 살기를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동짐 집단 원리의가장 중요한 논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인종. 언어. 계층을 떠나 서로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원리보다는 실제로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고 책임있는 신자가 되게 하는 현실적인 원리가 요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집단원리는 궁극적인 것 (Penultimate)이 아닌 영적 활력 정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질 접단이 이상적이라고 믿는 제랄드 팔머는 “동질집단은 한 그룹을 시작하여 성경적 이상인 이질 그룹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솔직히 시인한다. 동질집단원리는 방법론적 활력으로서. 궁극적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여전히 이원리가 안고 있는 위험은 존재한다. 동질집단교회들을 세우도록 격려하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인종 차별 주의나 카스트 제도 또는 인종차별 정책 (apartheid)같은 것들을 은연 중에 승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칼이 외과 의사의 손에서 선한 도구가 될 수 있는 반면 살인자의 손에서는 악한 도구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아예 없애버리지 않는 것처럼 악하게 사용되면 인종 차별을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올바로 사용된다면 인종 차별을 줄요나가는 효과적인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가 지닌 위험의 요소는 인정되어야 한다.
동질집단원리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것이 야기시키는 전도 명령과 문화 명령 사이의 딜레마이다.

전도 명령에 충실하자면. 이미 경험적으로 입증된 동질 집단 원리에 의한 교회성장이 요청된다. 반면. 문화 위임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세상에 만연하는 각종 차별 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갈등과 대립. 투쟁으로 얼룩진 세상의 상태는 정복하는 한 가지 길을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람들사시의 어떠한 구분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음을 분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계급.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만 문화 위임의 이 요구는 세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동질성은 전도 명령을. 이질성은 문화 위임을 각각 지지한다. 문제는 이 둘은 어떻게 다 이룰 수 있는가이다.

첫번째 대답은 우선 복음 전도에 전력하라는 것이다. 전도 명령은 문화 위임에 비해 더욱 중요하며 우선적이다. 아무도 문화 위임은 희생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로 새로운 사람들은 인도하기 위해서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에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두번째 대답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각각의 동질 집단들이 적당한 구조 위에서 서로 관련을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글쓴이 : 띠띠빵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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