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해설 (신약) - Rev. Edward Craig Mitchell (받아가기: PDF) |
성서해설시리즈
The Parables of the New Testament Explained
성서해설 시리즈
비유해설
? 신약 성서 편 ?
The Parables of the New Testament Explained
by the Rev. Edward Craig Mitchell
에드워드 크레이그 미첼 지음
배제형 옮김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 창조 때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 마태복음 13장 34-35절 -
Rev. EDWARD CRAIG MITCHELL
Pastor of the New-Jerusalem(or Swedenborgian) Church, St. Paul, Minn.
AUTHOR OF "THE PARABLES OF THE NEW AND OLD TESTAMENT SPIRITUALLY UNFOLDED"
차 례
서문 -------------------------------------9
입문(성서 비유들의 본성,사용, 해석에 관해서)-- 10
1. 반석 위에 지은 집------------마태 7: 24-27------------------- 25
2. 옷과 포도주-----------------누가 5: 36-39------------------- 34
3. 장터에 있는 아이들--------------마태 11: 16-19---------------- 46
4. 씨뿌리는 사람-----------마태 13: 3-8, 18-23------------------- 57
5. 밀밭 속의 가라지---------마태 13: 24-30, 36-43----------------- 82
6. 겨자씨-----------------마태 13: 31-32---------------------- 96
7. 누룩----------------------마태 13: 33----------------------106
8. 숨겨진 보물--------------------마태 13: 44------------------ 117
9.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마태 13: 45-46------------- 129
10. 끌어 올려진 그물----------------마태 13:47-50---------------- 138
11.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마태 13: 51-52---------- 148
12. 무자비한 종-----------------마태 18: 23-35------------------- 155
13. 포도원의 일꾼들------------------마태 20: 1-16---------------- 168
14. 두 아들------------------마태 21: 28-32---------------------- 181
15. 사악한 소작인------------------마태 21: 33-43----------------- 193
16.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마태 22: 2-14----------------- 208
17.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마태 24: 32-35--------------- 227
18. 열 처녀-----------------마태 25: 1-13------------------------ 238
19. 달란트-------------------마태25: 14-30-------------------- 249
2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마가 4: 26-29----------------- 262
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누가 6: 39------------------ 274
22. 빚진 두 사람-------------------누가 7: 41-43----------------- 285
23.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 10: 30-37------------------ 296
24.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 11: 5-8--------- 309
25. 어리석은 부자------------------누가 12: 16-21----------------- 320
2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고 기다려라-------누가 12: 35-48------- 331
2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누가 13: 6-9-------------- 343
28. 낮은 자리에 앉으라-----------------누가 14: 7-11--------------- 351
29. 핑계들--------------------누가 14: 16-24-------------------- 360
3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누가 14: 28-33------------------ 372
31. 잃었던 양 한 마리-----------누가 15: 3-7--------------------- 383
32. 잃었던 은전------------------누가 15: 8-10------------------- 393
33. 잃었던 아들--------------누가 15; 11-32---------------------- 403
34. 부정한 청지기----------------누가 16: 1-12-------------------- 429
35. 부자와 라자로---------------누가 16: 19-31-------------------- 441
36. 보잘것없는 종---------------누가 17: 7-10--------------------- 453
37. 부정한 재판관----------------누가 18: 1-8-------------------- 462
38. 바리사이파인과 세리------------누가 18: 9-14------------------ 475
39. 선한 목자--------------요한 10:1-16------------------------- 485
40.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한 15: 1-10------------------- 496
서문
이 책은 신약 성서의 비유를 새 예루살렘 교리의 관점에서 살펴 실제에서 응용이 잘되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는 비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살필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노력한다해도 비유에 관한 주제를 총망라해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각 비유를 관조해서 해석하는데
몇 가지 국면이 있어지겠지만,각 경우에서 저자는 실제 사용에 가장 적합한 듯 보이는 국면만을 선택했다.
각 비유의 설명은 그 비유 자체 내에서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 생각되어 꼭 필요한 경우,
설명을 반복했다.글자적 견지를 중시하는데 있어,저자는 해석의 일반적 방법, 상응이나 표현성에 관한
사실과 원리에 대해서는 이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신학 저술에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그리고 몇몇 예를
드는데 있어서,저자는 다른 주석들이 제공하는 암시들을 사용하기도 했다.이 책과 짝을 이룰 구약 성서
비유 역시 기획하고 있음을 첨부해 드린다.
입문
(성서 비유들의 본성,사용, 해석에 관해서)
정의
단어 “비유, parable”는 “곁에 놓음, throw beside,” “비교함, compare”라는 그리스어 파라볼레(parabole)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비유를 정확히 구별해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힘들다.그 이유가 기존에 있어 온 정의는
비유의 필수적인 어떤 요소를 제외하고 있다거나, 단지 비유적 형체인 것만을 포함시키거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터 사전(Worcester's Dictionary)은 이렇게 비유를 정의하고 있다. “자연 또는 삶에 있는
실제적인 어떤 것에 기초된 짧은 이야기 또는 우화, 그 이야기가 즉각적인 관심사의 어떤 것과 비교함으로
도덕성을 끌어내는 이야기들.” 대주교 트렌피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유는 하나의 가공적이긴
하나 대체로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취해져 보다 높고,덜 알려진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 사용된 대화체들.”
비유는 우화(fable)와는 다르다. 그 이유가 우화는 생명 없고 추론 불가능한 것들이 인간 존재로 행동하듯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비유는 인간 존재로 가능한 것들을 취급하고 있다.단지 그 이야기가 특별한
경우를 위해 창안되었다는 점에서만 가공적일 뿐이다. 풍유(allegory)도 의미를 엄격하게 보면 비유와 다르다.
그 이유는 풍유에서는 사상이나 품질이 인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유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해석하고 있으나,비유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영어 성경의 공통된 번역,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단어 “비유”는 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1. 수수께끼
(enigma), 또는 희미하게 말함 2. 풍유적인 어떤 담화로서 3. 가공적이나 가능한 대화체로 어떤 진리를
탐사하고 예증하려고 고안됨.그러나 비유를 취급할 때,일반적인 비유 목록은 우화나 풍유, 예언들,
환상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것을 나열하고 있다.
비유는 진리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들이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따라서 진리를 풍유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닌,상응에 의한 서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짝을 이루는 법칙에 의한 서술인 것이다.
상응 (correspondence)
영적 원인인 내향의 것과 영적 원인의 자연적 결과인 외향의 것들 사이에는 명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물리적인 세계 속의 것들은 영(spirit)이라는 내부 세계 속의 것들을 명백하게 해주거나 체현된 바깥쪽
형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안쪽 삶을 언급하는데 있어 육체적 삶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되 풍유적 방법,또는 상징적 방법으로 사용할 뿐이다.우리는 진리를 본다고
말하거나,애정이 훈훈하다라던가,명백한 생각, 달콤한 느낌 등등의 말을 늘 사용한다, 이런 용어들이
우리의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정확히 일치해서 사용될 때, 우리는 상응에 의거
말하는 것,또는 자연과 영을 대응시켜 말하는 것이 된다.이 법칙은 성경이 씌어진 수단이기도 하다. 성경의
글자 의미는 바깥쪽 사항들,인간의 자연적 삶에 속한 것을 취급하면서,그 반면 영과 육체의 관계와도
같이,글자 내에는 변하지 않는 의미,시종일관된 의미, 계속적인 영적 의미가 있어 언제나 인간 본성의
영적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안쪽 의미,즉 영적 의미는 상응의 법칙에 관한 지식과 사실들을 수단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는 영적 진리들을 표현하고 있고 영적 삶에 응용된다. 그래서 영적 진리가 감추어
놓인 글자 언어는 유사함을 수단으로 글자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다시 말해서 유사함이란 상징물,상응물,
그리고 표현물의 형상을 수단으로 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
주님이 성서에서 비유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다음 논제는 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다. 이 의문에 대하여서는 어떤 억측도
남기지 않는다.그 이유는 주님께서 마태복음13장 13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들어도 듣지 못하고,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진리란 일종의 칼과 같다. 잘 사용하면 우리를 잘 섬기는 물건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칼을 다룬 자를
다치게 한다.이와 같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지식이 더 많아질 때,그 지식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하면,
우리는 더 많은 단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그 인간에게 있어 최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논리적 서술은 서술 그 자체가 인간으로 이해하도록 명령하는 셈이지만, 비유는
진리를 받고 사용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 진리를 운반해 주면서도, 명백한 진리를 들을 준비가 안된 이들을
위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비유는 시선을 끈다
주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데 대한 이유는 비유가 지닌 놀란만한 특성과 동시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서였을 것이라 본다.대화의 시작에서 비유 형체는 듣는 자의 시선을 잘 잡아당기고,그 속의
교훈이 인정되어 상대방 속에 정착할 때까지 들은 자로 하여금 잘 붙들고 있게 해준다. 비유는 진리를
큰 힘으로 마음 앞에 가져다 놓는다.이때 유사성은 기억 속에서 교훈이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영적 사항들은 이 세상의 인간 삶의 통상적인 것들과는 달라서 자칫하면 기억에서 미끄러져 빠져나가기
쉽다.그러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있는 흔한 문제와 관련되어 생각할 때,비유는 우리의 상상 속에 놀랄
만하게 인상지워 놓여있게 해준다.이렇게 되면 진리들은 이중적으로 표현되어진다.진리의 영은 사실이라는
육체로 준비되고,육체는 원리의 영으로 준비를 갖춘다.그래서 진리의 각각 측면은 마음속에 진리를 고정시킬
뿐 아니라 다른 측면이 마음에 고정되는 것까지 돕고 있다.
비유는 시선을 잡아끈다.그 이유는 비유가
원리를 구체화 해 놓은 그림이기 때문이다.비유 안에서 추상적인 원리들은 단단한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다시 말해 비유는 모든 마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데, 그 이유가 비유는 모든 이들이 아는 친숙해진 것들로
형성된 그림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세상에서 움직이며 살아간다.육체가 일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들은 경험을 수단으로 우리의 감각들과 고리를 형성해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마음들이 열리는 시작 초반에는 늘 경험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인 것들이 드러나야만
영적인 것에 관한 분명한 사상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비유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모든 타락된 본성
속에 숨겨 있는 악덕을 다루면서,한편 거듭나는 사람이 배워 실제에 응용해야 할 미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는 마치 해묵은 달력과 같이“시대에 뒤떨어지는”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그 속의 진리는“매 아침을 새롭게,매 저녁을 새로워지게” 하는 주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같다.
비슷한 것에서의 지각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슷한 것(유추)에서 오는 지각은 인간 본성의 모든 국면에 공통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글자가 주어진 동방인들은 쉽게 비슷한 속성에서 지각한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같은 종류들은
모든 인간 속에 놓여져 있다.따라서 이 능력을 비합리적인 독단적 교리가 내려 누르지 않는다거나,감각적
삶이 질식시키지 않는 한,언제나 인간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비유에서 사용되는 진리의 형체는 모든
본성에,모든 세대에 적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따라서 이 형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사람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치는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것이다. 생각이나 표현의 양식이나 어조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그러나 유추의 원리는 언제나 인간과 더불어 남아 있는데,그 이유는 그것은 모든 본성 속에
있는 같은 성질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으나,영적 마음은 거의 열려져 있지 않다.따라서 모든 시대
풍토에서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각 인간의 감각에 먼저 접촉하는 것이다. 그
다음 유추를 수단으로 진리는 감각을 넘어서 영적 삶이 열린 사람에게로 들어간다.
비유는 의지에까지 도달한다
그 다음 비유 속의 진리는 마음을 통과해 의지를 두드려 설사 논리적 서술이 주어져 이해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에도 스스로 용납하도록 마음을 강요시킨다. 명확하게 지적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많은
진리들은 인간 속의 각종 편견으로 인해 명확한 진리에 마음 문이 닫혀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비유가
지닌 놀라운 형체는 의지를 갈아엎어 지성의 문을 열도록 하여 마음이 변화할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런
한 예로 바쎄바에 관련하여 다윗을 견책한 나단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는 다윗에게 진리를 보여주었다.그래서 그는 비유 속의 악행자에 대하여 분노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한
진리는 그 진리가 적용된 사람에게 예언의 말을 수단으로 쉽게 자각되었던 것이다.
비유는 심판을 위해 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꺼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비유의 형체는 그 사람으로 자신의 영적 위치가 어딘
지를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심판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그 이유는 비유는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형편에
맞추어 진리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은 형체인 반면, 진리의 형체는 듣는 자가 기꺼이 회개하지 않으면 듣는
자의 마음에 진리가 옳다는데 대한 뉘우침이나,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회개는
진리를 향한 인간 의지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리하여 비유는 진리를 사용하겠다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날라다 주고, 동시에 교훈을 받을 채비가
안되어 그 교훈을 모독할 것 같은 이들로부터는 진리를 감추는 두 가지 일을 수행해 낸다. 마치 땅콩의
껍질과도 같이, 비유의 글자는 진리를 남용하려는 것에서 비유의 알맹이인 가르침을 보호하면서 장차 사용을
위해 잘 보존되게 해준다.또는 이스라엘 후손의 여행을 인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과도 같아,여행의 안내와
더불어 추격해 오는 에집트 군대로부터 그 후손이 안보이게 해준 것과 같다.
비유는 형상(image)이 고정되게 한다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비유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진리를 감추이게 하지만, 무관심하게 듣는 자에게도 비유의 형상만은 고정시켜 주어서 차후
비유 속에 있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비유를 붙잡을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비유의 글자는
땅에 떨어진 씨의 껍질과도 같아 속에 든 생명이 싹트기에 적절한 토양의 조건을 갖출 때까지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
비유는 성령으로 차 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제자들에게 확답하신 것은,성령이 와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것, 그분이 그들에게 말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그들 기억에 가져다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취되었는데,과거 그들 마음에 씨와도 같이 뿌려진 형상들,즉 비유를 수단으로 있어졌던 것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그 속의 영적 의미들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비유들은 과거 그들의
마음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에 단지 형상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 자체가 진리의 빛으로
팽창되며 사랑으로 뜨거워지자, 그들 속에 있던 형상들이 벗겨져서 진리의 더 높은 양상에서
더 높은 생명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순수한 영적 가르침은 무엇일까?그것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준 다기보다는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고 훈련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가 들은 정보 속에 있는 모든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씨는 말씀이다.씨의 성장은 심어져야만 한다는 조건뿐만 아니라 심겨진 토양의 조건에도
의존된다.어떤 수준의 진리가 보여지고,어떤 국면의 진리가 받아들여 질 것이냐는 것은 진리를 받는
마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땅에 씨가 떨어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될 것이다.
똑같은 사실,똑같은 교리라 해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진리만을,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 진리를,천적인 사람에게는 천적인 진리를 전달한다.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 그들이 감각적인 마음
상태에 있었을 때,주님이 말하신 비유는 그들을 혼동하게 해주었던 때가 많았다.그래서 해처럼 명백한
빛보다 구름이라는 희미함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주님은 구름과 함께 오신다.”
각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는다
진리의 빛은 각 사람에게 각자가 정신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어야 진리를 볼 수 있는지 밝혀 준다. 마치
자연계의 태양이 쏟는 밝은 빛에서 어떤 이는 그 빛으로 인해 자기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보겠지만,
어떤 이는 태양의 강한 광선만을 똑바로 쳐다보아 오히려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태양과 자기와의 위치에 따른 결과는 극과 극이 될 수도 있다.우리는 주님이 말하시는 것을 듣는다.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방법으로 듣는 위치에 있어야 함이 선결 조건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 가진 자에게 주어지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느님에 속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그는 그 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비유 속에 있는 두 겹의 속성은 주님 자신 속에 있는 속성과도 같다. 그분은 그분의 인성
(humanity) 가운데서 그분을 영접하는 마음의 열림에 따라 하느님으로, 때로는 단지 인간이신 듯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의 교리는 인간이 만든 신조(creed)로부터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지만,
그 돌은 새 예루살렘에서는“모퉁이의 돌”이 되어 있다. 이 돌은 비유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그분은 그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된 도리의
정도에 따라 잘 알도록 배려하시기도 했다.우리가 주님의 속성 측면에서 접근할 때,우리는 그분의 속성을
더욱 명확하게 관조할 수 있다.그분의 속성은 모든 진리와 더불어 존재한다.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속성을
사랑하여 우리 인격을 형성하는데 사용한다면,우리는 더욱 더 충분하게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게 된다.
비유는 주님이 일하실 때 필요하셨다
왜 주님이 비유로 말하셨는가를 좀 더 외적 측면에서 찾는다면, 그분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데
필요하셨다는 것, 지상에서 그분이 오신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하셨다면 유대인의 폭동과 분노를 폭발시켜
그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는데 간섭을 받으시기 때문이라는 등등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런 저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진 목적과 협동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셔서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그분의 가르침에 든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되,
그가 받을 수 있는 정도만큼에서 진리의 어떤 면을 보여주셨다.
이리하여 선한 사람들의 거듭나는 일을
도와주시고,준비된 사람들을 개혁과 회개에로 인도해 주셨으나,진리의 영적 측면을 볼 준비가 아직 안된
이들에게는 그들의 장래를 위해 기억 속에 진리의 형상이 고정되게 해주시고, 진리를 명확히 보기는 하되
진리를 남용하게 될 사람들은 그들이 알게 된 진리를 모독하는 가장 비참한 죄에서 보호되게 배려하셨는가
하면 심판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빛 가운데 심판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하신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었다. 귀를 연 자는 들을 수 있지만, 자기들의 영적인 귀를
틀어막은 자의 경우는 그들에게 상해를 입힘도 없이 지나쳐 갔다.
유추함의 원리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추의 원리를 납득해야 한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생각을 어느 정도
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 원리는 우리 삶의 양면인 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목적, 원인, 그리고 결과 사이에 있는 논리적 연결을 지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에서 취급되는 자연의 사실이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 원리는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도울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글자 의미와 영적 의미에 있는 상응은 단지 서술 형체뿐만 아니라 감각, 사상까지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로 마음 안에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진리의
상징물로 고용된 것들에 관해 적절한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교리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비유가 진리의 영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에 고리를 맺기 때문에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교회 속의
교리에 관한 좋은 지식의 획득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입해 주고자 하는 영적 진리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가지게 해준다.이런 사항은 다른 문제들,다른 영적인 사항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기회를 가진 셈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가진 것은 더 많은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이 가르친다
주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을 납득하는 최상의 방법은 주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그 사람들에게서
느끼셨던 대로 우리도 느껴 보는 것이다.그분은 파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상한 심정을 싸매 주기 위해 오셨다.우리가 그분의 느낌과 생각 안으로 진입해 음미할 때,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역시 음미해 볼 수 있다.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똑 같은 목적,즉 인간 구원에 대한
모든 수단이기 때문이다.만일 우리가 인간 본성을 관조하되 남을 단죄하기 위해,또는 자신의 속셈을
챙기기 위해 관조한다면,우리는 무한하신 사랑의 가르침을 움켜 쥘 수 없을 것이다.
비유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비유 하나 하나가 독립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단지 비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상응으로 가르치는 신성한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들이 각자 독립된 위치에 있으면서 그 모두는 서로 관계가 있다.한 예로 마태복음8장에서
“씨뿌리는 자”로 시작되는 몇 개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들은 거듭남의 진보를 예증하면서 모두
연결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화랑을 걸어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면밀히 검사해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비유를 전체적 시리즈 또는 개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각 비유는 각 나름대로 우리를 가르친다.그럼에도 시리즈로 된 미술 작품과도 같이 각각은 나머지
비유들을 설명해 주고 있고,모든 비유는 각 비유가 이해되도록 돕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관조할 때,우리는 천국의 화랑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우리가 천국의 인도,
성령의 이끌림을 원한다면,그림들을 설명하는데에 우리를 참석하게 해줄 것이다.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설명되고 이해된 부분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영적이고 천국적인 음미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를 안내하는
그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적은 부분일지라도 꼭 응용하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각 복음서가 조금씩 다르듯 각 비유도 차이가 있다
복음서만 가지고 말할 때 각 복음서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듯 각 복음서 내의 비유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네 복음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온 진리의 서술이다.이는 영의 세계에 있는 네 방위로부터, 거룩한
성에의 접근이 네 측면에서 있는 것을 말한다.이와 같이 개별적으로는 각기 다르고,다양한 특성을 소유했다
해도,복음서,그리고 그 속의 비유들은 모두 다 신성하게 무한한 사랑 속의 위대한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들
인간에게 도달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은 입으로 말해지는 비유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비유까지
동원하고 있다.예를 들어보자.오지그릇을 사 가지고 벤힌놈 골짜기로 가서 장로와 사제 몇 사람에게
그 그릇이 깨지는 모습으로 가르치도록 예레미야가 명령받는다 (예레미야 19:1-11):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와
끈을 만들어 그것을 주님의 말씀과 함께 여러 왕에게 보내는 비유 (예레미야 27:2): 하나니야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순 뒤 있게 되는 예언의 비유 (예레미야 28:18):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비유 (예레미야
32:6-15) 등등이다.
또한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행동을 통한 비유도 있다.묵시록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본 것,환상들은 행동된 비유들이기 때문이다.아주 큰 규모로 행동된 비유는 인간
거듭남을 예증하는데 보여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더불은 광야 여행이다.
보편적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지상에 , 있는 일상 경험을 비유로 삼아 우리를 가르치시고 있다.지상의
우리 삶에 속한 것은 사실상 영적 삶에 대한 비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은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고 경청하려 한다면 영적 교훈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고대의 언어는 비유적이다
인류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비유가 얼마나 널리 보급되었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더 충만한 영적 시야가 인간을 더 광대한 감각적 삶 위로 들어올릴 때,바깥 자연
속의 모든 것은 마음속 내적 세계에 관해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까지 쳐다본다.자연은 일종의 거울이다.그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비유로 충만해 있는 주님의 일을 발견한다면,비유의 언어로 씌어진 그분의 말씀 역시 발견하는 바,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글자로 교회에 내려진 모든 것은 기독인인 우리에게 와지는 영적 실재에 관한 형상으로 존재해 왔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으나,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오게 되었다.”
예증과 견책
주님의 비유들 중에 어떤 비유는 위대한 진리를 예증해 주기 위해 주어진 듯 보이나, 다른 비유는 그
당시 널리 퍼진 죄들을 견책하시기 위해 주어진듯 여겨질 때도 없지 않다.그러나 이 비유이든,저 비유이든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각 비유 속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교리를 강력히
주장하거나, 삶을 위한 교훈 등등 모두는 태양 광선이 열과 빛을 다 같이 보내듯 따로 따로이되 동시에
한 비유 속에 존재한다.그 이유는 기독교는 신조에 있는게 아니라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신조(creed)는
삶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가 있고, 종교 생활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교리는 삶에 관한 이론이고,행동은 삶 속에서 이론이 구체화된 것이다.
비유의 해석
따라서 주님의 비유에 관한 해석의 법칙은 무엇일까? 많은 각 개인은 그들 나름대로 비유를 읽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밝혀질 수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해석의 법칙은 없을까?자연이나 인간에 속한 모든 것에
법칙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하느님의 사랑은 계획이나 방법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그 중에서 방법이
법칙인 것이다.그래서 인간이 사는 두 세계,영계와 자연계 속의 모든 것이 질서, 또는 법칙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면,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법칙에 속한 어떤 질서에 따라 작동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기록되고
말해지는 비유들이 어떤 법칙에 일치되며 골격이 짜여 있다면,비유들은 법칙에 의거 읽혀질 수 있다.
법칙이 존재한다면 이는 밝혀질 수 있고,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고용하게 된다.만일 우리가 법칙의
원리를 알고 있고,어떤 사건의 사실들을 알고 있다면,우리는 그 사건에 법칙을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으면서 자신의 관념에 머무른다면, 비유로부터 끌어 올려져 알게 된 진리에
기초가 없다.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려진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비유의 가르침을 건설하는 반석을 가진
셈이 된다. 모든 과학은 그 나름대로 법칙과 용어를 가지고 있다. 미술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mode)이
있다.음악을 기술하는 경우,그 나름대로 소리를 위한 표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배울 때,
각자의 지식이나 기술에 따라 각 사람에게 모든 것을 똑같이 말해 준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관념이나
변덕스러움을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상응의 법칙
이미 살핀 바와 같이,성경의 비유는 상응의 법칙,즉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상대물에 의거 씌어져
있다. 상응의 법칙은 육체와 영 사이의 관계를 포함해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위대한 법칙이다. 비유의
글자는 인간의 자연적 삶 속의 것들로 되어 있지만 비유가 예를 들어 증거하는 영적 원리는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법칙이다. 이런 관계가 인간의 육체와 영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진리는 자연적 삶에 흔한
사항들에 기초를 두고, 비유라는 형체로 놓여져 사람들이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하여 유추(analogy)를
수단으로 해서 자기들의 영적 마음이 비유의 의미에 열리게 할 수 있다.
자연과 영의 대응물,상응의 법칙에서 우리는 비유 해석에 관한 원리를 가진다.이 원리의 응용은 열려진
모든 마음,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정신적 진보가 어느 수준에 있든 비유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응의 법칙은 변동이 없는 원리,또는 해석의 법칙이요,이 응용은 비유뿐만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모든 다른 부분에도 응용된다.사실상,우리 인간 삶의 모든 경험이나 현상에 적용되기도 한다.세상에는
한 분 하느님,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고,해석의 법칙도 하나뿐이다. “들을 귀 가진 자는 들을 것이다.”
비유의 세부 사항에도 진정한 뜻이 있는가?
주님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확실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게 해준다. 얼마나
많은 비유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비유의 세부 사항들을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일반 원리를
우리는 수집했는가? 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이런 요점 사항들에 대해서는 계속 확정짓지 못한 채 연기되어
왔었다.그러나 신성한 법칙이 존재하고,비유는 이 법칙에 따라 골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비유는
그 법칙에 의거 완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 속의 세부 사항 모두는 그림 속의 세세한 부분과
같다.전체로서의 그림을 구성하는 것이 세부 사항이다.그래서 비유를 해석해 가는 가운데 세부 사항에서
주님 스스로 생각을 어떻게 맞추셨는지를 알게 해준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신 주님의 방법,
생각을 상기해 보라.예수께서도 세부 사항에 관한 해석을 주고 계신다.이 구절에 덧붙여 기억해 볼 것은,
이 때 주님께서는 듣는 자에게 걸맞는 해석,즉 외적인 해석만을 주셨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외적 해석만이 주어졌는데,그 이유는 그들이 비유에 관한 승강된 가르침,
영적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도 가르침을 얻어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예수님 스스로 사용하신
방법을 생각하면 결말이 나리라 본다.사실 상응의 원리로부터 살피면 위의 의문은 명백해진다.
우리가 상응 속의 원리와 사실들을 따라가는 한, 우리는 비유의 세부 사항까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보증 없는 추론들
한가지 위험한 것은 상응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추론으로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대중화한 방침으로든지,비유의 상응을 가지고 추론하려 들든지,모두 보증 안된 것들일 뿐이다.
예를 들면,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했다고 서술하는“열 처녀의 비유”를 가지고, 인류의 절반은 구원되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면,이는 주님의 비유에서의 가르침이든,그 외 다른 구절에서든,
어리석은 추론을 생산하는 것일 뿐이다.이런 추론은 상응의 법칙이 응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상응이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관계,마음의 눈인 영적 시야와 육체의 눈인 자연적 시야 사이의 관계이다.그러나
보증 없는 추론은 외적인 이것과 또 다른 외적인 저것과의 비교일 뿐,인간 삶의 법칙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관한 모든 실제적인 상응들을 살피되, 정당성이 없는 보증도 안되는 추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유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성경의 교훈을 끌어내야 하리라 본다.
상응은 신성한 원리이다
새교회 밖에서의 큰 곤란은,상응의 원리를 신성한 원리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이들은 비유가
인간을 본따서 만든 석상과 동등한 형상으로 생각한다. 사실 석상은 어떤 인간 형상의 모습인바 바깥 형체는
비슷할는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초상화의 경우,색깔까지 그 사람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속 부분은 불가능하여 오로지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그러나 비유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비유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인간의 형상이다.바깥으로 구체화된 열정은 그 열정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마치 웃는 얼굴이나 양팔을 벌린 모습은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 사랑이고,반대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을 경우,그것은 그 사람의 분노의 모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유로부터 외적인 것들인 자연적 추론이 아닌, 자연적 결과에 들어 있는 영적 원인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비유는 중심 되는 진리로부터 붙잡아야 한다
비유를 해석하여 영적 교훈에 가장 잘 도달될 수 있는 것은 먼저 비유 속에 있는 중심 되는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그림의 전체 중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중심된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비유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공원의 중앙에 위치한 사람이
사방의 길을 볼 수 있는 경우 같이 된다.
구심점은 비유의 중심 원리에 해당되고,사방으로 뻗는 길은 비유의 여러 상황을 말한다.그래서 중심
원리가 좁고 넓은 길들을 통제하여 간다. 따라서 공원 한 중앙에 위치한 사람은 공원의 계획도 쉽게 알게
되고,공원의 특정 지역들 사이의 연관성도 이해할 수 있듯이,비유 해석의 중심에 선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에
관한 일반 계획,서로 다른 듯한 비유간의 연결이나 관계까지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원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은 공원의 특정 구역과 구역의 연결을 납득 못하듯, 비유의 중심
원리를 파악치 못하고 바깥으로만 맴도는 사람은 비유의 가르침을 납득하지 못한다.
비유 속의 중심 진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경우,우리는 그 비유의 전후 문맥을 살피거나,소개되는
상황,또는 응용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을는지 모른다.주님이 토론하시는 것,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응용하기를 바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우리는 그분이 의도하시는 가르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하학에서의 경우 주변은 언제나 중심에 이끌려 있지,중심이 주변에 매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중심 되는 진리는 비유가 올바르게 해석되게 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응용 가능하게 해준다.
비유는 예증하는 구절들이다
비유는 논쟁적이지 않고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교리를 확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비유 속의 중심
진리를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비유의 응용 또한 가능한 것이다. 전후 문맥 속의 모든 상황은 비유가 예증하는
중심 진리를 내세울 때만이 하나로 뭉쳐진다.
비유 속의 진리는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중심 원리,
또는 진리가 언제나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일단 발견된 이후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있다.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데 노력이 많이 들었지만, 그 뒤의 모든 사람들은 그 결과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 속의 비유는 주님의 작품이므로 그 비유들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분이 밝혀 두신 법칙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비유는 영적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을 뿐,어떤 국가나 교회사,예언하는데 기발난 생각들을
제공하려고 주어져 있지 않다. 교회들의 역사에서 모든 종파나 그 종파의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입증하려는데 사용되도록 비유는 강요당해 왔었다. 그래서 상징적이거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비유의
경우,쉽게 남용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새교회 밖에서의 경우, 비유의 영적 가르침은 몇 계단 올라간
수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는 자연적인 의미일 뿐,확실히 구분되는
영적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영적 의미는 외관상으로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비유의 영적인 해석은 비유의 글자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놓고 새교회에서도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위의 사항이야말로 새교회가 비유를 해석하는데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유의 글자와 영의 관계는 인간의 육체와 영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여겨진다.그럼에도 그 둘은 아주 가깝게 연결이 가능한 가운데 존재한다.우리가 제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연구하여 이해했다 해도 그것 가지고 인간의 영을 이해하는 수준까지 오를 수 없다. 사실
노골적으로 불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자연과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이 더욱 물리적 삶을 연구할수록,그들은 더욱 영적 삶의 존재를 덜 믿는다.
왜?이유를 정밀하게 말한다면,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영과 육체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 둘의 연결은 연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응성에 있다. 영적 삶을 명백하게 이해하고저 하는 사람은
그 삶의 증거를 물리적 삶을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연구함으로 발견하려 들지 말고 자신의 영적 마음을
열므로 해서 발견해야 한다.영적 마음이 열려질 때,과거 영적 사항을 지각하는데 장애물이었던 자연
속의 참 사실들은 이제 자신의 열린 눈을 통해 그에게 영적 삶을 확증해 주고, 예증물도 되어 주며 응용할
수 있게 한다. 비유를 해석하는 새교회의 방법 속에서 발달되는 영적 의미들은 글자 의미와 전적으로 끊어져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영과 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는 정도 이상으로 글자와 영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연결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끊어져 있지 않다.
성경의 영적 의미,이는 인간의 영과 같이,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그 존재의 비밀을 끝내 밝혀 준다.
이미 알려진 영적 원리들은 진리의 빛으로 보는 이에게 비유의 비밀을 밝히고 응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이유가 진리는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이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영적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해석을 위한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못한다. 확정된 법칙을 가지지 않은 채 비유에서 의미를 찾을
경우,그는 성경에서 의미를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경을 밀쳐내어 놓고 만다.이렇게 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성경은 인간에 의해 남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 같은 영으로 성경의 글자에 다가가는 사람, 주님이 자기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준비가 된 그 사람에게,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한 생명수가 솟아오르도록
하는 샘이 되어 줄 것이다.
< I >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실제에 적용 안된 진리의 불안정성 -
성서 본문: 마태복음 7장 24-27절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 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종교는 삶과 관계가 있다
이 비유는 주님의 비유 중에서도 의미 파악이 가장 명백한 비유에 속할 것이라 본다.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두드러진 요점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실제화된 진리만이 시험에
잘 견딘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 이는 주님이 말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밝혀 주심이다는 것,
26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복음 7장 24-27절
우리의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이라는 영혼의 정부(government)를 위해 그분이 내려놓는 위대한 삶의
원리들이다.이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인 것은 그분은 신성한 진리이시요,인격화되신 분이 그분이시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다른 성경 부분에서 주님은 말하시기를,“너희가 듣는 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선으로부터 이다는 말이다.
신성한 선은 아버지요,진리는 아들이다.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선이 진리와 하나를 만들듯 하나인
것이다.진리는 선의 형체이고 진리를 수단으로 선은 그 자체를 명백히 한다.마치 불의 열이 불의 빛과
불가분하게 하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듣는 것
속뜻에서 듣는 것은 속 사람,즉 영이 듣는 것을 말한다.그리고 그 영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은 진리이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되고,그분의 소유인 그 말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자연적인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고려해 봄도 없이 단지 과학적인 수준 정도에서 진리를 원리로서 채택한다.예를 들면,세상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말하기를,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다”고 말하고, 그는 가장 정직한 정책을 채택한다. 채택하는
이유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정직한 정책보다 정직한 정책이 소득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 받지 않고 세상적인 정책에 규율 받아진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정책을 선택함에
있어 뱀의 신중성을 사용해 간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고 뜻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이 있는 사항을 행동에
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종교적인 원리에 의해 규율되어 진다.
오늘 비유는 경고장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 경고가 갖는 힘의 출처는 천국은 신성한
진리를 그저 알고 이해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고 이해한 뒤 행동함에 의거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있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사람”인지 아니었는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양쪽 다 듣기는 했고, 양쪽 다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전자는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응용해서 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경우이나, 후자는 그분의
말씀을 지적 측면에서는 간수했으나,일상 생활에서의 응용이 없었던 결과,시험이라는 폭풍이 불어닥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영적 죽음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는 한마디로 그 말씀을 행동에
놓기 위함이요 듣는 목적인 바,듣는 것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행하는 자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세상은 많이 아는 자를 슬기롭다고 흔히
부른다. 그러나 주님이 슬기로운 자라고 하실 때 그 사람이란 자기 지식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선용을 만드는
자를 두고 일컫고 계신다.어리석은 자란 지식을 선한 삶에 응용 못했기 때문이다.슬기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증거 한다.영적 의미에서의 이 비유는 영적인 사항들,즉 영이
마음속에서 짓게 되는 영적인 집과 관계가 있다.
영적인 집
마음은 각자의 영적인 집이고,그 집은 각 개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음은 의지와 생각으로 구성되고 의지는 애정(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생각은 지성을
동반하고 있다.인간의 영적 삶은 그의 마음,즉 그의 의지와 이해성 속에 존재한다. 각자의 영적 삶의
질,또는 삶의 종류는 그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원리 하에 각자의 마음을 짓고 있다. 뾰족이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될 집을
우리 속에 짓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계획에 의거 집에 구조물을 하나씩
하나씩 붙여 세워가고 있다.우리가 이 집을 천국의 재료들인 선한 애정,진정한 생각들로 짓고 있다면,
우리의 주님은 그 집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주님이 거하실 집을 짓게 된다.그 이유는 그분이 말하시는 바,“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23).
선한 사람이 자기 몫인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동안, 주님은 그분의 몫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통해
우리 속에서 집을 실지로 지으신다.악한 사람의 경우,악령이 그에게 역사해서
그를 악마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 속에 짓게 되는 집이라는 인격은 지어지는 집, 즉 상부 구조에만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그 안정성은 집이 앉게 되는 기초에 의존됨을 잊어서는 안된다.견고한 기초 없이 안전한 집은
28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복음 7장 24-27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번쩍거리는 궁전일지라도 그 기초가 가라앉는다면 그 궁전의 가치는 하루
아침에 없어지고 만다.
반석
성경 글자에서 반석(rock)은 진리에 대한 상징물이다. 신성한 인간 측면에서의 주님은 진리이신 고로
그분은 바위(rock)라 불리우신다.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 나의 하느님, 내가
숨을 바위...” (시편 18:2).
반석,그 위에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짓는데,그 반석은 주님이시다. 좀더 뾰족한 의미로
보면 반석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우리는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는다.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은 주님의
진리 위에 마음을 세운 것이며 순수한 믿음을 붙잡게 된다. 위에서 살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은 집의 두
부분과 같다.의지는 집의 기초이고,이해성은 기초 위에 세운 상부 구조이다. 의지가 믿음 속의 진리를
굳게 잡고 있을 때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보고 이해한 뒤 우리 심정을
그 진리,주님의 진리 위에 정착시킬 때,한 마디로 그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이 영위될 때 반석 위에 집은
건설되는 것이다.
모래
“모래”란 의지로 사랑됨이 없이 기억이나 지성 속에 놓여 있는 진리를 상징한다. 바위나 모래는 똑
같은 재료인 돌로 구성되어 있다.둘 다 자연계의 법칙에 따라 서로 단결해 나가고 있는데,모래는 과거
수많은 세월 동안 큰 바위가 서로 결집된 상태가 흐트러진 죽은 바위의 해골들이다. 생생한 바위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우리 마음에서 결합되고 응고되어 서로 단결되어 있는 생생한 진리와도 같다. 이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원리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 속의 분자는 서로 풀리어 있어 서로가 접합하고
있을 뿐 결합되어 있지 않고 서로 서로 옆에 놓여 있는 상태이므로 기반을 주지 못하는 기억이나 지성
속의 진리들과 같은 것이다.
의지에 기초를 둔 진리, 즉 진리에 의거 살고 있는 믿음이라는 반석이 아니면 단단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6장 49절에서는 더 뾰족하게 서술되는데,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
반석 위의 교회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셨다. 우리의 주님이 그분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반석이란 진리를 살아 내는 믿음, 즉 의지 안에
기초를 둔 진리이다.우리가 반석 위에 영적인 집을 건설할 때 그 집이 교회인데,그 이유는 우리 주님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이렇게 해서 인간 안에서,
믿음의 진리 안에서,사랑 안에 기초를 두어 뿌리를 내린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에 원리를 두지 않으면,자아 사랑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그래서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천국으로부터가 아니면 그는 천국적인 것을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아에
의존하면 어떤 힘도, 안정성도, 견고함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리를 지상적으로 받게 될 때 그 진리는 자기에게 자기 속의 악들을 보여주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악들을 끊지 못하며 진리의 실제 응용 역시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우리에게 왜,어떻게 모래가 우리 집을 짓는데 불안정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비
집의 위험은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에서 온다.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위험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든 공히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는 버티고 다른 하나는 허물어진다.반석
위에 세운 집이 별난 재주가 있기라도 해서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것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피하는 것뿐이다.
비나 홍수 그리고 바람이란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강타하는 시험을 표현해 준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이것들을 만나야만 한다.그러나 선한 자는 그것들 아래서 견고하게 서 있고,
악한 자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 속에서 그 강도, 기량, 성질 등등 모든 것의 상태를 조사 받게 된다. 만일 그 믿음이
30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복음 7장 24-27절
진정한 믿음이라면,그 믿음은 주님 위에 기초를 두고 심정으로 사랑되고 있는 바,그 믿음은 그 테스트에
견디게 되어 불 속에서 연단된 금같이 더 품질 좋은 순수함을 드러낸다.그러나 그것이 가짜 믿음이라면,
지성 속의 믿음에 불과했다면,사랑이 주도해 가는데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그 믿음은 훼손되어 쓸려
가버리고 만다.
시험 (temptation)
악을 향한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발판으로 해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꾀어 들이어 우리의
타고난 악한 성질(propensity)을 흥분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진리의 가르침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악한 영향력과 맞서면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우리의 믿음이
지성 속에만 있을 경우,천사들은 생각 차원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고,만일 우리 심정이
악과의 대결에서 포기된 상태이면,악령은 심정에 다가가서 애정을 수단으로 우리를 끌고 가 버린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정이란 언제나 전진 방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애정과 이견을 보인다 해도 애정은 지성을 점진적으로 장악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천사들이 우리의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게 하려면, 우리는 믿음에 속한 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한 만큼 가능해진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악한 기질까지도 우리를 장악할 힘을 어떤
시험 속에서도 갖지 못한다.
시험은 모든 이에게 온다.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있어 시험은 자신을 더 순수해지게 만들고,악한 자에게는
자기의 악을 더 확증하는 기회가 된다.
시험의 심한 시련이 비나 홍수,바람이 집에 불어 들이치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잘 그려지고 있다.
“비,” 이것도 물과 같이 자연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비가 광폭하고 파괴적일 때 이는 꺼꾸로된
진리,거짓으로 변해 버린 진리를 명시하게 된다.
집을 때려부술 듯 퍼붓는 비는 마음을 공격하는 거짓,우리에게 오는 거짓 암시,속임을 당하게 만드는
거짓들,악령에서 나와 마음에 오게 되는 각종 것들이다.그리고 이것들로 인해 악에 대한 유전적인 자연적
경향성을 흥분시키는 것들까지도 비가 표현해 준다.
홍수
시험 속에서 이런 거짓 암시들이 마음속에 흘러 들어와 차츰 이 암시들의 부피가 증가해 간다. 자연계에서
오래 계속되고 무거워진 비가 홍수를 야기시키듯, 시험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이 거짓 암시라는 사악한
비는 처음에는 조금 들어오지만 차차 거짓을 축적해서 이를 부풀려 홍수를 만들고, 넘칠듯 넘실거리는
홍수와도 같이 돌진하여 그나마 우리 속에 남아 있던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집어삼키고야 만다.
바람
비에는 바람이 흔히 동반한다.비와 동반하는 바람이 세어지면 폭풍이 되는데,이는 거짓이 생각에
관계하여 있어지는 독특한 모습들을 표현해 준다. 폭풍은 비나 홍수보다 더 미묘함을 가지고 은근히 강타하게
된다. 바람은 모든 틈새나 구석까지도 침투해 들어와 약한 모든 구석을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는데 이용하고
만다. 바람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오나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거꾸러트린다.
단어의 차이점
번역 성경에서 쉽게 나타나지 않는 차이점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한다. “부딪치매, beat”라는 단어는
두 집의 경우 똑같지는 않다.반석 위에 지은 집에 있어지는 부딪침은 약한 부딪침,엄습함, fall이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일 것 같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때려눕힘, beat upon, 또는 때려부숨, dash against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본다. 시험 기간 동안 거짓들은 악한 마음에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광폭하게 돌진하여
그 속에 잔류한 선과 진리들을 모두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선 자체에게는 아주 약한 광폭함을 가지고
다가와 쓰러트리려 할 뿐이다.더우기 거짓은 거짓을 초대한 우리의 악한 성질을 광폭하게 끌고 가 버린다.
그래서 선한 자의 경우, 엄습한 폭풍인 시험이 끝나면 선한 자 속에든 악한 기질이 그만큼 더 사라진 결과
달콤한 평화가 마음의 더 많은 부분을 점유하게 된다.
영적 폭풍의 근원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인간 안에서 지으시되“죽음도 감히 누르지 못할”살아 있고, 사랑받는 믿음이라는
32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복음 7장 24-27절
반석 위에 지으신다.이는 우리에게 광폭한 시험의 근원을 암시해 주게 된다.시험은 성난 폭풍이고, “지옥문”으
로부터 돌진해 나와,우리 속의 악들이나 악한 기질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자 애쓴다.그 이유는 지옥의
것과 우리 속의 악한 성질과는 서로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험을 수단으로 악령은 우리의 영적인
집을 파괴하거나 유인해낸다.그러나 시험이라는 위와 같은 폭풍은 선한 자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이고, 더욱이 주님의 경우는“분노한 자로 그분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함을 더욱 확고 부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악한 자에게는 악함을 허용받는 계기가 된다.시험 중에 선한 자는 더 굳건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심정이 거듭나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들 안쪽의 사랑들이 시험을 야기시키는 주범인
자연적 수준의 마음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유전성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집은 영계에서 세워진다
인간의 영은 언제나 영계에서 사는 바,우리 안쪽의 집 어디에 계속 건축되어 가고 있을까?물론 영계이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바,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슬기로운 자이어서 굳건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같다고 했다. 사실 영적으로 보건대 슬기로운 자는 “...사람 같다”가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영적인 반석 위에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으로 짓는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영적인 집을
영적인 모래 위에 짓는다.
본문은 영적인 사항에 관해 글자적으로도 진정한 것이다. 선한 자의 안쪽에 있는 집은 실제로 천국에
짓고 있다.그 이유는 천국은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게 아닌 내향의 상태(inward stat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각자에게 자기 집에 대한 소유권을 100% 획득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악한 자는 시험 동안에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안쪽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게 될 천국
쪽에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악은 지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지옥이 그들을 이끄는 대로 뜻을 같이
한다.따라서 악한 자는 자기들의 집을 지옥에다 실지로 짓고 있다.
반석 위에 기초한 집은 폭풍에 견디고 무너지지 않는다. 즉 자기 의지 속에 기초한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에게 생명과 도움을 구하고,받기 때문에 어떤 시험,죽음까지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는 바, 그는 악령과의
대적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무너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폭풍에 노출되면 무너진다.여지없이 무너진다.즉, 진리를 알고 이해하되 마음
안쪽에서 악을 흠모하는 이들은 시험 동안에 무너진다. 자기에게 자발적으로 있어지는 지식이나 이해성의
남용으로 인해 스스로“더 큰 단죄를”자초한다. 그 무너짐이란 아주 크고, 완전한 무너짐이다. 이 무너짐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경미한 거짓의 수준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별로
힘들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미한 거짓이 반복되어 가다 보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라는 크고 강한 급류로
돌변해 간다.이 급류의 원인인 억수 같은 비는 진실로 크게 무너지는 것,영적인 것을 완전히 침식하여
영적 인간을 영원히 멸해 축축한 무덤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인격
실제로 사용된 진리만이 참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업무는 우리의 주님이 거하실 집을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지어 드리는 것이다.우리가 주님을 위해 짓지 않는다면,우리는 단지 야생 동물이나
불결하고 보기 싫은 새들이 거할 굴을 짓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애정들은 우리 안쪽의 집을 짓는데
쓰여지는 품질 좋은 재목들이다.모든 진정한 생각은 튼튼하고 오래가는 돌이다.그 반면 우리 속의 악한
애정은 벌레 먹은 재목이요,모든 거짓 생각은 인간이 찍어 만든 벽돌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집을 잘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계산할 수 있게 섭리해
두셨다.이 건축의 실제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어리석은 자는 자기 계획대로 집을
지으려고 애쓰지만 선하고 슬기로운 자는 주님의 계획대로 집을 짓는다. 슬기로운 자는 온 정성을 가지고
재료들을 선발하고 아주 세심하게 주의해서 집을 지어 간다. 그러나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손에 편리할
듯 싶은 재료이면 선뜻 선택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감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닌 고정된
원리들이다. 원리를 가지고 뭔가를 실현하지 않고는 고정된 원리가 인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진리를
생각함,선을 사랑함들이 한 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지침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2 > 옷과 포도주
-새 교리는 새 진리를 위해 필요했다-
성서 본문: 누가복음 5장 36-39절
36.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못쓰게 만들뿐만 아니라 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그리고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것이니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는 못쓰게 된다. 38.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39. 또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요약
진리는 교리로 표현된다.따라서 모든 진리는 그 진리를 담을 적당한 교리를 요구한다.새 진리는 낡은
교리에 의해 전시될 수 없고,그 교리에 담길 수도 없다.그러므로 새 진리를 위해 새 교리를 가져야 한다.
교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칠 때,삶에 관한 모든 새 특질은 새 교리와 동반되어 진다.
그 이유는 삶의 새로운 종류는 새로운 생각, 감정, 습관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
생각함이나 느낌이 낡은 방법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새 방법이 왜 있어져야 하는지 보지
못한다.동시에 그는 새 습관의 필요성도 보지 못한다.새 삶은 새로운 내적, 외적인 것을 포함한다.
위의 원리들이 이 비유의 주변에 깔려 있다.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요한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까지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라고 물었다.
새 방법과 낡은 방법
그래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인의 제자들과는 달리 다른 습관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주고 있다.바리사이파인들은 옛 유대인에게 하늘이 내린 처방 속에서 살아왔다.그들의 느낌, 생각, 습관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내렸던 처방(dispensation)의 특질 속에 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새 진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을 경고하러 왔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제자들은 예배의 새 형체를
옷입을 준비는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에 대한 새로운 처방을 소개하시기 위해,새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옛 처방 위에
심판을 가져오시기 위해 오셨다.더욱이 인간이 느끼고,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들에 근본적인 도전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의 인격 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행동하는 방법이
바뀌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늘이 준 처방의 차이
삶에 대한 각 처방은 인간의 영적 필요와 조화되도록 인간 삶에 재 조정되어 왔다. 인간이 더 낮은
인격 상태에로 기울어질 때,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들에게 내려와 그들의 조건을 재 조정하여,그들의
악에 따라 있어질 나쁜 결과로부터 가능한 한 지켜 주시었다. 동시에 그들의 인격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하늘의 축복이 열릴 수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었다.
교회에 대한 각 처방은 그들속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을 수단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재
조정하여 왔다.따라서 각 처방은 삶의 고유한 단계가 있고,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질이 있게 된다. 다른
처방 속의 인간은 다른 인간의 종류 속에 있어 왔고,그 인격의 성질 역시 다르고,바깥쪽 삶의 방법이나
습관 역시 다르게 있어왔는 바,이것들이 인격을 구체화시켜 표현하였다.
후퇴함 (retrogressing)
각 처방에서 인간의 영적 삶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후퇴될 때,새 처방이 반드시 대두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이전 처방의 특색을 이루는 성질의 얼마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들의 중심 원리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삶의 방법 역시 다르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것을 성장시켜 가면서 영적 영향의 다른
국면들이 자기들의 영적 필요성에 채용되어졌던 것이다.
인간이 신성한 사랑을 보다 높은 형체에서 고맙게 여기던 데서 아래로 처질 때, 무한하게 부드러운
주님의 사랑은 더 낮고, 더 외적인 형체로 그들에게 다가와 그들이 그분의 사랑을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주님의 오심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보존될 수 있는 상황의 가장 낮은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파멸되는
정점에서 인간을 건지시기 위해 육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천국 삶의 진가를 인정하는 쪽으로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해 주셨던 것이다.
상승 (the ascent)
그리하여, 신성한 사랑의 인도 하에서 과거에는 잃고 있었던 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인류의 상승이
시작되었다. 상승하던 인간이 자기에게 존재했던 처방 속의 특질을 벗어나 새롭게 위쪽을 향할 준비가
되어 삶의 더 높은 국면을 필요로 하자,새로운 처방이 소개되어졌다.
옛 것과 새 것의 분리
이와 같은 변화의 각 단계에서, 자신에게 존재한 낡은 영과 처방의 특질에 한껏 빨려 들어 있어 그
삶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새 처방의 필요성도,그 특질을 납득하는데도 실패했다.그래서 새 처방 속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
든 새로운 감정이나 생각들이 삶의 새로운 방법으로 그 자체를 드러냈을 때 옛 처방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옛 표준을 가지고 새 것을 저울질해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 것을 위험한 혁신으로 선한 옛 방법으로부터
죄를 짓게 하는 출발로서 간주해 버린다.
주님의 재림
위와 같은 상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영적 생명과
빛의 새 처방 속에서의 주님의 두 번째 오심에도 비슷하다. 주님의 재림은 바깥쪽 또는 육체적인 오심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에 오시는 안쪽으로의 오심,즉 영적인 오심이요,이는 인간에게 안쪽(inward)과
바깥쪽(outward) 삶에 새 품질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 오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생각함
옛 것은 새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그 이유는 옛 것이 새 것으로 될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 것은 옛 것을 넘어 있고, 삶의 새 국면에 있어서는 존재의 수준 자체가 달라 삶의 특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 새 것을 이해 못하는 옛 것이 새 것을 잘못 판단하게 됨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옛 것이 상도에서 벗어나 성장하면서 새 것은 자신이 과거에 처해 있던 조건을 납득하면서
오히려 변화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한다.예를 들면,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자신의 눈이 보는 경험을
하기 전 까지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납득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 (garment)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옷 입히며 보호도 해주는 겉옷이란 우리의 선한 애정들을 영적으로 옷 입혀 보호하는 진리를
표현한다.진리의 명석한 지식이 산출해 내는 보호가 없으면 우리의 선한 자극(impulse)들은 자주 우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만다.
이와 같은 겉옷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주님의 말씀 속에서 겉옷에 관해 많이 거론되고 있다.그중
하나인 이사야서 52장 1절을 보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 찌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영적 예루살렘인 교회는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아름다운 진리로 자신을 잘 차려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 진리들을 가르침으로 해서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하러 갈 때 혹은 사회적인 모임에 갈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려 하는 습관은 우리가 주님께 접근될 때 또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때문에 발산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때 주님의 진리로 우리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정신적인 습관을 표현해 준다.
유대인들의 예배에서 사제들의 겉옷은 주님에 의해 규율되어진 것인데, 이는 각기 다른 경험 속에 있는
우리의 애정을 옷입히게 될 진리에 대한 주님의 규율을 표현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언급된 매우 흰 겉옷은 영계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바, 이는 삶에 진리를 적용해서
입게 되는 진리,순수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옷의 표본 (representative)
옛 유대인에 대한 처방에서 그들은 영적인 것들의 표본이 되어 있었는 바, 옷 입는 것까지도 표본이
되는 그들의 특질에 맞추어져 있었다.마찬가지로 기독교회에서,새로운 처방의 영적 삶 어디서나 인간의
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들은 애정의 상황에 부응되는 지성의 옷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으로 의복 차림,각자의 옷차림은 그 사람의 조건,직업, 공적 지위 등등을 흔히
암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그래서 인간의 정신적인 의복,즉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진리들은 그 사람의
영적 조건과 그의 삶의 성질을 암시해 준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매.”
다시 말해 그분은 진리의 빛 안에 그분의 속성을 진열해 놓으신다는 말이다.
주님의 겉옷 자락을 건드리기만 해서 병이 나은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는 말씀 속의
진리에 접촉함으로 애정을 깨끗케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들은 종종 빛나는 옷을 입고 있음이 보여져 왔다. 이는 인간 삶의 천적인 상황을 보여주게 되는
빛나는 진리를 말한다.그래서 예수님이 변모하실 때 그분의 옷은 희고 광채가 났던 것이다.말씀의 글자는
우리의 외투(outer garment)와도 같아 글자 안쪽에 든 것, 즉 영적 의미를 보호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
새 옷과 헌 옷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옷(garment)은 마음을 옷 입히고 있는 진리를 표현해 준다. 수선해서 입어야
할 헌 옷이란 생각의 헌 상태,인간 마음 안에 든 영적 질서가 올바르지 않은 것,한마디로 진리의 낡은
국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새 옷은 생각의 새로운 방법, 진리의 새 국면(phase), 새 진리를 표현한다.
말씀의 글자적 의미,이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이 보는 바 대로의 의미이다.이 의미는 잘못 성장할
우려가 많지만 말씀의 속뜻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가 그는 진리의 영으로부터
글자에서 발하는 빛을 발견하여 총명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옷
교리는 영적 성장에 맞게 조정되어야 할 필요를 이 비유는 예증해 주고 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을 깁는 사람은 없다.” 사실 어떤 사람도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진리의 낡은 국면을 과대
성장시킨 사람도 낡은 사상이 새 환경 조건을 섬기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 조각을
가지고 헌옷을 깁는 격이다.새 상황은 그 변화된 마음 상태에 적절한 새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헌 옷을 깁는 것
낡은 신앙에 얼마 큼의 새 빛을 놓음으로써 낡은 신앙을 보충하려 한다면 그 노력은 성공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새 옷의 조각이 헌 옷을 찢어지게 하기”때문이다. 새 옷처럼 새 진리는 탄력성이 있다. 그러나
헌 진리는 헌 옷과 같아서 팽팽하게 당겨 질 수 없다.당겨지면 째지고 만다.“새 옷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즉 헌 관점과 새 관점 사이에는 하모니가 없다는 말이다.
포도주
이와 같은 일반 원리가“새 술을 헌 가죽 부대(병)에 담는 사람이 없다”는 두 번째 본문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포도주는 영적 진리와 상응된다.이런 이유 때문에 포도주는 주님의 성찬에서 사용되는 바,
이는 주님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많이 등장하는데, 나쁜 의미로의 사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적 진리라는 내적 의미를
가진다.나쁜 의미의 표현에서 포도주는 꺼꾸로된 진리,왜곡된 진리, 그 성질이 부패된 상태의 진리를
표현한다.
병(bottle, 가죽 부대, wineskin)
병이 포도주를 담는 용기일 경우,이 병은 진리를 붙잡고 함유하는 교리들을 표현한다.교리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또는 진리가 사용되기 위해 필수적이다.본문에서 언급되는 병이란 염소나 새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병(가죽부대)이다. 그래서 신약 성서의 새 번역에서는 병 대신 “가죽부대(wineskin)”를
사용하고 있다.
가죽부대가 새 것일 때는 매우 탄력성이 있다. 새 포도주가 그 속에 담아질 때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이 부대가 오래된 것이면 경직되어 있어 그 유연성을 잃어버린 상태라서
새 포도주가 이 헌 부대에 담기게 되면 포도주의 발효는 이 부대를 터트리고야 만다. 그러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터져 양쪽 다 못쓰게 된다.이 비유에서 헌 병(부대)은 헌 교리, 낡은 사고 방식, 낡은
정신적 조건들을 표현한다. 그 반면, 새 병은 새 교리를, 마음의 새로운 조건에 부응될 교리들을, 교회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가르침들을 표현한다.
유대주의 속의 교리는 기독교로 처방된 새 포도주를 붙잡을 수 없는 헌 병이었다. 그리고 첫 기독교회의
교리가 명확치 못하며 불합리하게 되어 감으로써 이 교리는 주님의 재림에서 있게 된 장엄한 영적 진리,
새교회(New-Church)라는 새 포도주를 붙잡을 수 없는 헌 병이 되었다.
새 진리
마음이 영적 진리의 측면을 진보하게 하려고 새로운 단계를 취할 때, 그 마음은 새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해 새 교리를 채택해야만 한다. 거듭나는 이해성은 일상 용도에서 반드시 있게 되는 필요성의
팽창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어서 새 진리가 마음에 가져오게 되는 것들에 탄력성을
보유해야만 한다.
새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면 그 진리는 마음으로 시험에 부딪치게 해서 영적 발효를 일으키게 하고,
이 발효는 마음속의 불순물들이 저절로 걸러지게 해서 깨끗함 속에서 진리를 붙잡도록 하여 주변의 불리한
상황에도 마음이 견뎌내게 해준다.엄밀히 말한다면 우리가 그 진리 때문에 고통받고,그 진리를 위해
싸우며 그 진리를 위해 살 때까지 그 진리는 우리 것이 아닌채로 있는다.
헌병이 깨짐 (부대가 터짐)
우리가 진리를 내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그 진리의 겉에 나타나 보이는 글자적인 양상을 밀어 제치게
된다.새 진리의 팽창된 힘은 헌 병,헌 교리를 깨트리고 말아, 헌 병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헌 병을 대체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영적 진리의 포도주는 쏟아지고 만다. 예를 들면, 언젠가 그에게
계발된 가르침이나 합리적 생각이 창세기는 물질적인 과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을 때,
이는 새 진리라는 새 포도주가 헌 교리라는 헌 병을 깨트리는 격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떤 새로운
병,새 교리가 사용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그 합리적 생각은 못쓰게 되고 마는 바, 그는 그 진리마저
잃게 된다.즉 창세기는 신성한 책이 아닌 것으로 귀결짓고 성서를 거절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느님의 책으로 항존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창세기는 인간 마음의 거듭남과 영적 창조를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교리, 말씀의
영적 의미에 근거한 교리의 새 병에 합리적인 생각인 진리의 새 포도주를 놓을 경우,그는 포도주도,진리도,
교리도 동시에 보존하게 된다.진정한 교리라는 병 없이 진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옷과 포도주
이 비유는 똑같은 의미를 옷과 포도주를 가지고 번복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옷은 마음의
바깥쪽 사용을 위해 있는 진리,마음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로서 표현되고,포도주는 마음의 안쪽 사용을
위해 있는 진리,영에 활기를 주며 훈훈하게 하는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이런 사실과 일치되는 경우를
본문의 그리스어에서 발견하는데,번역된 새(new)란 단어는 비유 내의 두 경우에서 똑같지 않게 사용되었다.
좁은 측면에서 보면 헌 병은 유대교회의 규범들이고,새 포도주는 기독교회의 진리이다.또한, 헌 병은
첫 기독교회의 전복된 교리들이고, 새 포도주는 새 교회(the New-Church)의 진리이다. 헌 것과 새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우리가 교리의 구멍난 곳을 새 천조각으로 깁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주님께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라고 말하셨다.모든 것이란 교리와 형체 또는 생각과 애정이요, 이런 모두를
새 것으로 만드신다는 말이다.헌 교리는 헌 사상에 어울릴 뿐 새 진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증
예를 들면,옛 교리는 거듭남(또는 구원받음)이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이 교리를
꽉 붙잡고 있는 한, 거듭남이란 점진적인 영적 성장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새교회의 교리를 알아차릴
수 없다.새 것은 옛 가르침에 있는 신학적인 용어에서 까지도 다르다.영적으로 옛 마음은 묵은 포도주
병과 같다.그들은 자기들의 능력 한도까지 팽창이 가능하겠지만,그 이상의 경우에서는 그 탄력성을 잃고야
만다.그들은 자기들 방법에 집착되어 있어 그 이상의 유연함을 발휘하지 못한다.그들은 묵은 포도주를
담을 수 있을 뿐 활기 왕성한 새 포도주는 안된다.진리는 교리에 생명을 준다.그리고 교리는 진리를
지탱시켜 준다.
교리는 진리와 더불으면 팽창되어 질 수밖에 없다.인간이 소년기를 벗어나 자라는 바,그가 입었던
소년 시절의 옷은 그에게 맞지도,예쁘지도 못하다.어른이 되면 그 나이에 알맞은 크기와 멋이 옷에도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이와 같이 마음이 옛 교리에서 벗어나 성장하노라면,새 교리가 반드시 그 상황에
어울리게 준비되어야 한다.교리의 각 체계는 정신 성장의 각 단계에서 채택되는 바,우리의 상태가 현
상태를 벗어나 자라면 그 상태 하의 교리 역시 벗어나 바꿔져야 한다.
새 것과 옛 것
예를 들면,새교회인이 되는 데는,새교회 진리의 사상 얼마를 포획해서 옛 교리에 그 새 것 조금을
깁는 것, 또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부어 보려는 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교리의
새 체계를 가져서 마음의 중심에서 밖의 경계선까지, 삶의 새 방법에 새 교리가 구체화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이 말을 바꾸어 설명하면,우리는 자신에게 새 것과 헌 것이 완전히 다른 특질임을 알게 하지도
않았으면서 타인의 마음에 새교회 사상을 슬며시 밀어 넣으려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
식의 시도 역시 새 옷조각을 가지고 헌 옷을 깁는 것이고,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붓는 것일 뿐이다.
새 진리임을 똑바로 인정치 않는 이상 밀어 넣어진 새교회 진리는 새 교리 안에서 어떤 실용성을 만들지
못한다.
영적 위험
진리의 새 사상을 피상적으로 채택하려 드는 데는 위험이 존재한다. 그렇게 채택되면 이는 낡은 습관이나
방식을 가지고 삶을 계속 이끌어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삶은 낡은 습관이나 사고 방식 속에
붙잡혀 있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적 표준으로 확증해 볼 필요가 없고,오로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변형시킬 필요만 있다.
새교회를 위한 진리는 속 마음을 위한 내적 진리이나 옛 신학 속의 진리들은 외적 진리, 진리의 가상으로
자연적 마음을 위한 진리이다.
예증들
주님에 관한 교리를 예로 들어보자.옛 교리를 수단으로 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분은 성내시는 분,편파적인 분,징벌하시는 분 등등으로도 보여진다. 이 견해를 새교회의 명백한 진리,
그분은 한 인격 속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하느님 속에 있는 무한한 선함과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는 것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옛 교리인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나 믿음만으로 의로워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것과, 새 교회 교리인 주님과 인간 사이의 동의(agreement)에 관한 교리, 즉 인간은 악을 금하고 주님을
사랑하며,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그리고 자기의 모든 삶, 즉 느낌, 생각, 행동 면에서
악을 거절해야 구원된다는 교리를 비교해 보라.그리고 옛 교리의 경우,모든 성경은 그 서술이 신중해지도록
주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에 모두 다 신성하다는 성경 글자상의 진리와 새교회의 경우, 성경에는 글자적인
것과 영적인 것 즉 말씀에는 몸과 영이 있고 이 둘은 상응으로 관계를 가진다는 것과도 비교해 보기 바란다.
또 한 가지,삶의 교리를 들춰 보자.옛 교리는 경건심에 의존하는 바 인간의 실제적인 악과 관련될
때 그 실용적 가치는 거의 없게 된다.그러나 삶의 새 교리는,인간은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는 것이 삶의
44 옷과 포도주- 누가복음5장 36-39절
양면(내, 외면)에서 있어지는 만큼에서만 선해진다는 것, 그나마 이 일은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과도 비교해 보라.
헌것을 깁는 것
지금까지에서 명확히 알게 된 것은 위와 같은 옛 교리를 붙잡으려 노력하는 것이나, 새교회로부터 잘라낸
새 조각을 헌 옷에 깁는 것,또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으려는 것 등등은 다 쓸모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새 옷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 않기”때문이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실지로 우리 삶의 상태나 행동 지침들이 자연적 마음에 바탕을 둔 옛 사상에 의해 통치되는 한,
우리는 새 진리를 생동력 있는 원리로서 붙잡을 수 없다. 새교회인(a New-Churchmen)은 새교회의 빛
속에서 자기의 삶을 통째로 형성해야 한다.다시말해 자기 삶에 새교회의 분명한 품질이 나타나야 한다.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옛 삶에
만족해하는 이들은 새 삶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옛 것에서 벗어나 새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더욱이 옛 삶 속의 특질이 고착화된 모든 이는 변화 역시 반기지 않는다.오히려
옛 영 속에 아직 있는 이상 그들은 새 것을 거절한다. 외적인 틀 속에서 사는 이들은 내적인 틀을 보고도
단 번에 고마워하지 않는다.자연적 마음만을 지닌 사람은 영적 삶의 실재를 보지 않는다.그러나 명석한
새교회인이라면 영적 삶이야 말로 진짜 삶인 고로 그 삶이 자신의 바깥 삶을 통치해야 하고 그 삶으로
자신 전체를 형성시켜야 함을 똑바로 볼 것이다.
새 천국(the New Heaven)
새교회가 지상에서 봉기될 수 있기 전 새 천국이 형성되어져야만 한다. 새 천국이 증가 될 때 그 천국의
영향력도 증가되는 바,이에 따라 지상의 새교회도 증가된다.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천국에서 내려 올
수 있기 전,새 예루살렘을 위한 올바른 여건이 반드시 있었어야 했기 때문이다.새 예루살렘, 새교회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
단 번에,또는 강제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와 질 수 없다.오로지 인간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이는 옛 신학 속의 거짓들이 제거될 때만 가능하다는 말도 된다.그 이유는 거짓이 제거되지
않으면, 거짓이 심어졌었던 장소를 새 것이 차지하도록 하는 승인을 당사자로부터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에 대해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새 교리를 수단으로 삶의 새 품질을
받기 위한 인간의 준비와 그 신속력에 대한 의문이기도 한 것이다. 과거 하늘이 유대인에게 내린 처방
속에 있는 영과 삶으로 확증되어 있는 유대인 모두를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옛 교회 속의 품질에 빠져 자기 삶의 영으로 만들어 버린 이들로부터 새교회인을
만들 수 없다.옛 조건은 새 삶을 위한 그릇으로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두 비유의 연결
앞의 비유와 오늘 비유,두 개를 동시에 생각해 보면 연결이 있음을 보게 된다.“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에서는 진리를 알았으면 그 진리에 의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옷과
포도주에 관한 비유는 옛 교리와 그 삶의 상태를 가지고는 새 진리, 새 삶을 붙잡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새 진리를 삶에서 실지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을 새 진리의 수준까지 들어올려야 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또 그렇게 행한다면, 너희는 행복하다.”
<3> 장터에 있는 아이들
-주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
성서 본문: 마태복음 11장 16-19절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19. 사람의
아들이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보아라,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글자 의미
글자 의미에서“이 세대”란 유대인을 가리키고 있다.주님은 개인적으로 볼 때,유대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그러나“그분이 그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은 유대인들에게“경멸받으시고 거절되어지셨다.” 주님은 탄생하실 때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혀”지시기도 했다.그리고 그분의 성년 시절을 두고 하신 말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건만,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 예수님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을 보이셔서 그들로 그분의 권능을 인정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 권능이 악마인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주님을 거절했고 그분의 영향을 파괴해 보려고 애썼으며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주님이 그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악 속에 머물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보물을 보고 즐거워하도록 해주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보물은 물론 그분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코웃음을 쳤다.
내향적인 뜻
영적 의미에서, “이 세대”라는 단어는 유대인 같은 사람들, 그들 같은 품성을 가진 이들,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알고, 그분의 권능을 보았으면서도 심정과 생활에서 그분에게 속한 것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마음들이“세대”라 불려진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용물은 악한 어떤 원리로부터 태어나 대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말하셨을 때 같이, 인간의 “조상”은 악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모든 다른 사람들같이 유대인들도 자연적으로는 악 속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그들은 회개나 개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재생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문제점은 교리에 무식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 삶을 기꺼이 영위하지 않으려는 심정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아이들”이란 작은 영들,말씀 속의 원리들,즉 순진과 이타애 속에 든 선과 진리들,또는 어린 시절로부터
주님에 의해 인간 내면에 담겨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말한다.새 교회의 용어로는,이 원리나 상태들을
“아껴 두신 것,remains”이라 부른다. 이것은 천국에 속한 것들인데 인간 마음에 계속 남아 있어 인간이
거듭날 수 있게 해준다.이것은 삶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생각에 의해
성년기까지 성숙되어 간다. 이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어서 우리 속에서 뭔가 쓸모 있게 된다거나
성숙되려면 우리의 조심스런 돌봐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확증해 버린 삶의 어떤 원리 안에 있지 않다.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확증해서 우리 속에
고정되는 삶의 구체화 속에 존재하려고 애쓴다.
이런 목적 측면 때문에, 그들(children, remains)은 장터에 앉아 있으면서 자기들의 동료를 찾는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거듭나도록 주님은 부르신다.그래서 그분은 우리가“들을 귀”가 있는 한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신다. 이 작은 것, 아이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우리 속에 그분이 거하실 방을 마련하시려고 애쓰신다.
이 방에서 이 작은 것, 아이들은 우리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하고 우리의 강함과 더불어 강해져 성숙된
성년으로 자라,우리들로 성령과 교통하게 한다.그리고 이 성령은 우리의 유일한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성에서 근원 된다.
제 동무를 부름 (calling to their champions)
이 아이들, “아껴 두신 것, remains”이 “자기 동료”를 부른다. 그들은 이미 우리 속에 고착된 것들,
즉 이기심(self-hood)이나 자아(proprium)에 속한 것들에 동무하자고 호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확증된 삶의 원리는 무엇이든 간에, 또는 마음속에서 성년이 된 것은 무엇이든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비록 다른 원리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던가,수식된다 해도, 한번 확증되어
자리잡은 삶의 원리는 제거되지 않는 게 특성이기 때문이다.인간이 자신 스스로 살아온 것들,그래서
그것이 자기의 일부가 된 것들,이것들 모두는 제각기 각자의 집을 이룬 인생 건축 자재들이다.그가 건축하는
대로 인격은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 “아껴 두신 것,” 즉 마음속에 든 말씀의 원리들은 마음속의 다른 아이들을 “제 동무가 되라고
부른다.” 다른 아이들이란 지금 커 가고 있고, 고착되지 않았으며, 성숙되지 않은 삶의 종류나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이 원리에 호소하는 이유는 그 원리들은 아직 어려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훈련이
가능하고 훈련된 그대로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 속의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영적 아이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 마음속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섭리하신다.이 원리들이란 지금 발달되고 있는 것들,
푸르고 연약한 가지 같아서 잘 구부려 지므로 보기 흉한 자연적 경향성들에서 탈피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내적인 것들은 영적 마음에 소속되어 있으나,“동무”들은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장터 (market)
아이들이“장터에 앉아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장터란 물건을 사고 팔고, 교환하려는 이들을
위한 번잡하고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다.자연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은 영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즉 인간
마음을 먹이고 옷입히는 영적 원리들과 상응된다.
자연적인 것들을 사고 팔고, 교환하는 장소는 인간이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자신에게 조달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본보기
주님은 장사라는 측면에 관해 또 다른 본보기를 주고 계신다.그분은 자아 신뢰를 포기하시고,그 대신
주님 신뢰를 획득하셨다.주님은 그분 스스로 자랑을 팔아 치우시고,시련에 의해 겸허함을 매입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온유하심을 위해 그분의 성마름을 팔아 치우셨다. 세상적 보물에 대한 연민은 느슨하게
하시면서 천국의 보물을 꽉 붙드셨다.
정신적인 장터
인간이 위와 같은 교환을 수행하며 추구하는 마음 상태가 거래와 교환이 있는“장터”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다.이 장터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이다.이 능력 속에서 모든 것이 검사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자기의 합리적 능력을 사용하는 가운데,인간은 그가 주님의 말씀 속에서 본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음미하고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아껴
두신 것,” 즉 주님에 의해 우리의 내면(interior)에 아껴 놓으신 거룩한 말씀 속의 원리들이 우리에게 오는
변화의 상태,변화의 시기에 작동할 태세가 완비되었음을 말한다.이 변화의 시기란 우리가 새 원리를
합리적으로 검사하려는 때이고,이미 가진 것들을 팔아 치우고 새 원리를 사고 싶어하는 때,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때,그 생각을 생활 속에 반영하려는 때,영적 필요성을 느끼는 때, 종합해 보면,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얻어 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때, 따라서 마음이 열려 있어 검사하여 받을
준비가 된 때,이런 때들이 장터에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예증
위의 의미를 두고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 (요한계시록 3:18).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 말하시기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정신적인 앉음 (mental sitting)
아이들이“장터에 앉아 있었다.” 앉음은 서 있는 것이나 걷는 것보다 더 부동적인 자세다. 앉음은 의지
또는 사랑의 상태를 표현한다.그 이유는 의지가 한번 자리를 확보하면 어떤 상태로 굳혀지기 때문이다.
서 있다 함은 지적인 상태, 또는 이해성, 생각함이라는 긴 연속의 한 토막, 움직이기 직전의 준비 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에서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상태가 더 영구적이다는 말이 된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 remains,” 또는 주님이 우리 의지 속에 저장해
두신 말씀 속의 원리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기회를 영구적으로 갖고 계심을
말한다. 또한 이런 수단에 의해 주님은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실 수 있으시며 언제든지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시어 인간 마음이 거듭나는 쪽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시다.
영적인 부름(spiritual sitting)
자연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정신적인 장터에 가게 될 때, 그는 그곳에서 자기의 탐욕이나 거짓이 좋아할
것들을 획득하기를 바랜다. 그러나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제 동무를 부를” 뿐이다. 즉 우리의
내면(interior) 속에 저장된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선과 진리는 지금 발달되려 하는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을 부르고 있고, 악과 거짓된 것을 구매하려 하는 우리 속의 경향성들에게 그것을 사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천국적인 인격에 관한 것들만을 구매하라고 촉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저하고 있을 때 우리 속의 아이들이 우리를 불러 이르는 말,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셔라.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1-3).
영적인 마음은 천국의 형상을 따라 이루어진다.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마음의 모양을 따라 형성될 것이다.
선과 진리에 관한 내적 원리들의 구체화는 자연적인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과 상응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마음을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은 좋은 영혼을 형성하게 해 줄 좋은 소식을 영적 마음을 통해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 보내신다.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삶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우리는 스스로 자연적인
마음 문을 닫아걸게 되어 더 높고 더 사랑스러운 삶에 관해 말하는 영적 마음의 속삭임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된다.
부름과 말함 (calling and saying)
영의 아이들이“부르고”“말한다”고 적혀 있다.소리의 억양을 가지고“부른다”는 것은 의지 또는 애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고, “말한다”는 것은 지성 또는 생각에 호소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부르고”
“말함”은 심정과 지성 양쪽에 결합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피리 붐 (piping)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악기에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있다.현악기의 소리는 각 줄이 제각기 한번씩 소리를 낸다.그래서 악기의
종류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우리의 생각과 비슷하다.따라서 현악기는 우리 삶의 영적 수준,진리, 생각과
상응된다. 그러나 관악기의 소리는 계속적이어서 한 음이 길게 연장되면서 키에 의해 다양해진다. 그래서
이 소리들은 우리의 애정들 같아서 계속적으로 흘러 나가면서 음조도 다양해진다.
피리(pipe)는 갈대(reed)로 된 관악기이다. 그러므로 피리는 의지의 생명인 애정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본문에서 있게 되는 피리를 부는 음악이란 주님이 우리 속에 이식해 놓으신“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즉 본문의“아이들”에 존재하게 되는 내적 하모니를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은 하모니는 천적 애정 또는
내적 사랑에서 있어지고, 우리 속의 선과 진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마음의 내용물 안에 저장되어 있다.
거룩한 말씀 속의 것들이“장터에 앉아,” 자기 동무들에게 “피리를 불고 있다.” 다시 말해 “아껴 두신
것들,” 말씀 속의 원리들은 인간의 품성이 형성되고 발달되는 동안 인간과 더불어 거주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호소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적인 것들이 내적인 하모니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연적인 마음에 대해 그 행복과 하모니를 받아서 추구해 보지 않겠느냐고 부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적인
것들,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말씀 속의 원리들은 거듭난 삶의 영화로움에 관한 것을 자연적 마음에 자꾸
말해 준다는 말도 된다. 이것이 “피리를 분다” 또는 피리로 음악을 만든다는 뜻이다.
춤추다 (dancing)
그래서 그들은 이 음악에 맞춰 “춤추도록” 자기 동료, 동반자를 부르고 있다. 춤춘다는 것은 신체가
기뻐하는 활동, 특별히 손,발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기뻐하여 둥둥 뜨는 느낌에 대한 신체적
응답으로 음악에 의해 야기되거나 어떤 좋은 소식 등등에 의해 흔히 있어진다. 손과 발(lower limb)은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들,즉 자연적 마음과 상응된다.그러므로 춤은 자연적인 마음이 느끼는 적극적인
즐거움이나 기쁨과 상응되는데,이런 즐거움이나 기쁨은 영적 마음의 내적 하모니가 유입(influx)에 의해
자연적인 마음에 내려와질 때 있어진다.다시 말해 영의 아이들,마음속에 저장된 “아껴 두신 것들”이
그들의 동무들, 자연적인 마음속에서 발달하려는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 때에 있어진다는 말이다.
합리적인 마음
위의 일이 있게 되는 곳,장터란 마음의 합리적인 원리이다.즉 선하고 올바른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절하는 마음의 능력,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비교하고 참작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이 합리적인 원리는 영적이고 자연적인 마음 사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장터와 같이 교환이 이루어지는
바,영적인 마음의 아이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자연적인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감으로서 만나는
장소이다.그래서 자연적인 마음이 영의 아이들의 소리에 유의하게 되면,양쪽에 기쁨이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영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기를 매우 즐거워하기 때문이고,
자연적인 마음의 아이들은 이런 영의 기쁨을 받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리 부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비유의 역사적 적용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서의 말씀이 주어졌었다.그리고 주님은 그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다.그러나
그들은 말씀 속의 진리가 만드는 천국의 하모니를 감지 못했고, 내적인 것들의 유입에 따라 그들의 자연적인
마음을 기꺼이 질서 있는 상태로 바꾸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말씀의 글자를 받들어 모신다고 고백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 하면서 자기들의 악에 동조되도록 해석했을 뿐, 말씀의 글자
속의 영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비유의 개인적 적용
위의 유대인의 경우 같이, 영적“세대”에 있는 모든 이, 그들과 같은 악과 거짓 속에 있는 오늘날의
모든 이에게도 같은 적용이 있게 된다. 각자가 자기를 자세히 살피면 우리 모두에게 아주 많이 널려 있기도
하다.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은 세상적인 관심사로 꽉 차 있어 영의 호흡을 붙잡는데 매우 느리다. 장터에
앉은 귀중한 영의 어린이들은 자연적인 마음의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어서 내적인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와서 보고 음미한 뒤 응답해 달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천국적인 원리를 받아서 실생활에 응용해
보지 않겠느냐고 계속 묻고 있다.그렇게 응용해 보면,더 장엄하고, 더 자유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높은
영의 삶이 출현되어 육체의 삶 역시 이와 같이 표현될 것이라고 권고한다. 또한 천국의 장엄한 하모니는
지상의 삶을 아름답게 해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우리의 눈은 아래쪽만을 응시하고,우리의 귀는 무디다,그래서 비록 영적 원리들이
“경계를 더하며,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친다 해도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영과 협력하는 데는 얼마나
느린지 경험이 입증한다. 천사의 소리가 영들에게 말했던 아름다운 것을 자연적인 평면에서 보다 강도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게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들이다.따라서 피리가 열심히 소리를 내는 데도 춤추지 않는다.
딱딱해서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차디찬 외용물이 우리를 덮고 있다. 서로 서로 동감하고 위로를 제공하는
것은 거의 없다.한 마디로 땅 위를 걷되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 정상이 되어 있다.세상적 성공밖에는
성공이라는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천사들의 상태
그러면 천사의 영을 구체화한 삶은 과연 어떨까? 천국의 영적 하모니를 함유한다면 위와 같은 표준을
가질 수 있을까?따뜻하고 자유로우며,생기 있고 너그러운 인간애, 동정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삶, 기쁘고
반짝거리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런 영으로 자연적인 마음을 채워 기뻐 춤추는 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순간만이라도 부드럽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천사의 외모를 볼 수 있다면 자연적인 마음을 씌운 딱딱하고
찬 뱀의 비늘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혀지고, 영의 아이들이 연주한
음악에 장단을 맞추지 않은 부끄러움을 가질는지 모른다.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며, 우리를 그분에게
결합되게 하시어 구원하며 복을 주시려고 애쓰고 계신다. 그리하여 천국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인간까지도 채우시려 노력하신다.아이들은 피리를 불고 있지만,우리는 그 피리에 장단을 맞추는데 너무나
속도가 없다.우리는 냉정하고 비수용적인 「나」(proprium)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나」를 포기하되
마지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 당도해서야 겨우 포기한다. 천국적인 실체를 위해서도 「나」라는 것의
포기가 너무나 느리지 않느냐 말이다.
슬퍼함 (곡함, mourning)
아이들이 말한 또 한가지는,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아이들, 마음속에 저장된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인간의 합리적인 지각과 이해성이 인간 속의 악하고 거짓된 자연적 상태의 슬픈 쪽을
돌아서서 보게 될 때 곡을 하게 된다.그리고 속에 든 악을 회개하기 위해 가슴을 치라고 불러 댄다.이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속의 자연적인 상태를 밝히 알게 해주시면서 아이들의
동무들, 발달되려는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에게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며 거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고해
주신다.
가슴을 침(한탄함, lamenting)
자연적인 마음이 슬퍼하는 소리를 들을 때,그 마음이야말로 한탄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겸허 속에 있어져야 되고, 자신의 악들을 인정하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도움과 안정을 찾으려 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가슴을 치지 않았다.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다.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제공하셨다.그럼에도 이 두 가지 모두는 거절되고 죽음에 몰아넣었다.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피리를 불었지만,
그들은 춤추지 않았다.요한이 말씀의 글자를 표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요한의 말들은 우리에게
회개를, 단식을, 투쟁을 해서 에집트를 빠져 나와 광야를 통과하라고 부르고 있다. 요한과 비교해서 볼
때 예수님은 말씀 글자의 영을 표현하시고 있다.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천적인 삶의 상태,약속된
땅,사랑과 지혜로 가득 찬 보물,영의 잔치가 마련되어 있음을 인간에게 소개하시고 계신다. 글자대로의
율법같이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 일상 생활의 개념을 만드는 규정들에 우리의 시선이
모아지도록,그리하여 영적 질서에 우리를 가져다 놓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이 지시하는 삶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보여 주셨다. 회개라는 요한의 세례를 수행할
때만이 우리는 새 삶 속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우리가 비질서인 낮은 본성을 키우려고
열심히 먹이던 것을 멈출 때,우리는 천국에서 내려보낸 빵으로 우리 삶을 먹여 살려 더 높은 삶,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
천국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이 비유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은 인간으로부터 천국을 보류해 놓고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 오히려 주님은 우리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 속에 모든 사랑과 지혜 그리고 실지의 기쁨을
부어 주고 계신다는 것,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에 게을러 있을 때조차도,혹은 우리가 그분께서 제공하는 은혜를 거절하는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 앞에 놓으신 주님의 주제를 언제나 유념 하시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신다는 것, 그분의
무한한 경륜 속에서 모든 기회를 다 사용하시어 우리의 악을 경고해 주시고 천국을 소유하는 승리를 갖게
해 주시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그분은 모든 이를 위해 그분의 은총을 주시고 계신다.그러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자신 스스로 천국 안에서 기꺼이 살려는 자,자신 스스로 악과 죄를 끊으려는
사람 만이 그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은 인간 자신의 바램에 일치되는 것들 속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천국적인 품질의 삶에 자기의 바램을 순응시킬 때 가능해진다.
지혜 (wisdom)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But wisdom is justified of
her children.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지혜의 결과(자녀들)란 지혜에서 태어난
삶의 원리들이다.이 원리들은 정당화되고,의를 만들며, 공의이다.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은 그 열매로
그 원리의 옳음을 입증하며 거듭나는 삶의 질을 말해 준다.우리가 창조된 것은 천국을 위해서이다.따라서
우리가 뜻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도달될 수 있다.우리의 마음에는 미발달된 능력,우리 영 속에는 탐험되지
않아 아직 높이를 모르는 산들이 수두룩하게 있고, 이 속에 주님은 계시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시어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 인도하신다. 자기가 자기를 다 아는 듯 여기지만 실상 인간은 인간 본성의 초보 단계밖에
아는게 없다.모든 천국은 우리에게 열려 있고 우리를 맞으러 내려오고 있다.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 음미하는 것”뿐이다.
어린 아이가 즐거울 때 껑충 뛰며 좋아하듯, 자연적인 마음은 높은 사랑의 삶이 우리 속 아주 우묵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에 진한 만족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의 표현이 어린 아이처럼 당연히 있어져야 할
것이다. 합리적 생각이라는 장터에 앉아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영의 아이들의 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여 지나쳐 버렸는가? 성경에서 오는 모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속 천박한 성품에
대고 곡을 하는 한편,천국 삶의 영화로움에 대해서는 피리를 불고 있다.주님의 특사가 바로 말씀 속의
진리이다.주님을 사랑하는 자,그분과 함께 살 자들에게 주님은 이 특사를 보내시어 진리의 지식을 축적시켜
주시고 그 지식을 응용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초대장,주님의 경고장을 받지 못한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어떤 인간이 거듭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의 경고나 권유를 소홀히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허용되는 훈계는 자아
추구에서 돌아서는 거듭남을 위한 기회들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천국을 소개하는 영
속의 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우리가 주님의 분부,말씀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한다면,
“주여, 주여”하고 밤낮 불러 봐야 헛일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어린이로서 천국에 우리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오히려 우리는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에 의해 심판되어진다.애석한 것은 이런 사항을
알고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게으르다는 것이다.그래서 우리에게 또 되풀이되는 말,“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4
씨 뿌리는 사람
-인간 수용성의 다양함-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3-8, 18-23절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6.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
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 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 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58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음은 흙과 같다 (minds are like soils)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그분의 선물을 자유롭게 받도록 배려해 놓으셨지만 그 선물을 받게 되는
인간의 마음은 다양하다.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진리이다.인간의 마음은 흙과 같다. 그러나 이 위에
뿌려지는 씨를 수용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주님의 비유 설명
우리 주님은 이 비유에 관해 일반적인 설명을 그분 스스로 주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새교회의 빛 속에서
우리는 옷을 더 벗은 진리,더 발달된 영적 의미를 명확히 보게 된다.
우리 주님이 지상에 계셨을 당시의 인간들의 마음은 외적 상태(external state)에 있었다. 그래서 높은
국면에서의 진리를 산출할 수 없었다.그러나 지금,주님의 재림에서, 인간은 진리의 영적 국면 까지 볼
수 있도록 합리적인 시야가 주어지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과 씨 (the sower and the seed)
씨 뿌리는 사람은 주님 자신이시다.씨는 그분의 말씀 속에 든 진리이다.진리들이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는
그 때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또는 말씀의 가르침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과 교통하는
때에 이루어진다.씨에 발아력이 있듯 진리에는 생명력이 있다.이 씨가 옥토에 심어지면 그 성장 과정은
경이로운 기적을 창출해 낸다. 수용하는 마음 안에 뿌려진 진리는 그 진리가 수확을 거둘 때까지 연속적인
단계를 통해 성장한다. 씨 같이 모든 진리는 그 속에 새 진리를 번식시키는 능력을 함유하고 있어 그 진리를
불멸하게 한다.그래서 씨는 주님의 속성 중에서 무한하심,언제나 창조해 가고 계신 것, 결코 죽지 않으시는데
대한 형상인 것이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최고 높은 측면에서 보면 주님 자신은 말씀(the Word)이요, 인간에게 내려오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59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시다. 그러므로 진리라는 씨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그분의
영과 생명을,신성한 사랑의 생동력을 주시고 계신다.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육을 입으신 신성한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은 “씨를 뿌리러 나가셨다.”
즉 영적 죽음을 재촉하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 마음의 밭에 그분의 말씀인
살아 있는 씨를 뿌리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씨 뿌리는 사람으로서의 주님은 모든 시대에,모든 그분의 처방 속에서의 모든
사람에게,더욱이 인간의 영적 진보의 모든 단계마다에 씨를 뿌리고 계신다.
밭 (field)
씨 뿌리는 사람의 작업 전후에 있는 들판을 보라.씨를 뿌리는 사람이 오기 전,들판은 비록 사용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다 해도 어떤 사용도 수행되고 있지 않다. 밭을 가는 사람이 토양을 잘 마무리해 놓았을는지
모른다.그러면,이제 영적으로 씨뿌리는 사람인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인간 마음을 보라.주님이 강림하시기
전 인간 마음의 상황은 얼마나 비생산적이었는가?그러나 우리 주님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 일하신 뒤,
인간 마음은 얼마나 변화를 일으켰는가?
그래서 씨를 뿌리기전 밭을 갈아 논 상태와 같은 것이 세례자 요한이 세상에 와서 주님의 강림을 위해
인간을 준비시키고자 그들에게 세례와 회개를 촉구하여 삶을 수정해 놓은 모습이다.그야말로 요한은“광야에
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는 이사야의 예언에서도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철로된 농기구란 글자 그대로의 명령 속에 있는 진리들이다.이를 가지고 요한은 그의 시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인 딱딱한 밭의 흙들을 짓부수웠다.그래서 요한에 의해 정신적인 바탕이 골라진 뒤,예수님께서
영적 진리라는 씨를 뿌리신 것이다.
말씀의 글자가 요한이다.그의 일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말씀의 글자란 영적 의미라는 알맹이를 보호하고 있는 씨의 껍질에 해당된다. 인간에게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필요하듯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입(흘러듦, influx)
60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선한 원리들이 어떻게 인간 마음속에서 결실을 맺는지, 어떻게 진리들이 번성하게 되는지 이해해 보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천국이 인간 마음에로 어떻게 흐르는(inflowing)가에 대해서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에 두 분과, 또는 두 마음, 즉 내향적(inward, 영적, spiritual) 마음과 외향적(outward,
자연적, natural)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진리로서 알아보는 인간의 능력인 합리적 능력은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사이에 놓여 있다.그래서 이 능력이 두 마음들로 서로 통하게 해준다.그리고 인간이 영적인
것에 열릴 때,계속적인 교류를 간직하게 해준다.그러나 인간이 출생할 때, 그의 자연적 마음이 열리어지지만
그의 영적 마음은 그가 거듭남에 의해 열리어진다.
우리의 내향적 영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영적 선을 위해,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길을 통해 역사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외향적 마음과 삶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간직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분과 협동하여
역사 한다.
우리가 심정과 지성을 주님에게 열 때,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그분의 비밀스런 거처에서 나오시어
우리를 만나러 내려오신다.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자유롭게 영접하여 그분과 협동할 때,그분은 우리의
안과 밖,양쪽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그제야 우리 자신의 내향적 마음의 문은 열리어 있어 거듭나는
영인 내향적 삶 속에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된다.
합리적 능력 (the rational faculty)
합리적 능력은 주님이 우리 영의 비밀스런 문이 열리도록 만드는데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합리성에 주님이 호소하심은 지성에만 호소하시는게 아니라 우리의 총명을 통해 심정에 호소하시
는 것이다.따라서 이는 이해성을 통하여 전체 인간(whole man)에 대한 호소이다.
악의 영향력은 우리의 자아 사랑에 악의 열정과 편입견을 가지고 호소하나, 주님은 우리의 내향적 삶의
입구를 지키는 합리적 총명에 호소하신다. 따라서 주님의 진리를 얼마나 수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받게 될 때, 또는 영적 생명을 받게 될 때 그 진리를 얼마만큼 받느냐와 수용
태도의 품질 여부에 따라 받아진 그 진리는 각양 각색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거절하면
그만큼 우리는 영적 생명에 대해 심정과 이해성을 닫는 것이고, 우리가 의식하는 삶을 주님이 조절하시는
것에서도 그만큼 잠궈지게 한다.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인간이 진리라는 씨를 받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씨 뿌리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61
가장 크신 분으로서의 주님은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하게 뿌리고 계신다는 것등이다.
길바닥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아주 큰 밭에는 몇 방향으로 이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하게 다져진 도로가 있기 마련이다. 이 길이 본문에서
말하는“길바닥”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광범위하게 뿌릴 때 얼마의 씨는 이 길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이 바닥은 딱딱해서 씨가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만다. 이 씨가 짐승이나 사람이 밟아서 뭉개지지 않는
한 이내 새들에 의해 먹히우고 만다.
좋은 의미에서 “길”이란 진리, 정신적인 길, 이 길로해서 마음이 여행하는 것, 삶의 원리들을 말한다.
그래서 시편은, “나는 당신의 증거들의 길에서 기뻐합니다.” “제가 당신의 진리에서 걸을 수 있게 나를
가르치소서 주여...”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나쁜 의미에서,길은 사악한 자의 길,거짓된 길, 거짓, 또는 거짓 원리들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래하기를“당신의 교훈을 통해서만 저는 이해를 얻습니다.그러므로 저는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합니다.”
모든 악한 마음은 거짓된 길을 걷고,마치 딱딱하게 다져진 통로 같아서 진리의 씨를 거절한다.
쿵쿵거리며 걷는 우리의 이기적인 열정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있는 단단한 길로 옷을 지어 입고 있으면서
비질서적인 삶에 의해 확증되어진다. 생각의 거짓된 방법 속에서 진리의 씨는 어떤 인상도 남겨 줄 수
없고 성질이 맞는 토양도 발견할 수 없다.
길바닥에 떨어지는 씨 같이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affection)이 있을
리 만무하다.따라서 진리에 무관심하다.길을 따라 걷는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짓밟게 되는 씨에 무관심이듯,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 생각 속에 우연히 떨어진 진리에 진지한 흥미를 갖지 않는다.
한 마디로 진리는 그 사람 마음에 잡혀지지도 않으며 그 마음에 심어지지도 않는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 그는 그 말씀을 갖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심정으로 그것을 이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새 (fowl)
62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새”란 마음속을 날아다니는 것들, 즉 생각을 표현한다. 오늘 비유에서 새는
나쁜 의미인 거짓 생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거짓 생각은 우리 마음속을 날아다니면서 기억 속에 있을지
모르는 어떤 진리,그 진리의 영향력을 잡아서 파괴시킨다.
이런 거짓 생각은 자아 사랑(self-love)으로부터 출현된다. 자아 총명 속의 거짓은 “사악해서” 진리를
붙잡아 쫓아낸다. 이런 마음들은 생각의 거짓된 길에 본거지를 두고 진정한 삶의 원리를 기꺼이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말씀 속의 진리가 이런 마음,딱딱하고, 저항이 강한, 다져진 길에 떨어지면, 그 진리는 그 진리를
박해하거나 거절함으로 인해 거짓된 생각이 그 진리를 쪼아먹을 때까지 우리 기억 속에 누워 있게 된다.
새교회의 교리에서 보여지는 바, “진리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영혼(soul)은 빛 가운데서 말씀 속의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에 정말 흥미가 없을 때, 그의 영혼(soul)은 진리를 바라지도 않는다.
돌밭 (the stony ground)
“돌밭” 같은 이들은 합리성이라는 빛 속에서 진리가 진리로서 보여지기 때문에 진리를 믿는게 아니라,
단지 권위 때문에,혹은 역사적 차원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돌밭” 또는 돌투성이의 밭이란
조그만 돌들이 많이 있는 밭을 뜻하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돌이 많이 있는 밭이라 해도 만일 깊고 비옥한
토양이 돌과 섞여 있다면 아마 작물의 수확이 얼마간이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돌밭이란 자라기에는 흙이 많지 않은 밭,또는 얇은 흙이 덮여 있을 뿐 바닥이 바위로 된 밭,그래서 씨로
하여금 뿌리를 내릴 틈을 주지 않는 밭을 말한다.누가복음의 경우,이를 두고 “바위에 씨가 떨어졌다”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어찌됐든 표면에 놓인 씨일지라도 이내 싹은 트고 빠른 성장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들은 쨍쨍 내리비치는 태양이나 뜨거운 바람에 오래 견딜 수 없다. 그 이유는 식물을 버티게
해줄 영양 공급이 겉만 덮은 토양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진짜 본성을 비수용적인
인격으로 덮어놓은 피상적인 총명의 소유자들이다.
피상적인 수용 (superficial reception)
돌밭 같은 마음들은 빠르게 전환은 하지만 피상적이다. 새 진리를 듣고 알게 된데 대해 매우 기뻐하여
이 진리들을 큰소리로 외치기도 한다.그들은 감정적이고,용솟음치며 역설적으로 진리에 접근하거나, 진리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63
가지고 논하는데 매우 흥미있어 할런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미모나 사랑스런 꽃을 보듯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는지 모른다. 비록 그들 안쪽 심정이 영적으로 단단한 껍질을 씌우고 있다 해도 겉으로는
부드러운 심정을,명백한 생각을 얼마라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이 사상들은 재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이내 중단되고 만다.그 이유는 영적 인격의
심오함,깊이 있는 옥토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들은 목적 측면에서 내향적 진지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진리도 그들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
종종 이런 사람도 부드러운 심정이나 사랑한다는 본성의 옆을 스쳐 지나 가기도 한다. 그들의 감정은
비록 피상적이지만 매우 빠르다. 그들의 눈물은 언제나 눈 언저리에 대기하고 있어 감정을 살짝 건드려도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하느님에 반대되는 악을 죄로 알고 금하도록 자신을
채찍질하기에는 너무 충분치 못하다.
신앙 부흥 (revival converts)
때때로 우리는 신앙 부흥 집회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경건심(piety)이나 시끄러운 열정(zeal) 속에 파묻힌
인격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과 받으신 고통에 눈물을 터트리는 반면,
정작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삶이 자기 삶의 실제적인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데 대한 것은
경시한다. 예수님의 원리는 모든 우리의 사랑들, 생각들, 그리고 행동에 대한 주요 동기(main-spring)이어야
한다는데 대한 깊이가 빈약하다는 말이다.그들이 자신 속의 본성을 이해한다면,그들의 감정적인 진리의
수용은 그런 대로 신실할 수 있겠으나,그게 통째로는 되지 않는다.감정적인 수용은 그들 삶의 진짜 원동력에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실족케 됨 (being offended)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사회의 상태, 교회인까지 포함해서 그들 속의 피상적인
경건함은 사회 생활의 거짓된 견해와 고리를 맺고 있으면서 인간 삶의 다방면에 걸쳐 있는 깨끗하고 건강한
모든 것,선하고 참되며 유용한 모든 것을 향해 이간질을 한다.주변의 이런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는 지반이
64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바위이고 표면만 흙이 덮인 밭에 뿌려진 씨의 결과를 가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피상적 인간은 진리를 위해 자기 애정의 성질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만일 새로운 진리가 이 사람의
마음 안에 시련을 가져오게 한다던가,이 사람의 이기적 바램이나 계획,쾌락 등등을 잘라 버리라고 촉구한다면
그는 즉각 진리를 등진다. 만일 새 진리가 이 사람의 마음속의 집안에 들어가 앉아 그 집 주인의 카운슬러가
되어 집안을 청소하라고 권고한다면 그는 즉각 그 진리를 내어 던진다. 그는 진리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이나
분위기를 살려주는 사상의 고취는 허락하나, 진리가 그에게 악을 죄로 알고 끊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라고,더 존경받을 수 있는 인격이 되라고,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관용도 있어야 한다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 보라고 권고하면 더욱 성내며 실족한다.
해가 떠오름 (sun rising)
“해”는 우리의 사랑을 표현한다. 악한 사람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은 자아 사랑이다. 이 해가
떠오르는 때란 우리의 자아 사랑이 진리에 반대하여 실력을 행사 하기 시작하는 때다. 씨라는 새 진리는
피상적 인간의 외적인 감정 속에서 빠르게 싹이 틀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도 새 진리를 발견할는지
모른다.그러나 그의 자아 사랑은 진리가 천국적 선교를 하려 한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또한 모든 이기적이고
악한 열정, 거짓 생각, 이기적 행동에 이 선교가 반대 의견뿐임을 눈치채자마자, 그는 진리를 밀어내고자
보다 강도 있는 반대 입장을 부상시킨다. 그의 자아 사랑은 그 뜨거운 광선을 발출시켜 자라나는 진리를
말려 버리는데 어쨋든,이는 자연적 마음 안에서 피상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예증 (illustrations)
위와 같은 실례는 지상에서의 주님의 공생애 시대 때에도 있었다. 어떤 이들,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말씀에 실족되어졌다.그래서 그들은“되돌아갔고 그분과 더이상 동행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하시기를, “나로 인해 실족치 않는 자는 누구든지 복이 있다”라고 말하셨던 것이다.
진리들은 유아 시절 때부터 주님에 의해 말씀으로부터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이들을 통해 기억 속에
뿌려진다.그러나 인간이 독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그의 자아 사랑의 열정이 떠오르게 되고, 그들의
탐욕과 거짓이 발출된다. 그래서 이것들이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거짓과 뒤섞어 버리거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65
아예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깊은 토양이 심정 속에 없기 때문에 멸해지고 만다. 더욱이
진리를 믿는 때조차도 사람들은 진리에 악을 좋아하는 어떤 거짓된 응용을 접합시켜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천국적 성질을 파괴하려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용감한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가끔 사나이답게 결투하는 것을 연상시킴으로서 엉뚱한데로
끌어낸다. 즉 용감한 자의 영은 자아 사랑의 가차없는 주장에 존재한다고 결론을 끌어낼 때이다. 사실
이 결론을 영적으로 이해하면 가장 비겁한 것일 뿐이다.
소년들이 생각하기를 사나이가 되는 것은 부모의 제한에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사실상,이와
같은 독단적 주장은 천사의 삶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천사는 유한한 인간의 가장 고상한 보기들이다.
천사들이 더욱 나은 천사가 되는 방법은 그들이 독립적이기보다 천국 아버지에게 인도 받기를 더욱 사랑하는
데서 있어지기 때문이다.주님을 향해 독립을 선포하는 이들은 지옥에 있는 자들뿐이다.
환난 (tribulation)
새 진리가 생각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애정이나 생각,그리고 행동 지침들의 속을 까벌릴 때,환난이나
박해가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temptation) 속에 있게 되고, 이 속에서 우리 마음과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툼이 있게 된다.이 때에 만일 우리가 진리를 단지 피상적으로 잡고 있다던가,
우리의 본성이 단단하고 비 수용적인 바위여서 뿌리 자체인 선함의 깊이가 충분치 않다면, 시험은 진리를
내던지며 그 영향력 역시 파괴할 것이다.
게다가 새교회 교리를 배운 자,이 교리를 가슴 깊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그런데 그들이 이
교리를 알고만 있을 뿐 실제에 응용하지 않고 있을 경우에도 그들은 타인과의 논쟁에서 무기로서 새교회의
명쾌한 진리를 사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교리가 자기들의 총명을 드높여 준데 대해 매우 흡족하여
기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교리가 그들 자신 속의 악들에 대해 사용될 때 그들은 이 진리에 성을 내고
만다.
시험을 치르는 인격 (testing character)
66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환난이나 박해는 인격으로 테스트를 치르게 해준다.육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 족들이,영적 측면에서는
기독교인들과 더불은 것들은 불을 통과해야 했었다.불 속에서 순수한 금속은 찌꺼기와 분리된다.
단어 “tribulation”은 꽤 암시적이다. “tribulum”은 곡식을 두들기는데 사용되는 방망이(roller)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훈련(discipline)을 표현한다. 곡식의 알맹이와 쭉정이가 두들김으로 서로 분리되듯 시련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 마음속에 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신다.
한 마디로 우리는 시련에 의해 깨끗케 된다. 우리가 진리를 사용해 보지 않고는 어떤 원리가 정녕 자신에게
값어치가 있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사용해 보려는 노력이 없는 상황에서,“미덕 중의 절반은 시험의
길을 벗어나 있는 우리의 존재로부터 흔히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련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윤곽을 명확히 해준다.만일 우리가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진실로 깊이 있게 사랑한다면,그것을
생명으로여겨 그것에로 기울 것이고,그것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단호히 분리시키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기심을 선한 원리보다 더 사랑할 경우, 선한 원리가 자기 속의 악과 거짓에 반대함을
보여주면 줄수록,더 신속하게,더 결정적으로 우리는 선한 원리를 포기하고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구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모든 것은 그 인간의 생명이 된다.” 그래서 내향적 삶은 사랑과 생각의
삶이다.
선한 사람은 시련을 견디어 낸다.그리고 시련 가운데서 그들은 자연적 약함 들을 잃게 된다.
“과즙이 더 향기가 있고 더 달듯
선한 사람들은 아픔으로 더 선하게 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시련으로 인해 자기 내향적 인격의 부분이 달성 안되는 바, 그들의 소유인 것 같았던
선과 진리의 피상적인 사랑마저 잃게 된다.
인내 (endurance)
선한 사람은 자신 속에 뿌리를 가진다.뿌리는 지면 밑에 있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이와 같이
선한 사람이 꽉 붙잡은 영적 원리는 얼핏 볼 경우 상대방에 의해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기독인의
내적 삶 속에 있는 뿌리의 깊이는 비록 세상이 그것을 잘 보지 못할지라도 주님만이 아신다. 원리에 대한
진지함의 깊이는 일상 생활 속의 시련을 얼마나 끈질기게 버텨가느냐가 결정해 준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요한복음 15:2.)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67
우리가 상대방을 파악할 때 그의 경험을 참조한다.단지 그가 말하는 고백도 아니고,열성을 내는 그의
감정,말하자면 마음이 후하다는 것 같은 것도 아니다.오로지 잘 인내하는 특성 같은 것, 세상이라는 망치가
달구어진 쇠를 대고 두드려 패는 동안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모루(anvil)같은 능력, 기꺼이 시련을 맞이함
같은 것,시험 속에서도 그가 흠모해 온 원리를 꾸준히 신봉하는 태도 같은 것,자기의 시련 깊은 심정인
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토양 속에 강한 뿌리를 놀랍게 깊이 박고 있는 그의 자세 같은데서, 또는 그의 속에
든 강건함을 끌어내서 그를 시들게 만들려는 모든 영향력을 헛수고하게 만드는 그의 힘 같은 결과를 보고
그를 판단한다.
가장 높은 삶은 가장 큰 슬픔 후에 온다.용감한 투쟁만이 가장 고귀한 강건함을 발달시켜 준다.“네가
살아온 날들같이,너의 강건함이 있으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10).
가시덤불 (the thorns)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시”란 악의 욕망이요, 이는 이기심의 흥분이다. 이와 같은 욕망과 흥분이 마음을 점거하면, 이것들은
인간에게 가르쳐진 모든 신성한 진리를 숨막히게 해서 파괴시킨다. 이것들은 인간을 영적인 것 대신 세상적으로
만든다. 이 삶은 자아와 세상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므로 그 사람은 선에 관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세상적인 흥분은 감각적이고 외적인 삶,허구적인 가치들에 소모되고 만다.
우리의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욕망,마치 가시나무같이 불이 쉽게 붙고 재빠르게 탄다.가시나무 같은
사람들도 아마 진리를 알고 싶어하고 총명해지기를 바라나, 그들은 자신의 거듭남에 이 진리를 응용하려고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증
이와 같은 사람도 종교적인데 기울기도 하나 그는 바깥쪽 분위기나 경건함 또는 고백하는 것에 치중하고
68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만다.그런데도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자로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 천국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간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들 속의
세상적 욕망을 빼어 내려 하는 어떤 진리도 자신들의 의지 안에 정착하도록 허락지 않는다. 이들은 설교가
뭔가 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가상되는 경우,그 설교를 매우 기뻐한다.이와 같은 사람은
진리인고로 진리 안에서가 아닌 감각적인 웅변술에 흥미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마음속에 뿌려진
진리의 씨는 세상적 욕망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격이된다.
그 땅 어디에 가시덤불을 잘 자라게 하는 곳이 있을까?그리고 밀을 잘 자라게 하는 곳은 어디에?
곤경은 밀이나 가시덤불 모두를 자라게 하려고 노력한다.만일 가시덤불이 토양의 소유권을 쟁취한다면,
거기에는 밀을 성장시킬 땅의 여유가 없게 된다. 가시덤불이 밀의 성장을 저지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게 된다.하나는 토양의 자양물을 먼저 흡수해 버리는 것,또 하나는 밀에 그늘만을 주는 것, 엉켜 질식시키는
것이다.
가시덤불은 토양 자체가 그 나무의 본산지이다.다시 말해 농부가 심지 않았는데도 자라 오른다.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 마음속에서 세상에 대한 욕망은 그의 주거지를 발견하고 번성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의 악과 세상욕은 우리의 애정들에게 자기들의 자양물을 끌어낸다. 마치 심지도 않은 가시덤불이 싹이
터서 그곳 토양물에서 양분을 빨아올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시덤불이 밀을 질식시키듯 세상욕의 재빠른
성장은 천국의 선한 영향력을 질식시켜 진리의 씨로 하여금 결실을 못 맺게 한다.
천국은 사랑의 따뜻함과 진리의 빛을 가지고 열린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만일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이 지독하게 성장해서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이런 것들은 마음에 와지는 천국의 영향을 뒤집고,
그 천국 성질을 파괴시킨다. 이리하면 기억 속에 놓여 있는 진리들은 그 진리를 생생하게 해줄 천국의
영향력을 받을 수 없어 생명의 근원에서 잘려지는 바,씨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세상욕 (worldliness)
가시덤불에 질식되는 현상은“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재물에 사기 당한”결과이다. 즉 직업이라든가
쾌락을 담당하는 세상적 영의 결과이다.우리가 해야 하는 것,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에 적당한 관심을
두는 것은 슬기롭고 유용하다.관심과 재물 모두 적당히 사용된다면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이것의 나쁜
영향이란 그것의 남용에,그것에 현혹될 때에 존재하는 것이다.세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업에 정력적으로,능력도 발휘해 보고,근면하게 종사해야 하는 것 물론 당연지사이다. 정직하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69
쓸모 있게 부자가 되는 것,부의 선용을 위해서라면 정법에 속한다.그러나 탐욕, 허욕은 지옥적인 것이다.
종종 우리는 세상적인 주제에 관심이나 애정이 너무 많이 흡수될는지 모른다. 시중드느라 경황이 없었던
마르타,삶의 외적인 것을 과도하게 추켜세운 마르타에게“필요한 꼭 한가지 것”은 영적인 것, 이것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주님은 그녀를 타이르셨다 (누가복음 10:38-42).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이 마음속의 주인이어야 하고 세상적 관심사는 종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적 관심사나 감각적 삶이라는 외적인 것들을 스스로 포기할 경우, 자신의 신중성에 의존하기
십상이어서 자칫 신성한 섭리를 잊기 쉽다. 인간을 에덴이라는 동산으로 상징화된 삶의 조건에서 몰아낸
것이 바로 자아 신뢰나 감각성이었다.
인간이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를 때만이 주님은 인간을 진정으로 축복하실 수 있다. 세상의 일들을
좋은 쪽으로 처리하게 되면 자기는 종교인으로 바뀌었다고 즉각 말하는 이들을 가끔 보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채택하라는 삶의 순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외적인 것)을 너희에게 더하리라”이다. 이는 영적인 필요에 따라 자연적인 것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선한 영적 질서로 세상의 일을 처리 해갈 수 없다.
무관심 (indifference)
가시덤불 밭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상황은 길바닥의 경우에서 같이 진리를 바깥쪽 측면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논쟁 같은 것에 의해 자신의 신앙이 공격당할 때,진리에 대한 우리의 흥미는 공격자의 논쟁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 속 자아 신뢰(self-trust)라는 것은 모든 불신앙이 펼치는 논쟁보다
더 영적 생명을 위험하게 한다. 자아 신뢰 속에는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게 하는 미묘하게 속으로만 흐르는
힘이 있다.이 무관심은 우리가 세상에 관심이 너무 고조될 경우,또는 재물에 현혹될 경우 자란다. 다시
말해 감각적인 삶이 우리의 애정과 시선에 눈길을 보내고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속의 정신적
가시덤불은 재빠르게 성장해서 주님이 마음속에 뿌려 놓으신 영적인 밀을 닥치는 대로 질식시켜 버린다.
밀과 가시덤불 모두를 배양하게 하는 마음속의 미덕(virtue)이란 것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재물 (riches)
70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현혹하는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 부함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라,모든 정신적,물질적 소유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재물, 슬기로운 씀씀이를 위하기 보다 이기적인데 충당하려는 재물까지 포함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지식, 지적 능력, 개인의 외모, 사회적 지위, 공적 명성,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밖의 것,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낫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들이 위험한 재물들이다. 이것들이 영혼을 현혹하며
영적 생명을 파괴하려 위협하고 있다.이것은 선하고 참된 원리라는 씨,사랑의 주님이 정성들여 뿌려
놓으신 씨들을 질식시킨다.
이 재물을 이기적으로 사랑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심정이나 지성 속에서 우리의 애정과 생각들을 흡수해
버리고, 주님의 선하고 참된 영적 생명의 원리들에 주어져야 할 거주지를 찬탈해 버린다.
이런 모습이 위에서 열거해 본 재물들이다. 이 재물들을 가지고 인간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 이유는 자신의 거듭남이나 인격의 향상보다 이 재물을 더 사랑하며 더 신뢰를 두기 때문이다.
천국 또는 인격의 천국적 성질 속에서 모든 종류의 재물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되어야 한다.
예증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천하고 낮은 수준의 인격 소유자들,매우 한정된 총명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위치는 남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자부하며 떠벌린다.그 떠벌리는 이유의 속을 들여다보면,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높은 사회 지위나 재산이 있어서, 자기 가문의 누구가 사회의 인사급이었고 자기는 그의 후손이어서라
는 등등을 자기 속에서 은근히 내세워 자기를 추켜 보고자,또는 남이 알아 줘야 하는데라는 식의 태도들이고,
이것이 사회 전반에 꽤 널려져 있는 보편화된 지옥들이다.이런 자만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밀밭 같은 인간 사회 속에서 보면 이런 자만으로 자기 동료보다 자신이 더 높은 듯 여기려
드는 두뇌는 사실 텅빈 깡통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으로는 높으면서도 영적으로는 텅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예수님은 그분의 신성한 총명을 통해 그분 자신을 유화 시키고 낮추시었다.그래서 더 높은 천사들이
더 높은 인격 속에 머무르려면 더 겸손해야 하고 자기 주장이 더 줄어들어야 한다.
인격보다 지위에 관심을 두는 세상을 둘러보자. 정치에서, 지옥적 능력의 소유자들, 방대한 자기 주장,
아우성 소리, 술책, 부패된 협상 등등을 자기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여차 없이 행사 한다. 이런 것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저질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이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직에 앉은 것을 가지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71
자신 속의 조그만 것들을 극구 찬양 받게 해보려 한다.그런데 이런 부류가 그들 목적을 달성했을 때,
그들이 확보한 재물은 가시덤불 같아서 조용하게 유용한 삶에 있는 만족, 선하고 참된 삶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든 질식시켜 간다.
이 질식의 정도가 더 증가하고 위험수위인 것, 정신적, 물질적인 재물에 대한 욕망에 극도의 흥분이
연결을 이루면 화약고에 불이 접근되는 격이다. 이런 경우는 지면을 할애해서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들
속에,주위에서 쉽게 그 예를 각자 찾을 수 있다.국가의 물질적인 발달이 빠르게 있어지면서, 인간속의
중대사에 관한 애정이나 관심도는 물질적인 것들에 빨려 들어 영적인 것들의 배양에 대한 심오한 흥미마저
축출되어지고 마는 경우도 그 한 예다.
패권을 다투는데 혈안이 된 인간 종족 속에서 사회는 도덕적 쇠퇴로 벌집 같은 구멍투성이가 된다.
차지해야겠다는 욕심, 명성을 얻어야 한다는 야망 같은 것은 온갖 종류의 부정을 닥치는 대로 저지른다.
그래서 음모나 사기들은 온갖 삶의 형태에 만연되고 만다.무절제나 방탕도 더 난폭해진다.이런 가시덤불이
영의 생명을 질식시킨다는 것에 의아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질문의 답
이런 주위 환경 속에서,매우 예민하고 열렬한 희망으로 불타는 젊은이들,그럼에도 포부라는 영으로
차 있는 젊은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우선 그들은 자기 자신의 합리적인 총명에 각종 주변 상황을 놓아서,
세상적 삶과 쾌락 위주는 인간 생명의 가장 크고 고상한 측면에 자기 영혼을 닫히게 하고 만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합리적 총명에 놓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영적인 마음을 순진하고 쓸모 있게 하며 하느님의 인도하에 놔둘 때만이 세상의 쾌락이나
의무들에도 충실해짐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말씀 속의 진리를 빠르게 붙잡지 않는다면,그의 물질적,정신적인 재물, 세상적 관심은 그의
온 마음을 다 채울 때까지 놀랍게 성장하여 위험한 가시덤불이 되고 만다.그렇게 되면 싹트는 마음,젊은이의
마음에 천사나 부모 그리고 선생을 통해 주님이 뿌려 놓으신 천국적인 진리의 선한 씨들은 이 가시덤불에
눌려 질식사하고 만다.
“만일 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뽑아 버려라...” 우리가 물질적이거나 이기적인 정신의 소유물을 진정한
재물로서 간주하고 있는 한,예수님께 찾아가“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부자 청년같이
될는지 모른다. 이 청년은 영생을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소유물을 포기해야 한다고 배웠을 때
72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슬픔에 잠기고 돌아갔는 바,그는 겸손한 선용의 삶 속에서 주님을 기꺼이 따르지 못했고,자신을 부정하는
댓가인 천국을 기꺼이 잡으려 하지 않았다.
가시덤불의 성장
반갑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자주 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젊은 마음 안에 있는 위의 가시덤불의
성장과 동시에 인격이 퇴보하는 모습이다. 세상에 속한 것을 맛보기 시작하여 그것들에 입맛을 더욱 다시기
시작하면서 영적 원리가 잊혀져 가기 시작할 때,인격은 도덕적으로나,영적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책임에
불성실 하는 쪽으로 퇴보한다.더욱이 결혼 관계의 경우,무정한 불성실이 불법이란 뒷박을 채우고, “사람의
자,즉 천사의 자”에 속하는 평화롭고 천국적인 품위에 죽음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뒤로 미끄러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지기도 한다.
개인적 응용
여러분, 특히 이 책의 독자들, 아마 자기 마음속의 영성(pirituality)이 더디게 자라 오르는데 대해 자주
실망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만일 그런 적이 있다면,그래서 그 원인을 열심히 찾으려 한 적이 있다면,
그 원인,자신 속의 밀이 질식하도록 한 것은 자신 속의 악한 느낌,거짓 생각 또는 죄로 변질되게 부추기는
어떤 습관들임을 발견했었으리라 본다.성격의 결점,느끼는데 있어서의 자신 속의 불친절, 남의 흠집만
잡으려는 생각,말만 튀어나오면 자제력을 잃는 혀,등등의 것들이 영적 성장의 뒷켠에서 조종 역할을
담당했음을 발견한다.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더 나은 영적 성장을 가졌다면,그 배후에는 발견된 약함투성이에
대한 절대적인 자아 부정이 있었음을 동시에 알게 된다.
성공은 우리들 앞에 모두 놓여 있다.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방법으로 일해 가야 한다.즉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심어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 족속을 멸시하던 주위의 모든
민족이 다시는 가시로 찌르지 아니하고 갈대로 할퀴지 아니할 것이다” (에제키엘 28:24.).
훈련의 섭리 (discipline providential)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73
삶 속에 상존하는 시련과 훈련은 하느님의 섭리 하에 우리 속에서 가시덤불이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허용되어져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손쉽게 번 돈 또는 부귀는 우리 속의 밀보다는 가시덤불을
더 잘 자라게 하는 환경,가장 위험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따라서 우리의 가장 큰 선을 위해, 또는 영적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신성하게 허락된 훈련 속의 투쟁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영적 위험인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재물은 각기 다른 듯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적 관심과 재물의
남용,모두 이기심으로부터 튀어나온다.하나는 탐닉이라는 수단을 포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탐닉을
수단으로 감각적으로 자라난다.
가시덤불의 상응
그들의 구세주 하느님에게 온갖 희롱을 퍼부으면서 가시면류관을 씌어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국가가
자신들의 악을 가지고 그분의 영적 생명의 면류관과 대체 해버린 것은 생각만 해도 슬퍼지는 일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각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우리가 악을 죄로서 덜 끊을 수록 더 많은 악의 탐닉에 빠져,
더욱 악을 위해 선을 내려 놓고, 악은 선을 가장하여 영적 총명은 어두워져 죄라는 가시덤불이 밀을 질식시키고
만다.가장 순수한 삶의 나날이 가장 명백한 총명의 나날이기도 한 것이다.
과오가 있는 곳 (where the fault lies)
이상 살핀 세 경우, 길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에서 씨가 자라나지 못한 이유는 그 과오가 씨에 있는
게 아니라 토양에 있다.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씨만을 뿌리신다.그것도 광범위하게 뿌리신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조건이 어떠한 상태에 있던지 주님의 진리는 마음에 뿌려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 우리의 자아 사랑은 자신의 영적 실패를 우리가 병들어서, 가난해서, 사업상 바빠서, 운이 나빠서,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의 탓으로 돌려 대고 싶어한다.그러나 이것들은 실패의 원인이 결코 못된다.그
원인은 우리 심정과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좋은 씨가 마음에 뿌려졌다는 것, 그 씨에 알맞은 마음이라는 토양이 적절히 있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정도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비유에 언급된 세 가지 실패를 보면,첫 번째 실패는 토양이 씨를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두 번째 실패는 토양의 조건이 천박했다.그리고 세 번째 실패는 비록 토양이 좋은
74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조건이었지만 그 토양이 다른 것들로 꽉 차 있는데 실패 원인이 있었다.
첫 실패에서,씨는 싹 조차도 내지 못했다.둘째 실패에서 작물이 시들어 말라죽었고, 셋째 상태에서는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만숙되기 전에 가시덤불로 말미암아 질식했다.세 조건 모두의 인간 마음은 과오라는
조건하에 있었다.각 마음 조건은 주님의 진리를 거절하고,뒤집어엎고, 고통받게 했다.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가르쳐질 때,혹은 진리의 암시가 와질 때,우리의 합리적 능력은 천국의 빛을 받기 위해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돌아선다.그리하여 진리가 지상의 삶에 속한 것들에 응용됨으로써 그 빛을 가져다준다.우리의
합리적 능력이 주님을 스스로 따르게 하는 위쪽으로 돌아서면 우리는 거듭 나아진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좋은 땅이라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좋은 땅 (the good ground)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삶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듣는 것이다.이는 교리의 서술만을 듣는다는게 아니라,말씀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서 총명하게 듣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지적으로 파악했을
뿐아니라 삶의 원리로서 그 의미를 취하기 위해 이해성 속에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심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요,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의심을 가지고 진리를 듣는
이들,자기의 자연적 추론을 가지고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이들은 자신이 총명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정밀하게 보면 꼭 반대이다.순수한 영적 총명은 의지가 어떻게 진리를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영적 진리의 빛을 향해 자신의 이해성을 어떻게 여느냐에 의존된다.영적 진리를 잘 받으려면 우리는“바르고
선한 심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선처된 심정, 인격의 단순함은 진리를 사용할 것이고, 그래서 진리를
살아 있게 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75
예증 (illustration)
사도인 토마는 자신의 감각으로 예증되는 증거가 잡힐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은,진리가 내면으로 열리는 것이 진리의 외부적 증명보다 더 낫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진리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진리를 절실하게 바라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진리를 의심하는
상태에 있다.그러나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그래서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수정해 볼 목적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향해 마음을 깔끔히 정렬해 놓은 상태이다.그들은 귀로 듣고,심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진리가 그들에게 와질 때 그들은 그것이 진리임을 인식하려는 내적 상태에 있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다가 온 진리가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임을 보고,영적 인격의 성장에 이 진리들을 즉각 사용한다.한
마디로 그들은 좋은 땅이다.그들은 진리를 합리적으로 사랑하는 이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진리에 사려 깊은 관심을 쏟는다.
진리가 마음속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선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그가 그의 의지,심정에 좋은
땅을 가져야 생산이 가능하다.진리를 가지기 위해 자신을 강요해야 하며,관념이라는 수준에서가 아닌
실지 사용을 위해,악은 죄가 되기 때문에 금하고 선을 행하는 좋은 땅이어야 한다.
진리를 향해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큰 이점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딱딱한 땅 같은 것이다.이 상태의 사람은 진리를 향해 긍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모든
나쁜 정신적 새들, 자연적인 수준 속에 든 거짓 생각이나 감각적인 추론은 접근해서 진리를 쪼아먹되 마음속의
진리가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 쪼아먹는다.이런 조건하에서 인간은 결코 진리를 붙잡지 못한다.그의
마음은 부정적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은 우리의 합리적 생각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감각들이 감각적이라는 차원을 넘어 있는 것들을 판단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좋은 땅의 품질 (quality of good ground)
좋은 땅이란 토양이 부드럽고, 깊고, 비옥하며, 잡된 것이 없는 땅을 말한다. 마음속의 좋은 땅도 이와
76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같이 부드러워 진리의 씨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악이나 거짓의 탐닉에 의해 굳어져 있어서는
안된다.이 땅은 진리를 받아 붙잡기 위해 반드시 깊고,심오해야 한다.
사상을 취하려는 지적인 즉응력만이 딱딱한 심정을 덮고 있거나, 암석이 깔린 땅의 표면만을 이 즉응력이
덮고 있을 경우도 있지만,옥토 같은 마음은 가시덤불이나 잡초가 없는 깨끗한 땅을 간직해야 한다.세상에
쏠린 관심,감각의 쾌락은 영의 지배하에 반드시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땅의 조건은 농부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조절되어질 수도 있다.즉 땅을 갈아엎는다거나,잡초를
제거하여 좋은 조건을 간직할 수 있다는 말이다.주님이 작물을 생산하실 수 있기 전,인간은 이와 같이
인간 부분의 일을 해 놓아야만 한다.교회에서 가르쳐지듯,말씀의 교리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배워야만
한다. 즉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속성은 어떠하며,이웃이 누구인지,사랑이 무엇인지,선하고
참된 것,그리고 유용한 것은 무엇인지,악과 거짓, 죄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삶,그 삶의 가능성도 배워야 한다.
위의 사항들을 자신이 사용할 목적으로 알고자 할 때,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그러면 마음은 파종을
위해 준비가 마무리 된 조건하의 땅을 갖춘 셈이다. 그래서 주님은 씨 뿌리는 사람 같이 그분의 진리를
마음에 드넓게 뿌리신다. 씨, 태양, 비는 땅이 어떤 조건에 있던 똑 같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르다.
그래서“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그분의 부드러운 자비는 그분의 일 속에 스며 있다,” “그분은 그분의
해를 선한 자,악한 자 모두에게 비추이게 해 주시며,의로운 자든, 불의한 사람이든 똑같이 비를 보내
주신다.” 그러나 그 결과는 토양의 질, 양에 따라 달라진다.
땅 위와 아래 (on or in the ground)
옥토의 경우 씨는 땅 위 뿐만 아니라 땅 아래로도 들어간다. 마음이 진리에 문을 열어 내적으로 영접한다는
말이다.씨가 비옥한 토양 아래로 뚫고 들듯,진리는 이해성 뿐만 아니라 의지에도 꿰뚫고 들어간다. 이
조건에서만 마음은 말씀을 잘 간직하게 된다. “나에게 당신의 법을 지킬 수 있도록 이해를 열어주시옵소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법을 지키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필요한 모든 것은 진리가 기억 속에서 마음을 통과하여 가면서 진리를 인상깊게
남기고,관통하여 나가 다시 그 밖의 것에서 거할 방을 만든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그가 진리를 간직할
때까지, 진리가 그와 더불어 정신적인 가족의 일원이 될 때까지 어떤 진리도 인간에게 살아 있는 실재가
되지 못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77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진리는 진리가 사용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진리가 행위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인간 삶의 원리로 있게 될 때만이 진리는 존재한다.
선의 다양함 (varieties of good)
이런 질문도 있다. 왜 정신적인 땅은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땅이 선이라 불릴까?
어린 시절 마음속의 선은 사실 자연적이지 영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선은 수확할 것으로 차 있는 땅 같지
않고 파종을 위해 준비해 놓은 땅 같다.한 마디로 잘 정리된 마음이다.
마음은 언제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 유아기 때부터 주님은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에
관한 상태들을 우리 마음에 이식해 놓으신다.새교회의 용어로 이는“아껴 두신 것, 남겨 두신 것, 나머지,
remains, remants”라 부르며, 이는 내적 삶에 속한 것들로서 우리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으면서 씨를 위해
좋은 조건을 형성시킨다.이와 같이“아껴 두신 것”들은 신성한 진리의 씨가 잘 심겨 지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는 수단들이다.
만일 우리가 삶 속에서 이러한 내향적인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들을 배양하고자 노력한다면, 이 아껴
두셨던 것들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천국적인 영향력을 부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경멸하며 그것의 자극에 저항하면, 우리는 여타 우리 속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도
마음이 굳어지게 하고 만다.우리가 악을 향하려는 경향성을 보고,그것에 저항하면 필시 우리는 악에
반대되도록 자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들을 흠모하고 사랑하며 실제에 응용하면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더 나은 것,내적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이“아껴 두신 것들”을 질식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더욱 활활 타는 이기적 열정에 의해 더 단단한 밭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인 씨들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굳어진데 대한 책임이 있게 되는데, 그 이유가 굳어짐은 악한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이라 해도 우리는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는지 모른다.그러나 그 지식을
인격이 거듭 나아가는데 사용치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올바른 심정”인 좋은 땅은 풍성한 열매를 산출한다.
살아 있는 진리의 씨가 어느 좋은 토양을 발견하면,그 씨는 자기의 생명력을 성장이라는 것에서 보여준다.
“올바른 심정, honest heart”은 진리가 삶을 통치하도록 순수하고 진지한 애정을 가지고 진리를 받는다.
토지(ground)는 사랑 또는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씨를 받는 이들의 차이점은 각자의 토지, 즉 각자가
소유한 애정의 품질과 양에 있어서의 차이점인 것이다.
78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겨울철의 빛이 식물을 생산하지 못하듯,총명만으로는 거듭나는데 있어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그러나
여름철 태양의 빛과 열이 하나가 되어 소출을 내듯,총명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애정)과 하나가 되면
소출이 가능해진다.
열매를 맺음 (bearing fruit)
좋은 땅인 심정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행하고,악을 행하기를 중단하고 선을
행한다.주님을 사랑함,이웃을 향한 이타애는 삶에 응용되어 구체화되며 아주 사소한 삶의 사건(ultimate)들에
게까지 스며든다.땅이 좋냐 나쁘냐라는 판정은 그 땅에서 무엇이 생산되느냐에 있다.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의 증거는 우리가 진리를 실용적인데 사용하는 양적 증가에 존재한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있으며,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우리가 증가시키는 선함은
삼십 배뿐일는지 모른다.아마 삼십 배만이 우리의 실질적 증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선함이 증가되고
있지 않으면 어떤 영성도 그 선함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성장 (individual growth)
이 비유는 마음의 다른 계층에 관해서뿐아니라 각 인의 마음에서 거듭나는 각기 다른 상태와 수준까지도
언급하고 있다.비유에서 주목할 것은,세 토지 조건이 더 향상되어 가는 것에 관해서이다. 향상되는 토지
조건은 씨가 토양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더 자라고,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거듭남
속에서 각기 거듭나는 마음은 이런 조건들을 통과하면서 진보되는 성장이 있어진다. 거듭나는 마음은 비유
속의 위험들을 만나고 정복하되 주님의 섭리 아래에서이다.
이 비유는 교회에 관해서도 언급한다.무엇이 교회를 구성할까?교리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선용의
삶,이것이 인간으로 기독교인을 만든다.진리로 살아보지 않는 이상 진리는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삼십 배 등등 (thirty-fold etc)
선한 사람에서조차,진리를 받는 수준은 양과 질 양면에서 차이가 있다.“어떤 것은 백 배가 된 것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79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결실의 수준은 거듭나는 삶의 세
가지 불연속적 수준,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이다.
위의 모든 숫자들은 십(10)을 곱해서 이루어진다. 숫자 10이란 “아껴 두신 것, remains,” 자라나는 영의
내면에 이식된 생명 상태를 명시하고 있다. 만일 이 아껴 두신 것이 자연적 수준인 인간이 의식하는 삶에서
발달된다면, 그 결과는 외적인 법, 계명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이 상태는 3 x 10, 30의
결실을 거둔다. 3은 진리 측면에서 가득 찬(full) 상태를 말한다.
이 사람이 보다 높고,보다 내면적인 영적 성장의 단계로 간다면,그는 영적 수준인 진리를 총명하게
사랑하는 상태,즉 진리를 삶의 원리로 소유하는 상태에 진입된다.즉 그는 육십 배의 결실을 가져온다.
6이란 정신적인 전투 상태,창조의 육일, 거듭남의 육일, 일하는 육일, 이렛날 이전의 날들, 완성하는
상태를 말한다.
100이란 한 바퀴 돈 숫자(a round number)로서 선의 측면에서 가득 찬 상태, 진보가 다된 상태를 표현한다.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이들은 완성하는 거듭남이 충만된 상태,즉 천적 상태인 선을 사랑함,주님을 사랑하는
충만된 사랑,최고의 사랑에 도달된다.이 상태에서 “주님이 아껴 두신 것”은 인간이 의식하는 삶에서
100% 발달된다.
이렇게 해서 토양의 세 가지 생산성은 거듭남의 세 조건, 불연속 등차, 그리고 세 천국을 표현한다.
그 반대 측면에서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실패의 세 조건은 거꾸로된 삶,지옥의 삶을 표현한다.따라서
비유는 선과 악,양 측면에서의 완전한 조건,그 조건의 확증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적 상태를 영적으로 음미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천적 상태는 가장 매력적인 상태같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감상적인 사람에게는 달빛이 햇빛보다 더 아름답고,꽃이 익은 열매보다 더 마음을 당기게
하고,젊은 여자가 노령의 여자보다 더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이러한 맛은 심오하고 내면적 사랑에 속하는
수확물이라기 보다 믿음의 초기 상태들에 속한다.
보다 진보된 상태 속에서 행동으로 구체화된 원리인 만숙된 것은 입증 안된 감상적인 것 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그래서 천적 천사는“사람의 자”로 재어 네모반듯하다.
새교회 저술을 읽는 독자
이 세상 상태에 관해 말하면서 스베덴보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저서를 읽는 이들에게는 다섯
계층이 있다.첫째는 진리가 전혀 없거나 다른 교리가 꽉 차 있어 완전히 거절하는 자,둘째는 호기심의
80 씨뿌리는 사람- 마태복음13장 3-8절, 18-23절
수준에서 받는 자, 셋째는 지적 측면에서 받아 어느 정도까지는 책의 내용에 흡족해 했지만 책의 내용이
그들 삶속에 스며들고자 할 때 곧바로 이전 상태로 환원하는 자,넷째는 이 책이 그들 자신을 잘 설득시켜,
어느 정도까지지만 악을 죄로 알고 끊는 데까지 인도되고 선을 행하는 자. 다섯 째는 책의 내용에 기쁨을
가지고 영접하며 책의 내용을 그들 삶에서 확증하는 자이다.”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이 세상에 허락한 새교회라는
처방을 수용하는 인간 마음의 조건들이다.
수확 (harvest)
더 충만한 진리가 마음이란 땅을 점거하면 더 많은 영적 소출이 수확기에 있어진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많은 수확을 위해 일하신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그분은 인간 상태가 허용하는 정도에서만 산출하실
수 있다. 그분은“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실 수 없다 (마태복음 7:16).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요한복음 15:8). 주님의 위대하심과 선함을
나타내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선한 자의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에게 더욱 더
영광을 돌리면 돌릴수록 더 많고 더 품질 좋은 영적 열매가 생산된다. 자신에게 영광을 더 돌릴수록 우리의
선한 열매는 더욱 줄어든다.
씨가 길가에,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 어느 곳에 떨어지든 그 밭에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주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영적 이유의 하나는 마음 밭이 준비된 자,진리를 듣고 이해할 준비가 된 자를 위해,
만일 준비가 안되었다면,진리가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고 피할 수 있도록,한마디로 진리가 더렵혀짐으로
받을 그들의 상해를 피할 수 있게 하시려는 배려에서 였다.
거의 모든 이들의 경우,자기들은 진리에 흥미가 있고,그것을 찾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흥미가 어떤 속성인지,피상적인 흥미인지,심오한 흥미인지 점검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진리에 무딘 흥미만 가지고 있다고 발견하면,우리는 길바닥을 갈아엎어야 한다.우리 심정이 암석
같음을 발견했다면, 반드시 그 암석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부수어 트려 가루가 되어 토양의 심도를 갖게
해야 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트리는 망치 같지 아니하냐?”
(예레미야4:3) 추구할 오직 하나는 우리의 거듭남이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0:5,6).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81
들음 (hearing)
주님의 성전에서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가 가르쳐지는 데서 우리에게 인정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즉 좋은 설교와 좋은 들음이다.만족한 생산을 위해 우량한 씨도 있어야겠지만 적절한 밭도
필수적이다. 제 아무리 설교 강단이 일을 많이 한다 해도 교회 의자에 앉은 사람이 경청하려는 자세가
없는 이상 진리의 씨는 뿌려지지 않는다.잘 들음은 모임에서 좋은 설교를 촉진시킨다.“네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 유념하느냐?” 심정으로 듣는 것, 열린 심정을 가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우리의 주님은 설교에 관해서는 아주 적은 방향을 제시하고 계시지만,듣는 것에 관한 언급은 상당히 많다.
우리가 언제나 유념해야 할 것은 듣는 것은 교인의 의무이자 설교자의 의무로서 교회에 가기 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즉 세상의 사업이나,정치, 육적인 쾌락 같은 감각적 세계로 열리는 마음 문을
최소한도 일요일 하루만은 걸어 잠가야 한다.그래서 듣는 자나 설교자 양쪽 모두,주님만이 신성한 진리를
뿌리시는 분이시다는 것,설교자는 그분의 미천한 조력자일뿐임을 유념한다면,듣는 자와 설교자 모두
더 나으며,더 유용하게 되리라.“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82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5
밀밭 속의 가라지
-지옥은 신성의 영향력을 분쇄하려고 발버둥친다-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가 있다. 25.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27. 종은 주인께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읍니까?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읍니까?’ 하고 묻자 28.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29.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 들이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36. 그 뒤에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37.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38.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83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41.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43.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투쟁 (the struggle)
우리의 마음은 선과 악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싸움터이다.천국은 우리가 그곳의 축복을 받도록 추구하고,
지옥은 우리를 지옥의 비참함 안에 끌어들이려 한다.이 둘에 대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유사점 (resemblances)
오늘 비유는“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 두어야 한다. 사실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비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비유들은 연결된 형태로 진보해 가는 시리즈로서
선한 사람 속에서는 거듭나는 진보를,나쁜 사람 속에서는 악을 확증해 가는 것을 보여준다.
두 비유의 구별점 (distinctions)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새롭고 영적인 삶이 일어나도록
진리를 뿌리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각기 다른 종류에 따라 진리를 영접하는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에서,사랑 있는 심정인 옥토에 진리가 뿌려진 것까지 포함해서 진리라는 좋은 씨에
따라 붙는 위험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위험들은 신성한 파종자의 일을 역행하려는 악령의 발버둥침에서
비롯된다.
오늘 비유에서, 곤경은 땅의 성질에 기인되는게 아니라 악마의 일로 인해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84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따라서 씨 뿌리는 사람은 두 사람이 있다는 것,천국 삶의 수확을 위해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시고,지옥
삶을 전염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나쁜 씨를 뿌리는 악마가 있다고 말한다.
천국 (the kingdom of heaven)
천국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주님의 교회 속에 있다.주님을 왕으로 인정하고,그분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곳에 천국은 존재한다.이 왕국은 물질계의 장소가 아니고 어떤 상태,조건 속에 존재한다. 즉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을 통치하는 원리로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주님은
인간의 지성에 진리의 씨를 뿌리신다.좋은 씨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신성한 진리이다.이 진리의
씨가 싹틈으로서 모든 천국적인 선이 그 안에 있게 되고 그 선을 운반하기도 한다.
자녀 (the children)
좋은 씨는 하늘 나라에 있는 자녀들이라고 본문에서 말해진다.각 개인으로 볼 때,영의 아버지를 주님으로,
영의 어머니를 교회로 삼아 거듭나는 이들이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다. 씨가 진리이다는 말은 추상적이지만
이 진리가 사람 속에 존재하면,우리는 진리를 씨로서 비유하여 부른다.그 이유가 진리의 씨는 각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이 싹이 터서 자라 열매를 생산하면 그 사람을 특징짓게
하는 품질을 주게 된다.우리의 정신적인 왕국에 있는 자녀들이란 애정과 생각들이다.신성한 진리라는
좋은 씨는 거듭나는 사람의 인격을 좌지우지하여 그 진리의 살아 있는 형태를 그에게서 만든다. 한 마디로
원리가 인간에게서 구체화된다는 말이다.
밭 (the field)
씨가 뿌려진 “밭”이 “세상”이다. 이는 정신적인 세계에 있는 것, 자연적 마음이요, 세상의 일을 담당하는
마음 부분을 말한다.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은 인간의 마음 중 내적 부분,즉 영적 마음에 심어지나,
이는 반드시 자연적 마음에도 이식되어져야 한다. 즉 기독교적 전투를 지상에서 펼치어 각 사람은 자신
속의 자연적 마음을 통제 해감으로써 기독교적 승리를 천국에서 갖기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과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85
같다.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진리의 씨를 인간의 영에 뿌리시되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까지도 뿌리시어 그
진리가 바깥쪽 삶에서 자라나 통제해 가도록 하신다. 교회는 품질 면에서 세상적이지 않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주님께서 말하신 바,“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에게 밝히 알려질
것이다.그리고 나서야 끝이 올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분이 의미하신 것은 복음이 지상의 모든
곳에 도달되어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세상의 것을 다루는 마음의 부분,자연적 마음의 모든 곳에 도달되어
복음의 영향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면 인간은 거듭나는 조건들을 거쳐가는 바,거듭나지 못한
마음 부분에는 끝이 온다는 말이다.
악을 만남 (meeting evil)
악한 영향력과 우리가 접촉되는 것 또한 세상에 존재한다. 천국의 천사들은 영의 내면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천국적인 것들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에 관여하는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속한 정신
세계에서 악한 영향력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어떤 암시를 만들려고 애쓴다.
그래서 자연적 마음에서 선한 영향력과 악한 영향력은 승부를 가리게 된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시나
악마는 가라지를 뿌린다.이것이 삶에 의거 인격을 형성하는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다.
잠을 자다 (sleeping)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우리가 보다 높은 삶,영적 삶 속에 있을 때이다.그러나 우리가 감각에
속한 것들,외적이고 자연적인 삶에로 내려갈 때,우리는 상대적으로 잠들고, 내적 삶에 대해서 무뎌지거나
꾸벅꾸벅 조는 상태에 있게 된다.이것이 본문에서“잠든 사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가라지의 글자적 의미 (the literal meaning)
글자적 측면에서 본문은 타인을 해치고 싶어하는 사람, 비겁하고 심술궂은 사람의 야비한 행동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한 밤중에 야비한 행동의 표적이 잘 뿌려진 밀밭이고 거기에 악한 잡초의 씨들을
86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뿌렸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가라지”란 통상 부르는 가라지,즉 밭에 나는 강아지풀 같은 식물이 아니다.왜냐하면
이런 풀은 때로 가축을 위해 일부러 뿌리기도 하기 때문이다.사실 이런 풀(가라지)은 성장의 매 단계마다에서
밀의 성장과 달라 금방 식별되는 식물이기도 하므로 본문의 가라지와는 다르다. “가라지, tares”로 번역된
단어 “zizania”는 이 비유를 제외하면 성경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 식물을 탐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결정은
“zizania”는 팔레스틴의 아랍어 “zowan,” 특별하게는 “독보리, darnel”이라 불리는 잡초일 것이라고 했다.
이 잡초는 성장의 각 단계가 밀과 아주 비슷하다. 이 잡초는 “가짜 밀, bastard wheat”이라고도 불린다.
독보리를 뽑을 때 두 가지 위험이 뒤따른다. 하나는 독보리를 뽑다 보면 옆의 밀의 뿌리도 뽑힐 수
있다.기술적 측면의 위험이 있고,또 하나는 밀을 독보리로 잘못 판단하여 오리려 밀이 뽑히는 정신적
측면의 위험이다.독보리는 독성이 있다.
정신적인 가라지 (mental tares)
이러한 독보리 또는 가라지는 악한데서 근원되는 거짓 원리,악에로 인도하는 원리들을 표현한다.“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즉 그들은 악과 거짓 원리에서 튀어나온 것들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사악한 사람들,거짓 원리를 구체화시킨 사람들,거짓 원리라는 형체 속에 담긴 사람들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있는 가시나무는 거듭나지 않고 있는 마음, 육의 욕망에서 임의적으로 성장된
것,악을 행하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을 표현하고 있다.그러나 본문의 가라지는 마음 안에 뿌려져 있다.
그래서 가라지는 악령에 의해 마음속에 비밀리에 심어진 거짓 암시들을 표현한다. 주님이 진리를 뿌리시는
동안 악마는 거짓을 뿌린다.이는 옥토에서까지도 그러하다.
인간이 잠드는 동안 악마는 씨를 뿌리고 있다.즉 우리가 감각적인 것에 관심을 두면서,그 반면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적게 둘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거짓 암시들은 악과 거짓에 쏠리려는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성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접근한다. 아주 당연스럽게 우리는 악령들의 이런 저런 암시들이
자기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원수들은 자기 할 일을 계속하면서도 어떤 의심도 우리로부터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 속의 감각적인 생각들의 근원을 인식 못하기 때문이다.
악마 (the devil)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87
가라지를“뿌린 원수”가 “악마”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악마란 지옥에 대해 인격적인 이름을 붙여
부르는 말이다.꼼꼼하게 말해서 악마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원리이고,주님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악한 자,또는 악한 인격을 고정시키거나,그 인격이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은 일종의 악마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아 사랑의 형체요,자아 사랑을 구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악마가 사람이라고 말한 옛 생각은 자아 사랑에서 오는 원리의 비인격이다. 성경의 언어에서 말하는
악마는 비유적이다. 한 때 천사였던 사람이 악마가 되었다고 옛 사상은 말했는데 그렇게 된 천사는 없다.
모든 악마는 한 때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주님이 주시는 삶의 모형을 뒤집어서 영위한 사람들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이다.지옥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주님이 만드신게 아니다.
자아 사랑에서 나온 악마는 인간에게 원수요,주님에게도 적이다.심정 속의 모든 악한 원리, 지성 속의
모든 거짓 생각은 우리 영혼에,우리 주님에게 원수이다.우리가 악쪽으로 더 돌아서서, 악령이 자극하는데
대해 더 귀를 갖다 댄다면,우리는 더욱 주님과 천국에서 멀어지게 된다.진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악마는
하나도 없다.그 이유는“악마는 태초부터 거짓말쟁이요, 악마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곤경은 우리 마음에 잘못된 관념을 뿌리는 영향력이 우리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우리가
영적 삶에 감각적으로 무관심한 상태,즉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거짓 암시들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예증 (illustration)
수세기를 거친 기독교 역사를 보면,수많은 악마들이 주님의 밀밭에,교회에 가라지를 얼마나 뿌렸는지
모른다. 어떤 교회가 대중적이 되고 세상적으로 성장했을 때면 언제든지 그 속의 영은 깊이 잠들어 가게
되고 악마는 이 조건을 한껏 이용해서 그들의 편견을 뿌리고,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여 속이는 작업을 주님의
이름으로,교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자행했는지 우리는 쉽게 역사를 회상해 볼 수 있다.그런 다음 악마는
제 갈 길로 가 버리고 인간은 자신의 인격의 진짜 품질에 무지한 채 내팽개쳐진다. 주님이 제자들에게까지
하신 말씀, “너희 속에 든 영이 어떠한지 너희는 알지 못하고 있다”와 같아, 각 시대마다 주님은 교회
속의 사람들에게 말하셔야만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자기 생각의 근원을 알지 못할 때, 악마는 씨를 받을 준비가 아주 잘된 우리 마음에 거짓된
설득이라는 지옥의 씨를 자주 뿌리고 있다. 이렇게 뿌려져도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그 씨가 열매를 맺어야
88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그 씨의 성질을 발견하고,파악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악에 기울려는 우리의 유전적인 경향성은 악령의
영향력이나 현존에 매혹되기 쉽다.
싹이 틈 (the blade springing up)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팻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생산하여
우리 마음이 바뀔 때,우리는 자기 속에 가라지도 있음을 알게 된다.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악령이 과거
우리에게 암시했었던 것들의 속성 중 어떤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진리가 우리 의지에 영향을 주기 시작할
때,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반대적인 것,즉 이기적이고 죄에 속하게 될 것들이 우리 속 자연적 마음에
이미 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사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들의 진짜 속성을 실감 못했을 뿐이다.
가라지의 발견 (discovering the tares)
“가라지도 드러났다.” 이는 가라지가 자기 본색을 드러냈다는 말일 것이다. 이런 시기가 오기 전, 우리는
그것들이 밀인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셈이다.가라지가 밀 사이에서 자라는 동안 가라지도 밀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더 자라면서 두 씨의 차이점은 더욱 보여진다. 그들이 맺은 열매 속에서 그들의 차이는 확실히
구별되어 진다. “열매로 너희는 나무들을 알리라.”
우리 속의 악과 거짓의 속성을 파악해 내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속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악과 거짓의 속성과 반대되므로 그 반대된 것을 드러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 속의 선과 진리가 성장을 더 잘할 수록,우리의 악들이 더 나쁘게 보여 진다는 말이다.악인의
경우, 아마 외견상의 것이나 수단에 불과한 것을 제외하면 자기 속의 악한 습관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인이라 불리는 것이다.그러나 그 인간도 그 사람 속에 더 나은 것이 자라도록 하면,그도 자신
속의 나쁜 습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기 시작한다.
밀이 숙성되어 그 속성을 보여줄 때,가라지도 자기 속성을 보여준다.진리를 사랑하려고 진리에 흥미를
충분히 갖고,진리대로 살아 볼 때까지,진리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은 바, 진리가 우리 속 가라지의 진짜
속성을 밝혀 주기에는 미약한 편에 속해 있다.완벽한 힘은 선을 사랑할 때만 존재한다.이것만이 악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89
송두리째 식별 가능하게 한다.
주인 (the householder)
주인의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종들은 묻기를,“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최고의 의미에서 주인은 주님이시고, 이 주님이 우리의 안쪽 집을
관리하신다.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아들,또는 신성한 진리라 불리우신다. 바꿔 말하면, 집주인은 신성한
진리이고, 이 신성한 진리가 우리 안쪽 집을 지키시며 그 집이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한다.
종 (the servants)
주인을 섬기는 종들이란 지식들,또는 우리가 아는 가르침들이다.이것들이 마음을 섬긴다. 진리에 대한
지식들이 마음에 이미 뿌리를 내린 거짓 암시들의 속성을 파악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 속에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더욱 더 음미하면, 우리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속에
악한 삶을 부추기고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이 있음을 더욱 더 발견하게 된다.그래서 짐짓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분의 밭,즉 우리 마음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뿐이었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라는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왜 이런
악과 거짓된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서 나를 괴롭힐까?라고 되묻게 된다는 말이다.이렇게 묻는
때, 이 때는 우리가 이미 준비된 상태인지라 이런 거짓과 악들을 뽑아 내겠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때이다.
이 때에,우리는 주님께로,그분의 말씀에로, 신성한 진리가 통치하는 안쪽 마음에로 나아가서, 마음의
상태에 관해 묻는다.이렇게 물을 때란,자기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것을 멀리 던져 버리겠다는 결심에 어떤
의심도 갖지 앉는 때이다.이 때에 주님은 그분의 진리로 가르치시는 바,마음속에서 스스로 보여주게
된 거듭 안 난 것들은 영적인 원수들이 해 놓은 짓들이라는 것, 이는 자아 사랑이라는 악마가 해 놓은
것들,이 자아 사랑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악마는 우리로 악령인 자아 사랑과 제휴하도록
꾀고 있다는 것 등등을 알려 주신다.
주님은 가라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의문이 제기되도록 하시어 우리로 인간 본성을 이해 할 수 있게,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을 자신의 진정한 충고자요 스승이심을 더 충분히 인정하도록 배려하고 계신 것이다.
90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예증 (illustration)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을 선으로 간주하여 시작할 때, 또는 자연적 자아 사랑에 근거해서
인간이 시작하는 순간,악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창조되어 진다.왜냐하면 악은 선을 뒤집어 놓은 것, 신성한
선에서 분리되어진 선,이리하여 선의 성질이 신성과 반대되어 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신체를 돌면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혈액이 심장과의 연결에서 분리 될 때,그 피는 위험한 것이요,죽게 되는 것과 같다.
거짓 사상도 진리와 아주 흡사한바 이것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대신 자아 사랑을 선호하여 뒤돌아
섰을 때만 쉽게 구별된다. 이런 경우, 인간이 자기 삶을 개혁해서 주님과 천국에 연결되기 전에는 이런
사상들을 던져 버릴 수 없다.개혁만이 거짓과 진정한 것 사이의 차이점을 실감하게 해준다.
가라지를 모음 (gathering the tares)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짓 신념의 속성을 얼마만큼이라도 알아차리고, 그 거짓 신념이 악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을 두려워 할 때,우리는 그것을 뿌리 뽑아야겠다는 강한 확신 속에 서게 된다.초심자가 가지는 성급한
열정을 가지고 우리는 자신이 생각 한대로 되지 않는 자신 속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길 원한다. 아마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자기 속의 쓸모 없는 것들을 태우라고 요청하고 싶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치시는 바,우리는 그런 일을 전적으로 해낼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사실
그런 일은 천사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열정을 보자.그는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장담했고,결코
그분을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스승의
예언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그는 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뽑을까요?” 하고 종들이 주인께 물었을 때, 주인은 대답하기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비유
설명에서“추수 때란 세상이 끝나는 날이다.” 이 끝날 이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세상욕의 끝이기도 한
것이다.우리 마음의 정상적인 것은 거듭 나아가는 데 보조를 맞추는 것일 게다.우리는 우리 속의 악과
거짓된 것이 과잉 성장을 해서 삐져 나오기 전에는 우리 속의 그것들을 던져 버릴 수가 없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91
본문에서 주목할 점의 하나는 종이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들을 뽑을 때가 아니었다고 대답하는
점이다.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속의 거짓 신념의 속성을 보게 될 때,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처리해야 하는 적기가 언제인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거짓을 뿌리 뽑아 내는 때가 언제인지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거짓 사상이 자라고 있음을 여러분이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을 뽑아 내야겠다고 작정한다.그 이유는 그것이 삐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잘 처리 해갈 경우,자신 속에 신념이 서 있다고 판단하고,여러분은 자기
속의 거짓 사상을 추방했다고 착각해 버린다. 이 착각은 자신 속에서 자라나는 주님을 신뢰함과 겸손도
뽑아 내게 된다.거짓된 속성을 거짓된 생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그 인정했던 것은 진리에 반대되어
살고 있는 것인데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듯하여 오히려 그 거짓 속성을 과잉 성장시키는 노력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모든 사상을 단번에 모두 추방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의 안쪽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원리의 점진적 발달에 의해 우리는 자연적 마음, 즉 바깥쪽 마음에 있는 거짓들이 성장 못하게만
할 수 있다.
예를 들면,우리가 성경의 내적인 영적 의미에 대한 총명한 지식을 증가시킬 때,우리는 성경 글자가
주는 의미로 형성된 잘못된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거짓된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자주 실수를 연발한다.예를 들어보자.자연적 마음만 가진 사람은 자기 속의 거짓 관념을
던져 버리겠다고 성급하게 서두르는 가운데 인격적 측면에 관한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에
대한 모든 사상까지 뽑아 내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해서 그 진리로 살게 되어 선한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형성할
때 우리는 추수하게 된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와서 우리 속에 있게 된 선은 자연적 마음속에 든 거짓된
것들을 보게 된다.그리고 우리 심정은 온갖 거짓들에 완전한 혐오를 느끼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이리하여
우리가 선하고 참된 원리를 가지고 스스로 살아 갈 때,우리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 밖에서 살게 된다.
거짓을 분리함 (separating falses)
진실로 좋은 것이 부와 명예라고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어떤 이가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가진 그런 생각이 잘못임을 보았다는 것만 가지고 그가 그 사상을 즉각 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
속에서 이웃을 사랑함이 자라 갈 때,그리고 쓸모 있는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될 때,그는 자기 속에서 우물쭈물하며
92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세상 욕이 암시했던 거짓 관념들의 성장을 제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들은 선함이 확증되는 추수 때에 완전히 분리되어 진다. 실제로 우리는 거짓
사상을 점진적으로만 거절할 수 있고,선함 역시 점진적으로 키워 간다.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의 의지가
언제나 자유로운 상태에 있도록 보호하신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의지가 인격을 바꾸겠다는 데 대해 만족할
때까지 거듭나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서 가라지를 뽑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강요당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인간은 거짓 사상이나 악한 습관이 발견되자마자 거짓 생각을 거절할 것이고 악한 습관을 멀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사실, 더 낫다는 순간을 제외하면 인간은
나쁜 습관이나 거짓 관념에 변명을 보태거나 오히려 방어까지 하려든다.
그러나 인간이 거듭 나아갈 때, 거듭 안 나고 있는 생각과 습관들은 점차적으로 정오의 태양이 눈을
녹이듯 되어 질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반기는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을 거절하기 전에 우리 속의 거짓을
마음으로부터 거절해 내지 못한다.
물론 인간은 언제나 악하고 거짓된 모든 것을 던져 버리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공은 그가 얼마나 거듭났느냐에 달려 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얼마나 잘 저항해 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속의 가라지를 제거할 수 있다.악이 하느님과 반대되기 때문에,하느님과 반대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에 악을 금해야 한다.악행을 중단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습득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도 악을 금할 재간이 없다. 심정이 선을 사랑하여
따뜻해지게 될 때,눈은 진리의 빛으로 더 밝아진다.그리하여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본다.
예증 (illustration)
겨울철에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를 외관상으로는 식별할 수 없다.그러나 여름철,나무가 성장하는
기간에는 각 나무의 조건은 자연스럽게 드러나진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도 진리의 빛은 사랑의 따뜻함
없이는 영적 성장을 눈곱만치도 만들지 못한다.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교회에서까지도 많은 이교도들이 발생하고 얼마나 많은 악들이 자행되는지
잠깐만 둘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다.모두 같은 성경을 지니고 있다.그러나 자아 사랑이라는 악마,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지배욕이 교회 안에 흉측한 가라지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93
왜 가라지가 있도록 허용되고 있을까?
다음과 같이 질문할는지 모른다.왜 주님은 가라지가 뿌려지는 것을 허용하실까?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 자신 속에 든 악에 기울려는 유전적인 경향성이 악령이 보내는 암시에 문을 열어
놓고,그 암시를 듣고 싶어하고,그런 암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런 가라지들은 신성한 섭리에서
선한 이들에게 시험으로서 사용되기 때문이다.이 시험은 인간으로 자신 속의 경향성들을 보게 해주고,
그것들을 멀리 하게 하는 약효가 있다.비록 인간이 자주 잠들어도 주님은 결코 그러하지 않으신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잠드시는 일도 없으시다.”
인간이 진리를 배워 그에 따라 살려 할 때,악령은 악에 기울려는 인간 속의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흥분시킨다.
이러므로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이 발견 없이,어떤 거듭남도 존재할 리 만무하다.
진리 없이 인간은 자기의 악들이 악인지를 알지 못한다. 시험 없이 자기 스스로 악을 거절할 수 없는게
인간이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 속에서 악마의 일들은 거듭나는 사람을 선한 쪽으로 더욱 향하게 해준다.
천사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심판을 행하시어, 인간의 인격에서 각 사람을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축출하신다.신성한 진리(Divine Truths)들이란 천사들이고, 천사들이 바로 수확기의 추수꾼으로
활동한다.그들은 밀,좋은 것들을 주님의 창고인 천국으로 모으고, 악과 거짓된 것들은 단으로 묶어 불태운다.
즉 그들은 우리 마음속의 다양한 것들을 질서대로 정리하고 분류해서 거듭난 삶 속의 모든 원리들은 그것에
걸맞은 장소인 천국에 모으고 모든 지옥적인 원리들은 거절하여 지옥에 그 자리를 갖게 한다.
지옥의 불, 등등
지옥의 불은 모든 심정 속에 든 악한 욕망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것”은 거짓들이요 “불법을
행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이다.
“통곡함”이란 거짓 원리서 비롯되는 슬픔이다.“이를 갊,가슴을 치며 통곡함”이란 악한 욕망으로부터
있는 거짓 추론의 불일치를 말한다. “그러나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94 밀밭 속의 가라지 -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그들은 사랑과 지혜, 영적 태양의 열과 빛을 더욱 이용하여 더 많은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말이다.
의로운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자신의 비천함을 보이려고 행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오히려 그들의
인격이 사랑과 지혜로 빛날 것과 주님의 선함과 지혜를 찬양할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서 비취게 하여 너희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주목할 것 중 하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표현하는 본문 속의 종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선한
것을 악에서 분리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은 천사들에 의해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하늘에 속한 진리, 저것은 땅에 속한 진리라고 가르는 것은 삶으로 확증된 진리들에 의해서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두 왕국 사이에 놓여 있다.
두 왕국에서 오는 영향력,모두는 우리에게 각기 그 힘을 쏟는다.두 왕국에서 온 씨들이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 뿌려진다.우리가 천국에서 온 씨를 음미할 때,우리는 그 씨를 계속 키워 나갈 필요가 있을 뿐,
가라지를 보고 뽑아 내는 일까지 하라는게 아니다. 수확하는 그 때까지 우리의 선한 원리들을 계속 키우고
있노라면,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가라지를 뽑아 낼 힘을 주시게 된다.어찌됐든 우리는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바,우리가 거듭나는 삶을 시작하자마자,이 지상은 보다 쉬운 낙원일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도 말하고 있다. 불법을 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추수 때까지 우리 마음에서 끄집어
내질 수 없다. 즉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요한복음 16:33.) 우리는 이 세상을 이겨내야
한다.그래서 우리 주님의 본보기와 같이,세상은 우리가 모셔야 할 스승이 아니고 우리가 부려야 할 하인임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고향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주신 운명은 천국에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이 고향이 우리에게 열려 있고,
그 속에 우리가 거할 장소는 신성한 사랑에 의해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그 장소를 차지하느냐,못하느냐는
지상에서의 삶에 의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질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은 우리 마음에 계속 씨를 뿌리고
계신다.그분은 좋은 씨만을 뿌리신다.그분은 밝고 따뜻한 대낮에 뿌리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현혹하려 드는 악마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신 일을 주시한 다음, 정신적인
어두움이 덮이는 때,우리가 영적으로 잠드는 때,우리가 감각적인 것들에 정신이 쏠리는 틈에, 우리도
모르게 살짝 다가와서 주님의 진리에 별로 경청하지 않는 마음 밭에 악하고 거짓된 원리의 지옥적인 씨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95
뿌려 놓는다.그래서 우리는 인간 삶의 실제에서 스스로 깨어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요,영적으로 잠들지
않아야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분의 천국 일을 계속하실 수 있고, 악마는 지옥적인 책략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을 알아들어라.”
96 겨자씨- 마태복음13장 31-32절
6
겨자씨
-실제로 사용된 진리의 성장-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31-32절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 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생명 (life)
진리는 씨처럼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에는 한 개의 자존하는 생명,창조자에 속한 것,유일하게 진정한 생명, 내향적 생명력, 이 생명이
모든 창조된 것들을 채우고 활력을 준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각 진리는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내향적으로
채우신다.모든 진리는 지적 생명의 완전한 체계의 근원을 자체속에 함유하고 있다.그래서 그 체계는
씨가 나무로 성장하듯 질서 있는 성장 과정에 의거 발달되어진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97
하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이 비유는 영적 삶을 처음 의식하는 시작에 관해서, 그리고 그 시작은 진보적으로 발달해 간다는 것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하늘 나라는 신성한 지혜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이 통치하는 국가이다.이 국가는
영의 왕으로 주님을 알고 사랑한다면 어디에서든지 존재한다. 그래서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라고 답하셨던 것이다.
감각적이기만 했던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나라란 메시아가 오신 뒤 지상에 있는 것들이 안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그들이 오랫동안 바래 온 것,패권을 잡아 유대인을 높이 세우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삶과 마음 안에서 영적 원리들이 통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 있는 나라에 입국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의 어떤 상태에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세상에서의 삶에서 천국의 삶이 있어진다는 것은 영적으로 말해서 세상적 수준의 인격에서 천국적
수준의 인격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하늘의 왕국은 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이다.지상에서의 경우,거듭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만큼 주님의 교회가 있게 된다. 하늘의 이런 영적인 나라 그리고 인간 마음 안에서 천국의 원리가 통치하는
것은“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으로 된 이 나라의 성장, 또는 인간 마음 안에서
있게 되는 사랑과 믿음의 성장은 마치 씨의 성장과 같기 때문이다.
겨자씨 (mustard seed)
“씨”란 진리이다. 진리 안에 선함이라는 싹틈(germ)이 존재한다. 특별히 겨자씨가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데,그 이유는 그 씨의 본성 내지,그 씨가 지니는 세부 내용 때문이고, 더우기 글자로도 영적 의미의
상응이 눈에 띄도록 강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겨자씨는 열(heat)을 함유하고 있다. 이 씨의 열은
사랑의 따뜻함을 표현해 주고, 이 따뜻함은 진리 안에 또는 마음 안에 놓여 있어 진리에 열심을 낼 때
열을 낸다.
물론 이 열심은 초기에는 단지 자연적일 뿐이고 많은 이기적인 바램과 하나가 된다. 그러나 거듭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외적(자연적)조건을 벗어나 성장하는 바,영적인 열심(진지함)으로 진입된다.어쨋든
98 겨자씨- 마태복음13장 31-32절
처음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자연적인 진지함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뭔가를 행동하려는데 대한 목적을
주장하게끔 해준다.
어떤 사람, 그리고 밭 (the man, and the field)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지고 밭에 뿌리러 나갔다.이 사람이란 주님,예수 그리스도, 신성한 사람이시다.
그분이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밭”이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다. 이러므로 겨자씨는 진리를 표현하고,
그 안에 선한 애정이 있고, 이 씨가 주님에 의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에 뿌리어져서 우리로 장차 영적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
씨가 작음 (the smallness of the seed)
이 겨자씨는“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방 지역에서 겨자씨는
10-12피트(4-5미터) 크기의 나무로 성장한다. 그래서 글자적으로 보면, 본문은 동양적인 언어, 즉 뭔가를
강하게 표현하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겨자씨는 작은 씨로 널리 알려진 씨이다.동양의 말
가운데, “겨자 씨 만큼 작은데...” 라는 경우와 비슷하다. 예를 들면, 모하멭의 코란을 보면, “나의 아들아,
참으로 모든 문제,그게 좋든 나쁘든,비록 그것이 겨자 씨 만 할지라도, 그리고 바위로 감추어져 있어도...,
하늘이든, 지상이든, 하느님은 똑같이 빛을 가져다 주신다.”
우리 주님은“겨자 씨”란 용어를 사용하시어,인간의 영적 삶의 시작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그럼에도
그 작은 것이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영적인 겨자 - 씨
영적으로 보면,겨자 씨는 진실로 모든 씨 중에서 작은 것이다.그 이유가 그 씨는 영적 삶의 지극히
작은 시작을 표현해 주기 때문인 바, 인간이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그 진리로 살아보겠다고 시작이
되었을지라도,그는 자기가 이뤄 놓는 선이 자신이 선해서 있게 된 줄 알고,또는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한 마디로 이러한 그의 선은 자연적이지 영적이지 않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99
이 선은 아주 작은 종류의 선,즉 천적인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선에 속한다.그가 해 놓은
선의 양이 아무리 많다 해도,여전히 그 선은 가장 외적인 특질 속에 존재하고,선이라 불릴 수 있는 어떤
것 중에서도 가장 작은 영적인 것이다.진리라는 생명 있는 씨는 인간의 마음에서 거처할 곳을 발견하는데,
그러면 선을 행할 그의 어떤 열정(zeal)이 불타오른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외적인 것, 자연적이어서 많은
이기적인 것들과 하나를 이루고 만다.
씨가 뿌려짐 (the seed sown)
영적인 겨자씨는 인간의 마음에 뿌려진다. 그 때란 인간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용하려는
때,악을 죄로 알고 금할 때,자신의 사상 대신 신성한 진리가 그의 삶을 통치하도록 결심할 때에 있어진다.
자연적으로 보면,우리 모두는 자아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사상을 사랑한다.이 사랑으로 어떤 선을 행할
때,우리는 그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자기는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타인도 자기의 선함을 본받기를
바랜다.그러나 이런 선함은 모든 선함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일 뿐이다.이런 선함이 가진 진리는 진리라는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이고, 그 씨 안에 함유할 수 있는 천국적인 선함은 단지 미발달된 싹틈만
있을 뿐이다.
씨가 자람 (the seed growing)
그럼에도 우리가 선을 행하겠다고 작정하고 있노라면,주님은 우리의 선함을 점진적으로 발달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악을 금해야겠다는 결심과 바램을 증가시킬 때,우리의 선함의 특질 역시 개선되어 간다.
그러면 우리의 지혜는 천사들 같이 증가되어 지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하시기를, “아직도 나는 할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일러 두셨던 것이다(요한복음 16:12.).
진리라는 우리의 씨는 나무로 자라 갈 것이고,마음속의 새들은 거기서 쉴 곳을 발견하게 된다.모든
선함은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될 때,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우리는 자신만이 중요한 인격자라는
아집을 벗어나 성장하면서,더욱 나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가게 된다.그러면 마음속의 진리들은 가지를
더 치게 되고 여느 푸성귀보다 더 자라나게 된다.그리고 진리를 위해 진리를 사랑할 때,마음속의 진리가
100 겨자씨- 마태복음13장 31-32절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를 이룰 때,우리의 진리들은 장대하고 풍성해진 나무들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뿌려진 모든 진리는 그 속에 영적 생명이 미발달된 채 발달될 능력만을 담고 있다.
인간에 비교한다면,아기가 태어나되 성인이 될 가능성이 단지 미발달된 채로 가지고 있는 것,즉 싹을
가진 것과 같다. “사람의 자”는 곧 “천사의 자”가 될 싹이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21:17).
나뭇가지 (the branches of the tree)
이 나무에 관해 말해진 바,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나무의
가지는 사람의 팔같이 말단 부분들이다. 그래서 가지들은 궁극적인 것(ultimate), 또는 외부적인 것, 표면에
가장 가까운 것들,마음의 바깥 부분 등을 표현하게 된다.진리를 가장 내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이다.
지혜란 진리가 사랑 받아 실제에 쓰여질 때에 있게 된다.가장 바깥쪽 수준으로 본다면,진리는 사실(fact)에
관한 지식, 즉 과학이다.
이를 새교회에서는 사실에 관한 지식, 기억 속에 있는 지식을 과학적인 것들(scientics), 즉 알려져 있는
것들이라 부른다.이런 것들은 인간 마음의 말단 부분,즉 기억 안에 존재한다.
새들 (the birds)
새란 지적인 것들,즉 생각들을 표현하는데,이것들이 마음을 날아다닌다. 거듭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해서 실제에 응용해갈 때, 진리는 나무처럼 그의 마음속에 가지를 뻗고 그의 합리적인
생각인 새들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된 알려진 사실 안에 거처를 둘 장소를 발견한다.
그 다음 이와 같은 모든 사실들이 삶을 채우게 된다. 그 이유는 영적 진리라는 생명 있는 것들은 기억
속에서 거처를 발견하고 더 가지를 쳐서 더 멀리 더 넓게 삶의 각 방면에 미치기 때문이다.
깃들일 곳 (lodging-place)
우리의 영적 생각속의 원리가 추려져 나와,바깥 삶의 사실과 하나를 만들 때,영의 내향 세계가 뻗어
나가는 외향 세계, 바깥쪽 삶의 각 세부 사항 속에서 모든 사실이나 주위 여건들이 영혼과 생명을 인식하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01
될 때,이 때야말로 축복된 조건을 갖춘다.
그런 다음,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내향적인 영은 말씀 글자 안에서 거처할 곳을 발견하고,
말씀의 영과 글자는 인간의 영과 몸이 하나를 만들듯 하나를 만든다. 이는 신실한 심정이라는 옥토에서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가 성장해서 있게 되는 은혜스러운 약속으로서의 결과이다.
이런 삶 속에서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스스로 열려져 신성한 진리 속에 거처를 둔 영을 드러내 보여준다.
“자연을 꿰뚫어서 자연 속의 하느님까지 보아야”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진리의 큰 나무의 작은 가지인
기억 속에 알려져 있는 사소한 사실에서까지도 위쪽으로, 그리고 안쪽으로 추적해 가서 나뭇가지에 깃들인
새들,영적 사고라는 살아 있는 새들 안에서 영적 상응물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삶의 칭찬할 만한 상태 속에서 물리적 창조의 모든 세부 사항은 거룩한 하느님을 찬양하여
행복한 합창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 물질적인 자연은 영계의 거울로서 지상의 온갖 것으로 구체화된 더
높은 생명을 반영하게 된다.
이렇게 거듭남을 진보시켜 갈 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실용적인 삶에 있어서의 문제들이 되어 간다.
어린 시절에 가르쳐진 우리 속의 모든 교훈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것들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사용이
있게 된 바,그것들은 영적 생명으로 채워진다.따라서 그것들은 그저 몸일 뿐이 아닌 살아 있는 몸,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는 몸이다.
기르는 곳 (breeding-places)
나뭇가지는 새들을 위해 쉴 곳도 되지만 새끼를 기르는 곳도 제공한다. 이와 같이 기억 속의 지식은
더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주어 생각을 더욱 배가시켜 준다.
이리하여 투쟁하는 삶에 있어지는 실망되는 주위 여건 가운데서 이 비유는 천국적 햇빛의 광선과도
같이 우리를 향해 미소지으며,한 때 마음에 뿌리박은 생명있는 진리를 가르친다.그리고 선의 사랑으로
채워 주고 무성해져 마음 안에 가지를 뻗게 하는 바, 고상한 나무가 되어 활력과 다양함으로 가득 찬 삶이
될 때까지 성장하게 해준다.
이는 주님의 새교회에서 더욱 그렇게 된다.그 이유는 이 교회의 교리는 합리적 체계로,모든 사항들이
관련짓고 연결되어 모든 방면,즉 내면에서 외면으로까지,마음으로부터 물질로까지, 천국에서 지상에까지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삶에 관한 과학적인 것들이나 사실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그 모든 것은 합리적으로,
영적 생각이라는 정신적인 새들에게 거할 곳과 기를 곳을 제공해 준다.
102 겨자씨- 마태복음13장 31-32절
진실로 새교회에서, “그렇다. 참새도 제 집을 발견하고 제비도 자기 둥지를 발견하여 자기 새끼를 놓는다.
너의 제단에서 나의 왕이요 나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여호와여”일 것이다. 새교회에서는 삶의 모든 사실들이
선용의 수단이 되고 영적 삶의 수단이 되어“나뭇잎까지도 만국 백성을 치료해 준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진리는 마음의 천국적인 동산 한가운데서 생명의 나무가 되어 있다. 이렇게
나무를 가진 자는“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그리고 그의 기쁨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김”에서
있어진다. 이 사람은“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는”
나무 같다.이 사람에게 안될 일이 없다.
진리의 번식 (truths prolific)
진리가 씨에 비유될 때,우리는 진리 속의 생명력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졌으리라 본다.“씨는 말씀이다”라
고 주님은 말하셨다.씨는 비록 작지만 다산성이 강하다.아주 작은 씨라해도 매우 큰 나무로 성장될 수
있다.그리고 이 나무는 더 많은 씨를 생산하는 바,비록 씨가 하나일지라도 큰 나무, 큰 숲을 이룰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그리고 이 씨들은 그 밖의 장소로 운반되어 다른 과수원도 형성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진리라는 씨 하나 하나에 존재한다. 각 진리는 천국의 생명력을
그 속에 담고 운반해 준다.이는 한마디로 경이로운 다산성을 지니고 있다.진리 하나만이라도 진실로
사랑되어 실제에 쓰여진다 해도 씨의 경우 같이 큰 나무가 되며,계속 이어져 간다.정신적인 나무의 씨가
성장하고 숫자적으로도 배가해 가듯 천사들의 지혜도 말씀 속의 진리로부터 증가해 영원까지 배가되어
간다. 천사들이 더욱 슬기로워지기만 한다는 말은 지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혜의 바깥쪽 영역에만 있다는 것, 그들은 모든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는 신성한 지혜에는 결코 도달되지
못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 속의 진리는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정신적인 씨이다.그 이유는 십계명은 글자로나,영에 있어서나
생명의 법칙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계명은 인간 삶의 모든 국면과 수준에서 채택되어진다.각양 각색의
인간이라 해도 계명에 의해서만 살아야 하는바,천국적 삶 중에서 가장 큰 다산성은 계명에 있다.
교회 ( the church)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03
교회가 진리와 함께 존재해야 하듯,진리는 교회와 함께 존재한다.교회는 작은 씨같이 시작해서 가지를
뻗치어 곧 성장을 이룬다.예수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팔레스틴 마을에서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고,
그 뒤 굴욕적인 죽음을 만나고, 그의 몇 안되는 힘없는 추종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는 식의 세상적인
태도로 응시하는 이에게는 그분의 일에 하등의 중요성이 있을 것 같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지금 세계를 이끄는 종교가 되어 있다. 그분의 제자들 자체만을 본다 해도 그들은 기독교의 생명력에 대해
매우 적게 납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새 교회도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어떤 학식 있고 우수한 사람이 자신 스스로 영적 선교에
부름 받았다고 선포했다.그리고 그는 신학에 관련된 많은 책을 라틴어로 썼다.그 후 이 백년 이상이
지나 갔지만 그의 저서를 믿는 자는 숫자적으로 보아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것이 새교회와 함께 하는
작은 시작의 날에 해당된다.그러나 그 진리는 씨가 지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바,그 가지가 멀리
그리고 드넓게 확장될 것이다.
세상 (the world)
세상은 새교회의 진리를 추켜들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준비를 하는 마음들 속에서는
이 진리들은 고귀한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마지막 심판 이후 성장할 여건이 더 나아져 가고
장애물은 더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직도 세상은 자연적인 선함을 넘어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세상은 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것이 세상의 맛을 실어 나르게 만들려 하고 있다.그러나 새교회는 이 생각과 꺼꾸로이다.즉 새교회는
지상을 천국으로 가는 발판으로 삼고 있다. 세상의 목적(purpose)은 즐거움 (pleasure)이나, 새교회가 노력하는
목적(end)은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용(use)이다.
작은 시작들 (small beginnings)
이 비유는 작은 시작들을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우리는 작은 것에서 결과되는 모든 것,
그것이 좋은 것이든,나쁜 것이든 예견할 수 없다.모든 선하고 진실하며 유용한 것들에 용기를 북돋아
104 겨자씨- 마태복음13장 31-32절
발달하게 해주며, 모든 악하고 거짓되며 해가 되는 것들은 실망하도록 해주는 것이 지혜의 몫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마태복음 7:17). 천사들 속에
있는 것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듯이,지상의 인간에게도 씨 같이 가득 차 진다.그래서 열매가 있는 나무들이
천사들 속에 있는 것같이,인간은 영적 삶의 시작에서 씨의 성장을 보아 용기를 얻게 된다.영계의 천사들은
영적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그러나 천사들이 인간으로 지상에 있었을 때,그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 악을 죄로 알고 금하며 회개와 개혁이라는 일을 계속 행하지 않았던들 그들은
영계에서 천사도 못되었을 것이고,영적 생명으로 가득 차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어떤 선한 작은 일이
시작되고,그 시작이 신실하게 계속되면 위대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 측면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때로 어떤 악의 경우,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듯, 눈에 보이게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 그 악을 저지르도록 허용하라고 유혹되는 수가 있다.
이는 악령의 교활한 암시인 것이다.선과 악이란 양이 중요한게 아니라 질이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합리적으로 보아 잘못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중요해서 금욕(self-denial)이라는 주체를 만들기에
충분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것은 꼭 해야 되고 저것은 금해야겠다는 것을 결정함에,우리는 대상의
질을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하는데,그 판단 기준이 중요하다.우리는 판단 기준을 주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대로,또는 그분의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주님의 진리에 표준을 두어야지, 자아나 세상에 널려 있는 표준을
가지고 측량해선 안된다.
성장의 법칙 (the law of growth)
씨가 나무로 자라나되,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씨의 본질에 이식해 놓은 법칙에
의한 것이다.온전한 나무의 근원(germ)이 씨 안에 들어 있다. 주위 여건은 씨의 근원을 만드는게 아니고
오로지 씨가 성장할 기회를 줄뿐이다.그래서 우리는 선함의 근원,즉 진리를 사랑해야 하고, 자기 주위의
어떤 것도 우리를 천사가 되게 할 수 있는게 없다.좀더 자세히 말하면,우리가 실천해 보아야 할 진리를
아직 해보지도 않고 어떤 영적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 삶을
진지하게 시작하는 것,또는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신실한 노력을 자꾸 만들어 간다면,그리고 자신의 원리를
실용적으로 계속 유지하는 한,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된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거듭남을 다 마무리 지었다는 데에는 도달되지 못한다. 그러나 완전한 거듭남을
향한 첫 일보로서 우리 속의 씨는 반드시 성장을 시작했어야 한다.그러면 다음 세상에 가서,자신 속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05
작은 씨들이 엄청나게 큰 나무로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만일 우리가 악을 끊는다면,우리는
선함을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속에 든 악의 성장을 제지한 만큼 우리 속의 선함 역시 존재하게
된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주님은 대답하셨다.
“계명을 지켜라.”
성장의 확실성 (the certainty of growth)
작은 씨가 커 가는 것을 유심히 보자.씨 안에 생명력이 있음을 알 것이다.하늘 나라의 모든 힘은
이 작은 씨 안에 존재한다.사실,주님의 모든 권능도 그 안에 있어 씨를 자라게 만든다.씨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씨의 생명의 법칙이 작동되고 있다.그리고 그 결과는 오고야 말 것이다. 씨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성장을 위한 기회이다.
이와 꼭 같이 마음에서 진리의 씨는 작동되고 있다. 그래서 그 진리에 기회와 여건을 부여해 주면 그
결과는 확실하다.이 진리가 성장하는데 요구되는 조건이란,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것,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원리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영적 삶에서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자신이 왔느냐 가 아니라 어디로 들어가게 되느냐이다.
우리 모두는 자연적 측면에서 악뿐이다.그러나 회개와 개혁,그리고 거듭남에 의해 그 악을 벗어나 성장할
수 있다.
양과 질 (quality and quality)
“의로운 자의 작은 것은 사악한 자의 많은 것보다 더 낫다.” 그 이유는 영적 삶이 비록 초기 상태,
지극히 작은 업적을 달성했다 해도 감각적으로만 치닫는 삶보다는 훨씬 더 가치가 있다. “사악한 자의
천막 안에서 거하기 보다,내 하느님의 문지기가 더 낫다.” “주님은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을
사랑하신다.” “의로운 자가 소유한 작은 것” 가지고 구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질이 향상되기를
도모하면,주님은 우리가 노력하는 그 삶의 양도 알고 계신다.그 이유가 선함은 지혜가 자라는 땅이기
때문이다.
106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7
누룩
-미묘한 시험의 사용-
성서 본문:마태복음 제13장 33절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
시련 (trials)
영적 삶의 발전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여 있게 된다.시련은 인격의 테스트이며,이 테스트로 인해 거듭나는
사람은 선함과 진리의 측면에서 확증과 힘을 얻게 된다. 동시에 자기 속의 자연적인 마음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 쏠리려는 경향성에 저항하면서 그것을 버릴 수도 있게 된다.
하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하늘 나라”란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통치의 원리가 되어 군림하는 인간 삶과 그 삶의 마음에 있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07
정신적인 왕국이다.따라서 내향의 왕국,영적인 왕국이다 (이에 대한 더 많은 이해는 제 6장을 활용할
것). 그러나 “이 왕국”의 진리들은 신실한 마음에서조차도 연속적으로 자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악한
경향성들의 공격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악의 경향성에 대한 비유상의 차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신성한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마음 바탕을 나열하고 있다. 거기서
악의 경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한 영향력에 반대되게 하려 하거나, 진리에 무관심을 보이게 하려
들기도 하고,그 영향력에 단지 피상적인 접근만 있게 만들려 하고 있다.“가라지”의 비유에서는 마음에
있는 진리에다 거짓 사상들을 뿌려 놓는 악한 경향성을 진열하고 있다. 그러나“누룩”의 비유에서는 악한
영향력의 아주 교활한 수법을 폭로해 주는 바, 이 비유에서는 현혹하는 악마들이 선과 진리라고 간주되는
참된 것 안에 악의 거짓 암시들을 슬며시 주입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용한
진리들의 좋은 특질들이 오염되고 만다.이 오염을 발견해 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이 얼마나 암흑일까!” 사랑하려 하고 진리를 행하려 하는 우리 내향의 기질들이 생각과
느낌,그리고 행동들을 형성하려고 자연적 마음에로 나가려고 할 때,우리의 악한 경향성들은 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들이 진리를 오염되게 한다.
예증
성급한 성미로 기울려는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아마 성질이 급한 사람도 거듭나 보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온화함은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그리고 성급한 기질의 행동은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때로 죄악시되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나쁜 성미를 탐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떤 사건이 있을 경우 그 급한 성미가 즉각 발동하는 때가 빈번하다.이 때 약한 자를 공격하려 들고,
보복하길 즐기는 우리의 옛 경향성들까지 잇따라 일어나 진리의 응용을 그릇되게 함으로 진리를 뒤집는다.
그러면 우리 속에서는 선으로부터의 내향적인 원리와 성미 속에 있는 자연적인 이기심 사이에 싸움이
붙게 된다.
이 싸움이 시험인 바,그 수단은 영적 발효이다.그 이유는 우리의 선이 악한 경향성에 의해 섞음질
108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당하려 하고,진리는 거짓 암시에 의해 뒤집혀 지려 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자기 앞에 버티고 있는
잘못된 행위를 한 자에게 자기 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보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도입할 때이다. 그래서
진리를 위해 진리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실지로 있어지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의 탐닉이다.
이런 때에도,십계명의 빛 속에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의 질을 검사해 본다면,우리는 이전 생각의 오염도를
가늠해 낼 것이다.그런 다음 자신의 혀와 손을 자제해 간다면,그리고 주님의 뜻을 시행해 가기로 결심을
다시 한다면, 주님 사랑으로부터의 불이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거짓된 누룩은 밖으로 내던진다. 그러면
우리가 저항해 온 악과 거짓은 우리들에게서 분리되고, 선의 특질은 사랑되어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확증이 있게 된다. 따라서 더 명료한 진리가 우리 삶이나 생각 속에서 더 실용적인 원리가 되어
간다.
이렇게 되면 시험을 유발하는 발효는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선과 진리가 우리들 속에서
더욱 자라는 것을 깨트리고 악령의 자극이 있어 시험을 거치지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진보를 얻게 해준다.
그러나 악령은 자연적 경향성을 일으켜서 파괴 쪽으로 치닫게 유인한다.
시험은 허용되는 것이다 (temptations are permitted)
주님은 악령들이 우리를 휘젓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악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과
이것이 우리로 지옥을 향하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허용으로 악마가 우리를
부추길 때, 주님은 수호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악마의 오염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천사로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이 간직되게 해주며, 이 애정과 원리들에 대한 증거를 우리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주님은 악마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셨다.그 이유는 악마의 일이
우리에게 오히려 이득을 보도록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악마가 우리의 밀가루에 누룩을 놓는 것을
허용하셨다.그 이유는 더 나은 빵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미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고로,
이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경향성 속에 든 악의 속성을 볼 수 있다.
누룩 (leaven)
마음속에 있게 되는 시험의 작용(operation )은 빵을 만들 때 누룩이 작용하는 것과 같다. 자연 상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09
하의 빵반죽은 무겁고 불순물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나, 누룩을 첨가함으로서 누룩은 반죽 덩어리를 쑤석거려
발효시키는 바,빵을 굽는 불이 누룩을 다 쫓아낼 때까지 발효 작용을 한다.게다가 반죽 속의 불순물까지
누룩이 몰아 내면서 더불어 없어진다.
인간은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선하고 참된 두 원리 사이에 있게 되는 싸움이 없으면 악쪽으로 기울려는
경향성을 똑바로 볼 수 없다.각자가 지닌 선과 진리의 질은 향상되어야 하는 바,싸움이 끝난 뒤 진리가
승리했다면,거짓 사상은 빵에서 누룩이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누룩의 본성은 그 누룩의 힘이 붕괴되고 만다는 결과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룩은 영적인 쇠퇴
또는 죽음을 표현한다. 누룩을 수단으로 해서 오는 선은 누룩 자체로부터가 아닌 누룩의 작용에서이고,
이 작용은 선을 위해 신성한 섭리의 전적인 통제하에 있고,이 통제는 불을 수단으로 한다.누룩은 악에
근원을 둔 거짓 원리를 표현한다.
거칠게 간 곡식 (meal)
밀(wheat)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마음속의 선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원리들은 실지 사용에로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다.밀을 빻는다는 것은(grinding)은 우리 속의 선한 원리를 검사하고 생각해 봄으로써
그 원리들을 실지 사용을 위해 준비하는 정신적인 과정을 표현해 준다.이러므로 거친 가루(flour, meal)란
선으로부터 온 진리를 표현하는 바,선이 응용되기 위해 어떤 모양새를 갖는 것을 말한다.응용 속에 선이
놓일 때,더 많은 선이 생산되고,더 실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실제적인 사용을 위해 곡식 가루는
빵으로 만들어져야 한다.인간의 일에 해당되는 빵은 선의 실제인 바,일상 생활에서 선용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산된다.그러나 인간이 붙잡고 있는 진리로부터 순수한 선이 올 수 있으려면,먼저 그 진리와
뒤섞여 있는 불순물들,즉 인간 마음속에 있는 거짓 관념들이 걸러 내어져야 한다.이래야 인간이 진리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자기 속의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경향성이 일어나서 진리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밀가루 안에 든 불순물은 좋은 것과 결합하려고 한다.그러면 좋은 것을 부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한 것,더 순수해지고자 하는 좋은 것은 이 불순물과 결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그 결과 불순물이
제거될 때까지 싸움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있는 거짓된 것은 진리에 결합하여 진리를 거짓으로
물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나는 마음 안에 있는 진리들은 거짓에 물들어 부패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110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여인 (woman)
본문에서 누룩은 여인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여인이란 애정을 표현해 준다.오늘 비유의 경우, 이 여인은
퇴보되는 상태에 있는 자연적인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이 여인이 가루 속에 누룩을 슬며시 넣어 놓았다(hide).
거짓들은 악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은근히 심어져 진리 속에 감추어 놓여 있다. 이 거짓들의 행동 발판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려는 마음,즉 자연적인 애정이다.이와 같은 방법이 예시되는 곳이 에덴의 동산에서
뱀이 이브를 발판으로 해서 아담을 유혹하는 것인바, 이는 자연적 애정이 합리적인 사고에 도달하려 드는
것이다.
측정 (measures)
이 가루는 “서 말” 되는 양이었다. 측정이란 양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용기, vessel)이다. 움푹 들어간
그릇,무언가를 담는 것들은 진리를 붙잡는 형체,즉 교리를 표현한다.
3 (three)
숫자로서의 3은 진리의 측면에서 충분함(fullness), 완성함(completeness)을 표현한다. 삶에는 세 개의
불연속적이고 각기 다른 수준(degree)이 있다. 즉 천적, 영적, 자연적 수준의 삶이다. 인간의 신체에도 세
개의 각기 다른 부분, 즉 머리, 몸통(trunk), 사지(extremities)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 속에도 세 개의
부분, 영(spirit), 활동 부분(activity), 몸(body)이 있다. 주님 안에도 세 개의 부분, 즉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Spirit), 바꿔 말하면, 사랑, 지혜, 권능인데, 이 원리의 세 개가 한 분 신성한 인격,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이와 같이 숫자3이 충분, 완성을 의미하듯, “가루 서 말”이란 진리에 관한 체계적인
교리,즉 진리에 의거 살 수 있도록 완성된 체계를 의미한다.본문이 주도하려는 요점은 용기로서의 서
말이라는 부피보다는 완성된 교리적인 체계로 마음 안에 있는 진리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누룩을 사용함 (using the leaven)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11
마음이 영적인 진보를 위해 적절히 훈육되어질 때, 그리고 영적 삶의 새로운 단계를 향해 전진하려
할 때,본문의 여인 즉,악령은 우리의 자연적 애정을 수단으로 얼마간의 자연적인 거짓을 우리의 생각
속에 은밀히 심어 악에로 기울려는 우리의 경향성과 연계되게 해 놓는다. 그러면 온 마음은 주입된 거짓으로
인해 휘저어진다.이를 두고 본문에서“온통 부풀어올랐다”고 기술되고 있다.
진리가 정말 진실된 것인지?라는 의문이 마음속에 발생한다.이러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주입된 거짓 원리라는 누룩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여인이 누룩을 슬쩍 넣었다.이 누룩이란 과거 부풀어 오른 옛 밀가루로부터인 바,이는 거듭나지 않는
본성으로부터 온 어떤 것을 표현한다,지금 묵은 밀가루 반죽이 새 밀가루 반죽에 첨가되는 것이다.이리하여
싸움이 발생하는 바,이것이 발효요 시험인 것이다.만일 진리가 정복한다면, 주님 사랑의 불은 누룩을
몰아내게 된다. 가다라지방의 돼지 떼에 악마가 들어감으로서 악마가 내쫓기는 모습과 같다.
정확한 의미 (the exact meaning)
우리가 알 수 있는 바, 하늘 나라는 누룩 자체 같다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 마음에서의 하늘 나라의
건설이 누룩 같다는 것이다. 이 건설은 시험을 수단으로 하여 반죽을 깨끗이하면서 좋은 빵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건조한 누룩을 건조한 밀가루에 아무리 많이 넣어도 발효되지 않는다.누룩은 습기를 필요로
한다.
물은 자연적 진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자연적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진리인 자연적 진리는 흔히 잘못
이해할 때가 많은 바,마치 밀가루 속의 수분이 누룩의 작용을 돕는 것 같다.자연적 마음은 순수한 진리들을
한번에 획득할 수 없다.자연적 마음은 진리의 외관(껍질)이 비록 순수하지 않더라도 이를 먼저 받아야
한다. 껍질에 불과한 진리라도 이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인간 마음은 순수한 진리를 받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열매의 첫 단계에서는 시고 떱떨하지만 둘째 단계에서는 달고 영양 있는 열매를 생산하는 것과 같다.
예증 (illustrations)
예를 들면, 주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 물었을 때, 사실
그는 자기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112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발견되자 마자,그는 자기에게 제시된 첫 일을 행하는 것을 사양했다.그
일이 자기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였다.
베드로가 주님을 받드는데 얼마나 자만심이 있었는지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장담하였다.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몇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나 마찬가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최소한 남보다는 선하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 게다가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 해서 자기가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 듯 여겨 버리는 경우도 흔하다.그러나 우리는“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으스대며 갑옷을 벗지 말라”는 구절을 명심해야 한다(열왕기상 20:11). 우리에게는 싸움이 언제나 있는
바,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인간은 자기 속의 선과 진리의
품질이 어떠한지 인식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진리를 가지고 노력하고 테스트 받을 때, 그리고 우리 속의 선과 진리의 오염된
정도를 인정할 때,진리를 위해 싸우고 살아 낸 만큼 그 진리는 삶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한 마디로
살아 낸 만큼의 진리 부분은 그의 생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된다.” 실제적인 삶 속에만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삶, 즉 애정과 생각도 형성한다는
말이다. 우리 속의 선한 원리를 지지하고 주님이 악한 경향성을 몰아 낼 수 있게 자신의 문을 열어 놓을
때,우리는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선한 원리들을 존경하게 된다.그러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더 높고
더 섬세한 특질이 일어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악에 기울려는 데서 자신을 더욱 분리시키기
때문이다.이 때야 말로 우리의 선한 원리는 이론에서 뿐아니라 실제에서도 있게 된다.다시 말해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고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론과 실제 (theory and practice)
기억이나 자기의 이해성에, 또는 자기의 자연적 애정 위에 새 진리가 놓여졌다 해서 그 진리가 삶에
놓여진 냥 상상해서는 안된다.삶에 놓여지는 것은 또 다른 전진 단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좋은
밀가루를 가졌다 해서 언제나 좋은 빵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단지 생각 속에 새 진리를 집어넣고,
얻은 진리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있어야 할 투쟁을 결코 취하지 않는다면, 밀가루는 잘 구워진
빵은 아니고 단지 밀가루일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따라서 밀가루는 부푸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13
것,그 과정 속에서 순수해져 영적 양식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선하고 진정한 정신적 소유물들을 느슨하게 붙잡고 있다.그러나 시험이 올 때,
그래서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소유물들이 휘저어 질 때,밀반죽이 발효되듯 할 때,그들이 추측한 원리들은
이 휘저어짐에 날카롭게 돌출되어 자기가 가진 선하고 참된 것의 면모를 알게 만든다.
사람들이 새교회 안으로 오게 될 때,그는 새로운 진리들에 매우 열성적인 기쁨을 가진다.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교리들을 단번에 왜 받지 못할까라고 궁금해한다. 그러나 당사자가 일상 삶에서
새 교리들을 수행해 보려 노력할 때, 그리고 자신 속의 악하고 거짓된 경향성들이 기반을 형성치 못하도록
떼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때, 이 악과 거짓이 새 진리의 실질적인 특질을 오염시키려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보게 될 때, 그는 왜 온 세상이 한꺼번에 새교회 안으로 돌진 못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던
것을 중단하게 된다.
자기 이해성 안에서 진리가 완전한 체계를 갖는 것이“밀가루 서 말”이다. 그러나 이 밀가루는 삶의
양식은 아직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빵”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이
밀가루는 반드시 경이로운 발효 과정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누룩은 지옥을 표현하고 있다 (Leaven represents hell)
주목해 둘 것은,비유에서 누룩은 천국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표현한다는 점이다.새교회
밖에 있는 많은 주석가들의 경우,본문의 누룩이 천국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본문 외의 다른
성서 부분에서도 누룩은 악하고 거짓된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인정된 사실임에도 그러하다.
누룩이 지옥을 표현한다고 본 옛 주석가들의 경우도 막상 결론을 반대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그들도
이 비유는 누룩 같은 이설적이고 악한 것들이 기독교계에 잠입해서 전 교회를 부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이런 저런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사상은 누룩을 상징적으로서,또는 일반적 방법 면에서 드러내놓는식
보다는 은밀한 영향력이 어떤 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룩에 대한
어떤 분명한 성격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또 다른 일반적인 해석의 경우, 이는 그리스도 복음의 조용한 힘이 세계에 점진적으로
작용해서 그 성격과 품질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핀바
같이 이는 누룩의 의미에 관한 전적인 오해이다.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이든,본문의 경우에서이든, 누룩은
선하거나 진정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114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누룩 자체로만 보면 별 가치가 있지 않지만,누룩의 작용은 매우 좋은 결과,즉 이익을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이 악하고 거짓된 것은 추하고 아무 쓸모가 없음에도 그것의 작용인 시험은 거듭나는 사람의 속성들을
선한 쪽으로 더욱 돌리도록 신성한 섭리의 지배하에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을“부풀림”으로써 어떤 것이 선해진다고 말하려는 흔한 우리의 습관은 고쳐져야
한다.부풀림은 순수해짐을 뜻하지 않는다.부풀림은 시험받음을 의미하고, 부패되어감이다. 부풀리게 하는
것은 악이다.더 뾰족이 말하면 악으로부터 온 거짓이다.그러나 주님은 누룩을 쫓아내심으로, 누룩의 영향력을
누룩 자체가 의도하려는 것에 반대되게 돌리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순수하게 해주신다.
불 (the fire)
누룩 자체에 어떤 좋은 것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것은 사실 불로부터 있다. 불은 누룩으로 하여금 저절로
패배케 해서 추방시켜 준다.만일 우리가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섞은 채 내버려두면,그 반죽은 이내
썩어진다.좋게 되는 것은 불로부터 온다.불이 누룩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이 불이란 영적 사랑이다.
시험 동안 우리의 영적 사랑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라는 불로 채워져 마음속에서 그 힘이 발휘되어
악령이 우리 속에 슬쩍 심어 놓은 악한 것과 거짓된 것들을 몰아 내 준다. 게다가 우리 속의 유전적으로
온 악하고 거짓된 경향성마저 누룩과 더불어 쫓아내지는 이중효과가 발생한다. 그 이유는 시험 동안 우리는
속에 있는 악과 거짓을 인식해서 저항하게 되어 더욱 지옥적인 것들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룩이 선하고 진정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면, “온통 부풀어오르도록” 하는 반죽의 부풀음이라는
작용만이 빵이 되는 필요한 조건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면 반죽 전체에 누룩이 퍼질 때 기껏 있게 되는
결과는 못 먹는 음식의 발생뿐이다. 밀가루 반죽이 맛있는 빵으로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누룩 자체가 밀가루를 개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밀가루를 빵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반죽된 채 놔두면 밀가루 마저 못쓰게 만들뿐이다.아마 더 오래 방치해 두면
누룩이 반죽 전체에 더욱 번져 밀가루 반죽은 완전히 못쓰게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을 몰아내기 위해 반죽을 굽게 되면 좋은 빵이 생산된다.
이런 사실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누룩이 천국 또는 천국의 복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룩이 복음을 표현해 준다고 알려진 믿음은 구시대 신학의 피상적인 견해에서 비롯된 오류일 뿐이고
그 신학은 사물의 중심을 꿰뚫지 않는다는 것도 짐작하게 해준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15
누룩 없는 빵
과월절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종교 행사 중 일부에서, 백성들에게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어져
있었다.그리고 모든 누룩은 엄격하게 금지되기도 했다.지금, 만일 누룩이 선한 어떤 것을 표현했다면,
아마 과월절 같은 중요 행사에 꼭 필요로 하는 종류이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누룩이 악과 거짓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면 위의 행사에 대한 설명은 매우 쉽다. 유대인의 일년
기념 행사 일정 중에서 빠른 일정에 놓인 행사는 거듭나는 단계 중 이른 단계, 즉 초기 단계를 표현해
준다. 이 초기 단계란 인간이 사랑의 측면에서라기보다는 믿음의 측면에서 거듭날 때의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는 아직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유혹을 받지 않은 상태,따라서 순수해지지도 않는 상태이다.
이 백성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초기 단계의 의미를 표현하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누룩을 사용하지
말도록 명령되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통하여 순수해지는 결과를 낳는 실용적 삶 속에서 이 백성들은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것으로 아직 만들지 못하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햇곡식을 바치는 축절,first fruits”에서는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도록 명령되었다(레위기
23:17). 왜냐하면 정신적 측면의 햇곡식은 노동과 시험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이 과정은 누룩을
넣어 빵을 굽는 과정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누룩을 넣은 빵,순수해진 빵은 보다 더 마음의 상태가
진전을 이룬 상태를 표현했다. 이 진보된 상태에서 그 속의 선은 어느 정도 질적 측면에서 더 노력이 있어
온 것이고 따라서 더 순수해진 것이다.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은 약속된 땅에로의 진입을 표현했다 (레위기 23:10). 그런데 이 진입은 시험이라는
어떤 부풀림을 통해,그 과정 이후에 있어진 것이다.
악이 아닌 선으로서의 밀가루 (the flour as good, not evil)
그래서 다시 만일 누룩이 선을 표현한다면,밀가루는 악을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이러면 밀가루가
주님께 드리는 헌물로서 축제에서 사용되는 표현에 반대되고 만다. 물론 밀가루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긴
하지만,고운 밀가루 자체는 선으로부터 파생되는 진리를 표현한다.그래서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룩의
사용은 좋은 밀가루를 더 순수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116 누룩 - 마태복음 13장 33절
예증 (illustration)
구 신학에서 영적 진리는 희미해 있었거나 종종 잊어 버렸다. 그 이유는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
그리고 “믿음만으로 의로워 짐,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이라는 두 거짓 교리라는 누룩 때문이었다.
이 두 교리는 신학들을 온통 부풀게 만들어서 신학 속의 특질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영적 사랑이라는 불은 아직 이 누룩을 몰아내지도 못하고 있고,순수해지게도,건강에 좋은 생명의 빵을
만들지 못하는 실정이다.
구원은 믿음만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사랑과 믿음,그리고 계명에의 순종에 의해 달성된다. 선함은
인간이 선해서 소유한 게 아니라,인간이 실제 삶 속에서 주님을 따를 때,주님이 인간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젊은이들, 그리고 기타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악한 영향들을 만나 극복할 준비가 되기
전 시험 속에 뛰어들지 말라는 경고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밀가루 서 말,” 즉 지성 속에 진리의 완전한
가르침을 소지하고,심정 속에 순수한 사랑의 불을 지녀야만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애정의 질이 어떠한지 모를 것이고, 따라서 생각과 애정 속에 섞인 누룩은 추방되지 않아 순수한 생명의
빵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험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그것들은 곧 그리고 충분하게 올 것이다.그러나 그것들이 내게
올 때 버티어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그러나 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시험에 들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면서, 시험에
들었을 때,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리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17
8
숨겨진 보물
-영적 진리의 발견-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4절
44.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요약
영적 삶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천국적인 기쁨이다.영혼이 내향적으로 열리면,감각에서 오는 쾌락은
단지 외적인 것들로서의 제 위치에 가라앉아 있다.
천국은 신성한 진리가 마음과 삶을 통치하는 영적인 왕국이다.
글자적인 의미
보물이란 가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거나 그렇게 추산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비유에서의 보물은 고대
118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시대 또는 동양에서 공통되어 알려진 관습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고대 시대 때에는 돈이나 값진 물건을
보관할 은행 같은 특별한 장소가 없었다. 극히 일부의 부유했던 국가들의 경우 무역 부분에서 어떤 투자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는 있다.그런데 강도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더욱이 통치자들은 독재정치를
하는 터에 경미한 트집만 생겨도 백성들의 재산을 포획하려 들었다. 전쟁은 그 땅의 통치자를 바뀌게 하고
사회의 조건을 변화시켰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 소유가 확실하다 해도 사람들이 소유한 보물은 안전치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생겨난 방법이 보물을 땅에 묻어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흔한 것은, 갑작스런 죽음이나 정치적 변동 같은 것으로 인해 소유자가 사라져 버리는 통에 그 사람의
보물 역시 감춰져 있게 되고 말았다.그래서 어떤 행동,즉 그 땅을 변형한다던가 하는 어떤 작업 과정에서
감추어 놓인 보물이 드러나게 되곤 했다. 유대인의 법 아래서 보물이 발견되는 땅의 소유자는 곧 그 보물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 사실들은 비유의 글자적인 의미를 설명한다.즉 보물을 발견한 자가 왜 그 밭을 사야 했는지이다.
만일 그 밭을 사지 않고 그 보물을 슬쩍 캐내어 갔다면 필경 그가 갑자기 부유해진 원인이 주위 사람이나
통치자에 의해 캐묻게 되어 결국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발견자의 도덕성
이 비유는 인간 삶에 있는 표본적인 그림을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보물을 발견한 자의 방법을 칭찬하시려
했다거나, 보물을 발견한 자가 그 밭의 소유주에게 그 사실을 은폐한 행위를 정당화하시려고 비유를 말하신
것도 아니다. 이 정당화는 또 다른 비유인 부정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이 정당화된 정도뿐이었을 것이라
본다. 오늘 비유를 가지고 위와 같은 행동에 대한 도덕성을 토의 하는데에 초점을 모아서는 안된다. 오직
이 비유가 표현하는 가르침만을 얻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영적인 보물
이 본문의 보물은 영적 삶을 위해 가치 있고 바람직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란 실제에 보인
영적 진리,그래서 천국적인 선을 생산한 영적 진리를 말한다.따라서 이 보물이란 자신에게 밝혀져 음미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19
신성한 말씀 속의 지혜이다.
밭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이란 어떤 조직이나 단체로서만의 교회가 아닌 교회,즉 인간 안의 교회,또는
교회에 있는 신성한 말씀에 관한 원리나 가르침들이다. 아마 밭을 교회 또는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말씀이 교회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그런 교회 속에 주님의 현존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에서,그 밭이 가치 있게 된 것은 감추어진 보물이 그 밭에서 발견되어서이다.이는 세상의 교회에서의
경우도,우리 마음속의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그것이 귀중하게 여겨지는 때란 우리가 감각적인
것만 오랫동안 응시하여 상대적으로 쳐저 있었던 천국적인 삶에 관한 진리를 다시 보게 될 때이다.
교회의 원리 속에서 영적 삶에 관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히 교회의 교리를 어떤 특별한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식의 밭으로 간주해 버린다.교회의 보물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이다.보다 뾰족이
말한다면 성경의 영적인 내적 의미이다. 진정한 새교회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영적
진리를 보고 음미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런 진리 가운데 기뻐하여 그가 지닌 정신적인 소유물을
다 팔 것이고, 감각에 속한 자신의 관념도 다 팔아서 내면의 진리들에 속한 삶에로 들어가 그 진리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 것이다.
보물은 감추어 있다
보물은 교회라는 밭에 감추어 놓여 있다.그 이유는 영적이고 내면에 속한 진리는 성경의 글자,즉
글자적인 역사, 예언, 시편, 또는 복음서라는 제목 하에 감추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유들이나 상징물들이
성경에서 주어지고 있는데 그 안에 진리의 영이 감추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놓인 이유는 진리의
영이 모독되는 데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에는 한 개의 가장 큰 주제가 다양한 가르침 밑에 감추어 놓여
있다.이 주제란 천국과 천국의 왕에 관한 것이다.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의 모든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그분의 신성한 인간성에 관해,오직 한 분, 유일한 하느님에 관해, 한 분 신성한 인격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그분의 영적 왕국에 관해 가르치고 있고,이 모든 것은 거듭나는 사람의 삶과
120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심정 안에 설립되어진다.
천국은 참으로“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다. 이 보물은 영적 진리와 영적 삶이요, 그것은 교회라는 밭,
즉 성경 글자 안에 묻혀 있다.성경 글자 속에서 빛나는 의미,그 의미가 읽는 이의 눈에 환하게 비쳐질
때,한 마디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를 보게 될 때,그 사람은 감추어 놓인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성경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천국의 문을 열리게 해주어 천국 속의 모든 것을 보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물을 다시 묻어 둠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가 밭을 살 때까지 보물을 밭에 묻어 두었다. 영적 보물을 발견해 낸 사람도
밭이 자신의 소유가 될 때까지 보물을 그 밭에 묻어 둔다. 글자적으로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다른 이가
그의 비밀을 습득함으로 인한 손실의 위험에 직면하거나,음모라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이와 같이
영적 보물을 발견한 자도 계략이라는 위험에 놓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적 보물의 발견은 신성한 영향력이 보통 수준 이상이었을 때,즉 보다 더 명백한 높은 상태에서 있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발견된 영적인 보물은 삶이라는 실용 단계,즉 외적인 상태나 일 속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마음은 이와 같이 새롭게 발견된 보물이 당사자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방해하는 이유란, 새 진리의 발견은 당사자로 하여금 새 빛으로 자기 삶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이고 감각적 수준의 마음은 비평 당하기를 싫어하고 질서 속에서 바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는다.그래서 모든 새 진리가 마음에 소개되면,과거에 가졌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행동들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성경에서 밝혀지는 영적 의미,영적 진리라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이 보물이 감각적인
사고가 던지는 야유 같은 것이나 반대에 복종 당하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발견한 자는 그것을 밭에
다시 묻어서 다른 통행자의 눈에 띄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적 보물을 발견한 자는 이 새 보물을 내면의 마음, 즉 자기 속 마음이라는 심오하게 깊은 마음에
감추어 두어서 거듭나지 않는 자연적 마음 속을 거니는 정신적인 개나 돼지로부터 안전하게 한다. 이 사람은
“하늘 나라는 너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내향의 영 속에 이 큰 보물을 저장해 두어야만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자기가 완전히 그 보물을 소유할 때까지 꼭꼭 숨어 있게 해야만 함도 알고 있다.
그런 다음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의 말씀을 제 가슴 속에 감추어 두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21
당신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이 사람은 먼저 자기 내향의 마음, 즉 자기 심정 속에 영적 진리라는 보물이 잘 보관되고 있는지를
확실히 해 두고,그 다음 그 진리들을 외적인 삶 즉 행동에로 가져온다.그 이유가 자연적 마음 속에 있는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을 극복함으로써만 영적 보물을 확실히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지닌 이기적인 삶을 팔거나 이별해 버리고 주님이 그에게 주시게 되는 것을 사거나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뻐함 (rejoicing)
이 사람은 보물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기쁨의 상태란 진리를 사랑함에서 오는 환희이다.선과
진리에 대한 내향적 애정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것 때문에,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회의
가르침 때문에 일어난다.이 사람은 가장 큰 보물을 획득하기 위해 과거에 지녔던 느낌이나 생각들,즉
과거의 모든 소유물들을 포기해 버린다.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따른다.그는 주님의 말씀, 즉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그래서 그는 밭을 사기 위한 길을 달려간다.
가다 (going)
그래서 영적 진리를 발견한 자는 밭,즉 교회의 원리,또는 말씀의 글자를 사기 위해 “가야”만 한다.
그가 가야만 하는 이유는,간다라든지,진보를 만든다던가, 걷는다라 함은 진리에 의거 살고 행동함을 의미한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이 사람은 주님의 계명에의 길을“가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적 진리에 위대한 가치가 있음을 보게 되어서 그 가치의 위대함을 평가해 보는
것만 가지고 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밭의 소유자에게 가서 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값을 치뤄 밭을 사야 된다.
소유자
122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의 소유자는 주님이시다.그 이유는 모든 진리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말씀의
글자가 그분의 것이라는 말이다.그래서 우리가 말씀 속의 영적 진리를 보게 될 때,그 진리들이 주님의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총명을 통해 발견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당한 소유자로부터 훔치는 격이 된다.그 대신 밭에 보물이 있음을 보게 될 때,즉
말씀의 글자적인 진리 속에 놓여 있는 영적 진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의 소유자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만 한다.그렇게 인정한다면,미처 발견 안된 말씀 속의 모든 사항도 주님의 것이라고 실제로
인정하는 셈이다.
밭을 삼 (buying the field)
만일 우리가 밭을 산다면 우리는 보물을 소유할 수 있다. 밭을 사되 비밀스런 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방법에 의해 밭을 사는 것이다.그 이유는 밭을 사는 것,또는 글자 속의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먼저 그 진리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실제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는 작업 중 우리에게 할당된 부분, 즉 주님의 진리에 따른 삶 혹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
가는 생활을 해 나갈 때 우리는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 진리라는 천국적인
보물,선한 삶이라는 보물을 우리에게 열어 주신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즉 계명에 따라 자기 일상 생활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지켜 나가라는
뜻이다. 그런 다음 그의 내부 삶은 그의 일상 지침에 적합한 외부적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이 비유의 영적 의미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소유자에게 어떤 것도 감추지
않았다.다시 말해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즉 “그는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대목에서
그의 진지함이 증거 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팜(selling all)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판다는 것은 그가 천국적인 사랑, 영적 총명, 천국적인 정의를 소유하기 위해
자기가 남보다 조금 더 영리하다고 으시대는 자아 총명,최소한 자기는 올바르다고 우기는 자아 정의,
누구보다 애정이 많은 자라고 뽐내는 자아 사랑,이런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이다.그는 제 스스로부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23
있는 모든 애정의 대상물을 주님과 바꿔쳤다.그는 자아를 부정함으로,자기 속의 악에 기울고 싶어하는
경향성에 저항함으로써 자기 악들을 멀리해 버렸다. 이렇게 실제 속에서 선을 자신의 소유로 만듦으로서
그는 선을 산 것이다.
이기적인 삶을 포기하는 값을 치르지 않고서 우리는 주님의 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수용할 때,즉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법칙으로 주신 명령을 수행해 갈 때,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적인 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속에 이런 보물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 말씀에 의거 살지 않는다면,
보물이 감추어 놓인 곳을 알고도 그 밭을 사지 않는 사람인 바,우리는 그 보물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팔아야만 하는 것들
“모든 것을 다 팔아”라고 씌어 있다 해서 자기의 자연적인 재산,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단지 그것들이 자신의 것,즉 이기적인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들이 주님의 것인데 자신이 사용한다는 것을 배우라는 말이다.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파는만큼,자기
십자가를 완전히 지는 만큼, 또는 자신을 부정하는 만큼에 비례해서 그는 영적인 보물을 완전히 소유하게
된다. 만일 그가 이기심의 어떤 것을 은밀하게 간직해 보겠다고 하면 영적 보물의 구입 과정에서 실패한다.
우리는 천국가는 여행을 경제적으로 하는게 아니다. 지옥의 악한 삶을 중단할 때만이 천국의 순수한 삶이
흘러 들어와 우리를 복되게 한다.천국을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만큼에서 우리는 천국의 것을 붙잡을 것이다.
주님과의 흥정에서 약삭빠른 장사는 가능치 않다. 천국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정도에서 천국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자유의지에 의해 주님을 인정하는 이들,그래서 말씀에 있는 내면의 진리를 보는 이들,이들은
거듭 나아가기 위해 자신 속의 거듭나지 않은 것들,이기성들의 소유권을 포기해 가는 사람들이다.그래서
거듭남이 진보할수록 그들은 말씀 속의 내면의 진리를 더 뚜렷하게 보는 바, 과거 자연적 마음으로 말씀을
대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게 된다.악을 멀리하면 악에 반대되는 선이 주는 기쁨이 우리에게 더 충만해진다.
악은 죄로 될 소지가 절대적으로 있기에 멀리 할 때, 우리 악이 만드는 죄악의 소지들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거룩함이 발하는 아름다움을 한웅큼 쥐게 될 때,거듭나는 삶의 영광을 맛보게 될 때,우리는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시기 등등, 이기적 사랑의 모든 형체를 한쪽에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124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영적 진리의 보물들,즉 사랑하는 것,참는 것, 친선, 타인을 생각해 주는 것, 인격의 영성을 바래는 것,
그 외 미덕들 등등을 소유한다는 말이고,이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살게 된다.
주님의 영적인 피 (the spiritual blood of the Lord)
새교회인이다면, 갈보리에서 주님이 흘리신 육체의 피로 천국을 매입할 수 없다는 정도는 쉽게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대속죄, vicarious atonement”의 교리는 성경 글자를 외적이고 감각적인 시야에서 보아 기초된
사상 중의 하나이다.우리가 말씀의 구름을 제치고 볼 때,즉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로부터 발하는 빛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때,글자라는 밭에 감추어 놓인 귀중한 보물을 발견한다.
그래서“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판다.” 다시 말해 장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들, 주님은 무한하신
사랑이시다는 것,주님을 인간이 버렸다고 해서 그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는 것,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이를 구원해 주시려 하신다는 것 등등의 진리에 들어가게 된다. 즉 무엇보다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여기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요한복음 15:10).
주님의 피란 영적으로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려 하고 배운
대로 살아갈 때 그 진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준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교회의 밭 즉 말씀을 단번에 다 살 수 없다.우리는 그 밭을 조금씩 계속하여 사들인다.우리가
생활 속에서 갖게 되는 악한 느낌들을 거절할 때, 그 거절된 악이 우리가 소유하려는 보물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우리의 악들을 멀리하거나 팔아 치워 자기 속에서 꺼내질 때,선에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물을 위해 값을 다 치를 수 없는 고로 해서 교회 속의 영적 삶을 소유하는데 선한 자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라는 외적 형태의 조직은 영적인 것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계명대로 살아가는 이들과 살 필요가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다. 또한
교회 조직에서 활동하는 일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서도 안된다.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알고 있다. 게다가 감추어 놓인 보물을 우연히 만나는 체험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25
한 두 번 이상 가졌었줄로 본다.그럼에도 그 보물은 우리의 것이 안되어 있다.우리는 필시 밭을 사야만
한다.우리는 말씀의 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다시 말해 진리에 반대되는 우리 속의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서,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의 글자,밭을 사는 것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악을 금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함으로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 밭의 값을 지불해 가야 한다. 그래서“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될 것이다.”
악에 저항함
모든 악은 당파적이고 배타적이다.그래서 이것들은 마음을 한쪽으로 쏠리게 한다.우리 속의 어떤
악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 그 악을 느슨하게 처리해 버릴 때, 그것은 여타 악들에 대해서도 느슨해지게
처리하려는 성향을 부추기게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악을 흠모하려는 자기 속의 성향을 모르는 척 해
두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내버려두게 되면,그렇게 한만큼 모든 악의 영향에 노출되는 셈이다.모든 악은 자아 사랑의
형체들이다.그래서 우리가 어떤 악에 저항한다면,우리는 모든 악의 뿌리인 자아 사랑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그래서 어떤 형체의 악이 되든 진실로 금하려 한다면,최소한 이미 자기가 아는 악한 형체의 경우
만큼은 기꺼이 저항해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상태
현 상태의 기독인에게 주님의 말씀에 있는 내적인 영적 의미는 감추어 놓인 보물이다. 이런 보물의
존재를 아는 이는 거의 없다.만일 새교회의 교리 속에서 보게 된다면,영적 의미를 보물로서 보게 되리라
본다.
많은 현 세대 사람들, 교회 안의 일부에서까지도 구약성서를 묵은 달력 같은 책으로 간주한다거나 현시대에
는 별 실용성이 없는 듯 여기는 경우를 목격한다.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내향의 보물을 사람들은 어떻게 발견해야 할까? 이 보물은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 띄는 표면에는 놓여 있지 않음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126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경작하는 밭
비유에 있는 밭은 그리스어로 보면 경작하는 밭을 뜻한다. 그래서 감추어 놓인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마 소유자를 위해 그 밭에서 늘 일하는 사람일 것이다.
밭을 늘 경작한다는 것은 영적 측면에서 생각하면,교회의 진리를 가지고 일하는 때,또는 말씀의 글자를
가지고 어떤 선을 행하려 추구하는 때,우리에게 열린 글자적 진리를 가지고 뭔가 선용하려 할 때,그래서
말씀 속의 내향적 항목들을 나열해 보고,그 속의 영적 보물을 찾으려 추구하는 때,등등을 뜻하게 된다.
“만일 네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소리쳐 요구하며,그 이해를 들어올린다면, 만일 네가 그 지식과 이해를
은을 원하듯이 추구하고,감추어 놓인 보물로 여겨 열심히 찾는다면,주님을 경외해야 함을 이해하고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발견할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보물이 밭의 어딘가에 감추어 놓였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단지 그는 적당한 급료를 받기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따라서 발견된 보물은
그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대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삶에서도 존재한다.우리에게
주어진 바깥 임무들을 끈기 있게 해 가고,그런 일들이 유용해지도록 사랑하노라면,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보물을 발견한다는 말이다.그리하여 발견된 보물로 인해 기쁨을 발견하고 삶의 풍요를 누리며,
그와 동시에 삶의 품성 역시 바뀔 것이다.
악을 멀리함
팔아 치워야 할 것, 또는 멀리해 버려야 할 것들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속에 얼마나 있는지 헤아리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적다.그렇게 적은 이유가,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속 악의 비통한 형체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고,자기 죄에 관한 한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다던가,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수준에서
겨우 점검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선되는 요점은 악은 악이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악들이 남의 속에만 든게 아니라 내
속에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죄는 하느님과 반대되므로 그것들을 멀리하는 방향에서 해결을 가져야
한다.이 원칙에 있게 되면,악이 죄가 되는 기회가 온다 해도 그것들을 못본척하여 용납하는 어떤 순간도
허용하지 않게 된다.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우리가 쉽게 쏠려지는 악에 반대되는 선을 강행함으로 더욱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27
기반을 다져 두어야 한다.
이럴 때만 우리는 보물이 감춰져 있는 밭을 매입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글자적인 계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만큼, 또는 계명을 실제에 응용하는 정도에서 말씀 속의 영적 의미도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말이다.자신이 부자라고 간주하는 가장 진정한 길은 자신에게 대해“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라고
묻는게 아니라, “계명을 표준으로 해서 판단하건대 나의 실제 인격은 어떻게 되어 있지?” 라고 되묻는
것뿐이다.
지식은 힘이다
이 비유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식은 힘이다.” 이 말은 물질적 세계에서 공인된 말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영적인 보물과 천국적인 삶은 우리 주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그럼에도
우리는 이 삶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다.
수세기 동안 캘리포니아나 오스트렐리아 등지에서 금이 매장된 밭들이 자기들 발 밑에서 짓밟히는
줄도 모른 채 지내 왔다. 정신적 측면에서 우리는 영적인 부유가 함유된 것들을 거침없이 쿵쿵 밟고 다니고,
우리 주위에 있는 영적 부의 가능성을 눈치도 못챈채 살아가는지 모른다. 자기에게 무진장한 행운을 보증해
줄 부를 함유한 땅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난으로 죽어 갔는지 모른다. 펜실바니아의 농부들은 땅
값을 다 지불 못해 경작하던 땅을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땅에 매장된 석유에 관해 그들이
알았더라면 백만 장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적인 가난으로 죽어 간다. 사실 주님이 영원한 삶의 보물을 엄청나게 저장해 두신
땅위에서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때때로 펜실바니아의 농부들 같이 우리는 석유라는 것을 알았을는지
모르나,석유의 가치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을는지 모른다.성경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의 귀에 익혀져
있는데도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에는 소경이 되어 있다. 게다가 “볼 눈”까지 가졌는데도 말이다.
주님의 오심
주님은 그분 스스로 육신을 가지시고 인간 앞에 오셨다. 신성한 인격이라는 보물이 지상에 오신 그분
안에 존재했다.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분 안에 신성이 존재 않는다고 알았던 것이다.“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128 숨겨진 보물 - 마태복음 13장 44절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요한복음 1:10-11).
오늘날,신성한 말씀에 있는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밝히 아는 것(계시), 이 지식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은 명백하게 설명된다.이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다.그분의 재림은 물질 세계라는
구름 안에 육체로 오시는게 아니라,말씀의 글자적 의미인 구름 안에 내향적이고 영적으로 오셨다.말씀의
글자는 영적 마음을 가진 이들의 눈앞에서 구름이 벗겨지듯 갈라지고 말씀 안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더 큰 영광으로 나타나 보여지고,그 영광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백한 자태,즉 한 분 하느님, 한
인격으로 드러내 주셔서 거듭나는 사람의 삶과 마음에 자리잡으신다.
신성한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 감추어 놓여 있고 단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이 감추어 놓인 신성한 인격을 발견한다. “진실로 구세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 백성 안에 숨어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의 가르침을
읽는데도,정작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 숨겨 놓은 보물을 백만 분의 일도 보지 못한다.“성경을 뒤져라.
너희가 생각하는 성경 속에서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성경은 나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보물,은밀한 곳에 숨겨진 재물을 너희에게 주리라”(이사야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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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주를 찾아다니는 장사꾼
-하느님의 인성을 인정함-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5-46절
45.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중심 되는 진리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하느님의 모든 말씀에 흐르는 가장
큰 주제요, 기독교의 가장 귀중한 진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에 관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성경이 다양한 각도로 가르치는 가르침 속에, 그리고 내향적 의미로 상주하는 거룩한 성경에서
중심 되는 가장 넓은 논제인 것이다.그리고 오늘 본문에 있어서도 이 주제는 예외일리 없다.“숨겨진
보물”의 비유가 암시해 주는 것은,교회는 세상이 관심을 두지 않아 숨겨진 채 있는 아주 큰 보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연적인 생각으로부터 숨겨진 채 오로지 영적인 마음에만 밝히 알게 하는 내향적인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 등등이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는 주님의 말씀에서 가장 크고 중심 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130 진주를 찾아 다니는 장사꾼- 마태복음13장 45-46절
인성이 신성하다는 것은 진리이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신성한 인성 (the Divine Humanity)
우리는 지금 보다 꼼꼼한 표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함, the Divinity of the Humanity of
Jesus Christ”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용어를 정밀하게 사용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 속에는 신성한 어떤 것만을, 특별히 그분의 내향적 삶 속에 있는 신성한 어떤 것만을 인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한편 극소수이긴 해도 일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가 신성하다는데 대한 완전한
사상을 확실히 갖고 있다 구 신학은“삼위 일체의 신비”라는 비합리적인 명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라는
짐을 떠맡겨 놓아서, 일반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납득할 수 없는 신조로 뒤집어 씌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을 가르치는 바,사실 가르치는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표현이 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때가 되면 너희에게 아버지에 관해 명백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가 새교회에 있다. 그래서 새교회에서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성한 한 분으로서 아버지와
더블은 그분 자신의 신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계신다.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신성한 인격을 보여주시되,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이 아닌 (그 이유는 물질적 육체만으로는 어떤 인간의 경우도 인간의 필수가 되는
부분은 못되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로서 입으신 자연적인 인간다움(물질적 부분을 넘어 있는 모든
것들) 이 영화되시어 예수 안에 거주하신 아버지와 합쳐져서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셨음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고
말씀하셨다.
가진 것을 다 팔다
이 위대한 진리가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위에 내리 비칠 때,그 진리는 두 겹으로 된 인간 삶(자연적,
영적 삶)의 모든 것 위에 하늘의 빛을 홍수처럼 쏟아 부어 준다.이 영광스러운 빛 가운데서 이 사람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든 것,그리고 지금까지 진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테스트 받아진다.그래서
자기의 생각, 느낌, 습관에 속한 것까지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이 기독교의 장대하고 중심 되는 이 진리와
모순됨을 발견하고,모순된 것이 무엇이든 그는 기쁘게 포기한다.영적으로 보건대, 이 가장 위대한 진리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31
소유하기 위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기쁘게 팔아 치운다.그는 옛것을 밟고 일어서서 이제는 성장해 간다.
과거 예수님께서 모든 진리를 성취하시기 위한 삶을 가지셨듯이 진리대로 살아 보려는 순수한 노력을
해 가서 자기의 옛것에 속한 것,이기적인 삶의 궤도를 벗어나 성장한다.
장사꾼
장사꾼이란 직업적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이다.그래서 뭔가 유용한 것을 팔고 사는 사람이란,
그가 총명과 지혜를 획득해 보기 위해, 또는 그가 타인에게 그 유용한 것을 서로 나누기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사람을 표현한다.이 사람은 선을 위해 진리들을 배워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장사란 정신적 재물들의 사용을 만드는 것을 표현한다.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해서 장사한 이들은 자기들의 행운을
증가시켰고 칭찬되어졌지만,주어진 달란트를 사용 안한 사람은 주어졌던 것 마저 잃고 혹독하게 비난되어졌다.
영적으로,장사꾼이란 어떤 사용을 위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수집하는 이들이다.그래서 어떤
사용을 위해 지식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 서로의 선과 진리를 위해 자기에게 부족한 지식이나 총명, 그리고
애정들을 벌충하게 됨으로 보상받아진다. “지혜를 발견하는 자, 그래서 이해를 끌어내는 자는 행복하다.
그 이유가 지혜와 이해라는 상품은 은이라는 상품보다 더 낫고,얻은 것이 순금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찾아다님
비유 속의 장사꾼은“좋은 진주를 찾아 다녔다.” 찾는다는 것은 진리를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해서 오는
의지의 노력이다.우리에게는“너는 주님을 찾으라” 또는 천국을 추구하라고 명령되어져 있다. 이는 주님과
하나를 이룸으로 영적 삶에 도달되도록 의지가 노력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언약을 지키는 자,
성심으로 그분을 찾는 자는 복되다.”
거듭나겠다고 애쓰는 사람, 그래서 자기 마음에 천국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은 지식과 진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요,이 사람은 그 진리대로 차차 살아가게 된다.이 사람은 영적으로 좋은 진주를 찾고 있는 것이고,
이 진주와 더불어 정신적인 장사를 하는 것이다.
132 진주를 찾아 다니는 장사꾼- 마태복음13장 45-46절
진주
“진주”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진리 그 자체를 표현한다.
따라서 진주는 바깥 쪽에 있는 지식들,예를 들면 말씀의 글자에 존재하는 지식들이다.그러나 상응에
의해 이러한 진리들은 말씀의 안쪽에 있는 의미 즉 영적 의미와 하나를 이룬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보해
가면 진주는 지식일 뿐아니라 진리이기도 하다.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이해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게 된 교리가 마음속에서 단지 지식이든, 진리이든, 또는 지혜이든, 무엇이 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 여부에 달려 있다.
진주가 외적 진리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거룩한 성의 문은 진주로 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또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이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었다”(계시록 21:21). 문이란
외적 진리들이고,이 진리들은 문 안쪽에 있는 것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거룩한 성의 문은 우리들
마음에 영적 진리의 체계에 관한 지식을 소개하는 외적 진리들을 말한다. 각 문이 각각 다른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다 함은 진리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것이다.그 이유는 주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그리고 모든
진리는 최상의 의미인 주님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소개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과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모두 함께 끌어내지게 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파생되어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은 하나로 결합되어진다.결국 모든 지식은 본질 면에서 보면 주님에 관한 지식이고,신학이란 하느님에
관한 지식이다.
예증
인체의 모든 부분들은 아주 다양하고 각각 독립되어 있지만 하나의 몸으로서 모든 부분은 연결을 맺고
서로가 적극적인 협동 하에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 안에서 모든 진리들은 생각이라는 체계
속의 각 부분들이다. 그리고 모든 진리들은 어떤 사용에 있어서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관련을 가지고 연결을
이룬다.육체가 그 안에 거하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듯,모든 진리들은 하나의 육체같이 진리들의 영혼(soul)이요
생명인 신성한 영혼(Divine Spirit) 아래 하나로서 행동한다.
모든 것 안에 주님은 계신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33
어떤 지식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볼 때만이 그 지식은 우리에게 어떤 영적 쓸모가 있도록 되어진다.
“나는 문이다,” “나를 거처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고 주님은 말하셨다.
거의 같은 듯한 지식이나 교리라 해도,만일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면,지식이든, 교리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인간으로 영적 삶에 들어가지게 해줄 수도 없고, 자신 속의 악들의 영향으로 영적으로 부식되어
가는데서 치료되게 해줄리도 만무하다.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이고,가장 위험한
것은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일 게다.단지 도덕적이기만한 사람은 그가 선을 행하되 자신을 위해 시도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똑 같은 선을 행하되 주님을 위해 노력한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고 진리에 의거 살면서 지식을 사용한다면,그는 선을 획득한다.그래서 더 열심히
추구하면 그가 구하고자 한 것을 더욱 발견해 간다. 한 마디로 그는 아주 많은 진주를 발견해 가고 결국
지금까지 자기가 소유했던 모든 진주보다 더 값어치 있는 한 개의 큰 진주까지 발견하게 된다. 지식을
추구하면서 그는 진리를 획득하고,진리를 탐구하면서 그는 선함을 달성한다.그는 모든 진리가 만나는
지점이 선임을 발견하고,거듭나는 그 사람의 선은 주님과 하나를 이룬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데 마리아가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자,주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타일러 주셨다.
“마르타,마르타,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그것을 뺏어서는 안된다.”
유일한 하느님 (the unity of God)
한 분 하느님이 계심을 알 때만이 우리는 통일된 진리를 납득할 수 있다.구 신학의 경우,거기에는
여러 가지 신들이 있었고,종종 이 여러 가지 신은 서로 상반되기도 했다.자연적인 사람에 있는 마음은
유일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고로,이와 같이 대부분의 진리들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것 같이 보인다.
더욱이 각각의 진리는 어떤 중심되는 큰 진리 밑에서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는 것 같고, 서로 충동을 일으키는
듯 여겨진다.어떤 통일된 목적에 서로 협동 안하는 듯 보일 수밖에 없다.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한 분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유일하신 분의 영과 시야로 충만된 기독교를 납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신성한 인격이 충만해져 있음을 납득하는 것을
배우려 할 때, 영적 생명에 있는 한 개의 장대한 중심 되는 진리가 왕같이 모습을 들어내 모든 진리를
끌어내 체계화 해주어,우리가 아는 모든 진리는 다양한 인간 삶 속에서,그 삶의 모든 수준에서, 모든
134 진주를 찾아 다니는 장사꾼- 마태복음13장 45-46절
평면에서 통일되게 해준다.예수께서 말하시기를,“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그리고 또
말하시기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
진리의 성장
한 개의 진주는 층을 이루는 겹겹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다. 진주는 간단한 한 개의 둥근 공이
아니라 작은 응어리(core)를 덮고 덮은 층층으로된 껍질의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주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작은 시작으로부터, “교훈에 교훈을” 더해 가는 점진적인 형태를 취하여,
마치 큰 진주가 되어 끝나듯 큰 진리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된다.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마음은 중요한
지식과 진리를 추구해 간다.그래서 점진적인 성장에 의해 준비가 마무리 될 때,그 마음은 한 분 하느님으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인격에 관한 지식,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야 만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 진리를 하나의 교리로 정리해서, 또는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그 진리를 실제에 사용함을 안다는 말임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그것을 안다는 것은
마음에 잘 간직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따라서 진리를 안다는
것이란 모든 진리 안에 주님이 계심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은 육을 입은 말씀이요,씌어 있는 말씀이 신성한 진리임을 우리가 안다면,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
안에,주님으로부터 있다는 것,모든 진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특별히 이러한 것들이 말씀의 내향적인 영적 의미로부터 보여져 알게 된다면,그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도 명확히 볼 것이다.
진리는 서로 연계되어 중요하다
위와 같은 위대한 진리를 우리가 붙잡고 있음에도, 우리가 가진 모든 진리들이 가장 값어치 있다는
것에는 주목하고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한 개의 큰 진주의 진정한 특질에 방향을 맞추고
있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그 이유가 이런 진리들이 진주 즉 지식들과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진리들의 가치는 양만에 의존되지 않고 그 질이 어떠하느냐에 의존되기 때문일 것이다. 큰 것이 언제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35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 가고 경험도 하는 초기 단계에서 주님에 관한 교리는 중요하지
않은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교리 역시 우리가 아는 많은 교리 중의 한 부분일 것 같고 다른
교리를 믿듯 이 교리도 믿고 있다고 예상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에 관한 교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실용성에 속하는 교리가 더 중요한 듯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고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보면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더욱 전진할 때,주님은 모든 진리 안에 계신다는 것,“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것 같이 모든 지식은 주님을 향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얼핏
읽기에는 우리의 바깥쪽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듯 보일런지 몰라도, 안쪽 의미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에
관한 어떤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인간다움은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임을, “사람의 자”가 곧 “천사의
자”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증
창조의 이야기에서 빛은 해가 창조되기 며칠 전에 창조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서
창세기는 어떤 물질적인 세계를 만드심이나 지질학을 취급하는게 아니라, 상징의 언어로 이 책은 신학이나
인간 영에 관한 정신적인 세계를 만드시는 것을 취급하는 것이다.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빛이 있어진 이유는,성장해 가는 인간의 마음은 신성한 태양,즉 주님을 알아보기
전,또는 개인적으로 모든 진리의 근원,정신적인 빛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식하기 전 일반적인 진리들을
먼저 보게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태어난 아기가 태양을 보기 전 빛을 보는 것,빛과 태양 사이의 어떤 연결도 없이 무작정
먼저 빛을 보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아마 이 아기는 햇빛,달빛, 불빛 등등 많은 빛을 볼 것이다.
아마 아기는 이런 빛들이 여러 가지 근원에서 있어진다고 간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츰 그에게 태양을
보여주면 빛의 근원이 태양에서,태양으로부터임을 가르치면,그는 각 빛의 연결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
다음 점차적으로,그는 더욱 더 총명해져 가서 빛이 직접 비치든,간접적으로 비추이든 그 빛들은 태양에
근원을 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총명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성에 관한 진리로 가르쳐지게 되면,
136 진주를 찾아 다니는 장사꾼- 마태복음13장 45-46절
그 마음은 생명과 빛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심을 이해한다.이리하여 그 마음은 모든 진리는 주님의 것이요,
영적 마음은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진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귀속된다고
하는 것에 실패하는 일이 절대 없다.한 마디로 그는 그분의 명령에 따른 길을 걷는다.이 사람도 열심히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되 그것 자체가 자신의 영적 진보를 방해하게 하는 것들로 만들지 않는다.
파는 일은 반복된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보물을 발견한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 그리고
연속되는 비유 시리즈로서 오늘 본문에서는 진주를 발견한 자도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만 했다.
이 비유들은 동일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진보해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묻기를,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았다면, 어떻게 그 다음
비유에서 그는 또 다시 가진 모든 것을 다 팔 수 있단 말인가?라고 다그칠 수 있을는지 모른다.두 비유를
좀더 세밀하게 구분해서 말한다면, “숨겨진 보물”의 비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그 다음 비유는 자아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측면을 다루고 있다.인격에서 각각의
진보는 정신적인 빛 속에서 각기 다른 발전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보할 적마다 더 알게 된다. 진보의 각 단계마다에서 그는 악과 거짓에 속하는 자신 속의
것을 팔아 치우고 포기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돼지 앞에 있는 진주
“너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의 돼지
떼란 악에 속한 우리 속의 감각적인 욕망들을 말한다. 우리의 애정들이 썩어 뭉글어진 본성인 오물 앞에
머리를 숙이려 든다면,우리의 주님은 천국적 진리로 천국의 삶에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실 수 없다.사실
진리를 해박하게 안다는 것과 진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론이나,말로는 비슷할 것 같이 보일런지 모르나,
이 둘은 별개의 사항이다.요한계시록17장을 참조하면, 부패되고 세상적이며 신성을 모독한 바빌론도
“주홍과 진홍색의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한”여자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도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고,겉보기에는 거룩함을 고백하나,속은 썩어 있어 모든 선과 진리를 더럽힌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37
진리를 앎으로서 오는 기쁨
“숨겨진 보물”의 비유나 이 본문의 비유, 모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영적 진리를 알게 되면 기쁨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비밀은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있다.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언약을
보여주신다.” 이와 같이 진리가 더 높아지면 그에 따른 기쁨도 더 높아지고 증가한다.
신성한 말씀은 무진장하게 존재한다.우리는 그 진리를 결코 다 소화해 낼 수 없다.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범위에서는 우리가 더욱 총명하게 성장해 갈 수는 있다.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이요,이 진리는 인간의 생각과 삶의 모든 평면과 수준에 적용된다.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이미 있는 것에 관한 지식일 따름이다. 지식이라는 진주는
다만 주님의 정신적인 도성,새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도성의 문일 뿐이다.즉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은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21).
138 끌어 올려진 그물- 마태복음13장 47-50절
10
끌어 올려진 그물
-선과 악의 분리-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47-50절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심판
교회의 가르침은 심판에 대비해 인간을 준비시킨다. 인간의 인격에 작용하는 면에서 하느님의 진리는
두개의 반대되는 특질의 발달로 해서 선으로부터 악을 분리시킨다.
그 이유는,영적인 분리란 장소에 관련된 거리 상의 분리가 아닌 것,즉 상태 또는 인격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서로 대치되는 인격으로 발달된 사람들은 영적으로 분리된다.또한 그들은 서로 떨어진 채 성장한다.
아마 그들이 물질적 세계에서는 서로가 가까이 살고 있다 해도, 정신적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39
거주하는 것이다.
영계에서의 거리는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인격면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말이고,서로 떨어져 있다 함은 인격면이 서로 일치 않는다는 것이 된다.
이런 모습은 이 세상에서까지도 그러하다. 누군가가 자기와 견해를 같이 하면, “그는 나와 가까운 사이지...”
라고 말하나, 자기와 비슷하지 않으면, “그와 나는 거리가 있어서...”라고들 말한다.
하늘(Heaven)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입장이 허락되어 들어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사람은 자기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행동에 선과 진리의 천국적 원리가 입장되도록
허용한 사람, 그래서 천국적 원리들을 삶에서 구체화하여 천국적 원리가 살아 있게 만든 이들이다.
물
“물”이란 자연적 진리에 대한 표현이거나, 이 진리와 상응된다. 즉 생각의 자연적 평면에 있는 외적
진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 진리는 신성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 특별히 십계명 등등이다.
바다
“바다”는 많은 물들이 집합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자연적 진리의 저장소로서 주님의 말씀의 글자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진리들이 인간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바다는 진리라는
물들로 채워진 인간의 자연적인 기억을 표현한다.
고기잡이 (fishing)
“고기들”이란 기억, 또는 교리 안에 살아 있는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표현한다.
이를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고기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또는 자료나 학문의 측면인
자연적 평면에서 진리들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이에는 선한 자연적 인간 또는 악한 자연적 인간,어느
부류도 다 해당되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가르침은 악하든 선하든 모든 인간에게
140 끌어 올려진 그물- 마태복음13장 47-50절
주어진다.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가 모든 종류의 밭에 뿌려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고기잡이란 마음이나 삶이 외적이고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전환시킨다거나 교훈 하는 것을
표현한다.그래서 어부란 말씀의 글자에서 진리를 끌어내는 자,그리고 그 진리를 타인에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주님은 그분의 첫 제자들로서 어부를 선택하셨는데 이들의 직업은 주님이 그들을 부르신 새로운 직무를
표현했다.그들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리라.”
예언자들 같이 제자들도 그들이 가르친 원리들을 표현했다.
고기란 삶의 낮은 형태,냉혈적인 삶,총명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래서 자연적 평면의 마음 상태, 영적으로
고기라 불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더 높고 총명한 조건 속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가르침을 받아 낮은 형태에서 끌어 올려져 생각의 더 높은 형태로, 고기가 바다에서 해안가에 끌어 올려지듯
더 강화된 교리라는 지식에로 끌어 올려질 수 있다.
그물
고기를 잡기 위해 질서 정연하게 끈을 연결한 그물이란 논리적이고 질서 있는 체계를 갖춘 교리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 교리가 인간의 마음을 붙잡으며 논쟁의 결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그물도 그 외 다른 표현물들 같이 양면, 즉 좋고, 나쁜 측면의 의미를 가진다. 나쁜 측면에서 그물은
거짓 교리로 연결된 체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좋은 측면에서 그물은 신성한 말씀으로 확증된 진정한 교리
체계를 말한다.
“바다에 그물을 침”은 훈육하기 위해 자연적 마음들을 모으는 것, 그래서 그 마음들에 있는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합리적으로 열어서 설명하는 것을 표현한다. “온갖 것”이란 훈육되는 모든 인간, 갖가지
종류의 인간을 표현한다. 이렇게 온갖 것이라 서술된 이유는 인간 마음이 훈육되어 어떤 영적 마음이 될
것인지 그 인격의 결과를 보지 않는 이상 뭐라고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물을 끌어올림
그물이 가득 찼을 때,어부는 그물을 해안가로 끌어올린다.가득 찬 그물이란 훈육된 인간의 이해성
안에 있는 풍부한 진리의 지식을 표현한다.이 인간은 악과 선을,죄된 것과 거룩한 것을, 진리와 거짓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41
구별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진리에 의해 살 수 있는 것이다.
“물”이 자연적인 진리에 상응되듯, 땅에 속하는 “해변”은 자연적인 선에 상응된다. 이 자연적인 선은
진리에 의거 살아간 결과이다.따라서 자연적 선은 생활에 진리를 응용한 실제인 것이다.
진리가 인간에게 가르쳐져 알게 된 뒤, 그 다음 단계는 안 것들을 실제에 놓음으로서 그 진리로부터
선을 얻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사용해서 더 나은 인격을 만들 작정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 적절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가 안 진리를 실제에 사용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된다.
판단(심판)의 실제
이렇게 해서 각자가 걷는 삶은 각자에게 실제적인 심판이 되어 간다. 모든 이는 자기가 받은 가르침을
사용함으로서 심판되어진다.그 이유는 가르침의 목적은 인간으로 선한 삶을 꾸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심판은 성취된 상태,무르익은 상태,준비되어진 조건, 즉 선하든 , 악하든, 각자가 결정한 것이
삶에 의해 고정되어지고 확증되는 때에 있어진다.
넓은 측면에서 땅 위 교회의 역사는 각 시대와 각 시대에 있어진 처방에 의해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져 왔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가라지와 밀은 수확기까지 함께 자라도록 허용되었다.이 수확기가“세상 끝날”이라
고도 말해지는데,이는 한 시대의 끝,한 처방의 끝, 또는 세상의 어떤 일반적 상황 조건이기도 하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있게 되는 심판이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항구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격 속에 고정시킨 만큼 우리는 자신의 심판에 접근되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의 인격이 고정되어
간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원리 그대로 살아 그 원리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서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은 원리는 거절해 버린다.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삶에 의해 스스로 심판하는 것이다.
자신 속에 남긴 것으로 각자의 모양이 어떻게 되도록 함으로 스스로 심판한다는 말이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한채로,의로운 자는 의로운 채로 남겨 지리라.” 자신의 삶에 의해 모든 이는 자기가 만들고자
한 것을 인격 속에 남기고, 확증하고, 견고하게 해 나간다. 각 개인은 자기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한 것들을
좋은 것이라 부르면서 나중 사용을 위해 조심스럽게 간직한다. 그 반면 자기가 더 이상 흠모하고 사랑하고
싶지 않은 원리들은 나쁜 것,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 던져 버린다.이는 마치 어부들처럼 가득 찬 그물을
142 끌어 올려진 그물- 마태복음13장 47-50절
해변에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잡은 고기들을 분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이 판단해 보아서 좋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인 그릇에 모아 담고 나쁜 것은 던져 버린다.
앉음
“ 앉아 있음”은 걷는 것이나 서 있는 것에 비해 보다 더 고정되고 항구적인 태도인데, 이는 의지나
심정이 더 고정된 상태, 또는 자기가 살아가야 하는 태도를 결정하는데 더 준비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의지가 결정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에게 오게 되는 것을 삶 속에 예상되는 원리로서 심판하기 위해
영적으로 앉아 있는 것이 된다.자기의 바램이 고정되면,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은 것,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릇
속이 비어서 뭔가를 담게 될 “그릇”은 교리를 표현한다. 이 교리가 진리를 담고 있게 된다. 그런데,
“그물”은 논쟁적인 측면의 교리인 바,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삶의 원리들을 수집한다. 그러나 좋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라는 교리는 내향적인 생각의 영적인 원리,즉 내면에 속한 것들을 담는다.그릇에 담기는
것들은 각자가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하다고 하는 원리,살아 있는 원리들이다.우리는 자신의 그릇이라는
교리 안에 살아 있는 원리를 가지고 채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릇에 담은 원리는 흔하디 흔한 원리라는
수준이 아닌 일상 삶에서 자신에게 절대 필요한 원리 수준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분리
위와 같이 자기 마음속에서 심판이 집행되는 바,좋은 것과 나쁜 것,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분리되어진다.
자기 애정 속에 있는 선한 것들은 자기 생각 속에 있는 진리들과 서로 상응하여 결합을 이루고, 악한 것은
던져 내진다.
넓은 측면에서의 심판에서도 같은 진리들이 응용된다. 악한 인격은 선한 것이 천국에 넘어 갈 때 선한
것에서 분리되고,악한 인격을 위해 적절한 것은 악한 자가 지옥에 넘어갈 때 채워진다.그래서 각 개인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43
자기가 선택해서 확증한 인격을 지니고 살 수 있는 데로 가는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선하든 악하든 어느 쪽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자기 인격의 테스트는 각자가
주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켰는지,또는 자신의 자연적인 바램을 따라 살았는지,이기적으로 살았는지, 또는
신성한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는지,그래서 자신의 이기적인 경향성에 어떻게 저항했으며,자아 부정을
선한 원리를 위해서 얼마나 실제화 했는지에 의해 받게 된다.
세상 끝 날
“세상 끝 날에는 이와 같을 것이다”또는 넓은 측면의 교회로 볼 때, 시대의 끝 날, 처방의 끝 날 에는
이와 같을 것이다.
각 개인으로 본다면,인간이 진보하는 매 단계에서도 이와 같을 것이다.“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낸다”고 본문은 말한다.천사들은 모든 인간 가까이에서 나타나 도움을
준다. 그런데, 천사들의 기운(sphere)은 선한 사람에게는 호감을 느끼게 하지만 악인에게는 강박감을 느끼게
한다.그 이유는 악인은 천사들의 현존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
천사란 지상에 살면서 거듭나서 천국에 간 사람들이다. 추상적 의미에서 각 개인 안에 있는 선과 악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선하고 참된 원리들, 우리가 사랑해서 채용한 영적인 원리들을
말한다. 이런 원리들이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의 품질과 그 성격을 심판해 준다.
이 천사들이 신성한 말씀에서,주님으로부터“나타나,” “선한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것을 떼어
내준다.” 다시 말해, 이 천사들은 악한 세상적 삶과 거듭난 삶 사이에 선을 그어준다는 말이다. 즉 그들은
선한 것은 수용하고 악한 것은 거절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
바꿔 말해서,만일 우리가 악 속에서 자신을 확증했었다면,신성한 말씀 속의 내면의 진리들은 그 진리가
우리 마음을 수색하기 위해 빛을 비추일 때,악한 것이 선한 것에서 떼어 내진다.즉 이 빛은 우리의 인격과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해준다.
만일 어떤 이가 교회의 선하고 참되다고 하는 것에 자기는 상당히 가깝다고 위선적으로 공표한다면,
144 끌어 올려진 그물- 마태복음13장 47-50절
그는 내면의 진리에 있는 기운이나 그 진리의 현존이 훨씬 더 가까운 상태에서 더 심오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어 그가 믿는다고 하는 진리의 바깥쪽 나타남까지도 부서지고 만다. 마치 태양이 빛과 열을 가지고 떠오르면
낮의 새들에게는 활동하도록 깨워 주지만, 동시에 밤에 적응하는 새들에게는 뒷전으로 물러가게 하는 것과
같다.악한 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자기를 위해 간직할 것이고,그가 사랑하지 않는 선과 진리는 거절할
것이다.
예증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어떤 젊은이가 가게에 취직했다고 간주해 보라.그가 “정직함이야말로 인간
본성 중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라고 교육받으며 성장했었다고 가정해 보자.이럴 경우, 바깥쪽 생각의
측면에서 그는 정직한 태도를 가진다.게다가 자기는 정직한 품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앞으로의 자기
삶에 있어서도 정직함은 자기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할는지 모른다.
이런 젊은이일지라도,그는 차츰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킨다.게다가 그가 타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그는 친구들의 습관을 재빠르게 본뜬다.그리고 그는 친구들과 어울림에서 자기가 꽤 잘난
인물로 사랑 받기를 원하고 관대하면서 자유 분방한 인격자로 평가받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과시해
보고자 한다.이를 위해 호주머니가 허락만 한다면 그는 돈도 서슴없이 소비한다.
이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있는 명성이나 쾌락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거세어진다. 이와
더불어 그는 자기에게 돈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제 그의 이기적인 사랑,또는 탐욕 등이 그의
초기 때의 태도인 정직함에 대치하기 위해 은밀히 자라 오른다. 그래서 그와 더블은 정직함은 일종의 감상적
수준일 뿐 삶의 원리로 아직 확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자신의 쾌락,명성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 이것이
자신이 해결해야 할 급선무라고 자꾸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자연적인 인간의 맛을 내는 쪽을 계속 바래고, 자기의 감각적 바램을 운반해 주는 습관들이
쓸만하여 간직해 두면서 인생을 출발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하고 허용 가능한 바깥쪽 생각이나 교리의
체계를 그는 채택한다.
이 교리가 고기잡는 그의 그물이다.이 그물을 가지고,그는 자기 속 기억의 바다로 거침없이 노를
저어 나간다.그 바다 속에는 교회의 가르침,부모의 가르침, 세상에서 배운 각종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 속에 그물을 던져 가득 채운 뒤 그는 해변에 되돌아 와서 그 그물, 정신적인 온갖 고기들로 가득 찬
그물,삶의 온갖 원리로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린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45
그리고 그는 해변에 앉아 잡은 고기들을 분류한다. 그의 의지가 기억에서 끌어 올려진 것들을 판단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다.그는 그물 속에 선함과 정직이라는 생명있는 많은 종류들을 발견하지만,삶에 관한
많은 거짓 사상도 함께 발견한다.아마 이런 거짓 사상은 과거 그에게 가르쳐져 온 것 중 잘못된 관념이라든가,
그의 부모가 그의 기억 속에서 자라도록 방치해서 있어진 잘못된 사상도 있을 것이다. 부모의 경우라 해도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인간은 삶을 꾸려야 하는지에 관해 잘못된 견해도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것을 가지고 그는 가게에서 돈을 빼먹는 방법까지도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수단에 첨가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그의 정신적인 고기잡이 여행의 결과, 그는 자기 앞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날카롭게 대비되는
두 층의 원리를 가져다 놓게 된다.과연 무엇을 자신이 채용해야 하는 걸까?
만일 그가 거듭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면,그는 참되고 선한 원리는 좋은 것으로,거짓되고 악한
것은 나쁜 것으로 여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내향적 마음에 좋은 것을 조심스럽게 추려
담는다.동시에 그는 나쁜 것을 즉각 던져 버릴 것이다.그가 보건대 부정함은 아무리 작은 시작이었다
해도 어떤 선도,어떤 행복도 결코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 결론 지을 것이다.
그러나,만일 그가 자신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로 결정했다면,그의 쾌락에 대한 사랑은 그의 정직함에
대한 사랑을 짓밟고 만다.그러면 교회의 가르침에서,부모의 가르침에서 얻은 정직함이란 실용적인 선함이
못된다는 것에 귀착하고,그것들을 자신의 흥미에 상반되는 것으로 여기고 만다.그러면 그의 애정과 생각
속에서 그는 선을 위해 악을 놓고,악을 위해 선을 놓는다.어리석게도 그는 나쁜 원리들을 자신 속에
체류시키면서 흠모하기까지 하는 바,오히려 선한 것을 던져 버리고 만다.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자기 속의 자아 사랑에 좋게 반응하는 것이 선인 듯, 자기 욕망에 일치되는 것이
선인듯 느낀다.그래서 성서는,“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하는 이들,어둠을 빛이라,빛을 어둠이라 하는
이들,쓴 것을 달다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이들에게 화있을진저...”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더욱 악화되는 쪽에 몰입되고 있다.
그가 주인에게서 뭔가를 훔치려 하는데 유혹되는 것도 위와 같은 경로를 밟는다. 자기 속 감각적 쾌락의
바램을 만족시키겠다고 결정할 때,그는 정직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진리를 거절해 버린다.처음에 그는
주인을 매우 조금만 속일 것이다.그러나 매우 조금이라는 부정직함은 자기 속에서는 탐닉으로 자라 오른다.
그래서 매우 조금이 휫수를 더해 간다면,성실함에 대한 그의 느낌은 더욱 더 무디어 가고 만다.그래서
그는 선과 악,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마저 상실한다.그리고 도둑이라는 인격을 자기 속에 고정시키게
되는 것이다.빠르던 조금 늦던,그의 행동은 폭로되어 전복되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이기적 쾌락 역시
146 끌어 올려진 그물- 마태복음13장 47-50절
끝장을 보고야 만다.
설사, 그의 도둑질이 들키지 않은 때 조차에서도 그는 언젠가 드러나리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매일 괴로움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 확증되는 형태를 수단으로 자신 스스로 심판을 집행해 온
것이다.
역사적 응용과 개인적 응용
역사적으로 보면,본문은 일반적 측면에서의 모든 교회,모든 처방의 끝에 있는 일반적인 심판과 관련되고
있다.그런 다음 고기잡이는 자연적인 것,즉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적인 것, 즉 저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다.그리고 그 해변은 영원한 세계에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보면,모든 영적인 심판은 영계에서 집행되어진다.그 이유는 심판되어지는 것이 인간의
영이기 때문이다.또한 모든 영들이 심판을 위해 완숙되는 곳도 저 세계임에 틀림없다.
개인 측면에서 보면, 각 개인의 심판은 비록 우리가 지상에 있을 때 조차에서도 우리 속 영적 부분
안에 존재한다. 우리들 영이 진보해 가는 매 단계에서 심판이 있어지고 그 심판 후 우리 영은 다음 단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격 속에 뭔가를 고정시키기 전 우리는 영적으로 심판을 준비하던가,심판을 진행하던가 한다.
신성한 진리의 천사들은 언제나 우리 기억 속에 헤엄쳐 다니는 것들을 해변에 끌어 올려 준다. 그리고
천사들은 끌어낸 것들을 분류해 주고 옳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 준다.
교회란 이런 일들을 우리가 해 가는데 알 필요가 있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천국적 삶의 길을 제시해
줌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우리는 언제나 기억의 바다에,신성한 말씀의 글자에 교리라는 그물을 던진다.
그래서 성경 안에 있는 풍부한 지식을 해변에 끌어내기도 한다.끌어낸 것들 중 어떤 것은 선하고 참되지만,
어떤 것은 성경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 왜곡된 것도 있게 된다.따라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좋은 것은 장차 사용하기 위해 그릇에 담고,나쁜 것은 던져야 할 것이다.
처벌
본문은 선포한다.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47
치며 통곡할 것이다.” 불구덩이란 인간 바깥 부분에 있는 어떤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악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 인간 자신의 덩어리인 것이다. “통곡”함이란 악인이 자기의 바램을 다 채울 수 없어
느끼는 번민이나 고통이다. “가슴을 침, 이를 갊”이란 악인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만날 때 있어지는
생각의 마찰이나 충돌이다.
주님이 고의적으로 악인을 벌하시려고 장치한 지옥이란 없다. 주님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
천국을 창조하시려고 애쓰실 뿐이다.그러나 주님께 저항하는 이들,그분의 원리를 뒤집으려 발버둥치는
자들,선을 악으로,진리를 거짓으로 돌리려는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마음과 삶 속에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인간의 심판이란 자기들 인격이 어떻게 충분히 발달 되느냐일 뿐이다.악의 결과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악을 사랑함과 그 응용을 포기해야 한다.
신성한 정의는 또한 신성한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결코 인간 면전에다 과거 악한 행적의 목록을
내동댕이치시지 않으신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의 바깥쪽 행위만에 의해 심판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형성시킨
인격에 의해 심판되는 것이다.인간의 인격이 악에서 선으로 변화 될 때,그는 더 이상 자기 과거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 같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다. “범죄한 그 영혼은 죽을지라...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리라... 그러나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하면...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제키엘 18:20-24). “만일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거
든,계명을 지켜라.” 그 이유는 계명이 삶의 법이기 때문이다. 행복함은 여기서든 저 세계이든, 천국의
말씀이 주는 빛 가운데 신성한 진리의 천사와 더불어 앉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삶이 진보하는
매 단계마다에서 자신의 애정과 생각, 행동 지침들이 움직여 가는 것들의 영적인 품질들을 조심스럽게
검사해 간다.이런 삶 속에서 천사들은 진실로“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아 주고 나쁜 것은 내던져 줄
것이다.”
148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 마태복음13장 51-52절
11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
-영적인 진리와 자연적인 진리를 살아 있게 수용함-
성서 본문: 마태복음 13장 51-52절
5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 듣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질문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비유 시리즈를 다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지금 한 말을 다
알아듣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우리의 내향적인 마음에도 던지고 계신다. 우리가
신성한 비유를 읽게 될 때,비유의 글자 의미 내에 감추어 놓인 영을 합리적으로 쥐고 있을까?이렇게
의문을 가져 보는 이유는 그 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만큼에서만 그 비유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49
그래야 그 비유 속의 의미가 실생활에 적용되고, 생활에의 적용에 의해서만 인간은 진리를 확정
하는 상태에 진입된다.만일 그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던가,설사 진리를 안다 해도 막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진리를 선명하게 가진 것도 아니고 능동적인 진리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그 진리를
확언하거나 사랑하지도 못하게 된다.이럴 경우, 자신의 자동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운전하듯,그의 마음은 의심 가운데 항상 놓여 있을 뿐이다.
영적으로 말한 비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비유 안에 있는 진리를 본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본인의
영과 행동의 양면을 통치하기 위해 실생활의 원리로서 진리를 확정하며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듣게 될 때,주님은 내면의 마음에 작용하시어,“지금 하는 말을 다 알아듣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대답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우리는 대답해야 될까?아마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 같이“예, 주님” 하고
대답할는지 모른다.또 한가지 질문을 더해 보자.“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대답을 만들어야 할 까?” 바깥쪽
생각으로부터 대답한다면,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베드로 같을는지도 모른다.그래서 막상 시련이 오게
될 때 실수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 속에서 주력이 되는 자기를 통치해 주는 사랑(ruling love)을 쉽사리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애정을 가늠해 봄도 없이 바깥쪽 생각으로부터만 주님의 질문에 답할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는 자신의 애정으로부터 답하려고 억지를 써서도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애정은
상황에 따라 다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애정에 의존한다면 자신의 바깥 측면의 애정에서
말하기 쉽다.그러면,“어떻게 주님의 물음에 대답해야 할까?”우리의 일상 생활이 대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7:16). 우리의 삶이 위의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정답이 된다.
그 이유는 삶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애정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읽고,일상 생활의 긴요한 교훈으로 비유의 내향적인 진리를 채용한다면,그리고
그 진리가 자신 속의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행동을 형성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향해 능동적이고
확신적인 상태를 가지게 된다. 수학의 기본 원리가 틀림없다고 아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비유 속의 진리를
150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 마태복음13장 51-52절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행동하게 된다.
안과 밖의 삶이 위와 같은 조건에 있게 될 때,우리의 삶 그 자체가“예, 주님”이라고 말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께 답하지 않는 이상 그외 어느 방법으로 대답해 보려고 노력해야 쓸데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삶은 인간 전체의 요약이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사랑,그분의 진리에 대해 능동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은 필시 그의 행동에서 그 사랑을 보여 줄 것이라는 말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율법 학자(서기관)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즉 신성한 진리를 향해 긍정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그 진리로 교육받아지는 이들은 주님의
살아 있는 형상과 모습이 되어 가고,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글자 속의 영,양면으로부터 자기의 삶을 건설한다는
말이다.
율법 학자들은 학식 있는 계층으로 신성한 법에 관한 임무를 띄고 교회의 법에 대한 선생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베끼기도 했다.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교리들을 가르쳤다.
좋은 의미에서,율법 학자는 진리에 있어서의 총명을 표현한다.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알기”
때문이어서이다.그들은 구약 성서의 율법의 글자를 쓰고 베꼈기 때문에,그 법에 매우 친숙해서 그들의
자연적인 기억 안에 보물로서 저장되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에 따라 살아감으로 해서 자기 심정과
이해성에 율법의 영을 쓰고 있다.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영적인 율법 학자인 셈이요,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인 것이다.
원래,율법 학자의 직분은 좋고 유용한 것이다.그러나 유대인들이 악에 빠졌을 때, 그들은 신성한 법을
뒤집었다.그런 다음“바리사이파인과 율법 학자들”은 “위선자”가 되어 백성을 누르는 악한 권세를 행사했었다.
본문 속에서의 율법 학자는 좋은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다.
교육받는 율법 학자
영적으로 보건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선한 원리와 영적 진리들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51
교육된 사람이다. 그 이유는 천국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천국적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 인간 안에
건설되기 때문이다.인간이 이 진리들을 내면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그는 더 내면적인 삶을 갖게 되어,
자연스럽게 천국은 그 사람 안에서 건설되어 질 수 있게 된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것과 하늘 나라에 관해 교육을 받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합리적인 이해로 교육을 받아 진리를 수용한 상태이고,후자는 교리의 지식으로 교육받아진 상태이다.
교리가 진리로 될 수 있는 때란,당사자 스스로 교리가 진리라고 보게 될 때이다.
사람과 집주인
교육받은 율법 학자는“마치 자기 곳간(보물 창고)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사람, 집주인과
같다. like unto a man, a householder, who bringeth forth, out of his treasures, thing new and old.”
“사람”은 이해성에 있는 진리들을, “집주인”은 의지 속에 있는 선들을 표현한다. 이 둘이 언급되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어 그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의지는 인간의 가장 깊은 거주지요,
개인 소유의 집인 것이다.
가장 깊은 측면에서 볼 때 집주인은 주님 자신이시요,그분의 집 또는 거주지는 거듭나는 인간의 심정이다.
낮은 측면에서 볼 때,집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다.그 이유는 이것들이 주님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율법 학자는 집주인 같다고 말해지고 있다.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살게 될 때,그는
주님을 닮아 간다.그가 주님의 진리를 알게 되고,그 진리에 따라 살 때,그는 주님의 형상이 되어 간다.
보물 (곳간, treasure)
주님이 집주인되시는 바,그분의 보물이란 그분 말씀의 영에 있는 선하고 참된 모든 천국적인 원리들이다.
이 천국적인 보물들은 말씀의 글자로부터,선하고 진정한 원리들로부터 끌어내져,인간의 자연적 행동에
응용된다.
새 것과 낡은 것
152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 마태복음13장 51-52절
끌어내진 보물들이“새 것과 낡은 것”이라고 불리고 있다. “새 것”이란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오는
것,내면에 속한 것,영적인 삶을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즉각 채워져 있다. “낡은
것”이란 말씀의 글자에서 오는 것,외부 행동에 대한 교훈들, 바깥쪽 삶에 속한 것들이다. 이러한 글자적인
것들은 낡은 것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새것과 낡은 것으로서 성경의 글자와 영을 말하기를, “우리는 글자에 속하는 옛것을 섬기지
말고 영에 속하는 새것을 섬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의지는 애정과 더불어 그의 사랑의 곳간이고,그의 이해성은 생각과 더불어 지혜의 곳간이며,
삶은 실제의 선함,거룩함의 곳간인 것이다.이리하여 주님은 그분의 약속, “나는 내 법을 그들 안쪽에
놓아,그것을 그들 심정에 쓰게 하리라”를 성취하신다.
율법의 성취
새 것과 낡은 것,이 두 가지를 곳간에서 꺼낸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구약 성서의 율법은 신약 성서에
의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칼빈 주의자들은 말하기를,“우리는 율법 밑에 있지 않고 은총 밑에 있다.
즉 우리는 율법에 의해 잡혀 있지 않다.고로 우리는 율법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대신 율법을
성취하실 수 없으셨다.오히려 그분은 그것을 그분의 인성 속에서 성취하셨는데,그로 인해 우리로 율법을
성취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율법을 성취해야만 한다.즉 율법에 순종하여
율법을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다.다시 말해 율법을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예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 사이에 선택할 자유를 회복시키심으로 율법을 성취할 기회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두시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에 관한 법을 지켜야만 한다. 아마 과거 유대인이 그것을 지킨 것 이상으로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은 율법을 글자대로의 수준에서 준수했지만, 우리는 글자와 함께 글자 속의
영까지 지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즉 우리는 새 것과 낡은 것,두 가지를 꺼내서 삶 속에 실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은총과 진리”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느님 말씀 속의 영적 의미의 열림이 그 말씀의 글자를 폐기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는 인간의 영적
마음이 열렸을 때, 그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에 있는 진리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해 버려서는
안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53
“만일 너희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계명을 지켜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만일 계명이
의미하는 것에 의심이 있다면,그 문맥 하나 하나에 의문이 정착된다.젊은 청년이 주님에게 계명을 물었을
때,예수께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 속의 계명을 인용하셨다.말씀의 글자에 관계되는 낡은 것은
자연적인 마음에 알맞다.말씀의 영에서 오는 새 것들은 영적인 마음에 채용되어 진다.따라서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인간 삶을 가득 차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영적 본성에 관한 지식이 각자의 바깥쪽 삶의 이해에
열쇠가 되듯 말씀 속의 영은 말씀의 글자를 적절히 설명해 준다. 모든 신성한 법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되
우리로 각자의 수준이나 평면에 걸맞아 순종되도록 주어지고 있고, 이렇게 적용됨으로 그것은 인간다움의
일부가 되어진다.
모든 진리는 실용적이다
이리하여 이 비유는 모든 진리가 실용적이며 우리의 사용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받을 때,우리는 영적 의미와 자연적 의미의 양면에서 받아야 한다.우리는 이 두 의미를 분리해서는
안되는데, 그 이유는 그 둘은 인간의 영혼과 몸이 하나를 이루듯 상응에 의해 하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 스스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글자와 영을 하나 되게 하셨듯이,우리도 말씀을 애정과 생각,그리고
행동에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그 이유는“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6).
우리는 선과 진리를 모든 수준에서,가장 안쪽에서 바깥에 이르기까지,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의 핵심에서
알아차리는 인간의 주변에 이르기까지를 총망라해서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없는 영적 선과 진리는 형체 없는 존재요,가득 채워지지 못한 그릇이요,힘이 없는 영일
뿐이고, 영적인 것 없는 자연적인 선과 진리는 내향적인 영과 생명이 없는 껍데기뿐이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 있는 내면적인 진리가 말씀의 글자에서 잘 맞는 표현을 찾아 인간의 자연적인 궁핍함을
채울 수 있게 하듯, 내면적인 선과 진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그 궁극을 발견하며 체현된다.
이렇게 해서,삶의 모든 평면과 수준에서,우리의 정신적인 진보의 매 단계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서,만일 그 생각이 영과 글자 면에서 하나를 만든다든가,안과 밖이 일치하는지를 보아서
그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만일 눈에 보이는 영적 진리가 자기의 바깥 행동을 위해
상응되는 규칙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154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 마태복음13장 51-52절
개인적인 영향
이러므로 우리는 주위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주는 우리의 영향을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선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이 세상은 영에 속하는 새로운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더욱이 영적인 것들을
명백히 해주며,우리의 영적인 마음에 새 천국을 만들어 주면서,자연적인 마음에 새 땅을 건설하게 하는
새 교회의 인정은 더욱 힘들다.
이 세상은 바깥쪽 삶에 있는 낡은 것들을 사랑한다.이 세상은 인간이 바깥쪽 곳간 속,즉 자연적인
인간에 있는 낡은 것들을 타인에게 줄 때,그 사람을 두고 선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일컫는다.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곳간을 열 때,영적 삶에 있는 새 것을 타인에게 준다면,그는 더 나은 선, 더 높은 종류의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 불멸의 영혼을 먹이는 빵은 일시적인 육체를 먹이는 빵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 두 종류의 빵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두 가지 것을 자신과 타인에게
주어야 지당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다.그 이유는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원리들,그래서 그것 가지고 움직이는
삶으로 자신의 심정에 날마다,깊게 새겨 가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우리 삶 속에서, 그 삶에 의해 우리는
생명의 자기 책을 집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책에 씌어진 것들에 의해 심판되어질
것이다.다시 말해 우리가 언제인가 쓰리라 예상했던 것이 아닌,선한 원리에 대한 감상적 접근이 아닌
일상 생활에 적용된 원리에 의해 심판된다는 말이다. 저 세상에서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 책에 쓰여진 것뿐이다.바깥쪽에 속한 것만을 바라면서 일해 간다면,우리는 지상 곳간에 보물을
쌓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천국 곳간은 가난한 채 남겨진다. 그러나 만일 영적인 사용을 위해 영적 보물을
자연적 용도에 충당해 간다면,영의 하늘에 보물이 쌓이면서,동시에 자연적인 마음인 지상도 채워질 것이다.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낡은 것도 꺼내리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55
12
무자비한 종
-용서 않는 영-
성서 본문: 마태복음 18장 23-35절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읍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156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하실 것이다.”
원리
영적 삶의 법칙은 선용(use)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선, 생각하는 진리는 그것들로부터 오는 행동이 있는
만큼에서, 이렇게 해서 행동 지침에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정도에서 우리의 것이 되어진다. 본문 비유의
요점은 영적 삶의 이런 법칙에 대한 예증이고 이것이 타인을 용서함,자비라는 원리에 응용되고 있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도 용서받아질 것이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이
법칙은 세상의 법규정 같이 임의로된 법이 아닌 인간 삶의 영적 원리에 관한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 네 스스로 자비로움을 보여라”고 주님은 말하셨다. 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비를 보고 고맙게 여기는 이들이라면,자기의 원리로 그 자비를 채택하고,그로부터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만큼 각 개인이 주님의 사랑을 이해했느냐는 것은 서로의 사이에서 주님의
사랑과 얼마나 유사한 사랑을 행사했느냐에 의해 측량된다. 그 반면, 하느님의 사랑의 속성에 감사를 느끼지
않는 이들은 그들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유사하게 살아 보려는 어떤 노력도 만들지 않는다.
베드로의 질문
베드로가 묻기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해 주시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렇게 물을 때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아마“만일 누가 하루에 일곱 번씩 잘못을 저지르고,그 때마다
되돌아와 말하기를,회개하노라 한다면,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할 것이다”라고 추측했을는지 모른다.
유대 원로들의 전통에서,피해를 가하는 어떤 사람을 세 번만 용서하면 충분했다.따라서 베드로도
그의 자연적 마음속에는 이와 공통된 생각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즉 잘못된 행위는 반복될 때마다 그를
더 범죄자로 만들고,결국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이와 같은 원리를 많은
나라의 법에서 채택하고 있는게 현 실정이다.
주님의 응답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57
주님의 응답은 베드로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이는 490번이라는 말이고 이 숫자의
크기로 보아서,주님의 말씀은 타인을 무한정으로 용서하라는 것,용서할 때 몇 번 용서했는지 아예 세지
말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몇 번인지를 계산한다는 것 속의 생각에는 잘못한 자가 어느 한계점을
넘어서서 처벌을 가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분노를 꼭 붙잡고 있겠다는 자연적인 바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그리고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타인이 잘못한 횟수에 의존하지 말고,본인 자신의 마음 상태에 의존하라는 것,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비록 잘못을 저지른 사람 속에도 선은 남아 있고,그 선 만큼은 사랑되어야 하기에 용서를 사랑하는
것을 자신 속에서 증진시키라는 것이다.
그 다음,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었는가를 계산하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악임을 보고,그 악은 반드시 거듭나는 가운데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일곱
본문의“일곱”은 거룩한 것을 명시해 주는 표현적 숫자이다. 그리고“일곱 번씩 일흔 번”이란,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갖는 가운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해라.” 이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이타적 사랑에 근접되도록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왕
“하늘 나라”는 거듭 나아가서 천국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마음과 그에 따른 삶 속에 존재한다. 그
나라의 왕이란 신성한 진리로의 모든 천국과 모든 거듭나는 마음속에서 천국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말한다.
종
158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종들과 셈을 밝히려 했을 때의 종들이란 인류이다. 주님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기쁘게 순종했을 때의 인간들은 주님의 진정한 종들이었다.인간들과 셈을 하심,인간들과의 계산을 조정하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삶의 질을 테스트하시어, 어떤 원리가 그들을 격려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이런 작업을 주님께서는 내향적 측면에서,각 사람 마음에 뿌려진 진리를 수단으로 계속하신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힌 때란 자기에게 가르쳐진 진리가 자신의 마음과 삶을 반성하게 하거나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때를 말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위의 반성을 행한다. 그 반면“분별없는” 사람은 계산이 어떻게 되어 자기에게 닥칠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되새겨 보는 가운데서 셈을 밝히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 이유는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 속에 든 것이 도로 튀기도록 진행시켜 주시고
그에 따라 있어지는 영향을 감지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달란트
달란트의 정확한 값어치는 확실치는 않는데,그 이유는 달란트를 은이나 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게다가 시대에 따라 그 값어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일만 달란트라면 아마 수백만
달러에 견줄 수 있는 굉장한 액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빚지고 있는 액수가 굉장하고 무한정 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글자대로 볼 때,그들 관계는 어느 성을 통치하는 왕이 어떤 이에게 내려
준 지위에 대한 대가로 공물을 상납하는 관계에서 빚을 진 종과 왕과의 관계일 것으로 보인다.
주님에게 갚을 부채
거듭나는 사람 모두는 자기가 주님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의
부채액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본다. 물론, 인간은 출생 때부터 주님에게 수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다만
인간이 이 사항을 거듭나는 삶이 있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제 자기가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안 이상, 그가 실감하는 사실은 자기의 모든 생애를 걸쳐 주님께 빚을 갚아 간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자신과 세상을 위한 것일 뿐 주님과 타인을 위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59
것이 없다는 것까지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보는 또 하나는,지금부터 빚을 줄이는데 전력을 쏟는다 해도,주님께 전액을 갚을 수
없다는 것,한마디로“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보신 바, 그는 그의 영적 채무를 스스로는
지불할 수 없다는 것,그는 자신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팔려져야 함
그러나, “왕은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라고 명령하였다.” 즉, 반성하는
사람(reflecting man)의 경우, 그가 주님께 빚진 상태를 벗는데 있어서 현 상태의 삶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보게 되고, 오히려 자기는 이기적 삶으로 인해 지옥을 향해 아래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의식하는 것은,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택에 감사하고,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자기는 자신의 악으로 인해 영영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팔아 치워야 할 것은 우리로 퇴보되게 하는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다. 거짓 사상 속에
붙잡힌 이해성,악한 애정 속에 파묻힌 의지,죄 가운데서 헤매는 삶, 게다가 자아와 악에 속한 거룩하지
않은 삶을 위해 사용된 정신적,육체적인 모든 소유물들이다.이에 대한 예증으로 아합에게 내려진 구절을
찾아보자. “너는 목숨을 내던져 가며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려고 한다” (열왕기상 21:21). 이런
상태 속에 있는 인간은 영적으로 붙잡을 수 있었던 값비싼 모든 것,즉 선함과 진정함,그에 따른 선용의
삶을 다 잃고 마는 것이다.
처자와 가진 모든 것
“남자”는 이해성을, 그의“아내”는 의지를 표현하고, 그의“자녀”는 그의 의지와 이해성이 하나를 이룸에서
태어난 애정과 생각들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이란 그의 자연적 마음과 삶에 속하는 외적인 모든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고,자아에 헌신될 때 악에 속박되고,노예화되어 마치
악에 팔리는 상태에 진입된다.
자신을 잘 숙고하는 사람은 자신 속의 자연적 성향에 있는 아래쪽만으로 향하려는 경향성을 인식한다.
160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보는 중에,그에게 경보종이 울려지고,자비를 간청하며, 자기가 빚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채무를 언제나 갚을 의도가 있고,갚기 위해 헌신해 보겠노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의도와 바램을 표현한다는 말이다.이렇게 해서 자기 인격을 주님 쪽으로,그분의
자비 쪽으로 바꾸겠노라는 결심을 표현한다.
열심을 다해 빚진 것을 갚겠노라는 그의 의도란 고된 것처럼만 보이는 진리라는 완고한 법칙에 의거
심판되어지기보다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통치되고 싶은 그의 바램을 표현하는 것이다.
간청 (애걸, petition)
위의 사항들이 26절의 “조금만 참아 주십시요.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로 의미되고 있다. 이 사람이
본 것은,법대로 하면 자기는 단죄된다는 것,신성한 사랑과 자비가 아니고서는 자기를 도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자기가 과거에 주님께 빚진 것 모두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기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기회만 있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제치고라도 빚을 갚겠다는 각오 뿐이다.
즉,살아야 하는 법칙을 살아 내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이다.그는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타인을 향해서도
그 자비를 느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겠다는 것이다.한마디로 그는 사랑과 자비로부터 행동하지,사랑이
분리된 완고한 진리만으로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더욱이 그는 처음에 주님이 그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이 하기보다, 자기에게 빚진 타인을 다룰 때 덜 엄격하게 계산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응답
그리고 주님은 인간의 처지를 인식하시고 그를 돕는다. 인간이 주님을 보되 그분은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시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왕이심을 보게 될 때,자기는 주님께 빚진 자임을 보고 인정하는 데로 인도되어지고,
그 다음,자기 채무를 최선을 다해 갚겠다고 결심할 때,그리고 자기의 부채가 얼마인지 인정하게 될 때,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노라는 결단이 내려질 때, 그에게는 주님의 속성 중 새로운 측면인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밝히 알게 된다. 즉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인간이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차리면 겸허가 생산되면서 성격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 변화야말로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정한 속성을 더 명료하게 지각하도록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61
열리게 해준다.그 이유가 주님께서는 언제나“인간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글자는
표현적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교리에 있는 영적 진리들을 말해 주지는 않고, 다만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적응되는 바깥쪽에 속한 표현적 그림만을 제공해 주고 있다.
빚을 갚음
자기가 빚진 것을 갚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자기 속의 이기적인 사랑이 자기를 지배
못하게 하는 것,자신을 부정하는 것,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리고 그의 모든 노력을 떠받치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의 심정 속에서 스스로 무한히 자비로우신 신성한 사랑과 결합을 이룬다. 그러면
그에게는 영적 자유가 주어진다. 즉 주님은 악에 노예가 되어 타락된 상태에서 그를 해방되게 해주신다는
말이다.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채무를 탕감해 준다.그 이유는 그가 주님을 인정하여 그의 생명을 주님께
기꺼이 내준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술은 인간의 영인 내향적 마음에서도 계속 되어진다.그러나 반성한 사람이라 해도,그는
용서라는 원리로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원리를 자신의 행동에서
수행한 것도 아니고,더욱이 그 행동 결과에서 그 원리를 확증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만일 그가 자신의
심정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좌지우지하시도록 마음 문을 열었다고 한다면,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그를 움직이도록 허용하고 그의 행동도 규율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그에게 참을성
있게,그리고 자비로 대하셨듯이 그도 타인에게 그렇게 대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그가 이렇게 행동할
때,천국은 그에게 흘러들고 그를 통해 타인에게도 흘러든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성한 자비는
그에게 복을 내릴 수 없다.그 이유는 그가 행동한 모든 것이 자신만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신성한
자비를 이기적으로,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 한 순간,그의 심정으로 유입되던 신성한 자비는 멈추고
만다.그 이유는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의 성질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자비가 축복을 내릴 수 있는 때란 당사자를 통해 타인에게 흘러갈 때뿐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자비의 특유한 성질은 선을 타인에게 주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성한 자비를 사용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거절할 때,그는 그 자비의 특유한 성질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162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감옥
이리하여 인간이 신성한 자비의 특유한 영으로 자신을 채우기를 사양하고,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비롭게 되기를 거절할 경우,그는 자신 속에로 신성한 자비의 유입을 멈추게 한다.그리고 이 자비의
축복이 없는 채 내동댕이쳐지어 감옥으로 떠밀려지고 만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이기심이 제작하는 지옥에로
되돌아가 자리잡게 한다는 말이다.이러면,“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난다.”
이 종이 왕의 면전에서“나갔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그가 그의 영 안에 있는 내면의 원리와 교통하는
관계에서 나갔다는 것,그의 자연적 마음과 삶인 외적인 것들에로 나갔다는 것을 말한다.그가 내면의
상태 안에 있었을 경우,그는 신성한 자비를 볼 수 있었고,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밖으로”나갔다.즉 그는 지금 외적인 마음과 그에 의거한 삶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인간이 영적 원리들을 볼 때만이 선한 해결책을 만들 수 있다.그러나 바깥 삶,즉 일상 업무인 밖으로
나가서도 선한 해결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거듭난 인간뿐이다.
동료 - 종
영의 “동료”란 자연적인 인간 또는 자연적인 마음이다. 영은 주님을 섬기고,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자연적 인간은 영을 섬긴다.이러므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은 동료라는 종들로 주님을 섬긴다.자연적인
마음은 영과 주님에 빚을 지고 있다.그 부채액이 백 데나리온이고 그 액수가 그 마음이 할 수 있는 모두이다.
이 부채는 일만 달란트나 빚진 영의 부채에 비해 아주 적은 액수이다. 즉 자연적인 마음은 영이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아주 조금밖에 할 수 없고,일하는 수준 역시 매우 낮은 평면일 뿐이다.자연적 삶 속에
있는 자비들이란 비록 그것 역시 빚을 진 관계에 있다 해도 그 액수는 양과 질의 양 측면에서 영적 삶
속의 자비에 비하면 극히 적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두 종의 부채 액수는 우리 삶의 두 부분의 가치는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도록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종의 요구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63
그러나 불성실한 자연적 인간은 위의 사실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내면의 진리인 왕의 면전에서
밖으로 나가,자기에게 빚진 동료 종을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내 빚을 갚아라”라고 호통을 쳤다.
바깥쪽 마음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연적 마음과 삶은 자기가 바래는 쾌락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이다.이 자연적 삶 역시 주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목이란 내면의 것 또는 영을 표현하는 머리와 외면의 것 또는 자연적 마음을 표현하는 몸을 연결하고
있다.뇌로부터 오는 생명이 목을 통하여 몸 속으로 흐른다.이렇게 흐르는 생명을 멈추게 하거나 질식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죽게 만든다.
이와 같은 작용을 마음속에서 보면, 영적인 마음이 자연적인 마음 안으로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하거나
질식하게 하는 모습이 된다. 그래서 자기의 자연적 마음을 영적으로 질식하게 하는 사람은 영으로 흐르는
주님의 생명을 멈추게 한다. “내 빚을 갚아라”라는 요구는 자아 사랑의 기쁨 속에 몰입하겠다는 요구이며,
동시에 인간 속의 악한 식욕을 돋구기 위해 자연적 마음으로 음식물을 운반하겠다는 요구인 것이다.
동료 종의 응답
“그 동료는 땅에 엎드려‘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자연적인 마음은 영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인정한다.그 의무는 영의 명령에 의해 계명으로 사는 것임을 알고 있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감각적 삶을 받들게 만들고,따라서 주님에게서 분리되고,그분의 명령에
반대되게 놓는다면,우리는 자연적 마음을 지옥인 악의 속박,즉 감옥에 던져 넣고야 만다. 본문에서, 종이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절했을 때 결과된 모습이다.
다른 동료 종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곧바른 동료
종이란 자연적인 기억,또는 양심 안에 있는 진리들이다.이 진리들은 말씀으로부터 받았던 진리들이다.
이 진리들은 매우 서운해하고,양심의 가책이 있게 하며,인간의 삶과 주님의 계명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 진리들이 우리에 대해 주님께 일러바친다. 그러면 왕은 그 종을 무자비한 종이라 부르면서 견책하는
164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것이다.즉 주님은 양심을 수단으로 해서 인간에게 그의 현 상태가 악의 하나요,은택을 느낄 줄 모르는
짓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형리 (tormentor)
“왕은 몹시 노하여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주님에게서 얼굴을 비끼어 삶 속에
있는 주님의 자비를 보는 것을 중단한 사람은 자기가 받는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를 벌하시려고 창출해
냈다고 상상한다.따라서 이 사람이 다시 주님의 진정한 인격을 볼 수 있기 전,그는 악에 기운 자신에
대항하는 시험의 전투가 수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럼으로 우리가 내향적으로는 주님의 자비를 알고 있는 반면,외향적인 경우,즉 자기 동료에게는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무자비한데 아직 기울어 있다면, 그는 자기 채무를 다 갚을 때까지 시험에 복종
당해 있게 된다.즉 그가 영적 삶의 법칙에 순종하는 결실이 있을 때까지,그가 자아 사랑을 포기할 때까지,
신성한 뜻을 수락할 때까지, 한마디로 거듭나는 영적 마음을 통해 보여주는 것들이 생산될 때까지 시험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만 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 자연적 마음과 삶을 질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이렇게 될 때,주님은 그의
영적 마음을 질서 안에 간직해 주실 것이다.그 이유는 자연적 삶이 기초이고,그 기초 위에 주님은 영적
삶을 건설해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바깥 삶에서 실제로 쓰일 모든 영적 원리를 가지고 우리
속을 채워 주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마태복음 6:12).
용서할 줄 아는 영이 발휘될 때면 언제든지,우리는 타인을 단죄하기 보다 자신을 더 단죄하게 된다.
다시 말해,우리가 타인 속의 악에 관해 불평하는 동안,우리는 그보다 더한 악 속에 자신을 있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악들을 볼 기회를 가지고 타인 속의 악을 볼 경우, 자신 속의 것을 볼 기회를 잃어 결국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자비
우리는 자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자비란 타인의 악을 못본척 놔두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65
것도 아니고, 그 악이 그들의 영적 생명을 다 불사를 때까지 점검해 주지도 않은 채 외적으로는 친절한
가운데 그 악을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순수한 자비는 영적이다.이 자비는 인간을
그의 자연적인 지옥에서 훈련시킴으로 해서 천국을 위한 인간이 되게 한다.
자비는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타인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까지 관계된다.자신이 비판되어지기를
바래는 정도 이상을 가지고 타인을 비판하려 든다면 우리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향해 어떤 종류의 불친절한 느낌과 생각을 흠모하게 될 때 우리는 무자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악들이라는 감옥을 나올 수 있기 전,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으로부터 타인을
느껴보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상대방의 인격이 어떠하든 자신의 사랑을 견지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 속에 있는 선 때문에 그들이 악에서 나오도록 인도하기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악 속에서 걷는 이상 우리는 누군가를 악에서 건져내 줄 수는 없다.
주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용서하신다.용서 안하는 느낌 자체가 아예 없으시다.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향해 주님과 비슷한 용서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용서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악을 이동시킴
우리의 죄가 주님에 의해 용서되어 질 때, 그 죄는 씻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의 경계선 밖으로
옮기어 지는 것일 뿐이다.즉 우리가 주님과 협동하는 동안 그 죄들은 보류되고,주님의 권능에 의해 그것들이
억눌려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말이다.따라서 만일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중단하거나 악에로 다시 몰입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악이 자신을 위해 만드는 감옥인 악의 권능 밑에 푹 빠지게 되고 만다.
천사들까지도 악에서 헤어나 있으려면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의존한다. 천사들은 이 사항을 알고 있어
그들은 주님이 자기들을 인도해 주기만을 바래고,자기들을 악에서 떼어져 있도록 하려고 주님을 붙잡는다.
그러나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그들은 자기들을 악에서 주님이 인도해 내시기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주님의 도움이 없는 경우 자기들은 비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자기가 행복해지려
면 자기들이 즐기는 것을 주님이 허용할 때 뿐이라 생각한다.이러므로 천사들이 보는 것은 신성한 자비이지만,
악마는 그 자비가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자비를 베풀어 네 스스로 자비를 보여라.”
166 무자비한 종 - 마태복음 18장 23-25절
용서 안하는 영
용서 안하는 영은 유대인에게 있어진 처방에 끝장을 내게 한 저명한 악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타인을
용서하는 원리는 아주 중요하다.이렇게 중요함으로 주님의 기도문에 등장하고 있고,주기도문 바로 뒤
구절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이리하여 용서하는 원리는 기독인의 기도하는 영에
실지로 축적되어 있도록 섭리되어져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타인에게 잘 사용하지도 않은 자비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 우리가 자신을
위해 주님께 간구한 대로 타인에게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타인을 단죄하는데 사용한 똑같은 진리로 자신을
단죄 받게 한다. 인간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자기 주위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네 형제 중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
이 비유는 하느님의 용서의 법칙을 예증해 주고 있다.그리고 구 교리인,“대속”이나 “믿음만으로 의로워짐”
이 거짓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이런 옛 사상에 의하면,빚은 누군가에 의해 지불되어 졌음에
틀림없다.그 이유는 의가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비유에서, 이 빚은 지불된 것은 아니고
용서되어졌을 따름이다.임의적인 의는 만족되어지지 않았다.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죄는 임의적인
자비에 의해 닦아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역사하시되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작용되는 바,그 원칙은“죄 있는 영혼은 정녕 죽게 되리니, 그 이유는 죄는 죽음이기 때문이다”에 있다.
비유에서,비록 채무가 용서되긴 했지만,그 뒤에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종을 주님이 감옥에 넣은 것이 아니고,그가 자신의 악들로 되돌아감으로서 해서 그의 죄가
그를 감옥에 넣은 것이다.주님이 벌하시는 것 같이 보는 것은 우리 속의 자연적인 인간 평면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평면에서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벌이 자신의 악의 필수적인 결과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죄에 대해 보상(atonement)해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죄에 빠지게 하는 기질을 포기하여,죄로 실제화 하려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내심으로 악을 미워하며 그 미워함이 마음 밖에서 성장하면서 동시에 선을 사랑하여 행할 때, 주님의 사랑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67
우리 삶 안에 들어 올 수 있다.교도소의 문을 열어 둔다면,그것이 범죄자들로 더 나은 사람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그것이 진실로 더 나은 삶을 전과자들에게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아마 그들을 더 심한
악에 빠지도록 허용하여 더 비참한 악의 결과만을 창출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는 신성한 사랑 같이 꾸준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용서가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기질을
거둬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속의 악한 자연적 조건을 보고 인정하면서 그것과의 싸움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주님의 권능은 인간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어 우리를 떠 받쳐 주게 된다.그 이유는
우리가 의지와 이해성,삶을 신성한 영향력 밑에 있도록 열었기 때문이다.이럴 때만이 주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류시켜 주실 수 있어서, “나의 죄악에서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시다.
인간은 주님의 권능이 자기를 도울 수 있게 할 수 있으나,오로지 그가 그 권능에 기꺼이 협동할 때뿐이다.
신성한 자비가 죄인을 향해 베풀어 질 때, 주님의 처방에 어떤 변화가 있어 베풀어지는게 아니라 죄인
자신의 기질에 변화가 있어 자비를 입는 것이다.죄인이 사랑이신 주님을 찾을 때,신성한 자비는 죄인을
위해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이는 주님이 일하시도록 허용하기 전이 아닌 주님이 하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
왔을 때에야 가능하다.
하느님의 용서는 과거에 속한 것에 존재하지도 않고,단지 미래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닌,현재에 존재한다.
우리가 악과 죄로부터 보류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순간 순간마다 와지는 생명에 의해 매 순간 매
순간 지탱되어지는 것이다.영적 삶의 법칙은 선용(use)에 존재한다. 우리가 사용한 것들은 우리 것이 된다.
주님의 계명을 게으르게 사용하면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잃는다.
168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13
포도원의 일꾼들
-거듭남의 질서-
성서 본문 : 마태복음 20장 1-16절
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4.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5.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하고 대답하였다.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69
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거듭남은 점진적이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성장이다.따라서 최근의 거듭나는 삶이 최상의 것에 속한다.시작 때 있게 되는
개혁(reformation)은 비교적으로 볼 때 좀더 조잡하고 피상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좀
더 안쪽으로, 위쪽으로, 앞쪽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한 단계씩, 조금씩 더 가까이 천국 안으로 들어오게
해주신다.하늘 나라란 마음과 삶에 있는 조건적인 나라이다.“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옛 사상
오늘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과거 이 비유의 목을 오랫동안 조이고 있었던 잘못의 구름이 깨끗이 걷혀지리라
생각한다. 오늘 비유는 임종시 있게 되는 회개에 대한 논쟁을 위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임종할 때의 회개라는 주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구신학이 오랫동안 가르쳐 온 바는,“믿음만”에
의해 된다는 것, 이와 같이 믿음만 있으면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임종시에도 의는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신학을 오늘 비유가 뒷받침하게 해주려면,비유를 비비꼬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는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이 부르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 가운데 살아 온 사람에게 임종의 회개가
있었을 경우이다.이 사람에 해당되는 비유 속의 일꾼이라면 일이 시작되어 열 한 시간(구번역 성경 -
십일시,공동 번역 성경-오후 다섯 시)이 지난 뒤 일하게 된 일꾼이지만, 사실 이 일꾼은 주님께 반역적이었다거
나,아주 보기 흉한 게으름뱅이로서 비유에 등장되고 있지 않다.그들도 역시 어떤 이가 자기들에게 일을
하게 해줄까 하고 알려진 장소인 장터에서 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즉“왜 당신들은 하루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그들 대답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이었다.
고용되지 않았던 것이 그들의 과오가 될 수 있을까? 사실 그들도 호의를 가지고 일을 찾던 사람이었으므로
170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임종시 회개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
비유적으로 이 일꾼들은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분을 찾지 못했던 이들을 표현했다. 그들은 유대인들
에게 오랫동안 이방인이라고 불린 자들인데,이들은 호의적이긴 했으나,그들이 주님에 관해 배웠을 때
주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무지했던 이들이었다.
열 한 시간
임종시의 회개에 관한 옛 사상은 열 두 시간을 놓고 생각하면 열 한 시간과 매우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사실 열 한 시간 지난 뒤에 온 마지막 일꾼이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렸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들도 열심히 일했다.단지 한 시간만 일할 수밖에 없었을 따름이다. 죽어 가는 사람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막판에 와 있는 상태이므로 그는 열 두 시간이 거의 다 차서 일에 착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죽어 가는 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는데 놀라면서 종교를 추구했을는지
모른다. 아마 자기는 세상적 쾌락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하여 포기가 강행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 일꾼들은 자기들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때에 일을 하러 갔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뭔가 할 기회를 가졌던 모든 일을 했다.거듭남에서도 이와 같이,우리는 개혁과 회개의 일을 해야만 한다.
회개만으로는 충분치 않다.회개와 더불어 삶의 수정이 꼭 필요한 것이다.
만일 비유 속에서 열 한 시간 지난 뒤에 온 일꾼들이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사람들을 표현한다면,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인생 기간 중 오랫동안 기독인이었던 사람들을 표현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님이 일찍 기독교인이 된 자들을 늦게 기독교인이 된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한다고 불평한 이들,주님에 반항하는 가장 비기독교적인 불평자로 해석되고 만다.이렇게 생각된다면,
이 해석의 결과는 종교에 오래 헌신해서 가지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논쟁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만을
얻어야 할 것이다.또한 주님의 선하심에 불평을 해대는 것이 우리 속의 이기적인 경향성이요,이 경향성은
삶이 만숙되기 훨씬 이전에 미리 미리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들임을 눈치채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면,본문은 임종의 회개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더욱이 성경에서는
임종의 회개에 관한 어떤 교리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죄 있는 영혼은 정녕 죽으리라.” 그 이유가 죄는
죽음이기 때문이다.영적인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뿐이다.그리고 죽음은
죄 속에 존재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71
비유의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나,
피상적인 지식이었을 뿐이었다.이방인들은 말씀에 관해 무식했었지만,호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는데 비해,유대인들은 주님을 거절했고 말씀의 경우도 말씀 속의 영은 거절하면서,
말씀의 글자만에 치중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개개인에게 대한 교훈과 그에 따라 사용하도록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를 최고의
측면에서 말하면,성경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 원리들을 말해 주고 있다.성경은 모든
인간의 마음이 알아야 될 원리,그리하여 사랑되어지고 실제 사용되어야 할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경책이 각 장으로 나뉠 때 있어진 임의적인 분할로 문맥상 이 비유가 연결을 이루는데 독자들로
혼동을 주고 있다.자기의 재물을 포기 못하는 부자 청년과 베드로의 질문인,“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읍니다.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읍니까?” 라고 기록된 19장 후반과 더불어
오늘 비유는 읽어야 할 줄로 본다. 그 이유는 오늘 비유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자기의 공적을 내세운 것에
대해서도 견책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집주인 (housekeeper)
“집주인”또는“포도원 주인”이란 주님 또는 우리 마음의 집 안쪽을 관리하시는 신성한 인간이시다.
인간의 안쪽 “집, house, home” 이란 의지(will)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실지로 살고 거주하는 것은 자기
의지에서 있어지기 때문이다.의지는 인간 삶의 중심 되는 곳이다.이 의지가 자유로이 표현되는 정도만큼에서
그의 생각과 행동 역시 진실로 그 사람 것이 된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 중, “집,” “포도원,” 그리고 “장터”가 있는데 이것은 각기 의지, 이해성,
기억을 표현하고 있다.주님은 의지 속에서 인간을 내향적으로 인도하시며,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을 수단으로
이해성 속에서 가르치신다.
넓은 측면에서 생각할 때 포도원은 교회이고,이 교회에 진리가 이식되고 그 안에서 인간에게 가르쳐지면서,
진리에 대한 그의 합리적인 이해를 통해 전환을 이루게 된다.그러나 이를 개개인의 측면에서 보면,교회는
172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신성한 진리의 지식을 수단으로 그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심기어진다.
일꾼의 고용
집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나갔다.거듭남은 주님으로부터,또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중간 매체물을 통해 외부로 평화롭게 흐르지만은 않는다.즉 천국이 인간 의지 안으로 단순히 흘러들고,
그의 이해성을 통해 삶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거듭남에 따라 생명을
받는 질서이지 인간이 의식적으로 거듭 나아지는 질서는 아니다.
거듭남에서 주님의 영향력은 인간의 내면인 그의 의지 안으로 흐르나,먼저 그의 외면에서,즉 행동에서
거듭남의 결과가 보여진다. 그런 다음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규칙이 하느님의 법임을 느끼면서 그 법에
순종하게 될 때,인간은 하느님의 법의 근거를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영향력은 인간의 외면에서 중간 매체인 이해성을 통과하여 그의 의지 안으로
되돌아온다. 그 다음 의지 안에 있는 선을 사랑함이 행동에 있는 선의 실제와 연합을 이룬다. 이 연합은
진리를 수단으로 하는데,그 진리는 처음에 기억 안에 놓여졌다가,후에 이해성 안으로 들어 올려진 다음
의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이러므로 이해성은 마음속의 포도원이고,거기서 인간은 자기
삶에 응용될 진리인 열매를 생산하고자 노동을 하는 것이다.
시작 (beginning)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그들이 의식하는 삶 안의 첫 자질은 애정을 가진 의지이다.그 다음, 기억이
열려 사실(fact)들이 그 안에 저장되어진다. 의지와 기억은 이해성이 어떤 실재적 형체를 나타내기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인다.그래서 어린이들은 자기들의 의지를 한껏 발휘하려 들고,알기를 사랑하면서,
기억 속에 지식을 쌓아 간다. 이후, 이해성이 이 지식을 작동해 가기 시작한다.
합리적 자질이 열리어 지는 때, 즉 젊은이들(youth)은 자기 기억 속에 저장해 둔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바, 합리적 자질들이 그의 일꾼이 되어 그의 이해성을 건설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나는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성장 속에서 새로운 출생은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새
출생 속의 의지가 기억 속에 든 지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이해를 통하여 인간은 진리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73
사랑함과 하나를 이루도록 인도되고,진리의 이해는 진리에 순종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꾼들
이렇게 해서 기억 속에 담기게 된 것들,즉 지식들은 의지로 작동되는 것,즉 이해성이라는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집주인이 집에서 나와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을 할 일꾼을 고용했다.
이 집이란 각 사람의 의지이다.또한 그 집주인은 최고의 측면에서 보면 주님이시다.그분이 인간 속에
내재하는 생명이신 바,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소유자(Holder)이시다.
그런고로 집주인은 바깥으로 나가시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시는데, 고용할 때란 신성한
영향력이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기억 안으로 흘러들 때이다. 그러면 기억 속에 든 진리에 관한 지식이
일어나 이해성에서 일하기 위해 파견되고, 그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원리를 합리적으로 터득하게
해준다.
이해성이 인간의 포도원이다.이 포도원이 인간의 포도원이라 해도,지극히 높은 견지에서 볼 때, 이것은
주님의 포도원이다.그 이유는 주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이시고,거듭남의 모든 성장을 시작하게 해주시고
운영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진리에 관한 지식이란 기억 안에 있는 사실(fact)들과 사상들이다. 의지가 의지의 방향에 따라 사랑과
생각,그리고 행동이라는 삶 속에서 이 지식들을 써야겠다고 할 때,이런 지식들은 기억 속에서 기다리면서
포도원에로 불릴 준비가 완료되어 있기만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식들은 의지가 부르기 전에는 어떤
것도 그들 스스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점들
그러나 기억 안에 있는 지식들간에는 서로간에 차이점이 많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 마음의 발달에서
각기 다른 때와 단계에서 기억 속에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기억 속에서 불려 이해성
안에서 실제의 일에 참여할 경우, 그 시기는 기억 속에 이식되던 거듭남의 단계와는 다른 진보 단계에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비유의 열쇠를 가지게 된다.본문의 일꾼들이란 기억 속에 든 지식들인데,이 지식들은
174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거듭남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질서에 따라서 합리적 사고인 정신적인 포도원에로
점진적으로 불리고 있다.
고용
각기 다른 일꾼을 고용할 때마다,인간은 보다 더 충만해지는 삶을 달성한다.지식은 거듭남 속에서
일하기 위해 기억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이해성에 고용되어,결국 애정과 하나를 이루는데,이것이 고용에
따른 보수이다. “일꾼은 제 나름대로 고용될 만한 가치가 있다.” 선함과 진리에 대한 지불은 그것들 자체
내에 존재한다. 우리는 자기가 지닌 선에 변제를 해야 하는게 아니라 은행에 돈을 입금시키듯 선을 비축하는
것이다. “미덕에 대한 보상은 미덕 그 자체이다.”
집주인은 품삯으로서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일꾼들과 합의를 보았다. 주님은 그분의 섭리로 거듭나는
시초에 있는 사람에게 거듭나는 삶에 대한 보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은 공적이나 보수를 바래는 생각을 떨구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데나리온 (penny, denarius)
은 한 데나리온은 로마 군인의 하루 일삯이었는데,그 당시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기도 했다.은(silver)이
란 영적 진리를 표현해 준다. 그래서 거듭 나아가는 일을 위해 진리에 관한 지식을 고용하는데 따른 보상은
그 진리를 보다 더 명료하고 높게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보수를 받는 것은 지식을 사용함으로부터
초래되고, 받은 보수로 있어지는 기쁨(delight)은 거듭나는 성장 가운데서 마음에 의해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적 마음은 그 영향력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내 자연적 마음까지 이르러 자연적 마음을 보다
높은 삶의 기운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상태 또는 진보 단계가 마무리될 쯤에서,의지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또는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로부터 나가셔서 전보다 더 규모의 큰 활동을 하기 위해 기억에 있는 지식을 일으키신다. 그러면 이
지식들은 이해성에로 들려져 다시 합리적인 진리들이 되어 간다.
이런 다음 더 따뜻한 상태가 마음을 날마다 들어올리는 것이다. 이러면 거듭나는 삶 속에 있는 기쁨으로
매일 더 강건해지고 더 확실한 삶의 방향과 인도를 받게 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75
거듭나는 중에 제일 먼저 우리 자신을 만들어 주는 원리는 가장 외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것들이다.
이것들은 최고로 덜 순수하고 덜 완전한 것에 상당한다. 그래서 그 원리들 속에는 많은 부분에 자아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처음에 있는 거듭남의 삶은 사실 자아로 인해 거의 전부가 얼룩져 있기도
한다.다시 말해 이 때의 인간은 자기가 칭찬 받는 것에 상당히 즐거움을 느끼고,때로 주위의 비평에
실망이라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노동 시간 (the hours)
본문에서 각각의 일꾼들은 각각의 시간에 고용되었는데, 그 시간대란 거듭나는데 있어지는 각각의 단계를
표현하고, 일꾼들이란 각기 다른 지식들이 이해성 속에서 실지 작업을 위해 기억에서 뽑혀 오는 질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 유대인의 노동 시간은 해 뜨는 시간에서 해 지는 시간까지였는데 본문을 살펴보면
대략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12시간이다.. 따라서 노동 시간은 해뜨는 시각이고 12시간째의 노동시간은
해지는 시각이다.
3, 6, 9, 12시간들이란 3이 배가된 숫자들이다. 그렇게 배가된 이유는 비유에서 취급되는 주제가 진리에
관해서이기 때문이다. 3이란 진리가 충만함, 진리 측면의 진보에서 어떤 시기가 충만해짐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아껴두실 것들 (remains)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우리는 거듭남의 질서를 다시 거론해 두어야 한다.우리의 유아 시절과 어린
시절 동안, 주님은 감수성이 강한 자연적인 마음속에 부모나 유모 등에 대한 사랑의 어떤 상태나 선한
애정에 관련된 어떤 상태들을 이식해 두신다.어린이들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새교회에서의 용어로 이런 상태들은 마음 안에 주님이“아껴 두실 것들,remains, 그루터기”이라 부르는데,
이것들은 장래 쓰임을 받기 위해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는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속에 조그만 것(remant,
remains, 그루터기)을 남겨 두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들,혹은“아껴 두실 것들”은 어린이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성숙된
연령에 이르면,이 때부터 인간은 거듭 나아가야만 한다.이 때 각 영적 원리는 주님으로부터 내향적으로
그 인간에게 흘러든다. 흘러들어 왔다 해서 그 원리들이 그 사람이 의식하는 생명의 일부가 되어 그 사람
176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것이 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사람이 의식 가능한 바깥 삶의 수준에 상응되는 정도에서만 그의 것이 되어진다.
이 바깥 삶은 영적 원리의 기초인바,각 원리들은 이 토대 위에 거주하고 안식한다.
거듭남의 질서
모든 인간의 거듭나는 실제는 위와 같이 그가 의식하는 삶에서만 이뤄지는 바, 각자의 의식 세계에
있는 마지막이고 가장 외면인 자연적 수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거듭남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법에
단순히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 다음 우리는 위쪽으로,그리고 안쪽을 향한 거듭남의 여행이 있어
진다.거듭남의 마지막 단계들은 최상의 것인데,그 이유는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내면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쾌락을 사랑하는 우리의 기질은 발달해 올라오는 의무를 사랑함에 종속되어진다. 그 다음 세상에
대한 자연적 사랑은 영적 사랑인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의해 조절을 받게 되면서, 자아 사랑에 집착하는
자연적인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천적인 사랑에 굴복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순종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원리를 연속적으로 배양해 간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우리가 의식하는 삶에서 위의 원리가 발달하는 순서는 하느님의 섭리로
우리 마음에 이식된 지식들은 무의식 속에서 발달하는 순서와는 정반대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부모에
대한 유아기의 사랑을 통해,천적 수준의“아껴두실 것들”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에 이식되어져 있기는
한데,그 이유는 그 당시 우리는 덜 자의식이 있고,유전적 악 역시 덜 발달되어 있어 아주 높은 천사들이
영적으로 우리(유아)와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로, “천국은 유아들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유아
시절,우리에게는 부모가 하느님 같다.그리고 부모에 대한 유아의 사랑은 장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거하게 되는 자연적인 기초인 것이다. 게다가 부모에 대한 유아의 순종은 차후 주님께 순종하게
하는 기초를 갖게 해준다.따라서 초기의 순종하는 습관은 굉장히 중요한 셈이다.
이런 유아 시절까지의 단계 후에,주님은 우리가 친구와 사귀는 관계를 통해 우리 속에“아껴 두실”
이웃사랑에 관한 영적인 사항들을 이식해 주신다.더 나아가 젊은 청년기의 단계에서,주님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램을 통해 자기가 아는 법에 순종함을 사랑하는데 대한“아껴 두실” 자연적인 사항들을 이식해
주신다. 이것을 소위 우리는 자연적인 것 안의 영적인 것 (spiritual-natural remains)이라 부르는데, 한
마디로 자연적 수준에서 이해된 영적 원리들로 채워진 자연적 평면을 말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77
발달
젊은 시절이 무르익을 때,위에서 살핀 세 가지“남음”들 중 맨 뒤에 거론한 남음이 맨 먼저 활성화되어진다.
이 남음도 천적인 수준에서 시작한다고 보아야겠지만, 실상 우리가 의식하는 거듭남이란 자연적 수준에서
시작된다.그리고 이것은 안쪽으로 진행되는데,거듭남을 측량해서 충분해질 때까지, 즉 지혜의 순진으로
어린 아이같이 될 때까지이다. “이와 같은 것이 하늘나라이다.”
주님은 우리가 의식해내지 못하는 마음속에 선하고 참된 상태들을“아껴 두시어”깊숙이 저장해 놓으셨다.
이런 고로 우리가 성숙되는 연령,즉 젊은 성인에 도착되면,그분은 아껴 두신 것들을 하나씩 꺼내 주시면서
이제까지 주님 혼자만 거닐 수밖에 없었던 길, 안쪽 마음에로 되돌아 올 수 있게 안쪽으로 위쪽으로 인도해
가신다.유아기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주님은 우리 속에 장차 거듭나는 삶에 필요한 중요한 사항들을
부지런히 이식해 놓으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열심히 자신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만을 발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계명을 지키면 자연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고 그 토대로부터, 그 토대 위에서
우리는 보다 높은 인간다움(manhood)을 건설한다.
첫째와 꼴찌
이러므로 우리 삶의 가장 이른 시절에 안쪽 마음에 이식되어 미발달된 채로 있던 싹인 최고의 원리들은
의식세계인 우리 삶에서 활동하여 우리 것이 되는데 이것은 마지막 단계에서 있어진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것들 중 우리에게 꼴찌로 인식되는 지식들, 주님이“아껴 두신 것들”이란 순진을 사랑하는 데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원리인데,결국 이 꼴찌인 것 같은 순진을 사랑함은 우리 자신에게 첫째가 된다.이렇게 해서 “첫째였던
것이 꼴찌가 되고,꼴찌였던 것이 첫째가 된다.” 이러면 젊은 성인 시절의 애정에 첫째로 부각되어 움직인
것들인 삶의 바깥쪽 측면의 것들은 거듭나는 삶에서 그 나름대로의 적절한 위치에 꼴찌로서 차츰 주저
않고, 대신 우리의 젊은 성인 시절에는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심오한 원리들은 성장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지고한 것으로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각기 다른 시간에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각기 다른 일꾼들이란 거듭나는 각 단계마다에서 거듭나는
실제에 사용되는 각기 다른 종류의 지식을 표현한다.
178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열 한 시간
열 한 시간째에 일하도록 불린 이들이란 유아기 때 있는 사랑과 평화에 관해“남겨진 것들”,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뿌려진 순진의 것,가장 좋은 지식들을 말한다.이 “남음”이 발달하게 되어 성숙한 지혜의 순진으로
진입하는 시기는 거듭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본문에서는 마지막 시간에 있는 노동시간이 이에 해당된다.
이“남음” 또는 지식들이 기억이라는 장터에 할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는 그들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이였다. 즉 순수한 “남음”이 우리가
의식하는 실제 삶에서 아직까지 음미되고 사용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젊은이가 거듭나기 시작할 때,그는 외적 상태에서 시작한다.그는 외적 종류에 속하는 지식들이 자기
수준에 알맞는 고로 먼저 음미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런 음미와 사용은 유아기 때 저장된 순수한
사랑의 상태를 볼 수 있기 전 오랜 시기 동안 있어진다. 그래서 의식되는 삶에 유아기의 사랑이 일할 수
있으려면 장터에서 제일 오래 기다리는 일꾼같이 지루하게 기다리는 세월을 요한다. 이것들이 생각과 행동을
위해서 이해성이라는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불리되 인생 여정의 꼴찌에서 불린다.
지불
인간이 되어 가는 작업의 끝인 날이 저물자,품삯의 지불이 있게 되었다.즉 우리가 거듭나는 삶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막판에 와서 일한 이들이 영계에서는 맨 먼저 품삯을 받게 된다.즉, 영계에서는
가장 높고 가장 내면에 속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적 생명의 흐름을 의지로 맨 먼저 느끼게 한
다음,이해성을 통해서 바깥쪽인 삶으로까지 확대해져 간다.
우리의 인간다움의 표면 근처에 놓여 있는 외적인 것들은 우리의 가장 안쪽 생명에 있는 주님의 거처에서
상대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고로,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받는 상태 역시 더 느리고 더 둔하게
수용한다.
본문1절의 집주인은8절에서 포도원 주인이라 불리고 있다. 그 이유는 이해성이 의지와 심오하게 조화를
이루게 되고 이 조화 속에 주님의 현존을 우리가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리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79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관리인이란 생각하는 마음,또는 합리적인 마음이다.이 마음이 거듭남 속에서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을 연결해 준다. 이 연결로 해서 영적 마음에 있는 것들이 자연적 마음에 담겨
삶 속에서 실현되게 해준다.
결산 (settlement)
맨 먼저 일하게 된 일꾼들은 비록 자기들이 합의한 정당한 품삯을 받기는 했지만 맨 나중에 일하게
된 일꾼들 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며 실망했다. 이 첫 일꾼이란 자연적 마음에 있는
가장 바깥에 속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거듭남이 마무리된 때일지라도 자기 공적의 어떤 것을
내세우려 들고 공적에 대한 칭찬과 보수를 기대하려 한다.
우리 속의 외적인 것들이 힘들게 나른 짐이란 자기가 똑똑하다고 착각 한데서 비롯되어 무거워 진
것이다. “온종일 뙤약볕”이란 자아 사랑의 불이 그것들을 무겁게 덮쳐 누른 것이다. 비유가 또 하나 알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외적인 자연적 마음이 갖는 생각의 경향은 자아를 위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려
한다는 것,신성한 섭리에 늘 불만족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그러나 우리의 안쪽 마음에
있는 높은 원리들은 자아를 깎아 내리고 주님만을 찬양한다.이 원리가 알고 있는 바는,천국적 삶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서 얼마나 많은 보수를 받았느냐는 식의 성취를 논하지 않고 그 일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양과 질
자연적 마음은 뭔가를 결정짓는데 양에 의해 되기를 바라고 질에 의한 판단에 실패한다. 자연적 인간은
외적인 무게와 크기 외에 어떤 규율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는,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무게와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즉 품질에 의거한다는 것이다.어떤 것에 있어서의
영적 무게란 그 속의 선함이고,영적 크기란 그 속의 진실함이다.영적인 “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는
휘트(feet)나 인치(inch)같은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함과 진리 안에 존재한다.
사물의 참 본성이라는 면에서, 자연적 마음은 충만하게 거듭난 삶 속에서 영적 마음과 같은 수준에
있을 수는 없다.그러나 제 각각은 각기 나름대로의 충만함 속에 있을 수는 있다.각각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180 포도원의 일꾼들- 마태복음20장 1-16절
벌 수 있다.제 각각의 수준에서 충만해질 때,외적 인간이라 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 다시 말해 눈보다는
발이 덜 예민하게 창조되었는데, 우리는 발더러 왜 눈 같이 예민하지 못하냐고 불평해서는 안되고 또한
발이 덜 예민하다 해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람다움에 요구되는 모든 부분이 각각에 걸맞은 질서를 유지한다면 최대한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사회 생활에서 모든 사람은 어떤 지위에 채용되는데,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위치를 선용하는
동안 가장 행복해지게 될 수 있는 것과 비등하다.거듭나는 모든 이는 천국에 불려져,그곳에서 각자에게
알맞은 수준에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부름과 선택
“많은 자가 부름 받았으되,선택한 자는 매우 적다.” 우리가 진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가 거듭나도록
불리는 것이다.그러나 선택한 자란 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행동에 옮기는 자,선과 진리의 삶을 선택한
자들이다.
“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고,그분의 온유하신 자비는 그분의 모든 역사 속에 스며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만 주의 주가 되시고,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이들이란 불리우자 그 부름을
선택하여 그분께 신실한 가운데 있는 이들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81
14
두 아들
-외적인 악과 내적인 악-
성서 본문: 마태복음 21장 28-32절
28.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하고 일렀다.29.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고 있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 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을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위선
위선자는 공개된 죄인보다 더 나쁘다. 그 이유가 위선자는 비록 외관상 선하게 보일런지 몰라도 내면상으로
182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나쁘기 때문이다.이 사람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악을 행한다.그러나 공개된 죄인, 비록 그가 바깥
행동면에서 잘못이 있다 해도,그는 자기 행동을 돌이켜 보고,회개하여 수정해 갈 수 있다.
문맥
이 비유는 앞의 문단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는 상인들을 쫓아내신
후,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이 주님께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따졌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정당성을 물으심으로 그들의 질문을 거절하셨다. 이렇게 그들의 의표를 찔러
혼동케 된 상태에서 주님은 세 비유, 즉 두 아들, 사악한 소작인,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한 비유를
그들에게 말하셨다.
이 세 비유 속에서,주님은 대사제와 원로들,그리고 바리사이파인들에게 그들의 내심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 속에 위선이 있음을 나열하시고, 둘째로 그들이 구세주로서의 주님을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고 대했다는 것, 셋째로 주님의 신성한 영향력을 받기를 거절했기에 있게 되는 비참한
종말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의 오심과 말하심
어떤 사람이 자기 두 아들에게 갔다는 것은 주님 스스로 그분의 신성한 인성으로 오셨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오심”이란 신성한 사랑이 인간이라는 조건을 입으신 역사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어떤 것을 말했다고 할 때의“말했다”란 신성한 지혜의 역사 하심이고,
이 역사는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그런고로“오심”이란 인간의 의지에 대한 하느님의
활동을 언급해 주고, “말하심”이란 인간의 이해성에 대한 주님의 활동을 언급해 주게 된다. 따라서 “오시어
말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과 그의 이해성 또는 지성에 있어지는 주님의 연계된 활동을
암시해 준다.
주님이 인간에게 다가 가실 때,그분은 언제나 뭔가를 그 사람에게 말하신다.이 때 그분은 그 사람과
어떤 거리를 두고 냉담하게 가르치시거나,그로 하여금 어떤 의심이 있게 하시지도 않으며,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해서 무관심하게 활동하시지도 않으신다. 신성한 진리의 빛은 태양의 광선과도 같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83
인간의 지성에 비추일 때는 언제든지 그 빛 안에 따스함인 신성한 사랑을 동반하여 그 사람의 심정의
문이 진리에 열릴 수 있게 준비시킨다.냉혹과 무관심이란 것이 존재하는 곳은 언제나 인간 부분뿐이다.
포도원
주님이 큰 아들에게“와서,” 말하시기를, “아들아,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넓은 의미에서
보면,주님의 포도원은 교회를 말한다.이를 개인 측면에서 살피면, 인간의 이해성이나 지성을 말한다.
이 속에서 진리가 작업을 하고,작업된 진리를 수단으로 각 사람의 애정은 훈련되고 계발되어진다.
사람을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은 인간의 합리성,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생각하는 능력이다.
인격의 변화는 진리의 원리를 각자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해서 행동에 옮기었느냐에 의존된다.
이러므로 주님의 포도원이 있는 곳은 인간의 이해성이다. 진리의 빛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 그 진리를
듣고 이해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것이 인간의 의무인 것이다.그래서 그가 해 놓은 일들은 자기 속의
악한 느낌이나 거짓된 생각,죄가 되는 모든 행동에 반대되어 있어야 한다.그 대신 모든 선한 느낌과
진정한 생각,선용이 격려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
그리고 주님은 인간으로 오늘 그 일을 해내도록 지휘하신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오늘이란 인간의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일은 그 일이 필요로 되는 즉시 시작되어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삶의 현 상태에서 당장 작업해 내지 않는다면,현재의 인격과 상태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신적 상태에서의 경우에도,그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은 생각과 느낌의 다른 상태를 이끌어 낸다.
더 높은 상태로 올라가는 방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에 어떤 작업이 있게 될 때뿐인데, 그 이유는 그 작업이
더 나은 상태로 올라갈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님의 모든 계명은 현재 속에 존재하므로
당장 그 계명을 응용해 가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을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 계명은 지금
말하는 것인 바, “너 오늘...일을 하여라”는 말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영적 원리를 납득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일상생활에 그 원리를 적용해야 하는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그 원리를 모든 사람에게,각자의 계발된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한 대로
184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즉시 그 원리에 순종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를 지금 이해한 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 원리 속에
있는 더 높고 심오한 깨달음에로 올라가는 수단인 것이다.
영원한 날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오늘”은 영원함을 명시해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만일 어떤 이가 거듭나고
있다면, 그의 하루가 영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천국의 모습에는 “밤이 없다” (요한계시록 21:25).
그러므로 오늘 일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장래 내 영혼에 필요한 일을 해야겠다고 상상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낮 동안”에 일을 해야 한다.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낮만이 존재한다.
지상 생활 동안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대항하느라 애를 써야(labor)하지만, 천국에서의 그 일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오직 기쁘게 하는 활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넓은 측면에서의 교회와 각자의 지성과 삶
속에서)우리는 그 일을 이해해서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그 작업은 즉시 수행되어야 하며, 그 작업이 넌더리나는
지겨운 작업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중단되고 기쁘게 하는 작업이 될 때까지 계속해 가야 할 것이다.
비유의 일반적 의미
일반적 측면에서 비유에서의 주님의 목적은 인간의 두 계층, 즉 이방인과 유대인의 모습을 폭로하는
것이었다.동시에 모든 시대,모든 사람의 경우에서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사람의 모습도 나열해 주고
있기도 하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반역적이었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둘째 아들은 순종한다고
약속하고는 은밀히 불순종했다.
비유의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맏아들은 이방인을 표현했다.그들은 바깥쪽에서 주님께 불순종한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들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그들은 순종했던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85
둘째 아들은 유대인을 표현했다.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씌어진
말씀을 잘 간직하면서,그 말씀의 글자를 잘 지키는 체 했을 뿐,말씀의 영에 대한 측면에서는 그 영에
상반되게 방치했던 것이다.
의지와 이해성
맏아들에서와 같이 이방인들의 경우,그들의 의지는 그들의 이해성보다 더 나았다.그러나 유대인의
경우,둘째 아들의 경우 같이,그들의 이해성은 그들의 의지보다 더 나았다. 맏아들은 총명이 필요한 상태였고,
둘째 아들은 진지한 심정이 결핍된 상태였다. 둘째 아들은 거짓 고백을 했으므로 위선적이었고 말씀의
글자를 모독한 것이다.그러나 말씀을 이해 못한 이들은 그 말씀을 모독할 수가 없다.그런고로 그들은
자기들의 총명이 열려짐에 따라 보다 쉽게 회개가 가능해진다.
위를 종합하면, 일반적 측면에서의 맏아들은 이방인처럼 인간의 의무를 이해 못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유대인처럼 말씀을 가지고 또 그 말씀이 주는 생활의 교훈을 이해하면서도 생활에의
적용이라는 자기들 의무를 심정으로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을 표현하고 있다.
위 두 계층의 사람들 각각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불리웠다.즉 거듭나는 사람의 작업,진리의
씨를 자기 이해성 속에 심고 키워 자기 일상생활에 적용토록 하는 데에 부름 받았다는 말이다. 맏아들은
자기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했으나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행했다. 말함은 이해성으로부터 존재하고
행함은 의지로부터 존재하는 바,맏아들의 문제점은 그의 이해성에 있었다.그러나 둘째 아들은 올바른
것을 말했으나 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인바,그의 문제점은 그의 의지에 있다.한 마디로 그는 계발되긴
했지만,위선적이었다는 말이다.그래서 자기 공의를 앞세우는 사제들과 바리사이파인들을 향해 오늘 비유는
무지했으나 마음씨가 고운 이방인과 잘 짜여진 위선을 대비시킴으로 강경한 견책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
이방인들이란 생각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이나 섭리의 인도하심에 반대는 하나, 정작 자기들이 선하고
진정하다고 믿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이 계발된 뒤 그들의 진짜 의지로부터
행동할 때,그들은 의를 행한다.신성한 말씀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 일치
186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않는 많은 생각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그들이 말씀 속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보게 될 때,그들은
그 가르침을 따른다.
현대의 이방인들
좀더 총명하게 뭔가를 잘 주시해 보는 새교회인이라면, 위에서 거론한 이방인이 어떤 교회와도 인연을
맺지 않는 현시대의 사람들 중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타애 보다 믿음을 더 찬양하는 이들, “믿음만으로 의롭게 됨” 이라든가, “대속” 이라는 잘못된 피상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천국적 진리라는 순수한 빛으로 채워져야 할 인간의 마음을 텅 비게 해서 세상에서
거짓된 위치에 처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불합리하고 피상적인 궤변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사랑이 메말라 버린 팍팍한 인간 심정의 원인이
사랑의 하느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그들은 세상에서 주님의 교회에 반발하는 실수를 가지게 된다.이러한
진리의 잘못된 표현이나 거짓 교리들에 그들이 반발하면서, 이런 거짓 교리에 주님이나 그분의 교회가
놓여지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이런 이들이 이방인이나,사실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이나 진짜 교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오직 거짓된 하느님들,부패된 교회,눈에 보이게 그럴싸해진 것들에 반대할 따름이다.
무식한 반대
교회가 부패해져 가고 주님의 말씀이 왜곡되었을 때,인간이 더욱 더 무식하게 되어 간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에 반대하는 가운데 그들은 정말로 참되고 선한 것 중 많은 부분까지에도
반대했다. 그래서 순수한 진리 속에서의 더 많은 계발은 위와 같이 반대한 이들의 더 깊은 의지에 도달되어서
그들이 회개하고 개혁할 수 있게 인도해 줄 것이라 믿는다.
순수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새교회의 일인바, 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내향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열어 주는 것이고,이런 계발로 인간 속에 주님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분의 교회를 재건설해야 한다.지적으로
잘못되었으나 심정이 선한 사람들(비유 속의 맏아들 같이 그들이 새 진리에도 반발한다 해도)속의 합리성에
빛이 도달될 때 그들은 회개하고 주님의 포도원에 일하러 갈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87
의도적인 반대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졌지만 내심을 악에다 팔아 넘긴 이들은 새 진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더 명확히 해주면 해줄수록,그들은 과거 유대인이 예수님을 배척하듯,그 진리를 실지로 더욱 반대할
것이다.주님이 유대인의 악들을 더 꼬집어 주셨을 때,그들은 더욱 덜 회개하고, 더욱 더 그분을 어떻게
잡아죽일까 궁리만 했었었다.
이 비유를 말하신 후,주님은 대사제와 원로들에게,“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들 역시, “맏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실제적인 진리를 볼 수 있는 합리성을 장치해 두시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계발을 위해 가르침이 필요하다.그러나 인간이 명백한 진리로 적절히 가르쳐질 때,
만일 그들이 진리에 대한 호의가 있다면,그들은 회개할 것이고,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 일하러 가야 한다.
속과 겉
이제 비유가 얼마나 실제적인지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인간 품성에는 두 가지 측면,즉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또는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다.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이 두 측면은 하나로서
함께 움직여 간다.그 이유는 속과 겉에 있는 품성은 선하고 진정한 것,양쪽에서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이와 반대인 확증적으로 악한 품성에서의 경우도,품성의 속과 겉의 국면은 악하고 거짓되기
위해 서로 일치한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은 겉으로 선한 모습을 입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바깥쪽 행동에서 신성한
법의 글자를 준수하는 한편,은밀한 그의 의도적 측면에서 그 법의 영을 깨트리고 있을는지 모른다.두
측면을 떼어놓은 상태로 본다면,그의 겉 행동은 그의 심정보다 더 나은 셈이다.즉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될 것이다.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그들의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나은 사람도
있다.미약하나마 그들은 거듭나고 있다.하지만 아직 그들은 자기의 통제하에 외적 마음을 가져다 놓지
못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겠지만 자신의 안쪽 마음이 선해지겠다고 하여 의를
행하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자연적 마음은 악에 쉽게 기울고 마는 유전성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 이중성인 위선 같은 것이 아니고 진지한 이중성일 뿐이다.
188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그런 사람은 그의 영 속에서,즉 그의 안쪽 의식 속에서,그 의식으로부터 생각하고 느낄 때, 그는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것을 사랑하여 행해야겠다는 쪽으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인다.그러나 그가 바깥쪽,즉
자연적인 마음으로 내려가서 느끼고 생각할 때 그는 악에 대한 그의 유전적 경향성들로부터 생각하므로
그는 선한 것에 반대할 것이다.따라서 그에게 마치 두개의 다른 사람이 있는 셈이 된다.거듭 나아가려고
애쓰는 모든 이는 마음속에 있어지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 경험했었으리라 본다.
두 계층
이 비유는 인간의 두 계층에 대한 상황에 질문을 던져 놓고 있다. 먼저, 바깥쪽 삶에서 신성한 법의
글자를 깨트린 이들,그럼에도 회개해서 자신의 생활을 수정하여 거듭 나아간 이들,그리고 둘째로, 바깥쪽
사람에서 신성한 법을 준수하는 체 하는 한편,영의 측면에서는 진리의 영에 상반되고,기꺼이 회개를
하지 않고,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수정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래서 인격이 바깥쪽으로 허약한 상태는 비록 악한 듯해도, 그 속의 의지가 썩어 못쓰게 될 정도로
깊이 고정되어진 악은 아니어서 언젠가 눈에 보이는 바깥쪽 삶이 질서 있게 될 수 있음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비유의 첫 째 경우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보다 더 나은 고로, 나중에는 결국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나,둘째 경우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더 나은바,이 외적인 것은 심정으로부터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위선적인 것이다.
첫째 경우는 천국과 지옥이 한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싸우고 있는 상태이나, 둘째 경우는 지옥이
그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상태로서 질서 있는 외적인 것은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듯이 그저 질서적인
체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껴 두실 것들 (remains)
주님에 의해 인간의 안쪽 마음에 아껴 두실 선한 상태가 맏아들의 경우는 의지 속의 악들로 인해 닫혀지지는
않았다.그래서 이 상태들을 가지고 주님은 그 사람이 회개하도록 작용하실 수 있었다.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심정 속의 악을 자신의 삶에 의해 굳혔는바,그 아들 속의 “아껴 두실 것들”은 질식한 상태여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89
신성한 영향력의 실력 행사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맏아들은 회개했다.게다가 회개와 더블은 새 심정은 새 삶을 이루었다.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 회개도,
새 심정도,따라서 새 생활도 없었다.이 아들은 겉이 번즈그레한 “회칠한 무덤” 일뿐, 그 속은 죽음과
부패라는 것으로 꽉 차 있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라고 말한다고 모든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맏아들은 사람의 아들,즉 말씀의 글자나 진리에 상반되게 말했던 것이나,둘째 아들은 성령, 내면의
진리,말씀 속의 영에 상반되게 말했던 것이다.
요한과 예수
예수님께서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에게 행동 측면에서 회개하도록 요구하는 것,즉 글자적 측면에서의 말씀을 표현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의 세례이지,기독인의 세례는 아닌 것이다.이 세례는 말씀의 글자에서 가르치는
것,이스라엘 예언자들에 의해 있어진 법에로 귀환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이보다 더 내면적이다.이 세례는 행동이나 외적인 것을 넘어서 도달되는 것들이다.
이 세례는 행동이나 밖에 나타난 모습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들,즉 의지와 이해성인 동기(motive)에 관한
회개를 가르치고 있다.요한을 영접한 유대인들,그래서 행동을 고쳐 잡은 이들은 예수님의 세례로 새
인격이 형성되는 기초를 가졌던 것이다.이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해 주었다.그러나 요한을
영접하지 않은 이들, 유대인의 표준인 외적인 것들에 의거해서 삶을 수정하지 않은 이들은 예수님도 영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기 삶을 개혁하지 않은 사람은 거듭남에 필요한 기초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형상에서 무질서했던 이들이라 해도,그들이 요한의 부름,즉 말씀의 글자에 귀를 기울였을 때,
예수님의 부름에서 거듭 나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세리와 창녀
190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본문의 세리란 로마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세리들이 유대인에
게 미움을 받고 경멸 당하기까지 했음은 지당한 이치일 것이다.마태도 세리였다.본문의 세리들은 이방인을
표현한다.
죄 가운데 있는 창녀란 거짓을 사랑하는 이들을 표현한다. 이들이 죄 가운데 있다 해도 세상 일각에
있는 상습적인 범죄자라고는 말하기 어려웁고, 흔히 젊은 여자들로서 그들은 그런 삶이 죄악임을 알지
못하거나 되새겨 본 적도 없이 죄라는 바깥 행동에 빠져 있는 여인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선교에서 많은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해서 자기들의 행실을 고쳤다.그리고 그들은 하늘나라에 갔다.즉 그들은 자기들
삶을 개혁해서 거듭 나아가는데 필요한 영적 진리를 받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바리사이파인들
경멸받아 버려진 위치에 있는 세리와 창녀들을 회개시켜 삶의 수정이 있게 한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상습화된 위선적인 사제들이나 바리사이파인들을 회개시켜 그들의 삶이 진지하게 수정되도록 하여 주질
못했다.이와 같은 내향적인 악들이 마음속에 있다면,설사 진리의 역사가 타인들 위에 있어지는 것을
본다 해도, 더욱이 자신 속에서 있어지는 진리의 활동을 알았다 해도 회개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을 두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자들” 이라고 하셨다.
또한 그들은 “입술로 내게 가까이 와 혀로는 나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심정으로는 나에게서 먼 사람들”
이라고 하셨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고,공공 장소에서 기도를 길게 하며 많은 헌물을 바쳤지만,내향적으로 악에 차 있고, 주님을 향해
성난 분노로 차 있던 자들이었다.그래서 말씀하시기를,“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바리사이파인 같은 사람을 두고 주님은
말하시기를, “이름만 살아 있을 뿐, 죽은 자들”이라고 하셨다.
바리사이파인들이 회개하는데 큰 장애물은 자기 공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외관상의 질서
정연함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더 진짜이고 심오한 악들을 감추고 있다. 외적인 악들은 더 피상적이어서
더 쉽사리 파악된다.즉 공개되어 있는 죄인들은 자기들 죄를 보는 것이 보다 쉽다.고로 성자나 된 듯하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91
보이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회개하게 된다. 은근히 타인을 경멸하며 자기 공적을 슬며시 추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양쪽에 반대되는 심정을 단단히 굳게 하여 진리의 더 높은 국면에 상반된 쪽으로만 마음의 문을
연다.
예증
예를 들면,급한 성미는 비록 좋은 것은 못되지만,겉으로 온유하고 미끈한 품위 속에 쥐 죽은 듯 하게
미움, 시기, 복수 같은 것을 깔아 놓은 유해한 성미보다는 덜 악한 편일 것이다.
때로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막돼먹은 실제의 죄들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고,회개하여 거듭 나아갈 수 있게도 하신다.노출된 죄라는 바깥 행위가 없는 때,
인간은 자기 정의라는 더 큰 죄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비유에서의 두 아들 모두 회개가 필요했다.이와 같이 그 당시 회개가 필요했던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세리와 창녀들,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 모두에 해당되었다.자신은 남들이 다 공인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 앞에서나,자신에게 위선이 정말로 없을 경우,그 사람은 으시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이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어떤 이가 위선이 없다는 것이 그가 위선 외의 다른 악들이 없다는 것을
보증 못하기 때문이다.또는 그 사람이 더 지독한 지옥에로 기울지 않고 있다 해도,자기 속의 악들이
어떤 지옥으로든 자신을 끌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은 못되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들이 위선자가 아닌 고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악을 행하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성실함(sincerity)은 거듭남이 없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다. 성실한 죄인은
위선자도 아니요,천사도 아니다.그들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일하라고 부르신다.즉 회개와 개혁에 의해 자신들 속에 있는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부르신다.
그 일이란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배운 그 진리를 사랑해서 행하는 것이다.
감정에 끌림 (impulsiveness)
이 비유에는 잠깐이라도 멈추어 되새겨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외적 생각으로부터 말해 버리는 충동적인
사람,또는 쉽게 감정에 끌려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경고를 담고 있다.충동적인 사람의 말은 쉽게
192 두 아들- 마태복음21장 28-32절
반발을 사게 하는 반역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당사자의 경우 “나는 그런 의도는 없었는데...”
라고 말한다. 이럴 경우, 만일 충동적인 사람이 말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속으로 말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습관을 기른다면,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외적인 생각과 느낌까지도 본인의 좋은 의도를 전달하는
습관을 얻을 것이라 본다. 이런 습관의 계속이 성경 속의 진리 탐구나 행동 측면에 있게 된다면 진리의
실천은 조금씩 더 진전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향적인 생각이나 느낌으로부터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잠깐 생각하는 습관의 연속은 자신이 꺼내야 할 말의 앞뒤를 반성하게 해주어 바깥
행동이 충동적이려는데 반해 자신의 입을 지켜 주리라 본다. 결국 이런 반복은 자신의 바깥 길에 변화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
주님의 포도원은 마음속에 있는 고로 나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포도원의 일을 해줄 수 없다. 우리가
선과 진리를 내향적으로 사랑하고,그것들을 바깥 삶에서 실천 해갈 때,주님의 뜻은 마치 거듭나던 사람이
천국에서 계속 거듭 나아가듯,우리의 자연적 인간이라는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93
15
사악한 소작인
-신성한 진리의 거절-
성서 본문: 마태복음 21장 33-43절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 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 갔다.34. 포도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
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다. 36.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37.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 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39.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 내어 죽였다. 40.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 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94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는 놀랍게만 보인다’
고 한 말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요약
신성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자기들 마음과 삶에서 진리를 거절하고 만다. 더구나 그
진리들이 자기들 인격 속에서 진리의 본질을 더 나타내면 낼수록, 더 완강하게 진리를 거절하며 그 진리의
영향력을 좌절시키려 든다.그러므로 심판에서 이와 같은 사람은 영적으로 멸망되고야 만다.그 이유는
그들이 내향적으로 진리를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이들이 자기들 인격의 질을 더 발달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신성한 진리에 반대될 것인바, 결국 그들은 자기들 기억 속에서까지도 진리를 지워 버리려 할 정도에
이르고야 만다.
집주인
집주인이란 주님이시다.그리고 그분의 집,또는 거하시는 장소는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포도원
포도나무는 마음속에서 자라는 진리를 표현한다.신성한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도 자신을“참 포도나무”
라고 부르셨다.넓은 의미에서의 포도원은 교회이다.이곳에 진리가 심어져 자라나 선한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개인 측면에서 볼 때,주님의 포도원은 인간의 이해성에 놓여지고, 거기에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 심어진다.교회가 포도원으로 표현될 경우,교회 속의 모든 것, 즉 교인 속에 있는 지식이나
총명,그리고 지혜들을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듯이 주님이 심어 주신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95
울타리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울타리는 방어를 위해, 또는 이쪽과 저쪽을 분리시키기 위해 설치한다. 마음속에
있는 포도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보호될 필요가 있고,뿐만 아니라,타인이 주는
영향력에서도 방어될 필요가 있다. “숲에서 멧돼지가 나와 그것을 망치고, 들판의 들짐승이 그것을 먹어
치운다.”
마음속에서 진리의 성장을 보호해 주는 푸르게 살아 있는 나무의 울타리(hedge)란 삶에 대해 글자
대로에서까지도 교훈을 주는 진리들,즉 십계명 같은 진리들이다.행동의 법칙으로서의 이런 계명은 악한
영향력들의 공격에 최선의 방어책이다. 이와 같이 주님 말씀의 모든 글자는 그 말씀 속의 영적 의미에
담긴 내향적 진리를 지키고,보호하는 울타리인 것이다.“세상적인 것, 육(flesh)인 것, 그리고 악마”는 언제나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 주위를 배회하며 한시라도 그것을 부수고 들어와 파괴하려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그리고 울타리는 보호 역활 뿐아니라 이 들판과 저 들판을 분리해 준다. 거듭나는 마음에 있는 원리들은
질서 있게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사랑과 생각 속의 적절한 위치에 다양한
선과 진리들을 놓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어떤 원리는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고,어떤 것은 목적이 되고,
어떤 것은 원인이 되며,어떤 것은 결과에 해당된다고 구분 짓고 처리해 가야함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정신적 원리를 질서 있게 배치하는 것을 배운 다음, 이를 사용하게 될 때 말씀에서 온 지식은
정신적 울타리가 되어 정신 분야에서 이것과 저것이 분리되고 구별되게 해준다. 사실, 영적 보호는 서로
다른 원리들 사이를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구별해 내는 작업에 의존될 때가 상당히 많다.
영적 질서
주님을 첫째에,이웃을 둘째에,자신을 꼴찌에 둔다면, 천국 질서를 뒤집으려 하고 지옥의 질서를 건설하려
하는 퇴보적 삶의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악령은 언제나 우리들 마음을 혼동시켜서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고, 진리와 거짓을 떼어놓는 실제
삶을 못하게 하려 든다. 그러나 “지식은 힘이다.”
원리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 놓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해 보라.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마음,
196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주님이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모르는 마음,그분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마음,감각적 충동인지, 수호 천사의
격려인지를 구별 못하는 마음,등등을 관찰해 본다면,이런 마음들은 악의 영향과 거짓 관념들에 속한
온갖 것의 곤경에 마냥 열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마음은 미미한 바람의 힘에도 움직이는
바람개비 같이 고정된 위치가 없다.따라서 어떤 것도 확언할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이면서 확정된 마음, 뚜렷한 구별을 줄 수 있는 지식을 지닌 마음은 악령들의 제스츄어에
강한 방어 능력이 있는 셈이다.이 마음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각종 영향력의 품질을 구별하는 바,그 마음의
울타리는 각종 영향력의 뒷배경까지 간파하고 있다.이 마음은 주님에 속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거듭나는데
필요한 것이 어느 것인지,그리고 자아와 퇴보되는 것에 속한 것,천국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어떤
것들인지 조심스럽게 구별함으로서 사전에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을 갖추게 된다. 이 마음은 제아무리
적이 양의 탈을 뒤집어썼다 해도 적의 진짜 속성을 알 수 있다. 적이 양의 탈을 쓰고서 양떼에 섞여 있다
해도 이 마음은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원리들의 이런 식별은 일상생활의 행동 속에서,애정과 생각 속에서
반드시 있어져야 한다. 원리 사이에 있어야 할 위와 같은 명백한 합리적 식별이 없는 마음은 선과 악에
관한 혼잡을 가져오고,그 혼잡은 악으로부터의 분리나 실용성이 없어져 간다.그 이유는 삶을 순수하게
할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더불어 보호해 줄 건전한 울타리도 없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움직여 간 것은 지상의 교회의 역사를 훑어 알 수 있을는지 모른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 내의 원리들을 명백하고 합리적이며 실용성 있는 구별을 유지하는 한 그 교회는 번성해 갔다. 그
교회 안에 감각적인 것을 던졌을 때, 그것이 세상의 것임을 구분하지 않고 탐닉함으로서 그 교인들은 점차
먹혀 들어가 약화되어져 결국 합리적인 명확한 구분도 잃어 실용적인 응용마저 거절되어졌다. 그런 뒤,
교인들은 교회나 자신들에 필수가 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 바깥쪽에 해당되는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동안 그들은 종교의 내향에 있는 영이 죽어 가는 것을 못본척 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울타리가 포도원을 보호하는데 필수적이듯,주님의 계명에 의해 자기 속의 원리들을 구분해
놓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의 안전을 위해 필수 사항인 것이다.
포도즙 틀
그런 다음,집주인은“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팠다,” 즉 집주인은 포도주 틀을 놓기 위해 어떤
장소를 파고 장래 사용을 위해 그 틀을 장치했다. 집주인인 주님은 영적 삶의 목표 달성이라는 장래의
일을 위해 인간 마음을 준비시키신다.포도주 틀은 포도에서 포도즙만을 분리시키기 위한 도구이다.정신적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97
삶 속에서 우리의 일들은 포도라는 열매, 다시말해 정신적인 포도원인 자연적인 이해성에 뿌려진 진리의
열매들이다.
우리의 일이 선하다면,그 일들은 영적 진리라는 명백한 포도 쥬스를 생산할 것이다.인간은 자연적
진리를 행함으로 영적 진리를 배운다. 다시 말해, 좋은 열매를 생산해 낸 진리는 그 진리의 영도 생산한다.
“만일 누군가가 주님의 의지를 행한다면,그는 그 행함이 하느님에 속한지 그렇지 않는지에 관한 교리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 일의 품질과 그 일 속의 영을 검사해 봄으로서 그 일 속에 체현되어 있는 영적
진리까지 보게 된다.이 검사가 바로 포도즙 틀을 사용하는 상태이다.즉 이렇게 검사해 봄은 각 사람의
일의 본질과 그 영을 파악하게 해준다.
포도즙 틀 자체는 합리적 능력,또는 우리 마음의 생각하는 원리를 말한다.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 속에 있는 영이나 인격의 발달을 위해 즙을 짜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포도즙 틀을 가지고 포도를 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일을 잘 가늠해 본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바깥쪽의 행동으로부터
안쪽에 있는 영이나 그 일의 동기를 분리시킨다.
우리는 행동이라는 바깥쪽 형태에 만족하려는 것이 자신의 느낌에 있음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천국에 속한 것인지 세상에 속한 것인지 그 느낌의 동기를 검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는지 또는 자아 속에서 있어졌는지 구분해야 한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서 그의 행위가 하느님 안에서 있어진 것임을 명백히 만들 것이다.” 포도는 포도주는
아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바깥쪽 좋은 열매는 그 열매로부터 축출되어지는 영적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망대
집주인은 포도원에“망대를 세웠다.” 망대란 관측함으로 포도원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다. 포도가
익어 가는 동안 들짐승이나 적들의 접근을 관찰하기 위해 경비원이 망대에서 보초를 선다. 그렇게 해서
경비원은 어떤 도둑이나 피해로부터 포도원을 방어한다. 때로 망대는 보초를 위해 견고하게 세워지기도
하고 공격당할 경우를 위해 은신할 수 있는 설비도 갖춘다.
이런 망대의 필수 사항은 보다 멀리 그리고 넓은 관찰을 위해 층계를 타고 올라가도록 설계되어야
할 것이고,방어를 위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망대란 내면에 있는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는 사물의 표면에 있는 진리보다 훨씬 더 승강된 진리로서
영적 생각의 보다 높은 관점을 산출한다. 게다가 울타리도 방어 역할을 하지만 울타리보다 더 강한 방어력을
198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갖춘 것이 망대이다.
생각이 높은 위치에 있는 상태에서의 합리적 마음은 경비원과 같은 바, 이 마음은 사물의 상태를 납득하는
고로 감각적 삶이 주는 위험을 직시한다. 돌로 쌓아 만든 망대는 말씀의 글자에서 오는 진리를 표현하고
이 진리는 말씀을 내면으로 이해할 때 주어진다. 이 진리들은 기억에서 들리워 외적 생각 위로 올려지고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지면서 심정 안으로도 들어가게 된다.
예증
악이 우리에게 다가서기 전 미리 그 악을 보아야 크게 유리하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자기의 나쁜
성미를 건드렸다고 말해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자기의 나쁜 성미가 발동된 후,우리는 그렇게 성질을
낸데 대해 자기는 가만히 있었는데 뭔가가 자기를 성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렇게
올가진 성냄을 정당화한 후에는 처음에 시도했던 화냄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즉 악을 행한다는
말이다. 이 때에, 자신의 영적인 포도원을 경계하기 위해 내면의 진리 속에 높은 망대인 영적 총명을 설치했다고
가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의 총명은 자신 속의 성미가 들썩거리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미를 그냥 놔두면 더욱 악화된다는 것도 미리 예견할 것이다. 이럼으로 나쁜 성미의 접근에 경고가
있게 되는 바,우리는 그 성미를 내려 누를 준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내면의 진리,즉 동기와 영을 아는 진리들은 우리로 모든 삶의 탐사를 잘 해갈 수 있게 해준다.그럼으로
발생될 위험한 것을 미리 관찰 가능하게 한다.감시와 경고를 위해 우리의 망대는 높이 설치되어야 한다.
때로 우리는 감각적인 생각들로 번민을 갖는 때도 있다. 이럴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적 진리들을 보호할
필요도 생긴다.이런 상황을 복음서에서,“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경계를 풀지 말고)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Watch and pray, lest ye enter into temptation; the spirit, indeed
is willing, but flesh is weak” (마태복음 26:41.)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신 바, 의로운 자들이 그
안에 달려들어가 안전해진다.”
포도원을 임대함
포도원을 다 마무리 지은 후 집주인은 소작인에게 임대해 준다. 임대에 의해 계약자는 계약서의 내용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199
따라 사용하기 위해 자산을 양도받는다.이것은 인간 마음에서도,또는 교회에서도 이루어진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포도원을 준비해 두시고,인간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즐기도록 세를 주신다.인간은
그것을 남용하거나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교회의 원리는 인간 마음에 심어지도록 가르쳐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리들을 계약 조건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이 조건이란 십계명이다.이 계명 하에,
우리는 모든 정신적인 땅과 포도나무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들을 취해서 사용하고 즐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원을 남용이 없는 사용과 더불어 포도원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순종함 가운데 살게 될 때,그분의 포도밭에 열매가 생산되는데,이 열매를
주님에게 양도해야 한다.그런데 만일 이 신성한 원리들이 자기 것이라고 간주한다던가,주님에 대한 충절을
잊음으로 자기가 점유하고 사용한 것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을 거절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인
강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집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세놓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진리를 교통하심으로
인간으로 각자의 영적인 삶의 일을 준비시키시는 것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모습이 에덴의 동산 비유에도
있다.주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데려다가,“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즉 동산을 사용하되 그것을
질서 속에 있도록 하고,어떤 피해에서도 그것을 보호하도록 하셔서,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룩함의 열매가
계속 생산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일 속에서, 마치 소작인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자라나는 작물을 가꾸어 수확을 거둘 수 있듯이
인간은 영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소작인은 씨를 만들 수도 없고 그 씨의 성장을 생산해 내지도
못한다. 다만 그는 주님이 설비하신 수단들을 부지런하고 성의 있게 사용할 수는 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수단들을 주셨고,뿐만 아니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우리가 그 능력을 선용할 때 주님은 우리의 강건함을 존속시켜 주신다.
멀리 떠남 (going to a far country)
그런데 우리가 막상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우리는 마치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일을 잘 처리하는 듯
여긴다. 주님의 손길(agency)이 자기 일 속에서 명백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그분은 멀리
떠나가신 듯 여겨진다.그래서 자신만이 남아 있는 듯 여긴다.이것이 본문의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200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주고 멀리 떠나갔다”는 것에 대한 의미이다.장소(place)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우리는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데,특히 이해성이 승강될 때,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이해성이 열릴 때 진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리의 실지 사용은 우리의 바깥쪽 생각이 응용해야겠다고 하는 것, 자연적 삶이라는 실용적인 행함 속에
존재한다.
주님의 귀향
우리가 진리를 자신의 행동 안으로 가져다 놓아 진리의 열매를 생산하게 될 때, 즉 진리로부터 실지의
선들을 획득하게 될 때,이 선한 열매는 주님을 상기하게 한다.그래서 주님은 진리라는 것만의 형체에서는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지 않으나 진리의 삶 속에서 가까이 계신다.
우리가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할 때, 주님은 “멀리 떠나가신 듯” 여겨진다. 그 이유는 마음의 상태가
그분으로부터 멀리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가깝다든가 멀리 있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공간에 존재하지 않고
인격에만 존재한다. “주님은 그분께 부르짖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진리 가운데서 그분을 부르짖는 모든
이에게는 가까이 계신다.” 그럼에도 악인에 대해 말해지는 바는 “하느님은 그들의 모든 생각 조차에도
계시지 않는다.” 악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놓는다. “너의 불법이 너와 너의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고,너의 죄가 너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리웠다.”
우리는 태양의 빛이 아니면 태양을 볼 수 없다. 사실 태양 빛이 아니면 태양이라는 존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와 교통하게 하는 주님의 진리가 아니면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더 찾으면 찾을수록,더 많은 빛을 가지게 된다.이렇게 해서 마음속의 진리는 선한 열매를
가져오게 된다.정신적인 열매가 선함을 무르익게 할 때,주님은 더욱 더 가까이 와 계신 듯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더 가까이 끌어 당겼기 때문이다.
수확의 때
이렇게 자기에게 주님을 끌어당김은 수확의 시기까지도 더 가까이 끌어당기게 해준다. 열매는 열리되
기왕이면 많이 열리고 잘 익어 가야 할 것이다.열매가 완성되기까지의 성장에는 단계를 거친다.태양이
열매를 무르익게 하듯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은 우리의 정신적 열매에 작용하시어 무르익게 해주신다. 정신적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01
열매들의 품질은 그 사람의 내향에 있는 동기에 의존된다. 수확의 때란 진리가 이해성에로 반입되어 의지에
영향을 미침으로 실제의 선한 일이 나타날 때를 말한다.
각 사람의 열매는 각 사람 자신 속의 인격과 같은 것이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모든 사람은 각자에
걸맞은 열매를 산출한다.종종 외관상 악인의 일도 선한 이의 열매같이 보일 때도 있다.그러나 그 품질은
전혀 다르다.포도의 품질은 포도즙 틀을 거칠 때에 판정된다.그리고 단맛이든 신맛이든 포도즙 안에
있게 된다.정신적인 포도원에 심어진 원리들이 선한 일 속에서 열매를 산출하게 될 때,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몫이 선한 열매 속에 있음을 주장하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종
그분은 그분의 종들을 보내어 “도조(열매)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집주인의 종들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이고,이 진리들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어떤 진리가 이해성에 심어지고,
그 이해성이 의지에 영향을 미쳐 실제의 삶 속에서 열매를 생산하게 될 때 주님은 그분의 말씀 속에 있는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획득한 선한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신다. 게다가
우리의 정신적인 포도원의 소유권자가 주님이시다는 것, 우리가 그 포도원을 사용한 내력을 주님께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주님의 종들이란 모든 시대에 걸쳐 보낸 그분의 예언자나 선생들이다.이들로
하여금 신성한 생명에 우리가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셨다.개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종들이란
예언자가 가르친 진리들을 말하는 바, 누가복음1장 70절에서, “예로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주님께서 말씀(가르치신)하신 대로”라고 노래해 주고 있다. 글자대로 살펴도 사실인 것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인간인 예언자들을 때리고,죽이고 돌로 쳤었다.그래서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들을 영적으로 박해했던 것이다.
일 속에 존재하는 선한 것은 양에 의해 측정되지 않고 질에 의해 좌우된다. 자기가 해 놓은 선한 일이
많다고 해서 자기야말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자기 주장을 펼치는 순간,
그 선한 일이 자기 것이라고 권리를 내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유권을 내세울 때 그 선함에서
있어지는 천국적인 특성 모두를 자기 것으로 강취하게 된다.
202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종들을 학대함
그런데,이기적인 사람도 겉보기에는 선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다.그리고 그가 주님 말씀 속의 진리들을 보고 납득할 경우,그에게도 주님을 인정하도록 요구되어지는데,
이때에 그는 그 진리들을 거절한다.그가 주님의 종을 맞이했지만 그를 때리고,죽이고, 돌로 친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분리될 때,진리 속의 생명은 그 진리를 분리시킨 마음속에서 거두어진다.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진리는 자아 사랑이라는 악에 의해 더렵혀진다.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침
종을 때린다는 것은 삶 속의 악을 가지고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을 죽인다는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부터,즉 실용적인 진리의 선용을 떼어 냄으로 삶에서 진리를 박탈하는 것이다.종을 돌로 쳐죽였다는
것은 진리 속의 진정한 것, 즉 그 속의 영과 씨름해서 진리를 왜곡되게 하여 자기의 악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왜냐하면 좋은 의미의 돌은 자연적인 진리이나,나쁜 의미에서의 돌은 왜곡된 진리, 진리를
거짓에 응용함으로 마음에 거짓을 만드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종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자비 가운데서 인간이 고집 부리는 불법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도우시려고 언제나 애쓰신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성에 부응해서 영적 환경을 재조정해 주신다.만일 우리가 이 방법으로 주님께 반항하면,
그분은 저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구해 주시려 애쓰신다. 그분은 회개하고 수정할 모든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
위와 같은 처방이 넓은 의미의 인간 교회에 계속 있어 왔고,개개인의 영혼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읽히고,설교되어지되“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더하여 간다.이 종 뒤에 다른 종들이 우리에게 보내지고,그들은 주님의 메시지를 들고 있다. 그 메시지에서
포도원의 열매를 요구하고 계신다.만일 단순한 진리가 우리에게 도달되지 못하면,더 심오한 진리가 우리에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03
보내어진다.이 진리는 보다 더 꿰뚫는 힘을 지닌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우리는 계속 갖가지 형태로 그 진리를 거절하게 된다.그 이유는
진리가 갖가지 형태로 와서 우리의 악을 견책하기 때문이다. 계명 중 어느 하나를 자발적으로 깨트리는
사람은 계명 모두를 깨트리는 것이 된다. 계명들은 쇠사슬의 고리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고리 하나를
끊으면 사슬 전체를 끊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는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모든 진리
속의 영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그래서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까지 거절하게 된다.진리들이 지닌 영은
모두 유사하기 때문이다.진리 하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든 진리도 미워하게 되는 바,그 이유는 그가 진리
속의 신성한 영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집주인의 종 하나를 미워한 것이 모든 종을 미워한 것과
같다.
아들
사악한 소작인이 집주인의 종들을 거절한 뒤 그의 아들까지 거절한 것에 별로 의아해 하지 않으리라
본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만일 인간에 대한 진리의 호소 중 가장 확실한
것이라면,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육을 입으신 신성한 진리는 인간에게 도달된다는 것이리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드높은 가르침은 어떤 심령에도 도달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에서,우리는 교훈과 본보기라는 두 가지를 가진다.그러나 유대교의 악한 지도자들은
구약 성서에 가르쳐진 진리에 대한 적대 행위보다 더 심각한 적대 행위를 저질렀다. 그들이 주님 속의
영 즉 그분의 품성을 보게 되었을 때,그들은 그분에게 더 격렬하게 적개심을 발휘했다.그 이유는 그분의
영이 그들 인격 속에 든 악에 대해 더 강력한 적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본문에서“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이와 같이 모든 악한 마음에 있는 목적은 진리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그 이유는
만일 진리가 그들 마음에 뭔가를 건설하려 한다면,필시 세상적인 탐욕을 그들에게서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상속자다.” 상속이란 주님을 받는 조건,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으로 오는 조건들이다. 악인은
추론하기를,만일 자기들이 주님의 거처인 새 생명의 상태,주님이 주셔야만 하는 모든 상속받는 조건인
새 생명을 거절하게 되면 결국 자기들은 자기들이 애쓴 선한 일의 공적을 자기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추론하고,
더욱이 자기들 삶 속에서 어떤 신성한 작용도 더 이상 인정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라고 추론한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영적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그래서 인간 속의 원리 중 천국
204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생명을 받도록 열리게 해주는 것은 겸손과 한 쌍을 이루는 순진이라는 원리이다. 그러나 자아를 찬양하는
마음의 경우 겸손한 순진은 그 마음이 가장 지겨워하는 것들이다. 자기만 챙기려 드는 마음은 자기 속에
상속받아 있는 겸손한 순진이라는 원리를 꿈틀대는 애초부터 깔아뭉개려 갖은 노력을 경주한다. 이렇게
해서 악인 속에서의 외적인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속한 마음이 주님께 열리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노력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저지하려 드는 것이다.
셋
악한 소작인은 집주인의 뜻에 세 번씩이나 저항했다.그들은 처음 보낸 종에게,두 번째 보낸 종에게,
마지막으로 아들에게도 저항했다.표징적 숫자로서의“셋”이란 진리 측면에서 충만함, 완전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 번씩 진리를 거절함이란 악인이 진리를 거절하되 완전하고 전적으로 거절했다는 말이고 그들
스스로 진리에 반대되는 거짓 원리의 삶으로 확증해 버렸다는 것이 된다.
붙잡고, 밖으로 끌어내어 살해함
소작인들은“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그를 잡았다”는 것은 의지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것이고,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었다”는 것은 이해성으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말이고,
“그를 죽였다”는 것은 일상 생활로부터 진리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악한 마음이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쳐서 자발적으로 진리의 영향력과 생명 자체를 파괴하여 모든 천국의 사랑까지 말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 적용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던 자,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할 유대인과
관계를 갖고 있다.그러나 그들은 예언자들을 거절했고,결국 주님 자신까지 거절해 버렸다. 그래서 영적
왕국이 그들로부터 박탈되어 이방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사실 주님이 영적 왕국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라,그들 스스로 그것을 내던진 것이다.주님은 인간으로부터 그분의 사랑을 결코 철회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선하고 진정되며 유용한 그분의 선물 뿐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05
인간에게서 철회하신 적이 없으시다.이런 것들은 그분이 계속 공급해 주시는 선물이요,선물 속의 선함은
주님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다. 이런 선물은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그 속의 선함은 보존되고 있다.주님의 자비들은“매일 아침마다, 매일 저녁마다” 존재한다. “주님은 모든
이에게 선하시고,그분의 온유하심은 그분의 모든 일 속에 스며 있다.” 그분은 악마라 해도 그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것까지도 방지하려고 하신다.
상속자
신성한 사랑에서 출생한 아들인 신성한 진리는 신성한 사랑이 교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상속자이다.
그 이유가 선은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성한 진리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진리 속에 내재한 신성한 선까지 거절하는 것이다. 진리가 영적으로 주님에게서 상속받을
수 있게 해주는 모든 것을 우리가 거절하는 셈이다.
악한 마음은 진리의 참 영이신 주님을 거절하고, 자기 속의 정신적인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상속물을
송두리째 먹어 치우려 든다. 더불어 이 마음은 하느님에 관한 모든 사상을 헛되게 해서 모든 선과 진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떠들려 한다.결국 자신의 쾌락 속에서 악에 선을 섞어 버리고,진리를 왜곡해서 신성한
품질을 파괴시킴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하려 든다.
이럼으로 악한 자는 모든 자기 능력이 전적으로 자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바, 그 능력의 사용에
대해 누구에게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이리하여“상속분을 가로채자”는 것은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을
주님에게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하게 된다.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거듭나는 가운데 나를 따르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주님은 곧바른 자를 아시고, 그들의 상속분은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우리로 주님과 하나를 이룰 때,거듭나는 사람,그리고 그 교회는 “주님의 상속”이라고 성경에서도
종종 불리우고 있다.
결과들
사악한 소작인의 악한 행동을 말씀하신 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다. 다시 말해 이 물음은 “소작인이 저지른 악한 결과는 무엇일 것이냐?”라고
206 사악한 소작인- 마태복음21장 33-43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주님은 그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악의 벌은 그것 자신의
인격과 조건에서 유래되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악인의 경우 자기가 받은 처벌이 주님으로부터 온 듯 여길 것이다.그 이유는 그들이 착각하기를,만일
그분이 하려고만 하시면, 아마 그분은 딴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까지도 그 결과에 있어서는 언제나 유쾌해지게
하실 수도 있을 거라는 착각이다.그러나 이런 착각은 아예 터무니도 없는 발상이다.주님은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시다.그래서 모든 생명,모든 기쁨은 그분 안에, 그분에게 근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주님과 분리됨을 뻔히 알고도 의젓하게 여기는 자는 모든 순수한 행복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이 사악한 자를 파괴하시고 벌하신다고 말해질 때, 이는 글자적 의미가 자연적인
겉보기에 따라 말해졌기 때문이지 영적 진리에 따른 것은 아니다.주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그 진리가 우리를 심판하되 우리가 그 진리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의존된다.그래서 주님께서는“나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고 말해 두셨다.
악은 스스로 자멸한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다.” 악한 자를 파괴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속의 사악함인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나는 세상을 멸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예수님은 말해 두셨다.비록 주님께서 만인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백방으로 애쓰시지만, 악인들은
천국을 받지 못한다.그 이유는 그들이 천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악인들은 인간 영혼에 천국을 형성하려
하는 영향력에 완강한 고집으로 거절한다.
포도원을 옮김
그러므로 불가피해지는 것은,포도원을 사악한 소작인에게서 되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작업이다.
십계명에 축적된 주님의 말씀 속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듭 나아지고 악의 지옥에서 구원될 것이다.
그들은 악이 죄가 되는 고로 금하고 선을 행한다.
그러나 선한 원리에 의거 살지 않는 이들은 구원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심정에 지옥을
만들기 때문이다.그래서 사후,그들은 지옥을 향해 가는 쪽을 스스로 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향에
지옥이 들어 있고 천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천국적 원리로 살아서 천국의 인격을 형성하기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천국은 어떤 장소에 있는게 아니라 천국이 되어 가는 인간의 인격 속에 있다.
진리에 의거 살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진리의 지식마저 잃는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는 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07
말을 지키리라”고 말해 두셨다.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에게 기쁨을
창출함과 같은 말이다.즉 우리는 포도원을 열심히 가꿀 것이다.“계명을 주심으로 당신은 내 것이 되어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나를 만드십니다.” “당신의 법령들을 깨우쳐 슬기를 얻었으니 모든 거짓된 길을
역겨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행하는 모든 이는 슬기를 가진다.” 그러나 “가지지 않은 자로부터는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마저도 빼앗을 것이다.”
계속되는 교회들
하느님의 섭리에서 한 교회가 기울어 질 때는 언제든지 주님은 그분의 포도원을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 또 다른 교회를 일으키셨다.주님의 오심은 유대 주의의 파멸 뒤 첫 기독교회를 구성하시었다.그
뒤 약 일 백년 후 첫 기독교회 역시 교리와 삶의 측면에서 부패되었을 때 주님은 그분의 재림을 영으로,
진리 안에서,즉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 담긴 내향적인 의미,영적 의미를 밝혀 주심으로 성취하시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새교회(the New-Church), 새 예루살렘(the New-Jerusalem)의 교회를 구성하시어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을 얻도록 섭리하셨다. 이 새교회의 진정한 모퉁이의 머릿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성에
관한 진리로 서 있고,세 국면으로 보여지되 한 인격인 한 분 하느님,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구신학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지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다. “만군의 하느님이시어, 하늘에서 내려다보
시어 이 포도나무를 보살펴 주십시오. 주님의 오른손이 설비하신 포도원이니이다” (시편 80: 14-15).
208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16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신성한 진리와 선을 거절함-
성서 본문: 마태복음 22장 2-14절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 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아라.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09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하늘 나라
하늘 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 속에 있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유용함(usefulness)의 나라이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현존은 인간 안에서 천국을 만든다. “왕”이란 여호와, 신성한 아버지, “왕중의 왕” 이시고,
“아들”이란 신성한 인성(Divine Humanity)이다.
혼인
신성한 존재,한 분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또는 신성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그리하여 진정한 결혼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에 존재하는데,각 사람의 거듭나는 수준에
따라서 있어진다.그리고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존재하되 각 사람이 완전해진 정도만큼,다시 말해서
각자의 심정 속에 있는 사랑과 지성 속에 있는 진리의 완전한 하나됨, 또는 그 둘이 결혼된 수준에 의거
존재하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결혼은 주님과 교회 사이에도 존재한다.그래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그분은
“신랑” 또는 “남편,” 교회는 “신부” 또는 “아내”라 불리운다.
신성한 선과 진리의 완전한 결혼은 아주 미미한 부분(ultimate), 즉 말단의 것들에서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라
는 신성한 인성의 영화 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신성한 결혼은 타락된 인간이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영적 결혼의 상태로 귀환이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혼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적 상태의 인격이 되게 해주듯,하늘 나라도 이런 결혼에 비유된다.그 이유는 하늘 나라는
그런 결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이라 해도 영적 결혼이라는 조건 속에 존재할 때까지
그는 정신적으로 천국 안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 결혼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의
재 연합인 것이고,이 연합에 하느님이 함께 연합되신다.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는 상태라면 그의 의지와
이해성은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말씀 속의 결혼
210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영적 결혼은 주님의 말씀의 글자 속에서 그 글자가 이중으로 표현되는 데서 암시해 준다. 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하나는 의지 속의 애정과,다른 하나는 이해성 속의 생각과 관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굶주린다는 것은 선을
갈망함에,목마르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관계된다.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인간 안에 영적인 결혼이
창출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추상적 의미에서, “왕”은 내향적인 신성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이고, “아들”은
말씀의 글자에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서 그 글자와 영이 하나를 이루도록
하시어 인간으로 영적인 결혼을 생산하게 하신다.주님은 그분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그리고 인간이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하셔서 인간에게 천국적 삶의 기쁨을 인간 영혼에 있는 혼인 잔치로서 주시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의 그림
이 비유는 위의 사항들을 표징적으로 그려서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한 임금이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잔칫날 이전 적당한 때에 종들이 손님들을 초대하러 파견된다. 때로 잔치의 정확한 날과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잔치가 있게 될 것을 예고하러 보내지기도 한다. 그리고 잔치 준비가 마무리 될 때 두
번째 부름을 위해 종들이 파견된다. 처음 때에 초대에 응하겠다고 한 손님은 잔치집 주인이 오라고 할
때에 참석할 것이라는 서약을 이미 해 놓은 셈이다. 따라서 오라고 부름 받을 때 거절하는 것은 자기들의
서약을 위반하는 것이 되고,그 주인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되고 만다.
역사적 의미
위와 같이 주님의 오심은 예언자들에 의해 미리 말해졌었다. 비록 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히 고정되지는
않았었다 해도,이미 인간들은 초대받은 상태로서,그분의 오심을 위해, 또는 그분이 가져오실 영적 잔치를
위해 그들 스스로 준비하도록 미리 예고된 것이다.그래서 주님은 오실 때가 되시자,그의 종 세례자 요한을
앞서 보내시어 그분의 오심을 알리면서 회개와 개혁을 통해 잔치에 참석 가능한 준비를 인간이 마무리하도록
하셨다.이렇게 신성한 왕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만드셨던 것이다.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11
아들 또는 신성한 사랑이 바깥쪽으로 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
개인적으로 우리 각자는 이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름 받고 있다. 우리를 오라고 하기 위해 보내진 종들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진리들이다.모든 진리는 우리로 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함으로 주님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다.이 진리를 듣고 읽는 모든 각 사람은 사랑과 지혜,또는 선과 진리 속에서 있게 되는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져 있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다.” 직역하면 “그들은 올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일 것이다. 즉 인간들은
자연적인 애정 속에 있는 감각적 상태에만 머물고 있어서 영적 마음의 상태 안으로 진입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그래서 문제점의 발단은 인간의 의지 부분이었다.인간들은 자기들이 지닌 자유 의지를 남용했던
것이다.인간은 자신을 회개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마음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적 응용
역사적으로, 거룩한 말씀의 초대장을 받아 쥐고도 영적인 잔치에 가지 않았던 이들이란 말씀의 글자를
쥐고 있었으나, 그 말씀의 예언이 성취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분을 거절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잔치에 이미 초대되어져 있었고 자기들도 그 초대를 수락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상해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본문에서 종을 파견했듯이 그분의 사도들을 파견하시어 유대인들을 잔치에 오라고
부르신 것인데,이 초대는 그들에 의해 거절당해졌다.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선포한 잔치 따위를 바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들이 바랜 잔치는 자신들의 자연적인 악들을 위한 잔치요,그 잔치란 자신들이 타국가를
지배하고 싶은 잔치일 뿐이었다.따라서 주님의“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게 아니라 “영”에 속한 나라라는
것, 그 나라에 들어가 즐기려면 자아를 부인하는 회개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들이 배우게 되었을
때,그들은 그 가르침을 지독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부르는데 회개와 개혁을 하지 않은 이들, 오로지 가진 것이라곤 자연적 수준의 마음뿐인
212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자들은 인격 측면에서 위의 유대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즉 그들은 자연적 마음,감각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찾는 마음,선함에 정 반대되는 이들일 뿐이다.
두 번째 부르심
“다시 주인은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즉 초대가 반복되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첫 초대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 유대인에게 있어졌었다.그리고 두 번째 초대(부름)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있어졌었다.역사적 인물을 떠난 넓은 의미에서 볼 때,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분에 관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을 가르치심에 의해 진리의 훈육이 각 사람의 이해성에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사항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훈육을 각 사람이 가지게 되었을 때,두 번째 초대가 있게 되는데,
이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애정을 일깨우심으로 그들의 의지에서 만들어진다.
이리하여,각자가 결혼이라는 정점에 진정 도달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인간의 정신적 본성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이 부름 받는다.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이해성이 결혼하도록,다시 말해
영적인 결합으로 두 부분이 하나 되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먼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은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속성을 가지셨는지, 우리의
속성은 무엇인지,그리하여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가르치신다.그 다음, 두 번째
초대로서 그분은 그분 스스로가 우리에게 연합하시겠다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기회를 제공하신다.그분은 모든 우리의 애정들을 순수한 생명,천국의 생명으로 채우시겠다고
우리에게 제의하신다.
잔치
초대받는 저녁 식사나 파티는 상대방과의 유대를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선용 속에서 주님을 친구로서 여기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바랠 때, 우리는 그분의 잔치에
참석하는 셈이 된다.우리가 주님의 법을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여겨 순종 할 때,우리는 그분을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이다.그분이 말하시는 바,“내 계명을 새겨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킨다면,너희는 나의 친구이다”라고 일러두셨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13
터 그분은 영적 잔치를 준비해 놓으신다.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기쁘게 사랑하는 만큼에서 진리의 사랑을
채워 주신다.우리가 영적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그분은 우리의 지식과 애정,진리와 선들과 결혼하신다.
이와 같은 잔치가 교회에 있는 성만찬이요, 이 만찬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진리의
포도주와 사랑의 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영적 결합(communion)이라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신실한 사람의 심정은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그분에게서 흘러 나와 유입되는 생명에로 그의
심정을 더 활짝 여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서로 서로 더 사랑하는 연합으로 더
친밀해지도록 해준다. 우리가 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더 증가되듯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이 배가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잔치에 부르시되 우리 인간의 모든 부분,즉 의지와 이해성,그리고 행동 측면이라는
모든 부분에 걸쳐 부르고 있으신다. 종교는“믿음만으로”도 아니요, 사랑 측면만으로도 안되고, 선한 일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종교는 선한 일속에서 믿음과 사랑이 하나되는 결혼 속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 삶에 있는 즐거움을 부정하는 금욕적 생활 속에 있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주님을 사랑하는 영이 고루 퍼짐으로서 순수해지고 고결해지는 삶의 충만함 속에 존재한다. 그분이 계신
마음은 기쁨이 있고,그분의 오른 손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존재한다.이것이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즐거움이다.
짐승과 천사
인간은 동물과 천사를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짐승같이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자연적인
것이나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자기가 지닌 본성을 남용하는데서,자연적 삶과 영적 삶을 이혼시키는 데서,
인간 속의 두 본성 사이에 꼭 있어야 할 결혼이라는 원칙을 실제에서 부정해 버리는데서 비롯된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애정들이 질서가 있다면, 그것들은 수준 여하를 막론하고 제 위치에서 그것 나름대로 정상적인
것이다. 이 모든 애정들의 품질의 좋고 나쁨은 각 애정에 있는 내향적인 생명에 의존된다. 만일 우리가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서 그 애정들이 사용되게 몰아친다면, 게다가 타인 속의 선한 어떤 것을 경외하지
않으려 한다면,우리의 애정은 이기적이고 악한 애정이 되고 만다.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 애정들을 사용한다면,그분이 삶의 더 좋은 품질로 채우시기를 바랜다면,우리 속의 자연적이고 육적인
애정이라 해도 영적인 것들과 질서 있게 연결을 맺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신체가 그 속에 내재하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경우나 같은 것이다.
214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인간은 먹고 마시는 감각적인 삶을 즐기되 그것을 순수한 차원에서 즐기도록 설비되어 있다. 만일 어떤
이가“살기 위해 먹는다”고 한다면, 그는 먹는다는 것을 즐기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먹는 것이
그에게 유용하기 때문이고 먹는다는 목적이 실제의 먹는 것과 맞아떨어진다.그러나 만일 그가“먹기 위해
산다”고 한다면 그는 그의 목적을 감각적 즐거움이나 이기적인 즐거움에 두게 되어 결국 그 사람 전체는
이기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행동들은 본인의 인격의 품질을 형성하는데 참가하기 때문이다.
준비
종들이 손님들을 부르러 나갔을 때,그들은 자기들 주인의 이름으로“보라 잔치상이 다 차려졌다”고
말했다. “보라(behold)!”란 어떤 문제에 대해 초대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말이고, 그렇게 해서 그들 앞에
어떤 사건을 뾰족하게 가져다 놓으려 할 때 사용되는 말투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알 뾰족한 기회를 주고 있다.
“내 황소와 살찐 짐승들을 잡아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짐승이란 우리 속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원리 중에서 순진이라는 원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어린 양이라 불리우셨다. 그리고 예수님께
서는 헤로데를 여우라고 불러서 여우가 표현해 주는 감각적 교활함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짐승 중에서
황소는 자연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이 애정은 우리가 매일마다 틀림없이 실지로 해 가는 애정,즉 일하는
애정인 것이다.따라서 황소는 삶 중에 있게 되는 실제적인 애정,일하는 애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황소는
삶에 있게 되는 선함 중에서 외적인 선(external good)을 표현한다. 그러나 살진 짐승(fatling), 그 짐승이
어리거나 조금 성장한 경우까지 포함해서,이 짐승은 우리의 두 번째 출생,즉 거듭남 속에 존재하는 애정인
내적 또는 영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따라서 이 짐승들은 영적인 선을 표현해 준다.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충만된 삶에는 황소와 살진 짐승이 음식으로 준비되어 있다. 즉 자연적인 애정과 영적인 애정이
선하다는 말이고 두 가지 모두가 거듭나는 사람을 위한 양식이라는 말이다. 타락하는 사람은 속으로나
바깥으로나 모두 무질서한 상태인 반면, 거듭나는 사람은 안과 밖 모두가 질서 속에 있고 자유롭고 충만함
속에 안주한다.주님은 사람들을 부르시되 각자가 충만케 한 삶에서 잔치에 부르신다.그 이유는 각자가
노력해서 채워진 충만한 삶이란 순수해진 상태의 모든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충만하고 유용한
삶을 위해“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주님은 거듭 나는 삶의 기쁨 안에서 그분 자신을 인간과 하나가
되도록 추구하신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15
사람들의 응답
위와 같은 주님의 초대에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응답을 할까?필시 모든 사람들의 경우,자기는 진리를
사랑한다고,자기는 선을 행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 말에 대한 테스트가 자기 앞에
실제로 놓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삶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선호하는
때가 허다하다.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
손님들이 잔치에 불려졌을 때, “그들은 그 잔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즉 매우 적은 성의를 그
잔치에 보였다는 말이거나,그 잔치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도 될 것이다.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 이기적인 마음이 불리워질 때, 그 마음은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회개나 전환
같은 자신의 변화를 생각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에 천국의 삶은 지상적 쾌락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한게
하나도 없는 듯 여겨진다.그래서 악한 마음은 천국 삶을 뒤집어서 지상적 삶을 그 위에,천국적 삶은
아래에 처박아 놓는다.그런 다음,“그는 자기를 만든 하느님을 저버리고 그의 구원의 바위를 경솔히 평가한다.”
길
“그들은 제 각기의 길을 갔다.” 이 길이란 정신적인 길,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표현한다.
좋은 의미로 볼 때,길은 선을 달성하는 방법인 진리를 표현한다.본문의 경우 나쁜 의미에서인바 길은
악인이 행하는 방법인 거짓 원리들이다. 이 길은 주님과는 거리가 멀고 자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인 길이다.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주님과 분리시키며,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서도 자신을
분리시킨다.
밭과 장사
216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자기 밭”이란 그 사람의 의지 또는 심정, 그 사람에게 특유한 애정에 있는 원리들에 관계된다. 그
이유는 밭이란 작물이 자라 오르는 땅이요,물이 진리를 표현하는데 비해 땅은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밭과 대조가 되는“장사”란 정신적으로 사고 파는 것인 이해성에 있는 생각들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천국적인 애정과 생각들을 사양하고,대신 자신의 삶의 종류인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지옥적인
결혼에 이르는 것을 선호한다.
인간이 거듭나는 삶에 있게 되는 천국적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그러나 모든 역사는 이러한 거절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다.
아마 지상적인 왕이 자신을 초대한다거나,권력자가 자기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경우,그 초대를 우습게
여기거나,그 초대의 중요성을 경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그런데 우리의 천국의 왕이 초대하는 것에는
경멸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대조적일까? 그러나 감각적인 인간이 영적인 선과 진리의 삶에 하등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밭이라든가 장사한다는 것은 그 본연의 모습으로는 매우 좋은 것이다. 한 마디로 필요한 것이요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그러나 그것들이 심정,그리고 육체까지에 이르러 온통 관심사를 독점할 경우, 그것들은
우리로 덫에 걸리게 하고 만다. 따라서 자신이 쏟는 외적 삶이나 일에 대한 관심의 양이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그 관심의 품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즉 그가 영적인 목적이나 선용을 위해 관심을 쏟는다면,
그 일은 유용한 것이다.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것들만에 정신을 쏟다 보면,주님의 진리가 주는 모든 선한
영향력을 그들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종들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 마음에 주님이 아껴 두신 선하고 신성한 상태(remains)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된다.이렇게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이 주님의 종들이다.그러나
인간이 에집트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게 되면,그들은 금방 진리에 반대하는 흥분을 갖게 된다.이 흥분
결과를 본문은 말하기를, “그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고 기술해 놓고 있다.
첫 초대는 가르침을 통해 있어졌다.두 번째 초대는 주님이 아껴 두신 것(remains)을 통해 의지에 전달되었다.
악한 자가 이러한 주님의 종들을 붙잡았다는 것은, 그들이 말씀 속의 진리를 광폭한 의지로 반대했다는
말이다.그들이 종들을“때려 주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해성이 진리들을 반대했다는 것으로 종합해서 말하면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조롱하며 경멸했다는 말이다.그 결과 그들은 종들을“죽였다.” 이는 그들이 일상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17
생활 속에서 진리에 반대되게 살아서 그 진리 속의 생명을 그들 스스로 파괴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예언자를 얼마나 자주 죽였는지,아예 신성한 예언자,예언자 중에서 가장 큰 예언자이신
예수님까지 죽였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너의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황폐해지리라.”
심판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떻게 되어 갈지를 주님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주님이 들으셨다고 말해질
경우,이는 주님이 들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이 인식했음을 의미한다.즉 왕이신 진리가 인간에게 각자의
상태를 까 벌려 줄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심판을 말하고 있는바,이는 인간이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결과이고,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에 마땅히 있는 선한 직책의 수행을 인간이 거절한 탓에서 비롯되는 심판이다. 인간이 신성한 진리의
실용적인 사용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확증을 자신 스스로 가져 버릴 때,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그러나
그 진리를 경멸하고 남용하고 있으면,그 진리는 그들을 심판에로 가져다 놓아준다.이 진리들은 영적
삶의 법칙들이다. 그래서 그 진리들은 당사자가 되어지고 싶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들 속에 남아 있도록
판결해 준다.
이리하여 인간이 자기 인격 속에 채워져야 할 용적을 다 채우게 되었을 때, 그는 필시 심판에 서게
된다.심판이란 자기 인격의 결과,또는 그 인격이 만들어 낸 바깥쪽의 것들이다. 자기 인격이 고정될 때,
그 심판은 마무리되는 것이다.만일 인간이 기억 속에 진리를 가지고 있고,심정 속에 선한 나머지들을
저장해 놓고 있다 하자, 그런데도 그가 주님의 종들인 내향적 진리에 반대되게 자신을 끌고 가려 한다면,
그는 그만큼 더 자신이 사랑하여 살고 싶은 악의 형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판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은 군대가 되어 심판을 집행한다.사실 주님이시든,진리이든,
거기에는 어떤 분노도,복수도 존재하지 않는다.분노란 악인 속에 존재하며, 단지 그 분노가 주님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여겨지는 이유는 하느님에 관한 모든 각 개인의 사상은 당사자들의
인격으로 색칠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설사 인간이 악하다 해도 그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분의 진리를
218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보내실 때,악인은 그 진리를 뒤집고,그것을 자신의 지성 속에서 왜곡시켜 거짓으로 만들어 버린다. 진리를
잡고 있는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은 이와 같이 진리가 왜곡되어 만들어진 거짓이다. 본문에서의 군대들이란
악인의 이해성 속에 들어앉은 거짓들이다.주님이 화를 내신다고 간주하는 사람의 경우,실제의 분노는
그 사람의 의지 안에 든 악인 것이다. 마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더욱 멀어져 갈 때 이
악에 든 거짓 원리가 선과 진리의 살인자를 오히려 파괴해 준다.
동네를 불사름
“살인자의 동네는 불살라졌다.” 즉 거짓 원리들은 인간 마음에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들까지 파괴한다
는 말이다. 동네(city)란 마음에 있는 질서 정연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영을 보호하면서 영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불은 사랑을 상징한다.그러나 뒤집어진 사랑,악한 사랑은 탐욕이다.이와 같은 사랑은 악하다. 이
악은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그나마 남은 교리라는 동네를 불사른다. “악이 사악한 자를 죽인다.” 악은 인간
자신들 안에 존재한다.
악은 태워 없애 버리는 불이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악인들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있다고 말해진다.
사실 그 불은 악인들 속에 있는 것이다.그들이 자신을 더 악한 데로 빠지게 하면 할수록,그들은 스스로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들을,모든 천국적 결혼을,주님의 현존과 영향력에 속한 모든 것을 더욱 더 파괴시키게
된다.역사적으로 볼 때,유대인 속에 있던 이런 악한 사랑, 악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만들었고,스스로 심판하게 했던 것이다.주님의 혼인 잔치에 오지 않겠다는 이들은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이들이요,일상 생활을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시킴으로 신성한 선을 사랑하지도,채용하지도
않겠다는 이들이다.
두 번째 집단이 초대됨
이제 왕은 초대의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손님 집단을 잔치에 부르고 있다.그래서 왕은 종들에게“‘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 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그가 영적 삶의 가치를 이해하여 음미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19
때,거듭나는 속에서 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할 때, 인간다운
자격이 있는 것이다.인간으로서의 값어치가 있음,또는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자연적 품질이나 그의 주변 환경에 의존되는게 아니라 그의 거듭나는 상태에 달려 있다. 한 마디로 천국적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인간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비록 그 진리가 가르쳐진 사람에게 거절되긴 했지만,그 진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즉 무지로 인해 거짓 속에 처박혀 있던 마음에서 그 거처를 발견한다.이들을 가르치심으로
주님은 그들과 하나를 이루게 된다.
거리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나 길에서 불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신적인
길이란 마음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는 방향 또는 길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인 길이
어떠한지는 그 사람 속에서 통치해 가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큰 도로(highway), 또는 주요 도로란
마음의 중요 도로이다. 길, 진리, 또는, 교리, 이것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은 그의 통치하는 목적을 향해
여행한다.본문의 거리라는 단어를 보다 더 직역한다면,“큰 도로가 갈라지는 곳,” 즉 교차로(네거리)라고
볼 수 있다.천국으로 가는 큰 도로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그러나 “큰 도로가 갈라지는 교차로”란
마음속의 간접적인 길,덜 명확하게 보이는 길,그래서 잘못 하면 평탄하지 못한 길로 들어 설 수 있는
곳이 교차로일 것이다.
씌어진 말씀을 가지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천국으로 가는 직선 도로를 알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거짓 교리나 잘못된 견해라는 교차로에서 배회하고 있었다.한 마디로 그들이야말로“어둠 속에서 길을
걷던 백성들”이었다.교회라는 측면에서의 유대인들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그래서 이방인들이 새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아졌다.그들은 무지했던 가운데 일부는 마음이 선의적이었고,또 일부는 악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방인의 상태와 유대인의 상태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은 정신적
삶의 큰 도로인 그분의 직접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로 자신들의 악에서 되돌아서게 하실 수 없을 때,
그분은 그분의 종들인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우리 마음속의 이방인 상태인 자연적 마음속에 남은
선의적인 상태에 호소해 보도록 파견하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는 종종 그분이 보여주시는 명백한
도로로 여행하기를 거절하는 바,결국 그분은 우리를 정신적 삶의 교차로에서 만나신다.이 지점은 주님이
우리를 간접적으로 만나시는 방법, 아마도 훈련이라는 것을 허용하심으로 우리와 만나질 수 있게 인도하시는
220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방법이다. 이리하여 천국 가는 길은 각자의 상태에 알맞은 처방에 의해 결국 당사자에게 매력적일 수 있게
된다.이렇게 해서 우리는“이것이 네가 걸을 길이다”고 우리 뒷전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손님을 데려옴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우리의 감각적인 마음에 의해 경시되고 있던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은
우리 생각과 느낌의 교차로,옆길인 간접적 방법까지 동원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이 진리들은 마음속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연적 마음속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려고 애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보내져서,가능만 하다면 모든 것이 거듭 나아가도록 추구하기 때문이며,하늘 나라와 영적인
결혼 잔치는 인류에서 온 손님들로 메워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고 있고 신성한 섭리 역시 모든 이에게 작용한다. 특정한
누군가가 지옥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있지 않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신성하게 의도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다.영의 혼인 잔치는 모두를 위해 차려져 있다.그 잔치에 참석 않는 자, 또는 잔치하는
동안 남아 있지 못하는 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베푸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의 이기적이고
악한 삶을 기꺼이 떨구지 못하는 자들이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잔치를 준비하고, 손님들이
다 모이면 주인은 그들을 보고 말을 건네면서 인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다. “임금”이란 주님이시다.
그분이 손님을 둘러보신다.인간의 마음 안에 더 많은 신성한 영이 흘러들면 인간에게 심판이 산출된다.
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그는 자기 악을 더 많이 꺼내서 치워 버릴 것이나,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그는 자기가 아는 선과 진리마저 더욱 거부할 것이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도 친구의 차원에서 말을 건네고 있다.보다 더 직언 하면 이 친구(friend)란 안면이
있는 사람(acquaintance)이라 할 수도 있다. 안면은 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 진리를 알므로 해서
주님을 알고 있는 자,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따라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예복 (the wedding-garment)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21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갔을 때,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다.다시 말해 그 사람은 때와
장소에 알맞은 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대목을 글자대로 읽고 요즈음의 상식까지 동원해서 생각한다면
예식장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지 않는데 대한 처벌로는 너무 매정하고 불공정한 처사일 듯 보일는지 모른다.
사실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초청 받은 상태이니 어쩌면 집에 돌아가 잘 차려 입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예식장에 왔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시대의 고관 대작들의 상설된 연회장에는 언제나 여유 있는 예복을 비치해서 손님이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그렇게 해서 잔치에 오는 손님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다.만일 그런 편의 마저 마다하고 예복을
입지 않으면 이는 주님을 우습게 여긴 격이 되고 만다. 따라서 연회장의 규칙을 위반한 자는 그 집에서
쫓겨나야 할 것은 지당한 것이다.
이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이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 영적 혼인 잔치에서 자신을 축출시킨 것이다.
신성한 성경 내의 여러 곳에서 사람이나 천사의 의복,주님의 의복을 언급해 주고 있다.일례를 들면, 예수님의
변모하심에서,그분의 외모 변화는 그분의 겉옷까지도 변화시키게 해주었다.겉옷 또는 의복은 진리들을
표현하는데,마음을 옷 입히고 있는 것이 진리이다.모든 애정들은 그 애정에 부응되는 진리로 입혀지고
표현하여 그 애정을 드러낸다. 활기 있는 강력한 애정들은 그 자체를 박력 있는 생각과 언어로 옷 입히고
있다. 그러나 냉담하고 꿈 같은 느낌은 쉽고 온건한 생각과 말들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예증
시편 104편에서 우리가 주님에 관해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라고 읽게 된다. 빛은 진리의
상징이고,진리는 마음의 빛이다.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옷을 입으신다. 주님의 겉옷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 거룩한 성아 네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었다.
정신적인 결혼이 선과 진리의 하나됨 또는 사랑과 지혜의 하나됨이듯, 예복을 차려입음은 사랑되어
실제에 쓰여진 진리,즉 사랑과 결합한 진리이다.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붙잡고 있는 진리는 결혼 예복을
입은 상태가 아니다.그 이유는 그 진리가 애정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준비해 놓은 옷으로 치장하지도 않고 혼인 잔치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란, 천국의 진리로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노력도 없이,선과 진리의 천국적 사랑과 영적인 결혼도 하지 않은 채,자기의 일상
생활에서 선과 진리가 실지로 사용되어 확증하지도 않은 채, “믿음 만”에 의해 거듭나는 삶의 천국적 기쁨을
222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달성하여 즐겨 보겠다는 사람,그야말로 손도 안대고 코풀겠다는 항간의 말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는 인간으로 잔치에 오라고 부르고 있지만, 불림을 받는 각 사람은 그분의 초대를
위해 준비해 두신 임금의 옷장인 신성한 성경으로 자신들의 행동 지침을 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으로 자신을 옷 입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복을 입지 않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신성한 말씀의 부름에서 천국적 삶을 영위해 보려고 시도하고,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해보겠다고 작정하면서도 진리를 사랑해서 진리대로 살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
회개와 개혁은 자기에겐 필수 사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한 척 하는 사람을 말한다. 천국적 원리를 자신
스스로 받아 쥐되 인간 쪽에 할당된 의무를 도외시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천국을 허락하실 수 없으시다.
천국적 원리를 받아 쥔다는 말은 그 원리로 자기 삶을 꾸려서 자기 삶이 그 원리가 진리임을 확증해 보여
자기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향해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가 말한 사항들은 지키지 않느냐?”
는 주님의 나무람을 우리는 상고해 보아야 한다.
주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보셨다”는 것은,신성한 진리의 현존은 그 인간의 진짜 인격을 그
사람에게 까 벌려 주신다는 뜻이다.
최상의 의미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인성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서
결혼되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넘치는 사랑으로 받는 신실한 마음은 주님에 관해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영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되도록 마음의 안쪽이 열리어 진다. 그래서 사랑과 지혜의 잔치인 그분의
말씀 안에서 주님과 상호 교통을 가진다.
이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모든 사람이 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 든 선하고 참된
것을 즐기도록 부르시고 있다.그분은 모든 이에게 이 잔치를 즐기도록 홍보하시되,참석자는 반드시 자신들을
정신적으로 옷 입혀야 한다는 것, 즉 삶의 계명인 말씀의 글자 속의 진리로 그들의 정신을 옷 입혀야 한다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23
일러두신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실생활에 사용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지닌
진리에 대한 이론뿐인 지식은 천국적인 잔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잘 치장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 속에서
그는 진리의 삶도 없이 존재하는 인간으로 보여질 것인바,그는 기껏 소유한 진리의 지식마저 잃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저 세상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 실습해 쌓아 놓은 삶에 속한 것들뿐이기
때문이다.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도,사용하려 들지도 않은 이들은 그가 지닌 이론적인 것까지 모조리
저 세상에서는 거절당한다.
만일 이들이 천국에서 자기들이 지녔었다고 하는 믿음을 근거로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즉각
천국의 밝은 빛이 그들 마음에 비쳐질 것이고,그 빛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진짜 인격이 어떤 모습인지,
천국의 진정한 속성은 그들 속성과는 전연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준다.
할 말이 없음
위와 같은 사람들은 비유 속의 사람 같이“할 말이 없다.” 즉, 그들은 천국적 삶을 위해 자신이 부적당함을
확인하게 되어 어떤 변명도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언어란 생각의 표현이다.할 말이 없는 자란 자신의
방어를 위해 말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고,표현할 생각도 전연 없는 자이다.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는
천국적 삶에 관해 생각 조차 해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 진리로 정신적인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묶음
악이 애정과 은밀한 생각까지 지배토록 되었을 때,악은 그 인간으로 죄의 노예가 되게 묶는다.“죄를
짓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종이다.” 이리하여 왕은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사람에 관해 그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으라”했다.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마음의 외면과
내면에 있는 능력과 자질을 묶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손은 위쪽에서의 말단이고 발은 아래쪽에서의
말단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손과 발 모두는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는바 손은 일로,발은 걷는 것으로 제
능력을 발휘한다.
224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이러므로 악은 죄에다 인간 전체를 묶는다.그래서 악인이 타인에게 악을 행하는데서 제지당할 때,
그 악인은 주님이 그들을 묶는다고 말하지만,사실 그들이 자신의 악으로 자신을 묶는 것이다.실지로
주님은 이 악인들에게 다가 가신다 해도“그들이 포로됨에서 자유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억류해
놓은 감옥을 열어 자유를 주시기를 바래서일 것이다.
내어쫓음
악들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내어쫓는다.멀어진 인간의 인격은 주님을 더욱 더 적대시하여“사람의
자,곧 천사의 자”라는 표준에서 더욱 멀어져 간다. 그는 천국적 결혼에서 자신을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바깥 어두운데,즉 거짓에 자신을 던지고 만다.
거짓에는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무지 또는 가르침의 결핍으로 인한 거짓인데,이는 변명할 수 있는
거짓도 된다.또 하나는 악의 거짓,이는 내심에서 오는 의도적인 거짓이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후자는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진리를 사랑하지도,행하지도 않는 마음이요,이 마음이 있을 곳은 바로 바깥(지독하게)
어두운 곳이다. “만일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두움이야말로 얼마나 큰 어둠이겠느냐.” 어두움의
두 종류가 이사야 60장 2절에서 거론되고 있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인간이 가진 빛이 크면 클수록,그가 그 빛을 거절할 때 있게 되는 그의 어두움은 더욱 더 짙어 진다.
태양이 병든 눈을 거절해서 피하는게 아니듯, 인간을 거절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그 인간의 병든 마음인
것이다.
통곡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운다는 것”은 의지의 불행한 상태를 암시한다. 그 이유는 그
인간은 악으로 인해 필시 불행을 자초하고,자기 욕구를 채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를 갊, 또는
가슴을 침”이란 지성이 불안한 상태이다.이 지성은 진리와의 격렬한 충돌 속에 있을 것이고 진리의 빛이
그 지성을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부름 받음과 선택받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25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글자대로 보면, 이 말은 히브리 군인들과 관계가
있다.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부름 받아 등록된 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남자들은 열병을 거쳐 그 전투에
적절한 숫자만이“뽑혀졌다.” 그래서 히브리 군인들은 바후림(bahurim)이라 불렸는데, 그 뜻은 “뽑힘, chosen”
이다.
영적으로 불리운 모든 사람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들은 이들이다. 뽑힌 사람이란 진리를
듣고,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행동에 옮긴 이들이다.즉 주님의 진리를 실제 삶의 원리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인간의 구원은 진정한 교리를 아는 지식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아는 교리에 따라 살아간 정도에서 구원되어진
다.그렇게 산만큼 그는 자기 지식과 그의 사랑이 영적으로 결혼한 것이고,자기와 주님이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주님과 함께 있는 그들은 불리우고,뽑히었는바 성실한 이들이다.”
많음과 적음
영적으로 숫자는 양을 표현하지 않고 질을 표현한다. 뽑힌 적은 사람들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이라는 선한 삶에 필수적인 원리들을 잘 배양해 간 사람들이다. 불리운 많은 사람이란 악한
사람 속에 있는 수많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살아온 모든 이들이다. 주님은 선함의 혼인
잔치에 만인을 초대하신다. 이런 그분의 은총 있는 초대는 제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제각기 다른 영접과
취급을 당한다.주님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인을 위해 해 두신다.그러나 인간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하신다.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말인가?” (이사야 5:3,4,7).
차이점
226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마태복음22장 2-14절
오늘 비유는 앞의 비유“사악한 소작인”과 매우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앞의 비유는 이해성의 상태에
관계되는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고,오늘 비유는 의지의 상태에 관련되는 선을 거절함이다.
예증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에 진입하기를 바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습은 오늘 날 사회에서의 결혼 관념이 매우 흐트러진 상태에서 쉽게 예증된다. 사실 어떤 한
쌍이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결혼 상태는 대체로 그들이 살아가는 주위 공동체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깊다.
얼마나 그 공동체가 결혼의 천국적 근원을 암시해 주고 잘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공동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상적이며 감각적이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결혼한 부부의 상태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악영향으로 많은 남녀들이 오로지 세상적 동기만을 가지는데 급급하여 결국 결혼의
거룩한 용도를 뒤엎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새교회인은 자기 나름대로 수행할 어떤 의무를 가진다.
사실 우리는 주위 공동체,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자신의 경우만큼은 자신에 의해
조절이 가능하리라 본다.우리는 내적 결혼과 외적 결혼 사이의 관계를 가르치고,그 본을 보여 줄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 자녀만큼은 사회에서 우세해져 가는 결혼에 관한 참담한 거짓들에 빠지는 것에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예방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신실한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원인에서 결혼하는
남녀들, 또는 결혼 관계를 우습게 여겨 그 본성을 쉽게 변질시키는 남녀들은 영적 파멸을 향한 긴 스텝을
밟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직시하여 이를 합리적으로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적이든
외적이든,결혼을 우습게 여겨 버리는 이들에겐 화가 있을 뿐이다.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파멸이 바야흐로
있어지기 때문이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복을 내리시는 주님은 천국적 삶의 혼인 잔치에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영적 결혼을 달성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는 진지하고 순수한 외적
결혼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27
17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재림의 표시-
성서 본문: 마태복음 24장 32-35절
32.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4.
나는 분명히 말한다.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35.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새 생명
이 비유는 두 번째 오심과 관련이 있다. 인간을 향한 신성한 영향력은 그 힘이 올 때마다 새로운 처방을
가지고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데,이는 인간들에게 보다 더 크게 우세해진 선과 진리에 의해 점철되어진다.
인간이 선과 진리에 무관심하다가 결국 그것들에 반대할 때, 주님은 이전에 인간에게 보여진 형태와 다른
형태로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그것을 인간이 기꺼이 원해서 그 원리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새롭게
갱신되면서 응용할 수 있게 배려하신다. 더 나은 것에로 되돌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은 그들 생활에 있어지는
228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마태복음 24장 32-35절
더 많은 실제의 선에 의해 두드러진다. 이런 실제의 선함이 증가함은 인간 구원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새로운 유입에 대한 표징이기도 하다.
여름철 새 생명의 활동은 가지가 연해지고 새 잎이 돋아남을 보고 알듯이, 새로운 활동은 새 생명에
대한 표시인 것이다.
이 비유 앞문단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과 그 재림이 가져올 교회와 세상에
있을 결과에 대하여 말하셨었다.상징의 언어로 악의 파멸과 선의 쾌거를 초상화 해주신 것이다.
일어나는 것들
본문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구절은 이 비유 앞의 구절들이다. 즉 “그런 재난의 기간이 지나면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모을 것이다.” 이것들이 본문에서 말하려 하고 있는 것들이어서,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영적 의미
그러므로 오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이런 일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에 대해 어떤 윤곽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비질서적 삶 속에서 결과되는 사랑과 믿음의 손실로 인한 첫 기독교회의 파멸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다.해가 어두워짐이란 빛의 손실,즉 주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야기되는 신성한
진리의 손실을 표현하신 것이다.그리고 달이 빛을 잃는다 함은 믿음의 손실을 표현하는데,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함을 실패한 연유에서이다.별들이 떨어짐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손실을 표현한다.
“하늘의 권능(모든 천체)이 흔들린다”는 것은 교회의 기반이 위와 같은 손실로 해서 깨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주님이 처방하셨던 첫 기독교회는 끝이 오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신성한 진리로 다시 오시어서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자,영적 생명 때문에 심히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게 된다.이를 위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29
주님은 거룩한 말씀의 내면에 있는 영적 의미를 밝히 알게(계시)해주셔야 했던 것이다. 이 영적 의미 속에
있는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선하고 신실한 자들을 함께 모아 새 교회를 건설하시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 새교회의 시작과 그 시작의 표시가 될 것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나무들
나무들은 생생하게 살아 성장하는 마음 속의 원리들을 표현한다. 성경 속에서 나무들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많은데 그중 특별한 나무의 언급으로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가 있다. 상징적 언어에서
이 세 나무는 인간 삶의 불연속적 등차인 천적 등차, 영적 등차, 자연적 등차를 표현한다.
올리브나무로 표현되는 천적 등차(the celestial degree)는 주님을 사랑하는 등차요, 마음과 삶 속에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함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이에 해당되는 바, 그 사람의 의식 세계에서의 원동력은
주님을 사랑함이다.이는 또한 선을 사랑함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포도나무로 표현되는 영적 등차는 이타애의 등차 또는 이웃을 사랑함이 원동력이 되는 사랑으로 진리를
사랑함을 원동력으로 삼는 이들이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로 표현되는 자연적 등차는 법에의 순종을 사랑하는 등차이다. 이는 행동면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을 사랑함인데, 때로 이 등차는 주님을 사랑하는 의식 세계나 진리 속의 원리들을 확실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존재한다.이와 같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등차,자연적 인간, 또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표현해 준다.동시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또는 외적인 교회를 표현하는데,이러므로 해서 내적 또는 영적
교회와 구별된다.
그중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무화과나무를 거론해 본다면,이 나무의 가지는 인간의 애정들이고,이 애정들은
그 사람의 원동력이 저장된 창고, 즉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으로부터 모든 측면으로 가지(애정)를 뻗쳐
간다.그리고 그 잎이란 진리를 생각함이요,이 생각들은 그 사람의 애정에서 발출된다.
연한 가지
230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마태복음 24장 32-35절
따뜻해지는 봄이 되돌아오면,나무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우선 가지들이 물이 차서 연해지면서
새 잎이 돋아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새 삶이 일어나면 그 사람의 애정들은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그런 부드러운 애정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튀어나와 진리에 관한 새로운 상태에 진입하여 새 삶의 발달이
이루어진다.인간 속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의 영향력은 나무의 수액(sap)과도 같아 애정들을 더 새롭고
부드럽게 해주신다.
우리의 신체 속에서도 부드러운 부분들이 더 활기가 있어 생명이 더 가득 차 있다. 딱딱한 부분, 즉
뼈나 피부, 머리털 등은 활력이 가장 적어 생명을 수용하는 신체의 그릇 중에서 가장 적은 생명을 지닌다.
나무에서도 생명과 성장은 딱딱하게 고질화된 부분이 아닌 부드럽고 연한 부분에서 있어진다. 겨울 동안
나무는 딱딱하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따뜻한 계절은 새 생명을 가져다주어 그 가지들로 연하고 부드럽게
하여 새 잎이 돋아나게 한다.
따뜻한 계절
따뜻한 계절은 열과 빛이 다함께 존재하여 하나로 작용할 때이다. 우리의 삶과 성장에 있어 따뜻한
계절은 진리의 빛과 사랑의 따뜻함이 존재하여 하나로 묶여 작용할 때이다. 우리의 정신적인 여름은 우리
속에 새 생명이 활동하는 때이다.그 때란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있어지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이 하나됨은 우리 삶의 원리의 결실인 선한 행위가 생산된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우리의 의지가 부드러워지는 시작에서, 자아 사랑이라는 딱딱함이 그 딱딱함을
덜 보여 줄 때,그러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부드러움이 더 증가될 때 우리 곁에 바짝 붙게 되고,이 새로운
부드러움으로부터 우리는 정신적인 잎인 진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새 삶의 증거로서 산출된다. 즉
모든 적극적인 애정은 생각과 상응되는 것들을 계속 생산해 간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지성이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태, 수많은 생각의 다발들이 발견되는 곳에서 늘 발견되는
것은 그 사람의 그런 상태는 그 사람의 어떤 애정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지적인 활동이
영적으로 선하고 참된 생각 속에 있을 때,선하고 유용한 일 속에서 그 자체를 체현해 내게 되므로,이는
그 사람에게 정신적인 여름이 가까웠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해준다.
그렇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영적인 여름의 가까움은 시간 속에 있지 않고 상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자연계에서는 시간과 함께 온다.그러나 정신 세계에서는 상태나 상황들이 함께 오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31
“좋은 때가 온다는 것”은 좋은 상태가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옴은 우리가 그 상황 안으로 진입한다는
말이다.
새 성장
새교회가 주님에 의해 형성되어질 때, 그 교회의 성장에 대한 첫 증거들은 자연적 선함에 관한 생각들
중 더 널리 보급된 생각 속에 있게 된다.그 이유가 모든 진리는 실제에 존재하여,실제적인 결과를 끌어
내주기 때문이다.그래서 새 생명이 인간 삶에 작동되어질 때,그에 대한 첫 증거는 그 사람의 행동에
관한 생각에서 보여진다.
그리하여 새 생명이 작동을 시작하게 되면,우리는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도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옛 느낌과 생각을 부서뜨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옛 느낌과 생각이 부서질 때까지 새로운 삶 속에
그의 이해성의 새로운 상태나 새로운 애정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느낌과 생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옛 조건들을 포기하여 그것들의 성장을 저지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는 새 상태에 들어가는데, 마치
소년이 어른이 되려면 소년기를 넘어서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성장은 점진적으로 되는게 원칙이고,이는 거듭나는 마음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마치 씨에서 열매로까
지 가는 나무의 경우나 같을 것이다. 질서의 회복은 악과 거짓 그리고 죄들을 부수고 선과 진리 그리고
의로움의 성장이지만,이것도 점진적인 성장의 법칙에서 예외 되지 않는다.
옛 것과 새 것
그러므로 옛 조건들을 부수는 것은 새 것이 온다는데 대한 예언이다. 그 이유는 새 것의 영이 옛 것을
부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다. 지상에 인류를 보존하시기 위해 어떤
교회가 하강한다 해도 그 하강 뒤에는 반드시 새교회가 이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교회의 하강을 우리가
보게 된다면,그리고 그 교회의 파멸이 임박했다면,필시 새로운 처방이 있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눈치채야
한다.
232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마태복음 24장 32-35절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이렇게 우리가 알게 되는 이유가, 인류는 주님과의 의식적인 연결이 아니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존될
수 없다는 법칙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교회에 대한 처방이 빠른 하강 길에 접어들고 주님의 통로가 막혀버린
것을 보게 될 때,인간 구원을 위해 주님이 머지 않아 새 처방,즉 새교회를 구성하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비유는 구 교회의 하강과 새 교회의 일어남이라는 두 사건과 관계가 있다. 구 교회가 하강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 속에 악이 드리우고 거짓된 가르침이 우세해짐으로서 영적 진리에 대한 명백한 지식은
그 교회에서 더 이상 존재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바,이와 같은 명백한 지식과 이해성 대신,거기에는
수많은 분노하는 논쟁과 당파적인 편협된 신앙으로 가득 찬다. 이런 국면에서는 선과 진리의 진정한 품질을
인식하거나 보는데 영영 실패하고 말아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알았던 선과 진리마저 모독해 버린다.
이럼으로써 구 교회는 끝장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시대의 종말, the consummation of the
age” 이라고 일컫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번역 성경에서는 “세상의 끝, the end of the world” 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런 교회 상태의 끝에서 새교회가 시작되어 계속 인간들이 악에서 구원 될 수 있게 배려된다.
새교회에 관한 증거
이 비유는 인간의 자연적 평면에서 있게 되는 더 부드럽고 더 수용적이면서 더 유용한 삶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인간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새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로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어떤 효과 있는 원인도 없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의 성장이 있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더 향상되고 있다면,이는 필시 그 사람에게 그를 더 향상시키는 뭔가가 존재했던 탓이다.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뭔가가 그에게 왔다는 증거도 된다.
심판
옛 것과 비질서적인 자신 속의 상태들을 깨트리는 것이 옛 상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심판이다.
이와 같은 심판과 그 심판의 결과로 인간은 더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고 더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33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의 신체 조건에서 예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때로 사람들의 건강이 악화되어
열이 치솟을 때가 있다.이 때의 열은 신체의 불완전한 조건에 대한 심판이다.만일 아픈 사람이 치솟은
열을 이겨내어 다시 원기를 회복하게 된다면,열이 발생하기 전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을 때가 많다.그런
이유는 그가 과거 잘못된 조건을 깨뜨리고 새 건강을 자유롭게 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적 측면에서도 마음이 심판을 준비하여 심판이 무르익을 때까지 그 사람 속의 악은
강세를 더해 간다.이 심판은 새 삶 속에서 일하게 될 새 진리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다.따라서 새 진리가
각 사람 속에 건설됨으로 인해 옛 조건에서 기꺼이 자유로워진 이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해주게 된다.
주님의 현존
태양이 지구와 더불어 언제나 존재하듯,주님은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신다.그러나 인간의 악과 거짓들은
마치 지상에서 뿜어 올린 오염된 물질이 태양 광선의 통과를 방해하듯, 주님의 영향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문을 닫아 걸게 한다.그러나 인간의 악들이 심판에 인간 자체를 가져다 놓게 될 때,주님에게서만 오는
영적 생명의 차단으로 인한 결핍의 증가로 교회가 죽게 될 때, 주님은 새로운 생명을 보내셔서 그 새로운
생명을 기쁘게 받는 이에게 구원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주신다.
비바람이 한참 지나간 뒤의 대기는 깨끗해져 더 찬란한 태양 광선을 맛보게 하듯, 옛 조건들을 깨트림은
그 인간으로 자연스럽게 새 생명을 받게 해준다. “그것이 문 앞에 다가와 있다.” 이 문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들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문의 특징은 경첩이 이중으로 달린 것이다.그래서 이 문은 안쪽 방향으로,바깥쪽 방향으로도
움직인다.그리고 그 문은 위쪽으로,그리고 아래쪽으로도 열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노아의 방주가 3층으로
되었듯이,우리 마음은3층, 또는 3 등차인 자연적, 영적, 천적 등차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등차, 또는
각 층마다 위에서 설명한 문이 달려 있다.타락하는 마음일 경우,보다 높은 등차에 있는 문은 닫혀지고,
대신 자연적 마음과 세상 사이에 있는 문 만이 열리어 있다. 그러나 거듭나는 마음의 경우, 이 문은 안쪽(inward)으
로 열려 내면의 삶을 인간의 마음이 의식하게 된다.
옛 조건,또는 타락하던 마음이 깨트려질 때,새 생명은 우리의 정신적 문 앞에 다가와서 들어 갈 허락을
받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비록 모든 선이 주님 만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안쪽 통로를 통해 오지만,
우리가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마음에서의 선이다. 인간에게 의식되는 삶의 첫 문은 자연적
234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마태복음 24장 32-35절
마음에 있고 이 문이 먼저 열리게 된다.새 생명이 인간에게 올 때,제일 먼저 그 생명의 영향이 미치는
곳은 자연적 등차인 자연적 평면이다. 그리하여 자연적 선이 먼저 오게 되어 기초를 형성하고 이 기초를
바탕으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거처를 만든다.이렇게 되는 이유는,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외적인 것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바깥쪽의 것들과 의무라는 중간에 끼어 살기 때문에 바깥쪽에
응용된 원리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이라는 바깥쪽 삶의 변화는 안쪽에 해당되는 우리 인격이 변화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첫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세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이 세대(generation,
birth)란 위에서 설명한 삶의 자연적 평면과 등차를 의미한다. 우리의 느낌과 생각들은 지금도 이 등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거듭남이나 새 생명이 온다 해도 우리가 자신들의 자연적 의무나 상태들이 죽어
감으로서 내면의 삶인 영적 삶에 도달될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이 세대,”즉 우리 삶의 자연적 등차,또는 바깥쪽의 것들,즉 일상생활에 있게 되는 선함이나 질서,
선용을 가지고 입증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fulfill)말 것이다.” 이렇게 되는 때란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새 생명으로 가득 찰 때이다. 그 이유는 새 생명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우리의 옛 것이
깡그리 부서졌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글자대로 보면, “이 세대”란 유대 국가였는데, 이 국가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신성한 섭리에 의해
보존되었는 바, 그 이유는 히브리어와 구약 성서가 새교회를 위해 보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하늘과 땅
그러나 오늘 비유가 영적인 예언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구절,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성경에서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고
언급하는 어느 경우에서도 그 언어는 상징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물질적인 하늘과 땅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는 말이다.새 하늘이란 내면의 마음에 있게 되는 천국인 것들에 관한 새로운 상태이고,새 땅이란
바깥 삶에 관한 것,즉 외적이거나 자연적인 마음들이 거듭난 상태이다.이는 옛 조건들이 깨어지고 새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35
조건들이 창조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 생명
오늘 비유에서 새 교회(the New-Church)가 무화과나무로 표현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즉, 새교회는
인간들 사이에서 더 큰 실제적인 선함을 결과하게 되는 새 생명 속에 든 생각들에 의해 소개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을 새교회가 역사 한다는데 대한 증거는 교리에 관한 서로간의
독단적인 말싸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새롭고 보다 더 부드러운 선함이라는
싹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이 싹은 인간들을 더 새롭게 하여 생명 있게 하는 진리들,이 싹이 나무가
되어 내는 “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
오늘날 위에서 말한 증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인간 틈새에서 아주 조용하게 일하는 새
생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날마다 신문은 수많은 불법을 나열하고 잇다.그 반면 더 나은 조건을
암시하는 때에 관한 징조들도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 조건,이것을 우리는 기대하는데,이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폭 넓은 분야에 퍼져 있기도
하다.자연적인 삶을 위한 실제의 진리들,자연적인 선한 일들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일 예를 들면, 아픈
자, 눈먼 자, 다친 자, 심지어 신음하는 동물들을 위해 병원이라는 형태로 인간 고통의 치료를 위한 사회
단체라든가,고아나 장애자,고령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 속에서, 아마 소리 없이 선한 일을 수행하는
이들의 수고는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시작
정말 새 생명에 관한 것들은 자연적인 평면 위에 존재한다. 이 평면 위에 있는 선한 일들은 더 나은
생명을 향한 바깥쪽 일들로서,이는 더 낫고 더 높은 어떤 것을 담게 될 기초를 형성한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유전적인 선함으로부터,또는 친절만에 근거해서 시작되는 것,즉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 속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간섭받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일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선이며
필수적인 것들로 인정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일들의 기원을 영적인 것인 거듭나는 선함으로부
터, 비록 그 선함이 눈에 보이는 측면에서 단지 자연적인 것 같이 보이겠지만 일하는 사람의 경우, 거듭나는
236 잎이 돋는 무화과나무 - 마태복음 24장 32-35절
선함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위의 예는 아직 영적인 여름철인 것은 아니고 단지 여름이 온다는 징조들일 뿐이다. 무화과나무
의 가지들이 연해지고 그 가지에서 새 잎이 솟아오른다. 즉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자연적인 평면에서
일할 때,그것이 인간들 사이에 있는 새교회의 증거임을 알 수 있으리라.우리는 새교회의 삶을 자연적인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실지의 선함 없이, 탁상공론만을 가지고 증거로서 내놓을 수 없다. 회개, 개혁, 그리고
거듭남은 내 이웃,내 친구 내가 묻혀 있는 사회 등등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실지의 선함 속에서,그것이
새교회의 생명 자체가 되어 나에 의해 체현(embody)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희망적인 활동들
1757년, “최후 심판” (이는 영계에서의 영적 심판임)이 있은 뒤, 영들의 중간 세계는 더 나은 질서 속에
있게 되었고,사람들은 자유롭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그 뒤 성경은 더 폭넓게 대중들에 의해
읽혀졌다.또한 수많은 사려 깊은 책들이 출간되어 폭 넓은 독자층을 형성해 가기도 했다.한 마디로 이는
합리적 사고를 위해 희망적인 활동인 것이다.많은 발견과 발명의 시대가 도래했고,이는 바깥 삶의 각
분야에 응용되었다.이 모든 것들은 좋은 것들이다.
오래 전에는 몇 사람에 의해 민중이 눌려 지내 왔었고 극히 적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었으며, 소수만이
대중을 통치하는 법을 만들고 했었다. 이제는 지도자나 그 밑에서 따르는 사람이나 동등한 교육의 기회와
정신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통치해 가게 되었다.증기나 전기 등등도 보다 빠르게,그리고 보다 값싸게
대중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고,그럼으로 사람들은 더 빈번하게 왕래하고 더 빨리 서로를 알게 되기도 했다.
지도자의 일이나 학식에 대한 혜택도 많은 이들이 더 빨리 나누어 가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간단한 위의 이야기들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실상 이 모든 것들은 영적 삶의 건설과 성장을
위한 자연적인 기초를 설비해 주는 것이다.우리는 외적인 것들을 경멸해서는 안되고,오히려 우리의 영이
그것들을 사랑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선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이백여년 전 주님께서는 한 선구자를 들어 써서 첫 기독교회에 대한 마지막 심판과 새교회가 올 것임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37
선포하도록 하셨다.이 새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이요,그 오심은 새로운 빛과 생명을
흘려 보내시는 가운데 있어지는 영적인 오심이다. 이 선구자가 스베덴보리(swedenborg)이다. 주님은 그를
지휘하시어 그로 하여금 새교회의 저술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밝혀 인간으로 알게
하도록 하시었다.
영적 진리가 알려져 사랑되어 실제화 될 때,우리는 새교회의 일에 관한 영적 증거를 찾게 된다.진정한
교리 없이 사람들은 새교회인으로 변할 수 없다.우리가 진리를 사랑해서,“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신성한 섭리는 우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배부르도록 해주시고, 더불어 그 진리에 따라 살 기회도 허락하실
것이다.새교회가 마음에 내려 올 조건은,옛 악과 거짓이라는 옛 조건이 깨어지고 제거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238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18
열 처녀
-사랑있는 믿음과 사랑없는 믿음-
성서 본문: 마태복음 25장 1-13절
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 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39
글자적 이야기
이 비유는 동양의 결혼 관습을 연상하게 되면 매우 인상 깊게 된다. 그 곳의 결혼 축제는 때로 며칠
동안 계속 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중심되는 행사는 신랑이 신부를 처갓집에서 보금자리가 될 집으로 호송해
올 때이다.이 행사는 통상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가 벌어지는 밤중에 거행된다.그 행사에는 많은
횃불과 합창이나 악기까지 동반되는 매우 흥분되어 기뻐하는 광경이 줄을 잇는다. 몇 명의 친구나 친지들이
신랑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호송 행렬을 환영한다.이 때 그들은 호송 행렬의 선두가 포착될 때,그들은
“저기 신랑이 온다.어서들 마중 나가라!” 라고 크게 외친다.
신랑이 밤중에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관습이라고 유대교의 어떤
라삐(rabbi)는 말해 준다. 그리고 호송되는 여자 주위에는 열 개의 막대기를 든 사람이 따른다. 각 막대기의
꼭대기는 놋쇠 접시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그 접시에는 불을 지피기 위해 기름이나 역청,옷조각 등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이 막대기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접시 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료인 기름병을 들고 있다.
영적 의미
넓은 의미에서 볼 때,이 비유는 주님의 오심과 그에 따른 심판을 취급하고 있다.좁은 의미에서, 비유는
사랑과 연합된 믿음을 사랑이 없는 지식일 뿐인 믿음과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
제 17장인 잎이 돋는 무화과의 비유도 주님의 오심과 오실 때 있어질 상태에 관해 뭔가를 알려 주고
있다.그래서 알게 되는 것은,인간 생명의 옛 조건은 깨어져야만 하고 새로운 상태들이 깨어져 나간
그 자리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오늘 비유는 분리되는 두 인간 계층,새 진리를 바깥 쪽 측면에서
받게 될 이들, 즉 새 진리를 받되 의지와 더불어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 이들과 교리로서 진리를 받되 이해성에서만
수용하는 이들이 주님의 재림에서 있어질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
처녀
240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성경은 교회를 여인 또는 몇 명의 여인들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인 처녀는 주님과
결합하지 않고 있는 교회,즉 영적 결혼이 안된 상태의 교회를 표현한다.주님은 신랑이고 교회는 그분의
신부이다. 진정한 신부가 자기 남편을 찾아서 남편의 사랑과 형상을 자기 심정에 받아 들여, 애정이나
생각,그리고 행동으로 남편에 충실하듯이,교회는 신성한 신랑을 찾아 그분의 형상을 받고, 그분께 충성을
다한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의 남편이고,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것이다.” 따라서 좋은
처녀란 주님과 결합하려 애쓰는 교회를 표현해 준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루살렘,또는 유다의 처녀,딸, 등등과 같은 말을 자주 발견한다. 열 “처녀”란 교회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10”은 모든 것, 또는 어떤 것이 가득 차 있음을 자주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십계명도 가지고 있는데, 십계명은 거듭나는 삶에 있어야 할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와
그 삶에 있어야 할 우리의 안과 밖에 관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
등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속이 빈 용기로서 빛을 만들기 위한 등잔은
실제의 삶을 꾸리게 해줄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수용하게 될 교리,또는 진리에 관한 지식,어떤 정신적인
형체나 그릇을 표현한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 119:105.) 등불을
가진 열 처녀란 교회 안에 있는 이들,교리로 가르침을 받아 온 이들,또는 교리에 어떤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표현한다.정신적으로 이들이“신랑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교리가 발하는
빛으로 주님과 천국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슬기로움과 미련함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천국의 지혜는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에
응용하는데 존재하고,미련함은 자기가 아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데 존재한다.슬기로움과
미련함이라는 말은 제1장에서 취급한 마태복음7장 24-26절에서 이미 설명했던 바 있다.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자”는 주님의 진리를 듣고서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41
신랑이 오기 전,즉 심판이 있기 전,슬기로운 자나 미련한 자 모두 외적 교회 안에 함께 있었다. 주목해
볼 또 하나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이다.밀과 가라지는 성장하는 기간 동안 함께 섞여 자랐다.그리고 양과
염소도 한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그러나 주님의 오심,심판 때에 위의 두 계층은 분리된다. 인격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결과가 분리인 것이다.
기름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우리가 기름을 섭취할 경우 신체를
따뜻하게 하고,기계에 기름을 칠 경우 미끈미끈해서 마찰을 줄여 준다.이와 같은 특질을 지닌 기름이란
사랑을 원리로 삼는것을 표현한다.등잔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등잔이 아닌 등잔 속의 기름이다.등잔은
빛을 만들기 위해 기름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그래서 등잔은 교리,또는 지식을 표현하고, 만일 등잔이
기름을 채우고 있다면,그 등잔은 우리를 계발시켜 총명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성전 예배 시에 기름을 사용한 것에서도 기름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빈 등잔은 텅빈 교리,지적인 것만으로 된 교리,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
교리,그 결과 실제적인 삶에 사용하지 않는 교리를 표현해 준다.사랑의 기름은 영적 총명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지식은 진정한 총명을 간직해 주지 않는다.
의지와 더불어 이해성에 진리를 받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다. 이들은 등잔에 공급할 기름을 지닌
이들이다.즉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 총명을 계속 보존한다.슬기로운 자는 종교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그 지식에 의거한 삶까지도 이행한다.그들은 교리를 알고 계명을 지킨다.그들은 순수한 심정,
계발된 이해성,그래서 거룩한 삶을 가지고 있다.어리석은 자는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악을 죄로 알고
끊지 못한다.
신랑의 부재 (absence)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여러 비유나 다른 성경 부분에서의
말씀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주님이 안 계신 듯 여겨지는 것,즉 주님의 외관적 부재에 관한 것이다.
본문의 경우, “신랑이 늦는 것”은 신랑이 오는 것을 지켜보는 자로부터이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242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포도원 주인은 “...멀리 떠나갔다”는 말로 그분의 부재를 표현해 놓고 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돈의
소유자가 종들에게 돈을 맡기고“먼길을 떠났다.”
영적 인간의 열린 마음은 주님이 현재 존재하신다고 느낀다. 특별히 그 인간의 삶의 원리 속에 존재하심을
느낀다.그러나 감각적인 삶에 따른 외적 삶의 세세한 면에서,바깥쪽 마음이 일하고 즐기는 곳에서 주님의
현존은 거의 있지 않다.아마 주님의 존재가 아예 없는 듯 여겨진다.왜냐하면 바깥쪽 마음과 감각적인
마음은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데 매우 무디고 희미하기 때문이다.
졸고 잠듦
인간이 감각적인 삶에 푹 빠졌을 경우,그 상태는 영적으로 보면 졸다가 잠이든 것이다.이런 상태의
사람은 마음이 높고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인 영적 삶을 내향적으로 실감하지 못한다. 존다는 것은 자연적인
의지의 무딘 상태이고,잠든다는 것은 자연적인 이해성의 희미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그래서 인간이 말씀
속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실제화 하기 위해 세상 것 사이에 그것을 놓음으로
해서,세상 삶 속에서 그 원리들을 확증하게 된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람이라 해도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고 반드시 외적인 것들 속에서 자신의 슬기를
사용해야만 한다.이 자연계는 우리의 마지막 거처가 아니다.이 세계에서 우리는 거듭나는 삶을 이룰
수 없다.이를 두고 본문에서 신랑이 늦게 오자 졸다가 잠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고,이를 더 설명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과 더 완벽하게 접합하는데 우리의 슬기를 다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심판을
맞이 할 완숙된 조건에 다다를 때까지 한 개인이든 한 나라이든 성장과 발달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한 마디로 인격이라는 그릇이 다 찰 때까지 자기 그릇을 채워야만 한다.
한밤중
인격이 다 채워져 마감의 때,즉 마감의 상태가 되면,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 비유에서 말하는 “한밤중”이
바로 마감의 때인 것이다.한밤중은 하루의 끝이면서 다음날,다음 상태의 시작도 된다. 한밤중은 변화를
이루는 시간,즉 심판의 때인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43
크게 외침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크게 외침이란 어떤 사건에 대한 중대한 발표이다. 이와 같이 자연적인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의 상태가 심판을 위해 무르익고,새로운 상태가 막 도래하려 할 때,주님의 존재는
평상 때의 그분의 진리보다 더 강하게 암시하게 된다.진리가 인간의 마음을 휘저어 줄 때,그 진리는
진리의 신성한 근원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진리 속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인간으로 외치게 하는 바 “저기
신랑이 온다”이다.
크게 외침은 글자대로 말하면 각자에게 만들어진 강한 인상의 결과이다.이를 영적으로 보면,크게
외침은 인상 그 자체,또는 외침 속에서 표현된 마음의 상태이다.
교회의 한밤중이란 옛 교회의 끝이고, 새로운 교회의 시작은 정신적 어둠 속을 걷던 사람들이 큰 영적
빛을 보고 그 빛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알아 차려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주님의 교회에 이끌리는
것을 말한다.
신랑이 옴
교회가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은 오신다. 즉“신부가 결혼을 위해 잘 단장했을 때” 이다.
새 예루살렘이 인간에게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였다. 어떤 경우에서도
새롭고 더 높은 조건의 도래는 옛 조건에 심판이 있음으로써 옛 것과 새것이 분리될 때만 있게 된다.
주님을 만남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애정과 생각,그리고 행동에서이다.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줄 때, 우리는 감각적 삶인 캄캄한 한밤중으로부터 그분의 진리로 주님과 결합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주님은 영적 원리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우리가 그 원리에 의거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그분을
맞으러 밖으로 나가는”것이다.모든 진리는 우리가 그 진리를 실제에 사용할 때 주님을 맞으러 나가도록
우리를 부른다.
244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등불을 챙김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 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일어난다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 의지가
활동하러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등불을 챙김이란 지성이 활동하는 것,즉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처녀들이
일어남이란 교인들이 그들 마음을 생각의 더 높은 평면에로 들어올리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등불을
챙겨 처녀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교인들이 그들의 지적인 지식들을 교회의 교리에 의거 질서 정연하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
슬기로운 처녀,미련한 처녀,모두 일어나 자기들의 등불을 챙기었다. 이는 교회 안에는 진리에 진지한
사람,그렇지 못한 사람,모두 교회에 참석해서 교리를 배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두 계층 모두 인격
면에서의 차이점을 금방 드러내게 된다.그래서 슬기로운 교인은 항구적인 영적 계발의 상태에 들어가고,
미련한 자는 어둠에 빠져 버리고 만다.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음
미련한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자기들 수중에 기름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등불”이란
진리에 관한 지식,또는 기억으로 알고 있는 교리들이다.감각적인 삶에 졸고 잠이 들어 있었던 미련한
처녀들, 즉 천국적 기름인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내향적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총명을 받게
해줄 생명에 관한 어떤 것도 마음에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위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 속의 악한 사랑이 그들의 총명을 꺼져 가게 해서 천국에 관한 진리에 어떤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의지 속의 악,이해성 속의 거짓,행동 속의 죄들은 영적인 것들 안에 있는 어떤 순수한 총명을 위해,
주님이 자기에게 오시는데 대해 감격적인 느낌의 어떤 응답도 불가능하게 한다. 악인이라 해도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무척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인간의 영적 원리로서 감지하게 하는
진리 자체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따라서 심판이 오게 될 때,교회 속의 교리를 단지 지적
흥미로 여긴 이들은 정작 그들 마음을 먹여 살리지도,영적 총명을 증진시키지도 못한다.
어쨋든 심판에서 진리의 빛이 선과 진리를 사랑해야 할 필요성을 만인에게 보여 줄 때, 미련한 자들은
영적 인간다움을 달성하는 방법을 찾느라고 궁리하기 시작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45
기름을 요청함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라고 청하였다.
이들은 타인 안에 있는 선함과 사랑에 의지하려 한다. 이들은“대속”이라는 교리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교리에 의존하려 한다.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신 속을 채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순수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믿음“만”의 믿음은 겉치레뿐인 믿음이다.그리스도의 피란 주님의
영적인 진리가 사랑되고 믿어져서 실제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죽어 가는 병자가 건강한 사람의 팔로부터 공급받은 건강한 피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그 병자는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을까?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피를 흘려서 된 것이
아니라 피 속의 생명 때문이다. 환자가 피를 공급받음으로 해서 그는 그 피를 자기 것으로 흡수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은 그의 심정만에 신성한 진리를 받아서 그 진리를 자신의
전체적인 정신 체계를 순환시키는 실제적인 삶의 원리로 사용할 때 구원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피로 구원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거절
허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어떤 신조나 교파,
구세주이든 간에 사랑의 기름인 선함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이는 오로지 스스로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밖에
없다.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자기가 아는 진리를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어떤 선함까지
줄 수 없는 것이다. 선함, 사랑은 모든 개개인이 자신 스스로 획득해야만 한다. 각 개인이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의 진리를 매일 실제에 응용함으로 선함을 획득해 가야 한다.만일 누군가가 선함을 획득하겠다면,
그는 그것을 사야만 한다. 즉 그는 그 선함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악들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교회를 들리신다면 그분의 교리에 관한 수많은 사항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식만을
가진 이들은 텅빈 등불을 지닌 자들이요, 일상 생활에서 자기들 지식을 지켜 줄 사랑의 기름이 없는 이들인
것이다.이와 같은 자들은 결혼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그들은 주님과 결합하는 더 없는 행복을 누릴
246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자격이 없다.그 이유는 주님과의 결합,거듭남은 각자의 의지 속에 있는 선과 이해성 속의 진리와 영적
결혼의 정도만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정신적인 파트너들이 마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천국은 그의 마음에 드리워지고,그 사람은 주님의 결혼 만찬에 참석하게 된다.
잔치에 들어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이들은 주님과 함께 천국적인 상태에 입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문은 천국에
입장할 조건에 있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닫혀져 있다.
각 개인의 생활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우리가 거듭남을 추구하고 있을 때,우리의 자연적 마음에는
많은 세상적 욕구와 사상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우리로 인정하고 찬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일어나서 위를 쳐다보고 있다.그 마음은 주님을 인정하며 그분의 의를 추구하려 한다.그래서
우리는 삶의 새로운 품질을 경험하기 시작한다.사랑은 우리의 총명을 먹여 키운다.그리고 우리는 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함이나 여타 다른 자만이라는
피상적인 것까지도 거듭나는 인격이 되는데 슬쩍 사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굳게 잠겨져 있다.천국에는 자만 같은 것을 위해 비어 둔 방이 없다.사실 닫혀진 문은 각자 속에, 각자의
인격 속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이 천국 쪽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천국은 천국을 예비한 이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즉 천국을
자기 인격 속에 지닌 자라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어떤 악한 자가 천사들 틈에 끼어 있도록 허락된다
해도 그는 천국 사회가 천국적인 듯 여겨지지 않는다.그 이유는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닌,상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 의해 인격을 고정시킨다. 악마라는 인격으로 자신을 만든 이들은 천국의 분위기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를 모르노라”
악한 사람도 천국이야말로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도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상상할는지 모른다.그러나 그 천국은 그들에 대한 천국이 아닌 것이다.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즉 그분은 악한 자들의 인격 속에 천국적인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신다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47
말하신다. “주님은 올바른 길을 아신다.” 그러나 그분은 악한 자의 길이 그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신다.
천국은 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이라는 조건 속에 존재한다.총명의 빛을 생생하게 지키기 위해 순수한
사랑의 기름을 가진 이들,진리를 알고 그 안 것에 따라 살아간 이들만이 천국적인 조건을 갖춘 것이다.
“너희가 이런 사항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복있을 찌어다.”
주님은 주님을 알고 사랑해서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삶에 관한 그분의 신성한 원리들은 주님이 모른다고 하는 이들 속에는 없다는 말이다. 당신이
천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 될 경우,그 이유는 천국을 만드는 원리를 기쁘게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국은 이타적 사랑이라는 순수한 상태,순진이라는 순수한 상태,영적 총명의 순수한 상태인데, 이기적인
애정이라는 불순한 상태,선함 없는 교리라는 허울뿐인 상태,기름 없는 등불만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섯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다는 숫자로 인해 세상이나 교인들 중 정확히 절반만이 구원받고
절반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억측해서는 안된다.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 기억해야 할 점은,비유가
의도하는 교훈들은 영적 원리들이지,단지 외적인 사실들의 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주님의 말씀 모두는
영적인 것을 취급하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비유적인 가르침들로부터 영적인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다섯이라는
숫자가 주는 교훈은 수학적인 양에 관한 것이 아닌 영적 품질에 관한 것이다.
숫자 다섯은 일부 또는 조금을 표현한다. 아마 위와 같이 수학적 기교를 부려 추정해 본다 해도 구원되어질
인류는 최소한 절반은 더 될런지 모른다. 그렇다고 가정해 본다 해도 구원되는 사람들 모두가 천국적 삶의
똑 같은 등차에서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천국은 삶의 수많은 등차로 이루어져 있다.“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면 납득될 것이다.그러나 거듭남의 결과, 즉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그 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원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 사회에
끼여들 수 없다.
지켜 보라(깨어 있어라, watch)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 절에서도
248 열 처녀- 마태복음25장 1-13절
때에 관한 시간을 말하고 있지만,그 속의 의미는 품질,즉 삶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그 날과 그 시간이란
의지와 이해성에서 오는 애정과 생각에 관한 상태이다.우리는 자신의 심정 안에 있는 목적과 동기,이해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원리들을 안팎으로 지켜보아야 하며,자신이 하는 행동,일들을 언제나 잘 감시해서
자기 속의 목적과 동기, 원리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체현(embodiment)해 가고 있는지 늘 깨어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외적 삶 속에 있는 불과 홍수, 우리의 행동을 좀 먹어 가는 나방이나 중독물들이 들어 붙어
우리 삶을 죽어 가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영적 강함을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 무너뜨리려는
악과 거짓, 그리고 죄들의 영향력에 대항해서 영적인 경계를 그치지 않는 것은 각자의 의무이다. 특별히
우리는 바깥쪽 삶만을 경계하는데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 속의 악한 경향성과 거짓 관념에 대해서 더욱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경계함에 있어 우리는 자연적인 두려움에 의해 자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연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적극성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계명을 지킴으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랑을 수단으로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악 속에 푹 빠져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약해진 상태를 자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면, 본문에서와 같이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다면 자신의 삶은 아래쪽을 향해 기울고 있음을 알아채려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내려 비치는 태양이 언제나 열과 빛을 함께 가지고 있듯이, 우리에게 알려진 진리 자체 속에
주님은 언제나 존재하신다.이와 같은 진리가 우리의 구속자이시요,우리의 판관인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신성한 영향력이 들어 왔는지,위험한 것이 들어왔는지,어느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경계를
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빛을 가져야 한다.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로,교회 안에서 가르쳐진 진리로
교리라는 등불을 가지되, 진리가 가르치는 선함을 위해 진리를 위한 사랑이라는 따뜻한 기름으로 그 등불을
채워야 할 것이다.이렇게 하면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 마음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의
품질을 명확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는 깨어 있어라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49
19
달란트
-사용의 법칙-
성서 본문: 마태복음 25장 14-30절
14.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9.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20.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주인께서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22.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주인님,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읍니다’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250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말하였다. 24.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읍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 두었읍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다면 27.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가 내가
돌아 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요약
인간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면서 살아간다.각 인간의 영적 삶에 있게 되는 수준,품질,
충만도는 당사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의해 측정되어진다.
문맥의 전후 관계
본문이 포함된 제 25장에서는 이 비유 외에 두개의 비유, 즉 “열 처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어 서로 비교하게끔 되어 있다.이 세 비유 모두는 주님의 오심에서 있게되는 심판을 취급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세 비유의 내용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세 비유는 각기 다른 견지에서 취해진 관점을
가지고 심판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교인의 애정 측면에 거행될 심판을 예증하고,
“달란트”의 비유는 교인의 이해성 측면을 더 뾰족하게 전시해 주고,“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결과와 인간의 행동 측면을 취급하고 있다.이렇게 해서 세 사건 속에서 인간 삶의 세 분과인 의지,
이해성,행동을 망라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장에 “금화”의 비유가 있는데, 이 비유와 오늘 비유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본질 형태에서는
아주 유사하다. 두 비유의 목적 측면에서 비유를 읽는 이로 하여금 두 비유를 서로 상충시켜 이해를 증진시켜
주고 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51
글자적 의미
많은 번역에서 본문 14절은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하늘 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은 영어 성경의 경우 이태맄 글씨체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그리스 원본에서 이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과 다만 번역자가 예상되는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첨부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번역자가 이런 형태를 취한 이유는 많은 비유들이
하늘 나라라는 단어로 시작되기 때문인 듯 하다.사실 오늘 본문은“열 처녀” 비유의 마지막 절,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Watch, therefore, for
ye know neither the day or the hour wherein the Son of Man cometh” 이 절에 이어 14절에서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as a man travelling”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13절의 “사람의 아들, the Son of
Man”이 14절의 “어떤 사람”과 의미를 같이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길을 떠나는 사람
이“사람”이란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필요한 지식들을 모두 주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이 모든 지식을 일상 생활에
응용하도록 하는 허락도 첨부되어 있는 것이다.마치 자기 것인 냥,자기 능력으로 일을 해내는 듯이 사용하도록
허락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을 읽노라면, 주님은 인간의 마음에 필요한 것을 주시고 나서 우리에게서 떠나시고 구원을
제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신 듯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떠나 가신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때 그렇게 보여질 뿐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일상 생활 즉 자연적인 모든 세부적인 것에서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느낌을 전혀 가지지 않는게 흔하다.이렇지 않으면,자연적 인간은 자유로운 가운데 있는
줄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주님의 노예인 냥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인간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해성 안에서 주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지식을 응용하기 위해 세상 삶으로 나가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이 구절은 인간에게 주님이“먼 나라”로
떠나신 듯 여기게 해준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감각적인 삶은 내면의 삶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252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때문이고, 내면의 삶 속에서만 인간은 주님의 영향과 현존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종 (하인)
본문의“어떤 사람”은 먼길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렀다. 이 종들이란 교회에 소속된 모든 이,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한 모든 이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만민은 스스로 주님의 종으로서 간주해야 마땅할
것이다.
달란트 (the Talents)
재물(riches)은 필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달란트, 재능”은 기억이 붙잡고 있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자신의 심정과 생명이 되는 살아 있는 원리로서의 선과 진리를 획득하는데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지식들을 표현한다. “지식은 힘이다” 인간은 지식을 수단으로 알게 되어 악에서 선한 것을, 죄에서
거룩한 것들을 가려낼 수 있다.알려진 것들의 축적이 지식이라 불리운다.이것들이 정신적인 “재능” 또는
마음의 재물이다.
주님은 이런“지식들”을 인간에게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셔서 주고 계신다.게다가 이런 지식 속에 있는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까지 모든 인간에게 주고 계신다.그래서 만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서 볼 것이고 그것이 진리인줄도 알게 된다. 그러나 진리에 무관심하고 선에 상반되게
놓여,오히려 악과 거짓을 탐닉한다면,그는 자기 마음을 진리의 빛 안에서도 눈멀게 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가 설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그가 지식을 일상 생활에 응용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들로부터 자신이 받아야 할 어떤 영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만다.
일반적인 도덕성
간접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공통된 도덕을 끌어 낼 수도 있고, 모든 우리의 능력과 소유들은 그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주님에 의해 우리에게 위탁된 것이고,이것들은 일상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주님을 섬기는
데에, 한 마디로 선하고 참된 유용한 삶에 쓰이도록 되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53
섬긴다는 것은 외적 예배만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사용함이라는 살아 있는 삶 속에서 있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섬기는 이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원리로 사는 사람이고,그의 전 삶은 주님을 섬김이다.교회가
해야 할 것(service)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실생활 안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들의 심정을
주님께 가져다 놓는 것이다.좀더 꼼꼼한 의미로 볼 때“달란트, 재능”이란 우리의 지식들이고, 선과 진리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한다.
숫자들
본문에서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글자상으로만 볼 때,본문의 숫자는 양을 표시하고 있으나, 영적으로
볼 때 이 숫자들은 진리나 인격면에서의 차이점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에서 숫자들은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지,수리적 계산으로 사용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그 이유가 비유는 주님의 말씀의 다른 부분들
같이 안쪽 의미, 즉 영적 의미를 가지고 영적인 원리를 다루면서 실생활에 그 원리가 응용되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
본문을 읽노라면,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각기 다른 수준과 다른 분량에서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의도적으로
주님 마음대로 주고 계신다고 상상될는지 모른다.주님으로부터 받는 차이는 인간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은“각자의 능력에 따라”모든 사람에게 주시고 있다. 즉 그의 능력은 자기의 의지와
노력에 의존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실제적으로 볼 때 각 사람이 지니는 영적 지식은 질이든, 양이든, 각 사람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따라서 만일 인간이 이 지식들을 받으려 노력한다면,주님은 누가 됐던지 간에 천국의 축복을 다
주신다.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도 말하셨다.“네가 생명을 가져볼까 해서 나에게 오지 말라. Ye
would come unto Me, that ye might have life.” 실제로 주님은 인간이 취해야 할 것만을 각 사람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
본문의 세 숫자는 외적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세 층을 표현한다. 교회 안의 모든 이는 가르침에 의해
254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어떤 지식을 받는다.그러나 그 가르침을 받는 상태는 아주 다르다.
다섯
숫자,다섯은 상징면에서 적음,또는 약간을 말한다. 열의 절반이라는 측면에서의 다섯은 열 손가락이
십계명이듯,완성을 표현한다.보리떡 다섯 개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먹이시는 일을 완성하시었다. 다윗은
골리앗과 대적할 때 자갈돌 다섯 개를 취했었고,베짜타못의 행각은 다섯 개였다.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란 그 사람 속에 천국적인 지식이 있는 마음의 상태, 일상 생활에 사용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약간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둘
상징 측면에서 둘은 이것과 저것이 결합하는 것, 접합, 하나를 이룸을 표현한다. 특별히 둘이란 사랑과
믿음,선과 진리,애정과 생각의 결합을 말한다. 두 달란트가 주어진 사람이란 진리의 지식이 진리를 사랑함과
하나되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하나
둘에 반대되어 사용될 때의 숫자 하나는 분단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란 지식이
있으나 지식만 있다 할 뿐 진리를 사랑함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다섯, 둘, 그리고 하나
세 숫자를 한 가지 사항을 놓고 연속된 의미로 살핀다면, 다섯 달란트란 유아기 때 마음 안에 저장된
지식들,즉 미래에 사용되기 위해 주님께서 아기 속에 나누어주신 선과 진리의 상태,다른 용어로 말하면
주님이“아껴 두신 것들”을 표현한다. 이와 연결해서 볼 때 두 달란트는 어린 시절에 가르침에 의해 받아진
지식을 표현하는데,이 지식은 후에 거듭남에 의해 진리를 사랑함과 하나를 이룬다.한 달란트는 청년기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55
성년기에 획득된 지식을 표현하는데, 이 지식들은 기억 안에만 있을 뿐 선과 진리를 사랑함과의 어떤 결합도
없다.
장사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다섯 달란트를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리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팔고 산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그것들을
가르치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한다는 것은 그 달란트를 사용함으로 증가시키는
것을 말한다.지식을 선하게 적당히 활용하면 더 많은 지식을 만든다.이것이 다섯 달란트, 즉 적은 지식들을
가진 이들, 그리고 두 달란트 즉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기 지식에 결합시킨 이들의 경우이다.
갔다
이 사람들은“곧 가서 장사했다”고 말해지고 있다.즉 그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들의 지식을 이용했다는
말이다.이와 같은 응용은 실제를 수단으로 지식들을 증가시켜 준다.
두 배로 된 달란트
두 슬기로운 사람은 달란트의 숫자를 두 배로 불렸다. 그들은 애당초 가지고 시작했던 양만큼 더 만든
것이다.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한다면 배가된다.즉 우리가 그것들을 자연적인 삶 속의
실지 행위들에 적용시키면,적용시킨 만큼에서 영적 삶에 필요한 양을 되돌려 받는다는 말이다.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그것들은 영적인 것이 된다.이것들이 두 배가 된 것은 질적 측면에서이다.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적 삶 속에서 그것들을 사용했을 때, 그 달란트들은 우리에게 영적 삶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진리가 자연적인 삶 속에서 진리의 자연적인 형태로 실체화되지 않고는 어떤
진리라도 영적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달란트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두 배가된다.즉 그것들은 우리의 이해성에서도 싹이 터서,
즉 애정에 이해성 속의 지식이 결합을 이루는 가운데 더 완벽하게 승강되어 의지와 결합하는 것이다.
256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땅을 파고 감추어 둠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자기 지식을 실지의 선한 용도에 활용하지 않는다. 땅을 판다는
것, 또는 땅 속에서 뭔가 찾는다는 것은 지식에 관한 사실(fact)을 사실(fact)로서 공부하고 탐사하여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 달란트를 아무 쓸모 없게 방치해 두는 것이다.
땅 (earth)
땅이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바깥쪽에 해당하는
감각적인 삶에 속한 것들 안에 자기 지식을 푹 담가 놓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지식을 수준
낮은 외적 동기,즉 육적 쾌락이나 명성 따위,이기심만을 부추기기 위해 자기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가진 지식 속의 진리도 진리의 형체(form)는 소유했겠지만, 그 진리 속에 생명을 주는 영이
없어 선용은 결여되기 마련이다.우리 모두는 바깥쪽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그 속에 영이
없게 되면 사랑 없는 형체만의 믿음이 되어 어떤 좋은 열매의 수확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열매를 보아
너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던 것이다.
시간
“얼마 뒤에, 주인이 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얼마 뒤라는 시간은 삶의 상태나 조건들을
표현한다.각 사람의 상태가 심판하기에 적절하게 무르익을 때,주님은 그 사람에게 온다. 이는 처벌을
위한 심판의 차원이 아니라 열매가 익었을 때,즉 성장 단계를 마무리 지음으로 씨가 되었을 때의 심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인격이 형성될 때 심판이 있는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 스스로 심판함이라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이다.따라서 심판은 각자가 형성해 놓은 인격을 각자의 탓으로 여기게 해준다.즉 그가 만든
것들을 자신이 간직하게 해준다.그가 영적 인격을 하나도 만들지 못하였다면,그는 받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지녔던 선과 진리의 지식마저 잃게 된다. 그나마 지닌 것이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57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심
각 사람은 주님께 자기가 번 것을 가져온다.그래서 그것들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이와 같이 거듭나는
사람은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인정한다. 자기 지식을 사용해서 순수한 지혜와 총명을 획득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 때문에 주님께 빚을 지고 있음을,은혜를 입고 있음을 인정한다.그는 자기 달란트를 두
배로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달란트가 자연적인 수준뿐이 아닌 영적인 수준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칭찬, 상을 받음
주인은 종들에게“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하고 있다. 즉 의지나 심정 속의 선, 이해성 속의 믿음, 그리고
그 선과 믿음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이다. “잘 하였다”란 그의 양심과 교통하시겠다는 주님의 승인이다.
이 세상에서 보여지는 작은 것들에 충성을 다한 이들은 선을 사랑하는 하늘의 섭리를 발달시킨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 부분이 열리어져, 그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속에 든 생각이나 열정 등 많은
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인 생각들은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위치에 불과 했었지만 저 세상에서는 명예와
권능이라는 지위로 승진된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 사상 위에 영적 의미들이 부상해서 지배하는 거듭나는
마음의 상태, 즉 내면의 것들이 외면의 것을 좌지우지해 가는 상태가 더욱 칭찬 받을 것임을 보여주게
된다.이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상을 받는 약속인 것이다.
기쁨을 나눔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 구절의 모습은 먼 여행을 갖다 온 주인이 큰 잔치를
벌이고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한 종들을 초대해서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럴 경우 칭찬
받은 두 종들은 자유를 얻고 지위를 부여받아 타인을 통솔하는 위치에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258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영적으로 볼 때,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사랑과 순종으로 인해 주님과 결합하게 되는 것,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기쁨을 받는다는 것,선을 사랑하고 행함에서 기쁨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이럴
경우 우리는 일상 생활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애정 역시 영적 애정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지게 된다.
무서우신 분 (a hard man)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 역시, 비록 그가 그 달란트를 잘 활용은 못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는
있다.그러나 그는 자기 주인을“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사랑이 결여된 믿음,또는 지식은 영적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증가시키지도 못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적 인간은 주님의 속성을 납득 못하는 바,그분과의 결합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스함을 경험한 이들은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일 역시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은“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웁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지 않은 이들은
그분이 엄하고 불공평한 분이어서,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고 행하라고 요구하시면서도 그분은 선과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도 인간에게 주지 않는 분이라고 간주해 버린다.또 그들이 뇌까리는 말인 즉,주님은 자기들
속에 선과 진리의 어떤 씨도 뿌리지도 않고 인간에게서 수확만 거두시겠다고 요구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자기 달란트를 감추어 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잘못도 행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여지고 있다.
그의 말을 되씹어 보면,주님이 자기에게 부당한 일을 책임 지웠다고 까지 생각하는 듯 여겨진다.악한
자는 주님이 완악하다고 생각한다.그 이유는 그분이 자기들 악에 반대되기 때문이요,그들 속성이 그분의
속성과 대치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들이 선을 행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조차도 고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신성한 섭리를 믿지 않는다. 자기들도 법의 글자를 잘 준수했는데 그 외 뭐가 더 필요하냐고 오히려
따지고 든다.그래서 자신 만만하게 주님에게 하는 말,“우린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보십시요 여기 그 달란트가 그대로 있읍니다.” 이들의 근심거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 수준의
것들이다.이들 역시 말씀의 글자는 포획하긴 했지만,그 말씀으로 자신들 속의 악을 검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죄를 변명하려했을 뿐이다.
주인이 이 종에게 대답한바 같이,만일 인간이 생각하기에 주님이 무서운 분이신 줄 알았다면,오히려
그는 자기 달란트,지식을 실지 사용하는 쪽에 더욱 정진했어야 했을 것이다.자연적인 사람에게서조차
주님은 선용(use)을 요구하신다. 설사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되 보상만을 기대했다 해도, 주님은 선을 행하기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59
원하신다. 이것이 자기 달란트를 사용 않을 바에는 차라리 이자라도 붙도록 해야 한다는 구절에 담겨 있다.
악하고 게으름
위의 종을 두고, “악하고 게으르다”고 호통이 쳐지고 있다.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은 생각에는 거짓이,
의지에는 악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그는 자기 달란트를“돈 쓸 사람, exchanger”에게라도 놓아두었어야
할 것이었다.즉 그는 자기 지식을 합리적인 생각에 가져다 놓기라도 했더라면,주님의 인도 하에 그의
바깥쪽 지식에 영적 지식이 첨가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라도 인간은 주님을
영적으로,자연적으로 인정하여 선하고 기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을 선용하지 않는 자는 그 지식을 마음의 일부가 되게 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영계로 들어
갈 때 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어떤 것도 바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지식이라는 형체까지 그의 마음에서
거절되어 진다. 의지나 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것들은 그의 인격 속에도 존재 않기 때문이다.
인격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그에 따른 삶을 수단으로 인격의 어떤 품질을 스스로 획득한다. 모든 사람은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을 어떤 정도에서 받아 지닌다.이 분량이 그의 자신이다.저 세상에서 그는
이것이 가득 찰 때까지 채운다.그런데 만일 여기서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사용 못하게 되면,저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든 것까지도 떨구어 진다. 그 이유는 그가 지닌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속의 지식이
그를 통치해 온 사랑에 반대되어 자신으로부터 저절로 거절당해지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에게 줌
그러나 악한 자 속의 지식이라 해도 이 지식들은 선한 이들이 선용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악한 자도
지식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식들은 비록 악한 자들로부터 영적으로 취해졌다 해도
열 달란트 가진 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으로 해서 지식을 획득하여 그 지식을 가지고 더욱 많은 천국적인 것들을 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260 달란트- 마태복음25장 14-30절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있는 믿음은 여름철의 태양같이 열과 빛을 가지고 있어
식물들을 번성시켜 준다. 그러나 사랑 없는 믿음은 겨울철의 태양같이 빛은 있지만 열이 없어 식물들로
죽어 있게 만든다.
이러므로 사람들이 지혜와 총명을 받는 것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의 양과 질에 따라 가능해진다.
그래서 만일 그가 이 세상에서 위와 같은 사랑을 획득 안했다면, 그의 인격 속에 피상적으로 가졌었던
지식마저도 저 세상에서는 거두어지고 만다.누가복음의 경우,“그로부터 가진 듯 보이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그 이유는 그가 진실로 내향적으로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깥 어두운 곳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아라.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글자대로의
언급은 주님이 먼길에서 되돌아 올 때,쓸모 없는 종으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 못하도록 하고 있다.영적으로
어두운 곳이란 진리에 문을 닫는 거짓들이다.어두움이란 진리에 무지함을 말하고,바깥 어두움이란 진리를
거절함이다. “너희 안에 있는 빛이 어둡다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주 큰 어둠이 아니겠느냐?” 악한 사람은
어둠을 사랑하고,그들 행위는 악 뿐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
운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거절함으로 야기되는 슬픔이다. 이를 갊이란 거짓 원리들이 진리에 반대함으로
일어나는 충돌이다. 거짓 원리로 확증된 악한 자는 마치 끈으로 매어 놓은 성난 개와도 같이 무기력한
격노의 상태를 이를 갈아 표현하듯,가능만 하다면,모든 선과 진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
이빨이란 위장에 들어가는 음식을 사전에 준비하는 신체의 일부인 바, 이는 외적이고 감각적인 생각들을
표현해 준다. 이 생각들이 정신적인 소화 작용을 거쳐야 하는 다각적인 것들을 미리 준비시킨다. 감각적
인간은 진리를 진리로 보는게 아니라 그것에 관해 논쟁하려 든다. 이런 논쟁들은 신학이 영적 진리를 내면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토론될 때,참된 교회에 흙탕물을 일으킨다.이와 같은 논쟁들이야말로
지옥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이를 본문에서 표징적으로“이를 갊”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61
자연적 삶 속에 있는 영적인 삶
이 비유는 가르치기를,영적 삶은 자연적 삶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오히려 영혼이 육체 안에
있듯 그 속에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행동에 적용함으로써 선한 자연적
삶 속에 영적 삶이 건설되어야 한다.그래서 잘못된 것을 행함으로 발생하는 죄,뿐만 아니라 옳고 선한
것을 행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까지 점검해야 함을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가진 지식,아는 진리를 선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빛도 지식도 가진게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결과는 그것마저 잃는
것이요,자신에게 당연히 따라 올 축복마저 포기하는 셈이다.
사람마다 교육 수준이든 마음의 양상이든 다 다르다. 이와 같은 환경 조건의 다른 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이와 같은 자신의 성질,태어난 조건 등등에 대해 각 개인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유전 받은 능력,상속받는 성질 등등에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그러나 받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에는 자신의 책임 범주에 들어간다.악을 죄로 알고 끊고,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선용하는
이들의 고향은 천국이 될 것이다. 새 교회 속에는 말씀의 글자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까지 이어지는 포괄적인
지식들이 많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늘 경계해서 점검해야 할 의무가
있고, 특히 거듭나는 삶의 실지 응용에 이 지식들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지식이 있다고 우쭐대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더욱 특별한 것은,비록 타인이 자기와 같은 지식을 가지지 못한게 분명하다 해도 그를
경멸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비록 그 사람이 지식은 덜 소유했을는지 몰라도 우리보다
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품성을 갖추어 더 아름답고 유용한 삶을 꾸릴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62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2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은밀한 하느님의 역사-
성서 본문: 마가복음 4장 26-29절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27.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하늘 나라
천국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선과 진리로 통치되는 인간 마음이면 어느 곳에서나 건설되는 나라이다.
즉“하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 이 하늘 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에
이식되어 형성된다.
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63
씨는 진리이다.진리라는 씨는 선함이라는 생명력을 진리 속에 담고 있다.이 생명력은 성장 조건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진리의 씨로 하여금 발아하게 하여 싹을 내서 뭔가가 살아 있게 해준다.
천국은 진리와 선을 받는 모든 사람들 안에 이식되어진다. 즉 옥토에 진리를 받는 자란 그 사람의 자연적
의지가 진리를 사랑해 보려 하는 마음에 이식된다는 말이다.땅이란 인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바,
그 땅의 상황은 그 사람을 좌지우지해 가는 사랑이 어떠한 것이냐에 달려 있게 된다. 씨는 그릇과 같아서
주님에게서 흘러 나가는 생명을 받아 사용해서 성장한다.이와 같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즉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릇처럼 각 인간은 생명의 각기 다른 수준과 품질을 받아 성장한다.
씨 뿌리는 자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는 인간 자신이다.다른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는 주님을 표현한다.그 이유는
씨 뿌림이 주님의 작업 부분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인간의 작업 부분과
주님이 하시는 일과 대비되도록 하고 있다.인간의 일이란 땅을 잘 고르고,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주님의 일이란 씨의 은밀한 성장,성장할 조건의 공급,더불어 인간이 계속 노력할 수 있게 떠받쳐
주시는 것이다.따라서 주님이 주무신다거나,씨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모르시고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심는 것
본문에서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 진리를 자기 마음에
이식하는 일을 표현해주고 있다.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인간 이해성 안에서 진리가 받아들여져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싹의 성장이란 그 사람의 의지 속에 진리가 받아들여져 생동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비밀스런 작업이다
인간의 거듭남은 그 거듭남의 작용과 진보를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성취되고 있다. “바람은 제가 불고
264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싶은 대로 분다.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주님의 역사는 결과로만 알게 될 뿐, 그 일의 과정은 인간의 실세계에서는
감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고 일어남
자고 깨고 일어남,그리고 밤과 낮이란 마음의 어떤 상태를 표현해 준다.즉 마음이 진리에 대한 명백한
빛 속에 있어 그의 마음이 승강될 때,그의 마음 상태는 낮인 것이다.그러나 자기에게 진리가 분명치
않고 오히려 희미할 때,그는 정신적으로 어둠 속에 있는 바,그의 정신적 경험들은 밤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영적 진리라는 빛 속에서 적극적일 때,우리는 깨어 일어나서 뭔가 선용을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생각이나 느낌에 빠지게 되어 위대한 영적 원리로 보는 시야를
잃게 될 때,우리는 잠들어 있다고 말해진다.따라서 잔다는 것은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이고, 일어남이라든가
깨어 있음은 영적 마음의 상태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교체
위의 두 상태는 삶의 과정 속에서 상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번갈아 있게 된다. 한 때 우리의 마음은
영적 빛에 열리워져 있어 영적인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아는 듯 여긴다. 이런 상태들은 실제적인 사건
속에서 진리를 행하는 상태를 필시 동반하는 바, 생활이라는 공통적인 일상 업무에 그 원리를 적용해 갈
때이다. 그가 진리를 실제화할 때 그는 더 많은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교훈을 받아 마음이 강해지는 때와 이 마음을 가지고 일상 생활에서 그 교훈을
체현 해내는 때가 번복된다.인간은 마음을 의기충천하게 해 주는 빛 속에서 언제나 머무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발전 매 단계에서 원리를 적용해 갈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알게 된 진리를 응용함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를 심정에 가져오게 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발전되는 단계를 가질 때 새 단계는
그로 하여금 진리의 새 빛으로 더 진보하게 해준다.
이리하여 알게 되고 실습된 각 진리는 그 진리에 부응되는 선을 발달시킨다. 각 선이 발달되면 그 선은
더 많은 진리 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일어나고 자는 것을 되풀이해서 인간은 한 단계 한 단계 훈육되어지면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65
그의 원리는 최 말단에까지 적용 가능하게 되어 그는 일상 생활 속에 그 진리를 고정시키고 그 진리를
확증하게 된다.
변화는 무의식 상태에서
만일 인간이 진리를 보기만 한다면 그는 이론가일 뿐이다. 만일 그가 진리를 보지도 못하면 그는 감각적
인간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동안 거듭남은 인간 속에서 계속 진행된다.
진리의 실습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그 변화를 결과에서 경험하게 되지만
그 변화가 오고 역사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인간을 인도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내향적으로 인도하시고 각 사람의 의지인 그의
사랑 안에 흘러드시기 때문이다.인간의 의지로부터 주님은 그의 이해성이 영향을 받게 하신다.따라서
우리가 선을 기꺼이 사랑한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고 심사숙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사랑 안에 흘러든 것을 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느끼는 일반적인 감동 그 이상의
것은 가지지 못한다.그러나 그는 이해성에 흘러드는 것에 대하여는 명백한 감동을 가진다.그 이유는
이해성으로의 감동만이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뚜렷한 형체를 취하기 때문이다.
은밀함은 필수이다
인간이 의지에 선을 받되 은밀하게 받아져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인간으로 자기의 전 인격을 재건설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자연성은 비질서적인 정신 조건에
있다.그래서 그는 자신 속의 악이 선이요 꽤 쓸만한 것인 듯 착각하고 있다.그러나 주님은 이런 비질서로부터
인간을 인도해 내시기를 바래신다.그래서 질서적 조건으로,그 조건 속에서 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배려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자신에 반대되는 쪽으로 기꺼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기가 타인의 강요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인도하는
듯 보이도록 주님의 명령이 나타나게 해주시어 자신의 의도에 일치하는 인격 속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신다.이러면 인간은 자유로운 듯 느낀다.그 이유는 자신의 바깥쪽 생각에서 볼 때 자기가 자기를
266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강요하는 듯 보이지,어느 누가 강요한 것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가능한 수준에서 주님은 각자가 선을 사랑하려는 의도와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도를 인간 속에 은밀히 이식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이 어떻게 자기 속에서 일어났는가
를 보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선을 배양해 가는 것이다.
예증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는 농부가 알아야 할 필수 조항은 아니다. 만일 그가 자기 역할 부분인 땅을 잘
준비하고, 씨를 심고, 이 씨가 잘 자라도록 협력하는데 자기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수확을 거둔다면
그는 씨의 성장 결과로서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가 마음에서 성장하도록 능력을 발휘해서 그 진리의 성장에
협력하면,그는 마음과 생활에서 진리가 성장되는 실제적인 결과를 붙들게 된다.아마 자기 속의 진리가
어떻게 이식되어 실지의 선이라는 추수를 거두기까지 성장되었는가를 모른다 해도 문제가 안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은 다양한 작용을 수행한다.즉 소화되고
흡수되어 피와 살로 전환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작용을 명백히 느끼거나
지각하지 않는다.이런 소화 단계들을 알지 않아도 그 단계들의 결과를 붙잡아 살아간다.
이와 같은 것이 영적 생활에도 있다. 주님은 우리의 지식 없이 우리의 정신적인 조건 속에 많은 것을
수행해 주신다.농부가 씨를 심고,자고 일어나 밤과 낮이 바뀌되 그는 어떻게 라는 방법에 고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일을 해 가되 영적 상태에서도,자연적 상태에서도 수행해 갈 뿐이다. 그럼에도
내향적인 성장은 우리가 지각 못하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사랑으로 영원히 지켜보시는 주님에
의해 역사 되고 있다는 말이다.
수호 천사
천사와 영인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인간을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이끄는 영들을
보지 못한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들과 얼마나 친숙한 상태인지,자기 주위에 현존해 있는 그들을느끼지
못한다다는 말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67
주님으로부터 자기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떻게 흘러들며, 지옥으로부터 자기 속에서 악과 거짓이 어떻게
흘러드는지 자신 스스로의 감각으로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법칙에 해당된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가 자기 속에서 자기로 하여금 악을 반대하고 선을 좋아하도록 은밀히 어떻게 역사 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런 과정을 안다면 그는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지도 않기 때문이고,
자기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기 의사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자기 삶의 영적 원리로 알고 인정한다면,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있는 교회 원리로
가르쳐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우리가 바깥쪽 감각들로 알려드는 것은 각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만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에게 오는 선한 영향력에 반대되는 행동을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증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오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쳐가는
가를 생각해 봄으로도 쉽게 파악된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보고 먹을 수 있지만 실상 자기
뱃속에 들어가 버린 음식의 과정을 일일이 지켜볼 수 없듯이, 정신적인 양식이 마음의 각 층이나 각 수준에서
어떻게 소화되고 흡수되어 배분되는 신성한 섭리의 모든 내향적 작용을 간섭해 보려 드는 것은 가능할
수 없는 일에 해당된다.
결과로서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주님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각 단계나 진보 수준을 거치는 과정을 알 수 없다 해도, 그
과정이 끝난 후의 결과는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보인다.추수 때가 올 때,우리는 그 추수에 관해 보고
안다는 말이다.인간이 거듭나질 때,각 사람은 주님께서 점진적 성장이라는 많은 단계를 통해 자기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반대하지 않는다.
예증
268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농부가 씨의 성장을 생산할 수도 없고,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도 못하지만,그에게도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있다.그는 씨를 심는 방법이나 기술을 연마해 갈 수 있다.그는 불량한
씨와 우량한 씨를 구별해 내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그는 땅을 고르고 잘 돌볼 수 있고,잡초나 돌을
제거하며 여느 짐승이 씨의 성장을 방해 못하도록 울타리를 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좋은 작물을 수확하지
못한다면,거기에는 씨 뿌리고 가꾼 농부의 결함이 존재했을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자신이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신성한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마음을 준비하여,주님의 영향이 자기 마음에 계속 미치도록 한다던가,그분의 수호 천사가 마음의 성장을
계속 하도록 허용하는 등등 우리 쪽의 할 일이 많이 있다. 따라서 진리의 성장함이라는 결과를 받는데
실패함은 우리 쪽의 할 일이 다 진전되지 못한 만큼에서 있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을 알고 행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충분하다.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물론 영적 사항에 관한 큰 지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유익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지식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은 지식이 응용되기 전에는
어떤 쓸모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실제 응용에 소용되지 않는 한 모든 우리의
지적인 지식은 아무 실용성이 없게 될 뿐이다.
협동
주님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으로 다가 오시어 선으로 채워 주시고 악은 쫓아내어 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단지 각자의 일상 생활 속에서 선과 진리를 기쁘게 응용하려 하는 한도에서 우리 속의
선과 진리를 성장하게 해주실 뿐이다. 즉, 그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더 확장시켜
주시어 그분에게서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게 해주신다는 말이다.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사용해 갈 때,
그분은 은밀하게 더 받게 해주시는 바 이것이 그분의 경이로운 작업인 것은 확실하다.
땅이 열매를 맺는다
그럼에도 행해지는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해 놓은 냥 보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 구절의 말은 글자에서까지도 실제적인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땅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69
아니라 수동적이기 때문이다.즉 작가의 극본 그대로 움직이는 배우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열이나
빛, 대기, 기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의미되는 인간의 자연적
마음은 그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다양한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생명력은 땅에 있는게 아니라 씨 안에 있다. 따라서 인간 마음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는 인간 안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라는 씨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밭이라는 인간 마음은 진리를 받는데 준비된 조건 속에 있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점진적인 성장
씨는“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인간이 진리를
받는 처음에는 그저 생각 수준에서,즉 미약한 새싹의 수준에서 진리를 받을 뿐이다.게다가 그 생각도
자신의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 다음, 인간은 진리를 받되 기억 속에 저장해 둘 만한 지식, 과학적
상식 정도로 진리를 받는다.후에 그는 진리를 원리로서 보게 된다.이러면 그가 믿는 진리들이 되는데
이를 두고 믿음 속의 진리라 한다.그런다고 그의 자연적인 생각이 진리와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낟알이 이삭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그러나 이 이삭도 쓸모 있기에는 아직 이른 상태다.이후, 인간은
실제적인 양상,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한 어떤 것 속에서 진리를 본다.이것이 삶 속의 진리요, 이삭
속에 낟알이 들어찬 상태,언제라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상태,사용할 준비가 된 알이 찬 이삭인 것이다.
이 낟알이 사용될 때 진리들은 이타애라는 행동 속에서, 또는 이웃을 사랑함이라는 행동 속에서 생활의
선이 되어진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자라나고,그 마음과 더불어 진리도 성장해 간다.즉 진리는 먼저 각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오고,그 다음 그의 이해성 속에서 정리되어,마지막으로 그의 의지 안에 자리잡는다. 이 성장은
인간이 자기의 자연적 삶 속에서 주님의 진리에 꼭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그분의 계명을 준수해
갈 때만이 진행되어 진다.
받는 것은 다양하다
270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인간은 진리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그 이유는 인간 각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인간 삶 전체를
망라해서,만일 그가 거듭 나아가고 있다면,그는 더욱 더 많은 진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이 새
진리를 받는 태도는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진리를 수단으로 선이 모든 사람 속에 이식되어진다.천적인
사람은 선을 사랑함으로 그 사람 속에 선이 이식된 경우이다. 이 사람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거듭나는
것이고,이 선 역시 진리를 수단으로 이식되기는 마찬가지이다.그러나 그 사람 속의 진리는 기억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이것저것 재 보기 위해 이해성 속에서 되씹고 있지도 않은 바,그의 진리는 즉각
그의 의지,심정 안에로 이동되어 실제적인 선 속에,즉 생활 속에서 즉각 즉각 응용된다.
그러나 영적 인간, 즉 선을 사랑해서 진리를 실천하기 보다 진리를 사랑하기에 진리를 실천하겠다는
사람일 경우, 진리들은 그의 이해성에 들어가 거기서 추론의 대상이 되었다가 점차 그의 믿음 속의 진리로
채택되어진다. 이렇게 되면 양심(conscience, con-science, science with man)이 영적 인간 속에 건설되고,
이로부터 그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그러나 천적 인간, 즉 실제적인 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인간은 자연적 인간 같이 과학에 의해,
영적 인간 같이 양심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아는 정의의 표준에 의해서만 규율되는게
아니라 정의를 사랑함과 선함 속에서의 기쁨에 의해 규율되고, 이 기쁨으로부터 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각 속에 있는바,그는 자기 속의 사랑이 증가되는 만큼 그의 진리도 증가된다.
낫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 예리한 날을 가진 낫, 이 기구는
밑뿌리로부터 낟알들을 분리시키는 바,진리를 표현하되,특별히 필수적인 것과 비필수적인 것을, 또는
악에서 선을 구별해 내어 잘라 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의 주님의 말씀을 표현해 준다.
곡식은 차후 사용을 위해 잘라서 분리되고 있다. 이 절단에 수반되는 것으로 자르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
탈곡(도리깨질)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마음속에서 찾아보면, 신성한 말씀 글자, 특별히 십계명으로 무장한
마음은 가상적인 진리,눈에 보이게 그럴듯한 진리로부터 진정한 진리를 자르고 분리시킨다.특히 합리적
사고를 수단으로 꾸준한 사용을 위해 실용적인 선만을 탈곡해 낼 수 있다.
추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71
추수란 농부가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등등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의 좋은 것들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섭리 속에서 생활 속에 있는 실제의 선은 주님이 인도하시고 역사 하시는 모든 과정을
망라하여 있게 되는 그분의 목적,즉 추수이다.농부가 일하면서 작업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기대하는
대로의 씨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기뻐해 가듯,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우리 마음이 진보하는 매 단계마다에서
선하고 질서 있는 상황을 마련하여 추수 때를 준비해 가고 있을 때 매우 기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기 자녀들이 거듭남을 향해 질서 있는 길로 진보해 가는 것을 볼 때 흐뭇해하기도
한다.매 단계마다에서,우리는 진리의 씨를 위해 준비된 땅을 보고 기뻐하고, 성숙과 추수를 향해 그 씨를
계속 돌본다. 이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도 우리가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매우 기뻐한다.
천사들은 우리 사랑이 선한 자극을 받는 것에, 모든 진정한 생각이나 쓸모 있는 행위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주어 우리를 지혜에로 인도하고 어리석음에
서 되돌아 서게 해준다.
해야 할 우리 몫
위와 같이 주님과 천사들은 노력하고 있지만,이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우리는
씨를 뿌림 즉 진리를 배우고, 사랑과 선용이라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실제의 선을 알이 찬 곡식을 모아들이듯
거두어 가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빵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먹어야만 한다.우리에게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심정 속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많다. 주님이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위해 마치 농부가 씨를 뿌려 두면 당연히 싹이 올라 올 것을 믿고 있듯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은밀한 일들은 우리 하느님 주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에게
밝혀 주신 일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속한 것이요, 우리로 그 일의 법칙 속의 모든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 이 일의 성사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는
자기 속 애정이나 생각,자기 밖 행동 속에서 악을 금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
272 은밀하게 자라나는 씨- 마가복음4장 26-29절
따라서 실용적인 관점이 즉각 떠오를 것이다.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너무 골몰할 필요가 없다.그 이유가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오하고 영적 상태에 언제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높은 상태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고 작정된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는 자기가 세상에서 떠나 언제나 고고하게 날으기를 추구하겠다
는 세속 탈피주의자들의 미묘한 실수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은 우리로 자고 일어나는 밤과 낮을
주셨다. 즉 자연적 상태와 영적 상태 사이를 오가도록 해서 우리로 진리를 배워 더 함양된 상태에도 있게
해주시는가 하면,그걸 가지고 자연적 상태에서 실습하도록 배려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상태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자연적 상태에 더욱 자주 있게 된다면, 우리는 악한
자연적 상태를 그만큼 모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실지로 위험한 것은 우리 밖인 세상에서 떠도는 악한
상태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부추겨지는 악들인 것이다. 따라서 재삼 강조해야 할 것은 선한 자연적 삶
속에서 계속 살아가되 주님의 말씀을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 자신은 계명에 순종하고 있다해서 그것을
뽐내지 말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야 하는 것,뭔가 큰 주님의 일을 해내겠다고,세상에 뭔가 나를
드러내 보겠다는 식으로 포부성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려 든다거나 주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려들지
말 것,오로지 평탄하고 지극히 단순한 일상 생활 속에서 계명의 준수,말씀의 실현에 만족해야 하며, 그런
삶 속에 옮겨다 놓은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추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용기
위의 사항들을 우리가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자기 스스로 자신을 격려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위의 일을 해내는데 우리에게는 크나큰 자연적 지식,학식,재물,사회적 지위 미모 등등 어떤 자연적 조건도
요구되는게 없다.요구 사항은 계명을 지키는 것,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뿐이다. 이를 행할 때, 주님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세계에서 쓰게 될 우리 인격을 이타적인 소망과 열망들로 채워 주시어 내향적 성장을
이룩해 주신다.
이 세상은 학교 기숙사일뿐,오게 되는 저 세상이 진짜 삶이다.극히 적은 외부 사항들이 지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요구될 뿐이다.더욱이 외적인 풍요로움이 진짜 행복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거듭 나아가는
영적 삶의 요소들을 채우는 이 세상 조건들은 극히 미미한 것뿐이다.
우리 자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73
이 비유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 그들이 자연적 세계에서만 자라지 않고 영적 세계에서도 성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그들에게 순수한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 주님이 그들 마음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들이 준비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을
암시하고 있다.씨의 성장이 은밀한 비밀이듯이 성장의 실패 역시 비밀이다.그 비밀에 우리는 간섭할
수가 없다.그 이유가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이든,자녀의 마음속이든, 되어 가는 그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일이 잘 되어 가게 노력만 해야 할 것이다.아마 때로 잘 안되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악한 잡초 씨가 땅 밑에서 은밀하게 성장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번드르한 외용물이 오히려 진리의 씨가
성장하는데 더 나쁜 상태일런지도 모른다.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것,즉 땅을 잘 준비하고, 잡된 씨를 걸러
낸 우량한 씨를 선발해 심고,자라 오르는 잡초를 계속 뽑아야 하고,튼튼한 울타리를 내 마음 밭 주위에
둘러쳐 두어야 하는 등등의 우리 몫을 슬기롭게 잘 처리해야 하는 것뿐이다. “만일 네가 이런 사항들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면 복 있는 자이다.”
2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악은 거짓을 창출한다-
성서 본문: 누가복음 6장 39절
39.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눈이 멈
무지한 교사는 자신과 학생 모두를 잘못 인도한다.
육체적인 소경은 정신적인 소경을 표현해 준다. 정신적으로 소경된 자란 진리의 빛에 정신 속의 눈을
닫고 있는 이들이다.그 이유가 진리는 진리 자체의 빛에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거짓 원리를 신봉하여
그 원리를 응용하는 이들은 진리의 빛 가운데 있지 않아서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그들도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눈먼 것의 등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75
그런데 눈이 머는 상태는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몇 가지 등차가 있다. 소경이란 자연적인
결함이나 각 개인의 나쁜 습관에 기인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영적인 소경 역시 무지 또는 악으로부터
기인된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눈이 머는데 몇 가지가 있다.먼저 진리에 무지한 경우,즉 진리를 전혀 알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둘째로,교리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경우,즉 진리를 알되 단순히 잘못 이해된 경우의 진리의
앎이다. 셋째로, 진리가 왜곡된 경우가 있다. 이는 진리를 알고는 있으나 말뿐이어서 그 이론을 자신의
이기적인 바램에 걸맞도록 잘못 적용한 경우이다.넷째로,의지로부터 진리를 거절한 경우,즉 어떤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일치 안된다고 느껴져 진리를 기어이 받지 않는 경우이다. “어리석은 자는 심정으로 하느님이
없다고 말한다”는 성경 구절은 위의 네 번째에 해당될 것이다.이어서 우리에게 해주는 말씀은, “빛을
미워하는 자,그의 행위는 악할 뿐이다.”
세 번째의 경우의 인간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인간의 전통에 진리를 끼워 맞춰서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법칙이 어떤 결과를 생산 못하는 경우이다.이는 진리의 형체만 있을 뿐 진리의 영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그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마태복음 23:23).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
마태복음 23장 16, 17절에서, “눈먼 인도자들”이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가
재삼 상기해야 할 것은 성경 내의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는 모든 시대 모든 이들을 위해 성경 내에
존재하며,마음과 삶이 그들 상태와 비슷한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또는 영적 진리의 빛이 자기들의
마음을 바꾸려 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 이들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이들이
자신도,타인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이들까지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그 결과 그들 모두는 구덩이(ditch)에
빠지고 만다.
구덩이
276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누가복음6장 39절
눈먼 사람이 자칫하면 구덩이에 빠지기 쉽듯이,영적 진리에 눈먼 사람은 정신적인 구덩이,즉 생각과
삶의 거짓 원리라는 것에 쉽게 빠진다.
성경 글자에서 언급되는 말, “음부(pit)에로 내려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거짓 원리에 빠져든다는 말이다.
“그분은 나를 무시무시한 구덩이,늪에서 건지시고 내 말을 바위 위에 놓아 주셔서 내 가는 길을 건설해
주셨다.” 이 구덩이란 거짓을, 바위란 진리를 말한다.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은 자는 거짓말을 생산해
낸다.그는 구덩이를 만들고,그것을 깊이 판 뒤, 제가 만든 구덩이에 제 스스로 빠진다.” 이런 구절에서
보여주는 바,사악한 자는 자신의 거짓 원리에 제물이 된다는 것일게다.
타인을 잘못 인도한 경우...
그래서 오늘 비유는 가르치는 자가 자신이 가르치고 영향을 행사하는 이들을 자신과 더불어 구덩이로
끌어내린다는 것을 보게 해준다. 그리고 타인을 잘못 인도하는 악을 보도록 우리에게는 구약성서에 다음과
같은 금지법을 가지고 있다: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을 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말라” (레위기 19:14). “누구든지 물웅덩이를 열어 두거나 물웅덩이를 파고
덮지 않아서 황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에는, 그 물웅덩이의 임자가 짐승의 임자에게 돈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 대신 죽은 짐승은 그의 것이 된다” (출애굽기 21:33,34). 다시 말해서, 만일 어떤 이가 거짓을
가르쳐서 타인을 잘못 인도했다면,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잘못된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그
대신 진리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그리고 그가 잘못을 저지른 만큼,그 악은 그의 과오가 된다는 것이다.
위의 율법은 우리의 실제 사용을 위해 얼마나 아름다운 법인지 모른다. 우리는“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식을 바래서는 안된다.만일 우리가 자신의 어떤 이기적인 자만,기타 다른 악들로 인해 어떤 문제의 처리를
잘못되게 했을 때,우리는 이미 잘못된 것들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그리하여 우리의 영향이 악이
아닌 선이 되도록 신속 과감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본을 보이되 잘못 인도하는 경우...
하느님의 말씀 글자를 가진 이들,그러나 그 글자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왜곡하는 이들,이들은 실제의
경우,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인간은 말로 가르치기보다 행동으로 더 가르쳐지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77
인이나 율법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곡시키므로 그들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는 격이다. 신실한 교사라면 거듭남을 위해 인간의 실제 삶 속에 진리를 열심 있게 응용해 가야만
한다.
아마 우리 주위만 둘러보아도 악을 혹독하게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 가지고 쉽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그들은 선함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에 있어서 그 시대,그 사회에 흐르는 통상적인 감정을 자신
속에 흡수시킨다.그러나 그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필요한 심오한 지식은 없다.그리고 자신의 애정과
생각에 대한 품질 측정에서도 합리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다.단지 그들은 무난한 것을 선택한다.따라서
그들은 별 대수롭지 않는 악일 경우 그 악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쉽게 허용한다. 그들은 조그만 악을
격렬한 눈초리로 감시하는 것을 불친절에 속하는 태도가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한다.
교사
진리에 아주 진지한 교사가 있어 위와 같은 계층을 상대한다면, 그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을
피하기 위해 그의 의무를 아주 심각하게 수행하리라 본다. 그는 악이 작게 보이든 크게 보이든 상관없이
모든 악을 혐오하도록 하는 태도를 학생들에게 조장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악일지라도 그
악은 지옥의 과업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힘을 모아들이는 바,전갈 새끼와 같기 때문이다.
악이 어떠한지 얼마나 지독한 거머리인지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교사일 경우, 그가 진리의 가상 속에서
거짓이라는 실제의 구덩이로 잘못 인도함이 없이 타인에게 진리를 가르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교사는 진리를 교리적으로 배워 기억 속에 잡아 두어야 할뿐 아니라, 진리를 향한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만일 그렇지 않다면,그 교사는 올바른 교리를 잘못 응용할 것이고, 실제의 경우에서
타인을 잘못 인도하여 해를 받게 할는지 모른다.
예증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주님이 다 마련해 주신다”는 진리가 있다. 그런데 이 진리로부터 인간은 각자를
위한 것을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라고 추론한다면, 이는 잘못된 진리의 응용이 되고
만다.슬기롭지 못한 사람은 슬기롭지 못한 방법으로 이타애를 행할는지 모른다.오히려 그런 행동 속에서
278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누가복음6장 39절
타인에게 오히려 피해를 줄는지도 모른다.그는 거짓이 진리인체 하는 줄도 모르고 거짓을 사용하는 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든 사람, 그들은 행복에로의 길이 하느님에 반대되는 것이 악인 고로 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행동 강령에 있는 줄을,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을 알아야 함을 가르치고 응용하는데 실패하는 이들이다.
진리의 빛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들,그들은 자신 속의 빛 가운데서 진리가 나타남을 알고 있다.그러나 비합리적으
로 생각하는 이들,그들은 어떤 내적 시야로부터,가르쳐진 진리에 대한 어떤 지각으로부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내면의 생각은 영적 진리의 빛인 천국의 빛 속에 있다.그러나 외면의 생각은 자연적인 빛 속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성은 사랑과 지혜에 의해 내면의 빛 속으로 승강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면 생전에 결코
들어 본적이 없는 것에 부딪쳐도 그 중에 어떤 것이 진정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오로지 감각적일
뿐인 사람은 그의 육체가 태양의 열과 빛을 느끼되 대기를 통과해 완화된 정도만큼에서 느끼는 것같이
천국적인 진리를 감각적 수준을 넘어서서는 알지 못한다.
진리의 영과 형체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에게는 그 지식 속의
영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영을 가지는 조건은 진리를 향한 우리의 의지 상태에 달려 있게 된다.듣는
자의 지혜가 이해하는 것 이상의 어떤 지혜도 더 말해 줄 말은 없다.
논쟁 같은 속에서도 우리는 진리의 형체뿐만이 아닌 진리의 영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만일 우리가 진리의 형체를 취해서 자신을 실제로 잘못되게 추켜세운다면,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 된다.이 왜곡이 팽창되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이 비유 뒤를 잇는 문맥을
보면,우리가 타인의 눈에 든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기 전,자신의 눈 속에 든 들보를 빼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우리의 문제점은 진리가 부족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각함이 부족한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79
있는 것이다.
율법 같은 진리
진리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어떤 진리가 어디에 있든 법이다.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실제 역사는 자연적인 법칙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심으로부터 외곽에 이르는
모든 창조에서 법은 최상의 위치를 점한다.그래서 모든 법은 하나의 진리이다.자연계의 이상한 현상을
관찰할 때 그것이 문명화된 사람에게는 과학적으로 이해되어 받아들이지만 미개인에게는 공포의 자연
법칙으로 다가오게 된다.그러나 문명화된 사람은 법칙의 지식을 가지고 무지라는 공포를 탈출한다.이와
비슷하게 영적 무지라는 공포는 영적 진리에 있는 합리적 총명 앞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새교회 속의 진리들로 내면을 교육시킨 마음은 실제 사용을 위해, 영적 삶의 건설을 위해 세워진 합리적
지식이라는 거대한 창고와도 견줄 수 있다.
책임
눈이 먼다는 것은 결함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운일는지 모른다.이와 비슷한게 무지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지에서 태어나긴 하지만 무지로 어떤 악한 자가 생겼다고 할 경우, 그가 영적 진리에
무지한 채 남아 있도록 방치되어진 것은 진정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의 결과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더 심오한 의미
위와 같은 데에 책임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 비유에 대해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찾는데 노력하게끔
해준다.심오한 의미란 보다 더 실제적인 영적 의미를 말한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눈먼 인도자란 눈먼
의지,악에 의해 눈이 먼 의지이다.인도를 받은 눈먼 자란 눈먼 이해성, 거짓에 의해 눈이 먼 이해성을
말한다. 따라서 둘 다 눈이 먼 관계로 둘 다 거짓이라는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연적인 의지가 어떠한지 보자.이 의지는 추진력은 있지만 빛이 없는게 흠이다.이 의지는
280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누가복음6장 39절
원리를 볼 수가 없고 단지 느낄 수만 있다. 즉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것에 대한 품질을 감별하는 내적
시야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보는 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마음에
지성 또는 이해성이라는 것을 장치해 두셨다.이것이 마음의 눈이다.그래서 우리에게 진리가 가르쳐지면,
심정 속에 거주하는 열정의 속성이 어떠한지 우리는 볼 수 있게 된다.
진리를 보는 이러한 능력은 거듭 나아가는 능력에 의존된다. 의지와 이해성은 이해성 속의 진리와 의지
속의 선이 삶이라는 현장에서 하나가 되는 천국적 결혼으로 상호 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어둠을 사랑하고 행실이 악하다면,” 우리의 눈먼 의지는 눈먼 이해성과 짝을 맞추는
바,둘 다 거짓 원리라는 구덩이에 머리를 디밀게 된다.“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22,23).
여러 가지 예들
나쁜 충동은 언제나 눈이 먼 인도자이다.그것을 따른다면 언제나 미련해지게 된다.악마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악한 열정이 우리의 눈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보게 할 수 있을까?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닫히게 해 준다.우리가 분노로 떨 때,흔히 우리는 영적인 사항에
소경이 되게 하는 감각적인 빛 속에 자신을 빠트린다. 이런 사항들은 우리가 실제의 삶의 법칙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라 본다.우리가 나쁜 열정 속에 있을 때면 언제든지 우리를 소경 되게 한다.그것은 눈먼
이해성에 대한 눈먼 인도자이다.그래서 그것은 우리를 거짓 개념으로,거짓 결론으로 이끌게 하는데, 설사
우리가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올바르게 의도하고자 생각하고,더욱이 올바른 것을 행하려 하는 때 조차에서도
구덩이로 끌고 간다. 분노라는 거룩하지 못한 불로부터는 오로지 감각적 사고라는 시꺼먼 연기만 솟을
뿐이다.이 연기는 오로지 영적 진리가 발하는 명백한 빛을 희미하게 해줄 뿐이다.좋은 영향력만이 진리에
우리 마음을 열리게 해줄 수 있다.
위급한 상황 같을 때 우리에게는 선한 충동이 먼저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위급이 지나면 우리는
그것에 반대되게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런 이유는 우리가 선한 것을 짓밟도록 악한 욕망을 자신 속에 허용하기
때문이다.주님은 우리 속의 악한 열정이 일어서기 전에 내면의 삶에서 먼저 일어나신다.그렇지만 우리가
나쁜 충동을 산출하여 선한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가기를 거절하는
셈이 된다.그 결과는 재난을 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81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충동을 신뢰해서는 안된다.그 이유가 우리에게는 밝혀진 말씀의 빛,그리고
주님의 리더쉽이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자신이 올바르다고 과신할 때,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을 흔하게 저지른다. 따라서“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라는 계시록
3장 17절의 말씀을 위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소경의 눈이 열림
예언서를 읽게 될 때, 우리는 “소경도 눈을 뜰 것이라...”라는 구절을 읽을 때가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이 말씀은 이교도들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라고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나,우리가 이 구절을
자신에게 특별히 응용하면 우리가 영적 이교도인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얼마나 우리는
거듭나는 삶의 웅대함과 영화로움을 조금도 보지 못하는가? 천국적 진리의 빛에 자신의 영적 눈을 몇
번이나 열리게 했었던고?반문해 보아야 한다.보지 못하는 이들만큼이나 우리도 소경인 것을 재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치료약
오늘 비유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적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인 치료약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즉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서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 주님은 스승이고, 우리는 제자이다. 그리고 주님이 진리로 가르치시는
바,진리는 우리의 스승이다.그래서 인간이 자신을 평가하건대 진리보다 위에 있다고, 즉 주님 위에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그러나 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심을 가지고 진리의 빛과 생명 속에서 자기 스승을
따르는 자,그는 자기 스승같이 될 것이다.즉 그는 신성한 스승의 모양과 형상 같이 되어 진다는 말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씀을 통하여 깨끗해진다.”
따라서 자신의 바램과 견해, 그리고 자신을 진리보다 높다고 하는 자는 영적인 소경인 채로 남아 천국적
빛을 볼 수 없다.그러나 진리를 자아보다 앞세우고 자신의 애정이나 생각,그리고 행동을 진리에 종속시켜
진리의 지배하에, 그리고 진리를 수단으로 시험을 치뤄가는 사람은 천국 빛 속에 살면서 천국의 스승과
282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누가복음6장 39절
함께 걷게 된다.
인간의 마음에 주님이 영적으로 오신다는 것은 영적 진리의 빛에 인간의 영적 눈, 즉 그의 이해성을
열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심정이 순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라.” 다시 말해서
심정이 순결하면 그분의 신성한 진리 안에서,그분의 거룩한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심정은 순결하기 때문에,또는 악에서 자유롭기 때문에,그들 속의 의지는 그들 이해성을
잘못 인도하는 눈먼 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제물
눈먼 상태가 표현한 의미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에서 사제들 중 소경들은 예배를 집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족들에게는 어떤 눈먼 짐승도 제물로 주님께 바치지 못하도록 명령되어 있었다.
우리의 영향력
모든 사람 각자는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바,각자는 그 영향력에 책임이 있게 된다.그리고 각자는
눈먼 인도자가 아닌 좋은 인도자로 부름 받고 있기도 하다.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책임이 있겠지만,
더 나아가 저 세계에서도 지상 생활에서 가진 영향력이 계속 되어지는 바, 그것에도 책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삶의 모든 나쁜 상태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밑으로 쳐져서 본인이 잘못 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하고, 게다가 타인이 올바르게 행하는 것까지 간섭하여 타인마저 자기와 비슷하게 만들려 한다. 결국 모든
악한 열정은 동기 속에 둥지를 틀고 자리잡아 불행의 기초가 되고 만다. 이런 열정이 언제 어디서 멈추겠는지
누가 말할 수 있으랴?
흔히 우리는 자기 속의 악이 터져 나온 이유가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 속의 자아 사랑을
위로하려 들는지 모른다. 흔히 하는 말 “네가 나로 그렇게 행동하게 했어...”라고 쉽게 결론짓는다. 이런
사건 발생의 경우에도 그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설사 타인의 꾐에 빠졌을 때 조차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죄 속에 몰아넣을 권리까지 주어져 있는 듯 착각해선 안된다.넓은 측면에서 볼 때,우리 속에
든 이기심이라는 지나친 감각적 상태가 자신 속의 악한 기질을 폭발시킨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83
예증
만일 우리가 자기 집 마루 바닥에 인화성 물질을 방치해 둔 상태에서 누군가가 우연히 그곳에 불을
떨어트려 집을 불타게 했을 경우,우리는 불을 지르게 된 그 사람을 정당하게 혹평할 수는 없다.그 이유는
불이 쉽게 날 수 있는 조건에 집을 방치해 둔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요동을 칠 때,자기 속에 든 악들 중 감금되어야 할 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호랑이는
성을 내고 날뛸 때에야 자신을 진실로 표현하는 때일 것이다.호랑이가 깊이 잠들고,비활동적일 때, 호랑이는
자기 특유의 성미를 드러내지 않는다.이와 같이 우리가 각자 속에 악을 가지고 있다면,그 악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판단하기 보다 그 악이 호조건을 만나 날뛸 때 자신의 속성을 판단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가늠할 때 흔히 최상의 상태에서 자기의 특질을 가늠해 보기를 은근히 좋아한다.
우리의 열망이나 포부 같은 것은 그것이 행동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메말라서
매력 없는 섬에서 온갖 역경을 치르며 사는 사람이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이상하게 잡혀 본토에서 흘러
넘치는 오렌지의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을 때 그의 코는 잠시나마 흥겨운 멜로디 같은 냄새에
취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렵고 고되며 냉혹한 이기적인 불 속에서 살면서 때로 천국의 멜로디,
향긋한 냄새를 맡게 되어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아마 자신도 사랑스러운 삶 가운데 도달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는 것을 잠깐이나마 붙잡아 볼 수 있어 마치 그렇게 된 냥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속한 것을 소유하기 앞서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용기와 사랑
천국적인 것들에로 이끌리는데 도와주는 이들,또는 이끌어 주는 이가 우리라고 해도,모두에게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위해,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경고를 듣기 위해 영적 용기가 흘러 넘쳐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설사 그 진리가 우리 자신을 심하게 견책할 때조차 에서도 사랑이 그
견책이라는 회초리를 거두어 줄 것임을 알고 인내해야 한다. 그 이유가 진리의 견책은 우리 속의 악에
대한 것이요,우리 영혼이 악에서 구원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로 침몰되고, 선의의 비평으로 다가서는 사랑의 힘에 어떤 가치를
284 소경이 소경을 인도함- 누가복음6장 39절
부여하는데 실패한다면, 또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자기 속에 든 어떤 결점을 보지 못하게 덮어 주는
이들이라고 판단하여 격렬한 거짓에 빠지고 만다면, 우리는 가장 미묘하고 위험스러운 영향력을 친구 삼는
것이 되고,그 반면 천국에서 보내 주는 친구를 거절하게 된다.그러면 우리의 심정은 자기 기만에 빠지고,
우리의 이해성은 부패된 심정에 노예화되어 시꺼먼 구름으로 가려지고 말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심정은
눈먼 인도자가 되어 거짓이라는 비참한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85
22
빚진 두 사람
-영적 사랑과 자연적 사랑-
성서 본문: 누가복음 7장 41-43절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겠지요” 하였다. 예수께서는 “옳은 생각이다” 하시고...
요약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을 통치하고 있는 사랑(ruling love)의 품질에 좌우된다. 그 사람이 소유한 사랑이
우량한 품질이라면,그의 실제 삶의 상황은 천국적인 삶이 되고,그의 사랑의 품질이 불량하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에 걸맞은 것 이상의 더 높고,더 위대한 실제의 삶 속에 들어 갈 수는 없다.이것이
비유로서 예증하는 원리이고, 이 원리는 본문 전후 문맥인 36-47절을 연결해서 읽게 되면 이해된다.
286 빚진 두 사람- 누가복음7장 41-43절
자연적 사람은 오해했다
바리사이파인이나 시몬같이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영적 애정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의 목적이나
인격을 언제나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한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은 품질이나 종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즉 애정이나 생각의 두 가지 다른 정신적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비유는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시몬에게 사랑에는 다른 종류,다른 품질이 있다는 것을, 외적인
삶이 언제나 안쪽 인격의 품질을 언제나 암시해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겉만을
볼 뿐,안쪽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비정상적이었고 죄를 진 경력이 있으나 내향적으로
더 향상된 사람을 독선적인 사람은 쉽게 경멸한다.
이에 연계해서 우리에게 기억되는 또 하나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되 자기는 죄 짓는 세리들 같지
않고 의로운 사람이라 하여 정중히 무릎꿇고 기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일 것이다.그러나 주님은 말하시기를,
이 사람(세리)의 집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채권자와 채무자
채권자란 주님이시다.사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게 된 모든 것에 대해 그분에게 변제해야 한다.비유에서
두 채무자가 언급되는데,한 사람은 많은 빚을,또 한 사람은 적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빚에 관한 영적
사항을 살필 때,우리는 양보다는 질을 간주해야 한다.모든 이는 각자가 소유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빚을 지고 있는 지를 인식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빚을 인정할리 만무이다.
표현적 언어를 사용하는 비유에서, 주님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자기가 주님께 진 빚이
엄청남을 알고 인정하는 이들이요,따라서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해주셔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것,자기는
그 많은 것 전부를 주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주님께 빚을 지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기가 주님께 진 빚이 있으나 조금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렇게
적은 만큼 주님께 빚졌다고 인정하는 이들이다.
500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주님이 자기에게 해주실 것이 아주 많다는 이들을 표현하고,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위해 일을 하시도록 허용하되 조금만 허용하는 자를 표현한다.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을 비꼬아 생각하면 주님이 불균등하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듯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87
주님이 각자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받는 인간의 상태가 불균등할 뿐이다. “나의 방법이 평등치 않다고
말한다마는 오히려 너희들이 방법이 고루지 않더냐?”
각기 다른 인간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이 비유에서도 각기 다른 금액이 인간에게 주어졌고 각기 다른 금액에서 인간에게
의무가 주어 지는데, 이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각자 재량대로 주시는 것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있어지는 인간의 다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열과 빛을 받는 만큼이나 자유로이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신다.사랑으로 주님께 자기 심정을 여는 사람,다시 말해서 주님이 천국적인
사랑으로 자기 속을 채우도록 허용하는 사람은 주님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위해,자기 속에서 많은 것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신성한 용서
비유의 언어는 자연적 외관에 따라 서술되어진다. 따라서 주님은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을 더 용서한
듯 말해지고 있다.그 이유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주님 편에서 보는 용서는 무엇일까?이 용서는 어떤 행동에 대한 벌을 면제해 주는 것만은 아니다.죄를
따라 다니는 벌은 마치 법률이 사회법을 위반 한데 대해 벌금이나 형벌을 부과시키고 있듯, 주님에 의해
죄에 외적으로 첨부된 것이 아니다. 죄가 깨트린 법은 정신 세계의 헌법이라는 것에 소속된 인간 존재에
관한 법인 것이다.죄에 대한 벌은 법을 깨트린 결과와 분리될 수 없다.이는 마치 건강한 육체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생활 규칙을 깨트림으로 치르고야 마는 신체적인 고통이나 질병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의지가 병들어 있거나,독단적인 처벌까지도 주님께서는 관심을 가지시고 모든 이를 언제나 용서하신다.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에제키엘 18:23).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를 이해하는 것, 또는 인간이 용서되는 것이란 당사자가 자기 죄를 보고 인정하고
그 죄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즉 그가 모든 이에게 확장되어지는 신성한 용서를 실제 삶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벌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든 죄에 수반되는 실제의
288 빚진 두 사람- 누가복음7장 41-43절
벌을 제거해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죄와 그에 따른 벌은 각 사람이 그 죄를 계속 짓고 있는 한 그
죄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성한 용서를 실지로 받는 길은 죄 짓는 일을 중단하여 벌을
피하는 길뿐이다.
빚을 갚음
그러므로 비유에서 더 많은 빚을 져서 더 많은 용서를 받는 듯 여겨지는 사람은 죄 짓는 것을 더 열심히
중단하므로서 거듭남의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한 사람이요, 자기 악들로부터 구원됨에 있어서 신성한 용서를
더 음미하고 더 충분히 느낀 사람을 말한다.
비유의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진 빚을 갚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즉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죄를 차감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선함은 하나도 없다.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이 그들에게 거저 주신 선물뿐이다.
영적 측면의 모든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빚을 전부 갚으라고,또는 빚의 얼마라도
변제하라고 묻지 않으신다.오로지 우리가 그분께 빚이 있음을 인정만 하도록 요구하실 뿐이다.그리고
그분께서 내리시는 상여금을 기쁘게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신다. 인간은 그분의 상여금을 받기 위해
악행을 중단하고 반드시 그분의 계명에 의거 삶을 꾸려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인간의
수용 능력은 당사자가 주님에게 진 빛이 얼마인지 헤아려 인정하는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주님께 진 빚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적 축복을 받을 정신적 상황 속에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자연적 모습
우리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이라면,우리의 애정들은 이기심뿐이다.사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를
자신의 일부로 여겨 사랑한다.타락한 인간은 사랑의 이기적인 품질 그 이상의 수준에 올라서지 못한다.
이 인간이 내놓는 가장 헌신적이라 하는 사랑도 자아 사랑 중 어느 한 형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사랑한다. 아마 우리는 자연적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큰 개인적 희생도 감수해
낼 수도 있다.그럼에도 우리의 사랑은 내향적 동기에서는 지독하게 이기적일는지 모른다.자연적 마음뿐인
상황에서 우리 애정들은 매우 협소하고 한정된 수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거나, 자신의 자연적 바램들을 기쁘게 만족시켜 주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89
거듭남
그러나 우리가 이기심뿐인 사랑을 벗어나는 것,즉 거듭 나아가기 시작할 때,우리 사랑은 인격면에서
어떤 변화를 수행한다.이 변화란 애정 측면의 성격이나 품질의 변화를 말한다.거듭남을 더욱 반복해
갈 때 우리 사랑은 확장되면서 더불어 타인들에게까지 뻗쳐 그들의 인격이나 사랑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그리고 자신의 것 보다 그들의 것에 더 많은 흥미를 갖게 된다.이런 우리의 사랑은 결국 인류라는
범위 까지 포괄적으로 퍼져 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더
폭넓게 되고 더 자유롭게 모든 사람에게 스며든다.
타락하는 상태일 경우,우리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듯 여겨지는 이들을 미워한다.그는 자신의 바램이나
계획들에 대해 눈에 나타나는 태도로 만사를 결정지운다. 그러나 거듭남으로 해서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
서서 타인을 생각해 보는 것을 점차 배워 간다.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되,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인물이냐만이 아닌, 오히려 그들의 삶과 품질면에서 그들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게 된다.
견해의 변화
자연적 수준일 경우,자신을 잘 대우하는 이들을 두고 선하다고 여기나,영적 수준일 경우, 주님에게
선한 경우인 것, 즉 유용한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켜 가는 이들을 선하다고 여기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때, 인간이 자기들 속에 주님의 생애를 얼마만큼 가졌느냐에 따라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
는 것도 배우게 된다.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 속의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그들이
거듭 나아가는 것을 도울 기회와 수단을 추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죄인을
동정하나,그 죄인 속에 든 죄는 미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아 사랑은 모든 것에 배타적이나 거듭나는 사랑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바 총괄적이다. 주님은
만인을,악마까지도 사랑하신다.그래서 그분은 모든 것이 행복 되도록 추구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각인이
그분의 행복을 받는 한 그렇게 되도록 계속 일하신다.
290 빚진 두 사람- 누가복음7장 41-43절
사랑과 일
위의 주님의 일은 우리 삶의 만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더 사랑하면,우리는
그들의 복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그들을 위해 더 해줄 뭔가를 행하게 된다.그런데 이보다 좀 더 높은
차원도 전개된다.우리 사랑의 품질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의 품질로 측량되어 진다.우리는
사랑의 질을 위해 사랑의 부피 측면에 실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부피가 많은 사랑도 품질면에서 매우
이기적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증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자기가 무척 사랑하는 처녀를 향한 남자의 마음 상태이다.아마 그는
엄청난 고백을 정중히 무릎꿇고 하였을 수도 있고, 아주 감상적인 언어를 다 동원해 사랑한다는 약속을
하여 그녀 없이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남자의 사랑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일는지도 모른다.영적 사랑은 영적 삶에 중심을 두고 관심을 쏟는다.이 사랑도 외적인 껍데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신의 계획에 상반되는 때조차도 신성한 섭리에 신뢰를 두고 있다.
어떤 건전한 사랑, 또는 영적 사랑은 자신을 자포자기하게 하거나 자신을 죽게 만들도록 이끌지 않는다.
결혼 생활 속에서 사랑의 품질은 표현이라는 양태 속에서 보여진다. 단지 자연적인 사람은 이 세상만을
위해 살고 있고,뭔가를 소유하는데 소비하는 시간만이 기쁜 시간이다.자기를 성가시게 하거나 비평 당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오는 어떤 견책이 없을 경우 그의 방종함은 자기 눈에 걸맞아 계속되고, 이 계속 됨은
방종함에 대한 간섭이 없는 이상 끝까지 그의 멋대로 이어진다.
자기 자녀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자신과 같이 그들에게도 자기 방식으로 몰입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 인간 속의 사랑은 그 사랑의 품질 자체가 영적인 바,영적인 목적만을 바라본다.따라서 모든 어린이를
주님의 자녀로 간주하여 그들을 주님의 법도에 의해 훈련시킨다. 결혼한 한 쌍의 부부를 생각해도 그 부부
역시 세상 삶이라는 껍데기에서의 동반자로만 보지 않고 차후 영계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맺어진 영적 존재로서 더 특별히 생각한다.
외적이기만 하고 감각적이며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부모 또는 결혼한 한 쌍은 겉보기에는 훨씬 더
즐거운 듯,훨씬 더 안정된 듯 여겨질는지 모른다.그러나 그들 본성 깊은 속에서 각자의 이기적인 사랑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1
각자를 통치하는 원동력이 되어 있다.이럴 경우 영적으로 보건대 각자는 어떤 것도 사랑하는게 아니다.
고로 그들은 이타적일 경우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인 영적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영적 인간은 영적 견지에서 삶을 관조하고 영적 목적을 위해 일을 한다. 이 사람이 어린 아이들이나 자연적
마음뿐인 성인에게 비쳐지는 모습은 아마 너무 냉조적이고 비동정적인 듯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의 평면은 그 일을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납득력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영적인 삶을 위해
일하고,이것을 해내기 위해 그는 그 일에 수반되는 악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그 사람의 일을 납득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들이 영적 애정의 영향력 밑에 있기 전까지는 그들은 영적 인간 속의 사랑의 품질을
음미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시초에 하느님을 사랑한 이유가 하느님이 자기를 위해 뭔가 해주셨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이는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목적을 위해,또는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거듭남을 반복하면서 그는 주님 사랑의 품질을 구분하는 것을 배워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보기까지 된다. 그 다음 그는 주님의 목적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때문에
사랑하고야 만다.
우리가 자신의 거듭남 속에서,생활이 계명을 지킴 속에서 주님을 따라갈 때,우리는 자신들의 사랑의
품질면에서 그분을 더욱 닮아 간다.그리하여 우리의 정신적 상태들은 변화하여 낡은 것,이기적인 상태를
벗어나 생활해 감으로 해서 새 조건 속에 자신을 만들어 살게 된다. 이 삶이 향상되면 될수록 주님은 우리를
위해,우리 속에서 더 많은 것을 하실 수 있게 된다.자신을 악 위로 들어올리는 개인적 경험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셨는가를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갖가지 종류의 악에 더욱 반대할 수
있고,특별히 자신 속의 악에 대하여도 반대가 가능해진다.
우리가 비유 속의 진정한 의미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용서되어진다. 즉 주님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삶과 마음의 조건 속에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주님은 그분의 꾸준한 용서하심을
실지 결과에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받는 수용력
역시 줄어든다.한 마디로 이들은 천국적 삶에 마음의 문을 덜 열었다는 말이다.
292 빚진 두 사람- 누가복음7장 41-43절
영적인 힘
영적 인격의 힘은 그 사람이 지닌 사랑의 양과 질에 의존된다.선을 강하게 사랑할 경우,그 사랑은
필시 악을 강하게 미워함이 동반되어야 하고,특히 자신 속에 든 악은 더더욱 미워해야 할 것이다.우리의
영이 주님과 결합하게 될 때만이 신성한 영향력이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를 악에서 떼어내 유지시켜 주고,
그 영향은 바깥 삶에까지 다다른다.계명을 지킴으로 우리가 상호 협동할때만이 위의 섭리는 진행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함이요,영적 양식과 물을 그분에게서 공급받는바 강건해진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비유 속의 두 사람들을 한 측면만 다룬다면, 더 많은 빚을 져서 많은 용서를 받게 된 사람은 거듭남의
더 높은 수준을 달성한 영적 인간을 표현했고, 덜 빚을 져서 결과적으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계명을
글자대로 열심히 순종했음에도 아직 영적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자연적 인간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두 사람에게 있는 사랑의 품질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품질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랑의 품질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악들을 멀리함을 기꺼이 노력하는 그 속에 든 사랑의 품질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을 미워하는 품질은
선을 사랑하는 품질의 척도를 결정해 준다.
주님이 인간의 심정에로 들어가시되,그분은 선을 사랑함을 가지고,그리고 악을 미워함을 가지시고
들어가신다.그리고 인간은 그가 악행을 끊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할 때,들어 온 그분의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는 품질의 척도는 그가 타인을 향해 연습되어지는 사랑의
척도로 테스트되는 것이다.사도 요한은“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라 불리웠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 심정을 열어 그분이 들어오시도록 하여 축복하실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품질이나 부피면에서 많이 사랑할 때,그의 영적 인격은 더 높게 부상된다.그 이유는 그가
과거 삶 속에 있는 악들을 거부했고,그 죄악 속에 든 악들이 형체를 취하는 것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가 악을 떠나 선 안으로 자신을 진입시켰을 때, 그의 과거 삶 속에 있어 온 죄들은 그에게는 더 이상
들러붙어 있지 않는다.그것들이 더 이상 그의 일부가 아니라는 말이다.그 이유는 그가 죄를 짓게 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3
과거의 악들을 더 이상 흠모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킨다.” 그 이유는 사랑은 율법을 준수하여
율법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에 의거하여 사는 사람의 충만된 삶 속에서 있어진다. 주님을 극진히 사랑한 이유로
본문의 여인에게 주님은,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신 것이다.그 이유는 극진한 그녀가 지닌 사랑의 강건함,그 사랑의 품질에 따라 그녀는 새 삶에
진입되었기 때문이다.그녀의 현 심정 상태에서 그녀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죄란 악한 애정과
생각들이 바깥쪽으로 표현되었거나 체현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우리 인격이 계속 그
죄 가운데 있는 한,계속 우리와 함께 머무른다.그러나 인격이 변할 때, 이전의 인격에 속해 있던 상태를
벗어나는 바, 아픈 뒤, 건강을 되찾듯 병든 조건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진 영혼은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처벌로서가 아닌 죄의 결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 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에제키엘 18:21). 그 이유는 주님의 노력은 인간을 벌하시는데 있는게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아버지는 신성한 사랑이요,아들은 신성한 진리이시다.아버지, 또는 신성한 사랑이 아들 또는 신성한
진리를 인간에게 보내신 것은 인간들로 신성한 사랑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되돌아오도록 가르치시려
는 이유 때문이다.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한 인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신 바,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해 두신 것이다.
우리 사랑의 증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에 관해 주님께서, “내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이라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선포하셨다.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 모임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으로,어떤 규모
있는 자선 행위만으로 측정되는게 아니다. 천국의 측량자는 위와 같은 피상적인 것들보다 훨씬 심오하게
294 빚진 두 사람- 누가복음7장 41-43절
모든 것을 꿰뚫어 잰다.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악을 금한 만큼에서 발견된다.그 이유는 악은 실제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반대되는 죄이기 때문이다.진정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우리는 주님의 목적을
위해 자신 속에서 부풀어오르려는 악한 경향성을 과감히 밟아 눌러야 한다.
동료간에도 위의 원리는 마찬가지이다.친구에게 큰 사랑을 가지고 베풀고자 한다면,그 친구에게 있는
악한 경향성을 누르는데 협조하는 것이다.
영적인 동정
누가 진정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당한 바깥쪽 곤경에 외적 동정심을 가장 크게 발휘한
사람이 아니다. 외적인 전시 그 이상으로 높게 부상한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동정심이라는
그의 힘을 쏟는다.그리하여 그는 슬픔에 빠지게 한 악들을 멀리하는 이웃의 노력을 도웁는다.그는 인간의
타락에 통곡만 하지 않고 타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연하게 돕는다.
순간적인 주목을 끌게 해주는 눈물의 흘림을 얼굴 표면에 있게 하는 사람의 경우, 종종 그 당사자와
거리를 두게 하려는 나쁜 기질도 함유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거듭남을 위해 상대방 속의 악을 견책함으로 서로 불쾌해지더라도 기꺼이 그 일을 해낸다. 그는 영적 사랑의
힘으로 탐욕이라는 감각적인 쾌락을 기꺼이 깨트리며, 자연적인 투쟁이나 슬픔 대신 장차 올 세계 안에서
더 높은 삶의 품질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해 간다.그러기 위해 그 사람은 자기에게 불쾌한 일,즉 자신
속의 악들을 보게 해주는 사건,그래서 그 악을 멀리 하게 하는 고통 등을 기꺼이 맞아 드린다.
이런 것이 사랑이요,이것이 동정이다.이런 행동은 외적 삶에서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 폭 넓고 높은
수준의 동정으로 오로지 외적 삶 너머에 있는 진정으로 영원한 삶에 목적을 둔 동정인 것이다. 하찮은
동정,감각적인 동정은 신성한 섭리를 잊게 하고 자아 사랑을 부추기는 바,이런 동정이야말로 순금을
정제하기 위해 조잡한 금을 불 속에서 제련해 걸러내듯 심오하게 깊고 높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사랑 있는 동정인 것이다.
거짓으로 나타남
우리에게 곤경을 준 그 진상, 슬픔의 진짜 원인은 기쁘게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들 속에 있는 진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5
존재들이었을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반면, 우리 곤란의 근원인 듯 여긴 것들이 거듭남을 위한
주님의 섭리적인 수단이 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적인 선을 보신다.그리고
우리 속에 거듭나는 인격이 건설되는 것을 추구하신다.
천국적인 방법들
천국적인 사랑의 품질로 자기 심정을 채울 때, 그 사람은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 같이 영적인 목적을
위해 합리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할 것이다.이를 행하기 위해 그는 자기 친구들과 연합할 수도 있고,동료와도,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이에 전력할 것이다.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그분의 방법만이
가장 옳은 것임을 인정하는 외에 있을 법한 방법으로는 감히 어떤 행동도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가 아는
한가지는 주님이 자기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다는 것,따라서 모든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실 터인즉,
자기 이웃이 주님께 심정을 더 활짝 열므로 주님이 그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이웃을
권유해 갈 것이다.그는 삶의 모든 평면,모든 수준에서 부드러운 동정심과 더불어 원기 왕성한 사랑을
느낀다.그는 영적 선에 이바지되는 최선의 방법만에 그의 애정을 노출시킬 것이다.
그가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듯 인간과도 동행해서 그의 영적 애정은 영적 인간에 의하지 않고는 발휘하지
않는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종 같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주님을 “무서운 분”으로
간주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우리의 일은 선한 삶을 유용하게 사용함으로 인격 속의 영성을 증진시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음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슬기로워서 위와 같은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사람은 주님의
자애를 이해하기까지 할것이다.”
296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23
선한 사마리아인
- 이웃 사랑-
성서 본문: 누가복음 10장 30-37절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주인에게
주면서‘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원리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7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함 속에 있다. 두 큰 계명, 즉 주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르쳐질 때,중요한 사항은 누가 이웃인지,그리고 무엇이 이타애를 구성하는지,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그에 대한 실용적 예가 이 비유이다.
글자적 이야기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선생님,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그대로 실천하여라.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비유로 그에게 대답해 주셨다.
율법교사의 질문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상황을 상기해 본다면 타당할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 당시 예루살렘성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성내의 도로들은 각 나라에서 모여 든 잡다한
인종들로 붐비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인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한 율법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누가 자기의 이웃일 것인지에 매우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친구, 친척, 좀 더 넓혀
생각해서 자기 나라 등등은 이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은 그에게도 당연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도 받지 않은 이교도들, 거룩한 도성을 마구 짓밟은 국가의 적들이라는 떼거리까지 이웃으로
생각하고 느끼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예상하기 거의 힘든 사항들이었다. 더욱이 강한 반감과
더불어 유대인에게 역겨운 인종인 사마리아인까지 이웃에 포함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저주해야 할 사마리아인은 미워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사마리아인
298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그 이유가 사마리아인이란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빈 성읍에 강제 이동시킨
이민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열왕기하 17:24).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성전을
그리짐산에 세우기도 한 이 이방인들을 아주 미워했다.
한정된 법
이 율법교사로서는 이방인과 적들을 미워하고 있는 터인지라 그 미워하는 것을 자신 스스로 정당화하려
들고,자기 백성만이,더 좁혀 생각하면 제 계층만 이웃이라고 단정하고 싶었을 것은 의아하게 여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그가 내뱉은 첫 질문,“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에 대해서 주님은
율법교사 자신의 일이었던 신성한 법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시었다. 그러자 그는 그 법을 적용시키는데 대해
어떤 한계점을 긋기를 바랬던 것이다.그러나 주님은 비유에서 율법의 적용을 더 넓히셨던 바,그 법은
온 인류, 더욱이 경멸되고 있는 사마리아인 속의 천국적인 자질에까지 넓혀 적용하게 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이 여행 코스는 대략 8마일 정도뿐이지만 이 길은
팔레스틴의 길 중에서 가장 나쁘고 위험한 길인지라, “피 흘리는 길”이라고도 까지 불리운 코스도 있었다.
많은 사제나 레위인들이 예리고에 살면서 예배를 집전하기 위해 교대로 예루살렘과 예리고를 왕복해야
하는 도로였기도 하다.
이 코스에서 어떤 이가 강도를 만나 모조리 빼앗기고 마구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 있었다.
사제와 레위인
31절에 대한 번역에서 마침(by chance, 우연히) 한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by chance”라는 용어보다 “by a coincidence”라는 말이 더 합당할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복음서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299
서의 단어 중 chance(기회), luck(행운), fate(비운), arbitrary fortune(임의적인 우연)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는 연유에서인데 참고하기 바란다.
피 흘리며 쓰러져 죽어 가는 사람이 놓인 길을 따라 한 사제가 왔다.우리가 상상해 볼 때,아마 이
불쌍한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사제일는지도 모를 그 사람, 아마 예루살렘에서 예배 임무를 마치고 내려가고
있는 사제일는지도 모를 그를 만나게 되었는 고로 큰 도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제가 가련한 그 사람을 보았을 때,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두 사람 모두 동정의 한 마디, 사랑의 행동 하나도 없이 가 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아마 거지 라자로의 헐은데를 핥아 준 개와 같이 여느 개라도 멈춰서 그 사람의 상처를
핥다 주었을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신성한 법을 준행하며 가르친다고 하는 위의 두 사람은
어떤 동정심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자기들이 가르치는 자비를 응용해 볼 기회를 피해 갔을 뿐이다.
사마리아인
죽어 가는 사람의 희망은 이제 다 사라진 듯 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존경하는 거룩한 사제마저 자기를
돕지 않았다면,어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나 통상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물론 그로부터도 피 흘리는 유대인은 학대받을 것밖에는
더 기대했을리 만무이다.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너무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요한복음 4장을
보면 시카르 동네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한 구절에서 우리가 가정해 본 위의 말을 뒷받침해 볼 수 있다.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 역시 상처로 죽어
가는 이 유대인이 정상적 상태라면 자기를 어떻게 대하리라는 것, 만일 자기가 강도를 당해 처지가 바뀐
상태라면 과연 길을 가던 유대인은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것,등등을 알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주님을 사랑했고,이 사랑이 그로 하여금 느끼게 한 것은,자기를 필요로 할
때 모든 이는 자기의 이웃이라는 것이었다.그래서 그는“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어 가는 유대인을 치료해 준 약들은 그의 여행을 위한
양식들이었다.그 다음 그는 자기 나귀에 그를 태워 여관으로 데려다가 간호해 주었다.아마 그가 그 사람을
위해 끝까지 다 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까지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00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자,이 사마리아인이 죽어 가던 유대인을 위해 했던 일은 가벼운 도움만은 아니다.그는 그 유대인에게
자기 양식, 돈, 간호해 줌 등등을 주었다. 그는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그를 붙든 채 걸어갔을 것이다.
위험 천만뿐인 도로를 이렇게 걷다 보면 여행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쩌면 자기까지 강도들에게 당할는지
모를 위험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주님은 물으셨다.그러자 율법교사가 자비를 보여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주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이렇게 해서 비유에서 취급되는 큰 문제는 실제적 형태 안에 진리가 놓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웃이란 우리가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교사와 주님의 질문 사이에 놓인 차이점을 주목해 두어야 한다.율법교사는,“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다시 말해 저의 이웃 사람 같은 사랑과 봉사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비해,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오히려“누구에게 저는 이웃이 됩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이웃 사람 다운 사랑(neighborly love)은 다른 이들을 향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사랑하려는
마음의 상태(affection)에 달려 있다는 것, 우리는 만인을 향해 이와 같은 사랑의 조건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우리의 사랑,슬기로움, 효과적인 도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이웃
새교회의 빛을 가지고 우리는 이타애(charity), 즉 이웃 사랑은 만인을 향하여 있는 내향적 인간, 즉
심정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사실 폭넓은 차원에서 볼 때,만인은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요,모두 주님께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필요함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필요함은 우리의 현명한 동정에 호소해야 한다.모든 이는 천사가 될 능력을 가지고도 있다.그래서
우리는 각 개인 속에 든 이 능력을 사랑해야 하고, 그 능력이 잘 발달되도록 그를 도와서 그 사람 속에
천국적 인격이 형성되게 해주어야 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01
추상적 측면에서 볼 때,선의 원리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그래서 타인에게 진정으로 이웃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든 주님에게서 온 선,즉 그를 통치하고 있는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심정이 자기 동료에게 얼마나 가까우냐는 것은 사실 우리 심정이 주님께 얼마나 가까우냐에
의존된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쏟아 부어 주실 수 있도록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품질만큼만
우리는 타인에게 쏟아 부어 준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웃 사람 다운 사랑은 어떤 개인을 선한 원리 위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이웃 사람다운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또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려 애쓴다.우리가 어떤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 중 가장 큰 것은,상대방에게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별짓는데 소경이 되게 하여 그 사람으로 악을 행하게 유도하는 짓이다. 상대방이 어떤 잘못된 상태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뭔가를 해주기를 바랠 때 무조건 해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 아니다. 예를 들면 자기
아픈 데를 가지고 동정을 사서 뭔가를 얻겠다는 자, 또는 아픈 데를 일부러 만들어 가지고라도 동정을
사겠다는 얄팍한 극빈자에게는 그들의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을 수단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훈련시킴으
로 도웁는 것이 최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선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실시해야
한다. 이웃 사람 다운 사랑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을 찾아내서 그들 안에서 그것이 더욱 배양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웃의 등차
이웃에는 몇 가지 등차가 있다.첫째가는 우리의 이웃은 선 그 자체이신 주님이시다.둘째는, 천상 천하에
있는 주님의 왕국이다.셋째는 집합체로서의 교회.넷째는 나라. 다섯째는 공동 사회. 여섯째는 각 개인이다.
선은 이 순서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보다 더 큰 것에 속한 선을 진정으로 위할 때 보다 작은
선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선한 사람을 우리는 사랑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인격의 연약함에 의존하기보
다는 인격의 선함에 더 의존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람다운 사랑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행해야
할 선을 사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어
야 한다.그런데 그 누군가가 선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우리는 그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사랑하여
그 능력이 발달되도록 도와주어 그로 하여금 주님이 자기 속에 천국을 형성시켜 주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게 협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천국은 내향적 조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구절을 생각해야
302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한다는 말이다.그래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든지,우리는 계속 그 사람을 향해 의를 행하고 있어야 하는
바,그를 경멸하는게 아니라 그가 달성 가능한 표준에 이르게 도와야 한다.진실로 이웃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닮는데 있다. 그분은“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분은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에게 해를 비춰 주시고,
의로운 자든,그렇지 못한 자든 비를 보내 주신다.”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에
있는 교리가 아닌 지옥의 교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교리를 우리의 생각에 앞서 아주 명백하게 간직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이웃 사랑은 삶의 원리이지,감상적인 수준에 속한 진리가 아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사랑이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 이상은 행해지지도
않는 사랑이다.
예증
바깥쪽 감상주의에 젖어 있는 많은 이들, 그들은 동료가 좁은 길에서 허우적대고 고통받는 것을 보는
것도 실패하면서 자기들 눈은 구름 너머에 두어 절대적 경건만이 자신의 전부인 듯 보이게 행동한다. 주님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의 이웃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예수께서 말하시기를“내 형제 중 작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도 베푼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성경을 부패시킨 옛 전통은
말하지만,주님께서는“원수를 사랑하여라”고 말하신다. 이러므로 이웃이라는 이름은 온 인류에 해당되는
말이다. 선한 이웃이란 어떤 강박감에서가 아닌 사랑으로부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선을 슬기롭게
행할 준비가 갖춰진 사람이다.
수 천 가지 방법으로 이웃 사람 속에 든 선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빼앗는 자, 이들이 악인인
것이다.이들이야말로 공동체를 좀먹어 들어가는 강도요,야바위꾼이요, 기생충 같은 자들인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희생되는 이들,희생시키는 이들,모두를 위해 우리의 동정심은 발휘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 계층에
대한 선의 표현 방법은 아주 다른 것이다.우리는 두 가지 극과 극이 되는 것,즉 한편으로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선과 악을 혼동케 하는 동정심의 실수를 피해야 할 것이다.
내향적 의미
어떤 이가 신체적,물질적 곤란에서 헤어나도록 도우려 했다면,아마 더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그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03
하여금 영적 곤란에서 헤어나게 도웁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글자 의미에서 볼 때,오늘 비유는 이타애의
바깥쪽 행동들을 나열하고 있으나,내향적 의미에서 보면,이 비유는 이타애의 영적 원리를 초상화해놓고
있다.자연적 사랑은 상대에 대한 사랑이나,영적 사랑은 그 상대 속에 있는 선, 또는 그 사람 속에 있을는지
모르는 선을 사랑한다.이타애는 조금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가능하면 서로의 능력에 일치하는 정도까지
최대한도로 행해진다.
예루살렘과 예리고
국가의 예배나 가르침을 위해 성전이 세워져 있는 예루살렘이란 예배나 교리라는 측면에서의 교회를
표현한다. 우리가 진리와 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그 지식으로부터 주님을 예배하려 할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된다.
예리고는 가나안의 경계 근처이다.그래서 예리고는 교회의 바깥,또는 바깥과 안쪽의 경계인 교회나
삶의 외적 사항들,교회를 소개하는 진리들을 표현한다.따라서 예리고는 선과 진리, 그리고 가르침의 외적이고
실제적인 국면을 표현한다.예리고는 “종려나무성”이라고도 불렸다. 종려나무란 우리의 선이 자라서 열매를
산출하는 애정을 표현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성에서 예리고로 내려 간다 함은 영적인 교훈으로부
터 삶의 실제적인 일로 들어가는 것,실제의 일에서 선을 발견하려는 것을 표현한다.
강도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를 연결하는 길, 즉 원리로부터 실제에로 내려가는 작업에는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그 길 주위에는 많은 강도들이 상주하고 있다.영적인 강도란 인간의 영적 재물을 강취하면서, 그의
영적 생명까지 손상을 입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를 더 세분해서 생각해 본다면 영적 강도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모든 것, 이것에는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악인을 포함해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친구들,그럼으로 해서 우리의 악이나 자만심을 부추기는 이들,게다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별하는데
혼동을 주는 이들,모두가 포함된다.
악령,역시 강도이다.이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영적 재물과 생명을 강취해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연적
열정을 휘저어서 우리의 비이타적인 느낌이나 생각,행동을 조장시킨다.그것들은 우리의 애정을 옷입히우고
304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있는 진리,즉 의복을 벗겨 간다.그것들은 거짓 암시라는 것을 우리 앞에 상주시킨다. 그것들은 거짓 추론으로
우리 심정을 상하게 하며 심한 부상을 입게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 속의 영적 생명을 거의 다 강취함으로
우리를 반쯤 죽게 한다.이리하여 주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심정 상태에 해를 가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예루살렘에 있었기는 하지만, 즉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주님을 열심히 예배해야
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 해도 막상 삶의 실제에 그 진리들을 응용하려 할 때, 즉 예리고로 내려가는 상황에
진입할 때 우리는 영적 재물을 잃게 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사제와 레위인
위와 같이 우리가 악한 영향력의 폭행에 고통받게 될 때,사제와 레위인,즉 거꾸로 되어 버린 교회
속의 악과 거짓들,거꾸로 된 상태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사실 좋은 의미에서 볼 때 사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레위인은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해 주지만,본문 같은 경우는 나쁜 의미에서 사용되므로 자아
사랑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런 것들은 부패된 교회, 부패된 자연적 마음의 상태 속에 든
것들이다.이런 것들은 곤경 속의 우리를“피해서 지나가 버린다.” 그것들은 진정한 모든 이타애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
아마 본문의 사제나 레위인은 상처 입어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자기들을 도와줄 여분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거나,그 일은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그러나 우리가 선용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면, 설사 자기와 일치 않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선을 행하는 사랑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 속의 악들이 우리를 성가시게 만든다면,우리는 보다 진지한 사랑 가운데,또는 나쁜 영적 집단에서
그를 구해 내고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과의 하찮은 문제는 잊어야
하리라 본다.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고통받는 자를 도와 줄 시간을 발견하고 있다. 사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행할 영적 시간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어떤 이도 영적으로 의를 행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지는 않는다.
설사 그가 자기 환경을 모두 좌지우지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원리만큼은 언제나 좌지우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05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사람은 영적 강도들에게서 타인을 구해 내려 하는
마음도 있기 마련이다.그래서 이 사람은 구조해내야 할 천적 사랑인 기름을,영적 진리인 포도주를 쏟아
붓는다.그는 실제적인 선한 충고로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묶어 준다.그는 거동할 수 없는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운다. 즉 이 사람은 감추어 놓인 진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부상자의 마음에 가져다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부상자를 여관,즉 영적인 양식과 물이 주어지는 교회 학교에 그를 데려다 준다.그리하여
부상자가 선과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하여 주님과 천사의 보호 속에서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더 안전하게
해준다.
이방인이라는 측면에서 사마리아인은 자연적 수준의 이타애, 즉 선과 진리를 단순하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다.사마리아인은 자기가 여행하는 동안,즉 삶 가운데 자기 영혼을 진보시키는 동안 다른 사람이
지나간 곳에 당도했고,도움을 요청 받는 상태에까지 왔을 때,그는 선한 일을 행했다.
그래서“이튿날,”즉 새로운 상태,새로운 조건에 처할 때,그는 고통받는 자를 더 지원해 주기 위해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고,필요하다면 돌아올 때 더 지불하겠노라고 까지 했다.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고통받는 자를 악과 거짓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기 속의 사랑과 지혜의 모든 것을
주었고,자기 능력이 증가한다면,또는 타인이 자기를 더 필요로 한다면 더 노력할 결심까지 보였다는
말이다.
위의 강도 당한 사람같이 우리는 자신이 악령에 감염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속에서 헤어나는데 필요한
도움을 부패된 사제나 레위인, 즉 부패된 삶 속에 든 악과 거짓이라는 낡은 원리에 기대어서는 소용이
없다.우리의 안전은 우리 속의 이방인 같은 상태,즉 선에 대한 단순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비유의 빛은 과거 예수님의 명백한 가르침에 화를 낸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의미 심장한지 모른다.진실로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예수의 영을 보여준 것이다.또 하나 기억해 볼
것은 예수께서 나병 환자 열 명을 고쳐 주셨을 때, 되돌아 와서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
는 것이다 (누가복음 17:11-19).
예증
영적 강도에 관한 것을 가지고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예루살렘 안에서 살아 왔던 사람,즉 진정한
교리로 가르침을 받아 오면서 주님을 경배해 오는 습관을 길러 왔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의
어떤 친구가“대속죄”라는 교리를 믿도록 그를 설득해 왔을 경우,그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이 종교적
306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원리로부터 온 선함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소실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친구가 말하는
“대속”이라는 원리가 자기 구원에 훨씬 편리할 듯 자아 사랑이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는 과학적인 불신앙이
그를 휘어잡을 경우도 있다. 그럴 때, 그는 자기의 감각으로 입증 안되는 것은 다짜고짜로 거절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진리의 지각, 즉 진리에 대한 영적인 열림에 자신의 원리를 의존하려 않고 감각적인 외관에
의존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영적 강도는 그에게서 영적 진리를 강탈해 그를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를 거짓이라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거의 죽게 하여 겨우 살아 있는 것이라곤 그의 외적인 것뿐이어서 영적 마음속의 합리적
총명을 열게 해주는 더 높고 더 광대하며 더 거룩한 것은 전부 황폐해지게 한다. 이렇게 된 사람은 영적
삶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성 대신 감각적인 것들로 온통 뒤덮여 있게 되는 바, 모든 인간의 애정과
생각들은 뇌세포의 관계적 위치나 조건에 따른 변화의 일시적 결과일꺼라고 상상하기까지 한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서 실수하고 만다. 따라서 소경 지도자가 소경을 인도하듯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적인 결과라는 수준과 평면 그 너머의 것은 볼 수도 없고 그들의 눈은 영적 원인의
광대한 세계에 닫혀 있을 뿐이다.
구원하는 사랑
위와 같이 된 사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영적으로 심한 부상을 입어 반쯤 죽은 사람이 되었다 해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강한 바램을 느껴, 어떻게든
그들을 간호해서 생생한 영적 삶에로 되돌아오게 하려 할 것이다. 아마 영적인 악한 집단에 파묻혀 오히려
해를 주려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그들이 속한 악령 집단에 그들의 악을 던져 버려 그 집단에서 빠져
나오게 하려고까지 할 것이다.
또 하나,우리가 서로간에 있어지는 개인적인 사소한 측면들을 잊을 때,우리는 이웃 사랑과 선용이라는
보다 더 고상한 원리를 부상시킬 때도 있다. 우리를 박해하고 경멸하는 이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명령,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가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천국에 간다 함은 사랑과
자비,그리고 선용이라는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07
이 비유의 큰 영(Spirit)은 “대속, Vicarious Atonement”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원은 “믿음만,
Faith alone”으로 되지 않고,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율법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수단이라고 말하셨다.또한“내가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도 말씀하셨다. 완성한다는
말은 예수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인간으로 율법을 피하는 것이 허용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치 않고,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 즉 율법에 순종하려는 이들에게 자기들 삶 속에서 율법에 순종해야 함을 보여주셨다는
말이다. “만일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왜냐하면 계명이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
“누가 나의 이웃일까?”라는 의문이 마음에 떠오를 때, 그에 대한 답은 각자 자신의 심정 상태에 따라
자동으로 있어질 것이다.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동료들도 사랑한다면,인류가 그의 이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극도로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기 심정의 한계 밑으로만 있어지고
말 것이다.
자기는 좀 잘낫고 남은 좀 모자란 듯 여기는 심정,이 심정 속에 지옥의 영은 자라 오른다.자기는
남보다 다른 계층이라는 편견 속에서 지옥의 영은 영양을 공급받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도
마다 않고 겸허하게 일하는 사람을 두고 은근히 빗대는 잔인한 경멸 속에도 지옥의 영은 잠복하여 대기하고
있다.자신의 관점만으로 모든 것을 재야 한다고 우기는 외고집,협소한 이기심 속에도 지옥의 영은 때를
기다려 놓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필요함을 호소하는 동료를 외면하는 비유 속의 사제와 레위인이 언제나
있는 법이다.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일과 사랑이 필요한 곳도 있기 마련이다.자기 양심을 보게 하는
거울로 이 비유를 자기 앞에 걸어 두어 그 거울 속에 레위인이나 사제가 비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감상적 수준뿐 아니라 심정과 행동 지침면에서까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훈훈해 있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자, 그의 사랑하는 심정으로부터 이웃사랑을 필요로 하는 일에 임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308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10장 30-37절
새교회
새로운 교회가 부상하는 것은 인간 본성을 위해,교회가 뒤집혀지는데서 기독인을 구속하기 위해,새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모든 이를 사랑과 삶의 새로운 품질로 인도해 주기 위해 절대 요소인 것이다.이
아름다운 비유 속에 든 사랑의 견책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에게서 왔지
않는가?” “한 분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복음 7:12).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09
24
귀찮게 졸라대는 한밤중의 친구
-영적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노력-
성서 본문: 누가복음 11장 5-8절
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 가서‘여보게,빵 세 개만 꾸어 주게.6.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 놓을 것이 있어야지’하고 사정을 한다면7.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하고 거절할 것이다.8.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 주지 않겠느냐?”
원리
천국은 열린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자신의 심정과 이해성이 주님께 언제나 열려 있도록 하여
그분이 선과 진리로 우리를 채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꾸준하고도 신실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310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복음11장 5-8절
비유의 해석 방법
오늘 본문은 비유가 상응에 의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단지 자연적 비교 고찰만 가지고는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예증해 주는 보기에 해당되기도 한다. 비유 속의 친구 같이 주님은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하시다던가,인간이 곤란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방치하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또는 우리가 고집스럽
게 그분께 요구한다면 결국 귀찮아서라도 우리를 위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던가, 그분의 사랑이 그분이
행동하게끔 밀어붙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등등을 말한다면 신성 모독이 되리라 본다. 주님은 게으르게
가만히 계신 때가 한 번도 없으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잠드시지도 않으신다.”
비유 속의 잠자던 친구의 행동과 주님과의 사이에는 글자적으로 볼 때 유사성이 있지 않다. 이 친구의
행동은 사실 비이웃적이고 비우정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에게 선을 베풀어주실 기회를 놓친 적이
결코 없으시다.태양이 열과 빛을 언제나 보내듯,주님은 모든 이에게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려 애쓰고
계신다.따라서 영적 생명을 받고자 한다면,언제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명백히 하시는 것은 인간의 간구함은 부피의 여하로 천국에서 들려지는게 아니라, 품질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리하여 가장 전형적인 기도,
주님의 기도가 뒤따른다.주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그 사랑을 기꺼이 받지 않는 것은 인간의 부분일
따름이다. “생명을 가지도록 너는 나에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그를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리라.”
무관심의 외모
거짓 교리를 담고 있는 마음에 의해 성경의 글자가 총명치 않게 이해되어 오판된 성서의 의미들로부터서
주님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언제나 도우시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게끔 한다. 여하튼 이와 비슷한
사건들,간구함에 신속하게 응답은커녕 무관심하셨던 듯 보이는 구절도 있다.예를 들면 마태복음 15장
21-28절, 마가복음 7장 25-29절에서 어떤 여인이 자기 딸 속에 든 마귀를 쫓아 내 달라고 간청했을 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11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뒤 그분은
그 여자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답하셨고,결국은 그녀의 딸을 치료해 주셨다.
위의 지체하시게 된 원인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를 더디하신 이유는 그 여인으로 자기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시는데 도와주시려
했기 때문이고, 믿음이 강해짐으로 그녀에게 줄 도움을 받을 조건을 갖추게 하시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행동을 눈에 띄게 지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주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더 강화되도록
해주기 위해서이다.많은 사람들,베드로와 같이 자기들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천국적 삶을 받을 준비가
다된 듯 생각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 우리가 지탱하지도 못할 조건에 접촉되는
때이른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다.
인간에게 있는 곤란, 그것이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선과 진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을 얻고자 하지 않은 이유에서이다.즉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에 오게 될 때,그
길을 차단하고 있는 자기 속의 악들을 인간이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진정한
것은,우리가 어떤 것이 값진 것이냐를 평할 때,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진심으로 바랬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얻기 위해 일했는지로 판단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눈에 보이게 지체하신 그 행동은 우리
인격을 영적으로 더 강건하게 해주고,영적 강건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더 값진지를 알게 해주신다.
끈기가 필요함
그런 반면, 본문은 반가워하지 않는 친구와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 사이에 글자적인
유사성은 제공하고 있지 않다.그럼에도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설사 이기적인 사람이라 해도 그가
끈기 있게 요구한다면 그도 뭔가를 획득할 것이라 하여, 우리가 성의 있고 끈기로 바래고 구한다면 주님의
뜻하심은 결국 우리에게 어떤 영적 선을 주실 것이라는 데에 하등 의심을 남기게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열심이라든가 끈기는 주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격을 발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312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복음11장 5-8절
내적 의미: 친구들
비유에서 언급되는 친구는 주님을 표현하나,각기 다른 면모에서의 주님이시다.처음 명명되는 어떤
친구에게 빵을 구하러 갔는데,이 사람은 선에 관한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한다.다시 말해 신성한 사랑
측면의 주님이시다.두 번째 친구,여행하다가 방금 들린 친구는 진리 측면에서의 주님, 신성한 지혜 측면에서의
주님을 표현하고 있다. 정신적인 길, 이 길을 수단으로 우리는 선함을 향해 여행한다.
여행
여행하는 사람은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고,그 진리로 발전하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다.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여행 중에 있다.진리는 인간의 기억을 통과하고,이해성에서
되씹어져서 그의 심정 안으로 여행하는 점진적인 진보를 만들어 간다. 과거 다윗에 대한 나단의 비유에서
같이 진리는“손님,wayfaringman, 여행자”와도 같아 양식을 필요로 해서 집에 들르게 된 여행자인 것이다.
즉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와서 각 인간의 선한 애정과 하나가 되려고 추구한다는 말이다. 주님이 진리이신
것같이 진리의 여행은 주님의 여행,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시어 그 마음에 거처를 두시려고 마음 안에 들어가시
려는 주님의 여행이다.
한밤중
여행자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사실 여행자가 한밤중에 도착하거나 들르는 것은 동쪽 나라에서는 별로
특이한 것은 못된다. 그 나라들은 낮에는 워낙 뜨겁기 때문에 밤중에 여행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정신적 측면에서의 한밤중이란 정신적 어두움,무지의 상태,마음이 진리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모든 사람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무지함 속에서 태어나는 고로,모든 이는 지식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모든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는 상속받은 능력,합리성을 가지고 있고, 이 능력을
열리게 해서 발달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주님은 한밤중인 우리 마음의 어두움에 강한 감동(인상)이
있게 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한 진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한밤중(12시)은 이전 날의 끝이요, 또 다른 날의 시작이듯이, 한밤중은 정신적 어두움인 무지의 상태이면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13
도 마음의 새로운 상태의 시작,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게 되는 새로운 상태의 시작도 표현하고
있다.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한밤중에 저는 일어나서 당신에게 감사를 올릴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정의로운 판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한밤중은 글자대로 보면 다윗에게 있는 헌신적인 습관을 말하고
있는 반면,그 밤중은 마음이 더 높은 상태로 부상하는 영적 조건,주님의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한밤중 같은 어두운 마음 상태에 주님의 진리가 왔음을 표현하고도 있는 것이다.
지난번 살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기억되는 말은,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이다. 그래서 주님이 친구로서, 그분의 진리로 우리의 한밤중, 어두움에
오시게 될 때,우리는 그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기 시작하고,얼마간의 성의 있는 바램이 생겨
그것을 받으려 하고,그 진리가 지적해 주는 실제의 선을 붙들어 보려 하는 바,우리는 영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그 진리를 받을 준비가 갖추어져서 그 진리를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자세를 갖춘다.
내어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가운데,주님의 진리를 심사숙고한 결과 알게 되는 것은,우리 속에
선이 없다는 것을,그 진리가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그 진리를 받쳐 줄 기초로 쓸
수 있는 선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다시 말해 친구가 우리에게 한밤중에 왔으나,우리의 정신적인
집에는 그에게 내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새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검증할
때,우리는 자신 속에 어떤 선도 없다는 것을,진리에 대한 어떤 심오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진리에 순종하는
실제적인 삶도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런 다급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급 상태에서의 우리는 자기를 도와줄 또 다른
“친구”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선함을 생각하여 선함을 얻는데 도와줄 수 있는 그분을 찾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의 진리가 우리로 정신을 집중하여 지지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을 알고, 진리를 잘
대접하는데 우리를 도와줄 그분의 사랑을 찾게 된다는 말이다.그리하여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되,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받았음을 인정하면서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영접한 그 진리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선이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집에는 없음을 인정하면서 그분께 나아가게 된다.
빵
314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복음11장 5-8절
우리가 그분께 나아간 이유는 빵을 위해서이다. 이 빵이란 우리에게 와진 새로운 진리를 먹여서 받쳐
줄 생활 속에 있는 실제의 선이요,이 선만이 영적 자양분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우리가 실제적인 선함을
위해 요청한 빵은 세 개이다.빵 세 개란 가득 찬 상태,모든 등차, 즉 의지, 이해성, 행동에서 충만해진
선,이 선이 실제적인 선함이다.숫자로서의 셋이란 진리 측면에서의 충만함, 또는 완성을 표현해 준다.
빵과 연결시켜 볼 때,본문은 진리의 선,진리를 받쳐 줄 선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 선함을 우리는 자신의
정신적인 집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서,그 선함을 빌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간다.그리고
우리가 자기 것 삼게 되는 정도만큼의 선함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된다.
아주 크게 볼 때,우리는 그분께 권위를 인정하는 것,즉 법에의 순종을 주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법에 순종해서 선을 취해야 한다.이래야 빵을 빌릴 수 있다.이렇게 빌린 후, 우리는 실제적 삶에서 자신의
선함을 만들어야 하고,선을 사랑함으로부터 주님과 결합하는 가운데 선함을 취득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달라고 말했다고 해서 선함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진리는 우리가 요청하면
가르쳐 질 수 있고 전달되나 선함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 스스로 진리를 사용함으로 선함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물론 주님은 우리에게 선함을 주신다.그러나 주실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와의
협동에 의해서만 주실 수 있으시다.
지체함 (delay)
우리가 주님께 다가가 선함을 구할 때, 우선 우리에게 보여지는 그분의 모습은 우리의 요청에 무관심인
듯 여겨지는 것이다.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이“귀찮게 굴지 말게”라고 우리에게 말하시는 듯 여겨진다는
말이다.물론 이 본문은 단지 외면적 측면일 뿐이다.그 이유가 주님은 결코 무관심하지도 않으시고, 악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어떤 인간을 향해서도 해주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선을 주시기 위해서, 지옥의 악마가 당하는 고통을 자초해서 받고 있는 사람의 고통까지도 누구려 뜨려
주시기 위해서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하고 계신 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돕는 방법을
인간이 이해 못할 때,인간은 주님이 자기들을 돕지 않는다고 착각해 버린다.
안으로부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15
집에 있는 친구에 관해 본문이 말하는 바, “그 친구는 안에서...라고 거절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눈에 나타나 보이는 주님의 무관심은 인간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게 되는 그의 안쪽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그 다음 상상하는 것은,하느님은 죄인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시려 하시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문
인간이 자기 인격과 주님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할 때,인간이 상상하려는 것은,주님이 인간과
주님 사이에 있는 문을 닫아걸고 계시면서 그 문을 다시 열려고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문, 또는
문 입구는 이쪽과 저쪽의 두 장소를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우리 마음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자연적 문은 이 세상의 자연적 삶과 교통하는 문이고,영적인 문은
천국을 향해 열리는 문,영적 삶을 위해 열리는 문이다.
따라서 마음속의 자연적 문은 바깥 세계에 열려 있으나, 영적 문은 그 사람이 그 문을 열려고 할 때까지
닫혀져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회개와 개혁을 통해 주님이 그의 영적 의식에 오기 위해 문을 열 수 있는
정신 상태에 다다를 때까지 그 문은 닫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주님께서 영적 문을 기꺼이 여시지 않는다고 한다.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인간을 “문”으로 만들어 두시고, 그분을 통해 인간이 삶의 영성에로 진입하게 섭리해 두셨다. 예수께서,
“나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 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해 두셨던 것이다.문이 닫혀져 있을 경우,그 문을 잠그어 놓은 자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영적 삶에
무지한 사람일 경우,그는 주님이 그 문을 잠궈 놓았다고 착각한다.
침대, 등등
비유 속의 친구가 말하기를,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라고 말했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란 삶의 새로운 원리,옛 상태에서 뻗어 나온 상태,옛 것을 계승하는 새로운 상태를 표현한다.
우리가 쉼을 얻는 침대란 교리를 뜻하는 바,우리의 마음은 그 교리 위에서 쉼을 얻는다.이에 대한 예를
이사야 28장 20절에서 읽어보자. “침대는 짧아서 길게 눕지 못하고, 이불은 좁아서 몸을 덮지 못한다.”
316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복음11장 5-8절
즉,거짓 교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짧다는 말,그 교리는 마음이 더 확장되게 허용치도 않고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지도 못하면서,오히려 우리의 애정을 죄어 매고,생각을 감금시킨다. 어린이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새로운 원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오는 진정한 교리에서만 발견된다는 뜻이다.
성서는 공식화된 교리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저수지와도 같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은
어떤 교리를 총명하고도 합리적으로 이끌어 내고자 할 때 마음껏 퍼낼 수 있는 저수지인 것이다. 자연은
정밀한 과학이 아니고 저장고이다.자연으로부터 총명하게 합리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 과학이다.그러나
정밀한 과학 없이는 자연을 이해할 수 없듯이, 진정한 교리 없이 주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지지
않는다.진정한 교리는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영의 과학인 것이다.그래서 주님께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이 교리에 관한 적절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가“생명의 빵”인 선함을 획득하는데 주님이 어떻게
돕고 계시는 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럴 경우, 자기가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연고로 그는
자주 실망하게 된다.
일어남
이렇게 실망할 때마다,그에게 주님은“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라고 대답하시는 듯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인즉,본인이 교리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수준까지“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자연적 감각의 영역이나 자기 생각 평면 그 이상으로 마음을 승강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에 관해, 그리고 그분의 인성에 관해 더 높고 더 영적인 관점에로 자신을 일으키려 애쓰지
않는 한,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일어나실 수”없다. 우리가 그분을 자신의 생각과 애정 속에서
위로 들어올릴 때만이 하느님은 일어나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선 “일어나신” 다음 우리에게 “주신다.” 즉 우리가 주님을 마음에서 높이 드는
때,그렇게 높이 드는 노력이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상태를 주게 된다는 말이다.“하느님이 일어나신다.
그분의 적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우리가 심정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우리 속의 악과 거짓들은 그분의
현존으로부터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는 말이다.
귀찮게 졸라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17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앞 페이지에서 이미 상술한 바와도 같이, 위 본문에서 언급되는 행동은
주님의 방법과는 글자 그대로만 볼 경우 어떤 유사성도 있지를 않다. 그 이유가“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하시고,그분의 온유한 자비는 그분의 모든 일 속에 넘치고 있기”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선한 자든
악한 자든 해를 비춰 주시고,의로운 자든,불의한 자든 고르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모든 선을 제공하고 계시지만, 인간이 선을 받기 위해 마음 문을 여는
정도 이상으로는 어떤 이에게든 선을 전달시켜 주실 수 없다.
주님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 해도 그가 바깥쪽 측면에서
요청하는 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다 주실 수는 없다.그러나 그분은 인간이 안쪽 측면에서 바라는 것,
그 바램으로 살고자 하는 것에 한해서만 주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요청해 온 인간 자신의 끈덕진 노력과
성실함은 그들로 주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마음 문을 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인간의 기도와 진지한 노력이 주님에게 변화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분으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것 이상을 주시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 자신을 변하게 하여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게 해주는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진리에
목말라 하지 않고 선함에 배고프지 않다는 사람을 선과 진리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주님은 인간 속에서 일하시되,먼저 그 사람이 영적 생명을 바래도록 하시고,그 다음 그의 바램이
선을 갈망하는 의식 세계를 만들도록 해주신다.그 뒤 그 사람이 진지하게 선해지기를 추구할 때,그는
그 선함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자신을 열게 된다.달라고 보채는 것,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기도가
해답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그 이유는 주님은 그 사람이 정작 바랬어야 할 바램과만 호흡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의식 세계 안에서 자신 스스로 솔선해서 선하게 살아갈 때, 주님은 선함을 요청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
그런 다음 주님은“그가 청한 만큼”을 인간에게 주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받으려고 열어둔 모든
선,그가 사용하려 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인간이 자기 속에 든 악에 쉽게 기울려는 경향성(evil
inclinations)에 저항하고 금할 때, 그는 자기 마음과 삶 속에 선함을 위한 방을 만든다. “이기는 자에게
모든 것을 상속하겠다.” “네 손을 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바램으로 만족하라... 그분께서는 그분을
318 귀찮게 졸라대는 한 밤중의 친구-누가복음11장 5-8절
경외하는 이들의 바램을 충분하게 채워 주시리라.” 새로운 진리가 친구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주님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고, 다가 온 새 진리에 양식이 될 선함은 우리 마음의 품질에 부응시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비록 주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선과 진리를 전달받게 해주시려 애쓰신다 해도, 정작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주시는 복을 잘 붙잡고, 악은 금하겠다고 하는 우리의 의지를 끈덕지게 지켜 갈 때만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선을 받는 정도는 스스로 악을 실지로
금하고 있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 속에 영성을 채워 가려면 영적 삶에 깊은 흥미가
있어야 하고, 그 삶을 추구하는데 꾸준히 노력하는 진지함과 더불어 자신이 살아 내고자 하는 모든 선함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은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를 해내는데 있어서 우리는 의기소침해서
는 안되고,초조해서도 안되고,실망도 금물이며, 선을 지적해 주는 진리를 의심 없이 배워, 그 선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용감무쌍하게 그 진리를 실천해 가야 한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본보기까지 우리에게 남겨 두신 것이다.
기다림
자연적 인간은 주님의 계획이 마무리되는 것을 기다리는데 무척 피곤해 한다. 결과를 얼른 보고 싶어하는
인간 자신의 성급함은 오히려 계획이 지체되는 한가지 원인도 된다. 사실인즉 언제나 기다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그분은 인간이 영적 생명을 받을 상태에 오기까지 언제나 기다리신다.과거 이스라엘 후손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도 있었듯이, 모든 인간과 더불어 약속된 땅으로의 지름길이
존재한다.만일 인간이 뜻하기만 하면 인간은 그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인간 자신의 악들은
인간으로 오래 걸리고 우회하는 길로 가나안을 가도록,배회하도록 몰아치고 있다.지름길이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길뿐이다.
진지함
우리에게는 더 많은 영적 진지함,더 많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올바른 동기를 가진 이들은 언제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19
성공한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되리라.” 이에는 자연적인 목적이나 결말뿐만이 아닌 영적인 목적까지
포함되어 있다.우리는 영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악과의 모든 투쟁에 용감하게 견뎌 내야 한다.항구적인
진지함만이 합리적인 행동으로 선한 목적을 체현해 낸다.
삶에 있어서 한가지 큰 비밀은 만족(contentment)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면,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만족해야 한다.단지 구하기만 한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당장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구하는 것을 위해 살아감으로 해서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있다.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을 당장 받지 못하게 될 때,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영혼에 매우 유익한 것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슬기롭지 못하게 요구하는 것을
그분의 신성한 지혜로 보류하셔야만 하는 때가 자주 있다.
기도
우리는 외적 형태상에서의 기도 속에서 꾸준히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선용(use)은 그 속의 목적이
수행되는데 있다. 따라서 선용은 우리가 외적 형태상의 기도함 속에 계속 머무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선용이 실제 이루어지는 그 속에 존재한다.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려는 끈질긴
노력이야말로 주님께 도움을 받게 하는 살아 있는 기도이다.이 기도야말로 최고로 빨리,쉽사리 응답되어
질 수 있는 기도이다.왜냐하면 응답은 우리가 받는 강건함과 후원 속에 있고,이것들이 노력하는 가운데
있는 우리를 떠받쳐 주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주님께서 말하시기를,“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문을 두드려라,열릴 것이다.”
320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25
어리석은 부자
- 세상욕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2장 16-21절
16.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17. ‘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18.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고 하셨다. 21.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원리
세상욕은 영적 삶에 대한 마음을 닫히게 한다. 자기의 애정과 생각이 감각적 삶에 빨려 들어가게 한
사람은,비록 그가 세상적 부유함의 쟁탈전에서 괄목할 만큼 뭔가를 이룩했다 해도,영적 부유함에서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21
가난한 채 남아 천국의 복을 받거나 즐길 수는 없다.
질문자
주님께 부탁을 한 사람의 상태가 세상적 수준인 것은 주님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려 한 태도로부터
추정되어진다. 본문의 때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에게 영적 삶의 큰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열중하고 계신
때였다.그런데 이 사람은 내면의 삶에 관한 광대한 진리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가르치시고 있는 분위기마저
무례하게 깨트려 가면서 까지 자신의 사소한 문제를 들고 나와 남들 앞에서 시선을 모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자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데 주님의 권위를 약삭빠르게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응답
그러나 주님은 질문자가 물은 주제보다 오히려 인간 영혼을 만나셨던 것이다. 그분은 사건의 시비를
가리지 않으시고, 그와 비슷한 모든 경우에 자칫 흘러가기 쉬운 내향적 원리에 시선을 모으게 하셨다.
주님이 지상에 오신 것은 빛과 삶의 새로운 처방을 주기 위해서 였다. 따라서 그분은 인간의 시민적
업무를 관장하는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가 되도록 그분 자신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이런 일들을 위해
인간은 법과 법정을 가지고 있다.주님은 새로운 삶의 새로운 영적인 법을 인간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
이 법칙이 인간의 마음을 채워서 인간들로 적절한 권위를 지닌 모든 법을 준수토록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을 질책하셨던 것이다.
탐욕
탐욕을 나무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은 자기의 소유가 얼마나 되느냐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선포하셨다.우리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사용된 단어“생명, 삶, life”이란 단지 바깥쪽 생활, 생계에만
있지 않다.비유가 보여 주는 바,탐욕은 무덤 넘어 있는 삶을 준비하지 않게 하는 정신적 상황으로 인간을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감각적인 것에 자기의 생각과 애정의 중심을 놓게 되면 그는 자신으로
영적인 것에서 닫히게 하기 때문이다.
322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비유에서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잘못된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는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비유가 지적하려는 요점은 부자라는 자체나 부자가 재물을
획득한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재물을 향한 소유자의 마음 상태에 대한 것이다.주님의 견책은 부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소유물을 세상적으로 사랑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재물이 증가한다고 너의 심정을 그것에
기대지 말아라.”
영적 삶의 준비
삶의 목적은 선용(uses)을 수행해 가서 영계를 발달시키는 것인 바, 지상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기의
모든 시간과 수단을 소비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비유는 단지 감각적 삶을 살려고 선용을 수행하는데서
은퇴하고 싶은 이들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서의 선용(use)이란 주님의 법칙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에게 이 세상 이후에 있는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데 이 세상 삶을 어떻게 활용하여야 하는 가를 보여주어, 그들로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해 가는 것이다.
교회와 나라
시민적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주님께 요청한 사람의 권리를 주님이 묵살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은 정의가
발견되는 위대한 원리를 인간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고, 시민 업무는 법집행이라는 시민적 권위에 남겨
두셨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로 시민법에 순종하도록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즉“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동시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속한게 아니다라는 것은 아니고,단지 시당국은 시민 업무를 처리하는 하느님의 대행인 일 뿐이라는 말이다.
교회와 나라는 삶의 각기 다른 평면에서 행정을 펼치는 것이다. 집행이나 해석에 있어 시민법은 시민
업무의 행정을 위해 주님의 종으로 공적 권위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법은 주님에 의해 밝혀져
교회에 의해 설명되고 적용되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거듭나게 될 때,교회에서 가르쳐진 원리,영적이고 자연적인 모든 삶에 관한 근본 되는
원리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시당국에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행정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근본 되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23
원리가 바깥 삶에 속한 시민법,자연적 평면이라는 말단 지점에서 응용되는 것이다.이리하여 교회는 시공무원
을 가르쳐, 그들로 슬기롭고 성실하게 시행정이라는 차원에서 선용을 수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공동체라
는 것은 인간의 육체와도 같이 각 부분은 제각기 자리를 지키며 역할에 충실하여 건강이 유지되어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연적 부와 영적 부
비유의 교훈은 글자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합당하다. 다시 말해 자연적 부나 영적 부라는 양면 모두에서
진정하다는 말이다.만일 자연적 부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면,재물은 그를 축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해 버린다. 모든 재물에 관해서 생각되어야 할 요점은 그 재물이 각자의 인격 형성에서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라는데 있는 것이다.만일 재물 소유자가 삶의 영적 원리에서 분리된다면, 제아무리
재물이 풍부하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진짜 이익을 남길 수 없게 된다. 사실 풍부함이 더하면
더 할수록, 그 재물은 소유자의 감각적 욕망을 더 흥분시켜 영적인데 대한 관심까지 더욱 그 사람 속에서
축출시키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온 세상을 다 얻었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와같이 말할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영이 그의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인간이 영계로 가져가는 것은 인격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은 영적 재물에 속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의 경우에도 합당하다. 우리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으되,이를 자아 사랑에 남용하고,자신의 개혁이나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정신적 재물임에도 천국에서 보유할 수 있는 재물은 못될 것이다.
비유 이후에 있는 구절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들의 백합에 관한 아름다운 비교를 가지고, 우리 주님은
모두를 돌보아 주시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자연적 측면과 영적 측면,양쪽의 필요함에 예비하고
계심을 가르치신다.
재물에 따른 고민
비유에서 부자는 자기 재물이 풍부해짐으로 말미암아 걱정이 생겼다. 그는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그는 그것들을 저장해 놓을 창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재물을 필요로 하는 동료에게 좋은
324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창고가 있지 않았을까?자기의 잉여 농산물을 위해 최상의 창고는 가난에 찌들린 이들,불행을 당한 이들이
아닐까?
부자는 자기 창고를 증설하는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래서 그가 더 큰 창고를 지어 그의 모든 소출을
저장했을 때,그는 여러 해를 위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그에게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 남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100%의 감각적 삶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영적 삶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부자라고 해서 장차 닥칠 세계를 위해 준비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의 영혼(soul)이 요구됨
이런 사람이 자아 탐욕으로 불태우며 위로 받고 있는 동안,어떤 특사가 자기 문을 두드린다.이 특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로부터 온 특사이다.이 특사는 덜덜 떠는 부자에게 말한다.나와 함께 가자. 네
세상 삶을 이제 마감 지어야겠다.너는 영계로 건너가야만 한다.이 불쌍해진 부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기 싫다고 말할는지 모른다.슬퍼할는지 모른다. 아마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나
순종해야만 할 수밖에 없다.이 부름에 저항함은 아무 쓸모 없는 짓이다.가야만 하고 그것도 당장 가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영혼(soul)이 가도록 요구된다. 그의 육체는 쓸모 없이 자연계에 버려져야 된다. 그가 자기의
자연적인 삶, 육체적 삶을 위해 장만해 놓아 왔던 모든 것은 쓸모 없는 그의 육체와 함께 자연계에 머물러야
한다.이제 그의 영혼은 물질적 세계의 모든 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가련한 물질적인 그의
몸은 더 이상 물질적 소유물을 사용할 수 없다.그것들 모두는 타인에게 떨굴 수밖에 없다.그리고 그의
영혼은 가야만 한다.가긴 가되 어떤 조건을 갖추고 그는 가는 것일까?가야만 하는 그 삶을 위해 그는
어떤 준비를 갖추어 두었을까?
본문의 부자 같은 사람들 모두 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준비할 만큼 잘 쌓아 두었다고 제 나름대로
느낄는지 모른다.그러나 그는 다음 세계를 위해 어떤 재물도 쌓아 두지 않았다.이런 사람들은 영계에
대해 자신 스스로 어떤 확신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었고, 그곳에 들어가려는 어떤 바램도 없었던
이들이다.그의 생각과 애정은 육적인 것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고,육을 넘어 있는 어떤 것도 그에게는
한낱 그림자 같고 가짜 같기만 했던 것이다.이런 사람이“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 하느님을 향해서는
부유하지 못했던 사람”인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25
영적 의미에서의 재물 (riches)
영적인 재물이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알고 있는 교리나 사실들,그리고 기억 안에 저장된 것들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부자라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풍부하게 소유한 사람, 진정한 교리나 사실들을
잘 공급받은 기억의 소유자, 그래서 만일 그가 뜻하기만 하면 그가 이론적으로 아는 선을 포획할 준비가
된 사람을 말한다.부자의 밭이란 그의 마음이다.이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붙잡고 있다. 이
지식들이 생산할 수 있는 선의 품질은 그 인간의 사랑의 품질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인간의 애정들이 감각적
삶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의 지식들, 제 아무리 많다 해도 그의 정신적인 밭은 자연적 측면에 속한
소출만을 많이 거둘 수 있을 뿐이다.오로지 자연적 삶만을 위해 좋은 것을 생산한다는 말이다.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은 인간의 정신 제국 속의 황제 같아서 이 황제 밑에서 모든 것은 좌지우지되고 만다.
혼자 궁리함
“...하며 궁리하다가...” 이를 다시 말하면, 그가 곰곰이 생각하였다는 것, 또는 그가 자기 내면의 생각을
분주히 활동시켰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 내면의 생각은 그 사람의 진정한 언어이고, 이 언어야말로 자신의
목적과 계획에 대해 발가벗은 이야기를 나누는 말들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라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우리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옳지 좋은 수가 있다, 또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 라고 생각하거나, 독백한다.
다시 말해 그의 생각이 그의 의지로부터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때의 경우 의지와 생각은 같은 목적을 향해
협동하고 있다. “내가 어찌 해야 할까?”는 이해성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리라”라는
것은 어떻게 목적을 성취할 것인가에 관해 의지가 지각했다는 뜻이다. “부정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한 다음, 자기 의지로부터 응답 받기를 “옳지 좋은 수가 있다”라고
했다.
쌓아 둘 곳이 없음
본문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그는 선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326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자연적인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기쁨들이 증가하면서 그는 자기가 바래는 자연적인 선함 모두를
쌓을 방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그의 이해성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그가 좋다라고 느끼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납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인간의 의지가 새로운 기쁨들을 느낄 때,그는 자기
이해성이 팽창되어 자기가 새롭게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를 이해하기를 바랜다.
새 느낌이 증가할 때,그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 즐길 수 있는 것을 계획할 수 있기를 바랜다.
느낌에 대한 새로운 상태는 생각에 관해서도 새로운 상태를 주게 된다. 따라서 그는 바뀌는 느낌에
일치하도록 자기 생각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고로, 그는 옛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짓는다. 즉 그는
자기 의지의 상태에 일치하도록 이해성과 기억의 영역을 넓힌다. 이렇게 넓혀진 이해성 안에 그의 의지에
온 모든 새 느낌을 저장하고 계획하고 즐긴다.
인간 속의 통치하는 사랑이 애정에 관한 새 작물을 내게 될 때마다,그는 생산물을 더 거두게 되고,
확장된 소출은 그의 이해성을 같은 비례로 더 커지게 한다.만일 인간의 심정과 이해성이 불일치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분단시키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다른 하나 뒤에서 꾸물거리거나
뒤쳐지게 되어 박자를 못 맞춘다면,그는 자유로운 상태 아래 있지를 못한다.
충분히 쌓아 둠
새로운 상태를 느끼는 사람은 느끼는 그 상태를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될 때까지 자기 이해성을 팽창시켜
가서,그것들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파악하여 만족하는 상황에 이른다.그래서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지식과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한다. 그 결과, 선에 관한 자기 지식은 저절로
선한 것으로 이미 바뀌었다고 착각하기에 이르고 만다.
먹고, 마심, 등등
이런 뒤 그는 제 영혼에 말하기를,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고 한다. 먹는다는 것은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영혼(spirit)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마신다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영혼이나 마음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즐긴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의해 생산된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그러나 만일
인간의 지식이 추상적인 진리일 뿐이어서,그 진리가 순수하게 선한 삶을 생산하지 않고 있다면,그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27
헤아리고 있는 선은 순수한 선이 못된다.
어리석은 자: 밤
그 다음,심판이 닥칠 때,신성한 진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어리석은 자”란 자기 기억
속에 지식을 잔뜩 쌓아 두었으나,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것,그리고 선용을 실천함으로 거듭 나는 데에
그 지식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밤”이란 속이 깜깜한 상태에 있는 사람, 거짓으로 꽉 찬 사람, 이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삶의 빛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의 상태이다. “네 영혼(soul)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인간이 자연계로부
터 분리될 때 심판이 온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가 실제 사용하지 않은 모든 지식들은 그에게서 떠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그 이유는 그가 다른 삶에 들어갈 때,그는 자기가 사용치 않은 모든 지식들을 실지로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그 지식들은 그의 진짜 삶의 어떤 부분도 형성해 줄 수 없다.그 지식 가지고
어떤 이윤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사람으로부터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그 이유는 그가 고향이라고
느낀 감각적인 것들인 자연계를 기꺼이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인색함(하느님께 부유하지 못함)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만사에서 자신과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고 챙기려는 것은 자신만을 향한 부유함이다.부유함이란 돈뿐만이 아니다.돈을
포획 가능케 하는 모든 것,편하고 안락함,호화로운 삶,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 권력, 영향력, 명성
등등과 더불어 지적 부유함도 포함된다.이기적인 목적,세상적인 결과를 위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고 획득하는 자 역시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축적한다.이와 같은 부자가“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악의 요소들
328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자연적 재물이든 영적 재물이든 간에 세상적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두 가지 곤란한 요소가 들어 있다.
첫째는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둘째는 주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것이다.이렇게 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통째로 물질이 되게 해 버린 경우도 있어 과연 그들이 감각적인 자연계 말고는 어느 곳에서 자기
고향이라고 느낄 수가 있을까 의아할 정도이다.이런 사람을 두고,“하느님께서 자기를 강건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사람,오히려 자기 재물이 풍부해지는 데에 신뢰를 둔 사람,자신 스스로 강해졌다는 사람”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번영은 그를 파괴시킨다.” “주여, 이 세상에 운명을 건 세상 속 사람들로부터 제
영혼을 건져 주시옵소서...”
실수 속의 위험
위와 같은 삶의 방향에서 인간은 경솔함 앞에 감추어 놓인 덫(실수)에 걸려들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경우, “나는 돈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식을 위해서야...
나는 그들이 독립해서 남보라는 듯이 살기를 원해...” 라고 말끝을 맺기도 한다. 얼른 들으면 이타적인
듯 들릴는지 몰라도,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식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에는 위험한 요소가 숨겨져 있다.
만일 그가 자기 애정이나 생각, 그리고 노력을 가지고 자기 자식들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여 독립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그는 자녀들로 영적 문제에 흥미를 있게 하거나,영적 문제에 수반되어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 등에는 자칫하면 어떤 열심도 내지 않게 되고 만다. 인간은 자기가 가장 선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이를 뒤집어 말한다면,자기가 열성을 내어 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장
선한 것이라고 은밀히 그는 평가한다.이런고로 해서,예를 든 위의 사람은 자기 어린이를 이 세상에서의
재물로 처지게 하고 영계를 위해,하느님을 향해서는 가난하게 방치하는 결과를 빚는다.
쓸모 있는 재산
정직하게 재산을 모아 영적인 선용과,자연적 선용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에서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신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29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자아 사랑에 속한 재물은 우리 마음과 삶의 지상적 부분인 자연적 마음에 쌓여지는
바,이 마음은 악과 거짓,그리고 죄들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거듭나는 삶에 쌓아 두는 재물은 우리 마음과
삶의 천국적 부분에 쌓여 우리 영은 파멸적인 악과 거짓의 영향을 벗어나 영원한 우리의 소유가 된다.
하느님께 부함
하느님 편에 서서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재물이 우리로 하느님께 인도해 주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따라서 개혁과 거듭남을 위해 정신적 재물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모든 천국적인
결과와 목적은 주님의 목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천국적 재물은 사랑과 지혜,그리고 거룩함이라는 특성에
속한 재물이다.이 특성에 속한 재물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축복 역시 가지게 된다.그 이유가 신성한
축복은 위의 특성을 경유하여 내향적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축복은 외적인 선물 같은 것으로만
오는게 아니다.자기 인격 속에 사랑과 지혜,거룩함이라는 특성이 주님의 축복에 따른 영적 품질과 일치하는
만큼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 천국의 원리를 자기 인격 속에 가진 사람은
천국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성한 천국과 천국적 지혜에 속한 사항들을 사랑하는 이들 위에 천국의
빛이 비추여서 그들은 계발된다” (천국과 지옥 265항).
영적 삶을 얻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이기적 삶을 떨구면서 모든 자연적인 것들 속에 내재된 삶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감각적인 것들에 더욱 덜 의존해 가는 법을 배워 가야 할 것이다.이를 비유 뒤에 이어지는
문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자연적인 것)도 그의 필요에 따라 더하여 주실 것이다.
선용(use)을 사랑함
모든 사람은 선용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따라 영적 삶을 가진다. 따라서 주님의 이름 아래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선을 행함으로 그 사람 안에서 선용의 영적 사랑은 형성되어 진다. 다시 말해 사람이 선용을
실천하는 것이란 영적 원리로부터 선을 행할 때 있게 된다. 우선 악을 금해서 자기 마음이 주님께 열려지게
하면,주님이 들어가시고,주님께서 그 사람으로 선을 행하게 배려하신다. 영적 목적에 의거 선이 행해질
때 영적 선용이 실천되는 것이다.
330 어리석은 부자- 누가복음12장 16-21절
그러므로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경우, 자기의 모든 삶은 외적인 것들을 감각적으로 즐기는데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반면,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의 경우,순수한 인간 삶은 그가 감각적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 자기
영혼을 열고 신성한 생명의 흐름을 유입함으로 내면의 행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임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하느님의 평화는 단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의 모든 이해성에서는 빠져나간다.
순수한 자연적 선
자연적 삶 속의 좋은 것들이 각기 제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영적 삶의 종으로서 활동되고 있다면 선한
것이다.불이 지펴질 때,그것들은 “착한 종이면서도 나쁜 주인”도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자연적 삶이
마치 진짜 삶인 듯하여 그것 때문에 초조해 하고 걱정하게 될 때 우리는 어리석어진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실제 필요한 외적인 것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혼을 위해 이 세상을 이용하면 우리는 양쪽 세계에 대해 최선의 것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
지상은 주님의 발판이 되고,그 위에 우리는 서서 그분의 옥좌를 향해 위쪽으로 연결을 이룬다.“의로운
자가 가진 것이 제아무리 작아도 사악한 자의 풍성한 재물보다 더 낫다.” “멸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영원히 있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31
2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고 기다려라
-준비된 상태-
성서 본문: 누가복음 12장 35-48절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36.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 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37. 주인이 돌아 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
줄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
냐? 39. 생각해 보아라.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40.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41.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 지금 이 비유는 저희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 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44.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46.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332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처넣을 것이다. 47.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맞을 것이다. 많이
받는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 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
요점
비유의 힘은 인간으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을 준비를 계속 유지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 악과
거짓 그리고 죄악에 빠져 받을 수 없는 상태를 피하도록 경고해 주고 있다.
허리에 띠를 띰
동방에서 남자들은 발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을 걸쳤었다.그래서 작업을 한다던가,여행을 위해서 그들은
띠를 가지고 이 두루마기를 허리에서 죔으로서 긴 옷을 추켜올려 발의 움직임을 좀 더 활발하게 했었다.
이것이 본문에서 “허리에 띠를 띠는” 모습이다. 이에 더해 기억해 보아야 할 구절은, 출애굽기 12장 11절일
것이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는 마치 여행 채비를 다한 상태,또는 작업에 막 들어가려는 준비 태세이다.이 구절의 요점은 해야만
할 것에 대해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허리는 애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허리에 띠를 띠어 옷을 추켜올린다는 것은
진리를 낮은 수준, 즉 자연적 측면에서 들어 올려 내향적 애정으로부터 진리 안에 있어야 할 선을 가늠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그러므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을 켜 놓음
우리가 등불을 켜 놓는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는 믿음의 상태,또는 정신적으로 계발된 상태,즉 총명한
상태를 말한다.빈 그릇 상태로서의 등은 교리를 표현한다.이 교리라는 등(그릇)이 사랑이라는 기름으로
채워질 때 마음을 비춰 준다(이에 대한 설명은“열 처녀의 비유”를 더 참조할 것). 등불이 켜 있다는
말은 교리를 사용하는 가운데 있거나,최소한 사용할 준비의 상태에 다가 서 있다는 것이다.다시 말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33
교리 속에 든 진리를 잘 알고,그 안 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며,더욱이 느닷없이 발생할 삶의 어떤
상황을 위해서도 준비가 된 상태를 말한다.
이해성 속에 든 진리가 의지 또는 심정 속에 있는 사랑과 결합될 때, 그 둘은 밝게 빛나면서 우리의
총명이 계속 유지되게 해준다.이러므로서 우리 마음은 삶을 천국 원리의 영향 아래 있게 해준다.다시
말해서 거룩한 불인 천국적 사랑이 정신 속의 제단 위에서 항구적으로 불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매일 생활 속에서 주님을 인식하며 살게 된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라는
고백이 삶 속에서 이어진다는 말이다.
집의 주인과 종
본문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집안의 종들이다.영적으로 볼 때,집주인, 또는 어떤 장소의 주인은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에 해당된다. 따라서 종들은 진리에 해당되는 바, 진리들이 그 사랑을 섬긴다. 우리의
애정(affection)들은 각자의 목적을 섬기도록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들을 부린다. 그러나 최고로 높은 의미로
볼 때,집주인은 주님이시다.그 이유가 그분은 거듭 나아가는 모든 인간 마음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시
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에게 있는 통치하는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흘러 그 사람에게 들어간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이란 주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 안에 거주하는
진리들이다.
혼인은 신성한 선 또는 사랑이 신성한 진리 또는 지혜와의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은 주님 안에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그리고 인간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그 인간 안에서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거듭남이 진보되는 만큼에서 그 하나됨도 진보되어 간다.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때란
우리 영이 결혼하는 상태 속에 들어가는 때이다. 이 때에 그 사람 속의 사랑과 지혜는 주님께 헌신함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주님의 오심은 인간의 의지에 신성한 사랑이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성에 신성한 진리가 발표되는 것이다. 이 오심과 두드림이 인간과 더블은 주님의 현존을 구성해 주는
것이다.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계시록 3:20).
334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문을 열다
주님에게 문을 여는 것이란 그분께로 의지 또는 심정이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실제적 측면에서
보면,길가에 버틴 장애물,주님이 못 들어가게 배척하는 것들을 제거한다는 말이다. 이 장애물이란 우리
자신 속의 악과 거짓,삶에서 영글고 있는 죄악상들이다.이런 것들이 회개하여 제거될 때, 우리는 즉각
그분께 문을 열어 드리고,그분은 사랑과 지혜로 들어오신다.그분은 들어오실 입구를 꾸준히 찾고 계신다.
그리고 영적 생명으로 인간을 축복해 주시려 하시고 있다.
주님을 기다림
주님에게 문이 열려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그 이유는 마음의 이런 상태에 주님은 언제나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그분을
맞이하려고 언제나 준비하는 상태이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연계에 기현상이 있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정신적 상태, 또는 갑자기 정신이 변화하는 상태 같은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준수해
가는 상태,선용을 사랑해서 매일 생활에 응용해 가는 상태에서의 기다림을 말한다.이는 해야 할 뭔가를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하여 더 큰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도록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진리의 빛, 사랑의 따뜻함은 일하고 있는 마음, 적극적 자세 속에
있는 마음 안으로 흘러든다. 자신이 지닌 생명보다 더 큰 생명을 기다리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이미
지닌 영적 생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는데 있는 것이다.
지켜봄 (watching, 깨어 있음)
지켜본다는 것을 실제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 인격이 형성되는 것을 자신이 지켜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악에 잘 쏠리는 자신의 경향성을 내려 누르고 선을 행하면서 주님이 접근하시는 것을 눈치채는 상태에
자신을 간직한다는 말이다.그 이유는 주님의 오심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진리 속에서,예상하고
있는 모든 선함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 올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하실
수 있고,들어오셔서 더 많고 더 높은 영적 생명으로 채워 주신다.이것이 그분께서 내리시는 복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35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동안 그분은 우리를 섬겨 주신다. 우리가 그분께 문을 열고 있는 동안 받을 준비가
된 우리 속의 것들에 흘러드신다.그리하여“그 주인은 허리에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있는 종 또는 진리가 선 또는 사랑과 하나를 이룰 때 거기에 복이
있다.
우리가 지켜보아 주님을 발견하는 때란,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때,즉 감각적 삶에 속한 것들로
인해 푹 잠든 상태가 아니고 영적 원리를 총명하게 응용해 가는 때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주님이 인간을 섬김
주님이 스스로 띠를 띠셨다. 그 이유는 그분의 신성한 사랑은 그 자체 사람을 섬길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한 애정이라는 영적 양식을 받도록 준비함으로 그분은 우리로 식탁에 둘러앉게 하신다.
우리 마음에 그분의 진리를 이식해 주시고,영적 총명을 주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섬긴다.
지킴 등등에 관해서
밤을 지키는 상태의 첫 단계는 우리가 진리로 훈육 받는 상태이다. 둘째 단계의 지킴은 우리의 애정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와 연합하는 상태이다. 셋째 단계의 지킴은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이
선한 행동 속에서 일을 수행하는 상태이다.만일 주님께서 둘째,셋째 단계 중 하나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의
집주인이란 통치하는 사랑이다.만일 통치하는 사랑이 선하다면,악령의 미묘한 수작이나, 악령이 슬쩍
자신 속에 심으려 드는 거짓된 암시들, 자신의 밑바닥을 파고 들어오려는 짓 등등 모두를 두 눈 크게 뜨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모든 거짓은 우리 속의 선하고 참된 것을 훔쳐 가려는 도둑인 것이다.
도둑처럼 악령은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밝은 우리의 상태에서 오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자연적
마음뿐인 상태,즉 캄캄한 정신 기간동안에 잠입한다.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속의 약해진 상태들을 공격하고,
공격하되 우리 모르게 공격한다.즉 좀 먹어 들어가는 수법을 쓴다.이런 수법에서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336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방법은 자기 마음을 거듭나는 삶의 영적 원리 속에 꾸준히 있게 하는 도리밖에 없다.
밤
사람들이 밤중에 잠자기 위해 물러가 있듯 우리는 일상 생활이라는 외적 용도에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일상 업무 속에서까지 영적 원리들을 응용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영적 도둑에 대비해서
집을 지키는 것이 된다.
“가라지”의 비유에서,원수가 가라지를 뿌린 시간은 밤중이었다.그 반면“은밀히 자라나는 씨”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밤,낮으로 성장했다.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위해 주님의 계명 속에 든 진리를 마음속에
늘 간직하면서 거짓 교리와 감각적 현혹이라는 은밀한 영향들에 눈을 치켜 뜨고 지켜봄을 꾸준히 함으로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준비 안된 상태,즉 자신의 도덕적인 상태나 영적 상태의 어두움,정신적 어두움이 몇 시쯤이나
되는지 말할 수 없다면,우리는 악과 거짓에 정복당하고 말기 때문이다.주님의 거룩한 말씀에서 밝혀
주시는 그분의 선함과 진리의 안내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정신 조건에는 어떤 안전도 보장
안된다.
관리인, 기타 등등
우리 속의 품위들 중에서 믿음을 표현하는 베드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주님께서는 비유 속에
있는 진리들은 모든 이의 정신 조건에 응용되는 것임을 서술해 놓으셨다.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슬기로운
관리인이란 거듭나는 자연적 마음이다.이 마음이야말로 자연적 의무나 일들을 잘 관리한다.그 이유는
주인의 뜻,즉 영의 뜻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악과 거짓에 의해 붕괴된다면, 자연적 마음을 섬기는 진리인 남자 종과 마음속의
자연적 애정인 여자 종들 역시 남용 당하고야 만다. 그러면 신성한 진리는 그 마음들을 심판에 서게 하여
그 마음 바탕에 걸맞는 지옥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따라서 빛에 반대되는 죄들은 그것에 비례해서
지옥에로 가라앉고, 그 마음이 그 속의 지식을 덜 전복시킨 만큼에서 그 마음이 자초한 재난도 그만큼
덜해지는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37
고로 자신 위에 작용하려고 애쓰는 영향력에 대해 잘 지켜보도록,그리하여 우리가 선한 것만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흠모하고 있는지, 모든 거짓들을 축출하며 죄악된 행위를 거절하고 있는지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고
비유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마치 거듭나는 영혼
속의 슬기로운 관리인같이 제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다.
“허리에 띠를 띠라”라는 말은 우리의 애정을 주님에게, 또는 영적 목적과 결과를 위해 들어올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등불을 켜 놓으라”는 말은 우리 생각을 교회 속의 교리에서 가르쳐지는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로 계속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체계로서의 진리들
진리를 총명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의 하나는, 우리가 진리를 완성된 체계로 마음에
간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래야 우리는 계획과 계획이 연결을 이루는 가운데 삶의 전체와 세부 사항에
이르는 모든 측면에서 진리를 꾸준히 응용해 갈 수 있다.
예증
인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손가락 정도의 작은 부분부터 이해하려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전체로서의 인체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얻고 난 뒤,각 부분과 그 각각의 연결을 개별적으로 공부하면서
전체 체계로서의 인체를 공부해 간다.게다가 그가 각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는 상황까지 공부했다 해도,
인간 영혼을 납득할 때까지는 인간 전체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영적인 구성과 인체를 이해할 때,그는 인간이 무엇인지,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부분 사이의 연결과 그 관계를 납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진리를 공부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와 연결들을 가진 서로 밀접한
체계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목표를 두어야만 한다. 손가락이 몸 전체와의 연결에서 떼어져 독립된 상태로
생존할 수 없듯,개별적인 진리 하나가 전체와의 연결 관계를 끊은 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어떤 사실
하나가 연결된 것 없이 독단적 사상으로 총명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어떤 원리가 체현되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만 파악된다. 그래서 모든 원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자연적 형체뿐만 아니라 그 형체의 상응물인 영적
338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원인 그리고 그 원인과 주님과의 관계까지 파악해 가야 환히 알게 된다.
진리의 빛
우리의 등불이 계속 켜져 있기 위해서 우리는 교리를 기억 속에 담되 교리 속의 진리가 삶에 적용되는
살아 있는 진리로서 알고 이해해야 한다.우리가 기억한 것은 잊을 수도 있겠지만,경험에 의해 파악된
진리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그 이유는 경험 속에 내재한 원리를 보았기 때문이다.모든 각각의 진리는
그 나름대로의 수준에서,삶 나름대로의 평면에서,그 진리를 받으려 준비된 마음속에서 모두 나름대로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영적 빛인 영적 진리,역시 그 진리 나름대로의 수준에서만 총명할 수 있다.그래서 우리 마음이 영적
빛 속에 있지 않다면, 영적 진리는 그 사람의 생각 수준에서 나타나는 양상에서만 진리로 보여지고 만다.
더 높고,더 내면에 속하는 수준에서 진리를 본다면,더 많은 납득력이 특정 진리에까지 확장되어 더 밝게
우리 등불은 불을 밝힌다.
따라서 삶 속에서 일하고 있는 원리는 우리에게 더 뚜렷한 증거물이다. 고로, 우리 등불이 켜 있게
하기 위해,우리는 교리를 붙잡되,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실생활에 사용해서 우리 생각의 일부가
되게 하여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진리가 구체화된 상태야말로 우리가 그 진리를 심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이러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확증하고 있어 그것을 진리로서,비록 그 진리가
가장 외적 상태일지언정 진리임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우리는 어떤 진리가 생산한 선함이라는 실제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증
금빛 찬란한 선명한 아침에 창문 너머 멀리 있는 산들을 쳐다본다면 그 산이 상당히 먼 위치임에도
우리는 그 산의 정상을 볼 수 있다.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산이 있다는 확실성을 가지게 된다.그러나
구름이 많고 안개가 잔뜩 깔린 날, 다시 창문 너머 그 산을 살피려 한다면 우리 시야에는 그 산이 보이지
않는다.그럼에도 우리는 그 산을 보고 있는 듯,거기에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음에 구름이 잔뜩 깔린 상태에 있을 경우, 왜 우리는 과거 명료한 마음 상태에서 이미 보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39
알고 있는 영적 원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하게 될까? 정신적인 밤의 상태에서 왜 우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지 못할까? 가장 높은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왜 합리적
이해 속에서 계속 간직되지 못할까?
산 위에 오른 모세와 같이,인간 삶의 성전에 관한 천국의 모형을 본 뒤,자연적 삶의 낮은 평면에
내려와 산 위에서 본 바대로의 모형에 따라 왜 성전을 짓지 못할까? 깨끗한 시야가 허락된 아침이라면
우리는 자기 집에서 먼 산까지 갈 수 있는 방향을 짐작해둘 수 있다.그래서 구름낀 날,즉 고상한 형체의
진리가 우리의 시야에서 애매 모호한 것 같다 해도 그 산까지의 여행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정신적 삶에 구름이 끼었다 해서 거룩한 말씀의 빛으로 밝혀진 주님의 선하고 진정한
원리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하지 못할까? 정신적인 날이 캄캄해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선을 향한 여정에 왜 확신 있게 움직이지 못할까?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여행길의 방향을 기억할
것이다.주님께서 이르시기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그분의 계명은 우리의 여행 방향을
뚜렷이 제시해 준다.
우리는 우리 소유의 집 구조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집안이 캄캄해진다 해도 자기가 갈 통로를 찾을 수
있다.우리가 주님의 집에 살고 있다면,우리는 비록 밤이라 해도 집안의 통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의 고향인 사랑하는 원리들이 가야 할 길을 언제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법칙으로
진리를 이해해서,그 법칙에 의해 영적 삶을 꾸리게 된다.
삶의 법칙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거나 작물을 재배하는데 응용될 원리를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한다.
그래서 사육자나 농부들은 동식물의 삶에 관한 법칙의 어떤 것을 알아야 성공적으로 경영이 가능해짐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영적 존재, 영원한 존재로서 성장하는 수단인 영적 삶의 법칙에 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유전의 법칙이 소떼나 작물의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중요하다면,
영적 삶의 법칙은 인간 영의 존재를 발달시키므로 더 중요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밝혀지는
진리로 오시는 주님을 지켜보는 가운데 일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이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그리고
그 진리 속에 있는 선을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썩지 않은 삶 속에서 진리가 잘 유지되고 있는가를
늘 지켜보아서 자신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입맛이나 고집으로 진리가 비비꼬이거나 뒤집어지지 않도록
340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해야 할 것이다.
뒤집어진 진리들
많은 이들이 진리의 관계나 연결로부터 애쓰게 추론해서 진리를 수중에 넣을는지 모른다. 그리고는
그 진리를 천국적 조건과는 아주 딴판으로 나타나게 비틀어 버린다. 전문적인 예술가에 의해 모자이크로된
주님의 초상화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초상화에서는 각 조그만 돌들이 있어야 할 제 위치에 놓여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작품이 되고 있다.그런데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돌의 배열을 무시하고 다시 배열한다면,
비록 돌의 종류나 색깔 모두가 같은 것임에도 그 초상화는 아주 다른 얼굴을 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위의 예술가에게 근본이 된 돌과 돌의 관계나 연결을 깨트린다면, 초상화의 원래 형상은
사라지고,대신 전혀 다른 인물이 표현되고 만다.진리에 대한 양상도 위의 예나 다름없다. 가장 극도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대로의 진리의 체계를 본래 모습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들,그 진리를 삶에 응용하는 사람들 속에 신성한 형상은 보존되고,또한 나타나신다. 이 때 주님은
우리 속에서 그분의 형상과 모습이 자라도록 인도해 주신다.체계적 진리에 관한 지식을 적절히 갖출 경우,
그 체계는 거짓의 체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게 된다.
예증
건강에 관련해 인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체의 상황들을 알고 있으면서 무질서된 육체에 있는 질병을
꾸준히 간파해 간다. 이와 같이 건강한 인간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체계를 납득하고 있는
바 악과 거짓의 현존을 간파해서 거짓 체계의 모두를 거절할 수 있다.이는“가라지를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린다”고 하신 마태복음13장 30절의 구절에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을 묶는다는 것은 내
속의 거짓을 분류해 낸다는 것,불에 태운다는 것은 거짓 체계를 거절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화냄이라는 악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그것이 나쁜 것인 줄 모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본다. 화냄이 자아 사랑으로 부추켜지게 될 때 격정으로 비행해서 죄로 이어지는 고속 도로를 건설하고
만다.이런 간단한 원리의 체계를 우리의 정신적 눈앞에 계속 간직할 수 없을까?이를 계속 상기하고 있다면,
우리는 분노에 관한 우리의 경향성에 있는 지옥의 품질을 간파할 수 있어, 그런 경우가 드러날 때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41
즉각 그것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행동에 옮겨지기 전 마음속에서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이다.
준비함
우리가 허리에 띠를 띠고,불을 켜 놓은 채 있노라면,주님이 계획하시는 것,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에 대비하고 있는 셈이다.따라서 예상했던 것,예상 밖의 것까지에도 준비된
태세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설비하시는가에 대해 그것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는
사실상 알지 못한다.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그런데도 자신이 바랜 것을
했더니 오히려 나쁘게 처리되어 바래지 않았던 것만큼도 못할 수 있다. 마치 기나 긴 항해를 하는 선원에게
다정하게 느껴지는 해안이 오히려 난파된 배를 기다리는 격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선원이
배를 해안에 정박시키는 방법 여하에 따라 해안은 친구 수준에서 파괴자의 수준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어떤 이가 아주 중요한 직책에서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차의 선로를 바뀌게
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팔이 어떻게 움직여 기차를 통과시키느냐에 따라 그 기차는 올바른 선로로 무사히
달리거나,충돌이라는 파괴쪽으로 갈라지거나 하는 경우이다.세상사의 수많은 것이 각각의 그 일을 위해
준비해 두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각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위의 경우는 우리의 아주 사소한 생활 속에서도 적절히 적용되고 있다. 자신에게 언제 비상사태가 있을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러나 그런 사건이 터질 때,그 일을 슬기롭고 과감하게 해치울 준비가
된 사람은 사건을 슬기롭게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준비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자기의 할 일에 관해 총명한 지식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느냐에도
달려 있다. 영적 측면의 준비도 진리를 하나의 체계로 다각적인 연결로서 납득하여 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의존된다. “선한 자는 비보를 접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은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에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신중하게 자기 업무를 처리한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인간 삶의 자연적 측면만을 주시하려 드는 외적인 사람은 자기 주위에 속하는 것들이 갑자기 바뀔
때 매우 당황하거나 심히 놀랜다.그러나 영적 빛에 내면을 열고 있는 사람,인간 삶을 그 삶의 내적 측면에서
342 허리에 띠를 띠고 불을 켜놓고 기다려라 - 누가복음 12장 35-48절
관조하며 사는 사람은 장차 발생할는지 모를 어떤 것에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외적 측면만을 중시하는 사람이든,내적 측면을 중시하며 사는 사람이든,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바깥쪽에
속하는 일들이 있게 될 사실들을 미리 볼 수는 없다. 외적인데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변에 있게
될 일,흔히 말하는 자기 운세를 점쳐 보려 할는지도 모르겠지만,내적인데 마음을 두는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는 일 그 자체가 자신들의 자유 의지를 뒤흔들고, 혼란을 일으켜 결국 선택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을 알므로,자신의 미래 사실들을 아예 내다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그러나 그들이 아는 바는, 영적
원리는 확실하다는 것, 영적이든, 자연적 측면에서든 “각기 종류대로 결실을 갖는 것”임을, 따라서 행동에서
구체화될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 주어진 어떤 원리라는 것 등등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자비로운 약속은
주님께서 언제나 이루신다는 확실성을 가슴으로 꽉 쥐고 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그래야
너희가 그 땅에서 살 것이고,너희를 먹여 주실 것이다.주 안에서 스스로 기뻐해라. 그러면 너희 심정이
바래는 것을 주실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43
2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종교는 삶 속에 있다-
성서 본문: 누가복음 13장 6-9절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쓸데 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그냥 두십시오.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9.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포도원
“어떤 사람”이란 인간 포도원의 소유자이신 주님이시다. 포도원은 교회이고, 그 안에 신성한 진리가
심어져 열매를 생산한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이사야 5:7). 개인별로 볼 때, 포도원이란 각 인간의 이해성에 세워진 교회를 말한다.
344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누가복음13장 6-9절
나무들
나무란 마음 안에 심어진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나뭇잎이란 기억 안의 지식들,또는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한다.꽃은 감정(sentiment), 또는 생각 속의 사상들을 표현해 준다. 그리고 열매는 삶에서 성숙된 원리들,
인간 원리들의 열매, 일들이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성경에 언급되는데, 그중 특별한 나무는 올리브,
포도,무화과나무일 것이다.이 세 나무는 인간 삶의 세 가지 특별한 국면을 표현하는데, 새교회의 용어에서
천적, 영적, 자연적 등차(수준)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들은 종류와 품질면에서 서로 다른 등차들이다.
올리브나무로 표현되는 천적인 상태란, 선을 사랑함 즉 신성한 선으로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통치되는
인간 상태이다.이 사람은 선을 사랑하여 선으로부터 기쁘게 선을 행한다.중간 등차인 영적 상태가 포도나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진리를 사랑함이 그의 애정을 조절한다. 이 사람은 사물 속에서 선보다는 진리를
본다.하느님을 알되 신성한 진리로서 그분을 안다.낮은 등차인 자연적 상태, 무화과나무로 표현되고,
그는 원리보다는 행동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적 차원에서
선을 행한다.
무화과나무
위에서 살핀바 같이 무화과나무는 가장 낮은 등차,또는 인간 삶 중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을 수단으로 자연적 등차 안에 먼저 존재한다. 그 다음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거듭남의
“재 탄생”속에서 발달되어 진다.자연적 등차는 인간의 바깥쪽 삶과 그 삶에 연계되는 애정이나 생각과
관계를 갖는다. 인간 각자가 자연적 등차에만 관심을 두는 한 그는 계속 자연적 등차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이거나 천적인 상태로 되어 가는 이들과 더불어 삶의 새로운 등차는 자연적 등차 속에서, 또는
그 위에 더 첨가되어 발달되어 진다. 모든 인간은 각자 속에 영적이거나 천적 인간으로 될 소질(germ)을
갖고 있어 이 씨가 각자의 일생 중에서 언제일지는 몰라도 열리어 자라게 되어 있다.
자연적 마음만 고집 하는 사람일 경우,그가 거듭나고 있다 해도 내면의 등차는 열리지 않는다.그의
거듭남은 자신을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함으로 선하고 올바른 질서에 있는 자연적 삶에 가져다 놓아준다.
따라서 그의 자연적인 선함은 그 선함 속에 내면의 선함이라는 씨(germ)를 함유한다. 고로 그의 자연적인
선도 천국과 연결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근원으로부터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적 근원이 그의 의식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45
세계까지 팽창된다면 거듭 나아지겠으나, 그의 마음은 영적 또는 천적 등차에 관한 뚜렷한 경험을 즐기지는
못한다.
오로지 자연적 인간의 수준에 있을 경우,거듭난 자연적 인간까지에는 도달할 수 있다.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천국에 마음 문이 열리는 수준만큼에서 자연적 인간도“생명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그가 제 아무리 진리를 교리로서 붙잡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다. 주님의 가르침을 알고는 있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잎사귀밖에 없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일 뿐이다.
유대 교회
위의 무화과나무는 주님의 첫 오심에서 보여준 유대교회의 상황이었다.유대교회는 외향적,자연적
인격 속에 있었다.그래서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하기보다는 교회의 표현물이었을 뿐이다.다시 말해 진정한
영적 교회의 정신적 생명이 담긴 의식이나 행사만을 가진 껍데기 교회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교회가 비록 껍데기 수준이었을지라도 자연적 선을 사랑하여 연습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교회들은 예언자를 통해 천국과의 연결도 있었고 더욱이 신성한 명령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적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의 글자적 수준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말하시고 있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은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나무의 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해 준다.” 이는
알고 있는 진리들을 실제 사용한다면 자기들의 악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국가를 상징한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했다.주님이 유대교회에 오셨을 때,그분은 그 나라에
내린 처방(dispensation)에 심판을 놓으셨다. 즉 그분이 이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주님의 백성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가 없어 주님의 시장하심을 채우실 수 없음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속이 텅빈
지식만 무성하고 실제의 선함이라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잎만 무성한 지식들만
가지고는 어떤 영적인 사람다움도 건설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가 보았지만 (coming and seeking)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다.” 무화과나무에 “옴, come”이란 인간에게
346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누가복음13장 6-9절
선을 가져다주고,인간 안에서 선을 발견하고자 하는 신성한 사랑의 접근,“구함, seek”은 신성한 지혜의
노력을 표현하는 말이다.위 두 개의 동사 역시 그저 심심해서 되풀이 된 말도,우연히 있어진 말이 아님을
우리는 눈치채어야 한다.주님의 말씀은 주님과 우리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말씀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에 더해서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추가되어 질 때가 성경 구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한 예로서, “깨진 심정을 붙잡아 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갇힌
자를 풀어 주도록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라는 구절에도 있다.신성한 속성은 주님 안에서는 하나로 되어
있지만 인간의 생각 속에서는 분리될 때가 많다.주님에게 분노나 성내심은 존재 않는다.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으로 드러내진다.
비유의 개인적 응용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비유는 유대인과 관계되지만, 개인적 측면에서 볼 때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
무 같은 상태의 삶과 관계가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이란 교리에 관한 지식을 풍족히 갖고 있으면서도 삶
속에서 선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아마 그는 명목만의 기독교인이요,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다고 자처할 뿐 계명의 준수와는 무관한 자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능할 수
있는 어떤 기회를 본문 말미에서와 같이 부여하고 계신다.
포도원 지기
신성한 진리는 위와 같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이미 정죄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즉, “그래서 포도원
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이와 같이 신성한 진리는
악의 정죄를 선포하고 있다.그러나 신성한 사랑은 언제나 모든 인간을 구하시려는 신성한 섭리를 펼치신다.
이 신성한 섭리가 포도원 지기이다.
“어떤 사람”인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지기”라는 두 사람이 비유 속에 등장하여 대화하는듯 여겨지지만,
이는 인간이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섭리를 따로 따로 보게 되는 양상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사실 위의
둘은 주님 안에서 하나일 뿐이다.섭리란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지혜를 통해 권능으로 발휘되는 돌보심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47
그러므로 인간이 악한 상태에 있을 경우,그 악은 마땅히 정죄되어지게 되어 있음을 당사자가 알게 되지만,
동시에 신성한 섭리는 모든 인간을 구해 주시려 아주 말단에 이르기까지 역사 하시고 있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
그래서 포도원 지기가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요”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즉 삶의 바깥쪽에 있는 선을 표현하고 있다.그러므로 이 선이 순수한 선,
즉 선한 동기로부터 행해질 경우,이 선도 영적인 근원에서 비롯되는 선이 된다.잘 성장하고 있는 무화과나무란
교회의 진리들로 가르침을 받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자연적 인간)을 표현하는 바, 그 나무의 잎은 지식들을,
그 나무의 열매는 삶에 있는 실제의 선한 일들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눈에 보이는 상태로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의 영은 선하지 않은 위선일 경우, 그들의
선한 일은 “먹을 수 없게 썩어 버린 무화과”이다 (예레미야 24:3). 그래서 인간이 선한 행동들을 낳기 시작할
때, 그에게 어떤 시험이 있게 되면 그 시험에 맞서지 않고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어 선행을 중단하고 악을
행할 때, “강풍에 흔들려 미처 익지도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같이 되고 만다.
과실수 (fruit-tree)
과실수의 중요한 특징은 그 열매에 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원리가 생산하는
열매인 선함이다. 이 선함은 나무의 열매와도 같이 장차 더 많은 열매를 생산하는 씨라는 생명되는 원리가
들어 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듯”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라고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7:16-19).
인간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삶 속에서 저절로 나타난다는 원리에 대한 위의 서술은 아주
348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누가복음13장 6-9절
분명한 말들이다. 그래서“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요한복음 15:8). 이사야서에서, 선한 자는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심으신 “정의의 나무”라고
말하고 있다.시편1편에서,선한 자는“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철 따라
열매맺는다”고 노래하고 있다.
포도원 지기 같은 신성한 섭리는 영적 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영적 열매를 돌보느라 노력하고, 인간 마음에
있는 모든 무화과나무에서 좋은 무화과가 맺혀지도록 무던히 애쓴다.
3
포도원 주인은 삼 년 동안 나무에서 열매가 열렸나 가 보았다.셋이란 진리 측면에서의 완성,또는
충만(fullness)한 상태를 표현한다. 유대교회에서이든, 본문의 무화과나무로 표현된 개개인에서이든, 마음속
의 생명인 세 분과, 즉 의지, 이해성, 행동의 어느 분과에서도 순수한 선이 없는 것이다. 이 나무는 제
분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주님은 이 나무가 잘려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셨다.그러나 잘리기
전, 인격의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기회 역시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시기도 했다.
열매 없는 나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잘리운다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자연적 인간이 자신의 악들로 인해
파괴되어질 때를 말한다.포도원에는 태양의 빛과 열,수분, 포도원 지기의 돌봄이 있어 왔다. 따라서 포도원에
있는 무화과나무가 좋은 품질의 나무라면 열매를 생산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 속의 사람들은
각자 선을 행할 모든 기회를 가진다.교회는 주님의 말씀,특전, 예식 등등을 가지고 교인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열어 놓고 있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잎사귀밖에 없는 무화과 나무 같이 어떤 실제의 선을 열매
맺지 못한 채 있다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땅을 괴롭힘 (cumbering the ground)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땅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똑 같은 땅에 좋은 나무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49
심어졌더라면 열매가 얼마라도 생산되는데,결국 땅으로 하여금 게으름 피게 만든 격이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 속의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그 사람은 어떤 선용도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그는
자신을 위해서 쓸모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이 수행해 보겠다는 선용의 길을 가로막고 서서 타인으로
하여금 시간을 낭비하게 할는지도 모른다.더욱이 그의 나쁜 본보기는 타인에게 해까지 입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라 해도 회개하여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기회가 있어 소극적이나마 타인을 섬길 수
있도록 주님의 섭리는 본문의 포도원 지기와도 같이 그 사람에게 역사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줌
나무 둘레를 판다는 것은 마음을 가르치는 것,뭔가를 조사해 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뒤져보아 사랑의 따뜻함과 진리의 빛이 그 마음에 와 닿으려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기 속에서 제거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나무 둘레에 거름을 준다는 것은 시험 속에서 악이 맹렬히 몰아
부치는 것을 허용하여 그 인간으로 그런 시험을 겪을 경우 회개와 개혁 쪽으로 인도되지 않을까 배려하시는
것을 말한다.본문의 거름이란 거절되어진 물질인 똥거름(manure)인 바, 이는 악을 의미한다. 악마의 악은
똥거름 같이 더럽지만 시험 속에서 좋은 목적을 위해 충당될 때도 종종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배려와 섭리의 기회가 주어졌다 해도 악인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의 삶의
결과는 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있다. 유대인들, 비록 그들이 국가나 교회라는
측면에서 해체된지 오래되어 수세기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특성을 세상에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 이유가 아마 타인들의 선,그리고 가능할는지 모를 그들의 선을 위해서 일 것이라 본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비유 말미에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지기에게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이는
유대교회가 교회가 될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본문과 유사한 구절이 마태복음21장 18-22절에
있는데, 거기서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 버렸다”고 기술되고 있다.
이 나무도 여느 나무들이 가졌던 혜택만큼이나 태양의 빛과 열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생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주님은 만민에게 똑같이 해주신다.더욱이 영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똑 같은 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해를 비쳐 주시고, 의로운 자든, 의롭지 못한
자이든 비를 내려 주신다.”
350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누가복음13장 6-9절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우리 주위 각처에 존재한다.그 나라는 사랑과 지혜,선함이라는 내향의 나라이다. 빛이
소경에게도 비추이고 있지만 그는 빛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그의 눈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경에게는 빛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온 천국은 우리로 천국 인격을 갖도록 하기 위해 열렬한
사랑으로 역사해 주고 있다.말씀 속의 모든 진리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이렇게 말하신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마 각자는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맺힐 수 있게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자기 속의 악을 내던지지 못한다.
정녕 그러하다면, 신성한 섭리는 비생산적인 우리의 나무에 다가 오시어 우리를 도우시는 마지막 기회인
둘레를 파고 똥거름을 주실 것이다.다시 말해 주님은 교회를 수단으로,또는 일상 생활이라는 실제의
삶을 수단으로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그리고 그분은 각자의 진짜 상태를,자기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도록,제 분수를 알아차리도록 우리가 시련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실 것이다.아마도 우리가 회개하여
개혁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서...
성장
나무의 성장을 두고 단지 변화라고만 말할 수 없다.그것은 분명한 계획에 의해 있어진다.나무는 어떤
출발점 즉 씨나 뿌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성장도 어떤 출발점 즉 마음에 뿌리를 내린
어떤 원리,진리라는 어떤 씨에서 시작된다.나무가 어떤 의도된 계획에 따라 성장하듯 마음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잘 의도된 천국 질서에 의해 성장한다. 각 진리는 먼저 기억 안에 저장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교리로 이해되고,진리가 인식되면서,원리가 사랑 받아지게 되면 일상 생활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 어느 하나라도 건너뛰면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나무가 성장하려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야 가능하듯이,마음속의 진리도 사랑에
의해 따뜻함을 입고, 지혜로 밝혀지면서 정성어린 돌봄으로 보호되어야 열매맺는 데까지의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다시 말해서,우리는 자신 속의 진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 돌보심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임무를 잘 담당하고 있어야 한다. 나무가 계속 잘 성장하려면 주위의 잡초도 제거해야 하며 이 나무를
짓밟는 적으로부터서도 보호받게 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비생산적인 나무가 들어 차 있어
정작 자라야 할 진리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1
28
낮은 자리에 앉으라
- 겸허함 -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7-11절
7. 그리고 예수께서는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어
말씀하셨다. 8.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 10.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 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원리
신성한 진리는 거듭나는 마음에 천국의 질서를 놓는다. 이 질서 속에 인간 삶의 모든 원리들이 각 마음의
품질에 일치되어 배열되어 있다.먼저 가장 높은 차원으로서 주님이 사랑되어지고,이웃이 내 몸과 같이
352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14장 7-11절
사랑된다.이를 실제적으로 보면,거듭나는 모든 삶, 그 삶 속의 심정이나 이해성, 행동의 모든 단계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가 인간 영혼에 있어야 할 영적 요소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이 가장 높은 원리를 응용함에 있어,우리 이웃의 흥미나 권리,바램들을 자신의 것으로서 지키고 섬기는
것이다.즉 우리는 천국 원리의 안내에 자기의 심정이나 생각,그리고 행동 속에 있는 자아를 복종케 하는
것이다.
이런 삶 속에 있을 경우,우리는 개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고 그 개인 속에 든 원리를 중시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개인을 향해서도 각 사람 속에 든 선한 것을 사랑해 주고,진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행하게 하는데 관심을 집중한다. 이렇게 선의 사랑을 중시한 상태는 각인의 인격에
관심을 둔 상태이다. 그러나 자신만을 극도로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자아만을 사랑하는데 집중하게 되면 그는 악한 인격을 자신 속에 형성하여 인격의 품질을 저하시키고
깎아 내리게 된다.그러나 천국 원리의 통치 밑에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스스로 겸손해지려는 사람,그것을
행하는 선한 자는 천국의 축복에 자신의 심정을 열어 놓아 자기 안으로 흘러들게 하여 그의 마음과 삶
속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
글자적 의미
오늘 비유는 동쪽 나라의 잔치 관습을 상상해 봄으로 더욱 이해되어 진다.잔치에 초대될 경우,도착한
손님은 먼저 그 집의 안주인에 깍듯이 인사하고, 방에 들어오면 도착한 손님을 향해서도 인사한 뒤 식탁에
앉을 자기 자리를 찾는다.그가 이 자리를 정할 때,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손님까지 계산에 넣어 생각해
보고 자기 좌석이 어디쯤이겠다고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주인은 윗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아 있을 경우,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하여 자리를 옮기게 한다. 만일 모든 이가 자리를
모두 차지하여 자리가 없을 경우에도 주인은 윗자리에 앉은 이를 일어나라 해서 아래 자리로 옮기게 하고
그를 상석에 앉힌다.
윗자리에 앉게 하려고 예상한 손님을 그 자리에 앉게 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은 집주인의 특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각 손님의 최상의 방책은 자기와 주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최대한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고,주인이 자기를 불러 윗자리에 앉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3
자기 자랑
자기 자랑은 마음의 상태 중 가장 외적 수준에 속한 것이다.그래서 세상의 경험은“자찬은 취할게
아니다”라는 속담에 근간을 두고 있다.그러나 미성숙된 마음은 자기에게 발달된 최근의 능력이 꽤 대단한
것으로 여겨져 타인 속에도 그 정도,또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음을 때때로 잊어버린다.
제것만 옳다고 우겨대는 습관에 푹 빠진 것보다 구역질 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습관이
자아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자아 사랑은 그 속에 타인을 경멸하는 태도도 함유하고
있다.그런고로 이 사랑은 마음을 불균등하게 발달되게 하고,미 성숙된 채 남겨 놓아, 이기적 마음만이
무성해지게 한다. 그러나 삶의 체험과 정신적 성장은 이런 상태를 벗어나 가치 있는 개개인이 될 수 있는
높은 자리로 들어 올려 준다.
그러므로 자기 주장이나 자만심은 젊은 나이에 많이 돌출 되는데, 특별히 거듭나는 과정 시초에 잘
발견되기도 하나,이런 것들은 더 나은 인격 품질이 발달함에 따라 자리가 바뀐다.이와 같이 우쭐해 하는
자기 주장은 젊은 시절의 삶에서는 큰 결함이라고 볼 수 없겠지만 성년 시기의 인격에서는 심각한 오점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책
본문을 글자대로만 볼 경우,비유는 세상적 정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 여길는지 모른다.어리석은
자는 겉보기에,그리고 일시적으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되,후에 높은 자리로 추켜지기를 기대한다. 그럼으로
그는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억지로 나타내 의롭게 보이려 한다. 그가 낮은 자리를 앉는 이유는 행여나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밀려나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영적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그의 목적은 타인이 칭찬되기를 바래기 때문이다.그는
마치 바리새인들이 큼직한 성구함을 만들어 차고 다닌다던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길에서 기도하듯
하지 않는다.
시작
354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14장 7-11절
이 비유는 겸손이라는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자기 본위 주의로 영글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붙잡게 할 수 있을까? 유일한 수단은 그의 행동을 질서 속에 정착하게끔 그를
가르치는 것일게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어떤 동기로 자기 마음을 조절해 가든 우선 질서 있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그가 질서 쪽으로,그리고 질서 안에 들어오는 매 단계들은 그에게 질서의 영향 밑에
더 확실히 오게 할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거듭남을 위한 머나먼 목적을 향해 움직이되
종종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시작할 때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보자.많은 이들이 행동에서 죄짓는 일을 중단하되,그 이유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이런 우리가 지옥을 미워하고 천국을 사랑하는 높은 상태,악을 죄로 알고 금하는 상태에
도착하는 데에는 신성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하는 긴 과정이 요구된다. 많은 경우에서 주님은 쓸모
없게 보이고 좋지도 않게 여겨지는 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나 이런 불필요한 듯 여겨지는
것들이라도 해도 우리가 악에서 나와 선 쪽으로 이동하는 진보 단계에 있어야 할 필요 요소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에집트와 가나안 땅 사이에 광야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이 광야에는 배고픔과 목마름,
전쟁과 염병, 뱀, 강한 적들까지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잔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진리로 훈육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에
관한 어떤 좋은 원리를 암시 받고 그것을 사랑하고 사용하게 되어 우리 속의 선한 애정이 진정한 생각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우리는 거듭나는 보다 높은 상태에로 옮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잔치,선한 원리의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우리는 자기가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렀다
던가,가장 큰 선을 획득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초대된 우리는 높은 산을 보고 막 오르려는 등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수준에서의 원리라는 것은 아주 높다거나 가장 내면에
있는 원리는 아닌 것이다.
믿음과 사랑
맨 먼저 우리는 사랑이라는 높은 원리로 행동하기보다는 믿음이라는 원리에서 행동한다. 그 이유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5
사랑은 믿음보다 더 내면에 속한 것이고,사랑의 삶은 믿음의 삶 보다 그 품질이 더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구원은“믿음만”으로 되는게 아니라,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에 의해 되는 것이다.거듭 나아가는 여행은
먼저 각자에게 밝혀진 진리에 단순히 순종하는 데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 순종하는 삶은 우리 속에서 진리에
관한 믿음을 발달시킨다. 그리고 이 믿음의 상태 훨씬 멀리에 선을 사랑함이라는 더 높고 더 거룩한 상태가
위치해 있지만 이 사랑은 믿음의 원리 속에서 성장해 간다.
그러나 정신적 진보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많은 것들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상태,이런 시기에서의 우리는 믿음이 최고 높은 원리인 줄 상상하며 행동한다.그래서 주님이 초대한
식탁에 자신이 앉을 경우,자신의 믿음이 존경받는 자리,주님에게 더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해주고 있다고
상상한다.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시어,영의 잔치에서는 믿음이 사랑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되고, 사랑이“더 영예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첫 기독교회의 치명적인 실수는 믿음을
사랑 위로 추켜세우고, “믿음만으로 구원됨”이라는 거짓 교리를 선포한 것이다. 이것은 교리면에서나 삶의
측면에서나 교회를 부패시킨다.
주님은 잔칫집의 주인이시고,이 주인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 식탁에 함께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고 말하신다. 그래도 주님은 신성한 진리의 잔치에 우리의 지성, 이해성을
부르신 것은 사실이므로 믿음 역시 제자리를 찾아가 앉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잔치에 우리의 믿음만이 아닌 의지 또는 심정도 초대하셨다. 사랑을 가진 우리의 의지는 겸손해서
아주 낮은 자리에 먼저 앉는다.그 반면 우리의 믿음은 우월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서
주님이 밝혀 주시는 것은 거듭나는 의지 안에 있는 사랑은 거듭나는 이해성 안에 있는 믿음보다 “더 영예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현존,그분의 잔치에서 사랑은 믿음보다 위에 앉도록 자리가 배정되어 있다.그래서 주님은
상석에 버젓이 않은 믿음에게“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고 말씀하시고, 사랑에게 “친구여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하신다.다시 말해, 영적 삶을 이끄는 원리는 사랑이요, 이 사랑이 주님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해야 올바른 질서라는 말이다. 그 다음 우리는 믿음을 사랑보다 더 추켜세웠던
과거 속의 자신을 창피하게 느끼게 된다.
질서
356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14장 7-11절
우리가 더 계발될 경우,우리는 주님의 창조에 질서와 체계가 존재함을 보게 된다.더불어 이 질서와
체계는 현재의 우리 마음과 육체에도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삶의 각 부분에는 가장 높은 것에서 가장
낮은 것까지,가장 안쪽에서 가장 바깥쪽에까지 이르는 점진적 변화가 존재한다.모든 각 애정과 생각은
삶의 질서 안에 제각기 배정 받은 자리가 있다. 이 질서가 보존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적 건강에 혼란이
초래되고 만다.즉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머리는 언제나 발 위에 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진리에 비쳐 보아 인간이 알게 되는 것인즉,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잘났다고 추켜세울게 자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그 이유는 주님에게서 나와 자신에게
흘러든 생명을 빼놓으면 자신은 길에 있는 나무나 돌과 하등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 더 진전된
진리들을 보고 자기 생명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어 주님과 분리된 자신을 생각하면 전혀 무가치함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어 더욱 겸손해지고, 이 때 주님은 천국 생명을 가지고 그 사람 안에 흘러들어 채워 주시어
그가 주님과 더 가까운 결합을 이루도록 그의 인격을 높여 주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더 겸손해지면 해질수록 주님은 그에게,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앉게”라고 말하시는
바,그의 인격이 주님과 더 가까워지게,그분의 나라가 그 사람 속에 더 충만하도록 해주신다. 그 반면,
자신이 똑똑하다고 추켜세운다면,그는 더욱 주님과 등지고 더욱 적게 주님에게서 받게 된다.그래서 주님은
말하시기를, “내가 명령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높은 데로 올라감
본문에서 손님에게“윗자리에 올라앉게”라고 말해진 후,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주님께서 초대한 천국의 혼인 잔치의 손님은 거듭나는 이해성 속의 생각과
의지 속의 애정이다.이들 모두는 영적 빵인 선을 먹고,영적 포도주인 진리를 주님의 식탁에서 마신다.
주님께서 초대한 손님들 중에서 존경받는 손님은 주님과 더불어,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과 더불어 영예로워
진다.다시 말해 주님에게 가장 가까이 이끌린 사랑,각 자신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거듭나는
마음속의 모든 천국 원리에 의해 인정받아 주님의 식탁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배정 받는 것이다.
겸손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7
우리가 주님과 관계를 맺는 정도, 그분을 예배하는 수준은 자신이 자신을 생각하건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심각성만큼에서 더 심오해진다.자아를 사랑함,이 사랑은 자아를 평가해 봄에 있어 추켜세워
주기만 하는 바, 더욱 인격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창피하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지옥에 자리를 배정 받게
하고야 만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은 신성한 원리의 통치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우리의 겸손히 더 커질수록,주님과의 결합도 더 가까이,더 강하게 이루어진다.
사랑을 자기 원리의 주축으로 삼는 이들은 믿음을 자기 원리의 제 일 번으로 삼는 이들보다 더 겸손하다.
다시 말해 천적인 천사들은 영적인 천사들보다 더 겸손한 상태 속에 있다. 천사들의 능력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는 정도에서,주님 없이 자신은“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더 실감
있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물론 이런 경우의 겸손은 영의 차원인 내향적 겸손을 의미한다.바깥쪽
겸손은 안쪽 느낌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뿐이다. 따라서 안쪽에 해당되는 영이 없이는 바깥쪽 형체는 단지
죽은 시체일 뿐이다.
겸손한 사람이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것은, 무릎을 꿇음으로 해서 자기에게 뭔가 더 나은게 오지 않을까
해서, 또는 자기 속의 악을 변명해 보느라 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자신이 속으로 겸허한 영을 느끼기 때문일
따름에서이다.구부린 무릎,푹 숙인 머리가 지닌 상응에서 오는 것이 저절로 그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겸손은 인간이 악에 쉽게 기울려는 자신 속의 자연적 경향성에서 자신을 억제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그 이유는,인간 스스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여 주님을 찾고,그분께 순종해 보려 애쓰게 될
때,주님은 그를 인도하실 수 있고 가르쳐 지도해 주실 수 있을 뿐 아니라,그를 보호하되, 악의 실제 공격에서
뿐아니라 악에 기울려는 자연적 경향성으로부터도 보호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자기만 사랑함,
자기만 잘났다고 추켜세우려 하는 것은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당연하게 거절하고, 자신을 악령의 수중에
밀어 넣으면서 악한 경향성에 푹 빠지고 만다.
겸손과 인격
진정한 겸손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미워한다. 순수한 겸손은 인간의 인격이 얼마나 승강됐느냐에
정확히 비례해서 존재한다.그런고로 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천사가 가장 큰 겸손을 가지고 있다.겸손은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상적 느낌에 존재하지 않고 삶의 변치 않는 원리로서 삶 속에 존재한다. 겸손한
자는 과거에 있는 죄들 때문에 통탄만 하고 있는게 아니라 즉각 죄 짓는 일을 중단하고 천국에 속한 선하고
참된 것 속에서 살아간다.
358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14장 7-11절
겸손은 하나의 미덕이다. 그 이유는 선한 자로 자기의 결점이나 과오를 보고 알게 해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자신 속에 결점이 없다고 하는 자들,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선함을 자랑한다 해도 그
사람 속에는 눈부시게 현란한 과오들로 꽉 차 있는게 분명하다. 겸손은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는데 매우
기뻐한다.겸손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
인류의 역사는 겸손이 점차 하강하는 역사였으나,주님이 오시고,다시 오시는 데서 그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태고교회가 가장 겸손했는데,그 이유는 그 교회인들은 자기들이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을 경우 무가치한
티끌에 불과함을 가장 충분히 느꼈었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을 자초케 한 뱀이란 자연적 감각들이요, 이 감각은 뱀같이 냉혈적이고 삶 밑바닥에서 숨어
기어다니면서 우리로 자신을 추켜세우게 하고 감각적 삶을 지향하여 영적 삶을 잊도록 유도한다. 인간
타락은 악의 결과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 삶의 영성을 되찾게 끌어올리시려 언제나 노력하신다.
자아를 찬양함이란 자신의 애정과 생각 속에서 진리 위에 거짓을,선 위에 악을 놓는 것이다.그러나 스스로
겸손한 자, 그는 자기의 외적 삶을 영혼의 종으로 여기고 종의 자리에 앉게 함으로서 선과 진리에 관한
천국의 영향을 드높이도록 자신의 문을 연다.
창피함과 겸허함
자기가 타인보다 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는 때, 그리고 자기는 하급에 속한다고 생각되어 쓴맛을 느끼는
때,아마도 인격이나 지위 면에서 능가 못하는 상대방을 부러워하는 때,등등 같은 상황에서 강제되는
것,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어떤 종류의 창피함이 있다.이런 종류의 느낌은 겸허함이 아니다. 진정한
겸허는 시기함이나 부러움 없이 자기 위의 상급자를 쳐다보고, 자기 아래의 하급자라고 해서 경멸하지
않고 쳐다본다.
이 사람은 타인 안에 있는 선함을 볼 때 그 선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바꾸어서 타인이 자기
안에서 선함을 보게 될 때, 자기 선함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상대방에게 알게 해주어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방법 속에서 삶을 꾸린다.
순수한 겸손은 온유한 영이다.산상설교에서“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즉 이타애의 선 가운데 있는 자는 마음 속의 하늘인 영과 구별되는 마음 속의 땅인 자연적인 마음을 좌지우지할
힘을 얻는다는 말이다. “온유한 자는 심판 속에서도 그분이 인도하시고, 그분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로지 자비를 사랑하고,정의를 행하며, 하느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59
것이 아니더냐?”
자기 주장
자기 것만 주장하는 사람은 그의 영의 측면에서는 지옥에 살고 있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천국에
살고 있다.겸손은 어떤 슬픈 표정이나 얌전한 태도에 있는게 아니라,깔끔히 정렬된 심정과 선한 삶 속에
있다.지상에서의 통상적인 삶과 천국에서의 삶은 상당히 다르다.지상에서 인간들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 투쟁을 계속한다. 그래서 각자는 타인에게서 긁어낼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갈취하려 애쓰고 있다.
천국에 있는 각 사람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해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섬기는 데에서 자기의 행복을 발견한다.각자가 천국에서 살 수 있기 전,그는 반드시 천국 삶의 조건에
걸맞지 않으면 안된다.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바,우리는 타인이 칭찬 받기를 바래야 한다. 상대방을 격려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칭찬되어지도록 교묘하게 자신을 사랑하는게 인간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용적 의미
비유는 실제 사용을 위한 의미들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님의 모든 진리는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오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우리가 이기심에서 빠져 나오도록 부른다는 것,선한 애정이 진정한
생각과 결혼되기를 바란다는 것,주님의 현존 속에서 그분과 함께 잔치에 참석해 보라는 것,그래서 자신
속의 모든 악과 거짓,죄악된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어린 아이 같은 순진과 단순함을 지니라는 것, 그러므로
해서 영적 인격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라 앉으라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3,4).
360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29
핑계들
-천국 삶에 무관심-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16-24절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첫째 사람은‘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심부름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하고 말하니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61
요약
천국은 자기 인격을 천국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항상 열려져 있다. 그 이유가 천국은 어떤
장소 속에 존재하지 않고 조건(condition)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천국 품질을 사랑치 않는
자를 강요해서 천국 인격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천국을 바래지 않는 자에게는
설사 그것이 선물로 주어졌다 해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거룩한 성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악인은
성 밖에 있기를 더 좋아한다.그 이유는 그가 선한 인격 바깥쪽에 있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떤 선한 것에도 배타적인 사람은 설사 주님 자신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해도 선한 인격에로 입문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잔치
동방에서의 잔치는 걸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데,흔히 주최자의 지위나 부에 따라 잔치의 규모가 달라진다.
결혼 잔치는 종종 칠일간 계속되었다. 아마 가장 큰 잔치가 있게 되는 경우라면 왕의 취임식에 뒤이은
잔치일 것이다.그 이유는 그 나라의 남편 격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주님의 오심에서
그분은 신랑으로,교회는 신부로 표현되었던 바,거듭나는 삶은 흔히 결혼 잔치에 비유되어 왔기도 하다.
비유에서 언급하는“큰 잔치”는 꼭 저녁 만찬이랄 수 없겠지만,그 날 중 가장 중요한 때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그러나 핑계(변명)들이 주어진 정황으로 볼 때 즉 그들이 밭을 보러 간다던가, 황소를 부려 보러
간다는 핑계들을 미루어 짐작컨대 낮 동안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본문의 잔치가 저녁 만찬(supper)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옳다고 생각된다.그 이유는 저녁은 옛 교회가 기우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잔치란 심정과 지성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영적인 선과 진리로 벌어지는 마음의 잔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큰 만찬(great supper), 또는 하루 중 제일 중요한 식사란 각자를 주도하는 사랑(ruling love)과 합리적인
총명에 속한 것들에 영양을 공급하게 되는 정신적 잔치를 표현한다.한 마디로 이 만찬은“영혼의 흐름과
이성의 잔치”이다.
어떤 사람
362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큰 잔치”를 준비한 어떤 사람이란 신성한 인간,주님이시다.그분은 거룩한 말씀 속에 모든 선과 진정한
원리로 영적 잔치를 차려 놓으시어“선에 굶주린 영혼을 만족하게”해주신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포도주를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이사야 25:6). 주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운 초대에 기쁘게 응낙하는
이들을 위해서 천국 양식으로 차려 놓은 그분의 식탁을 언제나 준비해 놓고 계신다.이 잔치의 충만함,
이 잔치에 참석 한데 따른 기쁨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충만이요,기쁨일 뿐이다.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는 인간 영혼에 꼭 필요한 모든 양식이 들어 있다.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에 있는
모든 다양함은 심정과 지성을 지탱시켜 주는 양식들이다.이것이 잔치요,이 잔치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만족을 얻게 된다.”
초대
넓은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인간에게 가르치심으로 모든 인간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고
계신다. 그래서 말씀을 듣게 되는 이들은 자신이 주님에게 초대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잔치
시간이 되자,” 즉 인간이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시키어 소득을 올릴 준비가
되었을 때,주님의 종들은 그에게 와서 천국 잔치가 준비되었음을 통보한다.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초대는“그 영과 그 신부에게 어서 오라”고 말해진다.
한결같이...
그러나 비유에서 초대된 손님들은“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만 대었다.” 이 핑계는 주최자와의 어떤
동의로, 또는 그와의 불일치로 참석 못하는게 아니라 각자의 목적(purpose) 때문이었다. 목적에 이의가
없어 찬성한 것은 결과나 목적과도 일치를 이룬다.이 세상 모든 것은 원인과 똑같게 결과를 산출한다.
짐승이나 새들도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울새(robin)들은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고,
어디에 거처를 두던 같은 종류의 둥우리를 친다. 이와 같이 같은 종류의 통치하는 사랑을 가진 마음들은
그 사랑이 서로에게 보이지도 않고 알고 있지 못하다 해도 그들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야
만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63
무수한 형체로된 자아들, 그 인격의 내향적 품질 역시 무수하게 다르겠다고 생각되지만 무수한 그 성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그것들은 한결같이 선함을 적대시하고,진리에는 무관심하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이 인간의 자연적 마음에 심어졌기는 했지만 감각적 생명인 가시와 엉겅퀴들이
자라 올라 말씀을 질식시키고 열매 없게 만든다.
역사적 응용
천국과 지상 사이에 교통이 있게 유대인들 앞에는 구약성서라는 잔칫상이 펼쳐져 있었다. 따라서 말씀이라
는 빛을 가진 유대인들은 빛 가운데 걸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각종의 세상적인 것과 이기적 목적으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감각적 영혼이 즐기기 싫어하는 천국 잔치에의 참석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핑계를 대어왔다.
세 핑계
본문에서는 세 핑계만이 주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세 핑계는 타락되어 가는 사람의 일반적 상태를 특징 있게 말해
주는 것이다.각기 특별한 핑계는 세 가지 일반적인 머리 글자로 분류할 수 있다.즉 거짓 교리로 있게
된 핑계,악한 애정 속에 있는 이들의 핑계,잘못된 삶으로 인해 악과 거짓에 결합된 이들의 핑계이다.
첫 핑계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사서” “거기 가 보아야겠다”라고 핑계 대었다. 씨가 뿌려지는 밭(field)이란 진리가
뿌려지는 마음을 표현한다.따라서 마음 중에서 지적 측면을 말한다.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 속에서 선과
진리라는 큰 잔치에 초대받았다.그러나 그는 선과 진리라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그는 어떤 거짓
원리에 이미 그의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그 원리를 사서,내 것 삼겠노라고 작정하고
있던 차였다.지금 그는 그 거짓 원리에로 자기 애정을 가지고“가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더 충분하게
“보아”확실히 자기 것임을 확인하고 싶기만을 바랬다. 한마디로 그는 그것들이 자신이라고 여기기를 원했다
는 말이다. 그는 주님 말씀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 보다 거짓 원리에 더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하니
364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그는 주님의 잔치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주님께서 그분의 종들,즉 명백한 진리로 이 사람에게
자기 의무를 다하도록 말했을 때,그는 주님 말씀인 잔치를 원칙적으로는 용납하고 있었지만,자기의 이기적인
관심거리가 그의 마음을 먼저 점령했던지라,당장은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어 발을 뺀 것이다.
둘째 핑계
두 번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매매가 마무리되기 전) 부려 보러 간다고 핑계대었다. 소(ox)는
동양에서 농사일에 사용되고 있다.따라서 겨릿소들을 사기 전 그것들이 과연 잘 훈련되고,힘세고 건강한지
시험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소란 자연적 애정을 표현하는데,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애정이
주는 느낌을 가지고 활동한다.그러나 타락하는 사람의 경우,소는 악한 자연적 애정을 표현한다. 이 애정은
악의 자연적 수준에 있는 탐욕들이다.이것들은 주님의 잔치에 기꺼이 가지 않는다.
이 소들을 부릴 때 멍에를 메게 하거나 소 전부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 즉 부리는 소들이 서로
협동해서 일을 할 수 있게 겨리를 지우기도 한다.다섯 쌍이란 열 마리의 소이다.본문에서의 열이란 숫자는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타락해 가는 그들의 애정을 말한다.우리의 열 손가락,또는 열 발가락은 우리의
자연적 삶 속에 있게 되는 모든 의무들을 표현하고, 이 의무들은 우리의 모든 애정들로부터 흘러나오게
된다.정신적인 소들,이런 자연적 애정들을 증명해 보아야겠다는 것은 그것을 작동시켜 본다는 것이요,
그것들에 몰입한다는 것인 바,그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나오는지 알아보겠다는 말이다.이와
같이 우리가 자신 속의 악한 애정들에 몰입되고 말 때, 우리는 주님의 천국 잔치에 갈 수 없노라고 핑계를
대고야 만다.
셋째 핑계
세 번째의 핑계는 결혼이었다. 제일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참석 안해도 된다는 것이 세 번째 사람의
원칙이다.사실 본문 글자대로 보면,그는 핑계를 대기는커녕,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라고 대들었다. 천국적 결혼은 우리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의 정신적 결혼, 또는 우리의 거듭나는
의지와 이해성이 거듭나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하나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와 정반대 되는 결혼,즉 우리의
악한 애정과 거짓 생각의 지옥적 결혼, 또는 우리의 타락하는 의지와 이해성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65
되는 것도 있다. 이런 조건에서의 사람은 천국 잔치를 싫어하는 바, “여건이 이러이러한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겠나?”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를
더 선호하고 있다.
구실(pretext)들
지금 글자대로 볼 때 본문의 핑계들은 참석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있는 구실(명분)들이다. 땅을 산
자는 잔치에 참석하고 난 다음 날 땅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소를 샀다는 자도 잔치에 참석한 후 소를 시험해
볼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마누라를 얻었다는 사람도 그녀와의 약속을 잔치 이후로 미뤄진다 해서 그 결혼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그 이유는 그 당시의 시대 환경을 참작한다면,남성은 여성보다 발언권이나 결정권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 핑계들 모두 잔치에 참석하기를 간절히 바랜 사람이라면
하등 문제가 되는 사항들이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본문의 구실 거리들이 발생했다 해도 그 구실을 차선에
두었다면 잔치에 참석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핑계들이 당사자를 정당화시켜 주는 이유는 타락하는 인간이 선과 진리라는 천국 잔치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 세 핑계는 오늘날 자신의 영적 문제에 무관심한데 대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범주를
망라해 주고 있다. 사업이 바빠서... 재산을 불리느라고... 집안 청소나 빨래가 밀려서... 이런 등등의 세상사들의
처리가 불필요하다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등등의 핑계는 외적 문제에 정신이
쏠린 사람들의 일요일 아침을 휘저어 놓아 그 세상 일이 인생의 전부인 듯 확대되어 비쳐진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이런 모든 사항들의 근원지는 자연적인 것에 기울려는 인간 본성이지,우리의 판단에서
오는게 아니다는 것이다.한 마디로 이것들은 논리적인게 못되는 바 쉽게 반박되는 핑계들이다.그들 모두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글자에서의 교훈
글자대로 볼 때 비유는 위법 사항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밭을 사서 보러 간다는 것,소를 샀으니 부려
보아야겠다는 것,결혼한다는 것,모두가 인간을 위해 지극히 올바른 행위들이다. 그러나 글자에서의 교훈은
자연적 문제들에 마음이 빼앗기도록 허용함으로서 영적 문제를 소홀히 다룬데 대한 것이다. 사실상 시험은
366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매우 미묘한데, 그 이유는 어떤 사건이 시험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빠져 있을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과연 바깥 일들에 마음이 빠지도록 한 근원이 무엇인가이다.그것은
자아(self)인 것이다. 자아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바, 주님의 잔치에 무관심하게 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게 하기까지 만든다. 밭을 사는 비유가 성서에 또 한군데 있다 (마태복음 13:44). “감추어 놓인
보물”이 묻혀 있는 밭,보물이 있음을 안 이 사람은 진리라는 밭을 샀다. 그가 그 밭을 산 이유는 황금의
선함이라는 큰 보물이 진리라는 밭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소를 가지고 밭을 갈아 보는 방법 중에도
타락하는 삶에 빠지지 않고서도 경작이 가능할 수 있다.더구나 결혼하는데 있어서도 그러한 바,우리가
천국에서 더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선함이 진리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천국에 가까워진다.
둘째 집단이 초대됨
초대되었던 사람들이 핑계만을 통보했을 때,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어서 동네로 가서 한 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하고 명령하였다.” 이 둘째 집단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
거지 신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주인이 노했다고 서술되고 있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
서로가 반대됨을 표현하는 것이다.주님은 악인에 대해서까지도 노하시는 분이 아니다.그 이유는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대문이다. 오로지 자연적 인간이 자연적 수준으로 상상할 때 주님도 성내실 것이라고
착각할 따름에서 본문에 성냈다는 서술이 있어진 것이다. 잔치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초대된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남은 것이 있으면 주위를 맴도는 가난한 자,거지들까지 와서 잔치 음식을 다 먹어 치우는
일이 흔하다. 따라서 비유에서 명명되는 것들은 꼭 특이한 말은 아닌 것이므로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표현적인 의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졌던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거절했을 때 잔치에
입장하게 된 기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간주했던 이방인들이다.
사람들이 집들을 짓는 성읍이란 마음 안에 짓게 되는 체계적인 교리를 표현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인간 마음을 향해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내려오는 체계적인 진정한 교리를 말한다. 사람들의 통행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67
수단인 성읍(동네)의 한 길(street)과 골목(lane)이란 정신적인 방법들, 즉 마음속에 있는 크고 작거나, 또는
일반적이거나 개별적인 측면에서 있는 교리 속의 진리를 표현한다. 이 진리들은 주님의 말씀 글자 안에
존재한다.
주님의 종,신성한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 애정들을 부르고 우리의 이해성에 발표될 때,우리 속의 이런
것들은 자신들에게 먼저 관심 있는 것이 있어 주님의 잔치에 참석 않겠다고 초대장을 찢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시는 섭리 속에서 다시 종들을 보내어 우리 속의 이방인 같은 상태들, 즉 훈육은
안되어 있지만 호의적인 심정 상태들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퍼져 가고 모든 것을 구하시려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우리 기억 속 어느 한
귀퉁이에 쳐 박혀 있다 해도 진리인 주님의 종은 그 구석까지 찾아 들어가 거듭나는 삶이라는 천국 잔치에
그 마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셋째 집단
“길거리(high-way)나 울타리(hedge)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성 외곽에 있는 사람들인 바, 이들은 교회
바깥쪽에 있는 사람,또는 주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주님의 잔치에서는
이런 사람들이라도 만일 그들이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한다면 그들을 위한 방이 있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적용
이를 각 개인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리 주님은 우리 속의 통치하는 사랑과 각자를 이끄는 생각들에
진리를 보내신다.그런데 우리 속의 그 사랑들이 그분의 천국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할 때,그분께서는
이방인 같은 상태,아직 진리에 경청할 여유가 있는 마음의 구석까지 진리를 보내신다.우리가 자만심에
빠져 있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속에서 가장 좋고 귀한 것이 자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가난한
사람,불구자,소경,절름발이 같은 사람 측에 끼지 못할 것 같은 상태들,자아 찬양을 부추기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무시해 버린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들,이것들이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상태들이다.
타락하는 삶일 경우,우리는 더 나은 삶의 시작을 경멸한다.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각자의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성공되게 하시는데, 이때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바리사이파인이나 서기관들 같이 짐짓 잘난 체하며
368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목에 힘이 들어간 정신적 상태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각자가 자기 속에서 경멸해 온 것들,겸허함이나
상냥함,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상태를 불러일으키시고,주님의 진리는 우리 속의 그런 것들을 발달시키심으로
악에서의 구원을 성취하신다.
물론 각자 속의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도 거듭나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후의 통치하는
사랑은 이전의 각자 속에 있었던 통치하는 사랑과는 그 품질이 전혀 딴판이 되어 자신도, 누구도 옛것과
비교가 불가능하다.자신이 가난하다고 하여 목에 힘을 뺀 인격,자기 속의 선함은 각종 불순한 것과 뒤섞여
있어 온전한 선함이 아닌 불구자 같은 선함뿐이라고 인정하는 인격, 정신적으로 올바로 걷게 하는 수단인
순수한 진리에 무지하다는 절름발이 같은 인격,진리를 볼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소경 같은 인격,이와
같이 초라하게 여겨지는 인격들이 하늘의 도움을 기꺼이 용납하고,천국의 도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는 그것들만이 자신이 무지하고 무가치함을 알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터지도록 배부르다는 자에게
밥을 먹으라고 주는 것 같이 어렵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집을 채우도록 종들에게 명령되고 있다.
사실 이 구절에서의 억지(compel)란 말은 물리적 힘은 아닐 것이라 본다. 종 한 명이 성 외곽의 배회자나
거지 떼거리에 가서 완력을 사용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석하라고 말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라
본다.따라서 이들은 자기들의 경향성이 강요받지는 안했다.그 이유는 그들이 기꺼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참석을 주저했다고 가상해 본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자신의 무가치함 때문이었을
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석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어떤 보증뿐일 것이다.
주님은 거룩한 말씀 속에서 종과 같은 부탁하는 어조로 우리를“억지로라도”잔치에 참석하도록 하고
계시지 않을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으리라”등등의 말씀이 우리 귓전을 스치고 있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그분의 초대장을 이해성에 먼저 보내시고,후에 심정에도 보내신다.
오늘 비유는“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와도 매우 유사한 듯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비유는 각기 다른
때에 말해지는 바,동일한 비유로 착각할 필요는 없다.그 이유는 두 비유 각각은 각기 특별한 사항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69
초대에 응한 이들
본문 가운데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이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계층이었고, 초대에 응한 이들은
아주 평범한 이들이었음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게 된 이유는 그들 마음이 옛 전통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권력이나 현재의 신분 따위로 인한 체면과 관계없었기 때문이다. 진리는“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감추이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신다.”
거듭남의 영적 결혼은 선한 생활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이들만에게서 성사되는 결혼이다. 따라서 머리로
만 진리를 알뿐 그에 따른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선한 것들에 배고파하는 이들은
배부르게 되겠지만,배부르다고 하는 이들은 텅비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자아 사랑으로 채워 만족하는 이들은“내향적 만족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이며,더욱이 주님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오로지 그들은 바깥쪽 것들이 무엇인지만을
알고 그것들로 기뻐한다. 그들은 내적인 만족을 가질 수 없다” (A.E. 1162). 주님은 인간이 천국 생명을
받고자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핑계와 이유
이제, 우리는 핑계(excuse)와 이유(reason)를 조심스럽게 구별지어 보아야 한다.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데 대해서는 적절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상태 쪽에 해당되므로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핑계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어서 흥미의 결핍을 보여준다.
인간 마음을 미리 채우고 있는 상태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얼마나 무관심하게 하는지 모른다.
새교회의 가르침이 그런 마음에 접근하게 될 때 우리 모두 무관심이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의
경우,그들 마음은 감각적인 바램과 계획들로 마음을 꽉 메우고 있다.그래서 그들은 어떤 영적인 것에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상들,편견, 자기 견해만이 똑바르다고 은근히 주장하는
자만심,또는 탐욕의 원형들로 마음속을 꽉 메우고 있다.따라서 진리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방을 내어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또 다른 경우,어떤 이들은 세상에서 세력을 확보한 어떤 종파의 이론에 마음을
다 홀려서 어떤 새로운 진리도 기대하지도 않고 설사 그가 새 진리를 접할 기회가 있다 해도 자기 속의
370 핑계들- 누가복음14장 16-24절
옛 것에 도로 만족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자연 과학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 영적인 것들에 관한 어떤
암시에도 경멸적이다.
위에 열거된 것들 말고도 더 많은 원인들로부터 우리는 과거 성경 시대에 있어온 함성 소리 같은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인간 마음이 주님의 것 이외의 것으로
차 있기 때문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 마음을 점령한 것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있다.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예상 못하는 통로로 오신다.
우리의 핑계들
주님이 초대하시는데 어떻게 인간이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초대 불응 불가론을 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 삶을 뒤져보자. 우리가 아는 각 진리는 주님의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고자 마음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자신이 행해야 할 것이라고 아는 것만큼 하지 못할 때,우리는 그 실패만큼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된다.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게다가 세 번씩이나 계속했다.우리는 자신이 포기하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자질구레한
일들이라 간주하는 것,즉 나쁜 버릇(vice)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런 잘못된 습관이나 성벽이
주님의 초대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핑계들임을 주지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잔치를 소홀히
해 버리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잘 키워 마음과 행동에 자리잡아 옳은 것인 냥 비쳐지는 그릇된 습관이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임에도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찾는 것은 얼마나 손쉽게 발견해 내는지 모른다.
이렇게 핑계를 대는 습관은 우리 속에서 쉽게 자라 오른다. 주님의 초대가 우리 속에 보다 더 큰 영성을
길러 주므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정작 주님의 초대가 있을 경우 생각하는 것은,주님께서는
때를 잘못 맞추신다고 결론짓는다.그 이유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계획,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때, 주님의 초대를 싫어하는 때 주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초대장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우리가 그 진리에 대꾸하는 것,고작“잠깐 실례하겠습니다”는 한마디로 그분의 정의를 거절한다.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것, 자기 편리주의라는 우리 속의 자아 사랑이나 세상 것만을 사랑함은
우리 속에서 주도권을 주님의 진리에 이양하고 싶어하는 때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자신의 느낌과 생각들의 새로운 방향을 위해“억지로라도”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 본다.
아마 자녀를 양육해야 할 부모라면 그 자녀에게 위의 사항은 자질구레한 사항들이라 생각되겠지만, 미래에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1
그것이 치유되기 힘든 악한 습관이 됨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때가 언제 오나
많은 사람들이“행운이 언제나 내게 오려나?” 하고 무척 갈망한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행운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악을 금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만이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다.좋은 때란,자신이 그런 때를 맞고 싶다면, 당장이 최적의 때인 것이다. 우리가 큰 특권을 소유했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더욱 중요한 것은 그 특전을 남용하지 않고 슬기롭게 사용하는 일이다.초대받았다는
것과 잔치에 참석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영적으로나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태가 아니다.수많은 일들이
우리로 잔치에의 참석을 방해할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지닌 인격이란 것은 영적 잔치를 위해 인간에게
아주 적합하기도 하지만,자주 그 잔치를 인간에게서 배척하게 부추키기도 한다.따라서 주님의 초대를
기쁘게 응낙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수단은 억지로라도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다. 다시
말해“만일 네가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계명을 지켜라”이다. 계명에의 불순종은 천국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초대장을 찢어 버리는 격이다.
그런고로 주님의 초대는 언제나 지금 존재한다. “너희 마음이 완악하지 않다면, 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단지 교회에 가서 무릎꿇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게 아니라, 오늘
악을 금하고 선을 행하려 노력하는데서 결실을 본다.간혹 사람들은 거액을 투자해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감정을 끓게 하는 설교,북적거리도록 좌석을 메운 교인,이런 등등의 외적 핑계에서 만족해한다. 주님께
나아 온다는 것은 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소비하며 만족하지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좋은 것을 받아먹어라.너희 영혼이 풍족하여 기뻐하리라.”
372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3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거듭남에 드는 비용-
성서 본문: 누가복음 14장 28-33절
28.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29.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30.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이다.
31.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명으로 당해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32. 만일 당해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33,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요약
자아만을 사랑함(self-love)은 큰 적이요, 악마인바, 우리는 갖가지 형태로 이 큰 적과 싸워야만 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3
자아 사랑과의 싸움을 위해 우리는 이 싸움에 드는 비용을 계산할 필요가 있고, 싸움에 임하는데 따른
준비 사항이 뭔지 알아야 하며, 그 싸움을 완전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을 헤아려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 앞에 놓인 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 위해 요구되는 사항이나 닥칠 위험과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거듭나는 작업은 의식적인 삶의 재조직을 완성하는
것이다.자신이 은근히 흠모하던 애정이나 생각,은근히 저지르고 싶은 행동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동기와 계획,새로운 습관의 정착이 거듭남의 애정 속에서 거쳐야 할 작업 단계이다.
두 개로 된 한 비유
본문을 글자대로 읽어 갈 때 두 비유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두 비유는 내향적 측면,즉 영적 관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망대에 관한
첫 부분은 해야만 하는 것,일을 해내는데 재원이 충분한지 그 여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두
번째 부분은 타인이 우리에 맞서려 하는 것들, 이 반대적인 것들을 극복해 낼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가려
보아야 한다는데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일의 시작 초로부터,인간은 자신에게 심각하게 되묻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먼저 자기를
거듭 나아가게 하는데 있어 자기를 인도할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장진하고 있는지와 진리를 행동에
옮기되 얼마나 꾸준히 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자기 심정 속의 성실도가 얼마나 되는지이다. 둘째로 자기
속의 자연적이고 유전적인 경향성과 자기 주위의 악령들이 쏘아붓는 맹폭격을 기꺼이 만나 극복해 갈
수 있는지 어림해 보는 일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거듭남에 대해 진지하게 해보려 하면 할수록
자기 속과 자기 주위의 악한 영향력 역시 더욱 거세게 기세를 몰아붙여 우리를 파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에 따라 기꺼이 살아가므로 해서 그분의 인도를 기쁘게 응낙하는
이상,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면서 인도하신다.
망대
망대(tower)에는 두 가지 용도가 있다. 즉 관찰과 보호이다. 높은 망대는 먼 거리를 볼 수 있어 적의
접근을 미리 탐지 할 수 있게 하고,견고한 망대는 공격해 오는 적을 방어하는데 한몫 하게 된다.망대는
374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내면의 진리,사물의 표면 너머로 승강된 진리,생각의 더 높은 관점을 제공해 주므로 해서 악과 거짓에서
더 크게 보호해 주는 진리를 표현한다.
내면의 진리,생각이 더 높이 올라 있는 상태,마치 파수꾼과 같은 영적 진리, 합리적 마음은 사물의
상태를 납득하고 있으므로 감각적 삶의 결과가 주는 위험을 미리 내다본다. “주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다.
의로운 자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 안전해진다.” 악이 우리를 맹습할 때, 우리는 내면의 진리, 즉 높은
관점에 있는 진리,사물의 바깥 모양 너머로 이해성을 올림으로 안전해 진다.위와 같은 진리 안에서 우리는
안전과 보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내향적 원리가 인간 삶의 각종 것을 통치하므로 우리는 피상적이고
세상적인 견해나 생각에 대한 경고를 미리 받는 격이 되어 보호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영적 원인을 이해하는
사람은 영적 원인이 구체화된 바깥쪽 현상을 납득할 수 있다.
따라서 망대는 내면의 진리를 표현한다.망대는 흔히 돌과 돌을 차곡차곡 높이 쌓아 짓는다.내면의
진리라는 정신적인 망대 역시 감각적인 것 위에 차츰 차츰 쌓여진다. 즉 영적 진리의 빛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된 주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글자적 진리라는 돌로 쌓아 올려 진다. 우리가 글자적 진리 속의 내향적
양상을 납득할 때 우리는 감각이라는 영역 너머로 글자 속의 진리를 승강시켜 정신적인 망대를 쌓을 수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우리가 삶의 본질적인 법칙을 완성된 건축물로,즉 우리 내면의 삶을 합리적으로
이해함으로서 내면을 질서 있는 체계로 완성할 때 우리의 정신적인 망대의 건축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높은 구조물로부터 우리는 감각적이라는 삶을 내려다보아 감각이 주는 위험의 접근을 미리 관찰하므로
서 설사 그것들을 만나더라도 극복이 가능해진다.
“망대를 지으려 하는”사람이란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에 관한 이해를 승강시켜 자기 내면의 진리를
체계화하여 영적 지식을 도모하면서 악에서 보호되기를 목적으로 삼는 마음을 말한다. 이런 망대를 짓겠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따져 자기가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볼 수밖에 없다.즉 그는 자기 내면의 진리의 품질을 잘 생각해 보고,자기가 내면의 진리를 잘
이해할 준비가 충분한지, 내면의 진리에서 귀결되는 대로 확실히 따를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는
말이다.
예증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있다고 하자.그런데 그는 바깥쪽 현상을 생각의 관점으로 삼고,감각의 빛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중심으로 삼으면서도,자기는 인간 삶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착각한다.이런 착각은 그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5
하여금 자기 생각을 자연적인 수준 너머로 결코 승강시키지 못하는 바, 그는 자연계의 삶 그 이상의 높은
어떤 존재에 대하여는 쉽게 부정해 버린다.이런 마음을 고집하는 한,영적 망대를 짓는 조건 속에 있는게
아니다.더구나 그 망대를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은 더욱 없다.설사 그가 감각적 국면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보겠다고 시도하는 정신적 활동이 있다 해도 영적 빛으로 본다면 망대를 지으려고 비용도 계산해 보지도
않은, 그래서 건축을 마무리 질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짓기를 시작하는 어리석은 자로 보여진다.
망대를 지음
영적인 망대,이는 영원히 서 있을 망대인 바,매우 조심스럽게, 견고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높이 지어져야만
할 것이다.진리를 배우기 시작하면 망대를 짓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배운 진리를 이해할 때 그 망대는
위쪽으로 쌓아 올려 건축된다.그리고 배우고 이해한 진리를 사랑할 때 망대는 완성되어 진다.그리고
그 망대를 사용할 때,진리를 실제 사용하되 더 높고 더 내면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 된다.내면 속의
진리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어 사랑되면,마음이 승강되어 주님과의 결합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용을 따져 봄
이제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승강시켜 영적 빛의 수준으로 높이고자 할 때, 우리는 이와 같은
작업에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가늠해야 한다. 부흥회와 같은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그럼에도 그 중의 많은 이들이 세상 삶으로 미끄러져 내려진다.
그러면 그들이 과연 진실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들은 부흥 집회 속에서 풍기는 감정적인 분위기에만 잠깐 푹 젖었을 뿐이다.그들은
전환된 마음을 유지 존속시켜 완성하는 것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에 감정적 차원의 흥미만을 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지닌 자연적 바램이 주님의 말씀에서 얻은
자기 속의 새 진리들을 핍박하게 되면 그 진리는 금방 시들어 버린다. 마치 돌밭에 뿌려진 씨와도 같이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은 탓에 그들이 기껏 작정했던 마음 상태는 시들어 버린다. 그들이 자아 사랑을
기꺼이 포기 못했다는 것, 한 마디로 거듭남은 자기들로서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고 판단되었다는
말이다.
376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사실상, 우리가 더 거듭 나아 갈 때마다 그 거듭남은 우리에게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 수준에서 더 높은 저 수준으로 거듭 나아갔다는 말은 더 큰 댓가를 영적으로 기꺼이 치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가 더 큰 자기 속의 이기심을 기꺼이 내어 던졌다는 말인 것이다. 자연적인 마음을
건설하는 것 보다 영적인 마음을 건설하는 데에는 더욱 많은 비용이 든다. 더욱이 영적 마음을 건설하는
것보다 천적 마음을 건설하는 데에는 훨씬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우리를 비웃음
이제 우리가 진리를 생각해 보고 자기의 정신적인 망대를 짓겠다고 하여 시작했는데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 사용함으로 건설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우리 속의 거짓과 악들은 우리를 비웃게 된다.이 악들은
진리를 자연적 마음으로 끌어내려 경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몰랐던 때보다 더 지독하게 빛에
반대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공격에 저항함
우리가 정신적인 망대를 지을 재료인 진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
사용함으로 망대를 짓기로 작정하였다고 한다면 더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망대를 짓는데
대해 방해하는 요소들,즉 자기 속의 악에 쉽게 기울려는 경향성,자기 주위의 악령, 지상의 삐뚤어진 인간들로
인한 우리 안팎에서 오는 공격에 잘 견딜 수 있을는지에 관한 것들이리라.
두 왕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앞의 왕은 거듭나는 마음을 통치하는 진리이고, 뒤의 왕이란 퇴보되는
마음속에 든 거짓들로 우리의 거듭나는 공사를 방해한다.
병정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7
진리의 병정“일만 명”이란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들,즉 주님에 의해 인간의 내면,즉 속마음에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들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인간은 자기 생각을 휩쓸려 하는 거짓과
대항하게 된다.만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온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그는 악과 거짓에 대항하거나
선과 진리를 위해 싸울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른 왕 또는 거짓의 병정“이만 명”이란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속한 모든 감각적 상태들을
말하고 이것들이 진리가 거듭나는 삶 속에서 전진하며 승리하지 못하게 대항해 온다. 이러한 감각적인
상태들은 영혼 속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상태보다 갑절로 나타난다. 10의 두 배인 20은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 중에서 보다 상급에 속하는 것들이지만, 오늘 본문의 숫자는 이와 정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참된 것을 파괴하려 드는 감각적 악과 거짓을 말한다.
두 왕, 즉 진리와 거짓 사이에 있게 될 싸움이란 거듭나는 마음에 꼭 있게 되는 시험의 시리즈를 말하고,
이런 시험 속에서 우리 속의 악은 보여지고 알려지게 된다. 자신 속의 악이 보여지고 알려져야 그 악을
극복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고 더불어 선 속에서 자신을 확증해 볼 기회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시험을
수단으로 마음의 내면은 열린다.
앉아서 따져 봄
두 비유 각각 속에서“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가 원리 속에 앉는 것은
그 원리에 자신의 애정을 고정시킬 때이다.그리고 비용을 계산해 보는 것,정상을 참작해서 생각하는
것은 지적 부분의 노력을 언급하는 바, 우리가 동원한 원리 위에 생각이 고정될 때이다. 행동, 생각, 애정이
가지는 정신적인 조건은 서로 구별되는데 이를 뚜렷하게 구분 지어 우리로 확실히 알게 하는 성경은 아마
시편1편이리라 생각된다.즉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는...그에게 안될 일이 무엇이랴!”
인간이 앉아서 비용을 따져 본다던가, 정상을 참작하여 궁리하는 것은 그 사람 속의 이해성과 의지가
어떤 한 가지 일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다.지성은 심정을 위해 계산하는 일을 해주고,심정은
애정을 고정시키는데 지성이 계산한 것을 참작한다. 이 과정 속에서 마음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동기와
계획,목적의 품질이 어떠한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밝혀지는 악과
거짓에 기울려는 자신의 경향성과 맞서 싸우는 만큼에서 주님과 결합을 하게 된다.
378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전투 상태
종교적 삶은 우리의 수준 낮은 본성과 꾸준한 전투를 수행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장진된
시련에 대해 미리 경고 받는다.경고 받음으로 시련에 대비키 위해 미리 무장을 갖춘다.따라서 전투를
위해 우리를 무장시켜 주는 체계적인 진리를 이해해 둘 필요가 있고, 전투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주님으로부
터 강건함을 계속 얻어야만 되는 것이다.
화평을 청함
우리의 거듭나는 일이 일관적으로 성실치 않게 되면, 우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의 세력과의 대치
상태에 비상종이 울리게 되어 실지로는 그 악을 던져 버리지 못한 채 그 악과 평화조약을 맺고야 만다.
더 강한 군대를 거느린 왕과의 싸움에 자신 없는 왕과도 같이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인 악들과 타협을
가지는 바, 진리에 대한 순종을 바깥쪽인 형식상으로만 구체화하여 안쪽 원리를 바깥쪽의 경건함, 즉 경건한
체 하는 것과 대체시키고 만다.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끝에서,“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라고 매듭지어 놓으신 것이다.주님을 따르는 길이란 이기심에
속한 옛 것 모두를 단념해야 하고 주님을 따르는 체 하는 형식적인 경건함 따위로 자기 속의 버려야 할
것을 덮어두고 그것과 평화를 체결하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비용
우리는 거듭나는데 필요한 실제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영적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인바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그 선물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우리는 무지하다.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주님의 계명은 인간
행동에 관한 바깥쪽에 속하는 법칙이다.그리고 이 법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그 법칙에는 모든
삶에 대한 원리가 안쪽에 놓여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진리는 무료이지만,반드시 배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진리를 배우고, 그 반면 자기가 여태껏 고이 간직했던 잘못된 사상을 버리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79
두 가지 노력이라는 비용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를 억제하는 행동까지 우리에게 비용으로
요구하고 있다.이 행동이야말로 아주 큰 비용에 해당된다.덕행(virtue)을 달성하는데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게 아니다. 단지 덕행에 반대되는 악덕을 즐기도록 부추기는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여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직함을 달성하려면 자기 속에 있는 부정직해도 괜찮지 않느냐라는 자연적인
경향성들을 굶김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부드러운 성질은 괴팍한 성미로 쉽게 빠지는 자신의 경향성을 억제하고
조절하되 계속 노력함으로 차츰 획득되는 것이다.
거듭남은 우리에게 자아 의지,자아 총명이라는 것을 포기하도록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우리가 의존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것이라 여겨지는 총명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가운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과 그분이 밝혀 주시는 진리의 영에 의존하는 것을 습득해야만 한다.
거듭남은 자기 공적을 내세우려는 것도 비용으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치 못하다는
것,게다가 악에 쉽게 기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배워 둘 필요가 있다.따라서 거듭남은 우리가 은근히
아끼는 나쁜 습관을 포기하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위에 열거한 포기해야 하는 것들,비용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들은 과거 그것들을 양육했던 옛 생명과 함께 죽어져야만 한다.이런 것들의 포기,거듭나기 위해
치루는 비용은 자신이 죄 속에서 구원되려는 노력과 관계없는 비 조건적이어서 완전히 처리될 수 있는
것들이다.
거듭남은 세상의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려는 우리의 사랑을 대가로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인격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세상이 말하는 표준 위로 부상할 때,우리는 세상
것에 연연하려 하는 동정심을 상실할 수 있다.그 이유는 세상은 세상 속의 악들로 운명지어진 이들,감각적
쾌락들로 어지럽게 된 이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해서 우리로 광신자가,괴팍해지게,또는 위선자가 되도록 부르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적 삶의 표면 위 높게 자신의 정신적인 망대를 세운 사람을 세상에서는 잘못 이해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자아 사랑에 기초된 세상적 계획들
모두를 반드시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계산
위와 같이 치러야 하는 대가,비용은 너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또는 얻는 것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우리가 성실 속에 있지 않다면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주님이
380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우리의 건설 공사를 지휘 감독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공사는 헛것이 된다. “주님이 집을 지으시지 않으면
집 짓는 자의 수고는 헛 것이다.” 퇴보되는 상태 속에서 미발달된 인간의 능력은 단지 동물일 따름이다.
거듭난 만큼에서 우리는 천사가 되는 것이다.따라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사탄 또는 악마가 되는 길뿐이다.
치러야 할 대가만큼 거듭남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이렇게 되물어 볼는지 모른다.거듭남은 자기 인격
속에 든 지옥에 기울려는 경향성을 한쪽에 내려놓는 실제적인 작업이다. 퇴보되는 상태에 우리가 있을
경우,우리는 자신 속의 악과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큰 손실로 여길 것이다.그러나 이 손실이라는 것을
비용으로 계산하여 처리한 뒤,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것들과의 결별로,그것들이 없으니까 더 높은
행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신 속의 악과의 결별은 열심히 자기 속의 악이 바래고 추구한 어떤
것과의 헤어짐이고,이는 마치 온 몸을 죽이려 들 듯한 질병과의 헤어짐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부분,우리의 행복에 불가결한 것인 듯 여겨질 것이다.그러나 영체로
사는 영계에서 우리는 이전의 육체를 결코 갈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없는 덕분에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자연적인 것에로 퇴보되는 삶이 없으면,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더 행복해지게
된다.사실 거듭나는데 드는 비용은 실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상적인 것이다.그 이유는 우리가 포기한다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비용이고,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작별하는 그것들은 무용지물보다 더욱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작업 비용은 그에 대한 본성과 그것을 행하는 수단을 자동으로 밝혀 준다.
아주 피상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경우,이렇게 말한다.“나는 아예 거듭나고 싶지 않아. 그 이유는
그것을 시도하면 할수록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을 더 늘어나게 할뿐이니까...” 이런 생각, 심정 상태는
비단 위의 사람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접근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뭔가 잘해 보려고 하면 이전에 전혀 느끼지도 못했던 악들이 퉁겨 오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기 전 우리는 더 많은 편안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편안감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에서 가진 거짓 안전일 것이다.
아마 소경이 구덩이를 보지 못한 관계로 마음 편하게 그쪽으로 유유히 걷는 때의 모습일 것이다. 거듭나는
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닥칠 위험을 내다보고,아마 어느 일부는 지금 겪고 있을는지 모른다.따라서 그것을
해결하거나 피할 때까지 우리는 편안해질 수 없다.
영적 시험
영적 시험은 거듭나는 사람에게만 오는 시험이다. 그 외의 것들은 영적 시험이 아닌 단지 세상적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81
흥분일 뿐이다. 영적 생명을 위해 자신 속의 악과 싸우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영적 시험을 겪는게 아니다.
만일 어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나무를 더 정정해 주셔서 더욱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신다.악인의 경우,그는 자기 마음을 바꿀 의도가 없으므로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그러나 거듭나는 사람은 그의 인격이 변화되고 있는 중인 바,그에게 오는 시련은 그의 인격을
승화시키는 수단이 되어 준다.
어떤 병자의 경우,건강을 회복시키는데 있어서 자기의 생활 습관,자기가 늘 좋아하던 음식을 바꾸어
먹어야 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고 그에겐 일종의 시련이 된다. 그러나 그 시련은 그 사람에겐 그의
건강한 육체를 위한 단련 과정인 바,매우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과거에 먹던 음식이 바뀐 결과 그의
피는 다른 상태로 개선되어 그의 건강은 회복된다.영적인 측면도 이와 비슷하다.인간이 자기 삶을 개혁할
때,그는 차츰 그의 옛 애정,생각, 행동 지침을 새 것으로 대체해 가서 새 사람이 된다. 우리가 우리 속의
악에 저항할 때만이 선이 우리에게 와질 수 있다. 영적인 선을 우리가 붙잡는 방법은 악을 금하는 생활밖에
더 있을 수 없다.한 마디로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 것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악이 관여된 어떤 것도
천국에는 가지고 갈 수 없다.악은 지옥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천국에 간다면 반드시 우리는 우리 뒤에
지옥에 속한 모든 것을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천국적 원리를 이해하여 사랑해서
생활에 응용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지로 이는 자신 속의 결점을 내려놓고 그 반대되는 장점을 획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용기를 북돋우라
이제, 위와 같은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체크한다면 자신이 영적 시험을 겪고 있는 지를 발견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용기를 북돋울 수 있다. 그 이유가 이와 같은 체크는 자신이 영적 원리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것이요,그런 고로 해서 자신이 거듭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그렇지 않다면,
자신 속의 악이 들춰내어 질리 만무이고,그 악에 저항하지도 않을 것이다.그래서 우리가 꾸준히 노력해
가노라면,시험 속에 위험이 존재하지도 않는다.주님께서 말하시는 바,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
다” (신명기 33:25)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 악과 대항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다.어떤 것도 그분이 아니면 정복할 수 없다.그분은 자비의 섭리로 인간이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간직하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 인간으로 그의 생명의 목적인 내면의 믿음과 사랑에로 들어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382 망대를 쌓고 전쟁을 치룸 - 누가복음 14장 28-33절
모든 시련에는 그 시련에 벌충(보상)되는게 존재한다. 어두움이 전혀 없을 경우, 아마 우리는 별에 관해
아는게 아무 것도 없을는지 모른다. 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모든 것은 주님의 영적 선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이 된다. “주님의 모든 길은 그분의 언약과 율례를 지키는 자에게는 자비와 진리이다.” 우리가
악을 미워하는 것을 배우면,헤어지기 힘들었던 악도 쉽게 포기된다.거듭나는 삶은 단번에 성취될 수
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니요 생명에 이르는 일생의 작업임을 비유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는 구원되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 계시록을 통해 격려하고 계신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83
31
잃었던 양 한 마리
-구원하시는 주님의 사랑-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3-7절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해매지 않겠느냐? 5.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7.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은 주시기만 하는 사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악과 죄로 잃어버린
이들을 구원해 주시려는 것이다. 그분이 오신 것은 하느님의 분노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책략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성한 인격은 분노할 수도 없고 여하튼 사랑 않는 속성은 하나도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하느님은 본질면에서나 인격 측면에서 하나이시다.구약 성서 속의 여호와와 신약성서 속의
384 잃었던 양 한 마리- 누가복음15장 3-7절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인격이시다.
그러나 두 개의 각기 다른 처방인 이스라엘 교회와 기독교회, 이는 한 분 신성한 인격에서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돌출된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신성한 품성의 세 가지 다른 국면, 한 인격
속에 있는 원리들의 삼위일체인 것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 너희의 하느님은 한 분 주이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비유는 주님의 사랑에 관한 속성 또는 그
품질에 관한 아름다운 예증이다.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
이들이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한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즉각 이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리고“그들은 나의 양이다.나는 잃었던 자들을 찾아 구해 주러 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너희들은 의사가 필요치 않지만,그들은 병든 자들이다.” 자기
공적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경멸하고 미워했는데, 특히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둔다고 해서 같은 유대인이지만 배반자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자기가 잘난 인물이라고 은근히 추켜 대는 바리사이파인들의 경우, 정의는 자기들로 버림받은 자들을
멀리하여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인격자와 연계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는 듯 여겼다.그러나 주님의 경우,
정의는 위와 같은 자들을 회개시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친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이기적인 바리사이파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하는 착각으로 들떠 있어서 정의에
관한 주님의 생각을 납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주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그분이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다는 것에 대한 증거였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는 자기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더 한층 높여 주어 한층 더 죄인들과 멀리하게 해주시고 더욱 위대해지게 해줄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렇게 추론하고 있는 그들인지라,죄인들을 사랑하시면서도 바리사이파인들이나 율법학자
들을 추켜주시지 않는 예수님이 그들을 위한 진정한 메시아일 수 없다고 평가할 정도가 아니라 협잡꾼일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에 관한 완전한 오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구약 성서 자체가 그들에게 주님의
속성을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제키엘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신다.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그런 사람이라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85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려라.
의롭지 못한 자는 그 생각을 버려라.그리고 주께로 돌아와라.그러면 그분은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니,
그분은 통째로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들: 목자
일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은 주님,신성한 목자,전 인류의 소유자, 인간 안에 든 선과 진리의 소유자를
표현하고 있다.구약 성서에서 여호와는 목자라 불리고 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신약 성서에서는 그분 스스로 칭호를 신성한 목자로 부르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와 아버지
는 하나이다.”
양
구,신약 성서 모두에서 인간은 주님의 양이라고 불리고 있다.“그분은 우리 하느님이시오, 우리는 그분의
풀밭에 있는 백성,그분의 수중에 있는 양떼들이다.” 신약 성서에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추상적으로 볼 때 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을 표현한다.넓은 의미에서 우리 마음속의 양이란 애정 속에 있는 선한 모든 원리들이다.
100
100이란10이나1000등과 같이 한 바퀴 돈 숫자인 바, 모든 것(all)을 표현한다. 양 일 백 마리란 마음
속에서 거듭나고 있는 모든 애정,또는 선한 모든 품성을 말한다.그래서 100이라는 숫자는 수를 세거나
무게를 달 때 또는 비교할 때 어떤 표준으로 흔히 사용된다. 그래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누구도 100퍼센트
유감없게 행동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도 있다.
한 마리 양을 잃음
386 잃었던 양 한 마리- 누가복음15장 3-7절
일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 양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한 품성 또는 미덕 중 한 가지를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 속의 어떤 선한 품성이 인격의 퇴보에서 고통받을 때 그 품성이 지닌 선함을 잃는
경우,또는 그 품성의 생명력이나 활동력을 잃게 되는 경우이다.다시 말해 우리가 그 품성을 우리 마음이나
인격으로부터 잃게 되는 것이다.이 잃어버림은 장차 그 품성이 할 수 있는 일,선용(use)을 우리로 잃게
만든다. 흔히 그 선한 품성에 반대되는 악에 빠져들 때 우리는 우리 속의 어떤 선한 품성을 쉽사리 잃는다.
순진(innocence)
정도를 벗어난 마음으로 인해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선한 품성이란 특별히 꼬집어 말한다면 순진이라는
원리이다.순진이란 무지의 순진인 어린아이들에게서 겉으로 발산되는 것과 같은 순진,단지 때묻은(부패)데서
자유로운 소극적인 상태만을 말하는게 아니다.영적인 순진이란 지혜로운 순진이다.이 내향적 순진은
주님을 바라보는 데에서, 자신 스스로 볼 때는 선하고 진정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100% 인정하여
주님의 원리만이 선하고 참되어서 그 원리를 삶에 적용하여 사랑하려는 그 속에 존재한다. 순진은 의지
부분에 있는 품성인 바,의지가 주님께로 열려져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존재할 수 있는 품성이다.
이 순진은 모든 선한 품성의 중심 원리이다. 그리고 이 품성은 자아 사랑이나 자아 총명과는 정 반대
되는 품성이다.이 순진은 인간이 뒤로 미끄러지면서 잃어버리게 된다.그 이유는 타락이란 정신적 삶의
국면이 퇴보되어 더 낮은 형태 안으로 가라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타락은 주님을 바라보는 상태가
점점 더 실패 쪽으로 치닫게 하여 주님이 자신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기 보다 자신 스스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다는 쪽으로 고집 부려 가기 때문이다.이렇게 인간이 타락된 이래,주님의 노력은 언제나 인간에게
잃어버린 순진을 되찾는데 있어 왔다.즉 주님을 신뢰하는 어린 아이 같은 심정 상태,자아가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의 회복에 그분의 노력은 있어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속의 선한 품성에 관해 생각하되 그 품성이 자기 것이라고 결론 맺어 주님과
그 품성 사이에 있어야 할 연결을 끊는다면,그의 미덕은 천국적 품성과 생명을 잃게 된다.그 이유는
그 선한 품성 속의 생명은 순간 순간 주님에게서 받아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속의 선한 품성을
주님의 선물로 인정할 때만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든다.이 미덕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긴다면,그는
순진이라는 품성을 잃게 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87
광야
잃어버린 양이 순진인 바,이것 없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우리 속의 모든 다른 미덕들은 거의 생명이
없는 조건,광야 속에 남겨지게 된다.순진이 없으면, 즉 주님을 인정하여 사랑하지 않고서는 모든 다른
미덕들은 신성한 목자의 현존이 없는 상태,정신적,영적 광야에 처하고야 마는 것이다.결국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게 된다.순진이 없으면 자기 속에 있다고 하는 모든 미덕들은 자기 잘난 것,자아 공적이라는
것에 오염되어 있다.그러나 주님은 순진이라는 잃어버린 양을 정신적인 우리(울타리) 속에 있도록 해주시려
노력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로 주님을 인정하여 천국 삶에 마음이 열리도록 강구하신다는 말이다.
잃은 것을 찾으려 함
목자로서의 주님은 모든 영혼 속에서 배회하는 느낌과 생각, 방황하는 모든 정신 상태들을 주목하시면서
그분의 양떼를 언제나 지켜보신다.그래서 그분은 거룩한 말씀을 내보내거나,천사들을 시켜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하도록 하시고 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도우시는 원리를 예증해 주는데 있어, 양이라는 짐승은 이야기 속의 의미를 명백히
알게 하는데 최적의 짐승이다. 그 이유는 목자의 보호를 벗어난 양은 집안에서 배회해서 집안의 짐승인
개나 말 같은 집짐승의 위험에 노출되는게 아니라 들짐승의 위험을 우리로 금방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순진이라는 원리 없이,우리 속에 있는 선물로 받은 대부분의 좋은 것들은 영적 광야에 남겨져,그의
생각과 애정들 모두 희미해지고 헤매게 되는 바,주님께 되돌아 옴,주님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원 상태로 복귀시킬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회개로 삶을 수정하는 방법만이 주님과 결합되게
우리 마음을 본래 위치로 되돌아 가게 해준다.
신성한 목자로서의 주님은 우리가 정신적인 양 한 마리,내향적 순진이라는 원리(주님을 찾는 습관,
주님을 사랑하려 애쓰는 습관)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시면,그분은 이 잃은 양을 구하러 우리 마음에 출두하신다.
출두하시는 방법에서,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마음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위대한 사실을 상기하도록 명백하고 강경한 어떤 진리를 각자 마음의 수준에 따라 보내 주신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시고,암벽 같은 비탈지고 험난한 곳까지 다 뒤져서라도 그분의 양,잃은 양을 찾으러 애쓰신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기꺼이 순종한다면,그분은 우리 속의 영적인 양,순진이라는 심정 상태를 회복시켜
388 잃었던 양 한 마리- 누가복음15장 3-7절
주실 수 있다. 사실 우리 전 생애를 망라해서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구해 주시려 강구하시고 계신다.
그분은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그 노력을 결코 중단 않으신다. 단지 우리가 기꺼이 그분의 노력에 부응하고
있다면 말이다.우리 모두는 이러한 하느님의 조력이 필요하다.그 이유가 우리는 양과 같아서 쉽게 악에
물들고 말며 제각각의 방법대로 놀아나기 때문이다.
어깨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어깨, 이를 수단으로 우리는 힘을 발휘하거나 운반해야
할 뭔가를 떨어트리지 않게 들어 올려 지지할 수 있다.그래서 어깨는 우리의 힘,에너지를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힘을 과시해 보라고 할 때, “네 어깨로 마차를 움직여 보라”고 한다. 이 어깨를 주님의 어깨로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주님은 모든 신성한 권능을 발휘하셔서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알고 그분과의 연결이 회복되게 하신다는 뜻을 암시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깨를 우리 측면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모든 정력을 잃어버린 순진을 회복하는데 쏟아서
자아 의존을 깨트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는데 정진하도록 우리가 부름 받고 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천국에서 흘러드는 생명이 재 건립된 삶과 직접 접촉되어야만 잃었던 순진은 우리 속 정신적 양떼 에
합류된다.
잃었던 순진을 되찾았을 때,주님을 완전히 인정하는 마음 상태를 회복했을 때,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품성을 재촉하여 영적 순진으로 꽉 찬 삶을 향하여 정진하게 하면서 주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더욱
인정하는 쪽으로 온 정성이 쏟아지게 한다. 한 마디로 우리 의지 속의 모든 에너지가 순진이라는 원리를
회복시켜 가는데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원리를 우리의 정신적 어깨 위에 올려놓고 정신적
고향으로 운반하면서 영영 잃었을 뻔했다가 찾은 기쁨에 듬뿍 젖어야 한다.
이 비유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할당 부분을 보다 더 진열해 놓고 있다. 구원의 역사 중 또 다른
할당 부분,인간의 부분은15장 끝 비유인 “방탕한 아들”이 제 정신을 차려 과감히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내용에서 더 뾰족이 다루어지고 있다.
기뻐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89
잃었던 양을 찾은데 대해 모든 이가 기뻐하고 있다.잃었던 때의 슬픔만큼 찾은데 대한 기쁨 역시 커진다.
거듭나는 삶을 발전시켜 가는 사람, 그는 천국적 애정과 선용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과거 당연시했던 삶으로 영적 생명의 드높은 품성을 세상욕이나 자아 찬양 속에
익사시킬뻔 했음을 더욱 의식해 간다.그래서 이렇게 외친다.“오 하느님, 깨끗한 심정으로 나를 창조시켜
주소서, 올바른 영이 내 안에 있어 새롭게 되게 하소서... 당신의 구원으로 있게 되는 기쁨 속에 저를 회복시켜
주소서, 당신의 자유로운 영으로 위를 쳐다보게 해 주소서...”
주님을 찾는 질서 있는 삶에 되돌아 온 그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에게 흘러드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자기의 영적 삶이 회복된데 대해 그는 기뻐한다.되찾은 순진의 상태,이 상태는 지혜의 순진이요, 이 순진은
그의 마음을 천국 쪽에 열리게 해서 그로 하늘과 교통이 있게 하여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그의
기도는 이러할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심판으로 나를 도우소서, 저는 잃은 양과도 같이 배반했었나이다.
당신의 종을 찾아 주소서.저는 당신의 계명을 잊지 않겠나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향해 주님은 진리를
더 명백해지게 해주신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내가 너에게 말한 이 모든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너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해주려는데 있다.”
친구와 이웃들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되찾았습니다.’”
우리의 영적 품성 속에 있는 친구와 이웃이란 선한 자연적 품성들인데, 이것들도 함께 기뻐하는 곳으로
불리워 진다. 그래서 하늘과 영적 마음이 교류되어 생산되는 기쁨에 같이 응답하며 느낄 수 있어 한 마디로
영적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에 이르는 온 마음이 다 함께 기뻐하게 된다.
죄인이 회개함을 기뻐함
“잘 들어 두어라.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은 이 비유를 해석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 이유가
죄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삶을 꾸리는 사람보다, 잔뜩 죄를 짓고 막판에 회개하는 것이 액면가 이상의 보너스가
제공되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려 드는 것은 이 구절 속의 의미나 이 구절이 표현하는
390 잃었던 양 한 마리- 누가복음15장 3-7절
힘(호소력)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될 뿐이다.본문은 주님께서 의로운 자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단지 죄인이 회개하는 것에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증
위의 구절을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본다면 보다 더 확실해지리라 본다. 만일 어떤 부모에게 자녀가
여럿 있다고 하자.그중 한 명은 연약하고,나머지는 건강하다면, 돌보아야 할 부모의 관심은 허약한 아이에게
더 쏠리는 수밖에 없고,다른 자녀들이 볼 때,부모는 비실거리는 동생을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고 반기는
듯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자식이 지닌 연약함이라는 고통이 부모의 동정심과 애정을 다른 자녀보다
더 끌어내게 한 것이다.부모의 노력으로 연약했던 아이의 건강이 회복된다면,아마 늘 건강한 다른 자녀들보다
더 기쁨을 가져다주는 듯 여겨질 것이다.
영적인 잃음
영적으로 말해서,순진을 상실함은 우리에게 큰 걱정거리를 안겨 준다.그래서 잃은 양을 찾아내 양
우리에 도로 집어넣었을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여타 미덕들로 인해 기뻐함보다 더 한층 기뻐하게
된다. 이렇게 더 기뻐하게 되는 이유는 순진이 우리 속의 모든 선함 품성에 색조를 갖게 해서 기품을 잡아
주기 때문이다. 아마 음악 측면에서 볼 때, 음질(tone)에 해당될 것이다. 순진이 없으면 우리 속의 모든
좋은 품성은 팍팍해져 광야에 있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순진이 다른 품성에 생명이라는 활력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진이 회복됨으로 인해 갖는 기쁨은 우리 속의 좋다고 여겨지는 여느 품성의 회복보다
더 한층 높은 기쁨을 실제로 느낄 수밖에 없게 해준다.
회개할 것 없음
이렇게 해서 인간의 온 마음은“회개할 것 없는”다른 미덕으로 갖는 기쁨보다 잃었던 양의 되돌아옴으로
더 많은 기쁨으로 충만 된다. “회개할 것 없음”이라는 말은 회개가 필요했음이라는 상태가 과거에 이미
있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우리 속의 속성들은 때가 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1
때마다 회개를 필요로 한다.단지 바리사이파인들이 자주 해 왔던 회개,즉 바깥으로 보기에 회개하는
모습,외적일 뿐인 정의로움은 그 어느 것도 천국에로 가지고 갈 수 없다.이런 회개함에 천국은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는 기뻐함은 천국에서, 즉 천국적 인격을 지닌 사람 사이에서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주님이 어떻게 느끼시든 인간은 불평할 수 없다.무한이신 그분은
인간 세계의 갖가지 실례나 사건 저 너머에 존재하신다. 천국은 조건(condition) 속에 있다. 그리고 천국은
인간 안에 존재한다. “하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따라서 천국의 기쁨은 내면의 기쁨, 영적인 거듭나는
애정이 향유하는 기쁨이요, 거듭나서 기쁨을 갖는 애정을 소유하려면 우리 속의 모든 품성보다 순진의
상태가 회복되는데 있다.영적 순진은 모든 천국적 품성의 내향적 기초이다.
허용
주님의 섭리가 실제 운용됨에서, 어떤 이의 경우 그는 죄 가운데 푹 빠진 뒤 자기 속의 악을 보고 그
악을 혐오하게 됨으로 인해 특별한 죄에 노출됨이 없이 생활한 평범한 사람들 보다 거듭나는 삶의 더
높은 상태에 도달되는 경우도 있다.그 이유는 평범한 생활,특별한 악에 빠지지 않고 그런 대로 삶을
꾸리는 사람이나,죄로 헝클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나,누구나 공히 자아 공적이나 자신 속에 실재하는
악에 기울려는 경향성에 무지해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들은 그 마음이 죄를 혐오하는
상태를 얻기 위해 그 죄에 관한 실제의 경험이 요구되어질 때도 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여 개혁된다면
더 높은 수준으로 거듭 날지 모른다.
위와 같은 상황이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거듭남에 필요하시다면
위의 상황을 경험토록 허용하신다.주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조건으로부터,또는 어떻게 잘 해냈는지에
있지 않고 마지막 우리 속에 남는 것,출생되는 것이 무엇이냐일 것이다.그러나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은
모든 이에게 절대 필요한 순서요, 과정이다. 악을 금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제 일 번이요,
그 다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행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작은 것부터 해
나가야 할 것이다.중요한 우리의 할당 부분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선한 목자
392 잃었던 양 한 마리- 누가복음15장 3-7절
아주 초기 기독교회, 이 교회는 그 뒤의 교회인 첫 기독교회보다 더 어린 아이 같은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잃었던 양을 집으로 데려오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의 모습 속에 큰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사랑했었다.
이들이 그러했으리라는 것은 그 당시에 관한 유물들에서도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마음에 담았던 주님의 모습, 끝이 없고 부드러운 그분의 사랑을 오늘 우리 가슴에 간직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담고 있는 속성을 음미해 보겠다고
일어설 때,우리는 그 사랑 속의 품성을 심정에 충분히 받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 주님은 우리를
악에서 빼내시어 선함으로 이끄시려고 언제나 역사 하신다. 우리의 죄들은 장사꾼의 장부같이 채권자와
채무자처럼 천국 속에 쌓여 있는게 아니다.그러나 죄란 아팠다가 건강해지는 것과 비슷할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법칙에 의거 죄에서 빠져 나오는 삶을 스스로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과거의 죄에서
스스로 헤어 나와 자신 속의 악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 다시는 악의 영향권에 말려들지 않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부드럽게 인도해 주시어 우리의 노래는 다음과 같으리라.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언제나 곧은길이요,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시편 23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3
32
잃었던 은전
-잃었던 진리의 재발견-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
8.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 볼 것이다. 9.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10.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요약
소홀하게 취급한 진리는 그 진리를 사려 깊게 사용할 때까지 실지로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 진리를
새롭게 인식하여 실제에 응용할 때 그 진리는 그 진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선과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그 선은 진리의 내적 생명인 것이다.우리가 진리와 선을 가지고 정신적 연결을 새롭게 할 때,우리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오,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도 새로워진다.이렇게 새로워진 연결과
더불어 우리는 영적 기쁨의 상태에로 들려진다.
394 잃었던 은전- 누가복음15장 8-10절
글자적 이야기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주님을 목격한 위선적인 바리사이파인과 율법학자들은 주님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백성들에게 그분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파괴시켜 보려 발버둥쳤다. 이런 그들의 악한 인격으로
인해 그들은 사회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사람들과 주님이 왜 어울리시는 지에 대한 천국적인 동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릇된 판단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악인은 선한 사람들의 동기를 거의 이해 못한다. 이기적인 바램과 계획만을 아는
이들은 타인들이 자기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동기에 의해 활동된다는 것을 조금도 보지 못한다. 도덕적
인격의 경우도 위와 같아서 보다 수준이 낮은 인격은 타인 속에 있는 순수한 동기가 보여질 때 매우 의심스러워한
다.
응답
악한 자의 비난이나 모략질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응답은 주님께서 15장 첫 문단에서 바리사이파인들에게
대답하신 것들이다.즉 그분이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잃은 것을 찾아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 신성한
사랑은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모든 죄인을 구해 주신다는 것일게다. 주님이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처럼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이 그분처럼 되도록 유도해 주시려는데 동기가 있다.
선한 사람은 자기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것을 의무로서 생각하고
기쁜 사건으로 간주한다.
연결
두 비유,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은 인간 삶의 양 측면을 보여주면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5
“잃었던 양”의 비유는 회개하는 인간의 의지 또는 심정과 관계되고 있고,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같은
인간의 지성 또는 이해성에 관계하고 있다.그러므로 첫 비유는 인간의 심정과 애정 안에 있는 선과,둘째
비유는 인간의 지성과 생각 안에 있는 진리와 관계된다.
여인, 은전(silver)
여인은 애정적인 요소들을 표현한다.금이 선을 표현하는데 비해 은은 진리를 표현한다.성경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애정)을 가진 교회는 종종 여인, 처녀, 아내들로 표현되고 있다. 은은 진리로 특징 지워지는
수준인 삶의 영적 수준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데, 이에 비해 금은 선으로 특징 지워지는 수준인 천적
수준에 있는 것을 표현한다. “나는 주 구세주, 구속자이다... 나는 동을 위해 금을, 철을 위해 은을 가져오리라.”
이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거듭남 속에 자연적인 선 대신에 내적이고 천적인 선을, 거칠고 매서운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가져다 주신다는 말이다.
은전 열 닢
비유에서의 “은전”이란 그리스의 동전인데, 각 드라크마(drachma)는 약 15닢(cent)의 가치가 있다. 이
동전은 주로 매일의 생필품을 사는데 사용된 작은 동전이다.이 동전이 열 개가 있었다.열이란 표현적
차원에서 볼 때 모든 것(all)을 나타낸다. 따라서 은전 열 닢이란 주님의 말씀에서 온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표현한다. 여인이 은전 열 닢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성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풍부히
소유하게 할 애정(말씀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 닢을 잃음
여인이 은전 한 닢을 잃었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한 진리 하나를 삶에 게을리 응용함으로 인해 진리를
잘 붙잡게 해주는 애정까지 잃었다는 것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많은 진리를 성경에서 끌어
올렸고, 그 진리들 모두 실용적 목적에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 진리들에 자기 애정을 두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그가 어떤 악한 느낌이나 거짓된 생각에 자신이 끌려들도록 허용할 때,또는 자신의 나쁜 습관으로
396 잃었던 은전- 누가복음15장 8-10절
인해 그 진리의 실용화를 게을리 하게 될 때, 정작 본인이 지녔던 어떤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정신적 눈에서
희미해지게 된다.
예증
예를 들어 한 가지 큰 진리를 거론해 보자. 영적 진리에 관한 모든 우리의 지식은 진리를 발견해 보겠다는
각자의 능력으로부터 발견되는게 아니라 주님이 진리를 밝히 알게 해주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진리를 망각했다고 가상해 보자. 이럴 경우, 우리는 은전 한 닢을 잃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듭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라면,잃었던 것으로 인한 거듭남의 손실이 발견되어 느끼기도 할 것이다.심할
경우,그 손실은 영적 재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크게 확대될 수도 있다.이런 영적 재난 속에서
자신이 주님께만 의지해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의 실제 사용을 자신 속의 느낌이나 생각이 엉뚱해서 잃게
되었음을 언젠가 실감하게 된다. 아마 우리는 교회에 있어야 할 위대한 위의 진리를 이론상으로는 믿고
있겠지만,삶이라는 자기 속에서의 실제 역사를 관조하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정신적인 손실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볼 경우, 또는 신성한
섭리 속에 있는 진리들이 실제의 문제에 부닥쳐서 우리에게 명백한 어떤 해결을 주지 못함이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라고 할 경우,당장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비유에서의 여자같이, 우리는 등불을 밝히고
잃어버린 진리를 찾아보아야 한다.샅샅이 뒤지는 과정,우리는 정신의 집을 쓸어 내되 부지런히 하여
그 진리가 우리에게 되돌아 왔음을, 그 진리가 우리에게 명백한 해결책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쓸어 내는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집
더운 지역에 있는 집들은 대체로 밖의 열과 강한 빛이 차단되도록 건축되어 있다. 이런 집들도 창문이
있긴 하지만 숫자가 적고 그나마 정문 외에는 대체로 닫혀져 있는데다가 집 자체가 낮은 형태요 돌로
짓는 경우가 많다.마루라고 해보아야 흙바닥 그대로이다.그래서 이런 집들의 내부는 상당히 어두운 형편인지라
작은 것을 분실할 경우 찾아내려면 쉽지 않게 되어 있고,찾으려면 등불을 켜야 가능하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7
등불
본문에서의 불이란 촛불이라기 보다는 등불이라고 생각된다.등은 교리를 표현하는 기구이다.속이
빈 등은 사랑이라는 기름을 채우면 진리로 총명한 빛을 발하게 된다.그리고 진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온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나의 길에 빛이옵니다.”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악 가운데 빨려 들어
그 사람의 정신적인 빛인 진리를 잃고 만다.
찾아 헤맴
잃은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든 여자란 주님의 말씀을 실어 날라주는 교회의 교리로 가려고
하는 마음,즉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주님의 말씀은 교리에 불이
켜지게 해주어 과거 진리를 우습게 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희미해지고만 중요한 어떤 진리를 다시 실감해
보려 하는 우리의 애정을 돕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주님의 섭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꾸준히 역사 하신다.이 위대한 진리를 우리는 자기 시야에서
때때로 잃어버린다.이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면서 그 진리는 우리에게 희미해지고 만다.이 위대한 진리를
잃음으로 인해 우리는 실생활에서 용기를 잃거나 불평 등등으로 가득 차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등불로서 추켜들어 주님의 말씀에로 가게 될 때 그 말씀은 우리를 비추게
되고 우리는 잃었던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되어 예전처럼 회복된다.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빛을 획득하는데,
특별히 십계명으로부터이다.우리는 도와 달라고 주님을 찾는다.우리는 교회의 교리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이 계발되고 확증도 할 수 있는 도움을 받기를 기대한다.
집안을 쓸어 냄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이 여자는 등불을 켜 들었을 뿐 아니라,잃은 은전을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집안을 쓸어 내면서 찾아 헤맸다.인간이 들어가 사는 집이란 의지를 표현해 주는데,내향적으로 인간은
자기 의지 속에 거주한다.인간의 의지 속에 그 인간을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 존재하듯, 각 인간의
인격에도 존재한다.집안을 쓸어 낸다는 것은 집안을 깨끗하게 하는 것,집안을 질서 있게 하는 것, 집안에
398 잃었던 은전- 누가복음15장 8-10절
있던 잡동사니들을 던져 내는 것 등등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등불의 도움을 얻어 정신적인 집안을 쓸어
낸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 또는 심정의 상황들을 검증해서 의지 안에 있지 않아야 할 것들을 쓸어 모아
던져 내는 것을 말한다.
자아 검증
정신적으로 쓸어 낸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 위한 자아 검증을 당연히 함축하고 있게
된다.우리가 집안을 온통 쓸어 내면,우리는 그 속에 있는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그 다음 우리는 좋은 것을 나쁜 것에서 분리시킨 뒤 나쁜 것만 치워 낸다.그래서 우리가
자기 심정을 쓸어 낼 때, 심정 속에 널려져 있는 감각적 삶이라는 먼지가 여인이 찾으려 한 은이라는 진리를
덮어 우리로 볼 수 없게 했음을 알게 된다.
쓸어 내면서 우리는 먼지 같은 오물을 보겠지만 보는 이유는 그것들을 치워 내기 위함에서이다. 이와
같이 정신 속을 청소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연적인 애정들을 두껍게 덮고 있는 세상적 욕구와 감각적
삶을 제거하기 위해 들여다봄으로서 자신을 검증하게 된다. 지성을 쓸어 내면서 우리는 그 지성이 드높은
천국 원리들을 수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 마음의 등불이 비췸으로 드러나는 악들을 제거시켜 우리는 지성들을
질서에로 환원시킨다. 자신을 검증함으로서 우리는 속에 든 애정들 하나 하나에 관심을 쏟고 느낌이라는
상태에도 일일이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된다.
원인을 발견함
이러한 자아 검증,그 결과 있어지는 깨끗하게 질서 잡힌 마음은 자기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잃었던
진리가 과거 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꽉 붙들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왜 자신이 진리를 진리답게 신뢰
못했는가에 대해,일상 생활의 느낌이나 생각,행동들 가운데서 진리를 신뢰하는데 왜 만족하지를 못했나에
대한 이유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런 발견으로 과거 정신 속의 은전을 덮어 버렸던 악들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기뻐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399
깨끗하고 질서 있는 상태로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이 느끼는 만족감을 모든 이들도 한 번쯤은 동감했었으리라
본다.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자기의 정신적 집이 깨끗하고 올바른 질서로,감각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내던지고 선하고 진정한 원리가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진 마음 상태가 가져다주는 당연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우리는 실제를 위한 진리의 확신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테스트
사실상, 교리가 가르친 그대로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 확신도가 우리 마음에 여전히
결여되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의 정신적 집을 관리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자기의 정신적 은전을 잃고 있다는 것,그래서 내향적 집을 말씀으로부터 빛을 내는 교리라는 등불의
도움으로 깨끗이 쓸어 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진리는 우리 마음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만족하게도
만들어 준다는 것,진리는 심정 속의 악을 깨끗하게 제거한다는 것,자칫하면 빠져들기 쉬운 감각적인
하찮은 것들을 진리만이 청소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은 가장 실제적인 방법에 속한다.이렇게 기도해야 하리라.
“깨끗한 심정으로 창조하시어, 올바른 영으로 새로워지게 하소서...”
근면, 끈덕짐
정신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실지로 이해성이 행동하는 것이다.본문의 여인은“부지런하게,” 그리고
잃은 은전을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찾으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지가 자신 속의 문제에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지적 탐색의 강도는 결정되어진다. 우리가 정말로 심정에서 우러나온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찾아내는 노력에서 중도 하차하지 않는다.그야말로 찾아질 때까지 끈덕지게 노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고, 찾으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온 심정을 다하여 이해성이 찾으려는 노력, 이 느낌과 생각이 행동이라는
실제 활동으로 이어질 때 그 노력은 결실을 맺는다.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열심을 쏟는다.그리고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원리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그 진리를 상실했음을
400 잃었던 은전- 누가복음15장 8-10절
느낄 때,그 진리를 지각해 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때이다.진리가 우리와 함께 여전히 남아 있으려면,
그 진리를 일상 생활에 계속 적용하는 조건에서만 가능해진다.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리,이 진리는 육체
속의 근육과도 같아서 정규적인 훈련이나 사용함 속에서 더 발달되고 더 증가된다.
진리가 파악됨
실제의 원리로서 진리가 지각되는 것은 어떤 경건함에 대한 보상으로 자동으로 주어지는게 아니다.
이는 정신적으로 준비된 상태의 결과이다.영적 삶은 그 삶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에게,그 삶을 자기
활동의 중요한 목적물로 삼는 사람에게 온다.이런 사람이 마음의 영성을 확보할 때,그 사람 주위의 바깥쪽
모든 것은 영적 삶의 주인이 아닌 종으로서 제각기 자리에 배치되어 움직이게 된다. “너희는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지리라.”
진리가 모호해짐
생활에 적용하지 않는 모든 진리는 우리에게 희미해진다. 예전에 우리가 붙잡고 있던 진리가 자신 속에
없음을 보게 된다면, 이는 우리가 그 진리를 일상 생활에 부단하게 응용하지 않았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다시 말해 그 진리가 진리이다는데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는 말이다.또는 우리가 진리를
명확히 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 진리 위에 먼지 같은 불순물이 덮이도록 방치하여 우리 삶에서 진리가
발하는 빛의 힘을 감소시켰다는 말도 된다.예를 들어보자.그런 확증이 없었는 듯 여겨질 때가 많다. 왜
그럴까? 가장 간단한 답은 우리가 신성한 섭리를 신뢰 못하여 자신의 방법만으로 삶을 해결해 보려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자기의 등불을 켜 두고 집을 쓸어 내면서 잃은 진리를 회복시킬 때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감각이라는 먼지를 털어 내면서 영적 사항에 있는 보다 높은 기운 속에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먼지로 쉽게 마음을 뒤집어씌우는 경향이 짙다.따라서 먼지를 꾸준히
정규적으로 청소해 내는 작업이 요구된다.이와 더불어 우리 애정이나 생각,행동을 고정시키려 할 때,
즉각 우리 마음을 승강시키려는 의도(억지)를 강행해 보는 습관을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안쪽
측면에 있는 사항들로부터 생각하게 되고, 겉에 드러나 잘 보이는 낌새나 외관으로 판단하지 않고 정의로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01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리하여 매일의 각종 생각들에 영적 원리가 친숙하게 접근되어 있도록 자신을
간직해 가야 한다.다짐해 둘 것은,우리의 애정이나 생각, 또는 행동 중 어느 하나라도 썩어지게 되면
제 아무리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 왔던 진리, 자신의 생명이라고 큰소리 쳤던 진리라 해도 즉각 그 진리의
생명은 사라져 우리에게 사라져 버린 진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선과 진리
15장 첫 비유에서, 목자는 남자였으나, 둘째 비유에서 은전의 소유자는 여자이다. 중심 인물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남자를 남자로 특징짓는 사랑은 선을 사랑함이고, 여자의 특징적인 사랑은 진리를 사랑함이기
때문이다.남자,남편,또는 여자,아내,처녀,과부 등등과 같은 단어들은 취급되는 주제나 예증되는 불연속적인
수준에 따라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해 준다.그러나 내면 세계에서 남자는 사랑의 형체이고,외면 세계로는
지혜의 형체인 반면,여자는 내면으로 지혜의 형체이고,외면으로는 사랑의 형체이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자연계, 바깥 세계, 외면의 수준에서 살기 때문에 남자는 지혜 또는 진리라는 지적 측면의
삶에 의해 특징 되어 구분되고,여자는 사랑 또는 선이라는 애정 측면의 삶으로 특징 되어 구분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때 여자의 총명 때문이 아니라 선함
또는 사랑 때문이다.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때,남자의 선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총명
때문이다.이렇게 되는 모습을 볼 때,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면에 속한 특성은 그 내면과 같은 것을
끌어당기고,외면은 자기 외면과 다른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친구와 이웃
우리의 영적 성질 속에 있는 친구나 이웃은 우리의 선한 자질들이다. 이 자질들이 우리와 기쁨을 나누자고
본문에서 불려지고 있다. 천국에서 오는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이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듯 응답하고
느끼고 즐기도록 부름 받는다. 아예 천사들까지도 우리가 잃었다가 다시 발견한 선하고 진정한 원리의
회복에 우리와 함께 기뻐한다.다시 말해 우리 심정이 회개하는 분위기로 꽉 찰 때,하늘의 천사들도 화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402 잃었던 은전- 누가복음15장 8-10절
천사들이 기뻐함
만일 우리가 잃은 선(잃은 양), 잃은 진리(잃은 은전)를 다시 획득하는 데에 자신의 의지를 쏟겠다고
결심한다면,우리 마음은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새로워지는 삶 속에서 행복해진다.뿐만 아니라
천국과의 연결도 새로워진 질서를 갖는다.이 갱생된 삶은 천사들이“인간이라는 자녀에 대한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라는 노래에 더 한층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는 원인도 된다.
이러므로 진실로 흠모하고,총명하게 이해해서 부지런히 실습하는 모든 선한 애정은“영원한 기쁨인
아름다운 것들”을 축복으로 받아 대를 물려 이어 갈 것이다.그 반면 일상 생활에의 응용을 상실한 모든
선한 원리, 모든 진리, 한 마디로 잃은 진리는 우주 속에 창조되어져 있는 기쁨의 충만도를 줄어들게 할
것이다.위에서 살핀 결과,우리 속에 허락된 천국 원리를 생활 속에 열심히 적용 해감을 게을리 함으로
해서, 높은 수준에서 작용되어야 하는 천국 원리를 인간의 원리 아래로 침몰되게 하면 지옥의 죽이는 권세가
더욱 자신에게 방출되도록 허락하는 결과가 되어 우리 마음과 삶에 존재해야 할 천국 원리를 더욱 더
잃게 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03
33
잃었던 아들
-주님께 되돌아 온 죄인-
성서 본문: 누가복음 15장 11-32절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 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 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404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죄를 지었습니다.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주어라.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먹고 즐기자!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밖에 나가 있던 큰 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요약
이기적 목적에 써 버린 지식,지식의 남용은 인간을 재난에 빠트린다.그러나 그가 재난의 원인을 인식하고,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에 적용하면, 신성한 영향력은 그를 질서 있는 조건에로
회복되도록 진력해 주신다. 진리나 질서 체계의 한계선을 무너트린 사람이 발견하는 최종의 것은 자기가
바꾼 주인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일 뿐이다.주님을 떠난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욕망,지옥의 사슬에 얽매인
노예로 전락되고 만다.이 때 그가 배우는 것은,자기가 탈피하려 했던 천국의 삶, 그 삶의 힘이 자신이
자초한 재난에서 구조해 준다는 것이다. 그 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 설사 그 마음이 외견상 질서가 있다
해도,그 마음은 영적 수준의 마음이 갖는 경험,또는 신성한 사랑의 품성을 음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비록 죄인이라 해도 그 사랑 속에서 영적 수준의 마음이 봉기되면, 자연적 수준의 마음이 기껏해야 도달되는
도덕적 품성보다 더 높은 영적 삶에 있는 품성도 음미할 수 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05
세 비유의 연결
두 비유가 이 비유 앞에 놓여 있다.세 비유 모두 주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있다.더불어
인간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꾸준한 노력을 알게 해주고 있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우리가
선한 어떤 애정을 잃었을 때를 다루는데, 그 슬픔은 잃은 애정을 다시 발견해서 정신 속의 양떼에 합류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중요한 진리 어떤 하나를 잃는데 대해, 그것을 잃은 이유가
진리를 가볍게 여겨 사용치 않은데 있었음을 다루고 있다. 본문의 비유는 특별하게 죄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는 것,동시에 주님께서 신속하게 그의 귀향과 협동하심을 나열해 놓고 있다.주님에게 되돌아오고자
하는 죄인의 바램이 주님 자신에 의해 격려되었듯이 세 비유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을 복되게 하시려는
신성의 적극적 활동에서 있게 되는 세 가지 다른 국면을 살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가졌는데...
본문의“어떤 사람”은 신성한 인간, 주님, 그분 자신이시다. 그래서 “두 아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인간의
두 부류를 말한다.교회는 진리를 수단으로 형성되어 있다.그러나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하나는,진리의 지식을 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이들은 형식상으로는 교회 멤버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교회의 교리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부류는,진리를 내면으로 이해하는 사람,그래서 교회의 내면적 멤버, 또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첫 부류, 즉 외적 멤버에 속한 이들은 영적 삶 즉 내면의 삶이 없는 선하고 도덕적 삶까지는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둘째 부류의 경우,어떤 이는 아주 충동적이어서 삶의 죄 가운데서 방황하기 쉽다. 이런
사람이 방황 속에서 헤어나려면 오로지 회개와 개혁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애정
측면보다 지성 측면이 더 현저하게 돌출 되어 있고 또 다른 이는 이와 반대의 측면에서 돌출 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이들은 지성과 애정이 균형을 잘 맞추고 있기도 한데,이것이 가장 완전한 인격이다.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그런데 외적일 뿐인 사람이 이 비유에서 형이고,죄를 지었으나 회개함으로
높은 품성을 지니게 된 사람이 동생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무게가 더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데 있어서
필수 조건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다시 말해 죄를 지어야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가능만 하면 죄를 짓는 생활 속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속에 든 죄에 빠지려 드는 경향성까지
406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죄를 덜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에게 더 바람직하고 더 복된 것이 된다.
본문의 배경
이 비유는 바리사이파인들,바깥쪽으로 볼 때 매우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하고,안쪽에는 비이타애와
악한 느낌들을 숨겨 놓는 바리사이파인들, 그 반면 악에 푹 빠졌었으나 이제는 회개하고 개혁되어서 거듭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이 두 부류에 대하여 한 비유로 명백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보다 감정적인 사람들이
후자에 속할 때가 흔하다.
비유 속의 동생은 아버지의 집에 함께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속박같이 느껴서 더 큰 자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을 갈망했다.그 바램의 수단으로 쾌락을 사랑하고자,그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눠 달라고
요구했다.
살아감
인간이 살아가는 것,또는 살아가는 수단이라는 것을 영적으로 볼 때,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식의 공급,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이런 지식들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재산이다.
이것 없이 인간은 실로 가난할 뿐이다.이런 재산이란 주님의 말씀,또는 교회에 있는 가르침이나 교리들이고,
이를 실생활에 응용함으로 인간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작은 아들의 요구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 마음이 없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원했고, 그것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이런 생각을 가진 작은 아들이 표현하는 정신적인 모습은,인간이 자기
속에 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이 제 소유라고 주장하여 그것이 주님과 연결을 갖고 있는데서 분리되기를,
제 소유임을 인정받기를 바래는 마음 상태이다.
주님의 도움 없이도 자신에게 필요한 선과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자신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기 위해 주님께 가야만 한다는 것은 자기 위풍 밑에 있는 수준이라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07
자처하는 사람이 위의 작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지식을 주님과의 연결에서 분리시키고 자기 스스로
그 지식은 자기 것이라고 간주해 놓는다. 이런 심정 상태는 매일의 삶이 주님의 섭리에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 즉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갖는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분가함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자기 몫을 떼어 냄으로서 분가하게 되었다. 주님이 주신 삶의 법칙에서
자신을 떼어 내겠다는 사람, 자신의 고집대로 살겠다는 사람은 분가함으로써 자기가 주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마련이다.그 이유가 인간이 진리를 받되 그 진리가 주님의 진리임을 인정치 않을 때,그는 그 진리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이럴 때 그도 역시 교리로서 진리의 어떤 인식 속으로 인도되어 질
수는 있다.그 마지막 단계,응용 단계, 훈련 단계에서 그는 자기의 우둔함을 볼 수 있게 되어 회개하고
주님을 인정하기도 한다.다시 말해 자신이 똑똑하므로 허용이 있어야만 한다.그 뒤 실패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는 자신의 허점을 자신 스스로 똑바로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그분이
인도하는 데에 기꺼이 응하게 된다.이럴 경우만이,악을 행하는 자유는 지옥의 자유, 죄에 노예가 되는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는 주님의 계명을 준수함 속에 있음이 자연스럽게 가르쳐질 수 있다.
아버지를 떠남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자기 속에 든 지식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과거 주님께 의존해 왔던 그의 마음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며칠,
또는 몇 단계의 상태 변화도 거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각적 마음 상태에 내려가는 것은 금방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서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듯하여 나간 것이다.따라서 그는 이기적 욕구로 심정을 꽉 메우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베푼 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려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식의 의무감마저도 그의 생각 속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그는 자아로 똘똘 뭉쳐져,세상을 보는 것도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서만 볼뿐이다.
408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세상의 삶이 본문의“먼 고장,”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말한다.그런 마음의 상태는 오로지 감각적이고
비질서적이어서 인간 영혼의 고향, 아름다운 집,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방탕한 생활
먼 고장에 도착한 아들은 감각적 쾌락에 기울었고,그 쾌락을 얻고자“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하늘 아버지와 영적 고향에 관한 사항들은 그의 생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경고해 주려고 일어나는 자기 속의 생각들을 몰아내려고 애를 쓴다. 몰아내려는
유일한 방법이 자기 재산을 마구 뿌리는 것,자기의 정신적 재산인 지식,그 지식 속의 실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감각적 욕망과 쾌락 속에 몰입한다.
흉년
위와 같이 마구 뿌렸으니“돈이 떨어졌고 그 고장에 흉년이 온 다음,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과히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그의 진리가 그것의 근원이자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 될 때,
그가 지닌 진리는 생명력을 잃게 되어 인간 영혼을 떠받칠 수 없게 된다. 진리를 감각적으로 소비해버린
결과로,그 탕진의 결과로 기대했던 쾌락까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결국 그 마음은 쾌락 같은 즐거움까지도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참으로 그 땅,그 마음에는 흉년이 오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삶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언제까지나 자기 영혼을 떠받칠 수 있는 것은 영적 생명밖에 없다.비질서적인 세계, 감각적인
삶에는 언제나 영적 흉년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이 말씀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 수 있고,당신의 말씀 안에만 우리의 생명이 있사오니.저를 회복시키시어 살아 있게
해주소서...”
영적 진리의 빛으로 본다면,주님을 잊은 지성인,자기 스스로 총명해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
더 가련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그런 자부심에 비해 그는 순수한 인간 생명의 제일 가는 원리에 아주 무식하다.
죄인이 되는 첫 단계는 그가 세상을 자기 종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고, 그의 의기양양한 정복의
결산은 그가 세상의 노예가 된 모습이다.이 상태 즈음이면 그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다 탕진한 때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09
세상은 그 사람으로부터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빨아 낸 뒤,그를 헌신짝 버리듯 던진다.알맹이를
까먹고 해안 가에 버려져 수두룩하게 쌓인 조개 껍질 수준만이 그에게 남아 있는다.
돼지 치는데 종사함
알거지,빈 껍질만 남은 작은 아들,그럼에도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너는 생명을
받기 위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늘 아버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그분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따라서 그는 한 단계 더 밑인 외적 상태,자신을 떠받쳐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고장의
어떤 사람”에게 가서“더부살이,” 즉 거짓 원리의 얼마를 추구해 보는 삶에로 더 처지게 된다. 그 고장의
어떤 사람(citizen),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돼지 치는 것은
가장 천한 직업이었고,유대인에게 있어서도 돼지는 불결의 상징이었다.에집트인들의 경우에도 자기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유일한 사람은 돼지치는 자였을 정도였다.
돼지떼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열정,감각적 마음속에 있는 낮고 천한 욕망을 표현한다.
정신적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돼지가 표현하는 것들,비굴한 열정들을 키운다는 말이 된다.우리가 거짓
원리를 채택해서 세상 삶의 낮은 상태,부절제한 탕진 수준까지,인간 영혼의 고향인 영적 상태에서 아주
멀어질 때,양떼를 치는 대신 돼지 떼를 치게 될 때,우리는 영적으로 “먼 고장의 어떤 사람, 주인”과 결합하게
된다.돼지 떼가 육적 욕망,추잡함을 의미한다는 것은 복음서의 기사에서, 주님이 악마들을 내쫓으셨을
때, 그 악마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 줄거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젊은이에게 돼지
치는 일을 맡긴 주인이란, 그 젊은 이(작은 아들)가 자기 스스로 쾌락의 추구에 가담하고자 채택한 거짓
원리,삶에 관한 거짓된 견해,비뚤어진 삶의 목적들을 뜻한다. 주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 빠르던, 조금
늦던,조만간에 그는 돼지 치는 일에 종사하고야 만다.
쥐엄나무 열매 (껍질, 찌꺼기, husk, pod)
돼지를 치던 이 젊은이는 너무나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찌꺼기라도 먹어 보려 했다. 그가 먹으려 했던
찌꺼기(husk)는 쥐엄나무의 꼬투리(열매)였다. 이 열매들은 돼지를 치는 사료로 사용되는데, 식량이 상당히
위급해졌을 경우,가난한 자의 식량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열매이다.껍질, 또는 찌꺼기란 외적인 것, 오로지
410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바깥쪽에 속한 것,인간 영혼을 지탱시킬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것을 표현한다.그나마 “그에게 그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껍질은 인간 마음을 인간답게 해줄 양식을 공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바닥까지 내려온 작은 아들,이 젊은이는 철저한 실험을 거친 셈이고,그 결과 침통한 슬픔 속에 잠겼다.
가고 싶은 데까지 가보고,하고 싶은 대로 해보되 더 이상 해볼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른 순간,그 순간이야말로
신성한 힘이 그에게 다가올 찬스이다.그 사람 속에 남겨 두신 상태,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아껴 두신 선과 진리에 관한 상태,이 그루터기에서 뭔가가 움틀거리기 시작한다.하느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이 젊은이는 보다 나은 본성, 조금밖에 안되지만 뭔가 더 나은 본성이 그로 회개함이
있도록 부추긴다.
자신에게 돌아옴(제 정신이 듦)
“그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 과거 이 젊은이는 자기의 어리석음 속에 있었는바, 영적으로 미쳐
있었는 바,그는 자기를밖에 방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인간은 합리적일 때 그 합리성이 올바른 자신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함을 내팽개칠 때,인간은 광기가 솟아오르고,감각적 쾌락 속에 풍덩 빠진다. 이성을 되찾을
때,인간은 자신 안에 돌아온다.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버지임을 인정할 때 인간은 제정신이
든다.그 이유는 주님과 결별하고서는 어떤 인간도 인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제 정신이 들 때 인간은 과거 자기가 타락했던 만큼, 자신 밖으로 멀리 간 만큼,
미래에 더 나은 것을 위한 자신의 용적에 비례되는 만큼의 큰 슬픔과 창피함으로 적셔진다.
종 (하인)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이 젊은이는 과거를 되씹어 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아버지의 일꾼이란 보다 수준이 낮은 진리, 자연적인
진리들이다.이 진리들이 주님과 연결을 맺고 있는 이상,그 진리도 인간을 선한 생활로, 행복에로 인도해
준다. 주님을 섬기는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은 각자 용적에 따라 충분한 양식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주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자가 행복하다.” 세상의 감각적 삶이라는 돼지를 치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영적으로 배고파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만인을 위해 영적 양식이 풍부함을 늘 일깨워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11
주시려는 것,이것이 주님의 자비이다.이 젊은이가 집을 떠나기 전 위의 사항을 알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대체로“자기가 강건해진 것은 하느님 덕분이 아니라, 자기 재물, 지식이 풍부해서라고,
자기의 섬뜩한 성질이 자기를 강하게 했다”고 뽐내는 게 인간 아니던가?
배고픔
그런 인간이 이제 확실히 쥔 것은 인간 영혼은 세상이 공급할 수 없는 양식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고, 그분께 인도 받기를 거절한 자의 종착점은 악마에 노예가 되어 있는 신세뿐임을
확실히 발견한다.돼지 떼의 양식,헛것을 열망하는 수준, 낮고 낮아 더 낮아 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자기,천사들의 양식에 불만족을 토했던 자기를 확실히 보게 된다.주님이 인도해 주지 않아도. 세상을
쥐고 흔들겠다고 한 그는 세상 속의 고통스런 것들,악만을 확실히 보게 되고,급기야 그는 자기 주위에
찌꺼기들이 풍부하게 널려져 있어도 영적 배고픔으로 죽어 가는 자기를 본다.
이 아들은 자기가 세상에 관해,진짜 즐거움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고된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도록 아버지가 허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았다. “경험은 아주 고된 학교임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외의 방법으로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안에 어떤 영성이 남아 있다면, 그는 감각이라는
먼지로 그 영성을 오랫동안 덮어 둘 수는 없다. 돼지 떼나 먹어야 할 껍질 가지고 자신 속의 더 고상한
바램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아주 비굴한 삶,잘못 불러들인 쾌락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불멸의 영혼을
위한 먹이는 없는 바,영적 기근으로 멸해지고 만다.이런 상황에서 설사 그 사람이 지옥의 불로 자신을
덥게 해보려 발버둥쳐도,감각 속의 어떤 것도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바,그의 안쪽에 있는 인간다움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다.
신성한 인도
인간이 재난을 자초했어도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면서, 기회만 되면, 가능한 한 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시려 하신다.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에 숨어 잠적해 버린 어떤 진리 또는 어린 시절에 품었던
어떤 애정 중에 남아 있는 것들, 육의 욕망이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어떤 고상한 허덕거림을 시발점으로
삼으신다.이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일을 시작하신다.이 사랑은 돼지 같은 인간이 그의 껍데기 수준에서
412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단번에 탈피되도록 보채시지 않는다.그 대신 가능한 시기에 조금씩 그 사람 속에 더 높은 기운을,더
고상한 배고픔을 일으키시어 창조하신다.이 창조가 작동을 시작할 때,인간은 돼지 떼들이 구역질이 나게
싫어진다.그래서 자신의 의지로,기꺼이 그는 돼지 떼를 떠난다. 그러면서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하고
중얼거린다.
이 비참한 사람,과거 감각적일 뿐인 이스라엘 후손들 같이,애당초 잘 선택했더라면 덜 고생길로 접어들어
축복의 고향에 당도했겠지만, 이젠 먼길, 우회해서 가야 하는 길을 따라 그의 고향으로 인도된다. 인간
생명에는 보다 더 심오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시절의 자연적인 마음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또는 인간다움 속의 진정한 생명은 인격의 영성
(spirituality) 안에 존재하지, 감각적 차원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 인간 삶의 목적, 그 본성을 이해하려면
경험자나 목격자들의 충고 안에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질서 있는 마음과 삶으로 자신이 생활하는지를
소홀히 점검하여 감각적 부절제에 쉽사리 풍덩 빠진 이들은 영적으로 보면 미친 짓을 하는 것이고, 가련한
어리석음 안에 있다는 것,등등을 젊은이들이 경험하지 않고 확신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노릇이다.
미친 짓(insanity)
수용소를 메우는 많은 정신 착란증은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고자 정신적 생활이나 절제 있는 생활 규범을
이탈한 직접적 결과일 때가 많다.이런 광기 있는 삶은 방지될 수도 있었던 것들이다.특히 초기 삶, 인격이
깨끗하고 고결하면서도 단순했던 초기 삶을 수단으로 주님을 신뢰하는데 만족하는 영과 접합을 이루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당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정신 상태가 무엇 무엇이라고 우리는 똑바르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자연적 수준의 외면에 속한 것은 어떠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래서 올바른 질서 속에, 올바른
원리를 사랑하여 늘 생각하며 행동에 적용하려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발달되도록 애써 주시는
선한 영적 인격에 속한 모든 요소 요소들을 떠받쳐 줄 주님의 발판을 마련해 드리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님의 영을 받는 그릇이 되기 위해 계명을 준수하는 것, 선용을 수행하는데 행복을 느껴야 하는 우리
몫을 감당한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시어 우리의“잔은 넘칠 것이다.”
겸손 (humility)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13
이 비유가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겸손이나 순진은 이기적인 번영을 추구해 보겠노라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맛없는 메뉴들이라는 것,따라서 그는 그런 것들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결국
지속성이 강한 선을 획득하려면,그는 고통스런 방법,참아 내야만 된다는 각오로 점철되는 길을 결국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가 꺼내 보이기를 꺼려하면서,동시에 그쪽으로 기울고 싶어하는 죄들은 우리를
먼 고장에로 이동시켜 놓고 돼지 떼나 치도록 만든다.그러나 우리가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는 죄들,그
죄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만방으로 애써 중단된 죄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롯의 아내같이 되돌아보는 일이 없이 총총한 발걸음으로 먼 여행을 하게 된다.
거듭나는 우리의 체험 속에 늘 드리워 있는 것의 하나는, 우리가 어떤 사건에 접해서 뭔가 꼭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데도 우리 속 한쪽에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소리,지옥의 자만(pride)이 언제나 꿈틀댄다는
것, 그러나 결국 고쳐야만 되는 자기 속의 자만, 일찌감치 정정하려 했으면 창피함(humiliation)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제는 굴욕적인 것을 감수하고라도 해야 하는 지경에 처한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표현해 준 줄거리 곳곳에 스며 있다. 거룩한 땅을 정탐한 뒤 겁에 질려 싸우고
싶지 않았던 이들 중 전진하자고 제의한 두 명만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우리가 거듭 나아가는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반역적인 옛 기질,이기적인 것만 사랑하려는 품성, 거짓된
생각,이런 구세대의 것들은 우리가 거듭난 상태,거룩한 땅에 진입하기 전 시험이라는 광야에서 몽땅
죽어야만 되는 것들이다.
삶 속의 영성은 주님을 진실로 인정하여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를 간절히 소망하는 때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악마는 주님의 인도에 얼굴을 돌리나 천사들은 그분의 인도를 더욱 사랑하려 한다. 악마는 모든
것을 노예 상태에 놓고 있지만,천사들은 자유로움 속에 간수한다.“사악한 자에게는...평화가 없다.” 인간
영혼에는 오로지 한 개의 고향,한 분 아버지밖에 없다.그분에게서 분리되고, 그 고향을 떠나서는 진정한
어떤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우리 삶이 주님 안에 있음을 기뻐하는 수준이라면,자비의 하느님은 그
영혼을 지옥의 악마가 가로채 가게 방치하시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자.” 오늘 비유를 영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정신적으로
일어섬, 또는 보다 더 높은 목적과 계획 쪽으로 마음과 삶을 승강시켜야 함을 취급하고 있다. 비질서적
414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생활로 자신 속의 영적 실체를 낭비하고 있음을 보게 될 때, 절대 필요한 다음 단계는 더 높고 더 나은
경력을 쌓은 데로 자신을 들어올리는 일이다.이 일을 진행하려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가 상기되어진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이제 가자”라고 말하신 대화 속에도 들어 있다. 불멸의 영혼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낮고 낮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것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야 한다.
이 사람,이 죄인이 이제 보는 것은 자기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중얼거리는
말,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는 것,이제라도 내 아버지께 자신 속의 잘못된 것들, 죄들을 고백하여 신성한
자비를 무가치하게 여겼던 것이 자기 심정임을 솔직히 그분 앞에서 인정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새로워진 삶을 주시도록 그분의 사랑을 찾게 된다.
품꾼
참회하는 죄인은 무진장 겸손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의 상속자요 아들로서 복귀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그는 이렇게 말한다.“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완전히 성장한 아들은 자유 속에 있게 되나, 하인은 주인의 밑에 있다.
결국 죄인이 실감하는 것은,자기가 죄에 잘 빠지는 경향성 속에 있을 경우,진리를 사랑하여 그대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자기는 이제 누릴 수 없다는 것,오히려 자기는 품꾼,자연적 마음, 자연적 진리의
지식 속에만 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낮은 본성이 언제나 이의를 제기하려 드는 법칙에 순종해 보려면
강한 거부감만이 돌출한다는 것,등등일 것이다.따라서 이제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곳, 자신 스스로 영적 자유를 조절해 가기에는 자신은 너무 미흡한 고로 자기 처지에 알맞은 수준,
낮고 천한 신분, 품꾼의 지위만을 찾는다. 이 죄인의 고백은 그야말로 100% 자신을 드러내는 허심탄회한
고백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변명하고자 타인을 혹평해 대는 식의 태도는 갖지 않는다. 이런 등등이
그가 신실하다는 증거가 된다. 비 신실한 자는 언제나 변명을 늘어놓아 자아 사랑을 감출 은신처를 찾느라
그의 눈동자는 쉴 새가 없다. 진실한 참회자는 악과 죄들이 자기 것임을 인식하면서 공정하고도 자유롭게
자기가 죄를 범했음을 완전히 고백한다.
죄는 주님과 반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15
비록 인간이 잘못되어 있다 해도, 죄는 오로지 선하신 주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는 정도는 삐뚤어진 사람도
인정은 한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본문의 아들은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은
주님에 관한 측면에서 좀 더 세분해 볼 때,죄는 신성한 사랑에 반대되고,신성한 지혜에 의해 까벌려지며,
신성한 법칙에 의해 금하는 것들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잘못을 깊이 통회하는 다윗은,“제가
얼마나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저의 죄는 언제나 제 앞에 드리워 있습니다.저는
당신에게 죄를 범했고,당신 앞에서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허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선함도 실제로 달성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자아 사랑이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여 그를
악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자아 사랑을 내려놓게 하고 마음을 하늘로 열리게 해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해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남
인간이 비록 천국 조건에서는 멀지만,그가 그 조건에로 돌아가겠다는 노력을 시작했을 때,아버지는
멀리 있는 그를 만나는데 성급해지시고 깊은 애정으로 그를 받아 주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다”는
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관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간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인간 이해성에 운행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아버지가 측은함(compassion)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서 행동하는 것, 즉 주님은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보여주신다는 말이다.아버지가 그를 만나러“달려갔다”는 것은 주님의 역사가 인간 생명에 작용하시는
것,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그분의 계명에 의거 행해진 인간 사랑의 각각에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인간이 주님께 돌아 올 때,주님이 자기에게 달려오시는 듯 인간에게는
여겨진다. 그러나 실상,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님이 오시도록 인간이 마음 문을 얼마나
더 여느냐는 만큼에서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아버지의“키스”는 하나 됨의 상징이요, 서로 사랑한다는데 대한 상징적 행동이다. 또한 다시 만났다는
표시(token)이기도 하다. 참회자가 진리를 외적으로 잘 지켜 가는 것밖에 자기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가 주님에게서 새 생명을 받으면,그는 사랑의 자유 속에서,또는 진리를 영적으로 잘 지켜 갈 수 있게
된다.
416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하인들, 제일 좋은 옷 등등
아버지는“하인들에게 말했다.” 이는 신성한 사랑이 말씀에서 오는 삶에 관한 교훈인 실용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신성한 사랑의 목적과 계획과 교통하는 것을 뜻한다. 선은 거듭남을 수단으로 말씀을 통하여
참회자에게 도달된다. “제일 좋은 의복” 또는 예복이란 제일 가는 진리, 필수적인 진리들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들이 참회자에게 주어져서,그는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양면에서 필수로 요구되는 원리들로 옷입혀지게
된다.주님께 돌아오는 과정 중 제일 처음 있게 되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어떻게 그분이 자신을
도우시는 지에 관한 지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가락지, 신 (ring, shoes)
회개자의 손에“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도우신다는데 대한 확증이요 서약이다.
통상 반지는 뭔가를 확증하는 것에 대한 징표로 사용되어 왔다.봉인에 사용된 반지의 경우,자기 편임을
입증하는데,또는 동의를 표시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때로 매우 위급하게 특사를 파견하는 경우, 왕의
가락지를 특사에게 들려 보내 그가 지닌 메시지의 권위를 입증하기도 했다. 특히 결혼에서의 가락지는
결혼의 동의,서로 묶어졌음을 확증하는 징표로 사용되고 있다.
발을 위한 신은 노예가 맨발로 다니는데 비교해서 자유로움의 표시였다.신은 일상 생활에 관한 교리들,
또는 지침 사항들을 표현한다.그러므로 집에 오는 아들을 다시 반기며,그에게 옷을 입히는 등등은 그가
자유로운 사람,합리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명시하는 말이다.그리고 그에게 내면, 외면, 양면에서의 생활
지침을 위해 영적인 진리,자연적인 진리,모두를 주신다는 것, 그의 모든 진리들은 사랑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증해 주신다는 말이다.
살진 송아지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먹고 즐기자.” 과거 유복한 가정이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키워 두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본문의 잡는다(kill)로 사용된 단어는 제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물은 거룩하게 만듦을 뜻한다. 그래서 기쁨이 있게 되는 사건은 상태가 어떤 변화에서 수반되는 영적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17
기쁨을 표현하고,이로 말미암아 더 충만된 영적 삶이 받아들여진다.
“살진(fat)”이란 기름이 풍부한 고기인데, 기름(oil)은 따뜻하게 해줌, 선을 부드럽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다.
자연적 애정인 어미 소의 다음 세대인 송아지는 선한 자연적 애정을 수단으로 발달된 새로운 영적 세대,
즉 영적 애정을 표현한다.
살진 송아지(fatted calf)를 잔치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더 충만하게, 더 신실하게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와 교통하실 더 나은 애정에 있게 될 새로운 상태에 진입될 마음을 준비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이런 애정들은 새로운 마음 상태에 먼저 오는데,이 선한 자연적 애정은 천적 애정과 영적 애정의
씨눈을 담고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선한 자연적 애정들의 내면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로 채워 있기 때문이다.
함께 먹고 즐긴다는 것은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천국적 삶의 품질이 비슷한 사람들이 갖는 즐거운 회합,
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의 협의회 같은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해서 회개한 사람들은 각자의 신실한 정도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집주인과 더불어 잔치에서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정과 지성,그리고 삶에서 천국적 기쁨을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하늘 아버지,주님에게 되돌아옴은 회개한 영혼으로 주님과 하나 되고, 더불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도 하나를 이루는 축복을 향유하게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옴
기쁜 잔치에서 방탕아의 아버지는,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라고
선포한다.죄인은 선하고 진정된 것,즐거운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상태이다. 그는 그의 영적 고향,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하여도 죽어 있고 천사들의 연합에서도 탈퇴하여 죽어 있다. 그의 가족인 온 천국에 대해서도
죽어 있는 셈이다.한 마디로 그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떠나 악과 죄로 죽어 있다.그러나
그가 회개 속에 개혁되어 거듭남을 진척시키면서 그는 영적 생명을 다시 살린다. 그는 천국 진리가 인도해주지
않는 관계로 죄 속에 헤매다가 잃어버린 상태이다.그러나 거듭나는 가운데 그는 발견되어 진다.그 이유는
그가 주님께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만들어짐
418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and they began to be merry.” 애정과 생각 속에 있는 것은 기뻐
뛰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마치 좋은 뉴스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일 것이다.내면에
즐거움이 충만하면 그 즐거움에 상응하는 몸짓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희망
비유가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은,비록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자포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천국
조건에 맞도록 되돌아 갈 힘이 지독하게 미약하다 해도, 무한하게 한계 없는 부드러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언제나 보살펴 잃었던 것을 찾으려 애쓰시며 항상 더 낮고 더 높은 삶을 향해 진실로 노력하는
그 노력에 적절한 원조를 계속 해주신다는 것 등등이다.
결과들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에 아들 자신의 조건도 상당히 잘
맞추어져 있었다.아들의 겸허한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생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되 마음이 거만한 상태라면 아마 그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심히 다른 양상이었을는지
모른다. 그가 아들이랍시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당당하게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제가 다시
집에 왔습니다.그런데 저는 당신이 준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저는 재산이 더 필요합니다. 저는 지치고
배고파요.그러니 빨리 나에게 먹을 것,입을 것을 가져다주시고, 되돌아 온 기념으로 살진 송아지도 잡아서
축제를 준비해 줘요...”
이런 식으로 아들이 되돌아 왔을 경우,성실한 아버지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아마 “이 녀석, 아직도
고생을 더 맛보아야겠군...”라는 훈련 과정만을 제시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의 아들, 아주 다르게
변한 아들의 심정 상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를 입증해 주었다. 죄인이 자기의 악한
처지에서 천국으로 들리게 해 달라고 억지를 쓴다면, 그의 행동, 그 말 자체가 그에게 있는 천국 삶을
받을 능력까지 닫히게 하고 만다. 그 이유는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마음과 삶의 조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19
영적인 방탕아(prodigal)
글자에 있는 의미로 볼 때,아들의 회개는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이런 글자의 이야기는 정의로움 후에 있는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방탕한 아들이란 단지 물질이라는 재산을 마구 낭비한 사람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영적으로 본 방탕한 아들이란 영적 삶을 이루겠다고 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교인, 그런데
거짓과 악 속에 빠져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 속의 사람들을 말한다.
예증
방탕아에 관한 본문의 그림은 유명한 미술가의 멋진 스케치가 아니다. 이 그림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자신 속의 이기적 열정에 몰두하는 남녀들을 꼼꼼하게 베끼듯 해 놓은 초상화이다. 미친 사람을 수용한
곳을 보자.그곳에 가면 아주 가련한 모습들,움푹 들어간 눈빛들, 그런데도 자신은 왕이고,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을 보고는 자기 노예들이라고 떠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어떻게 그가 이렇게 소리칠 수 있을까?
그가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더 낮은 수준을 탐닉함으로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여 지상적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간 젊은이들도 위의 정신병자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게다가 행복을
찾고자 해서 이기적인 삶에 빠져들고,하늘 아버지의 집에 있는 신성한 법칙의 얽매임(?)에서 풀려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위의 두 부류와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조금 빠르던, 조금 늦던, 여하튼 이 사람들도 자신이 탐욕에 노예가 되어 있고 악마의 하수꾼였음을
발견한다. 너무 늦지 않게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겸손과 회개 그리하여 개혁됨으로 아버지께
돌아간다면 복된 일이다. 마치 무덤 사이에서 나온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과 같으리라 (마가복음 5:15).
진보 단계들
방탕한 아들은 진보의 다음 여섯 단계를 통과해서 일곱 단계에 진입했다.즉 자아 의지의 상태→어리석은
행동→비참해짐→자신을 들여다봄 → 회개 → 개혁 → 평화의 단계이다. 주님 안에서 영적 쉼의 안식인
420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데는 여섯 단계가 요구된다.이것이 새 창조이다.
주님의 사랑
이 비유는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에 조롱할 건수를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면 인간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한 뒤 또는 그 반대로 세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들을 추구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세상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이 사람들의 마지막 방책,또는 도피처로 성자(saint)가 되는 쪽으로 돌아서도
괜찮지 않느냐는 조롱의 근거로 이 비유의 글자가 사용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다 해도 한계가 없는 사랑이신 주님이 위와 같은 사람들을 성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한다. 세상적인 사람에게 세상욕을 가지고 마음대로 자신의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도록 허용해
주심으로 사실상 세상욕에서 떠나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세상이 인간 영혼이 원하는 것을 결코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목격되는 것들이다. 기독교적 이타애를 높은 수준으로 결코 끌어
올려놓지 못하는 냉혹한 이기심을 경건이라는 것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성자같이 보이는 위선자들보다
개혁된 세속인이 훨씬 더 낫다.
주님의 축복이 과거 경력과 언제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외적 측면에 있는 보상이나 처벌만을
생각하는 아이들 수준의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주님의 섭리는 신앙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그러나 기억해 둘 것 중 하나는,신성한 사랑의 노력은 과거 행실 때문에 인간을 처벌만 하시는게
아니라, 과거 행동의 우둔함을 스스로 보게 하여 그 악에서 빠져 나와 구원하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님은 형사가 아니시고,위대한 외과 의사이시다.“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는 것이다.” “잃은 것을 찾아 구하시려는” 분이 주님이시다.
모든 죄는 위험하다
그러나 죄라는 경력을 쌓는 것이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모든
죄는 심히 위험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쁜 경력에서 회개가 있어졌다
해도, 이미 그는 처음의 선으로부터 더 먼 거리에 자신을 서 있게 했음으로 해서 주님께 되돌아오는데
더 고되고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라. 그래야 너희는 그 땅에서 잘 살리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21
주님의 일
예수께서는 유대 땅을 오가시며 영적,자연적 삶의 법칙을 가르치고,이 법이 천국적 행동으로 있어지는
모습들을 예증해 주셨으며,병자를 고쳐 주셨으며,악마를 내쫓아 주셨고,죽은 자를 일으키셨다.이러한
그분의 일들은 오늘날의 천국적 행동들 속에 영적으로 존재하고, 영적 삶을 위해 그분께 돌아오는 모든
영혼 위에,거듭남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도 똑같이 역사 되고 있다.그분은 각 인간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최선을 언제나 해주시고 있으시다.
큰 아들
이상 살핀 내용들,즉 죄인의 회개와 개혁,아버지의 사랑과 관대함이라는 아름다운 모든 그림이 다
그려졌음에도 비유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또 다른 측면,어둡고 찬 그림자가 아버지의 명백하고
따뜻한 햇빛의 흐름에 곁들여 있다.큰 아들은 화가 나 있었고,사랑의 잔치에 어떤 동정심도 없다.
큰 아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다. 사랑의 하모니에 갑자기 튀어나온
째지는 소리같이,왜 큰 아들은 자기 목청을 돋구었을까?그는 두 가지 특질을 소유한 듯 여겨진다. 성실하게
오랫동안 섬김,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측면은 그를 칭찬할 만한 대목일 것이다.그러나 잃었던 동생의 귀환을
반기는데는 전적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동생의 귀환에 분노와 불평을 토함으로 그는 자기 속의 시기함이나
이기적인 비이타애를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제 잘났다고 마음속으로 으쓱대며 성전을 오가던 바리사이
파인같이, 그는 자신의 선한 측면을 떠벌리면서 더 나은 삶으로 되돌아 온 사람이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참회자는 개혁된 것이다는 공식으로 생각할 이유가 큰 아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 넘치는 분위기조차도 큰 아들의 냉랭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
큰 아들은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바깥쪽 생활이 똑바른 사람,자연적 평면에서만 거듭나고 있는 사람,
422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그런데 마음과 삶 속에 영성이 없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진리를 외면에서 받아 교회의
외적 멤버에 속한 사람도 표현한다.겉보기에 생활 규범이 어긋나지 않고 이웃도 돕는 등등,선한 생활도
계속하는 그야말로 자신은“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속으로 뽐내는 사람, 그럼에도 영적 애정에 속한 내면의
품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는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그러나 이방인들을 영접하는 주님의
행동에 시기함으로 끓고 있는 사람이다.
밭에서
회개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을 시간에, 큰 아들은“밭에 나가 있었다.” 즉 그는 삶의
외적 사항들을 수행하는 것,법에 순응하는 영 속에 잠겨 있었다는 말이다.그는 외적인 일에서 쌓은 공적만을
헤아릴 뿐 아버지가 동생을 환대하는 것에는 분노했다.
대비
큰 아들은 올바른 삶을 꾸렸고,그 삶의 기록을 자랑하고,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비동정적이었다.
작은 아들은 악을 행했지만 회개하고 개혁되고,더욱이 매우 겸손해졌다.이 비교로 볼 때, 동생의 영적
상태는 형보다 더 나은 것이다.
음악과 춤
큰 아들은“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영적 애정과 자연적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집주인의 기쁨에 응답할 마음이 없었다.그는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자연적 인간의 마음이 영적 애정의 분위기에 접촉되면 그 마음은 영적 사랑의 품질이나 본성에 관해 자기의
바깥 생각에 문의한다.그래서 아는 것은,주님의 사랑은 회개하는 죄인을 잘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23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사랑에 한 푼의 동정심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시무룩해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기하는 자연적 인간의 마음은 영적 사랑이라는 내면의 분위기에 반대됨을 느끼므로
영적 사랑의 분위기에 기꺼이 합세하려 들지 않는다. 형이 동생의 과거 속에 있던 악에 분노를 터트림은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그는 동생의 과거 경력에 집착했을 뿐,현재 동생이 안전하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면 그는 빈털터리 동생의 귀환으로 남은 재산이 다시 나뉘어야
할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섰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옴
큰 아들이 분에 차 씩씩거릴 때,아버지가 달려나와 그를 달래면서 동생을 환영 하자고 타이르신다.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가 자신에게 기울어 있는 자연적 마음에 흘러들어 가능만 하면 천국의 축복인 영적
애정과 하나 되자고 타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있는 자연적 마음은 천국적 사랑의
기운에 거부감을 느낀다.
불평
자연적 마음의 불평이란 이것이다. 영적 인간은 과거 악행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기쁨의 높은 상태에
들려지는 반면,자연적 인간은 성실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즉 믿음의 새로운 상태조차도
주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인간 그 자체에 있다.자연적 인간은 마음과
삶의 새롭고 높은 상태로 들려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대답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교회의
외적 인간, 법을 신성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은 각자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님과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다시 말해 신성한 법의 순종은 절대로 죄에 연결되지 않는다.오히려 그 법을 수용하는 정도만큼
천국 속의 모든 것은 그에게 알려지고,그가 음미하고자 한다면 그의 것이 되고,그가 하고자 한다면 자기
424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삶의 원리로 사용할 수 있다.더 전진한다면,그는 자기의 거듭남을 더욱 진보되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천국 원리를 사랑하여 사용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주님께서 주신다.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이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들은 불평할 수 없다. 그 이유가 천국에 속한 것들은 모든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항상
열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선
인간이 젊은 시절부터 질서적인 삶을 영위해서 거듭나는 높은 수준을 달성하여“본래의 선”에 있을
수 있다면 가장 복된 일이다.이 일은 만인이 달성해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상향이다.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을 보고 알아서 그 악한 경향성을 미워하고 그 경향성이 꼼짝 못하게
얽어매 두어야 한다.그래서 자기 삶이 자연적 질서,뿐만 아니라 영적 질서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자연적 선은 반드시 영적 선으로 속을 채워야 한다. 잘못 행하는 일은 없어야 원칙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어떤 잘못된 생각이나 느낌까지도 미워하여 금해야 한다.이것이 행해질 때까지,그가 외적으로 올바르다
해도, 그 올바름이 그 사람으로 영적 애정을 음미하거나 경험하는 쪽으로 마음 문이 열리게 하지 못한다.
세 천국
천국은 세 개의 다른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그 이유는 거듭나는 삶의 품질,또는 종류가 아주 넓은
측면에서 자연적, 영적, 천적 수준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보다 높은 천국이 갖는 특별한 품성은 보다
낮은 천국에 있는 이들이 납득하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두 형제
생활 질서가 똑바르지만 마음이 자연적인 사람,이 사람은 거듭나고 있다 해도,그는 거듭나는 첫 단계까지만
달성한다.본문에서 이것이 큰아들,첫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 영적 마음의 상태는 거듭남의 둘째 단계인데,
본문에서 작은아들,거듭남의 발달 과정에서 새롭게 뻗은 둘째 태생으로 표현되고 있다.그래서 우리에게
보다 더 새로운 영적 조건이 오게 될 경우,그것은 그가 시험을 견디어 낸 결과로 오는 것이다.그런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25
많은 이들의 경우, 새로운 영적 조건을 갖추기 전 즉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짜 모습을 인식하고 자신을
들여다보아 과감히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에게 되돌아오기 전, 우리가 지닌 영적 실패가 별 것 아닌 듯
여겨 세상적 삶에 속한 것을 탐닉하느라 영적 실체를 쉽게 낭비해 버린다.
그렇게 낭비해 버린 인간이라 해도, 합리성과 선함이 되돌아오면 우리의 외적인 마음은 즐거워하며
기뻐 뛰어야 할 것이다.우리 각각 속에는 두 아들이 있다.형이라는 완고한 자연적 상태, 고마움을 모르는
비판적인 상태,법률같이 딱딱한 상태가 있다.그 반면 동생인 보다 애정적인 상태, 영적 마음, 악한 경향성에
투쟁하려는 자세, 그래서 자연적 생각이 도달하는 거듭남 보다 더 높은 거듭남을 달성하는 상태가 있다.
결국 이 둘은 재회하여 하나를 이룬다.악과 거짓이 우리의 애정과 생각 안에서 탐닉을 즐길 때,우리의
작은 아들은 한동안 잃어버려 죽은 듯 방치된다. 그러나 회개와 개혁이 우리를 더 높은 상태로 들어올릴
때,잃었던 것은 찾아지고 죽은 듯한 것이 다시 살아난다.
두려움 없이
이쯤에서 우리에게 오는 암시는,인간은 과거 삶,그 삶이 비록 지독한 죄인이었다 해도 걱정 속에
살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회개와 개혁이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악, 내 속에서
쫓아내야 할 악들을 상당히 쫓아낸 뒤이므로 긴급히 쫓아낼 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상업 장부의 차,대변 관계에 놓아두시는 분이 아니시다.오로지 순수한 자비 속에서 그분은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기쁘게 받고자 원한다면 천국 삶과 기쁨 모두를 제공하고 계신다.
거듭남
위대한 원리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하다.생명은 하나만이 존재하고 그 하나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이시다.
주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즉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그리고 순종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복되고 행복해진다.
이런 조건은 진실된 선한 원리,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형체를 가져 그 존재가 가능해진다.이런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기심과 죄들로 썩어질 때는 언제든지 인간은 행복의 근원이요 수단이 되는 것에서 자신을
스스로 잘라 낸다.그렇게 잘린 상태에서도 제정신이 들어 회개와 개혁을 강행한다면,그는 주님, 그리고
행복과의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만이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해주시는 일을 주님으로 하실 수 있게
426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한다.
무자비 (용서 없음)
큰 아들은 어느 정도,꽤 쓸만한 외적 질서를 유지했다.그 반면 그는 모질고 시기하는 것, 무자비한
느낌과 생각을 속으로 흠모했다. 어떤 사건이 돌출 하자마자 그는 자기 속의 위와 같은 인격 속에 든 악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그는 자신 속에 순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또한 자기는 그 순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했지만,타인의 순진이 타락했을 때 그 사람,동생을 맹렬하게 단죄했다. 따라서
큰 아들은 거듭 나아가고 있었던게 아니고,단지 도덕적 삶,껍데기, 눈으로 보기에 멀쩡한 삶만을 유지했던
것이다.사실 큰 아들의 행실이 거듭나려고만 한다면,그가 보다 신실 하려고 했다면, 훨씬 더 빨리, 더
쉽게 거듭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그는 진리를 보았고 진리로 판단했으되,진리를 동생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기 심정을 채우고 있었어야 할 이타애,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이끌어 줄 이타애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외적 상태만에 있는 큰 아들,냉정한 진리만으로 판단한 이 아들이 아버지의 관대한 사랑을
보고 판단하되,아버지는 정에 매우 약한 분이라고만 결론지은 것이다.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아버지는 어떤 약함도 없고,오히려 사랑의 영적 힘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독선 (self-righteousness)
도덕적으로, 외적으로 똑바르다는 사람이 죄인을 볼 경우 자기는 최소한 그 사람보다는 더 낫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이런 느낌을 가진 상태의 사람은 만인이 죄인이라는 것,단지
은밀해서 탐사가 안될 뿐이요,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도 역시 힘들어 진다.자기가
남보다 조금은 더 낫다고 하는 우월감은 독선이라는 쪽으로 인간을 기울게 한다. 이 독선은 인간 악 중에서
아주 미묘한 형체로서 독성이 가장 강한 악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자라고 자처한 많은 이들이 죽어 저
세계에 있는 대기소에 들어가면 자신 스스로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독선이라는 악은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도 죄인 아니냐고
상상하게끔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이 죄를 더 만들어 내려 하고 죄인들이 추방자로 대우하여 정죄하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27
대신 오히려 존경받게 한다고,그리하여 죄를 더 짓게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억지를 내뱉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세리와 창녀”를 포함한 죄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바리사이파인들과는 수준이 다른 감명을 받았다.
많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관조하여 회개한 반면,바리사이파인들은 주님을 향해,그분이 가르치신
진리, 그분이 인간에게 주신 선을 향해 심정에 있는 문을 더욱 굳게 닫았을 뿐이다.
바리사이즘(Phariseeim)
위와 같은 모습,그들의 행동 속에 있는 것들을 비유 속의 큰 아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이 아들은
잃었던 것을 찾으시고자 하는 사랑을 음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분노로 단죄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공적에 비등한 보상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동생의 죄는 마땅히 그 죄에 꼭 맞는 대가가 치러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돌출 되어 밖으로 나오면서 그는 자기 인격 속에 있어야 할 영성이 결핍되어
있음을 드러냈다.자신이 매우 올바른 인격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다면,그는 동생을 심판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작은 아들이라 해서 만일 그가 자신의 악한 경향성에 잘 저항했을 경우,그 이상의 높은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자신 속의 악을 결코 보지 못하거나, 자신 속에 악이 있음을 결코 인정
안했을 경우보다는 더 높은 영적 조건에 있게 된 것뿐이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제물은 깨어진
우리의 영혼,그러나 깨진 것을 회개하는 영혼이다.그분은 깨어진 영혼을 경멸하시지 않으신다.
역사적 적용
주님은“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의 비유로 바리사이파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잃었던 아들”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보여주셨다.
이 비유 안에는 교회가 타락되는 과정인 카인과 아벨, 즉 믿음과 이타애(faith and charity)에 관한 암시가
들어 있다.형인 카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되는데 대해 시기하였다.이 시기심이 결국 아벨을 살해하는
죄악으로 이끌려지게 했다.이와 똑같은 영이 형의 침통한 분노 속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잘못된
사람 속에서 믿음과 이타애는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인간 속의 의지와 이해성은 인간의 첫 단계에서는 위와 같이 분리되어 있다.첫 단계란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단계이다.이해성은 관리하기가 쉬운 반면,의지는 충동적이어
428 잃었던 아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서 조절하기가 어렵다.그러나 거듭남을 일단 시작하면,의지는 더 높고 더 내면적인 수준까지 달성하게
해준다.그러면서 의지와 이해성이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화해 (reconciliation)
비유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 중 하나는,아버지가 두 아들을 화해시켰는지에 관한 것이다.비유가 이런
구절을 담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본문이 의지와 이해성,또는 이타애와 믿음,혹은 외적 마음과 내적 마음
모두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교회가 타락함에서“믿음만,faithalone”을 고집하면 이타애가 파멸된다는 것이다.이 비유에서 알게 되는
것은 새교회에 의해 이타애가 회복된다는 것이다.형의 반대적인 입장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새 예루살렘이
더 높은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가는데“믿음만”이라는 교리나 종교의 외적인 모든 형체들의 반대 입장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믿음이라는 형을 설득시켜서 신실한 회개와 개혁, 그리고 거듭남 속에 있는 사랑 또는
이타애라는 동생과 화해되도록 해주실 것이다. 새교회인들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높고 거룩한 삶을 이뤄
간다면, 주님께서는 인간 믿음과 인간 사랑을 거듭남 속에 있는 영적 결혼을 통해 하나 되게 해주실 수
있다. 그러면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께로부터 하늘을 통해 지상의 사람이 사는 곳까지 내려오게 되리라.
그리고 주님은 지상의 왕이 되시고,그 날에 한 분 주님,그분의 이름은 하나로만 불리시리라. 아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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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청지기
-실행 가능한 지혜-
성서 본문: 누가복음 16장 1-12절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청지기를 불러다가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3.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4.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 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5.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6.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하고 일러 주었다.7.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진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팔십
섬이라고 적으시오’하고 일러 주었다.8.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약다.”
9.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430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11.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원리
영적 미래를 위해 일하는 선한 사람은 세상 미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것 그 이상으로 실행
측면에서 많은 지혜를 드러내야 한다.
글자적 의미
본문을 피상적으로만 볼 경우,이 비유는 부정한 수단,즉 사기치는 일을 잘하는 짓이라고 격려하는
듯 생각할 수도 있게 되어 있다.그러나 본문을 좀 더 조심스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그런
엉뚱한 생각은 가셔지고 말 것이다.이 비유는 비교해서 생각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영적인 것과 자연적
사물을 대응시켜 비교하는 상응(correspondence)에 의해서 생각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글자 측면의 의미에서,
이 비유는 자기 기회를 재빨리 포착하여 놓치지 않는 세상적인 슬기로움을 보여준 약은 사람의 경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우선 그는 자신이 매우 절박한 사정에 놓이게 됨을 발견하자,장차 직위가 해제된
후의 자기 살길을 미리 생각하고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즉각적인 결정과 기민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글자에서 보여주는 도덕성은, 영적 인간에게 임박해진 영적 위험을 피하는데도 세상적 인간이
세상 일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실행력을 발휘해서 미래의 영적 보호나 처소를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의미들
이 비유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상응에 의해 정확한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으므로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주님은 자연적 인간을 두고 말하시어 미래 삶을 위해 자기의 자연적인
재물을 잘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자연적 차원의 추론을 남겨 놓으시지만, 영적 인간을 향해서는 영적 삶의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1
합리적인 행동 지침을 위한 총명한 방향 설정을 주시고 계신다. 따라서 이 비유의 무대 배경은 시험받고
있는 상태이다.
자연적 인간이 미래 삶을 준비해 둔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을 축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의 미래 삶의 준비란 인격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 이유가 인간이 영적으로 미래를 준비한다는
말은 자신의 악을 자라지 못하도록 억제하면서 자신의 선함을 키워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본문의“어떤 부자”란 신성한 인간, 주님이시다. 이 부자라는 말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부자라는 말뿐이 아니라, 모든 선함과 진리가 그분의 것이라는 말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먼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한 마디로 그분은 선함 자체,진리 자체, 생명 자체이시라는 말이다. 넓은 측면에서 볼 때,
청지기는 주님의 영적인 부를 분배하는 교회를 말한다.좁은 측면에서 볼 경우,가장 작은 형태의 교회인
각 개인은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한 의무를 지고 있는 주님의 청지기들이다.
재물을 낭비함
주님께서는 청지기가 그분의 재물을 낭비한다는 보고를 받으셨다. 영적 재물이란 영적 삶을 위해 필요한
재물,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슬기롭게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위촉하신 영적 삶에 관한 원리들이다. 이
영적 재물은 그 재물을 소홀히 여긴 사람 즉 진리를 사용하지 않고 경건이라는 형식을 일삼아 온 사람에
의해 낭비되어 진다. 이런 사람들이 집합한 교회는 부주의한 삶을 부추기게 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바 결국 주님의 선들을 낭비하고 만다. 교회의 모든 역사를 망라해서 주님께서는 청지기 직분을 남용한데
대해 셈을 하시었는데,집합적으로는 거룩한 말씀을 통해,개인적으로는 각자 속의 양심을 통해 셈(청산)을
하시었다.
청산이 요구됨
인간이 주님께 큰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그의 양심은 동요를 일으킨다. 인간이 시험
432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자기 속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상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기를 본다. 그러면 자기 주인의 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 자기를 검증하도록
인도되어진다.인간을 유혹하는 악령은 구원받을 가능성을 이미 넘어서는 죄를 범했다는 것,한 마디로
영적 고향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 속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해 역사 하시어 그로 하여금 과감함 개혁의 필요성이 일깨워지도록 그를 인도하신다.
심판 속에서 주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모든 교회로 각자의 청지기 직분에 관해 청산하도록 부르신다.
이 때 생명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데 실패한 모든 교회가 듣는 말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다”는 정죄뿐이다.이 말은 인간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처방에 있어 온 사항이다. 그러나 열려진
말씀,영적 의미로부터 주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마지막까지 잘 참아 내는 교회가 새 예루살렘교회로
될 것임을 그분은 약속하시었다.
속으로 생각함
인간이 주님의 영적 진리를 낭비했을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양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속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이는 자신의 자연적 악한 경향성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까?
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재물을 소홀히 하면 필히 그것을 잃게 된다는 걱정이 오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땅을 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근육노동을 매일 해 오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힘든 일을 해야 할 경우 습관적으로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느낀다. 영적 측면에서 땅을 판다는 것은 더 깊은 원리를 배우기 위해 뭔가를 찾는
것,또는 연구하고 문의하는 것을 말한다.사람들이 땅을 파보고 그 땅의 성질을 검사한 뒤 뭔가를 심거나
건축하듯이,영적 인간도 말씀의 글자나 교리들 너머 있는 뭔가를 정신적으로 추구한다.이 사람은 이런
뭔가를 파 보아서 그 깊이를 가늠해 보거나,보물을 발견하고,더 나은 삶을 건설할 적절한 땅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험 속에 있는 사람은“나에게는 땅을 팔 힘이 없어”라고 외친다. 그 이유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만 가지고는 영적 삶을 획득할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다.그래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진리를 추구하려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3
주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것,만일 자신이 주님의 진리를 소홀히 여긴다면,자기는 진리를 잃고야 만다는
것, 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고는 어떤 진리도 자기에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어먹음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이는 시험 속에 있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인데,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졌었지만 남용해 버리고,소홀히 간수한 뒤에,진리를 달라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데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나 도움을 빌어먹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시험 중에 있으므로 악령이 그의 마음속에 차 있어
그로 자포자기하는 쪽으로 치닫도록 만들고 있다.
좋은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해야 할 것을 결정하고 있다. 즉 자신의 소홀함이나
남용으로 지식이라는 재물을 박탈당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의 생각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다 해도
주님은 인간을 계속 관찰하시며 그로 하여금 겸허와 통회 쪽으로 오는 것을 허용하시어 그가 삶의 더
높은 상태로 인도될 수 있게 자신을 스스로 열도록 하신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폐물에 불과함을 느끼고
미래에 있을 집을 설비하는 어떤 길을 모색한다.
따라서 정당하지 않았던 청지기의 행동도 주님의 선과 진정한 원리에 있는 영원한 정신적 고향을 설비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이 된다.
집, 등등
청지기는 빚진 사람의 집이 자기를 맞아 주기를 원했다.모든 인간의 영의 집은 그의 안쪽 마음,즉
의지 안에 있다. 시험을 겪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보고 영적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회개하여
개혁하는 쪽으로 인도되어질 때 그는 타인 속의 선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정신적 조건(직분), 다시
말해 진리를 배우고 생각만 하던 단계를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가족의 한 사람이듯 선을 사랑하는 더
434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진보된 조건에로 인도된다.위와 같은 내용은 우리가 비유의 글자를 가지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의미들이다.
진리가 인간 마음에서 통치하는 원리가 되어 있기를 중단하고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않고 가족의 한 사람이 된다.
빚진 사람을 부름
청지기는 빚진 사람들을 불렀다. 빚진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대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상인들 즉 부유한
농장에서 물품을 조달 받은 사람들,또는 경작지의 일부를 세로 빌렸던 사람들이었을는지 모른다.어찌됐던
영적으로 모든 인간은 주님께 빚진 자들이다. 자연적 인간은 우리가 주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인정하지만,영적 인간은 그 사항을 인정하기를 사랑한다.주님께 진 빚을 다 갚을 자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인정하는 행동은 100% 가능하다. 바꿔
말해서 빚을 준 사람,그분이 내리시는 명령을 지킬 수는 있다.
주님께 빚진 사람이란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기 때문이고 비유를
읽는 가운데 상상되는 빚진 사람은 상당수에 이를 것 같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두 사람만이 거론되고
있다.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영적인 빚은 두 종류,즉 의지와 이해성에 관한 빚으로 총괄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이는 애정적 삶과 지적인 삶에서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다.기름은 먹을 경우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기계에 칠 경우 미끈미끈한 특성 때문에 윤활 작용을 한다.그래서 기름은 애정에
속한 것을 표현하는데, 우리는 이를 두고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이라 부른다. 그 반면 밀은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 부르는데, 말을 바꾸어 보면 지적인 삶이 생산하는 실용적인 선들을 표현한다.
“당신이 진 빚이 얼마요?” 라는 물음이란,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이 얼마인지, 위의 두 측면의 삶에 받은
축복이 얼마만큼 인지 자기 양심에게 조회해 보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있는 선한 애정들과
진정한 생각들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빚
빚진 사람 중 한 명이 자기는 기름 백 말을 빚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은 밀 백 섬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올리브 기름과 밀은 거룩한 땅의 주요 산물이다.그래서 이것들은 영적 삶에 주요 산물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5
사랑과 지혜를 표현한다.백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즉 넓은 측면에서 충만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가득하게
많다는 것을 통칭하는 숫자인 것이다. 따라서 기름과 밀에서 진 빚의 양이 각기 백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모든 선함,실용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진리가 주님께 진 빚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문서(bill), 등등
문서를 가져다가 앉아서 빠르게 어떤 숫자를 쓴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납득할 수 있기
위해 꼼꼼한 용어로 주님에게 빚진 부채를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앉는다는 것은 서 있는 상태보다
더 안정된 품세인 바,이는 의지 상태와 관계가 있다.우리가 주님께 빚졌음을 인정하기를 바래고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심정에 그 부채액을 적어 놓게 된다.
숫자들
숫자들은 정신적 삶의 상태나 조건들을 표현한다. 100은 충만됨, 완성(full, complete)을 표현한다. 100과
대조시켜 볼 때, 50은 비록 부족하나 그 정도로도 충만하다고 인정함(sufficient)을 표현한다. 주님께 진
빗을 완전히 청산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지사로 내버려두고 선함을 새로운
경력 속에 쌓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행위는
오로지 미래에 한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빚을 인정하여 여지껏 해 왔던 악행을 중단하고 계명을 지킴으로
빚의 청산은 일부라도 가능한 것이다.우리는 기름 백 말을 지불할 수 없고,단지 오십 말만 지불이 가능하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란 지금 할 수 있는 것뿐인바,과거의 것은 속죄하고,미래를 선한 질서
속에 간직하는 일 뿐이다.
그러면 주님은 오십 말을 갚는 것,문서에 적는 것,부족하지만 충분하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과거로 되돌아가 과거 속에서 다시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진리
안에 지금 앉아서 주님께 빚졌음을 인정한다고 심정에 적은 뒤,계명을 지켜 간다면,그는 역시 자기 생명책에
부채액을 기록하는 것도 된다.그런 뒤 그 책에 의거 그는 심판되어 질 것이다.그래서 그가 새로운 경력
속에서 살아간다면,그의 삶은 옛 경력 속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된다.그리고 자기 부채액의 절반은 취소되어질
것이다.
436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어느 인간도 자기가 게을리 취급한 진리를 과거로 되돌아가 회복되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개선해서 미래를 설비해 가야 할 것이다.한 마디로 우리는 자기가 빚진 액,밀 백 섬을 모두
지불할 수 없다.그러나 미래를 이제부터라도 설비해 가고 있을 경우,설사 진리를 소홀히 하려 들거나
부정하기까지 하게 하는 시험을 당해도 견디어 낼 수 있다.그리하여 시험 속에서이든지 또는 번영 속에서이든지,
진리를 준수하여 따르면서 힘닿는데 까지 빚진 액수의 얼마라도 갚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80
2 X 40, 또는 80은 시험을 표현한다. 그 이유가 80은 40을 두 배 한 것이고, 40은 시험의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40은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숫자이다. 예를 들면, 40일간의 홍수, 이스라엘 후손들의 광야
생활 40년, 예수님께서 40일간의 단식과 시험 등등이 있다. 이렇게 해서 밀 팔십 섬을 갚는 다는 것은
시험 속에서,게다가 이중의 시험,즉 애정과 생각 측면에서 진리를 수단으로 맞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살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런 것만이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을 갚는데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과거지사에 관한 한,우리는 “주여, 당신의 종으로 심판 받지
않게 해주소서,당신이 보시기에 어느 인간이라고 의로웁다고 하실 수 야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소리내어
울며 간청 드리는 어린 아이 같은 방법밖에 없다.
청지기를 칭찬함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 본문을 생각하되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칭찬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청지기의 주인,또는 어떤
부자라는 점이다.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의 소홀함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잃게 되는 경우(case)에
한해서만 주님께서 필요하셨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정직한 청지기는 이 비유의 목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제공하지 못한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의 부정직한 것,그의 부정한 수단, 그의 죄과를 옹호하시
지는 않았다.단지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있을 장래를 예견해 보는 것,신중성, 세상적인 지혜, 신속한 해결,
추진력 등을 예증하셨을 뿐이고,더불어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즉응력,장래를 미리 준비함, 등등의 인간
특성을 열거해 주셨을 뿐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7
정책, 방책(policy)
본문에서 사용되는“약삭빠르게”라는 용어에서, 우리는 지혜라는 생각을 도덕적 수준의 선함과 연계해서는
안되리라 본다.그 용어는 단지 세상적인 지혜나 신중함,뱀의 신중함 같은 현명한 정책이나 수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특질들은 설사 그 특질이 나쁜 목적에 충당되었다 해도 그 특질 자체는 칭찬될 소질이다.근면함,
세심함, 신속함, 정확함, 예견하는 습관, 경제성, 과감히 해결해 감, 추진력, 등등은 인격 속의 특질로서
칭찬되어져야 할 소질들이다.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의 영적 품성과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응으로 생각한다 해도 위의 특질들을 넓은 측면에서의 품성과 떼어서 따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독수리가 지닌 특질인 먼 거리에서 정확한 사물을 관찰하는 기능은 영적 인간이 갖는 예리하고 광범위하게
예견하는 통찰력(vision)과 상응된다. 이런 사항들이 우리가 독수리에 관해 생각해 보는 사항일 뿐, 그
외에 먹이를 포획하는데 있어서의 독수리의 광폭한 성질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부자는 청지기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그를 칭찬한 것뿐이다.사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만 일을 잘 처리했을 뿐이다.게다가
그는 자기가 빠진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잽싼 실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기네들끼리에서 더 약음
물질 세계에 있는 동안, 세상적 인간이 영적 인간 보다 더 신중하게 미래를 설비하고 그들 차원에서만
본다면 오히려 더 정력적인 지혜를 보여 주는 사실에 제자들의 시선이 모이도록 주님께서는 배려하셨다.
즉“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빚의 자녀들 보다 더 약다(현명하다).” 세속의 자녀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마음,즉 세상적인 마음을 말한다.그리고 빛의 자녀란 영적인 빛, 천국적인 진리의
빛으로 다시 태어난 마음들이다.
인간 삶에 있어지는 모든 각 상태들은 우리 속에 있는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에 의해 임신되어
출생된다.세상적 인간은 오로지 세상적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생시킨다.그 인격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세상을 사랑함에 의해 결과가 있어진다.그래서 세상적 인간은 세상만 위해 살아가는 바,그는 세상적인
것들에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영적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보다 세상적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더 간교하고 약삭빠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이유는 영적 인간은 진정한 삶의 자리를
438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내향의 세계에 두기 때문이다.한 마디로“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창세기 3:1). 뱀으로 의미되는 감각(senses)들은 그것들 차원에서 즉 감각적 삶이나 외향의 세계에서는
가장 슬기롭다. 그러나 그 슬기롭다는 것은 오로지 그 세계에 엄격히 국한되어 할 수 있는 말일뿐이다.
예를 들면,뱀은 양이나 비둘기 보다 더 간교하다.그럼에도 밤중에는 “올빼미가 독수리보다 더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이렇게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용적인 것도 가르치시는 바, 세상적 인간이 세상적 타산을
잘 헤아리듯이 우리의 영적 타산을 잘 헤아리고 준비되어야 할 것까지 가르치시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는 뱀같이 빈틈없고, 비둘기 같이 악의가 없어야 한다” (마태복음 10:16)라고
당부하셨다.서로 서로 인연을 갖게 되는 우리의 기회,우리 삶에 주어지는 갖가지 환경 여건, 이것저것
모두를 우리는 평상시에 산출될 수 있는 이윤보다 더 많이 창출되게 하여 영적 삶에 보태야 한다. 다시
말해 교인은 자연적 사항이든,영적 사항이든,어느 면에서나 세상 속의 인간에게 있는 재치나 박동력으로부터서
도 교훈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만듦
비유를 끝맺는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 둘 것은,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이 자기 수중에 있는 문제에
대한 적극성만이 아니라,신실함까지 칭찬하셨다는 것이다.“세속의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적이 아닌 영적 삶의 친구로 만들라는 것,
세상적 슬기로움,신중함,신속함,정밀함,상식,속담,등등을 영적 삶의 친구가 되게 하여 잘 이용하라는
것이다.우리가 이 세상 자체만을 사랑하고 천국 원리들을 잊게 될 때,이 세상은 영적으로 우리의 적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 세상을 천국을 위한 훈련소로 생각하여 잘 이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준다.돈이든 정신적 재산이든,그것이 남용될 경우 그것들은 “불의(세속)의 재물”이 될 것이나, 같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영적 삶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들은 불의의 재물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친구가 되어 천국의 집에
들어가는데 우리를 도웁게 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천국 진리라는 영적 재물과 협동하여 천국을 위한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39
우리 인격을 준비하는데 한몫을 담당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함(재물이 없어질 때)
우리에게 “재물이 없어질 때 (it fails)”란 우리가 죽는 때이다. 이 때야 말로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더 이상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때이다. 더불어 이 세상에 속한 온갖 것이 인간 영혼이 갈망하는 더
높은 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을 멈출 수(실패할 수)밖에 없는 때인 것을 영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충실함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삶에 관한 어떤 원리로부터 일하기 때문이고,
원리는 그 원리의 품질을 행동 속에서 행동의 부피에 관계없이 저절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선한 자는 자기 심정 속에 있는 선한 보물로부터 선한 것을 생산한다.”
지극히 작은 일과 큰 일
“지극히 작은 일”은 영적 삶의 시작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실하다면
그 충실함은“큰 일”로 자라게 된다. 다시 말해서“지극히 작은 일”이란 자연적인 것에 관한 사항들이고,
“큰 일”은 영적 사항에 속한 것들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것에 충실한 사람은 영적인 것에도 충실해진다.
그 이유는 똑 같은 내향적 원리가 양쪽 측면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부정직한 사람은 주님에게도
부정직해진다.계명을 글자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사람은 계명을 영적으로도 지키지 못한다.“내가 너희에게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도 믿지 못하는데,만일 내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느냐?”
불충실함
440 부정한 청지기- 누가복음16장 1-12절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우리가 불충실할 때 세상도 우리에게 부정직해진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질 때 어떻게 천국의 더 높은 삶을 달성한다고 기대나 해볼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 글자에 성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세상적 눈에서 감추어져 영적 의미의
심오한 깊음 속에 놓인 영적 진리라는 진정한 재물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시겠다고 기대나 해볼 수 있을까?
우리가 진리를 소홀히 하고 남용할 때 심정과 이해성에 있는 진리는 죽어 가고 오로지 기억 속에만
남겨져 있는다.그 진리는 우리의 애정과 생각,더구나 삶을 통치하지 못한다. 그러면 비록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진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우리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그래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 주겠느냐?”
그런고로“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맡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사람의 경우, 그가 지닌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지닌 자에게 주었다. 이와 같이 사용하지 않은 진리는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성실하게 처리하지 않은 진리,그러나 그 진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오로지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자기 삶에서 사용함으로,주님과 자신이 협력함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삶 속의 일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 사는 것은 거듭나기 위해서라는
것, 주님의 종이요 친구로서 세상을 잘 부려 가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님께 빚진 것의 얼마라도 갚으려고 노력해야 한다.지극히 작다고(하찮은 듯) 여겨지는
진리라 해도 그것을 성실히 삶에 응용해 갈 때 우리는 주님을 그런 성실로 대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적 영만으로 일하지 않고 선용을 수행하기 위해 상식과 기술, 정력을 사용하여 업무를 처리해
갈 수 있다.우리는 세상을 적으로서가 아닌 친구가 되도록 사용해 갈 수 있다.그러려면 우리는 이미
안 진리를 용감하고 정력적으로,신중하고도 정밀함을 동원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자연적인 것들이 우리의
열린 영을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실감할 때, 우리는천국 진리의 더 높은 국면들을 영원히 있을 처소로
받게 되리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41
35
부자와 라자로
-세상의 부와 천국의 부-
성경 본문: 누가복음 16장 19-31절
19.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20.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21.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22.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23.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하고 애원하자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26.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오지도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27. 그래도 부자는
442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하고 대답하였다.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약
진정한 개혁은 신성한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성,그리고 삶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있어진다.
지식이라는 커다란 부유함도 그 지식 속의 진리를 삶 속에다 비축하지 않으면 거듭남과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영적 진리로 삶을 통치하고자 해서 그 진리를 바라는 성실함은 무지한 마음이라 해도 천국의 빛과
따뜻함을 접할 수 있게 된다. 바깥 세계, 눈에 보이는 것들만에 자신의 애정을 쏟고 있다면, 그 심정은
닫혀 천국에 속한 것을 음미하기는커녕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다.그 이유는 그 심정이 이 세계에서든지,
저 세계에서든지 천국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과 극
비유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닥쳐올 세계에 관하여 극도로 날카로운 대비 또는 극과
극을 보여 주고 있다. 비유의 의미를 찾는 가운데 우리는 인격의 극과 극이 발견될 것임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즉 한 인간은 부자이고,또 다른 인간은 가난하다. 그래서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었고,
거지는 누더기를 걸치고 종기 투성이의 몸이었다.한 사람은 진수성찬으로 날마다 밥상을 차려 먹는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배고픔을 덜기 위해 부수러기를 주어 먹어야 했다.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바뀌는데 따라
움직여 주는 한 무리의 종들을 거느렸고, 또 한 사람은 개의 동정심을 살뿐 인간적 보살핌에서 거리가
먼 신세에 처해 있었다. 한 사람은 그가 매장될 때 화려한 긴 행렬과 큰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어 있고,
또 한 사람의 시신은 어느 누구의 비통해 함도 없이 묘비도 없이 땅 속에 쓰레기 던져지듯 묻히게 되어
있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43
위의 두 사람이 죽었다고,극과 극의 대비는 끝난 것이 아니다.한 사람은 호화스럽게 죽어 악의 처소로
내려가 비참하게 깨어났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거칠고 냉혹한 돌 같은 인간의 냉대함을 건너 영계에
있는 천사들의 품에 안기었다.
사실 천사들은 부자나 거지, 두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준비가 되어 있기는 매 한 가지 이였지만 물질계의
좋은 것에 고착된 심정은 천사들의 초대에 응답할 어떤 이유도 느껴 보지 못했고, 천국의 복을 끌어당길
어떤 내향의 세계도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적용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은 구약 성서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소유한 부자였다.따라서 그들이 뜻하고자 했다면,그들은 영적 잔치 속에서 언제나 살 수 있게
되어 있었다.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무지한 상태인 가난한 자들이었다.이방인들 중 마음씨
고왔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다.천국적인 것을 거절하는 유대인들,
거듭나고 있는 많은 이방인들은 말씀 속에서 “선한 것으로 배고픔을 채우려는 자들과 주어진 부유함으로
텅비게 하는 자들” 이다.
표현적 의미들
추상적으로 적용해 볼 때, 이 비유는 어느 개인에 관계된다기 보다는 각 개인의 삶의 조건과 상태에
관계를 갖고 있다.전체적인 풍경은 거듭나는 각 사람의 마음이다.우리들 각자는 부자와 라자로, 즉 인격
속에 세상욕과 영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인 시험은 세상욕인 부자를 총애하고 영성인 라자로는 굶겨서
감각적인 쾌락의 휘황찬란함 속에 내적 삶은 거지 상태로 방치해 둔다.
부자
영적으로 말해서 부자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 그래서 영적 삶의 수단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신성한 진리가 들어 있는 주님의 말씀은 천국을 구성하고 있다.보다 더 뾰족하게
444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생각한다면 주님의 말씀 속에 든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 영적 빛 속에서 진리를 보는 사람은 영적으로
부자이다.
화사하고 값진 옷(purple and fine linen)
상징적으로 겉옷은 진리들,특히 선한 원리들을 옷입히고 있는 진리들을 표현한다.하느님의 말씀의
글자는 내향의 의미인 벗기워 있는 진리를 옷입혀서 자연적 인간에게 그 진리를 채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화사함(자색, purple)이란 왕권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새교회의 경우 자색은 지식들, 즉 마음 안에
알려진 다양한 종류의 원리들과 사실들,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다.자색옷(purple
garment)이란 우리가 사랑해서 행해야 하는 것들 즉 선에 관한 지식을 표현해 준다. 고운 모시옷(값진
옷, fine linen garment)이란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것들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표현한다. 그래서 마음이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부자인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그는 자색의 고운 모시옷(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호화롭게 생활함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즉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천국적 원리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을 풍부하게 가진 삶의 조건 속에 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정신 차원에서 그가 잔치를
벌인다란 자기가 아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거지
영적으로 볼 때 거지란 지식이 없는 자,삶에 필요한 것을 알려고 하는 자이다.단어 라자로란 “도움이
없음, without help”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지식 또는 진리의 도움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라자로는 주님의 말씀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측면에서
볼 때 라자로는 우리 마음 중에서 마음씨가 고우나 이방인 같이 무지한 상태, 그러나 배우려고 열심을
내는 어린 아이 같은 상태를 표현한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45
문
부잣집 대문은 걸인들에게는 좋은 장소이었는데, 그 이유는 돈 많은 이들이 그 대문을 드나들 확률이
높아 음식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를 구걸할 수 있는 기회가 높기 때문이다. 문은 집의 밖과 안을 연결하는데
사용된다.그래서 문은 소개해 주는 진리,가르침, 또는 교리들을 표현하는데,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소개한다.모든 과학은 제 나름대로의 입문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거지는 대문밖에
있으면서 안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만 경멸되어져 더욱 밖으로 내쫓김을 당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지 같이 취급했던 것이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이방인 같은 어린 아이의 겸손한 상태와
더불어 감각적 수준에서 자기만 중요하게 여기는 상태로 꽉 차 있는 바, 이런 마음 상태들은 자칫하면
경멸되어 내쫓김을 받기 십상이다.
거지의 종기
라자로라는 거지는“종기 투성이였다.” 마음의 이방인 같은 상태는 비록 그 마음이 고웁다 할지라도
그 속은 왜곡된 자연적 원리 투성이가 있다는 말이다.건강이 좋은 상태는 건전한 육체를 만들겠지만,
나쁜 상태,나쁜 혈액은 그 자체가 종기를 생산하게 된다.이와 같이 거짓 원리들은 그 자체가 불순물이어서
바깥 삶에서도 같은 형태를 보여 줄 수밖에 없다.이사야서에서 자연적 마음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성한데가 한군데도 없이,상처나고, 얻어터져 있고, 곪고 있는 종기 투성이”
라고 읊고 있다.거지 라자로의 자연적 몸은 불쾌함 그 이상으로 불결한 바,이와 같이 우리의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마음은 설사 무지하면서도 호의적이다 할지라도 천사들이 보면 그것들은 아주 불결해 있는
상태이다.
개
개는 삶의 아주 외적 평면인 감각적 평면에 있는 원리들,또는 그런 원리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런 원리의 소유자들은 조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많이 해댄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 역시 아주 외적
446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용도에만 치중되어 그 쓰임새는 천박할 뿐이다.감각적인 선,마치 개와도 같이, 감각적인 것을 신뢰하는데
충성한다. 종기를 치료해줄듯 핥아 대는 개의 모습이란 마음을 질서에로 회복시키겠다고 하는 자연적 선한
애정의 노력을 표현한다.게다가 그 노력의 품질 역시 매우 수준이 낮은 품질일 뿐이다.이런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동정심만 가지고 있고,영적으로는 빈곤 상태이어서 가르침과 치료받기를 바랜다.더불어
그들 속에 있는 행동 지침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대신 거짓 원리들로 인해 고통받는 상태에 있다.
아브라함의 품
거지는 죽었다.다시 말해 거지의 자연성이 제거되어 그가 영적 상태로 옮겨졌다는 말이다.그리고
그는 천사들의 인도롤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낙원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했던 시적인 표현이다.사랑 받은 제자,요한은 마지막 성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다고
말해지고 있다.심장이 있는 곳인 가슴은 사랑을 표현한다.아브라함은 주님을 표현하고, 아브라함의 품이란
주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부자의 죽음, 음부(hades, 황천)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다.그도 영계로 건너갔으나 과거 죄 속에 매장된 낮고 감각적인 상태로 가라앉았다.
“그가 죽음의 세계(음부)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 아브라함을 보았다.” 음부(hades)란 그리스어에서
출발한 단어인데,이 말은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예수를 뵈올 장소였던 낙원 즉 영들의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인간이 죽은 뒤 맞게 되는
첫 상황으로 모든 인간이 거기에 모여 심판이 있게 된다.선한 사람은 음부를 지나 천국으로,악인은 지옥으로
향한다.
영들 세계의 양 측면
인간의 마지막 고향이 세상에서 주어진 기회의 선택 여하에 의거 결정되듯, 영계에도 한쪽은 선한 이들이
천국에 들어 갈 준비를 하는 반면,다른 쪽에서는 악인들이 지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악한 인격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47
그 악 자체가 고통을 야기해 내듯, 영계의 악한 측면은 고통하고 있어야만 자기들의 내적 인격을 더욱
발달시켜 확실히 지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어느 정도나마 자기들 생각을 높여 볼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심정은 악을 확증하기 때문에 자기들 인격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아예 자기들이 악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브라함
부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보았다. 멀리 떨어진 이유는 부자의 인격이 천국 조건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로 혀를 시원하게
부자는 라자로를 시켜 물을 가져와 자기 혀를 축이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 애원은 개혁이나 거듭나고자
해서 요청하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다.그 기도는 비참함의 외침일 뿐이다.그 이유는 그가 그곳에서는
이 세상에서 했던 것 같이 타인들 속의 선을 괴롭히거나 그들의 진리를 뒤집는 따위의 행동이 불가능하도록
억류된 상태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은 글자에 나타나 있는 진리, 마치 생활 속에 스며 있는 십계명 같은 진리를 표현한다. 혀를 축인다(cool)는
것은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를 뒤집고 공격하는 것, 또는 영적 재물을 남용하거나 엉뚱한데 소비하느라
역성을 내다가 느끼는 갈증의 정신적 상태이다. 그 이유가 영들의 세계에서 악인들은 자기의 진짜 본성을
더욱 드러내면서 자신이 지녔던 진리의 지식까지 더욱 잃게 되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게 하는 혀란 말해지는 교리를 표현한다. 악하고 불친절한 말을 지껄이고 싶어할 때 자기의
혀가 함부로 놀지 않도록 억제하느라 매우 힘들었던 때를 경험했을 줄로 본다. 영들의 세계에서는 악인이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더욱 덜 공격하게 하고 뒤집지 못하도록 되어 가는데 이것이 악인에게는 심한 고통인
것이다.불꽃이란 자기 자신의 악한 열정이라는 불이다.물질계의 불은 영체를 가진 영들에게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악한 열정을 터트리고 싶은데 자신이 무능력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것이 악인에게 있는
처벌에 해당된다.
448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온갖 좋은 것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그가 자연계에서 온갖 좋은 것을 가졌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자연적
마음뿐인 사람은 바깥쪽 삶에 있는 것에 자기 심정을 고정시키고 그것만이 정말로 좋은 유일한 대상물로
간주할 뿐 천국 삶의 좋은 것을 음미하고 즐기려는 데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 감각적 삶의 것들이 오로지
좋은 것인 냥 보인다.게다가 영적 삶의 것은 좋은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악하게 보일 뿐이다.따라서
자연적 인간에게 있어 시련과 시험은 악한 것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사실 시련과 시험이야말로 영적 삶을
위해서는 더욱 좋은 것을 받게 하는 수단이다.
세상적 좋은 것에만 집착된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겠지만,
그 복은 천국의 순수하게 좋은 것을 위해 준비하는 상태는 못된다. 시련과 슬픔 등등으로 허우적대는 삶을
통과하면서 인간 마음들은 천국적인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개혁을 통해 만들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시련이 오히려 슬픔을 만든다. “세상적인 사람의 몫은 이 세상에...”라고 시편 기자는
읊고,세상적인 부자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하시기를,“부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 이유는 부유함을 가지고
자기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환경 조건은 오로지 수단일 뿐이다
가난함이나 부유함 그 자체가 인간 의지를 반대로 구부릴 수는 없다. 선한 사람은 자기 환경이 어떠하든
선한 원리로부터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예를 들면 유능한 항해사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든 배를 원하는 항구에 도착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바람이 배의 방향과 정반대에서 불어올지라도
항해사는“갈짓자형 항법”으로 전진할 수 있듯이, 선한 사람은 불행을 닥쳐도 그 불행이 자기 목적에 충당될
수 있게 되바꾸어 놓을 수 있다.지식 또는 지식을 원함은 어떤 사람을 구해 줄 수 있는 반면,정죄당하게
할 수도 있다.그리고 알고 있는 것을 선용할 수도 있겠지만 남용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아는 것이
많되, 그것을 감각적 삶에 충당했다면 그 사람은 감각적 쾌락은 많이 얻겠지만 그의 영혼은 비참해진다.
아는 것이 적을 경우 그것은 시련이나 시험을 종종 발생시키겠지만 비록 적은 지식도 잘 선용하면 천국적
기쁨들로 인도해 준다. “의로운 자의 적은 재물이 사악한 자의 풍부한 재물보다 더 낫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49
큰 구렁텅이
인간은 죽은 뒤 자기 인격을 바꾸지 못한다.선과 악 사이에는“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 이 구렁텅이는
어떤 지역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 안에 존재한다. 천국으로부터 악을 분리시키는 이 구렁텅이는
각자 자신의 심정과 삶 속에 있다.선과 악은 정 반대이다.그들은 서로 함께 살 수 없다. 그것들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선한 자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기쁘게 받지만 악한 자는 모든 신성과
천국적인 선과 진리를 맹렬하게 거절하며 산다. 따라서 한 사람은 천국에 속해야 하고 또 한 사람은 지옥에
속해야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지옥에서도 어떤 선이 성취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천사를 그곳에 심부름을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악령은 선을 미워하므로 천사도 미워한다. 병든 눈이 강한 햇볕을 직시하면 더 괴로워지듯 그들은
천사를 보면 더욱 괴로워할 것이다.한 마디로 주님과 천사들이 악마를 위해,악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그들은 천국적인 특성의 어느 것도 기꺼이 받지를 않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정신적,물질적 재물을 남용하는 사람,그는 마치 극장에서 연주하는 사람과도
같다. 연주회가 이어지는 잠깐 동안의 공연 동안 그들은 풍성한 부자 같지만 공연이 끝나면 화려한 예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형제들
다섯 형제 모두 부자와 비슷한 정신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의 집이란 자기를 통치하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것들 모두를 말한다.악한 마음은 진리를 뒤집고 싶어한다.만일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라 해도 악한 마음은 마음속의 자기 형제들, 악한 사랑에서 뻗어 나온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각종 거짓 원리들이 자유롭기를 바랜다.인간이 악한 삶에 자신이 고정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그가 아직 더 희망하는 것은 자기의 악한 바램과 거짓된 생각을 써먹을 자유의 상태이다.
심판 전, 중간 상태 속에서 이해성이 승강되는 순간이 있게 되면 그는 자기가 진리에 무지했었다는
것, 따라서 진리를 몰라서 되어진 자기 삶을 가지고 자기를 심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댄다. 그러면
모든 진리가 존재하는 주님의 말씀, 모든 마음과 삶이 채택해야 하는 거룩한 말씀이 그 사람에게 보여지고
그가 신성한 말씀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본인이 생각하기에
450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자기 안에도 선하고 진정한 것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된 것들까지도 그의 통치하는 사랑의 품질 때문에
얼룩져 있다는 것, 그의 마음 안에 있는 다른 모든 형제 역시 모두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모든 선과 진리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가르쳐진다.
모세와 예언자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모세와 예언자” 또는
“율법과 예언자”란 구약 성서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다. 율법과 예언서는 특별히 유대 교회 회당에서는
늘 읽혀지고 있는 바,유대인도 신성한 명령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게 되어 있다.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각자 기억 속에 있는 말씀으로부터 듣는 것,가르침을 받는 것,이해성으로 들어 믿는
것,심정으로 들어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진리를 받는 것
진리는 진리를 받고자 열린 마음에 그 증거까지 보여준다. 진리는 사랑으로 명백하게 논증해 받는 마음에는
그 진리의 외적인 예증이 필요 없다.그러나 자연적 인간은 징조와 기적을 요구한다.요구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진리의 빛으로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악한 사람에게는 진리의 증거가 필요 없고,단지 진리를
믿겠다는 결심만이 더 필요할 뿐이다. 영적 진리의 증거는 그 진리를 받을 마음이 없는 자에게 더 이상의
충분한 증거도 능력도 결코 없다. 사실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이 인간에게는
위험한 것이 없다. 강요로 진리를 믿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되어 더 큰 정죄를 당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로부터 배우는 것
환상들,죽은 자와 대화했다 해도,그것이 당사자로 자기 속의 통치하는 사랑에 반대되는 진리의 확정은
결코 주지 않는다.만일 주님께서 어떤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다 판단되시면,그분은 그로 진리를 보도록
지적으로 강요하실 수 있다.또한 예수님 자신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그러나 이 사실은
신성한 인격, 주님의 가르침 속의 진리에 반대하는 그분의 적들에게는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다. 한 가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1
주목할 만한 것은,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그분은 자신을 적들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그리고 사무엘상28장을 보면, 엔도르에 있는 무당이 사무엘을 죽은 자들로부터
불러내었지만 여전히 사울은 자신을 개혁하지 않았었다. 사실 사울이 무당을 찾아가 죽은 자를 불러 달라고
한 행위 자체가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한 셈이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이 채택할 수 있는 삶의 교훈이나
원리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설사 죽었던 자가 살아난다 해도 우리가 지닌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다.
새교회와 강신술(spiritism)
강신술(심령술)은 새로운 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그것은 오로지 영적 통찰로 보여져야 하는 것을 바깥쪽
감각으로 입증해 보려고 애쓴다. 사실 이런 노력은 자연주의자들에 속한 사항이라 볼 수 있지 강신술이라고
간주해 볼 수도 없다.이런 등등은 스베덴보리의 선교와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그는 주님께서 말씀을
인간에게 열어 주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도록 부름 받아 계몽되었다. 그래서 모든 진리가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 존재함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도록 그는 사용되었다. 사실 상, 그는 근대 강신술에 아주 효과적인
해독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이 거룩한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는다면, 필시 그들 안에는 빛이 없다.”
우리 자신 속의 악이라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는 어떤 조그만 진리라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줄 수 없다.
믿음은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기적들은 주님의 원리에 반대하는 자들을 확신시켜 주지 못했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건만 그들은 도무지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의 고향에서, “예수께서는 권능 있는
일을 베푸시지 않았는데,그 이유는 그곳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 기적들로 해서 주님을
믿도록 의도했다면, 주님을 믿으려 들지 않는 그분의 고향에서 더욱 많은 기적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오늘 날 모든 것을 자연계의 탓으로 돌리려 하는 사람들도 모든 것은 영계에서 근원 된다는 주장에 시큰둥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인간을 섬뜩 놀라게 해서 천국에 오게 할 수는 없다.그리고 지옥의 공포가 천국을
만드는 선과 진리의 사랑을 생산하지 않는다.한 마디로 천국은 긍정적 측면(positive)이지 부정적 측면
(negative)이 아니다.
452 부자와 라자로- 누가복음16장 19-31절
인간은 자기의 외적 인간 속에 있는 악을 죄로 알고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의 내적
인간 속의 악을 제거시켜 주실 수 있어 인간 전체에서 악이 제거된다. 이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되지
못하는게 하느님의 섭리의 법칙이다.악이 통치하는 인간은 이미 지옥에 있는 셈이다.그러나 천국의 원리가
통치하는 인간은 이미 천국의 형체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거듭남은 하느님의 진리 속에 있는 원리들을
그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 속으로 진심으로 기쁘게 받는 방법 외에는 어떤 방도로도 가능할 수 없다.
본문의 비유는 세상욕에서의 부자와 선함에서의 부자를 대비시켜 주는데 강조를 두고 있다. 이 대비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대비와 정확히 같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상 삶의 상태들이 결국 천국과 지옥을 만드는
것만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3
36
보잘 것 없는 종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한다-
성 서 본 문: 누가복음 17장 7-10절
7.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8.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하지 않겠느냐?9.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0.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요약
어느 인간도 주님에 대한 자기의 의무 그 이상을 할 수는 없다. 그 이유가 어떤 선용을 행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눈치챌때,그 선용은 자기의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선은 언제나 인간의 의무가 된다.
454 보잘 것 없는 종- 누가복음17장 3-10절
글자적 의미
글자적 뜻에 있는 의미는 명백할 것이다. 일상적인 자기의 할일을 해가고 있는 종이 주인에게 어떤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듯, 주님의 종인 인간은 자기들이 타인을 섬기는 일을 함에 대하여 어떤
공적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인과 종
우리는 두 마음,또는 마음의 두 부분인 자연적 마음과 영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 두 마음, 자연적인(외적인) 마음과 영적인(내적인) 마음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의 자연적 마음(자연적
인간)은 내재하는 영의 바램과 명령에 의거해 진리를 배우고,선을 행한다.
농사 (plowing: 쟁기로 갈아 젖힘)
이 종은"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종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씨를 뿌릴
밭을 갈아 엎고 있다.인간이 밭을 갈아 엎는 것을 영적으로 보면,그것은 신성한 진리가 그의 일상 생활의
행위에서 자라나도록 진리의 씨를 받을 마음을 준비할 때에 해당된다.이를 보다 뾰족하게 말한다면,이는
주님의 말씀으로 부터 신성한 진리를 받기 위해 각자의 이해성을 준비하는 때를 말한다.
양을 침
양떼를 친다는 것은 의지 또는 심정을 계발하는(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양은 이타애 또는 이웃 사랑에
상응된다.양을 치는 것,또는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이타애를 경작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성이나
의지를 경작한다는 것은 신성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되 신실함과 끈기가 요구되는 높은 질서 수준에
속하는 선용(good uses)들 이다.
종의 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5
그럼에도 위의 선용은 종,즉 자연적 마음이 수행하지만 실지로는 영적 마음이 조종하고 있다.우리는
자신을 강요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경청하여 그 가르침을 교훈이나 교리로서 배워야 한다. 게다가 주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들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옛
자연적 조건을 탈피(break up)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느낌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그러면서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주님을 향해서,이웃 동료를 향해서도 가르치신
그대로를 느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을 가는 일,즉 자기 지성을 경작하는 것과 양을 치는 일,즉 자신의 선한 애정들을 관리하는 것은
주님의 종이 해야 할 날마다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종으로서 각자의
수준에서 위의 두 가지 일들을 해야만 한다.
예증
우리가 성질내는 것에 잘 기운다고 하여 분노를 탐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인간 경향성에
저항해야 한다.그 이유가 분노는 악에 속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속의 영적 마음이 분노하는 쪽으로 기울기만 하려드는 모든 경향성에서 빠져 나오도록 우리를 받쳐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영적 마음은 영향력을 발휘하되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의 의무인가를
볼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줌으로서,또는 그 의무를 행하는 노력을 지지함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주인은
종의 일을 하지 않고,단지 종을 명령하고 지휘 감독하여 종이 열심히 일하도록 할 뿐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우리의 외적 부분 즉 자연적 마음과 우리의 내적 부분 즉 영적 마음 사이의 관계를 이 비유는 언급하고
있다. 영적 마음(마음의 영적 부분)은 자연적 마음(마음의 자연적 부분)을 계발하고, 지휘하여 떠받혀 준다.
자연적 마음 그 자체에 국한해 보면 그 마음은 영적 마음의 명령들을 받아 순종한다. 이것이 거듭나는
인간에게 있는 질서요,천국에 있는 둘 사이의 관계이다.이 상태에서만 영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은 각자의
등차에서 서로 행복으로 채워지게 된다.
456 보잘 것 없는 종- 누가복음17장 3-10절
그러나 위의 천국 질서가 저지되거나 중단 될때, 인간 전체가 비 질서 관계로 돌입되면서 불행으로
그 속을 채워 버린다.그렇게 되는 이유가 자연적 마음은 영적 마음의 영향력이 없을 경우,명확하게 볼수
없고 슬기롭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적 마음의 실용적인 활동 없이 영적 마음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바깥쪽 선용을 가질수 없게 된다.따라서 종과 주인은 서로 기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들판, 일하고 쉼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오면”에서의 들이란 자연적인 삶이요, 그 삶에서 실제의 일들이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진리들이 배워지고,선한 애정들도 발달되다.우리의 상태는 언제나 교체된다.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쉬기도 한다. 일한 뒤의 휴식은 선한 원리를 배워 연마하는 노동 후에 있어지는 평화와 기쁨이라는
정신적인 휴식을 표현해 준다.우리는 자신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느라 노동하고,선을 행하도록 자신을
밀어부치느라 노동을 한다. 우리는 오로지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는 만큼에서 휴식을 취할수
있다.
먹고 마심
정신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있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주님의 말씀에 있는 원리들이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다.주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 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우리 몸의 자세 중에 앉아 있는 자세란
자신이 하고저하는 것에 자기의 의지를 고정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앉아서 먹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선하고 진정한 원리를 음미하며 자신의 의지에 고정시켜 삶에서 자기 원리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영적 양식을 이렇게 받게 될 때 즐거운 영적 휴식이 가능해진다.
주인이 먼저 섬겨김
그러나 자연적 마음은 그 마음의 의무를 수행할 때까지, 혹은 영적 마음이 먼저 채워질 때까지 영적
양식으로 채워지지도 않으며 휴식을 가져볼 수도 없다.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접한 뒤,자기 저녁 밥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7
먹기 위해 앉아야 한다.그래서 주인이“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준비함
준비한다는 것이란, 자연적 마음이 교회의 교리를 배우고 자기속의 악한 경향성을 배척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등등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이 이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 주인인 영적 마음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가 마무리 되면 우리의 문은 자동으로
열려 주님이 들어 오시어 우리의 영적 마음과 먹고 마신다. 인간이 진리를 응용하기전 그 진리에 관한
지식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한다.주님과의 결합은 진리를 수단으로,진리를 사랑함으로, 진리를 삶에 놓음으로
서 이루어 진다. 한마디로 인간은 주님과 반대되는 것들을 던져 버림으로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허리를 동임
자기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겉옷의 긴자락을 잘 갈무린 한후 띠로 묶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발이 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겉옷은 지식들,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들을 표현해 준다. 이런 진리들은
우리가 사랑에 의거 마음을 상승시킬 때, 그리하여 이 진리들이 보다 더 높은 국면인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때 발을 더 자유롭게 해준다. 따라서 종이라는 자연적 마음도 주인인 영적 마음이 다 먹고
마실때 까지 그 스스로 허리를 동여 매고 봉사해야 한다. 다시말해 신성한 진리로 선한 원리를 실습해감으로서
내향의 영은 주님과 천국과의 결합을 이루게 된다.
섬김 (serving,시중을 듬)
신성한 원리들은 그 원리가 자연적 마음과 삶에서 신실하게 행하여짐으로서 영적 마음 안에서 확증되어
고정 된다.그런 다음 신성한 영향력이 영적 마음에 흘러들수 있고,그뒤 자연적 마음 까지 그 영향력으로
채워 진다.이렇게 해서 주인과 종,모두가 영적 양식과 물을 먹게 되는 것이다.
458 보잘 것 없는 종- 누가복음17장 3-10절
그러나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섬기기도 전에 그 스스로를 먼저 만족 시키겠다고 세상적 방법을
시도한다면,진리의 천국적 국면에로 승강되지 않고 오로지 세상적인 것,자연적인 것만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무질서와 실수들에 빠져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적 마음을 먼저 섬기는 것이 자연적 마음 자체에게도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 이유는 자연적 마음은 영의 안내로 빛 가운데서 주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외적인) 것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인간의 역사를 통털어 선에서 이탈하고 인격의 영성과 결별하게 되는 원인은 자연적 마음 그 자체를
먼저 섬기려 시도하는 움직임에 있어 왔다.이것이 삶의 밑 바닥에 기어 다니는 뱀,자연적 감각의 조언을
덜컥 삼킴으로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려진“인간의 타락”인 것이다. 계발된 영혼의 명령없이 감각만을
수단으로 천국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진리가 주님의 진리라고
인정하여 사랑하고 실천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 진리 안에 존재하는 선을 음미하여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질서
우리는 내적인 것,즉 영혼을 질서속으로 먼저 가져다 놓아야 한다.영적 마음이 거듭나는 애정으로부터
행동 할때 만이 자연적 마음은 그 속의 자아 의지를 포기하고 영의 안내를 받아 천국적 동인으로부터
행동한다.천국은 인간에게 내향적으로 온다.“하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 다음 영적 마음을 통하여
자연적 마음과 삶도 거듭나는 생명으로 채워진다.
종이 먼저 그의 주인을 섬기고,그 뒤 먹고 마셔야 한다.자연적 마음이 영적마음을 어떻게 섬겼느냐에
따라 자연적 마음에 천국적 생명이 채워진다.영적 마음은 영계를,자연적 마음은 자연계를 주시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거듭나는 영적 마음으로부터 자연적 마음과 삶도 행동하게 만들면, 그는 천국과 주님으로 부터
행동하는 것이다.그러나 그가 자연적 마음만으로 행동한다면,그는 자신 스스로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고마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을 잘 섬겼다고 해서 영적 마음이 자연적 마음에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이유가 후자는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그 이상의 최상의 조건도 달성 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59
종이 명령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와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다시말해 주인은 종에게 특별히
어떤 고마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왜냐하면 육체가 마음을 섬기듯, 외적인
것인 자연적 마음은 내적인 것인 영적인 마음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중에서 피부는 그
속의 심장과 폐 등등을 섬기는 것인데,그런 질서 속에서 피부는 피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긍지를 발견한다.
보잘것 없는 종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일을 다 하고 나서는‘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말하여라.” 다시말해 우리는 자기 삶의 평균 수준 이상으로 주님을 위해 여분의 이익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오히려 우리는 자기의 삶을 발견한다.인간은 자기가
잘났다고 떠벌릴 어떤 것도 없다.우리는 각자의 의무 그 이상을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빛을 주시하고 주님께 의존해야 하며 더우기 의무 수행에 지치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
모든 공적은 주님께 있지 인간에게는 하나도 없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어떤 진정한 선을 행할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인간은 오로지 신성한 생명을 받는 그릇일 뿐이다.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계명
준수가 인간에게 최고의 이익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공적이라고 떠벌릴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모든 공적을 사사건건 제 잘난 탓으로 돌린다.그럼에도“인간은 천국으로부
터 주어지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받을 수 없다.” 작은 시냇물을 보자. 그것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간다. 그런데 강이 바다에 물을 공급했다고 바다에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강물은
어디에서,시냇물은 어디에서 왔는가?바다로부터 수분의 증발, 구름, 비로부터 야기 된다. 어쩌면 시냇물이
바다를 향해“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하며 우쭐댈런지 모른다. 사실 지상 곳곳에는 주님으로부터
나와 모든 것을 채우고 넘치게 하는 생명의 순환이 존재한다. 그 순환과정 속에서 각기 제 몫을 수행하여
모두가 복을 받고,감사하는 심정과 거듭나는 삶을 통해 주님께로 되돌아 간다.
겸허
460 보잘 것 없는 종- 누가복음17장 3-10절
이 비유는 겸허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겸허라는 진리는 저 잘났다고 으시대는 인간에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진리이다.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란 고작 각자의 의무 이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그 사람은
자신에게 공적이 있다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리라.
인간의 두 겹 본성
인간 삶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질서는 내적 마음인 영혼이 자연적 마음을 지배하고, 자연적 마음이
그 지배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에 존재한다.다시 말해서 동물같은 삶이 거듭나는 영의 지배하에 있을 때이다.
이런 질서속에서 동물적인 본성은 파괴되지 않을 뿐 아니라,오히려 세련되어져 사람답게 되어간다.다시말해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기쁨이 허용되고,이에 더하여 그것이 합리적이고 순수하게 되어 간다는 말이다.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동물인 반인반수의 모습은 고대의 상징적인 신화 같은 것,즉 스핑크스,켄타우로스
(Centaur)등과 같이 반쪽은 사람이고 반쪽은 사자나 말, 염소로 표현해 놓은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표현물에서 일치하는 것은,반쪽 중 위쪽에 사람이 있고 아래쪽은 언제나 동물이 차지 한다는 것이다.
각 경우에 몸체는 짐승이나 그 몸체를 지휘하는 머리 부분은 인간으로 되어 있다. 위의 두 부분중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위만 쳐다 보는 총명,잘 세련 되어져가는 애정들을 발견 할 수 있다.그리고
이것들이 짐승이라는 조잡한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모양을 각자의 유전적 본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인간의 짐승 부분을 잘 길들일 수 있는 방법,짐승 수준 너머로 부상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짐승 수준 그 이상으로 자신을 올려 놓는다는 것은 힘든 작업이라고 누군가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지옥이 천국에 복종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지옥이다. 아래쪽 본성, 수준 낮은 본성이 우리를 더 강하게 붙들수록 그것을 깨뜨리기는 더욱 어려워
진다.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완전한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인성을 입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지상에서 그분이 이룩하신 것 처럼 그분은 각자의 수준에 맞게 성취할 힘과 빛을 주고 계신다.
수없는 세대를 거치며 누적된 탐욕이라는 악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더욱 강한 요새로 발달시켜 놓았다.
이기적 삶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61
자연적 마음을 완전히 조절해 가야 하는 일,진실로 사람다운 삶은 종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복종하는 것이 천국 질서 인데 이를 언제나 상기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주인을 먼저 섬겨야 하는 일을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피곤해 하였을까?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차분히
앉아 제 음식을 먹을 때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지쳐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천국 질서 쪽으로 향하는 것이란
간단히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도움을 찾는 것인데 이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인색 했는지 모른다.
가능성들
모든 인간 존재, 그 존재가 어떤 조건하에 있든지 모든 이들이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 개인 속에서 악마와 투쟁하는 인간 영혼을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애정,가능해지는
도움,영향력 등을 악마에 대항하고 있는 영혼 부분에 쏟아야 하리라.
그럼에도 이런 측면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얼마나 미미한지 모른다. 게다가 상대방의 바깥에 관계된
것들, 지위, 실력, 미모, 등등에 우리의 관심을 흘려 낭비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 다른 측면,
즉 인간의 짐승 부분만을 상대방에게서 끄집어 내려 드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도 의식의 세계에로
깨어나려는 아기 같은 거듭 나려는 삶의 측면도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천국 아기를
실족하게 한다거나, 그 아기를 잘 성장하게 한다거나 하는 두 능력이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목적
우리는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사항까지도 영적인 목적에 짜맞추어 지게 하는 용기를 늘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큰 곤란은 그들이 자기들 마음을 승강시켜 영적인 빛 속에서 무언가를
보고 헤아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그대신 모든 것,심지어 종교적인 것까지도 조잡한 외적 경로, 감각들로부터
판단해 내려는 습관에 젖어 있다.그러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 생명에 종속되어야 한다.그리고 외적인
것들은 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정도 만큼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리라.
462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37
부정한 재판관
-끊임없는 기도-
성서 본문: 누가 복음18장 1-8절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3.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 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사실 하느님께서
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요약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63
거듭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은 성취하고야 말 것이다. 거듭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자연적
마음에서 오는 반대적 충동이 있다 해도 영적 마음을 항상 열어 두어 주님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설사 잘못된 원리가 자신의 자연적 생각을 지배하는 상황에 있다 해도 심정에 있는 성실함, 즉 일상 생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갈망할 경우 그 바램은 언제나 그것에 적절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그분의 신성한 진리로 언제나 함께 하시되 각자의 정신적 수준에 맞추어도록 하여
주신다. 그래서 이들이 거듭나는 삶에 들어갈 조건을 구비하면 즉각 그들 속에 있는 적들을 물리쳐 주신다.
도덕
일반적으로 성서의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비유의 도처에서 이야기 속에 있을 도덕적 교훈에 관한 것이
수집되는 경우가 많다.더욱이 이 비유와 그 다음에 있는 비유의 경우,비유 바로 앞절에서 얻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자연적 수준의 교훈을 찾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물쇠
옆에 열쇠가 놓여 있는 격이기 때문이다.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해 주는 자연적인 그림들이다.각
비유의 그림들은 그림에 앞서 존재하는(pre-exist) 목적(purpose)들로 색이 칠해져 있고, 그 다음 그림
속의 세부 사항들은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배열을 이루고 있다.
글자적 의미
예를 들면 이 비유의 목적은 거듭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증하는데 있다.비유의 그림을 자연적 수준에서 볼 때,그 요점은 계속 졸라대는 것, 성가시게 하는 것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라는데 있다.
그런데 주님을 부정한 재판관과 연관시켜 생각하려 들면 어떤 곤란함이 생각 속에 어른거려지게 된다.
그 이유가 주님은 언제나 정의로우시며 자비하시어 언제나 인간을 복되게 하려고만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나쁜 재판관의 등장은 의도적인 필요성이 대두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신속한 판결을 집행해 가는 선하고 의로운 재판관의 등장은 본문의 필요 요소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꾸준히 반복적으로 정의로운 재판을 거절해 온 인격이 본문에서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464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가상으로 비치는 것
위와 같은 재판관의 속성이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에게는 주님의 속성이라고 착각해 버릴수도 있다.
일상사의 고통을 해소 해주는 판결을 기다리다 못해 지쳐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매우 무관심하고 아예
부정직하신 듯 비쳐지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께서는 애타게 기다리는 기도자에게 이내 응답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주님께서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못 본척 하시는 듯 여겨지도록 비춰질 때,마치 기도가
아무 소용없는 듯 여겨져 그들로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유혹되어 진다. 사실 주님이라는 분은 그들이
정작 받을 수 있는 복 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아 가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 응답이 더딘 원인이 자기들
심정과 삶의 비수용성에 있다는 것을 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체함
사실 본문은 인간이 무작정 요구한다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기도를 응답 받는데 있어 하느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지는 경우를 성경을 포함해서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발견한다.그러나 사실은 이렇다.인간이 삶의 개혁으로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 주님께서는
인격 속에 영성을 주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인격의 영성에 진입하는 것 외의
다른 수단으로는 인간에게 영적인 복을 주실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천국의 복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해주는
것은 인격이지 어떤 환경이나,또는 당사자 주위의 사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
비유는 그림,즉 표현일 뿐이다.이 그림은 거듭남을 향한 시초에 모든 인간의 마음에 영적으로 놓여진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과부와 재판관 양쪽을 다 가지고 있다.그래서 우리가 진지하고 꾸준하다면,주님은
우리 속의 재판관으로 하여금 우리 속의 과부에게 판결을 내려 주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교훈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65
글자에서만 볼 때,비유가 주는 자연적 수준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만일 진지하고 끊임없이 성가시게라도
졸라대면,냉혹하고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이
설사 우리를 잊고 계신 듯 자신에게 여겨질 때조차도 정의를 베푸신다는 것을 비유는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 이런 등등에서 맺어지는 교훈은 우리가 인내심을 발휘하여 지속성을 가져야 하되, 설사 하느님의
도우심이 지체되는 듯 여겨질 때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면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리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라는 집합체에서도 응용해 볼 수 있다. 새로운 교회가 많은 박해에
투쟁하는 가운데 난감해져 있다 해도, 주님께서는 그 교인들의 인격과 삶이 허용하는 만큼에서 빠르고도
충분하게 교회를 건설하고 계신다.주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성급해 있다면,그에 대한 치료약은 당사자의
심정과 이해성,그리고 삶에서 교회의 원리를 더 확대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신다.
그분은 의롭게 걷는 이에게서 어떤 선도 유보하지 않으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 “네
발이 닿는 곳은 다 너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주님의 약속이시다. 영적 원리 위에서
걷고 있는 이상 어떤 영적 원리도 거두어 가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기다리면서 일하는 것,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소원한 사항에 앞서
더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이 구절 때문에 우리는 하루종일 기도하는 자세로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하루 종일 무릎 꿇고 기도만 하고 있다면,우리는 선용을 수행할 기회도,시간도 가지지 못할 것인바, 주님께서
말씀하신“언제나”란 하루 종일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뜻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마음의 상태, 즉 자기의 악한 경향성을 인정하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들을 듣거나 받을
준비의 상태로,하늘을 향해 마음 문이 열린 상태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천국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항상 열고 있다면,그 사람은 내향적으로 예배하는 상태,사랑의 예배와 그분을
인정하는 상태에 언제나 놓여져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의 심정은“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는 불” 같이
언제나 있어질 것이다.이 사람의 삶은 활력 있는 영적 삶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그 이유는 가장 지속적이고
466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가장 효력 있는 기도는 일상 생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 없음(fainting)
그러나 인간이 천국적인 것을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게다가 천국의 소리에 귀를 막으라는 세상의
왁자지껄하는 소리를 허용해 둔다면,그의 영적 생명은 활력을 잃어 비활동적이 되고 만다.우리의 육체가
매일 적절한 영양의 공급을 필수로 요구하듯,영체도 마찬가지이다.주님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알면서,
그리고 기도의 진정한 본성과 사용을 아는 사람,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말씀을 읽는 가정 예배는 꼭
필요하다는 것 등등을 당연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이 세상 매일의 삶 속에 널려 있는 자질구레한
것,그리고 위험한 것,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해가려면 어떻게 위쪽을 쳐다보아야
하는 지를 체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재판관
우리 마음속에 있는“재판관”이란 합리적 원리,생각하는 능력들이다.이것들이 생각에 도착된 것들을
서로 비춰 보고 비교하여 결정 짓는다.물론 타락하는 인간의 경우,그의 합리적 능력 역시 타락적이다.
그래서 타락하는 자연적 인간은 자신과 걸맞게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추론한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한다.게다가 자아 사랑을 부추겨 주는 정도에서 세상도 사랑한다.그의 합리적 능력은
세상 쪽에 활짝 열려 있고 천국 쪽으로는 굳게 닫혀 있다.그는 세상적인 빛으로 생각하는 바,영적 어두움에
존재한다.이것이 부정한 재판관,“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자 이다. 이 사람은
사랑이라는 천국 원리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이요, 인간 정의라는 만민이 인정한 규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거짓 원리가 그 사람의 추론을 지배하고,사리사욕이라는 원칙이 그의 행동 방향을 결정해 줄
뿐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도 거들떠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67
영적으로 말해서,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이란 사랑이 동반된 두려움, 악을 사랑하여 행하는데 따른
두려움,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느님께 반대되는 어떤 것을 행하면 안될텐데 할 때 있어지는 두려움이다.
사람을 거들떠본다는 것은 이타애의 원리,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시하는 것이다.이 원리는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행위 자체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인간 속에서의 합리적 능력은 천국의
영적 빛으로 생각한다.고로 그 능력은 인간에 정의를 베풀게 해 준다.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것이 그분을
향해 하는 것이라고 그분은 가르치시고 있다.그러나 사악한 자는“주님의 면전에서 하느님 두려운 게
없다.”
도시
재판관이 살고 있는“어떤 도시”란 마음이 거주하는 교리이다. 재판관이 부정하고, 판결에 무관심하기조차
도 한 사회의 거리를 상상해 보자.이런 모습을 이사야59장 14절에서 읽을 수 있다. “공평은 뒤로 제쳐놓았고,
정의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성실은 대중 앞에서 짓밟혔고,정직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하는 마음속에도
그에 상응되는 상태가 존재한다. 그들의 합리적 능력은 자아 사랑에 고용되어 천국의 원리에는 무관심한
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거들 떠 볼리 만무하다.
과부
이 도시에 같이 거주하는“과부”가 있다.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진리로 그 특징을 가진 영적 삶의 등차에서
남편은 진리를 이해함을,아내는 정의를 사모함을 표현한다.남편이 죽은 아내, 과부일 경우, 이 여자는
진리를 이해함과 결합한채 있지 못하는 진리를 사모함,즉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이다.이 애정은 자신의
안내와 도움이 결핍되어 있어 늘 곤경의 상태 가운데 처하게 된다.
비유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 있는 바,이 그림 속에서 합리적 능력은 거짓 원리라는 어두운 배경,
세상의 빛 속에 처해 있다. 그런 반면 같은 마음속에 진리의 빛을 갈망하고 추구하려는 진리에 대한 사랑도
존재하고 있음이 과부로 그려 주고 있다.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하고 있다.그 이유는
합리적 능력이 이기적 삶에 있는 거짓되고 감각적인 사상에 꽉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많은
빛을 구하는 애정의 하소연이 상달될 리 만무하다.
468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과부로 표현된 위와 같은 진리에 대한 자연적 애정은 정의를 행하도록 임명된 재판관, 곧 합리적 능력에
기대를 걸고,그 애정을 학대하는 모든 정신적 어려움,모든 의구심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판결(정의를 추구함)
그래서 과부는 “그를 찾아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본문을 글자대로 다 읽으면,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이 여자가 추구한 것은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에 넘어가 잃은 자기의
권리를 요구한 것뿐이다.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우리의 애정이 악에 의해 핍박당할 때,다시 말해 우리
인격이 혼합된 상태에 있을 때,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합리적 능력을 찾아간다.그래서 악하고 거짓된
것과 선하고 진정한 것을 가려냄으로 자신을 건져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악들이 우리의 추론하는 능력에 가담되어 있는 한, 추론력 역시 거짓 원리의
지배하에 있게 마련이다.따라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들먹거려 지는 것을 귀찮아 하게 된다.그러면
우리 마음은 분단 상태, 즉 어떤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사랑의 상태와 자연적 자아 사랑이 우리의 추론력을
그 사랑의 지배하에서 풀어 주지 않으려는 상태,이런 두 상태에 있게 된다.
판결해 주고 싶지 않은 재판관
위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과부는 정의를 재판관에게 구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부정한 재판관은 자기 속의 선한 원리로부터 판결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정책상
판결해 주어야만 한다고 강요받은 것이다. 확정되어 있는 법보다는 자아 의지의 갑작스런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독재적 통치자들에게 다분히 있는 경향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정의에 기초하기보다는 어떤 바람을 일으키는 것,즉 정책에 의존하는 데,이런 일은 현대에서도
흔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할 때 정치가들은 그들의 외침을
정책상 역이용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69
강요당한 재판관
자연적 마음속에 있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빛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외쳐 대면, 무관심하고 나태한
추론력도 결국 꿈틀거리고야 만다.자연적 사랑이 진리를 찾기로 작정하여 열심을 낼 때,우리의 생각은
일어서게 되고 성가실 정도로 외쳐 대는 자연적 사랑과 대결 상태로 불편하게 있느니 보다는 그 사랑에게도
어떤 길을 선택하도록 타협점을 모색하기에 이르고야 만다.
정책과 원리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애정을 더 낫게 실제에 사용하기 위해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어 정책이라는 것이
인간을 부추겨 일하게 해준다. 그 이유는 거듭나 보려는 시초에 있는 인간의 경우 그의 두 마음은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분단된 상태에서 주님은 인간의 애정에 역사 하시어 진리를 따르도록 재촉하실
수 있다. 이렇게 애정이 그의 합리적 능력을 재촉해서 일하게 하여 순수한 진리를 붙잡도록 함으로 그가
이전에 지녔던 의심이나 악의 박해를 몰아 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추론하는 능력이 신성한 진리의
영향 밑에 들어오게 될 때,주님은 그 능력에 역사 하시어 그 능력 자체도 거듭나게 하심으로서,선한
원리로서 일하게 해서 더 이상 정책적으로 일하는 것을 멈추게 해 주신다. 따라서 거짓 원리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점검하고 있다 해도,우리가 진리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우리의 거짓
관념이 진정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쪽으로 인도되어 결국 우리는 거짓 관념이나 원리를 거절하는데
이르게 된다. 진리를 바라는 진지함이나 꾸준함은 언뜻 보이기에는 세상욕이나 거짓 관념에 투쟁하고 버티느라
고 희망이 없는 듯,또는 고달픈 듯 여겨질지 몰라도 결국 필요한 진리를 획득하고야 만다.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연적 마음과 그 삶
안에 있는 것들의 상태를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누구도 진리를 영적인
빛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다만 세상의 빛과 감각적인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누구도
단번에 진실로 합리적일 수 없고 오로지 거듭나는 단계를 밟아야만 가능하다는 것, 우리 속의 자연적인
470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합리적 능력은 무관심할 수밖에 없고, 더욱이 주님의 영향하에 우리의 애정이 진리를 추구하라고 재촉할
경우,천국 빛에 더욱 반대한다는 등등이다.우리의 애정들은 우리에게 진리가 알려지고,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에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순수해질 수 없다.
표본적인 법들
이스라엘 족에게 주어진 법에는 불의한 재판이나 과부를 억압하는 데에 관한 많은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이런 모든 법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영적으로 응용해 본다면,자기 속의 합리적 능력을 악과 거짓의
쪽에서 추론하거나 선과 진리에 역행하여 추론하는 것을 허용치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더 특별한 것은,
우리 속에서 성장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박해하거나 억누르지 말라는 것, 그리하여 영적 삶을 진지하게
바래는 우리 속의 마음을 주님께서 채우실 수 있게 하라는 의미까지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의로운 재판관
합리적 능력은 마치 의로운 재판관처럼 마음속의 각양 각색의 원리들, 애정과 생각 속의 제 각기 다른
종류들을 두려움 없이 올바르게 판결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인간 의무를 행하는데 자유를 주고 제각기
적절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더욱이 우리 속의 선한 애정과 진정한 생각들을 격려하고 악한
느낌과 거짓된 생각을 던져 버리도록 해준다.
강요당함(imposition)
보호나 안내를 잃은 과부가 파렴치한 인간에게 사기 당하거나 강요당하기 쉽듯이, 애정의 길잡이인
진리에 대한 이해성이 결핍되면 악한 영향을 쉽게 받게 된다. 마치 재판관에게 판결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재판관을 매수할 수 있는 돈을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연약한 과부가 재판관
앞에서 매우 무력하게 보이듯이,우리 속의 자연적인 마음에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게 될 때,진리에 대한
우리의 애정 역시 무덤덤해진 합리적 능력을 뒤엎는데 매우 무기력한 듯 여겨지고 만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1
마지막 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끈질김은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인간에게 정의롭지도 않았던 상태를
뒤엎었다.이와 같이 우리 속의 영적인 것이 제 아무리 어둡다 해도,우리의 합리적 능력이 진리를 사랑하도록
일해 주는데 도무지 협력하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해도, 만일 우리가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어 진리를 발견해 보겠다고 갈망하고, 조금 뿐인 진리라도 삶에 적용해 가노라면 결국 우리는 실제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지체 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다
뭔가가 이루어지는데 너무 갑갑하게 지체되는 듯 여겨지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 즉 주님은 진리를
위해 우리의 심정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까닭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삶의 원리로 진리에
순종할 준비가 완료 되기전 오랫동안 우리는 진리를 감상적 수준에서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때 주님의 온유하신 자비는 우리가 심정적으로 진리를 채택하지 못하고 있는 진리의 이해를 보류해
주시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택한 자의 부르짖음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실까?”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란 그분을 사랑하고,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을 말한다.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은 계발의 상태에서 그리고 어두움과 의심의 상태에서도 부르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과
삶이 모든 상태에서 인도받음과 강건함을 주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된다. 우리 삶에서 정신적인 밤이란
우리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을 때, 또는 주님은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노라면,우리의 준비가 완료 되는대로,아마도 각자의 정신
속에 상당한 적들이 있다 해도, 혹은 우리 속의 느낌과 거짓 생각들이 상당한 세력을 유지해 가고 있다고
해도,우리가 처한 모든 역경에서 구해 내어 주실 것이다.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고약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472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정의롭게 우리를 판결하도록 강요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능력을 거듭나게
하시어,우리로 천국 진리를 보고 알도록 해 주신다.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까? (bearing with them)
글자적 의미로 볼 때,그분은 택하신 백성에게 긴 시련을 참도록 하신다는 것,그리고 그분은 그 시련을
그들과 함께 견디신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들은 스스로가 타인들이 자기들을 박해하는 것을 참고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실로 참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이유가 그분은 택한 백성들이 지닌 자연적인
악과 거짓을 보시고도 참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주님과 제자들이 배를 탔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그때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그래서
자기들이 위험에 직면했는데도 주님은 무관심 하시다고 제자들은 생각하고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어 제자들을 구해 주셨다 (마가복음
4:35-41). 주님은 영적인 선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선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며 기다려야 한다.우리의 눈에 주님께서 지체하시는 듯 여겨질 때,사실 진짜로
지체되게 하는 원인은 영적인 인간다움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예증
이웃하여 살고 있는 두 가정을 살펴보자.한 가정의 경우,부모들은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그들의 응석을
잘 받아 주었지만, “아니오”가 필요할 때 “아니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강건한 인격을 세워 주지 못했다.
다른 가정의 경우,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격을 훈련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그래서 이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종종 거절했다. 위의 두 부모들중 어느 부모가 인생의 전투에 나가는 아이들을 더 잘 준비시켰을까?
어느쪽 부모가 더 진지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베푼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녀들의 요구에 강경했던
부모가 더 높은 질적 차원의 사랑을 가졌다.이들은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모들 스스로 시련을 참았다.
그 반면 연약한 부모들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내 새끼인데...”라는 이기적 마음이 발동되면서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만 여겼던 것이다.따라서 아이들의 응석을 받은 만큼 응석이라는 인격에 아이들을 담근 셈이다.
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졸라대는 소리에 타협하는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집안에서의 훈련 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3
훨씬 더 큰 시련을 아이들의 장래에 낳게 할 소지를 남긴 것이다. 강한 훈련은 미래의 큰 시련을 작은
시련으로,해볼 만한 시련으로 만들어 준다.
위의 슬기로운 부모들의 예와 같이,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종종“NO"라고 말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최상의 것이 아닐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분은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켜 주신다.무엇인가가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속이 터질 듯 우리가
느낀다 해도 굳이 실망하여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신성한 섭리는 가능만 하면 빨리 성취해 주시려는
것이 섭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주님은 선한 모든 바램에 계신다.게다가 자신 스스로 해야 할 부분, 즉
자신 속의 잘못된 경향성을 배척하며 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각자의 선한 바램이 성취되도록 주님께서
운행하여 주실 것이다. 끈기(patience)는 우리 인격 속에 가장 좋은 특성을 발달시켜 주어 우리의 자연적
포부에 변화가 오게 한다.아마 우리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다면,우리가 마시는 물, 먹는 양식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에 보탬이 되리라 본다.
하느님의 방법
위와 같이 인내심을 동원하여 기다리면서 자칫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배상(redress)
해 주실 것을 찾으시는 동시에 우리를 박해한 자들 속에 있는 선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인내심은 우리를 억누른 자를 개혁시키는데 참 수단으로 주님께서 사용하신다. 이는 영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공히 진정한 말이다.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갚아 주시되 오래 내버려두시지 않고“빠르게” 갚아 주신다는
말은 확실하게 갚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영적 사항에는 시간 개념이 없는 고로 빠르게
일한다는 생각은 확실하게 일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비유의
끝 부분에 놓여진 것은,우리 믿음의 품질은 심정과 이해성,그리고 삶에 있는 우리의 기도에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이 어떠한지 늘 점검해서 신성한 진리가 우리 속에 오게
될 때 그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두 번째 오심
474 부정한 재판관- 누가복음18장 1-8절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된 마음과 삶,여기에 신성한 진리가 영적으로 오는 바,이때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그런데 어떻게 이 진리를 받아야 할까?얼마나 많은 믿음과 이타애가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많은
이의 사랑은 차갑다.” 신성한 인격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 하느님에 근거한
믿음,하느님의 말씀 속에 있는 신성한 속성에 근거한 믿음은 거의 없으리라.우리는 세상이 일컫는 신학,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옛 사상을 벗어나 믿음이 성장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새로운 국면을 찾아
나서야 진리를 가질 수 있다.새로운 교회는 시작되었다.그 안에서 주님은 그분의 진정한 속성을 밝히
알려 주셨다.그 안에서 그분은 말씀을 내향적으로,영적으로 열어 놓으셨다. 이 새로운 교회, 새 예루살렘의
교회를 주님께서는 신성한 원리를 받을 준비가 된 이들의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그들의 삶 안에 건설하고
계신다.비록 그 교인들의 악과 거짓에 대항하는 투쟁이 오래 걸려 지체되고 있다 해도,또는 새로운 교회의
건립에 반대하는 자들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듯 인간에게 보인다 해도, 이 건설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이 장엄한 결과를 향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격려하신다.“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5
38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독선-
성서 본문: 누가 복음18장 9-14절
9.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요약
회개하는 죄인이 자기가 선하다고 떠벌리는 자들 보다 더 나은 영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덕적으로
476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18장 9-14절
외관이 깨끗한 사람이라 해도 그 심정은 악과 결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오늘 비유는 풍유적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다.따라서 그 교훈은 비유에 의해 가르쳐지지 않고 실례에 의해 가르쳐지고 있다.이 비유는
독선(self-righteousness)을 꾸짖으시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인의 한 계층으로, 이들의 특징은 종교적 행사나 예식에 아주 엄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의 대다수가 독선적이어서 남을 깔보고 자신들이 타인들 보다 더 거룩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인격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들을 두고
주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장).
세리
세리들은 정복자인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사람들이다. 이 세리들도
대체로 같은 유대인들이었지만 배신자 취급을 당해 왔다.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겸손한 세리이다.이들은
자신이 잘났다고 우쭐대지 않는 사람 곧 겸허한 상태에 있는 마음을 표현한다.
성전, 기도, 등등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심정이 주님께 말하는 것을 뜻한다. 기도란 주님께 내향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기도하였다.그는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느꼈다.그는 행동 면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게다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것이다. “나는 혼자
서서 기도해야 한다.나에게 가까이 붙지 말라.너 보다 더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자리를 자신을
위해 우선 선택한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체 하면서 그는 자신이 선하다고 떠벌리며 타인을 경멸한다.
심정 속의 악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7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악은 심정 속에 있다는 것,심정 속의 악 중 어떤 것은 아직
바깥쪽의 잘못된 행동으로 나올 기회가 없어서일 뿐 밖으로 표출된 악 보다 더 큰 악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성이 지독하게 미운 것임을 발견할 때까지 제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우쭐대는
것이 우리들이다.
선한 사람은 타인이 지니지 못한 어떤 특출함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으쓱거리지 않는다.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찬양한다.그는 자신의 장점을 잘 이용해서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인도 되도록 노력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의 인격과 경건한 행동을 떠벌렸다. 자기들은 매우 신앙심이 깊어 어김없이
십일조를 바친다고 상상하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두고, “...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라고 꾸짖으셨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의 특색은 놀랄 만 하다. 그 기도에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도 없고 도움을
필요로 한 것도 없다.그는 회개할 필요성과 하느님이 도우실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한마디로
자기 만족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그들은 자신 속에는 악이 없다고 보는 한편,타인들의 죄에는 매우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그리하여 타인을 깎아 내림으로 자신을 더 추켜 세우는 것을 추구한다.
타인을 경멸함
고결한 영혼은 고상한 인간을 믿는다.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타인의 동기를 언제나 의심한다.부패된
영혼은 타인 속에도 미덕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타인을 추정해 보는데 자신의 동기가 지닌
품질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패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간주한 이유는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렸다는데 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시는 데에 있어서
사랑과 동기에 중심을 두시는 주님의 속성을 음미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분의 속성 측면에서 그분께
접근함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478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18장 9-14절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그를 동정하여 돕는 쪽에 있어야지 그를 경멸하여 분리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도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아마 그도 죄에 빠지기 전,우리가 심한 시험에 저항했던 것 같이 그도 자기
속의 악한 경향성에 저항해 보려고 노력 했었을는지 모른다.
독선은 악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으로 정복하기에 가장 힘든 악이다. 자신이 성인 군자에 맞먹는다고
상상하거나, 자기가 죽으면 아마 천국 중에서도 상석에 앉게 될 것이라고 어림잡는 이들은 천국적 삶의
조건을 지독하게도 음미하지 못할 것이고,미안하지만 천국의 하석도 차지하지 못할 것임을 저절로 발견하리라.
타인을 경멸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필시 그에 따른 악도 발견되는 게 통상적이다. 그 사람이 의로운
듯 착각되었다면 그의 의는 필시 외향적 측면일 뿐 심정 측면에서의 의는 아닐 것이다. 선한 자는 악을
미워하되 특별히 자신 속의 악을 미워한다.따라서 그는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해 낸다 그러나 저 잘났다는 외적인 사람은 죄인을 그의 죄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 속에 있는 악은 경멸하나 자신 속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착각한다.
세리
세리의 조건은 위와 다르다. 경멸과 차별 대우를 받아 온 그는 성전 멀찍이 서서 자신은 성전에 가까이
다가설 존재도 못된다고 여긴다.그는 낮은 위치,겸손한 지위만을 취한다. 그는 자신의 눈을 하늘로 감히
들어올리지도 못한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죄의식으로 그는 자신의 인격이 비천하다고 느낀다.
영적으로 세리는 진리로 잘 훈련되지 않은 마음, 진리를 높은 관점으로 끌어올리는데 있어 자기 이해성이
준비 안된 마음,그럼에도 하느님의 명령에 자신이 불성실했음을 인정하는 마음을 표현한다.“저의 불법이
저를 사로잡아 위를 쳐다보지 못했나이다.” “주님이시여! 정의는 당신의 것일 뿐, 저에게는 잡동사니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슴을 침
세리가 자기 가슴을 쳤다는 것은 악의 근원이 자기 심정이요,이 악은 정죄 되어야 마땅한 것,그것들에
자신이 반대되게 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 속의 어떤 선함도 떠벌리지 않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79
자신이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으며 자기가 의롭다고 어깨를
으쓱대지도 않는다.그는 어느 누구의 잘못도 혹평하지 않는다.오로지 이렇게 외친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자신을 깎아 내리고 주님을 드높인다. 자기만 옳은 줄 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 잘난 척 하는 것만 내놓을 뿐이어서 그들은 주님의 도움을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그러나
회개하는 세리는“당신 보시기에 어느 누구라도 의롭게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부디 당신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 라고 간구하는 바, 이 기도의 영은 다음의 시편과 같이 느낀다. “당신은 제물을
즐기지 아니 하시며,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 하십니다.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얕보지 아니 하실 것입니다” (51:16,17).
집, 올바름
그래서 주님께서는“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로 그
세리였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음 속의 집이란 우리의 의지이다. 악은 의지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 속의 자연적인 악들에 대항하게끔 자기 의지를 놓고 거듭남을 추구하기로 작정해 버리면
언젠가 우리는 결국“올바른 사람,” 심정과 삶에 의를 만드는 때를 맞이하고야 만다.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향적인 영으로부터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가는 때를 말한다. 이때 우리는 실제 행동에서
무언가를 이루게 된다. 집이란 단어를 둘로 대비하여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향적 의지는 하느님의 집(성전)이고,
그의 자연적 의지는 지상에 있는 인간 자신의 집이다.
내향적 의지를 가지고 죄를 뉘우친 세리는 주님을 만나 자기 죄과를 인정한 뒤 자연적 마음과 삶에로
내려가 주님의 자비와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의 행동을 올바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자기 속에서“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나고,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가
자신을 보건대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겠지만,이제 그는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그
까닭은 그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위의 것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함을
주님의 공로로 돌리리라.
올바르지 못한 것
480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18장 9-14절
그러나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를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놓인 악을 내던지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첫째라고 간주하겠지
만 천국에서 평가할 때 꼴찌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의 정의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정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다.” 거듭남의 초기에 우리는 마음속에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즉 독선과 겸손 둘
다를 지니고 출발한다.거듭나는 작업은 전자를 추방하고 후자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우쭐댐
이 비유는 원리를 실제적인 서술로 요약해 놓고 있다. 즉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물론, 이 서술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겸손해지되 차후에 우쭐대려고 처음에는
겸손한 척 하는 식의 겉으로만 겸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이런 자는 자신의 의지,이해성, 그리고 신중함이
하느님의 선과 진리,그리고 섭리와 비등하거나 조금 더 높다고 우쭐댈 소질이 충분한 것이다.이런 자의
행동은 자신을 더 낮은 영적 조건에로 빠뜨리고 말아 실제로 자신이 낮아지고 마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벌주기 위해 낮은 데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인격 면에서 낮은 표준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나 이해성을 신성한 의지나 진리에 종속시켜 그분의 명령에 의해 사는
사람은 실지로 삶의 높은 영적 표준을 채택한 셈이 된다.인격 면에서 그는 드높임을 받게 된다.고백도
회개도 하지 않은 죄는 우리와 더불어 남아 있게 되나, 진실로 고백하며 회개해서 더 이상 짓지 않게 된
죄는 우리들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마치 잘못을 저질렀던 이전의 인격으로부터 멀리 여행하는 듯이 된다.
주님께서 강경하게 정죄하신 악 중에서 자기를 뽐내는 악(self-exaltation)보다 더 큰 악은 없을 것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겸손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18:4) 라고 가르치셨다.
신성한 도움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81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악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회개는 그의 마음이 신성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그러나 우쭐대는 자는 회개를 추구하지 않는다.인간이 자기 스스로 행한다고 하여
생산된 선은 순수한 선이 아니다.이 선은 자기 공적이라는 것으로 이미 색칠해져 있을 뿐이다.천사들은
주님의 인도와 도움 없이는 어떤 조그마한 선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악마는 어떤
천국적인 선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인간이 우쭐댈 때,그는 인간 삶의 필연적 결과로 자신이
창피를 당해야 한다.
이런 법칙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우리는 명확히 볼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끌어당기겠다면,그는 주님과의 연결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 연결 관계가 더 충분하게
솔직한 관계로 되면 될수록,더 충만 되고 완전한 삶이 그의 것이 된다.이 연결 고리를 끊어지게 하는
갖가지 것들은 신성한 축복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자기 본위로 움직이겠다고 하는 인간 속의 갖가지 것들은
천국 생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자신에게 올 수 있는 인격의 생명 고리를 끊어지게 만든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단순한 그릇에 불과하다.이 그릇은 유입되는 생명을 썩게 할 수도 있고,그 생명을 고결하게
받을 수도 있는 그릇이다.
인간 영역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를 지배하는 사랑으로부터 인격의 품질을 갖게 된다. 이 품질은 인간 전체에
고루 퍼져 있으면서 활동 영역에서 각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준다. 이것은 인간을 두루 감싸고 있는 어떤
분위기인데, 우리는 이를 영역(sphere)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경우, 장미이든 독성이 있는 잡초이든 모두
제 나름대로의 영역을 가지고 있어 그 영역 때문에 우리는 각 식물을 식별한다. 개는 냄새라는 예민한
감각으로 주인의 영역을 알아내서 주인을 따르게 된다. 우리의 영역은 영적이고 자연적인 것 둘 다를
가지고 있다.주님께서 참생명을 인간에게 흘려 보내실 때,이 생명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통과하지 않고는
인간에게 흘러들 수 없다. 깨끗한 비라해도 죽어 썩어 가고 있는 시체에 떨어질 경우 그 비의 영향이 바뀌듯,
인간의 영역은 흘러드는 생명의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생명의 말씀
482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18장 9-14절
천국 생명이라는 동일한 품질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흐르는 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똑같이
이 생명을 받는다.그리고 각각은 그 생명을 자기의 고유 품질로 변화시킨다.악마는 지옥의 영역이 감싸고
있으므로 선을 악으로 부패시키는 바,주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뀌게 한다.애당초 주님께서 내보내신 생명은
천국적인 것이지만 이 생명은 악마 속에서 지옥이 된다. 주님께서 순수하게 주시는 것들을 인간은 자신의
불순물 안으로 흡입한다.그런고로 주님은 악마에게 천국을 주실 수 없다.그 이유는 천국에서와 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악으로 빽빽해진 영역은 모든 선과 진리를 질식시켜 썩게 만든다.마치 유독 가스로
꽉 찬 항아리에 신선한 공기가 유입될 경우 그 공기마저 같은 품질로 떨어져 버리는 격이다. “너의 불법이
너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지게 한 것이다.너의 죄가 그분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주님은 악 속에 거하실 수 없다.오로지 우리가 받아들인 그분의 선과 진리 속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있되, 회개하는 겸손한 영과 더불어 그곳에 있는다.
그리하여 뉘우치는 자들의 심정을 재활시켜주고 겸손한 영을 다시 살려 주리라.” 그러나 저만 옳은 줄
여기는 마음은 이기심과 악이라는 침침한 영역만을 창조하여 천국 원리가 뚫고 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겸손은 인간 영역을 부드럽게 하며 신성한 태양이 비치도록 허용하고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에 천국의
영향이 스며들도록 한다.그리하여 겸손한 자는 자기가 행한 선함,자기가 아는 진리들이 자신 스스로에게서
근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이 계속 자기 속에 흘러듦으로 자기는 한 순간이라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죄를 뉘우치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주님의 인격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예증
때로 주님께서는 인간이 큰 죄에 빠지는 것까지도 허용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빠지지 않고서는
달리 자기 속의 악을 보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회개한 사람은 신성한 도움의
절실함을 고통스럽게 의식한다.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도움을 추구하고,그 도움에 자신의 마음을 연다.
그러나 독선적인 사람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고로 마음 문을 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겸손은 야곱의 사다리와도 같이 인간 마음에 놓여져 천국과 주님에게 까지도 도달 가능하게 해주고,
주님의 특사인 천사들이 내려오는 도구로 사용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한 계단 한 계단 높은 위치에로의
인격의 상승이 가능하게 한다.이런 사람은“힘에 힘을 보태어 시온의 하느님 앞에 나와 선다.” 인간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릴 뿐,자기 속에 악이 있음을 부인할 때,그는 자기 속의 악을 자기의 것으로 채택하는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83
바,그 악 자체가 곧 그 사람 자신이 된다.이러면 사람 속의 어떤 악도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길이 없다.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은 그 죄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자기 속의 악을 거절하며 미워한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접근 하실 수 있으시고, 그가 고백하고 미워하는 죄로부터 그가 멀리 떨어지도록
그를 인도하여 주신다.
자기를 추켜 대는 사람이 자신의 선함을 떠벌려 자기 속의 악도 선이라고 우기는 동안,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외친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시편 51:1-3).
외적인 겸손, 선한 일
인간 겸손의 증거는 그 사람의 예절(manner)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삶속에서만 발견이
가능하다. 위선은 그 목적을 감추기 위해 겸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때가 아주 흔하다. 경건한
외모 그 자체는 신앙의 등차와 비례하지 않는다.그것들이 안에 있는 내용물과 상응 될 때,즉 내향의
원리가 밖으로 빠져 나온 만큼에서만이 비례가 성립된다.속에 원리가 없는 껍데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주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행하지 않는 인간의 일들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선한 일은
구원에 필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부각시키려 들면 우리는 또 다른 착각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는
것도 미리 눈치채고 있어야 한다. 일만 가지고 인간이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믿음만 가졌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선한 원리로부터 착수된 선한 일 속에 사랑과 믿음이 담겨 있어야 구원이 가능하다. 회개,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회개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게 해서 선 쪽으로 향하게 해준다.
본문의 세리는 갑자기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사랑과 믿음,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영위한 결과 점차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된 것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련됨 (culture)
오늘 주제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경고도 보내 주고 있다. 즉 외모로 볼 때 세련 되게 보이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주 도덕적이고 세련된 듯 보이는 사람이 아주 더러운 심정을 소유할 수도 있다.
484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 누가복음18장 9-14절
찬란한 깃털로 덮인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불협화음일 때가 많다. 그 반면 지극히 평범한 깃털을 지닌
새일 지라도 그 소리는 매우 달콤함을 귀에 전달하여 준다.감각적인 측면,즉 외모의 세련됨은 낮고 천한
인격을 덮고 있을 때가 많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본산지인 바빌론을 문화적 측면에서
본다면 세련됨의 중심이었다.
외적 세련됨에 도사린 한가지 특별한 위험은 세련되게 보이지 않는 타인을 깔보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그러나,“하느님은 속마음을 헤아리신다.”자아를 찬양하는 영,자아 사랑으로 자신이 부유하다고
느끼는 영은 세상을 향해 자신을 뽐내 보이고,자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간주하는 바,마치 바보들이
돌진하는 곳에서 천사들이 밟힐까 걱정해야 하는 격이다. 이런 영의 소유자는 영적 삶을 위한 최적의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만다.그러나 겸허한 영,유전적인 악한 경향성 속의 못된 것들을 인식하는 영의 경우, 설사
아주 힘든 환경 여건에서까지도 거듭날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주님의 자비는 발견하게 해 주신다. 마치
삭막한 바위틈에 떨어진 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위라는 여건 속에서도 씨는 자신의 뿌리를 위한 발판을
발견하고, 더 길고 더 강한 뿌리를 내려보내 얼마 안되는 흙으로부터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더욱 힘찬 뿌리를 생산해 바위틈을 비집고 내려가 견고한 기반을 형성해 뭇 나무들처럼 성장을
영위한다. 진실로“주님께서는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어떤 선도 유보하시지 않는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정의를 실천하는 일,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8).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85
39
선한 목자
-신성한 사랑-
성서 본문: 요한복음 10장 1-16절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 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486 선한 목자- 요한복음10장 1-16절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 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목자
우리의 주님은 신성한 목자이시다. 그분의 신성한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신성한 지혜는 우리를
가르치신다.그리고 신성한 권능은 우리를 보호하신다.우리는 이 세 가지 신성한 속성의 하나 됨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상 천하의 한 분 하느님으로, 창조자, 구속자,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으로서 보게
된다. 주님은 구약 성서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고 하여 여호와로서
알려져 있고,신약성서에서,“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선포하신다. 오늘 본문, 여타 많은 구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시어 예수님은 한 분, 유일한 하느님, 여호와가
그분 자신임을 명백히 해 놓고 있으시다.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 국면인 사랑과 지혜,그리고 권능에서
신성한 생명을 인간에게 충분히 보여 주었다. 신성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섭리의
지키심 아래 천국적 양우리로 인도되어진다.
양
정확한 의미로 국한해서 볼 때, 양(sheep)은 이타애의 원리, 또는 이웃을 사랑함을 표현한다. 넓은 의미에서,
양은 인간의 애정으로부터 있게 되는 모든 선한 원리를 표현한다.개인적 측면에서,주님의 양이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많이 받고자 마음 문을 열고,받아 자기 삶에서 체현할 준비가 된 이들을 말한다.
양우리 (sheepfold)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87
양우리는 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 뿐만 아니라 지상의 교회가 주님께 신실하여 순종하고 있다면 그
교회까지 표현한다.따라서 양우리는 천국적 조건을 갖춘 모든 이들,그들이 영계에 있든, 자연계에 있든
모두를 망라하는 주님의 천국적 왕국을 말한다.개인 측면에서 볼 때,양우리는 거듭나는 삶 속에서 하나를
이루는 천국적인 선과 진리가 있을 때 우리 마음에도 존재한다. 비교 측면에서 양우리는 포도원으로 표현되는
영적 교회에 비해 천적 교회이기도 하다.목자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을 표현한다.성실한 지도자와
선생은 내면의 사랑과 영적 생명에 의해 움직여지고, 타인들의 영적 생명이 발달되도록 도우려는 사랑으로
움직여진다.양떼란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다.
문
인간은 진리로 가르쳐지고 사랑으로 인도되어진다.그런데 인간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기 전,또는
진리에 순종하기 전,반드시 인간은 그 진리를 알아야만 된다.이 진리는 영적 삶에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적 진리에 관한 지식은 인간으로 영적 삶에 들어가게 하는 문에 해당한다. “만일 너희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나 인간이 계명을 지킬 수 있기 전 그는 반드시 계명에
대해 먼저 배워야 한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지식은 진리의 삶에 인간을 소개시켜 주는 문인 것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주님은 양우리의 신성한 문이시다. 문을 통하여 양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을 알고,그분께 나아가,그분의 신성한 인격 측면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신성한 인성 측면에서 주님께 접근하는 이들은 그분께 스스로 문을 열고,양으로 표현되는
영적 선과 진리에 관한 원리들을 스스로 살아 있게 간직한다.
동양의 양우리는 돌담 같은 울타리로 사방이 둘러 쳐져 있고 한쪽에 문이 있어 밤에 모든 양이 들어가고
나면 잠그고,아침에는 목자가 와서 문을 열고 양떼를 이끈다.따라서 도둑이나 이리는 문을 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침입할 것이다.
문지기 (porter, doorkeeper)
문지기란 우리의 합리적 능력,또는 생각하는 능력을 표현한다.이 능력은 마음의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 속으로 들어오려 하는 각종 사항들을 점검한다. 만일 우리가 삶에 관한 주님의 선하고
488 선한 목자- 요한복음10장 1-16절
참된 원리들을 사랑한다면,그래서 그분의 신성한 섭리들을 신뢰하고 있다면,주님이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밝혀 준 진리들은 자신 속에서 문으로서 존재한다.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지고 수용한 진리 외에도,우리의
합리력 역시 문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자신이 알고 인정한 진리의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목자가 된다.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딴데로 넘어 감
그러나 모든 악과 거짓된 영향력은 신성한 진리의 문이 자기들을 점검하기를 거절한다. 그들은 공인된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데로 넘어 들어가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적인 열정이나 편견 등을
통하는 부당한 방법을 써서 우리의 생각과 애정에로 들어간다.자신에게 밝히 알려진 진리 외의 다른 방법,
즉 자신이 선하고 진정하다는 것, 꽤 쓸만하다고 여겨져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우리 영혼을
해치려고 하는 영적인 도둑이며 강도인 것이다.악에 잘 기울려는 우리의 경향성(즉 우리의 자존심, 분노,
타인을 경멸함,기타 지옥적 열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대한다거나
귀를 기울여서도 안된다.마치 양들이 도둑이나 강도,이리떼를 양우리에 들어오라고 환영할 수 없는 것과
같다.이런 사실을 깊이 새겨 둔다면,지옥이 내뿜는 영향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때 과히 힘들지 않게 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신성한 말씀에서 끌어내서 밝혀져 인정한 진리라는 문을 통하여 그분의 천국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의 내향적 마음에 들어오신다.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한 도움,영적 생명을 공급받는데 있어서
신성한 말씀을 통하지 않고 삶의 여타 다른 길로 오려는 지옥의 영향,세상적 방법에 기대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말씀에 의거 말하지 않으면,너희 안에 빛이 없는 것이다.”
목자와 그의 양떼
동양에서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일반적으로 목자는 양떼의 소유자일 경우가 많다.
초지는 여기 저기 흩트려져 있어 목자와 양떼는 풀밭을 찾아 다녀야 한다. 게다가 물을 마시려면 더욱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이럴 경우 각종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을 받기 일쑤인 바,양떼는 목자에 의존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89
양을 이름지어 부름
우리가 개나 말에 이름을 지어 부르듯,목자들은 양을 이름지어 부른다.그래서 양들은 자기 이름을
알고,목자의 소리도 알고 있다.양들은 목자를 신뢰해서, 목자가 부를 때 쉽게 다가와 목자가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른다.이와 같이 주님의 양들은 신성한 목자에 신뢰를 갖고 있다.그들은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소리임을 인식하여 그분의 진리에 순종한다.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 이름이란 어떤
개인을 표시하기 위해 주어진다.이름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각 개인은 자기들의 품질, 또는 인격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주어져 있다.이런 일은 북미의 인디안이나 기타 많은 국가에서 행해져 왔다.이와 같이 이름은
품질을 표현한다.
양을 부름
우리의 목자 되신 측면에서 주님은 그분의 양들을 이름을 수단으로 해서 부르신다. 즉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영적 삶의 어떤 품질을 우리에게 밝혀 주실 때,영적 삶의 상태나 품질을 우리에게 밝히 알리실 때,
그분은 진리를 수단으로,즉 이름을 지어 부르신다.주님께서는 각 인간의 삶의 매 단계에 있는 품질과
조건에 정확하게 맞도록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채택하신다.영적으로 그분은 각자에게 필요한 진보,
영적 조건에 채택 가능하기 위해,순간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신성의 인도가 있기 위해,그분의 양을
이름지어 부르시고 있다.
밖으로 데리고 나감
위와 같이 해서, “주님은 인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 즉 선하고 진정한 원리와 그것을 이해함으로부터
일상 생활에 적용함이라는 데까지 이끄신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되 그분은 우리 앞에 서시어 데리고
나가신다. 다시 말해 돼지 떼를 몰아치듯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우리에게 주어 밖으로 몰아내시지 않는다.
마치 양들이 목자에게 인도되듯,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신다.이런 인도하심을 주님은 인간들 앞에서 보여
주신 선한 삶의 예를 가지고 성취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과 본보기 속에서 언제나 인간 앞에
490 선한 목자- 요한복음10장 1-16절
서 계신다.
목자를 따라감
“양들은 그를 뒤따라간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의지를 그분의 의지에 복종되게 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이다.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섭리로 보호되어진다.그들은
실제의 삶에서 그분을 따른다.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안다.즉 그들은 그분의 진리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진리에 순종하기를 기뻐 맞이하는 이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상황에 자신을 가져다 놓게 된다. “네가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그 사람은 교리가 하느님에 속한 교리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예증
여러분이 목마르고 배고플 때,자기 육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그래서 먹고 마실 것을 발견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먹고 마셔야 할 양식임을 금방 눈치챈다.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먹고 마신다.그것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않아야 하느냐라는 따위의 어떤 논쟁도 여러분 앞에 필요치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도
이와 같아서,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을 얻게 되는데,그 이유는 그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그들은 자기 앞에 있는 선과 진리를 금방 눈치챈다.그들은 천국 원리에 마음이 열리어
있어서 직바로 그 원리에 응답한다.그들은 선에 속하는 좋은 품질,진리에 신실해야 함을 직바로 지각하고
있다. 이 직감력(intuition)은 동물이 자기 먹이를 찾는 것이나 자기에게 부적당한 것을 경고해 주는 어떤
본능과는 아주 구별되는 능력이다.
주님의 양떼 각각 속에 있는 심정과 이해성은 선하고 진정한 원리에 응답한다.이는 마치 눈이 빛에,
귀가 소리에 응하는 속도와 같을는지 모른다.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그분을 따르는 신실함은 영적
원리를 내향적으로 인식하게 한다.그들이 아는 것은 논쟁 따위로 아는 것도 아니요,자연적 감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심정으로부터“사랑이 스스로 확신하게 해주는” 가운데 아는 것들이다. 주님의 영적
양들은 진리의 소리를 안다.그 이유는 진리가 주님처럼 되라고 그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님이 산에서 가르치심을 끝내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doctrine)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91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학자들도 교리를 가르쳤지만, 인간의 권위, 전통의
권위를 추켜세웠다.그러나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권위,영적 빛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 볼 눈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서 안에서 진리의 빛을 쉽게 본다.
낯선 사람
주님의 양떼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적으로 낯선 자란 주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주님을 사랑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추상적 측면에서, 낯선 자란 신성한
진리로 볼 때 이상한 것,즉 거짓 원리이다.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사람은 거짓된 설득이나 악한 영향력에
이끌려 가지 않는다.그들은 그런 영향력을 거절하고 금한다.악과 거짓에 대한 직감적인 거부 반응은
지옥의 영향력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자동으로 울리는 경보 장치와 같은 것이다.
표현들
때때로 어떤 이들이 불평한 것 중 하나는, 양과 같이 힘이 없고 무방비 상태인 동물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느냐 하는 것, 오히려 뭔가 더 강력하고 자기 방어력이 있는
짐승이 선한 자들의 표현물로 사용하는게 더 타당치 않을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제시는 상응이나
상징의 본성에 무식한 자기를 폭로하는 것밖에 안된다.자존심이 강하고,강하다는 자만심으로 꽉 찬 전투성이
강한 짐승,제 몸을 잘 지킬 수 있는 짐승들은 우리 속의 이기심,타락하는 마음, 즉 구세주가 필요 없다고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그러나 인도자를 꼭 구해야 한다는 양의 무력함은 거듭나는 인간,자신을 구원하는데
자신은 무능력함을 느끼는 인간,그래서 신성한 인도자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을 표현한다.
양의 유순함,다정 다감한 속성은 내면이 바뀌어 거듭나는 인간을 표현한다.
이 비유는 일부 바리사이파인을 포함해서 군중을 향해 말해졌다. 그들이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게 하나도 없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더 가르치셨다.“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신성한
진리 측면에서 그분은 목자이신 신성한 사랑에로 인도하는 문, 그분의 교회, 천국인 양우리로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다.
492 선한 목자- 요한복음10장 1-16절
도둑과 강도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이다.” 이 말씀은 세상적인 시간이나 개인에 관련시킬 경우
글자대로는 아니다.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님 앞에 먼저 세상에 와서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을 저주하실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이 구절을 영적으로 볼 때,주님 앞에 먼저 온 모든 것이란 중요도에 있어서 주님보다
자신을 먼저 놓는 모든 것들,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보다 자신의 논리를 추켜 대는 자들,주님이 밝혀
주시지 않아도 제 스스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말한다.
추상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악하고 거짓된 모든 원리들은 주님 앞에 자기 것을 먼저 놓으며,그분
보다 자기 것들이 더 낫다고 추켜올린다. 악한 원리는 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 주님으로부터 선을
분리시키려 들므로 그것들은 강도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신성한 것들로 여겨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될 경우,팔이 신체에서 잘려 나가 있는 것
같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주님에 대한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속성을 믿는 것은 영적인 빛에 마음이 열리게 하여 영적으로 총명하게
해준다.이런 믿음이 없을 경우,인간은 자연적 빛에서만 살게 되어 영적 빛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천상
천하의 유일한 하느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영적 삶에로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나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즉 신성한 속성과 개성을 알게 만드는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신성한 사랑을 납득할 수 없고,접근도 불가능하다는 말이다.주님을
통하여 인간은 내면의 삶인 영적 삶에로“들어가고,” 실제적 삶인 자연적 삶에로 “나오기도” 하는 바, 신성한
목자에 의해 인도되고 가르쳐지고 보호된다. 그래서 매일 해야 하는 적극적 삶 속에서 천국의 풀밭을 발견해
갈 수 있다.다시 말해 이들은 신성한 속성의 내면적 이해에로“들어가고,” “밖으로 나가” 일상 생활의
행위들에 천국 원리를 적용하게 된다.
목숨을 바침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93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그 인성을 영화시키심 속에서, 마리아에게서 얻게 된 인간적인
모든 것을 죽이심 속에서,신성한 인간이 신성 자체와 결합됨으로 해서 그분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주셨다.
이런 과정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 악에 관한 모든 것은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거짓 되고 악한 원리들,“도둑이며 강도”인 그것들은 인간에게 와서 모든 선과 진리들을
탈취하려 든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에게 오셔서 더욱 많은 선과 진리를 주시고 악과 거짓에서 선과 진리를
구해 주신다.
삯꾼
비유의 글자에는 선한 목자로서의 주님과 삯꾼 또는 악한 목자로서의 유대인의 지도자들과의 비교가
담겨 있다. 주님은“목자처럼 그분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고, 새끼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양들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사야 40:11). 그러나 삯꾼은 삯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사람, 비록 그가 적절할 대가를 받고 일하고 있다
해도 자기 일이 유용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때의 대가는 그의 삶이 기대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이 영적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음식을 먹되 먹기 위해 사는게 아니라 살아서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해 먹는 것뿐이다.삯꾼은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요,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일한다.
삯꾼의 경우,세상적 소득이 중요한 과제이겠지만,선한 자의 경우, 그것은 종일 뿐, 주인이 아니다.
삯꾼은 양을 소유하지 않는다.즉 그는 삶에서 자신의 원리로 채택된 선한 원리가 없고,자기 삶에서
그 원리가 체현되지도 않는다.그는 양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이런 삯꾼일지라도 원리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다.그러나 그 지식에 실제로 흥미가 없다.따라서 악들이 자신 속에서 일어날
때,그는 그 악들에 투항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리에게 그것들을 내버려 두어 주님이 자신에게 기껏 가르치셨던
선하고 참된 원리들을 흐트러지게 하며 잡히게 한다.
이리
이리란 거짓 원리를 사랑함이다.이 사랑은 세상적 마음으로부터 선을 포획하고 진리를 흩트린다.그러므로
이리는 죄인 자신의 심정 속에 존재한다.그래서 시험이 일어날 때,즉 악과 거짓이 습격을 감행할 때,
494 선한 목자- 요한복음10장 1-16절
악령이 자기를 덮칠 때, 그 사람 속의 원리의 수준이 삯꾼이어서 선한 원리라는 영적인 양을 내향적으로
돌보지 않는다면,그는 영적인 양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그는 악령과의 대결을 회피함으로 악과 거짓의 진격을 허용하여 주님이 자신의 마음속에 이식해 두신
선과 진리 쪽으로 기울려 하는 품성까지 파괴되게 하고 말 것이다.
안다는 것과 알아지는 것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자기 것으로 알고 계신다.양들은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 안에 거하고,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런데, 주님과 아주 친하다고 떠벌리는 다른 것들도 있다. 심판 있게
될 때,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신다.“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거라.” 그 반면, 주님은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안다.” 즉 주님을 사랑하여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을 구세주로서 안다.이에 대해 그들은 어떤 논쟁도 요구하지 않고,인간적
권위로된 주장이나 교조도 필요 없다.이들은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을 뵈러 나온 사마리아인들,그 뒤
그 여자에게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고 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다(요한복음 4장).
세상적 인간은 그리스도에 관해 논하고,그리스도의 자격 여부를 가지고 말다툼한다.그러나 영적 인간은
그분을 보고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분을 따라 영적 삶의 축복 안으로 들어간다. 진리는 인간의
영(spirit)에 호소한다. 육체적 눈에 보이는 기적 같은 외적인 사건은 우리의 감각들로 감탄과 경이를 뿜어내도록
강요한다.그러나 기적들은 인간으로 영적 진리를 확신케 하지 못한다.열린 영혼(soul)안에만 진리를 진리로서
아는 능력이 있다.이 능력은 감각에 호소되는 것을 훨씬 멀리 초월한다.영적 인간에게는 진리 그 자체
이상의 어떤 명백함이 없다. 영적 인간에게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보증(endorsement)도 필요 없다.
순백함(simplicity)의 필요
인간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영(spirit)의 순박함, 삶의 여정에서 주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들,
겸손,사랑 있는 온유한 심정이다.따라서 열이 있는 흥분, 이기적 포부, 예사롭지 않은 사건을 열망하는
따위는 없애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돌보아 주심 밑에서 일상 생활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할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95
수 있어야 한다.신성한 아버지(Divine Father)가 신성한 인성(the Humanity)이라고 인정하면서 신성한
인성은 영화하심(glorification)을 통해 신성한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셨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선한 목자로서의 주님이 그분의 양을 인정하시고,또한 그분의 양들은 각자의 정도에 따라 그분을
인정하면서 거듭남 속에서 그분과 하나를 이룬다.
다른 우리 (the other fold)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주님의 양우리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그분의 다른 양떼란 이방인들,아직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은 이들,그러나 가르침을 받아 인도될 사람들이다.
이를 좀더 꼼꼼한 측면에서 살핀다면, 두 우리(the two folds)란 주님의 왕국들, 하나의 거대한 천국을
이룰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이다. 영적 천국은 주님께서 육을 입고 오심과 영들의 중간 세계(intermediate
world)를 정리 정돈하셨을 때 형성되었다. 이 때 영적 천국은 영들의 세계에서 오래 기다려 온 사람들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천적 양우리에 소속되지 않는 이들을 모으시어 한 목자 아래 영적 천국을
이루시게 함으로 그분이 보시기에 천국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양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새 생명을 얻으라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해 목숨을 내려 놓으셨다. 이와 같이 거듭남 속에서 우리는
자신 속의 자연적이고, 이기적이며 세상적인 생명을 내려놓고 새로운 영적인 천국 생명을 얻어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6:25).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때, 그분을 더욱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때, 이러한 때를 갖게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고,잘 먹고 잘 사는 잘되어 간다는 인생 시기,가상적인 삶에서
보다 시련과 슬픔의 인생의 시기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이 경우에서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그러면서도
온유하신 그분의 팔이 막다른 골목에 처박힌 극한 상황 넘어로 우리를 들어올리시는 것을 느껴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양들 같이 우리에게도 최고의 풀밭은 가파른 암벽 투성이의 산 남쪽 등성이에
펼쳐져 있다.이 등성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강함,용기,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성한 목자는
우리의 강한 정도에 따라 인도해 주시고 유용한 쪽으로 우리 스스로 진력하도록 모든 강함을 주신다.
496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40
포도나무와 그 가지
-신성과 인간 생명-
성서 본문: 요한 복음15장 1-10절
1. “나는 참 포도 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조리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3.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어라.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97
요약
신성한 사랑은 만물의 아버지 되시고,우주의 생명이다.“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자기
존재를 갖는다.” 창조물은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신 그분과 연결을 맺는 가운데, 그 연결을 수단으로 해야만
살아 있다.
표현적 의미
이 비유는 심어진 포도나무와 그 나무가 농부에 의해 돌보아 지는 것을 묘사해 놓고 있다.자라는 나무,
기타 다른 식믈은 마음안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원리들을 표현한다.농부는 아버지,신성한 선, 신성한
사랑,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성에 내재하는 신성이시다.인성은 신성한 진리, 또는 신성한 지혜이다. 영화하심
속에서,신성한 인성은 유일한 하느님,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분 속에서 본체이신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다.
그래서 주님은“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사랑은
진리속에 내재하는 생명이다.그래서 사랑과 진리는 우리가 거듭날 때까지 둘로 존재한다.
포도나무
주 예수 그리스도는“참 포도나무”이시다. 그 이유가 그분은 신성한 사랑이 체현되어서 명백해진 신성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분(one Person) 이신 유일한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에게는 사랑과 지혜,
권능이라는 세 국면으로 알려지고 있다.기독교,특히 새교회 안에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은 총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분은“참 포도나무” 이시며, 신성한 사랑, 즉 아버지로 속이 채워져 있는 신성한 진리
이시다.
포도원
포도원은 마음안에 있는 교회이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이사야 5:7). 포도원에
498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있는 포도나무는 교회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다시말해 교회속에 있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의 진리이다.
신성한 진리가 인격화(personification) 되었을 경우, 주님은 신성한 사랑이 세상에 심으신 “참 포도나무”
이시다.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있듯이,사랑으로부터 진리는 파생된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듯이, 아버지인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간을 내보내셔서 인간 구원을 위한 교회를 형성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참 포도나무”를
심으셨던 것이다.농부가 포도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꾸듯,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 곧 신성한 진리를
돌보신다. “나, 주는 그 나무에 매 순간마다 물을 주며 잘 가꾸리라. 그 나무가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밤낮으로 돌보리라.”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인성을 통하여 우리가 아는 모든 진리들 안에 내재하시어 역사하신
다. 진리,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생명력도 없다. 진리의 생명은 그 진리안에 내재하는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존재한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냄
포도원에서 농부는 죽은 가지를 잘라 내고 살아있는 가지를 정돈해서 더 나은 열매가 맺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다 진리의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돌보신다. 악과 거짓이라는 죽어있는
것들을 거두어 내시고, 훈련을 수단으로 우리속에 있는 선한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어 전 보다 더 나은
선한 것이 되게 해주신다.
가지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지에 해당되는 것은 그분의 자연적 어머니로부터 파생된 인간적 애정들이다.
그분은 그런 것들 중 죽은 것은 거두어 내셨고, 좋은 것은 순수하게 하셔서 신성한 생명이 그분안에서
충만 되도록 하시었다.그러나 인간의 경우 포도나무 가지란 진리는 받는 개개인이다.가지의 생명은 우주의
한 생명으로부터 뻗쳐나가 있다.가지가 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듯,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우리를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로 만드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Lord's presence) 이시다.
교회는“주님의 신비한 몸”이라 불리운다. 유아시절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순진 가운데에 있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함에 따라 자아 의지가 튀어 나올 때, 주님은 시험을 통하여 악한 것 곧 죽은 것들을
거두어 내심으로 더 순수해지게 하시고, 좋은 것 곧 살아있는 것을 더 생생하게 하심으로 그분과 더 가까운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499
하나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실제에 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주님에게서
스스로 분리해 버린다. 진리가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여서 이타애와 사랑을 성장 시키지 않으면 가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주님은 인간을 위해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계신다.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에 저항하여 그 악을 금하려고 애쓰는 한,우리 속의 죽은 것,악한 것을 모두 거두어
주시고,우리가 받겠다고 애쓰는 한 선한 모든 것을 주신다.
어느 때가 우리에게 있어 행복한 순간일까? 그 때란 주님께서 우리속에 있는 죽은 것인 악한 것을
거두어 가시고 부분적으로 나마 선한 것을 순수하게 해주시겠다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일을 우리가 방해하지
않을 때이다. 더 나아가 악에서 건져내어 선쪽으로 한 걸음 더 진전되게 하는 수단이 시련과 훈련임을
스스로 인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할 때이다.신성한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온다.따라서 우리가
그 진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순종한다면,주님은 더 위대한 선쪽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인간 안에 계신 주님
진리라는 포도나무는 인간 안에 존재 한다.주님은 인간의 의도,생각, 행동이라는 의식세계 안에서만
거하실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환경은 우리의 가지를 쳐내어 정리정돈하는 모든 영적 필요성에 꼭 맞게
되어 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주님의 포도나무는 우리가 되어 가기를 원하는 쪽으로 꼭맞추어 성장해
간다.각양각색의 인간이 있듯이 각양각색의 진리가 존재하고,한 인간 개체의 경우도 그의 발전 단계에
따라 각기 다른 단계의 진리가 존재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있어서의 우리의 성장이란 우리속에 있는
진리라는 포도나무가 가지를 쳐내 순수하게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 속의 진리라는 포도나무를 우리가
어떻게 돌보느냐는 것은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맞먹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이 우리안에 있는 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이렇게 읽게 된다.“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진리의 진정한 열매가 선함이요, 이 선함이 우리속에 있는 주님의 현존인 바, 우리가
500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그분안에,그분이 우리안에 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를 쳐냄
우리가 진보해가는 가운데 있어지는 모든 단계는 종점이 아니고 오로지 발전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하나의 단계에 도달되는 진보는 더 나은 진보를 위한 준비 단계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잘 가꾸신다.” 즉 더 많고 품질이 더 나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적 진보에
관한 단계들이 이스라엘 족속들의 다양한 여행,즉 에집트에서 가나안으로,그리고 가나안의 정복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아마 더 위대한 정복을 위해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할는지 모른다.우리가 시련을 불행으로
간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시련은 우리의 영적 열매를 증가시키기 위해 포도나무를 깨끗이해도 좋다고
우리 자신이 허락하였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 시련의 아픔이 옯겨지게 된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속(the redeemed) 의 역사도 크나큰 시련의 역사를 감수해야 한다. 불필요한 인생 훈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 속의 악들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십분의 일이라도 감수하려 들면, 아마도 우리는 머지않아 자기 속의
악들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말씀으로 깨끗게 함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다.” 이 구절에 대해 구번역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Word)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밝히 알게 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주님을 알 도리가 없다. 그분은 신성한 삶과 인간 삶의 원리들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 주심으로
말씀이 삶의 매개체가 되도록 하셨다. 신성한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감각이라는 우리의 바깥쪽 삶에 와
닿는다.그리고 안쪽에 해당되는 영적의미는 우리를 영적총명으로 인도해 준다.이렇게 말씀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쪽으로, 안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들어 올리시고, 우리의 애정을 순수하게 하시며, 행동을
질서속에 놓도록 인도해 가신다. 정신적 포도나무를 쳐내서 개운하게 하신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영에
일치 않는 모든 느낌이나 생각,행동을 거절해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어떤 자연적 물이나 피도 우리를 영적으로 씻어주지는 못한다. 오로지 말씀 속의 진리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물이나 피가 가진 상징적 의미는 이러하다.하느님의 말씀 중 글자는 물이라 불리우고, 영적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501
의미는 피라 불리운다.물은 자연적 진리,즉 행동에 놓이는 진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란 바깥쪽 삶을 씻겠다는 각오를 표현한다.그러나 거룩한 성찬은 주님의 영적인 피,즉 신성한 진리와
더불어 있게 된다.그래서 포도주는 셩경 글자에서 까지“포도의 피” 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는 영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함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니...”
주님은 모든 것 안에 내재된 생명이시다.그러나 인간이 이 생명을 받기 위해서,그분의 생명이 각자 안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안에 거해야 한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살아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인간 각자의 삶의 질과 양은 주님과 각자와의 관계가 갖는 질과 양에 일치 된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가 공급해주는 생명을 사용할 수 만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에 의해
공급되는 생명을 사용하는 태도에 따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질과 양,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겠다는 마음이 열리는 정도에 의존
된다.거듭나는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있어진 것들이다.주님 없이는 어떤 인간이라도 제
아무리 작다고 말하는 선도 행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정과 삶이 주님과 보다 가깝게,보다 완전하게 결합될 때,더 풍성한 열매가, 더욱
품질 좋은 열매가 생산 되는 것이다.주님이 말씀속에서 그분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바,그분의 말씀이
없게 되면 우리는 어떤 선도 행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 원리에 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우리속에는 생명을 유지 보전하게 하는 어떤 것도 없다.생명은 주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한 순간,한 순간 마다 공급되어 진다.마치 시냇물이 공급지인 샘으로부터 끊임없이 물을 공급받기에
시냇물이 되어 있는 것과 같다.포도나무 가지 속의 수액(sap)은 포도나무로부터 이다. 육체 속의 피는
심장으로부터 순환된다.가지와 나무도 비슷하다.이와같이 인간은 주님과 비슷하게 선을 생산 한다. 물론
그 선 속에 주님의 생명이 순환되는 한도 내에서만 순수한 선이다.
밖에 버려짐
502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생명의 근원과의 계속적인 연결을
중단하는 사람은 생명의 공급을 잃게 마련이다. 그는 주님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 의해 스스로 내던져 지는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겠다고 해서 포도나무로부터 자신
스스로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자아만을 사랑하는 원리에 모든 애정이
쏠릴 때,그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가지를 모으는” 격이 된다. 그들은 품질면에서 자기들과
비슷한 영계의 사람들과 연합하여 서로 모인다. 그리고 자아들이 빚어낸 지옥의 불인 악한 열정의 불속에
서로 뛰어 든다. 이런 거룩치 못한 욕망의 불속에서 그들에게 남아 있던 모든 천국적인 것들은 그들에게서
사라진다.지옥은 하느님의 분노가 만든 처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영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은 분노는
없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지옥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축복의 사랑을 거절하고, 선을 악으로
돌려 버리는 결과로 있게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하느님은 각 인간에게 하느님의 심정을 주시고,
그 심정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셨으나, 미움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자신의 심정안에 지옥을
만든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신명기 30:15). 생명과 행복은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는데 존재하고,죽음과 불행은 주님이 주신 것을 남용하는데 존재한다.
구하는 것 (뜻할 것을 물어, asking what we will)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 질 것이다
(If ye abide in Me, and My words abide in you, ye shall ask what ye will, and it shall be done unto
you).” 인간의 모든 삶, 안쪽으로나, 바깥쪽으로나, 즉 의도면에서나 행동면에서, 영적 측면에서나 자연적
측면에서,신성한 법에 일치 할 때,그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 주님안에 거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생명은 그 인간에게 흘러들고,채워주시어 복을 받게된다.이런식으로 천국의 모든 힘은 인간에게서, 그
인간을 통해 역사되는 바,그 사람이 하고저 하는 것을 위해 힘을 주신다.이런 상태에서의 인간은 천국
질서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그가 되고자 하는 것,하고자 하는 것, 모두는 주님이 뜻하시는 것과 같게된다.
그는 주님이 자기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사랑한다.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오는 것들과
같다.그는 자기가 뜻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 삶과 일치 되는 것만을 뜻하려 하기
때문이다.그는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그이유는 천국이 그 사람에게 존재해서 지옥을
누르기 때문이다.그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더욱이 그는 말씀안에 계신 주님 자신으로부터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503
가르쳐진다.
위와 같이 아름다운 인간 삶속에 천국의 복들이 만족되게 주어진다.모든 바램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각은 신성한 지혜로부터 흐르게 되며 모든 행동은 신성한 힘으로부터 이어진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모든 천국 속의 것을 그는 소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싶어 바라는 것 중 천국 밖의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위와 같이 충분하고도 자유롭게 만족하는 조건에서 그 이상 더
바람직한 것이 있어질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의 바램이 보증됨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아마 아래의 두 가지 경우에만 보증될
것이다. 즉 자기가 자연적으로 바라는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획득에 반대되는 세력을 누를 힘을
가져야만 하든지,또는 올바른 것에 대한 어떤 표준을 자기가 인정한 뒤,자기가 바라는 것들을 그 표준에
맞추어 가든지 해야 할 것이다.이를 달리 말해 본다면,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소유 하든가,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만을 원하는 쪽으로 자신을 가져다 놓아야만 할 것이다.그런데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것은,어느 누구도 만물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만물 속의 법칙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데 성공할 수도 있는데, 이는 자신을 바꾸어지게 함으로서
가능하다.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신성한 의지에 자기를 종속 시키는 것, 자기 생각을 신성한 생각에
맞추는 것,자신의 행동을 주님의 계명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가능해 진다.이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데에 이른다.그 다음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하는 것을 주님께 묻게 되고,묻는(ask
)것이 그에게서 이루어 진다.이루어 지는 이유는 주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만을 그가 주님께 요구(ask)할
것이기 때문이다.거듭나는 사람,천국적인 본성은 천국적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묻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자유롭게 가질수 있는 것을 사용하는 면에서 자유롭게 모두 다 사용한다. 포도나무 가지라는
측면에서 그 사람은 포도나무를 통해 순환하는 생명의 모든 혜택을 향유한다. 주님께 거하는 천사들의
지혜는 얼마나 위대할까?주님의 자비에 저항하는 악마들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처참할까?헤아려볼 일이다.
각자의 바램들
504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주님은 악한 인간이 바라는 것이 행동화 되는 것을 억제하는 쪽으로 운행하신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만족은 더 깊은 재난으로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삶의 매 단계에 있는 본성에 일치되는
것만을 간절히 바랜다.따라서 그의 본성이 바뀌면,그가 원하는 것도 변한다. 모든 것은 그것들의 조직화된
상태에 맞추어 바라게 된다.즉 두 눈은 빛을,귀는 소리를 바랜다. 물고기는 물을, 새는 공중을, 목축떼는
풀밭을,육식동물은 고기와 피를 요구한다.모든 것은 각각의 본성을 먹일 것을 위해 외쳐 호소한다.
위와 똑 같은 법칙에 의해 악마는 복수나 탐욕을 꼭 필요로 하고, 천사는 사랑과 순수성을 위해 겸손히
기도한다.악마는 그 악마보다 더 사악한 악마에 의해 행동이 자제 되어야 하는 반면,천사들은 즉각적으로
충만해지는 기쁨이 없는 바램이 아니면 숨도 쉬기 힘들다. “주님은 곧 바로 걷는 이들에게 어떤 선도 유보
하시지 않는다.”
만족
우리의 바램을 충분히 만족하게 하는 길, 영화로운 진리는 우리의 자아 의지가 모든 것을 정복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자아 의지를 주님의 계명에 복종 시키는데에 존재한다.우리는 무질서 속에 인간 조직이
내어 놓는 기묘한 혜택의 미끼 때문에 서로의 사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래서 이 우주는 각자의 바램과
반대되어 있는 듯 여겨진다.그러나 우리가 자아 의지에 재갈을 물리고,천국 질서에로 귀환하면, 온 우주는
우리를 친구로 환대하는 쪽으로 돌아서고,우리 발 아래에는 각자가 바랠수 있는 것들이 선물로서 놓여진다.
인간은 천국 삶을 위해 창조되어 있다.인간이 이 삶안에 진입하면 즉각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사는 것이 진정으로 시작되었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 다음 이들은 자기들이 뜻하고저 하는 것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고기는 물을 요구하고,눈은 빛만을 추구할 것임을 주님께서 아시는 바,
이들이 묻는 쪽으로 이동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만민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 인간을 위해 설비해 두셨다.온 우주를 보라.그것이 영적이든 자연적이든 인간을 위한 집으로 창조되어
있다.그리고 인간 조직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되고 있다.주님의 선물을 남용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꼭 요구되는 한 가지 조건은 그들이 주님안에 거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의 충족없이 인간은 천국적인 복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
도달 할 수 없다.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505
열매를 맺음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란,신성한 사랑이 그분의 자녀들의 삶 안에서 명백하게 들어날 때이다.“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복음 5:16). 주님의 계명을 진실로 지키는 이들은 아버지, 즉 신성한 사랑을 자기의 심정과
삶으로 드높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서 계명을 실천함으로 자기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라는 본보기로
증거자가 되어 주님의 선함을 드러낸다.
어떤 진리도 그것이 실제에 사용되어 열매를 맺어야 살아있는 진리가 된다. 영속성을 지닌 씨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열매속에 존재한다.아름다운 진리를 단지 감상적으로만 보는 때가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우리는 자주 진리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하기도 한다.제 아무리 토론하고 생각해도 일상 생활이라는
실제에 놓여지지 않으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잘리운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
우리의 영적 조직 안에 있는 어떤 원리들이 체현되지 않을 경우, 그 원리들이 실제 사용될 때까지 그
속의 진리는 우리에게 심각한 진리로 존재한다. 어떤 진리가 매우 옳다고 여겨 반갑게 받아 들였으나 실제에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 각자의 심판 때에 그 진리들은 영적 삶을 위한 열매를 맺지 않은 죽은 가지인 바,
그 진리들은 우리들에게서 잘리어 진다.
주님의 사랑 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신성이 사랑을 수단으로 인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신성한 인간은 신성한 진리를 수단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진리 안으로 흘러 들고,이 신성한
진리는 인간에게로 내려와 꽃을 피우며 신성한 사랑이 열매 맺어지게 한다. 신성한 사랑이 신성한 진리로
하여금 신성한 진리가 되도록 하였듯이, 포도나무인 신성한 진리는 인간이라는 가지들 안에 신성한 생명을
506 포도나무와 그 가지- 요한복음15장 1-10절
보내준다.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할 때,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이유가
주님은 그분을 기쁘게 영접하는 이들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때문이다.
계명을 지킴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될 것이다.” 입으셨던 인성이 신성한 뜻을 성취함으로해서 신성과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가
주님과 하나됨은 신성한 진리에 순종함으로서만 결과를 볼수 있다. 열매를 맺겠다는 인간의 모든 지식이나
지혜 등등 모든 것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금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쪽으로 인도해
주어야만 된다. “모든 종교는 삶에 관련이 있고, 종교의 생명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킴으로 인간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가게 된다.그렇게 되는 이유는,계명이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님의 선에 의거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만큼에서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악은 주님과 진정한 인간 삶의 정반대 이다. 신성한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 속의 심정과 삶에 신성한
사랑이 흘러들게하여 더 새롭고 광대해진 삶을 이루게 하며,더욱 가지를 뻗는 바,“사람의 자, 곧 천사의
자”로 되는 충만을 향해 더욱 정진하게 한다.
삶 속의 진리
우리가 초심자일 경우,진리의 발견에 매우 흥미있어 한다.이때의 우리는 진리에 관하여 말을 한다고
하여 보아야 고작 적은 것,낮은 수준에 불과 하다.그나마 그 말들이 과거의 이야기들로 되어간다면, 그나마
그 진리는 삶 속에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이러면 우리의 가지들은 쳐내지고 깨끗케 할필요가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포도나무에 소속되지 않는 가지,즉 죽은 것들을 잘아 내어야 한다.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우리 사랑의 품질,삶의 품질이 어떠하냐 이다. 우리가 진리에
흥미를 잃고 있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게 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지 않는
바,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한다.우리들 안의 어떤 것이 포도나무로부터의 생명의 흐름을 멈춰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진리를 위한 우리의 일,진리에 반대되는 우리의 바램이나 생각들을
성서해설시리즈- 비유해설(신약성서편) 507
던져 버리려는 우리의 각오 등등은 교회 생활에서 발전하는 우리의 수준, 또는 그 반대인 뒤로 미끄러지는
정도를 측량하게 해주는 계기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진리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마치 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성장하는 가지가 되어 날마다 새 순을 더 내고, 새로운 꽃을
피워 새 열매를 산출하는 것과 같아 진다.
새교회 속의 진리들
자기가 갱신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나날이 새롭고 더 나은 성장되는 삶 속에 있다고 느끼는 영혼(soul)의
경우 교회의 진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끌려 나와지고,결코 늙거나 케케묵은 것이 되지 않는다.
위쪽으로 올라가고,그리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들은 두 개의 세계,자연과 영(spirit)이라는
세계에서 새로운 빛과 국면 가운데서 나타난다.즉 자라고 있는 영혼(soul)이 계속 전시 되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함을 보는데 있어서도 계속 새로운 관점이 자라 오른다. “이런 것들로해서 인간이 살고, 이런
것들 안에 내 영의 생명이 있사옵니다.” 사랑받아진 진리, 삶 속에 있는 진리는 늙거나 녹스는 일이 결코
없다. 진리의 사용(use)은 그 진리를 우리 속에서 생동하게 한다. 마치 계속적인 연습이 신체의 근육을
단련시켜 주는 것과 같다.진리라는 포도나무의 성장은 계속 새로워 지는 바,헌 가지는 버리고, 새 가지를
돋아 내서 팽창해가는 내향의 힘으로 움직여 진다.
신성한 말씀 속에 있는 속 뜻을 알게 해주는 새교회의 교리를 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특전이다.
그러나 아는 것 만큼이나 책임도 증가 된다. 더욱이 장엄하고 천국적인 진리에 흥미를 잃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향해야 할 더 높고 더 거룩한 삶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다. “저에게 깨끗한 심정을 창조하여 주소서.
하느님이시여... 올바른 영이 저에게 있도록 새롭게하여 주소서.”
진리에 대한 흥미가 이전보다 덜해져 간다면,이는 수많은 세상의 관심사들,또는 외적 환경에서 과오를
낳게 할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격이된다.세상적 관심사에 더 신경을 써야 하겠다면,자신의 방향을
결정지워줄 진리들이 더욱 필요해진다.좌우지간 우리가 진리에 자꾸 무관심해지고 있다면,그 원인을
찾기위해 자신의 심정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에 흥미를 잃는다면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한 것 까지 흥미를 잃는다는 결과를 빚는다.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셨다.“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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