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2014 강도사 목사고시 - 역사신학(교회사)

하나님아들 2015. 6. 19. 23:25

. 역사신학(교회사)

1. 역사신학의 정의

역사신학(歷史神學, Historical theology)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과 더불어 신학의 3부문 중 하나로 역사학적 방법을 써서 자료를 엄밀하게 음미하고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이다. 역사신학에서는 해당 신학적 개념, 진술 또는 체계를 발생시킨 사회적 · 역사적 · 문화적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역사신학의 연구와 방법론의 주된 초점은 연구 대상인 인물 혹은 주제에 영향을 끼친 주요한 신학적 사항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판정하고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학과 역사적 환경과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신학의 역사적 발달 과정이다.

 

2. 역사신학과 계시

계시(啓示)는 초()역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역사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학적 방법에 의해서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된 진리를 학문적으로 파악하는 학문인 신학에서 엄연한 기초적인 사실은 계시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계시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앙이나 신학 자체가 역사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역사신학의 기능성은 부정할 수가 없다.

 

3. 성경적 역사관(기독교 사관)

1) 헬라적 사관 :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인데 이는 농경민족의 삶에서 형성되었다.

2) 히브리적 사관: 역사는 발전된다는 생각인데 이는 유목민족의 삶에서 형성되었다.

3) 성경적 사관 : 성경은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나아간다고 증거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히브리적 사관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창조 - 타락 - 구속 - 심판과 회복이라는 순서처럼 창조에서부터 마지막 심판 때까지의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신뢰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져 감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역사관은 세 가지 확신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

하나님이 역사를 일직선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계획했던 의도대로 역사의 종결을 가져올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역사인식은 창조, 과정, 종말의 단계를 갖고 있으며 역사는 약속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또한 성육신설을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를 연결시켰다. 세속사를 구속사에 종속시키는 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또한 기독교 역사관이다.

 

4. 교회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는 끊임없이 내적, 외적인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성장과정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경륜을 잘 이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교회사를 잘 이해하게 될 때에 미래에 되어질 하나님의 계획들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계시는가를 배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5. 교회사의 위치와 범위

1) 교회사의 위치 - 신학은 일반적으로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분류하는데 교회사는 역사신학에 해당된다.

2) 교회사의 범위

시간적 범위: A.D 1세기- 현재까지

공간적 범위: 전 세계적인 모든 교회의 역사

 

6. 영지주의(Gnosticism)

1) 영지주의는 135~ 160년 사이에 최대의 영향력을 끼쳤고 초대교회를 가장 괴롭힌 이단으로 평가된다. 영지주의는 페르시아의 이원론,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바벨론의 점성술, 헬라철학(플라톤의 이원론)등에 기독교 교리를 혼합하고 절충시킨 종교철학으로서 영을 선한 것으로 물질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2) 영지(Gnosis)는 영적이고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써 이 지식을 전수받은 사람은 우주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구원받게 되며, 이 지식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 조명이다. 이들은 우주에 왜 죄가 있는가. 인간의 구원, 신구약의 상충성에 의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이원론에 따라 해결하고자 한다.

3) 이들은 최고의 신에게서 다른 에온들(Aeons)이 하향적인 과정을 걸쳐서 생산되고, 마지막으로 가장 열등한 불완전한 하위(下位) - 데미우르고스(Demiurgos)가 물질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주는 불완전하고 죄가 있으며 물질세계는 악하며,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은 하위 신에 불과하다.

4) 또한 차선(次善)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세계가 악하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 될 수 없고, 영적으로만 이 세상에 왔다 간 가현적 존재이다. 이들 중 발렌티누스 학파는 인간을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간, 어느 정도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 인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인 인간으로 삼분했다.

5) 이러한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인 요소를 과소평가함으로써 예수의 생애(탄생, , 죽음, 부활)를 부인했으며 물질계와 정신계를 대립시킴으로써 기독교에 이원론의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의 가치를 약화시킴으로써(신약만 성경으로 인정)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다.

 

7. 몬타니즘(Montanism)

1) 발생 - 156년 프리기아(Phyrigia)의 이교도에서 개종한 몬타누스에 의해 기독교적 근거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교회는 재림의 희망과 성령의 감화가 약화되어가고 있었는데, 이데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몬타니즘은 예언자적 열정과 결합된 성령의 역사와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났다. 카르타고의 신학자 터툴리안도 가입하여 뛰어난 몬타니스트가 되었다.

2) 사상 몬타누스는 자신을 성령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수동적 도구로서 성령의 대변자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말한 것과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했으며, 하늘의 예루살렘이 프리기아에 설립된다고 하였다.

3) 교리 - 이적의 은사(방언, 신유)를 강조하여 방언이나 성령 세례만 받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 천년왕국 강조, 감독의 권위 배격, 교회 조직의 거부, 성령의 계시에 의해 성경이 계속 기록되어질 수 있다는 계시의 연속성,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기 위한 금욕주의(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줌),

 

8. 사도신경의 유래

4세기 이전 서방교회에서 만들어졌으나, 여러 교부들과 저술가들이 저작에 단편으로 흩어져 있다가 4세기말 루피투스가 최초로 라틴어 사도신경의 본문을 작성하고 거기에 주석을 덧붙었다. 교회들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고백하였지만 근본 교리는 동일하며, 5세기 이후에야 현재의 것과 같은 형태의 사도신경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1) 12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신앙의 표준으로 작성하여 베드로가 로마에 가지고 갔다는 전설에 의해 사도신경이라고 함

2) 당시 수세 후보자의 신앙 고백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3) 아리우스 등 이단이 일어남으로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자를 넣어 완성함

4)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신경으로 확정

 

9. 니케아 종교회의

1)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아리우스 논쟁의 종결과 부활절 일자문제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니케아에서 소집하여 열린 회의이다. 이 회의 논쟁의 초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ousia)인가, 유사본질(Homoiousia)인가에 있었는데 아리우스 장로가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라는 발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감독과 그의 뒤를 이은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는 영원하사 성부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며 창조된 일이 없는 존재임을 주장함으로써 회의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시요 완전한 인간임이 결정되었다.

 

2) 결의사항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 예수는 나신 자이지 피조물이 아니다

아리우스파와 기타 이단 정죄 및 추방

부활절 제정 -춘분 후 만월 지난 첫 주일

3) 의의

예루살렘 회의 후 첫 회의로서 니케아 종교회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단을 극복하였으며 니케아 신조가 교회의 정통신앙으로 남아있게 되었고 교회의 문제 특히 신학적인 문제를 회의를 통해서 다루기로 결정하는 교회회의주의(Consiliatism)가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의 영향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국가가 구별이 없는 국가교회 형태를 취하게 되어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수도원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0. 칼케돈 종교회의

1) A.D 451년 칼케돈에서 마르키아누스(Marcianus) 황제가 소집하여 600명의 주교(Bishop)들이 참석했다. 유티케스(Eutyches)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육신 할 때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신성만 나타내고 그리스도는 우리 육체와 같지 않다는 단성론을 주장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간의 논쟁을 결정지었다.

2) 결의사항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 완전하여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다.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아니하고(Infusedly), 서로 변하지 아니하며(Immutably), 서로 분열되지 아니하고(Inseparably),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칼케돈 신조를 결의했다.

3) 반웅(약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Work)은 다루지 않고, 누구인가(Person)만 다루었고 후에 동방교회에서는 바로 수용되지 못하고 분열을 가져왔으며, 콘스탄티노플 등 큰 교회는 받아들였으나, 이집트의 콥틱(Coptic) 교회, 시리아의 야곱(Jacobite) 교회, 아르메니아(Armenia) 교회 등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단성론적으로 나갔다.

 

 

11. 하나님의 나라 - 어거스틴

1) 땅의 도성(都城)은 멸망하나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도성은 이미 지상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상의 도성은 불완전하므로 하나님의 도성이 자라는 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5) 하나님의 나라는 양면성이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실제

현재 역사적으로 그 구성원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격적인 실제

 

12.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1) 어거스틴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하였던 어거스틴은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했고 중세교회의 문을 연 신학자로 평가된다.

< 어거스틴 주의 >

1) 하나님의 예정

2) 불가항력적 은총

3) 유아에게도 원죄가 있다.

4)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

5)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2)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영국의 수도사로서 에베소의 장로가 된 인물이다.

< 펠라기우스 주의 >

1) 인간의 노력,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

2)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준다.

3) 유아는 범죄 전 아담과 동일한 죄 없는 존재이기에 세례가 불필요하다.

4)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한다.

5) 그리스도가 없이도 세례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3) 결 론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성악설을 부인하고, 훈련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주장함으로 인간의 책임을 극대화하였다. 사실상 전적타락과 전적인 은혜를 부인한 셈이다. 이에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주장함으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정립하게 된다.

 

13. 반 펠라기우스 주의(Semi-Pelagians, Semi-Augstinians)

1)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받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의견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롬은 은총이 구원에 불가결하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은총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생각은 없었고, 인간의 의지가 회심에 한 몫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했다. 빈센트는 은총과 예정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리가 카톨릭전통에 근거가 없는 새로운 주장임을 밝혀 공격하였다. 이들은 예정설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부인하였기에 Semi-Pelagians 혹은 Semi-Augstinians라고 불렸다.

2) 이에 529년 오렌지 회의가 소집되어 반 펠라기우스 논쟁이 끝을 맺는데, 그 결정사항은 원죄를 긍정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고 하였으나,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3) 결과적으로 Augustine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은총의 전수를 세례에 국한 시켜 은총의 세례전적 특질과 선행의 공덕을 내세움으로써 중세 로마 카톨릭 신앙의 기초를 형성한 공덕사상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인간의 노력과 공적이 인간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가능성은 1%도 없다고 본다.

 

14. 필리오케 논쟁(The filioque controversy)

1) 초기 교회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동. 서방을 막론하고 전 로마 제국이 니케아 신경에 동의한 것이었다. 니케아 신경은 교회사에서 특히 중요한 이 시기에 교회에 교리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의한 문서 중 일부는 성령을 성부에게서 나오는 존재(Holy spirit proceeding from the father)”로 언급한다. 이처럼 동서방 교회 모두 니케아 신조를 믿었지만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filioque(and from the son)라는 말을 첨가한데서 문제가 발단되었다. 즉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왔다고 하면 성자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2) 서방교회는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동의가 쉬웠지만 동방교회는 일신교, 일원론을 주장했기에 필리오케 논쟁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A.D. 1054 7.16 서로 파문장을 발송하므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때로부터 동방교회는 헬라 정교회(Orthodox Church)로 서방교회는 로마카톨릭 교회(Catholic Church)라는 서로 상이한 모습으로 발전하는데 서방 교회가 교회사의 주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1)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 하나의 세례와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신앙을 가진 평신도들은 사제나 감독들과 동일하게 성별을 받았다.

2) 교회의 바벨론 감금(유수)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 로마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신학적으로 조리있게 설명하고 반박하였다.

3) 크리스천의 자유 (On Christian Liberty)

- 자유인과 봉사자로서의 크리스찬의 본질을 설명하였다. 크리스찬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신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고 했다. 즉 모든 크리스찬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이라는 것이다(고전 9:19).

 

16. 칼빈신학의 특징

1) 신관 -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 중심

2) 구원관 예정론, 하나님의 섭리

3) 은총관 - 성령의 역사가 신앙과 윤리 행동 앞에 선행한다.

4) 인간관 - 인간의 전적타락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총

(칼빈주의 5대교리)

 

 

17. 칼빈의 성경관

1) 가경을 인정치 않는다. 2) 축자영감설을 믿는다.

3)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보다 위에 둔다. 4) 성경의 통일성을 믿는다.

5) 성령의 내재로 성경을 증거한다. 6) 66권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치 않는다.

7) 교회는 성경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18. 정통주의

1)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으로 개신교를 공격했다. 또한 문예부흥 이후로 발달한 인간 이성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적 철학이 카톨릭과 개신교를 동시에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여 등장한 것이 정통주의라고 할 수 있다.

2) 종교개혁이 가져온 긍정적인 모습은 중세 천년의 틀을 깨었다는 것과 잘못된 예배의 모습과 교리 그리고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여 성경적 신학을 형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흐름이 후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됨으로 발생한 것이 정통주의 신학이다. 여기서 자연히 신조들이 강조되었고 따라서 이때를 개신교 신조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3) 당시 개혁파에는 루터파와 칼빈파 쯔빙글리 파가 있었는데, 자파(自派)를 나타내는 신학과 위상을 정립할 필요를 느끼다 보니 교단별로 신앙고백이 나오게 된 것이다(=영국교회 신앙고백, 벨기에 신앙고백 등). 결국 자파의 신앙만을 주장하는 신앙고백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루터파 정통주의와 칼빈파 정통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신학의 다양성은 교파간의 논쟁과 싸움으로 변질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19. 경건주의

1) 루터파 교회가 정통주의를 거치면서 다시 중세화(교리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회복해보자는 교회 내부적인 반동에서 형성된 것이 경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정통주의의 교리적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건조함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한 경건주의는 정통교리를 수호하되 경건의 실천으로 강조점을 옮기는 운동이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신학을 주창함으로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린다.

2) 경건(Piety)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의 “eusebeia” , 존경, 존중(reverence)을 의미하며, 선함과 거룩함(goodliness, holiness)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적 의미는 하나님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감정을 의미한다. 또한 독일어는 신적이며 헌신적”, 또는 점잖고 무해하며 단순한 것을 지칭하고 있다.

3)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은 반카톨릭 운동의 출원지인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입각하여 당시 정통주의 신학이 너무 영적으로 드라이한 모습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신앙의 생활화를 추구한 운동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게 보인다. 주로 남부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이 형태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다.

 

20. 웨스터민스터 회의(1643)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분쟁을 종결짓고 칼빈의 신조를 채택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큰 영항을 주었다.

1) 목적 : 신조와 정치, 의식의 제정을 위해.

2) 3대 결의 : 예배모범,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설교자의 성경해석과 교육용)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164371일부터 1649222일까지 총 1163회기를 거치면서 작성된 것으로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고백서로 불린다. 영국의 국교에서 121명의 목회자, 30명의 평신도, 8명의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이 참석하였고, 감독교회, 에라스티안, 회중교회, 장로교회 등 주요 교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 고백서는 성경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드리워져 있으며, 칼빈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를 부르짖기 때문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호응을 얻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1968년도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21.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 교리(이단성)

1) 신앙관 : 교황, 감독, 사제 등의 중보기도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2) 성경관 : 가경(외경)과 유전(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내세운다.

3) 교황관 : 교황의 절대 권위 : 교황무오설, 교황의 사죄권

4) 내세관 : 연옥설

5) 칭의관 :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공덕, 선행으로 된다.

6) 구원관 : 사제가 집례하는 7성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

세례성사(영세) 성체성사(미사) 결혼 성사 신품성사(사제임명)

견진성사(세례재확인) 종부성사(임종시) 고해성사

7) 성례관 : 화체설(성찬의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한다)화체설 주장

8) 우상숭배 :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각종 기물을 숭배

 

22. 신사참배 논쟁

1)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박해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는 종교적 요소가 없는 국가에 대한 예의문제라고 하지만 신사가 종교라는 것에 이의를 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사참배의 목적은 일본의 신들에 대한 숭배와 민족정신의 말살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는 곧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도라고 확신했다.

2) 국내의 여러 교단과 천주교는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부의 총무 풀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며 기독교학교가 폐교되고 선교지를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에 참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지만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가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3) 그러나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신학생에서부터 박관준 장로, 주기철 목사의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또한 한국인들만 신사참배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남북 장로교 선교회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4) 신사참배 논쟁의 결과 - 첫째 신사참배는 종교라는 점이다. 둘째 신앙과 신사참배의 연관성에서 신사참배는 성경이 행위의 절대적인 표준이 되는지를 알게 해 준 사건이었다. 셋째 신사참배를 결정하거나 신사에 참배한 이들에 관련된 문제이다. 장로교 총회는 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회개하였다. 이것을 거울삼아 몰역사적이고 비신앙적인 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23. 장로교회의 분열

1)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마디로 대립과 분열의 시대였다. 혹자는 이 시대를 성경에 대한 논쟁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논쟁의 중심에 성경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공통적인 특징은 신학적 자유주의 세력과 신학적 보수주의 세력이 일련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2)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어지고 조선신학교는 세계의 조류에 부응하는 신학교를 설립이념으로 내세웠다. 세계조류라는 것은 그 당시 팽배해 있던 신정통주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대조류와 현대사상의 수용이 곧 자유주의 신앙을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학문적인 면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수용하면서 신앙적인 면에서는 얼마든지 보수성을 견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3) 이런 조선신학교의 진보적인 입장은 정통주의자로부터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한상동 목사와 미국 웨스트 민스터의 메이첸 문하에서 구프린스톤의 보수주의 교육을 받은 박윤선 목사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고려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교육에 대한 강한 반동이었다. 이들이 내건 신앙과 신학의 준수는 조선 신학교가 주창하는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이원론에 대한 거부였다. 조선신학교가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을 추구했다면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와의 역사적 단절이 아니라 계승을 모토로 내걸었다.

4) 고려신학교만의 외로운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신학교에 다니는 재학생중 51명이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조사위원들의 조사와 박형룡의 귀국으로 김재준교수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박형룡에게만 유리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두 석학인 존 맥케이와 에밀 부르너의 한국방문은 자유주의를 확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5) 박형룡박사가 귀국하고 고려신학교에서 1년도 있지 못하고 떠나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1949년 총회에서는 3가지 색깔을 띠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고려파,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기장파, 장로회 신학교를 중심한 박형룡 중심의 세력이었다. 1952년 고려파가 분립하였고 1953년에는 기장이 분열해 나갔다. 1959년에는 W.C.C를 찬성하는 쪽은 통합, 반대하는 쪽은 합동으로 분열하였다.

 

24. 에큐메니칼(Ecumenical교회일치) 논쟁

1) 한국 장로교회는 1954년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 명신홍과 김현정 두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둘은 상반된 보고를 하였는데 이것은 두 사람의 견해 차이라기 보다는 한국 장로교 안에 있는 두 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2)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보조를 같이하기 위해서라도 세계교회들의 협의체인 W.C.C.에 적극 참여하여 배워야 된다는 입장이었다. W.C.C.반대하는 이들은 이 단체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꾀하고 있는 단체이며 이를 위해서 신학적인 선을 철폐하여 새로운 신학조류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용공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3) 결국 W.C.C.를 찬성하는 쪽과 찬성하지 않는 쪽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총회의 화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각각모여 통합과 합동으로 장로교가 분열되는 아픈 결과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1959).

 

25. 장로교의 다른 세 가지 명칭

1) 보수주의 2) 개혁주의 3) 칼빈주의

 

 

25. 한국 최초의 설립 장로교회와 조직 장로교회

1) 최초의 설립교회 : 1884년 황해도 솔내(송천) 장로교회

2) 최초의 조직교회 : 1887년 서울 새문안 장로교회

 

26. 종교개혁의 3대 원리

1) 오직 믿음으로 2) 오직 성경으로 3) 오직 은혜로

 

27. 프로테스탄트 원리(=루터의 3대 원칙)

1) 이신득의 2) 만인 제사장 3) 성경의 절대 권위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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