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의 저자 역시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는 예수님께서 모세 오경의 모든 말씀을 골고루 인용하시면서 오경이 모세의 글임을 증거하셨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막 12:26절에서는 출 3:2-5의 말씀을, 마 8:3-4절에서는 레 14:3-4의 말씀을 그리고 마 19:7-8에서는 신 24:1-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출애굽 당시의 생생한 환경과 기적을 목격하고 그것을 가장 명확하고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 자는 애굽의 모든 학술과 지혜에 능통했던(참조, 행 7:22) 모세만이 가능하며 출애굽기 자체도 모세가 출애굽기의 저자임을 증거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에 대해 결론짓는다(참조, 출 34:28).
기록 목적과 연대
1. 기록 목적
출애굽기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하셨으며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셨고 유월절의 사건과 율법 수령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던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출애굽기를 이해할 때 출애굽기 전체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쉽고 명확해질 것이다.
2. 기록 연대
출애굽기의 사건이 B.C. 1446년이었음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출애굽기의 저술 연대는 B.C. 1446년부터 광야에서 생활한 40년 동안의 1407년 사이로 추정된다. 출애굽의 연대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이후 출애굽의 연대를 연구하는 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특징과 구조
1. 특징
출애굽기의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로 크게 분류된다. 첫째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이 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류의 대속주를 뜻하는 유월절 어린 양과(참조, 고전 5:7),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만나의 사건(참조, 요 6:48), 생수를 의미하는 반석의 물과(참조, 고전 10:4),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장 제도(참조, 출 28, 29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형에 대한 연구(Typology)는 출애굽기 연구의 핵을 이루며 신약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많은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할 때 출애굽기의 연구는 한층 활기를 띄게 될 것이다. 둘째는 출애굽기가 보여 주는 구조의 다양성과 다양성이 보여 주는 일치성이다. 출애굽기에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이한 사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복잡한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만의 독특한 특성은 그렇듯 복잡한 유기체가 여러 가지 주제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출애굽기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진리 또한 다양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전체의 내용을 이스라엘이 거한 장소의 지리상으로 구분해 볼 때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과(1-12장), 시내산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13-18장) 그리고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19-40장) 분류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따라 구분해 볼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와(1-6장) 구원(7-18장) 그리고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19-40장) 분류될 수 있다. 이렇듯 출애굽기를 형성하고 있는 구조는 그 주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다양성은 모두 이스라엘의 구속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어 있음이 출애굽기의 가장 특이한 특성이다.
2. 구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애굽기의 구조는 그 주제에 따라 매우 여러 가지로 나누인다. 그러한 구조를 일일이 글로 표현하기는 매우 힘들며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므로 이제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도표를 작성하여 보도록 하겠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1).
제1부 ; 출애굽기의 특별 주제들
I. 창세기와의 시간적 간격
창세기와 출애굽기와의 시간적 간격에 관한 논의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해로부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의 기간이 215년인가 아니면 430년인가 하는 것에 관한 논의이다. 본 논지의 난해점은 215년 설도, 430년 설도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며 성경을 베껴 기록한 고대의 사본들에 관한 문제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학설에 대해 정확히 규명하고자 한다면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하며 고대 사본학까지도 검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사본학에 대해서는 사본학에서 내려진 결론 부분만을 인용하고 주로 성경적 근거와 그에 대한 주장을 검토해 봄으로써 이 두 가지 학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1. 215년 설에 관한 견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후로부터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한 때까지를 215년으로 생각하는 학설인데, 주로 '칼빈'(Calvin), '보스'(Voss), '바움가르텐'(Baumgarten), '어셔'(Ussher) 등이 이 학설을 지지하고 있다.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들 수 있다.
1) 갈 3:16-17 215년 설을 주장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갈 3:16-17절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며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첫 번째 약속으로부터(참조, 창 12:1-3) 430년 후에 출애굽의 사건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들어간 때부터 이삭이 출생할 때까지의 25년과(참조, 창 12:4; 17:1, 21) 이삭의 출생부터 야곱의 출생까지의 60년(참조, 창 26:26) 그리고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간 때인 130년을 더할(참조 창 47:9) 215년을 빼면 실제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거한 기간은 430년이 아닌 215년이라는 것이다.
2) 사대로 표시된 모세와 아론의 족보 215년 설에 대한 또 한 가지 강력한 증거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이다. 모세는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사대 손이었다(참조, 출 6:16-20).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들의 한 세대가 100년일 수 없으므로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모세까지의 기간을 430년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교부들의 고백 215년 설의 마지막 증거는 교부들의 고백이다. 즉 그들은 '터툴리안'(Tertullian) 같은 학자가 215년 설의 대표적 학자였다고 말하며 '요세푸스'(Josephus) 역시 강력한 215년 설의 지지자였다면서 이처럼 215년 설이 초대 교회의 지배적 이론이었기 때문에 215년 설이 더욱 합당하다는 것이다.
2. 215년 설의 문제점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1) 갈 3:16-17절의 재해석 먼저 바울의 표현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바울의 견해는 틀림없는 215년 설의 대표적 언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갈 3:16-17절에 나타난 바울의 관심은 출애굽의 연대기나 창세기와의 시간적 간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이 오래 전에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이상 그것이 몇 년인가 하는 것을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헬라인들은 70인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70인역에서는 430년의 기간을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소급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그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본문에서 215년 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증거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언약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에게도 반복되었으며 실제로 마지막 계약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주어졌으므로(참조, 창 46:2, 3) 바울의 표현은 아브라함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러한 해석에 따르면 본문은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 이후 430년 후에'라는 뜻으로 풀이하여야 할 것이다.
2) 모세의 족보에 관한 성경적 재해석 215년 설의 주장대로 1세대를 100년으로 보는 것과 4대를 430년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점은 히브리인의 족보 기록 습관이다. 즉 유대인의 족보 기록은 대부분 중요 인물의 기록일 뿐 모든 후손에 대한 족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면 마 1:8에서는 '웃시야'를 '요람'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열왕기하와 역대하에서는 '웃시야'와 '요람'의 사이에 '아하시야'와 '요아스'그리고 '아마샤'를 삽입시키고 있으며, 모세가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4대손으로 묘사된 데에 반하여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의 10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참조, 대상 7:22-27). 이렇듯 동시대의 조상인 '레위'와 '에브라임'을 둔 '모세'와 '여호수아'의 계보 차이가 4대와 10대의 차이를 보인 것으로 생각해 볼 때 모세의 계보 역시 단순한 4대로만 볼 수 없으며 나아가 창세기와의 시간적 간격을 모세의 계보에 의해 215년으로 보는 해석 역시 불합리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3) 교부들의 고백에 관한 새로운 증거 215년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독교 초기의 모든 교부들이 모두 215년 설을 주장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215년 설을 말한 '요세푸스'(Josephus) 같은 학자는 215년 설과 동시에 430년 설도 함께 주장하였으며, '히포리투스'(Hippolytus) 같은 학자는 전형적인 430년 설의 학자였다. 따라서 초대교회 역시 430년 설과 215년 설이 병행되어 지지되었으며 215년 설만이 교회의 공적 고백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3. 430년 설에 관한 성경적 증거 이 학설은 창세기와의 시간적 간격을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명하고 있는 430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학설로서 '로젠뮐러'(Rosenmueller), '델리취'(Delitzsch), '에발트'(Ewald) 등이 이를 주장하고 있다.
1) 창 15:13 430년 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로는 먼저 창 15:13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 관해 예언한 내용으로서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는 선언이었다. 이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브라함의 후손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 나라인 애굽에서 사 백년간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거한 기간을 430년으로 보는 견해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해석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사백 년이라는 기간은 성경에서 흔히 사용하는 대략의 숫자이다.
2) 출 12:40 430년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증거는 출애굽기 자체의 증거이다. 즉 출 12:40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모세이고 모세는 당시의 모든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체험한 당사자임을 생각해 본다면 430년 설을 증거한 모세의 주장을 결코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3) 행 7:6-7 430년 설에 대한 세 번째 증거로는 행 7:6-7에 기록된 스데반의 증거이다. 즉 스데반은 출애굽 사건이 있은 수 세기 후의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스라엘이 사백 년 동안 외국 땅에서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스데반의 증거에서 다른 땅이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가리킴이 분명하며, 종이 되어 괴로움을 당한 장소 역시 가나안이 아닌 애굽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이스라엘 족장들이 가나안에서 축복된 생활을 했던 215년을 이에 포함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스데반이 증거한 430년 전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4. 창세기와의 시간적 간격에 대한 결론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모세의 출애굽기까지를 215년으로 생각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 성경에 대해 무식했기 때문이거나 그의 착각으로 인한 주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대의 전통적인 가문에서 자라났으며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자란 그가 히브리 성경에 무식하거나 착각을 일으켰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성경의 증거인 430년에 관해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당시에 70인역을 사용하고 있던 헬라인의 혼동을 막기 위해 215년이라 기록했다고 생각하여야 하며, 그 위에 스데반의 증거와 모세의 고백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을 받아들여 창세기의 마지막으로부터 출애굽기까지를 430년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해석이다.
II. 출애굽 당시의 애굽 왕조와 출애굽 연대
출애굽에 관한 정확한 연대를 추정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역사 특히 출애굽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애굽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실이 성경 자체의 증거뿐만 아니라 그들 나라의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해 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출애굽의 정확한 연대를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그 당시 애굽의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으며 모세가 활동했을 당시의 애굽 왕은 누구였나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고대 애굽 왕조의 4기간 성경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고대 애굽의 왕조는 주로 4단계의 통치 기간으로 구분된다.
1) 강력한 세력의 12왕조(B.C. 1991-1730) 이 기간의 애굽은 이제까지의 봉건 영주 시대를 지나 막강한 권세와 통치력을 지닌 통일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진 기간이었다. 상애굽과 하애굽으로 나뉘었던 두 개의 애굽은 하나로 통일되었고 수도는 구 왕국의 수도 '멤피스'(Memphis)로 확정되었다. 그들의 힘은 국경을 넘어 이웃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였으나 외국에 대한 정벌은 행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역은 성행하여 외부로부터 애굽을 드나든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그들은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은 애굽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지중해 전역을 여행한 한 애굽 의사의 여행 기록인 '시누헤의 이야기'(The Tales of Sinuhe)가 이때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2) 힉소스(Hyksos) 왕조의 침입(B.C. 1730-1584) 힉소스(Hyksos) 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이들에 대한 확실한 근원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들은 처음에 단순히 애굽인들과 공존하였으나 서서히 애굽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애굽인들이 그들의 세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때에는 이미 그들을 물리칠 만한 힘을 상실하여 결국 B.C. 18c가 시작될 무렵에는 애굽 왕조가 무너지고 힉소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애굽의 수도를 '멤피스'(Memphis)에서 동북쪽 삼각주 지역에 있는 '아바리스'(Avaris)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 통치하였다.
3)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18왕조(B.C. 1584-1314) 힉소스 족이 애굽을 통치하던 시대에도 애굽의 13왕조로부터 17왕조까지는 미약하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18왕조의 첫 통치자인 '아모스'(Amos, B.C. 1584-1560)가 나타나 힉소스 왕조의 수도인 아바리스(Avaris)를 탈환하고 그들을 멀리 북쪽 팔레스틴까지 쫓아냄으로서 애굽의 왕조는 다시금 강력하게 부활되었다. 이렇듯 아모스에 의해 강화된 애굽의 국력은 그의 손자 '투트모스 1세' (Thutmose I, B.C. 1504-1450) 때부터 제국적인 애굽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애굽의 원정은 시작되어 '투트모스 3세' (Thutmose III, B.C. 1504-1450)를 거쳐 '아멘호텝 2세' (Amenhotep II, B.C. 1450-142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애굽의 영토는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까지 확장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애굽은 극도에 달하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4) 건설의 시대 19왕조(B.C. 1314-1194) 성경과 관련된 애굽의 네 번째 통치 기간은 19왕조 기간으로 18왕조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소유하던 때였다. 이 왕조는 약 100여 년간 유명한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가 통치하였다. 그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막강하여 18왕조 전성기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건설에도 주력하여 남북 애굽의 모든 도성들을 확장 또는 신축하였다.
2. 고대 애굽 왕조와 야곱의 아들들과의 연관성
1) 요셉의 총리대신과 애굽 왕조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때의 애굽 왕조에 대해서는 애굽의 12왕조 때였다는 학설과 힉소스 왕조 때라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이 두 가지 학설 중에서 요셉의 때와 좀더 유사한 왕조는 힉소스 왕조가 아닌 애굽의 12왕조 때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해 왔을 때 요셉이 그들에게 준수토록 한 관습이 힉소스의 셈족 관습이 아닌 애굽의 관습이었고(참조, 창 46:34), 요셉 역시 애굽의 관습을 따르고 있었으며(참조, 창 43:32), 당시에 애굽이 힉소스 왕조의 침입을 서서히 받고 있었으므로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던 당시의 상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때는 힉소스 왕조가 아닌 애굽의 12왕조 기간으로 보아야 하며 출애굽의 연대를 1446년으로 볼 때 430년 전의 사건이라 가정한다면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때의 애굽 왕은 '세소스트리스 2세' (Sesostris II, B.C. 1894-1878)까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출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한다. 이 왕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행했던 이스라엘의 탄압과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을 두려워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이 후에 애굽의 적들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칠 것으로 생각하여 이스라엘에게 핍박을 가하기 시작한 왕이었다(참조, 출 1:8-10). 그렇다면 그가 적으로 생각했던 애굽의 적은 누구였겠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애굽에 침입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던 힉소스족이었을 것이며 요셉을 알지 못했던 그 왕은 이스라엘 역시 힉소스족으로 동일하게 취급하여 박해를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미루어 생각할 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힉소스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왕, 즉 힉소스족을 미워하여 그들을 물리치기에 최선을 다한 왕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애굽의 역사상 이렇듯 힉소스족을 미워하고 그들을 미워한 왕은 18왕조의 창시자인 '아모스' (Amose, B.C. 1584-1560)였으므로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아모스'였음이 분명하다.
3) 유아 살해를 명령한 애굽 왕 '아모스'의 히브리인 학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애굽의 또 다른 바로 왕은 이제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였는데 그가 바로 애굽의 위대한 정복자 '투트모스 1세'(Thutmose I, B.C. 1539-1514)였다. 이러한 증거로는 출애굽의 연대를 들 수 있는데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6년으로 생각한다면 모세가 출생한 연대는 80년 전인 B.C. 1526년이었고 이러한 연대는 투트모스 1세의 통치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모세의 구출자 바로의 딸 이제 출애굽의 배경에 관한 애굽 역사의 마지막 사건으로서 모세를 구출한 바로의 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로의 딸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가 '하트셉슈트'(Hatshepsut, B.C. 1504-1483) 공주로 일치하고 있다. 그녀는 '투트모스 I세'의 딸로서 아버지 '투트모스 1세'가 죽자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 B.C. 1514-1504)와 결혼하였고, 그가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자 자기 딸을 '투트모스 2세'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B.C. 1504-1450)와 결혼시킴으로 그들 위에 올라 왕의 권한을 가지고 애굽을 통치했던 여자였다. 그리므로 그녀는 모든 히브리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 속에서도 모세를 주워 기를 수 있는 권력과 대담성을 지닌 유일한 여성이었다.
3. 애굽 왕조와 이스라엘 자손과의 연관성 도표
위에서 언급한 애굽 왕조와 이스라엘 자손들과의 연관성을 도표로 나태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2).
4. 출애굽 연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온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인다. 첫째는 출애굽을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 B.C. 1450-1426) 치하의 B.C. 1446년으로 보는 견해이며, 둘째는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 치하의 B.C. 1290년으로 보는 학설이다. 이제 이 두 가지 학설 중에서 먼저 B.C. 1290년으로 생각하는 B.C. 13c설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B.C. 13c설에 관한 견해 ①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B.C. 13c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가장 강력한 증거는 출 1:11의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제 동원되어 건축한 라암셋 성은 당시의 통치자인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의 이름을 본떠서 지은 것이며, 따라서 만약 B.C. 1446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면 그보다 약 150년 후에 건설된 라암셋 성을 지었다는 성경의 기사는 거짓이 되므로 출애굽의 연대는 '람세스 2세' 치하의 B.C. 1290년이라는 것이다. ② 15c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모압과 에돔의 정착민들 13c설에 대한 두 번째 증거로는 모압과 에돔의 문명이 B.C. 1900-1300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서 모압 족속에게 막강한 저지를 당하여 우회하였는데(참조, 민 20:14-21) B.C. 15c에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당연히 모압과 에돔이 존재한 후인 B.C. 13c로 보아야 타당하다. ③ '라기스'와 '드빌'의 13c 멸망 이들의 세 번째 주장은 여호수아의 손에 의해 멸망당했던 '라기스'와(참조, 수 10:32) '드빌'의(참조 수 10:38, 39) 멸망이 고고학에 의하여 B.C. 1230-1200년경의 13c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당연히 B.C. 1290년이어야 하며 그래야 모세의 40년과 여호수아의 통치 기간을 합친 때와 '라기스'와 '드빌'이 멸망한 연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제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2) B.C. 13c설의 견해에 대한 반박 ① 모세 출생 이전에 건설되었던 '라암셋 성' 먼저 '라암셋'에 대한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라암셋 성이 '라암셋 2세'의 이름을 본떠 지은 것으로 '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인 B.C. 13c에 건축된 것이라 하지만 이는 세밀한 성경 연구의 부족으로 인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창 47:11에서 이미 '라암셋'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12C 왕조 말기였고 따라서 '라암셋'성은 '람세스 2세' 통치기간에 최초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요셉의 시대인 12왕조 말기에 건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 1:11의 '라암셋 성'의 건축은 이미 지어져 있었던 '라암셋 성'을 증축하거나 개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라암셋 성'이 당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라암셋 성'의 건축이 모세의 출생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참조, 출 1:11; 2:1-4). 그러므로 '라암셋 성'이 그들의 주장대로 B.C. 13c에 건축되었고 그때에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모세는 출생하자마자 80세의 고령이 되어 출애굽의 사건을 인도하였다는 엄청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라암셋 성'은 요셉의 시대인 12왕조시기에 이미 건축된 것을 '람세스 2세'가 개축한 것이었고 이러한 증거에 의하여 '라암셋 성'의 건축 연대로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B.C. 13c로 추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② '팀나 성전'(Timna Temple)에서 발견된 유물 등 13c설의 주장들은 13c에 모압과 에돔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최근 그곳을 조사한 고고학자 '랭카스터 하딩' (Lancaster Harding)에 의하면 '팀나 성전' (Timna Temple)에서 주전 1600-1399년의 애굽 돌항아리와 자기류가 발굴되어 요단 동편과 '네겝'(Negeb) 지역에 일단의 정착민들이 살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③여호수아에 의해 불살라지지 않은 '라기스'와 '드빌' 13c 설의 주장들은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당한 '라기스'와 '드빌'이 B.C. 13c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나 이러한 주장 역시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정벌 정책은 성읍의 거류민들만을 도륙하였을 뿐 도성 자체를 완전히 불사르거나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의 중요 실례는 북부 전투를 묘사하고 있는 여호수아서 11장에서 잘 나타난다. 그 전후에서 북부의 여러 왕들이 '하솔' (Hazor)성을 중심으로 여호수아에 대항하였는데 모든 성읍 중 특별히 하솔 성읍만이 이스라엘에 의해 불살라졌을 뿐 다른 성읍들은 '그들의 언덕에 세워진 채' 그래도 남겨졌기 때문이다(참조, 수 11:13). 그러므로 '라기스'와 '드빌'은 여호수아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진 것이 아니라 그 후의 다른 침략자 즉 애굽의 '메르넵타'(Merneptah) 등에 의해 불살라졌을 것이다.
3) B.C. 15c 설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 ① 성경의 증거 a. 왕상 6:1 15c 설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보다 480년 앞서서 출애굽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왕상 6:1의 진술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는 솔로몬 재위 4년의 B.C. 966년이었으며 따라서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출애굽의 연대는 정확히 B.C. 1446년이 된다. b. 삿 11:26 15c 설에 관한 두 번째 증거로는 B.C. 1100년경에 활동했던 이스라엘의 여덟 번째 사사인 '입다'의 진술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시대까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여 블레셋에 거한 기간인 300년간 이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1100년과 300년을 더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한 때는 B.C. 1400년경이 되므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는 1400년에 광야 생활 40년을 더한 B.C. 1440년이 된다. c. 여리고 성의 멸망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된 여리고 성(참조, 수 6:1-27)의 연대 역시 15c 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스탱' (John Garstang)의 발굴에 의하면 여리고의 파괴는 B.C. 약 1400년경으로 판명되었는데 특히 성벽이 외부로 무너진 지층을 나타내는 D성(City D)의 파괴는 B.C. 약 1400년경에 이스라엘 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② 성경 외적인 증거 a. 애굽 왕조와의 역사적 일치성 애굽 왕조와 성경적 사건들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출애굽의 연대는 B.C. 1446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연대를 B.C. 1290년으로 생각할 때 모세를 구출한 바로의 딸과 모세가 미디안에서 광야 생활을 할 동안의 많은 사건들이 애굽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연대를 B.C. 1446년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보다 8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 모세의 구출 사건이 '하트셉슈트'(Hatshepsut, B.C. 1504-1483) 공주였다는 사건과 일치하며, 모세가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할 정도로 40년 이상을 통치한 '람세스 2세'(Ramses II, B.C. 1290-1224) 이전의 유일한 왕인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B.C. 1504-1450)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외에도 모세 탄생 시 이스라엘을 박해했던 애굽 왕과의 일치성이나 그 후의 열왕기 시대의 성경 연대 등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B.C. 1446년에 출애굽 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b. 출애굽기 전체를 개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출애굽기가 지닌 두 가지 특성, 즉 역사적 특성과 상징적 표상들에 대한 연구가 밑받침되어야 한다. 본 서론의 목적은 이러한 특성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설정하기 위함인데, 두 가지 특성 중 상징적 표상들에 대해서는 신약의 해석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본 서론은 출애굽기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들을 먼저 고찰한 후에 출애굽기의 역사적 특성과 중심 사상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제2부; 출애굽기의 배경
I. 명칭
출애굽기의 명칭은 크게 히브리 성경의 명칭과 영역 성경의 명칭 두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히브리 성경의 명칭은 책의 첫 단어를 따서 그 책의 이름으로 정하는 히브리인들의 습관대로 출애굽기의 첫 단어인 웨엘레 쉐모트 t/mv]hl,aew], we'lleh shemoth>로 불렸는데 그 뜻은 '이것들이 …의 이름들이다'라는 뜻이다. 한편 한글 성경의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이러한 히브리 성경의 명칭과는 별 상관없이 70인역(LXX)에 붙인 엑소도스<ejvxodoz ; 탈출, 출발, 출 19:1>로부터 유래된 것인데, 이러한 이름은 본서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이름을 불가타역(Vulgata)과 영어 성경에서 그대로 인용 엑소더스(Exodus)라 하였고 한글 성경 역시 출애굽기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영역 성경의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여 출애굽기라 하였다.
II. 저자
'아멘호텝 2세' (Amenhotep II, B.C. 1450-1426)의 뒤를 이은 '투트모스 4세' (Thutmose IV, B.C. 1426-1408)는 원래 '아멘호텝 2세'의 장자가 아닌 차자였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디로 갔는가? 이에 대해 '웅장한 스핑크스 (The Great Sphinx)의 발 사이에서 발견된 '투트모스 4세'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즉 꿈에 비록 그가 장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스핑크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멘호텝 2세' 당시에 애굽의 장자가 죽은 10재앙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증명하므로 출애굽의 사건을 '아멘호텝 2세' 치하의 B.C. 144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c. '텔 엘 아마르나 서신'에 나타난 '아비루족'의 침공에 관한 보고 B.C. 1400년에 기록된 '텔 엘 아마르나 서신'에는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있는 애굽의 도시 국가와 영지들이 '아비루'(Apiru)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호소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아비루' (Apiru)라는 용어는 지금의 바벨론어 Habiru와 구약성경의 '히브리'(Hebrew)라는 말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을 침공한 자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가나안을 정복했던 히브리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13c가 아닌 15c임을 말해 준다.
4) 출애굽 연대의 결론 출애굽 연대에 관한 연구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연구가 아닌 역사 연대의 해석일 뿐이므로 어느 연대기설을 따르든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감소되거나 출애굽 사건의 역사성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연대기설 중에서 어느 것을 따르든 커다란 교리적 논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차피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성경의 증거뿐만 아니라 성경 외적인 상황과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역사와 잘 조화되는 15c설 즉 B.C. 1446년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욱더 성경적이며 앞으로의 성경 해석에도 더욱 유리할 것이다.
III. 홍해에 관한 논쟁
1. '갈대 바다'로서의 홍해
홍해에 관한 논쟁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를 성경의 증거 그대로 홍해로 받아들이는 전통적 견해와 이에 반하여 홍해의 문자적 의미인 '갈대 바다'로 해석하는 현대적 견해 사이의 논쟁이다. 이제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해 고찰해 보되 먼저 '갈대 바다'로 해석하는 견해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홍해'라는 단어의 의미 홍해를 '갈대 바다' 혹은 '얕은 습지'로 해석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홍해를 뜻하는 히브리어 '얌숲'<#Ws A !y">의 의미가 '갈대의 바다' 혹은 '골풀의 바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갈대 바다'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를 홍해 바다가 아닌 수에즈만의 위쪽에 있는 '쓴 호수'(bitter lake)이거나 아니면 지중해와 수에즈만 사이의 습지라고 주장한다.
2) 홍해에서 자라지 않는 갈대 '갈대 바다'에 대한 두 번째 주장은 홍해 주변의 그 어느 곳에도 갈대나 골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홍해'라는 말이 뜻하는 갈대는 홍해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에즈만 북쪽의 습지에만 발견되기 때문에 성경의 홍해는 당연히 습지 또는 얕은 물가로 해석 되야 한다는 것이다.
3) 출 14:2의 해석 '갈대 바다'를 주장하는 자들의 세 번째 근거는 출 14:2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개의 지명이 지중해 연안, 즉 수에즈만의 북쪽 습지에 자리 잡은 도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진을 친 '에담'이 수에즈만 북쪽의 습지이므로 이스라엘이 건넜던 장소는 홍해가 아닌 수에즈만 북쪽의 습지라는 것이다.
2. '갈대 바다'에 대한 반증
1) '홍해'라는 단어의 해석 방법 비록 홍해를 뜻하는 히브리어 '얌숲'<#Ws A !y">이 문자적으로는 '갈대의 바다'를 뜻하기는 하지만 홍해를 이름 그대로 갈대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많은 히브리어 이름들이 그 이름이 뜻하는 환경이나 모양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거룩한 샘'을 뜻하는 '가데스'의 경우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달리 '고라'의 무리가 모세의 명을 거역하다 멸망당하였을 뿐만 아니라(참조, 민 16:1-40),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나 죽은 끔찍한 장소였으며(참조, 민 16:47-50), '습지'를 뜻하는 '신광야'는 오히려 '엘림'과 '시내산'사이에 있는 메마른 광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참조, 출 16:1; 17:1; 민 20:1). 그러므로 홍해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홍해가 '갈대 바다'의 의미를 지녔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건넌 곳을 홍해가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다.
2) 홍해 주위의 해초 '갈대 바다'를 주장하는 자들의 두 번째의 주장에 대한 해답은 첫 번째 주장에 대한 해답과 함께 자연히 풀리게 된다. 즉 '홍해'의 의미가 '갈대 바다'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건넌 곳이 꼭 갈대숲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이며 따라서 홍해 주변에 갈대가 없다고 해서 홍해의 기적을 다른 장소로 이전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에 대해 한 가지 더 첨가할 수 있는 사실은 홍해 주변에는 갈대 바다가 전연 없다는 주장과는 달리 욘 2:5에서 사용된 '숲'의 의미인 (해)초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3) 확인되지 않은 출 14:2의 지명들 '갈대 바다'를 주장하는 자들은 출 14:2의 여러 가지 지명들이 수에즈만 북쪽 수역에 위치하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 14:2에 언급된 여러 지명들이 비록 애굽의 비문에는 언급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 지역의 정확한 장소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단의 학자들은 이러한 지역들이 수에즈만의 북쪽 끝 부분에 위치하였었다고 주장한다.
3. 홍해의 기적을 주장하는 성경적 증거들
1) 심히 두려워한 이스라엘 바로의 추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첫 번째 반응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려는 노력이 아닌 심한 두려움이었다(참조, 출 14:10).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 갈대밭이나 얕은 습지가 아닌 깊은 홍해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만약 이스라엘이 광야의 얕은 습지나 갈대밭에 이르렀다면 비록 더디기는 할지라도 계속해서 도망치려 했을 것이나 그렇듯 꼼짝도 못하고 두려워하고만 있었던 것은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얕은 습지가 아닌 깊은 홍해 바다여서 앞으로 나가려 해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육지로 행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로 행한 땅은 물이 마른 메마른 땅이다(참조 출 14:16, 21, 22). 만약에 이스라엘이 얕은 습지나 갈대 숲 사이로 건넜다면 결코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기사가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건넌 땅은 습기가 많고 축축한 습지나 갈대밭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가 갈라지고 땅이 메마른 육지였다.
3) 좌우의 벽이 된 홍해 이스라엘이 갈라진 홍해를 건널 때 물은 그들 좌우의 벽이 되었다(참조, 출 14:22). 두말할 나위 없이 갈대숲으로는 장정만 육십만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지나갈 통로와 좌우의 벽을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곳이 '갈대 바다'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억지 추측일 뿐이다.
4) 몰살된 애굽 군대 홍해의 기적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다 가운데 몰살된 애굽 군병들이다(참조, 출 14:26-28). 이러한 증거는 갈대 바다 통과를 주장하는 자들이 영원히 해결 못할 난제이다. 왜냐하면 갈대숲에서는 그렇게 많은 자들이 한꺼번에 죽을 수도 없으며 익사할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참조, 출 15:5,8)
5) 이스라엘의 찬송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으로 구원함을 얻은 이스라엘의 찬송 속에서도 그들이 건넌 홍해에 대한 증거가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났다. '큰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출 15:5).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 25:8).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납같이 잠겼나이다'(출 25:10).
4.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 장소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홍해의 기적이 어디에서 일어났겠는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의 홍해와 지금의 홍해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지금은 홍해를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그리고 홍해의 세 부분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과거에는 '수에즈만'과 '아카바만' 모두가 홍해로 불리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상 9:26에서 수에즈만을 홍해라 지칭하였고, 민 14:25; 신 1:40에서는 아카바만을 홍해로 칭했다는 사실에서 잘 증명된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들을 종합할 때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는 남쪽의 커다란 홍해가 아니라 수에즈만 북쪽의 끝 부분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위치는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참조, 출 15:22)에 거했다는 성경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5.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앞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들어간 여정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3).
6. 홍해의 기적에 대한 결론
성경은 홍해 바다의 기적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해'의 문자적 의미만을 추종하여 '갈대 바다의 통과'를 주장하고자 하는 자들의 의도는 초자연적 기록의 역사인 성경을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해하고 맞추려함과 동시에 성경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인간적 사고를 배격하고 성경이 증거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능력을 의심치 않는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IV. 출애굽기의 중심 사상-피의 구속을 중심으로
출애굽기의 중심 사상이 '구속(救贖)'임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이러한 구속사가 출애굽기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 본 논지의 요점이다.
1. 피와 생명(참조, 창 4:11; 9:4, 5)
출애굽기 전체를 흐르고 있는 구속적 맥락은 창세기 4장의 가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고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가인에게 아벨의 죽음을 '피'라는 표현으로 대신하셔서(참조, 창 4:11) '피가 곧 생명'임을 증거하셨고,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창 9:5에서는 '생명을 피'로 단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피를 흘릴 자의 대가는 반드시 피로 받으리라 말씀하심으로 '생명의 대가가 피'라는 원칙을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보여 주는 피에 대한 증거는 곧 피가 생명이요 죄인이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 흘림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2. 피와 할례(참조, 출 4:25)
죄인이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피 흘림의 방법밖에는 없다는 창세기의 원칙은 출애굽기 4장에 와서 의외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 적용된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미디안을 출발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례란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맺은 구속의 표상, 즉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별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할례의 전제 조건이 피라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뿌림이라는 사건을 거쳐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설정된 피와 생명의 관계 그리고 범죄의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피 흘림의 방법이 본문의 출 4:25에 와서 할례라는 방법으로 발전 계시되면서 피와 구속의 관계가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3. 피의 구속을 계시하는 최초의 사건 '유월절'(참조, 출 12:1-36)
할례의 의식으로 발전된 피와 생명의 관계는 유월절 어린양 희생의 사건으로 비로소 선명하게 계시되었다. 즉 '피는 곧 생명'이라는 창세기의 선언은 모세의 할례 사건으로 인해 '구속'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고, 그러한 개념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유월절 사건을 통해 '대속'의 의미로 확장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 어린양의 사건을 통해 확장된 대속의 개념은 출애굽기의 구속사의 절정을 이루며 후에 만인을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영원한 표상으로 남게 되었다.
4. 생명을 약속한 언약의 피(참조, 출 24:8)
유월절 사건이 피의 대속적 성경을 보여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면 피가 곧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본문의 말씀은 대속의 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이러한 언급은 모세가 여호와께 화목제를 드리고 난 후에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리며 한 말로서 피가 의미하는 뜻이 무엇이며 그것이 왜 대속의 피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인 것이다. 즉 피가 대속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은 피 자체가 지닌 어떠한 신비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피는 생명이며 피 외에는 인간을 대속할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피 뿌림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5. 피 뿌림을 위한 구체적 방법의 제시 놋제단(참조, 출 27:1-8; 29:12,16)
피의 대속에 대한 선언과 그에 대한 의미는 이제 모두 주어졌다. 그러나 아직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대속의 피에 대한 한 가지 방법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피의 제사, 즉 성막의 놋제단이었다. 그러나 놋제단이 본문에 와서야 최초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피의 제단 역시 아벨의 제사로부터(참조, 창 4:1-8)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었으며 이후로 솔로몬 성전의 제단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갔던 것이다.
6. 대속의 피에 대한 신약적 해석
1) 유일한 대속의 방법-피 구약에서 피는 유일한 대속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연결시키며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어느 누구도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참조, 히 9:22; 10:19).
2) 할례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다는 창조주의 인치심으로 할례 받은 자만이 거룩한 이스라엘의 반열에 속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러한 육체 할례를 영적 할례로 승화시켰으며, 영적 할례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라고 증거하였다(참조, 롬 3:30).
3) 유월절 어린양 대속의 피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인 유월절 어린양은 인류의 대속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확실한 상징이었다(참조, 요 1:29; 고전 5:7; 벧전 1:19). 그의 피는 구속함을 얻게 하는 구원의 피였으며(참조, 롬 5:9; 엡 1:7; 골 1:14), 단번에 드려진 완전한 희생 제물이었고(참조, 골 1:20; 히 9:12),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그와 화목케 하는 화목 제물이었다(참조, 엡 2:13; 골 1:20; 히 9:12; 10:19)
4) 언약의 피에 대한 예수와 사도들의 해석 피의 구속력은 하나님의 언약에 있었다(참조, 출 24:8). 그런데 이러한 언약에 대해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가 곧 '언약의 피'(참조, 마 26:28; 막 14:24; 눅 22:20)라 증거하였으며 사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피만이 대속의 언약을 약속한 '언약의 피'였음을 증거하였다(참조, 고전 11:25; 히 9:18-20; 12: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모세에게 약속된 구원의 언약이 계승된 것이었으며, 그 피를 믿는 자, 즉 그 언약을 믿는 자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약속된 구원이 임할 것을 확증하는 보증이었던 것이다.
7. 중심 사상에 대한 결론
출애굽기의 중심 사상인 구속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되었다. 어떤 때는 성막의 기구들을 통하여 계시되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제사장의 예식을 통하여 계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 사건은 피의 계시였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피의 계시는 각각의 사건들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면서도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향해 점점 분명하게 확장되어 계시되었는데 그 주제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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