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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4. 하나님의 길

하나님아들 2015. 2. 22. 23:09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4.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전라도에 “거시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과 비교해서는 안되지만, 성경에 ”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말로 그 의미를 번역하기에는 까다로운 것이 많은 것이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국 성경은 ”길“이라고도 번역하였고 ”도“라고도 번역하였습니다. 영어는 모두 ”Wa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으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연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세 가지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자기 계시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지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전체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느냐하면, 바로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말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알듯이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의 중요성

 

1. 성경에서 4번째로 가장 많이 반복된 단어가 “길”입니다.


4번째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를 흔히 복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 다음으로 “길”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많이 반복되는 단어이면서 가장 연구되지 않는 분야일 것입니다.

 


2.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길 (도)을 따르는 사람”이라 정체성을 규명하였습니다.


초대의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비꼬며 비난하는 의미로 그렇게 불린 별명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지칭하는 단어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초대교회 때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워낙 광대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교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자신들을 불렀습니다. 이유는 다양한 종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졌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외형적인 모습으로 본다면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속에 나타나는 각 교회의 모습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고, 에베소교회와 안디옥교회와도 완전히 다른 예배 스타일과 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각기 다른 종교적인 외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외적으로는 여전히 이방종교의 형태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내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섬기던 우상의 예배 형태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익숙한 종교형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종교적인 의식과 형태는 십자가 본질을 담는 그릇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 안에 담긴 내용물 즉,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신앙의 형식은 신앙의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행전 18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종교회의를 열정도 이었지만, 이 종교회의에서의 결론은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이전 자신들이 섬기던 종교의 형태를 사용하였다는데 의분을 일으키며 타락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회당과 성전에서 예배드린 형식이 바로 조르아스터교 예배 형식이 유대교에 정착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슬람의 예배형식이 바로 예수님이 하셨던 예배 형식과 거의 일치합니다. 다윗시대에 수많은 예배 형식을 바꾸었는데, 모두 이스라엘 주변의 종교적인 형태의 장점들이었고, 음악 또한 주변 발달된 것들을 도입한 것입니다. 모두 다른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본질과 그것이 담긴 형식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서적인 형식자체가 없지만, 만약 형식 자체가 아무리 성서적이라도, 그 안에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상 취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내적으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교회들마다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 (Jews)', '그 길 (도)을 좇는 자들 (The Followers of the Way)', '형제들 (brethren)', '제자들 (Disciples)', '신실한 자들 (the Faithful)', '택함을 받은 자들 (Elect)', '성도들 (Saints)', 신자들 (Believers)',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 (the household of God)'이라고 지칭하였지만, 불신자들은 '나사렛 사람들 (Nazarenes)', '갈릴리 사람들 (Galileans)', 혹은 '예수쟁이 (Jessacans,)'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 도 (길)를 좆는 자”라고 지칭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 (길)를 전했다, 예수님이 도 길)를 말씀하셨다”라고 까지 표현하였습니다. 한국말에는 정확하게 번역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길”로 번역하기도 하고 “도”로 번역 하였습니다.


3.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 길을 따르지 않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하였고” (히3:9-10)라고 하였습니다. 즉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해서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모두 계속 되는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구약에서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속해서 하나님은 길을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길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길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지속적으로 그 길을 여전히 따르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세 번의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 이후의 예루살렘입니다. 모두 길을 잃어버렸고, 길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성경에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시사한 바는 큽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에 길을 잃어버린 것이 무슨 의미이고, 길을 돌이키고 길을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성경의 중요한 개념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4. 회복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길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복의 길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회복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의 길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한 것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동안 하나님은 부흥을 통하여 이러한 회복의 길을 늘 인도하셨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이러한 회복의 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서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한계


1. 길은 한 가지 의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길의 의미는 한 가지만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투리의 거시기가 한 가지 의미가 아니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때도 있는 것처럼, 길은 한 가지 이상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렘 6:16)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길의 의미는 거짓신앙,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옛길과 가장 좋은 길 그 길의 의미는 회복, 구약의 신앙의 본질,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기준, 그 시대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 그때그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 “길”에 대한 의미는 한가지만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본문의 문맥을 통해 가장 근접한 의미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정리한 의미보다 더 많은 의미가 나올 수 있습니다.


2. 길을 연구한 연구 서적이나 논문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연구한 서적이나 논문 자체가 없기에 제가 성경으로만 자세히 연구하는 수밖에 없고, 또 다른 자료들을 인용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것만 연구한 연구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연구한 것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길‘을 연구한 연구 서적이나 책이 있다면 저에게 정보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원전에 대한 한계.


길에 대한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읽고 원어의 의미를 찾아 정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찾아 구절들을 뽑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가 가지고 있지 않기에, 길에 대한 번역이 가장 잘 된, 새번역을 가지고 길을 찾았습니다. 영어로 된 성경 역시 길에 대한 번역이 제각기 되었기에 한국 성경이나 영어성경이나 모두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 연구는 새번역 성경에서 길로 번역하고, 다른 한글 번역본인 개혁개정과 공동번역 개정판을 통해 길로 입증된 본문을 중심으로 연구하였습니다.


일반적인 길의 의미


1. 길 - 일반적인 도로를 말한다.


“제 갈 길만 바쁘게 가는 사람에게”(잠 9:15)

“어리석은 자는 을 갈 때에도, 생각 없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누구에게나 드러낸다.” 전 (10:3)


성경에는 일반적인 도로를 길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길입니다.


2. 길 - 인생의 여정


수 5:4, 수 5:5, 삼상 24:1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 47:9)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신 1:31)


우리 삶의 인생 여정을 일반적으로 지칭합니다.


3. 길 - 방법


삼상 1:15, 욥 13:16, 욥 24:22, 욥 29:25, 욥 36:26, 잠 19:5, 전 6:7, 렘 8:18,

애 3:20, 애 3:51, 나 3:19, 눅 5:19, 눅 7:42, 요 15:22, 히 12:25,


“그러니 그대는 이제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이제까지는 임금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의 아들,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나를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이오.” (삼하 15:34)


4. 길 - 자신의 생활과 사업과 신앙과 하려고 하는 모든 일


출 23:20, 출 33:3, 수1:5, 수 1:8, 삼상 26:25, 욥 13:27, 욥 19:8, 욥 22:28,

욥 30:12, 욥 31:16, 시 2:12, 시 18:32, 시,1:11, 시 139:3, 잠 2:8, 잠 3:6, 잠 3:23,

잠 5:21, 잠 11:5,20, 잠 12:26,28, 잠 13:6, 잠 16:9, 잠 18:16, 잠 20:24, 잠 21:8,

잠 22:5, 잠 31:3, 사 26:7, 사 45:13, 사,8:15, 렘 2:17, 렘 23:12, 렘 32:39, 암 2:7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창 28:20)

신 28: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특별한 지칭의 길의 의미


1. 길 - 죽음 이후의 세계


수 23:14, 욥 16:22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 너는 굳세고 장부다워야 한다.”(왕상 2:2)


2. 길 - 시온 (=거룩한 길)


사 35:9


“거기에는 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사 35:8)


3. 길 - 구원


“눈 먼 나의 백성을 내가 인도할 것인데, 그들이 한 번도 다니지 못한 로 인도하겠다. 내가 그들 앞에 서서, 암흑을 광명으로 바꾸고, 거친 곳을 평탄하게 만들겠다. 이것은 내가 하는 약속이다. 반드시 지키겠다.”(사 42:16)


4. 길 - 새로운 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사 43:19)


5. 길 - 회복


“그들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물어 보며, 이곳을 바라보며 찾아올 것이다. 돌아온 그들은 나 주와 언약을 맺을 것이다. 절대로 파기하지 않을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나와 연합할 것이다.”(렘 50:5)


6. 길 - 창조의 원리


욥 38:25, 사 43:16


“비가 내리는 규칙을 세우시던 그 때에, 천둥 번개가 치는을 정하시던 그 때에” (욥 28:26)


7. 길 - 배신


“도망가는 이들을 죽이려고, 갈라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받던 그 날, 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어야 했다.”(옵 1:14)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자, 에돔은 피를 나눈 자신의 동족이 멸망하는데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웃으며 기뻐하였습니다. 멸망한 유다에 들어가 도둑질과 살생을 일삼았습니다. 도망쳐 나오는 유대인들의 길목에서 유대인을 죽이고 강탈하였습니다. 여기서의 길은 바로 배신의 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길입니다.


8. 길 -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궁지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시 4:1)


9. 길 - 선택


“너 사람아, 바빌로니아 왕이 칼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두 길을 그려라. 그 두 길은 같은 나라에서 시작되도록 그려라. 이 나뉘는 곳에는 안내판을 세워라. 칼이 암몬 자손의 랍바로 갈 수 있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읍인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그려라. 바빌로니아 왕이 그 두 길이 시작되는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아보려고 점을 칠 것이다. 화살들을 흔들거나, 드라빔 우상에게 묻거나,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보고, 점을 칠 것이다.” (겔 21:19-21)


10. 길 - 과거의 회상과 추억


신 28:68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 17:16)


영적인 목적의 길의 의미

 

1. 길 - 거짓 신앙

 

“나의 백성은 잃은 양 떼였다. 목자들이 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그들이 산 속에서 헤맸다. 양 떼가 산과 언덕에서 방황하며, 쉬던 곳을 잊어버렸다.”(렘 50:6)


2. 길 - 하나님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삶 혹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삶


왕상 1:49, 왕상 9:6, 왕상 22:43, 왕상 22:52, 왕하 13:2, 왕하 13:6, 왕하 13:11,

왕하 16:3, 왕하 17:13, 왕하 19:28, 왕하 19:28, 왕하 19:33, 왕하 21:21, 왕하 21:22,

왕하 22:2, 대하 7:14, 대하 21:6, 대하 21:11, 대하 21:13, 대하 22:3, 대하 28:2,

느 9:35, 욥 22:15, 욥 31:7, 욥 34:27, 욥 36:21, 시 1:1, 시 1:6, 시 14:3, 시 35:6,

시 36:4, 시 37:7, 시 53:3, 시 58:3, 시 106:6, 시 119:67, 시 119:101, 시 119:104,

시 125:5, 시 131:1, 시 146:9, 잠 1:15,19, 잠 2:15, 잠 4:14,15,18,19, 잠 5:6,8,

잠 7:25,27, 잠 13:15, 잠 15:9, 잠 16:29, 전 11:9, 사 19:13, 사 47:10, 사 55:7,

사 57:17, 사 59:7, 사 59:8, 사 65:2, 렘 8:6, 렘 15:7, 렘 18:11, 렘 21:8,

렘 23:13,32, 렘 35:15, 렘 36:3,7, 겔 3:18,19, 겔 13:22, 겔 18:23, 겔 20:43,

겔 20:44, 겔 23:13, 겔 33:8,9,11, 겔 44:10,15, 겔 48:11, 단 9:13, 호 2:6, 호 4:12,

암 2:4, 욘 3:8,10, 슥 1:4, 마 10:5, 행 13:10, 롬 2:19, 롬 3:12,16, 딤전 5:15,

딛 3:11, 히 2:1, 히 3:10, 히 5:2, 약 5:19,20, 약 5:19, 유 1:13,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 (레 26:22 )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민 24:25)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걷는 길을 걷는 길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이 길을 성경은 가인의 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하나님은 이 길에서 따라가지 말고 지속적으로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이 길로 간 사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힘센 손으로 나를 붙잡고, 이 백성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나에게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사 8:11)


3. 길 - 하나님의 심판


시 80:12, 잠 2:18, 렘 4:7, 호 13:7, 계 16:12


“주님은 분노의 길을 터 놓으시니,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지 않으시고, 생명을 염병에 넘겨 주셨다.” (시 78:50)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신 주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도 참되십니다.”(계 15:3)


4. 길 -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다림줄


 

출 18:20, 신 30:16, 삼상 8:3, 삼상 8:5, 삼하 22:22, 욥 23:11, 시 23:3, 시 25:8,

시 37:14, 시 39:1, 시 44:18, 시 50:23, 시 51:13, 시 95:10, 시 101:2, 시 107:7,

시 119:3, 시 119:5, 시 119:9, 시 119:15, 시 119:26, 시 119:27, 시 119:29,

시 119:30, 시 119:32, 시 119:33, 시 119:35, 시 119:37, 시 119:105, 시 119:168,

시 119:176, 시 139:24, 시 143:10, 잠 2:5, 잠 2:9, 잠 2:13, 잠 2:20, 잠 3:32,

잠 4:11, 잠 4:27, 잠 5:23, 잠 6:22,23, 잠 8:20,32, 잠 9:6, 잠 10:17, 잠 11:3,

잠 14:2,8,12,22, 잠 15:10,19,21, 잠 16:17,25,31, 잠 21:16, 잠 22:6, 잠 23:26,

잠 28:6,10, 전 12:10, 사 2:3, 사 3:12, 사 30:21, 사 42:24, 사 48:17, 사 57:2,

사 58:2, 렘 6:16, 렘 7:23, 렘 26:3, 겔 3:20, 단 9:13, 호 14:9, 미 4:2, 말 2:6,8,

벧후 2:15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 이다”(마 22:16)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막 12:14)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히 3:10)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하나님의 기준 (다림줄)이란? 하나님의 기준인 다림줄을 볼 수 있는 성령이 주시는 분별력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의중을 성경 말씀의 통해 아는 분별력입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 길로 행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어야 하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각자가 자기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을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왕상 11:33)


자기 길과 세상의 길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육신과 세상과 사단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타락한 자기중심적인 삶과 세상의 풍속을 따르면 사단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단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며 살 수 밖에 없음을 알 아야 합니다. 세상의 길과 자기 길이 밀접하기에 자기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세상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사고와 가치관이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쉽게 동화됩니다. 자연스럽습니다.


자기 길은 ‘악’이요 ‘죄’입니다. 그리고 죄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6)


이 구절은, 하나님의 길과 네 (너희) 길이 다른데,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네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생각을 따르는 자가 악인이요 패역한 자입니다. 여기 말하는 악인, 불의한자는 자기 생각을 자기 길을 따르는 자를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자기의 길의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 (다림줄)만 통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 통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구원의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일 년간 밤마다 철야하고 때로는 금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철저히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관점만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정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 내가 정성껏 그렇게 하였으니 하나님이 봐 주시겠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5. 길 -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역


막 1:3, 막 1:2, 수 2:16, 사 62:10, 말 3:1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사 40: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 3:3)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역을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6. 길 - 하나님이 그때그때 마다 최선의 방법으로 이끄시는 것 혹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속해있는 것

 

창 24:40, 출 13:18, 출 13:21, 신 1:22, 신 19:9, 신 28:25, 수 3:4, 삿 18:5,

삿 18:6, 삼상 9:6, 삼상 9:8, 왕하 3:8, 느 9:12, 느 9:19, 시 5:8, 시 25:4, 시 32:8,

시 37:5, 시 37:23, 시 142:3, 시 143:8, 잠 14:32, 잠 19:3, 렘 42:3, 살전 3:11,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33)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드로아에 갔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거기에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고후 2:12)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이끄시는 것을 길로 표현하였습니다. 즉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이나 행동들이 모두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인도되기를 원하는 것을 길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그 선택과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기를 원하는 것을 길로 표현하였습니다.


7. 길 - 하나님의 다루심 = 하나님 자신에게 이르도록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여정


신 24:9, 신 25:17, 욥 28:23, 욥 38:20, 시 25:8, 시 43:3, 시 138:7, 시 25:12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시 8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8. 길 -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겠다.


렘 31:9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사 57:14)


9. 길 - 인간과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8,9)


길의 의미를 산출할 수 없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을 길로 표현하였습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 곁에 있어도 그 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성품을 다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한 표현입니다. 하나님 그분의 무한한 그분의 성품과 뜻과 의중을 측량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만큼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에게 속한 피조물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극히 일부분밖에 안됩니다.


10. 길 - 하나님 자신


시 77:19, 시 84:5, 시 85:13, 잠 3:17, 렘 21:8, 겔 14:11, 호 7:13, 합 3:6


“애타는 소리가 벌거숭이 언덕에서 들린다. 이스라엘 자손이 울부짖으면서 간구하는 소리다. 그들이 올곧은 길에서 벗어나고, 자기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잊었기 때문이다.” (렘 3:21)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11. 길 - 구약성서에서의 신앙의 본질

 

 

출 32:8, 신 8:6, 신 28:9, 신 31:29, 삿 2:17, 삿 2:22, 왕상 2:3, 왕상 2:4,

왕상 8:25, 대하 6:16, 대하 6:31, 대하 17:3, 대하 21:12, 대하 27:6, 대하 34:2,

욥 4:6, 욥 24:13, 욥 28:7, 시 1:6, 시 16:11, 시 17:5, 시 18:21, 시 23:3, 잠 2:19,

사 63:17, 렘 4:18, 렘 5:4,5, 렘 18:15, 애 3:40, 겔 13:22, 미 4:2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내 말을 듣기만 했어도, 내가 가라는 길로 가기만 했어도”(시 81:13)


“너는 에 푯말을 세우고, 길표를 만들어 세워라. 네가 전에 지나갔던 길대로를 잘 생각하여 보아라.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너희가 살던 이 성읍들로 돌아오너라.”(렘 31:21)


12. 길 - 하나님 나라


마 21:32, 눅 1:79, 눅 20:21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 2:2)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 18:25)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면, 떠오르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지금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학문의 방법론으로의 하나님의 나라는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책을 보게 되면 이런 기준도 잡아놓지 않고 혼돈되게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신학적 방법론으로의 하나님의 나라는 엄밀히 다릅니다.


성경은 길을 하나님 나라로 지칭하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개념으로 말하였기에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개념으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론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많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 없는 이론적인 확고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바리세인도 인정하고 사두개인도 인정하고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른 신앙이 문제였습니다. 바른 교리와 성서적인 설교를 바리세인들이 하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인정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른 교리와 바른 성서적인 가르침 자체가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였습니다. 흡사 오늘날과 비슷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의 실제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실제가 되도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그 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성서의 개념으로 풀어 말하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에 자신 삶을 조정하여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었습니다. 바리세인도 사두개인도 모두 알고 있고, 오늘날 우리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세인과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실제를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위 본문은 불신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정황은 이미 유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멸망의 문은 예수님 시대에 신앙에 대한 이론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을 지적한 것이고, 좁은 문은 신앙에 대한 이론을 동의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삶에 실제가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와 서론적인 것만 이 지면에 서술하였습니다.


13. 길 - 십자가


행 2:28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 14:4)


14. 길 - 복음 (=예수 그리스도)


행 2:28, 행 16:17, 히 9:8, 행 9:2), 행 24:14), 행 24:24, 롬 3:17, 히 10:20,

벧후 2:2, 벧후 2:21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4-6)


복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시인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복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것을 복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몇 십 년 되지 않은 합리주의적 복음 해석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극치가 바로 구원파를 낳게 하였습니다. 이것 자체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게 하는 중요한 핵심이지만, 그것 자체는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교리자체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입니다.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핵심에 해당합니다. 예수는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메시야"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이 이것이었을 때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분의 놀라운 대속의 사건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복음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이루신 그 일을 기초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뜻과 의중을 나의 비전으로 삼고, 그분의 비전을 이루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15)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가 아닙니다. 1차적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미 복음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동의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복음이라면, 바울은 무언가 잘못된 말들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단순히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알게 된 놀라운 복음 예수 그리스도)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03)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8-11)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을 알 모든 것이 있습니다.


4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이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하나님의 길로 사신 그 모든 삶,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비전. 모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전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뜻인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죄 때문에 제사가 필요 없어 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이 땅에 이룰 수 있는지 모든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 모든 곳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이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가 바로 옆에서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의 모든 영역에서 배어져 나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갈2:20)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의미는 바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미와 정확하게 똑같은 의미입니다. 복음이 실제가 되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가운데, 그 분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표준새번역 빌3:10-11)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초점으로 두었습니다. 복음은 한평생 우리가 추구하고 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된 복음을 고린도전서 1:30에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의로움거룩함구원함이 되셨으니” (개혁개정판)


“그러나 너희는 그분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주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거룩함구속이 되셨으니” (킹제임스한글)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거룩함구원 대속)이 되셨습니다.” (새번역)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공동번역 개정판)


이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쓸 때 까지 자신이 깨닫고 경험하였던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 (복음)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15. 길 -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뜻과 의중이 길입니다.


왕상 8:58, 히 11:25


“주님께서, 남은 백성 곧 앗시리아에 남은 자들이 돌아오도록 큰길을 내실 것이니,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게 하실 것이다.”(사 11:16)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눅 13:3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16. 길 - 회복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주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이 살아갈 올바른 길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며, 주님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신 주님의 땅에 비를 다시 내려 주십시오.” (왕상 8:36)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이 살아갈 올바른 길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며, 주님의 백성에게 유산으로 주신 주님의 땅에 비를 다시 내려 주십시오.”(대하 6:27)


길을 잃어 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 - 타락의 길


 

이와 같이 하나님의 길은 총체적이고 우리 신앙 전체를 의미합니다. 문제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친 외침은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 심각한 심판 앞에 서 있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에 보면 우리는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정한 패턴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다.

4.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5.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이 패턴은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패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 위쪽 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를 구하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거기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중단하면, 그 배는 절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폭포 쪽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잠시라도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을 중단하면, 세상과 육신이 사탄이 합작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그리고 세상 가까이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절대로 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중단하면, 바로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의 과정은 시작됩니다. 즉, 우리의 영적 타락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사야 29장도 이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이사야 29:9-12절).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 있지 못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든지 일반 성도들이든지 상관없이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집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지성 혹은 성경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가리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만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회개에 대한 교리에 의해 자신이 죄에 대한 각오를 하고 의지적으로 삶을 변화시킨 것을 회개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죄책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교리를 붙들고 죄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회개는 합당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의지적으로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께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없이 의지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회개로 인한 변화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변화입니다. 하나님 그 분 곁에 있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눈을 돌리신 하나님을 뵙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이론과 이에 대한 자기 의지의 결단 자체가 회개는 아닙니다.


4.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먼 예배.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곧바로 참다운 신앙은 자취를 감추고, 거짓 신앙이 진짜신앙인체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짜신앙에 빠지면, 항상 우리의 예배가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뿐만 아니라, 이 일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이사야의 이 구절을 인용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7-9).


이 성경구절들은 타락한 예배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은 먼 예배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형식적인 예배를 전혀 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듯이, 문제는 여기서도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 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바를 알지 못하면, 우리들도 그들처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의식으로서 본질의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께 중심에서부터 찬사와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중을 발견하여 그곳에 같이 있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나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그리고 온 삶으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선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시편 24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어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시 24:6). 이 구절을 예배로 나아가는 것에 관한 구절입니다. 3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그런데 이 구절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온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대하 15:12,15).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3).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온 마음과 힘을 대해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예배에 아무리 큰 정성을 쏟고, 아무리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아무리 엄숙한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예배를 통해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예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예배였습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 아무리 많은 희생과 정성이 드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면, 그 예배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입술뿐인 예배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도 그의 책 『부흥』에서 신앙의 타락하여 죽은 정통주의(하나님의 기준이 변질되면), 예배가 타락한다고 말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예배는 생명력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만,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언제나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입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 일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들 존재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그저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간다는 자만에 빠진 모습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에 의한 예배.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참된 예배는 당연히 성경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단순한 사람의 가르침에 기초한다면,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모두 자신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다른 날 드리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절기와 대회를 지켰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되, 돼지나 낙타를 제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성경에 따라 숫양, 수송아지,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출 29장; 레 4,5,8장).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경대로 병든 짐승, 여윈 짐승을 드리지 아니하고, 살진 짐승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예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일는 바와 같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는 모든 종류의 일을 철저하게 금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예배가 당연히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나 예수님을 통해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비벼먹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치유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안식일관을 범했을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적인 일을 쉬고,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안식일에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세분화했고,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행동이 그 세분화된 그들의 규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예배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전통 그 자체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전통에 대한 그릇된 의존은 하나님의 성령을 소멸하고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해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그리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처럼 전통에 대한 그릇된 의존은 하나님의 성령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스데반도 그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1).


더 나아가 전통에 대한 그릇된 의존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합니다. “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1-9).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예배 시간에 찬양과 경배를 부른다고 해서 화를 냅니다. 어떠한 이해와 가치와 자세를 가지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지, 그리고 그 가치와 이해와 자세가 성경에 합한 지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부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예배순서나 의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웨슬레 시대에는 웨슬레나 죠지 휫필드 등이 야외에서 설교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대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에 대한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놀랍게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놓칠 뿐 아니라, 그것을 대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신앙이 타락하여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면, 곧바로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와 목적을 채워줄 부드러운 메시지들을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치게 됩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사 30:9-12).


그런데 심각한 점은 이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이 부드러운 메시지를 거짓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이사야 30장 12절에서는 이 부드러운 메시지를 “허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는 이것을 거짓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3-14).


모든 부드러운 메시지가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거짓이라고 말하는 부드러운 메시지는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가짜신앙에 빠져서 하나님을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평강 축복)”의 메시지를 외쳐 댑니다. 그 메시지는 나름대로 성경에 나오는 약속에 기초한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아닌 선지자들이 임의로 선택한 메시지입니다. 그러한 메시지를 성경은 거짓인 부드러운 메시지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그러한 거짓이 팽배했습니다.“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렘 23:16-17).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러한 거짓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이익도 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23:32).


“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렘 7:8).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사 30:12).


둘째, 부드러운 메시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떠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럼, 왜 부드러운 메시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을 떠나게 만듭니까? 그 이유는 부드러운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철저하게 타락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부드러운 메시지는 그들을 절대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부드러운 메시지는 실제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떠나시게 만드는 메시지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7. 참다운 믿음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불신이 믿음으로 둔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면, 참다운 믿음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참다운 믿음은 자신의 존재를 다 걸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상태로 그러한 믿음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불신입니다.


이사야 30장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1절과 상동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사 30:1-3).


그 당시 유다 나라는 국가적인 존립이 위험을 받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무자비한 강대국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다를 향하여 서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매우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하다가 남방에 있는 또 다른 강대국인 애굽과 조약을 맺기로 결정하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 일은 그 상황에서 지혜로운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외교적인 관례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유다의 행동을 두고 그렇게 강력하게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인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그 행동이 하나님을 신뢰 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애굽을 신뢰한 불신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면, 참다운 믿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볼 때, 참다운 믿음을 참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것의 백분의 일 정도의 어려움만 처해도, 그들처럼 똑같이 합니다.


8. 영적인 패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곧바로 찾아오는 것이 영적 패배입니다. 이사야 30장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사 30:17). 우리가 이 구절을 잘 이해하려면, 레위기 26장 7-8절과 대조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백성 다섯이 적 백 명을 쫓고, 하나님의 백성 백 명이 적 만 명을 쫓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 이사야 30장에서, 오히려 적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천을 이기고, 적 다섯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곧바로 찾아오는 것이 영적 패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머 물로 있을 때에 그곳에 넘칩니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 가운데 있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승리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에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우리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심으로 그곳에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곳에 엄청난 패배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면, 거룩한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길을 다시 찾는 길 - 영적 회복의 길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백성들의 죄악의 결과 앞에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영적인 회복의 길을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필요한 기도일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의 길이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바로 비춰지지 않으면 영적인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면 아직 하나님의 기준을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그 기준 앞에 반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지식적으로 알지만, 아직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 직접 개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회복의 길을 다음과 같이 세우셨습니다.


1.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신에게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 19:3,4)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기준은, 자신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과 과학을 기초로 한 합리적인 성경해석으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주님에게로 인도한다는 뜻이 두루뭉술하고 어떤 행동이나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것은 서양식 사고방식입니다. 성서는 동양식 사고방식의 가치관으로 쓰여져있습니다. 한국이 근대화되면서 서양식 교육방법을 사용하면서, 한국도 서양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모든 국민들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동양식 사고방식으로 주님에게로 인도한다는 뜻은,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가 만나듯, 또한 잉꼬부부가 서로를 알 듯, 하나님은 그 이상의 만남의 교제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이것이 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과의 만남과 교제가 자신의 삶의 전부인 그러한 삶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엄청난 약속을 하시며, 선행조건으로 언약을 지키라 명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출19:5,6)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를 부르실 때 가나안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가나안을 이야기하신 것이 출애굽기 23장에서 비로써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약속합니다. 백성들이 가나안이 목표인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신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기준을 말씀하신 이후입니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과 수많은 약속들을 하신 것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은 백성들과 직접적인 친밀한 관계가 목적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과 지켜야 할 도리를 말씀하십니다. 무조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나아간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거룩해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에서 23장까지 하나님은 십계명과 법들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24장에서 언약서를 가져다가 낭독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24:7-11)


25장에서 31장까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들을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신 기준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알리십니다. 백성들은 충분히 이해되었고 그들과 언약까지 세워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감추거나 숨기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리시고,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주님이 가지신 선명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소용없고 무익한지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 회개


하나님과의 언약 후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쓰레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오래된 전통이었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행동이었습니다. 바로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출 32:4)을 우상숭배라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긴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가 여호와 하나님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우상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교를 하거나 잡신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옛 전통과 습관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것을 우상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사고방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목축의 신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농경의 신이 바알과 아세라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백성들을 현혹한 이유가 이러한 이유입니다. 목축으로 살다가 농경사회로 전환하는데, 농경에 대한 모든 노하우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종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유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정황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사실 전형적인 기복신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사고방식 가운데는 옛 전통과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가지고 나오면서 소중하게 여겨왔던 가장 귀중한 금을 헌금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한 방법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과 습관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무섭습니다. 옛 전통과 습관을 성서적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오해들이 교회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종교적인 모습의 약80-90%가 바로 전통인데, 그것을 성서적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지 않고, 옛 전통과 습관을 자체가 신앙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추구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세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 당시 백성들의 사고방식 가운데는 하나님께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금을 부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 앞에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족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법을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본주의입니다.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불신앙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사고방식 가운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되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가 진리인양 둔갑하는 시대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표증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7-10)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시는 지요? 인격적인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대체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우상이라 지명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큰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백성을 죽이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애타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화를 주의 백성에게 내리지 말아 달라며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들에게 보여줍니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6-29)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는 백성들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자신의 백성에게 돌리시고 사하실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모세는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수위가 얼마나 큰지 모세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출 32: 31-35)


모세는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지금과 내세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진노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용서와 자비를 구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차선의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1-3)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가나안을 주시기로 하십니다. 백성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모든 준비를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산물로 가나안은 주겠지만,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자신의 백성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 하여 백성들 가운데 계셨다가는 하나님이 어느 순간 분노하여 자신들의 백성들을 모두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죽은것 보다 못한 영적인 죽음을 맛봅니다. 이 말씀의 섬뜩함을 느끼시는 지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절감하고 계시는지요?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시는지요? 회개는 바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 33:4)


하나님은 백성들의 장신구를 달지 못하도록 명하십니다. 또 다시 이러한 우상에 빠질만한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아닌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주기만 할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습니다. 자신이게 부귀영화와 사람들에게 명성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분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슬픔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자신이 몸서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시고 계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나의 소망이기에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시대에 처음 듣는 희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책들이 그래도 많이 있습니다. A. W. 토져의 책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선지자적인 메시지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 1990년대 미국에서 한 달 동안 어떤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 세미나에서도 엄청난 현대시대를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미나 기간 동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쉽게 한국에서는 그 세미나 테이프를 구하기 힘들지만, 그 세미나는 미국과 한국 일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선명하게 세워지는 운동이 일어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아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떤 처지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아무리 설교하고 주장해도 능력이 없습니다. 성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저는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리 설교해도 성도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지 않고, 신앙이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아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돌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을 울게 할 수는 있고, 수많은 곳에서 세미나와 집회 요청이 들어 올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회개의 문제입니다. 회개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기준 12 - 회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보여야 되는데, 자신은 자신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회개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아직 자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아래 몸서리 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기에 하나님이 더 이상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1)


더 이상 이스라엘 진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자, 모세는 이스라엘 진 밖에 회막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 밖에 있는 회막에 임재하신 것을 백성들이 목격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에 고뇌하고 있던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하나 둘씩 모여듭니다.


부흥의 시기때 마다 하나님은 항상,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한 도시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에, 임재가 없는 그곳을 나오도록 하십니다. 부흥이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하셨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그랬고, 죠나단 에드워즈가 그랬고, 영국 웨일즈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그렇게 구별되게 하나님이 사용하실 사람들을 산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부흥은 항상 변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죄 아래 놓여있는 진중에서는 하나님이 모세까지 외면하셨습니다. 진 밖 회막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그 친밀함을 회복하십니다. 백성들이 몰려듭니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에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아무리 예배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섬겨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이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는 교회와 도시를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외곽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셨습니다.


모세는 이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은 백성들의 영적회복의 깃털이라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합니다.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5-18)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성품과 속성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그것도 들어주십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8-23)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들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과 같이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복입니다. 영적 회복이 일어나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임재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에반 로버츠, 죤 웨슬리, 데이비드 몰간, 하웰 해리슨, 다니엘 로렌드, 존 리빙스턴, 그리고 한국의 길선주 장로 등등……. 부흥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부흥 때마다 이러한 영광의 임재는 교회와 도시와 나라에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끌려서 교회로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다릅니다. 많은 책 가운데 혼돈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성서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영광의 임재가 무엇이고 그것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회복을 위해 두 가지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시고, 둘째는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십니다. 이 두가는 다음번 주제인 “하나님의 기준 15 - 임재와 영광의 임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4.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역사가운데 길을 잃은 수많은 시대에 하나님은 한사람을 시작으로 자신의 백성들의 회복을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 모든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는 확답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고 그를 기뻐하십니다. 모세의 이름으로도 모세가 어떠한 사람인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간구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 때문에, 백성들의 영적인 회복을 승낙하십니다.


“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 33:13-17)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만으로도 모세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세의 중심을 모세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 모세의 요청에 모두 승낙하십니다.


부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진노를 그치고 회복을 시작하십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볼품없고 권력조차도 없고 연약하였던 마틴 루터를 통해,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부흥의 열매가 종교개혁이 되었습니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몸이 약하여 오래 걷지 못했던 병약한 죠나단 에드워드 목사 한사람을 통해, 미국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셨고, 미국 전체를 뒤흔드는 부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용서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한 사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회복으로 바꾸셨습니다. 1907년 1월 6일 주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 한사람의 회개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은 평양의 영적 회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회복하시기 위해, 항상 남은자를 남기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회복하십니다.


5.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돌리신 고개를 돌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산꼭대기에 가져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출 34:10-11)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 앞에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지 이르십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이야기하시면서 가나안 사람 모두를 쫒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출 34:13,14) 하셨습니다.


구약성서 당시의 종교는 자신의 경제와 물질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농경문화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빠져들었던 우상들은 농경신들로써, 농경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비가오고, 언제 추수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즉, 이시대의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경제와 성공 그리고 여러 가지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섬기도 이방신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 여화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것은, 성서적인 원리로는 “하나님께 속한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한글에 ‘질투’와 ‘열심’으로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한국말로 번역할 마땅한 단어가 없기에 문맥에 따라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질투(열심)’는 인간적인 질투와는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름 자체에서도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일뿐만 아니라, 성품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얼마나 크냐하면, 하나님만큼 큽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 질투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질투를 인간이 품는 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버지 마음의 극히 일부분을 경험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열망의 일부분을 가슴에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품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질투냐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을 대체하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정의하고, 대체하는 모든 가짜신앙과 불신앙을 제거하고, 하나님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자신의 유일한 삶의 목적과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실 때 이러한 질투를 가진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부흥을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열정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열심히 부어지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 밤낮 없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땅에서 회복을 원하는 길입니다.


에필로그

 

처음 하나님의 길에 대하여 도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 가서 열심히 정리하고 하였지만, 자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다루어가시면서, 하나님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저는 하나님의 길에서 탈선한 것을 보고 참 많이 울고, 애통해 했습니다. 내게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너무 마음이 아팠고 괴로웠습니다.


저를 프리메이슨 맴버로 만들기 위해 저의 정신(맨탈)을 붕괴 시키고 프리메이슨 사상으을 심으려고 하였습니다. 모든 프리메이슨은 그런 방법으로 프리메이슨 맴버가 됩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제가 회복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첨단 전자 장비들로 저를 괴롭혀 온 것이 지난 16개월 동안의 저의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저와 아내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가족조차 이상하게 취급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난이 지나가고 회복의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대한 글은, 쓰기 시작한지 4일 만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까지 해가며 이 글을 완성하는 것은 벅찬 일 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글을 거의 다 쓰면서 과거 기억이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랄프 윈터(Ralph Winter)박사가 1994년 한국에 왔을 때 저에게 예언을 해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학적으로 세대주의와 자유주의 중간노선을 걷고 있는, 지금의 저와 전혀 다른 신앙노선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예언에 설마 설마 하면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정말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저에게 제가 하나님의 길을 완성할 것이고, 그것에 대한 의미와 이로 인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의 예언이 오늘에서야 실현이 된 것입니다.


“영적회복의 길”은 제가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영적회복의 길을 주님이 먼저 저의 삶 가운데 모두 실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른체 주님이 이끄시는 회복의 길의 과정을 따라 제가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으로 회복되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쓰게 된 것은 프리메이슨 사건 이후 하나님이 저를 영적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을 기억하고 정리하며, 저 자신이 회복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하나님이 저를 영적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을 기억하며 순서대로 배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 출애굽기를 읽으니, 모두 성경에서 하나님이 영적인 회복을 일으키셨던 순서 그대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상한 영적 순례를 한 것이 아님을 확증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샤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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