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0.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은 "십자가의 복음"책에 나와 있는 부분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한 문제
요17:0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기초요 또한 핵심 중에 하나 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 열매 맺는 삶을 위해서, 그리고 영적 승리를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짜신앙에서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 몇권 읽은 것을 가지고 다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의미가 가리어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어에 대한 이해가 가리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떠나는 것, 이러한 말에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이해가 가리어져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은 누구도 반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우리가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면허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필기시험을 공부합니다. 그 후에 그것을 토대로 실기를 하며 실제로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필기를 잘 알고 있으면서 운전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운전 필기시험을 합격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실제라는 말은 그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전도를 배운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배우면 자신이 전도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그 배운 것을 가지고 실제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 함으로 비로소 전도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우리가 성경공부라든지 설교를 통해서 배움으로 실제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사고에서는 주님을 안다는 것을 주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자기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요 5:37-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마디로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식을 성경공부와 교육을 통해 습득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자서전에 비유한다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일을 하셨고, 또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등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다릅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자서전을 통해 그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아는 것이라면, 인격적인 주님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실제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고, 그 저자에 관해 아무리 상세하게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아는 것은 그와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서, 그는 경험된 하나님을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지식으로 하나님 그분을 안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반면,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신이며, 살아 계신 인격체이십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인격적인 주님을 알게 될 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엡 1:15). 이 기도는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공동번역 개정판, 엡 1:17)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우유병과 우유의 비유.
우리는 주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신학을 우유병에, 그리고 주님을 아는 것을 우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유병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유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우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유를 담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유병이 우유에 비해 형편없이 작거나 혹은 구멍이 나 있으면, 우유는 다 쏟아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즉 바른 신학이나 바른 교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학이 찌그러지거나 구멍난 우유병과 같이 왜곡되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올바로 아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데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체험만을 신뢰하며,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배우는 자세나 지도자들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유병이 우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유병이 좋다 할지라도, 그 우유병이 비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은 주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훌륭한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나 마음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주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더 나아가 이론적인 지식 그 자체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전해도 그 자체가 절대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신다.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의 모습을 본 일도 없다. 또 그의 말씀이 너희 속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것은 너희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요5:37-40)
위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과거에 한 번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고 그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나님이 보내신 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잘 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너희는 성경을 알면 그것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잘 못된 신앙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해서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다. 그 결과 내가 왔는데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처럼 나름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인 소경이 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아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는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필수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2. 그의 형용을 보는 것.
3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는 주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형용을 보았으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데 성경은 나에 대하여 쓴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삼상 3: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연관되어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엘리 제사장에게서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황을 통해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성을 듣는 것은 필 수입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성경 말씀을 잘 지키고 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살면 열매 맺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중심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때 변화됩니다. 물론 나름대로 정해진 것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예수 믿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먹지 않고, 외부적인 것은 나름대로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변화되지 않습니다. 탐심, 시기, 질투, 미움, 이러한 것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형용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형용을 보지 못하면 안됩니다. 음성을 듣는 것은 친밀함을 통해서 듣고 은사로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성을 듣는 것과 형용을 보아야 합니다. 형용을 보는 것은 눈으로 형상을 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형용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후03: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하나님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한 길이 열려졌습니다. 히4장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영광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조나단 에드워즈 몸이 아주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너무나 감격해져서 그 는 땅에 머리를 박고 엎려서 한 시간 넘게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졌습니다. 제가 ...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성령의 조명으로 주님이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아지는 것을 형용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비춰질 때 근본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형용을 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사야의 예.
이사야는 제사장이자 선지자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그전에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장에서 그는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즉, 그 거룩하신 하나님, 그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1-5).
그 날의 이 경험은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에게 삼 년 동안 벌거벗은 채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사 20:2-3 참조). 이사야는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사야가 순종할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이사야 6장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사야는 그 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나 조롱이나 멸시는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당신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수 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여러 가지 직분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또 많은 성경 공부의 과정들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비해 하나님께 조금도 더 나아와 있지 않으며, 그 삶에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것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을 상고하는 연구하는 그들에게 그 말씀이 너희 속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거한다는 말은 이 말입니다.
마6장은 성도의 의에 행실에 대해서 기도, 금식, 헌금, 구제가 은밀히 행하는 의에 행실입니다. 성도의 의는 계19장에 보면 세마포 옷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깨달아집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든 주지 않든 상관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 때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생활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혀 우리의 속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비춰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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