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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8. 사역

하나님아들 2015. 2. 22. 22:56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8. 사역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줄기차게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의 핵심인데, 그것을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분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에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여 동참하는 것 이라고 간략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우리의 전존재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 이 부분은 우리의 사역과도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4-15).

 

예수님께서도 12 제자들을 세우실 때, 이 두 가지를 위해 세우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즉, 첫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둘째는 사역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사역의 관계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신앙의 두 가지 요소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존재로 동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존재로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복음서 중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이 두 요소 사이의 밀접한 관계 중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의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우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우리의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우리의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이런 비유를 들어 사역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고층높이에서 어떤 사람이 실수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땅에 그대로 떨어지면 그 사람은 충격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밑에서 그 사람이 떨어지는 곳까지 뛰어가서 그 사람을 손으로 안아서 충격을 떨어뜨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밑에서 받치고 있던 사람은 떨어지는 사람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두 손이 잘려나갔습니다. 죽을 목숨을 살려준 사람에게, 실수로 고층에서 떨어진 사람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예는 황당한 예화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예

 

성경이 말하는 우리 사역의 가장 훌륭한 모델을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구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역을 위한 가장 온전한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이것을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본을 우리는 요한복음 5장 17,19-20절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아버지께서 오늘 일하신다.

2. 나도 일한다.

3.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4.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본다.

5.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본 것을 행한다.

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보이신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은 비슷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역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1. 우리 사역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인가 주를 위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욱더 그렇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감당한 사역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해서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소위 “주의 일”이라는 용어에서부터 그 이해하는 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주의 일” 이라고 하면, 우리가 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합시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주를 위해 더 열심히 봉사하고 섬깁시다.” 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위해 하신 섬김과 봉사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예수님이 본 그 일, 즉 아버지께서 하고 계신 일을 의미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구절을 보면, 그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 10:37-38).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일을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 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 시대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낸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휘하시고, 역사하셔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일이나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바울)을 구원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 치유 하시는 것, 변화시키시는 것, 회개시키시는 것, 교회를 세우시는 것, 자라게 하시는 것, 개인과 교회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 등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주도하시며 인도하시고, 채우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이루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사람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실 때, 그 일에 동참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곧 그 일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말씀드린 대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계획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최선의 노력으로 그 계획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일로 모세를 부르시기 위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 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4,7-8).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세에게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도 계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을 통해서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3:15-20).

 

사울(바울)을 전도한 아나니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사울을 직면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가지시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모든 영광으로 그를 직면하셨습니다. 사실, 사울(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들을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등등. 그런데 주님은 다메섹에 살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주님의 행하심을 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그를 하나님의 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동역자의 삶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차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해야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우리를 향한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와 아나니아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주님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자원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통해서 그 일들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길들을 아무리 보이기 원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 일에 동참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우리는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산다고 열심히 노력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소위 “주님 따로, 우리 따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사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목적과 길들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십니다.

 

모세의 예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모세에게 보이셨을 때, 모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나중에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모세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이 아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5장 17, 19-20절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환자를 고치신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날 어떻게 그 38년 된 환자를 고치셨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시다가 그 38년 된 환자를 고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그 환자에게 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셨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38년 된 환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에필로그

 

저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역의 개념을 알고 나서, 저의 삶 속에서의 사역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결론은 저는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을 위해 무언가 수많은 희생과 열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하였지만, 주님이 시키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주님을 위해 헌신한, 한 사람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역이 너무나 허무하고 가치 없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역을 미화하려는 저의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중도 모르고 그저 희생과 봉사로 섬겼던 모든 것 중에는 하나님께 도움 되었던 수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그렇게 미화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거 주님의 기준 앞에, 나의 삶이 송두리체 변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뽑을 때, 성경에서는 딱히 정해준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는 장로(감독, 혹은 목자)와 집사(안수 받은)만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은 더 많은 직책이, 교회들 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장로교회는 초대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가 있었다고 가르치고 성서적인 구절들을 뽑아서 합리화 합니다. 많은 감리교회는 감독이 성서에 나오는 것을 주제로 합리화합니다. 침례교회는 목사와 집사만 있었다고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일꾼들은 필요에 의해서 각 교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일꾼들을 기도하면서 선출하였습니다. 각 교회의 직책은 교단마다 다르지만, 필요에 의해 교회헌법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역이 필요하여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직책을 주면 열심히 하니까 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장로가 많고 집사가 많습니다. 초대교회는 교인이 적어도 8천명 이상이었는데 안수하여 세운 집사가 7명뿐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수많은 교회에서의 문제의 출발점이 구조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주변의 교회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회개해야할 교회의 죄이며, 제가 회개해야할 내용입니다.

 

전도를 교회에서 활성화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전도대회를 열어 수많은 상품과 상금을 걸고 경쟁을 시켜 전도하게 합니다. 그 중에 신실하게 전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교회 전도잔치에 참여케 하려는 시도를 교회가 부축이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 보내실 때, 완전히 무일뿐으로 보내시며, 일꾼이 저 먹을 것을 현지에서 주님만을 의지하여 찾아 먹고 전도하라 보내셨습니다. 지금 세대의 전도에 대한 사역 자체가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하였습니다. 수많은 열매들이 맺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하늘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고귀한 전도의 동기를 가르치셨습니다.

 

무조건 전도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며, 어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무감과 자신이 받을 것을 기대하고 전도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중요시합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가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까지 들으시는 주님이, 우리의 전도의 동기와 행하심을 통해 순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교회에서는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달성을 위해 죽어라고 뛰어서 그 목표를 달성하는 사회의 경영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그것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중 대형교회는 반드시 참석인원에 대한 달성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화도하고 문자도 보내는 등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 일 한다고 하는 하나하나 짚어 가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본다.”는 다른 시각에서의 해석의 문제.

 

신학적으로 조금 들어가겠습니다.

 

자유주의의 시작은, 중세시대를 벗어나는 계몽주의 사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중요한 사상 중에 하나는 바로 이성과 과학의 잣대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다 못해,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신화로 치부해버리는 사상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을 낳은 동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사회적으로 옳은 소리는 외칠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교회성장이나 새로운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이성과 과학적 사고는 신학계에 널려있던 신비주의를 몰아내고 성경을 좀 더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 것은 사실입니다. 긍정적적인 면만 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이 사상이 복음주의에 침투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관해서는 이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성경의 모든 내용은 2000년 전 성서시대 이후로는 모두 끝났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은 성경에 나타나있는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은 모두 허구이고 마귀가 준 것이라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은사 같은 경우 어떤 것은 인정하고 어떤 것은 이성과 과학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정의를 내려 버립니다.

 

영적인 존재들이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교리로는 가르칩니다. 교인을 변화 시키는 것은 교리라고 믿고 교리를 열심히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신학교로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고신과 합신이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특별히 합신은, 저의 아내가 졸업한 학교로써, 합신 교수님 표현으로는 저의 처가 신학교입니다. 교수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신학적인 노선을 걷고 있지만, 교단이나 교단에 속해있는 신학교 자체가 추구하고 있는 노선 있습니다.

 

세대주의는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지고 자신에게로 이끄실 일들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내용인데, 정확하게 맞는 말이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내용들은 성서시대 혹은 성경이 정경으로 만들어진 후 모두 끝이 났다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정통칼빈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저의 관점으로는, 칼빈도 인정한 내용을 자신들은 부인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제가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 않지만, 제가 알고 있는 칼빈과 많이 다른 것을 봅니다.

 

제가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런 사상을 가진 많은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보는 것을 이렇게 표현 합니다.

 

“한손에는 성경 그리고 한손에는 신문”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가지신 뜻과 의지를 파악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별하여 동참하는 것이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성경이 이것을 사역이라고 할까요?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은 환경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동참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의 인물들은 환경은 전혀 불가능하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화일 때, 하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인물이었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시고자 원하시는 일들을 알려주시고 성경의 인물을 초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셔서 산꼭대기에 거대한 배를 짓도록 하십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 당시 수많은 사람의 놀림감이 되고, 손가락질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죄가 만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대가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분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도 똑같이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악한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었다는 사실을, 노아시대의 흐름을 통해 안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인물들은 세상이 주는 메시지를 의지하여 시대적 사명을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대를 보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아서 자신이 그 사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 성경에는 한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환경적으로 이룰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기 시작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고 동참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시작은,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되거나 환경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지어 초자연적인 수많은 방법을 사용하여 그 시대에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성경의 인물들에게 전달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직접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저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육성을 통해 받았습니다. 그 사명이 진짜임을 영광의 임재를 통해 증명해 주었습니다. 청소년시절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통해 3번들은 것이, 육성을 들은 모두입니다.

 

이 땅에 이슬람과, 개신교와, 케톨릭에 십자가 복음의 부흥을 계획하신 것을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사명은 이슬람과, 개신교와 케톨릭에 주님이 선택한 부흥의 주역들을 찾아서,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나누고 세우는 것입니다. 즉,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을 찾고, 부흥 때 그들이 하나님이 회복시키고자 원하시는 신앙으로 회복되는 다루심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의 다루심 안에서 두 번째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부흥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현제까지 이슬람에 4명, 개신교에 5명, 케톨릭에 1명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을 이 땅에 일으키시는데, 가장 큰 대적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프리메이슨 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가지고 게신 뜻과 의중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자진하여 프리메이슨을 변화시키는데 동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육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프리메이슨이 변화가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 사상, 심지어 나쁜 버릇까지 그대로 배운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마인드컨트롤 역주인 현상을 통해 집단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의도였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명의 프리메이슨을 주님께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계획인 아니라, 전 세계 프리메이슨을 향하여 주님은 변화시켜서, 자신의 것으로 삼을 의중을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6년 전 한국 프리메이슨 안에 내부자가 생길 것을 저에게 육성으로 말씀하셨고,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내부자로 남아 프리메이슨이 변화될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주님은 제가 프리메이슨으로 부터 받는 고난이 끝나면 인터넷을 통해 제가 경험한 모든 것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프리메이슨에게 당한 후, 저를 다시 가다듬기 위해 하나님이 저를 다루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도 프리메이슨 사역입니다. 주님은 외국 프리메이슨으로부터 제가 암살 위험을 알려주셨고,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저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에 프리메이슨에 대한 많은 것을 알리려고 합니다. 또한 일루미나티 지도자를 만난 한국의 극소수의 사람이기에, 그것도 알리려고 합니다. 주님이 2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특히 프리메이슨을 변화시키는 사역 말기에 제가 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말씀하셨고, 인터넷을 통해 그들을 알리고, 프리메이슨이 변화된 것을 알리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저에게 말씀하셨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세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 인터넷을 통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주님이 저에게 알려주신 길(방법, 사역)입니다.

 

하나님 행하심을 보기 위해 모든 사역을 멈추어야 하나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에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사역도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고,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을 다 멈추고, 이제는 주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여주실 때 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과 계획을 알려주시되,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위치에서 주님께 하던 사역을 모두 멈춘 상태에서 일일이 하나하나 다 알려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위치와 처지에서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되,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멈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이미 하고 있던 일은 그대로 하되, 하나하나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서 모두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고,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리고, 수정할 것을 수정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올바른 사역을 하기 위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동기를 싫어하십니다.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적이고 목표일 때 하나님은 그 분이 가지고 계신 사역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십니다.

 

 

포도나무의 삶

 

성경은 우리의 사역 또한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실 혹은 열매가 무엇인가를 알면, 우리는 이 점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열매는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을 말합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립니다. 그리고 배나무에는 배가 열립니다. 여기 나무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열리는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예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나무고 예수님이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삶을 통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러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전존재로 동참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맺으신 열매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하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그러한 열매를 말합니다. 즉,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의미에서의 아버지의 일 혹은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이렇게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우리의 삶에서 무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방법 중 하나는 열매 맺는 삶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마찬가지로 우리도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계획하신 일들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셋째,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요 15:8).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입니다. 또한 스승을 닮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뜻과 목적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일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단순히 신분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정명훈씨가 어떤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정명훈씨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서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피아노는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그저 “학교종이 땡땡땡”을 칠 정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하게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넷째,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우리 임의대로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거기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대가도 포도나무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짐이나 부담이 아닌 진정한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있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사역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하여 실행하는 것이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샤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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