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스탐목사의 사랑의 언약론

하나님아들 2014. 11. 26. 23:57

서 론

“야웨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야웨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야웨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신26:17,18)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이 생사 간에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주일)

아무도 성경의 풍성함을 한 마디로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적인 열쇠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언약이라는 용어일 것이다. 이 용어로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과 세우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언약의 모든 계시를 말한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이라는 주제가 지배적인 주제로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우리와 언약을 맺지 않으셨다면, 우리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 새 언약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있는 이 언약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성경 시작부터 마지막 부분까지 언약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도 언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도 이 언약의 구조 안에서이다. 우리 수중에 들어오는 물질적인 영적인 축복들은 언약 덕분에 받았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해당된다.

불행히도 오늘날 언약의 구심점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안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이 그 타당성을 의심하거나 심지어 거절하기도 한다. 이 책의 목적은 언약의 역사를 개관하는 것이며, 언약의 성격과 의미를 보여주는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 집중하고자 한다.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은 두드러진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언약을 계속 유지하셨다(시103:7).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리고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이 언약을 영원토록 보장하신다. (이사야 42:6: “나 야웨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이 메시아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그리고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다. 메시아가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새롭고도 영구한 언약이 확고해졌다.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은 이제 세상 전역에 설교되고 있는 중이며,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 언약에 접붙임을 받게 된다.

이 책의 요지는 언약이 협약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다. 우리가 신명기 26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야웨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그의 보배로운 소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한다(벧전 2장).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막대한 위로이며, 이 사실을 우리는 교회 신경에서 “내가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고백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답).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펼쳐지면서, 언약은 더 풍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더 강력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특별히 새 언약 안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셔서, 그리고 교회 위에 성령을 부어주셨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으며, 이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에 동참한다(요일2:20;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주의 날 제12주일 제32문답).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소속감이 결여되어 있고 또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여기에 고독과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하고, 그분과 그의 백성에게 속해 있으며, 그리고 자신들에게 삶과 성도의 교통 속에서 위치와 과업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개념을 진척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의 풍자일 수 있다. 정반대로 이 위치가 언약은 역동적인(working) 관계라는 사실을 제시했고 또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언약적인 입지는 불순종과 회개하지 않음을 통해서 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이 믿음은 행위로 반드시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이 책이 사람의 책임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고 해서, 인본주의적이지 않다. 언약 안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으로 더불어 시작한다. 우리가 달성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의 생활 안에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진다. 언약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승리를 기념한다. 언약적인 가르침은 종교개혁의 모토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으로 유도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언약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관계를 맺으셔야할 의무가 전혀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언약을 유지하셨고, 독생자를 내어주셔서(요3:16),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성경은 언약이 신자와 그의 자녀들과 체결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일관된 성경적인 가르침이며, 또 이 가르침은 큰 결과를 낳고 그리고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를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세대 즉 후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즐거워한다. 우리는 이 사실이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언약을 말해야 한다. 교회는 선교 명령을 받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과 함께 공유하는 [복음] 전도와 관련하여 철저하게 능동적이어야 하며, 이렇게 하여 그들 역시 믿음으로 이 사랑의 언약에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 가운데서 지혜와 일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롬15:5,6).

그러하기에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사랑의 언약 안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풍성함을 탐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 설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언약이 새롭게 조명되고 동시에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면 한다.

1998. 7.

Clarence Stam, Stony Creek

Ⅰ. 누가 언약을 주도하는가?

이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로써 언약을 말할 때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 관계(언약)를 수립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숙지해야만 한다. 언약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의 문제이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반응해야만 하고 이 관계 안에서 우리의 책임이 크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편에서 언약을 세울 수는 없다. 이 일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모든 관계에서 그렇듯이 누군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때때로 사람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교제와 헌신을 통하여 피차 점점 더 자연스럽게 자라가야 하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람의 관계는 상호 끌어당기는 힘을 방편으로 하여야만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편이 누구인지를 누가 알려하거나 관심을 가지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경우에서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코 추구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영적이지 못하며(고전2:14),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며(엡2:1), 하나님의 원수이며(롬5:10),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끄심을 받지 않는 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다(요6:44).

만일 우리가 하나님 수준까지 도달해야만 한다면, 언약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디든지 가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본성상 하나님께 나가는 것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찾는 이가 있는지를 살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을 하감하셨을 때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셔야만 했다.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3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길게 인용하였다. 또 시편53을 참조하라.) 그러나 야웨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은혜로 말미암아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언약이라고 불리는 이런 현저한 결속 혹은 관계(bond)를 우리에게 세우신 것이다.

때로 언약적인 관계라는 진리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언약은 기원에 있어서는 일방적이지만, 그러나 유지됨에 있어서는 쌍방적이다.” 이 정의는 언약이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또 계속해서 우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단순하게 말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왜 이런 구분이 중요한 지에 대해서 몇 가지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유에 몇 가지 덧붙여 설명할 것이다.

언약: 하나님의 주도권

첫째로, 이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그러하기에 우리는 반드시 성경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성경 본문 몇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담과 하와는 죄의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숨어버렸다. 그래서 “너희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소환을 받았다. “너희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죄를 폭로시키고 또 사탄을 정복할 승리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로 이끌기 때문이다(창3:15). 그러므로 우리는 벨직 신앙고백서 제17항에서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놀랄만한 지혜와 은혜로써, 사람이 이렇게 육체적 및 영적인 죽음에 떨어져서 그 스스로 전적으로 비참하게 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두려워 떨면서 도망칠 때에 그를 즐겨 찾고자 하셨고 또 위로하시며 자기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인간을 복되게 만드실 분이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소환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주도권을 유지하셨다.

타락을 둘러싸고 있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얼핏 보면 언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주도권으로 언약과 정확하게 연루되어 있음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언약으로 세워놓으신 관계를 사람이나, 동물이나, 심지어 사탄의 공작조차도 파기하지 못하게 하셨다. 죄 가운데로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관계가 바뀔지는 몰라도 취소될 수는 없다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언약을 보존하기 위한 모종의 행위를 취하신 것이다.

오랜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간 생명체를 제외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큰 홍수로 파멸될 때에, 인류와 당신의 관계를 계속해서 실행하신 분도 다시 하나님이셨다. 창세기 9:8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제 세우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인류로부터 선정되었을 때에, 이 역시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실상 아브라함의 시련과 시험은 자신이 오직 야웨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열광적인 자원봉사자가 아니며, 또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는데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 힘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이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되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이 주도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분이 부르시며, 또 그분의 부르심은 효과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다. “야웨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느니라.”(신4:3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또 그분은 이 사실을 구약의 구속 역사 안에서 거의 비견될 수 없는 구원사건인 출애굽(Exodus)으로 확증하셨다.

어떤 사람과 그의 후손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권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세우시는데 자유로우시며,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와도 자유롭게 이 언약을 세우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충분하게 인정하도록 배웠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19,20)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인종 우월감을 고취시키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냐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모든 열방들이 받지 못한 축복을 받았다. 또 모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 임하게 된다(창12:1-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내가 너를 택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이 사실이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도들을 지명하실 때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시니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3:13) 우리 주님께서 이 사실을 당신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에 당신의 모든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숙지시키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요15:16).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잘못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동일한 사항이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되던 때인 오순절에도 강조되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들을 파송하실 것이며 또 그분에게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나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자력으로 하나님께서 나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성령과 그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실 것이며 또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그들과 결속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서신서들에서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바와 같으니라.”(살전1:4,5; 고전1:26, 엡1:4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심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며 또 백성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에도 계속해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 성령과 말씀의 능력으로 그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조차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여야 한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3)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적인 방식은, 구원 사역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행하시는 사역이며 또 항상 그럴 것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언약 안에서 성부는,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아들이신 성자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다. 또 오직 이 일이 발생할 때에만이 우리가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욱 더 성경적인 용어를 배워서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그럴 때에만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 지와 또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두 번째로,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그래야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필요한 말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구원이 적어도 일부분만이라도 우리의 됨됨이와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사람들의 버릇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책임이 개혁신학 전통에서 무시되어왔기에 더 주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우리 편에서 이 언약 관계를 원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 관계를 수립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언약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일부든 아니면 전부든 우리 편에서 이 관계를 수용할 것인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는 나중에 언약 안에서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영역(element)에 적절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언약을 수립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수용여부나 세대간의 지속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이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인준할 것인지에 대해 어떤 허락이나 문의 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먼저 누가 가치가 있는지 시험해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단순히 당신께서 원하시는 자는 누구든지 언약적인 말씀으로 진척시키시고 또 말씀하신다.

언약의 자녀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추인된 사람들은 기쁨으로 이 언약을 받아들이며,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표징으로서 이 사실을 경험한다. 이들은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할 권리가 전혀 없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안으로 부르신 사람들의 유형들을 보면 아주 놀랍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수효가 월등하게 많아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야웨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이스라엘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적은 수효였고, 또 노예로 살고 있었던 백성들이었다.

어떤 민족이 가지고 있는 더 우월하고 높은 도덕적인 수준이나 타고난 경건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도록 하신 토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조상 아브라함, 나홀 그리고 데라에 대해서, 성경은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노라.”(수2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례한 짓을 인내하시고, 호렙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를 목도하신 후에,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일은 율법을 선포하고 난 직후의 일이다. “야웨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하나님께서 분명히 협조 잘하는 민족을 선택하시지 않으셨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변증하면서 다음과 같은 동일한 말을 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여러 세대를 통해서 감사치 않고, 무책임하고, 짜증나게 하는 자임을 입증했다. 이런 사실이 오늘날에는 달라졌는가?

정말로 똑같은 사실이 신약에서도 답습되고 있다. 고린도 교중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들이 가진 은사가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중들의 과거를 들추어내어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학식, 배경, 문벌이 토대가 되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어리석고, 약하고, 세상에서 멸시받은 자를 선택하셨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신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고전1:29,31)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 백성의 구원에 대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진술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또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라고 묻고는, “있을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했다(롬3:27).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 시편44:8)

가망이 없어 보이는 후보자들

참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심에 있어서 종종 거의 성공할 가망이 없는 백성들을 선택하셨다. 만일 큰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면, 여러분 같으면 아브라함과 같이 연로하고, 아내가 불임인 사람을 선택했겠는가?(창11:30)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선택은 상당히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모든 사람의 승산과 맞지 않게 여러분들이 노예로부터 여러분들의 백성을 건져내어 인도하기 위해서 영감이 있는 지도자를 선정하고자 할 때, 여러분 같으면 심지어 그 과업을 원치도 않고 또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출4:10)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세와 같은 인물을 선택하겠는가? 여러분들은 “온유함이 온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민12:3) 사람보다는 오히려 외모가 특출하고, 기질적으로 강한 사람을 선발하고자 할 것이다.

더 많은 본보기를 제시할 수 있다. 사무엘이 불순종한 왕 사울을 대신할 왕에게 기름 부으려고 할 때에, 그는 먼저 이새의 다른 아들들을 선택하지 않고, 이새의 막내아들이 오자, 소년에 불과한 다윗을 선택하였다(삼상16:12). 또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주 야웨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 우리는 언약적인 섬김에 있어서 자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거듭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보기에 거의 될 법한 후보자들은 그냥 간과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또 그 과업에 맞는 동기와 자질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선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열 두 사도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어떤 신임장도 없는 시골뜨기로서 경멸받은 갈릴리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AD 1세기에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받는 랍비 중에 한 사람인 가말리엘 문하(행22:3)에서 수학한 사람이었지만, 웅변에 능하지도 않고 또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고린도서를 기록하면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여 심히 떨었노라”고 적었다(고전2:3). 사실상 바울은 엄청난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그의 말에 “낙원”에 다녀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고후12:7)고 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권리와 진리에 도전을 받을 때마다 항상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자신을 공격할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였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나올 때에 다음과 같은 근간이 되는 주제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역 안에 있다. “야웨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138:6)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다. 야웨 하나님께서 종종 잘 갖추지 못하고 또 이렇다할 동기도 없어 보이는 사람 즉 스스로 이 과업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하신다. 잘 갖추지 못했고 별 동기도 없는 사람을 취하시어서, 당신의 언약적인 사역을 위해 강력한 도구로 쓰신다.

우리가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때때로 그들은 ‘영웅’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생각으로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성경에서 어떤 사람 그 자체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어 능력을 주신 모든 사람들은 오히려 증인이라고 불렸는데(히12:1), 이들은 자기 능력을 과시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들이 연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하심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영웅’이라는 말은 그 자신의 용기와 강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증인’은 전형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미래를 보장함

셋째로,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는 고백은 언약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언약이 여하튼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래)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주도권에 달려 있고, 또 그분은 당신께서 시작한 것을 끝내실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종종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데 첫 걸음을 내디디시고, 그 다음부터는 그의 백성들이 그분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시작하시고, 그러나 우리는 그 일들을 종료해야 한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모든 언약의 백성들이 지고 있는 큰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언약 안에서 우리의 책임이라는 주제를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지금 중요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언약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이 언약을 친히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거듭해서 언약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역사하셔서, 매우 필요로 하는 자유와 갱신을 백성들에게 주신다.

지금이라도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고 또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에, 야웨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시기 위해서 결정적인 걸음을 내디디시고 또한 친히 당신의 언약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언약(관계)을 맺으셨고, 또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신실함을 보증하시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에 항상 신실하시다.

야웨라는 이름

바로 이런 문맥 안에서 우리는 야웨께서 당신을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성호(聖號)를 바르게 파악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 성호를 아는 지식이야 말로 언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인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계시를 읽을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된 예배에서 얼마나 멀리 이탈해있는 지를 아주 잘 알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 하리이까?”(출3: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계시하셨을 때에‘야웨(Yahweh)’라는 이름이 아닌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창17:1)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이름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주권적인 능력을 친히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시겠다고 의도하신 것은 반드시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전후를 살펴보면, ‘엘 샤다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실제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경유하여 계시하셨을 때에, 그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이름을 사용했다. 이스라엘은 이 이름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지만, 야웨 하나님께서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에게 전달하시는 이유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초점이 이스라엘이 받을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야웨라는 이름은 동사 ‘있다(to be)’에서 유래되었고, ‘나는…이다’ 혹은 ‘나는 나이다’, 아니면 어쩌면 ‘영원히 나일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이름은 먼저 하나님을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소개하신다. 여러 우상을 섬기는 열방의 신들과는 정반대로,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또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나는…이다’라는 말은 다른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우상들 배후에는 귀신의 능력이 있을 수 있으나(고전10:19-22), 그러나 귀신은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이름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불변하시는 분으로 여겼다. 즉 ‘나는 나이다 즉 나는 신실하고, 의지할 수 있고, 항상 나의 언약을 기억하는 분이다.’ 열방의 신들은 의지할 수 없으며, 또 이 신들은 결코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세울 수 없다. 이방 종교에서 신들이란 변덕스러운 행위 때문에 결코 예상하지 못하며, 또 그날에 하겠다고 했어도 다른 일을 해버리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unknown quantity)에 불과하다. 이 신들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신실하지 않으며 또 이 신들이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면 항상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도록 한다. 이방 사람들은 “신들은 실제로 믿을만하지 못하며, 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능사다”라고 생각한다. 이방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사이가 나쁘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신을 의뢰할 수 있다”는 약속에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분은 어떤 것에 의해서 아무런 변화를 받지 않는 철학적인 의식이 아니라, 당신에게 또 당신의 말씀에 항상 진실하시다는 의미에서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야웨라는 이름은 주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동일시할 수 있다.

출애굽기3:15을 보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야웨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것 나의 표호니라.”

하나님의 이 이름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말 중에 하나는 ‘신실하심(faithfulness)’이라는 단어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헤세드(???)는 사랑, 친절, 자비와 같은 많은 말들을 의미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그분의 언약에서 은혜로우신 야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항상 나타낸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시편의 후렴구로 자주 나타난다. “야웨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역시 이 사실을 확증하시고 또 언약에 대해서 항상 진실하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들의 미래가 항상 밝은 이유이기도 하다.

언약의 확실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에 의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요구를 약화시켜도 되는 백지 수표(automatic guarantee)는 아니다. 그러나 이 신실하심이 사람의 행동여하에 달려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들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자 한다. 신약에서도 이 확실성이라는 사항이 강조되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맺으실 때에 맹서로써(under oath)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서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히6:13,14) 주 하나님께서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맹세로 서약하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하셨도다.”(히6:17) 하나님은 맹서로 서약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옛 언약 하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 교회에 이 확실성을 자유자재로 적용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6:18) 참으로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확신은 옛 언약 시대보다 결코 덜 하지 않다. 신약 시대에 더 크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론의 (일시적인) 제사장직 아래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멜기세덱의 (영원한)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확실성은 하나님 그분께, 그분의 맹세와 말씀 안에, 야웨라는 바로 그 이름의 깊이에서, 또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다.

예수라는 이름과 야웨라는 이름

이 지점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께 야웨(“나는 …이다”)의 이름을 어떻게 적용하셨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말한 바와 그분 안에서 언약의 최종적인 보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종 “나는…이다”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 뒤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원대한 선언들이 따라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9:5). 나는 문이다(요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ff).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포도 나무이다(15:1).” 이 모든 표현들은 다음과 같이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는 선언을 함축하고 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고로 나는 하나님이다!” 오직 야웨만이 자신에 대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씀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당신의 기원과 권위에 대해서 토론하실 때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요8장). 우리 주님께서 당신을 “세상의 빛”(12절)이라고 선언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주님께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경고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는 그를 증거하시고, 또 예수님은 위에서 오셨고 또 당신만이 그들을 자유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자유롭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비록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처럼 행하지 않는다며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또 위에 계셨다고 계시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고 하셨다(요8:58).

주님께서는 “나는…이었다” 혹은 “나는…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하셨고, 또 이 사실로써 전적으로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신 것이다. 이 말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집어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면, 엄청난 신성모독이 성립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진실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뿌려, 희생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세우러 오셨다. 그분 안에서 언약의 실체가 완전히 성취되는 것과 그 종국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시작하신 것을 끝내신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던 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이 사실을 확신했고 또 이 사실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삶의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도드릴 수 있다. “야웨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야웨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편138:8)

이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을 끝내실 것이라는 지식으로 이스라엘을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사야 46:8-10절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한다.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어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성취된다.

여러 선지서(특별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자주 포로 생활에서 살아남아 귀환하는 남은 자에 관한 사상을 볼 수 있다.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순종 즉 죄 가운데 사는 강퍅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롭고도 준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께서 세워놓으신 언약 때문에, 그분께서 다시 당신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우실 사람들 가운데서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회복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고 또 정결케 하실 때에,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사야 10:21)이다. 포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남은 자만이 귀환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써 언약의 노선을 계속 유지시키셨다.

언약은 일시적인 협약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은 영원하다(시편103:17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라고 했다). 언약의 이러한 성격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 17:7) 언약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또 그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영구하게 세워졌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언약이 영원한 것이다. 실로 성경이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명료하게 이 사실을 말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거듭해서 신약성경에서도 이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다. 즉 그분은 항상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언약 역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혹시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약속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시고 또 지옥과 사망을 정복하신 지금 더욱 더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이 사실은 또한 성령을 부어주심과 그의 임재하심에서 실제화 되었다. “또 그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진리의 영이시라.”(요14:16,17)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구원의 확신과 연계시켜서 빌립보 교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이로운 말씀을 적어놓았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3-6)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완수하신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중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우리 믿음을 시작하시고 완성시키신 분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초점과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 안에 있는 풍성한 약속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도록 만들었다. 주님은 천사보다 월등하신 분이시며,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며, 유일하고도 영원한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시며, 또 모두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히브리서 12:2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시며 또 완전케 하신 분”이라고 불렸다. 너무도 분명하게 옛 언약의 신자들의 길고도 인상적인 목록과 믿음의 열매(히11장)를 열거한 직후에, 우리가 우리의 모범과 소망으로써 이 신자들을 주시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께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자!”(히12:2) 그분은 새 언약의 유일한 중보자이시자 확신이시며, 또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첫 장을 매듭짓기 전에, 우리는 시작케 하시는 분 또 완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중요한 단어들을 더 가까이에 다가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의 모든 언약적인 관계가 이제 그리스도에 의해서 확립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육성되고, 그분에 의해서 완전케 된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웨께서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 시작케 하신 분이시요 완성시키시는 분 즉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시라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요한계시록 22:12,13을 보라.).

그리스도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으로 불렸다. 히브리서 2:10에서 그분은 우리 구원의 효시 혹은 주(광의적인 용어를 사용하여)라고 불렸다. 주(Author)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네 번 나오는데, 히브리서에서 두 번, 사도행전에서 두 번 나오며, 그리고 두 곳 모두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선구자” 혹은 “개척자”로 번역되었는데, 그의 백성을 앞서 가서 이들을 위해 길을 열어 두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분은 언약을 가능하게 만드신 분이시며, 당신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보증하신 분이시며,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시다. 거기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또 지금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과 말씀으로] 믿음을 일으키시고, 이렇게 하셔서 우리는 이 믿음으로 그분이 계신 곳을 따라갈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따르는데 필요한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도권은 주님께 속해 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이”라고 불렸다. 이 용어는 여기에서 우리 앞에 설정해 놓으신 도달해야 할 목표를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앞에 당한 경주”(히12:1)라고 언급했다. 우리는 정해진 코스로 달려야 한다. 경주를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숱한 도전을 대처하도록 하신다. 이 힘든 경주 코스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우리를 결승선까지 인도하시는 분 역시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경주를 다 마치고, 우리의 경주를 경주하게 하시고 또 경주를 완주하게 하신데 대한 영광을 그분께 돌려야 할 것이다.

일관된 노선

우리는 이렇게 하여 성경이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또 주권적으로 당신께서 선택하신 누구와도 언약을 맺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신 후, 역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적으로 그것을 온전히 지키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주도권은 언약의 성취와 완성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분이시며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딤전2:5). 우리의 확신은 우리의 허약함이나, 사람의 노력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주도권과 완전하신 사역 안에 있다. 이 사실은 언약을 둘러싸고 있는 토론에서 항상 핵심이 되어야 한다.

Ⅱ.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살펴보고 난 뒤에, 우리는 이제 언약이 어디에서 존재하였고 또 언약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언약이라는 말 그 자체는 단순히 두 사람(혹은 그 이상)의 당사자들이 서로 맺음과 동시에 그때부터 서로를 구속하는 공적인 협의 혹은 협약을 의미한다. 언약은 가담한 모든 당사자에게 유익이 되도록 의도되어 있고, 여러 가지 의무 외에도 독특한 특권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런 경이로운 관계로 만드는 것은 바로 특별한 약속들과 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또 친히 당신을 공적으로 특정한 의무에 묶으시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헌신하시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동일한 헌신을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

언약은 묶는 협약이다.

성경에서 우선되는 기본적인 언약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놓은 언약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반향 하는 것에 불과하다. 언약이라는 히브리어 베리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말은 서로에게 충성할 것이라는 아주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다. 헬라어로 언약에 해당되는 단어는 디아데케(διαθ?κη)인데, 이 단어는 셉투아진트에서 반복해서 베리트를 번역하여 사용되었고, 두 사람이 맹세로 구속을 받은 법적인 협약을 지칭하였다. 신약에서는 언약에 해당되는 용어인 쉰데케(syndeche)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단어는 언약 안에 있는 당사자들이 동등하다는 생각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당신이 부르신 자들과 주권적으로 체결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중요한 본보기는 혼인인데, 이것은 사람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고, 성경은 이 관계를 혼인언약이라고 불렀다(말2:10).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은 후에 바울이 “심오한 신비”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하나 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엡5:32). 하나님께서 언약을 틀림없이 존중받을 수 있는 협약이 되도록 간주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들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지를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두 당사자(혹은 그 이상)를 묶는 협약으로서 언약은 확실한 차서를 세운다. 언약은 불확실성을 종식시키고 동시에 충성과 신뢰의 상황으로 이끌어간다. 최소한 이것이 그 목적이다. 분명한 특권들과 의무들이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 언약을 말할 때에 언약의 법적이고 공적인 성격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종종 법적인(forensic)이라는 형용사가 모든 당사자들을 위해 법적으로 세워졌고 또 전적으로 결속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과 관계하여 사용되었다

사람들 가운데 언약은 양 당사자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거나, 아니면 충성과 신실함을 확정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야곱과 라반은, 그들 사이에 있었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언약을 맺어, 피차 결코 해하지 않기로 서약하였다(창세기31장). 또 다른 예를 들면, 다윗과 요나단은 언약을 맺어서 사울 왕과의 깊은 위기에서 항상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사실상 이러한 언약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의 상호 간의 사랑이 스스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맹세는 서로간의 사랑보다 더 결속력이 있다.

언약을 맺는다(entering into a covenant, 언약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중요하고도 엄숙한 일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요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분명한 표징이 주어지거나 아니면 기념물이 공식적으로 그 일을 표시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표징의 기능은 항상 언약의 법적인 또 공식적인 성격을 지시하도록 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다. 두 번째로, 규약들(협정들)은 언약의 각 당사자들이 언약을 맺자마자 [서로에게] 구속받도록 만들어졌다. 세 번째로, 야웨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을 맹세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일의 증인이시며 또 이 언약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주시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 라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시느니라.”(창31:50) 마지막으로 희생 제사가 드려졌고 또 지금부터 각 당사들의 교제를 인치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다.

언약은 파기 될 수 없다.

언약은 파기되어서는 안 될 영구적인 결속으로서 의미가 있다 언약들이 진부한 것으로 파기되었을 때에, 사회의 뼈대가 와해되고 혼란이 엄습하게 된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언약은 일반적으로 친척들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관계(natural tie)가 전혀 없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더 중요하다. 언약은 일반적으로 가족끼리는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미 혈연관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은 전형적으로 이전에 아무런 결속이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체결되었다.

언약의 기틀은 사회의 많은 측면들을 결정한다. 상호간의 의무는, 참으로 생활의 완전한 기틀인데, 이미 맺어놓은 언약에 의해서 통제받는다. 우리는 기존의 약속들에 일치하게끔 피차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때에, 사회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편11:3)

언약은 워낙 강력하여서 죽음을 초월하며 또 세대를 지나오는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유효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언약의 모든 개념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이다. 이전 세대의 언약의 의무와 특권들은 다음 세대가 되어서도 인정되고 선언된다. 참으로 언약은 여러 세대를 하나로 묶고 또 변화무쌍한 세상 안에서 지속적인 요인이다.

여러 세대를 하나로 묶는 언약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이스라엘과 기브온 사이에 맺은 조약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기브온 족속은 정확하게 자신들이 무력으로 이스라엘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브온은 한 민족으로서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략 하나를 짜냈다(수9:3ff). 그들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자신들과 조약(자구적으로 표현하면 “언약”이다)을 체결하도록 유인하였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었고 또 기브온의 지도자들에게 속았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수9:19) 기브온과 그들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은 지켜져야 했다. 언약이 분명하게 속임으로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언약 자체를 무효화시키지 못했다.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부주했던 일에 책임을 돌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야웨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수9:14). 서약한 맹세는 지켜져야 한다(민30:2; 전5:4,5).

피차 언약을 맺은 사람들은 피차 충성해야 하고 또 반드시 피차 사랑과 신실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헤세드라는 말을 기억하시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것을 적용하신다. 그러나 우리 또한 이것을 적용해야 한다. 거듭해서 언약을 체결한 사람들은 자비로써 각자를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기 때문이다.

언약은 깨뜨려질 수 없는 결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였고 또 그분의 자비를 노래하면서 용기를 얻었다. “야웨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40:4) 또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이 선포되었을 당시에, 선지자들은 당신의 언약을 저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신뢰할 것을 의인들에게 촉구할 수 있었다. “무릇 야웨를 의지하며 야웨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니라.”(렘17:7)

시편90편은 하나님의 언약이 영구적인 관계로써 모든 세대에 걸쳐 존재한다고 다음과 같은 말로 아주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1,2절) 시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애송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우리가 해가 바뀌기 직전 즉 신년 전날에 이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 시간도 지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당신의 백성에게 동일하시다. 우리는 영원하고도 변치 않는 언약을 그분과 맺고 있다!

신약에서 이러한 신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이 확보해 놓았다. “또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히10:23)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롭고도 큰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엡3:12;히4:16).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를 위해 큰 희생 제사를 드리신 완전한 대제사장이 있기 때문이다.

“신뢰”와 “확신”이라는 용어들은 히브리어 아멘이라는 용어의 어근과 관련이 있다. 언약은 이처럼 매우 강력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항상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이 사실을 [하나님께]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AMEN)’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언약은 평화를 가져온다.

언약의 결과는 적의와 불확실함을 종식시키고 또 평화의 상황으로 이끈다. 평화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샬롬(????)으로써, 이 단어는 언약 관계가 수반하고 있는 모든 것을 요약한 것이다. 평화는 삶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오직 평화가 있을 때에만, 생명이 꽃피고 동시에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평화라는 말은 단지 적의가 사라졌고 또 전쟁이 없다는 정도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평화는 온전함과 건강함, 번성함과 풍성함과 관련되어 있다.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기능이 원활하고, 모든 사람의 헌신이 온전하게 잘 유지될 때에만이 평화가 있다.

평화라는 이 요인이 너무 중요해서, 야웨께서는 “나의 평화의 언약”이라는 표현을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하셨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간음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를 죽이자, 이스라엘 진영을 휩쓸었던 역병이 중단되었고, 야웨께서는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민25:12,13).

이사야 54:10에서 우리는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야웨의 말이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평화의 언약이라는 말은 종종 야웨께서 백성들의 죄 때문에 그의 백성들을 형벌하시기를 중단하시고 또 당신의 헤세드를 보여주시는 여러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분과 백성간의 적의의 상태에 적합한 속죄와 갱신을 통해서 종식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함께 또 그들에 대하여 평화를 모색하신다.

평화의 언약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에스겔 34장은 거짓 예언자들에 의한 착취와 약탈의 시대가 종식됨을 말씀하고 있고, 동시에 야웨께서 친히 새로운 번영의 시기를 일으키실 것을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야웨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야웨의 말이니라.”(겔34:23-25)

동일한 사실이 에스겔 37장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과 하나 됨이 “나의 종 다윗의 통치하에서” 일어날 것으로 그려져 있고, 여기에서 “나의 종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실 것이다. 이렇게 묘사한 다음 우리는 26절과 27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에스겔의 이 본문이 대단히 중요해서 나중에 요한복음 10장에서 친히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적용하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종 다윗”은 여기에서 다윗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는 평화의 언약을 세우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라.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2,33)

또한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약속들이 완전한 실현을 증거할 때에, 영광 가운데 오실 우리 주님의 재림을 내다볼 수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계21:3) 평화의 언약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완전한 평화와 영원한 지복을 즐기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도록 만든다. 성경은 새 예루살렘을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다. 어쨌든 “영원한”과 “평화”라는 두 단어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언약에 적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영원토록 누릴 위대하고도 최종적인 평화를 예기하고 바라고 있다.

제사장적인 완전한 복

평화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하고도 사랑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또 모든 생활이 형통한 조화로운 사회를 묘사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하여서만 임하는 복이다. 이 빛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에 천사들이 “땅에서는 평화로다”라고 합창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평화의 왕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위대한 선물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십자가의 영단번의 희생 제사를 통한 영원한 평화이다. 그분의 유일무이한 희생제사가 드려지고 난 뒤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21)라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셨다. 나중에 이 본문을 살펴볼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사도적인 설교가 분명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자.”(롬5:1) 이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화이다(빌4:7). 옛 언약의 제사장적인 축복의 절정인 “야웨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2-26)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2)라는 사도적인 인사와 축복에서 강력하고 완전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언약 : 정의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정의해주고 있다. 이 언약은 우선적으로 형식적인 협약이 아니라, 두 당사자들 즉 하나님과 백성들이 끊임없이 계속 상호 교류하는 살아 있는 관계이다. 필시 가장 명료한 성경적인 용어로서는 신명기 26:17-19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네가 오늘날 야웨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야웨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야웨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야웨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신약성경은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소유”(엡1:14), “거룩한 백성”(벧전2:9), “제사장 나라”(계5:10)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하심이라”(딛2:14)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친 백성이며, 하나님의 소유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백성이며,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며, 하나님께 복종하고 또 그분께 바쳐진 나라이다.

그러므로(앞의 정의를 확대하면) 언약이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며, 이 관계 안에서 야웨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돌보실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또 우리는 그의 말씀에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섬길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언약의 내용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라!”이다.

위에서는 단지 간단하게 언약을 정의했다.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많은 중요한 측면들이 덧붙여져야 하고 또 그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살아있는 사랑의 관계”라고 정의하고 시작한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야웨께서 당신의 언약 안에 두셨던 사람들에 의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고 사랑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셔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 의해서 참으로 완전하게 존경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즉 그분의 계명에 일치하게 살아야만 한다.

언약은 반드시 살아있는 관계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언약은 또한 영구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1940년대에 “은혜 언약”이라는 정의가 네덜란드의 캄펜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흐레이다누스(S. Greijdanus) 박사에 의해서 내려졌다. 언약의 정의를 정리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흐레이다누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은혜 언약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위해서 또 타락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본성과 죄와 비참한 조건과 상태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고 또 보내심을 통해서, 영원한 구원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명령(decree)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은 이 사실을 에덴동산에서 선포하셨고, 또 이것을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보여주셨고, 다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견고하게 하시고 또 정해놓으셨고, 약속과 요구라는 깨뜨릴 수 없는 관계로 당신의 백성을 위해 모든 세대를 지나오면서 유지시키셨고, 또 마지막으로 이 언약의 중보자에 의한 화해와 구속 사역으로 폐기할 수 없도록 이 언약을 확립하셨고, 또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의 의(義)가 되시기 위해서 살아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언약의 구원을 획득하셔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 이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고 적용시키신다.”(J. Kamphuis, An Everlasting Covenant, pp.73,74)

이 정의는 그 당대의 전형적인 문체로 작성된 것으로써 오늘날에 와서 보면 상당히 장황하게 보이나, 흐레이다누스 박사가 언약(과 세례)에 대한 그 시대의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특정한 요인들을 담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법령decree과 같은 딱딱한 용어로 언약에 대해서 말한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참으로 언약은 하나님의 법령에 의존해 있다. 그러나 나는 관계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관계라는 말이 언약의 역동성을 더욱 공정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자. 흐레이다누스의 정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어떻게 이 정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중보자로 강조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언약 역사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시며, 이분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흐레이다누스가 어떻게 언약 역사에서 연속성과 점진성을 강조했는지를 볼 수 있다. 은혜 언약은 한 언약이자 같은 언약이다. 그러나 이 언약 안에는 다양한 시대(dispensation)가 있는데, 이전 시대보다 매번 점점 더 새로운 것으로 더 풍성해진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들 중요한 몇 가지 측면들을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언약 백성

하나님께서 한 개인이나 선별된 몇몇 개인들과 언약을 체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언약이 누군가와 체결될 때에, 항상 분명하게 그의 가족과 친족과 모든 후손들이 포함된다.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약속과 요구가 미래 세대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또 땅을 다스려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과 그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하셨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광범하게 미치는, 즉 개인이라는 한계와 시대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협약이다.

이 사실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다루시는 것을 보면 명확하다. 이 사실이 홍수가 있고 난 뒤에 노아에게 주신 약속 안에서도 분명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시내 산에서도 이 사실이 갱신되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한 백성을 다른 열방으로부터 불러내어 모으셨는데, 이 백성들은 하나님과 백성 서로 간에 책무를 지니고, 또 공동의 결속을 공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모든 세대가 조상들의 부를 상속하고 또 열조들에게 주어진 법령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유업, 포도원, 교중, 예수 그리스도의 양 무리와 같은 집단으로 부르는 한 백성과 언약이 체결되었다. 분명히 이 백성은 각 개인들로 구성되었고 -또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부르심에 반응해야 하지만- 언약 그 자체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 그러니까 그 안에서 태어난 사람과 그 가운데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백성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언약백성들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에 점점 더 언약 백성이 되어가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가 된다.

언약이 한 백성과 체결되어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언약적인 교육과 사고는 항상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며 연대적(corporate and federative)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에게 책임이 있으며 또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 백성의 하나 됨(unity)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며, 경험되어야 하며, 형식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언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믿음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오늘날의 자유분방한 개인주의는 멀리한다.

언약 : 친밀한 관계

이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응시하게 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형식적이거나 냉담한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친밀함을 인식하고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웨와의 언약 관계라는 것은, 날마다 그분과 교제하는 것으로써, 매우 인격적이고 친밀하다. 우리는 이것을 언약적인 친밀성(intimacy)이라고 말한다. 이 언약 안에 있으면서 또 야웨를 자신들의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백성이자 친구이다.

이 친밀함의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소돔으로 가시는 도중에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기사가 나오는 창세기 18장에서 눈여겨 볼 수 있다. 그들이 계속 걸어가면서, 야웨께서 (혼자말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한 다음 야웨께서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또 아브라함의 참여(input)와 중재를 얻어내려고 하셨다. 놀라운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주고 받으셨다.

야웨께서 아브라함과 어떻게 열고 닫으시는지는 엄청나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주 야웨의 종이라고 언급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야웨의 친구로도 익히 인정되었다 “그러나 너, 오 이스라엘아,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아, 너희는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손이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결속이 너무 강력하여서 이 언약 관계는 세상의 제약들을 초월한다. 또한 야고보서 2:23을 보라. “그는(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시편 25:14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당신의 자녀 사이의 친밀성에 대한 특기할만한 표현을 읽을 수 있다. “야웨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야웨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내 눈이 항상 야웨를 앙망하나이다.”(15절) 야웨께서 우리를 신뢰하시고 또 우리 역시 그분을 신뢰한다. 이 관계는 인격적인 방식으로 심오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의 언약을 보여 주심이로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끊임없이 더욱 깊어지고 견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 안에는 성장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더욱더 야웨를 가까이할 수 있게 된다.

친구들, 자녀들, 상속자들

다시 말하지만, 신약에서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언약이 더욱 긴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 친밀함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4-16)

이 말씀은 제자들이 더 이상 주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종의 관계에서 친구관계로, 인격적이면서도 사랑하는 관계, 심오하고 깊은 헌신의 관계로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아니하셨고, 마치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당신의 마음을 털어놓으셨다. 언약 관계는 비밀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당사자가 사랑과 우정이라는 긴밀한 교제 안에서 피차 열려있고 정직하다. 옛 찬송에서 언약의 결속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멋진 친구라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위해서 거기에 계신다. 또 우리는 항상 그분에게 갈 수 있다.

이 친구관계의 궁극적인 증거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드러났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15:13) 이 말씀은 우리와의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이다. 즉 깊은 사랑과 우정은 궁극적인 희생제사에서 분명해졌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성령께서 이미 부어지셨다. 우리는 “아들 됨의 영”을 받았다. 또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바울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롬8:16)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시편 25편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알리셨다. 또 바울은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하고 덧붙였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보배들이 합법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신약에서도 역시 언약의 법정적인 성격 안에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는 권리를 주셨다.

로마서 8장 안에도 전형적인 언약적인 경고(caveat)가 들어 있다. 만일 우리가 상속자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상속자처럼 행세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자기 성찰과 진실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언약이라는 동전 양면의 다른 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약속과 의무는 언약 안에서,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함께 붙어 다닌다.

Ⅲ. 언약이 몇 개 있는가?

몇 개의 언약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언약과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덧붙여 사람들은 은혜 언약과 반대인 행위언약에 대해서 말하며, 또 내적인 언약과 외적인 언약, 즉 선택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내적인 언약과 또 (보이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을 다 포함하는 외적인 언약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구분을 하도록 하는가? 이 언약들이 서로 다른 언약인가, 아니면 동일한 한 가지 언약인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이상의 언약을 맺으셨는가? 우리는 언약 그 자체의 속성과 내용이 다른 여러 가지 언약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동일하고 유일한 하나의 언약만 있다고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언약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지 않는가? 이것 역시 세대로부터 이어지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한 언약 ; 다양한 시대 혹은 경륜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오직 언약은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역사의 경로에서 이 한 언약 안에 다양한 시대(dispensation)가 있었으나, 언약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13장과 14장에서 이 문제를 더 깊이 다룰 것이다). 시대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사들이 특정한 기간동안에 분배되는(“시행되었다”)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참으로 가끔씩 차이가 났다. 그러나 언약 그 자체는 시행방식에 의해서 변경되지 않았다.

우리가 언약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라고 정의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이 관계가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줄곧 있어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관계도 오랜 세월 동안 정확하게 동일한 상태에서 계속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관계는 자라면서 동시에 깊어진다(만일 모든 관계가 잘 된다면). 마찬가지로 이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에서도 동일하며, 또 이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고 깊어진다. 그러나 언약의 성격, 내용, 목적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은 똑같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언약만이 있다는 입장을 방어하거나 고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모든 종교, 즉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는 태초부터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De Graaf, Hoofdlijnen,p.61). 언약은 두 당사자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태초부터 있어왔다. 우리가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고, 또 이 관계는 상호 약속과 의무로 지속된다.

하나님께서 변치 아니 하심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변치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현 세상은 쇠퇴해지고 또 파멸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하실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사실은 야웨라는 이름 속에서도 계시되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시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편102:25-28)

이 말씀은 개혁 고백서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주의 날 제4주일에서 고백하듯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죄를 경시하는 습성에 부닥친다. 이런 습성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의와 거룩한 상태에서 타락해버렸는데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라고 여전히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 값진 은사를 잊어버렸다면, 우리는 야웨 하나님을 공정치 못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주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언약이 모든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에 늘 요구해오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완전하시기 때문에 자녀들에게도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언약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어떤 곳에서는 언약을 복수(複數)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말하는 곳이,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들 즉 옛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요약하고 있는 로마서 9장이다. 그는 이 백성들에 대해서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9:4)라고 기록했다. 다른 여러 곳에서 같은 유익들을 신약교회에 돌리고 있다 위해 들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바울이 복수로 “언약들(covenants)”이라고 인용한 점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한 개가 아닌 더 많은 언약이 있었다는 뜻인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언약이라는 말을 복수로 사용한 다른 여러 성경 본문들이 있다. 이사야 33장 8절에서 우리는 “언약들을 깨뜨리고(개역 성경은 ‘조약을 파하고’로 번역했다)”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으나, 그러나 이 말은 백성들 가운데 맺어진 조약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법과 질서가 허물어졌을 때를 묘사한 것이다. 비슷하게 호세아 10장 4절은 지켜지지 않았던 “언약들(agreements)”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백성들 가운데 상호 협약들이 파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시 사용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두 여자 즉 하갈과 사라에 대해 기록하면서, 이 두 여자가 “두 언약을 대표한다”고 언급했다(갈4:24).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것은 육신의 방법(율법의 행위)과 믿음의 방법(성령의 열매) 사이를 대조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본문은 이 관계에 대한 더 깊은 질문을 하게하고 또 한 언약 안에 있는 두 시대 즉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를 대조한 것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율법을 다 지킴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중에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한층 더 심화시켜 살펴볼 때에, 성경의 이러한 입장을 개진할 것이다.

언약이라는 말이 복수 형태로 사용된 다른 곳은 에베소서 2장 11,12절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주로 이방인 출신이었다)에게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사람의 손으로 신체에 행한 시술)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어떤 사본에는 로마서 9:4의 언약을 단수로 표시하였다. 하지만 이 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 번역을 따를 필요는 없다. 흐레이다누스 박사는 로마서 주석에서 “언약의 확장과 언약의 풍성한 복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증거 된 것처럼 복수는 언약에 대한 반복된 증거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고 회개한 뒤에 언약의 확정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한 언약이 단지 견고하게 되고 또 확장되는 것일 뿐이다.

또 다른 잘 알려진 주석가인 흐로쉐이더(F.W.Grosheide) 박사는 “언약들”이라는 복수형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한 약속에 관하여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약정들과 결정들”로 본다. 이 말은 흐레이다누스가 말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언약들”이라는 말은 다른 언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약속들의 성취를 실현하는 역동적이고 점진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한 것이다. 언약은 시대들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강조 복수(intensive plural)를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한(one) 언약 즉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동일한 구원 사역과 동일한 독특한 사랑의 언약을 마주대하고 있다.

요약

우리는 성경에서 언약을 복수로 말한 몇 가지 실례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러나 이 경우들 역시, 이 언약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고 할지라도, 모든 시대에 현존하는 하나이며 유일한 언약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가 이 노선을 숙지한다면, 구속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함해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가는 길로써 언약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계속해서 탐구할 때에 언약적인 사고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혼선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Ⅳ. 하나님께서 첫 언약을 언제 세우셨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에 그들을 두신 에덴동산에서의 언약 역사를 개관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과 하와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과 맺은 언약을 인류와 맺은 언약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우리 모두의 첫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과 또 그들이 했던 일은 그들의 후손들도 짊어진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창조하신 뒤에 즉각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또 명령들을 분명하게 세우시고 동시에 특별한 약속들에 당신을 묶으셨다. 이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언약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성취하려고 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담같이 그들은 언약을 깨뜨렸다

창세기 1장에서 언약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언약이라는 말은 노아 당대에 홍수가 있고난 뒤에(창9:8), 노아와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어떤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특정한 단어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올바른 석의는 필수적으로 특정한 몇몇 단어들에 매여 있지 않다.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는 없었던 그와 같은 특별한 관계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이 이런 관계를 언약적인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합당한 이유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주장하는 성경의 특정한 본문이 하나 있는데 언급하고 지나가야겠다. 호세아 6:7에서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그들은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같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의문이 제기된다.

새국제역(NIV) 각주는 “성경이 아담과 언약을 맺었다고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라는 정보를 주고 있다. “거기”라는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번역된 아담이라는 단어가 지명이라고 믿도록 같은 각주에서 유도한다. 그러나 장소로 의도되었다는 것은 불분명하다.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다양한 관점을 토론하고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단어의 원형이 손상되었거나 지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한, 아담이라고 번역해야만 한다.” 바빙크는 본문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여기가 아담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흠정역(KJV)의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처럼 언약을 위반하였으며…”라는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다. 이 번역은 분명하게 “아담”이 장소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렇게 하고서는 아담(Adam)을 단수 대신 복수(men)로 바꾸었다. 이렇게는 본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석의에 늘 신중을 기하여 추론하는 바빙크에 따르면, “(“아담같이”라는 번역은)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이 본질적으로 언약의 문제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Gereformeerde Dogmatiek,Ⅱ,526).

나에게는 바빙크의 주장이 옳아 보이며, 또 이 본문은 참으로 역사적인 실존인 아담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번역은 호세아서의 문맥으로 보아도 적합하다. 호세아 시대에 에브라임과 유다는 오래 전에 그들의 열조가 했듯이 오직 언약을 파기하고 있었다. 아담 시대에 아담이 언약을 파기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호세아 당대에도 유다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추방당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생각은 성경적인데, 마찬가지로 뒤이어 일어나는 모든 죄는 언약을 깨뜨린 결과이다. 중요한 사실은 호세아 6장 단 한 구절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만 하는 이유는 그밖에도 많다.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사람의 창조와 위치에 대한 더욱 자세한 기사를 담고 있는 창세기 2장에서 이미 하나님을 “야웨 하나님(야웨 엘로힘)”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은 언약의 하나님 즉 야웨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로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요인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의 특별한 신분과 은사와 의무를 생각할 때 에덴동산에 언약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을 이어서 살펴보자.

특별한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들과도 다르게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1:26)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다. 이러한 특별한 창조는 인류를 독특한 위치에 둔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많이 닮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지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분과 교제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고, 알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과만 언약을 맺으셨다. 사람의 창조가 하나님의 모든 창조사역의 면류관이자 최종적인 솜씨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특별한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자녀로, 종으로, 친구로 창조하셨다.

특별한 직분

인류가 창조되는 방식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사람은 특별한 직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말은 공적인 역할이나 의무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 역할은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직접적인 목적은 사람이 (피조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창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직임을 받았다는 뜻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역할하고, 그분께서 세우신 통치자로 행동한다. 그는 향후 이 직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만물을 이끌어야 한다.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면모들을 반영한다는 것인데, 즉 다스릴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고 동시에 땅의 피조물과 교제할 수 있었다. 그는 창조의 한 부분이었을 뿐 아니라 창조 시 직임을 맡았고 동시에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직임은, 특정한 명령이나 과업을 의미하며, 언약을 요구한다. 이런 사실이 요구하는 것은 야웨께서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와 특별한 관계 안으로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다.

특별한 은사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것 역시 그가 자기가 받은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특별한 은사들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지혜와 이성이라는 은사를 받았다. 사람은 지능에서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 그는 언변의 은사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며,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있다. 사람은 경이로운 피조물을 통찰할 수 있는 통찰력을 받았다. 그래서 아담은 종류에 따라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창2:19,20). 또한 그는 선견지명의 은사를 받았고, 심사숙고하여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본능을 따라 반응하지 않고, 사려깊이 행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힘이 전혀 없었다. 교제는 친밀했고 자발적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엡4:24). 만일 의가 의를 행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즉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일치되게끔 행하는 것), 거룩함이란 의를 행하고자 하는 자발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게끔 살 수 있었고(able) 또 자진해서(willing) 살 수 있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져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사실을 제3주의 날 제6문답의 대답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게 또 당신의 형상대로 즉 참된 의와 거룩함 가운데 창조하셔서,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한 복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셨다”고 요약했다. 여기에서 이어지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함께 산다는 동사에 주목하라.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전심으로 그를 사랑할 때에만, 틀림없이 그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정하시고 맡기신 사랑의 관계이며 친교의 관계이다.

특별한 장소

태초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준비하신 장소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태초부터 언약이라는 개념에 늘 장소(혹은 땅)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거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게 된다.

창세기 2:2-13에서 이 특별한 장소는 온갖 실과를 맺는 모든 나무들이 자라고, 물이 풍부하고, 천연자원이 풍성한 큰 동산으로 묘사되어 있다. 진실로 이곳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곳이며, 또 이곳에서부터 활동을 넓혀 온 땅을 정복해야 했다. 아담과 하와의 집이 있는 곳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실 수 있는 장소도 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에덴동산에 특별한 두 종류의 나무가 있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9절에서 우리는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거나, 서로 인접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산 중앙에 있는 이 두 나무는 키나, 나무기둥의 두께나,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므로 에덴동산 어디서나 명확하게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동산이 주는 인상은 결단의 장소였다. 아담과 하와는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 두 나무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반드시 순종하여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에서 살 것인지 또 어디에서 일할 것인지를 아담이 결정하도록 맡기지 않으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인격적이고도 귀중한 선물이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모든 면에서 그들을 돌보셨다.

이제 우리가 특별한 직임, 특별한 은사, 특별한 장소에 대해 읽으면서, 우리는 또한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과 또 이 관계는 언약이라는 개념으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결론을 달리 내릴 수 없다. 다음을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특별한 의무

창세기 2장 15-18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야웨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야웨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특별한 과업을 주어 에덴동산에 두셨고, 또 이러한 사실은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이중 과업을 보여준다. 우리는 “동산을 계발하고 또 지키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첫 번째 동사는 “문화를 일구라(to bring into culture)”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으며, 동산에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합당하게 돌보고 또 개발시키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묻어두셨던 자원들을 발견해서 사용해야 했고, 또 이 동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전 피조물에 영향을 끼쳐 꽃 피우도록 해야 했다. 여기에 문화 위임명령이 있다.

두 번째로 사람은 에덴동산을 돌보아야 한다. 원문에는 통상적으로 “지키다(guard)”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용되었다 특별한 소명, 어떤 것을 지키라 했을 때는 언제나 원수가 틀림없이 있으며, 경계해야 할 어떤 악한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대항하여 지켜야 할 어떤 것과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아담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수상쩍은 적의 공격을 설명하지 않고 또 이 공격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보초를 세우는 사람은 없다.

나는 수년 동안 교리문답반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정당하게 경고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완연하게 함정에 걸려들어 “타락”한 것이 아니다.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라, 미리 경고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알더스(G.Ch.Alders)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지키다’라는 동사는 사람이 반드시 파수해야 할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 여기에서 이 세력이 어떤 세력인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나, 창세기 3장에서 이 세력의 활동을 볼 수 있다”고 썼다. 앞서 하늘에서 일어났던 반역과 또 신실하지 못한 천사들의 반란에 대해서 야웨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아담에게 말씀해주셨는지는 사실은 모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상세한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뭘 지키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악한 자의 꾀에 넘어 갔을 때에, 그들의 죄가 단지 더 크게 만들었다.

풍성함과 순종

야웨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에, 창세기 2:16,17에서 아담에게 경이로운 약속들을 주셨고 또 엄청난 의무를 주셨다. 이것은 다시 우리가 여기에서 언약의 분위기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또 즉각적으로 이 언약의 규정들과 조건들을 설명하셨다. 이 언약은 에덴동산에서 일방적이었고, 또한 그 기원에 있어서도 편무적(片務的)이었다.

깊이 주목할 것은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대하심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허락하셨다. 이것은 모든 사랑의 언약적인 선언의 출발점이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81:10)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동일한 사실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우리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진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속박으로 시작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언약 안에서 그들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풍성한 복에 관심을 모으셨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은 차고 넘치는 모든 선의 원천이시라고 고백한다(벨직 신앙고백서 제1항).

그러나 우리가 언약 안에서 가지고 있는 자유(너희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는 결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방종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자시며, 야웨 하나님으로 온전히 인정받고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결코 변할 수 없는 분명한 요구 한 가지가 이 언약 안에, 즉 하나님과의 이 복된 관계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사람의 자유는 항상 제한적이다. 분명히 사람의 자유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보호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유나 일치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굴종과 혼란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

주권이라는 말은 만물을 무제한적으로 통제하는 초월적이며, 또한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창2:17에 나오는 계명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너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아담과 하와는 풍성함을 즐겼다. 그들은 나무 한 그루만 제외하고는 아무 제약 없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 접근했다. 이때는 “생명나무”가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과 복 주심 속에서 그들은 그분과 또 피차간에 계속적이고도 방해받지 않는 생명을 즐겼다. 그들은 자유로운 피조물로서 살 수 있었으나, 항상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에서 높은 지위를 주셨으나 당신의 주권을 양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순종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풍성한 복과 순종은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시편 8편에서 우리는 사람이 천상적인 존재보다 약간 낮게 지음 받았다는 사실과 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a little less than God)”라고 번역하여 읽을 수 있다. 사람보다 더 우위에 있는 피조물은 없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자로 계신다. 여기에 오직 하나의 제한과 가장 큰 보호가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찬송은 항상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야웨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8:1,9)

금지된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오직 야웨만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결정하시고 드러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선하고 악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다. 그분은 최고시며 주권적인 입법자이시며, 우리는 항상 순종하는 겸손한 그분의 종으로 있다.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한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으로 그분에게 간구한다.

언약 안에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또 그분은 무조건적으로 또 온전한 순종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 나무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것은 첫 번째 계명에 구체화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최대의 요구이자 가장 심오한 요구이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 이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또 그 속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복과 엄청난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이 언약 안에서 그분의 주권 역시 유지되어야 한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다. 언약은 배타적이다. 언약 안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계명은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38).

바로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나무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에덴동산 중앙에 놓여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나무를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볼 수 있었거나, 이 나무를 지나치는 일은 이들에게 일상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강조하는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이 사랑의 언약 안에서 생명, 즉 복되고도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처럼 두 나무는 하나님의 언약의 두 측면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곳에서만 생명과 축복이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이 거부당하고 무시당하는 곳에서는 죽음과 저주가 있다. 그리하여 모든 세대를 지나 오늘까지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제재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언약을 사람에게 계시하셨을 때에 알려주신 상벌조항에 주목해야만 한다. 상벌은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끌어들인 수단이며 또 이 율법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 초래하게 될 심판을 보여준다. 언약이 파기된다면, 즉 사람이 금지된 실과를 따먹고 그리하여 스스로 주가 되고 주인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권리로 주권을 행세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받은 생명의 은사를 즉각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떨어지는 순간부터 언약은 파기되고 생명을 잃고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너희가 이것을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으로 제재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당장 지금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아직 죽음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생명과 친교의 반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은 종료이다. 만일 아담이 그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면, 그것으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녀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곁에 있는 다른 나무의 실과 즉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의 실과도 먹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생명과 순종은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이 가르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요일3:7-10) 에덴동산에서 하신 요구는 사랑의 언약을 따라 영원히 서 있다.

그러하기에 이 언약은 항상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분의 복을 즐거워하면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분과 함께 교제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거절하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야웨와 그분과의 언약을 제쳐놓고는 생명도, 미래도, 즐거움도 없다. 공허한 삶은 점점 죽어가는 삶이며, 결국 확실한 죽음에 도달하게 된다. 신약 성경은 지옥이나 불 못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으로 이 사실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핵심적인 성경 진리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최고의 직분을 받았고, 독특한 은사들을 받았으며, 경이로운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최고의 의무와 심각한 상벌도 받았는데,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그 사실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분과 사랑의 관계로 들어갔다. 중심이 되는 이러한 성경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전체 역사 속에서 다루실 때, 좀더 진전된 하나님의 다루심에 빛을 비춰준다.

Ⅴ. 우리는 행위 언약이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개혁주의 진영에 속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 중에 대다수가 타락 전과 후로 언약을 구분한다. 종종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어 있다. 타락 전에 맺은 언약은 행위(works) 언약이지만 타락 후에는 은혜(grace) 언약이 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타락 전에는 인간이 자력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자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고 난 지금은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기에, 사람은 은혜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주장의 바탕에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인간 편에서 행위나 수고나 공로 위에 세워졌는가?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이 관계를 결정했었는가? 우리의 행위가(아니면 부족한 순종이)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고, 이 관계가 심지어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였는가? 아니면 항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가?

행위언약

행위언약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이 만일 행위와 은혜로 구분하여 묘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위 즉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를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주된 사상이 로마서 3장과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유대주의자를 논박하는 사도 바울을 따르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문제이기에, 어느 누구도 야웨 앞에서 자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롬3:27;고전1:31).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직후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행위언약을 뒷받침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시험기간이나 선택의 자유문제와 같은 요인들은 초기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언급되었다. 어거스틴은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약(pactum)이라고 불렀다. 칼빈도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스라엘이 주님과 화해할 수 있었던 언약은 인간의 공로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기초를 두고 있다(Institutes, I, 370).”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에 언약에 관한 이 교리가 불링거와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제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이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Systematic Theology, pp. 21ff에서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행위 언약에 관한 이 교리가 곧바로 확산되면서, 이제 이와 같은 행위언약 자체를 거부하면 이단으로까지 간주되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행위언약에 대한 가르침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다양한 신조들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언약은 먼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심(a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이라고 진술하였다(제Ⅶ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이 표현에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제7장 2항에서 계속해서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언약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는데 우리는 이를 은혜언약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이러한 생각은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도 특별히 매우 잘 알려진 신학자이자 개혁교회 대변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작품을 통해서 역시 유행하고 있는 바이다. 한때 모든 개혁교회 신학자들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구분하여 가르치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행위 언약을 입증하는 증빙구절로써 갈라디아서 3장 12절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또 은혜언약을 입증하는 본문으로써 갈라디아 3장 21절의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타락 전에는 사람이 율법으로 살았고, 타락 후에는 약속들에 따라 산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행위(첫 번째 언약)와 은혜(두 번째 언약)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들은 충분히 위의 주장을 입증해주지 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타락 전과 타락 후의 사람의 상태를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Judaist)를 논박하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완전하게 개인적인 복종으로 영생을 획득할 수 있다(merits)는 이와 같은 제안은 추상적이고 매우 사변적인 것이다. 아담 스스로가 신실하게 복종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성경 어디서도 입증하는 곳이 없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맺은 언약 안에서 은혜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풍성한 생명을 이미 공급받은 터(given)였다. 그들이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복종하고 의롭고 거룩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했다.

죄로 인한 사람의 타락은 요구된 행위를 순종하는데 실패했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사람과 맺으신 그 언약을 깨뜨리는(breaking of the covenant) 반역과 신실하지 못함의 문제였다. 타락은 하나님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험기간이 있었는가?

행위언약이라는 관념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시험기간이라는 개념을 요구하게 된다. 만일 행위언약이 있었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값진 선물을 받기 위해서 시험을 받아야 한다. 만일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다면, 인정을 받고 더 나은 축복 즉 완전과 영생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타락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선하게 창조하신 것을 무슨 이유로 시험하여 입증하고자 하셨겠는가?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는 완전함(Aalders)’ 즉 흠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이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만일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을 지지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창조 시에 사람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하거나, 완전과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담은 이때에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썼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놀랍게도 행위언약과 여기에 필요한 시험기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사색에 의해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벌코프(Systematic Theology, pp. 216)는 ‘(아담은)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시험기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 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았는데, ‘이것은 순종의 조건이 채워져서 성취될 때에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바빙크(H. Bavinck)는 ‘행위언약 교리를 성경에 기초한 교리로 보며, 동시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빙크는 행위언약의 개념을 반대하는 자들을 일반적으로 언약(어떤 언약이든)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Geremeerde Dogmatiek, Ⅱ, p. 530ff). 바빙크의 생각은 나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과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한편으로는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꺼이 ‘…하나님께서 유익이나 혜택을 주거나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행위(work)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허락 받은 은혜의 종교이다’고 피력했다.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을 다 취할 수 있는가?

더 볼프(De Wolf)는 그의 주저인 창세기 개요(Outlines on Genesis, Ⅰ, p. 25)에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하심으로 “사람을 시험하시어, 그가 책임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거룩함 안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동전의 또 다른 한 면처럼, 사람이 순종을 통해서 생명 안에서 인내하면서 복된 영생에 이르러야 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일종의 성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명하게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분별력을 갖춘 지식을 갖고 사역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저주의 위협으로부터 이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이 너무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심지어 아담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부터 ‘추론’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시 이 나무가 단지 타락하고 죄인된 사람을 위해 실제적으로 역할하고 있는 일종의 표징 혹은 성례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벨직 신앙고백서 제33항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둔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성례를 제정하셔서 당신의 약속을 우리에게 인(印)치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보증하셨음을 믿는다.”

소위 시험 명령(probationary command) 안에 있는 시험한다(testing)는 사상은 사변적이라 할만한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정확하게 아담이 입증해야(prove)할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정상적으로 완전하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때에 아직 아담이 완전하지 않다는 말은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시험기간이 얼마나 지나야 끝이 날 수 있었는가? 새로운 세대마다 동일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는가? 거의 있을법한 일은, 만일 시험기간이 있었다면, 오직 한 가지 공격에 저항을 해야 했을 것이며 그래서 사단은 낙원에서 늘 쫓겨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실제로 사건들은 훨씬 단순하다. 야웨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시험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의 설명과 조건 즉 약속과 의무에 대해서 알리셨고, 정확하게 순종과 충성을 바라셨다. 왜냐하면 야웨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미 받은 이 언약의 정당한 복 즉 풍성함과 생명을 바라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이 깨뜨려질 시에 그 축복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죽음이 따라올 것을 경고하셨다. 정말로 에덴동산에서 언약의 기본적인 법칙과 골격이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언약의 이러한 법칙과 골격은 항상 있어왔고 또 있을 것이다.

은총 언약(Covenant of Favour)?

행위언약이라는 교리의 관심 때문에, 1930년대 유명한 몇몇 학자들은 이 용어들이 적절한지 성경에 비추어서 검증하기 시작했다. 스킬더(K. Schilder)는 언약에 관한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언약 안에서 사람이 그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 지금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이루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위와 은혜를 서로 대조하는 것은 많은 혼동을 야기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작성자 중의 한 사람인 우르시누스(Ursinus)는 정확하게 이 사실을 간파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결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복종을 조건으로 하여 구원을 약속하고 또 은혜언약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구원을 약속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공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법으로 행하실 것을 자유롭게 결정하셨다. 자유로이 그는 여름과 봄을 연관시키는 것처럼, 공로와 행위를 연관시키신다(Het Verbond, pp. 13ff).”

스킬더가 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모든 것이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두 개의 용어 즉 은혜와 호의를 사용하고 있다. ‘에덴동산에는 호의가 있었다. 다시 엄밀하게 말해서 은혜는 타락 후에 생긴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는 죄가 있을 때에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킬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호의를 보여주셨듯이, 타락 후에는 당신의 은혜를 주셨다.’ 스킬더가 다른 두 용어를 사용해서 타락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하게 제한시켜 강조하고자 했고, 타락 전에 하나님의 은총에 주목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없으며, 오히려 그분의 은혜 혹은 호의에 항상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더 흐라프(S. G. Graaf)는 행위언약이라는 용어를 강하게 반대하는 학자였다. 그는 ‘이 언약(타락 전에 맺은)은 일반적으로 행위언약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아담이 자신의 선행을 통해서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 자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신의 자애로우심을 충분히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이라고는 단지 이 은총을 선택하여, 이 은총 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순종을 보여주기를 바라셨다(Hoofdlijnen in de Dogmatiek, p. 61)’라고 썼다.

더 흐라프는 그가 쓴 언약에 관한 책에서도 똑같이 이렇게 표현했다(Promise and Deliverance, Ⅰ, 37). 그는 “우리는 이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칭을 잘못 오해해서 영생이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금으로써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서 지불하시는 삯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고 했다.

이것은 어휘문제가 아니다. 더 흐라프는 ‘일반적으로 은혜 역시 은총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이 사용될 때에 항상 죄를 사하시는 특별한 은총을 말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더 흐라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은총언약은 아담과 맺어졌고 은혜언약(죄 용서받기 위한)은 그리스도와 맺어졌다. 이 핵심은 인간이 받고 행하는 것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이 학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에 영향 받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

우리가 앞에서 요약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중요한 몇 가지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서술한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과 자유로운 주도권을 가지시고 친히 약정과 조건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 안에서 당신의 선하심에 따라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주셨다. 분명히 야웨 하나님을 넉넉히 의지했던 사람은 그분의 언약의 약속들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결코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로 항상 당신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야웨께서 인류와 인격적이고도 긴밀한 관계 즉 하나님의 은총과 선하심에 기초한 관계를 맺으셨다. 사람은 받을 만한 가치나 공로가 전혀 없지만 모든 것을 받았으며 창조 시에 명예와 영광의 자리까지도 받았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당신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웨께서 그 반응으로 한 가지 사실을 요구하셨다. 다시 말해서 주권자 야웨이시며 또 만왕의 왕으로 인식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대단히 풍성하게 해주시면서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요구하신 것은 자발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이 사랑은 아담이 추가로 은혜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전에 받은 것보다 더 높은 상태에 올라가야하는 것도 아니었다(시8편). 오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아담이 받은 생명을 보존하고 계속 유지하고 복된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사랑의 언약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동시에 은총언약이라는 표현 역시 사변적이다. 은총이라는 말을 은혜라는 말과 구분해서 사용하기에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와 맺으신 이 언약을 사랑의 언약이라는 표현으로 잘 살려내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 건강한 모든 관계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당신의 형상에 따라 우리를 만드셔서 친히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셨다. 사랑과 생명은 항상 함께 움직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생명의 기초이자 이 언약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언약”이라는 표현을 느헤미야서 안에서 두 번이나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느헤미야 1:5에서 “야웨이신 하늘의 하나님이며, 크시고 경외할 하나님이시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의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나이다.” 또 9:32에서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사랑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목전에 환란을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라고 기록하였다. 이 두 예문에서 헤세드(chesed)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용어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애로우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을 뜻하는 단어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오는 여러 본문(신7:9, 12;왕상8:23;대하6:14;단9:4)이 있다. 이 본문들에서 문자적으로 “너희들의 언약과 너희들의 사랑”이라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NIV에서 항상 ‘너희 사랑의 언약(your covenant of love)’으로 번역하였는데, 받아 들일만한 흡족한 번역이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그분의 사랑(chesed)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였다.

야웨께서 종종 이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주셨다. 신명기 4:37에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23:5에 하나님께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를 읽을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두로의 후람 왕이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으셨도다(대하2:11)”라고 답했다. 여러 시편들이 이스라엘, 유다,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새 언약을 세우시는 사실이 선포되어 있는 예레미야 31장에서 야웨께서 당신이 백성에게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도다(3절)”고 확신시켜 주셨다. 더 많이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라기 1:2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여기는 구약을 끝내면서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한 번 더 확신을 주셨다. “나는 너를 사랑하였노라 야웨의 말이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백성들에 의해서 다시 사랑으로 돌려드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이자 제일 큰 계명은, 태초부터 언급되었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우 간략하게 제시하셨듯이,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야웨이신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먼저 당신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시며, 또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계명을 주셨으며, 끝까지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다. 언약의 힘과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미 에덴동산에서 이 사랑이 중심에 서 있으며,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올 때까지, 우리가 그 안에서 영원히 자라가도록 이 세상의 역사 한 중심에 계속해 서 있다.

행위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적절한지 토론해보는 미미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우리에게 풍성하게 복을 내리셨던 그분을 알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과연 “사랑 안에서…자기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엡1:4,5).” 사랑이 하나님을 움직였고, 또 사랑은 우리가 그분을 섬기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있었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감에 따라 깊이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독생자를 세상의 구세주로 주시도록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이기에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인간에게서 하나님께로 전적인 사랑의 의무(a total commitment of love)다. 이것이 전부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Ⅵ. 죄 가운데로 떨어짐으로 언약이 파기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순결하고 무흠한 상태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창세기 2:25에서“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고 말씀한다. 우리는 “피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일 수 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는 온전한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순수했고, 또 그들은 연합하여 화평한 가운데 살았다.

또한 창세기 2장 25절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음 장에서는 “그 날 서늘할 때에”(3:8)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내려오셔서 거니셨다는 경위에 대해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흥분과 기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심지어 하나님을 섬겨 행했던 일에 대해서도 나누기 위해서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서둘러 만나려고 매일 방문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였다. 이후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처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8) 에덴동산에는 완전한 사랑이 있었다.

또한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조화가 있었다. 동물들은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자유롭게 모든 동물과 사이좋게 지냈고 동물들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협하지 않았다. 창세기 1장 25절에는 야생 동물과 가축 간에 구분이 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절을 보면 뱀이 야생 동물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야생 동물이라고 해서 사납거나 위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 동물들은 본성상 [야생 동물보다] 훨씬 수월하게 가정에서 사육할 수 있고,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동물[야생 동물]들은 멀리 들판이나 숲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서식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모두 함께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끼리 조화와 평화가 있었다.

언약의 조건들에 관한 몇 가지 의문

우리는 사람이 죄 가운데로 타락하기 이전에 분명하게 발생했던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에서 신실하지 못한 천사들의 반란이나 또 하늘로부터 사탄을 추방시킨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예를 훼손시키려고 사단이 사용한 계략이다. 사탄의 계략은 하나님이 실제로 정직하지도 공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을 노예로 묶어두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협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것”으로(3:1) 표현된 뱀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사단의 목적을 이루는데 적합하였다. 사단은 변장술의 대명사이다. 그는 출현할 때에 항상 위장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의 첫 번째 공격 전열에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동기에 의심을 심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있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말씀한다.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에 제재(制裁)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언약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착취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유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공정치 못한 방식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단과 그의 졸개들은 이런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언약을 깨뜨리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 스스로를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는다”(갈5:13) 즉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허가증으로 삼는다.

“너희가 하나님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니냐? 너희가 어떤 나무실과든지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사단의 질의가 악의 없는 것처럼 들리며 또 이 안에 진심어린 연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독기가 서려 있다. 그리고 여자의 대답은 특기할만한 하다. 그녀는 “우리가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실과를 주셨다. 이것들은 마음껏 따 먹을 수 있다. 그렇다. 제한은 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의 실과를 너희가 먹어서는 안 된다.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2,3)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옹호되었다. 여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정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적절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만일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 안 된다면, 만지지도 않아야 한다. 금지사항을 생각해보면 간단해진다.” 그녀는 또한 불순종은 죽음에 이른다는 상벌규정도 들었다. 하와는 자신의 대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위태로운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내비치고 있다.

언약의 심원함을 부인함

그렇게 한 다음 사단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나아가 곧바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비난했다. 사단은 대담하게 “너는 확실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제재는 집행하시지도 않을 어리석은 위협이라고까지 말한다. 인류는 제재를 초월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은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

언약의 노선은 이렇다. “오직 나만이 주권적이며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친 아들처럼 내가 사랑하고 복을 베푼 나의 종들이다.”그러나 사단의 노선은 이렇다. “너는 네 자신의 주인이 되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말고, 오히려 선과 악이 무엇인지 네 자신이 결정하라. 아무도 너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하라. 정신 차려라!”

사단은 하나님의 언약이 생명과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사단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류를 통제하기 위해 언약을 사용하셨거나, 사실은 노예지만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게 하려고 사용한 것인 양, [사랑의] 언약을 왜곡하였다. 여기에 사랑의 관계로써 언약의 심원함이 전적으로 거부되었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너희를 이용한다. 이제 너희는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그분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만일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셨다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왔고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단의 덫에 떨어지고 말았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유대주의의 죄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구원을 확보하려는데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미워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미워한다는 것은 폭력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주인이 되려고 했다는 말이다. 죄 가운데로의 타락이란 자의적으로 사랑의 언약을 깨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와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아담이다.

모든 위험스러운 표징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이를 무시하였다. 뱀이 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자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에 관한 [뱀의] 지식과 논법 스타일을 주시하면서 경계를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뱀이 이와 같은 통찰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체결하셨던 사랑의 언약을 여자에게서 깨뜨리려는 분명한 시도가 있었으며, 그녀는 즉각적으로 이 사실을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무의 실과가 더욱 먹음직스럽게 되어, 그녀는 그만 실과를 따먹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실과를] 남편에게도 주었고, “그가 아내와 같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가 먹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창3:6).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 방식에서, 우리는 하와가 죄 가운데로 타락했을 때에 아담이 처음부터 그녀와 같이 있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혹자는 “그녀가 곁에 있는 자기 남편에게 주었더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추론은 하와가 먹고 난 뒤에 남편을 찾아가서 그를 설득한 뒤에 실과를 먹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여자가 먼저 타락했다. 우리는 필시 이 사실에 대해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랜 뒤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2:14)

사도 바울은 여자가 여기에서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언약 안에서 자신이 받은 위치와 과업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그래서 하와는 아담에게 자산이 되는 대신에 부채가 되었다. 바울은 이 노선을 따라서 교회 안에 있는 여자들이 자기의 과업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할당된 위치에 만족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여야 여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여자의 위치에 관한 바울의 교훈은 성차별이 아니라 참으로 언약에 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고 난 뒤에 두 사람 모두 눈이 열렸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이 또한 언약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담이 자기 아내의 머리가 되도록 먼저 창조되었고, 또 지도자로서 그는 더 큰 책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따 먹었을 때에, 타락은 취소할 수 없는 확연한 사실이 되었다 사랑의 언약이 깨진 것이다.

타락의 결과들

성경은 타락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사람이 사랑의 언약을 그리도 단호하게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이 깨뜨려지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오히려 거저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은 전적으로 사람의 행위이자 사람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 잘 보살펴 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수많은 특별한 은사를 주셨고, 또 아주 아름다운 장소를 주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다. 그분은 분명하게 당신의 언약의 약정들을 그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로의 타락을 조금이라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짓는 것을 금하셨다.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마련하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언약을 깨뜨린 결과가 사랑의 관계를 중단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그 날 저녁에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러 오셨을 때에,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에덴동산 나무 사이로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사랑의 동산이 두려움을 피하는 은신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에, 아담은 “내가 두렵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즉각적으로 이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셨을 때에, 아담은 자기 아내를 비난했다. “나와 함께 한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여자에 대해서 “당신이 나에게 주셔서”라고 말함으로, 아담은 하나님을 [자신의 죄책에] 연루시키기까지 했다. 여기에서부터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계명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

하와는 [아담이 했던] 동일한 선례를 따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면서 뱀을 비난했다. 그러는 동안 이미 사탄이 떠나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 뱀은 사단에게 말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뱀 위에 내려진 저주가 효력을 발하여 아담과 동물들 사이에 즉각적으로 괴리가 생겨났다.

사랑의 친밀감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사람과 교제하실 수 없었다. 남자와 황폐해진 관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사람은 자녀를 출산할 때에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자연은 사람에게 적의를 품게 되었고, 자연이라는 세력(force)이 사람을 땅에서 살기 힘들게 했다. 동물은 사람을 겁내게 되었고, 또 수많은 동물들이 아담에게 늘 위협이 되었다 동물들은 피차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죽음이 인간 세계에 들어와 힘들게 살아간 뒤 피할 수 없는 최후가 되었다.

타락의 결말은 준엄하였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 죄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야웨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시니라.”(창3:23,24) 언약을 깨뜨리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지옥의 심판, 즉 바깥 어두운 곳과 불못으로 추방당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의 흐름은 명료하면서도 일관된다.

회복된 에덴동산을 희미하게나마 봄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적의에 찬 환경 속으로 사람이 쫓겨나고, 천사들에 의해서 되돌아갈 길이 막혀버린 것을 읽을 때에,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기할 수 있다. 두 번째 아담이 처한 환경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승리는 완전하고 영광스러웠다.

우리는 마가복음 1장 12절에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광야로 내몰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40주야를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이후에 극도로 허약해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악한 자의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을 자기에게서 떠나라고 명하셨다.

그런 뒤에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을 들더라”는 놀랄만한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잠시나마 광야가 낙원을 연상케 하는 동산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야생 동물과 교제할 수 있었고, 그분은 야생동물을 치고 야생동물은 그분에게 전혀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천사도 그 주위를 도는 화염검도 없었다. 그들은 섬기려고 그분께 왔다.

이 본문은 도래할 낙원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으로써, 사람과 동물들과 천사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서로서로 평화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사역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정확히 두 번째 아담이라고 했고, 그분은 사랑의 언약의 중보자로서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다.

마가복음 1장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첫 번째 아담에게서 두 번째 아담에게로, 옛 낙원에서 새 낙원으로 가는데, 이 모두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때문이다.

Ⅶ. 언약은 구세주의 약속 안에서 유지되었다.

타락한 후에, 야웨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힘든 조건 속에 살게 될 것이고 또 결국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에게 하신 말씀 속에는 인류를 위한 약속과 소망이 담긴 메시지도 있다.

우리는 창세기 3장 14절과 15절에서 “야웨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사람과 뱀 사이에는 나면서부터 증오감이 있다. 뱀은 물리적으로도 대단히 징그러운 동물 중에 하나인데, 파충류 중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뱀을 보면 무서워서 전율이 일어남과 동시에 반감으로 인해서 등골이 오싹해지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고, 뱀은 사람에게서 달아나거나 고개를 쳐들어 공격하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로써 문자 그대로 자연 영역에서 뱀과 사람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볼 수 있다. 사람과 뱀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뱀을 애완용으로 기른다. 이 증오감은 하나님의 판결의 결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많은 문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뱀은 사단의 도구 내지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사단이다. 뱀에 대한 저주는 훨씬 더 깊고 영적인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적인 전쟁이란 사단과 여자 사이에, 또 그들의 후손들 사이에, 그리고 경건하지 못한 세상과 신실한 교회 사이에, 참으로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사단과 그리스도 사이에 계속적이고도 치열한 전쟁을 말한다.

“내가 적대감을 둘 것이라…”

죄 가운데로 타락하여, 사랑의 언약이 파기되었다. 인류는 부패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사람들끼리도 적대감이 생겨났다. 사단은 강력한 승리를 호언장담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하나님을 반역하여, 악의 진영에 가담하여 악의 영향력과 권세 아래로 들어갔다. 새 언약이 출현하게 된 것인데, 이제는 마귀와 아담 하와 사이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마귀는 의기양양하게 “나는 인류를 벗으로 삼았노라, 또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투에서 내 쪽에 서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제 사람과 악한 영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데 하나가 되었다 죄 가운데로의 타락은 증오의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동맹을 결성하도록 했다. 마귀는 확실하게 언약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새로 형성된 친밀감(this newly-found friendship)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지 않으셨다. 사람과 뱀 사이에 반감을 두실 뿐 아니라, 마귀와 여자 사이에도 적대감을 두실 것이다. 이 적대감은 영속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단적인 언약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이고, 오히려 사랑의 언약이 유지되게 하실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과 사단을 계속해서 따로 떼어놓으실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동시에 마귀와 다른 언약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중요한 진리를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확언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이 진리를 그대로 적용시켰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10:21) 혹은 야고보가 기록했던 것과 동일하다. “너희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너희가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약4:4)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사탄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유지시키셨다.

여자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이유로 언급되었다 여자는 마귀의 제안을 먼저 수용하여 마귀와 벗이 되는 길을 열어놓았던 장본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훨씬 더 중요한데, 여자는 그 씨 안에서 또 그 씨와 함께 이 언약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그 씨를 낳을 것이다. 주님께서 사단에게 자신이 아담과 하와를 통제하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고 또 아담과 하와의 씨(후손)를 멸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다.

여자는 스스로 사단의 권세에서 풀려날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하라. 인류는 거듭 사단에게 쉽게 먹이가 될 것이고 세상과 벗이 되려는 경향이 농후할 것이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계속해서 둘의 사이를 벌려놓을 것이다. 그분은 양편을 대립관계로 유지시키실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과의 사랑의 언약을 유지시키실 것이다.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사람 자신과 마귀와 소원(疏遠)해지려고 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오히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라”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에 달려 있다.

후손도 포함되었다.

적대감은 [아담을 포함하여] 하와와 사단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후손(씨)에게서도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언약적인 방식으로 말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지 한 사람과 맺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후손들과도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적대감은 모든 세대, 즉 역사 내내 그 결과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뱀의 후손”이라는 표현을 문자적인 의미나 물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타락한 천사인 사단은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단의 후손 안에서 하나님께 불신실하고 사단과 함께 야웨 하나님을 대항하기 위해서 협력할 많은 세대의 인류들을 본다. 여자의 후손 혹은 씨는 하와에게서 나오고 동시에 야웨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신실할 수많은 세대들을 가리킨다(제8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었다).

여기에 또 다른 요인이 있다. 하와의 경우에, 후손이라는 복수 혹은 집단을 표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이 복수 단어는 두 개의 단수 단어에 뒤 따르고 있다. “그가 그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고 또 네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3:15) 온 세대에 영향을 끼칠 적대감은 궁극적으로 두 주요 인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구세주와 사단 사이의 충돌로 해결될 것이다.

악한 자와 싸우는 이 전쟁은, 언약에 신실한 세대들에 의해서도 수행될 것인데, 최종적으로 사단을 자기 발아래 짓누르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롬16:20).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이유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요일3:8).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거대한 이 전쟁을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막 출산하려는 한 여인이 있지만, 극악한 용 혹은 옛 뱀이 여자를 삼킬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도망하여 하늘로 들림을 받았다. 여자는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곳인 광야로 도망간다. 그녀의 아이는 철장으로 만방을 통치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 계시하셨던(창3:15) 하나님의 이 약속이 전체 역사 안에서 반향되어 있다. 이 약속은 사단과 그리스도 사이에, 세상과 교회 사이에, 언약을 파기한 자와 언약을 지킨 자 사이에 있는 전쟁의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한다. 그러기에 이 약속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타락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과 큰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격렬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그 고통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보장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언약을 오실 구세주 안에서 유지하신다.

고난으로 말미암은 영광

에덴동산에 있었던 복음의 계시 안에서, 우리가 나머지 성경을 읽을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배울 수 있다. 약속된 구세주를 통한 구원이 사람의 [죄와 비참의]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구원 사역은 값이 비싸며 큰 희생을 요구한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복음을 명확하게 말씀해놓으시면서 이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분명하게 밝혀놓으셨다.

“그가 너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라.” 내가 아는 한, 뱀을 죽일 유일한 방법은 뱀의 머리를 세게 발로 으깨고 일격에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다. 기회를 놓친다면, 뱀은 재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발목을 아주 쉽게 깨물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마귀와 싸워 이길 것을 확실하게 약속하셨고, 마귀에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전혀 없다. 이 전쟁은 완전히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약속 안에는 뱀에게 해당되는 말씀도 들어 있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라.” 이 말은 아마도 행인이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뒤에서 공격하여 발꿈치를 무는 뱀의 경향을 말했을 것이다. 발꿈치는 발에서 가장 공격당하기 쉬운 곳이며, 또 여기에는 다리 전체로 흐르는 주 동맥(動脈)이 있다. 만일 여기에 독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면, 거의 있을 법한 일인데, 그 독이 발꿈치를 지나 아주 빠르게 혈관으로 흘러 들어가서 죽음을 가져 올 수 있다.

이 말은 구세주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필히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독이 퍼지기 전에 상처에서 독을 제거하면 되고, 뱀이 낸 상처는 항상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약속된 구세주이신 여자의 후손은 이 전쟁에서 고난을 받게 될 것이고, 이 전쟁은 죽음을 가져 올 수도 있다. 개인적인 희생과 고난 없이는 승리도 없다. “고난을 통한 영광”이라는 말은 복음 속에 있는 한 가지 주제이기도 하다.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이어지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고, 그렇게 하심으로, 사단의 능력을 깨뜨리셨다. 사단의 능력을 깨뜨리기 위해서 큰 대가가 지불되었다. 그러나 구세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여기에 해당되는 대가를 지불하실 것이다.

복음이 기쁨으로 받아들여졌다.

창세기 3장 20절의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이름에 대해서 지나치게 사색하는 것은 그리 지혜롭지 않으나, 이름이 바뀔 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담은 먼저 자기 아내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함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취하여졌음이라.”(창2:23) 그러나 죄가 이제 소원(疏遠)해지게 만들었다. 이 소원한 관계가 해소될 수 있는가?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비록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을지라도, 아담은 생명의 복음을 믿었다. 아담은 자신이 죄 가운데로 가공스럽게 타락하였고 동시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보전되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어느 날 마귀를 멸하고 마귀의 권세를 파멸시킬 한 아들(a Son)이 나올 것이다. 이 아들은 하와에게서 나올 것이다. 비록 그녀가 죄를 지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죄의 권세를 무너뜨릴 도구가 될 것이다. 그녀에게서 모든 산 자가 나올 것이고, 또한 구세주가 될 아들이 나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들여온 이 여자를 “생명”이라고 불렀다.

하와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은 아담의 반응이다. 이러한 복음의 심오함이 이후에 사도 바울에 의해서 메아리쳤다. “죽음의 쏘는 것은 죄요, 그리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도다.”(고전15:56,57) 죽음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날도 올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의 길에는 생명이 있다.

Ⅷ. 두 계보와 한 언약

일부 사람들은 언약의 역사가 아브라함과 시작되었거나, 어쩌면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던 노아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그분의 사랑의 관계이며, 에덴동산에서 사람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온 첫 자손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 세대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을까, 아니면 그들의 부모가 타락했을 때처럼 자기 방식대로 살았을까?

한 가지 패턴이 있다. 성경은 두 가지 노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노선은 모든 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웨께 신실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노선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노선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고, 그분께 적대감을 가지고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재원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노선이 있다. 전자는 믿음으로 살고, 후자 노선은 힘으로 산다.

때가 되면 신실치 못한 세대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을 더 이상은 고려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두 번째 계명에서 단서를 얻는다면, 사람이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완전히 멀어지기까지는 불과 삼사 대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회개를 거절한다면, 언약 바깥에 있게 될 것이고, 점점 하나님께 반감이 자라가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로마서 1장 18-32에서 간략하게 다루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거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이끈다. 그 결과는 무서운 배교이며, 그런 가운데 본래 관계들이 파괴된다.

신실한 세대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시련들을 견디어내며,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과 신뢰를 보전한다. 이 사실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들 두 세대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만 할 것이다.

가인과 아벨

아담과 하와는 죄와 죽음이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영위했다. 이 사실이 그들의 자녀를 출생하였을 때에, 즉 가인이 출생할 때에 하와가 “야웨의 도움으로 내가 득남하였다”(창4:1)라고 말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와는 자신의 연약함을 표현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을 인정하였다. 필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참된 언약의 자녀들이 지니는 첫 번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자녀가 태어났을 때에, 체계화된 가정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에 딸들도 태어났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딸들은 기록된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두 어린 아이들은 동일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자녀들에게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발생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오실 구세주를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가인은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인은 그의 이름(“하나님의 도움으로”)에 걸맞게 살지 않고, 오직 야웨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기를 거절하였다.

우리는 야웨께서 전달해 주신 속죄 제사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이 없이 언급되어 있다. 속죄 제사는 속죄하는 것을 함축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임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 희생제사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야웨께서 위대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속죄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양식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일에 정통했을 것이며,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야웨께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행하는 것과 같이, 이 예배에 참여하여 야웨께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가인의 마음은 이 희생제사 즉 예배에 있지 않았다. 비록 가인이 야웨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는 시기하고 격분하게 되었으며 미움이 자랐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계속해서 악하게 나갔고 결국 자기 형제 아벨을 죽였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추방하실 때에, 가인은 단지 자신의 안전에만 급급하였을 뿐이다. 그는 추방되어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소외된 채로 자신의 세대를 시작하였다. 창세기 4장 16절에서 “그리하여 가인이 야웨 앞을 떠나 나가 에덴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이제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그 이유는 가인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마음에서 야웨를 섬기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계속해서 믿음의 생활을 영위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하와는 이 아이에게 셋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 때문이라”(창4:25)고 하와는 말했다. 아벨은 죽었고, 또 가인도 영적으로 죽었으나, 새롭게 주신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따라 신실한 세대의 노선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이 일은 창세기 5장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복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는데, 자신들의 법으로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야웨께 순종하고 또 그분의 복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언약 안에서 살고, 전자는 언약을 거절한다.

가인의 계보: 자가 구원

이 두 세대를 비교해볼 때에 곧 바로 알게 되는 사실은 불순종이 처음부터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가인은 안전한 장소에 도시 하나를 세우고, 아들을 낳았다. 그는 그 도시를 그의 아들 에녹의 이름을 따라 지었는데, 이렇게 하여 자신의 육신의 열매에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가인의 가장 뛰어난 후손들 중의 한 사람이 라멕이다. 셋의 수많은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결국, 그들이 한 가족에서 나왔다), 그들은 사촌의 생활방식과는 완전히 다르게 처신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비슷한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어서 무심결에 독자들은 이 두 세대를 비교하게 해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의도일 것이다.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급속도로 권세와 부를 얻었다. 가인이 두 여자와 결혼하였다는 사실은 창세기 4장 19-20절에 기록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께서 일부일처를 정하셨지만, 라멕의 비망록에는 전혀 다른 제도가 있었다. 라멕은 자신의 용맹을 보여주려 했고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끌어 올리려고 했다. 두 아내를 가진다는 것은 단기간에 더 많은 자녀들을 거느릴 수 있으며, 자녀들은 세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뜻했다. 이 사람 라멕은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었다. 23절과 24절에서는 그가 떠벌인 자랑을 읽을 수 있다. “만일 가인이 일곱 배로 앙갚음을 한다면, 라멕은 일흔 일곱 배로 복수할 것이라.” 어떤 청년이 라멕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혔나 보다(창4:23). 그래서 라멕은 엄청난 대가로 복수를 했다. 아마도 상처를 입힌 그 청년의 모든 가솔들을 무자비하게 없애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우리의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주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세상은 용서와 자비를 모르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자주 보복적인 살인을 일삼는다. 불경건한 세상의 속성은 폭력이며, 이것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창6:11을 보라. 온 땅에 강포가 충만하더라).

라멕의 자녀들은 다 방면으로 전문 기술을 가졌고 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야벨은 가축의 떼를 사육하는 전문적인 농부가 되었다. 야벨은 예술에도 탁월하였는데, 특별히 악기를 만드는데 두각을 나타냈다. 두발가인은 대장장이로서, 모든 종류의 도구들과 무기를 동과 철로 만들었다. 기초적인 농사, 예술의 발전, 장인(匠人)에 이르기까지, 가인의 후손들은 다방면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낸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시편 73:3에서 아삽과 함께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하면서 거의 불평으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이 세대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고, 스스로 구원할 것이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이 세대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식하는 것도 구세주를 열망하는 것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여러 이름과 상황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였으나, 가인과 그의 후손의 태도는 세상 사람들을 압도하였다.

셋의 계보: 야웨를 섬김

가인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셋의 계보는 발전이 느리고 볼만한 것이 없다. 창세기 4장 26절에 셋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에노쉬라고 불렀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에노쉬라는 이름의 뜻은 아담이라는 이름의 의미와 비슷하다. 그대로 번역하면, 약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에노쉬가 약골처럼 보였다거나, 자신이 맡은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셋은 타락한 인생의 한계를 보았고, 또 이 이름 안에 “우리의 도움은 야웨의 이름 안에 있다!”는 고백과 청원이 들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셋과 그의 후손들은 야웨와 교통하려고 하였고, 그분은 그들에게 사랑의 언약 속에서 약속을 주셨다.

창세기 4장 26절에서 또한 “그 때에 비로소 야웨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의 능력을 뽐낸 반면에, 신실한 셋의 후손은 야웨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렀고, 그분의 복 주심과 도움을 청했다. 여기에서 체계화된 예배 예식이 시작되었고, 이 예배는 장래 세대들이 계속해서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계보(5:1)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5장 1절과 2절에서 사람의 특별한 창조와 사람의 높은 지위가 어떤지를 현저하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회상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셨고, 이 계보가 이제 공식적으로 아담에서 셋과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가인과 그의 계보는 떨어져 나갔다.

창세기 5장 기사 가운데 또 다른 중요한 형태는 이 신실한 가계의 위업을 우리에게 대단히 적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실한 후손들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는 이들에 대한 특별한 일들이 아무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명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여전히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주목할 수 있다. 이 후손들은 장수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들이 땅에 가득해졌다. 이 계보 안에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종교는 단순히 형식상의 절차가 아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창5:22)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야웨 하나님과의 참되고 신실한 교제와 그분과 그분의 계명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같은 에녹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4)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에녹은 죽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신실하였고 또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다는 표징으로 하늘로 데려감을 받았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사실은 틀림없이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또한 셋의 후손인 라멕도 있는데 이 순종한 라멕은 한 아들을 얻었을 때에,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야웨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8). 라멕의 고백에는 “삶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는 겸손과 소망이 서려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의지하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삶이 어려울 때에 위로를 준다.

그때에 이 의로운 세대는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고, 그분과 친근하게 동행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을 섬겼다. 이들의 삶은 믿지 않고 회개치 않는 가인의 후손들에게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이 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공개적으로 그 당대의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였다. 에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다14,15절) 에녹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원수들 때문에 정확하게 에녹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늘로 들려올라갔다. 이 경건하지 않은 악한 사람들은 에녹을 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들에게서 건져내셨기 때문이다.

노아에 대한 증거도 비슷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6:9) 노아 역시 거룩한 두려움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말한다(히11:7). 이 사람들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믿었고 동시에 기도하면서 강렬하게 하나님을 찾았다. 이들은 말과 행위로 스스로 신실한 언약의 자녀들로서 드러냈고, 자신들의 행보 속에서 야웨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을 주시하자. 혹자는 오랜 뒤에 미가 선지자가 선포했던 언약의 요구를 상기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웨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이 말씀은 우리의 언약의 의무를 아름답게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한 생활양식과 예언으로 그 당대의 죄들을 대항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세상이 이들을 미워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말과 행위로 복음을 증거하였다.

두 계보가 한 점으로 모이다: 적대감이 잊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계보가 서로 하나가 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혼합 결혼이 낳은 결과를 읽어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였다.” 이렇게 혼인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헌신이 아니라 육신의 미모와 성적인 매력이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선포하셨던 적대감이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잊혀졌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동맹은 유전적인 관점에서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은 주목할만 한다. 네피림이 나오는데(6:4), 이들은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장대한 거인이자 용맹한 전사들이었고, 이 사람들의 목적은 자가 축복(self-enrichment)이었고, 그 방법은 폭력이었다. "네피림"들은 이 두 계보가 하나로 연합한 산물이라는 것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이 하나가 될 때에, 이들은 거의 무적의 권세를 만들 수 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폭력이 확산되어 하나님께서 깊이 근심하게 되셨고 동시에 홍수를 통해서 악한 자들을 파멸하기로 결정하셨다. 이 시점에 여전히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이 있나 찾아보셨을 때에, 오직 노아만 남아 있었다. 그 인류와 하와와 셋의 계보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노아를 통해서이다. 홍수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여전히 서 있다. 다시 말해서 방주 안에 피할 수 있었다.

통혼(通婚)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종종 신자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잊어버림으로 통혼(mixed marriages)을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경에 빠뜨렸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약과 신약 두 곳 모두에서 언약의 백성이 불신자와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일관된 가르침을 볼 수 있다. 혼합 결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타협시켜 하나님의 대의를 손상시킨다. 하나님께서 두신 적대감이 잊혀질 때에, 교회는 세상에 잡아먹히게 된다. 핍박으로 못 이룬 일이 동화하는 방법으로 실현된다. 발람이 충고했듯이, “그들과 싸우지 말라. 그들을 환대하라!”(민25:1)

그래서 이삭이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야곱에게 명령했던 것이다(창28:1). 에서의 아내인 헷 족속의 여인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의 원천이 되었다(창26:34). 성경에서는 혼인을 언약이라 부른다. 이 점을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한다(말2:14; “…너의 혼인 언약”). 우리의 혼인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혼인할 수 있다.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이 자신들과 조약을 맺으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34:16)

통혼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났었고, 삼손과 솔로몬과 같은 거장도 통혼을 했다.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하였다. 솔로몬에 대한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야웨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이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야웨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야웨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야웨를 온전히 좇음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11:1-6) 통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인종차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언약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통혼은 포로 생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에, 혼인에 관한 율법이 매우 엄격해졌다 예를 들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매우 강력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는 것은 야웨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다는 것과 같았다. “이 모든 아내와 소생들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니라.”(에스라10:3)

신약은 통혼 문제에 대해 결코 흐릿하지 않았다.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혼인언약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혼인은 지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하나 됨의 신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엡5:32). 혼인할 동반자가 “반드시 주님께 속해 있어야 한다”(고전7:39)는 것이 법칙이다.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후6:14). 이 사실은 혼인관계만 아니라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데, 특별히 혼인 경우에 적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찌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상관할 수 있으리요?”(15절) 또한 성적인 범죄는 이제 더욱 심각한 죄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신자들은 오순절 이래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16절을 보고, 또한 고전6:18-20을 참조하라. “… 너희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선포하셨던 적대감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우리의 언약이 위협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구세주의 보혈로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그분에게 속해있다. 이것이 신구약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Ⅸ. 노아와 맺은 언약

우리는 첫 세상이 어떻게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어떻게 온 땅에 “강포가 가득하게 되었는지”도 살펴보았다(창6:11). 온 땅이 폭력과 유혈로 가득 메워져서 야웨 하나님께서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하여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6:7) 야웨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인내하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제 심판이 임박했다. 이 심판은 완벽할 것이고 동시에 철저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온 지면에서 파멸당할 것이다. 이것은 큰 홍수로 옛 세상을 심판하는 강력한 심판이다.

이 심판은 사람과 동물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비록 동물들이 도덕적으로는 사람들의 잘못과 무관하지만, 동물들도 여전히 땅에 임하게 될 이 심판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사람의 지배 하에 살기 때문이다.

지면 위에 있는 동물들의 속성이 아주 사나워져 아무도 길들일 수 없게 되었고 역시 사람들을 위협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과 동물 모두 약탈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야웨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고 계셨다.

언약적인 인물평

그러나 야웨 하나님께서 인류와 동물들을 완전히 쓸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의 언약에 여전히 진실하시며, 동시에 미래에 계속 동행할 사람으로 노아에게 당신의 은혜를 보이셨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중요한 인물평을 발견할 수 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요. 그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여기에서 의인(righteous)이라는 단어는 이후에 신구약 성경에서 말한 믿음으로 된 의(righteousness)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믿음에 의한 의라는 말은 언약의 관계를 무시한 것이 결코 아니다. 노아는 이후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그에게 의로 돌려졌다.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언약은 항상 믿음에 의해서 오는 의롭다함 위에 세워져 있다.

의인이라는 단어가 만일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신분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흠이 없다 혹은 완전하다(blameless)는 단어는 노아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말해준다.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창세기 6장 9절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말한다. 그 당대의 그 누구도 노아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완전하다(그리고 의인)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노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에 옮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믿음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믿음의 열매 역시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요구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 뒤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온다(창5:24에서 에녹도 이렇게 증거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동행했다”는 말은 여기에서 날마다의 생활이 완전무결하였다(totality)는 뜻이다. 노아는 야웨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친밀하게 살았다. 언약 안에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며, 공적으로 믿음의 열매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야웨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세대에 살았던 참된 언약 백성들의 인물평이기도 하다.

이러한 언약적인 인물평에서 우리는 훨씬 더 중요한 한 가지 사항을 포함시켜야만 한다. 본문에는 즉각적으로 창세기 6장 10절에서 볼 수 있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노아가 세 아들을 낳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이 말은 단순히 자전적인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의 참 성격과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언약은 신자와 그의 자녀들과 맺어졌고 동시에 그들과 계속된다. 셈과 함과 야벳은 홍수 때에 이미 성인이었고 혼인도 했었던 자녀들이었다(창7:13).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계보에 속해 있는 자로서 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포함되어 있었다.

세 자녀들의 의나 그들의 영적인 자질에 대해서 본문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에 자녀들의 신분이 그의 가정의 머리인 노아의 입지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내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네(너와 네 가족들이 아니라, 단수로 나와 있다)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7:1)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개인들만을 다루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가솔들에게도 은혜로우시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신자들과 또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사랑의 언약을 적용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실을 언급한다. 노아의 세 자녀들의 태도는 나중에 홍수가 끝난 뒤에 표면에 드러나, 창세기 9장 18-27절까지에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참된 사랑이 모든 자녀들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큰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물을 통해서 방주 안에서 구원받았음

이 첫 번째 큰 심판은 물 심판, 큰 홍수 심판이었다. 물은 파괴시키고 또한 깨끗하게 하며 정화시킨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방주이다. 오직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과 동물들만이 안전할 수 있는 동시에 새 세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성하고 있는 [첫 창조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 심판 때처럼 녹아버리고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그러나 큰 홍수는 마지막 때에 도래하게 될 분명한 심판을 가리키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6,7) 두 경우가 하나님의 언약적인 방법으로만 피할 수 있다.

물과 방주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아 구원의 길을 설명해준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2)고 적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물(이를 테면 홍수로 깨끗하게 되어야 하듯이)을 통과해야 하듯이, 우리도 물 즉 세례의 물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물은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표와 인을 말한다. 노아는 자신의 “세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물은 죽음과 삶, 심판과 구원을 다 묘사하고 있고, 또 베드로가 기록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죽으시고 이제 살아나셔서 영광가운데로 승천하셨다. 우리는 예식이나 표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는다.

홍수가 옛 세상을 뒤로 남겨두고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함축하고 있듯이, 세례도 결정적인 전이(轉移)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세례를 통해서 그와 함께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고, 마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듯이,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에로 살아났다(롬6:3,4)는 것을 함축한다. 홍수는 세례를 가리키고, 세례는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해 정결하게 되었고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구속의 역사 안에 단일성과 점진성이 있다.

특별한 확신이 요구됨

노아와 그의 자녀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 그러나 이들과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워놓으신 것과 같은 동일한 언약을 통해서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멸망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와 아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언약을 세울 것이니라…”(창6:18,19) 홍수는 사람을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종국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홍수는 동시에 계속될 새로운 시작을 말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담과 셋의 계보 안에서, 신실한 후손들 안에서 당신의 옛 약속에 따라서 일하신다.

여기에서 성경은 언약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언약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전에 언약이 없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야웨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셨고 또 강력한 용어로 말씀하셨다(내가 너와 언약을 확립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인류에 대한 이와 같은 광범위한 심판을 선언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로 파멸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야 했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신뢰해야 했다. 노아는 이런 확신을 갖고 방주를 지어야 했고 또 “의의 설교자”(벧후2:5)로서 모든 사람에게 설교해야 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들을 품고 어두운 밤을 보내야 했다.

어쨌든 확신이 필요했다면, 방주가 만들어지는 동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줄곧 당신의 말씀에 늘 신실하셨듯이, 세상이 불로 소멸될 때에도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신실하실 것이다.

자연과 맺은 언약인가?

창세기 9장 9-11절에서 홍수가 다 그친 뒤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에게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들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 언약은 인류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또 단호하게 “땅 위의 모든 생물”(창9:17)과 맺었기 때문에, 종종 이 언약을 자연과 맺은 언약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이전에 아담과 셋과 맺은 언약과는 다른 언약으로 여겼다

헤르만 바빙크(개혁교의학, Ⅲ,196ff.)는 노아와 맺은 이 언약 안에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고 하는 특별한 양식이 있다고 보았다. 홍수로 하나님께서 강포로 뒤덮인 옛 세상을 정결케 하시고, 또 확장된 은혜의 시대를 시작하셨다. 바빙크는 이 “새”언약을, 그가 믿은바 은혜언약과 관련은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말들을 수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은혜가 이제 악을 더욱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저주가 제한되었고, 동물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대신에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의 능력)은 점차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세상” 즉 홍수 이전 세상의 모습과 비교할 때에, 사람들이 기질적으로 더욱 온화하게 되었고, 덜 강하고 덜 폭력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만큼 오래 살지 못하게 되었다. 홍수 이전에 단지 별 가치가 없었던 사람의 생명이 이제 홍수 이전의 끊임없었던 유혈을 억누르기 위해서 교수형이라는 형벌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창9:6), 그리고 생명이 훨씬 더 통제를 받았다. 바빙크는 또한 기후와 풍경에 변화가 왔다고 믿었고, 이 언약의 일부로써 공룡과 같은 선사 시대의 큰 동물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생명이 계속될 수 있도록 보장하시기 위해서 또 강도 높은 인류의 (자가) 파멸을 막기 위해서 이와 같은 강력한 모든 조치를 취하셨다.

더 흐라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노아언약은 흔히 자연 언약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는 한, 이렇게 특징짓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언약은 땅과 동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맺어졌다.”(약속 그리고 구원, Ⅰ,60) 더 흐라프는 한 가지 요점을 말했다. 이 언약이 사람과 맺어졌다는 것이다. 이 언약은 참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온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중요하나, 사람이 이 언약의 주된 수혜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완전하게 모아질 때까지 이와 같은 거대한 심판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하셨다. 피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 목적에 이바지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 섭리로부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이 언약을 자연 언약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이 세상)은 인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way)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현 세상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으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에, 현 세상이 끝나게 될 것이다(벧후3:7을 보라. “현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看守)하신 바 되어…”). 모든 피조물들이 물로 새롭게 되지 않고, 마지막 심판 때에 불로 새롭게 될 것이다.

동시에 야웨 하나님께서 신실한 인류의 세대와 맺으신 언약 안에서 악을 제어하실 것이고, 자연을 통제하시고 보호하실 것이고, 이렇게 하여 땅이 다시 사람들로(다른 피조물도) 채워지게 될 것이고, 교회가 모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새롭고 다른 언약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의 언약이며, 이 언약을 특정한 때에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보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언약이라고 하지 말고, 여기 언약의 선언을 단순히 현존하고 계속되는 사랑의 언약의 특별한 적용으로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무지개 표징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특별한 표징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하필이면 왜 이 표징인가? 무지개는 태양과 물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땅 위에 수많은 폭풍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 국지적으로 홍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지개는 태양이 구름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표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동물들은 분명히 이 표징을 바르게 평가하거나 무지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연결시키기에 합리적인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표징은 인류를 위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먹구름이 모이면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형형색색의 무지개의 찬란함은 모든 사람에게 폭풍이 분명히 지나갈 것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이런 무지개가 하늘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참으로 황홀해 하고 놀라 쳐다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했을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또한 뚜렷하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날 때마다, 내가 이것을 볼 것이며, 하나님과 땅 위에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을 내가 기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9:16). 야웨 하나님께서 실제로 약속을 상기하셔야 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랑의 언약이 완성될 때까지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태어날 때까지 최종적이고 철저한 심판을 연기하겠다는 이 표징에 자신을 친히 묶으셨다.

Ⅹ.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홍수에 바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길게 다룰 필요는 없다.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을 계속 복주시고, 창세기 10장에서 인류의 성장과 확장을 읽을 수 있다. 인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홍수 심판으로 준엄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 역시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온 세상에는 구음이 하나이며 언어가 하나였다.”(창11:1)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인류가 동맹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정착하면서, 하늘에 닿는 탑이 있는 도시건설을 결심했다.

이 탑은 사람들의 탁월한 역량을 과시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규합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람의 도성이 땅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 탑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는 사실은 이렇게 분투하면서 하나님의 더 무거운 심판에서 스스로를 지키자는 바람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살기를 원치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했다. 또한 “자기 이름을 내고자”했고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런 생각은 수(數)의 힘과 목적의 일치를 통해서 무적(無敵)이 되려는 것이다.

NIV는 정확하게 설명해 놓았다. “만일, 전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자기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람 중심적인 노력으로 역사의 고삐를 움켜쥐려는 오만한 시도 가운데서 일치를 유지했다면, 하나님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항거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몰아냈을 것이다.”

홍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죄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은 다시 뒷전으로 물러났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사람들 간의 동맹으로 힘을 추구한다. 사단과 사단의 후손과 적대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잊혀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처리하시려고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가능한 위험을 인식하시고(창11:6- “…그들이 하기로 계획한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인류 가운데 있는 일치를 깨뜨리셨다. 피차 못 알아듣게 되자 건설하고 있던 그 도시에서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온 지면에 흩으셨다.

바벨 대(對) 예루살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사람을 흩어지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단결을 깨뜨렸다. 이제는 각 언어와 영토와 문화를 가진 개별적인 민족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람들이 단결을 과시하려고 건설하려 했던 그 도성을 바벨이라고 부르는데, 히브리어에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희가 있다. 즉 일치를 상징하려고 한 바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혼동”과 비슷하다. 집단적인 노력은 혼동으로 끝났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언약이 산산조각 나고 만 것이다.

바벨 혹은 바빌론은 하나님 백성의 큰 적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빌론 왕은 이후에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그리고 바빌론은 하나님의 백성의 큰 포로소용소가 된다. “열국의 보석 혹은 영광”(사13:19)이라고 불리는 바빌론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해 건설된 사람의 힘을 상징한다.

이런 상징주의는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바빌론은 궁극적인 반기독교 세력이며, 큰 음녀이며, 성도들의 피를 마시며(계17:6),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바빌론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바빌론은 예루살렘이 완전하게 세워질 때까지 그러니까 교회가 완전히 모여질 때까지 최절정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서 세상은 분열된 채로 두실 것이다. 최종적인 심판은 오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 데려옴을 받을 때에 시행될 것이다(벧후3:9,10). 사단은 속박 당할 것이고(계19장) 무법한 자들은 제재 받을 것이고(살후2:7) 그 결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곳인 예루살렘의 영광은 항상 바빌론의 퇴폐적인 화려함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람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의 빛으로 활기를 잃는다. 마지막으로 바빌론은 멸망할 것이고, 반면에 새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평화언약의 도성은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계18장을 계21장과 비교하라).

“모든 사람이 너를 통해서 복 받게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성경의 초점이 인류에게서 멀어지면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나머지 세상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온 세상에 다가오실 때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스라엘과 연관된 이 삽화적인 사건을 약속된 메시아를 오게 하는 유일하고 필수적인 단막극으로 보고 중요한 다른 의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행히도 옛 언약 시기는 우리가 지나와버린 긴 기간이다.

나중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지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이 한 장소를 찾아 나라를 세우려고 흩어지는 사람들의 배경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내려고” 모였지만, 이제는 바벨 바깥에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늘왕국을 세우고 계시는 중이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야웨께서는 계속해서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신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독립 국가를 이루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쓰셔서 이 목적을 실현하실 것이다. “나는 너로 큰 나라를 만들겠다.”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자기 이름을 세우려고 하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세상의 열국은 오직 다른 사람을 짓밟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아브라함에게 “온 땅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12:1-3).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초점을 맞추셨다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세상의 구원과 복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하나님은 사랑의 언약 안에서 계속해서 세상의 구세주의 강림을 향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 특별히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셔서 그렇게 하신다. 이스라엘로부터 세상의 구세주가 오실 것이다.

주권적인 은혜의 능력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의 역사 안에서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후보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앞서 언급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나라의 조부가 될 자격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불임아내를 둔 노인이었다. 분명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에서 나올만한 선한 것이 전혀 없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명령 또한 놀랍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인가?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가깝고 애지중지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고립시켜야 했고, (아직은) 알지 못한 먼 길을 행해 떠나야 했다. 사람의 시작에서 본다면, 이러한 이동(갈대아 우르에서 익명의 땅까지)은 어리석고 자멸하는 짓과도 같다. 자기 민족과 가족의 후원 없이 한 사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에게 큰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자기 가족을 떠나라는 명령은 역효과를 낳을 것이 뻔하다.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언약의 길은 항상 이런 것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사람의 약함 가운데서 분명하게 된다. 족장들과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경험했다. “내 은혜가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옛 언약에 이미 이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하나님이신 야웨를 떠나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

왜 고립시키셨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본토에서 이끌어내시고 그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지게 하심으로 무엇을 달성하고자 하셨는가? 이렇게 강제적으로 고립시키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죄에서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죄는 우리 근처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달라질 것이 없으며,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뒤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내가 적대감을 둘 것이라”는 말씀을 유념하자.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쉽게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분명하다. 세상적인 동맹이 야웨와의 언약 위에 만연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선한 이유 때문에 가족과 본토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오직 야웨만을 의지할 것을 확실하게 하고자 하신다. 이후에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한 뒤에 소돔의 왕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창14:23), 오직 하나님만이 아브라함을 복 주실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아들들 사이에 사귐이 없도록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생활 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되어야 했다.

이 적대감은 결코 이전에 없었던 것으로 야웨께서 지금 요구하시는 반립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메시아, 즉 약속된 구세주가 오실 것이고, 악의 세력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그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 모든 짓을 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과업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분리시켜 성별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립에는 물리적인 많은 중요한 점들이 있다. 이 말은 외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해서, 개별적인 국가로 성격을 유지해야 하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과의 언약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물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고립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도 철저하게 강제성을 띠고 있다. 우리가 새 언약의 의미를 살펴볼 때에, 이러한 요소들이 있음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 보겠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또한, 아브라함 언약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야웨의 명령에 순종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 동의하면서 아무 갈등도 읽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순종했다. “그래서 야웨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은 떠났다.…”(창12:4) 우리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순종했다는 것을 읽는다. 그리고 이것은 안전 조치를 제공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은 아브라함의 제안으로 분리한다.

왜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가? 오직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활동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을 떠나 냉대 받을지 모를 미지의 땅으로 가는 것을 너무나 위험한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야웨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더라.”(히11:8)

가나안 땅이 언젠가 완전히 자신과 자기 후손의 것이 될 것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었는가?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더라.”(히11:9) 아브라함은 자신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번민하면서 뒤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받게 될 모든 것을 내다보았다. 아브라함은 언젠가 자신이 약속받았던 모든 것을 건네받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

그리고 늙어서 받은 아들에 대해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아브라함은 받아들였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11:11) 믿음의 능력은 실로 크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2)

성경은 이 믿음을 단순하게 말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언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중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했다는 사실을 안다. 믿음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또 주님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특히 이삭을 낳을 때에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이를 통해서 미래에 대한 문을 여셨다.

신구약에서 아브라함은 행위와는 별도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했다(창15:6;롬4:3).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로만 가능하다”(롬4:16)는 사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믿음은 분명히 행위로 드러나게 되지만,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자신의 행위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은 모든 언약 사상에서 토대(bottom line)가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신약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롬4:16) 즉 전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부조(父祖)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결속 즉 하나님의 사랑의 한 언약 안에서 가지고 있는 교제가 오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 받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실 땅으로 갔다고 본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점점 더 야웨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시험은 가나안에 이르러 가로질러 가나안 제국의 심장부이자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숙곳 근처 큰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안식하고 있을 때였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특별하게 “그때에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12:6)고 말한다. 이 말은 가나안 족속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낯선 사람 하나가 이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 땅은 자기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간이라도 잘못 인도하셨거나, 아직 하란에 있었을 때에 완전한 그림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야웨께서 세겜에 나타나심이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더 쉽게 만들지는 않았다.

두 번째 시험은 애굽에 체류할 동안 일어났다. 가나안의 재난이 아브라함을 억지로 애굽으로 내 몰았다. 바로의 궁궐에 받아들여질 정도로 사라의 미모가 빼어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그의 누이라 하라 명했고, 그렇게 하여 자기 생명이 보전될 것이고 대접을 잘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이 자신과 자기 아내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야웨를 신뢰할 때에 어떤 것이 따라오는지를 야웨께서 분명하게 하셨다. 얼마나 분명한 교훈인가.

만일 아브라함이 이 땅에 관한 약속과 관련하여 시험받았다면, 아들에 관한 약속은 훨씬 더 큰 시험을 받았다. 약속된 아들이 출생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 인내가 약해지면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스마엘은 합법적인 상속자가 아니라 위험한 경쟁자이다. 야웨께서 약속을 반복하시면서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다. 창세기 17장에 야웨께서 사라가 열방과 왕들의 어미가 될 것이라고 보장해주시자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웃었다. 늙은 여인이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웃게 만들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철저히 검증받았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이 옳다면, 혹자는 아주 의아해 할 것이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느니라.”(롬4:19-21)

바울의 기록은 아브라함이 힘들고 고달픈 시기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의 생활은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요지는 아브라함이 신속하게 믿음이 자랐고 점점 더 하나님의 약속 신뢰하기를 배웠다는 것이고, 결정적인 쟁론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정확하게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마음과 생각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가장 큰 시험은 야웨께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받았을 때이다(창22장). 이 시험은 정말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아브라함은 이 아들을 오랫동안 기다렸고, 마지막으로 그를 받아, 깊이 사랑했고, 이제 이 아이를 잃을 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행하고, 어떻게 하든 야웨께서 준비하실 것을 알고, 그의 길을 즉각적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것을 행할 수 있었는가?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완전한 승리를 볼 수 있다.

옛 언약: 영적인 관계

옛 언약은 육신적인 관계였고 단순히 출생으로 이스라엘에 속하게 되었지만, 새 언약은 순수하게 영적인 관계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새 언약이 되지 않는다. 옛 언약은 완전히 끝났다. 이런 주장을 한번 이상 읽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의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유지되었고, 믿음은 완전히 영적이라는 사실이 족장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분명해졌다.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일하신다, 그리고 이분만이 믿음을 주신다”는 뜻이다. 이삭과 야곱도 오직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이런 뜻에서 옛 언약은 새 언약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었던 셋과 노아와 같은 사람들의 동일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도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이며, 깊은 헌신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자신을 돌보아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충심으로 순종했다. 언약은 항상 영적인 관계이며, 믿음으로 결정되며, 사랑에 지배받고, 헌신과 순종으로 가시화된다.

우리가 속죄와 화해의 필요성이 어떻게 강조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훨씬 더 분명하게 옛 언약의 영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속죄: 언약의 토대

다음 질문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의 언약 안에서 죄된 인생과 아주 긴밀하게 관계하실 수 있었는가? 거룩한 하나님께서 불순한 피조물과 어떻게 협력하실 수 있는가? 단지 아브라함과 관련해서만 질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타락한 직후에 요청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사41:8;약2:23)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질문은 확실하게 이제 주목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도록 열어놓으신 화해의 길이 있는가?

속죄의 길이 있다. 우리가 옛 언약 백성의 정확한 속죄제사 행습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속죄 제사의 기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야웨께서 부분적인 속죄제사를 처음부터 주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은 제사를 드렸고, 제사 드리는 것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있다(창4:3,4).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에 행한 첫 행위가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다(창8:20). 아브라함은 세겜과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다(창12:7,8).

속죄 제사는 사람의 죄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졌고, 예배드리는 자리에서만 드려졌다. 속죄제사는 죄를 대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 제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의 기능 안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이 사실이 창세기 15장에서 분명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공식적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셨는지를 읽을 수 있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지게 될 것이고, 심지어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아서 셀 수도 없을 것이며,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압도당하여 “주 야웨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라고 아뢰었다. 그 다음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암소, 염소와 어린 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이 동물들이 살육 당하였고 서로 마주보게 놓아졌다(새의 경우는 제외하고). 이렇게 “피의 통로(street of blood)”가 생겨나게 되었다(K. Schilder SchfifoverdenkingenⅡ,97ff).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기 위해서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 제사를 받으실 것인가?

주목할 만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 피의 통로로 지나가셨다는 것이다(17절,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여기에서 언약은 두 당사자가 자원하여 결속으로 들어가는 협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다시 볼 수 있다.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실 수 있다. 이 사실이 골고다에서 아주 분명해졌다. 다시 말해서 언약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단 한 번 희생제사로 세워진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에서 예시된 것이다.

속죄 없는 언약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제단과 속죄 제사를 준비하심으로 보이신다. 그래서 그는 친히 사랑의 언약을 위한 토대를 놓았고 그 계속성을 보증한다.

속죄 제사의 영적인 성격

구약 속죄 제사에서 동물들이 드려졌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이 예식의 외적이고 물리적인 면만을 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모든 종교 의식에는 형식주의의 위험, 즉 마지못해서 형식적으로만 하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항상 이 위험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약은 줄곧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계적으로 드려졌을 때에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있다면, 또 제사가 성령에 의해서 일으켜진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이 제사들은 야웨를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언약 안에서 어떤 것들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산제사로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드려야 한다.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고 설명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신다”(시51:17)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은 황소나 염소 고기에 관심이 없으시고(시50:), 참된 감사로 제사할 것을 요구하신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야웨를 피상적으로 섬겼던 일을 크게 탄식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도다.”(사29:1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의 전통에 강하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약했던 그 당시 유대지도자들의 위선을 벗기셨다(마15:7,8).

하나님의 언약은 외적이고,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협약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야웨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살아있는 관계로서 드러나야 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곳 모두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인 예배니라.”(롬12: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영과 몸과 영혼을 당신께 헌신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전적으로 영적인 관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 제사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할례: 옛 언약의 표징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당신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어떻게 세우셨는지 읽을 수 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이때에 이미 체결된 언약을 확증하셨다. 이 확증식은 반드시 하갈과 이스마엘의 사건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야웨께서 지금 사라의 아들의 출생 시기를 선언하신다.

야웨께서 당신을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소개하시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전능한[El-Shaddai]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래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또한 이스마엘이 출생한 지 13년이 지났다(창17:25). 아브라함과 사라는 더욱 더 늙었고,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훨씬 더 멀어졌다. 그러나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또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요구도 있다. 이것은 늘 서있는 언약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하고 의식적인 교제 안에서 살아야 하고 동시에 그분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었다는 사실이 에녹(창5:23)과 노아(창6:9)에게 선언되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이 요구는 아브라함에게도 요구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동일하다. 이 장에서 부르듯이, 사랑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그 다음 새로운 요소가 따르는데, 즉 언약의 표징으로써 할례제도가 따라온다. 할례는 주위를 잘라낸다는 뜻이며, 이 말은 남자의 생식기관의 표피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례는 이스라엘에서만 아니라 보다 널리 행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만은 이것이 특별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다른 경우 할례는 종종 혼인을 위해 남자를 준비시키는 의식이었고 그래서 할례는 청년들에게 공히 적용되었다. 혹자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민족들 가운데서 공통적이었던 다산의식과 상관있는 행사였을 것이라고 믿는데, 이러한 주장은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경우에, 할례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너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17:10,11) 그러므로 할례는 유아들에게도 집례되었고, 또 자녀들이 출생할 때부터 야웨의 언약 백성에 속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집례되었다. 할례는 감염될 소지가 있는 외과 수술이며 동시에 치료를 위한 항체가 필요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곧 바로 시행할 수 없고, 유아들의 피 공급이 충분히 안정되었을 때인, 팔일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할례는 육체적인 외적인 표징이지만, 훨씬 더 깊고 또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반드시 잘려나가야 하는 것은 죄이며 동시에 반드시 요구된 것은 야웨를 섬기는 새 마음이다. “할례 받지 않는”것은 바르게 기능하지 못한다. 이 사실이 마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해졌다. 야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열국 역시 할례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뜻도 없었다. “이는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렘9:26) 할례 받지 않는 귀는 닫혀 있어 들을 수 없었다(렘6:10; KJV). 할례를 받지 않은 입은 바르게 말할 수 없었다(출6:12,13;KJV). 할례는 분명히 남자의 생식기관에 한 것처럼 마음과 귀와 입술에도 행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불평은 이스라엘이 야웨의 언약백성이며 할례로 언약의 표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자신들 주변에 있는 열방들과 다르지 않았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할례 받은 사람들도 완전히 이방인이었다는 것이다. 표징을 육체에 베푸는 일은 전통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어 원래의 의미와 역할을 쉽게 상실할 수 있다. 물론 할례를 대체시킨 새 언약의 표징인 세례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율법이 언약 백성의 생각과 마음에 자리하는 형태로 베풀어질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다(렘31:33).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원으로서 누구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새 마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그들은 과거의 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에서 “대저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기록했다.

또한 옛 언약 안에서 할례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되었다. 할례를 단지 육신적인 것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또 옛 언약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 것이다.

영원한 언약

창세기 17:7에 있는 한 단어를 좀더 살펴보기 원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영원한”이라는 형용사가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 말은 중요한 단어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자주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편과 선지서에서 그렇다.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시105:10) “야웨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111:5)

같은 단어는 새 언약과도 관련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55:3)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가 우리와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예수를 살리심으로 이루셨다.”(행13:32-34) 옛 언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약속은 새언약 시대의 백성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적용되었다(그들의 자녀들인, 우리도). 히브리서 13장 20, 21절에서 우리는 동일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래서 귀환할 포로들에게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렘32:38-40) 또한 에스겔 16장 60절을 보라.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본질상 영원한 것이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영원한(everlasting)이라는 단어는 보통 “끝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8:13절에서 옛 언약이 “낡아졌고, 또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은 무엇이며 또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설사 언약의 특정한 시기가 사라져야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사랑의 관계로서 언약 그 자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바울은 로마서 8: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뗄 수 있으리요?”라고 하면서 이 사실을 언급했다.

언약이 항상 있듯이, 언약 백성 역시도 항상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뒤에, 당신의 교회에 대해서 똑같은 말로 말씀하셨다.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래서 우리는 “이 교회는 세초부터 세말까지 있을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백성 없이 계실 수 없는 영원한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교회에 대해 고백한다(벨직 신앙고백서 제27항).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위로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언약적인 용어로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은 영원하다.

계속성과 영속성

우리가 창세기 17장의 문맥에서 영원한 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에, 이 단어가 할례와 자녀들과 상관있는 것은 분명하다. 언약은 단 한 사람과 체결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더불어 그와 맺은 것이고, 그 뒤에 오는 세대와도 맺은 것이다. 언약의 표징은 자손의 존속을 위해 사용된 신체의 그 부분에 집례되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다른 세대가 온다. 그리하여 언약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영원한 이라는 단어는 또한 세대를 통해 언약의 연속성과 영속성을 말한다. 이 계속성은 미래 세대의 순종에 달려있지 않고, 신자와 신자 자녀들의 관계로서 언약의 성격과 특징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언약은 끝이 없으며, 시편 105편에서 천(백의 열배, 십 세기, 충분한 기간)이라는 숫자도 세대의 끝없는 연속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당신의 언약을 세우셨을 때에, 언약 자녀들의 수많은 세대들이 이미 그 앞에 지나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뒤 따라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수가 찰 때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모든 시대에 걸쳐 모으실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언약은 참으로 영원하다.

11. 언약과 우리의 구원

야웨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시험의 기간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권징하시며, 그래서 우리가 겸손과 신뢰를 배우도록 하신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사랑의 언약 안에서 그 관계의 일부이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12:7-9에서 말씀한 바와 같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너희가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첫 번째 큰 시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이었다. 이 특별한 시련이 어떤 유익을 얻게 하였는가? 첫째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항상 종노릇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처음에 좋은 시절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중다하게 되어 한 민족이 되었다. 한 가족에서 시작하여 한 나라로 자랐다. 둘째로 애굽에 머무는 동안 시련은 영적인 성숙의 기간으로 의도되었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야웨의 언약의 약속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셋째로 야웨께서 애굽에서 구원하면서 당신을 이스라엘과 열방에게 드러내셨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되기에 이르렀다. 야웨께서 당신을 신실하시고 강한 하나님으로서 계시하셨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백년이라는 기간은 (가나안에 살았던)“아모리 족속의 죄”가 “충만한 데까지”이르러야 했기에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으로 성장해야 했듯이, 부도덕함과 우상 숭배로 가나안 족속이 하나님의 인내를 바닥내고 공의로운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실상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했다. 아모리 족속은 그 땅에서 제거될 것이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했던 자기 백성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이스라엘을 향한)와 그의 공의(애굽과 가나안을 향한)가 이 강력한 구원 즉 애굽에서 탈출을 통해서 분명하게 되었다. 애굽에서 탈출은 하나님의 가장 큰 언약적인 행위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 사실을 성경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영광의 길은 고난과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시련의 기간이 믿음의 강력함과 진정성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되었다. 이 또한 신약의 일관된 교훈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그리고 야고보는 인상 깊은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언약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시련을 당한다.

초강대국 애굽

많은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이 아닌 셈족 지배집단인 힉소스 왕조 재위 동안 애굽에 왔다고 믿는다. 힉소스 제국은 신속하게 세력을 확장시켰고, 또 애굽은 이 기간에 초강대국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아모시스 1세의 통치하에 애굽인들은 힉소스 통치자들에게 항거하여 그들을 쫓아내어, 제18왕조를 세웠다(1580B.C.). 애굽 제국은 이 왕조 통치하에서 나일에서 유프라테스까지 확장되었다. 이스라엘 노예들의 노역으로 요새화된 많은 도성이 세워졌다(출1:11). 애굽의 국수주의와 우월의식이 모세가 다시 무대에 등장했을 때에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런 배경에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를 바로가 거절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위대한 애굽의 신들의 “총아”였던 바로가 잘 알려지지도 않고, 열등한 신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언약의 역사 안에서 야웨께서 종종 열방이 자신의 권세와 능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로 당신의 영광 앞에 서게 하셨다. 이것은 애굽에게도 해당되며, 나중에 가나안,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와 로마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열방의 이목 앞에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세우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어떤 동맹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강력하다. 사람은 제국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모으신다.

신실한 종 모세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을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사역을 통해서 애굽에서 구원을 시작하신다. 신약은 “모세가 모든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다…”(히3:5)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또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실과 겸손의 조화가 그를 야웨의 참된 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에, 모세는 필시 바로를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인도하는데 가장 적합한 후보는 아니었다. 청년으로서 모세는 자기 백성의 곤경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동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거절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자 그 땅에서 도망해 버렸다.

그러는 동안 그는 미디안에서 괜찮은 생활을 이루어나갔다. 혼인도 하고 또 자녀들도 받았다. 자기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다는 현실이 모세의 꿈속에서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야웨께서 호렙산 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라고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또 많은 변명을 했다. 모세는 스스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고(“내가 누구니이까?”)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잊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했다.(“그들이 나에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할 것이라.”) 모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표징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오 야웨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하고…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마지막으로 야웨께서 모세에게 격노하시면서, 그의 부르심을 견고하게 하시고, 그의 형 아론을 돕는 자로 그에게 같이 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모세와 그리스도

모세는 야웨의 신실한 종으로 섬김을 다하기 위해서 야웨에게서 능력을 받았다. 아마도 아브라함 이외에 아무도 모세만큼이나 야웨를 가까이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허락받았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드는 방법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나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출34:29-35).

히브리서 3장 5절은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또한 모세와의 관계에서 야웨께서는 주도면밀하시고 공의로우셨다. 모세는 스스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언젠가 야웨께서 하신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에게 큰 시름의 근원이었다. “그때에 내가 야웨께 간구하기를 주 야웨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 레바논을 보게 하소서 하되 야웨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니라…”(신3:23-26)

요단을 건너가게 해 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야웨께서 거절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을 위한 준엄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길 때 완전하고도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는 신약 시대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중에게 직분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산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과업에 복 주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모세는 자기 과업을 완수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모세는 자기 일에 충실하였으나, 궁극적인 중보자는 아니었다. 히브리서 3:3에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모세는 사환으로서 신실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집을 다스리는 아들로서 신실하셨다. 옛 언약의 중보자였던 모세는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실 새 언약의 중보자”(히9:15)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노라…”

야웨께서 왜 사백 년 뒤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활동하셨는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되돌아 왔을 때에, 그들은 애굽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야웨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노라…”(겔20:7f)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가 죽기 직전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복된 이후에,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야웨만 섬기라”(수24:14)라고 말해야만 했다. 애굽에서 시험은 실제로 신실함과 인내를 일으켰는가?

우리는 모세 당대에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를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파(産婆)들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아들을 구원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더라.…”(출1:17) 여호수아는 또한 나중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웨께 도움을 요청하라”(수24:7)고 말한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야웨께 부르짖었더니 야웨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야웨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노라.”(신26:7,8)

그러나 모세는 또한 그가 부름 받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라며 두려워했다(출3:13).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이 부르짖음이 야웨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올라왔고, 또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러나 이 부르짖음 또한 의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린 것인가? 아마도 지금까지 야웨께 간청했었던 자들은 남은 자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러 오셨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2장 24, 25절에서 이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을 권념하셨더라.” 종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언약 때문에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언약에 신실하시다. 언약 때문이 아니었다면, 구원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이 하신 말씀에 진실하시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에게도 진실하시다. “야웨께서 그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활동이나 가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 진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와 사랑으로 다루신다.

출애굽과 구속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애굽에 많은 심판을 행하셨다. 이 재앙들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그 날에 세상에 임할 심판의 표징들이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을 주목하라. 거기에서 재앙들이 애굽에 방문했던 자들에게 비슷하며, 심지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이 공포되었다. 출애굽기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에로 이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의 종말이다.

야웨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집행하시기 직전 즉 모든 초태생을 죽이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서 속죄제사가 드려져야 했고, 이렇게 하여 야웨께서 준엄하게 심판하시는 날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간과하실 수 있었다.

이것이 그날 밤 야웨께서 제정하셨던 유월절의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은 양 한 마리를 잡아, 도살하여,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집 안에서 그들은 어린양을 먹었다.”(출12:7) 하나님께서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며 심판하시면서, 그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들은 지나쳐가셨다(넘어가셨다). 피는 속죄의 피이다(레위기17:11을 보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일치를 주목해야 한다. 신약은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속죄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말씀한다.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로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특별하게 예수님을 희생이 되신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고전5:7)라고 지칭하였다. 베드로는 우리가 은과 금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9)고 기록했다. 요한 계시록은 여러 차례 주님을 살육 당하신 어린양으로 언급하면서, 또 모든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했다(계5:6ff를 보라).

또한 배신당하신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기념하셨는데 이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마지막 유월절을 기념하신 뒤에 주님께서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26:28)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2장 역본에는 주님께서 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시고(20절), 옛 언약의 유월절에서 드러난 속죄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 흘림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성격상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는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다시 성경이 하나임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 출애굽 모티브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위대한 구원사역으로써 성경에 나타난다. 이 절기에 의해서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서 당신을 위한 이름을 지으셨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말한다. 출애굽에 대해 만든 몇 가지 관련 어구를 주목하자.

여호수아는 그의 최종적인 행위 가운데 하나로서 세겜 언약을 새롭게 할 때에, 다음과 같이 야웨의 이름을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킨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야웨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로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느니라.”(수24:6,7)

사사기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애굽에서 저들을 이끌어내신”(삿2:12) 야웨를 저버렸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야웨께 부르짖을 때까지 다시금 노예 민족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번 더 그들을 건져주셨다.

사무엘은 고별설교에서 야웨께서 애굽 탈출과 홍해를 건넌 후에 행하신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야웨시니라.”(삼상12:6) 솔로몬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 역시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우리의 조상들과 세우신 야웨의 언약.”(왕상8:21)이라고 언급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개혁하도록 호소할 책무를 가지고 있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갈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경고할 책무도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출애굽에 대해서 수많은 관련 어구를 사용하였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구원하셔서 자유와 풍성한 복을 허락하신 야웨를 어떻게 저버렸는가? 이스라엘의 배도는 야웨께서 주신 땅에서 쫓겨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스라엘은 애굽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건져내신 야웨가 자신들을 포로 된 땅에서 열조의 땅으로 귀환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에스겔 20장에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야웨께서 어떻게 다시 자기 백성을 회복시켜 그들이 자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는지를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야웨인줄 알리라. 나 주 야웨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20:44)

몇몇 시편에서 이스라엘이 야웨의 경이로운 구원 사역에 대해서 야웨를 찬양하라고 가르쳤는데, 여기에서 위대한 출애굽과 관련된 수많은 어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의 심장부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핵심이다. 몇몇 시편은 예를 들면 시편105과 106은 출애굽의 전 역사를 다시 해설하고, 한편으로 다른 시편들에서 출애굽과 관련된 수많은 어구들이 나온다. 확실히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던 사건이며 동시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신약에서 출애굽

신약에서 우리는 다시 출애굽 모티브를 발견한다. 이미 신약 시작부터 우리는 마리아가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리로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참한 자들을 높이셨도다.”(눅1:50,52)라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이 노래는 옛 언약 시대 출애굽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권념하사 그들을 압제자에게서 건져내셨다.

사가랴는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었도다.”(눅1:69,72,74) 구원(출애굽기)은 새로운 섬김으로(레위기) 이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출애굽을 정교한 어구를 만들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도다.” 여기에서 바다는 분명히 홍해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바울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여행하는 동안 바알브올에서 행했던 것처럼 부도덕과 우상숭배로 빠지지 말라고 신약 교회에 경고한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출애굽에서) 어떻게 해서 신약교회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기록한다. 그들 모두가 구름과 빛 아래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아래 있었다. 그들 모두 바다를 통과했다. 이것은 모세에게 하나의 세례로 제시되었다. 그들 모두가 동일한 영적인 양식을 먹고 또 동일한 영적인 바위에서 물을 마셨다. 이것은 분명히 주의 만찬을 가리키는 지시어이다.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셨다.

옛 출애굽의 주 성분들은 기독론적인 문맥 안에서 제시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복을 공유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옛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와의 관련 여부가 신약에서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같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드러난, 유일한 사랑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홍해) 바다와 세례 사이에 연관성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 3, 4절에서 “무릇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홍해를 통과한 일은 세례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 사도는 구약 백성에서 신약 백성까지 한 흐름에 놓고 있다. 세례는 우리가 이전에 죄에게 종살이하는 생활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벨직 신앙고백서 제35항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홍해이며, 우리가 이 홍해를 통과하여 독재자인 바로, 즉 마귀를 피하여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탁월한 증거이다.

신약의 여러 본문에서 더욱 더 일반적인 구원(구속)의 의미를 말한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13,14절을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신약 신자들인 우리 역시 우리의 출애굽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이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아래에서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광야에서 행하신 기적

만일 출애굽이 구원의 큰 사역이었다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생존한 일 또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사랑으로 종에서 건져내신 백성들을 책임지셨다.

야웨께서 광야에서 모든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셨고, 만나로 일용할 양식을 주셨다. 야웨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어떻게 돌봄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키셨다.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였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야웨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5,6)

하나님의 이름과 언약 때문에, 야웨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수많은 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돌보셨다.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벌하셨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홍해를 건넌 세대 가운데 한 사람도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다. 첩자들이 가나안에서 되돌아 온 후에 백성들이 반역하자, 야웨께서 이 심판을 선언하셨다(민14: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또 가나안 땅을 양도하시는 이 모든 것이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역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광야 기적은 야웨께서 친히 하신 언약 때문에 자기 백성을 가장 힘든 상황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보양하시며 또한 보호하실 것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관계인 사랑의 언약 안에 함축되어 있었다.

광야에서 그리스도

신약에서 광야 기적이라는 요소는 부족하지 않다. 잘 알고 있는 구약 선지자 엘리야는(말4:5) 그리스도의 전령으로서 온 사람이었다. 그때 아합은 유다에 가뭄을 요청한 일 때문에(왕상 17장) 엘리야를 죽이려 했는데 그 때 광야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하나님께 보호받았다. 그리스도는 오기로 되어있었던 엘리야로서 세례요한을 자신과 동일시하였는데, 세례 요한의 특징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사40장; 눅3장). 이스라엘 가운데 참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한 종이 자신들의 과업을 감당하도록 준비되고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 광야는 다시금 피난처와 위로의 장소가 되었다.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뒤에 성령에 의해서 광야로 내몰리셨다. 광야에서 이렇게 체류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막1:12,13). 그리스도께서 사십일 동안 광야에 계셨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있었던 한 해는 하루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십일 동안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부양도 받지 아니하셨다.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허기지고, 목마르고, 허약해지셨다(마4:1). 40일 간 광야에서 머무시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받았던 유익들을 즐기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반역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신실하셨다. [사십일 동안의 금식으로] 허약해 지셨음에도 그분은 마귀의 강력한 유혹에 저항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우리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행동을 본받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백성들이 시련과 유혹의 시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따를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항상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12:14을 언급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는다.” 여자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위해 준비하신 피난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끝 날까지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전하실 것을 보여준다. 신약 교회 역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때문에 생존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12.

ⅩⅢ . 새 언약의 약속

성경은 포로시대까지 새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 야웨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야웨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렘31:31,32)고 기록하였다.

예레미야 31장 31절은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약성경의 유일한 구절이다. 여기에서부터 이 용어가 신약 성경에 이른다.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새 언약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는가? 이전에 있었던 것과 새 언약이 어떻게 다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비록 새 언약이라는 용어가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안 그 자체는 다른 여러 곳에서 분명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한다. 이사야 55장은 하나님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 영원한 언약은 우리가 읽은 것처럼 “다윗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단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즉 외국인들과 심지어 전에 성전에 발도 들일 수 없었던 내시에게까지도 확대될 것이다. “이들을 내가 거룩한 산에 데려갈 것이라… 왜냐하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사56:4-8)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정보이다.

이사야는 “야웨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자녀의 입에서와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야웨의 말씀이니라.”(59:21)라고 기록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표현과 매우 가깝다.

게다가 선지자 에스겔은 한 목자 즉 “나의 종 다윗”(즉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드러나게 될 “평화의 언약”이라는 열정적인 언어로 말한다. 그는 “나 야웨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그들이 나 야웨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겔34:24,30)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다른 예언들 예를 들면 에스겔 37장과 요엘 2장도 생각할 수 있다. 새 언약은 포로 시대에 전면에 부각되었다. 새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

시내 산 언약과 비교된 “새로움”

“새 언약”은 시내 산 혹은 호렙 산에서 맺은 언약과 비교하여 특히 새롭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와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니라.”(렘31:32)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당신의 언약을 율법을 주심으로 분명하게 하실 때에, 모세는 “우리 하나님 야웨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살아있는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5:2,3)고 말한다. 열조는 바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다(신4:31,37).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있는 관계로써 유일하고 하나인 사랑의 언약만이 있으나, 이 언약은 다양한 시대(dispensations)를 거쳐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율법이 돌 판에 기록되지 않고, 오히려 구전을 통해서 내려오던 때가 있었다. 이 때는 시내 산 이전 시대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야웨께서 이 언약을 맺으셨던 것은 우리 조상들과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는 여기에서 수많은 법령들과 의식들이 기록된 성문화된 율법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모든 의식적인 법규들을 알지 못했다.

시내 산 이전에 하나님의 율법은 본질적으로 대개 구전형태였다. 그러나 율법이 성문화되어 확대되었을 때에(호렙 산에서), 바울이 기록한 것과 같이, 범죄가 넘쳤다(롬5:20). 하나님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따름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율법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저주가 된다! 이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기”(롬7:12)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된 본성이 남아 있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하기에 율법은 우리를 정죄한다. 계명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우리의 죄성 역시 점점 더 분명해진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됨이라.”(롬3:20)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 이 사실이 다르게 될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 판에 기록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할 것이요…그들이 큰 자에서부터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앎이라.”(렘31:33,34)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야웨께서 모세율법의 의식법들을 성취시키시고 또 그리스도의 피와 영을 통해서 정결케 하고 동시에 갱신에 초점을 맞춘 시대가 이르게 하심으로 앞으로 큰 걸음을 내딛게 하실 것이다. 언약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이 완전하게 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고 기록한 것이다. 옛 언약은 모세와 관련되었으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아담에서 다윗에 이르기까지 전 구원의 역사가 충분하고 영속적인 화해를 가져 올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언약의 핵심이시며, 그의 강림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게 되었다. 율법의 요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주어졌고 호렙 산에서 분명하게 선포되었는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기록해놓았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모세율법이 쇠퇴함

히브리서 8장 6절은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월등하고, 더 좋은 약속들 위에 제정되었다”고 진술한다. 옛 언약은 언약이 약속한 대로 일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언약이 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서 허물을 발견하셨기”(히8:8)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옛 언약 안에서 계속해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지 못했고(9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갱신에 초점을 맞춘 개역(new version)을 단행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로 옛 언약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 언약을 ‘새’언약이라 부르심으로, 그가 먼저 것은 옛 것이 되게 하신 것이라. 이제 낡아지고 오래 된 것은 사라져 가느니라.”(히8:13) 쇠퇴하다(obsolete)는 단어는 어떤 것이 완전히 그 가치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훨씬 더 나은 것과 더 효력이 있는 것이 만들어졌거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효과 있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교체된다.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말은 전에 전혀 없었던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은 전에 있었던 것을 갱신한다는 뜻이다. 개선되었다는 뜻에서 새롭다는 말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훨씬 더 나으나, 옛 언약을 폐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목적과 잠재력을 훨씬 더 잘 실현할 수 있도록 옛 언약 그 자체를 변화시킨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5항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율법의 의식과 예표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종결되었고, 또 모든 그림자가 성취되어서, 이들의 용도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폐지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실체는 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옛 언약은 지나갔으나,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런 까닭에 25항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동시에 우리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취한 증거들을 계속적으로 사용해서 그것으로 복음의 교리를 확증하며, 우리의 모든 생활이 정직하게 다스림을 받도록 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합니다.” 성경이 한 권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이 하나임을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옛 언약의 규정들과 의식들에서 복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배울 수 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고 옛 언약을 갱신하셔서, 새 언약의 실제 안에 우리를 두시고, 더 큰 축복과 위로를 주신다.

새 언약의 특징들

상술한 것을 마음에 숙지하면서, 우리는 특히 시내 산에서 체결된 언약과 비교되는 새 언약의 주요한 특징들을 열거할 수 있다.

첫째로 새 언약은 메시아 즉 야웨의 신실한 종에 의해서 성취된 영구적인 화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사야는 이 사실에 대해서 53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나음을 입었도다.”(5절) 옛 언약에서는 매일 드리는 수많은 속죄 제사들로 화목하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희생 제사에 토대를 두었다(사53:10; 히10:10,12). 모세의 율법과 연관된 수많은 의식들과 행습들이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어졌는데, 이는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 성령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졌다. 그 결과로 그들 모두는 진실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전적으로 그분을 섬기게 되었다. (16장: 언약과 성령도 보라.) 예레미야31장 33절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사야는 동일한 맥락에서 “너희 모든 자녀들은 야웨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54:13). 우리는 요엘2장 29절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 그리고 에스겔36:26,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마음으로부터 야웨를 섬긴다는 것은 분명 호렙에서 맺은 언약의 요구이기도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인 야웨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신6:4-6) 야웨께서는 결코 입에 발린 섬김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야웨께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순종을 원하신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더욱 깊은 실재가 되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

셋째로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은 약속된 땅으로 포로생활에서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의미했다. 결국 남은 자들이 귀환할 것이다. 남은 자 사상은 언약의 역사에서 중요하다. 불순종의 시대에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길을 잃었다. 개악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남은 자를 보전하시는데 이로부터 그분은 다시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 10장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남은 자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은 자에 대한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소멸시키지 아니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고향으로 부르실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라.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사43:5,6) 이사야는 시온의 영광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는 없을 것이며 내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60:18) 에스겔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에 대해서 길게 말하였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서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라.”(겔37:25,26)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은 메시아의 강림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넷째로 새 언약은 종말론적인 주제(thrust)를 가지고 있다. 메시아에 대한 이 약속들은 우리를 궁극적으로 이생 너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도록 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새 언약제도(arrangement)가 잠정적이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인, 하늘에 있는 거처를 사모한다.(히11:16) 귀환과 회복의 약속이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야웨께서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사60:19과 계22:1-6을 비교하라)

언약, 선교와 복음전도

다섯째 새 언약 사상은 구약성경에서처럼 선교와 복음전도가 비교적 덜 중요하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때는 구원이 거의 이스라엘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이 상황 하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될 것이라는 뜻에서 옛 언약보다 훨씬 더 위대할 것이다. 아브라함 이전의 옛 시대에서처럼, 그 언약은 범위가 보편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너무 커서 한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 제일 잘 알려진 본문은 이사야 42장 6절일 것이다. “나 야웨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또한 눅2:31,32을 보라.) 야웨 하나님께서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고 선포하셨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이 열방을 소성하게 될 것이다.(계22:2) 새 언약은 보편적인 범위를 가지고 있다.

성령을 부으심과 성령님께서 하나님 백성 안에 거주하심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예언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말하게 해준다. 특별하게 요엘은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다.”(2:28) 그 결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다.

오순절로 시작되는 기간은 심판의 날로 이끌지만(요엘2:31; ‘야웨의 크고 두려운 날’), 이 또한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를 모은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야웨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32) 예언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때이며, 이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된다. 그러므로 또한 최종적인 증거의 시기가 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막16:15) 새 언약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서 재림하시기 전에 역사의 최종적인 시기가 될 것이다. 이 때는 교회를 위해 결정적인 시기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12,17,21)라는 절박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와 사마리아로 교회의 확장과 또 고대 이스라엘 지역을 넘는 선교여행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되어야 한다.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오늘날도 여전히 존속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마28:18,19) 온 세상에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선포하라는 것은 [위임]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임재 약속은 이 명령을 가능하게 만든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교회는 임마누엘의 약속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이제 온 땅에 전파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배타주의는 없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언약 안에서 오만한 배타주의를 강력하게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기생인 라합, 모압 여인인 룻을 부르셨고, 또 이들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삼아서, 우리 주님의 족보에서 자리를 얻게 하셨다. 참으로 이 여인들은 규칙대로라면 예외였다. 그러나 또한 새 시대의 본보기였다.

다른 본보기들도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이라는 자신의 고향에서 그들을 언급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나아만 뿐이니라.”(눅4:25-27)

이제 새 언약에서, 온 세상이 우리 공동체의 시작을 듣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랑의 언약에 대한 강조점은 어떤 고립주의나 혹은 배타주의 형태로 유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내 일터는 온 세상이다”(마13:38)라고 당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내 일터 곧 밭은 우리 집 대문에서 시작한다.

사도 바울은 선교 사역을 위해서 교회들의 기도를 요청할 때에, 사도는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든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해야 할 교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또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3-6)

새 언약의 특성과 범위 때문에, 새 언약은 선교와 전도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해외와 고국에 선포되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새 언약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시대이다.

a) 칭의(justification): 죄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영단 번에 속량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단과 죽음에서 건짐 받았다.

b) 성화(sanctification): 성령이 교회 위에 부어지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

c) 기대(anticipation): 교회는 주 예수의 재림을 바라면서 산다.

d) 참여(participation): 교회는 부름을 받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ⅩⅣ. 새 언약이 세워졌다

새 언약이 언제 효력을 발하게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사람은 율법의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부터 야웨이신 주님께서 육신으로 출현하실 때까지라고 말할지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옛 언약의 시작을 에덴동산에서 타락 후에 두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시내 산에서 제정된 예식들과 그림자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호한다.

새 언약의 시작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또 그분이 죽으시기 직전, 마지막 유월절에서 선포되고 제정되었다.

유월절 동안

우리는 출애굽하는 날 밤에 처음 기념되었던 유월절은 탁월한 언약적인 축제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때 어린 양이 도살당하고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우리는 이미 세례 요한이 어떤 식으로 야웨이신 예수님을 진정한 유월절 희생 제물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동일시하였는지를 주목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그의 마지막 유월절 동안 확인해주셨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6-28) 누가복음 22장 역본에서 우리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20절)는 표현을 발견한다. 누가와 막역한 사이였던 사도 바울은 사랑받은 의사의 역본에 따라, “이 잔은 새 언약이니…”(고전11:25)라고 썼다.

언약은 속죄와 화해 제사를 통해서만 유효하다. 레위기 17장 11절에서 이 언약의 원리가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언급되었다. 희생 제사와 피 뿌림이 없이 화해가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속죄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을 때에, 이 언약이 단번에 갱신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참 어린 양이시다.

“다 이루었다”

새 언약은 효력이 발생하도록 요구된 모든 것이 완전하게 성취될 때까지는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모든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감당하셔야만 했다는 뜻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은 지옥 같은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하나님의 공의의 단 한 부분도 성취되지 않은 채 남겨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 시간을 이겨내신 후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외치신 후에, “내가 목마르다”(요19:28)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실 것을 요구하셨다.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이 후에, 모든 것이 이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또 성경이 응하게 하려하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하고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마실 것을 필요로 하셨고, 이리하여 사력을 다 한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소리치셨다. 속죄 사역이 완료되었고, 희생제사가 드려졌고, 그리하여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행위에 자신을 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때가 새 언약이 영원한 실재가 되는 순간이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다

예수님이 죽으시자마자,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성전 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마27:51)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마지막 희생 제물이었고 새 언약이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막 휘장은 “지성소”를 성소와 갈라놓은 것이다. 이 뒤에 법궤가 있었고, 이곳에서 일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렸다. 이 휘장은 비록 하나님이 가까이 계셨지만,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표시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위대한 희생 제사가 드려졌을 때에, 이 휘장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새 언약으로 매워졌기 때문이다.

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데 주목하라. 이렇게 찢어진 것은 사람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찢어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가담되었고,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 이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그가 선언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유일한 희생 제사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간다.

이 때가 새 언약이 이스라엘의 성전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던 순간이다.

새 언약의 평화

우리는 언약이 조화와 평화의 상황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앞에서 주목했다. 그리스도께서 배신당하시던 날 밤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고 또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처신했던 태도를 책망하였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들의 두려움과 배신 때문에 벌을 내리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오셔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 모두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평안할 것을 그들에게 확신을 주셨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제자들과의 모임에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21절)하고 말씀하신 것을 두 번이나 읽을 수 있다. 이 두 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키고자 하시는 일반적인 인사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내지 아니하시고 또 제자들에 대한 그들의 죄를 품고 계시지 않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다음 그러했기에 성경은 20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신 것은 신분확인을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진짜 예수님이 맞는지 알고자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을 때에 크게 기뻐하였더라.”라고 말한다. 동시에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는 것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속죄 제사의 표징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량하셨다.

우리는 21절에서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인사는 앞에서 했던 인사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인사였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또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상기하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웨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 인사는 바로 새 언약의 핵심이다.

모세와 선지자로 시작하여

주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애매함에 매여 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이러한 혼동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눅24:13-35).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이 현저했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0,21절)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부분들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 몇 일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27절은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시니라”고 말한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은 모든 구약성경이다. 그리스도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셔서 선지서를 통해서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자기 사역을 설명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예언되고 또 예표된 것처럼, 단지 언약의 빛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날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분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44절)고 말씀하셨다. 또 누가는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절)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비추어서 구약 성경을 읽기를 배웠고, 또 그 안에서 옛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통일성을 견고하게 하셨고 그의 사역이 모든 세대를 통해서 주어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셨다. 이것은 옛 언약에 비추어야만 새 언약의 더 위대한 영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ⅩⅤ.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이라는 용어가 신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그래서 언약이라는 개념은 신약 교회를 위해서 실제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언약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묶어놓았던 물리적인 질서(arrangement)로 보고 있으나 이제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언약은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언약이 여전히 기능을 한다할지라도, 최소한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혹자는 언약이 신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용된] 횟수와 백분율을 인용할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열거한다. 옛 언약 하에서, 누구든지 그 언약 안에서 태어나지만(born), 또 그러하기에 즉각적으로 옛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받았다.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듣는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부가 되기 위해서, 누구든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reborn) 한다. 누구든지 오직 중생해야만 그 표징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이제 영적인 문제이다. 이런 식의 추론대로라면 유아 세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장에서 유아 세례 문제에 대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이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생활에서 신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적용하고자 할 때에 여전히 언약적인 용어로 말할 수 있는가?

새 언약: 약속이 성취되었다

신약 안에서 언약이라는 개념이 그 시작부터 나와 있는데, 보족어나 혹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필수적인 계시로써 그 시작부터 나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마태복음 1장을 들여다 볼 때에,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다윗을 경유해서 요셉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체결한 언약적인 약속의 성취로 마태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족보가 성경에 나타날 때마다, 족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언약 세대들의 계보 안에서 일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성경적인 역사관은 우리가 끝없고 절망적인 순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계보에 따라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은 항상 전진하시고, 모든 세대가 그와 함께 전진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고 그분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앞으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마태는 자기가 기록한 족보로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며, 세상 역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언약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예언되었고, 또 그러하기에 예상될 수 있었다. 마태는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술할 때에,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라. 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2) 마태가 어떤 중요한 일이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발생했다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신약은 분명히 구약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언약 역사에는 연속성과 점진성이 있다.

누가복음 3장에서 또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족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길이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을 다루는 이 특수한 언약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마태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며, 또 그러하기에 이스라엘의 부조(父祖) 아브라함으로 시작한다. 누가의 목적은 훨씬 더 넓고 깊다. 로마의 집정관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쓰면서, 누가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을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연결지어 해설한다. 하나님의 언약 역사는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생성되기 전에 시작하였다. 이 사실이 예수님이 세상과 온 인류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서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 역대기서에서 그 출발점 또한 다윗으로 시작하지 않고, 아담으로 시작하고 있다(대상1:1)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과 그들에게 부과된 요구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아담)과 맺으셨던 동일한 언약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약의 계속성을 주목한다. 족보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다윗과 이스라엘을 경유해서,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구속역사의 흐름을 보여준다! 신약은 [구약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대를 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통일성이 있다. 신약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의 계보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작하는 첫 장에서 이미 선포하고 있다.

구약의 관련구절들

나는 앞에서 사가랴의 노래를 언급했는데, 또 사가랴는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나니”(눅1:72)하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님의 탄생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제시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끊임없이 구약을 인용하는데, 왜냐하면 주 예수님의 사역이 이 빛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알리실 때에, 복음은 구약 안에 계시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당신 아들의 피 안에서 확증하셨을 때에, 복음은 신약 안에서 연속성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3)고 기록한다.

사도들은 구약을 언급하지 않고서 설교할 수 없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기쁜 소식 즉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인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심을 그들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선포하노라.”(행13:32) 같은 장에서 구약성경의 관련구절들이 있다. 우리 구원의 복음은 옛 언약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에게 주셨던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가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누가복음 24장에서 이 본문을 주목했었다. 여기에서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전 구약성경)이 어떻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영광을 가리키는지를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구약은 우리에게 언약의 약속들을 알려주는데 비해서, 신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약속들의 성취를 알려준다. 초대 교회에 이 모두가 이미 인정되었고 동시에 받아들여졌다. 어거스틴은 “구약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다(Vetus testamentum in novo patet, novum in vetere latet).”고 했다.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미 신약에서 전부 성취되었다고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만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또한 새 땅에 편만할 평화와 조화에 대해서 예언하는 이사야 11:6ff에 주어진 약속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구원의 길목에서 수많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에 관한 약속들은 여전히 그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다소의 문제

우리가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에 약속과 성취라는 견지에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정도의 차이(less and more)”라는 견지에서 말할 수 있다. 옛 언약 하에서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풍성하게 축복받았던데 비해서, 새 언약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우에 훨씬 더 풍성하게 축복받았다.

이 사실을 확증하는 성경의 여러 본문들이 있다. 고린도후서 3장 7-18절을 생각해보면, 여기에서 사도가 새 언약의 영광과 옛 언약의 영광을 비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약의 사역자들”로서 자신과 자신의 동료 사역자들을 적합한 자로 만드셨다고 설명함으로(3:6) 이 주제를 소개한다. 무엇이 새 언약인가? 새 언약은 의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다. 이 말은 예레미야 31장과 일치하게 새 언약은 주된 특징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새긴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중생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마음으로 섬긴다.

이것은 또한 옛 언약에 속한 요구이지 않았는가? 그렇다. 이 역시 구약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사람의 죄성 때문에 성취될 수 없었다.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의도된 율법이 단지 죽음과 정죄만을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생명이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실을 유대주의자들(바울이 자주 유대주의자들에 대해서 다루어야 했다)의 유익을 위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죽이는 의문”에 대해서 기록한다.(고후3:6) 그러나 성령은 생명을 주신다고 사도는 덧붙인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마음에 기록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참으로 전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이제 활동하지 아니하셨는가? 분명히 말해서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은 활동하셨다. 우리는 이 또한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완전하게 적용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백성들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새 언약에서 이다.

바울이 마치 구약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옛 언약을 폄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사도는 옛 언약의 영광에 대해서도 기록하는데, 이 영광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췸을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졌다. 하나님께서 그때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그러했기에 그분은 또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이제 비교할 시점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만일 사람을 정죄했고 또 사라져야 했던 이 옛 언약이 그와 같은 영광을 가졌다면, 새 언약의 영광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새 언약의 영광은 옛 언약의 영광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영광이 옛 언약의 성취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이해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랬다면 그들 또한 구약을 훨씬 더 분명하게 이해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야 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었다(고후3:15). 구약의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보였다.

옛 언약과 새 언약: 그림자에서 실체로

히브리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고린도후서 3장과 유사한 방식으로 비교한다. 이것은 옛 언약이 유익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옛 언약도 그 목적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레위 제사제도를 통해서 죄에 대한 속죄가 치러졌다(히5:1-4). 그러나 옛 언약의 속죄 제사는 지속적인 화해를 가져오지 못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우리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일 뿐이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즉 그 자체는 실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것 혹은 어떤 이가 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옛 언약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표징이다. 그러나 옛 언약은 참된 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참된 것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그렇게 의도해서가 아니었다. 즉, 참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월등한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이와 같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곤경을 이해할 수 있으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히4:4-16) 이 대제사장은 나이가 들거나 죽어서 없어지는 자들처럼, 일시적으로 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시110) 야웨는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이라고 맹세하셨고, 또 이 사실은 그를 “더 나은 언약의 보증”(히7:22)으로 만든다. 다른 제사장들은 동물의 피를 드렸으나, 그리스도는 영단번의 희생제사로 자신의 피를 드리셨다.(히9:28;10:1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이다.”(히9:15) 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산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로마서 8장 34절을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생명에로 살아나셨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는 자시다.”라고 확신한다.

옛 언약은 잠정적인 역할만 했고, 결정적인 돌파구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은 소멸되었다. 옛 언약은 좋은 것이지만 새 언약은 훨씬 더 좋다. 우리가 이제 훨씬 더 나은 언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해야 할 더 큰 이유를 가지고 있다. 새 언약의 경고와 벌칙은 옛 언약보다 훨씬 더 준엄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옛 언약 하에서 형벌하셨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새 언약 하에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 담긴 여러 권면들은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피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만 한다. 우리는 에서와 같이 언약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히12:16). 이제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2:3)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라.”(히12:29)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특히 히브리서 10장 28절과 29절의 권면을 주목하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단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만일 옛 언약이 가벼이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면, 새 언약은 심지어 훨씬 더 준엄한 문제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림자 아래에서 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밝은 빛 안에서 살고 있다. 은혜를 경멸하는 곳에,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을 리 만무하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령의 대한 죄의 준엄함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마12:32;히6:4-6;요일5:16).

ⅩⅥ . 언약과 성령

앞 장에서 나는 성령께서 구약 시대에도 활동하셨다는 점을 언급했다. 성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구약에서도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분,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부터 함께 일해 오셨다.

가끔씩 오순절 이전까지는 성령님께서 뒤로 물러나 계셨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 주장이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그러나 성령은 시간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의 경륜에 가담하셨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갑자기 무대에 등장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일해 오셨던 사역을 계속 진행하신 것이다. 본 장에서 우리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또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이 특별한 사역을 좀 더 가까이에 다가가서 다루고자 한다.

성령과 창조

성령은 창조의 사역에 가담하셨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성령께서는 아직까지도 황량한 땅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한 거처로 만들고 계신다.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운행하시더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한다. “모세의 노래”(신 32:11)장에서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어린 독수리 위에 “운행하는” 어미 독수리에 사용되었다. 만일 새끼 독수리가 아직 날지 못하면, 어미 독수리가 급강하해서 강한 날개로 새끼를 낚아 채 온다. 이렇게 운행한다는 것은 강렬한 경계 즉 돌봄과 반응의 관계를 가리킨다. 우리는 동일한 돌봄을 사랑의 언약 안에서 볼 수 있다.

성령께서 이 세상의 창조에 가담하셨듯이, 성령께서는 또한 창조의 보존과 유지에도 가담하신다. 시편 104편 30절,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고, 성령께서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임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 문맥에서 보여준다. 땅의 표면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유지되도록 다시 곡물들이 자라게 하실 때인 봄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령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없이는 자연이 견디어낼 수 없다. 물론 성령의 이 능력은 타락한 사람의 중생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출생과 삶을 주시는 성령께서 또한 중생과 새로운 삶을 주신다.

옛 언약은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 없이는 아무 작용을 할 수 없는데 이것은 새 언약보다 더 그렇다. 그러므로 사랑은 성령님께서 보존하시는 돌봄 안에서 드러난다.

성령과 직임의 사역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봉사할 수 있도록 무장시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사들을 부여하신 일은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출애굽기 31장에서 우리는 성막, 법궤와 모든 도구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지명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한 가운데서 거하시게 되는 것은 성막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성막이나 법궤나 그 안에 있는 물품들은 신적인 특별한 지시에 따라 지어야만 했다. 이 중요한 계획에는 숙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 사역을 위해서 우리의 아들 브살렐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기술로써…”(출31:3)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위한 거처를 준비하고, 언약의 법궤를 만드는 중요한 사역에서,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필요로 했다. 천상에 있는 원형(scheme)에서 통찰력을 받아야 했는데 왜냐하면 성막과 성막의 품목 일람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히9:23)이기 때문이다.

칠십인 장로들

민수기 11장에서는 지도자와 직분자로서 모세를 도울 70인의 장로를 지명한 일에 대해서 읽을 수 있다. 야웨는 이 사람들이 성막에 나와야 할 사람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17절에서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라.”하고 말씀한다. 성령님께서 칠십인 장로들에게 임하자 이들도 예언했다(25절).

이들 장로들 가운데 두 사람이 아직 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리고 성막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예언을 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모세에게 달려가 이들이 예언하는 것을 중단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야웨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라고 대답했다. 모세의 바람이 오순절에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예언이라는 이 표징은 아마도 여기에서 무아지경에서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임직에서 칠십 인이 신임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며, 오순절과 마찬가지로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표적들은 구속역사에서 새 국면의 시작 역할을 한다. 민수기는 참으로 칠십 인 장로들이 더 이상 예언하지 않았다(11:25)고 덧붙이고 있다.

특별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이 요인은 구약과 신약에서 수많은 직분자들의 경우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바로는 요셉에 대해서 “우리가 이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41:38)라고 증언했다. 바로는 성령을 가리켜 말하지 않았는데, 바로는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는 신적인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감지할 수 있었다. 성령의 임재는 특별하게 여호수아, 기드온, 입다, 삼손, 사울, 다윗, 엘리야, 엘리사 또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와 사역에서 언급되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에서 역할을 하셨다.

아무도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없이는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무장시켜 봉사하게 하시며, 신약과 마찬가지로 구약에도 그렇게 하셨다.

성령과 하나님의 뜻을 행함

성령님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신약에서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회개와 믿음의 갱신 시대에 진실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와 관련된 자신의 범죄를 야웨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0-12)라고 탄원했다. 마음과 의지의 갱신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들이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래로(삼상16:13) 성령의 능력 하에서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만일 성령을 거두어 가셨다면, 다윗은 자기 이전의 사울과 마찬가지로 그의 왕의 직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직분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성령님을 의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소서.”(시143:10)라는 언약의 근본적인 원리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효했다.

성령의 부어주심의 약속

그러나 구약은 또한 성령의 사역이 훨씬 더 분명하게 되고 동시에 영광스럽게 될 시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령은 “부어지실 것”이며, 이 말은 성령께서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에서 훨씬 더 풍성하게 임재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이 점에 대해서 경이로운 전망을 주셨다. 즉 성령께서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도 풍성하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게 될 시기가 온다고 말이다.

요엘의 예언에서 우리는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2:28,29)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이 약속은 성령을 부어주셨던(행2:15) 오순절에 그 성취가 시작되는 것을 본다. “시작(initial)”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이유는 요엘의 예언에는 국면들이 있고 어떤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때까지 성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고 해서 성령께서 실제로 구약시대에 활동하시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이 오순절 이전에는 거의 하신 일이 없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한다면 잘못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즉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 많은 예를 드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느헤미야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고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언약의 갱신에 대해 알게 된다. 여기 3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 해 동안[광야에서] 당신께서 그들에 대하여 인내하셨도다. 당신께서 당신의 영으로 당신의 선지자를 통해 저들을 권면하셨도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한 성령의 임재와 사역이라는 견지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영을 반역하였고 주의 거룩한 영을 괴롭혔으니, 그러므로 주께서 돌이켜 그들의 원수가 되셔서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셨도다.”(사63:10) 이스라엘의 죄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똑같은 경고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해 오셨다. 학개 선지자는 유다의 치리자 스룹바벨을 격려하고,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을 짓도록 하면서 “전능하신 야웨께서 선포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2:4,5)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록 성령께서 옛 언약 하에서 참으로 활동하셨을지라도, 거리감 또한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사셨으나 당신의 백성들과 떨어져 계셨다. 이 사실은 성령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옛 언약 하에서 성령이 새 언약 하에서 부어지신 것과 같이 아직 부어지지 않았다. 부어지심이라는 말은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이전보다 더 충만하고 풍성하게 임재하실 것이라는 주장이다. 부어지심이란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은 단지 메시아를 통해서만 올 수 있었는데, 메시아 안에서 성령은 충만하게 거하셨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바와 같이, “내가 보매,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요1:32) 비슷하게 오순절에 성령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이전보다 더 친밀하게 거하시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 성령의 기름 부음에 아무도 배제당하지 않는다.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당신의 백성 위에 부어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성령의 사역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이 훨씬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성령은 중생케 하는 사역에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신다. 나는 나중에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한 장(제20장 언약과 중생)을 할애할 것이다. 본 장에서 나는 특별히 옛 언약 하에서 성령의 사역에 주목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성령은 독단적으로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떨어져서 일하지도 아니하신다. 사실상 그분은 하나님의 단 하나의 사역을 완수하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성령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요, 또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을 보내어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동시에 우리 주님은 “…만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내가 그를[성령] 너희에게 보내리라”(요16:7)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니케아 신조)고 고백한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성령께서 독단적으로 전혀 새로운 어떤 일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나에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그리고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요16:14)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심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그렇게 하실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셔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아버지에게서 오신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중생은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로서 아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거룩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언약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단지 세 위격 가운데 한 위격과 결속하는 것이 아니다.

ⅩⅦ. 언약과 교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항상 인정되지 않는 사실은 신약이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용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 언약 백성들에게 사실이었던 모든 것이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이 사실은 언약의 약속과 의무 둘 다에 적용된다. 사실상 신약 교회는 더 큰 의무 하에 있는데, 그 이유는 신약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훨씬 더 큰 풍성함과 부유함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복음서와 서신서들 안의 적절한 표현들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2,13)라고 기록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칭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이 명칭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명기 14장 1절에서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웨의 자녀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역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야웨를 대적하고 또 그를 거절하였을 때에, 모세는 “우매 무지한 백성아! 야웨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지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신32:5,6)라고 말한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처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상기시켰다(예를 들어, 이사야8:18;렘3:12f을 참조하라).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와의 결속이 이제 훨씬 더 친밀해졌는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리라.”(롬8:15-17)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지상에 있는 그의 자녀들 사이에 하나로서 언약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셨던 사랑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3:1)

우리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제사를 통해서 양자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사실은 우리가 이 언약 안에서 받았고,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확증되었던 하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의 자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당신의 언약을 맺으셨을 때에, 그분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이들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큰 특권이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업을 자랑했었다. 주 예수님께서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신을 믿었다면 자유롭게 되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종되었던 적이 없었노라.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8:33)라고 응수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유대인이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나, 실상은 마귀의 자식들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참 후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의해서 알려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모든 신자 즉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롬4:16,17) 아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할 때에 이 사실에로 되돌아온다. 나중에 바울이 수많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를 거절하였다는 슬픈 사실을 토론할 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달리 말해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롬9:6-9)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였을 때에, 그는 이 사실이 두 언약 하에서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갈3:7)라고 덧붙였다.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약속들의 상속자이며, 그의 [참된] 씨(갈3:26)라는 것이 결론이다. 오늘 교회는 아브라함의 씨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다.

접붙여진 가지들

우리가 로마서 11장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오늘날의 신자들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밀접한 결합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감람나무와 접붙여진 가지에 대한 강화에서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람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NIV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이 나무는 배양된 나무 즉 풍성한 소출을 내도록 다 자랐고 또 선별된 나무이다. 이 나무는 또한 거룩하여 하나님께 드려졌다(16절). 그러나 불신 때문에 몇몇 가지가 잘려나간 상황이 발생했다. 그들은 아무런 소출을 내지 못했다(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대한 요한복음 15장을 참조하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잘려나갔다.

이 잘려나간 가지가 있었던 그 자리에, 야생 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여졌다. 이 야생 줄기는 이방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이런 시도는 손해볼 염려가 있다. 야생 가지는 개량된 열매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좋은 열매를 냈다.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이 야생가지들은 좋은 열매를 낸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바울은 중요한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신약 교회 신자들은 특별히 이방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은 옛 언약 백성인 참 이스라엘에게 접붙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반드시 열매를 내든지 아니면 잘려 나가든지 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여기에서 구속역사의 통일성을 본다. 믿는 이방인들은 온갖 새로운 법칙들과 조건들을 가지고 새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단순히 옛 언약 백성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것일 뿐이다. 이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겸손하도록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다음 장에서(롬12:1) 사도는 신약 교회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견지에서” 올바른 감사 제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역시 언약적인 용어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 드릴 영적인 예배니라.” 이제 우리가 드릴 희생제사는 동물을 드리는 희생제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제사는 영적인 제사며, 이 제사는 또한 육체적인 함의(바울은 “너희의 몸”이라고 말한다)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스스로 믿음과 순종을 드려야 한다. 언약적인 예배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의 부어주심 이래로 의미와 깊이에 있어서 성숙해졌다.

본보기들과 경고들

나는 앞에서 출애굽기 모티브를 다룰 때에 고린도전서 10장에 기록된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옛 언약의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교회와의 유사성을 주목했었다. 옛 언약 백성들은 모세 안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셨다.” 이런 놀라운 선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숭배로 돌아섰으며 준엄한 형벌을 받았다.

우리는 이 기사와 유사한 것들을 무시해버릴 수 없으며 “글쎄, 이것은 옛 언약이며. 오늘날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스라엘과 가지고 있었던 결속 즉 언약에 대해서 우리에게 회상시킨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언약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신다. 그리고 이 말은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은혜로 복 받을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공의를 근거로 해서 진노를 초래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기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고전10:6)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거듭해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된 것이라.”(고전10:11)고 했다.

반복해서 언약 역사 안에서 통일성을 주목하라. 만일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인해서 벌을 받았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동일한 죄로 벌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스라엘이 받은 형벌은 우리에게 모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옛 언약 백성들과 하나인데, 다시 말해서 동일한 주님과 구세주(1-4절)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훨씬 강력한 용어로 경고를 받는다. 우리의 위치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울은 우리를 “세상의 끝 날을 당한”(11절)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이것이 오늘날 언약의 진지한 요구이며, 그러하기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12절)

바울은 우리에게 옛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적용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치를 우리에게 적용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라는 훨씬 더 견고한 토대 위에서 야웨와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높은 신분에 걸 맞는 도덕상의 의무가 있다(Noblesse oblige). 더 많은 재산은 더 큰 책임을 의미한다.

분리된 존재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생활의 특징 중에 하나는 열방과 반립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단절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들의 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리된 생활은 거짓 우월감을 가지고 하는 뭔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보전하기 위해 주어진 규칙이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동일한 노선을 발견한다. 사도 바울이 통혼 문제에 대해서 다룰 때에, 그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매지 말라.”(고후6:14)고 기록한다.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6:16)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다음 바울은 구약에서 이 사실을 계속해서 증명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다. 사도는 레위기 26장 12절과 13절에서 인용한다. “나는 너희 중에서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야웨니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분명 이 말은 다른 보족어 없이 바로 신약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6:16)는 바울의 진술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옛 언약 백성과의 차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통일성뿐만 아니라 점진성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으나, 그때에 그분은 항상 성전에 계셨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분은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은 명령이 뒤따른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52장 11절과 12절에서 인용한 것이며, 여기에서 바빌론에서 귀환한 포로들이 그들을 더럽힐 수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버리고 가라고 촉구했다. 바빌론에 관한 동일한 경고가 “내 백성아, 거기에서 나오라.” 그들의 죄에 가담하지 말라, 그들의 재앙에 망하지 말라고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분명하게 발견된다. 명백하게 이 명령은 역사 마지막 때까지 서 있다.

오늘 우리는 옛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세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약1:27을 참조하라)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고 또 너희는 나의 아들과 딸이 되리라. 전능하신 야웨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 4장과 이사야 43장에 있다.

바울은 이 본문들을 출애굽기, 레위기, 이사야에서 인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적인 현 신분을 보여주고 또 하나님의 백성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성경적인 토대를 제공해주고자 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풍성한 약속들을 주셨고, 그리하여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신약 교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았기 때문에, 거룩을 유지해야 하고 전에 구출 받았던 생활양식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하갈과 사라

나는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신약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자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3:7,26)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바울이 같은 서신서에서 하갈과 사라를 어떤 방식으로 언급하는가이다.

바울은 이 두 여인과 관련된 것을 우화적으로 취할 수 있다(갈4:24)고 설명한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을 대표한다. 하갈은 시내 산에서 체결한 언약을 대신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에 매여 있었다. 율법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들을 속박할 뿐이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에서 현재의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은 이스마엘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사라는 새 언약을 대표한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바울이 이런 진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하갈”은 사람의 의지, 육신, 자기 구원의 방식이다. 하갈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나, 여전히 종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는 거룩한 약속의 길이 사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 교회의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브라함의 씨, 사라의 아이, 약속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언약의 백성이다. 이것은 율법과 그 규정으로 지상의 예루살렘과 관련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계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죄와 죽음에서 구속받아 자유롭다.

나누어진 벽이 허물어졌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풍성함을 묘사한다.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 표현이 애매하지 않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을 통한 은혜의 문제다.(엡2:8-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큰 복을 강조한 뒤에,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그와 같은 유익에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모든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의 시민권에서 제외되었고 약속하신 언약에는 이방인으로서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자들”(엡2:12)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만 언약을 체결하셨다. 다시 말해서 어느 나라도 이 언약을 공유하지 못했다. 몇몇 예외도 있었지만,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유일한 백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왔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분은 바로 주 예수님이셨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적대적인 장벽”이 허물어졌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교회에 이방인이 들어옴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싸움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 하나 됨은 피상적이거나 단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오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목적이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짓는 것”(15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새로운 신분임을 안다. “결과적으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안에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당신의 언약의 나라에 속한 것으로 인정하신다.

사실상 더 이상은 예전과 같은 언약 민족은 있지 않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 세계적(catholic)이다. 모든 방언과 민족 가운데서, 온 세상에서 모으고 계시는 중이다.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약속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새 인류를 창조하실 것을 에덴동산에서 약속하셨다.

이 본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가속의 일원들이며, 참 이스라엘이며, 이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계속해서 놀라게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과거에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다.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계시된 이것을 바울은 신비라고 부른다.(엡3:3,6)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상속자, 한 몸의 지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약속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비슷한 주장을 한다(1:21-23).

내가 거룩하니 거룩하라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다른 본문이 있는데, 왜냐하면 신약 교회가 오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우리의 논제와 아주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11장 44,45절에 하나님께서 “나는 야웨 너희 하나님이라. 너를 성별하여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라. 땅 위에 움직이는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너희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에서부터 너희를 건져낸 야웨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거룩하기에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신 말씀을 알고 있다.

거룩하라는 요구는 레위기의 주제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건져내셨고(출애굽기), 그 결과로 그들은 거룩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레위기). “거룩”이라는 말은 따로 떼어놓다, 또 순수하게 되었고, 오직 야웨께만 드려졌다는 뜻인데, 성경 다른 어떤 책보다 레위기에서 훨씬 더 자주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전체에 메아리치고 있다. 언약은 거룩한 언약이며 또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셨던 것은 바로 이 거룩을 위해서이다. 나는 고린도전서 6장 11절을 언급하면서, 여기에서 바울이 과거의 죄들을 말하면서,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했다.

사도 베드로는 레위기에서 이 표현을 가지고 신약 교회에 이 말씀을 적용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녀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따르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서 동일한 거룩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요한도 이러한 요구를 언급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사도 베드로는 이 거룩을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9)와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10)라는 표현으로 교회에 대해서 말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 이 모든 표현은 구약에서 온 것이며, 또 여기에서 그들은 항상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신분과 의무를 연결짓는다.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인 교회라고 부른다. 옛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교회인 새 언약 백성에게 적용된다. 그러하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를 내리고 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한다. 생활의 갱신과 거룩함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야 하는 요구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것이다. 언약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활의 거룩함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구속과 갱신은 같이 움직인다.

신부와 신랑

사랑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는 때때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된다. 이 사실을 구약에서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구약 이스라엘과 오늘날 교회 사이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인상적인 삽화이다.

오랜 세월 동안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나는 풍유적인 해석을 선호하지 않지만, 아가서가 상징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탐구하려면 주제에서 너무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성경책[아가서]에 대한 토론을 남겨두고 구약의 다른 부분에로 돌아가고자 한다.

선지자들은 신랑과 신부의 은유를 특별하게 사용한다.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포로의 귀환을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야웨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사49:18)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은 신랑에게로 귀향(歸鄕)하는 것이며,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내로서 귀향하는 것이다.

이사야 61장에(이 구절을 주 예수님께서 나중에 나사렛 회당에서 인용하셨다) 이런 큰 기쁨이 묘사되어 있다. “내가 야웨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10절) 이사야 62장 5절도 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신랑이 그의 신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시며, 신부는 기쁨으로 이 사랑에 보답한다. 이것이 사랑의 언약의 정수이다.

그러나 선지서들 안에는 혹독한 고발도 있다. 신부는 항상 열렬하게 자기 신랑을 기다리지 않았고 자기 남편에게 신실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음란한 짓을 저질렀으며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심히 근심시켰다. 예레미야 2장에서 우리는 신실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야웨의 애가를 읽을 수 있다. “…네 소년의 때에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2절) 그러나 신부는 돌아서버렸다. “…너희는 많은 정부와 함께 창기로 살았도다.”(렘3:1ff) 에스겔과 호세아와 같은 다른 선지자들도 신부가 자기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셨던 신랑에게 불신실함에 대해서 말한다. 이 죄가 얼마나 더 큰 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신실하지 못한 신부를 계속해서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고 또 아버지 앞에 흠이 없이 드릴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신부라고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비유로 신랑, 신부와 혼인잔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런 표현으로 사도로서 자기 과업을 묘사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계시록은 신부와 혼인잔치의 주제로 확대할 수 있다. 계시록 19장 7절과 8절에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느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의 행실이다)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말씀한다. 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한다.

신랑과 신부. 신부는 새 땅에서 함께 생활할 신랑에 의해서 회복되고 준비된다. 왜 그런가? 신부에 대한 신랑의 큰 사랑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언약이 모든 세대에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그의 신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때에 다음의 선언은 올바른 선언이다. 우리는 죄에서 깨끗하여졌으며,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총회 가운데 흠 없이 최종적으로 드려지게 될 때까지”(유아세례 예식서, Book of Praise, p.584) 우리 생활이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에베소서 5장 27절을 보라.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자기를 위하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영광스러운 교회로” 드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놓았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완전한 신부로 신랑 곁에 서게 될 것이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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