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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배울 교훈

하나님아들 2014. 10. 4. 21:04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배울 교훈

본문: 사도행전 9: 9- 19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본명은 사울인데 사울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 구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 파 출신으로서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출생하였습니다.(행22:3, 빌3:5)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행22:3)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 철저한 유대교도로서 기독교 박해에 앞장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자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난 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박해자에서 사도로 대전환(변화)을 하여 아나니아에게 세례받고 사도로 세움받은 후(행9:15), 안디옥 교회에 의해 이방인 사도로 파송받았습니다.(행13:1-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바울은 군중 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전파하였습니다.(갈1:16-18, 행9:22)

1차 선교여행에서 바나바와 함께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 섬을 경유, 소아시아 중남부 지방의 유대인 회당을 순방하면서 거기를 발판으로 선교하였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실라를 데리고 안디옥을 출발하여 드로아 바다를 건너 유럽 땅에 들어가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 데살로니아, 아덴, 고린도에 이르러 1년반 동안 머물렀다가 그 후에 에베소를 지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행15:40-18:22)

3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의 내륙지방 갈라디아, 브루기아 지방을 지나 에베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3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 부근에서 선교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가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선교여행에서 지중해 연안에 몇 개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신약 성경에 편집된, 편지(바울서신), 옥중서신을 포함하여 총 13편을 썼습니다.(행18:23-21:14)

3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반대파인 율법 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으로 입건되어 가이사랴에 2년간 감금(옥살이)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울은 총독 벨릭스,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갔습니다.(행21:17-24:27)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삯을 받고 일하지 않았고 천막 깊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행18:3),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나서는 정열적인 사람이었으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돌보아 주는 데 힘쓴 책임감있는 사람이었습니다.(고전16:15-20, 살전1:2)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여러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지적하라면 저는 서슴지 않고 사도 바울을 꼽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목회자요,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1. 바울의 복음 전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바울은 군중 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전파하였습니다.(갈1:16-18, 행9:22)

사도 바울, 그는 삯을 받고 일하지 않았고 천막 깁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행18:3),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나서는 정열적인 사람이었으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돌보아 주는 데 힘쓴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고전16:15-20, 살전1:2)

2. 바울의 변화

사람은 일생동안 여러 번 변합니다. 좋은 면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고 나쁜 면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변화는 가장 바람직한 변화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옛날에는 말이 가장 빨랐기 때문에 전쟁을 할 때 말을 타고 전쟁을 하였고, 속도도 마력으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 시대를 지나 비행기와 로케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변화의 속도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이 시대에 적응하여 살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고는 절대로 새로운 일도, 큰 일도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끝은 곧 성숙의 끝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만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회개란 바로 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출생과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적어도 세 번은 태어납니다. 첫 번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육체적인 출생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인인 '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음은 좀 크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나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두 번째로 사회적 출생을 경험합니다. 내가 남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온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즉 사회적 출생을 통하여는 사회성이 생기고, 교양이나 에티켓을 배우게 되지만, 문제는 이 사회적 출생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로부터 태어나는 영적 출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자아를 회복하게 됩니다.

(1) 바울의 첫 번째 변화

제1의 변화는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응아'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연적 출생의 세계입니다. 이 때의 특징은 본능대로 사는 삶이요, 자기 소견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성경 사사기에 보면 당시를 암흑시대로 기록하면서 그 이유를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절, 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는 인간이 하는 것마다 죄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같이 다 죄악이었단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사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삶의 자세는 9장 1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9:1)

사울의 삶은 자신의 성공과 출세와 성취욕에 들떠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생활이었습니다. 13절에는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연인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연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연인의 특징을 항상 자기 소견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 가운데 아직도 자신의 성공과 출세와 성취욕에 들떠서 사는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특징은 아랫것만을 찾는 삶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동물은 다 머리가 아래로 숙여져 있어서 아랫것만을 찾습니다. 먹을 것만을 찾고, 저 편안한 것만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소위 직립동물입니다. 머리가 위로 솟아 있어서 동물처럼 밑에 것만 찾지를 않고 위의 것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 정의를 찾고, 사랑을 찾고,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랫것만을 찾으면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아직도 동물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자연인의 특징은 항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이고 다른 것들을 모두 다 원 주변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만날 때에는 조화나 양보가 없습니다. 서로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기 때문에 자신이 바로 표준이기 때문에 서로 싸웁니다.

둘째로, 자연인의 특징은 끝없이 이익추구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그래서 소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건강을 소유하고, 지식을 소유하고, 예쁜 아내를 소유하고, 비둘기 같은 자식들을 소유하고, 정원처럼 꾸며놓은 아름답고 편리한 집을 소유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물질과 권력과 온 세상을 소유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소유함으로 무엇을 얻는 것도 아니고, 소유함으로 행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본래의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자연인의 특징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차이가 있습니다. 불안은 대상이 없는 것이고, 두려움은 구체적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난했을 때에는 가난한 대로, 부자가 되면 부자가 된 대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유물의 특징은 없으면 '없어서 어떻게 사나?'하여 두렵고, 있으면 '이걸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그 비결을 터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바로 이 비결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고백하기를 12절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어떤 형편에서든지 불안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2) 바울의 두 번째 변화

바울의 두 번째 변화는 영적 변화로서 다메섹 도성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이때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아닌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영의 세계를 보면서 이 세속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영의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소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하늘나라를 보아야 하고, 하늘의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세속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변화산에서의 체험을 하고 난 뒤에 "주여, 우리가 여기 잇는 것이 좋사오니"하면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의 모세를 위하여, 또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또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즉 주님과 함께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8절에 당시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다음절에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의 세계는 이 세상의 어떤 체험보다 깊고 놀랍기 때문에 보는 것도 잊게 되고 먹는 것도 잊게 됩니다. 이 영적 체험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의 체험을 하고 나면 세상은 간 곳이 없어집니다. 오직 영의 세계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영적 세계를 체험했다 해도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변화산 위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비의 산, 변화의 산에서 내려오셔야 합니다. 삼층천만 보고 있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할 일은 바로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세 번째 변화

바울의 세 번째 변화는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이제 바울은 세상만을 보는 자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의 세계만 보는 광신자도 아니고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다 보는 그런 축복된 눈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두 개의 눈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두 세계를 동시에 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보려면 육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보려면 신앙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연의 세계와 영의 세계와 영의 세계,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세 번째 변화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그런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세계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나는 그의 관리자, 혹은 청지기란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입니다. 영의 세계를 본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않고, 세상을 불쌍히 보고, 멸망으로 향하는 그들을 구원하려는 주님의 간절한 가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과 청지기 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교회만'이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전체를 위한 것이고, 민족 복음화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변화입니다. 즉 주를 위해 해를 받을 수 있는 자세, 즉 하나님 영광 제일주의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 번째, 기도할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11절에 보면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기도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신유의 은사가 있는 주님의 제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잇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을 때에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유일한 표준은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동물처럼 이 세상만을 바라보는 우리들을 저위를 바라보도록 해주는 일을 하기 때문에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기도는 바로 천국창고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를 우리가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고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무기를, 이 열쇠를 꼭 사용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죄의 비늘이 벗겨졌을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18절에 보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라고 하였지요? 즉 기도하면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면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영의 사람이 아니고, 육의 사람으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 예수를 믿지만 아직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육의 사람, 다음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며 사는 영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야 과거의 죄가 영화의 필름처럼 보입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지 않은 사람은 남의 죄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죄만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 비늘은 어떤 비늘입니까? 바로 '죄의 비늘'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계속 기도하는 데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유는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가증해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같아서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바리새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의 비늘을 벗기시지 바랍니다. 회개해서 죄의 비늘을 벗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충만할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심으로 충만하고 죄악으로 충만하고, 미움으로 충만하고, 이기주의로 충만해 있습니다. 바로 이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의 세계가 보이고, 그래야 성령으로 충만해 질 수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15절에 보면 주님께서 바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야 있든 없든, 직위가 높든 낮든, 지식이야 있든 없든, 주님께서 택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연세계만 보는 그런 자연인이 아닙니다. 영의 세계만 보는 그런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주님의 택한 그릇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의 위대한 신앙관을 살펴보면

첫째, 철두철미한 복음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통해 복음의 귀중성을 강조하였고 바른 복음을 심어 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외쳤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한때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른 복음의 신앙에서 이탈되어 다른 복음을 좇아갈 때 그는 안타깝게 권고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6-8)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이었습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이나 신앙의 목적을 잘못 가지므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변질되어 가는 사람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사명감이 투철한 신앙이었습니다. 사명이 없는 신앙인은 구경꾼이며, 사명감이 없는 신앙인은 맹종자인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 가운데 "네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한 것도 그가 얼마나 사명완수를 위하여 위대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선교 중심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였습니다.(고전2:2) 그는 항상 율법주의자와의 대결에서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롬1:17, 롬3:21-28, 갈2:16)

4. 우리가 바울을 통해 배울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가장 성실하게 순종한 사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마28:19),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씀에 누구보다도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복음 전파에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합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 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

둘째, 바울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끈기와 정열을 갖고 열심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2:2, 갈1:14)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한 이상 미지근한 신앙으로 책망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셋째, 바울은 건강도 좋지 못했고 용모도 보잘 것 없었으나(고후10:10, 고후12:7) 그의 풍부한 신앙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부인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더욱 가까이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넷째,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린 사람이었고 주님을 위하여 많은 유익한 일을 행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우쭐해 하거나 교만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았고, 가장 천한 사람들과도 자유롭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 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운 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겸손의 덕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다섯째, 사도바울은 많은 유혹과 시험에 맞서서 인내로 이기면서 그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많은 고난과 위험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성도를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섯째, 아덴에서 바울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철학적 연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행17:15-34) 전도는 궁극적으로 논리의 우월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고전2:1-5)

일곱째, 열성적인 핍박자였던 사울도 그리스도에 의해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죄와 영생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에게라도 주어지는 것입니다.(롬3:24)

여덟째,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배경, 교육, 시민권, 열정과 약점까지 그 어느 것도 버리시지 않고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자신에게도 그와 같이 역사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아홉째, 바울은 두려움으로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키고 있었습니다.(고전 9:27) 우리는 자신이 맡은 직분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며 자성하고 있습니까?

열 번째, 바울은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실제적인 실천가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임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약2:26)

열한 번째,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보면 '내게 힘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보셔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할 만해서 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신실하게 보셔서 귀한 직분을 맡긴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이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가 풍성해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서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에 감격해서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했다고 할지라도 이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분, 권력의 자리에 계신 분, 많은 재산이 있는 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우리의 여생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울처럼 변화되어 성령이 충만하고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 복음전파의 사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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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태완 목사 설교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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