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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고보서 강해(이장우목사)

하나님아들 2014. 10. 1. 16:22

야고보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야고보서 1:1  종 야고보  2005. 5. 11.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보고자 합니다. 야고보서, 그러면 제일 생각나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서를 가지고 말로만의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따라야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증거하는 것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여서 행함을 더 보태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만약 나의 결단과 실천의 문제라고 한다면, 믿는다고 하고나서 실천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도덕을 배우면 도덕에 대한 사고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도덕을 실천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식이 됩니다. 이런 식의 행함이 되어버리면 야고보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행함이 아니라 평소에 상식적으로 생각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행함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잘하는 것으로 행함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안에 바른 복음이 들어있고, 바른 믿음이 들어있는가를 다시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함인가를 말씀에 비추어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행함의 강조 속에 목사나 교인들의 욕심이 위장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심과 헌신을 독려하면서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행함이 나오는지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16절입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위한 헌신과 충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입으로 외친다고 하여도 그 안에 얼마든지 자기들의 욕심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에 욕심인줄 모르고 속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위하여 큰일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수많은 능력을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중심의 행함에 대하여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도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행함의 형태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윤리 도덕적으로 착한 일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료급식도 하고, 문화교실도 만들고, 지역주민들을 위한 봉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욕을 덜 얻어먹고 사람들이 교회에 호감을 가져 많이 교회로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에 재물을 쌓아놓았다고 울고 통곡하라는 말씀을 그들이 과연 호감을 가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우리의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받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받은 믿음이라면 어떤 모습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받은 믿음이라면 이어서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환대하고 가난하다고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대로 믿고 사는 것이 받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바른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시면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주님 재림하시면 다 불에 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유황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타 죽은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행함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그 성의 멸망의 소식을 듣고서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더 쉽게 예를 듭니다. 우리교회 장은택 집사님이 비파괴 검사를 하는 회사에 있습니다. 건물을 부수어보지 않고서 엑스레이 같은 사진으로 건물을 조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전문가가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지하실이 5분 후에 무너진다고 진단을 내렸다고 합시다. 그 말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5분 안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가지 않고 있다가 무너져 내릴 때에 죽었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었습니까? 행함이 없었습니까? 믿음이 없었으니 죽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었다면 당연히 빠져나가야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며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면 믿음의 내용이 일단은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8:24-25절을 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어떤 믿음을 말하든지, 행함을 말하든지 간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나 소망의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이 현실에서 믿음이 무엇으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는 믿음을 말로만 말하느냐, 행함으로 보여 달라고 합니다. 네 믿음의 능력을 보이라고 합니다. 너는 만 6년이나 되면서 아직도 지하를 탈출하지 못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만 3년에 이만큼 보암직한 결과들이 있는데 너는 도대체 무슨 행함이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야고보서 2:1절처럼 ‘받은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란 야고보서 1:16-17절에서 은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받은 믿음, 은사로 주어진 믿음이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욕심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와 비교 경쟁하면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참된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는 그런 열매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광의 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만나는 것이 받은 믿음이고 받은 은사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일을 야고보를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이기에 예수님을 더욱 믿지 못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면서 조금 다른 면은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성경은 아주 조금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생 때의 이야기와 성전에서의 결례, 12세 때의 자기가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자기 형 예수를 볼 때는 특별한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육신의 형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3:21절을 봅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셔서 활동하실 때에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붙들러 온 것입니다. 여기에 야고보가 포함되겠지요! 평소에 자기의 형인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있으니 미쳤다고 여기면서 붙들러 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2-5절입니다.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런 야고보가 어떻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서 자기를 종이라고 하게 되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5: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5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그후에 야고보에서 보이셨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서는, 그 영광의 주님을 뵙고서는 모든 생각들이 다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합니다.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모든 것이 다 바뀌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보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다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9절입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먼저 교회의 기둥이라고 하면서 야고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12-21절을 봅니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1)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 ㄱ)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문제로 유대인이 시비를 걸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가 열린 것입니다. 베드로가 증거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증거하고 나서 야고보가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바 자기들도 메지 못한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 어떤 행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돌아온다는 것을 야고보가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어떤 행함을 더 추가하여야 되는 문제가 아니라 주께로부터 받은 믿음,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야고보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본문을 보면서 더욱 자세하게 보겠습니다만 오늘 보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기둥이라고 여김을 받고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라는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이 고백이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자기의 소유라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인의 소유물이 종인 것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살지도 못하고, 자기의 목숨도 자기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것이 야고보의 믿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야고보를 만나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로서 임하여 주소서!

 

 

 

 

야고보서 1:1-4  시험을 만나거든  2005. 5. 18.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지난주에 야고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고백을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김을 받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형으로 알았던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심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 어떤 혈육의 관계로 말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성도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되는 이유와 그 목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생각나게 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열두지파가 되는데 이들이 구약에서도 많이 흩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 흩어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앗수르나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면서 흩어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또 여러 나라로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야고보서를 받는 사람들이 흩어진 유대인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를 나사렛 이단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흩어져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8:2절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시작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흩어지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벌로서 흩어지게 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이미 사도행전 1:8절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핍박을 통하여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증거 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열두 지파란 유대인들 중에 예수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예수 믿는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베드로전서 1:1-2절을 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에서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그네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에 각 지역에 흩어진 이유는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것이며, 피하여 간 곳에서도 계속되는 핍박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핍박들을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일 심한 핍박은 유대인들의 핍박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인 예수를 믿는 무리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도 여러 가지 핍박들이 닥친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문안하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하여 내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사람을 혈통을 따라 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6-50절입니다.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3)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3)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3)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3)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시험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이 온다는 것은 만약에 온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라고 하였으니 각 사람마다 다르게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부적인 핍박일 수도 있고, 건강 문제로도, 경제적인 문제로도,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실패의 모습으로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오는 모양은 다르나 반드시 시험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형통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을 믿고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은 물리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미신이 어떤 내용들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저 사람은 예수를 잘 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어서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면 예수를 잘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미신들이 한국교회를 망쳐놓은 것입니다.

 

 

 

 

왜 미신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지도 않고서 그저 자기 마음의 본능대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국가에서 일제 강점 하에 피해를 입은 자들의 신고를 받고 있습니다. 저희 선친도 일제 징용에 끌려갔다 오셨기에 저희 어머니께서 어디에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보상을 받는다고 하면서 신고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서를 보니 피해 보상과 전혀 상관없다고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브로커들이 피해 보상을 해준다고 속이면서 서류를 대행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그러니 그런 말들을 듣고서는 보상해 준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때 제 생각이 이런 것이 미신이구나! 분명 아닌데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어제 성경공부 모임 마치고 서류하려고 가니 이제는 정리가 되셨는지 하지 말자고 해서 그냥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세상에서 시험도 없고, 혹시 있더라도 잘 이기고 나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이라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비슷한 구절을 끌어 대지만 그러나 앞뒤를 살펴보면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엉터리를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들이지요! 그것이 바로 13절에 나오는 시험입니다. 자기들의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유혹의 시험과 지금 2절에서 나오는 시험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들에게 왜 시험이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악한 세상에서 성공하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시험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2절에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시험을 당하고 있는데 그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빨리 이 시험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기쁘지 아니한데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쁨이 나오지 않지만 기쁜 일처럼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은 괴롭고 힘들고 고단합니다. 그런데 왜 기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시험이나 시련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시련을 왜 기쁘게 여겨야 합니까?

 

 

 

 

3절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가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만들어 내게 됩니까? 그것은 주의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척척 주어지면 인내란 필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도록 하기 위하여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0-11절입니다.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여기서도 형제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합니다. 그 중에 욥의 인내를 보라는 것입니다. 욥의 인내는 어떤 인내였습니까?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너는 무언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벌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욥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얼마나 치열한지 욥기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욥도 자기가 그런 시련을 당하는 이유를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귀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욥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련을 겪고 나서 욥이 하는 말이 자기가 전에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오는 믿음의 시련이란 결국 주님을 더 알게 하고, 주님의 약속을 더욱 굳건히 붙잡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평생에 얼마나 많은 시련들이 있었습니까?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니 세상에서 성공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이 최종적으로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게 하시고자 그렇게 평생을 나그네로 험악하게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완성과 종결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성도가 믿음의 시련과 인내를 통하여 무엇이 온전하게 구비된다는 것입니까? 욥과 야곱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이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바르게 알고 그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함입니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믿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를 주님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믿음의 시련과 인내를 통하여 세상의 끈들을 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7절을 봅니다. “봉독” 말세에 나타난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은 산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산 소망이 진짜 소망임을 알게 하시려고 썩어 버리고 더럽혀지고 쇠하는 것을 붙들지 않도록 여러 가지 불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여도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믿음을 받은 성도에게는 환란과 시련조차 기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난이 닥치지 않게 할까? 하면서 근심걱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착한 일도 해보고, 종교도 가져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그 어떤 시험이 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기에 시련조차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 담대함과 자유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그날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5-8 지혜를 구하라 2005. 5. 25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란 이 땅위에서 반드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이 시험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생과 달리 믿음으로 오는 고난과 시련입니다. 이런 믿음의 시련이 올 때에 지난주에 보았던 대로 대부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무언가 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이런 어려움이 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난을 받지 않고 축복을 받을까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생각들이 지혜가 없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미학 오디세이라는 진중권씨의 책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대로 사물을 본다는 것입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동굴에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보이는 대로 그렸습니다. 저같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잘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잘 그리지 못한 그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내장을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만 그리던가 하는 것은 이미 동물에 대한 지식이 쌓여있어서 그렇게 그린다는 것입니다. 사전 지식이 쌓여있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듣는 것에 적용을 해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아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이미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가득 들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대한 내용인데 기도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것은 어떤 기도입니까? 나의 소원이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신에게 정성을 다해 비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무엇만 뚜렷하게 보이는가 하면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보다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면 무엇이나 구하는 대로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강조점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고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믿고 구하면 그래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실까 안 주실까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복음을 듣기 위해서 온 어느 여 집사 이야기를 하였는데 모임을 마치고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나 구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무엇이나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무엇이나 들어준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7:7-11절입니다.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구하면 주신다고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1: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단어만 몇 글자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 무엇이나 구하면 주신다는 그 무엇을 괄호로 만들고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와 연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아니하고 이미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면 악한 아비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데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복음에 보니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두드리고 찾았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좋으신 것으로 주신 것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21절입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나 구하면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나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소원하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하신 일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 언약을 따라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나 ‘무엇이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그 계명 지킴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나 구하고 받는 상태인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와 함께 함으로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되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철없는 아이들처럼 엄마 아빠는 필요 없고 용돈이나 듬뿍 달라고 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가 아는 대로 구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2절 이하에서 3절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2절 말씀에 보시면 무언가 구하기 위하여 욕심을 내고 시기하며 살인하기 까지 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면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욕을 위하여 구하지 말자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한다는 것이 어떤 식입니까? 십일조를 백만 원, 천만 원 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크게 되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큰일을 해드리자고 합니다. 내 욕심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믿는 내가 세상에서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봅시다. 4: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과 벗이 되고자 구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무엇이나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면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지기 위하여 구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2장 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자기가 속는 줄도 모르고 속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이나 구하면 주신다고 하면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들었는데 그 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을 구하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가 없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란 마태복음 7장에서 ‘좋은 것’이고, 누가복음 11장에서 ‘성령’이고, 요한복음 14장에서 ‘무엇이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취하신 언약의 완성으로 성도에게 은혜와 은사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야고보서 3:13-18절에서 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여기서 두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교회 아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 아이들을 보시면 다 시기와 다툼이 들어있습니다. 어른은 위장하지만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시기와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이 아무리 주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이미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는 시련을 만날 때에 우리는 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스스로도 속고 남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후하셔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으니 자꾸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지혜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의 지혜이기에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혜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꼴이 나고, 제자들의 꼴이 날까봐서 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지혜대로 구하다가 내가 그런 꼴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면 아직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날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면서 살게 됩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해서라도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9-11 풀의 꽃 2005. 6. 1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지난주에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이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양 속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처럼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해서 지혜를 얻고 지혜롭게 살자고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지혜의 아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3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어서 비유로 하신 말씀에 아이들이 장터에서 하는 놀이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장단이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께서는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자기의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가난한자와 부자와의 비교를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부요한 형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다른 본문에서는 부자를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는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2:6-7절과 5:1-6절에서도 부자에 대한 경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고 가난한 자는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누구를 복 받았다고 합니까?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고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사회이든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것입니다. 회사도 강한 회사가 살아남고, 집안도 강한 집안이 살아남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도 어떻게 해야 살아남습니까? 강한 교회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돈 많은 교회입니다. 부자가 많이 모여서 돈을 많이 내어야 힘이 있는 교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야고보서 2:1-4절을 봅시다. “봉독” 초대교회 때에 이미 이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이 그 어느 시대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강하고 힘 있는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크게 많이 해서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더 높은 꿈, 더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서 당근과 채찍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들도 힘 있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아담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강해야 산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몸에 배인 것입니다. 회사도, 나라도, 가정도 부강해야 독립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남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의존적인 인간은 세상에서 불쌍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독립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리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립적인 인간으로 우뚝 서고 싶은 것입니다. 보란 듯이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조차 사람들은 신에게서 힘을 얻고자 모여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지금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런 지혜는 위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있다고 힘없는 자를 깔보는 것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증거 하고 있습니까? 사무엘 상 2장에 보시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서 하는 기도입니다. 힘 있는 용사는 넘어지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띤다고 합니다.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고,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다고 합니다.

 

 

 

 

이 기도는 메시아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첩인 브닌나가 자식을 낳게 되자 한나를 심히 대적한 것입니다. 옛날 일수록 자식을 낳지 못하면 힘없는 여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땅이 이렇게 된 것은 이미 이방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방나라는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브닌나처럼 자기의 자식을 힘으로 삼고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름부음을 입은 자에게 힘을 주셔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국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기에 산산이 부수어 지리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46-55절입니다. “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의 공통점을 보게 됩니다. 거꾸로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으며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가난한 자란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낮아져서 되는 일이 아니라 메시아가 이루어내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시고 그 혜택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 자들은 이제부터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사는 사람이기에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이란 가족이기도 하고, 회사의 직원이기도 하고, 교회의 교인이기도 합니다. 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겠니?

 

 

 

 

이런 것이 성도의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를 얻게 되면 이 세상의 결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결론을 알기에 여러 가지 시험들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9절을 봅니다. 가난한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라고 하는데 가난한 자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높아진 다는 말씀이 아니지요! 그런 시각이 바로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높아진다고 자랑하라는 것입니까?

 

 

 

 

2:5절을 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종말론적인 시각입니다. 세상에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난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 높아짐과 부요함을 약속으로 받았기에 미리 당겨서 그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영원하신 기업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야 비웃겠지요! 그러나 그런 비웃음을 받는 것,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작업을 통하여 주님은 이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증거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10절입니다. 부한 형제는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자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형제라면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자기의 소유의 넉넉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부유하고 강한 자들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부유하고 높은 자가 된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여서 그 대가로 그렇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세상의 것만이 아니라 자기 의로 부유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주님께서 내리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기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챘는데 예수님이 자기 형에게 말씀하여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한 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유의 넉넉함을 믿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하였지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재물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나 과연 무엇을 믿고 삽니까? 세상의 돈을 사랑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재물들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재물이나 세상의 영광들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직접 여행하고 온 사람의 글을 보면 들판의 풀과 꽃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시들어지는지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열풍이 밤낮으로 불어오면 꽃들과 초목은 그 아름답던 꽃들은 과거에나 존재 했던 것처럼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풀과 꽃들은 불에 타버릴 연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이사야 40:6-7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장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소식입니다. 그 메시아가 오신다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전하는 말의 내용이 이 백성은 실로 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포기의 들풀이요 그 영광의 그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쇠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이 영원한 말씀을 베드로 사도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바로 앞의 말씀에서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보배가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의 성취로 이루어졌기에 이 복음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이 살아 있는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것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임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 영원한 복음의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12-18 욕심과 은사 2005. 6. 8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2절에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복이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란 1:2절에서 보았던 대로 믿음의 형제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여러 가지 시험들이 반드시 오게 되는데 그런 믿음의 시련들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 온전함의 결과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고 하니 머리에 쓰는 관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생명이 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사람은 시험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기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지난주일 낮에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부부가 자기의 몸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여러 가지 시험들이 올 때에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면 시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에 빠져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과연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세상의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13절을 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시험과 야고보서 1:2절에서 말씀하는 시험은 단어는 같지만 내용상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test 와 temptation 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시험이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아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유혹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아서 넘어 갔을 때에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아가지고 아담으로 죄짓게 해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셨는가 하는 생각들을 한두 번은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지 마시든지 만들었어도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셨으면 되실 텐데 왜 그렇게 방치 해두셔서 죄짓게 만드셨는가 하는 의문 내지는 원망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원망과 책임 전가는 사실 범죄 이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시니 아담과 하와의 대답이 어떠하였습니까?

 

 

 

 

창세기 3:12-13절입니다.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주므로 먹었다고 합니다. 여자는 뱀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핑계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이 오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하면서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까? 또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 죄를 짓고 나서도 탓하기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아무도 친히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까? 그 시험을 받으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이겨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한 시험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8절을 봅니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심판받을 자는 하나님께서 유혹을 받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1)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1)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유혹을 역사하여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시고, 데살로니가 후서는 시험정도가 아니라 유혹을 역사하여 거짓 것을 믿게 하십니다. 어느 것을 믿어야 합니까? 한 쪽입니까? 둘 다 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공의를 보이시기 위하여 심판 할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유혹을 역사합니다. 반면에 자기의 긍휼을 보이시기 위하여 심판 받아 마땅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아멘 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유혹들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14-15절을 봅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이러한 죄의 패턴이 아담에게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뱀의 유혹을 받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 그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유혹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시험이며 최후의 시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이 유혹으로 넘실대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현대의 철학과 과학은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과 전능성입니다. 이제는 창조의 비밀을 물리학자들이 밝히려고 나섭니다. 오늘 동아일보에 김영기 교수에 대하여 보도가 나왔습니다. 시카코대 교수인데 세계 최대의 가속기 운영의 공동책임자입니다. 그의 연구는 창조의 비밀을 밝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도 얼마든지 복제하여 낼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었습니다. 다만 윤리적인 문제로 복제하지 못할 뿐이지 허락만 된다면 사람을 복제하여 내는 일은 송아지를 복제하여 내는 일이나 다를 바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창조니 생명의 잉태니 하는 것들을 사람의 손으로 좌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살고 있습니까?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것들을 따라 사시겠습니까? 그래서 야고보는 속지 말라고 합니다. 1:16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지금 우리가 속고 있는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점검을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유혹을 받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있는지를 말씀으로 점검하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자기 마음의 욕심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습니다.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는 힘의 세계입니다.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아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을 정당화하면서 그 욕심을 이루어 놓고서 신의 축복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세상의 헛된 영광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가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다 변화합니다. 그러나 빛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은사로 주어지는데 그 은사로 주어진 결과가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기위하여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죄를 알고, 그 죄의 결과를 알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임을 믿게 된 이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입니다. 내 뜻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를 짓고 살다가 사망에 이르는 것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의 능력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과 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은 다 자기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이제 유혹과 은사를 구별하시겠습니까? 유혹이란 자기 욕심이 발동해서 죄를 낳게 됩니다. 우리도 다 여기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나 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의 욕심이 성취되도록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마음의 욕심보다 더 지나치게 성취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실족할 뻔 하였다고 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과 같은 고난과 재앙도 없고 죽을 때도 고통도 없고 저희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 하다고 항상 편하고 재물은 더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경건하게 손을 씻으며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전에 나아가서 그 결말을 알았는데 악인은 졸지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입은 자들은 날마다 진리의 말씀으로 공박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것이 죄를 잉태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회개하고 위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옴을 믿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을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원하지 아니하는 내용들입니다. 먹음직하거나 보암직하거나 이 세상의 자랑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종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은사인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주심을 감사하며 삽시다. 
 

 

 

 

야고보서 1:19-20 우선순위 2005. 6. 15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할 때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합니까? 주로 그 사람의 열심을 보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어디에서 나타나야 신앙이 좋다고 합니까? 주로 교회 일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을 열심히 하면 신앙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 내가 믿음으로 하는 일인데 당신이 왜 아니라고 하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바른 진리냐 아니냐는 누가 결정을 하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 성경 아닌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 신앙고백서이고 교리문답이라는 것입니다. 같이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같은 교리 문답에 동의하면 같은 신앙인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도 이해관계에 부딪히면 서로 이단이라고 하면서 갈라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야고보서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진짜냐 가짜냐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야고보는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만으로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함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는 것은 또 문제가 됩니다.

 

 

 

 

전에 저희교회 게시판에 어떤 사람이 계속하여 질문한 내용이 믿음에는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행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구체적인 행함을 말하지 못하고 사랑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그 사랑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교를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저 주시는 은혜에 감사만 하는 것도 사랑이 됩니다. 거지 나사로와 십자가의 강도처럼,,,

 

 

 

 

우리가 그동안 듣고 배워온 바로는 신앙이 좋다는 것은 일단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하는데 야고보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심겨진 도라는 것입니다. 그 도가 무엇입니까? 바울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도가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1:18절에서 진리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심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심각한 고민을 하며 자기는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물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입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사람이 믿음을 줄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선물인데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이란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으니(롬10:17) 우선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나오더니 역시 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말씀이 들리지를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심겨진 사람은 반드시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리기는 하지만, 듣기를 속히 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 병이 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을 저절로 찾는데 병이 든 아이는 젖을 거부하는 것처럼 됩니다.

 

 

 

 

베드로전서 2:1-3절입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버릴 것이 있고 사모할 것이 있는데 버릴 것은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악한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모하라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갓난아이들이 젖을 사모하듯이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까? 성경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성경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의 성공담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빠르고 느리며, 무엇을 무겁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속히 하고 있습니까?

 

 

 

 

월요일에 자동차 보험료를 내기 위하여 시내로 나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 길에 사람들이 얼마나 길게 줄을 서있는지, 그렇게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은 창원 와서 처음 보았습니다. 나중에 뉴스를 들어보니 세븐 시티라는 고층 오피스텔 청약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전날부터 길에서 잠을 자가면서 줄을 서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 일에 얼마나 속히 달려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자리에는 온갖 핑계를 다 댑니다.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핑계대고 오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소한 일을 가지고서도 나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지 않습니까?

 

 

 

 

이러고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율법적인 잣대로 기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말씀 듣는 일을 속히 하라는 것을 일주일에 몇 번을 말씀 듣는 자리에 오고, 온다면 몇 분전에 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말씀을 듣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진 자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자기를 변명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듣기를 속히 한다는 것은 시간상의 말이 아니라 중요도의 문제도 함께 포함이 됩니다. 사람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에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가장 우선순위란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듣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8-42절입니다.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3)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4)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느라 몹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분주한데 동생은 예수님의 발밑에 가만히 앉아서 꼼짝도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한마디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여러 가지로 분주하다만 그러나 한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시면서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마르다는 마리아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혼자서 예수님을 대접하느라고 참고 참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 마리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이 난 것입니다. 성 내기를 더디 하라고 하신 말씀에 저촉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만 낸 것이 아니라 사실 말하기도 빨리 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역시 저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말이 빨리 나옵니까? 자기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 말이 빨리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성이 나는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성이 납니다. 무엇이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말도 빨리 나오고 성도 나오는 것입니다. 말이 급한 사람이 성도 잘 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성냄은 어떤 성냄입니까? 자기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의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환전상의 돈 궤를 둘러엎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아버리는 분노와 비슷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가 보면 언제 분노가 일어납니까?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조를 맞추어주지 않을 때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사가 열심이거나 전도회장이 열심이면 분노도 많이 일어납니다. 열심 있는 사람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는가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분노는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요나도 그러하였습니다. 자기는 성을 내어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 냄이 과연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분노입니까?

 

 

 

 

20절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의 열심이 어떤 열심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분노의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라고 분노의 소리를 발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분노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의 성 냄과 분노의 중심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왜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나에게 복을 주지 않는가 하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집사님과 함께 문상을 갔다 오다가 십일조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십일조를 하면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자기도 믿고서 열심히 정직하게 십일조를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오래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오기가 나더랍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복을 주지 않아도 십일조는 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의 성 냄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자기는 의롭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복도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노가 아니라 회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기를 속히 하는 사람이 말하기도 더디 하고 성 내기도 더디 하게 될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정당한 분노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모양인지 알았다면 내어버리고 능히 우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겨진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양식이 없거나 물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오늘 이 시대도 여전합니다. 무엇 보다 말씀 듣기를 우선순위로 정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22-25 자유하게 하는 율법 2005. 6. 22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보십니까? 특히 여자 분들은 수도 없이 보지요!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보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식당에서도, 차 안에서도 거울을 봅니다. 그렇게 자주 거울을 보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고 고치기 위하여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서 고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야 거울을 놓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 거울의 비유를 가지고 말씀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22-23절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말씀 듣기를 속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기는 듣는데 듣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을 듣는 그 자체로서 이미 자기는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졸지도 않고, 말씀에 아멘하면서 잘 들었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기가 해야 할 종교적인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문헌에 네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 회당에 가서 토라를 듣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2) 가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 3) 가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다. 4) 가지고 않고 행하지도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야고보는 1)의 사람을 책망하면서 3)의 사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로 만든 거울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속을 비추어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외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거울을 대충보지 않습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꼼꼼하게 화장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하루에 거울을 보는 시간만큼이라도 말씀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기의 얼굴에 무엇이 묻어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씀을 보지 않으면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게 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생깁니다. 율법을 생활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읽고 외우고 실천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완벽하게 지켰기에 율법의 의에서 흠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정죄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열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심을 낸 그 열심은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라 그들의 혈과 육으로 된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의 열심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지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아니라 수건에 가려진 죽이는 문자였습니다.

 

 

 

 

로마서 10:2-4절입니다. “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나님의 의란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혈과 육으로 이루어내겠다고 나선 것은 자기들의 의를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결과는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예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줄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여다보고 열심히 지킨다는 사람은 자기의 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보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율법 그러면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율법이란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오늘 말씀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는데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율법적인 행함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정작 본문에서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모세 율법의 조문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율법의 문자적인 지킴이나 행함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행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이란 무엇입니까? 2:8절을 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말씀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2:15-16절입니다. 역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율법의 완성이 무엇입니까?

 

 

 

 

1:21을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서 ‘마음에 심긴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돌 판에 새겨진 말씀을 듣고 지킨 사람들은 온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새겨진 도가 있어야 온전한 자유에 이르는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진다는 말씀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2)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세운 언약인데 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킨다고 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가 나와서 자기 자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지는데 그때에 이웃이나 형제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하지 아니하여도 다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율법으로 교육하고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하에서 마음에 심겨진 도를 받는 사람은 누구다 율법으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즉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돌 판에 기록된 말씀은 그들의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고 나와도 하나님의 언약을 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에 심겨진 도는 도저히 스스로 파괴할 수가 없는 언약이 된 것입니다. 마치 문신을 새겨놓은 것처럼 부인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듣고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자유하게 하는 완전한 율법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복음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합니다. 율법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완전한 율법이 오게 되면 두 가지 다 알게 됩니다.

 

 

 

 

자신이 죄와 사망아래 종노릇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열심을 내어서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불복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낼 그 어떤 능력과 자질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으로 원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탄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의의 종이 된 사람은 죄의 종에서 자기 마음대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던 것처럼 자기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서 곧 자기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의 종임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었음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게 된 사람입니다. 이제 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충 보면 하라는 것은 하면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을 하라 하지마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의 기능이 그러합니다. 우리를 죽이게 하는 법을 가지고 살겠다고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죽이고 다시 살리시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언약으로 이루어 내신 마음에 새겨진 새 언약인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1:19-21절입니다.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고 하늘에서 음성을 들은 것 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 하지 말고 기록된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보라는 것입니다.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이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르듯이 너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질 때까지 주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식으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8-12절입니다.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거울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구약의 성경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외모를 꾸미기 위하여 거울을 보듯이 우리의 속을 단장하기 위하여 말씀의 거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 추하고 더러운 죄악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함을 우리가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완성된 사랑이 마음에 새겨지니 자유 함으로 그리스도의 종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나오는 행함이란 자기의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 있는 자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26-27 경건 2005. 6. 29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경건이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헛된 경건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경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건이란 어떤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들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이 다 있을 것입니다. 주일은 빼먹지 않는다. 십일조는 반드시 한다. 예배시간에 박수를 치거나 웃거나 하지 않는다. 정장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들을 경건의 모습이라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 내린 기준들이 사실 참된 경건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경건의 기준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경건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자기의 경건의 기준을 누구와 비교하겠습니까? 다른 집사와 비교해보고서 나는 이만하면 저 집사보다는 경건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자기보다 못하게 보이면 나는 그들보다 오히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기준들은 다 겉으로 보이는 행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목사나 장로들은 다른 목사나 장로들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뉴스에서 아주 나쁜 짓을 한 목사나 장로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저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남에 대한 정죄와 자기에 대한 자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헛된 경건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 그러면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경건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건들입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경건하게 살았는가 하면, 율법을 보면서 자기들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가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라가 되었는가를 율법에 비추어보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현실은 외세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서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율법의 요구보다 더 심하게 자기들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한 것이 바리새인 운동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리새인의 의들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한쪽 구석에 세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이기에 그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나함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레에 두 번이나 금씩하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합니다.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헛된 경건인 것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물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경건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여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안식일 날 일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꺼리는 세리와 창기에 집에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경건이냐를 시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주동자들이 누구입니까? 경건하다는 자들이었습니다. 날마다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지낸다는 제사장계열과 날마다 생활 속에서 거룩을 실천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한 바리새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의가 이 바리새인과 같지 않습니까? 이 기준을 자기 스스로에게 두는 것입니다. 내가 이정도만 하여도 다른 사람보다 경건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으니 그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들의 싸움이라는 것이 누가 더 의로우냐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동일한 싸움입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한 자기 정당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주장을 하게 되면 반드시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은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경건을 가지고도 결국 자기 자랑을 하고 자기 사랑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헛된 경건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합니다. 즉 그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헛된 경건은 누가 결정하였습니까?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인지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문자적으로 지킨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율법에서 수도 없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제에도 힘을 썼습니다. 종교인들의 경건을 무엇으로 드러냅니까? 구제에 힘쓰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러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고자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의 경건하다는 행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오는 것들이 역시 헛된 경건입니다.

 

 

 

 

그러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이 왜 참된 경건에 속하는 일입니까? 신명기 16:9-12절을 봅니다. “9 ○칠 주를 계수할찌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찌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칠칠절, 오순절,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절기 때에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초막절에도 고아와 과부와 함께 하라고 합니다. 맥추절만 아니라 초막절도 그렇고, 신명기 14장에서는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따로 하는데 그것으로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7-22절을 보셔도 객이나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게 하신 것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이 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들이 잘나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차원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구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또다시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인데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이미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가 구제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금식을 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종교의 경건한 모습이 구제, 기도, 금식 등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종교적인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자기 자랑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 헛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너희가 종이고 고아며 과부요 나그네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자기는 경건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유대인들이 행하여 왔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몰라서 다시 이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선지자들이 그러한 고발을 많이 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 지낸다고 소를 잡고 양을 잡으면서도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고 있었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우리의 경건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인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긍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처음에 헛된 경건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았습니다. 세리는 누가 보아도 경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 안에는 긍휼이 담겨질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찬 것입니다. 세리는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경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참된 경건이란 주님을 제대로 만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제를 하면서도 자기의 죄를 알고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자임을 아는 사람이 참된 경건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세상의 시대흐름,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결론짓는 이런 세상에서 경건조차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 경건을 이익을 재료로 삼는다는 것은 경건을 공로사상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누가 자기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자임을 알고, 누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야고보서 2:1-4 영광의 주 2005. 7. 6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지난 수요일에 참된 경건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경건에 대하여 무엇을 듣기는 들었는데 무슨 말씀인지 잊어버리셨지요! 다시 말씀을 봅니다. 1:16절에서 헛된 경건이란 자기 스스로 경건의 기준을 세우고, 자기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며,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 헛된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기에 자기에게는 늘 후한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만 열면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은 오늘의 본문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키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를 보면서 오늘 본문을 보려고 합니다.

 

 

 

 

세속에 물든다. 세속화 되었다는 말을 우리가 어떤 때에 사용합니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과 달라야 할 종교인들이 세상의 모습과 똑 같아 졌을 때에 세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절에 나가고 교회에 나가고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과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만 바라보고 살기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전혀 그렇지 않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은 세속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개인의 세속화 문제는 결국 그 종교자체가 세속화 된 것입니다. 절간에서 서로 좋은 절 차지 하기 위해서 각목 들고 싸우고, 교회에서도 편 갈라 싸우고, 서로 큰 교회 만들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을 보고서 세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게 구별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 보다 더 세상적인 곳이 종교단체들이요 종교인들이 되었으니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과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좇아 살아가면 그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그건 한마디로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라고 모이고 있는 단체들이 과연 돈 없이 유지가 되겠습니까? 물론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그것이 완전한 교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사람의 의도나 계획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주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회라는 곳이 과연 자본이 없는데 일이 되겠습니까?

 

 

 

 

전도사 때에 유년주일학교를 담당했습니다. 교사만 50명이었으니 규모가 짐작이 되시지요! 어느 주일날 다른 교회에서 견학을 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모이는가를 보고 배워오라고 교회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온 전도사의 질문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비용은 어떻게 합니까? 유년 주일학교 재정으로 합니다. 다른 것은? 이런 저런 것을 합니다. 비용은? 재정으로 합니다. 그 당시에 유년주일학교 일년 예산이 2천만 원이었으니 그 전도사가 교회 돌아가서 무어라고 하였을까요? 예산을 늘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았을까요?

 

 

 

 

이런 문제는 한 주일학교에서의 예만이 아닙니다. 장유신도시에 상가에 전세 낸 건물에 개척교회 한 것과, 처음부터 종교부지 사서 크고 멋있는 예배당 지어서 시작하는 곳이 어떻게 될 지는 말 안 해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가 전세 낸 개척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왔습니다. 누구에게 더 관심이 가겠습니까? 여러분이 목사라면 그 교회 집사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저 부자가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하면 우리도 보란 듯이 땅 사고 멋진 예배당 지을 수 있을 텐데 라는 마음이 드는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세속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달째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적자입니다. 지난 주 제직회 회계보고를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개인별 회계보고를 받지 않습니다만 여러분이 목사이고 회계보고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좋아 보이겠습니까? 말만 많고 헌금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헌금을 듬뿍 하는 사람이 더 귀하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목사만이 그렇겠습니까? 여러분도 교회에 장로를 뽑는다고 할 때에 믿음이 좋은데 돈이 없고, 믿음은 부족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있을 때에 누구를 뽑겠습니까? 돈 많은 사람 뽑아서 자기가 부담해야할 헌금에서 편해지고 싶다면 그것도 다 돈을 사랑하는 세속화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보다 돈을 움켜지는 개인이나 교회나 간에 다 세상에 물든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2:2-4절입니다.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그 외모로 차별대우하면 그것이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교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을 따라 친하게 지내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다 세상에 물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세상보다 더 세상을 닮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까? 세속에 물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아예 세속에 찌들어서 복음의 물이 들어가지도 않는 상태가 아닙니까?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해도 전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기준을 말하게 된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 경건한 사람인데 어쩌다가 세상에 물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영광의 주님을 만나 보지도 못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 영광의 주님을 어떻게 만나봅니까? 꿈에서 봅니까? 기도하다가 봅니까? 당신 지금 신비한 체험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2: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셔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과 더러움을 발견한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을 세상의 외모로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죄임을 알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금욕을 하고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자는 훈련으로 될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의 주님을 만나는 비결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선물로 받는 것인데 어떻게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동일한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님을 만난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 영광 앞에서 세상의 것들이 무가치 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를 봅니다. 모세가 80세에 인생의 황혼에 영광의 주님을 만납니다. 40세에 그 열정적일 때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영광 앞에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 영광을 본 모세는 애굽의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광야로 간 것입니다. 아니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간 것은 40세가 아닙니까?

 

 

 

 

약 7연전에 이집트왕자라는 모세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영화에서 보면 모세가 80세에 애굽으로 돌아와서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때에 애굽의 바로 왕이 전에 자기와 경쟁하던 왕자 였는데 자기와 함께 애굽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고 출애굽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즉 모세가 40세 때에는 자기 민족애에 사로잡혔다면 80세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4-28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영광의 주님을 만나고서,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님 앞에서 무엇이 과연 복입니까? 애굽의 그 어떤 힘으로도 장자의 죽음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 뿌림이 영광의 주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을 본 자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효력을 알게 되고 그 피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길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서 무어라고 말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백성 중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으니 죽었다고 복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발견하게 되면 그 순간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영광에서 가려줄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와 세상의 그 어떤 영광스럽다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으로 다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 앞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제단 숯불로 그 입술을 지져 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헛된 경건이 자기를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면서 자기의 입술을 재갈물리지 아니하면 그런 경건은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이 숯불에 지져진다면 우리의 입술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볼수록 자기의 입을 가릴 뿐입니다.

 

 

 

 

바울사도도 주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삼일 만에 아나니아의 기도로 보게 되었습니다만 이때부터 바울은 세상의 영광을 배설물로 여기고 십자가의 영광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자들이 자기들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듯이 오늘날의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평소에 자기의 형이라서 믿지 않았던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면서 오늘 말씀에서는 영광의 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영광의 주님을 뵙고서는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의 영광을 본 자들은 한결같이 세상의 영광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만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십자가에 감추어 놓고서 자기 백성에게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와 더러움을 알기에, 다른 사람을 보아도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 영광의 자리로 부르신 주님의 영광만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2:5-9 가난한 자를 택하여 2005. 7. 13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ㄱ)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둘 다 되고 싶으시죠? 그러나 둘 다는 안 됩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가 세상에 대하여 부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많은 것도 되지만,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도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믿음생활 잘하면 세상에서도 부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사기입니까? 그런데 그런 사기가 좋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세상에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에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영광의 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다면 사람을 외모로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서 세상의 모든 영광들은 배설물과 같은 것인데 어떻게 세상의 배설물을 가지고 서로 잘났느니 못났느니 따지거나 차별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같이 믿는다는 형제들 안에서 여전히 세상의 기준을 따라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세상의 유혹이 강렬한가를 보여주는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야고보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망을 하면서도 부르기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라고 말합니다. 야고보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도 주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예수님을 정신이 좀 나간 사람 정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의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공동체를 향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5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질문형식으로 말합니다. 더 강렬한 표현입니다. 너희도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이 어떤 형편에서 부름을 받았는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선택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기 자랑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선택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랑거리가 전혀 없다는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다 구원받아야 한다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돈을 사랑합니다.

 

 

 

 

어느 노숙자가 구걸을 하여 만원이 되면 만 원권으로 바꾸어서 모았다고 합니다. 그 돈을 베게처럼 만들어 다녔는데 무려 2천만 원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이 돈을 얼마나 소중하게 끌어안고 살았겠습니까? 그러니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언가 그 사람에게서 선한 것이 있어서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6-8절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지상의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 자기들이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그래도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서 선택받은 줄 알고 교만하고 자기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선택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다 드러내신 것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그 어떤 민족이나 신분이나 세상의 지위와 상관없이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선택과 결정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만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기절할 말씀입니다. 어떻게 할례도 없고, 율법도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라는 것은 그 어떤 인간의 조건도 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4:16-19절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ㅁ)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하신 고향에서 배척받으십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누가 가장 반발하였습니까?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다 부요한 자들입니다. 어떤 부자들입니까?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종교적인 신분에 있어서 부요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는 자로서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실천들이 자기들을 차별화 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경제력을 쥐고 있는 부자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얼마나 싫었는지 어떻게 하면 죽일꼬! 하면서 그들끼리 모여서 의논하여 결국은 죽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부요한 자들입니다.

 

 

 

 

야고보서 2:6-7절입니다. 부자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우리가 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들이 돈을 빌렸다가 고리채 이자를 갚지 못하여 저당 잡힌 것들이 넘어가게 되면 부자들은 변호사 대동하여 문제를 해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 하소연 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증권에서 이익을 보았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고, 복권이 당첨이 되었다는 것은 당첨되지 않은 수많은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단계로 돈을 번 사람은 수많은 하부조직의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기에 가능한 것이고, 대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부요하다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죄악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일컫는 그 아름다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누가 훼방하였습니까? 부요한 자들입니다. 세상에 부요한 자들, 종교적으로 부요한 자들, 자기 착함에 부요한 자들,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가난함을 청빈으로 여기고 그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 역시 부요한 자가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선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인간은 일체의 자기 자랑이 나올 수 없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선택을 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부요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가졌다고, 이루었다고, 착하다고, 의롭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철거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는 것은 자기들의 자랑이 일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29절에서 이는 아무 육체라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인들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입이라도 벙긋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입었다고 함으로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야고보서를 인용하면서 설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어떤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힘이 되는 쪽으로 행함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서는 어느 한 구절도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는 쪽의 행함을 말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 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차별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누가 힘이 있느냐로 따집니다. 돈, 권력, 지식, 가문 힘이 되는 것을 누가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차별을 받는 것입니다. VIP로 대접을 받는데 그런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이 교회 와서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속에 물든 것입니다.

 

 

 

 

야고보서 2:9-10절입니다. 최고의 법이란 이웃사랑입니다. 그 이웃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도둑놈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이웃이란 도움을 받고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는 이웃입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입니다. 왜 이것이 최고의 법이 되는가 하면 이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먹고 배부르게 되자 그러한 자격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땅에, 그 율법을 주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약하신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외모로 취급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최고의 법으로 알고 있던 그 이웃 사랑의 법을 주신 분을 살해함으로 그들의 죄악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교회로 모인 성도란 일체 세상의 조건으로 차별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피의 능력을 무시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차별 없이 그 어떤 조건을 보시지 않고 긍휼로 대하여 주신 그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2:10-13 심판을 이기는 긍휼 2005. 7. 2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ㄴ)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야고보서를 생각하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함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약 율법적인 행함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11절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살인도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최고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을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란 8절에서 최고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외모로 차별하였다면 이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대충 보아 넘기니 나는 살인도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 그것을 이미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인도 미움이 곧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14-15절입니다.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미워하였다면 이것은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곧 살인하는 자며 영생에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율법이든, 어떤 행함이든 간에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율법을 항상 늘 완벽하게 지켜야만 합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율법에서 613가지인데 그 율법 중에 612가지를 다 지키고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하였다면 이 사람은 복을 받습니까? 저주를 받습니까?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대단한 점수를 쳐 주지만 율법에서는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 앞에서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아래 놓여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심판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11:31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기에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가 율법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긍휼로만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긍휼로만 구원하시는가 하면 어떤 인간의 자랑도 없애버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아들 홀로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홀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를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신 저주 받으심 아래 있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늘 율법의 저주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제 율법의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제 정죄가 아니라 자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는 말씀과 오늘 자유의 율법이란 같은 말씀입니다. 율법이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그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기에 자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먼저 율법의 정죄를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지 그 죄의 깊이를 보면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과 절망이 있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심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 다시 자기 공로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과 긍휼을 동시에 알고 믿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형제를 외모로 차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긍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오직 긍휼뿐입니다.

 

 

 

 

야고보서 2:12-13절을 봅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합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한다는 말씀은 13절에 나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곳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결국 인간의 행함으로 긍휼을 베풀어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행함으로 심판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5:7절입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6:14-15절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면 인간이 먼저 긍휼히 여기는 선행 조건이 있어야 긍휼을 받는 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되는데 지키다가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내용 중에 자기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말씀이 과연 있습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습니까? 범죄 한 눈을 빼내어 버리고, 손과 발을 찍어버렸습니까? 오른편 뺨을 치는데 왼 뺨을 돌려 대었습니까?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었습니까?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었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결국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누가 나는 이러한 긍휼을 베푸는 조건이 갖추어 졌기에 긍휼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세리의 집에서 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문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답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자기들이 제물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긍휼을 담아야 하는데 제사 지내는 그 율법적인 행위자체를 그들의 의로 여겼기에 그런 제사에는 긍휼히 여김이 담겨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죄인들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자들은 주님의 긍휼, 불쌍히 여겨주심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죽을지언정 자기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처음에 믿을 때는 은혜로 믿지만 믿고 나서는 나의 행함으로 갚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주님의 긍휼, 유일하게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는 긍휼을 발로 차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긍휼을 입고 나온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가 나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부자가 왔다고 특별대우하고 가난한 자가 왔다고 무시하게 된다면 그 현장이 주님의 긍휼을 모독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주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자인지 아닌 지를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께 긍휼을 입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이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긍휼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외모로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줄까요? 일곱 번 정도면 되겠습니까? 대단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란 그저 많은 돈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주민들과 베레와 지역 주민 모두가 로마에 세금을 내는데 그 돈이 이백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란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금액입니다.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 돌아가는 중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난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 백일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인데 그 돈을 갚지 않는다고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조금만 참으면 다 갚아 준다고 하였는데도 그렇게 조치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주인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토록 갚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벌을 받은 것은 무엇을 행하지 아니한 것입니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그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네가 긍휼을 입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지옥형벌의 저주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를 긍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를 받은 사람끼리 세상의 조건을 따라 차별대우 한다면 그런 곳이 어떻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를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모두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 받은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심정이 이 용서 받은 여인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긍휼만 자랑되기를 바랍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19 행함이 없는 믿음 2005. 7. 2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부족하여 행함을 보태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으니 행함을 보태자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으니, 또는 부족하니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성경보고 봉사하자는 식으로 말합니다. 왜 그런 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느냐 하면,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평가 되어 왔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 국한 된 문제들로 믿음의 유무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서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그런 행함의 내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1장부터 지금까지 본 말씀에서 믿음의 행함 들이 어떤 내용들입니까? 몇 가지만 보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오늘 말씀은 가난한 형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가를 가지고 믿음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교회 안에서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는 평가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요약 해 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받는 시험이 무엇입니까? 아담의 유혹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만 한 것들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런 욕심에 이끌려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상의 부와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면 그것이 이미 시험에 든 증거요 세속화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의 행함의 강조란 마귀의 시험아래 있는 증거입니다. 열심히 행함으로 경제적인 부가 주어지고, 종교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다면 그런 행함의 강조는 예수님의 길과 정면으로 반대 되는 길입니다. 어저께 밤중에 기독교 채널을 돌려보니 서울에 유명한 교회의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상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세상의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함께 정상에 올라서 성공하자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 오른 것을 정상에 오른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의 꿈과 비전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산에서 주님은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세상의 별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10-11절에서는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영광이라는 것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이 마르고 그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미 교회 안에서도 부자를 다르게 대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분 자를 세울 때에 목사만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부자가 직분을 맡아서 목돈을 팍팍 내어 놓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자는 특별관리대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귀에 거슬리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아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가난한 자는 멸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믿음이 좋다는 행함 들과 그 행함의 결과로 주어진다는 것들이 성경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행함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서 듣는 행함이거나, 세상의 윤리 도덕 수준의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기에(롬14:23) 믿음으로 나오는 행위가 아니면 나는 믿음이 없구나 하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로 오는 사람마저 발길을 끊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어떻든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간주하고 행함이 부족한 것은 차차 훈련해서 행함이 나오도록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는 봄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장은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조화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나오는지 눈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향기까지 넣어놓기에 진짜 꽃인지 가짜 꽃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매들도 매달아 둔 것을 보게 되는데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죽은 나무를 단장하는 식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반응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 열매가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행함을 강조해서 행함의 모양들을 갖다 붙인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믿음 없음을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까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들은 19절에서 마귀들도 아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12-16절입니다.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2)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3)시험적으로 2)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악귀도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라는 것이 무엇을 보태는 차원이 아니라 바른 믿음에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하고 찾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아닌 것도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믿음의 행함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보아도 바른 믿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함도 있다고 하지만 그 행함의 결과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이 이 땅의 것들이라면 이미 틀린 것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우리가 바른 믿음의 행위라면, 구하고 찾는 것이 이런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까?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땅의 것은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죽이라고 합니다. 음란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찾고 구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사욕은 없습니까? 정욕과 탐심이 없습니까? 그것이 우상숭배요 그런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함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에 그 행함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열심히 행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고 한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을 때 그 행함이 무엇과 연결이 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2:14-17절을 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 행함의 내용으로 예를 든 것이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굶주리는데 그에게 이르기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아무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비유를 가난한 형제자매를 돌보는 것을 비유한 그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교회나 성도가 구제를 잘하면 바른 믿음이라고 보면서 구제를 힘쓰자는 식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제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를 들면서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이 된다고 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긍휼을 받는 자로서 긍휼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내용들입니다. 만약에 긍휼히 여김이 담겨있지 않으면 틀림없이 자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사야 1:10-17절을 봅니다. “봉독” 성전에 무수한 제물을 바치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여서 성회라고 모여 많이 기도할 지라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한데 그 피가 악업과 악행들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고 과부를 돌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열심 내는 종교적인 행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본다는 것은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긍휼을 입은 자라면 형제와 자매에 대하여서도 반드시 긍휼히 여길 것입니다. 같은 형제와 자매가 어려움에 있는데 말로만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과연 주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은 사람인가를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형제를 우리에게 붙여주심은 우리가 긍휼을 받은 자 임을 잊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입니다.

 

 

 

 

요한 1서 3:16-19절입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2)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는 같은 사랑을 받은 형제에 대하여 말로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2:20-26 네 믿음을 보여줘! 2005. 8. 10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 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ㄷ)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얼마 전에 ‘네 능력을 보여줘!’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만하지 말고 실제로 능력이 있음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무엇을 보여주어야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남자가 여자 앞에서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카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카드를 소유하고 있으면 능력 있는 자로 보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무엇을 보여 달라고 합니까? 믿음이 있다는 말만 하지 말고 네 믿음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믿음을 지식으로만, 말로만 하는 믿음이란 귀신도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그런 믿음 말고 이것이 믿음이라고 할만한 행동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받습니다. 무엇을 제시하겠습니까? 무슨 카드를 내 밀 듯이 보여줄 믿음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는 믿음의 행위가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여줄 믿음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어떤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행위로 증명 될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믿음의 행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을 봅시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을 주여!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행하면 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이런 엄청난 행함 들도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평소에 교회에서 강조하는 믿음의 행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말씀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행함 들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함 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믿음의 행위를 말하면 교회를 위한 행위, 또는 세상에서 착하게 살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행위에 대하여 예증하는 두 인물과 그 사건은 교회를 위한 행위도 아니고 세상에서의 착한 일로 통하는 윤리나 도덕적인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20-23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임을 알고자 하느냐며 제시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다는 것을 이삭을 바치는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창세기 15:6절의 말씀의 증거가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는 사건으로 확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창세기 15:6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니 창세기 22:12절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것으로 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누구에게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에 살 때에 믿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기에 아브라함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를 부르시고 가나안 땅에 들여놓으시고 약속을 주십니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약속만 받았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입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왕이 하나님께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는 자기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로 4개국 연합군과의 싸움에 이깁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오는데 멜기세덱을 만나서 축복을 받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절에서도 믿음이란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에 대한, 어떤 내용의 믿음인 것입니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인데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땅에 대한 약속도 후손에 대한 약속도 약속만 주셨지 그 실체를 아직 받지 못한 때에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내가 너의 방패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는 상속자가 없는데 자기 집에서 기른 엘리에셀이 후사가 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 몸에 날 자가 네 후사라 되리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으리라고 하시자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게 됩니다. 즉 믿음의 내용이란 후손에 대한 약속인데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고백과 언약을 체결하고 나서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99세에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을 주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셔서 이삭을 낳게 됩니다. 이처럼 이삭을 낳게 되기까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짐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100세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 삼일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고민과 번민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망설임 없이 약속을 받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갈등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결단과 의지가 됩니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지만 제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아브라함은 스스럼없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그런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 그 씨가 죽더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입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1)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ㄱ)네 2)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사건이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의 확정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이 행위란 교회를 위한 헌신이나 순종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착하다고 하는 그런 행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억지로 마지못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그런 행함을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과 같은 이삭을 바치는 행위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인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이삭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의 확증적인 사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교회에 대한 충성이나 세상에서 윤리 도덕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한 행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가 아브라함의 행위인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이 세상에서 착한일입니까? 그 내용,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이 믿음의 행위인 것이지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몸이나 자기 자식을 바치는 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행위에 대하여 예를 든 사람이 기생 라합입니다. 이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직업이 함께 나옵니다. 기생입니다. 몸 파는 여자입니다. 그런 여인이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예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행함 역시 세상의 상식이나 윤리나 도덕과 전혀 어울리지 아니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조국을 배신하고 스파이를 숨겨주었습니다.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혼자, 자기 가족만 살겠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조국을 헌신 짝 버리듯이 버리는 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행위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의 행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2:8-11절입니다.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은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모든 백성이 다 간담이 녹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은 기생 라합뿐입니다. 이 기생의 행함이 무엇으로 설명이 됩니까?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 국가관으로 설명이 가능합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과 그가 행하시는 일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망해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스파이를 숨겨준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따른 행위입니다.

 

 

 

 

이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수도 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나라는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를 구하는 것도 역시 나의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는데 행위로는 전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1:1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믿음이 없었음을 자인하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3:1-12 말의 실수 2005. 8. 17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1)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2)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자신을 선생이라고 합니다. 선생 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선생이 된다는 것은 교회의 집회에서 교사로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르치려고 하는 자들이 많았을까요?

 

 

 

 

유대사회에서 선생은 아주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생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는 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선생님!'하고 부르는 말입니다. 율법전문가이자 선생인 서기관을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단지 선생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아주 존경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다음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더욱 존경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17절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잘 다스리는 자를 배나 존경하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에게는 배보다 더 존경할 자로 알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교사라고 합니다.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의 말을 받아서 각 교회에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가르치는 자들이 많아지면 더 좋을 텐데 왜 그러지 말라고 합니까? 가르치는 자들의 실수로 인하여 얼마나 잘못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가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 실수란 말의 실수들입니다. 말의 실수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지 간에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기 마련입니다. 단순한 말의 실수만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치게 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목사라는 직분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만 목사라는 직분이기에 목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면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고자 하여도 들을 사람이 없다면 역시나 그만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나는 목사이니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자매가 선교회에서 일을 하는데 월급을 사십 만원 정도 받는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 취직하면 그 몇 배를 받는데도 선교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매의 나머지 생활비는 누가 부담해야 하는 것입니까? 선교여행을 하는데 백 만 원이 넘게 드는 금액을 가족에게 부담시키면서 자기는 선교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니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선생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가르치는 자이기에 당연히 존경을 받아야 해! 그리고 배나 존경을 받아야 해! 이런 식이 되어버리면 다만 말의 실수만이 선생의 경계가 아니라 가르치고자 하고, 선생 되고자하는 자들이 대부분 빠지기 쉬운 함정들인 것입니다.

 

 

 

 

특별히 가르치는 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생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말한 내용들을 돌아봅시다. 혼자 있으면 말할 필요가 없지만 혼자 있어도 누구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까? 남편이 오면 이것을 이렇게 하라고 말해야겠다. 자식이 오면 어떻게 하라고 말해야겠다는 식으로 마음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좀 다닌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해! 목사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해! 봉사는 이렇게 해야 돼! 말로 선생이 다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를 가르치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서야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또 다른 함정은 자기 제자를 만들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자기 제자를 만들어 자기 말에 복종하는 자들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말을 듣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진리대로 증거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욕구를 채워주는 가르침은 언제나 인기가 많습니다. 그 인기를 얻는 비결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더 큰 욕망을 계속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희망, 비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면 그런 선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다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또다시 자기 귀를 즐겁게 할 선생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는지 위에 예를 든 내용들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기분이 좋아서 막 열심을 내면서 가르치는데 몇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대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 가르치면 그것으로 더 큰 심판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선생은 자기의 지식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종종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손가락처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가리키는 자가 되면 자기 제자를 삼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많이 가게 되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선생 된 자의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의 실수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말이 많으니 그만큼 실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야고보서 1: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는 것은 선생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항상 말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말에 대한 영향력과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달리는 말을 제어하기 위하여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엄청난 배를 움직이는 것이 작은 키가 됩니다. 작은 입과 혀가 어떻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혀를 불에 비유합니다. 작은 불이 어떻게 큰 수풀을 태우는지 몇 달 전에 강원도의 산불의 무서움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불을 혀로 비유합니다. 그 혀가 불의의 세계로서 온 인생의 바퀴를 불사르는 것입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혀는 길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새나 기어 다니는 것이나 해물조차 길들일 수가 있지만 혀는 능히 길 들일 수 없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혀와 입이란 말이 나오는 통로이지 그 근원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실수하면 입술을 때리는데 그런다고 혀가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5장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고 따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란 바로 유대 사회에서 선생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킨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외식이라고 예수님은 책망합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말씀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입과 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마음이 악한 생각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 가득하니 그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입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혀는 어떤 혀가 되어있습니까?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존경하고 있습니까? 내 말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고 무엇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한 입에서 두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9-12절을 봅니다. 한 입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를 저주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1:15).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범죄 함으로 흙의 형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인간은 아담의 형상, 즉 흙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런 아담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 지음을 받았는데 외모를 보고서 차별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술과 혀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이 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의 은혜로 충만하면 은혜의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즉 헷갈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저주 받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저주할 자라고 한다면 그 마음에 악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할 자라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에 임한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형제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 축복과 저주를 말하는 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말하는 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야고보서 3:13-18 두 지혜 2005. 8. 24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요즈음 과일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 좋고 먹음직한 과일일수록 농약을 많이 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고 유기농으로 키운 것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가격이 아주 비쌉니다. 그러므로 싼 가격인데도 보기에 좋은 과일들은 농약을 많이 치기 때문에 벌레도 먹지 않고 보기도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 전문적인 기관에서 농약잔류 검출을 하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행함을 강조하지만 그 행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해보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행함의 열매들을 내세운다고 하여도 그 내용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열심히 많이 행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위는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피해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사람의 행위가 위로부터 난 지혜인가 아니면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에 선행과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함이 나타나는가 아니면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대단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열심이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의 축적이 되어버렸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배척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행함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행함이 의와 진리와 생명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8-21절입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4)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4)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5)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자기들이 세상에서 빛이라고 진리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두움이었음이 예수님 오심으로 들통이 났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행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어두움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행함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까?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입니다. 즉 위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의 특징은 독한 시기와 다툼과 거짓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서 처형하라고 압박한 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넘겨준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7-18절입니다. “17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예수님을 시기심으로 넘겨준 그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시기심이 가득하여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17절입니다.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그러므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는가를 보면 그 지혜의 출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독한 시기와 다툼들이 무엇에 대하여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그를 증거하는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란 위로부터 온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 특징은 독한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과연 시기와 다툼이 없습니까? 교회끼리 교인끼리 어떤 시기와 경쟁이 나타납니까? 주일학교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시키면서 학생들에게 어느 반이 잘하는지 보겠습니다 하면서 경쟁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잘 따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쟁을 붙이는 것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우는 것이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그 안에 시기가 일어나면 위로부터 온 지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의의 경쟁이라고 합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열심내자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잘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미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세상으로부터 온 지혜인가 위로부터 온 지혜인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분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새로 와서 더 열심히 봉사하게 되면 지금까지 인정받던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 감사하면서 늘 하던 대로 섬기겠습니까? 아니면 시기가 일어나겠습니까? 시기와 경쟁심이 일어나면 지금까지 그렇게 봉사 해왔던 일들이 과연 위로부터 난 지혜로 말미암아 행하였는지 아니면 시기와 다툼으로 행하였는지가 점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단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 열심히 행함을 나타내자는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위로부터 나온 믿음이냐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 때에 과일 이야기 하였는데 또 과일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희 신학교 때에 창조과학 가르치던 교수님이 겨울에 심방 가서 제철이 아닌 과일이 나오거든 많이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사님 오셨다고 비싼 것 사왔지만 그런 제철 아닌 과일은 맛과 향이 제철 과일과 똑같다고 하여도 그것은 억지로 익은 것이기에 독소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의 일이라고 행하는 것들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온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17-18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오직’ 이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여야만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성결입니다. 성결이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결은 야고보서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것은 성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이런 성결이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케 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결코 화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함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난 지혜만이 화평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가 믿음의 분량대로 받은 은사대로 하는데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평이 왜 위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까? 야고보서 1:16-17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인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일을 벌려놓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면서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그런 일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즉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관용과 양순 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관용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부드럽게 맞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받았기에 관용과 양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와 다툼에는 결코 관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한 일에 대한 비판과 책망과 책임전가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 안에 얼마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없고 세상 지혜로 가득한 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버지께 구하라고 야고보서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자신이 긍휼을 받았으며 또한 계속적인 긍휼을 입고 있기에 긍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긍휼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3절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니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긍휼이 없다면 그것은 세상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에게서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입니다. 선한 열매란 긍휼의 열매이지 시기와 다툼의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 편견이나 위선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형제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편견이나 위선이 있다는 것은 회개하여야 할 일이지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화평은 이미 한번 나온 말씀인데 또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마감하는가 하면 세상으로부터 나온 지혜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아무리 선한 경쟁이라고 하여도 그 안에 시기가 나오고 경쟁이 나오면 이것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일체의 시기나 경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심으로 파당이 나누어질 때에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여기서 무슨 시기와 경쟁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이러한 열매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의 하는 동기와 속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위로부터 난 열매들은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에 의하여 맺히기에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안에 무엇이 가득합니까? 세상 지혜가 가득합니까? 위로부터 온 지혜가 가득합니까? 우리가 위로부터 온 지혜가 없음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야고보서 1:4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세상에 대하여는 미련하고 어리석어도 됩니다. 경쟁에 뒤쳐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가는 안개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더욱 구하시어 의의 열매가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야고보서 4:1-4 하나님의 원수 2005. 8. 31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호세아서 4: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합니다. 내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니 그들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다른 말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두 지혜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의 특징은 시기와 다툼과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관용,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 편벽과 거짓이 없이 화평으로 의의 열매가 나오는 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어떤 지혜로 살았습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았습니까? 세상적인 지혜로 살았습니까? 오늘 말씀도 계속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4:1절입니다. 너의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서 오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탓합니다. 전부 남의 탓을 합니다. 부모가, 남편이, 자식들이 잘못하였기에 싸움과 다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의 인간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본성적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먹지 말라한 그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에게 책임을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툼과 싸움과 원망과 시기가 나오는 것은 환경의 문제나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의 문제인 것입니다. 환경이 문제라면 어떻게 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으며, 모든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고, 아내가 욕하고 도망가더라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멜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지만 고멜은 바람이 나서 가출한 것입니다. 남편이 부족함 없이 해주는데도 옛 세상의 쾌락이 좋아서 집을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고멜을 다시 값을 주고 찾아와서 아내로 데리고 살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2절입니다. 우리 가운데 싸움과 다툼이 어디에서 옵니까? 정욕입니다. 우리 속에 세상에 대한 정욕이 가득하니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정욕을 위하여 열심히 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정욕이 어느 정도로 강력합니까? 살인하여 시기하기까지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이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어저께 뉴스를 보니 어떤 가장이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아내와 아들 세 명을 살해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잔인한 나쁜 놈이라고 욕하시겠지만 그러나 전혀 욕할 것이 못되는 것은 우리 속에 그러한 정욕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여건이 안 되어서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무언가 선한 것이 있어서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기는 천하에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사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살인하고 간음을 하고서도 자기 죄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런 놈이 내 나라에 있다니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놈이 바로 당신이오! 이 책망 앞에 처절하게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알고 자기 대신 희생당한 분의 공로로 살게 됨을 고백합니다만 다윗이 자기 정욕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말하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의 정욕에 사로잡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인하고 시기할 정도로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을 살인하고 시기할 정도로 우리의 정욕이 강렬한 것입니다. 그 정욕을 따라 무엇이나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배 잘 드리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과연 수요예배 이렇게 밖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새벽기도회에 그렇게 밖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원하는 그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나의 정욕입니까?

 

 

 

 

2절 끝 부분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를 바란다면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가지고 무엇이나 구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구하면 주신다는 내용의 말씀들을 짜깁기 하면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마태복음 7장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악한 아비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자기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 내용물이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구하면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정욕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대학 수시모집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내 자녀가 고삼이라면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요즈음은 고삼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기에 학부모들의 소원이란 성적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헌금하고 봉사하고 정성을 바치는 것도 내 아들 성적이 올라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성적 내려간다! 그러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엄마들입니다. 자식 공부를 위한다면 파출부도 노래방 도우미도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를 잘하게 하소서!

 

 

 

 

성경 어디에 공부 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우리의 기도 내용 거의 전부가 다 자기 욕심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도 무엇을 위한 기도입니까? 오직 우리 교회 잘 되기 아닙니까? 사람도 많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아져서 세상의 다른 교회들보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해보자는 것입니다. 구제도 많이 하고, 선교도 많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내 교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그렇게 되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정욕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3절입니다. 그러므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은 나의 정욕을 따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정욕이 아닌데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은 때가 되지 않아서 일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욕이 얼마나 강렬한지 기도도 예배도 성경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다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정욕이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여 왔는지를 알게 되었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제부터 제대로 기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말씀이 한 말씀도 없기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이것이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지켜낼 인간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그러나 그렇게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제목을 두고서 새벽기도, 금식, 철야하는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까? 현재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제목의 기도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교회들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교회가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교인들의 속마음이 다 그러하기에 종교 서비스하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욕들을 정욕이 아닌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기들의 정욕을 정당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구하며 사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간음하는 여자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란, 이 세상이 심판받았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별세 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별세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전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과연 애굽에서 탈출하듯이, 바벨론에서 탈출하듯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에서 탈출하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이지 않습니까?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유혹한 내용입니다. 마귀의 말만 잘 들으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성욱 목사는 ‘회개 하소서 십자가의 원수 된 교회들이여’ 조성기라는 분은 ‘성전을 넘어서’ 이근호 목사는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무엇을 고발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와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간음의 현장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간음하는 교회들이여! 이제는 자기 이름을 넣읍시다. 간음하는 ㅇㅇ여!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명심하시고 세상보다 주님을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4:5-10 성령의 시기 2005. 9. 7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ㄱ)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시기와 다툼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바로 앞에서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은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새 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한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로 되어 있고, 개역개정판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로 되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이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한 쪽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을 질투하실 정도로 사모하신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우리를 향하여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한 쪽은 하나님이 성령을 사모한다는 것이고 한 쪽은 성령이 우리를 시기한다는 것이 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대로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을 삼으셨기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낮에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령이 임하신 것은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기에 세상과 벗되지 말고, 마귀와 친하지 말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이기에 우리 안에 거하신 성령께서 시기하시기 까지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6절 말씀에 더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는 행함만 이야기하고 은혜가 없는 것처럼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보통 은혜가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우리 속에서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시기하며 사모함으로 무엇을 하실까요?

 

 

 

 

로마서8:23-30절입니다. “봉독”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의 모습은 탄식하게 됩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바라며 기다리는데 눈에 보이는 소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기에 우리가 연약합니다. 자꾸만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이러한 탄식의 간구가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미리 정하신 자들입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미 영화롭게까지 하셨는데 이러한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성령께서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만 지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시고 천국에서 만나보자고 올라가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서 시기하시기 까지 사모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사모해야할 주님을 사모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의 시기, 하나님의 질투가 왜 더욱 큰 은혜가 되는지 구약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4:14절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기에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가까이 왔을 때에 미디안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 우상에서 절하고 간음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전염병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두 남녀를 죽였을 때에 전염병이 멈추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도 하지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 한 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질투의 양면성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대신 하는 질투로 인하여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가랴 8:1-8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함으로 성읍이 황폐화된 것입니다.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왜 질투와 분노로 구원받는 것입니까? 자기 백성이 배반을 하니 아예 배반을 하지 못하도록 더 완벽한 은혜를 베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4:5절을 봅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이 말씀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됩니다. 다른 데 한 눈 팔거나 다른 곳에 마음을 두면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눈 돌리고 마음 주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서라도 주님에게만 마음 두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하면 이 세상이 다 불에 타 없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악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얼마나 보암직한 것들이 많습니까? 특히 돈만 있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입니까? 그런데 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불태워 없애버리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에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심판이기도 합니다만 더 이상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에 마음 빼앗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포로 다가옵니까? 감사로 다가옵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공포가 되겠지만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은혜로 다가올 뿐입니다. 주여 나는 날마다 마음이 나뉘어 집니다. 그러므로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시는 그 은혜로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하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으로 달려가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한눈팔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오는 말씀들은 명령이 아니라 사랑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란 어떤 자입니까? 교만이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아담의 후손은 자기 힘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인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겸손이라면 야고보는 도덕 선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겸손한 자란 더 이상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내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그러니 주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군요!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야고보서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그런 유혹을 대적하기는 커녕 오히려 원하고 있다면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친구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물리친 세상의 영광을 우리도 포기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세상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버리게 되는데 그런데도 가까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손을 씻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손이란 외면적인 행위들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일들에서 손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성결케 하라고 합니다.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늘 둘 다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제일 잘 속는 부분이 이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의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 세상에서 실패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나오고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을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성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여 울라고 합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입니까? 이 세상을 거꾸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였다고 잔치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웃음과 즐거움으로 살고 싶은데 그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 복이라고 여기는데 어떻게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더 큰 은혜를 받아야 되는 일입니다.

 

 

 

 

10절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기에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높아지기를 애씁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습니다. 혹시 일부러 몸을 낮추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높아짐을 위하여 낮추는 것이라면 그것이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출 사람이 없는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나온다면 이것은 더욱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더욱 큰 은혜를 말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세상의 정욕과 싸우며, 마귀를 대적하고, 손을 깨끗이 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아니하고, 세상의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슬픔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를 아무도 구하는 자가 없기에 성령이 시기하면서까지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지 아니하는 우리를 위하여,,,

 

 

 

 

야고보서 4:11-12 너는 누구관대 2005. 9. 14


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지금도 성경을 보고 설교를 합니다만 우리가 성경을 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지 않고 평소에 세상을 살아가면 어떤 상태가 되는가 하면,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남을 비방하고 남을 판단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옳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사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고 삽니까?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여기고 삽니까? 내가 차를 타고 복잡한 길로 갈 때 걸어가는 사람이 빨리 비켜서지 아니하면 뭐라고 합니까? 죽으려고 환장했나! 여사로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걸어가는 사람이 되었다면 차를 보고서 저놈의 차가 미쳤나! 이러는 것입니다. 모든 사사건건을 전부 내가 옳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불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만 펼치게 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조차 자기의 이익을 따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가 성경을 보게 되면 반드시 어떤 모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3:15-17절입니다. “봉독”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성경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자기가 옳은 줄 알고 남을 교훈하고 남을 책망하고 남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훈과 책망을 받을 부분은 비방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비방을 하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본성인지 처음에 잠시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남을 비방하는 전문가가 된 것은 역시 아담의 범죄사건으로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부끄럽고 두려워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을 찾지 못하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지요! 네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인간의 실상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실상은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비방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비방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나에게 주신 이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잘못을 전가 시키는 것입니까? 자기의 아내에게 전가시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었으면 안 그랬을 텐데 괜히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 주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하와를 비방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본성으로 태어났기에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성을 거스르면 거북스럽고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잠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잠언 18:8절입니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이 별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맛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이 본성이라는 것입니다.그러면 남의 말을 할 때에 남을 칭찬합니까? 비방합니까? 거의 비방입니다.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을 함께 비방하다가 비방하던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입술은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잠언 18: 6-7절입니다. “6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잠언서는 계속하여 경고합니다. 25:17-18절입니다. “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8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이웃집에 자주 다니면 자연스럽게 비방의 말이 많이 나오겠지요! 그런 비방이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13-14절입니다.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과부의 명단에 올릴 자 중에서 젊은 과부는 금하라는 말씀 중에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집집에 돌아다니며 망령된 폄론을 하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려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주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래 이제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판단하지 말고 살자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그러합니다. 무언이 옳은지 그런지도 구별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서로비방하지 말자고 합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하면서 뻔뻔스럽게 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히 판단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11-13절입니다.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고린도 교회 안에 근친상간의 음행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이런 판단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교리에 대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판단 할 것들이 많습니다만 오늘 말씀에서 왜 비방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형제들 가운데서 서로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형제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의 은혜를 동일하게 입은 자로서의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일하게 은혜로 된 형제 사이에서 자기가 무엇을 좀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관대 감히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판단한다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면 멸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관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비난하고 판단 할 때는 언제는 그 기준을 자기에게 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을 보고 온갖 판단을 다합니다. 위선자다. 잘난체한다. 교만하다. 온갖 말을 다하지만 정작 자기에게는 적용시키지 않고 혹시 적용시키더라도 굉장히 관대하게 대합니다. 똑 같은 잘못을 하여도 남은 죽일 놈이고 자기는 약간 실수한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형제에 대한 이런 비방과 판단이 결국 율법의 입법자요 재판장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35절입니다.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패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십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우심을 입는 것입니다. 왜 비방을 받는가 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려내려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악한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기들은 착하고 바르다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비방하였는지 모릅니다. 율법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사사건건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29-31절입니다.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2)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비방하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쌓은 자기 의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참된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3:39-43절을 봅니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지 아니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그렇게 큰소리 치신 분이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분을 누가 비방하지 않겠습니까? 다 고개를 흔들며 침을 뱉고 돌아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강도는 모든 인류의 두 모습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방하든지 믿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데도 가난하고 병들고 어렵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예수를 잘 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죄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형제에 대한 사소한 비방과 판단이 바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라는 사실을 아시고 날마다 회개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이웃을 비방하겠습니까?

 

 

 

 

야고보서 4:13-17 너희는 안개니라 2005. 9. 21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 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지난주의 제목이 ‘너는 누구관대’였습니다. 너는 누구관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느냐면서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목은 지난주 제목의 답변처럼 보이는 ‘너희는 안개니라’는 말씀으로 제목을 삼았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죄인이기에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오직 소망이 있다면 주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의 자랑을 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이며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리 존귀하게 살아도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늘 마음이 어디로 빼앗기는가 하면 세상의 영광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에 마음이 빼앗기니 자신의 처지를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상담 란에 어떤 분의 질문처럼 사는 게 괴롭고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자꾸 위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곁에서 속삭이면서 넌 못난 사람이라고 비참한 사람이라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싫고 하찮은 존재인 것만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변하기를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자신이 못나고 비천하고 무능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리플을 달기를 예수님 앞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답변하기를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비참함을 발견한 사람은 남과 비교할 틈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괴로운 것은 언제나 남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 많기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을 느끼며 자꾸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 직장건강보험 조사에서 월급을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이 한달에 47억원이 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12억원이 넘었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서 나도 한번 돈 벌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1위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2위는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안 된다면 나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장래에 대한 계획과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내가 남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각오로 나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차고 야무진 생각을 품고 있을 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는 말씀입니다.

 

 

 

 

13-14절입니다. “들으라.” 왜 들으라고 시작하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어떤 사람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외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자기의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가는 길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있기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끝까지 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면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자고 하는 자들이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계획을 세우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것입니다.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받는 독자가 누구인가를 1:1절에 보면 나옵니다.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이 심하여지자 각처로 흩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부터 여러 지역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무엇에 대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장사를 잘하여 이익을 남길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제일 잘하는 일이 장사하는 것입니다. 너무 지독하게 장사를 해서 미움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경제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미국이라면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은 금융, 언론, 유통, 석유등 돈 되는 여러 곳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의 유대인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서 살게 될 때에 무엇으로 기반을 마련하겠습니까? 장사하여 이익을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지중해 연안에서 새로운 도시들이 생기고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무역 한번 성공하면 큰 이익을 남기게 되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무엇을 계획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도 한번 장사하여 이익을 남길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야고보는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냐?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다가도 잠시 후에 태양이 떠오르면 언제 안개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는데 몇 곳을 봅니다.

 

 

 

 

이사야 2:22절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시편 146:3-4절입니다. “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인생을 의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 중에 높다는 방백들도 의지가 못됩니다. 그들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야심 찬 계획을 세웠더라도 숨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40:6-7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 백성들에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 앞뒤에 보면 내 백성을 정다이 위로하라고 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합니다. 주의 날이 오리니 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위로를 받는 아름다운 내용 중에 이 말씀이 들어있는 것입니까?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생을 의지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고 방백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인생의 무가치함을 먼저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이 실로 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합니까? 인간의 위대함이나 인간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들의 한 포기 풀과 같은 것입니다. 수많은 들풀이 시들어 꽃이 떨어질 때에 우리가 그기에 관심을 가집니까? 물론 관심을 가진다고 있습니다. 도올 같은 사람은 세상의 신비란 들의 풀 한 포기보다 더한 신비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풀이요 안개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자고 하고 싶습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하면서 놀려고 하십니까? 15절을 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행하리라고 할 것이거늘” 주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라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다가 실패한다고 해서 좌절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반대로 무슨 일을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자기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뜻대로 하지 않게 되면 무엇을 성공하면 틀림없이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인생승리, 자수성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실패하면 고개도 들 수 없어서 도피하거나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 하고 인생들이 스스로 세운 계획에 도취하여 자랑하는 것은 허탄한 것이며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벌리는 일 중에 과연 인생의 자랑거리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엄청난 일들을 하는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자랑거리입니까? 인생들의 자랑거리입니까? 세상에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좋아하고 호감을 가지는 내용들이라면 인생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러한 인생들의 자랑거리라면 허탄한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습니다만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만 몇 구절 봅니다. 요한복음 6: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런 구체적인 말씀에서 인생의 자랑들이 나올 틈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흠모하고 사모할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시편 131편의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그러면 믿는 자들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사도가 말 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사도의 삶의 태도가 어떠하였는가 하면 늘 주의 뜻을 앞세운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가리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나 비전을 품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그런 자는 결코 자기의 자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뿐인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러므로’ 앞에서 연결이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악이라고 합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만이 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쳐두고 인생의 야망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다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행하리라고 하는 것이 인생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인생이 안개인데도 그 신분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10: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모든 길을 주님께 맡기고 살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5:1-6 말세에 2005. 9. 28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부자 되세요. 한때 어느 카드회사의 광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영향이 바로 옆의 김밥 집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여기 오는 모든 분 부자 되세요! 이런 광고가 김밥 집에만 있습니까? 어디에도 있는 것입니까? 교회라는 곳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어느 목사의 설교를 차안에서 잠시 들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거룩한 시기와 경쟁을 말하면서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경쟁이 과연 나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내가 제일 십일조를 많이 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저속한 욕심의 기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하여 사용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친절한 금자 씨라는 영화에서 금자 씨를 사진 찍어서 정보를 팔아먹고서는 정보를 판 대가로 수표를 받으면서 하는 말이 선한 사업에 쓰겠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지금 예배당을 건축 중에 있는데 돈이 능력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습니다. 이런 말들이 사실이지요!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보다 더 능력이 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에서 자본이 많아진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분명히 오늘 말씀과 성경전체에서는 부의 축적을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의 축적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본의 축적을 교회에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막스 베브라는 독일의 사회과학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서구에 집중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주의가 그렇게 발달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본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는 것은 예정 되어 있어야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정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불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정되었다는 징표를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이 구원의 징표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 소명설이 나온 것입니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여 자본을 축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신이 주신 사명에 충실함으로 주어진 도덕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칼빈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도 고정된 신분제도들이 무너지면서 상공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하나의 정당한 논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자본이 힘이 되는 것을 알았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자본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표이며 축복이라는 근거를 가지게 되니 얼마든지 자본을 축적하여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자본주의의 발달에 칼빈의 사상이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서 특히 개혁주의라고 하고, 칼빈주의라고 하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으로 보겠습니까?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신학자인 칼빈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누가 반박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사람들마다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문제이지만 그러한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부자는 복 받은 것이고 가난한 것은 저주 받은 것으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떠합니다. 부자에 대한 책망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부자에게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집행이 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부자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부자가 무엇입니까? 부자란 자본이 축적되어야 부자입니다. 동산이나 부동산을 많이 축적하여야 부자인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곡물과 의복과 금과 은입니다. 다 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을 축적하는데 그 축적의 과정도 정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축적하고서는 자기를 위하여 쌓아둔 것입니다. 그러니 곡물이 썩고, 의복이 좀이 썰고, 금과 은이 녹이 쓰는 것입니다. 금과 은이 녹이 쓰는 것이 아니지만 금과 은이 쓸모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자본의 축적을 지금 야고보는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5:1절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아니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울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재물이 썩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금과 은이 녹이 쓸었는데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고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이 말세이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고 합니다.

 

 

 

 

아니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말세에 재물을 쌓은 것이 복을 쌓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쌓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금에 와서 자본의 축적을 복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개인이든 교회이든 국가이든 자본이 많은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서구가 자본이 많아진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않게 들어왔는데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정직하게 벌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정직하게 일해서 부자가 되는 길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정직하게 일해서 성공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자기의 믿음일 뿐이고, 우리나라에서 세금 제대로 내고 종업원들 월급 제대로 주고 공해시설 제대로 가동하고 해서 재벌 된 회사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4절을 봅니다. 밭에 추수한 일군들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추수하는 일군들 일용직 근로자들이 그 품삯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땅히 일군에게 돌아가야 할 삯이 하늘에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4-15절입니다.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군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이미 율법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이사야 5:8-12절입니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부한 자들의 향락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심에 관심 없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2:6-8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선지자들의 이런 책망은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는 책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세상은 종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 자체가 종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책망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5절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날입니까? 도살의 날입니다. 짐승을 살찌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치 날에 도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처럼 지금 부자들이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은 도살의 날에 잡힐 짐승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입니까? 말세입니다.

 

 

 

 

예수님 오심이 종말인 것을 교회가 지금까지 외쳐 왔다면 과연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이렇게 돈을 사랑하고 돈을 많이 가진 것을 축복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이미 교회는 힘없는 십자가와 이별하고 힘 있는 돈과 결탁한 것입니다. 하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한 쪽을 사랑하면 한 쪽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고 힘이 되는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음녀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하여 지금 야고보는 외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도 아니합니다. 지금 심판이 집행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울고 통곡하라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임하였기에 울고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이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말세인데 심판의 날이요 도살의 날인데 무엇을 쌓아두고 그것을 힘이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힘을 추구하면 그것이 이미 심판을 받은 증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처럼 가난한 교회는 괜찮은 것입니까? 천만에요? 더 부자 되고 싶어 합니다. 더 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하면 누가 돈을 좀 많이 내어서 좀 근사한 예배당이나 하나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부자가 아니더라고 부자 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경고하는지 말씀을 봅니다.

 

 

 

 

디모데전서 6:9-10절입니다.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 되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을 봅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다른 교훈에 착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에서 힘없이 달리신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일어나는 기적이요 은혜요 복입니다.

 

 

 


야고보서 5:7-11 오래 참으라 2005. 10. 5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이 세상에 교회가 나타났다는 것이 종말의 현상입니다. 교회가 나타난 것은 메시아의 오심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현상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미리 내다 보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징은 종말론적인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자체가 주의 재림을 대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늘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몇 십 년 이 지나도 주의 재림의 징조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큰소리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점점 고난은 가중되는데 주의 재림은 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도들 사이에 여러 가지 불평과 원망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시면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난은 가중되고 주의 재림은 오지 않으니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고난들이 있었습니까? 오늘 7절 말씀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길이 참으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 부자들의 착취를 말씀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시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다고 책망합니다. 물론 가끔 부유한 자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하면서 가난하고 약하고 천하고 못난 자들을 부르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난한 자들이 누구에 의하여 더 고생스러운가 하면 부자들의 착취로 인하여 더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정당한 품삯이라도 주면 나을 텐데 가난한 자의 품삯마저 착취하는 부자들로 인하여 고생이 심하였던 것입니다. 5:4절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강림의 소식은 부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가난한 자들은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강림이 자꾸만 더디어 지는 것입니다. 일년 이년이 지나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는데도 주의 재림이 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놀리는 것입니다. 너희들 주의 재림이 임하면 세상을 심판한다고 한다더니 재림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너희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살지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여전히 떵떵거리며 호의호식 하고 사는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고 희롱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림도 고난을 가중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 이런 놀림까지 받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나도 돈 벌어서 보란 듯이 한번 살아보아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에서 보았던 대로 내가 어디에 가서 일년 동안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이며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잠시 보이는 안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라는 곳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축복으로 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부자가 된 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 오늘날 교회나 성도가 부를 획득하고 축적하는 것이 정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물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 어떤 교리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까?

 

 

 

 

칼빈의 예정설과 직업 소명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증거가 믿음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것으로는 사람들이 무언가 불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좋은 근거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칼빈의 신학에서 자기 직업에 충실하여 부자가 되는 것을 부르심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일에 교리적인 뒷받침까지 있으니 개신교가 가는 곳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막스 베브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이 돈이 많아지고 교회가 돈이 많아지는 것을 정당화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요하게 되면 될 수록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게 됩니다. 서울의 분당이라는 곳은 얼마나 좋은지 천당보다 좋은 곳이 분당이라고 한답니다. 그런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불에 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이 문밖에 가까이 계십니다. 야고보서 5장의 이 말씀을 선포하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종말을 기다리는 자들을 향하여 오히려 세상에서 실패하였으니 무능하여 기다린다고 하면서 놀리지 않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1-14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둘째 편지를 쓰면서 제일 먼저 기억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제일 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말을 내가 죽을 때쯤이나 생각할 문제로 돌리지 않습니까? 많은 돈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하려는 교회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강조하는 내용이 과연 종말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부자 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가장 우선순위로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합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에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 홍수의 심판도 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잊어버리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세상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 홍수 때의 그 동일한 말씀대로 이 세상은 불살라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편안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저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었기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으로 핍박이 있다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이 핍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은 우리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그 고난에 참예한 자들은 주의 영광의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기에 미리 당겨서 고난 중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여전히 동일한 유혹과 핍박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보암직하게 살아보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을 거부하셨는데 오늘날 교회는 사단이 주마고 한 것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보암직한 세상의 영광을 보이겠다면 그것은 이미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다는 것 자체가 핍박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가족에게서도 미움을 받을 것이요, 교회 안에서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지금 중, 고등학생들의 중간고사 기간입니다. 자녀의 성적표를 기다리는 것보다 과연 예수님의 재림을 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새 아파트 분양 받아놓고 입주할 날보다 주님을 더 기다리십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심판과 주의 재림을 말하지 않으면 핍박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에 희망을 주는 사람을 누가 핍박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재림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통째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리는 것입니까? 7-8절입니다. 농부처럼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기에 천수답입니다. 그래서 씨를 뿌려 놓고 비가 와야 싹이 나고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 비입니다. 그리고 늦은 비가 와야 곡식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농부처럼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포도나무 꺾꽂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마당 한 귀퉁이에 꽂아 두었습니다. 얼마를 기다려야 뿌리를 내리는지 몰랐기에 계속해서 며칠 간격으로 자꾸만 뽑아 보았습니다. 뿌리가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 확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본 농부라면 뿌리가 내리도록 진득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신실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판자가 문밖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 원망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 속에서 주님의 억울함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말고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18장에서 어느 억울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하소연하고 그 억울함을 푸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자기의 억울함을 자기가 갚지 않고 주님의 심판에 맡겨둘 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는 사람만이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이러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오래 참은 자들의 예를 선지자들과 욥을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이 온갖 핍박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선지자 치고 핍박을 받지 아니한 선지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욥의 인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고난을 받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핍박을 오래 참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까닭 없는 고난을 받는다고 원망하고 있는 욥에게 어떻게 답변을 하셨습니까?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서 부르짖을 때에 그 까마귀 새끼를 위하여 먹을 것을 누가 준비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지금 욥은 자기는 까닭 없이 고난 받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대답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답변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은 이런 말씀 앞에서 회개합니다. 자기는 정당한데 고난을 받는다고 억울해 하였지만 까마귀 새끼의 배고픔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산 염소가 새끼를 언제 치는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 욥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서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이 죄가 있어서 벌을 받는다고 하는 세 명이 욥처럼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욥이 그들의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기도함으로 그들이 사함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내란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로 문밖에 서 계십니다.

 

 

 


야고보서 5:12 맹세하지 말라 2005. 10. 12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오늘 말씀은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언제 맹세를 하게 됩니까? 자기 말의 정당함을 주장할 때 맹세를 합니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내 말은 참말이라고 합니다. 또는 벌을 면하기 위하여 맹세합니다.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 맹세를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 신에게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만 하여 주시면 반드시 이 맹세를 지키겠습니다. 이런 맹세가 제일 많겠지요! 일종의 서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맹세들을 구약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맹세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자기 며느리를 구하여 오도록 하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러한 맹세를 지켰다는 기록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급하게 되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대고 맹세를 하기에 율법에는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레위기 19:12절입니다. “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늘과 땅에 맹세하는 것보다 더 큰 맹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하는 거짓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 헛된 맹세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율법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합니다.

 

 

 

 

신명기 6:10-15절입니다.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여기는 두 가지 맹세가 나옵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맹세가 나옵니다. 그 맹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입니다. 그 맹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이란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거의 다 외우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그러한 맹세를 이용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축소판입니다.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되면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에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율법의 전문가들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맹세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가 무엇을 걸고 맹세하는 그 대상이 누구 것이냐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른 것을 걸고 맹세를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맹세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것도 아니면서 맹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하늘과 땅에 맹세를 한다고 해서 하늘을 줄 것입니까? 땅을 줄 것 입니까? 그런데 우리도 실상은 얼마나 그런 맹세를 많이 하였습니까? 자기 말의 정당성을 위하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자기의 소원을 빌기 위하여 무엇이나 영원하고 절대적일 것 같은 것에다가 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상물이 나의 것이 아닌 것이기에 맹세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이름으로 맹세하면 되지 않는가 할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에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머리카락 한 가닥 임의로 희거나 검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네 몸이 네 것 인양 맹세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를 책임질만한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지 않습니까? 결국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도 내가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몸을 무슨 수로 관리합니까? 아무리 웰빙을 외쳐도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 머리로 맹세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과 땅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기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맹세가 어떻게 변질되는가 하면 자기들의 이익의 재료로 맹세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6-22절입니다. “봉독” 무엇으로 맹세하여도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맹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율법의 전문가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세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금이 우선입니다. 제단보다 제물이 우선입니다. 맹세하는 사람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맹세를 하는데 맹세를 시키고 맹세를 받는다는 지도자들이 무엇으로 맹세하면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의 이익이 되는 맹세는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된 인도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서원을 지키라고 합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있으면 서원하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맹세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들이 하나님께서 저의 사업을 이렇게 도와주시면 제가 반드시 무엇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아이 일류대학에 합격 시켜주시면 제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런 조건부의 기도가 다 맹세입니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도 거의 다 이런 내용들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미 우리는 죽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구할 내용이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결심이나 결단을 가지고 맹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독자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서 맹세로서 이루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불신의 사람입니다.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지언정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맹세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맹세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내용 중에 이런 것이 들어있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현재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나 과분한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같이 여김을 받을 지라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맹세하고 무엇을 서원하고 작정기도를 하는 전부가 결국은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아무리 거창하게 포장을 하여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내 영광이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맹세라도 하여서 이룰 수만 있다면 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나치는 것은 다 죄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예와 아니요 제대로 못하는지 아십니까? 예라고 하여야 할 때에 아니요 가 나오고, 아니요 가 나와야 하는데 예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애매모호하게 답하고서 자기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나 아니오! 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맹세를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맹세하고, 예와 아니요도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의 이익을 따라 예와 아니요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까? 죄 정함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죄 정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바로 위의 말씀에서 심판자가 문 밖에 계신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헛된 맹세와 거짓된 예와 아니오를 반복해 왔는지를 돌아보면 심판 외에 달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맹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맹세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신명기 6:10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맹세를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앞선 맹세가 있습니다. 창세기 22:16-17절입니다.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맹세를 이루실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한 제물을 여호와의 맹세로 준비하십니다. 그 씨가 대적을 문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이루어내시는 그 씨를 통하여 어떻게 대적의 문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 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ㅅ)아브라함과 그 3)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3)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3)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이루심으로 그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자기 백성에서 하나님의 맹세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에 예하면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 언약, 맹세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예 하면 됩니다. ‘예’ 라는 말이 ‘아멘’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면 아니요! 는 언제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지 못하였다는 말에 우리는 아니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언약과 맹세와 순종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5:13-18 기도와 찬송 2005. 10. 19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오늘 말씀에 보면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할 것이며 즐거운 자는 찬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도와 찬송은 성도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에 찬송이 되는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무얼 그리 따지듯이 보아야 하는가! 고난당하면 기도해서 해결 받으면 되고 즐거우면 찬송하면 되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보았듯이 우리에게 급한 일이 닥치고 꼭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슨 맹세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다’ 하는 것을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구절 한 말씀이라도 쉽게 볼 말씀은 없는 것입니다.

 

 

 

 

1.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고난당할 때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고난을 빨리 해결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초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고난은 자기가 잘못하여 당하는 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이기에 오는 고난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기록 목적도 흩어진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시련이 올 때에 그것을 인내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에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돌아보아서 빨리 고쳐서 해결보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5절에서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 때문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하게 되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1:2-3절입니다. 기도하여 지혜를 얻게 되면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 시련들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길은 결국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장치인 것입니다. 그 온전함이란 12절 말씀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4:12-14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결국 성도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에 기도함으로 무엇을 발견하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짐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자기 앞에 있는 어려움을 빨리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의미를 더욱 알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에게 닥친 고난만 해결하는 것이 기도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편함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 못해서 이렇게 어려움이 왔는지를 돌아보면서 자기를 탓하거나 아니면 남을 탓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보나 자기가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되면 이웃에 대하여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고 합니다. 고난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되면 그 고난을 주신 뜻을 알고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2. 즐거울 때 찬송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정말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고난 받을 때는 기도하기는 쉽습니다. 고난의 뜻을 알기보다 고난을 빨리 해결하고 싶어서도 기도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십니까? 우리는 무슨 일이 잘 되면 자기 탓이고 잘 못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아담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치면 전부 남이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핑계하고 잘 된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슨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길 때에 여러분은 누구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말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래도 내가 그동안 노력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느냐고 하면서 자기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에게 즐거운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것이 전적이 주님의 은혜라고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만 돌리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사람들이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란 십자가의 영광이기에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암직하고 세상에서 영화로운 것을 구하고 있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영광을 배척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찬송하겠습니까? 찬송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찬송하는 사람이 영광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 우리가 이렇게 큰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찬송을 돌립니까? 그러니 즐거울 때 찬송하는 일이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힘든 정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즐거운 일이라고 여긴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즐거운 일을 즐거움으로 보고 있으니 이미 초점부터가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양보하여 세상의 즐거움이라고 하여도 과연 주님께 찬송을 돌립니까? 전세방 살 때는 좁아도 자기 집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막상 집을 마련하여 일년만 지나도 자기는 의례히 그런 집에 살만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집이 좁다고 여기고 더 나은 집에 살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에 이것도 누리지 못하겠느냐고 하면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원망이 나오겠습니까?

 

 

 

 

유다서 1:3-4절입니다. “봉독” 성도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도를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색욕거리나 세상의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즐거움을 무엇을 삼고 있습니까?

 

 

 

 

고난 받을 때에 기도하고 즐거울때 찬송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그렇게 고난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찬송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도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즐거운 일에 찬송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는 귀하여서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3. 병들었을 때에 기도하라고 합니다. 14-18절입니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고 합니다. 병든 자가 있다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합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하며 병 낫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아를 예로 듭니다.

 

 

 

 

이 말씀의 해석으로 수많은 문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근거도 종부성사를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의식이 없을지라도 신부가 기름을 가져가서는 눈, 귀, 코, 손, 발에 바르면 그 신부의 기름 바름에 의하여 면죄를 받는다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유족들에게는 위로가 되겠습니다만 언제 그렇게 하여 구원 얻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가 부산에 있을 때에 합동 측 어느 목사는 아픈 교인의 가정에 심방을 가서는 기름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기름이 없다고 하니 식용유라도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서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 기독신문에 자기가 그렇게 행한 것이 잘못 된 것이라고 사과의 광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고 장로들이 기도하고 서로 죄를 고하면 죄가 사함을 받고 병도 낫는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보고서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전도협회라는 곳에서는 죄를 고백하라고 하니 공개적인 자리에게 온갖 추악한 죄를 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는 죄가 대부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며, 돈을 사랑함이 죄이며,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죄이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인데 이런 죄에 대하여서는 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의 기도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기도입니다. 만약에 장로들의 믿음이라면 장로들이 죄를 사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도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한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로 병에서도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바르기에 약용으로 사용하는 기름을 바르면서 주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의 예로 엘리야를 예로 듭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하면 하늘이 놋이 된다고 하셨기에 비가 오지 않아야 된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3년 6개월이 지나고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하고 하나님께 단을 쌓아 제물을 드리고서는 비가 오기를 간구하여 비가 오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도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하고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 의인은 누구를 의인이라고 합니까? 구약에서의 의인이란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의인도 역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런 자들은 고난 가운데 기도하며, 즐거울 때 찬송하고, 병든 자가 있으면 죄를 알게 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만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9-20 돌아서라 2005. 10. 26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형제 중에서 미혹되어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면, 돌아서게 한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고 야고보서의 결론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이미 진리에 서 있다고 여기고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제목을 돌아서게 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서라고 한 것은 바로 우리가 돌아서야 할 자라는 입장에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오후부터 시편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시편 1편을 보면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늘 자신을 의인의 편에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편 일편을 보아도 자기는 복 있는 사람이기에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형통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어떤 집사님이 자기는 늘 복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시편 일편을 묵상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는 것은 대충 넘겼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과연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말씀인데 누가 즐거워하겠습니까?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선지자들을 돌로 치며 죽여 버렸겠습니까?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세상입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들을 역시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받을 벌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악인이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임을 지난 주 오후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나는 의인으로서 진리에서 떠난 너희들을 바르게 돌이키겠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야고보서 전체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한 통의 편지이기에 처음부터 한꺼번에 끝까지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야고보서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이면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진리의 삶으로 풍성하다면 이런 편지를 한번만 읽어보고서도 아멘 하면서 넘어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뼈 속 깊이까지 세속성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듣고 또 듣고 보고 또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그러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한 말씀만 기억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그 행함이라는 것도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몇 가지로 국한하여 자기는 행함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강조하는 몇 가지만 잘하면 행함이 있다고 여깁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봉사를 잘하면 행함이 좋은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10절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의 명령으로 된 것,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613가지가 된다는데 그 중에 한 가지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몇 가지를 행한다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키는 충성을 하였다고 하여도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지 그것이 자랑이 되거나 상을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 가지도 제대로 못하면서 자기는 진리에 서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너희의 믿음이 도대체 무어냐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돌아서야 할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바로 설 때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돌이키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을 만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구비하여 온전케 하시는 것임을 믿고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런 시련 중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기도하면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이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데도 온통 원망과 불평을 하며 남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우리는 거의 다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돌아서야 하는 사람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1:19절입니다.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얼마나 속히 하고 있습니까?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데 과연 우리는 성내지 않고 사십니까? 성 내는 것도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성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세상은 커녕 가족조차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은 조절이 됩니까? 내 자신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성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돌아서야 할 자는 역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1:22절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듣습니다. 듣고 있다고 의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도로 살고 있습니까? 복음이 좋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자기 편한 것만 챙기면서 복음이 좋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리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1:26-27절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 먹이고 있습니까? 자기가 경건하다고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그런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혀가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래서 혀란 야고보서 3장에서 작은 지체로서 온 인생을 불사르는 지옥이 불이라고 합니다.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혀를 능히 길들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를 탓하기 전에 자기 혀부터 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말로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2:14-26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말로만 하는 것의 헛됨을 여러 가지 예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헐벗고 배고픈 자에게 따뜻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하고 옷을 주지 않고 음식을 주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 우리 자신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인데 과연 오늘날 우리 자신부터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들이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세속에 물드는 것을 더 열심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물들지 않고 떠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더 세상에 물들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수능생을 둔 엄마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러니 부자가 부러운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까? 세속에 물들고 싶은 것은 부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하고 싶기에 부러운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서 서로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있습니까?

 

 

 

 

3:13-18절입니다. 세상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은 위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성내고 다투며 시기하며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들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위로부터 온 지혜를 얻기 위하여 사모한 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입니까? 위로부터 온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함, 편벽과 거짓이 없음,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이런 것을 과연 사모하고 있습니까?

 

 

 

 

4:1-10절입니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기는커녕 세상의 것을 사모하고자 달려가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데도 우리는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삶이 하나님과 원수 되고자 발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과 벗되고자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며 살았습니까? 아니면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며 살았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고자 살아가는 것을 책망하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텐데 오히려 거역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돌아서야 할 자들입니다. 어떻게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귀를 가까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 있는 자들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을 회개하여 성결케 하고 슬퍼하며 애통하여 울어야 할 것입니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4:11-12절입니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재판자와 입법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데 이웃을 판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늘 내 기준으로 이웃을 형제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이 전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 남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4:13-17절입니다. 인생이 안개임을 알라고 합니다. 안개인 주제에 자기 인생의 계획을 스스로 세워서 부자가 되어 보자고 하는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이것도 저것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이루면서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이 다 악한 것입니다.

 

 

 

 

5:1-18절입니다. 부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부자에 대하여 울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면 축복인줄 알았는데 부자에 대하여 이처럼 무섭게 심판을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이 먹었다고 합니다. 도살의 날에 살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이 심판의 때입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주님이 바로 문밖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고 고난 당하면 기도하고 즐거우면 찬송할 것입니다. 병든 형제를 위하여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말씀을 듣고서 돌아서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22:32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말씀으로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제를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그 허물이 사함을 얻고 그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가 진리에서 떠난 형제를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돌아섬이 있는 자는 또 다른 형제를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까? 허다한 죄를 덮어주시는 주님에게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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