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개혁주의 기본교리 학습 2(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아들 2014. 9. 20. 19:53

.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 계시서인 성경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처음부터 기정사실화하며 이를 전제적으로 선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인식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을 통해 전제적으로 수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논증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불성설이다. 마치 개미가 인간의 언행심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1:1)

 

특별계시인 성경은 천지만물과 피조물의 면류관인 사람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술한다(1:1, 26-27). 이는 이성에 근거한 논증이 아니다. 믿음에 기초한 선언이요 선포의 의미를 띤다. 히브리서 기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한다(3:4). 그러나 이런 사실은 믿음을 통해서만 인지되고 수납되기에(11:6, 1)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거듭남이란 사건이 전제될 때, 비로소 거듭난 인격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긍정적/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반면에 거듭나지 않더라도 인간의 내면에 잠재돼 있는 신의식을 통해 창조주의 존재와 능력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창조주(하나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1:20).

 

결국 특별계시인 성경은 사람이 거듭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섬기는 일에 결정적으로 기능하게 되지만(딤후 3;15-17), 일반계시인 자연계를 통해서는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충분히 분별해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작용하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 못한다는 게 성경의 진술이다.

 

2. 하나님은 구원자가 되신다(1:4-6)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택하셔서 자녀를 삼아 주심으로 영원토록 구원의 은혜의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것을 작정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1:3-6). 이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구속경륜/예정/작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구속경륜에는 하나님의 선택사상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님의 인침/내주/보증의 적용사역이 포함돼 있다(1:7-14, 고후 1:22, 3:5, 고전 3;16, 8:11).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곧 죄사함이란 주제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1:7, 1;14). 그런 의미에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란 하나님의 작정계획 속에는 세상 창조와 인간 타락 및 그리스의 구속이란 주제가 자체 속에 이미 내포돼 있었음을 간파하게 된다. 결국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전() 경륜 속에서 ()-계획’(언약)에 해당되며, 세상 창조와 에덴에서의 아담부부의 타락과 여자의 후손언약(3:15)을 통한 구속사상은 ()-실행’(성취)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계획의 입안자가 되신다.

 

3.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11:36)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이에 따른 피조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세상역사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이 되시며,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성경적 표현들은 한결 같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증거해 준다(21:6, 22:13). 이는 세상역사의 시작과 과정과 그 결말이 창세전에 수립된 하나님의 작정과 뜻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예수께서 십자가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19:30)고 말씀하신 사실과, 계시록에서 일곱째 대접재앙이 공기’(2:2, 6:12) 중에 쏟아지는 것을 통해 사단의 세력이 일망타진 되는 것과 관련해 하늘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었다”(16:17)고 선언하신 말씀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이루었도다”(21:6)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언 속에서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로마서 기자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성과 관련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이라고 설파한다.

 

4. 하나님은 오직 생존하시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20:3)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 시내산까지 인도하신 후에 저들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는 과정에서 십계명을 하사해 주신다(20:1-17). 이스라엘 백성이 신정왕국의 헌법과 동일한 성격을 띤 십계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계시적 사건의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십계명을 출애굽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율법언약의 형식으로 주심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가나안 땅에 수립될 신정왕국(하나님 나라)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에 수립될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천상의 거룩한 나라를 현시해야한다. 그러기 위해 기존 가나안에 살고 있는 족속들의 세속적/이기적/우상숭배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문화적 양식을 철저히 배격하고 근절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을 확고부동하게 정립함으로 가나안의 제반 우상들과의 차별성을 확립해야 한다. 본 주제와 관련해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은 이런 맥락에서 강조되고 차별화돼야 한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선포한다(20:3). 이는 하나님이 여러 신들 중의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닌 홀로 한 분이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사실을 천명한다. 이런 사실의 전제 하에 다른 신들은 본질상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이외의 신들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선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계명이 각종 피조물들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명령과, 3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차별화된 거룩한 정체성에 합당한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제반 자의적인 신앙 행태를 강력히 제한하시는 이유를 통해 제일계명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닌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으로 기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며, 어떤 방식으로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계획을 섭리적으로 수행해 가시는 지를 바르게 인식해 하나님의 정체성과 요구에 합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겨야 된다는 것이 성경을 주신 의도요 취지이다(딤후 3:15-17).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11:36).

   

5.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인간들의 연구의 산물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계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명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온 용어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본질상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3분의 1씩을 나누어 소유하고 있음으로 전체를 합쳐서 한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세 분의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몸은 하나인 데 머리가 셋인 형상을 띠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나아가 물(액체)과 수증기(기체)와 얼음(고체)의 관계도 아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한 사람인 데 어머니에겐 남편으로, 자녀에겐 아버지로, 밖에서는 직장의 상사로 존재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체계는 성경에 분명히 계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교리체계이다. 거듭난 인격을 통해 발휘되는 믿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주제이다. 전통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내재적(존재적)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해 사용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란 처음부터 존재하셨던 영원자존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용어인 반면에, 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하나님의 구별되는 사역과 관련해 표현된 용어이다(성부의 선택/성자의 구속/성령의 적용).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nature) 안에 세 인격(위격, persons)을 지닌 존재로서 본질상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나누어 질 수 없는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고 계신다.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신구약에 걸쳐서 확인된다. 그러나 구약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체적으로 계시되기 전에 기록되었고, 신약은 그 이후에 기록되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충분하게 성취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해 풍성하게 계시되었다. 그렇다고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이 삼위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이란 의미는 아니다.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도 완연하게 삼위 하나님이시다. 다만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이란 관점에서 아직 충만하게 계시돼 있지 않을 뿐이다. 실례로 천지창조와 관련해(1:1-3), 인간창조와 관련해(1:26), 바벨탑 축조사건과 관련해(11:5-7), 성경 기자는 공히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목에서 우리라는 복수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구약은 신약을 통해 그 진의가 드러나고, 신약은 구약 속에 그 진의가 숨겨있다는 표현에 근거한다면 신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이 구속사의 점진성의 원리를 통해 구약 속에서 그 전모가 감춰진 상태로 희미하게 계시되고 있다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이 성육신 하신 성자 그리스도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삼위 하나님의 현현을 구체적으로 보진 못했을지라도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신 사실이 확실하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 후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이 완전하게 드러난 후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하나님이 영으로 계시면서도 동시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육신으로 볼 수 있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물세례를 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눅 3:22과 마 3:16-17을 통해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밝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신 세 분을 동시적으로 만났다. 그러나 이 세 분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신 사실을 확신했다. 마태는 이런 사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름들이라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통해 시사한다(28:19). 이는 본질상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독립된 세 위격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위격으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One nature, Three persons)이신 사실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20:17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내 아버지와 내 하나님으로 언급하신다. 이는 성부 하나님을 의미한다. 20:28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리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성자 하나님을 의미한다. 5:3-4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거짓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성령을 속인 사실을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으로 고발한다. 이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상의 사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 각각 한 분 하나님의 본질(One nature)을 소유하고 계시며 동시에 한 본질의 하나님은 세 위격(Three persons)으로 존재하고 계심을 확인하게 된다.

 

6. 비공유적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공유적 속성(communicable)

 

하나님의 속성(성격/성질/성향)과 관련해, 하나님께만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물들에게 전달 될 수 없는 차별화된 속성을 가리켜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원성, 무한성, 불변성 등이 포함된다. 이런 사실들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본질에서 구별된다. 전지성(omniscience), 전능성(omnipotence), 편재성(omnipresence) 등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전인적/전폭적인 믿음으로 수납하게 될 때,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체의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 및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능히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피조물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특성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예컨대 존재(3:14/영원 자존자),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자비, 진실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공유적 속성들을 하나님은 무한하게 소유하고 계신 반면에 피조물들은 단지 제한된 규모로만 소유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자신과의 비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울 속의 모습은 자신의 반영이요 반사체다. 상당 부분에서 유사할 수 있으나 본질상 동일할 수 없다. 외형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라도 내면은 큰 차이를 불러 온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원상(原狀)이며 원실체(原實體)이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의 반사와 반영에 불과하다(1:26).

 

7. 하나님은 영이시다(4:24)

 

본 주제는 주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문맥 속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돼 이를 감사하는 심정을 가지고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열납되는 예배의 정체성은 기독론에 입각한 구원론적 신앙에서 찾게 된다. 이런 사실이 아벨의 열납된 제사를 통해 그 의미가 밝히 해명된다(4:4, 11:4).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3:15)에 담긴 구속사상에 깊이 접촉된 데서 가능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을 가지고 전인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것은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고 드린 계시의존적인 예배였던 것이다(히 11:4). 반면 가인은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와진 종교심을 부추긴 데서 나온 자의적이며 편의적인 숭배신앙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이는 하나님의 본의를 이탈한 것으로 거절당했던 것이다. 이런 예배 원리는 오늘날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령과 진정(진리)의 예배란 기독론에 근거한 구원론적 믿음을 발휘해 전인적/전폭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란 의미는 보이지 않는 인격체로 존재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영적 실체이시며, 모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며, 누구의 제한과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 자충족하시는 분이시며, 세상 가운데 편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사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보이는 것은 한시적이며 과정적인 실체임에 비해,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로서 하나님과 영적 세계는 영원하며 영속적인 참된 실체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말씀과 뜻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5:8, 요일 4:9-1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성경적 명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구속을 위해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된다(5:8, 요일 4:9-10, 3:16).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게 되는 구원의 은혜로 작용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게 되는 바 영원한 심판에 처해진다는 게 성경의 증언이다(16:15-16). 따라서 십자가는 이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징표이며 동시에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저주로 기능한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인간 편의 선행과 공적에 대한 보상과 대가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감사와 감격의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심정의 발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행할 본분과 도리의 성격을 띤다. 무익한 종의 고백과 삶이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증시해 준다(17:10).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평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정으로 종노릇하게 만든다(15:16-17).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덧입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주는 영원한 흔적이며 자취이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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