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신내 감리교회 김영범 장로
기도 ・・・・・・・ 4
들어가면서 ・・・・・・・ 4
1. 율법 ・・・・・・・ 5
1-1. 사전적 의미의 율법 ・・・・・・・ 5
1-2. 성경적 의미의 율법 ・・・・・・・ 5
1-3. 성경적 율법의 범위 ・・・・・・・ 6
1-4. 필자가 다룰 율법의 범위 ・・・・・・・ 6
1-5. 율법의 정의 ・・・・・・・ 6
1-6. 율법을 주신 목적 ・・・・・・・ 7
1-7. 율법의 구성 ・・・・・・・ 7
1-8. 율법의 내용 ・・・・・・・ 7
1-8-1.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출20:1~출31:18) ・・・・・・・ 7
1-8-2. 모세가 성막에서 받은 율법(레위기, 민수기) ・・・・・・・ 8
1-8-3. 모세가 모압 땅에서 받은 율법(신명기) ・・・・・・・ 8
1-9. 율법주의 ・・・・・・・ 8
1-9-1. 율법주의란? ・・・・・・・ 8
1-9-2. 율법주의의 특징과 위험성 ・・・・・・・ 9
1-10. 율법의 시효는? ・・・・・・・ 11
1-11. 율법의 기능 ・・・・・・・ 11
1-11-1. 가르치는 기능 ・・・・・・・ 11
1-11-2. 복을 주는 기능 ・・・・・・・ 11
1-11-3. 저주의 기능 ・・・・・・・ 12
1-11-4. 사죄의 기능 ・・・・・・・ 12
1-11-5. 범죄와 탐심을 알게 하는 기능 ・・・・・・・ 13
1-11-6.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기능 ・・・・・・・ 13
1-12. 율법의 폐지 ・・・・・・・ 13
1-12-1. 율법폐지의 이유는? ・・・・・・・ 13
1-9-2. 계명과 율법을 누가 폐지시켰는가? ・・・・・・・ 15
1-9-3. 어디에서 율법을 폐지시켰는가? ・・・・・・・ 16
1-9-4. 율법의 어느 부분을 폐지시켰는가? ・・・・・・・ 16
1-9-5. 율법폐지의 언약 적 근거와 복음시대로의 이동 ・・・・・・・ 16
2. 복음 ・・・・・・・ 16
2-1. 복음이란? ・・・・・・・ 16
2-2. 죄로부터의 해방선언 ・・・・・・・ 16
2-2-1. 죄에서의 해방 ・・・・・・・ 16
2-2-2. 죄에 대한 올바른 태도 ・・・・・・・ 17
2-2-3.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 18
2-2-4. 죄에 대한 보상 문제 ・・・・・・・ 19
2-2-5.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길 것인가? ・・・・・・・ 21
2-3. 그리스도의 법 ・・・・・・・ 22
2-3-1. 그리스도의 법의 핵심은? ・・・・・・・ 22
2-3-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 위에서 출발 ・・・・・・・ 24
2-3-3. 율법주의를 능가하는 영적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규례들 ・・・・・・・ 25
2-4. 복음에 합당한 삶 ・・・・・・・ 26
2-4-1. 복음시대의 저주 ・・・・・・・ 26
2-4-2.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법을 좇아 ・・・・・・・ 27
2-4-3. 믿음과 착한 양심 ・・・・・・・ 28
2-4-4. 송사당하는 양심 ・・・・・・・ 29
2-4-5.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 ・・・・・・・ 31
2-4-6. 복음에 합당한 생활 ・・・・・・・ 32
2-4-7.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 ・・・・・・・ 32
2-4-8. 은혜를 누리는 삶 ・・・・・・・ 33
2-4-9. 하늘나라의 상 ・・・・・・・ 34
3. 율법과 복음의 관계 ・・・・・・・ 35
3-1. 누가 영생에 들어가는가? ・・・・・・・ 36
3-2. 죄인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 36
3-3. 구원에 이르는 길은? ・・・・・・・ 36
3-4. 율법을 믿고 따르는 자의 결과는? ・・・・・・・ 36
3-5. 율법을 따르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 37
3-6.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 37
3-7. 복음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과 타협을 하나? ・・・・・・・ 37
3-8. 나는 과연 유대교인, 유대교적 기독교인, 기독교인 중 어느 범주에 속하나? ・・・・・・・ 38
3-9. 율법에 따른 복과 저주에 대하여 ・・・・・・・ 38
3-10. 복음시대에 율법에 의한 복과 저주가 있나? ・・・・・・・ 38
3-11. 율법의 종국은? ・・・・・・・ 39
3-12.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 ・・・・・・・ 39
3-13. 참형상의 그림자로서의 율법 ・・・・・・・ 40
4. 율법을 완성시킨 복음 ・・・・・・・ 40
4-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40
4-2.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는 복음(예수) ・・・・・・・ 40
4-3.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로 와야 할 이유 ・・・・・・・ 41
4-4. 율법에서의 자유는? ・・・・・・・ 42
4-5. 성경은 율법이 얼마만큼 우리를 괴롭히기에 “원수”라고 했을까요? ・・・・・・・ 44
5. 맺는 말 ・・・・・・・ 47
율법과 복음
기도
하나님!
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글을 읽는 이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되는 말씀이 깊이 들어가 이해되게 하시고, 깨달아지도록 하시고, 분별하게하시고, 믿어지게 하시고, 기억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말씀으로 세우는 일에 기여되게 하소서!
우리가 거할 처소의 준비를 차마하시고 다시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들어가면서
필자는 성경을 기초기반으로 하고, 웟치만 니, 베니 힌, 잔느 귀용, 제씨 펜 로이스 등의 영향을 받아 진리 안에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율법과 복음의 교리적 관계가 혼선되고 또 그 율법과 복음이 믿음과 삶의 실천에 대한 연관관계가 혼선이 되어 헤매던 중, 월터, 루터, 캘빈, 무디, 폰 진젠도르프 등의 글을 읽는 중 성령님의 조명하시므로 헤매던 문제에 해결의 접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성경의 하나님말씀을 깊이 깨달은 선배들의 글을 저의 복음보수주의 적 신앙관과 소통되는 부분들을 원용하여 저의 부족한 소견으로 자칭 성경신학적 모습으로 구성하였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월터는 구 ․ 신약 성경의 교리적 내용은 ‘율법’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교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율법과 복음을 구분할 줄 모르면 그에게는 성경이 닫혀져 있는 책” 일수밖에 없다고 한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의 양심 속에서도 본성적으로 그 기능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기에 율법이 쉽게 이해가 되고 잘 납득이 된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본성 속에 전혀 없다.”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이며 그 어느 종교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복음을 믿기란 불가능하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율법과 복음은 논쟁거리였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많은 변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음이 설교되지 않으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율법주의”로 흘러간다. 성경에 너무도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복음”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을까? 의문이 생길법도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기본적으로 “복음”이 전혀 없었음을 알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복음”을 잘 모르는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복음”이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묵상하며,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다. |
월터 박사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이 혼동되었을 때부터 교회는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루터는 “율법을 복음으로부터 구분할 줄 아는 예술을 잘 습득한 사람은 과연 성경에 관한 석학으로 불려질 수 있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이라고 말하였다. 실제로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온갖 모순투성이처럼 보일 것이다. 한쪽에서는 죄를 정죄하고 한쪽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선행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말할 때, 어떤 사람이 혼돈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
그리고 루터가 이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깨우쳤을 때 그는 종교개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성경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속에 각 각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중을 성경신학적으로 파악하여 분별해야 하는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구약의 핵심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초림의 메시아(예수)를 영접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가 신약의 복음으로 죄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그 복음의 핵심을 모르고는 예수 재림의 날에 그 재림의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면 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경에 대하여 잠간 언급하겠습니다.
성경을 크게 둘로 나누는데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구분하고, 구약은 먼저 한 약속 즉, 지나간 약속으로서 그 약속이 예수 초림으로 성취된 것이고, 신약은 나중에 다시 한 약속 즉, 먼저 한 약속은 지나가고 새롭게 다시 한 약속이라는 뜻인데 이 신약은 예수 재림과 동시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법률이 개정되면 먼저 있던 법률은 효력이 상실되고, 나중에 개정된 법률이 효력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의 뜻을 한번 상기해보고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 속으로 들어가도록 합니다.
속(贖) : 값을 치름
대속(代贖) : 대신 값을 치름
구속(救贖) : 값을 치르고 구함
속량(贖良) : 값을 치르고 원상회복시킴
속죄(贖罪) : 죄 값을 치름
1. 율법
1-1. 사전적 의미의 율법
율법(律法) [히]토라(torh)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키도록 내린 규범을 이르는 말.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유대교의 율법에 관한 중요한 장구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오경 이외에, 뒤에 미슈나에 집대성된 구전 율법도 포함한다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율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어의]토라(torh)는 <가르침 ․ 지시>를 의미하는 말이며, 내용은 종교적 법규, 도덕적 규범 및 사회적 ․ 정치적 윤리 전부를 포괄하고 있다.
1-2. 성경적 의미의 율법
ꀥ 이스라엘백성과 이방인들이 ꀥ 모든 국가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
가 되겠고(출19:5)” ꀲ 이스라엘백성이 ꀲ 이스라엘백성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찌니라(출19: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출24:6)”
ꀲ 이스라엘백성에게 뿌릴 피
“언약 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출24:7).”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이방인과 이스라엘백성들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에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백성만 하나님이 소유한 백성이라면서 그 증표로 모세로 하여금 피를 취하여 단에 뿌리고 언약 서를 낭독하니 이스라엘백성이 모든 언약의 말씀을 준행한다고 응답한 후에, 이어서 또 이스라엘백성에게 피를 뿌려 언약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에 언약 서를 체결할 당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출19:5)” 즉, 이스라엘백성과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계약당사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 간에 체결된 언약 서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간에 체결된 언약을 지킬 책임이나 의무도 없고 하나님을 섬기(믿)는 길도 없이 계속하여 이방인들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순간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길(믿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1-3. 성경적 율법의 범위
ꀥ 구약성경 ꀥ 구 ․ 신약성경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ꀲ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눅16:16)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범위를 광의로 해석하면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 즉, 세례요한의 때까지 쓰여 진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고, 협의로 해석하면 모세의 율법을 말합니다.
1-4. 필자가 다룰 율법의 범위
필자의 이 글에서 다루는 율법의 범위는 모세 오경만 다루도록 합니다.
모세 오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율법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오경 외에 만들어서 사용한 율법은 취급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모세 오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구전율법과 유대교인들이 오경 외에 만들어서 사용한 규범
(약 613조항)들은 그 근원이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며,
둘째,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의 취지에서 어긋난 형태로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
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1-5. 율법의 정의
律(법률) 法(법법) ⇨ (히)토라 ⇨ (헬)노모스 ⇨ (영)The Law ⇨ 율법은 가르치고 지시하여 ‘꼭 지켜
야 할 법’이란 뜻입니다.
* 율법의 다른 표현
모세의 율법(행13:39)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요1:17)
모세의 율법과 (십)계명을 통칭하여 율법, 또는 옛 법이라고 부릅니다.
* 율법의 적용 대상…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신31:11)
율법 없는 이방인(롬2:14)
율법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셨고,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이
방인은 율법을 받지도 않았기에 처음부터 율법이 없었습니다.
1-6. 율법을 주신 목적
율법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구체적으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18:20)”, “너희(이스라엘 백성)는 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18:5)”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 치 않게 하심이니라(출20:20)”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으로 오시어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을 말합니다.
율법시대의 사람들은 율례와 법도를 가르침 받아 갈 길과 할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 치 않게 하려고 하는 목적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비로소 율법을 주신 궁극적 목적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에 의하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치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7:13),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3:19),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5:13).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1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4).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를 위함이니(딤전1:9,10)”
뽑아서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와 탐심을 알게 하고,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롬7:13, 7:7, 3:19)”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1-7. 율법의 구성
율법은 모세의 5경 즉 창세기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의 전체를 말합니다.
이를 더 좁혀서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겠습니다.
도덕법(道德法 ․ 출20:1~17)
민(형)법[民(刑)法 ․ 출21:1~23:19]
제사의식법(祭祀儀式法 ․ 출25:1~30:38)
식생활법(食生活法 ․ 레11장)
보건위생법(保健衛生法 ․ 레12~1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8. 율법의 내용
1-8-1.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출20:1~출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 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
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라(출31:18)”
* 십계명(출20장)
* 상전과 종의 제도(출21장)
* 죄의 벌(출21장)
*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22장)
*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출23장)
* 토지소산의 첫 열매는 여호와의 전에 드리라(출23장)
* 우상을 훼파하면 물질의 복을 받고 무병장수하리라(출23장)
* 성전건축(출25장, 26장, 27장)
* 제사장 예복(출29장)
* 제사법(출29장)
* 성전 세금(출30장)
* 안식일을 범하면(출31장)
1-8-2. 모세가 성막에서 받은 율법(레위기, 민수기)
“여호와께서 회 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레1:1, 민1:1)”
* 금기음식(레11장)
* 할례(레12장)
* 간음 자는 돌로 쳐 죽이라(레20장)
* 십일조(민18장)
1-8-3. 모세가 모압 땅에서 받은 율법(신명기)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신1:5).”
* 모든 복(신28:1~14)
* 모든 저주(신28:15~68)
위 1-5-1,2,3이 바로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대(교)인에게 주신 대표적이
며 핵심적인 모세의 율법입니다.
1-9. 율법주의
1-9-1. 율법주의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갈 5:4)” 자가 율법주의자입니다.
↱ 율법주의자들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4). ꀲ 율법이 폐지도지 않았다고 믿는 자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 ↰ 이방계열 그리스도인 ↰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은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
희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고 주장하
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갈5:3).
이방계열의 교회에 할례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예루살렘 총회는 바울과 유대계열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대해 사도들은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할례=율법)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이방계열 그리스도인)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10,11)고 사도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ꀲ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 구원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와의 차이(엡2:8,9). | ||
구 분 |
율법주의 |
복음주의 |
구원의 근거 |
나의 노력 |
하나님의 은혜 |
어떻게 구원 |
행위로 |
믿음으로 |
누구로부터 출발 |
나로부터 |
하나님께로부터 |
구원의 성격 |
나의 노력대가 |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
구원에 대한 나의 태도 |
자랑함 |
자랑치 못함 |
나의 행위에 따라서 복과 화가 결정된다는 사상은 확장된 의미에서의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의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각종 율법을 지켜야 한다
는 사상이며 넓은 의미로는 자기 행위로 구원을 비롯한 각종 복을 얻으려거나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아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상입니다.
또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
람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율법적 이여서 언제나 율법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태도는 율법주의의 전형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다수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유형이었고, 많은 이방인계열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염되었던 율법주의 사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2. 율법주의의 특징과 위험성
우리나라 속담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미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지성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주의 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성을 따라 일하시지 않으시고 믿음을 따라 일하십니다.
율법주의의 특징은 종교적인 어떤 행위들 즉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것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를 강요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특징은 구원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구원에 감격하여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받고 보니 지옥 가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히 보여 그 영혼을 건져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교제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요일1:3, 3:23,24)과 서로 협력하며 선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단순히 행위 자체로만 끝나는 것은 율법주의에 불과합니다.
율법주의가 언뜻 보면 경건해 보이고 거룩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신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골2:23).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이며, “힘써 하나님
의 의를 복종치 아니합니다(롬10:3).”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을 비벼 먹었다”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지
적하며(눅 6:1-5),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지 말 것을 주장합니다(눅13:10-17).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은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동기가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랑거리를 가지려고 하여 교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하신 이
유는 아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1:29).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엡2:8,9)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사실 자랑의 힘은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랑할 수만 있다면 십일조를 목소리 내어 기꺼이 바치고, 예의바른 생활과 심지
어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는 것도 불사합니다(눅18:12).
만일 당신이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거나 큐티를 하거나 제자훈련을 모두 마쳤다는 것이 자랑
거리가 된다면 당신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랑거리가 되는 순간 당신은 바리새인처럼 남을 멸시하게 되고 스스로 교만하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우리가 행위의 대가로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에게 돈을 주며 자기도 베드로와 같은 능력을 갖게 해달라
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4~25).”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눅18:9-14)” 특징이 있습니
다.
그러나 믿음으로 거듭나고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은 죄인들에 대하여 긍휼함
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위험한 점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모든 문제를 장사지내고 새롭게 부
활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누리기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더 집착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자기의 노력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들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인적인 의지가 필요하며,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
의 능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율법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그는 모세율법의 문자적 준수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율법의 문자이며 성령이 아닙니다.
그는 그 문자에 담겨져 있는 참된 교훈보다는 단지 그 문자에 의해 정죄되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쓰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각종 미신에 사로 잡혀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차에 성경책을 두고 다니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믿기도 하고, 십자가를 걸어 놓으
면 귀신이 쫓겨 간다고 믿기도 하며, 열심히 전도하면 그 대가로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하고 이마에 올리브기름을 바르면 성령이 임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쌓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10. 율법의 시효는?
↱ 그리스도가(갈3:16)
“율법은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ꀲ 율법은 믿음(복음)이 오기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함(갈3:23)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눅16:16)”
ꀲ 율법과 복음 혼용시대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
ꀲ 계명과 율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시각까지 유효
율법과 복음은 서로 중복되지 않고 시작과 끝이 분명하며, (십)계명의 율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에서 운명하시는 시각까지만 유효합니다.
아래 도표를 보시고 율법시대의 끝과 복음시대의 시작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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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
운명하신 십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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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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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시대의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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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시대의 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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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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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시대 |
십자가에서 율법이 |
사랑의 법으로 완성 |
성령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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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교 시작 |
유대교 끝 → |
→ 기독교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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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직접 통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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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속죄제사까지 만 율법(유대교) 유지 → |
→ 기독교(복음) 주의 날까지 계속유지 |
위 도표에서 보시는 대로 십자가를 중심으로 율법시대의 끝과 복음시대의 시작이
분명합니다.
1-11. 율법의 기능
1-11-1. 가르치는 기능
“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출18:20)”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출
24:12)” ꀲ Law and Commandments(법 그리고 계명)
율법과 (십)계명은 택해서 모델로 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1-11-2. 복을 주는 기능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세계 민족위에 뛰어나게(신28:1), 하나님 여호
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신28:2), 성읍과 들의 복(신28:3), 몸의 소
생 ․ 토지의 소산 ․ 짐승의 새끼 ․ 우양의 새끼(신28:4), 광주리의 떡 반죽(신28:5), 들어와도
복 나아가도 복(신28:6), 대적을 패하게(신28:7), 창고 ․ 손 ․ 모든 일 ․ 땅에서 복(신28:8),
하나님의 성민(신28:9), 세계 만민이 보고 두려워하리라(신28:10)”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신28:11),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
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계명 ․ 율법)을 듣고
지켜 행하며, 네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계명 ․ 율법)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
우 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3,14).
택해서 모델로 뽑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복을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었기에 그 율법에 의한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1-11-3. 저주의 기능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도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28:15), 성읍 ․ 들(신28:16), 광주리와 떡 반죽(신28:17), 몸의 소생 ․ 토지의 소산 ․ 우양의 새끼(신28:18), 들어와도 저주 나아가도 저주(신28:19), 손으로 하는 모든 일 ․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고 속히 파멸(신28:20), 몸에 염병 땅에서 멸망(신28:21), 패병 ․ 열병 ․ 상한 ․ 학질 ․ 한재 ․ 풍재 ․ 썩는 재앙 ․ 너를 진멸(신28:22),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신28:23),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로 멸하리라(신28:24)
“대적 앞에서 패하고 일곱 길로 도망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신28:25), 시체가 새와 짐승의 밥(신28:26), 종기 ․ 치질 ․ 괴혈병 ․ 개창(신28:27), 미침 ․ 눈멂 ․ 신경증(신28:28), 형통치 못하여 상함 ․ 압제 ․ 노략 ․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신28:29),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신28:30), 소를 잡았으나 먹지 못하며 나귀 ․ 양을 빼앗기며(신28:31),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며(신28:32), 토지소산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압제와 학대(신28:33),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신28:34)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신28:35), 네 임금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려가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신28:36), 너를 끌어가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 ․ 속담 ․ 비방거리(신28:37),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신28:38), 포도원을 벌래가 먹을 것이며(신28:39), 감람나무의 열매가 떨어질 것이며(신28:40), 자녀 포로가 될 것이며(신28:41), 나무와 토지의 소산을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신28:42),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신28:43), 이방인은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며(신28:44), 또 이 율법 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 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계명,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신28:61,62)”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급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자가 없으리라(신28:68).
율법과 (십)계명이 가르치고 명령하는 대로 지켜 그 율법과 십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택해서 모델로 뽑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율법과 십계명은 저주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었기에 그 율법이 이방인을 저주할 수가 없습니다.
1-11-4. 사죄의 기능
“제사장이 범죄 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
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레4:3)”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범한 죄를 깨달(회개)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레4:13, 14)”
“족장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머리에 안
수하고 잡을 지니 이는 속죄제라(레4:22-24)
“평민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 소에서 잡아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 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희생의 기름을 취한 것같이 취하여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 찌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4:27-31)
택해서 모델로 뽑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제사장, 회중, 관원, 평민이 그 범한 죄에 대
하여 깨우침을 받으면, 속죄제를 드려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율법이 없었기에 죄가 죄 인줄도 몰랐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었으며,
사죄하는 속죄제사도 필요하지를 않았습니다.
1-11-5. 범죄와 탐심을 알게 하는 기능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 인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른 자(딤전1:8-10)”에게 율법이 필요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율법시대가 지나가고 복음시대가 시작 되면서 즉, 예수님 십자가 속죄제사 이후부터는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사람이든 간에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율법은 범죄와 탐심을 알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1-11-6.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기능
↱ 십자가의 사건(복음)
“이것(율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7).”
↱ 복음 ↱ 그리스도인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 하도다(갈 3:25)”
ꀲ 예수를 영접한 ꀲ 율법과 관계없이 곧 바로 그리스도에게 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
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이며, 믿음(복음)은 율법(몽학선생)아래에 있지 아니하며, 그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4)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ꀲ 어린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
1-12. 율법의 폐지
1-12-1. 율법폐지의 이유는?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이는 무슨 소리야 율법이 폐지되다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마5:18).” 하셨는데?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폐지 선언에 항변을 하면서 펄쩍 뜁니다.
어떤 분이 항변할지라도 율법은 폐지되었습니다(율법의 문자적 또는 법률적 효력 말소).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19절을 통하여 한번 보도록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율법이 완전해지려면 그 “율법은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속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선언하는 필자도 “계명(율법)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본대로 “율법이 완전해지려면 그 ”율법은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속
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마5:18)”한다고 하
였는데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니 펄쩍 뛸 만도 하지요.
그분은 “없어지지 아니하고(마5:18)” 바로 그다음의 “다 이루리라(마5:18)”하신 말씀을 아
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마5:18).”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정 반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엡2:15)”하셨
다고 선언합니다.
어떻습니까?
한쪽에서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또 한쪽에서는 “폐하시고” 정 반대되는 것 같아 엇갈리십
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하신 말씀 중 “다 이루리라(마
5:18)”하신 말씀의 의중을 깨달으면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
지 아니하고” 하셨는데,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는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라 하십
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의 끝부분에 “다 이루리라”하신 말씀은,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실 것을 “다 이루리라”고 마태복음 5장 18절에
서 미리(예언) 표현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마5:18).” 직접 말씀하신 뜻은 율법이 영원히 살아서 그 효력을 가진다고 말씀하셨다 기 보다는 율법이 본래 요구하는 것의 “성취와 완성의 사랑”을 통해 그 요구를 “다 이룬다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며, 그리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을 하실 그 당시에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이전” 즉 죽으셔서 이루기 이전 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천지가 없어지기 이전”까지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어린아이의 선생)의 기능과 죄의 기준 및 판단 설정의 기능이 계속되기 때문에 즉 예수님의 재림과 그 이후까지 거울과 경계로서 계속되어야 하므로 “율법의 일점일획도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리라(마5:18)”하신 진행형의 이 예언의 말씀을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
다(요19:30)”라고 완료형으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특히 “다 이루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 이룹니까?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다 이루시고 온전케 세우십니다(롬13:8~10, 갈5:13,4).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는 순간 그 시각에 율법이 사랑의 법으로 다 이루어 졌기 때문
에 율법이 사랑의법(복음)과 함께 동 시각에 그 효력을 발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법률적 효력은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의 법 뒤로 물러가야 됩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등불은 그 역할이 끝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영원히 살아서 그 효력을 지금 현재 이 시각에도 가진다고 해석한다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무효가 되어 지금도 제사의식법이 살아서 짐승을 잡아 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지내야 하며, 안식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
게 세우느니라(롬3:31).
여기서 굳게 세운다는 의미는 율법의 법률(문자)적 효력은 폐지되었지만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게 하고 죄가 된다고 알려주는 기준의 기능은 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고전9:21)”으로 거울과 경계로서 굳게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유효기간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갈3:19)”라는 사도의 말씀은 옛 언약으로서 율법의 법적 통치가 끝났다는 의미이지 그 율법 속에 있는 “교훈의 기능까지 상실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고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
의 몸을 깨드려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폐지시켰는가?
복음 즉, 사랑의 법을 세우려고 폐지하였습니다.
↱ 계명, 율법 ↱ 사랑의 법, 복음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ꀲ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완성
하나님은 둘째 것 즉, 사랑의 법(복음)을 세우시려고 그 첫 것 즉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율법을 폐지시킨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의 義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을 폐지하였습
니다.
율법의 시효 만기 일 ➡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ꀲ 예수(메시아 ․ 그리스도)
모세로부터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까지는 (선)율법시대이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는 율법과 복음을 함께 혼용하여 적용되는 시기를 (후)율법시대라고 부르며, (선)율법시대와 (후)율법시대를 모두 합쳐서 “율법시대”라고 합니다.
율법은 역부족해서 ➡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과 옛 (십)계명이 연약, 무익하여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함으로 폐지(히7:11, 17,18)” 하였습니다.
율법제사 완성하기 위해 ➡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ꀲ 양을 잡아서 제사 ꀲ 예수님의 몸을 드리는 제사
의(義) 완성하기 위해 ➡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
심(롬10:4)” 율법 행위로 의를 얻지 못함(롬3:20)으로 율법을 폐지 ↵
1-9-2. 계명과 율법을 누가 폐지시켰는가?
예수님이 폐지 시키셨습니다.
“(십)계명의 율법을 자기(예수)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
“그리스도는 …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영적으로 볼 때 아직도 (십)계명의 율법 폐지와 율법의 마침을 거부하고,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고 천국을 가고자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한 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1-9-3. 어디에서 율법을 폐지시켰는가?
“원수된 것(계명의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심(골
2:14)” ꀲ 십계명
예수님은 계명의 율법(엡2:15)과 의문에 쓴 증서(십계명)를 십자가에서 폐지하셨습니다.
1-9-4. 율법의 어느 부분을 폐지시켰는가?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예수)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
ꀲ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儀文)(고후3:7) ➡ 돌 판에 친히 쓰신 십계명(신4:13)
ꀲ 의문 ➡ The Law of Moses was written on stone(십계명)
예수님께서 의문에 속한 (십)계명과 율법을 예수의 육체로 폐하시므로 서 (십)계명의 모든
율법이 다 폐지되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율법 중에서 도덕법은 폐지되지 아니하고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한다면, 도덕법이 살아 있다는 성경 말씀의 구절로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1-9-5. 율법폐지의 언약 적 근거와 복음시대로의 이동
아직 율법이 없을 때(양심시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메시아(그리스도)가 오심
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으로부터 430년 후에 생긴 모세의 율법이 첫 약속(그리스도의 오심)을 폐할 수 없고, 오히려 첫 약속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둘째 것인 율법의 시효가 끝났습니다(갈3:15~19).
율법 폐지의 언 약적 근거와 복음시대로의 이동 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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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오심 先 약속 |
→ 그리스도 오심 약속성취, 예수탄생 → |
예수의 십자가 |
죽음→ |
←율법 |
완성, 義 실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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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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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그리스도 오심의 그림자↗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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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8 |
창26:4 |
창2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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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 |
라함 |
이 |
삭 |
야 |
곱 모 |
세 ← (선)율법시대 → |
←율법+복음 혼용시대→ |
→ 성령시대 → | |||||
←(후)율법시대→ | |||||||||||||
←예수 공생애 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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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 광야시대→ |
← ← 1 5 0 0 년 → → |
→ 예수 재림 이후까지→ | ||||||||||
←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던 시대 → |
← ← 율 법 시 대 → → |
→ 완성된 율법으로 복음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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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폐지 →↑→ 복음시작 |
위에 도표를 보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던 시대를 지나 430년간의 광야시대와 (선)율법시대 (후)율법시대(율법+복음 혼용시대)를 포함하여 전체의 율법시대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기점으로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언약 적 근거들이 뒷받침을 합니다.
2. 복음
2-1. 복음이란?
복음(福音)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을 예수께서 이루어 즉 “예수의 탄생, 생애의 사역, 대속 적 죽음, 장사지냄, 부활, 승천, 재림, 하늘나라에 입성하여 영생하는 복의 좋은 소식의 새 노래”를 말합니다.
2-2. 죄로부터의 해방선언
2-2-1. 죄에서의 해방
그리스도인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마1:21).
만일 우리가 죄 성에서 구원받았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이 죄 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요?
우리가 죄 성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죄 성을 하나님께서 모두 없애주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거하는 한 우리의 죄 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성에서 해방시키셨다는 것은 죄 성보다 더 강한 성령의 능력으
로 그 죄 성을 이길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에게도 만유인력이 작용하고 있지만 떨어지지 않고 날 수 있는 것은 만유인력
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 날개에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
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게(롬6:6)”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 성에서의 효과적인 해방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죄 성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은 즉 죄를 이겨서 자유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
력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방할 수 없는 숭고한 삶입니다.
못마땅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도 힘든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 속에 있는 도덕법으로는 더욱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법도 폐지하고, 복음의 사랑의 법과 성령의 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으로 영원히 죄의 유혹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옮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와 계속 싸워야 하는 격전장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격전장에서 그리스도 보혈의 귀중함과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
우는 과정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의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2-2-2. 죄에 대한 올바른 태도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서 났음이라(요일3:9)” ꀲ 말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롬6:11)”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
다.
소위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죄를 짓기를 즐긴다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 한 것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갈5:19-21)”한다고 경고 합니다.
먼저 구원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거듭나서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아닌가를 종종 묻습니
다.
그러나 구원은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는 구원을 받았는데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다시
물에 빠져도 안 죽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죄에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
물러 있다면 그의 구원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의 구원은 의심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믿음의
파산).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니 이다(요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이 말씀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옥에서도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는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 간 사람을 두 번째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생이란 영원히 사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것임이 분
명합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관계로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마치 형광등과 전기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형광등은 전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빛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유업을 소유하기위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죄에 대
한 올바른 태도를 취하여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2-2-3.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마귀는 우리로 죄를 범케 하는 것보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로 인해 절망할 때 그는 한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가 이러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 데는 몇 가지 근거가 되는 성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마5:48)”는 우리
주님의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저(여
호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 하리로다(시:34:22)라고 조언을 해야 합니다.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든 불완전을 정죄합니다.
복음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을 요구합니다.
계속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하지 못한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라고 말씀하십
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거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가 평안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보다 더 거친 음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정죄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똑바로 걷는 법을 가르치지만 그가 당장 똑바로 못 걷는
것에 대해 야단치지 않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이치입니다.
완전하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가 죄를 멀리하여 성숙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성숙하여 성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2-2-4. 죄에 대한 보상 문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
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누19:8).
헬라어로 조롱하고 욕할 때 사용하는 격멸적인 말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자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인간관계에서 형제에게 보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보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선한 양심 때문에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반드시 보상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율법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종종 그리스도인을 노예로 만듭니다.
보상의 기준은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것들이며 상대방의 입장에
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후 그는 나단 선지
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통곡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기 죄가 바로 ‘주님께(4절)’ 범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주님께서 자기를 씻기신다면
자기는 정으로 깨끗케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7절).
만물은 다 주님께 속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시면 진정으로 용서되는 것입니다.
보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우리의 선한 양심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
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보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상하는 것은 책임 있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마십시오.
율법은 그 사람의 과거의 전력만 따집니다(출22:1~3).
그러나 복음은 그 사람의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엡4:28).
짐짓 죄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짐짓 죄는 도덕적 과실을 뜻하지 않고, 기독교 진리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며,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후 그 신앙을 공공연히 버리고 배도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뜻하며, 이들에게 속죄(죄 값을 치름) 하는 제사가 다시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도를 하지 아니하는 한 “짐짓 죄”는 나와 관계가 없는 죄입니다.
↱ 성령에 고의적으로 반항
단,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마12:31)”, 그 외의 죄는 “예수의 피가 우
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1:7).”입니다.
자기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나의 죄는 너무 커서 십자가의
피로는 대가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말은 십자가의 대속(대신 죄 값을 치름)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종종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요나와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욘2:4).” ꀲ 하나님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어떤 사람이 상습적인 죄 때문에 심한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마귀에게 송사당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그 죄를 벌써 열 번이나 범했다.
오늘은 이렇게 자백 하지만 너는 내일 또 범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너의 자백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 죄를 완전히 버린 다음에 자백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끝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18:22)” 용서하시고,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 니라(롬8:12)”고 조언해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번 범한 죄에 대해 자백할 엄두를 못 냅니다.
이러한 일로 절망될 때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 리요 하거니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0,11)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겔
33:10,1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포기하고 죄악 중에 죽으라.”고 말하며 유혹하고 쓰러지게 만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사단의 유혹을 따르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8:21-22).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도 이렇게 용서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000번을 넘어져도 하나님을 향해 넘어지고, 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십시오.
비록 내일 또 범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6:34).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바로 지금 나는 정결하게 되어 있어야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은 죄 때문에 고민하고 그 죄책감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다시 죄를 범하지 않
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용서받아 정결케 되어 천국영생에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죄를 범하지
않게 합니다.
당신의 습관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
오.
당신을 괴롭히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적하십시오.
“그래,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그러나 너에게 빚진 것이 아니다. 너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롬8:12 참조). “
대부분의 습관적인 죄들은 연약하기 때문에라기보다 버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됩
니다.
가까운 형제나 인도자와 상담하고 함께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하십시오.”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
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12:20).” ꀲ 떠나지
하나님을 믿는 데에서 떠나 배도를 하지 아니하는 한 “짐짓 죄”는 나와 관계가 없는 죄입니
다.
2-2-5.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길 것인가?
율법과 복음으로 잘 정리된 교사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죄인보다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면서 “다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로 모신 것이 다를 뿐이다.”라
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옳은 가르침 입니다.
그러나 무엇에서부터 구원해주신 “구주”란 말인가?
죄와 악한 행동과 타락에서부터 구원을 해주신 구주 이십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으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그 결과 하늘나라 영생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죄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
해 몇 가지 성경적인 원리를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롬6:11).
죄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하라(마 6:13).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시1:1,2 ).
죄의 유혹을 무시하라(롬6:6, 고후5:17)
마귀를 대적하라(엡5:18, 롬8:13).
믿음의 고백을 하라(롬7:15,21,25).
주님께 맡겨라(약4:7)
죄의 환경을 피하라(롬1:17)
성령에 충만 하라(요10:11,28)
우리는 종종 원치 않는 생각 때문에 괴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예배의 그 시간에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으로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원치 않는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바로 그것을 깨닫고, 그러한 생각과 유혹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우리의 초인적인 의지로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성령에 충만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는 이 구절을 오랫동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구절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
그러나 실제로 위의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위의 구절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도 그를 기쁘시게 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한다.
이제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여 살겠노
라!
그렇습니다.
승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단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미국을 가는 비행기 속에 따고 있으면 내가 미국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목자, 나의 주님으로 믿어 의지하고 따르게 해야 합
니다.
2-3. 그리스도의 법
2-3-1. 그리스도의 법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
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
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이니라(마22:37~40)
ꀲ 사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나 요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사도들의 교훈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 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8-10)”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그리스도법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의 동기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 하며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고전13:3).
전적으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는 법은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조언은 필요할 수 있어도 잘못했을 경우 처벌하는 법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곧 율법이 죄인에게 선언하는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뜻함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나니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갈5:13)”
“사랑으로 종노릇”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넉넉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가 사랑이요 그 사랑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랑으로 종노릇”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을 못한다고 “율법”으로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종노릇”을 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사
랑으로 종노릇” 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그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 사랑으로 살수 있도
록 하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3위 1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를 그 “사랑의 법 안”에서 살도록 하
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가 아닙니다.
사장은 종업원들에게 ‘일’을 요구하며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보다는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또 형제를 사랑하는가?
이것은 사랑의 법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지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
니다.
만일 사랑이 싸늘하게 식어있다면 즉시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을 온전히 실천한다면 율법을 넉넉히 행하고도 남음
이 있습니다.
↱ 서로 사랑하라(요13:34,35)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을 비교해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율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6~9).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율법이 600여 가지의 법이라면 그리스도의 법은 100여 가지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차이점을
두면 안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법은 율법보다 훨씬 수준이 높아서 더욱 지키기 어렵습니다.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너희 원수를 사
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십니다.
율법은 간음을 하고 들켰을 때 율법을 범한 것이 되지만 복음은 음욕을 품으면 벌
써 간음이 됩니다.
율법은 죄냐 아니냐를 판정하며, 죄를 지은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법인 반면에, 그리스도의 법은 정죄하는 법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 되고 의롭게 되었으며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표준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돌비에 새겨진 문자라면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심비에 새겨진 영적인
법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법(새 계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성취될 수 있는 “사랑”입
니다.
ꀲ = ↵
2-3-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법 위에서 출발
그리스도인은 율법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
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과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법도 기준도 없이 살아가는 무 율법주의자들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무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죄하는 무 율법주의란 아무런 사랑의 짐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말하
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 살면서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사
람을 가리킵니 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따라야 할 생활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성령”, “믿음과 착한 양심” 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교훈의 말씀을 가리키며 그리스도
인들은 바로 여기에 착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그의 말씀에
전적으로 따라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21)”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은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딤전 6:3)”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함을 전제
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곧 법입니
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그리스도인은 율법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위에서 출발”합니다.
2-3-3. 율법주의를 능가하는 영적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규례들
의로워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지키면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규례들을 지킨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규례는 결코 양심을 속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삶의 유익을 위하여 몇 가지 좋은 규칙들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내가(바울)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켰다(고전11:2)”고
합니다.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사도들)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 사도들의 유전을 잘 지키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유전(遺傳/tradition)이란?
헬라어로는 파라도시스(παραδοσις)라고 하는데, 보통 구전(口傳)하는 불문율(不文律)이라
고 말해집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안식 후 첫날)에 교회에 가는 것은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유전’으로서 성도들의 신앙에 많은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전’을 단지 자유라는 명목으로 무조건 무시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
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정중히 처리하라는 바울의 일반적인 사상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인의 모임들에서 질서와 정직, 평화와 일치를 유지시키는 규례들은 물론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니요, 양심을 구속할 수도 없으며, 그 어떤 경건과 관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사도의 규례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들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법으로 행세하여 “양심을 속박할 경우” 우리는 이러한 규례들에 대하여 단호히 항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례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확보해주신 자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종교를 모호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위엄을 땅에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의 양심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신다. 다음의 말씀은 확고부동한 진리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을진대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고전3:21-23). 인간들의 계명들에 불과한 가르침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이다(마15:1-20). - 캘빈 - |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
도”하는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단6:10).
바울은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하는 규례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에 대한 규례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9:14-19).
매일 규칙적으로 경건의 시간 및 기도의 시간들을 갖고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하며 금식하
고 철야기도 하는 것들은 참으로 영적성숙에 큰 유익을 주는 규례들 입니다.
이러한 규례들이 참된 유익과 자유를 주는 규례인지 아닌지 알고 종노릇하는 것과 모르고 종
노릇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를 능가하는 영적 성숙을 위한 그리스도의 규례들은 영적성숙을 위해 필요하
고, 믿음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주지만, 그 차체로서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님도 알아야 합니
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계명들에 불과한 가르침들을 가르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마15:1-20)이 되기 때문입니다.
2-4. 복음에 합당한 삶
2-4-1. 복음시대의 저주
복음과 믿음 그리고 성령의 시대는 율법이 폐지되고, 그 율법이 사랑의 법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기초한 저주가 없어 졌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저주가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형벌, 곧 지옥 불 못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세의 저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복과 저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면 사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ꀲ 바울 등 ꀲ 십자가의 도(갈6:14) ꀲ 율법을 따르도록 하는 것(갈5: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4)”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막
11:21).”
복음시대는 거듭난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요(벧전2:9),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ꀲ 율법시대의 제사장의 주 임무 : 이스라엘백성(죄인)의 죄를 사해주는 제사 집례
ꀲ 복음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의 주 임무 : 각 성도가 하나님께 직접 죄를 자백(회개)
누가 누구를 저주하고, 축복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목사에게는 축복과 저주 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축복과 저주를 할 수 있었던 제사장은 축복과 저주를 할 수 있는 근거 법 즉 율법이 폐
지되므로 율법 속에 있는 제사장직분제도 그 자체가 율법과 함께 폐지어 신약시대에는 율
법에 근거한 제사장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제사장직분이 레위(아론) 자손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히5:6, 시110:4,
히7:11)즉, 제사장의 직임이 예수님에게로 이동되면서 목사나 성도나 모두 다 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며(벧전2:9),
셋째, 신약시대에 새로이 제정된 목사만이 축복과 저주를 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
문이며,
넷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므로 목사는 축복과 저주 권이 없고, 예수님만이 하나님 말
씀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하고, 자기(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 지옥의 저주를 하십니다.
2-4-2.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법을 좇아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고전3:16, 롬8:9).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부여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정의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말씀하고 있
습니다.
로마서 7장 3절에 의하면 “영의 새로운 법으로 섬길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 심비에 새겨질 수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법조차도 모세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문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무조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잔인한 명령입니다.
그는 걸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하셨고 그는 즉시 일어나
침대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그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가 불가능한 명령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부단한 연습이나 극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중
풍병자에게 놀라운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논리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교훈들은 너무 고상해서 죄인들이 지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38년 된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은 것처럼 기쁨으
로 그 말씀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언제나 새로운 계시를 받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
닙니다.
성령의 하시는 일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적시 적소에서 기억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소원을 일으키심으로서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게 하시고 우리로 육체를 거슬
러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갈5:16, 고전2:12, 요14:26, 요16:13, 빌2: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법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
다.
2-4-3. 믿음과 착한 양심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
니라(딤전1:1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곘느뇨(히
9:14).”
양심이 파괴된 사람에게는 믿음도 있을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어떤 일이 비록 양심에는 꺼려지지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말씀에 위배된다면
그 일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양심과 위배되는 것도 거절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보다도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보다 그리스도의 법이 차원이 더 높으며, 고상하며, 거룩하다는 것입
니다.
반면에 율법주의에 오랫동안 젖어있었던 사람은 종종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합니
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는 믿음으로 그런 가책을 떨쳐버리고 양심을 복음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롬2:14,15).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것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
는 믿음(딤전1:5)”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서의 자유가 마치 양심에서의 자유인 것처럼 말하는 데 그것은 양심을
율법과 같은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14절, 15절에서 이방인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고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
고 했지, 양심 자체를 법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이란 입법부라기보다는 사법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법을 가질 때 양심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때 양심이 새롭게 되므로(히9:14)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양심은 믿고 확신하는 것으로 판단하므로 양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또한 믿음을 따라 산다
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양심이 파괴된다면 그에게 믿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딤전1:19).
“양심의 자유”와 “양심에서의 자유”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는 속박당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인 양심을 따라 사는 자유를 말하는 반면 “양
심에서의 자유”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아 더 이상 양심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죄악의 충동
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바로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특성상 양심은 잘못된 지식에서 나온 불필요한 가책을 가질 수도 있으며 혹
은 무지에서 나온 무감각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은 계속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되어야 하며 우리는 말씀과 양심이 일치될 수 있
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과 선한양심을 가지라고 한 성경말씀의 명령을 기억합시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하는 말씀은 바로 양심과 관련
된 말씀입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양심에 거리낀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법이 율법보다 더 어렵지 않습니까?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계명(법)은 율법의 도덕법보다도 고상하고, 그 힘이 크고, 거룩
하며, 차원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폐지되어도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율법의 도덕법을 지키고도 더 넉
넉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행동지침입니다.
그러나 양심에 거리끼지만 않으면 어떠한 행동도 죄가 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양심은 매우 둔해서 명백히 죄가 되는 행동에 대해서도 가책을 안 받
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의 경우는 믿음의 결여로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송사당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의 양심은 믿음의 확신이 결여된 상태로 계속 사탄에게 송사당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트집잡히며 지식으로는 문제없다는 것을 알지만, 양심은 계속 괴롭힘을 받습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다가 잘못 넣어서 우체통의 페인트칠이 살짝만 벗겨져도 그는 보상 문제
로 우체국장을 찾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산을 걸어가다가도 혹시 이 산의 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낙엽을 밟은 것조차 가
책을 느낍니다.
상대방이 웃지만 않아도 혹시 상처를 주지를 않았는지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용납할 수 있는 사소한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피곤할 정도로 조바심을 냅니다.
이러한 양심은 죄에 대해 민감한 양심과 언뜻 구별되지 않으나, 분명히 다른 것으로서, 일종
의 병든 양심입니다.
송사당하는 양심은 어떤 범죄 때문에 생기거나(고전8:7) 혹은 정신적 결벽증세로 생성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송사당하는 양심은 근본적으로 자기 의(義)에 집착하는 율법주의 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지 ‘송사당하는 양심’을 가지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소한 것에도 죄책감을 갖는 민감한 양심을 송사당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잘못을 사소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은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일도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이것을 송사당하는 양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통 선한 양심과 송사당하는 양심의 차이는 그것이 전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사랑에
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내가 완벽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가로 분별합니다.
송사당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거의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주님
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송사당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참고로 하여 그런 상황에서 벗어
날 필요가 있습니다.
- 주님의 자비하심을 믿으십시오(엡2:7). - 주님은 트집 잡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자비하십니다!
트집 잡는 자는 마귀이며 우리는 마땅히 대적해야 합니다.
- 주님께서 용납하심을 믿으십시오(롬15:7).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
니다.
우리는 언제나 허물투성이며, 주님 나라에 갈 때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십니다.
주님께서 용납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기뻐하십시오.
- 지나치게 따지지 마십시오(고전10:25). -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 단순히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고 너무 깊이 따지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이쑤시개 장사가 이쑤시개가 유흥가로 팔려가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식입
니다.
그는 단순히 이쑤시개를 파는 것으로 끝나야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에 까지 상상
하지는 마십시오.
- 일반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용납되는 행위에 대해서 믿음으로 행하십시오(전7:16). - 보통
가족끼리는 양말을 바꾸어 신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에서 용납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도 하나의 공동체로서 용납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에서는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서 포도를 가져가지는 않고 단지 따먹
기만 하면 전혀 범법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기준대로 살라고 하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보다 차원이 훨씬 더 높은 그리스도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면서 남에게 도움을 전혀 안 받고 살 수는 없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은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 마귀를 대적 하십시오(약4:7, 계12:10). - 송사당하는 양심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강한 믿
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대적하고 강한 믿음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남자답게 강건하여야 하
겠습니다(고전16:13, 롬14:1,15:1).
날마다 송사당하며 피곤하게 사는 형제자매들이여!
부디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4-5.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
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 용서함에 대하여 확신하고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기쁨도 잠깐, 곧 깊은 고뇌 속에 빠집니다.
그것은 자신이 계속 반복해서 짓는 죄 때문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끊임없이 용서해 주신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이 죄로 인해 이제 지옥 갈 위험
은 벗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은 괴롭고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어느 누구도 죄를 계속 지으면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 정도로 양
심이 타락한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완전치 못함을 성령님이 근심하시지는 않으나 우리가 죄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근심하십니다.
내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도록 하게 하는 성향이 내 속에 있습
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죄 성입니다(원죄).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죄 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없
습니다.
2-4-6. 복음에 합당한 생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1:27,2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청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
지 이것들을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빌4:8,9). ꀲ ?
우리는 율법의 도덕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보다도 더 수준이 높고, 고상하고,
거룩한 복음의 요구 즉 그리스도의 생활지침인 그리스도의 규례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옛 습관에 젖어있었고,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비 복음적인 교훈들이
널려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고, 복음을 반대하
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살아야 합니다.
2-4-7.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더 부러 화평을” 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5:1).
하나님과의 화평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은 “믿음으로 견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롬
1:17,11:23)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에게는
루터도 그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중에서 |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분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양심
은 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 탐닉하고 있으면서 단지 과거에 자신이 믿음을 고백했
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양심이 평화롭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양심
을 속이는 거짓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십자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실체를
계속하여 받아들일 때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양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의 양심이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속에 우리의 평화가 있습니다.
날마다 죄의 고통 속에서 살던 마르틴 루터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습
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어떤 죄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듯이 당신의 고통스러운 양심도 당
신이 믿음을 가지는 순간 치유될 것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여전히 평화를 누리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가르침이 불 경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율법주의 골수분자였던 바리새인보다 훨씬 더
경건하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4-8. 은혜를 누리는 삶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서(롬5:2)”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시골에서 경운기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할머니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옆을 지나가다가 할머니
가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할머니를 태워드렸습니다.
그리고 한참 가다가 뒤에 탄 할머니가 계속 쩔쩔매고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이게 웬일
입니까?
할머니가 계속 그 짐을 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왜 짐을 이고 계십니까?”
청년의 질문에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을 내려놔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이런 식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누리
고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누워서 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가 무언가 하기를 원하실 거야!”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30) 라고 조언해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어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을 때 그것은 곧 하
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믿을 때에 비로소 그것은 하나
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 강박관념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하며
감사하는 삶이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 기쁨이 충성스러운 삶으로 승화될 때, 그는 진정한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무엇을 해드리는 사람보다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사람을 더 고맙게 여기신다. - 폰 진젠도르프(구세군 창설자) - |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엡3:14-19)”를 간구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의 일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러저러한 봉사와 전도를 하라는 것 등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의 사랑을 받기도 전에 일터로 내쫓긴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은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후에야 하늘나라와 지옥에 대한 실체를 이해하게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봉사도 하게
되는 것이고, 지옥 가는 영혼이 너무도 불쌍히 보이기에 전도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합니다(롬1:17).
그리고 믿음은 일회성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연속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
비록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 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
는 한, 우리는 늘 세움을 받고, 결국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하늘의 상은 행위로 받는다.”는 말은 매우 오해가 될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마치 믿음과 행위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상은 믿음이 아닌 오직 행위로만 받는다는 말은 틀립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된 것처럼, 믿음 없이 행한 것도 헛것 입니
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이 말씀은 바로 행동 속에 있는 동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
으로 이어져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상은 바로 그러한 믿음에서 나온 순종과 사역들에 약속된 것들입니다.
2-4-9. 하늘나라의 상
복음으로 “하늘나라의 신령한 영생의 복”을 한량없이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선행으
로는 복음으로 받은 그 “영생의 복” 위에 더한 복을 얻어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으로 완전하게 파선했을 때, 복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값없이 거저 받
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선을 행했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
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눅17:10)”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할 때 종종 지치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러할 때 “하늘나라 영생의 상”을 받은 약속은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입니
다.
종종 “하늘나라 영생의 상”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봉사하며 주님께 순종하
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동기를 제공 합니다.
“하늘나라 영생의 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복음으로 합당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이
끌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은 말하기를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복음은 말하기를 ‘살아라. 그리하면 네가 이것을 행하리라.’
율법은 말하기를 ‘네가 빚진 것을 갚아라.’ 복음은 말하기를 ‘내가 네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노라.’
율법은 말하기를 ‘죄의 값은 사망이니라.’ 복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니라.’
율법은 말하기를 ‘죄를 범한 영혼은 죽을 것이니라.’ 복음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율법은 말하기를 ‘새 마음과 새 정신을 가져라.’ 복음은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새 마음을 주며 네 속에 새 정신을 넣어 주리라.’
율법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전부를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느니라.’ 복음은 말하기를 ‘허물의 사하심을 얻고 그의 죄를 가리 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율법은 말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복음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율법은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복음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나?’
율법은 ‘거룩함을 요구한다.’ 복음은 ‘거룩함을 주신다.’ - D. L. MOODY - |
디엘 무디가 정리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보셨지요?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義)에 이를 수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율법을 완전히 폐지 하셨습니
다.
학력이 없어 무식하다고 알려진 디엘 무디는 율법과 복음을 통찰하는 은혜를 받아 능력 있는 교회학
교의 교사이자 전도자 이였으며, 부흥사로서 성령님의 사역을 일으키는 큰 도구로 사용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스스로의 열매를 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절로 열매를 맺습니다(요15:4,5).
율법주의자는 대가를 바라고 일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합니다(벧전1:8,9).
율법주의자는 자기 힘으로 봉사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합니다(빌3:3).
율법주의자는 여러 가지 종교적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갈5:6).
율법과 복음을 올바로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모든 교리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은 율법과 복음을 어떻게 그리고 충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인데, 말로만이 아니라 느낌과 체험을 통하여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과 양심에 근거하여 그 두 가지가 잘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말로써는 표현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직접 체험을 통하여 율법과 복음을 올바른 자리에 두는 일은 쉽지 않다. - 마르틴 루터 - |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다시는 종의 멍에(율법)를 메지 말라(갈5:1)”고 강조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폐지됨과 동시에 그 율법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완성된 그 복음으로 죄에서 구원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여 하늘나라의 영생에 들어가는 구원의 노정(과정)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3-1. 누가 영생에 들어가는가?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
ꀲ 의인 ⇨ 자신의 죄를 100% 씻음 받은 자 ⇨ 예수를 믿어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께서 너 죄 없다고 하는 것(稱
義)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인이 된 후, 요한계시록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해석한 자의 말을 듣는 자들과 그 가
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어 하늘나라의 영생에 들어갑니다(계1:3).
3-2. 죄인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3:9)”
진리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3-3. 구원에 이르는 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3-4. 율법을 믿고 따르는 자의 결과는?
“우리(바울 등)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5:4).”
“어찌하여 의문(율법․십계명)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골2:20~22)”
하나님은 “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하시면서 어찌하여 율법의 십계명에 순종하느냐며
“붙잡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3-5. 율법을 따르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ꀲ “율법의 선생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 율법주의자”
변론, 족보, 분쟁, 율법을 따르는(딛3:9) ↰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9-11).”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율법을 따르는 자를 이단과 부패한자”로 판결 하셨습니
다.
3-6.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 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그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3-7. 복음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과 타협을 하나?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갈2:19)”
ꀲ The Law has no power over me.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다만, 율법은 거울과 경계로 사용될 뿐입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루터의 견해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있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을 가르치고, 죄를 고발하고,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약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로 인한 은총과 평안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율법서, 신약은 복음으로 불릴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민족의 율법이고, 이스라엘을 한데 묶고, 이스라엘에게 만 타당한 민족의 율법이다. 그 자체로서 구약은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없고, 그리스도인들을 한데 묶지도 못한다. 율법은 모세의 의식법과 법전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또한 상당히 일반적인 구분에 반하여 십계명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율법의 원천이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중에서) |
3-8. 나는 과연 유대교인, 유대교적 기독교인, 기독교인 중 어느 범주에 속하나?
* 유대교인…………………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고 세상 복도 받는다.
* 유대교적 기독교인………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율법을 지킴으로 세상 복을 받는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고, 율법을 지킴으로 성화 된다.
* 기독교인…………………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을 따라 성화 되어가고, 죽어서 영화를
누린다.
[유대교인]은 율법이 폐지된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할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며.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은 율법이 폐지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 일부분은 율법이 살아있다고
하며(말씀의 근거 제시요망) 그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의무화하여 은혜의 복음과 병행해서 믿는
자들이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 율법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되었음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 율법이 100% 폐지되었음을 알고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자들입니다{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도덕의 범주에 있는 율법(십계명 등)은 그리스도의 법으로 지켜 행하게 됨}.
당신은 지금[유대교인] 인가요?
아니면, [유대교적 기독교인] 인가요?
그도 아니면, [기독교인] 인가요?
스스로 정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9. 율법에 따른 복과 저주에 대하여
법의 힘이란 그 법이 지닌 형벌의 구속력에 있듯이 율법도 복과 저주라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
습니다.
율법이 지니고 있는 강력한 힘을 보십시오.
∘율법은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를 하는 말씀이다(수8:34).
∘계명을 지킨 자는 천대 은혜 받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 값은 3, 4대까지 내려간다(출20:5,6).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신13:6-11).
∘부모 공경은 장수의 복, 부모 구타와 저주 자는 반드시 죽이라(출20:12, 출21:17).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출21:12).
∘눈은 눈, 이는 이, 상함은 상함, 때림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에 일하는 자는 생명이 끊어지리라(출31:14).
간통한 사내 ↰ ↱ 음녀 : 음탕한 계집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와 음부(淫婦)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20:10). ⇨ 간음한 여인의 앞에서 예수님께서 땅에 쓴 것으로 예상, 왜냐하면, 간부와 음부를 모두 죽여야 하는데, 음부만 데려오고, 간부는 데려오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온전한 십일조는 넘치는 복을 받고,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면 저주받음(말3:8-12).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 땅의 모든 저주를 받음(신28장).
∘모든 율법을 지키면 이 땅에 있는 재물, 권세, 지배, 토지, 건강 등의 복을 받음(신28장).
이렇게 “강력한 저주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제사로 무효화(폐지) 시키셨습니
다.”
3-10. 복음시대에 율법에 의한 복과 저주가 있나?
복음시대의 율법은 구원의 그림자로서 죄를 깨닫게 해주고, 죄인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즉,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모세 시대는 율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며 죄 씻음 받는 법이기에 율법 속에 죄인의
생사화복이 걸려 있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도구이기에 결코 그릇됨이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인간에게 전적으로 저주의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지니고 있는 강력한 요구는 율법을 지켜 순종하면 복이고, 율법을 어겨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으니,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것 이지만, 한 단계를 넘어보면 율법을 100% 지킬 수 없기에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의 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 복에 매달릴 수밖에 없기에 [폐지된 율법]을 붙잡게 됩니다.”
성경을 펴놓고 분명히 확인하십시오!
“복음(기독교)시대에는 율법의 복과 저주가 없습니다.”
“그것이 있다면 복음시대가 아니고, 율법(유대교)시대 입니다.”
복이라면 구약 ․ 신약을 가리지 않고,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지도 않으며, 양심과 윤리마저 따지지 아니하고, 동양의 기복사상에 기인하여 얻은 “기복신앙의 종교”라는 오명을 이제는 벗읍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루터의 견해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의 결정적 구분은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다. 루터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을 서로 반대 위치에 두고, 율법을 죽음의 사역으로, 복음을 영의 사역으로 설명한다(고후3:6,7). 율법은 죽음으로 인도하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에 의해 영생을 선포한다.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두고, 복음은 은혜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율법은 곧 정죄하고, 그 정죄하는 율법은 무효화된 것이다.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중에서) |
복음시대에는 율법에 기초한 복과 저주는 없습니다.
3-11. 율법의 종국은?
“죄를 멀리하여 복을 받으라고 주신 율법”이지만 끝내 죄를 멀리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율
법의 저주만을 받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1)”
ꀲ 율법을 다 지키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율법의 마지막은 저주 뿐 입니다.
3-12.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율법에서의 자유를 오해하면 율법을 거부하는 감정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비록 우리가 율법에 의해 통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
고자 하는 자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젠 복음의 빛 가운데서 율법을 재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옛 언약 자체로 옛 언약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인 복음의 밝은 빛 가운데서 옛 언
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13. 참형상의 그림자로서의 율법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
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 십자가의 사건 ․ 복음
“이것(율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7).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입니다.
4. 율법을 완성시킨 복음
4-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0절과 31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당
신은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소화하고 계십니까?
우리 민족의 유교 사상 보다 더 엄격하며 전통적인 규율을 지켜온 유대(교)인들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여 믿으면 1,500년 간 얽매였던 “율법(유대교)의 올무에서 벗어나 복음(기독교)으로 한없는
자유”를 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우리 한국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면 그
들이 진정 복음의 진리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일까요?
왜?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자유 함이 없이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을 까요?
문제는 교인들이 예수를 잘 믿겠다는 열의만 앞설 뿐 복음이 요구하는 죄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
어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참 자유를 주는 복음(말씀)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기껏해야 복음(기독교)에 대하여 이사 ․ 결혼할 때 날짜 따지지 않는 정도, 사주 ․ 관상 ․ 점으로부터
탈피, 또는 거리낌 없이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든지,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한다는 등으로만 인
식하고 있는 정도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율법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율법에서, 죄에서, 병마에서, 지옥에서, 사단에게서, 놓임을 받도록 이미
십자가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기뻐 즐기면서 누려야 합니다.
율법은 자유를 어거하지만 복음은 자유를 선포합니다.
복음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 시켰습니다.
4-2.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는 복음(예수)
↱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 지라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십자가의 사건=복음)
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8,19).”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예수=복음)로 폐하셨으니(엡2:15)”
“그리스도(복음)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느니라(롬10:4).”
ꀲ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해 주시는 것.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고 즉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모두 다 어긴 것이 되어 율법을 폐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복음) 안에 있는 구속(값을 치르고 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롬3:24).”다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으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갈2:16)가 없고,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어 하나님께 갈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폐지하시고 그 율법을 사랑의 성령의 법으로 다 이루었습니다(요19:30).”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청산해야 하셨
던 것입니다.
4-3.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로 와야 할 이유
“(로마서 7장 1절)형제들아 내가 (율)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절)남편(율법) 있는 여인(성도)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율법)이 죽으면 남편(율법)의 법에서 벗어(해방)났느니라. (3절)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율법)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복음=예수)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율법이 법적시효가 끝났)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예수=복음)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절)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절)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자유 ․ 해방)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복음)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율법)으로 아니할지니라.”
어떻습니까?
율법은 올무가 되어 어거하여 옭아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올무를 풀어놓아 해방(자유)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복음 아래 있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마치 “빛과 어두움이 동 시각에 함께 공존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율법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율법 속에 있는 도덕법이 살아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입니
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복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율법과의 관계
를 청산”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은 자신이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고전9:20).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다시는 종의 멍에(율법)를 메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갈5:1).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중 하나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약(율법)의 할례, 절기, 제사, 안식일, 십일조, 먹는 문제 등 다시 말해 율법을 그
리스도인들이 지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율법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는 율법의 저
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되어 그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율법 안에서(율법을 지켜 그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
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갈5:4).”
우리가 복음의 계시 즉 그리스도의 법(고전9:21)을 실천하고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
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율법 안에 있는 어느 것(도덕법 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나, 단
순히 율법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율법이 살아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는 유대교인이며,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세율법의 요구를 사랑의 법으로 성취(다 이루어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모세·율법의 요구는 사랑 안에 들어있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법의 요구를 행하게 되어 있으며, 혹시 부족할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다 해결(폐지)한 것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계속하여 의롭다고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했을 때 이 율법은 도덕법을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법이나 절기법 등은 지나칠 정도로 잘 지켰기에 하나님께서도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시50:8).” 하셨습니
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 : 자기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인도(人道)를 위하여 진력(盡力)하는 일]와 인(仁 : 애정을 타에 미침, 곧 어짐 ․ 착함 ․ 박애)과 신(信 : 믿음성이 있고 성실함)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율법과 복음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시대 이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당 시대의 사람들은 이것(율법)도 저것(예수님의 사상에 깊이 배어있는 義, 仁, 信)도 즉 모세의 율
법도 그리스도의 복음도 지켜야 할 시기입니다.
결국 율법에서 가장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부분은 바로 “도덕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도덕법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다루다가 막상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는 제사의식
법에서 만의 자유를 말하는 모순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즉 도덕법, 민(형)법, 제사의식법, 식생활법, 보건위생법에서도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계속 도덕법을 포함한 율법을 말하다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할 때 도덕법을 제
외한 율법에서만 자유하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4-4. 율법에서의 자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뛰어 넘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이끌림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도덕법을 포함하여 모든 율법에서 자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법을 범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취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캘빈 [기독교강요 2부] 7장 15절 |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으며 그를 의롭게 하기 위해 어 떠한 선행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선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율법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만일 그가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는 율법에서도 해방을 받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 10장 |
우리가 도덕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고전9:21)”이 말하
고 있기 때문에 도덕법을 지켜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도덕법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 저주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
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할 때 그 율법에서는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면 십계명에 포함된 도덕법에 대해서 안 지켜도 된단 말입니까?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이 말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복음)이 말하기 때문에 지켜
야 됩니다.
십계명의 대부분의 계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이 곧 그리스도의 법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면 십계명은 도덕법이므로 제4계명인 “안식일”을 우
리는 반드시 지켜야 하며 못 지킬 경우에 율법의 저주는 불가피하게 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십계명 중에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킬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누가 지키고 안 지킬 수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칠 수 있
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셨으면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의식법이든 도덕법이든 모두 다 폐기 되었습니다.
모두 폐기되었지만, 그 율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사의식법을 통해 십자가의 구속사를 알게 되고, 도덕법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알아 하나님께 영
광 돌리는 몽학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십계명)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십계명 ․ 율법)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위하여 그 얼굴을 (너무 광체가 나서)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3~8).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십계명은 법적시효가 지나가고(폐지),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새 언
약(복음)에 의하여 행하면 자연히 도덕법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의해 허물투성입니다.
날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를 주심으로 우리가 많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정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허물이 많 치만 그래도 날마다 우리를 용납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며 기
뻐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기쁨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충성으로 승화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의 자유는 도덕법에서도 자유 합니다.
4-5. 성경은 율법이 얼마만큼 우리를 괴롭히기에 “원수”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은 복과 저주의 종교법이자 실정법으로써 100% 지키면 복
을 받고, 1%라도 어기면 저주를 받는 실로 무섭고 두려운 성문법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율법을 경외하였는데 그럼에도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되자, 결국 율법의 노예가 되어 항상 공포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인을 억압했던 그 율법은 바로 십계명, 율례, 규례, 할례, 절기, 제사, 제사장, 안식일, 성전, 십
일조, 금기음식 등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저주가 두려워 지키려는 척 하려는 위장에서
나온 것이 바로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 받은 바리새인들의 억지, 형식적, 습관적, 액막이 식의 신앙
이었습니다.
오늘날 억지, 형식, 습관, 액막이 식의 주일 성수, 또는 십일조와 각종 헌금 등을 율법의 방식에 기
초하여 드리거나 체면상 드린다면 그들 역시 바리새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율법의 義(율법을 100%지켜서 죄 없는 상태)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의 저주(율법 중 1개라도 범하여 받게 되는 형벌)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
사 독생자이신 어린양의 생명을 지불하며 원수 된 “율법을 폐지”시켰기 때문입니다(기독교 탄생).
더 분명한 것은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신일 조차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폐지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문(길)이 열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이방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길이 열린
것이지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란 바로 율법을 떠나 예수(복음)를 믿는 것을 자유”라 말합니다(요
8:30~36).
정말 “그리스도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면 그 율법이 믿음과 사랑 속으로 스며들어 와서 신
앙생활이 자원하는 마음, 신령한 감사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 자유가 없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교회가 말로는 율법의 폐지를 외치는데(사실은 얼마 안 되지만), 실상 교회 속에는 율법이 버젓이 살아 저주부분의 말씀은 떼어버리고 복 받으라 외치면서 교인들을 율법으로 끈적끈적 옭아매며 힘들게 합니다.
그 증거로서 제사의식법은 폐지되었으나 도덕법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구약)시대의 민(형)법과 식생활법과 보건위생법이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요?
말할 나위도 없이 제사의식법을 포함하여 도덕법, 민(형)법, 식생활법, 보건위생법이 그 각 법적 효
력을 다하고(구약의 시대가 다 지나가고), 폐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의식법, 도덕법, 민(형)법, 식생활법, 보건위생법이 모두 다 “율법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성취하여 사랑의 법
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계시가 아니고는 알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육적인 눈과 혼적인 눈으로는 복음의 계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린 것이 지금도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마13:25).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라면, 말이 아닌 삶에서 율법으로부터 실천되어지는 자유를 체험해야 하며[이를 율법의 제3효용이라 함 : 신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생활의 표준(도덕법)이 되는 율법”을 말합니다.], 실제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결과의 열매로 나타나는 자원함과 기쁨 속에서 주를 사랑하고 주를 위해 헌신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미 나는 율법에 중독 되어 율법에서 말하는 복을 떼어버리면 예수 믿을 필요성까지도 흔들
릴 만큼 맹신적이고 무속 적인 율법의 노예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어떤 이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구약도 성경이므로 구약의 말씀도 무조건 지켜야 되고 구약의 복과 저주도 오늘날 살아 있으므로
구약의 복도 다 받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말합니다.
십자가를 꺾어 버리고 절이나 또는 고목나무에다 복 빌던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복을 비는 영적 무
지를 어찌하면 됩니까?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이 자유(율법으로부터의 해방)를 누가 빼앗아 갔습니까?
일부 주석 가와 신학교수들과 그 교수로부터 수업 받은 목회자들에 의해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저주의 율법으로부터 자유 함을 주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면서 율법의 저주를 속량(값을 치르고 원상회복시킴)하셨는데, 어떻게 오늘날 율법이 되살아나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유대교의 율법 ․ 갈1:6~10)”을 전하는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혹시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는지 다음에서 확인해 보십시오.
신의 계시를 운운하며 분수를 가리지 않고 그저 최고를 지향하며 최선의 정성으로 그리고 최상의 헌금(?)으로 성전건축(?)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는 건물을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성전 또는 하나님의 전으로 부르도록 가르치거나,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분명히 사람을 속이는 무서운 죄악이 됩니다.
벽돌 건물을 마치 신전인 것처럼 둔갑시켜 그곳을 거룩한 처소로 주입시키며 그곳에 복이 있는 것
처럼 하여 성전이라 부르도록 가르치거나 묵인하는 것은 벽돌 건물을 신성화시키는 죄악이며, 벽돌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을 우상숭배 화 시키는 신성 모독 죄악에 해당되고, 예
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헛되이 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권위를 추락시키는 일이 됩니다.
말이 영(요6:63)이라는 원리에서 볼 때 성령의 말(영)인지 사단의 말(영)인지 분별하시기 바랍니
다.
오늘날 “성령의 전인 성도의 몸” 곧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진정한 성전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고전3:16, 6:19).
성도들에게 어느 날 복과 저주의 칼날을 휘두르며 교인들 위에 군림해도 그저 맹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만인제사장 교리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속임수”입니다.
ꀲ 복음시대에는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직접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는 교리(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
ꀲ 율법시대에는 제사장이 집례 하는 속죄 제사를 통하여 죄인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지금은 이 제도가 폐지됨).
진정 겸손히 낮아지고 섬김의 본을 보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도록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신령과 진정의 바탕 위에서 자발적이며 구원의 감격에 찬 예배가 아니라, 율법(유대
교)의 안식일을 지키듯 억지와 형식의 시간 때우기에 급급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액막이 식으로 주일성수(?)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무속적 신앙방식에 익숙해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봅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씨를 하나님께 심었더니 건강 주셔서 땀 흘린 것에 대한 정직한 보상으로 만족하고, 복음에 근거하여 드리는 십분 일 감사헌금 또는 소득의 감사헌금이 아니라, 율법에 근거한 십일조를 복채처럼 드리며 위안과 희망을 좇아가고 있다면 신앙의 재점검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심지어 교회의 행정을 믿지 못하고 주보의 십일조 난에 자신의 이름이 있어야 안심하는 실로 믿음
없는(?) 성도들, 강단에서 나의 헌금을 알리는 호명소리를 통하여, 나를 드러내려 한 적은 없습니
까?
아니면 헌금을 더 걷기 위한 속셈은 아닌지 하나님은 다 아시겠지요!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하고 십분의 일 만을 드림에 오히려 죄송스러워 하는 겸손한 마음의
십분 일 감사헌금 또는 소득의 감사헌금의 복음의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십일조의 재조명
참조).
무당 앞에서 싹싹 빌던 손이 예수 믿어 거듭났음에도 그 손을 씻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가
져와서 하나님께 싹싹 빌며 신명기에 기록된 저주는 떼어버리고 복만 달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신명기의 율법에 의한 복이 오늘날도 살아 있다면 그들은 복이 아니라 엄청난 저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약속은 “지켜 행할 때 복을 준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처럼 성경의 참 진리를 덮어버린 무지한 신앙이 교회에서 버젓이 자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율법이 폐지되면서 사랑의 법으로 성취되어 완성된 것과 복음과 율법의 분기점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율법의 일부는 폐지되고 일부는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율법 선생 노릇에 맛 붙인 까닭일
것입니다.
시효가 끝난 율법을 사용하여 건물의 크기, 헌금의 량, 교인 숫자 늘리기를 하는 것은 아닐는지요?
지배의 극대화를 위해 구약의 율법을 교인들에게 문자(문자 속에 있는 영적의미는 빼버린)대로 적
용시키는 무당의 속성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효 지난 약을 처방해주고 환자는 그것을 전혀 의심 없이 먹으며 죽어간다면 성경대로 소경이
소경을 만난 연고 외에 무슨 답변이 있겠습니까?
교인들에게 율법을 주입시키면 교인들은 그 율법으로 인하여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순종하는 척하다가 심판 날 하나님이 그를 모른다 하면 정말 땅을 치며
통탄할 일입니다.
“시효가 끝난(폐지된) 율법”을 이용해 사람의 종을 만든 지도자를 주님께서 모른다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 이런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율법을 쓰면 헌금이 척척 걷히고, 교인들이 벌벌 떨며 말을 잘 듣는다 해도 율법의 종국을 생각한
다면, 아니 지옥의 뜨거운 불 못을 생각한다면 바울처럼 굶어도 하나님 앞에 복음으로 정직해야 합
니다.
순진한 교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율법에 중독 되어 율법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억지와, 형식, 기복과 저주 속에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하나님의 복
음에 말씀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주신 참 자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 천국을 믿고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간다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배설물처럼 버려야 마땅하며 더 나아가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자랑하며 낮은 자세로 겸손히 섬기는 복음적인 교회(성도들) 즉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주신 것을 받아들여 벌써 새로이 거듭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하나님은 알곡만을 찾으시는 구원 역사를 지금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믿는 양들에게 주신 자유를 만끽 누려야 합니다.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천국을 가고자 한다면 오직 십자가 복음 속에 이미 내가 들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복음의 그림자인 까닭에 율법도 철저히 깨달아 사랑으로 승화되어 지켜져야 합니
다.
위에 모든 말씀은 “결코 율법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과 목표가 ‘사랑으로 성취된 복음’이 복음 되게 하되, 율법의 복과 저주의 문자적 적용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예수)은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당신은 이제 율법폐지에 동의하고, 율법과 복음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 지어 이해 하
셨습니까?
5. 맺는 말
필자의 논지가 하나님의 의중대로 완성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진리의 율법과 복음을 어찌 장로가 완전히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깊고 오묘한 율법과 복음의 핵심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의중과 방향을 헤아려 접근해보자는 것이며, 34년 이상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지득되어진 율법과 복음을 저의 복음보수주의 적 신앙관과 자칭 성경신학이라 명하여 그 측면에서 조명해보려고 노력한 것이오니, 부족하거나 넘치는 부분은 여타의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채워주셔서 하나님의 의중과 그 방향에까지 도달하도록 다듬어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복이 있으며, 그 복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의 목적 즉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며,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며,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다가 재림의 날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되 그 곳에서 하나님 사랑의 품에 안기어 영원히 왕 노릇 하는 결과를 얻게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며 온전케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히
10:1).
만일 이 글을 읽고도 율법이 복음 속으로 들어오지 아니하였다면, 당신은 아직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복음의 지식은 즉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하나님상징)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이삭(예수상징)과 야곱(이긴자상징)의 그 후손들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모델로 하나님의 뜻을 양심과 율법으로 다스려 오시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소수의 이스라엘민족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이방민족들까지 복음으로 다스리시는 오늘 십자가 사건 이후의 복음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기는 자(계2,3장)를 통하여 하늘나라로 어떻게 귀속되어지고 완결되어지는가?
하는 장엄한 안목을 가질 때 복음과 상충되는 율법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사료됩니다.
만일 이를 깨달았는데도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을 믿고 깨달은 사람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알고 사도 바울과 같이 대가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가지고 있는 권도 다 쓰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모습을 본받아 복음을 거저 받았느니 그 받은 복음을 대가 없이 거저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씀은 장로의 항존 직 속에 교사의 직분이 내재되어 있고, 그 내재되어져 있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금이라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대가없이 시간과 금전과 믿음의 열정을 독자에게 바치는 것입니다[교사의 직분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서 난 의라(빌 3:7-9).”
율법과 복음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우리가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보충해주기 때문이죠.
그러나 율법은 무엇이며, 복음으로 교회가 세워져야하는 분명한 목적을 찾는 데에는 율법과 복음을 떼
어 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떼어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복음은 율법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마15:6, 막7:13, 요19:30).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시는 사람들을 경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율법을 복음으로 완
성 시키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효력을 지금까지 계속하여 유지시킨다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아)로 오실필
요도 없고, 율법의 기득권자들인 제사장이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로부터 미움 받을 필요도 없으며,
그 결과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필요도 없는 것을 보아도 율법을 복음으로 완성시키심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율법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즉 복음위에서 세워졌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
다.
복음은 예수가 사랑이며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 그 자체 이였습니다.
복음은 천국을 알려주고 하늘나라(천국)로 들어가도록(구원) 합니다.
율법과 복음을 떼어 생각하면 많은 문제들을 찾아내고, 그 해결의 방법으로 재 정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복음이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더 드러나기 위해서, 교회가 복음대로 운영되고 관리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이 논지들 중에서 행여 성경의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의 의중에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그 어긋난 부분이 성경말씀 어디 어디에 근거하여 어긋났으니 바로 잡기를 조언해 주신다면 바로잡겠다는 자세도 취하고 있음을 알려두는 바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근거한 조언 외에는 일체 사절합니다.
누구 또는 누가 율법이 폐지되지 아니 하였다고 하니까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한다든가, 그 외에 이러니까 그럴 것이 아니냐? 등의 유추해석의 조언은 일체 사절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필자가 율법폐지의 근거로 제시한 말씀들에 대칭되는 말씀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제시되어서 율법폐지의 논거를 수정하여 바로 잡아 하나님의 의중에 접근시켜 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복음보수주의자”라 자칭하며,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조명되어 졌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현장에서 율법과 복음에 관련한 오류와 왜곡들에 대해 비판받을 문제들은 비판
받아 바로잡히기를 바라는 충정이 배여 있음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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