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의 통전적 이해
1. 구원론의 여러 유형과 그 쟁점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구원에 대한 표상은 아주 다양하다. 죄와 구원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도 아주 다양하게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죄와 구원에 대한 이해가 포괄적이며 통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은 기독론에 정초되어 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2)이며,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핵심인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는 고백에는 예수가 구세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론은 니케야회의(325년)와 칼케돈회의(451년)를 거치면서 교리적으로 분명한 발전 단계를 밟아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신이시며, 이 두 본성의 관계는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다’는 교리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구원론은 인격론처럼 그 교리사적 발전 과정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구원론은 성육신론과 양성론에 종속된 교리로 발전되었으며, 어떤 특수한 유형의 구원론을 교리화 하지도 않았다. 성서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관한 묘사가 너무나 다양하고 풍부하므로 일치된 구원론을 쉽게 도출해 내기가 용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구원을 개인구원이나 사회구원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며, 이미 얻은 구원만을 강조하는 소위 ‘구원파’가 등장하여 구원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성서 안에도 죄와 구원에 대한 여러 표상들이 존재하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구원론의 유형들이 전개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죄-구원의 속죄론적 도식으로 정식화되었다. 아울렌은 교리사적으로 다양하게 주장되어 온 속죄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바 있다. 즉 고전적인 속전설(Ransom Theory), 전통적인 주관적 속죄론인 충족설(Satisfaction Theory), 그리고 전통적 주관적 속죄론인 도덕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이 그것이다.1) 아울렌은 종교개혁의 동기가 칭의론(루터)은 고전적 속죄론에서 예수가 이루신 구원의 방식으로 제시된 사탄과의 거래를 사탄에 대한 승리로 해석한 점에서 고전적 속죄론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시대의 주요한 쟁점은 예수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었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이루신 구원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는가하는 문제였음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루터의 칭의론은 이런 관점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인 구원론을 새로운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다. 현대신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슐라이어마허는 아벨라드의 속죄 이해를 현대적인 형태로 개념화하였다. 아벨라드가 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바뀌었다.2) 이어 등장한 리츨은 죄와 구원을 도덕적인 의지의 문제로 파악하였다.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은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로 이해하였고, 그리스도를 하나님 의식 또는 도덕적 의지의 모범과 이상으로 이해함으로서 전통적인 주관적 속죄론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평가된다.
현대에 와서는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만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실존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화해론과 해방론으로 전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흐만은 성서적으로 볼 때 화해는 구원의 수직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것이며, 반면에 해방은 구원의 수평적인 차원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였다.3) 그러나 바르트에게 의해서 화해는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고전적 전통적 구원론의 4 유형 즉, 속전론, 충족설(안셀름), 사랑감화설(아벨라드), 칭의론(루터)과 현대적 구원론의 2유형 즉 화해론(바르트)과 해방론(몰트만, 구티에레즈), 그리고 한국신학의 구원론의 유형으로 제시된 서남동의 한의 속량론과 생태구원론을 포함하여 8 유형의 구원론을 비교 검토하려고 한다.
8가지 유형의 구원론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 3가지 검증의 틀을 사용하려고 한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다음 3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기독교의 구원론은 죄-구원의 속죄론적인 도식으로 정형화되어 있다. 구원의 내용은 죄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존하여 있다. 그러므로 죄가 어떻게 기원하였으며 죄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내용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기원과 죄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게 된다.
둘째로 기독교의 구원 이해는 기독교인인 구세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죄를 대속하고 구원을 이루었는가 하는 예수가 구원을 이룬 방식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관한 논의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에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는 구원론의 또 다른 쟁점이 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론의 7가지 유형은 3 가지 관점에서 비교 분석하고 재검토한 후 구원론의 여러 유형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구원의 세 차원과 구원의 시간적인 세 계기를 통합할 수 있는 구원론의 과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2. 고전적 속전설(Ransom Theory)
속전설은 죄를 사탄의 노예 상태로, 구원을 노예에서의 구출(redemption)로 이해한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사탄의 미혹 때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원죄로 인해 인류의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와 고난과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의 포로가 된 예수를 구출하기 위하여 지불된 속전이라고 설명한다. 속전설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벌어진 원죄를 사탄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죄의 기원에서 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류의 죄를 贖량(exagorazo 갈 3:13)하기 위한 속전(贖錢, αντιλυτρον, 딤전 2:6, 고전 6:20, 7:23) 또도, 대속물(代贖物, λυτρον, 막 10:35)으로 표현하였는 데 이는 모두 댓가(ransom)를 치루고 다시 사서 구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표상을 보다 체계적인 속전설로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레네우스와 오리겐이다.4) 이레네우스는 ‘무슨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는가’ 라는 질문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5) 그는 아담의 불복종에서 비롯된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만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그가 죽음을 진멸하고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다. 이는 우리가 죄 속에 갇히고 거기에 속박 받고 있으며 죄 안에서 나서 죽음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6)
이레네우스는 죄와 죽음과 사탄을 인류의 원수라고 하였다. 인류를 노예로 삼는 이 원수를 처부수어 이기고, 만물을 회복(Recapitulatio)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서 오셔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잃은 양을 도로 찾듯이’ 건져 내셨다고 한다. 내용적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것이 본질적으로 죽음이다. 죄는 죽음을 동반한다. 죄와 죽음의 지배자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내용이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불사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였다.7)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인류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방식을 설명하면서 이레네우스는 속전설(贖錢說)을 주장하였다. 사탄이 인류를 속여서 하나님께 불순종케 함으로서 인류는 죄와 죽음을 지배하는 사탄에게 팔렸다. 전능하신 말씀으로서 참된 인간이 되셔서 그의 피로 우리를 이치에 맞게 구원하시려고 포로로 끌려가는 인류의 속전(ransom)으로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속전설은 여러 형태로 주장되었으나, 속전의 방식에 대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논리적 엄밀성을 가지고 설명한 이는 오리겐이 처음이라고 한다.8) 사탄의 유혹으로 범죄한 인류는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므로, 인류에 대한 법적인 권한을 획득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 대한 속전으로 지불되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어서 사탄과의 거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울렌에 의하면 닛사의 그레고리는 ‘낚시의 미끼’라는 유비(analogy)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미끼이며. 그의 신성은 바늘이다. 거대한 바다 괴물같은 악마는 이 미끼를 낚아채지만, 너무 늦게 그 바늘을 발견한다… 그 바늘은 상처를 내기 위하여 미끼로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을 때. 악마의 죽음을 위하여 자신을 바늘로 삼으신 것이다.”9)
사탄과의 거래라는 설명 가운데는 ‘사탄에의 미끼’라는 개념과 더불어 ‘사탄의 월권’이라는 개념도 주요하게 취급되었다. 사탄은 예수의 신성 속에 감추어진 인성이라는 미끼를 삼켰는데 보이지 않는 바늘 즉, 그의 신성(神性)의 고리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 죽음의 세력을 관장하는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삼켰으나, 그리스도는 무죄하고 신성을 지니신 분이므로 사탄으로서는 예수를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월권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하나님은 무죄한 예수를 죽음으로 끌어들인 ‘사탄의 월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뿐만 아니라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불손종하고 사탄의 노예가 된 모든 인류를 구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자유하게 되어 죽음의 지배를 받는 사람 중 원하는 사람은 모두 그를 따라 음부 곧 죽음의 왕국에서 나올 수 있게 되고, 다시는 죽음이 저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10)고 하였다.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탄에게 속전으로 주어진 그리스도는 일종의 미끼와 같은 것이고, 사탄은 이 미끼에 속아 그리스도를 삼켰으나 무죄한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력이 삼킨 것은 사탄의 월권에 해당하므로 그리스도는 사탄의 월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인류를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견해는 죄를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 보고 구원을 불사와 신성에의 참여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한 방식에 관해서 ‘사탄에 대한 미끼와 사탄의 월권’이 라는 표상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으므로, ‘사탄과의 거래’라는 다소 신화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러나 아울렌은 이러한 고전적 속죄론의 배후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승리하셨다는 우주적 투쟁의 극적인 방식이 강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고전적인 속죄론을 비신화화하여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표상을 약화시켰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개신교 신학의 선구자인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의 투쟁과 승리가 강조되어 있다고 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에 굴복한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이며, 이러한 역설을 감추인 하나님(deus abscunditus)이 곧 드러난 하나님(deus revelatio)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주장하였다고 한다.11)
어쨋든 고전적인 속전설은 죄와 구원을 사탄과의 거래에 초점을 두고 전개한 것으로 평가된다. 죄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구원은 사탄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방식도 ‘사탄과의 거래’로 전개하였가 때문에 ‘사탄에 대한 미끼나 사탄의 월권’과 개념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이루신 구원의 방식에 논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예수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주장을 펴지 않았다.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성이라는 미끼와 신성이라는 낚시 바늘로 사탄을 속였다는 속전설의 논리는 속임수에 의해 인류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전적 속전설은 사탄이 먼저 인류를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속임수에 대하여 속임수로 대응한 것이라는 옹색한 반론을 제시하였다. 1000년이 지나서 안셀름이 등장하여 ‘속임수에 대해 속임수 로 대응한다’는 고전적 속죄론의 신학적 약점과 논리적 한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충족설을 속죄론의 새로운 대안으로 주장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다.
3. 전통적 주관적 충족설(Satisfaction Theory)
충족설은 고전적 속전설의 비판에서 출발한다. 고전적 속죄론이 죄와 구원이해를 사탄과의 거래에 초점을 둔 것 자체가 방법론적인 오류라고 본 것이다. 죄가 사탄의 유혹에서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사탄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서가 표상하는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충족설은 죄와 구원, 구원을 이루신 방식과 우리가 그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을 모두 하나님의 공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전개한다. 그러나 예수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었느냐는 것이 논의 초점으로 강조되었다.
충족설에 의하면 죄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였다. 인간의 범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불복종으로 훼손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구원의 방식은 자신의 외 아들 예수를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의 피로… 화목제물(hilasterion)로 세우시고…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로우심(하나님의 공의)을 나타내는 것”(롬 3:25)이다. 구약성서의 희생제사의 중요한 요소인 화목제에 근거하여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propitiation)의 희생제물이라는 것이다.12)
이러한 충족설은 터툴리안, 키프리안을 거처 안셀름(1033-1109)에 의해 가장 체계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다.13) 터툴리안에게도 충족(satisfaction)과 공로(merit)에 관한 기본개념을 찾아 볼 수 있다.14) 그는 배상을 치루지 않고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배상을 통한 속죄의 행위를 충족으로 설명한 것이다. 의무 이상의 ‘여분의 행위(superer ogatoria)’로서 단식, 독신, 순교 등은 신앙의 공적이라고 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서 키프리안은 이러한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이양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여분의 공로를 획득함으로서 인류의 죄를 보상하고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셀름은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책에서 충족과 공로의 개념에 기초하여 충족설이라 불리우는 속죄론을 전개하였다.15) 안셀름 역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와 진노와 지옥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죄와 구원의 내용에 관해서는 고전적인 속전설과 다를 바 없다.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속죄의 방식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속전설의 견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탄와의 거래가 필요하고, 사탄의 속전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주장은 성육신의 참된 목적을 오해한 것이라고 하였다.17)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 그리스도가 사탄의 미끼가 되어 사탄을 속이고 그 월권을 문책한 것이라는 논리도 비판하였다. 죄가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이라면 구원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고전적 속죄론의 결정적인 모순인 “사탄 속임수에 하나님이 속임수로 대응하였다.”는 것도 비판하였다. 예수는 자신을 진리라고 했으며, 따라는 진리는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셀름은 성육신의 기본적인 동기는 하나님 자체 안에서의 일어난 갈등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합리적 근거를 로마의 배상법 개념에 비추어 제시하였는데, 그 골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원죄는 하나님에 대한 현저한 불복종이며 이는 하나님의 영예를 심히 훼손하고 그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18) 따라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예를 회복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의 대응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영벌을 내리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단절이므로 너무 가혹하다. 다른 하나는 당신의 로마법에 의해 시행된 것처럼 형벌을 대신하여 보상(penalty)으로 충족하는 일이다. “모든 죄에 대해서 형벌 아니면 보상이 필연적”19)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정의와 자비를 충족하기 위해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였다.
3) 인간은 보상책임은 있으나 자신의 무한한 죄책을 보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의 영벌을 보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는 자는 오직 신 뿐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은 죄에 대한 보상책임이 없다.
4) 보상책임과 보상능력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분은 단지 한 분 신인(神人) 이외에 없다.20)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5) 신인도 일상적인 행위로서는 인간의 영벌을 보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무한히 귀중한 생명의 자발적인 복종은 온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보상을 충족시키고도 훨씬 남는다.21) 그러므로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을 통한 대리 보상은 하나님의 영예 회복과 인간의 영벌 면제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안셀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마귀와의 거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예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이 미끼를 사용한 속임수가 아니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죄가 하나님 자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신에게 있어서도 무조건적인 용서가 쉬운 일이 아님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고전적 속전설의 약점을 많이 보완한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틴적인 법개념과 계량적인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건적이고 법률적인 배상의 요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리고 충족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귀결시킴으로서 십자가 이전의 성육신과 공생애의 구속사적 의미를 약화시켰다.
또한 인간의 속죄가 전적으로 하나님 자체 안에서 이루어진 객관적인 사건으로만 묘사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22) 따라서 이러한 충족설은 객관적인 속죄론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나 안셀름 이후 중세교회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대속의 희생제물로 돌아가심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킨 공로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이루신 공로는 교회에서 사제들에 의해 집행되는 성례를 통해 신자들에게 분배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례전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피터 롬바르트 이후로 체계화된 성례론과 안셀름의 충족설이 결합되어 예수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성례적인 행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가르쳐 졌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는 표시이고, 성찬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제단에서 피흘리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사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사제 앞에서 고해함으로서 용서받을 수 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성례는 성례전적 행위로 이해되었다.
4. 전통적 주관적 사랑 모범설
아벨라드(1079-1142)는 「로마서 강해」에서 새로운 속죄론을 전개하였다.23)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속전설이 죄와 구원을 사탄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안셀름의 충족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라면 아벨라드는 사랑모범설은 죄와 구원을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밝히려 하였다.24) 아울렌은 아벨라드의 견해를 도덕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라고 하였지만, 사랑모범설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한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듣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는 이의 말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벨라드는 죄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상실로 그리고 구원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회복으로 이해하였다.
아벨라드는 아벨라드 역시 안셀름처럼 고전적 속전설이 주장하는 ‘구원의 방식’을 비판하였다. 마귀는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으며, 인류를 속인 자가 인류를 그 지배 하에 둘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수 없다.25)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속전도 결코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나아가서 아벨라드는 안셀름이 속죄의 방식으로 주장한 충족설이 율법주의적 틀에 짜여져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낼 뿐이다(롬 3:18-19). 속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하였다(롬 3:21-24).26)
따라서 아벨라드는 ‘값없이 의롭다 하신 하나님’이 인류의 범죄를 대속하기 위해 무죄한 그리스도에게 대리 배상의 조건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어떤 것의 댓가로서 무죄한 자의 피를 요구하는 것은 잔인하고 사악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27)
그리고 대리 보상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안셀름의 주장과 하나님이 아무런 값없이 무조건적인 은총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이 된다고 보았다. 무조건적인 용서의 사랑은 대리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는 범죄한 아들의 죄에 대한 대리적인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값없이 무조건 용서한 것이다.
아벨라드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는 율법적인 개념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은총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와 같은 인성과 연합하시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28)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벨라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원한 방식이 하나님의 명예와 공의를 충족하기 위한 대리 보상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참 사랑의 확증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벨라드는 무엇보다도 고전적인 속전설의 기초가 되는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죄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적인 행위라고 하였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인류가 죽음과 사탄의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불복종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상실한 것이 바로 죄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속죄란 인류가 상실한 초월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것인가? 아벨라드에 의하면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골자)은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마 22:37-39)으로 가르쳤다. 하나님은 예수를 사랑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자’(마 3:17)라고 하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참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한 것이다.
예수는 또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37)”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쳤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을 애간장이 타는 마음으로 사랑하였고, 마침이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아벨라드는 예수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라고 보았다. 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실한 인간에게 사랑의 모범으로 보여 주시고 우리가 상실한 사랑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낸 것이다”(요일 4:10).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랑의 모범을 통해 인간이 상실한 사랑을 회복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용서의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상실한 죄에 대한 용서를 일깨우는 사랑이다. 아벨라드에 의하면 사랑을 많이 받은 자는 용서를 많이 받은 자가 된다(눅 7:47).29) 이러한 신의 사랑에 의한 용서의 행위는 인간에게 인격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신의 사랑에 대한 응답적인 사랑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참된 자유를 허락하여 준다.”30)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사랑의 반응을 통해 사랑을 상실한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벨라드에 의하면, 속죄란 내용적으로 죽음과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행위는 사탄에 대한 속전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객관적인 법률적인 거래도 아니며, 인간에게 사랑을 일깨우는 가장 위대한 참 사랑의 모범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법은 십자가글 통해 본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이고 자발적인 사랑을 본받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회복함으로서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인격적인 참 사랑에 대한 응답과 교제가 아벨라드의 속죄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아벨라드의 견해는 죄와 구원을 인간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므로 주관적인 속죄론이라 하고 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랑모범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벨라드의 사랑모범설은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의 방식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하여 중세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수덕신앙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수덕신앙을 공적사상과 결합되어 역설적이게도 고행과 금욕을 강조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아벨라드의 주관적인 속죄론은 소시니우스에 의해 좀더 과격하게 전개되었다. 소시니우스(F.Socinius 1538-1604)는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De Jesus Christo Servatore, 1549)에서 “왜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인가”라는 부제로 죄와 구원 및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신 방식과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을 서술하였다.31) 소시니우스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서 인간은 영생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상실한 영생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은 “영생을 의미하는 구원에 관한 지식의 계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기독교 종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한 영원한 삶을 얻는 방식이다”32)고 하였다.
소시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신성(神性)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deitas)과는 본성적으로 구분되는 신적 성품(divinitas)을 주셔서, 하나님과 신적인 것에 관한 진리나 교리를 계시하고 확립하도록 하였을 뿐이다.33) 따라서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음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고 우리를 구원하였다는 대리 충족설을 실랄하게 비판하였다. 예수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인간의 징벌을 대신하였다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가 필요 없고, 인간의 죄가 무조건 용서가 되었다면 충족에 대한 법률적 교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34)
소시니우스에 의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 결의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징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를 알고 복종함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화해자라기 보다 가장 뛰어난 계시자”35)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보여준 하나님의 의지를 본받아 배우는 것으로 보았다.
아벨라드이 사랑모범설은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에 의해 현대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다. 아벨라드가 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바뀌었다.36)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인류는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의식(consciousness of God)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의식을 상실한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죄를 ‘하나님 의식의 붕괴’로 구원을 ‘하나님 의식의 회복’으로 보았다.
리츨은 칭의와 화해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였다. 칭의는 죄책(guilty)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화해는 하나님에 대한 적의(enmity)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정의하였다. 전자는 속죄의 주관적인 측면이라면 후자는 객관적인 측면이라고 보아 양자의 통일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죄책이나 하나님에 대한 적의는 모두 인간 의지의 문제이며,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의지 사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하였다.3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최고의 가치 있는 삶의 모범을 실증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보이신 것으로 가르쳤다.
5. 종교개혁과 칭의론
종교개혁 신학의 선구자인 루터의 속죄론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평가 되고 있다. 리츨은 속죄론에 관한 한 루터는 안셀름과 같은 배상과 충족에 기초한 법적인 유형에 속하지만, 전체적으로 중세기의 도덕주의에 예리하게 대립되는 칭의론을 주장하였으나, 공적사상을 철저하게 극복하지는 못하였다고 평가하였다.38)
부룬너는 죄의 대속적인 징벌과 대속 사상이 개혁자 특히 칼빈에게 의해서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울렌은 루터에게는 오히려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속전설에 내포되어 있는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표상이 강조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뿐만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요소를 초점에 두고 칭의론을 전개한 것으로 해석하였다.39)
그러나 종교개혁의 두 기수인 루터와 칼빈도 중세기의 대리보상으로서의 충족(satisfactio)을 수용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명예를 충족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보다 인류의 영벌을 대속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었다.
무엇보다도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며, 복음에 나타나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무조건 용서함으로서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라는 바울의 칭의론(롬 1:16-17)을 부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칼빈 역시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분을 충족과 중재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중재(intercessio)를 통해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에 우리가 참여한다고 가르쳤다.40) 따라서 루터와 칼빈의 속죄론을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충족보다도 인간의 영벌에 대한 충족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와 무한한 은총이라는 점이 더욱 강조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속죄론을 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 Theory)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루터는 칭의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는 방식에 대한 개신교신학의 새로운 가르침을 체험적인 고투를 거쳐 성서적 사실에 입각하여 신학적으로 정립하였다. 루터는 청소년기에 체벌, 성적인 충동, 미신적인 사탄공포증, 죽음에 대한 불안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 등으로 고문당하는 듯한 영혼의 절망의 심연(Anfechtung)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41) 이러한 영혼의 동요 속에서 루터는 자신을 수도원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마귀이든 하나님이든 그가 어엿한 수사로서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방식에 따라 구원의 길로 매진하였다.
첫째로 당시 수도원은 전통적인 주관적 속죄론(아벨라드)에서 가르친 것처럼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완전한 덕목을 실천하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루터는 사랑, 검소, 자선, 순결, 가난, 순종, 금식, 철야, 육신의 극기 등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김없이 실천하기로 했다. 그는 정해진 규칙 이상으로 철야 고행과 기도에 전념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늘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42) 그러나 ‘너 자신을 깨끗이 할수록 너는 점점 더 더러워진다’고 말한 바와 같이 금욕적이며 고행에 가까운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서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더욱 노출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둘째로 당시의 로마교회에서는 객관적인 충족설(안셀름)과 잉여 공로사상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이 교회의 성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구원의 은총이 중재되는 수단으로 7성례를 주장하였다. 특별히 세례 받은 이후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사제 앞에서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사죄를 받을 수 있거나 연옥으로 유예될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철저한 수도생활과 더불어 행여나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가 있을까 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이 비상한 사죄의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몇 차례 씩, 어떤 때는 내리 여섯 시간을 고해했다. 그는 영혼을 샅샅이 뒤지고 기억을 이 잡듯이 털어 갖가지 동기를 저울질하였다. 당시 고해성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체계로 고안된 여러 죄의 항목들 말하자면, 5가지 감각의 죄, 7가지 큰 죄(교만, 탐심, 욕정, 분노, 과식, 시기, 나태)와 십계명의 조목조목을 훑어 내려가면서 고해하였다. 한번 고해할 때마다 이 죄목 가운데서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자신의 일생을 차례차례 훑어 나갔다. 심지어는 고해 후 그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하기도 하였다.
그는 성인 21명을 수호신으로 정해놓고 세 명씩 교대로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맡아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이처럼 죄를 피하기 위해 엄격하게 고행을 하고 별 것도 아닌 죄를 철저히 고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진정한 영혼의 평안과 참다운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고 다시금 기억되는 죄들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괴로운 것은 그의 비상한 머리로서도 자기가 지은 죄 가운데서 잊어버리고 기억이 되지 않은 죄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고해를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간 편에서는 죄를 저지를 때나 저지른 후에도 그것을 죄로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 고해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는 행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명백히 죄로 정죄 받을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자, 그는 고해성사의 근본적인 한계를 통감하게 되었다.43) 이처럼 루터는 전통적인 속죄론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 생활과 고해성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그의 스승 슈타우비츠(Staupitz ?-1524)는 그는 루터에게 몇 가지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참 회개는 형벌하시는 신을 무서워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사랑함으로 시작된다”43)고 가르쳤다. 신의 사랑을 기대하여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로 인해 고행과 고해에 대한 루터의 의심에 급진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루터에게 대학의 설교와 성서 강의를 명하였다. 루터는 시편 강의(1513-14)와 로마서 강의(1515), 갈라디아서 강의(1516-17)를 맡아 성서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청소년기의 영혼의 고통(Anfechtung)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루터는 시편을 통해 히브리의 위대한 신앙인들이 자신이 겪은 것과 똑같은 영혼의 고통(Anfechtung)과 같은 처절한 고통을 호소한 참회시들을 발견하고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영혼의 번민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특히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시편 22편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참회시의 대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부르짖은 말씀(마 27:46 병행)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루터는 히브리의 위대한 신앙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고 내팽개침을 받은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도 Anfechtung(겟세마네 기도, 채찍, 가시 면류관, 버림받음 등)이 있었다”43)고 확신하게 되었다.
루터는 죄인인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알 수 있었으나, 죄 없는 예수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불의를 짊어지셨다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후에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극복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43)
시편 31편의 “주여, 내가 당신께 피하오니 나로 결코 부끄럽게 마시고 당신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은 루터에게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 주었다. “이 구절은 ‘나의 의’로 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의’, 즉 신앙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되신 나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의로라고 말한다”43)는 점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게 된다.
루터는 철저한 수도원 생활을 통해 행위로써 흠이 없도록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털끝만한 죄일지라도 철저히 고해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최후 심판 시에 의로운 자로서 인정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시편 31편 1절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제까지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43)
시편의 말씀에 이어 로마서 연구를 통해 루터는 새로운 구원의 체험에 이르게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루터는 ‘천국의 문이 열려짐’과 같은 구원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소위 탑상체험(Turmeriebnis)으로 일컬어지는 이 말씀의 빛을 통해 지금까지의 절망과 불안과 공포와 번뇌(Anfechtung)가 일시에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43)
무엇보다도 로마교회는 하나님 의가 최후 심판 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청소년기의 루터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그때 나타날 하나님의 엄격한 의의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영혼의 시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로마서 1장 17절의 첫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시간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가 최후 심판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심하던 차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두 구절에는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내가 이 의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따라서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 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 분에게 투덜댔다...밤낮 가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던 어 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수동적인의(Justitia Pussiva)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4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바울의 표현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의인을 의롭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통해 ‘죄인을 그 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인정하는 義認(Justification)’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능동적인 의(Justitia activa)와 수동적인 의(Justitia passiva)로 구분하였다. 죄인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의는 최후 심판시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수동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인 복음 안에 이미 나타난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총으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며, 따라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롬 1:17)’는 말씀이 루터에게는 진정한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들려진 것이다.
루터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계시된 의로써 우리를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의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수동적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뜻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는 바로 ‘그리스도의 의’와도 같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패러독스이며, 십자가의 감춰진 뜻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역(opus proprium)은 죄와 죽음과 사탄과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하는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였다.44) 그리스도가 이루신 인간 구원의 내용을 죄와 죽음과 사탄과 그리고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라고 본 점에서 고전적인 속전설의 죄와 구원 이해를 이어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을 이루신 방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투쟁과 부활의 승리로 이해하였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과 투쟁하여 십자가 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것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은 전통적인 충족설에서 가르친 것처럼 성례를 통해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감화설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본 받아 온갖 덕행을 수행함으로서 그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로서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중재되는 방식’에 대해 중세 수도원과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친 것이다. 구원은 십자가 상에서 이미 이루신 객관적인 은총의 사건이지만, 이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은 우리의 참된 회개를 통한 삶의 전적인 전향인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하였다. 루터에 의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구원의 전면에 부각되게 된 것이다.
루터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는 충족설과 사랑감화설을 종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통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서 인류의 불복종으로 인한 죄를 대속하신 것으로 가르쳤다.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충족시킨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자발적인 복종은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속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이루지 못한 율법을 완전히 이루셨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obedientia activa)이다. 그리고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범한 모든 죄를 보상하기 위해 십자가를 통해 대신 담당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obedientia passiva)이라고 하였다.45)
그리스도의 능동적 복종으로 우리의 의가 회복되고,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으로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능동적인 복종은 그리스도의 행하신 도덕적 모범으로, 그리고 수동적인 복종은 그리스도가 지신 대리 보상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종을 이중적으로 이해한 것은 구원의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을 통합하려는 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6. 현대적 화해론(K. Barth)
현대신학자 중에서 전통적인 속죄론을 가장 새롭고 방대하게 체계화한 이는 칼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속죄론이 죄론에 근거하여 구원론을 설명하려는 ‘창조→죄→구원’의 도식을 ‘창조-화해-죄’의 도식으로 재정립하고, 구원을 속죄나 칭의 대신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Versöhnung, reconciliation)라는 개념으로 사용하였 화해론을 전개하였다.
첫째로 베버가 지적한 것처럼 바르트가 화해론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가장 새로운 점은 사상의 배열이다.46) 전통적인 속죄론은 ‘죄-구원’의 속죄론적 도식에 따라 ‘창조론→죄론→구원론’의 순서로 전개되어 왔다. 바르트는 이러한 순서를 포기하고 속죄론에 있어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였고, 그 인간이 범죄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사역이 필요하다는 전통적인 사유는 논리적으로 보면 결과론적인 논증 방식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창조의 필연적인 결과로 원죄의 타락이 있게 되고, 원죄와 타락의 필연적인 결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청된다는 설명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인간을 타락하게 했는가? 하는 질문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가룟 유다의 배반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죄-구원’의 속죄론적인 도식은 죄가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전제에 기초하여 있다.
따라서 구원의 의미는 죄의 내용에 의해 종속되고, 원죄와 십자가에 대한 이해는 ‘죄-구원’의 속죄론적 도식, 즉 ‘원연합→분리→재결합’의 소외동기가 내재된 시원적인 도식으로 환원되고 만다.
바르트는 이러한 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구원론의 새로운 도식을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와 신학적 고백이 채택한 창조론-죄론-구원론의 순서를 창조주 ‘청조주 하나님-화해자 하나님-죄인인 인간’ 순으로 바꾼 것이다.47) 인간이 죄인이라는 죄론과 인간론을 화해자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는 기독론 다음에 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먼저 하나님을 다루는 것인데, 인간의 타락과 죄를 하나님의 사역에 포함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죄와 타락은 창조의 하나님, 화해의 하나님을 다룬 다음에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실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는 어떤 상태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화해는 임마누엘(Emmanuel: God with Us)을 의미한다”.48) 따라서 화해의 전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계약인데, 이 계약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며, 창조사역에 선행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계약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창조 이후 타락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은총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창조의 내용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은총의 계약의 빛에서 볼 때, 인간이 이 계약을 파기한 죄와 타락이 드러나는 것이다. 죄와 타락은 바로 이 계약의 파기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는 창조시에 세우신 계약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구원 즉 화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타락은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의 빛에서 이해되고 드러난다. 창조의 내적 근거인 화해에 의해서만 계약을 파기한 죄가 드러나는 까닭에 바르트는 창조론과 화해론을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하고 창조와 화해의 사건에 비추어 죄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바르트는 화해론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창조론와 화해론(속죄론) 사이에 죄론이 놓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창조→원죄→원’의 시원적인 도식이 ‘창조→화해→죄’의 비시원적 도식으로 전환 된 것이다.
바르트는 죄와 타락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론과 무성(das Nichtige)에 관한 독특한 가르침을 전개하였다.49)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락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태라고 하였다. 이 타락과 죄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사태로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를 허용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죄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밖에 있는 무성적인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으로 침입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사하는 것이 최초의 거짓이며 이 거짓 세력의 유혹의 죄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타락과 죄는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의 빛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드러나는 것이다.
셋째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방식을 계시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하시는 하나님(reconciling God)인 동시에 화해된 인간(reconciled man)이 되심으로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계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해는 무한한 은총의 계시이며,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계시의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너무도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피차 분리 할 수 없다고 하였다.50) 바르트는 화해론의 체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론에 관한 양성론과 양위론을 결합시켰다. “신성과 인성, 비천과 존귀 이 네 가지 사항을 바르게 관련시키려면,… 불가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지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높아지신 인간에 관한 논의로 시작해야 할 것”51)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두 지위를 두 본성과 결합하여 내용적으로 낮아지심은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의 역사이며, 올리우심을 그의 인성 안에서 일어난 사역이라 했다. 예수의 신성은 그의 비하의 상태에서, 그의 인성은 그의 존귀의 상태에서 계시된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사유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평가된다.52)
넷째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활동의 원리는 온통 하나님의 혁명으로 그리고 화해 사건의 내용은 주와 종의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1919)에서 레닌이 주도한 인간의 혁명(1917)에 대립되는 ‘하나님의 혁명’53)을 주창하였는데, 이를 기독론적 관점에서 ‘화해의 원리’로 해석하였던 것이다.54)
“화해는 인간과 세계의 상황의 전적인 변혁이고 실로 혁명적, 급진적, 전체적 및 보편적 변혁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다른 자’라고 부른 바르트의 어법은 행위로부터 추론된다는 그의 원칙과 일치하고, 하나님은 ‘전적으로 다르게 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다.”55)
화해(Versöhnung, reconciliation)는 그 내용에 있어서 인간의 죄성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순도 폭로하고 제거한다는 점에서 구원의 실존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까지 포함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칭의와 화해를 구분하였다.
칭의(Rechtfertigung, Justification)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인 된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인간 즉, 의로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성과 모순이 전적으로 변혁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화해의 원리는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전적인 변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화해 사건의 내용으로 설명된 ‘주와 종의 변증법’ 역시 정치적 차원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 사건 안에서 존귀한 자로서 낮아지고, 낮아진 자로서 높아지셨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교환과 자리바꿈’이 일어난 것이다. 저 ‘교환과 자리바꿈’ 역시 인간과 세계의 상황에 대한 철저한 변혁을 의미하므로 화해는 내용적으로도 실존적이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차원을 지닌다.56)
바르트는 화해론을 통해 전통적인 죄-구원의 속죄론적 도식을 전환시켰으며, 구원을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관계론적인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신 방법을 화해하시는 하나님이 화해하는 인간이 되신 화해 사건의 계시로 설명하였다.
마귀에 대한 속전이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계시의 사건 자체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화해의 사건 즉,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화해에 참여하는 방식은 루터의 경우처럼 은총으로 주어지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화해는 내용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변혁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는 구원의 개인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차원의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구원의 정치적인 차원을 원리적으로만 천명하였고 구체적으로는 해명하지 못하였다. 이어 등장한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은 구원의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을 보다 엄밀하고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7. 해방론(J. Moltmann, G. Gutierrz)
현대에 접어들면서 아담의 불복종으로 인해 인류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예수의 대리적인 희생과 복종과 피흘림을 통해 원죄로부터의 구원이 획득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죄와 구원을 존재론적이며 내면적인 것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성서의 다양한 죄와 구원의 표상을 충분히 다루기에 미흡하다는 비판이 여러 형태로 제기되었다.
아울러 전통적인 죄와 구원의 이해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다양한 의미의 죄와 구원의 체험과도 동 떨어진다는 것이다.56) 이런 이유로 죄와 구원에 관한 전통적인 속죄론은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의 새로운 죄-구원에 관한 이해로 인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1) 몰트만의 해방론
정치신학은 바르트와 본회퍼의 십자가와 복음의 정치적 해석을 이어 받아 죄와 구원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특히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인격적인 대리의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우리 죄를 위한’ 제의적이고 속죄적인 의미로 이해 할 때, 구원의 세계사적 지평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개인적 영적 속죄의 표상을 넘어서서 부활의 빛에서 종말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였다.57) 구원의 공동체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를 새롭게 부각한 것이다.
첫째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사탄과의 투쟁과 승리로 이해한 속전설의 표상을 정치신학적으로 수용하여, 십자가를 고난의 표상으로 부활을 고난에의 항거의 표상으로 해석하였다.58) 그리고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을 수용하여 십자가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해석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인간과 함께 고난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의 속전이나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대리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설명하였다.
둘째로 고전적 속전설과 전통적인 충족설은 철저히 율법적인 틀에 속한 것으로서 구원의 미래적인 차원을 다루지 못한다. “죄를 위한 속죄는 언제나 하나의 소급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속죄의 동기는 원상태의 회복(restitutio in integrum)에 있으며 하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는다.”59) 그러므로 ‘창조-원죄-구원’의 환원주의적 도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되는 구원의 미래적 전향적인 차원을 약화시킨다.
셋째로 법적 보상 개념에 기초한 대리 충족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것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을 의미하는 언제나 반복된 여러 전통적 표상은 부활의 케리그마와의 아무런 내적 신학적 관련성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60) 희생제물은 그의 피흘림과 죽음으로만 효력이 발생하므로 속죄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은 대속적 제의적 표상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몰트만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선취된 구원의 희망에 대한 미래적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넷째로 이제까지의 신학은 죄와 죽음과 악의 문제를 원죄론에 기초하여 우주론이나 자연신학을 바탕으로 한 신정론(神正論)으로 질문하였다. ‘선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왜 악한가?’ 하는 신정론적인 질문을 몰트만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 안에서 생겨지는 현실적인 고난의 문제로 취급한다.61)
사회적 정치적 고난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정치신학은 복음의 신화적 해석이나, 제의적 해석뿐만 아니라, 이를 비신화화한 실존론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복음의 정치적 해석의 근거를 십자가의 정치적인 의미에서 찾는다.61)
예수의 십자가를 외적으로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유대인에 의해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자로 그리고 빌라도에 의해 로마의 평화를 교란한 정치적인 모반자로 오해를 받아 정치적인 사형도구인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내적 신학적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해석된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함으로서 고난을 이긴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참다운 항거를 뜻한다.”61) 하나님이 고난당함으로서 여러 차원의 모든 고난이 철저히 극복되었다. 고난 당하는 신이 아니고서는 고난은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의 방식을 속전이나 대리 배상을 통한 충족이나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으로 보거나, 아니면 대표성이나 위타성의 개념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만, 몰트만은 고난의 연대성(solidarity)과 일치성(identity)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1) 예수는 고통당하는 죄인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 고난 받는 민중들과 연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신 것이다. “예수는 버림받은 죄수의 모습으로 온 인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인류와 더불어 고통을 당하면서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서운 형태의 죽임을 당하였다.”62) 그리스도의 고난이 고난당하는 인간의 고난을 극복하는 구원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정치신학에서는 죄를 인간의 죄책감이나, 율법의 저주나, 죽음의 세력이나, 사탄의 지배로 이해하지 않고 현실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구체적인 고난과 삶의 온갖 악순환의 굴레를 죄의 여러 차원으로 이해하고 이를 다섯으로 설명하였다.62) 이러한 여러 차원의 고난과 악순환이 현대적 의미에서 죄라고 이해하고 이를 투쟁과 항거로 극복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한 것이다.6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서 말하자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현실적인 고난에 참여하는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고난에도 참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2) 구티에레즈의 해방론
남미 해방신학도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인 죄의 상황(harmartiosphere)으로 파악한다.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전거로 출애굽 사건과 눅 4:18-19를 제시한다. 출애굽 사건에서 경험한 구원은 노예 생활의 정치적 억압과 강제노동의 경제적 착취와 강제산아제한의 인종적 차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선포한 ‘가난한 자에 대한 복음’은 내용적으로는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선포하고 ‘주의 은총의 해’를 선언하는 것이다.
희년을 지칭하는 ‘주의 은총의 해’는 가난한 자와 압제자들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정치적인 사건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인 전거에 따라 1968년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에서 채택한 메데인(Medellin)문서는 “성자는 죄가 인간을 굴복시킨 모든 종속 상태에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 종속이란 기아와 비참, 압제와 무지, 불안과 증오들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심에 근원을 두고 있다”64)고 천명함으로써 ‘죄-구원’의 전통적인 정신을 ‘종속-해방’이라는 보다 포괄적이며 현대적인 사회집단적 정식으로 재해석하였다.
특히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이기심은 이미 인류의 절반을 파멸시킨 엄청난 죄의 구체적인 현실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빈곤의 악순환이 가중되고 이러한 경제적인 종속이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문화적 종속을 가속화시킨다고 분석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종속 구조를 해체하는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을 포괄적인 구원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65)
그리고 해방의 3중적 의미와 세 가지 차원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해방은 넓은 의미에서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층의 염원인 정치적 해방을 의미한다. 둘째로 해방은 역사를 통해 달성되는 인간화로서 인간 해방이다. 셋째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신앙적인 차원을 지닌다.66)
물론 구티에레즈도 구원의 정치경제적 차원만 강조하고 구원의 개인적 실존적 차원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강조점을 전자에 둔 것은 확실하다. 그 결정적인 논거로서 구티에레즈가 양적 구원과 질적구원으로 구분하고 후자를 강조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양적구원은 비기독교인을 복음화하여 개종시키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개인 구원이라면, 질적구원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인간화를 사회 구원이라고 설명하였다.67)
이러한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 해방론적인 의미로 죄와 구원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1973년 세계기독교협의회가 “오늘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모인 방콕대회의 선언문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죄는 개인적이고 동시에 집단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개인과 구조의 변혁을 이룩하신다. 이와같이 구원은 모든 역사를 통하여 보편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짓밟히고 억눌린 사람들이 해방을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가까이 온다.”68)
이처럼 해방론은 죄를 사회적 정치적인 고난과 억압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구원을 사회 정치적인 해방으로 파악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정치적인 삶을 따라 그리스의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바른 실천(orthopraxis)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예수가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8. 한의 속량론과 생태학적 구원(서남동)
1) 한의 속량론
1970년대의 민중신학은 한국적 정치상황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신학적 응답으로 전개된 일종의 정치신학이다.69) 서남동은 후에 민중신학을 전개하면서 ‘恨의 사제직’이라는 독특한 구원론을 제시하였다.70) 그는 민중신학의 핵심을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야성’과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고 하였다.71) 김지하의 단상에 나타나는 한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한의 신학’을 발전시키면 민중의 소리를 한 맺힌 호소로 해석한 것이다.
“한이란 눌린자 약한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없고 풀어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72)
한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남동은 죄의 개념을 한의 개념으로 대체하였다.73) 속죄론과 관련하여 죄를 고대사회에서는 죽음과 불사의 문제로, 중세와 근세에는 죄책감의 문제로, 현대 서구사회에서는 소외의 문제로 파악하여 왔다면, 한국신학이 문제 삼아야 할 죄의 주제는 한이라고 파악하고 죄를 가해의 죄와 피해의 한으로 구분하였다. 74)
“‘죄’,‘정죄’는 사회학적으로 볼때 흔히 지배자가 약자 반대자에게 붙이는 딱지(label)에 불과하기 때문에 ‘죄’의 사회학적인 분석 없이 신학적인 이론 전개란 오히려 성서적인 근본 의도를 배반하고 역기능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론에 앞서서 한, 곧 ‘범죄당한 경우’(sin against)가 문제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죄인들이란 ‘범죄를 당한 자들’(those who are sinned aginst), 곧 억울한 자들이다. 말하자면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한’은 민중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75)
죄를 가해의 죄과 피해의 한으로 구분할 때 한이라는 개념은 죄론적인 의미를 함축할 뿐만 아니라, 한을 푼다는 의미에서 속량적인 성격을 지닌다.76) 한을 지배자의 가렴주구와 억압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축척된 맺힌 한과 이를 반체제적 사상과 행동으로 승화한 푸는 한으로 구분한 김지하의 한과 단의 변증법을 신학적으로 수용한 서남동은 푸는 한의 속량적인 성격을 한의 사제직과 관련시켰다.77)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恨의 사제’는 전통적인 서구 신학에서 말해온, 죄의 회개를 강요하고 스스로 속죄의 매체로 자처하는 사제직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78) 그러므로 한의 사제는 죄로부터 구원을 말하지 않고 한의 절대 해체를 복음으로 선포한다.
“지배계층, 부유계층의 횡포를 축복하고 눌린자들의 자기 생존을 위한 항거를 마취시키고 거세하는 사제직이 아니고, 진정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비굴해진 저들의 주체성을 되찾는데 함께하고, 저들의 역사적 갈망에 호응하고 저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恨의 사제’가 될 것을 권한다.”79)
한의 사제는 현실에 눌린 자, 잃어버린 자, 저주받고 추방당한 자, ‘죄인과 세리들’의 한 맺힌 ‘소리의 매체’이다.80) 따라서 교회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예언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81)
서남동은 민중신학에서 출발하여 죄를 가해의 죄와 피해의 한으로 구분하고 한을 푸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함으로서 한의 속량적인 성격을 주장하였다. 예수는 죽음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은 무죄한 예수가 죄많은 인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으로 해석하여왔으나, 서남동은 예수의 죽음 자체가 피해의 한이 절정이며, 예수는 그 한을 풀어버렸기 때문에 부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해자들에 의해 피해이 한이 맺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이루신 구원 즉, ‘한을 푸는 것’을 통해 맺힌 한에서 자유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의 신학은 죄를 인간 사이의 정치적인 죄로 보고 가해자의 죄와 피해자의 한을 구분함으로서 죄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생태학적 구원론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전개하기 전에 현대자연과학과 새로운 자연신학의 문제에 몰두한다.82) 그 결과가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며”, “생태학적 신학서설”, “자연에 관한 신학”, “성장과 균현의 윤리”,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 “새 기술과학의 인간화”, “현대의 과학 기술과 기독교”, “생명과학 발전과 인류의 미래” 등의 논문으로 나타났다.83)
서남동에 생태학적인 위기의 관점에서 죄와 구원을 새롭게 파악하낟. 죄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 외에도 생태학적 차원을 지닌다는 것이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 죄는 생태계의 파괴이며 구원의 파괴된 생태계의 회복이 된다고 하였다 84)
생태학적 파괴를 죄를 규정하고 생태학적 위기의 요인과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을 분석한 후 기독교의 철저한 재고를 통해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학적 윤리를 생태학적 구원의 실천 과제로 제시하였다.85)
1) 인류환경의 생태학적 균형을 깨트려서 생태학적 종말의 가능성을 제기한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하였다. 곧 인구의 급격한 팽창, 경재성장에 따른 자원의 탕진, 그리고 성장과 소비지향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태도이다.86)
2)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사상적인 근원은 ‘서양 현대사상의 기조인 진보사상과 또 그 연원인 기독교 신앙’87)이라고 하였다. 진보 사상은 인간의 이용에 맞도록 자연을 변화시키는 과학적 발명을 극구 권장했으며,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과학의 탐험을 통해 인간의 좁은 시야는 넓어진다고 부추겨, 생태계의 파괴를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인본주의와 역사중심주의 역시 자연의 위치를 평가절하하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고 분석한다. 즉, 절대 초월적인 인격신이 천지를 무로부터 창조하시고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은 인간중심주의 여서 신도 인간의 형상으로 유추하고, 자연도 비신성화하여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위험이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은 역사와 자연을 대립시켜 역사일변도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신은 자연의 신과는 다른 성격을 띈다는 것이다.
“歷史의 神 男性神은 그 性格이 능동적이고 征服的이고 초월적인 데에 비해서, 自然의 神 女性神은 진리와 가치에 대하여 受動的이고 應答的(responsive)이며, 內在的이다.”88)
따라서 남성우위의 경향에 따라 자연의 정복을 당연시해 온 기독교의 부성신론은 재고 되어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에서 서남동의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89)
3)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기독교의 철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그 네 가지 과제를 제시하였다.90)
① 동양종교(원시종교까지 포함)를 배워서 참고하는 것이다. 죽재는 무엇보다도 “동양종교의 범신론적인 경향과 고대종교의 물활론(아니미즘)적이도 물신론적(Totemism)인 견해를 지금까지의 기독교가 이교(Paganism)라고 말한 것 것들을 기독교는 재고”91)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통합하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동방교회의 이해는 서방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서방교회는 자연의 과학적인 법칙성이 신의 존재를 가르킨다고 생각했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일찌기 ‘자연이 심미적으로 神의 얼굴의 聖像(icon)’이라고 생각했으므로 汎禮尊主義(Pansacramentalism)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92) 따라서 자연과의 화해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동서기독교의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현대과학, 특히 생명과학의 발견들을 통전하는 일이다. 자연을 전체로서 하나의 “생명의 그물”이요, 유기체적인 총체(organic whole)라고 주장하는 때이야르의 우주관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거시적으로는 전체로서의 자연을 법신론적으로 보며, 미시적으로는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범신적인 성격을 띈 “살아 있는 자연”으로 파악한다.93) 이러한 최근의 자연관은 서구의 근대의 자연관과는 매우 대조적이므로 양자의 통전이 필요한 것이다.
④ 성서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읽는 일이다. 죽재는 성서 자체가 인간중심적이고 역사중심적인 것만이 아니므로 성서를 또 한 번 새롭게 읽기를 시도한다. 성서 중에서도 창세기 1장, 시편 104편, 창세기 9-4,호세아 4:1-5, 로마서 8:18-26를 생태학적 신학의 관점에서 재검토하였다.94) 바르트가 성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차이를 드러내 보이는 세계를 발견했다면95), 죽재가 성서에서 발견한 세계는 그와 다른 점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神은 繼續創造의 神이며(시 104:14-30)이며,성서가 보는 神은 ‘萬有의 充滿(엡 4:10)이며,또 성서가 기다리는 神은 ‘萬有에 內在하 는 萬有(All in All, 고전 15:28)다.”96)
‘만물 위에 계시는 신’은 초월적인 성부로서의 신이라면,‘만물을 통하여 일하는 신’은 세계로 성육신하신 성자로서의 신이다. 그러나 ‘만물 안에 계시는 신’은 세계에 내재하는 성령이다. 삼위일체론은 신과 자연을 매개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삼중적 존재 양태를 다시 유신론, 진화의 신, 범신론과 상응시켰다. 따라서 성령과 범신론이 상응하게 되고, 유신론의 장점과 범심론의 장점을 종합한 화이트헤드의 범재신론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97)
이 네 가지 대안에서 우리는 서남동의 ‘생래적인 물활론과 범신론’이 자연스럽게 표출 된 것을 볼 수 있다.
4)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윤리로서 생태학적 윤리를 제시하였다.98) 개인윤리, 사회윤리, 생태학적 윤리의 구분은 죽재신학의 통전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99)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의 “양심의 소리”가 윤리적 규범이었으며, 사회적 관계가 점차 복잡해짐으로서 제2의 윤리규범으로 “사회정의”가 요청된다. 그러나 앞으로의 지구촌의 기술 사회에서는 새로운 제3의 규범이 요청되는 데 그것은 곧 “생명의 보존”(Survival of the Species)이라고 역설하였다. 특히 창세기 6장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는다.
“義人 노아는 이 生態學的 위기에 처하여 생명의 보존이라는 地上命令, 倫理的 規範을 듣게 된다(19절). 그래서 모든 생물-정결하거나 부정한 것을 불문하고(7:2)- 곧 지금까지의 人間中心主義的인 價値觀을 넘어서 “생명의 보존"(Survival of the Species)에 나선다. 모든 生物學的 種을 한 쌍씩 그의 方舟에 불러 들인다(20절).”100)
이처럼 일찌기 “창조의 보전”이라는 명제에 상응하는 “생명의 보전” 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규범을 죽재가 주창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101)
한편으로 죽재는 생태학적 신학을 새로운 자연신학이라는 점에서 “자연에 관한 신학”으로 전개하려고 하였다. ‘바르트 神學 以後 通行禁止令에 묶여 있던 自然神學에 대한 通禁解除’102)가 선언되고 자연신학이 새롭게 대두된 배경을 포괄적으로 조명하고, 창조교리와 구속교리의 문제,신과 자연의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신과 인간과 자연에 관한 그의 “통전적 자연신학”의 요체를 웅변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최초의 신학적 충격이며 그의 신학 형성에 영속적인 힘을 발휘한 생래적인 자연관이 유감없이 표출된 것이다.
“神을 거역하고 神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이브에게 神의 음성은 ‘아담아, 너가 어디 있느냐’ 곧 자기 상실의 반성으로 神을 심방한다. 그와 마찮가지로 自然을 상실한 사람은 神을 상실하게 되고 神을 상실한 사람은 自然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또 人間과 自然도 하나의 生態系(ecosystem)로 짜여져 있어서 인간상실은 자연상실이고, 자연상실은 인간상실이다. 이렇게 神, 人間, 自然은 하나의 生態系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有機體的 현상을 呈示한다. 그러기에 神은 宇宙의 마음이고, 宇宙는 神의 몸이라는 은유는 더욱 적절한 것 같다. 여기에 成肉身의 宗敎, 싸그라멘트의 自然이 알려진다.”103)
이 마지막 결론에서 서남동은 신의 상실과 인간상실 뿐만 아니라, 인간상실과 자연상실을 동전의 양면처럼 통전적으로 파악하였고, 신, 인간 자연을 하나의 통전적인 생태계라고 본 것이다.
서남동이 생태구원이라는 말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죄를 인간 상실로 보는 사회 구원에 비추어 볼 때, 자연상실을 죄로 보는 생태구원의 가능성을 구원론의 새로운 측면으로 제시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생태구원론의 그리스도론적 측면은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10. 구원론의 통전적이 이해
1) 구원의 세 차원과 천지인의 신학
죄와 구원에 대한 이해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속죄론과 관련하여 구원의 내용과 구원의 방식에 관해서도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죄와 구원의 내용에 관해서 고대사회는 죽음과 불사의 문제로, 중세와 근세는 죄책감의 문제로, 현대서구사회는 실존적으로는 인간의 소외의 문제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의 문제로 파악하여 왔다.
구원의 방식에 관한 고전적인 속전설이나 전통적인 충족설의 가르침은 신화론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이 현대에 와서 여러 형태로 제기되었다. 특히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른바 영지주의적 신화의 규범들로 해석’되었다는 전제에서 전통적인 속죄론을 비신화화하여 그 실존론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104)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속죄제물의 범주와 희랍의 보상법의 개념과 그리고 밀의 종교 및 영지주의의 종말론적 구원신화를 도입하여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하였다.105) 그러나 요한과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화적 표상을 비신화화하여 그 실존적 의미를 케리그마로 선포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롬 6:10)이라 하였다. 죄와 죽음과 율법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신화적 표상의 실존적인 의미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10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새로운 삶의 실존적 가능성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죄와 구원을 실존의 비본래성과 본래성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의 실존론적 해석은 구원의 방식에 대한 신화적인 세계관을 비신화화한 것이긴 하지만 구원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속죄론처럼 여전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만을 부각시킬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현대의 구원론 역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방식과 구원의 내용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에 관한 논의로 모아 진다. 전통적인 속죄론은 구원의 내용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과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이해했으나, 현대 화해론 또는 해방론은 인간과 세계의 전적 변혁이나 각종 사회적 정치적 고난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을 구원의 현대적인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구원을 이루신 방식에 대해 바르트는 화해하시는 하나님이 화해된 인간이 되신 계시의 사건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고 하였으나,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신 방식을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구원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듯이 고난의 현장에서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구원론에 관한 가장 큰 쟁점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에 관한 논쟁이다. 전통적인 속죄론의 입장에서 회심을 통해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고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지상과제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변혁하는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인간화를 이루는 사회구원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은 세계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며,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내용에 대한 양자의 통전적인 이해가 요청된다.
최근에 와서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넘어서는 생태구원이 구원의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였다.107) 개인의 회심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복음화와 사회구조악을 일소하여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인간화 못지않게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방사능 오염 등으로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회복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잘 돌보고 관리하여 ‘창조의 보전’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신학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내용을 이루는 이러한 세 요소의 삼중적인 관계를 통전적으로 설정하여야 할 과제가 제시된다. 인간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서 개인구원,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로서 사회구원, 인간과 자연사이의 바른 관계로서 생태구원을 아우르는 천지인의 신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천지인의 신학은 서구 중심의 인류 문명이 안고 있는 심각한 현안들의 대안적인 사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서구의 이원론적 실체론으로 인해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이 대립적인 실체로 분열되어 신성(神聖)의 포기와 자연의 파괴와 인격의 파탄이라는 인류문명의 생존과 관련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수직적 대신관계, 수평적 대인관계, 순환적 대물관계라는 천지인의 조화와 화해를 회복하는 것만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바른관계를 회복하고 마음과 몸의 바른 관계와 나아가서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을 지향하는 영성신학,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정의와 평화의 상생신학이나, 남성과 여성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여성신학, 자연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창조의 보전과 생태학적 신학을 모두 아우르는 해석학적 원리가 바로 천지인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1) 구원의 시간적 세 계기(과거․현재․미래의 구원)
이제까지의 구원론이 간과한 것은 구원의 시간적인 차원이다. 1900여 년 전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통해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 율법의 저주 및 온갖 사회적 정치적 고난의 악순환(구조악)이 완전히 해결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우리에게 여전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죄와 악의 문제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가 얻어 누리는 구원과 현재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과 장차 완전히 이루어질 구원에 대한 우리의 소망에 관한 논의는 전통적인 속죄론에서 충분히 다루어 지지 않았다.
바르트는 그의 화해론에서 화해사건의 세 차원을 언급하여, 칭의와 성화와 소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화해의 세 사건의 시간성을 분명히 설정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구원의 시간적인 차원들을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로 과거에 이미 얻은 구원이다. 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으며 아주 분명하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고 선언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다. 고전적 속전설과 전통적인 충족설과 칭의론은 이미 얻은 구원만을 강조하였으며, 이미 얻은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방법에만 초점을 두었다. 한국교회의 ‘구원파’ 역시 이미 얻은 구원의 주관적인 확신의 계기만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는 현재 이루어야 할 구원이다. 바울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전통적인 도덕감화설이나 현대의 해방론은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현세에서 이루어야 할 수덕과 고난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이미 구원을 얻은 신자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용이하지 않다. 현재 이루어야 할 구원은 값없는 은총(Gabe)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의 과제(Aufgabe)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장차 이루어질 것으로 바라야 할 구원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구속을 기다리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며(롬 8:23-24)”,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 13:11)”고 하였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고, 그 구원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구원은 미미한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고 져야 할 십자가의 짐은 여전히 무거운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장차 이루어질 영광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서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와 구원의 미래적 종말론적인 차원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통해 새롭게 제시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 사건은 시간적으로 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세 개의 서로 다른 십자가를 보아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믿어야 할 구원의 십자가’이며, 둘째는 ‘우리가 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이며, 셋째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영광의 십자가’이다. 이는 각각 구원의 세 차원인 칭의, 성화, 영화에 상응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속죄론이나 현대의 해방론은 구원의 시간적 차원을 통전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구원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구원, 사회구원, 생태학적 구원의 세 요소와 이미 얻은 구원(justification), 이루어야 할 구원(sanctification), 바라야 할 구원(glorification)의 세 차원을 조화롭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구원 이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당신이 꼭 기억해야 할 다섯가지 사실 (0) | 2014.08.06 |
---|---|
[스크랩] 신앙생활의 원리 - 3장 영원한 구원 (0) | 2014.08.05 |
[스크랩] 개혁주의 구원론(I) (0) | 2014.07.19 |
[스크랩] 구원론 요약정리 (0) | 2014.07.19 |
[스크랩]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무엇이 문제인가 (0) | 201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