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설교의 문제점
한국교회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는 가운데 본 장에서는 설교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부족한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자료를
본 장에 첨부한 가운데 여기에 실린 내용은 100% 필자의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된 가운데 산적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그 중에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설교의 문제점도 심각한 가운데 한국교회는 설교의 위기를 맞고 있다.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설교가 선포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변질된 신비주의, 열광주의, 기복주의, 성공주의에 물들어져 선포되는 설교는
복음적이며 성경신학적인 말씀보다는 기복주의, 성공주의적인 설교가 대부분인 것이다. 과거 필자는 마틴 로이드 목사의 '목사와 설교'를 읽었는데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 내용 중 저자는 말하기를 과거에 수십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복음에 관한 설교는 많이 들었지만 복음 자체에 대한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할지 모르겠는데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들에게 수박(복음이라는 수박: 예)을 전하는데 한 마디로 수박 겉 핥기식으로 수박의 겉은 어떻고 속은 어떻다는 말만하고 진정 수박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에 관하여 말만했지 복음 자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이 실종 되었다.(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대형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은 복음을 가장한 도덕적인 윤리적인 설교로서 기복주의 성공주의의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저멀리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릭웨렌, 조엘 오스틴 등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복음주의를 가장한 도덕주의, 성공주의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2. 한국 설교의 현장의 위기 요소들
첫째는, 우리의 초기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상당수에 이르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전체를 던져 하나님이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찾아 들으려는 뜨거운 열심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의 설교집을 뒤적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아 강단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음성으로 말의 기교를 부리는 습관화된 모습이 보인다. 말씀과 자신이 확신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이러한 비극적 현상은 설교의 상실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사연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우리의 설교에서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은 보이질 않고 설교자만 들어나 보이는 기현상이 발생되고 있다.
셋째는, 이상과 같은 결과는 자연적으로 강단을 설교가 아닌 연설의 장으로 만들게 되고 거기서 설교자는 부담없이 자신의 경험담이나 끝없이 엮어지는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사역을 탈선시키는 슬픈 현상을 보게 된다.
넷째는,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설교자들에게 있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에 대한 불평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상호의사 전달의 실패이다.
다섯째, 오늘날의 설교는 대개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자기의 삶에 연관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섯째, 요즈음 설교는 과감한 설교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의 설교가 삶의 현장과 별로 관련이 없는 고상한 이야기들로 가득찼다는 것을 말한다. 그 메시지가 때로는 고무적이고 위로의 성격을 띠기도 해야 되겠지만, 때로는 도전적이고 심령을 뒤집어 엎는 설교를 해야 될 때도 있어야 한다.
일곱째, 오늘의 설교는 상호전달이 안된다. 설교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아주 빈약하게 전달되고 있다. 교회와 설교는 현대 사회와 의미있게 상호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심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여덟째, 오늘의 설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설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게 하는 독특한 힘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에 가는가? 한 교회의 행동이 설교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성실성의 위기이다.
아홉째, 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되어 왔다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제는 더 이상 설교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설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무리들도 있다.
3.한국강단의 위기 요소들
첫째,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과중한 설교의 양이다. 일주일에 최소한 3편 이상의 설교의 횟수와 1년이면 156회,10년이면 1560편의
설교의 횟수는 역사상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고 할지라도 이만한 분량을 남기지는 못한 것을 볼수 있다.
둘째, 과중한 목회일로 인한 준비의 부족이다. 목사의 역할은 한가지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의 선포자로, 말씀을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사로, 교인들의 문제점을 들어주고 길을 밝혀주는 상담가로서, 교회의 제반행정을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행정가로서의 많은 일을 하다보면 25분의 설교에 25시간의 설교준비라는 많은 준비가 실상은 어렵게 된 것이다.
셋째, 본문을 떠난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말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지, 말씀의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해 주고, 그들의 삶에 적용해 주는 봉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설교자가 성서의 중심 메시지지를 잘못 전한다. 설교자가 성서의 해석과 바른 신학적인 이해가 없이 말씀을 선포하게 될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설교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설교자는 성서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다섯째, 설교의 메시지가 기복중심적으로 흐르고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의 선포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그분의 풍성하심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엄한 질책이 있다는 사실도 선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즉, 말씀의 선포에는 백성들을 싸매는 제사장적 기능과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예언자적인 기능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제사장적인 축복과 치유의 말씀만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꾸짖고 책망하시는 예언자적인 음성은 소홀히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여섯째, 설교의 내용이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과는 멀다. 설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그들의 삶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단지 성서의 진리만을 외칠 때에는 성경의 말씀은 땅에 뿌리 박힘없이 공중에 뜬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일곱째, 말씀앞에서 결단이나 변화보다 안일한 외침에 가깝다. 설교의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초점은 성도의 행동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안일하고 도피적이고 미사여구만으로 설교가 채워질 때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덟째, 설교자가 설교의 내용과는 다른 삶을 산다. 주님의 가르침은 먼저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 그대로 따라오게 하신 것 이다. 설교자가 말씀의 내용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때 그는 바리새인과 다름없는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완전히 살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근사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아홉째, 설교 단상이 쇼무대가 된 것 같기만 하다. 부산의 K 목사, 대전의 J 목사 등 여러 목사 들이 성경 말씀보다도 설교 중에 청중을 웃기는
원맨쇼 비슷한 코메디를 하는게 부지기수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 말씀을 듣는 설교 시간이라 할 수 있는가 의문스럽다. 설교시간이 아닌 웃음바다로 몰아 넣는 코메디 시간 같기만 해서 개탄스럽다고 할 수 있다.
4. 교인(청중)들의 위기요소
첫째, 예언적이고 고통을 요구하는 설교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요함이 찾아오자, 예전의 고통과 어려움을 쉽게 잊어버리고 주의 길을 따라오라는 고통을 요구하는 설교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예배에 전심으로 참여하는 정신의 부족에 있다. 설교를 들어주는 방관자적인 자세 속에는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설교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다. 능력 있고 힘있는 설교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최대한으로 경청하고 마음으로부터 응원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때 처음에는 미숙했지만 성장하는 설교자로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5. 도덕주의적 설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기복적인 것에 중심을 둔 과거 설교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지탄을 받았고, 이제라도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삶을 보이자는 반성적 차원에서 도덕주의적 설교가 강조되는 것 같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윤리적 설교가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권장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휴머니스트가 되거나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는 걸 우선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도덕적 가치는 설교가 근거할 복음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교가 지향할 하나님 나라의 근본 가치도 아니다. 둘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도덕적 가치를 케리그마의 중심에 놓는 것은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없다.
초등학생에게 훈화하듯 설교하는 목사도 적지 않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되면 ‘부모에게 효도하자’거나 ‘올바른 부부관계’ 등의 주제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다. 생일을 챙기고, 가능하면 이벤트도 만들라고 조언한다. 이건 근본적으로 설교가 아니다.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 통치의 새로움을 담은 성서를 삼강오륜 같은 윤리적 명제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오늘날 설교가 도덕주의로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설교가 청중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이것을 세분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그 토대는 동일하다. 하나는 도덕주의 설교가 신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적 신앙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세상과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양쪽 다 건강하지 못하다. 복음은 불안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 정용섭 목사 저서 설교란 무엇인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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