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 마 5,3과 눅 6,20b의 비교연구 -
정 훈 택 교수 (총신대 신대원)
서론
가난이란 상쾌한 단어는 아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한다. 자신의 적이요 인류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풍요해지는 것이다.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것은 가난을 정복하고 한 걸음 더 나가 부요해지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이 넘치고 희망과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돈을 펑펑 쓰고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눅 6,20b).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복음은 예수님의 입에서 떨어지는 날부터 이렇게 역설적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받아 들였다면 교회는 - 민중신학이나 흑인신학 혹은 해방신학이 주장하던 대로 - 마땅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는데 주력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교회는 항상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부와 건강과 번영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했다. 잘 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교회도 믿는 사람들도 최선을 다했다. 세계가 오늘날처럼 발전하는 데는 기독교가 톡톡히 한 몫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가난한 자 만이 아니라 부자도 올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와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 속해 있었다. 고용주나 피고용인, 우는 사람과 웃는 사람들이 함께 교회에 속해 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5,3).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순간부터 신앙은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들을 외부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종족의 차이, 신분의 차이, 사회적인 지위나 빈부의 차이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나 여자 누구나 마음이 텅빈, 목마른 자들은 하나님께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말씀은 정말 무리 없이 조화될 수 있을까?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자주 의문을 던진다. “(마음의) 가난”, 즉 영적 정신적 가난(마 5,3)과 “가난”, 즉 사회 경제적 가난(눅 6,20b)은 선택적이기는 쉬워도 통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음의 가난은 가난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가난은 마음의 가난을 배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삶의 차원에서 이 둘은 자주 신앙과 신학의 목표와 충돌하거나 반비례 관계로 나타난다.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가난한 자가 마음의 가난도 경험할 지 모른다. 혹은 극심한 가난과 고통이 마지막 남은 희망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축복의 선언을 듣고 그 위로를 소유하는 순간 그는 마음의 가난한 상태를 극복하고 신적 위로와 확신, 종교적 이기심이나 자존심에 사로잡힌다. 영원히 영적 가난 속에 헤매는 가난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이나 교회사의 출발점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인가?
신앙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현세에 그 긍정적 흔적을 남긴다. 가난이 극복되고 건강을 회복하며 현세적 부와 번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의 주도권을 쥔 중세 이후 교회는 이쪽으로 움직였다. 특히 개혁신학은 삶의 모든 국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제창함으로써 문화와 예술,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가난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 즉 가난을 극복하고 부와 발전을 일구어내었다. 그 결과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교회사가 이천 여년이나 진행된 지금 가난한 자들에게 주신 복음은 퇴색하고 말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교회는 교회사가 흘러온 것과는 역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하는가?
누가 처음의 이 출발점, 육적 가난과 영적 가난에 항상 머무를 수 있는가? 주님의 축복된 상태에 항상 안주하기 위하여 신앙과 교회가 만들어낸 괄목할 만한 결과를 우리는 부정하거나 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콘스탄틴 이후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를 되돌이킬 수는 없다. 아니 언제 시작해도 잠시 후에는 같은 결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영적) 가난을 축복된 상태로 부른 때로부터 조금만 시간이 경과하면 - 믿음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라면 - 자연히 같은 질문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마음도 가난하고 물질도 없는 기독교인들이나 교회는 현실에서 나약하기 짝이 없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조금도 주도하기 어렵다. 돈없이는 교회개척도 전도도 어렵다고 한다. 사람들에게는 내보일 수 있는 신앙의 결과, 체험들이 필요하다. 이 표적들은 항상 - 과거보다는 더 나은 -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러 모은다. 바로 이런 현실적 가치 때문에 교회가 더 강한 사회구조체로 발전하면 육적 가난과 영적 가난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수그러들고 교회도 부와 번영, 인류의 발전을 추구하는 대열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 부자이면서 동시에 마음이 가난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번영의 신학이 등장한다. 그래서 종종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있기보다는 통치자와 권력자와 가진 사람들을 변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런 것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어떻든 마음의 가난과 물질적 가난을 문자적으로 합쳐 개인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기독교인들 자신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다.
더 흔한 경험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늘 마음이 가난해지지도 않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늘 가난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부자도 마음이 가난할 수 있다. 경건한 부자들이 얼마나 귀한 사역을 일구었는가? 가난한 사람도 마음은 누구보다 더 부유할 수 있다. 부와 번영에로의 희망을 안고 고된 오늘을 극복해 가며 사람들은 살아간다.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늘 정비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고 반비례관계로 작용할 때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비슷한 두 말씀을 통합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수님은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셨는가 아니면 영적 정신적 가난을 축복하셨는가? 마 5,3과 눅 6,20b는 무리없이 조화될 수 있는가? 이 두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이런 질문들을 다룰 것이다.
공관복음서 문제
기독교의 정체성과 진로 그리고 그 목표를 찾는 탐구가 복잡해진 것은 비슷한 말씀이 마5,3과 눅 6,20b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둘을 쉽게 조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최근에 이 문제를 공관복음서 문제에 포함하여 해결하려 한다.
1. 마태복음의 문맥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산상설교가 시작되는 팔복. 5장 3절부터 10절까지를 통상 팔복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11-12절을 포함시켜 구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1-12절은 팔복의 확대 적용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 수록되어 있다. 그 문맥은 아래와 같다. 편의상 단락을 구분해 보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복은 앞의 네 가지와 뒷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부터 네 번째까지의 복은 통상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일반적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즉 - 간략하게 해석하면 -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고갈상태로, 애통이란 절망에서 표현되는 영적 비애로, 온유란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기다리는 것으로, 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구원을 대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네 가지는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차츰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점층법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다섯 번째부터 마지막까지의 복은 사람들을 향한 태도로 분석된다. 즉 다른 사람을 향한 긍휼히 여김, 두 마음을 품지 않음, 화평을 위해 일함, 의로운 삶으로 인한 박해를 복되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타인을 향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보다 적극적 자세와 행동을 표현하는 점층법이 사용되었다.
전자를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정신적 상태라고 부른다면 후자를 사람을 향한 윤리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런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앞 네 개의 복 가운데 온유나 애통을 영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사회적인 범위에 속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첫 번째 복의 영적, 정신적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이란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 즉 삶의 필수품들이 결핍된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다. 가난한 자는 그것을 구걸함으로써만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이 단어가 영적, 정신적인 면에 사용되는 예는 드물지만 예수님은 이 단어에 τω πνευματι를 첨가하여 사용하셨다. 이 표현은 한 사람이 성령에 굶주린 즉 성령을 갈급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야 하고 무엇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는가? 인간의 자존심, 희망, 삶을 위한 의욕 등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신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결핍된 상태 즉 극도로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상태, 혹은 한 인간의 영적 공허를 마음의 가난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극도로 가난에 빠졌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 막연히 하늘만 바라보는 혹은 하나님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셨다.
2. 누가복음의 문맥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은 평지설교가 시작되는 사복의 첫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그 문맥은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의 이 구절에도 마 5,3과 같이 τω πνευματι가 첨가되어 있다. 시내산 사본(א)의 이차교정자가 난외에 삽입했고 Q,Θ,파밀리 1,13에 속하는 소문자 사본들 등 몇 개의 사본이 본문에 이 구절을 가지고 있다. 사본학자들은 이것을 마태복음과 병행구로 만들려 했던 후기 복사자들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한다. “너희들의” 대신 “그들의”를 가진 사본도 소수 발견되었다. 공관복음서 사이의 병행구에서는 이런 동일시경향에서 만들어진 사본상의 차이가 자주 발견된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마태복음에는 이 구절과 병행구가 아홉번째 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의 선언이 대조적으로, 그리고 반의적 반복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앞의 네 가지 복의 선언은 모두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가난이란 정말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가난을 의미한다. 뒤에 이어 나오는 주린 자들, 우는 자들이란 용어와 같은 수위의 표현이다. 이 두 번째와 세 번째 복에는 이제(νυν)란 단어가 첨가되어 그런 상태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던 그 당시의 급박한 상황임을 표현하고 있다. 뒤의 화의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용적으로 앞의 복의 선언에 등장한 상태의 정확한 반대어들을 사용하셨다: 부자, 배부름, 웃음, 칭찬. 이 반어적 반복법이 6장 20절의 가난의 의미를 물질적 가난 이외의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가로 막는다.
누가복음의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사람들, 지금 그렇게 고통당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고 선언하셨음이 틀림없다.
3. 요약
마 5,3과 눅 6,20b는 같은 말씀으로 취급하기에는 쉽지 않은 면이 몇 가지 있다.
1.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설교(마 5-7장)에 수록된 팔복의 첫 번째로 나오고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눅 6,20-49)에 수록된 사복의 첫 번째로 나온다. 이 두 설교는 기본구조는 비슷하나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는 복의 선언으로 설교가 시작되고(마 5,3-10; 눅 6,20b-21),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즉 집짓는 자)의 비유로 끝난다(마 7,24-27; 눅 6,47-49).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맏는 자들에 대한 복의 선언(마 5,11-12; 눅 6,22-23), 비판하지 말 것(마 7,1-5; 눅 6,37-42), 거짓 선지자에 관한 경고(마 7,15-20; 눅 6,43-44), “주여, 주여”하는 자에 대한 경고(마 7,21-23; 눅 6,47-49)가 같은 순서로 수록되어 있고, 순서는 다소 다르지만 복수에 관한 말씀(마 5,38-42; 눅 6, 29-30), 사랑에 관한 교훈(마 5,43-48; 눅 6,27-28; 32-36), 황금률(마 7,12; 눅 6,31)이 두 설교에 다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는 네 가지 화의 선언(눅 6,24-26)이 첨가되어 있다. 평지설교에 나오는 선한 사람과 선한 일에 대한 말씀(눅 6,45)은 산상설교에는 없고 비슷한 말씀이 마 12,35에 발견된다. 산상설교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비유(마 5,13-16)는 눅 14,35-35에, 율법의 성취(마 5,17-20)은 눅 16,17에, 살인에 대한 말씀(마 5,21-26)은 눅 12,57-59에, 이혼에 관한 말씀(마 5,31-32)은 눅 16,18에, 주기도문(마 6,9-15)은 눅 11,1-4에, 보물을 천국에 쌓으라는 명령(마 6,19-21)은 눅 12,33-34에, 몸과 등불의 비유(마 6,22-23)는 눅 11,34-36에, 두 주인에 관한 교훈(마 6,24)은 눅 16,13에, 그리고 염려에 대한 교훈(마 6,25-34)은 눅 12,22-32에, 기도에 관한 교훈(마 7,7-11)은 눅 11,9-13에 같거나 비슷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팔복 중의 다섯 가지, 간음에 대한 교훈(마 5,27-30), 맹세에 관한 교훈(마 5,33-37), 구제와 기도에 관한 교훈(마 6,1-8), 금식에 관한 교훈(마 6,16-18), 거룩한 것에 관한 교훈(마 7,5) 등은 누가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의 배경도 일치하지 않는다(마 5,1-2; 눅 6,20).
2. 마태복음의 팔복은 그 자체가 점층법적인 구조를 갖는 것으로 그치는데 비해 사복은 점층법적 구조로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네 개의 화의 선언과 대조를 이룬다.
3. 마태복음의 팔복은 영적 내지 정신적 면을 다루는 네 개의 복(마음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윤리적인 태도를 다루는 네 개의 복(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함, 의를 위한 핍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의 사복은 사회적 경제적인 면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가난, 주림, 움, 핍박). 누가복음의 사회적 분위기는 뒤에 연이어 나오는 네 가지 화의 선언에서(부요함, 배부름, 웃음, 칭찬) 다시 한 번 확인된다.
4.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누가복음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무엇을 좀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 혹은 부자들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는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셨다는 식의 편의주의적 해석과 적용은 예수님을 기회주의자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예수님을 일괄성있는 분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하는 것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이요 전통적 예수님상에 잘 어울린다.
현대적 경향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는 오래 전부터 공관복음이라고 불리어왔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거의 비슷한 시각으로 묘사해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저자에 의해 독창적으로 기록된 것이라면 쉽게 일치하기 어려운 사건의 기록에 있어서도 용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구성, 문단의 형식, 혹은 사건의 기록순서 등이 놀랄 정도로 마치 서로 베낀 것처럼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크고 작은 차이들이 이곳 저곳에서도 발견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 말이나 예수님의 교훈이 같은 것이라면 시대가 웬만큼 지나도 달라지기 어려운데 복음서 사이에는 적지 않은 부분이 자주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때로는 사상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음시대의 사용어가 주로 아람어요 코이네로 기록된 것은 번역의 과정이 있었음을 추정케 하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다. 우리가 연구하는 두 구절도 이런 관점에서 조명된다.
서로 다른 저자들이 다른 상황에서 독자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기 때문에 일 점 일 획도 틀림이 없다는 고전적 성경(형성)관은 17세기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공격으로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복음서들은 역사적 예수님을 보여줄 수 없는 설교집이나 영웅전 정도의 문서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관복음서 사이의 일치점 차이점의 문제가 이외로 과대포장되어 기독교의 기반을 흔드는 괴물로 등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사적 예수님을 자신의 언어로 색칠하여 복음서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공관복음서 문제를 취급하는 신학자들은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놀라운 일치점에 도달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사이의 문서적 의존관계를 돌파구로 찾은 것이다. 현존하는 복음서 중에서는 마가복음이 최초의 복음서요 마태와 누가는 이 마가복음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복음서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태와 누가는 다른 하나의 문서를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이 문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로 수록해 놓은 어록집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학자들은 이를 즐겨 Q라고 이름지었다.
G. Strecker의 추론을 따르면 예수님의 복의 선언은 원래 Q에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형태로 세 개가 붙어 들어 있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에 대한 축복. 이것을 이용하여 마태는 윤리성을 강조하는 복을 덧붙이고 각 복을 변형시켜 지금과 같은 팔복을 만들었다.. G, Strecker, Die Bergpredig: Ein Exegetischer Commentar. Vandenhoek & Ruprecht, Göttingen 1985, p. 30-35.
우리가 연구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원래의 축복은 누가복음에 수록되어 전해진 대로 물질이 없어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었는데. 위의 책, p. 30. Strecker는 이런 분위기가 Q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같은 저자의 “Die Makarismen der Bergpredigt", in: Eschaton und Historie, Göttingen 1979, p. 116-117도 참고하라. 그는 마태 사도가 ”심령에“를 더한 신학적 의도를 원자료의 영성화 혹은 윤리화로 설명하고 있다.
마태는 이 원래의 말씀에 “심령에”(τω πνευμα)를 덧붙여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교만과 자기만족에 대조되는 겸손한 자를 축복하는 영적 정신적 복의 선언으로 변형시켰다. 위의 책, p. 31-32.
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불행하게도 최근의 신학신약계의 일반적인 공리처럼 인정되고 있다. 다만 누가도 전승에 손질을 가하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보충했는가와 마태가 변형시킨 신학적 의도가 달리 있는지 또 이것이 예수님의 원 의도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에서 학자들 간에 다소 상이한 견해가 발표될 뿐이다.
누가복음은 일반적으로 단체보다는 개인에게, 영적 정신적 분위기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분위기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님의 원 말씀은 그것이 “심령에”라는 부사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 예수님 당시의 분위기와 반바리새적 경향을 보이는 - 영적 정신적 축복일 가능성이 더 큰 데 누가는 사회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된다.. W. C. Allen, Matthew, in ICC, Edinburgh 1912, p. 39를 참조하라. 그는 누가복음의 복을 마태복음의 복처럼 해석할 것을 제한했다.
이에 비해 마태는 “심령에”를 첨가함으로써 예수님의 원의도를 더 잘 살리고 그 유동적 의미를 고정하고 있다고 분석되기도 한다.. A. M. Hunter, Design for the Life; the Sermon on the Mount, London 1978, p. 35는 마태가 예수님의 원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적 토론의 장에서는 우리가 위에서 던진 질문은 이미 일방적인 경기로 끝난 감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축복”으로 규정하며 멍청한 보수주의자들의 항변을 일축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비록 마태 사도에 의하여 예수님의 축복이 새로운 각도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초대교회부터 영적 가난을 축복으로 이해하고 적용해 왔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이것을 굳이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거부하거나 배제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성경은 교회의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극단주의자들이 기독교 이전의 예수님을 찾고 기독교의 방향을 그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사를 부정하는 흐름은 결코 대세를 잡고 있지는 못하다.
구약배경을 통한 통합
사태가 이렇게 발전해 오기 전에는 - 물론 아직도 비슷한 견해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 가난과 영적 가난을 통합하기 위하여 구약적 배경을 동원하곤 했다.. G. E. P. Cox, Saint Matthew, London 1952, p. 45는 이런 관점의 구약성구로 시 9,18; 37,14; 사 66,2를 제시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난한 자의 구약적 배경과 그 발전과정에 대한 논의로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NTD 2, Göttingen 1981, p. 49를 참조하라.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로 자주 언급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아나빔)”은 그들의 가난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난이 이유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영적 상태가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신구약 중간기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외세의 통치 하에서 율법은 점점 지키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대제사장권과 제사제도마저 유린하는 이방통치자들 아래서 그래도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억압을 받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정통 대제사장가문의 후예들은 유대사회를 떠나 광야로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간섭하지 않는 자유업을 주로 선택했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수치가 아니었다. 구약의 맥락을 이어가는 경건한 사람들의 표제어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상태 자체를 표시하기 보다는 가난을 만들어내는 상황, 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고자 하는 경건한 정신을 표시한 것이다.
가난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은 이렇게 내용면에서 그리고 형식면에서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가난”을 현상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되고 마태복음의 영적 가난을 그 원인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런 관점에서 J. N. Ridderbos는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란 이 세상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 뒤로 밀려나는 사람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시한다.”. H. N. Ridderbos, Mattheus, in Korte Verklaring, KOK, Kampen 1941, p. 89.
이 통합적인 방법은 그럴 듯하긴 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문맥으로 돌아가보면 두 구절을 다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통합하기 어려운 점 때문에 둘을 중간에서 만날 수 있도록 양비론적 발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각 구절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해석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더욱 예수님의 축복이 담고 있는 신약적이며 기독론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가난 자체?
위의 해석들은 모두 “(영적) 가난”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가난을 규명하고 그 가난한 상태 자체를 복된 것으로 분석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말 가난한 상태 자체를 축복하신 것일까?
가난은 성경 어디에서도 바람직한 이상적 상태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할 상태요 극복하도록 모두가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다. 구약성경은 부를 번영과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난은 그것이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이상적 상태라기 보다는 영적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이유가 되어 다른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복되다고 일컬어진다.
예수님은 이것을 각 복의 두 번째 연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왜냐하면(οτι)”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해 보자: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3). “복되도다 가난한 사람들이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것이 혹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 동기나 이유가 되어 천국 내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은 복된 이유, 혹은 복된 조건을 선포하신 문장이다.
본문 이외에도 가난 자체가 복된 상태가 될 수 없음을 아래에 몇 가지로 지적해 보자.
가난 자체가 최상의 길, 축복받는 유일한 상태라면 삶과 역사는 완전히 정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의 길은 오직 가난해지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해지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가난을 향한 역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누구나 노력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혹은 배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비참과 공포와 절망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이런 대답은 관심의 대상을 굳이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축소하지 않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첨렴과 결백을 무념과 무상을 미덕으로 생각해 왔던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난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현실을 살펴보면 기독교 세계이든지 비기독교인의 세계이든지 가난을 좋다고 말하는 것은 포기에서 나오는 절규에 가깝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쥘 수 없음을, 잠시 가져도 놓고 갈 수밖에 없음을 한탄하는 시한부 인생의 자조섞인 한탄에 가깝다. 영원한 소유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더 나은 것을 기대한다면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도 교회도 사실은 가난이 아니라 분명 부와 건강과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과제로 경청하고 순종하는 곳에는 항상 발전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교회는 과연 항상 가난한 상태에 있는가? 계속 가난해지기 위하여 노력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복음의 종들도 - 그것이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 사람은 - 자신의 것은 하늘에 쌓는 것으로 계산하며 -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부와 건강과 번영, 행복을 위해서 바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가난 자체에 대한 축복으로 받아들였다면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부와 행복을 빌고 기도하는 것마져 포기하고, 또 누구나가 그렇게 포기하도록 권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축복을 찬송하며 영생을 감사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이미 부유해진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동기를 제공하는 (영적)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것 아닐까?
우리는 가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방향을 복음의 당연한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가난과 문맹이 퇴치되고 발전이 있었다. 각성이 있었고 인권의 회복과 번영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 가난에 위배되는 것으로 - 부끄러워하지 않고 진보라고 생각한다. 축복이라고 부른다.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선전하며 자랑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어느 한 시대에 가난 자체를 목표로 삼는 기독교인들이 활약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에 소유 자체를 죄악시 혹은 필요악시 한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완전해 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소유를 버리고 가난을 선택했다. 그들은 아무 소유도 없이 구걸행각을 하며 전도하고 전국을 유람하곤 했다. 그들의 행색과 삭발을 하고 속세를 떠나는 사람들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 예수님은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성급한 판단
J. van Bruggen은 상기한 바와 같은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성급한 판단이라고 불렀다.. J. van Bruggen, Wie maakt de bijbel; Over afsluiting en gezag van het Oude en Nieuwe Testament, KOK, Kampen 1986, p. 98-112.
몇 안되는 자료로 너무 큰 결론을 서둘러서 내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문서설만이 가능한 대답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문서설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를 성급하게 가정하고 있다.
1.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한 어록이 있었다.’ 이 어록은 아직 가정상 존재할 뿐, 혹은 성경연구의 결론의 제안될 뿐, 그 실체가 조금도 확인되지 않았다. 즉 어록집은 아직은 가정이나 한 결론으로서의 가치밖에 없다. 이것을 근거로 다음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역시 하나의 가정밖에 되지 못한다.
2. ‘마태나 누가가 마가복음과 Q를 사용했을 것이다’는 것도 공관복음서 비교연구의 한 결론이지 공리는 아니다. 불확실한 한 추론을 근거로 주석작업을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확실한 자료인 복음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신학연구의 결론은 그것이 입증되기까지는 주석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3. ‘마태나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신학적 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변경시켰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한다. 무엇을 근거로 이천 여년 전의 이 주장을 부정하는가? 우리는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공관복음서의 비교연구를 통해 밝혀지는 차이점과 일치점 뿐이다. 이것이 저자들의 주장만큼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음서기자들이 전하는 그대로가 예수님의 말씀이라거나 그들이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까? 편집적 의도라는 것은 복음서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연구하는 복음서를 우리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4. ‘예수님은 비슷한 말씀 비슷한 설교를 한 번 하셨을 것이다.’ 삼년 동안 설교하신 예수님께서 매 번 다른 설교만 하셨다고 가정할 이유가 있을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청중들이 계속 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설교하셨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 주제로 한 번만 설교하셔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제한이다. 비슷한 설교를 조금씩 다르게 말씀하셨다면 누가 말렸을까? 복음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나 설교는 하루에 다 반복할 수 있을 정도의 소량이다. 예수님께서 비슷한 설교를 여러번 하셨을 가능성은 한 번만 말씀하셨을 가능성 못지 않게 크다. 그러나 가능성이나 없는 것을 근거로 말할 수는 없다. 확실한 근거는 마태는 마태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두 말씀을 예수님의 설교로 소개한다는 것뿐이다. 이들의 보도를 거짓으로 돌려야 할까?
공관복음서 문제 이해를 위해 우리가 찾아봐야 할 사항과 조건은 구전설이나 문서의존설이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복잡하다. 우리의 주된 관심이 예수님의 설교의 한 부분인 축복의 선언에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설명만 첨가해 본다. 이것은 같은 말씀이라 하더라도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본 것이다.
1. 언어는 그 장단과 억양, 상황에 따라 그 소리를 단순히 글로 적는 것 이상을 의미할 수 있다. 글에는 억양이나 음의 장단이나 고저와 같은 표현,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적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의미를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이해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 경우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의도하신 것을 찾는 방법은 예수님의 육성을 재생하는 것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어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한 사람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글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대략적 일치로 만족할 뿐이다.
2. 언어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예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은 변하지 않아도 그것을 재생하는 언어는 늘 유동적 변화의 과정에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장소가 달라짐에 따라 그리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언어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예수님의 한 번 말씀하신 역사적 교훈을 의미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단어 다른 표현이 채용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3.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는 이 의미의 차이는 더 커진다. 그래서 원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복음서를 고대 아람어로 재번역하는 시도로까지 나타나지 않았는가? 누가 번역하며 그 번역의 시대와 장소가 어디냐는 것까지 연구해 들어가야 한다. 고대 세계란 지금처럼 언어의 울타리와 간격이 좁아져 있던 시대는 아니었다.
학자들이 이문서설을 말할 때 이런 가능성까지 다 관찰하지는 않았다. 더욱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님의 말씀일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면을 감안하여 J. Calvin은 예수님의 여러 설교로부터 각 기자들이 각각 그 내용들을 발췌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Matthew, Mark and Luke, in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I, trans. A. W. Morrison, WM. B. Eerdmans, Grand Rapids 1972, p. 108.
위에 언급한 J. van Bruggen은 예수님의 보다 큰 설교로부터 마태는 마태대로 누가는 누가대로 각자의 관점과 강점에 따라 요약적으로 설교를 소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J. van Bruggen, Mattheüs: Het evangelie voor Israël, KOK, Kampen 1990, p. 85.
물론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 곁에서 우리는 복음서기자들을 거짓보도자로 만들지 않고 또 본문을 그대로 주석할 수도 있게 된다.
상황적 이해
우리가 위에서 길게 논의한 것은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를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취급하고 복음서 기자들이 설정해준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다는 상황 하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 상황연구에서도 밝혀진다. 설교의 배경이 다르고 그 대상이 다르다. 예수님의 사역 중 - 복음서가 알려주는 대로 순서를 계산해 본다면 - 설교를 하신 그 시점이 같지 않다.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평지설교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점 쯤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설교의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르다는 것은 문제를 발생시키기 보다는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를 제공한다. 설교의 상황과 설교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묘하게도 두 복음서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게 부각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1. 마태복음
마태 사도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네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을 소개했다(마 4,17-22). 네 명의 최초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약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태 사도는 이 광경을 “허다한 무리가 좇았다”고 기록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다(5,1). 산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무리를 피해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효과적으로 하시기 위한 적당한 장소로 산을 고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보기 쉬운 조금 높은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아마 사람들은 그 주변의 평평한 곳을 골라 앉았는지도 모른다. 학자들 중에는 이들이 끝까지 서서 설교를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 아마 네 명의 -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마태 사도는 이 광경을 감격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오래 기다리던 그 역사적 순간이 드디어) 예수께서 입을 여심으로 시작되었다고 썼다. 이 무리들은 설교가 끝나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설교가 끝나자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적인 가르침에 감복해서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신다(마 8,1). 물론 제자들과 무리들이 따른다.
그 첫 말씀이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삼인칭 표현법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서 문제를 다루는 신학자들은 다시 예수님의 원 설교가 이인칭 표현법이었는지 삼인칭 표현법이었는지를 토론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제안은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란 용어에 있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유대적 관습을 반영하는 “하늘들의 나라”가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을 그 단어였을 것이라고 선호한다.
삼인칭 표현법의 효과는 모여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다 지시하지 않고 그 중에 적격자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즉 모여 있는 사람들을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이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에게만 말씀의 내용이 적용되도록 하는 표현법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가 된다. 여러분 중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즉 모여 있는 모두가 복된 사람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 중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만이 복있는 사람이라는 선언인 셈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마음의 가난은 별 의미가 없다. 천국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그들의 것이 되는지 그리고 그 시점이 과연 어디인지 따지는 것은 또 한 바탕의 긴 토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마태복음 문맥 안에서 - 신약성경 전체를 거론해도 결론은 같다 - 결론만 적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산상설교 전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의 복음이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을 하시면서 그 복음의 내용을 마태 사도는 산상설교의 형태로 소개한 것이다.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산상설교에서 현재형으로 바뀐다. 물론 그 최종적 완성 국면은 아직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지만 천국은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이미 시작된 것으로 말해진다. 예수님은 그 천국의 왕으로서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한 것 이상으로 - 예수님은 율법의 수여자로서 - 산상설교를 선포하셨다. 산상설교는 오신 천국의 왕의 왕국선포이다. 팔복의 각 둘째 연에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미래적 이유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충족된다. 우리 시점에서 말하자면 이미 충족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져오신 분이요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분이시요 주린 배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천국을 소유하는가? 삼인칭 표현법은 모인 무리 중 일부분을 그 범위에서 제외하고 일부분만 포함시킨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변화하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며 실망하고 낙망한 사람들, 그래서 이제는 싸울 기력도 없이 항거하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켜 의인으로 살아갈 기력조차 없어서 다만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것이다. 아니 이미 천국을 발견하기 시작한 제자들도 있었다. 천국의 왕이 오셔서 자신을 따르며 하나님의 도움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와 구속’울 약속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설교와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과 그 당시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등한히 할 수 없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외의 방법으로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마태복음과 신약성경의 교훈이다. 결국 예수님의 축복의 선언은 하나님을 바라던 텅빈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따라 나선 바로 그 예수님께서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천국(의 축복)으로 채워주신다는 선언이었다. 복된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 이외의 다른 복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의 첫 번째 복)은 천국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인 것이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에 주안점이 있다. 예수님에게 왔으나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복된 사람이 아니다. 산상설교는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자격과 정체와 권한 그리고 의무를 규정하는 설교이다.
2. 평지설교
누가복음에는 평지설교가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이 비교적 자세하게 - 마태복음보다는 더 많이 -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와 더 많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네 제자를 부르신 사건 후에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 사건이 5장에 수록되어 있으며 6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12사도를 임명하신다.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시자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와 있다(6,17).
평지설교가 시작되는 시점은 산상설교의 시점보다 예수님의 사역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미 열 두 제자들의 임명이 끝난 후였다. 그 외에도 더 많은 - 넓은 의미의 -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6,20a) 평지설교를 시작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 산상설교와 비슷하게 - 설교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지만, 평지설교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설교는 이렇게 시작된다: “복되도다 가난한 사람들이여! 천국이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선언은 - 산상설교의 팔복과는 달리 - 이인칭 표현법으로 되어 있다. 이인칭 표현법의 효과는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혹은 청중으로 소개된) 모두를 직접 지시하며, 그 내용을 그들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이다. 삼인칭 표현법과 같은 청중을 어떤 조건으로 제한하는 기능은 없다. 청중 모두가 축복의 말씀을 듣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내용이 적용되는 대상이다. 누가는 이 설교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하신 설교로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 축복의 대상, “너희”로 삼는다. 즉 복되다고 선언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호감을 혹은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에게 나온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당하고 배고파하고 우는 사람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멸시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죄인들도 있었다(눅 5,29). 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잠시 후에 제자들이 되었다. 열 두 제자를 별도로 살펴도 상황은 크게 호전되지 않는다.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그들의 고향과 가족과 직업을 떠날 것을 요청받았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별로 버릴 것도 없었지만 어떻든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 때문에 가정도, 삶의 수단도 다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들이 밀밭을 지나가다 배가 고프자 밀이삭을 손으로 잘라 비벼 먹었다(6,1). 잠시 후에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 중에서 열 두 제자들이 임명된다. 그리고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신다. 평지설교를 들었다는 “너희”를 가난한 자들, 우는 자들, 배고파하는 자들로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것은 당시의 제자들의 가난한 실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는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배고파하고 우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부자들이나 웃는 자들, 배부른 자들은 쉽게 예수님에게 오지 않았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억압받고 가난한 자들을 복되다고 축복하신 이유는 다른 데 즉 예수님을 따라 나선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는 데 있었다. 아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이미 그들에게 임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 “너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가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난이나 마음의 가난이나 그 상태 자체를 축복하는 것은 신약성경이 아니다. 복음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 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실어 나르는 것.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다른 표현이지만 결국은 같은 것을 지시한다. 신학자들은 천국이 유대인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용어인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 아마 누가복음의 최초의 독자들로 추측되는 - 이방인들이 이해하기 쉬인 용어임을 일찌감치 인식했다. 공관복음서 사이의 병행구를 비교해 보면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천국”으로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신국”으로 표현되어 있는 예를 가끔 볼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사람들의 것이 되는가? 누가복음에서도 - 특수하게 사도들을 지칭하든 아니면 넓은 의미의 제자를 지칭하든 -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이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거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별다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현제에 실현된다. 예수님께서 시작케 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통치는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예수님을 따라 나섬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불리우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왕이 되신다.
가난한 자에 대한 누가복음의 복의 선언도 마태복음에서의 마음의 가난에 대한 축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신 것이다.
결론
마음이 가난한 자와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 단어와 그 내용을 따라 찾을 때는 이 둘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는 말씀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께서 누구를 축복하셨는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나 교회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길을 갈 수 있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문맥에서 문맥이 제시하는 그 역사적 상황과 함께 따져본 결과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상태나 마음의 가난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하여 자극되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게 인도되고 믿음으로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축복임이 밝혀졌다.
복음은 가난하다는 것이나 마음이 가난한 것 자체를 이상적 상태로 규정하지 않았다. 물론 부에 대한 경고가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마음의 가난이나 가난이 부보다는 더 쉽게 하나님에게 올 동기나 자극제를 제공한다는 것,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 나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가난이 혹은 마음의 가난이 주님에게 가는 지름길이 되는 것 임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적 부와 인간의 자만심, 자존심은 하나님에게 가는 길을 가난이나 절망보다는 더 쉽게 가로막을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자라도 그 부가 자극제가 되어 예수님을 찾게 되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면 결국 신약적 관점에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관점에서 복된 사람임이 틀림없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은 특수한 인간이나 한 인간의 특수한 상황을 절대시하거나 이상향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고 그를 믿고 따르는 것만을 축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이나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은 다같이 진실된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와 부합하는 기독교적 복음임이 틀림없다.
[출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작성자 쥬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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