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천당 구원과 지옥 영벌

하나님아들 2012. 8. 31. 18:07

예수가좋다오

천당 구원과 지옥 영벌
요한복음 3:16 -③-석기현 목사

 

기독교의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 가지 교리는 바로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이신득구'와 알미니안 신학의 '이행득구'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고 구원을 얻는다.'라는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구'의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천주교를 대항하여 참된 성경중심의 교회를 회복하게 만든 대표적인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개신교' 안에서 그와 같은 '칼빈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다시 천주교의 구원론으로 되돌아가는 '이행득구' 즉 '인간 자신이 쌓는 선행의 공로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라는 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서 그 '이행득구'의 교리가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인성론'에 맞먹는 중대한 교리라고 확신했던 '이신득구'의 교리를 두고 오늘날의 어떤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은 '한때 지상에 번성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종된 공룡과 같은 교리'라는 조소까지 던지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은 결코 '멸종'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요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너무나 뚜렷이, 너무나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하여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이 세상을"이라는 구절을 통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함께 상고해 보았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알 길이 없고, 오직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 편에서 구원 역사의 주도권을 시종일관 전적으로 행사해 주심으로써 죄인 된 인간에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 두 번째 진리 즉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증거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는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최대최고 표현'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스스로의 지식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 완전타락한 죄인을 향해 베풀어 주시는 당신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을 증명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까지 보내 주시는 기상천외의 방법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그처럼 성부께서 '주도'하시고 성자께서 '성취'시켜 놓으신 구원역사가 과연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만 남게 됩니다. 오늘  바로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세 번째로 증거해 주는 복음 진리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3. '영생 구원'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시고 전적으로 주장하심으로써 죄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죄인 대속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그 구원의 조건이 완전히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구원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적용되는 마지막 단계를 두고 본문의 말씀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주도하시고 그토록 사랑을 쏟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멸망치 않고"라는 말씀을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그저 대충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뽑아서 '영생'을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마땅히 멸망했어야 할 죄인에게 영생이란 엄청난 선물이 대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을 깨닫고 얻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은 만약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반드시 다 멸망하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부터 인식하고 또한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지극히 공의롭고도 당연한 선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상황 즉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다 '원죄' 아래에 있고 '자범죄'까지 더하고 있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지옥의 영벌'을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니 일부 기독교인들조차 '천당'이란 말은 좋아하고 잘 쓰면서도 '지옥'이란 말은 쓰기를 꺼려들 합니다. 성경에 '천당'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많이 등장하고 있는 '지옥'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영생 구원'이라는 말은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무슨 '욕'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도자이며 소위 '복음주의'의 목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살고 있을 당시 그 분이 유명한 주간지 '타임'(Time Magazine)의 한 기자와 긴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이 몇 페이지에 걸친 기사로 실린 것을 읽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 내용 중에 "당신은 천당과 지옥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기자가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질문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의 대답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천당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하면서도 지옥에 대해서는 그 대답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습니까?


미국은 물론이요 전 세계에서 그래도 양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될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천당구원과 지옥영벌의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깨끗하고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이 평생토록 인도했던 수많은 전도 집회들보다 오히려 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황금 같은 호기에 그 유명한 세계적 부흥사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는 다른 '좋은 말씀'들은 잘 하시다가 지옥에 대해서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려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는 말할 줄 알면서도 '벌'에 대해서는 이처럼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이런 현상은 사람이 타락할 때부터 그 악한 본성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가인이 첫 살인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핏소리를 들으시고 "너는 땅에서 저주를 받아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그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을 듣자마자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회개할 생각은 끝까지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자기에게 내려진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중하다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영벌을 받아 마땅한 자신의 죄는 생각지 않고 그저 그 벌이 무섭다고, 너무 심하다고 불평하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조차 듣기를 꺼려하는 오늘의 '가인'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지옥' 없이는 결코 '천당'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다면 '구원'이란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이란 받아 마땅한 '영벌'을 받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것, '지옥 영벌' 대신에 '천당 영생'이라는 이 엄청난 구원의 은총을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얻게 해 주셨습니까? 그것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나도 쉬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저를 믿는 자마다" 무조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귀한 영생 구원을 우리가 이처럼 쉽고도 간단하게 받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제일 어려운 부분은 이미 '독생자'께서 대신 다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갚을 길 없었던 그 엄청난 죄값을 성자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일전 한 푼 남기지 않고 완전히 다 갚아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 대신에 무슨 '지혜'나 '재력'이나 혹은 '덕스러운 인품' 따위를 가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놓으셨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무식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격이 못 된'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구원을 누릴 수 있는 방법까지 정말이지 '가장 쉽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못된 인생들은 그 구원의 길마저 또 제멋대로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이 쉽고도 고마운 복음을 그대로 받지 못하고 그 대신에 '선행을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자기네 딴에는 더욱 이치에 맞는 논리인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행득구'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실로 모순덩어리의 발상입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선행을 모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토록 한시도 쉬지 않고 선행만 계속 쌓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단 한 명의 해당자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평생에 단 한 번만 선행을 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천당은 만원사례, 지옥은 개점휴업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중간에 무슨 선이 그어져야만 합니다.
즉 '구원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충분한 선행의 양은 이 정도다.'라는 무슨 합격선이 있어야만 이 이행득구라는 구원론이 성립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쯤에 있겠습니까? 영생 구원과 영벌 저주의 당락을 가름하는 그 선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라는 말입니까? 사람이 세상에서 살 동안 '딱 요만큼의 선행만 초과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이 도대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하여튼 '선행이라는 공로를 쌓아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 선행이라는 것이 천차만별이니 그 종류에 따라서 점수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몇 점, 십일조 생활은 몇 점, 전도해 온 한 사람당 몇 점 등등 각기 무슨 해당점수가 있어야 할 것이고, 가능하면 '집중공략해서 많은 점수를 따야할 선행 과목'이 무엇인지 또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비록 평소에 주일성수만 했지만 그 점수들을 다 합산해 보니 이미 합격점을 무난히 넘은 사람은 이제 남은 세월을 사는 동안에는 헌금이나 전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일예배조차 참석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좀 여유를 부려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전혀 공부를 하지 않다가 시험 전날에 당일치기 하게 된 사람처럼 죽기 바로 직전에 구원을 받으려고 발버둥 치게 된 사람은 얼마나 급하겠습니까? 밤샘을 해서라도 한 문제당 배당점수가 많은 선행들만 '바짝 쪼아서' 어찌하든지 낙제는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달려 있던 '한편 강도'는 선행이라는 것을 단 한 가지도 할 기회가 없었으니 아무리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셔도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대입 수능고사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예비고사'라는 것을 쳐서 합격을 해야 '대학입학 신청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삼백 몇 십 점 만점에 백팔십 점 정도가 주로 그 당락을 결정하는 합격선이었습니다. 그 합격선에서 딱 '1점'이 모자라서 떨어진 학생들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속된 말로 '겐또'로 찍은 문제 하나만 더 맞았더라도 되었을 것을, 자기 딴에 고생은 고생대로 꽤 했는데 단 1점이 모자라 예비고사 불합격의 불명예를 쓰고 대학입학 본고사는 원서조차 낼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속이 터질 일이었겠습니까? 만약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와 똑같은 일이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도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 '선행의 합격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그저 천주교 신부가 가르쳐 주는 '예상 합격선'만 보고 선행들을 쌓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드디어 그 정확한 합격점수를 발표해 주실 것입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수험생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100점 만점에 합격자는 몇 십 몇 점이다."라고 공포하실 텐데, 예상보다 좀 낮을 수도 있고 혹 더 높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 합격점수가 발표되는 순간 심판대 앞에서는 그야말로 희비쌍곡선이 교차하게 될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딱 걸려서 구원받게 된 사람들은 헹가래를 치면서 기뻐 난리가 날 것이고, 그 합격점에 딱 1점이 모자라서 지옥으로 가게 된 사람은 그야말로 대성통곡하면서 땅을 치게 될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주일예배를 한 달에 한번 정도씩 빼먹었었는데 그 중에 꼭 한번만 더 참석했더라면 천당에 갈 수 있었을 것을...", "내가 헌금을 더도 말고 딱 천 원만 더 했더라도 합격했을 것을..." - 정말이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물론 이런 일은 결코 진짜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재림 후의 백보좌 심판대가 그런 아수라장이 될 리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이행득구'의 교리에 따를 때 거기서 절로 파생되는 얼토당토않은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행득구'의 교리는 이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자기모순을 내포하게 됩니까?  그것은 그 교리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인 선행을 '흑백'의 문제인 구원에다 억지로 짜 맞추려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라는 흑백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흑백 문제와 결부되어야만 짝이 맞습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 불신자는 지옥 - 이 합격자 발표에 대해서 그 어떤 이의나 항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삼척동자가 보아도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채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얼마나 선을 행하는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선행하는 정도는 색깔로 비유하자면 흰색과 검정색의 중간 즉 '회색 영역'(gray area)에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밝고 진한 정도가 문자 그대로 천차만별인 선행이 그 어떻게 구원을 결정짓는 조건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 '이행득구'의 교리에는 이처럼 결정적인 오류와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라는 잘못된 구원론이 기독교 안에서조차 더 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오늘날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신구교 일치운동'과 더 나아가서 '모든 종교의 통합운동'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행득구'의 교리를 따르면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 하더라도 똑같은 구원의 길이 공통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니, 소위 모든 종교가 다 하나로 일치되는 데에 있어서 최상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까 언급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서 또 나타났습니다. 그는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 CNN의 래리 킹이라는 유명한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부인했습니다.


그는 또한 지금은 '교회 파산'이라는 부끄러운 꼴을 당하고 말았지만 한때 아주 명성을 떨치던 '수정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와의 방송 대담에서도 미국의 대표적 보수주의 기독교인 '근본주의자'들이 '관대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이슬람교나 힌두교 혹은 불교 등 다른 모든 종교에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며 구원의 길이 있다.'고 오히려 로마 천주교의 보편적 구원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로버트 슐러 목사는 빌리 그래함의 말을 전폭적으로 찬성하면서 "There's a wideness in God's mercy."(하나님의 자비에는 '넓으심'이 있다.)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목사들이 세계적으로 방송되는 화면을 통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라는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발언을 태연하게, 아니 자기네들 딴에는 아주 '감동스럽고 은혜롭게' 주거니 받거니 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절초풍을 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의 꼴불견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세계적인 목사'라는 사람들이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이 성경의 제1요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만 똑똑히 보아도 결코 그렇지 않음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오직 "저를 믿는 자"만 영생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반면에 "저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쉽고도 간단한 길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은 정말이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1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토록 자상하게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은 실로 감지덕지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은혜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빈자나 부자나, 강자나 약자나, 현자나 무식자나 아무 차별 없이, 그야말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그 독생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구원은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 마땅한 멸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으며, 그 대상은 오직 '저를 믿는 자'밖에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천주교에서는 그 '선행이 부족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름대로 또 기가 막히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공로의 보고(寶庫)'(Treasury of Merit)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구원에 필요한 선행'을 '초과달성'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바로 평생토록 수많은 선행을 쌓은 '성인'들이 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런 성인들이 천당에 들어가게 될 때에는 그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선행의 공로'를 제외하고 '남게 되는 잉여 공로'들을 따로 모아 놓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위 '공로의 보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만큼 충분한 공로를 쌓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그 '공로의 보고'에 저축되어 있는 것 중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빼내어서 나누어 주면 그들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천주교가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팔면서 그것을 사면 이미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부모들까지도 낙원으로, 천당으로 '승진'시킬 수 있다고 한 것도 이 '공로의 보고'라는 것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바로 교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내거나 조금이라도 과장한 말이 결코 아니라 천주교의 '공식 교리'입니다. '이행득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처럼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진리처럼 가르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그처럼 강력하게 천명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 신앙의 슬로건이 되었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복음은 결코 '멸종'될 수 없는 영원불변의 교리요 신조요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 이 절대주권자께서 죄인을 위해 먼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 이 성자께서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구원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 성취하시기 위하여 화육강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 즉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믿는 자만이 영벌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영생천당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이 신구약 성경의 노른자위 같은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향한 그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고백함으로써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생 구원에 꼭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추심) 회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돌회(回) 고칠개(改) 세상에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회는 매일 잘못하는 것을 조용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는 우리가 깨끗이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믿으면 이미 깨끗해 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말씀을 믿으면 깨끗해 진 것입니다. 한국의 성경이 중국 성경을 변역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행 11:18 생명을 얻는 회개는?  이방인도 예수그리스도께 돌아갈 기회를 얻어서 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扈一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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