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작정 선교가 아닌 전략으로
소우퍼(Soper)는 전략과 전술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략은 전술과 다르다. 전략은 일반적인 선교계획과 그 계획이 기초로 삼고 있는 원칙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반면에 전술은 그 계획을 세부적으로 수행하는 것과 선정된 목적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다양한 수단들과 방법들을 다루는 것이다. 전략은 전반적인 접근, 계획 또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내지는 우리의 문제를 풀 방안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주된 관심사는 소소한 세부상황에 있지 않다.
전략이란 어느 특수 단체가 결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동의한 수단을 의미한다. 훌륭한 전략은 광범위한 원칙과 특별한 작전에 관심을 두지만 그러나 정한 목적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신경과 의사로부터 농구 경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어떤 정한 목표가 없거나 가는 방향이 설정되지 않았을 때는 전략은 불필요하다. 선교사업은 이러한 무지나 무관심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목적을 말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와 성경연구와 원숙한 상식을 통하여 정한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전략이란, 성경중심, 효율성 및 적응성의 삼대 요소라 할 수 있다.
성경중심; 세속적인 분야에서는 자기들의 전략이 성경적 인지의 여부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주님의 사업은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전략의 성경적 여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신실한 신자들은 어떤 성경 구절의 해석에 완전 동의할 수 없으므로 주님의 사업에 관하여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에 관하여는 완전히 명백하다. 따라서 성경이 중요한 자료이다.
효율성; 선교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제한은 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청지기와 가용자원의 책임 있는 활동을 강조한다. 청지기로서 일하는데 효율성은 중요하다. 선교사업에는 물질적 자원보다 일군이 더 중요하다.
적응성; 선교전략은 곧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다. 1970년대의 전략은 1960년대의 것과 많은 점에서 다를 수 있다. 시대의 변화로 말미암아 해마다 조정이 불가피하다. 전략조정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같은 전략만 적용할 때 선교사업을 보다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시대에 보조를 맞추는 데는 지혜와 광범위한 독서, 융통성, 회의, 계획 및 용기가 필요하다.
전략은 성경의 원리이다
완전한 선교전략은 정확한 성경원리에 입각해야 한다. 성경은 선교전략의 보고(寶庫)이며 자산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까지 이르러 그대로 적용되는 궁극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보여주는 원리들을 찾아 탐구하고 이해함으로서 성경의 가르침으로 통찰력을 얻어 선교현장에서의 전략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의 원리(마 13: 1-23)에서
이 비유는 선교전략 수립을 위한 주요한 한 면을 제시한다. 뿌린 씨가 어떤 토양 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그 결실에 대한 기대도 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토양을 검토하고 선별하여 씨를 뿌리는 것이다. 아무 땅에나 무조건 많은 씨를 뿌린다고 좋은 결실을 맺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 대하여 좀 더 수용적이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반감을 가진다. 복음의 씨를 뿌리려는 그 토양을 검토하여 돌밭이나 길가나 가시밭 같은 곳이 아닌 비옥한 토양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전략을 쓰는 셈이다. “농부들은 그런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데, 불행히도 선교사들은 그런 실수를 잘 범한다.”
무화과나무 비유의 원리(눅 13: 6-9)에서
이 비유는 열매맺지 아니하는 무화과나무에 노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정된 시간 밖에 없는데 그 나무만을 위하여 시간과 정력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주신 교훈에서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자들에게 시간을 사용하지 말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고 명령하셨다. 이런 원리는 ‘예수님 당시에 건전한 선교전략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꼭 같이 건전한 충고’라 할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원리(요 15:1-8)에서
이 비유는 과실을 많이 맺는 비결을 보여 준다. 첫째 비결은 적당히 손질을 해주는 일이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려고 농부는 가지를 잘라 준다. 그것도 법에 맞게 잘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약을 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적절한 방법을 동원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비결은 생명력을 부여받는 일이다. 포도나무이신 예수께로부터 그의 가지인 우리들은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부여받으므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아무리 좋은 토양을 선정하고, 아무리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고, 또 손으로 가한다 하더라도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으면 거기서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이다. 이것은 선교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얼마나 풍부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냐가 결코 판단의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져서 열매를 많이 거둘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은 열매를 거둔 결과이다. 그 결과는 아버지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만일 그 방법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떤 전략이든 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전략과 문화는 관계가 있다
선교전략이 다른 많은 전략과 다른 한 가지 요소는 선교전략에는 다른 문화와의 접촉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선교사업의 정의는 곧 다른 문화에서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의 전략은 문화, 문화의 충격, 그리고 문화적 장벽이라는 문제의 이론적이고도 실제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고는 세워질 수 없다.
선교와 문화의 관계있다
선교와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선교의 대상이 단지 일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는 개체적인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 공동체의 가치관, 즉 세계관의 변혁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하위문화와 조직의 가치관의 변혁으로 나타나야 한다. 선교란 이렇듯이 이교적인 세계관이 어떻게 인간 삶의 현장인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문화의 각 하위 기구나 제도권 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성경적인 세계관을 성령 하나님의 중생케 하심과 역사하심을 전재하고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이 존재론적으로 변화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몸담고 있는 문화적 삶의 근본적인 변혁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이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측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통전적 선교가 요청되고 있기에 선교와 문화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문화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화는 특정한 사람들의 총체적인 생활방식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를 조직해 가는 방법 또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함께 생각하고 행하는 표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어떤 사람들이 함께 공동사회를 이루고 그들의 정체성, 존엄성, 안전성을 보장하는 공동체로서 특정한 신앙, 가치관, 관습, 제도 등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학습을 통해 사회적으로 습득한 물질적 비물질적인 모든 것, 즉 전반적인 행동을 대대로 전승하는 인간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선교는 복음을 새로운 문화 속에 심는 것이다. 문화적 위임과 복음적 위임을 동시에 심는 것이 선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선교는 문화 속에 복음적 위임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선교는 문화라는 밭에 복음의 씨앗을 심는 것으로서 복음이 새로운 문화에 들어갈 때에 문화의 옷을 입고 가는 것이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 문화 속에 그리고 문화 위에 있으며 새로운 문화와 대립해서 문화의 변혁을 가져다준다고 지적한다. 즉 그리스도는 문화의 변혁자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문화의 변혁자로서 그리스도를 다른 문화에 심는 과정에서 선교사의 문화를 복음과 동일시한다든가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흔히 주장해 온 것이며, 그 결과로 복음에 의한 식민지와 혹은 문화제국주의를 야기 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교현지에서 겪는 어려움은 문화의 장벽이다. 즉 선교사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세 가지 모델의 문화에 관련된다. 세 가지란 성경문화, 선교사 문화 그리고 수용자 문화를 말한다. a) 의사소통자로서 선교사는 중간의 토대 위에서 두 개의 방향으로 본다. 먼저 그는 성경을 본다. 그의 메시지는 실제로 그의 것이 아니다. 즉 그는 그것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는 단순히 메신저이고 대사이다. 그는 결코 근원자가 아니고 이차적이다. b) 선교사는 다른 문화에 진입한다. 그 문화는 채용된 문화(adopted culture)이지 결코 그의 토착문화(native culture)는 아니다.
선교사의 메시지는 성경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의 언어와 문화적 상황가운데서 주어졌다. 그것은 성경적문화라고 하겠다. 그는 수용자 문화의 메시지를 이해가 되게끔 발신한다. 선교사는 문화의 상황가운데 의사소통 된 바의 기독교 메시지를 받는다. 그 문화를 “선교사 문화”라 칭한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문화가 있다. 이 세 번째 문화를 “수용자 문화”라고 한다. 선교사는 이런 세 개의 문화적인 상황 가운데 첫째로, 그리스도를 선교지의 사람, 즉 복음 수용지의 사람에게 이해되도록,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끔 의사소통하기를 원한다. 둘째로, 선교사는 복음을 듣는 자로 하여금 자신만 수용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되기를 원한다(딤후 2:2). 그래서 선교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그는 성경의 문화적 상황을 해석학의 건전한 체계로 해석해야 한다. 즉 성경 해석의 기본적 과정에는 그것의 배경, 구문, 스타일, 청중의 성격, 메시지가 주어지는 특별한 환경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선교와 문화충격을 무시할 수 없다
선교사가 자기 문화권을 떠나서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될 때 흔히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받게 된다. 선교사는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절대 필수적이다. 문화충격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타문화권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다. 이때 타문화권에 들어간 사람이 그 문화의 사물을 보는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습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충격을 느끼는 것은 자기문화의 행동 기준에서만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충격이란 사람의 감정적인 기관이 최대의 적응력을 가지고 새로운 사고방식, 의사소통, 행동양식 등과 부딪치는 형태를 말한다. 단기 선교사들은 아마도 이런 것을 그렇게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곧 자신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장기 선교사들은 이 모든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첫 번째 임기의 수년간이 종착점이 보이지 않는 도로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문화에 들어 갈 때 무엇이 심리적 동요를 야기 시키는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처럼 가난과 더러움의 광경이 아니다. 비록 문화적 충격 가운데 있는 사람은 흔히 청결과 위생적인 것에 정신이 팔리지만 그것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도 아니다. 문화적 충격은 우리가 아이 때부터 학습하였던 문화적인 지도(地圖)와 안내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경험하는 왜곡이다. 삶을 극복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탈취됨으로 혼란과 두려움과 노여움을 갖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 악화되었는가를 거의 모르고 더 더욱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른다. 문화적 충격은 새로운 문화에로 깊이 들어오는 대개의 사람들이 처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에 가는 서방인들 만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인들은 그들이 미국에 옮겨 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엄중한 경우들을 맞는 어떤 사람들은 가벼운 충격을 가진다. 문화적 충격은 실제적인 것이며 골치 아픈 문제이나 정복될 수 있다. 만약 선교사가 자기 연민이나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는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몇 가지 일들이 있다.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은 여덟 가지를 제시한다.
a. 예수님과 성육신을 기억하라.
b. 문화적인 충격이란 정상적인 반응임을 인식하라.
c. 다른 사람들이 극복해 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d. 가능한한 빨리 언어를 배우라.
e. 사람들의 사회적 생활에 참여하라.
f. 문화 속에 있는 좋은 점들을 찾으라.
g. 두고 온 본국 생활에 대해 잊어버리라.
h.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라.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서
선교는 종래에는 물리적인 경계를 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물리적인 국경이나 지리적인 거리를 뛰어넘는 것을 선교로 간주했다. 그래서 해외의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교로,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라고 구분해서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물리적 지리적 장벽이 복음 전달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정보통신과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은 소위 정보 사회를 탄생시켰으며, 정보사회에서 이제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말로 불릴 정도로 좁아지고 수축되었다.
정보 사회에서는 물리적 지리적 거리와 장벽은 더 이상 선교의 장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보 사회에서 선교의 장애물이 말끔히 제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장벽은 언어와 풍습인데, 그것은 총체적으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선교학에서는 문화의 측면에서 선교의 영역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의 선교영역은 같은 문화권에서, 제2의 선교영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유사 문화권에서, 제3의 선교영역은 전혀 다른 타문화권에서 선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난이도를 따진다면 제3의 영역인 타문화권 선교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타문화권 선교는 물리적 지리적 경계선을 넘어야 할 뿐 아니라 문화적 장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선교의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비행기와 전화 그리고 다양한 통신 장비와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의 수축을 가져왔으며 물리적인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문화적인 장벽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문화의 충격이 타문화에 적응하는데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이 문화적 장벽도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제 2의 문화에 가보지 않은 자들은 낡은 껍질을 벗겨 낼 수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특히 선교사에게는 다른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려고 하는 창조주 강박관념이 잠재한다. 인간은 새로운 규칙에 의하여 생활이라는 경기를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타인이 우리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확신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문화적 장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반면 그것을 줄이기 위한 조치는 취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노력에 성공할수록 우리의 봉사도 더욱 효과적이 된다.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문화의 장벽이 있다는 것과 그것은 위험의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성경 본문의 해석이 대단히 어려운 것은 그 본문이 우리의 문화에 의하여 규정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문화의 가치를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여기 흔히 사용되는 예로서 성경은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이며 자본주의가 경제 제도에서는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제3세계의 지성인들이 우리에게 곧 정보를 제공하겠지만 그들은 이러한 해석을 대단히 의문시하고 있다. 가능한 한 우리의 문화 표준을 타인에게 부과하거나 그것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선교사들은 문화규칙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선교에 도움이 되도록 문화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선교사는 전략에 신축성을 가지고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루즈베탁은 말한다: “선교사는 기존의 문화를 무시함에서가 아니고 그것과 일치하여 변화를 유도하고 지도해야 한다. “적응(accommodation, adaption)", ”문화적 적합의 원리(the principle of relevancy)" 혹은 “토착의 원리(the indigenous principle)"는 선교사가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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