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ן?/μάννα)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16:33)
만나는 생명을 살리는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라는 내용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먹이신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이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먹고 죽지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자신이 구원자이심을 알리셨습니다.(요6:50~51)
그 후에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사도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단에서 목사들이 생명을 살리는 불변의 말씀이 전달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명을 살리는 영생의 말씀이요 성경의 말씀입니다. 강단에서 전달되는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받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들을 때 지적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말씀을 들을 때 나에게 은혜의 메시지가 될지언정 지적되는 메시지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강단에서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선포될 때, 한 사람의 입에서 전달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람과 해당되는 사람으로 양분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삶이 성막생활이어서 항상 기쁘고 감사합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러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생을 소유에 두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기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되고 해당되는 것으로 들려집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어떤 질서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합니다.
우리가 나는 질서를 잘지키는 사람인가? 알려면 나라의 질서, 사회질서, 교회질서, 이러한 질서를 잘 지키는가를 아는 방법입니까? 가정질서입니다. 가정질서를 잘지키는 사람은 어떤 질서도 잘지킵니다. 가정이라는 질서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그 어떤 질서도 지키지 않습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제1이요, 자기 명예나 권위를 하나님보다 더 존중하고 사랑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이것은 병중에서도 중병입니다. 어째서 중병인지 아십니까? 자기 주인이신 하나님마저도 몰라보는 중병을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만나를 넣을 수 있는 증거궤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은 들판에서 뿌리가 완전하게 잘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자기라는 껍질이 벗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바깥에서 안을 드려다 볼뿐이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넣기 위하여 자신을 증거궤가 되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사탄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읽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는 경고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와를 미혹시킨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결코 죽지아니하리라”(창3:4).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롤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던 사탄의 미혹입니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실 때에 마귀가 나타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마4:3)고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명령했는데, 영생의 말씀을 자기에게 좋은대로 하라고 바꾸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살리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자기에게 좋은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은 뱀의 사상이 침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러한 사람은 하늘나라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만나를 증거물로 두었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잡류들이 모세가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문제를 제기했던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증거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던 다윗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증거궤를 수레에 싣고 올 때,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모시는 역할을 담당하고, 나곤 타작마당에 당도했을 때에 소가 뛰므로 인하여 증거궤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웃사가 증거궤를 붙들었다가 즉사 했습니다. 터치하지 말아야 될 말씀이 들어있는 궤에 터치했던 벌로 죽임을 당했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삼하6:6-7)
어떤 이유에서일지라도 말씀에 문제를 삼는 행위는 하나님이 싫어하심을 증거궤에 있는 만나를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시온의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교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찍이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문제삼았던 근원이나, 예수에게 나타났던 마귀의 경우를 볼 때, 생명을 살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문제를 삼는 사람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람은 시온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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