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기타!

[스크랩] 능력의 근원-보혈의 능력(1)

하나님아들 2012. 8. 27. 23:45

능력의 근원 - 보혈의 능력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갈보리를 거치지않고 오순절 다락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은 없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피의 메시지가 먼저이고 그다음의 불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이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에 믿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보혈로 정결해지고 보전된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논쟁보다 역사상 열띤 논쟁은 없었다.
물론 감출 죄가 있거나 반항적인 사람들에게는 보혈이 항상 거슬리는 주제이겠지만 미국과 유럽 교회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혈을 싫어할 줄은 거의 아무도 몰랐다.
보혈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한다.
그러나 반항적인 사람들에겐 보혈이 정죄감을 주고 기분나쁘게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보혈은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인간의 고등 표현과 사회적 진화를 통한 신성'의 개념 같은 것을 유포시키는 사람들에게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한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 많은 교회들과 '유명 신학교'출신의 존경받는 신학자들이 보혈을 '탈락'시키고 '값싼 은혜의 사회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보혈의 메시지는 문명화 된 많은 교인들의 감성에 거슬렸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은 보혈의 소박한 메시지를 예수님의 가르침중에서 더 긍정적인 측면들에 촛점을 맞춘 입맛에 맞는 메시지로 바꾼것이었다.
십자가는 선의 상징으로서 성전,강대상,교회 마당에 세워졌지만 
아무도 주님이 갈보리에서 피흘려 받으신 고통을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선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보혈이 없는 교회에 경악해야 마땅하다.
그런 교회는 사탄에게만 완벽한 교회이고 아담의 후손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옳게 여겨지든 아니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목회의 자살로 여겨지든 아니든 간에 구원과 능력을 얻으려면 
죽음의 제단과 보혈의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고 싶어하지 않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보혈을 흘리신 어린양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논쟁이나 궤변의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를 않으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
우리는 보혈에 관해 얘기하는것을 두려워하는것 같다.
교회 리더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구원이라는 것"을 보혈을 언급하지 않고 최대한 고통을 피해 말할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거야."
그러나 미안하지만 보혈을 피해갈 길은 없다.


살려면 먼저 제단에서 죽어야 한다

진리나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여러 세대에 걸쳐 싸워서 얻어야 한다.
전투 없이는 승리가 없다.
십자가의 길은 피로 얼룩진 길이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이 되기 전에 먼저 피흘린 길이 되어야 했음을 기억해라.
당신이 살려면 제단을 찾아가서 죽어야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
피흘림의 기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타락후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려고 
동물의 피를 흘리신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동물을 잡아 그피로 아담과 하와를 덮으시고 속죄하셨다.
죄인을 위해 무죄하고 깨끗한 피가 흘려져야 했다.
그후로 지금까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신학이 구축되었다.
하나님께서 피의 또 다른 새로운 비밀을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출애굽 시키실 때였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을 내리셔서 요셉의 가족을 학대한 바로의 의지를 꺾고 
애굽을 벌주실 때 무죄한 피의 또 다른 특성이 드러났다. 
그 비밀은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의 기초이며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반석이다.
애굽을 뒤흔든 재앙들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을 영원히 압제하려는 
바로의 고집스런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애굽은 최후이자 최악의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와
정의의 실현이 가까와졌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고센땅의 모든 이스라엘 집들에 명령하셨다.
그것은 흠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피를 우슬초에 적셔서 각 집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집안에 머물고 피아래 머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때에..."라고 말씀하셨다.

그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땅을 두루다니며 모든 집의 처음 난 것을 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설명하셨다.
다가오는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양의 피의 능력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이라는 용어의 기원이다.
그때 피로 덮이지 않는 집마다 첫번째 난 것이 죽는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시점에서 인간의 말은 부족함 뿐이었다.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에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가장 숭고한 생각과 감정과 능력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능력,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능력, 사탄에 대항하는 능력을 원한다면, 그 모든것이 어린양의 피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의 사자가 하나님의 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선을 들어가지 못했다는것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면 지옥이 사자에게 그것은 얼마나
더 건널수 없는 장벽이었겠는가?
보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그것이 바로 피의 능력이다. 
피가 주는 세가지 구체적인 유익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온다.
1,피는 그들을 보호했다.
2.피는 그들을 해방시켰다.
3:피는 그들을 과거 애굽 역사로부터 깨끗이 씻었다.
죽음의 사자는 죄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들어가지 못했다.
피가 흘려졌을 때 비로소 바로의 의지가  꺾여 하나님께 굴복했다.
피는 회개하는 자를 구원했고 거역하는 자를 멸했다.
피는 하룻밤 만에 '포로들을 자유케 했다'


피에 의해,물 가운데로 구름아래로 어린양을 먹고

하나님의 지시에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과 무교병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준비하며 먹어야 한다는 명령도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피에 의해 물 가운데로(홍해를 지나),구름아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먹고 애굽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출애굽기 12장의 메시지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 만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려면 예수님이 흘린 피에 의해 세례의 물 가운데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아래로 우리를 위해 상하신 어린양의 몸으로 
충만히 채워져 나가야 한다. 피에 능력이 있다.
희생제물이 된 어린양은 초자연적인 치료와 건강의 역사도 일으켰다.
그들의 해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실 일을 예표했다.
시편 기자는 350만에 달하는 그 무리 중에 아픈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선언한다.
미국에서 그 정도 크기의 한 도시에 요통 두통 관절염 암 사지불구 근육이나 
신경계 기능 이상을 가진 환자가 단 한명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성경을 믿는가?
출애굽할 때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은 어린 양의 피의 능력으로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 났을 뿐 아니라 피의 문을 통해 걸어 나갔기 때문에 
모든 병에서 치료되었고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되었다.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 되는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요? 너무 연로하시고 허리가 굽으셔서 애굽에서 나가기는 커녕 이방에서 저방으로 다니지도 못하시잖아요."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때 그들은 '우드득'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순간 할아버지가 정정하게 똑바로 걷게되어 출애굽 준비가 완료(?)되었다.
피에 능력이 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갈보리를 거치지않고 오순절 다락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은 없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피의 메시지가 먼저이고 그다음의 불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이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에 믿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피묻은 문안에서 쇠약한 자들이 춤추다

평생 팔다리가 비틀려 있었던 사람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할수가 있는가?
"가라!"하는 명령이 내려지자 갑자기 그들은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펴지고 회복된 팔다리로 능력이 들어왔다.
그들은 갑지기 치유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애굽에서 걸어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피묻은 문을 통해 춤추며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피에 능력이 있다.
애굽의 첫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상한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 무죄한 어린양의 희생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기시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이름으로 불리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어린양을 죽여 흘린피를 
집마다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인원이 적거나 가난해서 양 한마리를 잡을 수 없는 가족은 
이웃집과 양과 양의 피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어린양 예수님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쁘지 않은가?
흥미로운 점은 그 반대는 블가능 했다는것이다.
한 집에 식구수가 많더라도 어린양을 여러마리 잡을 수 없었다.
식구가 5명이든 15명이든 한가족 당 어린양 한마리의 피로 충분했다.
죽음의 사자의 마지막 재앙을 당하기 전에 애굽이 먼저 받은 재앙들도 
애굽과 이스라엘 자손이 눈에 보이지 않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구리든 메뚜기든 애굽인들이 고통을 당할때 이스라엘은 아무 해도 받지 남았다. 그 '분리'가 가장 극명히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아래서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그밤에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는 애굽을 쳤다.
이스라엘은 피의 보호로 안전했지만 애굽 전역은 곡하는 소리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그런 차이는 피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외에 달리 설명될 수 없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이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재앙이 닥치기 직전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 운명의 마지막 저녁에 해가 저물때 이스라엘인들 가까이 사는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을 보고 
"저 미친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또 뭘하는 거지?"라고 비아냥 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대에 걸쳐 내려 왔던 영적 물리적 정신적 가난이 그날 밤에 끝이 났다.
그 몇시간 후에 감옥 문이 열렸고 
속박 속에 태어났던 이스라엘의 세대들이 해방되었다.
애굽의 첫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께서 특별한 단어로 설명하셨다.
"그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표적은 훨씬 더 큰 것의 작은 일부분 기미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희생적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에 
애굽에서 그것을 상징한 어린 양의 피가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면
갈보리 사건 이후에 이루어진 진짜 능력은 얼마나 크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원수 마귀가 예수님의 보혈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우리는 정말로 이해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보혈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원수 마귀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보혈을 믿지 않고 믿음으로 보혈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하게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
보혈에 능력이 있다.
단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믿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 한해서 그렇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거륵한 환상 속의 능력도 피의 제물이 바쳐진 제단에서 나왔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단에서 취한 불타는 숯이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했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이사야는 빈 왕좌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눈을 들자 결코 본적이 없는 더 높은 보좌가 보였다.
선지자의 환상은 지상을 너머 하늘로 이어졌고 그는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선포했다(사6:1)
그것도 능력의 비밀한 근원중 하나이다.
우리는 땅의 모든 권세 영웅 승리자 보좌보다 '높이들린' 주님을 직접 보아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높이 계신 주님께 고정될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가 
우리의 비전을 바꾸고 우리의 말을 변화시킨다.
원저: 토미테니
출처:그리스도의 몸인 형제사랑의 집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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