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칭의에 대한 이해

하나님아들 2014. 4. 7. 20:35

 

 

 

 

               칭의에 대한 이해

 


1. 칭의에 대한 5가지 성서적인 이해


칭의”란 단어는 어쩐지 우리에게 낯설고 어려운 단어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은 목사, 혹은 신학자들이나 사용하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칭의는 의외로 아주 쉬운 주제인 것을 알 수있다.

칭의와 성화에 관한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주제들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관한 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경험을 함에 있어 이것은 칭의이고, 이것은 성화이며, 이것이 거듭남이라고 엄밀히 구분하여 나누기는 어려우며, 어떤 형식에 꼭 맞는 공식이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이런 영적인 것들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모든 경험이 한번에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칭의와 성화와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들을 연구함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우리가 이런 주제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때, 우리의 영적인 경험이 이 지식을 토대로 하여 올바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으로 함께 연구해 보자.


1. 칭의와 율법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믿기만 하면 은혜로 다 구원을 얻고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율법이 왜 필요할까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사람이 먼저 회개하려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않으면 구세주의 필요성도,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같지 않은 점을 가르쳐 주지요. 

하나님의 계명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는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므로 불의해진 우리는 회개하고 죄의 값인 사망의 형벌을 우리 대신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칭의(의롭다 하심)를 얻으려면 죄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각성을 가져오는 것이 율법이므로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2. “칭의”(Justification)란 무엇인가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1~25). (롬 5:1~11 참고).

칭의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굴복할 때 그의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마치 한번도 죄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죄인이며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의 본성은 불의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을 만나 영원히 살 사람은 의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얻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로 나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음의 의”(Righteousness by faith)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렇게도 중한 잘못을 저질렀고 하나님을 거스렸던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져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우리 죄인들의 허물을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의 실패 대신으로 가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회개하는 죄인)를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실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의롭게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에게로 가져갈 수 있으며, 주님은 그의 아들의 순종을 죄인의 계정에 올리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며 오묘한 구원의 이치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셔서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실(칭의를 주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로운 것처럼 대하시고 그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순간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한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칭의)을 받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용서받은 영혼은 계속 은혜에서 은혜로, 빛에서 더 큰 빛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외치게 됩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하였고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은 타락되어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는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지요. 

그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생애를 사셨지요.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회개하는 죄인들의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분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우리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되지요.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우리의 마음을 항상 주님께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용서와 칭의는 동일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쳐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 속죄를 그의 생애에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입니다. 

용서와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사단과 죄악의 자녀인 반역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백성의 위치로 나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타고난 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입양하여 그분의 자녀로 받으시기 때문이지요. 

죄인은 그의 죄를 그의 대리자이며 보증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의 자녀가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망의 선고를 유예하고, 나의 생명보험증권, 곧 영생을 그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입니다.” 

그리하여 용서받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됩니다.


죄인이 실수를 범할지라도 무자비하게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범죄와 죄악을 용서해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우리의 형벌을 중지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옷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킵니다. 

칭의는 유죄선고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흉악한 범죄자가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그리고 영생의 강한 소망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칭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진정한 용서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겔 36:25~2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죄인이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 앞에 부복할 때에 새로 창조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그에게 주시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마음 뿐만 아니라 감정을 거룩하게 하시고 생각을 순결하게 하셔서 모든 동기와 모든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의 생애에 일어나는 변화이고 거듭남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는 것은 단순히 용서뿐 아니라 심령을 새롭게함을 받는 것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새 마음을 네게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과 정신과 영혼 가운데 새겨집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전 2:16)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능력을 통해서만 이르러 오는 변화의 과정이 없이는, 우리의 마음에는 타고난 죄로 향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새로운 죄의 사슬을 형성하게 되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깨뜨릴 수 없는 노예의 상태를 다시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용서 받은 사람은 새 마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단순한 기술적인 방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의 치료뿐 아니라 영적 건강까지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처방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마음과 품성에까지 미치도록 하늘이 지정하신 방법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의지를 굴복할 때에 새로운 능력이 새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는 성취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 주는 것은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배역한 세상에서 예수께서 굳게 붙드시는 당신의 성채가 되며, 이렇게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진 영혼은 사단의 공격에 난공불락의 성이 됩니다.


5. 의지를 굴복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일어나는 진정한 회개를 보실 때에 즉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에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굴복시키지 않으므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분께 바치기를 원하지만 그들의 도덕적 능력은 약하고 그들은 곧잘 의심의 노예가 되며 죗된 생애의 습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며 자신의 생각과 충동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스스로 지키지 못한 약속과 결심에 대한 기억은, 그들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들며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게 되어,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납하시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럴 때 자포자기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의지의 진정한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힘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달려 있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우리들은 임의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애정을 억지로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으며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지만 선을 행하려고 하나님의 올바른 편을 선택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셔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죗됨이 너무 싫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고 그 대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대로 굴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성향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애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그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선하고 거룩하게 되고자 욕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런 욕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지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바라고 희망하는 중에 잃어버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의지를 하나님께 즐겨 굴복시키는 그 지점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생각과 욕망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게 함으로서 영혼에 새로운 생애를 가져오고 속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의지를 굴복한다는 뜻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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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칭의”(Justification) 요약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읽었다.(롬1:16) 이것은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그러나 그 다음절을 읽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곳에 다시 의로움이 나쁜 단어로 있으니! 그러자 루터는 다시 낙담했다. 그래서 루터는 다시 17절로 돌아갔다, 바울은 그런 무서운 단어들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바울이 여기에서 생각한 "하나님의 의로우심" 이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으로 죄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로마서1:17절은 이제 그에게 낙원의 문이 되었고 성경을 여는 열쇠였다. 그러므로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건전하거나 타락한 교회의 표준"으로 불렀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제임스 부카난(James Buchanan)은 이렇게 말했다. "이 교리(칭의)를 연구하기 위한 최적의 준비는 큰 지적인 능력이나 많은 학자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죄인으로서 실제적인 상태에(놓여 있다는) 감정으로 이해하는 자각이다"

 

 1. 단어 연구

 

  구약에서 보통 "의롭게 하다"를 차따크(tasadaq)의 힙힐(hiphill)인 히츠띠크(hitsdiq)란 단어를 사용했다. 즉, 다니엘 12:3, "많은 자를 의로 인도한 자들은 별처럼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가 그석이다. 신약에서 "의롭다"는 동사는 디카이오오(dikaioo)로 39번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8;14절의 "이 사람은...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집으로 갔다"는 것에서 그것은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서신에서 본 단어 디카이오오(dikaioo)는 죄인이 의롭게 됨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법정적이거나 법적 의미로 분명히 사용되고 있다. 아무튼 정죄의 반대는 "의롭게 하다"가 아니라 "의롭다 선포함"이다. 여기의 디카이오오는 "의롭게 하다" 아니라 "의롭다, 선포하다"는 뜻으로 이 사람의 믿음으로 의로움을 여긴다는 것이다. 디카이오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는 죄인에게 법적으로 전가하는 것(imputation, 덧입힘)으로 사용한다.

 

2.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먼저 구약을 살펴보자. 칭의를 다루고 있는 현저한 구절로 창세기 15:6절을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하사브{chachabh]의 동사 형태)"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4:3과 22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3:6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로마서 15:6을 인용한다. 야고보는 또한 그의 목적은 바울의 인용과는 다르지만 아브라함의 칭의를 언급할 때 창세기 15:6을(약 2:23에서) 언급하고 있다.

 

  신약에서 칭의를 살펴보자. 먼저 로마서 3;21-28을 살펴보자. 사도바울은 3:9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동일하게 죄 아래 놓여있다고 진술함으로 그의 기소를 요약하며 또한 비록 율법이 죄를 알게 하나 율법을 준수함으로(문자적으로 "율법의 행위들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롭게 되거나 의롭다고 선포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더한다(3:20에서). 21절을 살펴보자.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디카이오수네 데우/dikaiosyne theou)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안다고 말하며 그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의로움이란 율법과는 별도로 안 것이라 한다. 더욱 이 의로움은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22절에서 배운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획득된 의이다. 이 원인에 관해서 NIV역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a righteousness from God)로 디카이오수네 데우를 바르게 번역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는 그것은 선포적이며 법정적이다.

 

이 구절로부터 칭의에 관한 다음의 것들을 알 수 있다.

 

 (1) 이 교리는 구약에 그 기원이 있다.
 (2) 이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3) 이 칭의에 대한 필요성은 22절과 2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언된다.
 (4) 이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바울은 친히 로마서 1:18, 24, 26과 28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며 에베소서 2:3에서 우리 모두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라고 단언하며 데살로니가전서 1:10에서는 예수께서 "임박할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속죄의 희생으로 주셨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의 희생을 제공하셨다.

 

 (5) 이 구절에 우리의 칭의의 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희생을 제공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는)지신다. 둘째로 오늘의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한다. 전체의 결론은 28절에 진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았던 유대인들인 우리조차도 지금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한 것이지 행위로써가 아니다.

 

  아마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 교리를 가장 극적으로 진술된 경우는 빌립보서 3:8 - 9일 것이다. 8절과 9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안에서 발견된다"는 단어는 이전 장에서 살펴본 바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칭의로 맺어졌다. 그러므로 가장 명백하게 이 구절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행위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칭의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1)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이 대립된다는 설, (2)칭의에 관해 바울의 가르침의 도덕률 폐기론의 오해를 야고보가 반복한다는 설, (3)바울과 야고보가 각기 다른 문제들을 다루기에 상호 대립되지 않는다는 설이 그것이다. 가장 만족스런 세 번째 것으로 바울과 야고보는 다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직면한 문제는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 시대에 친히 행했던 것처럼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 대한 반대였기에 그는 구원을 얻는 한 수단으로써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써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반면 야고보는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단지 지적인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논쟁했던 것이다.

 

  야고보가 행위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여러 면에서 동일한 생각을 표현한 바울과는 다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구절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한 갈라디아서 5:6이 그것이다.

 

  야고보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행위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21절)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믿음은 행위에 의해 온전케 되었다"(에텔레이오쎄(eteleiothe), 그 목적에 이르다)는 점이다(22절). 즉 달리 말하면 이삭을 드리는 행위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김을 받았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야고보에게서 디카이오오를 "의롭게 된 것처럼 나타내어져야 한다"를 뜻한다는 점이다.

 

  제임스 패커9James Packer)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고보 2:21, 24_25에서 그것(디카이오오)의 언급은 인간의 행위가 의롭다고 여기는 하나님께 살아있으며 역사하는 그런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가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에 의해 신자를 최초로 용인함(orignal acceptance)이 아니라 신자의 생활에 의해 신앙의 공언을 한 그 후의 입증(the subsequent vindication)이다. 야고보와 바울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고가 아닌 용어상이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명백한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이렇게 깊고도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 바울과 야고보는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이지만 그러나 의롭게 되는 믿음은 홀로인 것은 아니다" 라는 칼빈의 말에서 일치되었다.


 

3.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

 

  16세기 로마교회는 루터와 칼빈에 의해 발전되었던 개신교의 그런 칭의의 가르침에 대하여 날카롭게 반대했다. 1547년 후기에 죤 칼빈은 트렌트 회의 의사록 논평(Acts of the council of Trent with the Antidote)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칭의의 교리에 대한 로마교회의 입장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칼빈이 반대한 이유를 트렌트 회의 (the council of Trent)의 6기 회기에서 설정한 칭의의 견해를 요약하여 살펴봄으로써 분명하게 될 것이다.

 

  (1) 트렌트 신조에 일치한 로마교회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써 보다는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는 은혜의 주입(an infusion of grace)으로서 주로 생각된다.

    트렌트신조에 참여한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칙을 거부했었다. 칭의에 있어서 트렌트의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이라고 결론한다. 칭의란 법정적으로나 선포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성화를 발생하는 은혜의 주입이라는 것이다.

 

  (2)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이다.
     트렌트 신조의 가르침에서 진실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세례인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칭의의 방법이 믿음이라 하나 트렌트 신조는 세례라고 한다(7장).

 

  (3) 칭의의 은헤는 한 번 받으면 다시 잃지 않는다.
  (4) 칭의로 받은 의 또는 의로움은 향상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칭의를 받았다 또는 안받았다고 말하거나 만약 그 사람이 칭의를 받았다면 칭의 가운데서 성장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지 않느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신자들이 칭의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5) 칭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된다.
     이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개념을 왜 그토록 맹렬하게 공격했는지가 명백해진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로마교의 가르침이 칭의의 은혜스러운 성격을 흐리게 하며 위협하였고, 그리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통로에다가 필수적으로 그들 자신들만의 어떤 공적을 또 추가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는 본질적인 변화가 조금도 없다. 그 가르침이 성경과 기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이 엄중한 교리문제에 대해서 로마교회에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계속해서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 주제를 넘어가기 전에 우리는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개신교의 칭의에 대한 견해에 반박하여 제기한 주된 비판들 중의 하나를 직시해야 한다. 그들은 칭의에 대한 순수한 법적인 혹은 선언적인 이해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변화되지 아니한 상태로 있게 하며, 그러므로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논박한다. 그래서 그들은 개혁파 혹은 루터파의 교리는 단지 '법적인 가설"(legal fiction)에 지나지 않으며, "송장 위에 던져진 옷"(robe thrown over a corpse"이라고 말한다.

 

  그 반론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칭의는 다만 우리의 구원이 드러내는 한 양상일 뿐이다. 믿음으로 칭의된 사람은 동시에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일이 진행중인 사람이다. 칭의를 하나님의 선언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고귀한 가르침을 안전하게 보장해주는 것이다.

 

4. 개혁주의 고백서들에 나타난 칭의

 

 A.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Q.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됩니까?
  A.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나의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거스려 심하게 범죄했던 것들로, 또한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결코 지킨 일이 없었던 것으로 나를 고소 한다고 해도, 그리고 내가 모든 악에 여전히 마음이 쏠리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순전한 은혜로,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적이 없었거나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순종하셨던 것과 같이 온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의와 거룩을 주시고 그 공로를 내게 돌리십니다.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전부는 믿는 마음으로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B. 벨직 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1561).


  22조로부터 다음과 같이 발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따라 우리가 오직 "오직 믿음으로" 혹은 "행위에 있지 않고"(apart from works) 믿음으로(롬 3:28)의롭다고 인정받게 됨을 참으로 언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는 것이 믿음 그 자체임을 의미하지 않는데 그것은 믿음이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신봉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행하셨던 모든 거룩한 일들과 그의모든 공로들이 우리에게 유효하도록 만드시므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그의 모든 은택들을 공유하도록 우리를 그 분과 연합시키는 도구이다. 그 은택들이 우리의 것이 되었을 때 그것들은 우리의 죄들을 완전히 사면하고도 남는다.

 

 C.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하나님게서는 효력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시는데 그들 속에 의를 주입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사하시고 그들의 인격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받아들이심으로서이며;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졌거나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심으로써, 또한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으로써 의롭게 되는데, 그 믿음도 그들 스스로 갖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5. 칭의의 개념

 

  칭의는 은혜로우면서도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것으로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2)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대 단 한번 일어난다. 그렇지만 신자는 끊임없는 믿음의 실천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칭의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라는 복은 그것이 받아들여진 후로는 위로와 평화와 기쁨의 끝없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3)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으며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롬 3:28)

  (4)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5)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6)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포함한다. "전가"라는 말은, King James Version에서는 헬라어 logizomai("to reckon", 간주하다)를 번역하기 위해서 8회 사용되었다. "전가"라는 말은 법적 용어 혹은 재판정에서 쓰이는 용어로서 다른 사람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세 경우와 연관되어서 사용되었다.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전가된 것과, 그의 백성의 죄들이 그리스도께 전가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칭의는 이 마지막 의미로서의 전가를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의 몫(소유)으로 계산되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 방법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는 고린도후서 5:21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 분과 우리가 하나됨에 기초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7)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나타난다.
  (8)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9)칭의는 "종말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10)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되지만"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0에서 확증한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신 사람을 반드시 성화도 시키신다.

  죤 칼빈(John Calvin)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며 그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것을 붙잡게 되면 반드시 동시에 성화도 똑같이 붙잡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의롭다고 하신 자를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은택들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결속력으로 함께 결합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지혜로 마음을 조명한 자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성화시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를 반드시 동시에 성화시키시는 것이다.

 

6. 칭의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칭의의 소극적인 면이란 죄를 용서받는 복을 말한다. 우리가 칭의될 때 하나님과 우리의 법정적 관계는 유죄에서 무죄로 바뀐다. 신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한 연구는 칭의가 신자의 생애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한번 일어난다는 것을 드러내 줄 것이다. 로마서 8:30,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edikaiosen; 단 한번의 행동을 의미하는 부정과거 시제) 의롭다 하신(edikaiosen)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마찬가지로 칭의를 단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가지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에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신자의 미래의 삶도 펼쳐진 책과 같이 하나님앞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칭의된 신자는 계속해서 날마다 사죄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자신이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절망감으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천부께로 가까이 가는 어린아이의 확신감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칭의가 사죄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그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는 것과 영생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또한 품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칭의되었을 때 우리에게 전가된 혹은 우리의 것이 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공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두가지 성질을 지니는데 바로 대속과 순종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순종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인양 우리를 그렇게 보아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의의 한 행동"을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 말하자면 꼭 우리의 죄들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신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것의 의미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칭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이제 의롭다고 간주되거나 선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혹은 율법준수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거나 또는 전가되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 의가 "되는"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롭게 여겨진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탁하는 것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그것이 우리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됨

 

  양자됨이라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신분에 놓여져서 그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특권들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법적인 의미를 가진다. 양자되는 복을 표현하는 신약의 헬라어 단어는 휘오데시아(huiothesia)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양자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효 중에 들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됨을 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에 동반되며,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삶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그 구속을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 영은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양자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서 우리의 양자됨을 표현할 수도 있게 하신다. 바울은 "양자의 영"을 신자들이 인도함을 받는 성령의 의미로 말한다(롬 8: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영을 받았으며 그 영을 통하여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면 어떤 혜택들이 뒤따르는가?

  (1) 이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진다(히4;16,요일 5:14).
  (2) 우리가 하나님의 방호와 보호의 복을 누리게 된다(마6:25-34,벧전5:7).
  (3) 우리가 여전히 겪어야 하는 역경들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훈육이다(히12:5-11).
  (4) 우리는 성령으로 인쳐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진다(고후1:22,엡1:13;4:30)

 

8. 영생의 권리

 

  칭의의 두 번째 적극적인 혜택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권리이다. 영생은 자기의 아들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요 3:16). 예수님이 소위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영생은(그리스도의 백성들이)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을 분명히 하신다. 영생이 현재 소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라는 요한복음 3:36에 분명히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생명이 우리가 죽을 때 끝나는 현재의 복일 뿐이라면 그것을 영원하다고 부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미래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생겼고 우리가 칭의될 때 우리에게 부여되었던 영생의 권리는 하나님의 양자된 복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함께 미래의 것을 함께 가리킨다.

 

  몸의 부활 후에 우리는 전적으로 충만하고 완전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믿음은 직접 보는 것으로 바뀌게 되고 죽음과 슬픔은 잊혀질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며 하나님을 온전히 즐기고, 또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9. 믿음과 칭의와의 관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ek pisteos, through faith)또는 "믿음으로"(dia pisteos or pistei, by faith)의롭게 된다고 한다. 이상의 각각의 표현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Ek는 "...에서 밖으로"(out of)혹은 "....을 통해서"(through)의 의미인데 이것은 그 믿음이 이 칭의를 자기의 소유로 받아들이는 "도구(기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가지의 표현 방법 dia ten pistin(on account of, "대문에" 혹은 "...으로 인하여")은 신약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을 우리가 칭의될 수 있는 공로적인 근거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61문에 잘 나타나 있다.

  Q 왜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만 당신이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가?
  내가 하나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내 믿음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과 의와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절대 아니되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의 그것을 받아들여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다.

  바울이 이 절(창 15:6)을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다(롬 4:5,9,22)는 가르침으로 쉽게 설명하여 쓸 때 우리가 깨닫도록 그가 의도한 것 전부는 바로 이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단호하게 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18절 이하)으로서 그에게 전가되는 의의 수단과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죤 스토트(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순종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라고 주장한다. 죤 머레이(John Murray)는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의 순종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고 확언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와 같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고 말하는 것이 아마 가장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전가되거나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 전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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