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많이 받은 청지기의 사명

하나님아들 2014. 4. 3. 18:52

많이 받은 청지기의 사명

                                                    누가복음 12:41-48

 

교회 주소/ 서울 노원구 상계5동 136-55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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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비전교회 카페삶의 행복과 깊은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더 많이 있습니다. 들어오셔서 함께 나누고 예수님의 비전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http://cafe.daum.net/jesusvision91 http://cafe.daum.net/boram9191

 

 

김정화 기자가 쓴 “인디언 계산법”이란 에세이가 있습니다. 백인들이 인디언 땅을 차지하고 인디언들에게 미국식 교육을 주입할 때였습니다. 인디언 오지브아족 출신 아이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인디언 아이백인들의 교육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수업시간 내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 못하는 학생에게 벌칙으로 씌우는 고깔모자를 쓰고 교실 구석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덧셈 뺄셈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도 그 아이는 고깔모자를 쓴 채 창문 너머로 도토리를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과를 4개 가졌는데, 친구에게 한 개를 주면 몇 개가 남지?” 인디언 아이는 백인들 교육방식에 불만이 있어서 처음으로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줘야 해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갖는 거예요.”

 

 

여러분! 인디언 아이계산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미국식 교육방식에 길들여져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한 사람은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왜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아야 합니까? 사람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우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한국 청소년이 더불어 사는 능력에서 세계 꼴찌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의 어른들이 아이를 경쟁자로 키우는 능력에 있어서 최고라는 것이죠. 우리 사회는 더 어렵고, 더 힘들 때에도 더불어 사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불어 사는 능력이 꼴찌가 되었을까요? 인성과 배려를 지식으로 배우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사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편리함과 편안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D. 본회퍼 목사님이 쓴 묵상집 <말씀 아래 더불어 사는 삶>에서 말했습니다. “말씀 아래 더불어 사는 삶은 믿음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다. 다 함께 공동으로 수고하지 않고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깨어 협력할 필요가 있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 가운데 함께 있는 삶만큼이나 개인의 홀로 있는 삶이 중요하다. 왜?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고독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나눔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나눔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고독에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또한 홀로 있는 삶만큼이나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하다.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노동과 식사를 통해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성도와 함께 나눔을 가져야 한다. 나눔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 25:40) 함께 나누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종말론적인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들이 다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종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종말론적인 세계관이란 신앙적으로 어떤 개념을 뜻하는 말일까요? 예를 들면,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고, 세상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들이 낡아지고, 쇠하고, 죽(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됩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나 다 결정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종말론적인 세계관 속에는 우연한 일이 없습니다. 다 필연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시고, 섭리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종말 직전의 유예기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유예기간이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시간 시간이 소중하고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서 “준비하다(헤토이모이/ετοιμοι/hetoimoi)”라는 말은 “적절한, 준비된, 이미 준비된”이란 뜻입니다. 무엇을 준비하라는 것일까요? 주님을 만날 때가까이 왔으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믿고,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것으로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미뤄놨던 것, 주저하는 것, 머뭇거리는 것, 지금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능력, 시간, 돈다 모아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요 6:29)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나의 구세주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교회의 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가 지속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될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히 13:8)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을 얼마나 나타내고 계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왜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요 6:35)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어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어야 거듭남을 체험하고, 새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어야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가져야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나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화목가족을 화해시키고, 형제를 화해시키는 힘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가져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합니다.(요 8:32)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고, 증거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타내십니다.(요 14:21) 지금 나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얼마나 나타내고 있습니까?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가톨릭 사제의 서품을 받았던 고이태석(62년생) 신부님이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 갔습니다. 거기서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을 치료하였습니다. 나병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흙집으로 병원을 세우고 학교도 설립했습니다.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가난을 벗기 위해서 농경지를 일구고 원주민 계몽에 나섰습니다. 많은 일들을 감당하다가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48세에 대장암에 걸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이태석 신부님의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10남매를 바느질로 키웠습니다. 안 아픈 손가락이 없을 정도로 바느질을 해서 키웠는데, 그중에 가장 기대가 많았던 아들이 태석이입니다. 의사가 되어 남들처럼 결혼해서 애도 낳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태석이가 사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너무 속상해서 하느님께 원망하며 부르짖었어요. ‘하느님, 열 명 중에 첫째도, 둘째도 신부로 데려가시고, 또 수녀로 데려가시더니 이제 태석이 마저 신부로 데려가시렵니까? 그저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게 저의 욕심인가요?...’ 그러던 어머니가 고이태석 신부님이 대장암에 걸려 투병할 때 전혀 다른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종으로 부르셨으니 제발 태석 사제를 살리셔서 톤즈로 보내주세요. 만약에 생명을 거두어 가시려면 저를 데려가시고 태석 사제는 톤즈로 보내주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나에게 재능(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믿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데, 멋지게 쓰임 받고 종말을 맞겠다고 봉사하고 있습니까? 선한 일을 감당하는데 왜 좀 더 시간을 주시지 않고, 죽음(종말)을 맞게 하셨을까요? 너무 아쉽고 아깝지 않습니까? 인간의 삶이란 내가 조금 더 일하고 싶다고 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이제 그만 일하고 싶다고 해서 그만 두는 것도 아닙니다. 청지기는 자기 사명을 다해 일하고, 사명을 마칠 때까지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일하는 모습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세요.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여기서 주님은 많이 받은 청지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청지기는 지혜 있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혜(프로니모스/Φρονιμος/phronimos)”라는 말은 “사려 깊은, 슬기로운, (지성이나 정신적인 인식을 가진) 신중한, 총명한”이란 뜻입니다. 지혜 있다는 말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아는 사람입니다. 본문 47절에 보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사려 깊이 생각해야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왜?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자기 생각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려 깊지 않은 종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 가장 맹랑한 선지자가 요나입니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가서 외치라. 너희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회개하고 돌이키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서 외쳤습니까? 아닙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요나가 왜 니느웨로 가지 않았을까요?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요나가 생각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괴롭혔던 적들인데 내가 왜 그곳에 가서 외쳐야 하는가? 니느웨 성읍은 멸망되어야 한다. 내가 가서 외친다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요나의 생각이 맞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켜서 요나가 탄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자기 신을 부르고, 물건을 다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때 요나는 배 밑층에서 누워 깊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요나를 깨워 ‘일어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러면서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한 것인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욘 1:14) 요나가 바다에서 던져 졌다가 구원을 받은 후에 니느웨에 가서 하루 동안 외쳤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여러분! 지혜로운 종은 내 생각, 내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따릅니다. 내 뜻, 내 기분, 내 감정,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가라.” 하면 가겠습니다. “버리라.” 하면 버리겠습니다. “거기에 서라.” 하면 서겠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알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 지혜로운 청지기입니다. 지혜로운 청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청지기는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진실(피스토스/πιστος)”이란 “믿을 만한, 신실한, 신뢰하는, 확신하는, 충성스런”이란 뜻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주인이 믿을 만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일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합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이 가게 행동하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찾으셨던 사람 다윗이 쓴 시입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 101:6)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충성된 사람을 찾고, 살피십니다.

 

 

여러분! 불황일수록 기업이 선호하는 일꾼이 있습니다. 전문지식과 기획력이 뛰어난 인재보다 충성심이 강한 인재를 선호합니다. 왜? 생산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 이전에 ‘인간의 문제’요, 인간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술력이 좋아도 마음이 불량하면 불량품이 나옵니다. 재능이 뛰어나도 마음이 상하면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제품이 불량품이 많은 것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노동쟁의 할 때 태업을 해도 불량품을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한 번 불량품이 나오면 국제시장에서 신용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용을 회복하려면 10년이 걸린답니다. 중국산이 싸지만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분유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고, 자동차 라디에이터에서 걸레가 나와서 신용을 잃는 회사가 있습니다. 왜 불량품을 만듭니까? 욕심이 많아서... 직원이 기분이 나빠서, 사고 쳐서 회사를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겁니다. 시간 때우고,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해야 합니다.

 

 

셋째, 청지기는 청지기의 사명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청지기(오이코노모스/οικονομοςׂ)”는 “감독, 집사, 복음 설교가, 총독, 경영자”라는 뜻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매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청지기 의식을 가지면 능력과 지혜를 다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으로 생산적인 역사를 하게 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집 종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는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다른 사람들이 일을 잘하도록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지혜 있고 신실한 청지기에게 모든 소유를 맡깁니다. 본문 48절을 보면,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찾을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많이 받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지위와 직책과 지도력을 맡은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도와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도록 격려하고,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청지기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재능, 은사, 물질, 시간을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북한에서 탈북하여 국내 여성 박사 1호가 된 이애란 씨가 미국 국부무의 초청을 받고 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평양에 살다가 10살출신성분 때문에 양강도, 함경북도로 쫓겨났습니다. 거기서 말할 수 없이 고생하는데 1997년에 미국에 사는 할머니(86세)가 연락을 했습니다. 47년 만에 할머니가 중국에 와서 연락을 한 것이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47년을 하루같이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기도했다. 너희 가족을 내가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그 편지를 받고 아버지가 얼마나 우셨는지 몰라요. 북한이 제일 미워하는 적대 국가(미국)에서 할머니가 살면서 47년 동안 기도했대요.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서 고통 받으면서 하나님이 왜 이곳에서 고통스럽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꿈꾸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베풀어주셔서 아홉 가족이 다 북한에서 탈출했습니다. 북경에 와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 입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셨지요. 그때 깜짝 놀라면서 “야, 우리 아바이 동무가 반동분자였구먼. 어떻게 내 아버지가 크리스천이었지? 이런 반동분자가 내 아버지였구나!”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기적 같은 모든 일이 믿음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기도하시고, 할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저에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북한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제가 받은 은혜를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많이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EXTREME-1
글쓴이 : Extreme-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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