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
요한복음 3:22-30
교회 주소/ 서울 노원구 상계5동 136-55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상담 : 02) 6221-6468, 010-8346-6468,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이은주 씨가 쓴 “엄마가 해 줬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아이와 꽃구경을 갔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름답게 핀 꽃들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유난히 진한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향기를 따라가 보니 이름 모를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까치발을 하고 향기를 맡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꽃이 샤워했나 봐! 꽃에서 좋은 향기가 나. 엄마가 샤워시켜 줬어?” 아이의 귀여운 상상에 한동안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꽃은 사워를 하지 않아도 향기가 납니다. 꽃은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시각을 사로잡습니다. 꽃은 향기로 사람의 후각을 사로잡아 상상의 기쁨을 선물합니다. 꽃향기가 코에 닿으면 꽃이 말을 걸어 시인이 되게 합니다. 시인 도종환이 말했습니다.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누군가 꽃씨를 심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려면 꽃향기에 매료된 감동을 표현해야 합니다. 꽃은 생명의 시련을 견뎌내야 향기가 납니다. 꽃은 화려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꽃은 열매를 얻기 위해 희생의 과정을 겪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꽃잎을 버리고 열매와 씨앗이 되는 순간에 꽃의 임무가 끝납니다. 꽃은 눈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마당에 꽃밭이 있습니까? 마음의 꽃밭에 어떤 씨앗을 심고 있습니까? 아름다운 사랑의 씨앗을 뿌렸습니까? 진리의 씨앗을 심고, 진리의 싹을 가꾸고, 진리의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왜 진리의 씨앗을 심어야 할까요? 진리의 꽃에 담긴 향기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이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고후 2:15) 이제 밤이 오기 전에 진리의 향기를 담아 이웃에게 전해주지 않으시렵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함께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 가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하셨습니다.(요 4:2) 예수님께서 왜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예수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면 큰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는데... 너는 제자들에게 받았지? 그러니 내가 받은 세례는 너와 달라. 네가 받은 세례는 내가 받은 세례보다 훨씬 격이 떨어져...’ 이런 생각을 가능하게 한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3년 동안 훈련받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초대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려고 나를 부르셨다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신 분(예수님)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어차피 물세례는 제자들이 해야 할 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권위를 위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유대 땅에 머물러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게 하셨습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물이 많은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애논은 히브리어 ‘에나임’, 아람어 ‘아인(샘)’에서 온 말로 “샘의 장소, 샘들”이란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계속해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요한이 선포한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기뻐합니까?
서울 명동의 길거리에 명신교회(明信敎會)를 개척한 김 길 목사님이 쓴 <사명(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의 삶)>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 “학창시절(전남대 철학과)에는 민주화운동에 몰두하다 군대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예수전도단 간사로 대학 캠퍼스에서 청년들을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삶과 사역은 소설이 아닙니다. 멋지게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일을 모르는데 없는 사역과 삶을 멋지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마음의 복잡한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면 내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지 압니다. 마음을 훈련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강건해야 이깁니다. 문제보다 믿음이 더 커야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생명이 없습니다. 사명이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나의 사명은 다른 영혼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사명자는 나의 뜻, 나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려면 매일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왜? 제자는 스스로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까? 사명을 이루자면 나의 삶을 걸어야 합니다. 왜? 그냥 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다고 말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걸어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감동할 만큼, 무엇보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겠다고 결심하실 만큼 말이죠. 아무것도 안 하고, 적당히 죄 짓는 삶을 살면서 꿈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명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을 따라가야 생명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명과 멀어지면 생명과 멀어집니다. 생명은 사명을 이루고자 할 때 가능합니다. 모든 인생이 의미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이 다 열매를 맺고 사명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듯이 말이죠...”
여러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계(나이)를 보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환경과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왜? 사명에 집중할 때 주변의 일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예수)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예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사실 이 말은 세례자 요한에게 마음의 갈등을 부추기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양보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례자 요한을 따랐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요한을 따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자 사람들이 거기로 몰려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흔들립니다. 왜? 인간적으로 서운한 감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처음 생각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면 고민이 됩니다. 마음이 변해서 변덕이 생기거든요. 변덕이 심한 사람은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신의가 없습니다. 변덕은 영광과 존경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의 변덕은 시기와 질투심이 있을 때입니다. 경쟁심과 시샘이 마음을 변덕스럽게 만듭니다. 채근담에 보면, 마음의 변덕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늘이 조절하는 추위와 더위는 피하기 쉬우나 인간 세상의 뜨거움과 차가움은 제거하기 어렵다. 인간 세상의 뜨거움과 차가움은 제거하기 쉬우나 내 마음의 변덕은 버리기 어렵다. 내 마음의 변덕을 버릴 수 있다면 가슴은 따뜻하고 생기 있는 기운으로 가득 차며 가는 곳마다 저절로 봄바람이 불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변덕스러움이 있습니까?
여러분! 세례자 요한은 이런 말을 듣고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심지가 견고해서 초지일관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세례자 요한이 왜 초심이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세요.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존재감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예수님의 길을 여는 도구로 선택하시고, 사용해주신 것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겨주셔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증거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에서 어떤 사명을 주셨다고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15년 동안 목회를 하던 레이먼드 크래이머가 임상심리학 분야의 수련 의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최고 상담자 예수님과 심리학의 만남을 <마음을 열어주는 예수 심리학>이란 책에 수록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문제점들을 안고 살아간다. 죄책감, 열등감, 불안, 분노... 왜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일까? 나약함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이 의지할 누군가를 찾는다.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일들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그 와중에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고통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데, 그리 쉽게 치유되지 않고 마음의 병으로 잔재하게 된다. 불안한 마음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위험을 직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이다. 인간이 절름발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적이 없고, 스스로 진실을 숨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계속 두드리고 있다. 왜? 죄책감을 제거하고, 예수가 가르쳐준 마음의 통로, 쉼의 통로, 구원의 통로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치 못한다. 매일매일 성숙의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아갈 때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승부욕이 없다. 누구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예수 심리학은 우리에게 인격의 대부를 보증한다. 우리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희박하다.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개조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을 보세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자 요한은 자기 존재와 본래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미리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미리 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시다. 나는 광야의 소리요, 메시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명자이다. 나의 위치와 나의 분수를 알고 행하는 것이 기쁨이다. 나의 위치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행복이다. 나의 분수를 알고 증거하는 것을 축복이요,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여러분! 세례자 요한이 즐기는 기쁨이 무엇입니까? 요한이 누리는 이런 기쁨이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위한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로 기뻐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일이 더 기쁜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세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잔칫날에 정말로 기뻐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신랑과 신부입니다. 그런데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친구입니까? 예를 들면, 아름다운 여자를 내 친구가 취해서 결혼한다고 했을 때 기뻐할 수 있나요? 시샘하지 않고 서서 축하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까? 잘 사는 사람을 볼 때 기뻐하고, 잘 되는 친구를 볼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런 마음, 이런 사람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이 어떤 것입니까? 절대적인 기쁨이요, 온전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이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고 증거했습니다. 본문 30절을 보세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왜? 예수님이 흥하여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쇠하여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왜냐? 내가 썩어져야 사람들이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참아서 그가 복이 된다면 참을 것이요, 내가 고난을 당해서 그에게 영광이 된다면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예수님이 산다면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신비로운 기쁨을 알고, 참 행복, 참 축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으로 인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주님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수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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