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 있는 인생을 사는 지혜
마가복음 1:21-28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상담 : 02) 6221-6468, 010-8346-6468
경남 창원에 사는 견선희 씨가 쓴 “사랑을 굽는 빵집”이라는 에세이가 있습니다. 대학생 때에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빵집 사장님이 직접 구우시는 빵이 워낙 맛있는 데다, 다른 가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빵들이 많았어요. 사장님은 빵을 굽고 팔면서 확고한 경영철학을 갖고 계셨습니다. ‘신선한 재료를 쓰고, 그날 구운 빵만을 판다. 남은 빵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눈다.’ 사장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굳게 지키셨지요. 그날 팔고 남은 빵들은 모두 큰 가방에 담아 가져가셨습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늘 궁금한 것이 있었어요. ‘저 빵들을 다 드시진 못할 테고, 어떻게 처리하시는 걸까?’
어느 주말에 사회봉사 실습 때문에 아동 복지관을 찾아갔습니다. 아이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데 간식으로 빵과 우유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빵들이 무척 낯익었는데, 알고 보니 사장님의 빵이었습니다. 복지관 선생님에게 여쭈어 봤지요. “이 빵이 어떻게 이 복지관에 오게 되었나요?” “사장님은 팔고 남은 빵뿐 아니라 매달 생일 케이크도 만들어 주시죠. 얼마나 정성껏 만들어 오시는지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나는 비록 용돈을 벌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니신 사장님과 만난 건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돈보다 소중한 인생의 가치를 배웠으니까요. 어버이날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롤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 빵집에 들렀어요. 사장님이 갓 구운 팥빵을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으시더군요. 복지관 어르신들에게 드린다면서 “맛있어야 할 텐데... 한 번 먹어봐.” 하고 팥빵을 건네 주셨어요. 사장님의 사랑이 가득한 빵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모른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나의 삶으로 행복하십니까? 지금 나의 삶으로 왜 행복하기 어렵습니까? 늘 행복의 제일 조건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요? 행복의 제일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희생하고 있지 않나요?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희생시키고, 가족들과 행복을 공감할 기회를 희생시키고 있으니까요. 행복의 외부 조건을 채우려고 애쓰다가 지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커다란 행복감을 맛보기 위해서 소소한 기쁨, 작은 만족감을 희생시키거든요.
그러나 평생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보물단지는 매일매일 소소하게 느끼는 작은 기쁨을 느끼고 얻어야 합니다. 소소한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만족은 탐욕스런 욕망을 잠재웁니다.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말했어요. “행복을 원한다면 섬기는 방법을 연구하라.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참으로 행복하게 될 사람은 계속해서 섬기는 법을 찾는 사람이다.” 왜냐? 섬기는 방법을 찾는 사람은 불평불만하지 않습니다. ‘뭘 줄까?’ 생각하고, 매사에 감사하고, 매사에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사람,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제시한 알렉스 파타코스가 <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라는 책에서 말했어요. “마음을 열면 시간이 되돌아온다. 우리의 삶은 의미로 가득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매순간 의미가 있다.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다. 시간을 되찾는 것은 의미에 마음을 열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정직하고, 공평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쓰는 사람마다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내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 등산을 간 사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한 사람은 인생을 음미하며 삽니다. 인생을 음미하면서 아름다운 삶, 행복을 지속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한 사람의 여유는 큰 나무 그늘과 같아서 열 사람에게 쉼을 주고, 삶의 소망과 평안을 줍니다. 한 사람의 믿음, 사랑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줍니다.
오늘 본문(마가복음 1장 16절 이하)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실 때에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을(시몬과 형제 안드레)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기잡이 두 형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곧장 그물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만약에 이 두 형제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평생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어부로 살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누가 어부 시몬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권세 있는 인생을 살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권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로 살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늘의 권세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야 봉사하면서 피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살지 않으면 칭찬할 때 좋아하고, 안 알아주면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고, 인정받지 못하면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권세로 살면 안 됩니다. 왜냐?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권세는 커지면 커질수록 부패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비리커넥션을 보세요. 주어진 권세가 커지면서 법망을 벗어난 일탈행위들입니다. 주어진 권세가 커지면 사람의 욕망도 더 커집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어진 권세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어진 권세가 커져서 구속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때 권력의 실세였던 사람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보고 있잖아요? 정치인이 권력을 탐하다가 구속되고, 공직자가 권력을 남용하면 구속됩니다. “권력 욕심이 커지면 역시 죄를 짓게 마련이고 죄가 커지면 망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아서 오늘의 권력자들이 불쌍해요.”(이희호 여사) 종교도 권력을 탐하면 추한 모습이 나타나고 그 추한 모습에 실망합니다. 종교가 권력지배적인 구조가 되면 변화의 아름다움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변화와 교화의 모태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교제하는 곳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권세로 세워진 건강한 교회와 건강하지 못한 교회로 구분해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건강한 교회는 정직하고, 검소한 삶을 실천하고, 절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룹니다. 건강한 교회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스스로 작아짐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세속적인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말하지만 세속적인 가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공, 번영, 편리함, 편안함, 자기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덩치를 키우는 공동체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권세를 더 의존하고, 키우려고 모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권세가 더 커지면서 부패하고, 비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왜냐? 천국 복음이 선포될 때 귀신들린 자가 소리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뭇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예수님이 가르칠 때 많은 사람들이 왜 놀랐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권위(엑수시아/ejxousiva/eksousia)”는 “특권, 힘, 재능, 능력, 자유, 영향력, 다스림과 통치할 능력”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였던 것이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 14:9,10) 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권세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권세로 살기 원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권세로 살기 원하실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야 무엇이든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로 누구 앞에서나 자유인으로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세로 살기 원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권세로 살고 있습니까? 누구 앞에서든지 자유롭습니까? 세상 부자, 세상 지식인, 세상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자유인으로 삽니까? 아니면 누구 앞에만 가면 뭔가 부자유한 것이 있습니까? 어떤 일을 맞닥뜨리면 자유롭지 못한 것들이 있지 않나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반응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본문 22절-23절을 보면,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정신이 온전하다’ 하는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요. 바로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의 능력까지 알고 말합니다. 귀신은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소멸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꺼려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귀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귀신들린 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멸망시키러 왔소?’ 말합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아세요?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소멸될까봐 두려워서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 이 말씀이 왜 오늘 현대인에게 중요합니까? 현대인들도 뭔가 알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 마음 속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의 지시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닌데... 원치 않는 대로 자꾸 끌려 다니고 있는 거 같아요.’ 내 지식도, 냉철한 이성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끌려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어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내가 곤고한 삶을 사는구나.”(롬 7:21-24)
지금 내 삶이 곤고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는 마귀가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자꾸 죄를 짓게 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마귀가 들어오면 자기 욕심대로 행합니다. 마귀는 진리가 없어서 진리에 서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여서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요 8:44) 마귀는 살인의 영입니다. 마귀가 들어가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고, 마귀가 들어가면 배신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요일 3:8)
다른 하나는 귀신이 들어와서 얽어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들어가면 두려워하고, 무서워서 떨고, 공포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업에 실패하지 않을까? 시험에 떨어지지 않을까? 암에 걸리지 않을까?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을까?‘ 이처럼 악한 영들에 매여 있으면 두려워하고, 무서워 떠는 경우가 있어요. 귀신들린 자는 남을 의심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저 사람에게 속지 않을까?‘ 불신하고 매사에 불만을 갖습니다. 귀신이 들어가면 진심을 고백하는 대화가 없어요. 귀신들린 자는 사람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빛을 싫어합니다. 환한 곳보다 어둡고 컴컴한 곳을 좋아해요. 요즘 현대의 타락한 문화를 보면, 귀신의 사슬에 묶여 있는 모습이 많아요. 5살짜리 꼬마가 할머니를 보더니 곧장 이렇게 말하더래요. “할머니, 수컷이 없어서 외로우시죠? 그럴 거예요.” 지금 현대인들은 자신이 귀신들려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봐야죠. 마치 정신병자가 자신은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있는 악한 영들(사탄, 마귀, 귀신)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내 안에 있는 귀신들은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는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병마는 물러가라.”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고 물리쳐야 합니다. 본문 25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까?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망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요일 3:8)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물리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제 이 권세를 사용하여 건강하고, 능력 있게 살기 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으로부터 주어진 권세는 유한합니다. 다니엘 4장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기 능력과 권세로 나라를 건설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자기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자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총명을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 후로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총명을 구했습니다. 총명이 돌아오자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단 4:34-35) 인간은 아무리 큰 권세를 가져도 자기 뜻대로 살 수 없어요. 인간의 권세는 유한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권세로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예수님의 권위를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의 권세를 가졌다.’ 이것을 깨닫고, 나를 구속하고, 속박하고 있는 것들을 명령하여 자유를 얻으십시오. 예수님의 권세는 육체적인 속박, 가난, 질병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정신적인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자기 고집,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영적으로 자유를 줍니다.
레오날드 라벤힐(Leonard Ravenhill)이 말했어요.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명령하고, 그 명령에 순종할 때 능력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는 자유와 무한한 축복을 얻었습니다. 권세 있는 인생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힘입어 빛을 반사하여 악한 영들을 물리칩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권위로 권세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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