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윤리학! 상담학! 교육학!

[스크랩]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 김영태

하나님아들 2014. 3. 9. 21:36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김 영 태**전남대




미국의 실용주의는 현대세계의 여러 철학사상 가운데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동안 실존철학, 마르크시즘, 현상학, 분석철학 등이 근·현대철학을 주도하다가 최근에는 한계에 부딪쳐 다른 어떤 대안적인 철학이 요구되는 가운데,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현 시대의 요구와 맞물려 각광을 받는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현대는 포스트모던 시대로서 과학기술, 상대주의, 실용성 등이 현대인의 삶의 가치기준이 되고 있는 바 이들에 대한 해석을 그 어떤 철학보다도 실용주의가 잘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실용주의를 하나의 체계로 보았을 때 그것의 중심은 진리관 및 가치관인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실용주의가 견지하는 하나의 가치관으로서의 종교관을 고찰하고자 했다. 미국인들의 실용주의 철학의 내면에는 깊은 종교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그것은 실제로 실용주의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고전적 실용주의자들인 퍼어스, 제임스, 듀이의 사상이 그러하고 현재 활동중인 로티, 퍼트남, 번스타인, 웨스트가 그러하며,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로이스, 미이드, 루이스까지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미국 실용주의사상의 제 측면 중 종교관을 고찰하되 우선 고전적 실용주의(퍼어스, 제임스, 듀이)에 한정했다.
퍼어스는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나 감독교회(Episcopalianism) 신자가 되었으며 종교경험을 많이 강조하는 스베덴보리의 학설과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퍼어스는 의심과 믿음을 반복해 가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적 준칙을 적용함으로써 점차 이상적인 인식에 이르게 되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실용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 탐구의 과정에서 관념을 명석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思考의 방법이었다. 퍼어스는 神의 가설이 실용주의적 가치를 갖는다고 확신, 즉 신의 관념은 인간의 삶의 理想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를 만족스러운 경험을 주는 신념과 연관시켜 파악함으로써 추상적인 사변보다는 구체적인 행동을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단순히 인식의 방법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하나의 진리관 내지 세계관으로까지 확장하였다. 제임스에 따르면, 참된 것은 마땅히 실천이나 경험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의 한 예가 곧 '현금가치(cash-value)'로서 이것은 곧 구체적인 결과를 갖는 것만이 참된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神, 절대자, 물질 같은 형이상학적인 용어들도 현금가치를 지닐 때 실용성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제임스는 스베덴보리 사상에 깊이 관여했던 부친에게서 체험적 종교신앙을 전수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는 인간을 '건강한 정신의 인격'과 '병든 영혼'으로 분류·분석하고 후자가 더욱 종교적이라고 보았으며,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그 전형적인 예라고 보았다. 제임스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종교인의 聖者性을 강조하였다.
틸리히와 라인홀드 니버가 미국사회에 종교적 실존주의를 전파하고 있는 와중에서 듀이는 사회적 행동의 실천 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듀이가 종교적 실존주의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종교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로교 신자였던 그의 모친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배운바가 있었기에 그리스도교를 이해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단, 듀이는 종교의 초월, 초자연적인 것을 배격하고 그 대신 理想에 대한 인류의 공동신앙을 내세웠다. 다시 말해서 제도화된 기성종교인 'a religion'을 배격하고 理想에 대한 인류 공통의 신앙인 비제도화된 'religious'를 주창했던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보면, 미국 실용주의의 진전과정에 있어서 종교적 측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톨릭적이 아니라 개신교적이며, 소위 '성스러움'에서 '속스러움'으로의 전이현상, 즉 종교를 초자연주의로부터 자연주의에로 끌어내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종교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는 여전히 초자연주의와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및 성령체험의 신앙이 수 많은 미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주요어(key words) - 실용주의, 퍼어스, 제임스, 듀이, 종교



Ⅰ. 서 언

미국의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는 현대철학의 중요한 사조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상은 몇 가지 중대한 오해와 은근한 반감 때문에 그동안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실용주의는 하나의 철학하는 방법일 뿐이지 사상 체계는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마치 연구를 천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겨 온 것이라든지, 혹은 미국은 물질문명에 있어서는 세계의 초강대국으로서 우리는 그 나라로부터 과학기술은 어느 정도 배울만한 것이 있을지 몰라도 그 나라에는 이렇다할만한 철학 사상이 없기 때문에 사상적 측면에서는 배울만한 것이 없다는 단정 및 폄하의 태도등이 우리들로 하여금 미국실용주의에 대한 연구를 간과 내지는 게을리하거나 미루어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오해 및 편견을 계속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실존철학, 현상학, 분석철학 등 현대 철학 사조에 가려 있던 실용주의 철학이 최근 로티(Richard Rorty)나 퍼트남(Hilary Putnam), 그리고 웨스트(Cornel West) 같은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강조되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동안 기대를 모아왔던 실존철학, 현상학, 분석철학 등이 현대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크게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메울 대안으로서 새로운 철학사상이 요구되는 터에 그동안 묻혀 있던 미국의 실용주의에 대한 재이해 및 재해석이 크게 기대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기대의 심리는 최근 미국의 발전과도 크게 맞물려 있으며 21세기를 이끌어 갈 지구촌의 철학사조로서 뾰족한 대안이 없는 점도 실용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한 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실용주의는 철학하는 하나의 방법론임에는 틀림없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꽤 방대한 철학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체계를 이루는 대표적인 내용은 진리관과 가치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틀 이면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깊은 물줄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실용주의의 종교적 측면이다. 물론 미국 사회는 여타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초창기부터 보수와 자유의 색깔이 분명한 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왔다. 예컨대 초월주의와 현실주의, 이상론과 경험론 등 양대 노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륙적인 합리론 그리고 앵글로-색슨의 경험론이 미대륙에서 혼재해 오면서 은근히 긴장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다. 또 종교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적 초월주의와 철학적으로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가 보수 및 진보적 성향을 띠면서 암암리에 대결해 온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의 성향은 그동안 활발하게 전개된데 비해 실용주의가 지닌 현실주의적(인본주의적) 종교의 측면은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자의 주된 관심은 조용한 가운데 이러한 미국사상 형성의 틀 속에서 미국문화를 주도해 온 실용주의의 종교적 측면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고전적(제 1세대)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실용주의가 안고 있는 종교사상 혹은 실용주의자들이 품고 있는 종교관을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른바 로티가 주창한 '신 실용주의(neo-pragmatism)'까지를 포괄하기엔 연구의 폭이 너무 광범위하여 금번에는 고전적 실용주의의 종교관 탐구에만 주력하기로 하고 곧 이어서 후속편으로 '신실용주의의 종교관'을 연구할 계획이다. 본 논문에서는 고전적 실용주의와 종교가 어떻게 접목되고 있으며 그것이 사상사적으로 어떻게 계승되고 변천되어 왔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따라서 고전적 실용주의자를 개별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실용주의의 계보 및 종교적 성향의 맥락을 고찰한 후 퍼어스, 제임스, 듀이 등 제 1세대(고전적) 실용주의자를 중심으로 각 실용주의의 기본사상 및 그것이 종교사상과 어떻게 연계되어 발전되어 가는지를 탐구하겠다.


Ⅱ. 실용주의의 계보 및 종교적 성향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미국사상계는 유럽의 사상, 특히 독일 관념론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있었다. 유럽사상의 미국화는 주로 신학면에서 퓨리타니즘(Puritanism)의 토착화 과정에서 진행되었다. 18세기 초에는 알미니우스(Arminius, 1560∼1609) 신학이 그리고 19세기에는 유니태리안(Unitarian) 신학이 전통적 교의를 자유주의적으로 개조했고 아직 식민지시대였던 당시 미국의 최대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알미니우스신학과의 대결을 통해서 퓨리타니즘의 혁신을 기도하고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아직 초월주의적이라고 불리울 만큼 유럽적이었으나 유니태리안신학을 로맨티시즘으로 개조했다. 당시 어느 사조도 미국에서 새로 일어난 산업주의의 사상적 문제를 소화하지 못했고 산업사회의 기업가적 개척정신이나 과학적 사고방식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즈음해서 이른바 실용주의라는 철학방식 혹은 사상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실용주의가 실용주의 혁신을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산업혁명이 대체로 완성된 후였고 산업혁명의 결과 야기된 국민들의 빈부의 차, 서민적 소외층의 대두 등 미국사회가 이중 구조를 심화해서 양극단의 대립이 노정되기 시작하였을 때부터였다. 실용주의는 일종의 타협의 철학으로서 퓨리타니즘의 종교적 신조와 기술적 사고방식 사이의 상극을 해결하려는 조정자로서 나타났고, 또 이성적 원리와 경험론적 사실의 양극단을 중간에서 매개하려는 중개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실용주의라는 철학이 아메리카의 토착물인 것만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 실용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퍼어스(Charles S. Peirce,1839-1914)까지도 실용주의의 출현을 1860년대라고 했다가 1870년대라고도 말하고 있으며, 제임스(William James,1842 -1910)는 1870년대 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대개 1870년부터 1874년 사이에 일어난 철학사상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용주의는 1870년대 초기 미국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2주에 한 번씩 모여 의미와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적인 이론을 연구한 논문을 읽고 토론하던 젊은 학도들의 집회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회는 '형이상학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고 불리어졌다. 이 클럽은 퍼어스의 서재에서, 때로는 제임스의 서재에서 모였다고 한다. 퍼어스에 의하면, 이 풍자적인 의미를 가진 '형이상학 클럽'의 집회는 6명이 중심이 되어 모였는데,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와르너(Joseph Warner), 그린(Nicholas St. John Green), 라이트(Chauncey Wright), 홈즈(Oliver Wendell Holmes Jr.), 제임스(William James), 그리고 퍼어스(Charles S. Peirce). 이 젊은 실용주의자들은 당시 하버드대학 학생들이었고 듀이(John Dewey,1859-1952)는 그 당시 10세를 갓넘은 소년에 불과했다.
이 회원 중에서 그린(Nicholas St. John Green)은 1853년에 하버드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했고, 영국의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를 지지하였으며, 베인(Alexander Bain, 1818-1903)의 연구자로서 영국의 경험철학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 클럽에서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린(Green)이 베인(Bain)의 철학을 인용함으로써 회합의 분위기를 명랑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즐겨 인용한 것은 베인(Bain)의 '신념의 정의(definition of belief)'였다. 베인(Bain)은 신념이란 어떤 사람이 그것에 따라 행동하려고 준비하는 생각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그들 자신의 의견에 적용시켜 반성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몇 가지 의견이 신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용한 의견은 취소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실용주의자들의 계보를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메난드(Louis Menand)는 한권의 독본으로 간행한 그의 『실용주의』(Pragmatism, 1997)에서 실용주의 제1세대(first generation)로서 퍼어스(Charles S. Peirce), 제임스(William James), 홈즈(Oliver W. Holmes), 듀이(John Dewey), 아담즈(Jane Addams), 미이드(George H. Mead)를 내세우고, 현대 실용주의(contemporary pragmatism)자로서는 로티(Richard Rorty), 퍼트남(Hilary Putnam), 네프(Steven Knapp), 마이클즈(Walter B. Michaels),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 웨스트(Cornel West), 포즈너(Richard A. Posner), 포이리어(Richard Poirier), 애플비(Joyce Appleby)를 들고 있다.
실용주의는 흔히 단지 미국에서 미국의 철학계에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98년 제임스에 의해 실용주의의 탄생이 알려진 이래 실용주의는 철학외에 미국의 지성 및 문화계 전반에 걸쳐 심대한 역할을 해 왔다. 대법원 판사 홈즈(Oliver W. Holmes)와 기호학(semiotics)의 창립자 퍼어스(Charles S. Peirce)를 위시한 제 1세대 실용주의자들로부터 철학자 퍼트남(Hilary Putnam)과 법학자 포즈너(Richard Posner) 그리고 문예 비평가 포이리어(Richard Poirier)를 위시한 현대 실용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실용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실로 컸었다.
실용주의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창안한 인물이 퍼어스라면, 실용주의를 하나의 철학 사조로 유명하게 한 인물은 제임스일 것이다. 제임스는 수 많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실용주의를 의미 이론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관 내지는 세계관으로 천명하여 퍼어스의 견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견지를 표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논쟁을 벌였으며 퍼어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실용주의를 아예 다른 이름, 즉 '프라그마티시즘(pragmaticism)'으로 고쳐 부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세 철학자들은 서로를 잘 알고 존중했지만, 그들 각자를 철학에 쏠리게 했던 동기는 매우 달랐다. 퍼어스는 자신을 범주에 관한 칸트의 교의와 논리에 대한 칸트의 관심을 발전시키는 칸트의 제자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칸트나 헤겔을 아주 진지하게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퍼어스나 듀이에 비해 종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헤겔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던 듀이는 격렬한 반칸트주의자였으며, 과학과 종교보다는 교육과 정치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듀이는 그의 논문 '미국 실용주의의 발전(The Development of American Pragmatism)'에서 퍼어스의 실용주의와 제임스의 실용주의의 차이점을 언급했는데, 전자는 논리학자로서의 실용주의를, 후자는 휴머니스트로서의 실용주의를 펼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듀이 자신의 도구주의는 퍼어스의 것보다는 제임스의 것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시사했다. 아닌게 아니라, 듀이가 신학에서 도덕으로 전환한 것만 제외한다면, 그는 강건한 것과 유연한 것을 중재하려고 한 제임스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M. White)는 세 사람을 비교할 때 "퍼어스가 실용주의적 과학 철학자라면, 제임스는 실용주의적 종교 철학자이고, 듀이는 실용주의적 도덕 철학자이다"라고 했다.
제임스와 듀이는 퍼어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종교에 대해 생각했다. 퍼어스는 감독제도주의(Episcopalian)만이 올바른 종교라고 주장하는 감독 교회의 신도로 성장했으며, 제임스는 스베덴보리(Swedenborg,1688-1772;스웨덴의 종교적 신비주의 철학자)와 에머슨(R.W.Emerson)을 독특하게 뒤섞어 놓은 듯한 괴팍한 부친 밑에서 성장했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부친의 독특한 신학적 '관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의 양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제임스는 부친의 종교적 '체험'만큼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제임스는 그의 부친(Henry James, Sr.)을 괴롭혔던 것과 같은 종류의 정신적 위기로 고통을 당했으며, 그는 그것을 심리학적 언어로 서술해야 할지 혹은 종교적 언어로 서술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었다.
퍼어스, 제임스, 듀이외에 고전적 혹은 제 1세대 실용주의자로서 로이스와 미이드, 루이스를 들 수 있다. 앤더슨(Anderson)에 따르면, 로이스(Joshiah Royce, 1855-1916)는 자신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절대적 실용주의(absolute pragmatism)'라고 언급하였다. 그가 말하는 '절대적 실용주의'란 경험의 전체적 맥락(whole context of experience)이라는 퍼어스의 말투(talk)에 상응하는 것이다.
로이스는 퍼어스, 제임스와 더불어 신념의 이론적 근거와 실천적 윤리를 결합하는 시도를 하였다. 로이스는 그의 부모가 신앙했던 복음적 기독교를 거부하긴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종교적 문제들이 그의 철학을 형성하였다. 로이스에게는 종교적 탐구가 진리나 가치만큼이나 큰 관심거리였다. 그에 따르면, 종교철학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사실과 가치, 감정과 신념, 신앙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방법으로서의 형이상학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로이스는 종교를 인간들이 실제로 실재(reality)의 총체(whole)를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로이스에 따르면, 종교란 항상 초인적 세계의 감각을 익히는 것에 관여한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인간과 초인을 확연히 구분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구분은 종교와 도덕성의 조화를 해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스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신학을 갖지만 어떠한 신학도 무한한 진리에 대해서 절대적 계시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로이스는 만약 실용주의 철학의 종교적 측면이 독단적, 변증적, 조직적 신학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실용주의적 신학을 요청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적 신학은 인간의 의식, 열망, 이상적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용주의적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주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그들의 궁극적 충성을 지향해 가는 원인(cause)에 집중된다. 그런데 그 원인이란 모든 생명 그 자체의 연합(union)인 것이다.
미이드(George Herbert Mead, 1863-1931)는 전통적 초자연주의 철학이 어떻게 인간의 사변적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에 대해 심리학적·사회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자아는 순수하게 지각적인 유기체, 살아 있는 기계 이상이다. 그리고 세계 안에서 자아는 유기체와 동일한 의미로 자리잡고 있지 않다. 미이드에 따르면, 초자연주의의 전개는 자아가 항상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욕망을 갖는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투사하고, 그 목표를 기호화하는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욕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전통적 종교에서 때때로 더 나은 것을 향한 이러한 욕구는 과거의 황금기에로의 회귀의 형태를 띤다. 이 욕구는 종종 현세나 내세에 신의 왕국으로 도래할 희망된 세계에로의 전회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이상적 존재에 대한 욕구는 불멸의 관념을 주는 또 다른 세계로 자아를 투사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미이드는 전체로서의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관해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그 관계에 관해 탐구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적 태도이다. 둘째는 '종교적 경험'은 중요성을 가지며, 삶의 의미를 산출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태도이다. 셋째는 미이드 자신의 견해로, 인간의 가치 경험은 분석될 수 있으며, 우리가 사회 전체에 대해서 갖는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념적 실용주의자(conceptual pragmatist)로 알려진 루이스(Clarence I. Lewis, 1883-1964)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특수한 개념체계를 선택하면, 일단 선택된 개념체계 안에서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의 구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감각적 경험을 조직하고 해석하기에 이르는 선험적 원리와 범주들(categories)을 공급함에 있어서 정신의 역할(role of mind)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한 경험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 범주의 다원성과 개념적 개요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루이스는 실용적 선험(pragmatic a priori)을 찬성한 것이다.
로티(Richard Rorty,1931- )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1979)이 등장한 이후 실용주의가 재흥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 듀이이후 실용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심리분석, 실존주의, 구조주의, 분석철학 등의 득세로 가리워져 왔었다. 로티는 소위 퍼어스, 제임스, 듀이, 그리고 쉴러가 정초를 이루어 놓은 실용주의 철학들을 다시 새롭게 해석하여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그 철학 속에서 로티는 영미분석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사상을 자신의 신실용주의 사상속에 용해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 이전까지만해도 유럽의 사상을 수입하는데 머물러 있었지만 제임스의 종교연구의 등장이후에는 역으로 미국적인 사상이 유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로티의 종교관은 '낭만적 다신론'이라는 무신론에 가까운 독특한 주장이다. 현대 실용주의자로서 로티외에 퍼트남(Hilary Putnam,1929- )이 거론되는데 그의 사상은 흔히 "내재적 실재론"으로 운위된다. 따라서 퍼트남을 '신실용주의자'로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로티가 자신의 실용주의를 'neo-pragmatism(신실용주의)'이라 했지 자신과 동시대 혹은 그 이후의 모든 실용주의를 '신실용주의'라고 포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로티와 퍼트남은 자주 비교되는데, 가령 로티는 '진리(truth)'의 첫글자를 소문자로 쓰면서 이 개념을 유지하려고 하나 퍼트남은 진리개념까지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몰아부치는 심각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양자가 모두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이지만 로티는 실제성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제임스를 닮았고 퍼트남은 이상성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퍼어스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칸트적 혹은 비트겐슈타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상성과 현실성을 강조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이상성과 근원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은 초월성의 수용 여부에 따른 가치관의 차이이다. 로티는 이성을 자연화하고 언어를 일종의 '소음'으로 해석함으로써 가치의 세계에서 초월적인 영역을 배제한다. 따라서 유대감과 대화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되고 민주주의는 아무런 전제나 조건없이 종교처럼 신성시된다. 그러나 퍼트남이 제시하는 실재론의 여러 얼굴에는 분명히 '가치'라는 얼굴도 포함된다. 이 실재론적 가치의 세계에서 진리는 과학의 분야뿐만 아니라 윤리와 예술과 종교에서 동등하게 의미를 지닌다. 요컨대 로티는 삶의 태도로서의 예술을 보편화시키지만 퍼트남은 신앙심이 돈독한 한 사람의 종교인이 될 수 있다.
또 퍼트남 외에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 웨스트(Cornel West)가 현대 실용주의자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는 점도 실용주의 연구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요약컨대, '실용주의'는 근원 뿐만 아니라 그 정신에 있어서도 다분히 '미국적인 철학사조'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실용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들이 미국의 학자들이었을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전개된 역사적 상황도 철학을 미국식으로 수용하고 변용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실천에 대한 강조, 결과의 중시, 실험주의, 도구주의, 민주주의, 진보에 대한 신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은 '미국적인' 기풍을 물씬 풍겨주는 것들이라 불리울 만하다.


Ⅲ. 퍼어스의 프라그마티시즘과 종교

퍼어스는 실용주의를 진리론이 아니라 의미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실용주의를 진리론으로 보려는 제임스나 듀이의 견해와 판이한 관점을 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퍼어스는 제임스와 더불어 1870년대에 '형이상학 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의 활동과정에서 '실용주의'라는 용어는 물론 일종의 의미 이론과 방법론을 최초로 '창안'한 인물이다. 실용주의를 '방법론'이라고 표기한 까닭은 퍼어스에게 있어서는 실용주의가 그의 사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그의 사상의 일부(특히 '현상학' 또는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의 한 방법 또는 테크닉에 해당된 것이라고 그에 의해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임스가 '실용주의'를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자기 나름의 '진리론'은 물론 자신의 다른 사상들까지를 포함시킨 어떤 것을 그 이름으로 부르자, 퍼어스는 아예 '프라그마티시즘(pragmaticism)'이라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표기하여 구별시키고자 하였다. 퍼어스가 말한 'pragmaticism'은 과학적 탐구에 대한 규범적이고 방법론적인 기본개념으로서 제임스나 쉴러(F.C.S.Schiller, 1864∼1937)의 '인간주의적 세계관(humanistic world view)'보다는 협소하고 보다 한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반적 실용주의(popular pragmatism)가 반지성적 혁명이라고 한다면, 퍼어스의 실용주의(pragmaticism)는 정확히 지성적이다. 또 일반적 실용주의가 일반적이고 경험적인 기질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퍼어스의 실용주의는 경험론의 역사를 지향한 진일보(a step)이다. 그것은 고전적 영국전통이나 칸트의 반형이상학적 회의론, 더 나아가서 19세기의 실용주의와도 다른 것으로서 주로 의미의 개념을 경험론의 방법론에 도입한 것이다.
믿음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서 퍼어스는 다음 네 가지를 든다. 첫째, 문제나 난점들을 무시하고 정신적 평온을 이룰 수 있게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는 고집과 독단의 방법이다. 둘째, 지배자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믿음을 주입시켜 지적인 노예로 만드는 권위의 방법이다. 셋째, 논리적으로 잘 정리된 명제들을, 경험적 조사나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형이상학자들의 선험적인 방법이다. 넷째, 실천적 가치와 참된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적으로 건전하며 객관적인 믿음을 수립하는 방법이다. 이 넷 중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네 번째 방법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다음에서 설명할 이른바 '실용주의적 준칙(pragmatic maxim)'을 제창한 것이다.
퍼어스는 의심과 믿음을 반복해가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적 준칙을 적용함으로써 우리가 점차 이상적인 인식에 이르게 되고 진리에 접근해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실용주의를 매우 좁은 의미로 파악하여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라 탐구의 과정에서 관념을 명석하게 하기 위한 사고의 방법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한 사고의 방법으로서 그는 실용주의적 준칙을 천명하였는데, 그 준칙이란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을 명백히 하려면 그 개념의 지시 대상이 가져올 실천적·실제적 결과나 효과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개념이나 관념의 의미는 그 개념을 지님으로 말미암아 예상되는 실천적 결과들이다. 이와 같이 퍼어스는 그의 실용주의를 관념과 개념을 명료화하는 방법 혹은 규칙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그의 논문 "How to Make 0ur Ideas Clear(우리의 관념을 명석하게 하는 방법, 1878)"에 소개하였다.
"어떤 대상의 개념을 명석하게 파악하고자 하면 그 대상이 어떠한 결과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잘 고찰해 보라. 그렇게 하면 이들 결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그 대상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개념의 전체이다."
퍼어스가 설명한 실용주의의 준칙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실용주의는 그 자체가 형이상학설이 아니며, 결코 사물에 대한 진리를 규정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그것은 난해한 언어나 추상적 개념의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둘째로, 난해한 언어나 추상적 개념에 한정하는 것은, 환언한다면, 실용주의를 모든 개념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지적 개념(intellectual concept)이라고 부르는 것, 즉 객관적인 논증이 그 구조에 근거되어 있는 여러 개념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방법(the practical method of clarifying the meanings of ideas)에 불과하다. 그리고 셋째로, 지적 개념의 의미란 모든 상황이나 의도하는데 있어 그 개념을 받아들인 결과로서 생길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합리적 행동의 일반적 양식의 총화'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퍼어스에 의하면, 실용주의는 형이상학설이 아니라 방법론의 철학으로서 그 방법은 지적 개념에만 적용된다는 것, 그리고 지적 개념이란 우리의 행동상에 일반적 양식의 효용성을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개념을 뜻하는 것이다. 퍼어스의 '실용주의적 준칙'은 다른 실용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로티의 신실용주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티의 경우 그것을 퍼어스가 파악하였듯이 개념의 의미를 명료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의미 이론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용주의적 준칙은 이론의 선택이나 메타포의 채택 과정에서 원용되고 있다. 로티의 신실용주의에서 매우 주요한 개념 중에는 '세상사에 잘 대처하는 것'과 '사회적 실행'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들의 의미에는 실천적 효과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준칙이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퍼어스는 신성(Deity)의 문제에 관한 그의 사상을 충분히 개진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의 저술 여기저기에 그의 통찰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것들은 결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암시적이다. 예를 들면 그는 인간은 신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으며 신의 지식의 본성을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의 이성을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독선적이고 자만에 차 있어서 신의 의지를 규정하려고 할 때 자신이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고백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퍼어스는 사실상 신의 의지를 예측하려고 하는 일부 인간들의 모든 시도는 단지 미친 짓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신의 지식은 우리의 지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앎이라기보다는 의지함(willing)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신의 전능은 전통적 신학이 묘사해 왔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데 그 이유는 신의 전능은 신이 모든 경험, 모든 욕망, 모든 의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퍼어스는 "신은 아마 어떠한 의식도 갖지 않은, 탈신체화된 영혼"이라고까지 말한다.
퍼어스의 신 관념은 다소 곤란한 철학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결정신학(definite theology)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신의 근접성과 아름다움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의 실재를 주장하는 논증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말하지만 신의 존재가 귀납, 가설, 연역의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때때로 그는 신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신에게 부여되는 특성들에 관해 매우 정교해 보이는 교설들을 수용한다. 그는 신이 세계와 상호 작용하지 않으며 세계와 신의 관계는 신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신이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은 세계에 내재하지 않지만 신은 내재적이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이라고 말한다. 신에 관한 이러한 혼란스럽고 외견상 모순되는 신념들은 아마도 절충될 수 있겠지만, 주장 그 자체로서는 그것들은 상호간에, 그리고 퍼어스 철학 체계의 다른 부분과 모순되어 보인다. 아무튼 이성적 사색을 통해 신에 관한 견해를 전개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는 퍼어스의 사색은 암시적 가치가 있다.
퍼어스는 신의 가설이 실용주의적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즉 신의 관념은 인간의 삶의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일념으로 신의 관념에 대해 사색함으로써 사람들은 그 관념의 아름다움과 실제성에 의해 본성 깊숙한 곳까지 동요될 것이라는 견해다. 그는 신의 관념에 관한 이러한 사색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왔다고 생각한다. 퍼어스는 신의 관념이 너무도 분명해서 모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관념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신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 그리고 가장 명백한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의 실재성에 대한 의식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퍼어스는 신의 존재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소박한 논리를 편다. "누가 나더러 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어떠한 개념, 심지어 수학의 개념까지라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것마저도 매우 애매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믿음(beliefs)은 확고부동한 과학의 결과보다도 더 신뢰할만하다. 예컨대 우리는 우주에는 어떤 질서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퍼어스는 자신이 종교적인 것과는 다른 길을 통해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그는 과학적 대상들의 탐구를 통해 신의 위대함에 마주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신의 관념은 우주의 심성과 인간의 심성이 일종의 동족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견해는 철학적 관념론과 유사하다. 퍼어스의 철학은 대개 관념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실재론으로 분류되지만, 그의 실재론은 우주로부터 인간의 삶을 분리시키는 유형의 실재론은 아니다. 즉 거기에는 우주와 인간 사이에 내적 조화가 존재한다. 퍼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의 모든 진리는 인간의 영혼과 우주의 영혼 사이의 유사성에 기인한다. 그 유사성은 물론 불완전한 것이지만." 퍼어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과 至高者(Most High)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퍼어스는 과학적 대상들의 탐구를 통해 신의 위대함에 마주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래 그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감독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그가 종교성 특히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스베덴보리의 학설(Swedenborgianism)과의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실용주의의 종교적 측면의 기원을 밀(J.S.Mill)이나 베인(Alexander Bain)이나 칸트(I.Kant)에게서 찾으려고 하나 역시 중요한 사실은 퍼어스가 스베덴보리 관련 서적을 읽은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퍼어스는 이미 1860년대에 스베덴보리의 작품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헨리 제임스와 함께 스베덴보리적(Swedenborgian) 사상에 대해 장시간 토론한바 있다. 퍼어스는 분명히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그의 논문에 반영한 것이다. 어느 모로 보든지 퍼어스는 종교적인 실용주의자였음에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Ⅳ.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종교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를 만족스러운 경험을 주는 신념과 연관시켜 파악하였다. 하나의 신념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그 신념에 입각하여 행위할 때 경험 상에서 감지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결과(sensibly satisfactory results in experience)를 산출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어떤 신념을 견지하고 그에 입각하여 행위한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그 신념은 진리라는 뜻이다. 이 생각은 퍼어스가 주장한 실용주의적 준칙을 진리의 개념이나 의미에 곧바로 적용시킨 결과라고 보인다.
실용주의자들은, 퍼어스가 말한 것처럼 생각의 목적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고, 믿음은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모두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주의의 견해를 누구보다도 일반적으로 보편화한 철학자가 제임스이다. 제임스는 추상적인 사변보다는 행동을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실용주의의 초점을 의미분석(퍼어스에 있어서처럼)에서 가치분석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임스에게 중요한 단어 중에는 '좋다(good)'와 '가치(value)'가 있다. 제임스에 있어서 진리를 의미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하듯이 진리는 좋은 것과 가치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제임스는 "진리는 좋은 것의 한 종류이다(truth is a species of good)"라고 한다. '진'은 '가치있고(valuable)', '유용하고(useful)', '편의하고(expedient)', '상황에 잘맞고(felicitous)', '이익되는(profitable)' 등 다양한 함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임스의 진리관은 제임스의 생각의 실질적 기능에 관한 견해의 일부분이다. 그의 진리의 개념은 능률(efficiency)과 만족스러움(satisfactoriness)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 참(true)됨은 이것이 유용하기 때문이요, 이것이 유용함은 참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단순히 인식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관, 나아가서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대·발전시킨다. 참된 것은 마땅히 실천이나 경험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임스는 '현금가치(cash-value)'라고 한다. 구체적인 결과를 갖는 것만이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진리들은 구체적인 사실들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예컨대, '신', '물질', '절대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용어들도 현금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용주의는 추상적 보편자보다는 개별자를 더 강조하는 명목론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합리주의적 전통에 반대하는 반주지주의적 견지를 택하게 된다.
제임스가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진리관을 발전시켜 간 배경에는 그의 근본적 경험론과 다원적 우주론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또 제임스의 부친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독실한 종교가였기 때문에 부친을 통하여 받은 종교관은 제임스의 실용주의의 사상적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제임스는 넓게 인간을 심성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건강한 정신(healthy mindedness)'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고, 두 번째 부류는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있는 '병든 영혼(sick soul)'의 인격이다. 이 두 부류들이 갖고 있는 종교경험의 이해는 매우 근원적인 차이점을 보여 준다. 건강한 정신의 인격은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어서 삼라만상을 매우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실재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고 매우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추상적인 일이나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낙관적인 견해를 갖는다. 너무나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정신의 인격은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바로 '선'이라고 규정하고, 나아가서 '악'의 실재는 인간 삶의 보편적인 양상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하여 악의 실재 자체를 자신의 삶의 태도 속에서 제거해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런 인격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악의 실재를 증명해주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타고난 형질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인격에 반해서 정신적인 고통을 지니고 있는 '병든 영혼'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아주 대조적으로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으므로 자기자신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부정적인 실재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모든 사건들을 불행한 일로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서 근원적인 인간존재 자체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어서 매우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다. 건강한 정신의 인격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병든 영혼의 인격은 인간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를 바로 '악'의 실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격은 선의 실재는 궁극적으로 삶의 보편적인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선의 실재 그 자체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태도에서 그것의 실현을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운 삶을 관조하더라도 그의 눈에는 그것이 결코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현상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경이나 사회의 구조 자체를 변경시키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변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반드시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서 인간 삶의 근원적인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병든 영혼은 생각한다. 제임스는 병든 영혼의 특징을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고통스러운 방황, 존 번연의 근원적인 삶의 물음, 그리고 성 어거스틴의 고통스런 참회의 과정과 같은 고백들 속에서 찾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건강한 정신의 인격은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회심과 같은 거듭남의 경험은 필요치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개조해 나갈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내세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고 현세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병든 영혼의 인격은 인간을 근원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인간자신의 문제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인격은 언제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회심의 경험 즉 제 2의 탄생경험을 필요로 한다. 영적인 탄생의 경험이 없이는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건강한 정신의 인격과는 대조적으로 병든 영혼의 인격은 사회의 문제보다는 자기자신의 실존적인 문제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내세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제임스는 종교의 핵심부분을 '구원(deliverance)'의 체험으로 보았기 때문에 슬픔, 고통, 연민 그리고 죽음과 같은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교경험의 표현은 건강한 정신의 인격에서 보다는 병든 영혼의 인격에서 더욱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계 종교전통 중에서 불교전통과 그리스도교전통이 병든 영혼들에게 더욱 완전한 인격을 갖도록 매개역할을 해주는 '가장 완전한 종교(the completest religions)'라고 평한다.
종교체험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종교체험을 하게 된 동기나 종교체험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체험자가 내면적으로 느끼는 정서(emotion)는 대단히 짙을 수 있으며, 그것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체험은 그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1870년 제임스는 결정적으로 종교체험을 통해서 그 전까지의 긴 방황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어떤 종교체험이 참다운 종교체험인가를 판단하려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이 있듯이 그 체험의 결과를 보고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참다운 종교체험은 궁극적으로 체험자들을 성자성(saintliness)으로 이끌고 간다고 주장하였다. 제임스는 결실의 공동의 명칭이 곧 성자성(聖者性)이라고 한다.

"우리는 변형의 과정을 심리학적, 또는 신학적인 신비로 남겨두고, 종교적 상태의 결실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성격과 관련된 종교의 무르익은 결실을 지칭하는 공동의 이름이 곧 성자성(saintliness)이다. 성자의 성격은 영적 정서가 인격적 에너지의 습관적 중심이 되는 성격이다. 모든 종교에는 똑같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성자성 이해가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임스의 종교해석의 기준은 종교경험 그 자체나, 철학적인 체계, 신학적인 체계 또는 믿음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경험이 일어난 종교적인 체계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삶의 의미있는 열매들을 제공해 주는 "유용성" 또는 "실용성" 안에 놓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될 사항은 유용성이나 실용성의 의미는 반드시 기쁨이나 만족감과 같은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고독, 자기부정, 죄의식과 같은 고통스러운 의미들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는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철학을 '사악한 지성주의(vicious intellectualism)'라고까지 혹평을 한다. 따라서 제임스는 성자성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세계를 이기적으로 보기보다는 폭넓은 삶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 이상적인 힘의 존재에 대한 확신, 그러나 지적인 확신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지각적인 확신, 기독교의 성자성은 이 힘을 항상 하느님으로 인격화시켰다. 그러나 추상적인 도덕적 이상, 유토피아, 또는 거룩이나 정의에 대한 내적 직관 등도 삶의 진정한 주(主)로 느껴질 수 있다. 둘째로, 이상적인 힘이 우리 자신의 삶과 친근하게 관계를 맺는다는 느낌, 그리고 기꺼이 그의 통제에 자신을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셋째로, 한정적인 자아의 테두리가 용해되는 느낌, 즉 엄청난 용기와 자유의 느낌을 갖는다. 넷째로, 정서의 중심이 사랑과 조화, 그리고 긍정의 감정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적인 내면 상태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귀결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1) 금욕주의: 열정적인 자기 포기는 자기 희생으로 변한다. 자기 희생은 또한 육체의 일반적인 억제력을 폐기시킨다. 따라서 성자는 희생과 금욕 속에서 즐거움을 맛본다. (2) 영혼의 강건함: 삶이 확장된다는 느낌이 고양되면, 개인적인 동기와 억제력이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리며, 새로운 인내와 용기의 장이 열린다.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3) 정화: 정서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정화가 증대된다. 영적 알력에 대한 감수성이 고양되고, 잔인하고 성적인 요소를 정화시키라는 명령이 주어지며, 이러한 요소들과의 접촉을 피하게 된다. 성자의 삶은 영적 일관성을 심화시키며,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화의 필요성이 금욕으로 변한다. 육체의 연약함은 엄격하게 다루어진다. (4) 사랑: 정서의 중심이 이동하면,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증대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비심을 억제하는 반감(antipathy)들이 금지된다. 성자는 원수를 사랑하며, 거지를 형제처럼 생각한다.
그러면 역사상 어떤 사람들을 성자성을 지닌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사도 바울을 실패자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거대한 환경에 장엄하게 받아들여졌다. 이 세상에서 정의를 싹트게 하고 이러한 정의를 자신의 성자성에 구현시킨 성자는 그의 운명이 비참하게 끝났다 할지라도 성공한 인간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따라서 누구라도 인정하는 위대한 성자들로서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열거한다: 프랜시스(Francis), 버나드(Bernard), 루터(Luther), 로욜라(Loyola), 웨슬리(Wesley), 췌닝(Channing), 무디(Moody), 그라트리(Gratry), 브룩스(Phillip Brookse), 존스(Agnes Jonese), 할라한(Margaret Hallahan), 패티슨(Dora Pattison).
결과적으로, 종교경험에 초점을 맞추어서 제임스는 종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종교란 어느 사람이 그가 神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갖게 되는 그의 느낌들(feelings), 행위들(acts) 및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 갖게 되는 그의 체험들(experiences)이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고 있듯이, 제임스에게 있어서 종교의 의미는 인간 개개인의 종교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임스는 자신의 종교연구를 인간 개개인의 종교경험을 연구하는 '개인적인 종교(personal religion)' 연구로 명명했다. 제임스는 엄격히 말해서 종교에 대한 그의 경험적인 연구는 단지 우리들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어떤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정신'일 필요는 없다. 제임스는 유신론의 몇 가지 형태가 가장 '실재적으로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하느님을 주권자로서보다는 유한자로서, 그리고 우주를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로서보다는 불완전하고 다원론적인 실재로 간주하려 했다.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를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그러나 제임스는 단일론과 다원론 사이의 차이점은 그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전능한 신만을 가지는 단일론적 우주는 하나의 죽은 정적인 세계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이미 고정된다. 이것에 비해 한 유한한 신을 가지는 다원론적 우주는 우리의 경험적 현실에 주어져 있는 실재와 조화하는데, 곧 우리와 같은 유한한 존재들이 겪어나가는 바, 분산되어 있고 이리저리 엮어져 있으며 흘러 지나가는 실재인 것이다. 이 실재의 세계는 더 나아가 진정한 자유와 분투와 행동과 같은 것들을 위한 여지를 제공해주는데 그러한 것들은 제임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제임스의 사고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철학에 입각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주지주의와 추상적인 형이상학을 거절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변호에로 계속해 나아갔으며, 하나의 새로운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제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Ⅴ. 듀이의 도구주의와 종교

듀이는 퍼어스와 제임스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실용주의를 집대성한 인물로 실용주의적 전통을 대표하며 미국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를 제창하고, 실용주의 교육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사회비평가나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듀이는 다윈과 제임스의 영향으로 그의 초기 사상을 지배하였던 헤겔주의와 결별하고 도구주의자가 되었다. 듀이는 제임스에 의하여 시작된 철학의 파괴를 체계화하였지만 자연주의적 인도주의를 위하여 계시 종교를 포기하였다. 또 그는 교회가 아닌 민주 사회에서의 지성을 사회 개혁의 수단이라고 믿었다. 듀이의 도구주의는 여러 사회 문제에 실용주의를 적용하는 것으로 그는 20세기의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한 철학자였다.
듀이의 저술 체계를 살펴볼 때, 종교적 문제들을 뚜렷하게 다루고 있는 저술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듀이는 자서전적인 언명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매우 정직하게 이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나는 관습적으로 무척이나 '자유로운' 신교도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중에 이러한 자유로운 신념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이고도 제도적인 강령을 버리는 데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나타난 것이지 오랜 기간에 걸친 철학적 교육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철학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거나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것은 이러한 지점에서가 아니었다."
듀이의 철학 사상은 당시 미국에서의 종교적 실존주의를 주도하였던 틸리히(Paul Tillich)와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실존주의 사상과 맞물려,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회적 행동의 실천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치즘의 부상과 함께 수반된 도덕적이고도 사회적인 타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맥락들 속에서 도덕적이고도 사회적인 차원을 더없이 중요한 철학의 탐구 과제로 자리 매김하였다는 데에서 듀이와 실존 철학이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듀이의 종교사상은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에서 이탈되어 자연적이고 과학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실천행위를 기본신조로 하여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는 헤겔의 이상주의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편 주체와 객체, 사물과 정신, 신성과 인성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의 대립을 극복하면서 이원론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듀이는 '기성종교(a religion)'라는 것보다는 '종교적(religious)'이라는 의미를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뜻은 협의의 종교적 도그마나 종교의식에서 해방된 만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중심으로 한 것을 뜻한다. 그는 '종교적'이란 민주복지사회에서 마음놓고 생활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경험의 생활을 뜻하며,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이 상호 친밀하게 결합할 수 있는 참된 생활의 구현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말은 종교적 견해(religious outlook) 또는 종교적 기능(religious function)과 같은 종교적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사람이 종교적 태도를 가지게 될 때 어떠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 종교적 태도란 어떠한 각별한 종류의 경험이거나 정신 생활의 독특한 요인의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곧 심미적, 정치적, 과학적, 도덕적 경험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경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듀이가 주장하는 종교적 경험이란 모든 다른 경험에 속할 수 있는 경험의 본질을 뜻하며 그 본질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그 힘은 생활에 있어서 보다 나은, 보다 깊은 또한 지속할 수 있는 순응을 하게 하는 힘이다.
듀이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것이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상(理想)에 대한 신앙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격신의 실체적인 존재를 믿지 않고 초자연을 인정치 않고 기적이나 계시를 부정하는 듀이가 '종교'와 '종교적인' 것과를 구별하는 것은 이 이상을 문제시한 데 있다. 이상이란 각개의 사람에 대하여 전체적 전망의 위에 선 인생의 목적이다. 또한 전인간적인 감격을 가지고 추구할 수 있는 인생의 목적이다.
듀이는 그의 종교론을 통해 한결같이 목적과 이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듀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목적이나 의도는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하워드(Howard), 윌버포스(Wilberforce), 피바디(Peabody) 등 박애주의자들의 목표는 헛된 꿈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의 여러 제도를 변화시켰다. 목표나 이상은 결코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격이나 인격 가운데 그리고 행위 가운데 존재한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예술가나 지적 연구자나 부모나 친구들이나 시민의 이름을 거명함으로써 목적이란 작용하는(operative) 방법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듀이는 이러한 신앙을 종합적인 이상목적(ideal ends)에 대한 헌신에 의한 자아의 통일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 이상목적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상상의 작용이다. 이 이상목적에 대하여 우리의 의지는 욕망과 선택도 제약할 수 있는 정도의 가치있는 의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듀이는 그의 『공동 신앙』(A Common Faith)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재의 상태하에서는 인간 경험에 있어서 종교적 기능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길이란 종교에만 국한된 종교 특유의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 종교를 통해서만 그러한 진리에 도달하는 특별한 길이 부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실이나 진리를 발견해서 증명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지식과 탐구의 분야에 있어서 어떠한 발견도 종교적인 신앙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신앙을 포괄적인 이상적 목적(ideal ends)에 대한 충성을 통한 자아의 통합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부여하며, 우리의 의지는 그 이상적 목적에 대해서 우리의 욕망이나 선택을 통제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반응한다."
1930년대의 듀이는 초자연주의나 초월적 신의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는 교파적 생활을 통해서 표현되는 종교를 반대하고 전생애를 통한 종교적 관점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곧 신조(creed)의 여지보다는 경험의 여지만이 용납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듀이의 휴머니즘으로서의 종교사상이 발표된 것이 바로 『공동 신앙』(1934)이다. 그의 종교사상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인본주의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듀이는 미국의 보수주의적인 전통적 기성종교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사상을 철두철미하게 신봉했었다. 따라서 듀이는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종교사상을 강조했기 때문에 종교를 하나의 인간학적 입장에서 논술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듀이는 그의 종교론에 있어서 신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가 뜻하는 신(God)이라는 관념은 인문주의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의 저서 『공동 신앙』의 내용은 종교 대 종교적인 것(religion versus the religious), 신앙과 신앙의 대상(faith and its object), 종교적 기능의 인간적 거주(human abode of the religious function)의 세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2논문인 신앙과 신앙의 대상 중에서 신에 관한 개괄적 관념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의 관념에 대하여 듀이는 그의 사상-실험주의 혹은 개념의 도구설의 입장-을 적용한다.
듀이는 신을 인간의 최고 사회경험과 동일시했는데 이것은 꽁트와 포이에르바하의 휴머니즘에 상응하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로서 듀이는 신을 이상과 현실 사이의 능동적 관계(active relation between ideal and actual)라고 보았다. 우리 인간이 그런 이상적 목적의 실현을 향하여 우리의 전 자아(the whole self)를 가지고 노력할 때 그러한 이상의 목적은 더욱 성장을 촉진하게 되며, 우리가 이에 몰두하게 될 때 그것은 '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곤 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실제적 관계인 것이다. 그는 신이라는 명칭이 오해를 가져오기 쉬울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적인 것(the divine)이라는 관념을 대신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듀이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능동적인 관계가 되고 있는 만큼 듀이가 사용하는 '신'이라는 개념은 최상의 존재, 혹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가늠되어 왔던 신의 사용 방식으로부터 아주 떠나 있는 것이라고 가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 대한 능동적인 관계 속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이상적인 목적의 통일이라는, 이른바 듀이의 신의 개념이란 것은 칸트의 신의 개념의 정신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 하면 칸트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의, 즉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인 문제를 모든 인간 경험과 행동의 규정적 이상으로서의 신의 실천적인 의미로부터 신중하게 구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듀이에게 있어서 신은 하나의 규정적인 이상에 관한 이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포괄할 수 있는 듀이의 진술을 눈여겨 보자.

"내가 개인적으로 앞에서 말해온 것과 같이 이상과 현실을 통합하는 것을 가리켜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는 과격한 무신론은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이 소극적인 것이어서 사상에 적극적인 방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전투적인 무신론과 초자연주의가 공히 인간을 고립시키려고 하는 배타적인 편견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주의는 언제나 자연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논급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를 우주의 도덕적 중심으로 보고, 인간을 만물 전 체계의 정상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초자연주의는 고립되고 단독적인 인간 가운데서 연출되는 죄와 속죄와의 드라마를 더없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을 떠나서는 자연은 저주받은 것이거나 무시해도 좋을 것인 듯이 취급된다. 전투적인 무신론도 자연적 경건의 결여에 의해서 화를 당하고 있다. 시인이 언제나 찬가하는 인간과 자연의 유대는 간과되어 버린다. 무신론이 취한 태도는 흔히 냉담하여 적의에 가득찬 세계에 살면서 늘 반항의 독기를 발하고 있는 사람의 태도와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적 태도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우주라고 여겨지는 것 사이에 연대감을 필요로 하는데, 이 양자는 의지와 도움의 형식을 취한다. 현실과 이상과의 통합을 전달하기 위해 '신' 혹은 '신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한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 의식이나 거기에서 발하는 절망이나 반항의 기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지 모른다."
이렇게 듀이의 신관은 초자연주의의 신관도 아니요,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이탈된 것도 아니고, 인간중심·자연중심·현실중심·이상추구의 노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신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듀이가 생각하는 신 또는 신성(Divine)은 예배대상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목적으로서 선관념을 만들어 내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잘못된 삶의 모습들을 수정하여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인간은 신성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수많은 이상들 중에서 자아는 가장 소중한 이상을 궁극적인 가치로 선택하여 그것을 숭배하고 따르려고 한다. 바로 그때 그 가치는 당사자에게는 신이다. 이런 측면에서 듀이의 신이해는 틸리히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의 대상을 신으로 이해한 것과도 매우 비슷하다. 이런 측면에서 듀이의 신은 초자연주의적 실재를 예배대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전통들의 선험적인 신의 교리속에 드러나 있는 신 이해와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천부적 신앙심이라는 것은 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 최고도의 충만된 표현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가치를 나누어 가지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들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공동체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듀이의 믿음은 『공동 신앙』이라는 글 마지막에 훌륭하게 요약되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먼 과거까지 이어지는 휴머니티의 부분이고, 이 휴머니티라는 것은 자연과 상호 작용하여 온 휴머니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극도로 상찬하는 문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함께 묶여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인간 공동체의 능동적인 행위들과 수동적인 고통 덕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보다 더욱 굳건하고 안정성 있게 더욱 폭넓게 다가갈 수 있고 너그럽게 널리 나누어 가질, 이른바 가치의 유산이라는 것을 갈무리하고 나르고 좋게 고치고 넓히는 책임만이 우리의 것이다. 결국 분파, 계급 또는 인종에 묶여져서는 안되는 종교적인 믿음의 모든 요소들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은연중에 항상 인류의 공통적인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힘있게 만드는 일만이 남아 있다."
듀이는 공동신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기도 한다.

"역사적인 그리스도교가 양과 염소,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선택된 자와 일반 대중을 분리해 온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개입에 대해서는 자유방임뿐 아니라 정신적 귀족주의가 그리스도교 전통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모든 인간이 한 동포라고 하는 이념은 입에 발린 말,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앙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만 잠정적 형제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따라서 금후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양자관계를 맺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가 인정해 온 것과 같은 근본적인 분리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 인간사에 있어 절실한 도덕적·정신적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비유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모두 동포이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거친 파도의 대양을 횡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종교적 의의는 무한한 것이다."


Ⅵ. 결 론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의 사상계는 독일의 관념론이 지배하여 왔으나, 남북전쟁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영역에서 이룩한 독자적인 발전은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독자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상적인 독자성을 추구하면서 미국인들이 이루어낸 사조가 바로 실용주의다. 실용주의는 영국의 경험론과 공리주의적인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한편 19세기에 발달한 생물학과 심리학 등 과학적 성과에 영향을 받고, 미국인들의 청교도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이 발전한 산업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다분히 일상적·현세 중심적인 관점 등을 종합해 이루어진 사조이다.
실용주의자들은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관련시키려는 전형적인 미국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유럽 철학으로부터 최상의 것을 흡수하려고 하는 미국적인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실용주의는 항상 개체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유명론과 일치하고, 실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와 일치하고, 말뿐인 해결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실증주의(positivism)와 일치한다.
실용주의가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다고 하겠다. 메난드(Menand)는 이것을 네 가지로 간추렸다. : ① 문화적 다원주의 ② 미국 법률 및 법사상의 혁신 ③ 교육철학 ④ 철학. 실용주의(pragmatism)가 어떠한 이유로 19세기 말엽에 북아메리카에 있어서 힘있는 철학으로까지 성장·발달했는가를 임한영은 세 가지로 잘 정리해 주고 있다.

①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학에 대한 도전 : 퍼어스 이전 미국에 있어서 철학은 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학의 부속물과 같이 생각되었다. 또한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독일의 이상주의의 일원론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미국사람들의 현실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독일 이상주의에 도전하게 되어 미국에 현실주의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② 자연과학에로의 진출 : 19세기에 있어서 모든 부문의 학문은 집약적으로 과학적 방법에 관심을 갖고 전보다 더욱 강경히 자연과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의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하여 발명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과 같이 탐구와 발명을 기초로 삼는 인간활동이란 구체적인 확실한 성과를 거두어야 된다고 부르짖게 되었다. 타당하고 확실한 것이란 정밀히 측정되고 엄격히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실용주의사상을 북돋아 주었다.
③ 북아메리카 사람들의 개척적 기질 : 북아메리카 사람들의 특징은 깊게 사색하는 것보다 눈부시게 활동하는 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소질을 가진 미국사람들에게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실정에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역동적 활동과 정복이 필요하였으며, 대담한 실험주의와 개척자정신이 광활한 미대륙을 정복하는 데 필요하였다. 대륙동해안에 상륙하여 서부로 서부로 향하여 황금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그들의 진취정신은 오늘날 미국인의 사상을 규정짓고 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정복과 개척정신이 결정적으로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종교와 관련하여 제 1세대의 실용주의 철학자 세 사람(퍼어스, 제임스, 듀이)의 업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퍼어스는 어떤 단순한 학문적인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유일한 신학은 사랑의 복음을 발전시킨 신학이다. 그는 진화적인 사랑의 교리가 위대한 종교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이를테면 그의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개성을 융합하는 모든 개인으로부터 발전해 온 것이다. 사랑의 교리는 세상에 관한 단순한 이론으로 생각되지 않고 행위를 위한 규칙인 열정적인 믿음으로 받들어진다.
제임스 철학의 특징은, 정서적 선호, 영적 욕구와 같은 비합리적 요인들이 개인의 신념의 기초로서 기능한다는 주장이다. 제임스는 그의 비합리적 신념변호를 신앙의 변호(defense of faith) 혹은 열정적 기초에 입각한 신앙의 정당화라고 부른다. 제임스에게 '실용주의'는 의미의 명료성을 획득하는 비판적인 격률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해소하는 방편이었다.
듀이 종교이론의 핵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도화된 종교전통의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종교를 살피지 않고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의 의미를 명사적인 측면과 형용사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으므로 방법론적으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듀이식으로 종교를 바라볼 경우에 종교는 일상적인 삶과는 무관한 초자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일상적인 삶 그 자체이다.
듀이는 퍼어스와 제임스의 전통적이고 체험적인 종교신앙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지는 않으나 종교의 실용성을 신봉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종교를 삶의 꽃으로까지 예찬했다. "시, 예술, 종교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비강제적인 삶의 꽃들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자들은 대개 신, 사후의 세계, 부활 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록 학문이 실험적으로 그 자신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것의 지성적이고 공적인 부적절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종교의 여지를 배척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고전적 실용주의의 종교적 성향은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향하되, 독일 계통의 경건주의적 성질보다는 영국과 미국적인 경험적 성질을 띤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며, 두 극단적인 화이트헤드, 베르그송, 크로체 등 형이상학적인 경향과 무어(G. E. Moore),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치밀한 논리학적 경향을 중재하는 위상을 점유하고서 능동적으로 기능하는 현대 철학 사조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겠다. 따라서 미국 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관념론적·초자연적 원리와 과학적·세속적·자연적 원리들이 상호교차되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실용주의 종교관의 변화과정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은 소위 '성스러움'에서 '속스러움'으로 점차 전이하는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이 곧 초자연주의로부터 자연주의에로의 변화인 것이다. 로티(Rorty)의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에 이르면 또 다른 종교관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추후 별도로 고찰하여 정리할 계획이다.


참 고 문 헌

김동식,『로티의 신실용주의』,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4.
김동식 편,『로티와 철학과 과학』,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7.
김동식 편,『로티와 사회와 문화』, 철학과 현실사, 서울 1997.
김재영,「존 듀이의 종교경험이론」,『대동철학』, 대동철학회 창간호, 1998. pp. 147-165.
김재영,「종교경험의 다양성 속에 나타나 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이론」,『범한철학』, 범한철학회 제9집, 1994.
임한영,『듀이 철학』, 법문사, 서울 1987.
임한영,『듀우이 교육사상의 연구』, 민중서관, 서울 1974.
정해창 편,『현대 영미 철학』, 대한 교과서 주식회사, 서울 1987.
조성술,「존 듀이 철학에 있어서의 경험의 구조에 관한 연구」, 미간행 철학박사 학위 논문,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전주 1985.
철학문화연구소 편,『철학과 현실』, 철학문화연구소 제31집, 서울 1996.

Anderson, Victor, Pragmatic Theolog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Albany 1998.
Apel, Karl-Otto, Charles S. Peirce : From Pragmatism to Pragmaticism,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Amherst 1981.
Buchler, Justus, Philosophical Writings of Peirce, Dover Publications, New York 1995.
Buswell, J. Oliver, The Philosophies of F. R. Tennant and John Dewey, Philosophical Library, New York 1950.
Cobb,John B., Griffin, David Ray, Process Theology : An Introductory Exposition, The Westminster Press, Philadelphia 1976.
Dewey, John, Theory of Valua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Dewey, John, A Common Faith,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1934.
Dewey, John, Reconstruction in Philosophy, The New American Library, New York 1954.
Hick, John, Philosophy of Religion, Prentice-Hall, Englewood Cliffs 1983.
James, William, Pragmatism, The World Publishing Company, Cleveland and New York 1968.
James, William,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61.
James, William, The Will to Believe, Human Immortality, Dover Publications, New York 1956.
Marty, Martin E., Modern American Religion, vol.2.,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Menand, Louis, ed., Pragmatism : A Reader, A Division of Random House, New York 1997.
Miller. Timothy, ed., America's Alternative Religion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
Putnam, Hilary, The Many Faces of Realism, Open Court, Lasalle, Ill. 1987.
Putnam, Ruth Anna,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William James, Cambridge University Press,1997.
Reid, Daniel G. ed., Dictionary of Christianity in America, Intervasity Press, Downers Grove, Ill. 1990.
Rorty, Richard, Consequences of Pragmatism,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Shusterman, Richard, Practicing Philosophy : Pragmatism and the Philosophical Life, Routledge, New York and London 1997.
Sleeper, R. W., The Necessity of Pragmatism : John Dewey's Conception of Philosophy, Yale University Press, 1986.
Suckiel, Ellen Kappy, The Pragmatic Philosophy of William James,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Notre Dame 1982.

Aune, Bruce A., Rationalism, Empiricism, and Pragmatism, Random House, New York 1970, 서상복 역,『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용주의』, 서광사, 서울 1997.
Bernstein, Richard J., John Dewey. 정순복 역,『존 듀이 철학 입문』, 예전사, 서울 1995.
Eames, S. Morris, Pragmatic Naturalism: An Introduction. 에임스,『실용주의 철학 입문』, 조성술·노양진 역, 전남대학교 철학과(미간행), 광주 1998.
James, William,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김성민·정지련 역,『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 대한 기독교서회, 서울 1997.
Macquarrie, John, The Frontiers of Philosophy and Theology, 1900-1980. 한숭홍 역,『20세기 종교사상』, 나눔사, 서울 1989.
Putnam, Hilary, Reason, Truth and History. 김효명 역,『이성·진리·역사』, 민음사, 서울 1995.
Rorty, Richard, Consequences of Pragmatism 김동식 역,『실용주의의 결과』, 민음사, 서울 1996.
Rorty, Richard,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박지수 역,『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서울 1998.
Rorty, Richard,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김동식·이유선 역,『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민음사, 서울 1996.
Solberg, Winton U., A History of American Thought and Culture, 조지형 역,『미국인의 사상과 문화』,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서울 1996.
White, Morton, The Age of Analysis : 20th Century Philosophers, The New American Library, New York 1955. 신일철 역,『언어와 분석의 시대 : 20세기의 철학자들』, 서광사, 서울 1987.
출처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