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스크랩]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의 가치 2

하나님아들 2014. 3. 5. 18:54

4. 그 교리는 사람으로 매우 겸비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론은 인간의 교만을 때려 부수는 큰 망치이다. 여기에서 이 교리는 인간론과 심하게 대조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정신은 주로 육에 있어서 교만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사랑의 성취, 그의 발전과 진보, 그의 위대성과 자족정신 등등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숭배하는 신전(神殿)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진리는 그 모든 결론과 함께 사람의 교만의 근거를 제거하여 겸손한 정신을 가르쳐 준다. 그 교리는 구원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 기원과 그 성취와 그 완성이 다 주님에게 속한다).

그 교리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주시는 동시에 적용도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완성하시며, 또 우리를 회개시키며 끝까지 보존하시고 유지하신다.

그 교리에 의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주시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활동(회개하기 이전의)은 선악이 섞여 있는 것으로 구원의 가치는 조금도 인정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는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라고 말한다.

이상의 모든 진리는 사람이 자기가 받은 구속의 대가를 받기를 원하지만 교만과 자족의 근거가 될 것을 만들어 놓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겸손하게 한다.

그러나 이 교리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주권에 비추어서 우리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시편 기자의 말과 같이 “나의 모든 근원이 당신에게 있도다”(시 87:7)라고 외칠 것이다. 우리가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고 실제상 그의 주관을 벗어나려고 하니 우리는 율법에 의하여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불꽃같은 진노에서 구원해내실 아무런 책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신의 외아들을 주셨다면, 그러한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표현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라고 말하게 할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라는 말을 우리 각자가 얼마나 쉽게 인식할 것인지 모른다.

5. 그 교리는 절대로 안심케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그의 뜻을 물리치거나 또는 그의 작정대로 되지 못하게 할 수 없다. 그런 말은 죄인들을 경고하기에 좋게 되어 있으나 성도들에게는 도리어 칭찬을 받게 한다. 한 말을 더 첨가한다면 내 하나님은 그 능력이 무한하시니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겁낼 것이 없다. 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내가 두려울 때에 당신을 의지할 것이다”. 내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

어느 시대에나 계속하여 이것이 성도들을 확신케 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에서 떠날 때에 보여준 확신이 아닌가? 모세는 “여수룬(이스라엘)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내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아내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6-27)라고 말했다. 이 안도감을 성령이 시편기자를 감동시켜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천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 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대신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룩한다)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시 91편)라고 시를 쓰게 하지 않았는가?

아 보배롭도다 이 진리여! 나는 불쌍하고 무능하고 무지한 [양]일지라도 오히려 그리스도가 그 손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거기서 왜 나는 평안 한가 무엇이든지 거기에서 나를 빼앗을 수 없음은 천지에 있는 모든 권세를 지니 하나님의 아들이 그 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심이다.

그리고 내게는 힘이 조금도 없다. 곧 온 세상과 모든 육체와 마귀가 나를 대항하여 진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님에게 나 전체를 맡겨서 보호해 주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사도와 함께 나도 “나의 의뢰한 분을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내가 그를 의지하는 것을 그 날까지 그가 지키실 것을 어떻게 내가 아는가? 내가 그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만방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6. 그 교리는 슬퍼할 때에 위로를 준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위안으로 충만하고 신자에게 큰 화평을 안겨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흔들릴 수 없는 기초며 천지보다 더 견고하다. 전 우주에서 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아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두움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하나님의 강한 손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아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른다. 참새 한 마리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아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바로 우리가 당하는 환란이 우연히 또는 마귀에게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명령하시므로 임하는 것을 아는 것은 마치 바울이 “누구든지 이 여러 환란 가운데 요동치 않게 하려함은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기 때문이다”(살전 3:3)라고 한 말과 같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고 지혜와 착함도 무한하시다. 여기에서도 이 진리는 보배롭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한 것뿐이요 그가 하시고자 하면 변치 않고 물리칠 수도 없다. 그는 너무 지혜가 많아서 실수하시지 않고, 그는 너무 사랑이 깊어서 자기 자녀가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 않는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지혜가 완전하시고 선행도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달렸고 그의 영원한 목적에 의하여 당신의 뜻대로 되게 하심을 확신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질문할 수 있으랴”(욥 9:12). 오히려 우리의 가족을 빼앗아 가시는 이는 마귀가 아니라 그분이심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 …….

우리 불쌍하고 가냘픈 마음에 우리가 살아 날 수가 그에게 있고(욥 7:1, 14:5) 질병과 사망은 그의 심부름꾼이며 항상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또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요 빼앗으시는 이도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시니 이 얼마나 안심할 만한가!

7. 그 교리는 유순히 복종하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순종하는 것은 평화와 행복의 위대한 비결 중 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이 길들기 전에는 즉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도록 맡기기 전에는 진정으로 기뻐서 복종할 수 없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권면을 받았다.

앞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제목으로 설명했는데 거기에서 최고의 모본에 첨부하여 엘리와 욥의 예를 들었다. 이것을 여기서 보충하기로 한다. 레 10:3에 “아론이 잠잠하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때의 형편을 관찰해 보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서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아론이 잠잠하니”라고 했다.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죽었다. 그들은 암도 그때에 술에 취했던 듯하다. 이 재앙이 갑자기 아론에게 임했으되 그에 대비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잠잠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나 합당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대한 보배로운 실례이다.

다윗의 입에서 나온 말을 생각해 보자.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삼하 15:25-26)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말하는 사람을 도전하는 경우는 사람의 마음을 매우 괴롭히는 것이다. 다윗은 슬픔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의 친 아들이 그의 왕위를 빼앗고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그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다시 보게 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매우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의 뜻이 가장 선한 것으로 충분히 믿고 자기의 왕위와 생명까지 잃어도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으로 만족하여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로 행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이 이상 실례를 더 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 실례의 교훈으로 충분하다. 구약 시대의 그림자 가운데에서도 다윗이 주님이 당신의 뜻대로 하시는데 만족했다면, 하나님의 심정이 십자가에 충분히 계시된 이 시대에야 우리가 얼마나 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만족해야 될 것인가?

8. 그 교리는 찬송을 부르게 한다.

주위에 둘러 쌓인 억 천만인들 보다 본래 다른 것이 없는데 왜 나는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아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는가?

나도 한 때에는 이방인이요 반역자였었는데 그토록 놀라운 사랑으로 나를 골라 내셨을까? 그런 은혜와 사랑은 판단할 수 없도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그에 대한 감사를 찬송과 경배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과거에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그가 나를 대하심에 대하여 감사의 생각이 마음에 넘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는 말씀의 비중은 어떠한가? “구세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을 모든 형편의 주장자로서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이라는 말에 주의하라. 바울이 이 말씀을 쓸 때에 로마 정부의 죄수이었든 사실을 되새겨 보자. 환란과 고통의 먼 길이 그의 뒤를 따랐다. 육지와 바다의 위험과 기갈과 욕 먹음과 돌로 맞음 등 이 모든 것을 그는 다 맛보았다. 그는 교인들과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당했으니 바로 그의 편에 서야 했을 자들이 그를 버렸다. 그래도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 그에게 있었던 평화와 기쁨의 비결이 무엇이었던가?

이와 같은 형편에 처해있던 사도가 이렇게 쓰지 않았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나 그와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게 되는지를 아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모든 것은 최고의 주권에 의하여 주관함을 받아서 진행되고 그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없다.

그런고로 모든 것을 그렇게 명령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최후에 가서는 잘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엡 5:20). 모든 것에 감사하라. 그 이유는 우리의 낙심은 다만 그가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구름은 은빛으로 가리워졌을 뿐 아니라 빛을 들어나게 하는 데에만 사용되는 어두움을 항상 덮히게 해 준다.
“우리 위에 검은 구름 뒤덮을 찌라도 주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지키리”( William Cowper)

9. 그 교리는 선이 악을 최후에는 승리할 것을 보장한다.

일찍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때부터 세상에서 선과 악의 충돌은 성도들에게 괴로운 문제였었다. 어느 시대에나 의인들은 핍박과 증오를 받아온 반면에 불의한 자들은 태연스럽게 하나님을 멸시해 왔었다. 대체로 주님의 백성은 이 세상 물질에는 가난한데 악인들은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이 마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다. 신자들이 압제를 당하는 것과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살펴볼 때에 전자는 그 수가 적고 후자는 어찌나 그 수가 많은지 …….

옳은 자들이 위를 쳐다 볼 때에는 그와 반대로 신앙인에게는 보좌가 분명히 보인다. 이 보좌는 세상 풍파에 의하여 파손되지 않으며 이 보좌는 견고하고 안전하며 그 위에 전능자이며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1:11)분이 앉아 계신다. 하나님이 그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확신한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고 그는 전능하시니 그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욥 23:13)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손이 육안에는 보이지 않으나 신앙에는 실제로 나타난다. 그 신앙은 그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데에 있다. 그런고로 그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 설명하는 말씀은 게블란인(Gaebelein) 형제의 말이다.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모든 것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맺은 약속은 그들을 위하여 성취되며 그들을 영광의 자리로 옮기는 일에 실패가 없을 것이다. 그가 분명히 와서 저희를 그 앞으로 모을 것이다. 여러 예언자들에 의하여 각국 민족에게 장엄하게 한 말씀도 역시 어김없이 이루어 질 것이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찌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찌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찌어다 대저 여호와께서 만국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케 하셨다”(사 34:1-2).

또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다”(사 2:11)고 한 그날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타나서 그의 영광이 하늘을 뒤덮고 그의 발이 이 땅을 디디고 설 그 날은 확실히 오고야 말 것이다. 그의 나라도 망하지 않고 말세와 세상 끝과 관련하여 약속된 모든 사건들도 그대로 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어둡고 괴로운 세대에 그는 변동될 수 없는 보좌에 계셔서 그가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다 이루어질 것을 기억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른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사 34:16)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믿고 고대하는 가운데서 그의 말씀과 뜻이 성취되고 평화의 왕이 오시므로 결국 의와 화평의 세상이 오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약속한 것이 다 성취되는 최고로 복된 순간을 고대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를 의지하고 그와 행동하며 또 그가 우리를 끝까지 보존하기에 실패하시지 않을 것을 매일 생생하게 발견할 것이다.

10. 그 교리는 마음의 휴식처를 준다.

여기에서 말할 것의 대부분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며 모든 민족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이미 작정하셨고 또 그대로 이루시는 분은 능력이 무한하실 뿐 아니라 지혜와 선에도 역시 한정이 없다. 모든 피조물의 주되신 분이 육신으로 나타나신(딤전 3:16) 분이시다. 여기에 사람의 문필로 바로 묘사할 수 없는 제목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으뜸 되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으신 분이 범죄 한 죄인의 죄 짐을 지시기 위하여 사랑하므로 겸손히 낮아지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당신의 피로(행 20:28) 값 주고 사셨다. 그의 나라가 설립된 것은 왕이 친히 은혜롭게 스스로 낮아지심에 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위에서 고통을 당하신 그 분이 우리 운명의 주님(전에는 그러했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주님이 되셨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최고의 주권자 앞에 경배하는 것은 비겁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존경하고 경배하는 마음에서 크게 외쳐 이르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함과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 배격해야 될 악한 도전이 있으니 곧 이 교리는 무섭게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또 그의 백성에게 설명하기에 위험한 거서이라는 것이다. 이 교리는 성도들에게 위험할 때에 안도감을 주고 슬퍼할 때에 위로를 주고, 핍박 중에 참음을 주고, 저희에게서 항상 찬송을 부르게 하는 이 교리가 험하고 위험한 것일 수 있는가? 우리로 확실히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며 우리 마음에 정녕 안식처를 주고 또 그것은 곧 그 주권자 자신의 모든 온전하신 것들인 이 교리가 무섭고 위험한 것일 수 있는가?

무섭고 위험한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론은 영광스럽고 신앙심을 북돋운다. 그것을 적당히 표현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세와 함께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라고 말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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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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