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는 기도
살전 5:16-18 "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Be joyful always ; pray continually ;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 이 3 구절의 말씀은 동일한 영적 실체의 외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영성원 이 경섭 목사님의 "쉬지 않는 기도"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적 노정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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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는 기도
☉ 여러 가지 기도 방법 중 은밀하고 지속적인 기도인 쉬지 않는 기도를 중심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개신교가 공동 기도, 집중 기도는 왕성한 반면, 개인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기도가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관상이니 명상이니 하는 여타의 기도 방법에 비해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있고, 일상의 경건을 주장하는 종교 개혁주의 영성 원리와도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부패성이 쉬지 않는 기도를 요구 합니다
우리 마음은 기도를 잠시 쉬어도 제대로 굴러갈 만큼 그렇게 낙관적이질 못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한 기도가 중단되는 순간부터 부패 일로로 치닫습니다.
현재의 마음 상태가 순수하다고 해서 앞으로 계속 그렇게 유지될 보장은 없습니다. J.Caryl 가 「욥7:18」의 주석에서 지적한대로, 중환자의 혈압이 수시로 변하듯이, 영적 중환자인 우리 마음은 너무 가변적이어서 겸손했다간 교만하고, 온유하다가 금새 광포해지므로 분초 마다 시험해야 합니다. 또한 혀가 상징해 주는 쉬지 아니하는 악으로서의(약3:8) 인간 부패성은 쉼 없는 기도의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부패한 마음이 사탄의 도구와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기도의 필요성이 더욱 요구됩니다. 사탄은 다윗의 마음을 격동하여 인구를 계수하는 죄를 범하도록 만들었으며(대상21:1), 베드로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과 정반대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처럼 가장 뛰어난 영적인 사람들도 때로 나약함을 보일 때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에 매진케 합니다.
2. 시대적인 환경이 쉬지 않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지속적인 기도 없인 믿음을 지켜나갈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쫒기고 내몰리는 생활 패턴, 경쟁 일변도의 사회 구조 등은 사람들을 광증(狂症)으로 내몹니다. 바다 속으로 치달은 거라사 땅의 귀신들린 돼지 떼 처럼 모두가 뭔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치달으면서, 그 대열에서 이탈되면 뭔가 불안하고, 낙오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도무지 이런 광증(狂症)의 시대에 비상한 기도 없인 믿음도 평안도 지켜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 이 시대에는 쉬지 않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흩어진 마음들과 떠들썩한 마음으로 끝없이 연속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숨이 차게 된다.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해지며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아무런 까닭 없이 마음 속에서 생각이 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한 가지 오랫동안 집중이 잘 안된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실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들이다"(리챠드 포스트).
- 칼빈은 「살전5:17」을 주석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할 이유를 우리를 둘러싼 변화무쌍한 환경 탓으로 돌렸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어지럽히고 기쁨을 앗아가는 사건들이 너무도 많이 발생하므로, 매일 아니 매순간 그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칼빈이 동시대의 영적 환경에 대한 자각이 그러했다면, 혼돈의 극치를 달리는 21세기의 영적 상황은 얼마나 더하겠으며, 따라서 얼마나 비상한 기도가 요구되겠습니까?
3. 쉬지 않는 기도는 성도의 본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러시아의 '무명의 순례자'가 그랬던 것처럼, 과연 '쉬지 않는 기도는 가능한가?' 라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실 쉬지 않는 기도는 성도에게 본성적이며, 자연스럽습니다. 중생한 성도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롬8:15)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 '영적 훈련'의 저자 도날드 휘트니가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뗄 수 없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의 한 표현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은.... 다만 종종 방해를 받을 뿐이다' 고 한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 호흡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우며 오히려 호흡이 중단될 때 고통과 불편을 느끼듯이, 기도 없음이 수고요 고통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쉬지 않는 기도는 성도에게 새의 날개 짓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가 새에게 부담이 되지 않듯이, 일관된 기도도 우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쉬지 않는 기도는 성령론 차원에서 성도에게 당연히 본성적입니다. 아이작은 쉬지 않는 기도의 본능성을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서 찾았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이 거하시게 되면 그 사람은 기도를 멈출 수 없다. 성령이 그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잠을 자든, 깨어 있든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기도하게 된다.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기도의 향기가 그의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피어오르게 된다".
- 그리고 기도가 무의식의 수면 상태에서도 실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쉬지 않는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아5:2」의 "마음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으니" 라는 표현은 무의식 속에서의 기도를 암시합니다.
- Jhon R 라이스는 그의 '기도' 라는 책에서, 자신이 말위에서 졸면서 수백 미터를 떨어지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경험과, 엄마들이 잠자면서도 자기 아기를 의식할 수 있음은 수면 상태에서도 기도가 가능하다는 예라고 말하면서, 쉬지않는 기도의 당위성을 받아 들였습니다.
4. 쉬지 않는 기도는 타성적 신앙을 저항하게 합니다.
오늘 신앙 문제 중 하나는 매너리즘과 무의식화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는 오랜 신앙 습관을 통해 형성된 매너리즘과 신앙의 무의식화를 저항하는 일종의 '깨어있음'(The awakening)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는 순간순간을 영적인 깨어남으로 이어가는 삶이며, 습관이나 매너리즘에 의해 신앙이 저절로 굴러가도록 허용하지 않게 합니다.
- 이런 점에서 기독교영성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는 내리막길 보다는 매순간 힘겨운 페달링을 해야 전진할 수 있는 오르막길을 더 좋아합니다. 윌리암 제임스가 '종교는 무딘 습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열정으로 존재 한다'(리챠드 포스트) 고 한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 물론 무의식화는 교육학에 있어 중요한 학습 원리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행동 변화는 끊임없는 반복과 학습으로 그 행동을 무의식 단계 까지 올려놓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무의식화는 사람을 타성에 젖은 습관의 노예와 방심에 이르게 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예컨대 운전이 초보일 때는 운전 조작이나, 방향 감각, 돌발 상황 대처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을 겪으나, 오랜 숙달을 통해 운전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할 만큼 익숙해지는데, 정작 조심해야 할 때가 이 때 입니다. 많은 경우 대형 사고는 운전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숙련자에게서 발생한다는 것이 통례입니다.
- 마찬가지로 오랜 신앙생활로 몸에 밴 영적 매너리즘은 우리의 영적 감각을 마비시켜 생각 없이 행동하게 하며, 영육의 투쟁을 종식시켜, 본능을 쫒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경건의 최대의 적은 습관화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경건훈련의 목적은 다만 경건을 몸에 배게 하는 습관화 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일깨우는 각성입니다.
예컨대 새벽기도는 예수님처럼 그것이 몸에 배도록 습관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습관이 의미 없이 반복되는 타성화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저절로 경건을 유지할 만큼 몸에 익히는 것이 결코 영성훈련의 목표가 아닙니다.
- 기독교 영성의 이상은 어느 순간에 도달해버리는 해탈이나, 달관의 경지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웨슬리안 완전주의와도 견해를 달리합니다. 우리는 항상 습관과 매너리즘의 경계선상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5. 노동과의 화해자로서의 쉬지 않는 기도
우리는 일과 기도를 항상 대립 관계로 놓으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일 때문으로 핑계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하느라 너무 바빠 기도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토로하기 까지 합니다. 이런 역설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한' 노동의 개념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더불은' 노동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 목적지향적인 노동관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만 하다면, 그 일에 몰입되어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 까지 정당화 해 주었습니다. 이는 특히 교회 사역자들에게서 흔한 일로, 오늘날 교역자들의 영성 고갈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 그리고 이런 목적지향적인 노동관은, 일하면서도 하나님을 지향할 수 있었던 과거의 단순 노동에 비해, 과도한 정신 집중을 요하는 21세기 정밀 업무 환경에서 더 잘 하나님을 망각할 만한 빌미를 주었습니다. 오늘날 병행할 수 없는 대립 관계로 굳어진 '기도와 일'을 쉬지 않는 기도가 노동의 조력자가 되어 기도하면서 일하며,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즐거운 노동의 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6. 쉬지 않는 기도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 방편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노동을 하던, 사람을 만나던, 설거지를 하던 쉬지않는 기도를 통해 그곳을 하나님의 임재장소로 만듭니다.
- 달라스 윌라드는 쉬지 않는 기도를 영성 생활을 강화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 방편이라 말합니다.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할 수 있다. 이것은 엣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 속에서 입증된 경험적인 사실이다.... 습관은 은혜로운 상호작용 안에서 확고하게 되고, 우리의 전 생애는 하나님이 임재로 가득찰 것이다"
- 이러한 기도 중심의 생활은 일상의 현장을 수도원화 합니다. 칼빈과 개혁자들이 부르짖은 개신교 이상(理想)으로서 "각각의 기독교 가정이 세상 속에서 작은 수도원이 되는 것"의 의미를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해 비로소 구현하게 됩니다.
- 만일 누가 일상적으로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따로 수도원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수도원적 이상(理想)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이는 수도원 생활의 절정이 쉬지않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영성도 바로 이것입니다.
- 종교개혁 정신의 백미(白眉)인 성속(聖俗)의 구분 폐지는 쉬지 않는 기도를 통한 일상의 하나님 임재로 구현되는데 오늘 개신교는 쉬지 않는 기도 없이 다만 성속의 구분 폐지만을 외치다가 세속화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7. 공감의 원천으로서의 쉬지 않는 기도
혹자는 쉬지 않는 기도를 문자대로 실천하면, 반사회적인 신비주의자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특히 삶과 기도의 전인적인 균형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앙인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 그러한 의구심이 '쉬지 않는 기도'를 문자적으로 과감하게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쉬지 않는 기도자는 오히려 더 세상에 대해 공감적이고 체휼적인 사람이 됩니다.
- " 쉬지 않는 기도가 숙련되어 잠재의식화 단계에 진입할 때 우리 행동의 변화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교통이 혼잡해도 짜증이 덜 나고, 집안이나 회사의 사소한 문제 거리들도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더 민감해진다"(리차드 포스트).
- 쉬지 않는 기도가 사람을 하나님께만 몰입시켜 세상사에 무관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비참함과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에 더욱 민감하게 만듭니다. 이는 쉬지 않는 기도가 환경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깨어 지킬 능력을 갖게 하여, 현실에 분별 있는 대응을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 기도의 사회, 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달라스 윌라드의 긍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도를 사회적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최상의 기도를 통해 인격이 변화되는 것 이상으로 사회적 상황에 부합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다른 삶의 영역 속으로 넘쳐흐르게 된다".
- 그는 계속하여 기도에 잠긴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담대하게 대적하는지를 묘사한 하드맨의 말을 통해 기도자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선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동조자 반대자를 막론하고 모두 사랑하게 되며, 기도가 그에게 부여해 주는 이상을 실현하고, 동조하려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강도 높은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고 합일의 기쁨으로 가득 찰 때, 그는 자신이 경험한 생명력 있는 합일의 실현을 위래 최선을 다해 분투할 것이다".
- 그 외에도 쉬지 않는 기도의 치유적 측면 역시 세상과의 공감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기도에 몰입하는 자들은 세상을 등진 채 어두운 골방 만 찾아드는 건강치 못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정을 할지 모르나, 근자에 미국 보스톤 대학에서 행한 쉬지 않는 기도의 응용인 '예수 기도'(동방정교회)의 임상 실험은 "하나님과의 관계 호전뿐 만 아니라, 우울증, 불안, 적개심, 열등감을 감소시켜 주었으며, 이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은 다만 하나님께 대한 것만 이 아니었다" 는 긍정적인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 물론 개혁주의 입장에선 주문(呪文)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예수 기도'의 형태에 대해선 부정적이지만, 쉬지 않는 기도 자체가 갖는 신학적, 사회심리학적인 공감은 열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8. 안식으로서의 쉬지 않는 기도
쉬지 않는 기도는 안식(安息)의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더 이상 '일'이 아니라 '안식'이며, 오히려 기도 없음이 수고요 고통입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로 옥고를 치룬 안이숙 선생은 그의 노랫말에서 '기도는 우리의 안식' 이라고 노래했습니다.
- 우리는 흔히 휴식을 위한답시고 한적한 자연을 찾고, 그곳에서 육체도 마음도 기도도 쉬어버리므로, 오히려 더 영적인 탈진을 경험하고 옵니다. 이는 진정한 휴식이란 쉬지않는 기도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 한편 일속에서의 안식 역시 쉼 없는 기도로 옵니다. 일반적으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힘 드는 일이지만, 일과 함께 하는 기도는 오히려 수고를 덜어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앙망이 탈진의 원인인 일의 몰입을 방지해 주고, 일과 의식 사이에 거룩한 기운(氣運)을 내통시켜 영적 생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 물론 일에 만 몰입하면 더 많은 작업량을 소화할 수도 있으나 정신과 육체의 과도한 몰입에 수반된 긴장, 조급함, 스트레스 등으로 육체와 정신은 쉬 탈진되고 결국은 일의 능률도 저하됩니다.
- 오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모두 기독교에 가깝다는 인식은 할 수 있는 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열매를 내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는 실용주의 정신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실용주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속도를 중시했고, 일에 대한 몰입과 서두름을 정당화 했습니다.
- 따라서 보다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기도할 때는 기도하고 일할 때는 일만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급기야 일과 기도를 분리해버렸고, 그 결과 일에서 안식이 제하여지면서 일이란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 피에르 상스가 지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출판된 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서구 효율주의의 근간이 된 '속도'의 허상과 부작용을 공감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빠른 속도로 많은 일을 성취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못하며, 오히려 심성 파괴, 사고, 공해 등을 더욱 유발시켜 인간 파멸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 게다가 매끼 때 꺼리 장만을 위해 몇 시간씩 밀림을 누벼야 하는 비효율적인 아프리카인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더 높았다는 연구 결과는 속도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효율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심어 주었습니다. 이는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라는(전9:11) 성경 진리도 재확인시켜 주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쉬지 않는 기도는 현대인을(의) 집착과 조급함에서 건져 주는 느리게 사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 줄 수 있는 지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 ' 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의 저자 폴 스티븐스가 말한 대로, 쉬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할 수 있는" 이상적인 노동 영성의 구현 방법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 비로소 노동은 고통이 아닌,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축복과 즐거움(전3:13) 일 수 있습니다.
9. 쉬지 않는 기도는 일상의 잡역을 거룩한 성업(聖業)으로 만든다.
폴 스티븐스의 하나님을 '위한' 노동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노동의 개념은 모든 노동이 성업일 수 있는 중요 원리를 시사합니다. 전자는 루터의 '직업의 소명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일의 형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모든 직업을 성직으로 보는 것입니다.
- 후자는 어거스틴이 주장한 경건의 방편으로서의 노동,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노동 개념입니다. 기도와 함께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급 노동은 그 호칭에 걸맞는 질 좋은 생산품을 낳습니다. 기도로 만드는 수도원이나 신앙공동체의 제품이 불량품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미국 렉싱톤의 「기쁨의 언덕」으로 불리운 세이크 공동체에서 만든 가구가 정평이 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 이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므로 집중력이 떨어져 상품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일반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기도와 일이 동시에 가능할 뿐 만 아니라, 그것만이 노동의 질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임을 증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의 글은 그러한 가능성을 확증해 줍니다.
- "정신적인 활동을 동시에 두 개의 차원 이상으로 영위하는 방법이 있다. 한 가지 차원으로는 외부 사건의 모든 요구 조건을 생각하고 토의하고... 심층적으로는 그 이면에서 보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숨결을 부드럽게 수용하는 것이다(리챠드 포스터)". "일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세탁도, 글을 쓰는 일도, 바느질, 시중드는 일도, 요리, 청소, 그 모두가 한층 더 효과가 있습니다."(엘멘).
- 이렇게 볼 때, 기도와 더불어 하는 일 만이 비로소 일의 궁극적인 목표, 최상의 노동 가치에 도달하여, 명실 공히 모든 일을 주께 하듯,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대하듯 하게 되는 성경적 노동관에 도달하게 됩니다(골3:23).
10. 쉬지 않는 기도는 기쁨입니다.
관계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를 통해서만 본연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것을 대치할 만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 쾌락, 성취감 그리고 어떤 이상적인 인간관계도 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쉬지 않는 기도 생활은 성도에게 있어 가장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의 길입니다.
- 무명(無名)의 '행복한 그리스도인' 저자는 동일한 어조로 말합니다. "성령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6-17)를 한데 묶어 놓으신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늘의 깨끗한 공기를 계속 호흡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모든 진정한 기쁨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 계속해서 그는 기도를 멈추는 것은 살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리챠드 포스트 역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일을 하든지 길을 걷든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 쉼 없는 기도를 통해 지속적인 기쁨을 맛본 사람은 그 둘이 서로 비례한다는 것을 알며,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그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11.' 쉬지 않는 기도'(살전5:17)의 실행 방법
(1) 기도와 일의 겸업을 통해 행할 수 있습니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쉬지 않는 기도를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부득불 일과 기도를 겸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 속에 기도와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며, 기도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기도하라는 말로, 혹은 일을 기도의 리듬으로 삼으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러한 기도와 일의 겸업을 도날드 휘트니는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는 동안 하나님과도 통화를 하는 것" 과 같은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2) 용의주도한 준비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선 성령의 인도와 함께 용의주도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로마교나 정교회는 '묵주 기도', '예수 기도', '기도문' 등을 사용하지만, 우리 개신교는 존 번연의 기도문 저항에서 보듯이 인위적인 기도 방법들은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막는 것으로 봅니다. 이런 정신에 따라 여기서도 다만 쉬지 않는 기도를 위한 몇 가지 지침을 기술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합니다.
ⅰ.기도 목록을 작성하라.
우리는 곧 잘 잊어버리는 속성 때문에, 설거지나 요리할 때 또한 식사 때나 화장할 때 쉽게 눈에 띌 수 있도록 기도 목록을 벽에 부착시키는 것도 작은 요령일 것입니다. 또한 호주머니나 혹은 핸드백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기도 목록표를 만들어 시간이 날 때 마다, 기도 목록에 적힌 사항들을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엘멘).
ⅱ.짧은 기도의 활용
일상의 업무 속에서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익한 기도는 단숨의 짧은 기도일 것입니다. 듀엘은 이 짦은 순간적인 기도를 "전보기도", "번개기도", "순간기도" 라고 명명했는데, 동방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수 기도' 혹은 '단숨 기도' '호흡 기도'라는 것을 해 오고 있습니다.
ⅲ.매일의 사건들, 만나는 사람마다 기도 대상으로 삼으라.
교회 곁을 지나칠 때면 그 교회 목사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를 지나칠 때면 교직원과 학생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며, 물건을 살 때는 점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전화를 방금 걸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편지를 부칠 때는 그 편지를 받을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설교할 때는 성령께서 그를 사용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으며, 신문을 읽을 때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서 다음 일로 옮겨갈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엘멘).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듀엘).
ⅳ.예배, 집중 기도
쉬지 않는 기도는 은혜의 방편인 동시에, 또한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심장이 쉬지 않고 박동하기 위해선 먼저 건강이 필요하듯이 쉬지않는 기도 역시 영적 건강이 필요합니다. 그런 영적 능력이 없이는 쉬지 않는 기도는 다만 사념에 빠뜨려지고 결실 있는 기도를 하기 어렵습니다.
- 공중 예배나 집중 기도는 쉬지 않는 기도의 영적 에너지원입니다. 명실공히 우리의 경건은 공적이고 사적인 균형 속에서만 제대로 성숙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동일하게 보게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보완적으로, 혹은 둘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상대를 고무시킵니다./창골산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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