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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기도문 10 -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아들 2014. 2. 11. 17:06

▣ 주기도문 10 -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기남 
말씀 : 마 6:13절 
1. 삶의 스펙트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서 
출발해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기도는 감히 누구도 이름을 붙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광을 바라보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관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중심부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와 시험에서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인간 관계를 위한 기도이며, 나아가서 사탄을 포함한 
영적인 존재와의 관계에서 승리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기도문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이 기도의 마지막은 어느 인간도 다 설명하기 어려운 
어둡고 깊은 악에 관한 기도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그 기도 속에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악과 악한 자인 사탄에 이르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선과 가장 비참한 악을 다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기도문의 범위는 넓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삶의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삶이란 거대한 숲을 한 눈에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삶이란 문제를 
거의 물질 문제와 인간 관계의 문제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비록 이것이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삶의 문제를 오직 이러한 시각만으로만 풀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21세기가 가진 중대한 편견일 수 있습니다. 
경제를 포함한 물질적, 인간적 관계가 잘 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런것만 잘 되면 모든 것이 다 잘 된다는 생각에는 더 깊고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인간의 삶은 물질과 인간 관계만으로 다 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더 큰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숲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과 인간뿐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와 그리고 사탄이라는 존재까지 다 포함합니다. 
삶은 창조주 하나님에서부터 인간의 온갖 물질적인 것들과 
다른 사람들과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 사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은 인간과 조직들을 웹(web)망 안에서 서로 연결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의 삶은 이러한 인간 사이의 연결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들과의 긴밀한 연결」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연결된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주기도문을 처음 시작하면서 말한 것처럼 요즘 사람들은 
인위와 무위의 차원은 말하면서 신위의 차원을 모르고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삶을 이루는 숲은 하늘과 땅과 인간과 그리고 영적인 존재들을 
다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 
그리고 빵이라는 경제 문제, 용서라는 인간 관계 문제를 거쳐서 
악과 사탄의 존재에 대한 영적 문제에 걸치는 이 넓은 스펙트럼을 보면서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개인의 삶 속에 있는 악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도 알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기도의 마지막에 나오는 악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이 악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삶의 성찰들도 모두 피상적이 됩니다. 
이 세상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고, 
사람들도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선하지 않습니다. 
악이란 문제가 인간이 겪는 모든 삶의 한복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동시에 시작된 이 악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 주기도문이 
그 마지막을 '악으로부터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로 
마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 악은 무엇입니까? 
너무 어려운 단어로 정의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현실에서 늘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 신문을 펼쳐보면 각 분야, 
각 영역에 악이 도사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소유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재벌 기업의 비자금 불법 정치 헌금, 
주가 조작 사건, 공해 물질로 강의 물고기들을 떼죽음 당하게 하는 
회사에 관한 기사, 폐기처분해야 할 한약재에 상표만 바꿔 붙여 
시중에 유통시킨 상인 등에 관한 기사들은 이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들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단면들입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행동 속에도 악이 있고, 진리와 선을 
추구한다는 학계와 종교계 속에도 악은 교묘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말할 때, 이 악은 철학에서 말하는 
추상적인 악이 아니라, 너무나 흔히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여러 형태의 악은 일상화되어 
별로 문제시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악은 타인들 속에 뿐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우리 속에서도 
크고 작은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라는 기도가 절실합니다. 
3. 악한 구조를 이용하는 악 
그러나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우리를 
개인적 악행에서 건져 달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개인의 악한 행위들은 대부분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구조, 이른바 구조 악이라고 하는 것들과 함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나 재벌의 비리들 뒤에는 
정치와 경제와 관료 사이의 얽히고 설킨 부패 구조가 있고, 
얌체 회사나 악덕 상인들의 악행 뒤에는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그 자체로서도 악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구조를 고치려 하기 보다는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오히려 이용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악한 구조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개인의 악으로 인해서 
계속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 
요즘 증권제도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증권제도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본의 재투자를 위해 
필요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투기를 통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마음 때문에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건전한 노동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게 하는 그릇된 사회 구조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더 부추기면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 악은 바로 이런 구조악과 
잘못된 가치관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은 이런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4. 개인의 선까지 무력화하는 악한 구조 
그러나 악의 현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이 악한 구조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로 악한 구조가 그 구조 안에 있는 개인의 선행까지도 
악에 기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악한 정권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있는 시민이 있다고 합시다. 
이 시민은 개인적으로 매우 충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개인의 선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선이지만, 
그 개인의 노력이 정권으로 하여금 
백성을 더 탄압할 수 있도록 만들게 한다면, 
그 선은 결국 악에 기여하게 되는 셈입니다. 
어떤 집단과 사회가 악하면, 그 사회에 속한 개개인이 
윤리적으로는 선하다 할지라도 그 선이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집단의 악을 더 신장시킴으로 
결국 개인적인 선은 선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5. 측정할 수 없는 악의 깊이 
악의 어두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집단이나 사회는 마치 사탄이 광명의 천사 모습으로 위장하듯이, 
악한 목적을 진리와 정의라는 이념의 옷을 입혀서 
그 집단 전체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악의 피해는 이루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히틀러가 나치즘을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선이며 정의라고 세뇌시켰던 것이 한 예가 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마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치즘을 신봉하는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대의 역사 속에서도 이런 악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중국 길림성에 가면 장춘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일본 관동군 731 특수 부대가 당시 
중국인, 몽골인, 조선인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한 장소가 있습니다. 
일본군이 패전하고 후퇴할 때 이곳을 거의 파괴하고 떠났기 때문에 
현재는 그 부대의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곳에 중국 정부가 당시 남아있던 일부 건물을 가지고 
일본인들이 사람을 '실험용 쥐'처럼 다루었던 장면과 
그 실험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녹슨 철제 도구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이곳에는 살아있는 인간의 배를 갈라서 해부하거나, 
혹은 사람의 손을 얼리고 또 불에 태우면서 피부 조직을 실험하거나, 
가스실 속에 사람을 넣어서 독가스의 성능을 실험해 보거나, 
말의 피를 인간 속에 주입해보고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조사했던 내용들이 글과 사진으로 게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잔인하고 악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마루타와 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한 국가가 그 국가에 속한 백성들의 양심을 
민족주의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마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군의 눈에는 포로들이 인간이 아니라 
실험용 쥐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엄청나게 잔악한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애국이란 이름의 선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악이 얼마나 교묘하고 두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악의 모습을 말하자면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워싱턴에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이 박물관 출구 양쪽 편에 수용소 죄수들이 신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신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고 합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내용만 봐도 마음이 무겁고 비통한데, 
출구 양편에 쌓인 수많은 검정 헝겊 신발들을 보면 
그 자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헝겊 신발은 영문도 모르고 신을 벗고 가스실로 들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북이 쌓인 신발들은 가스실 속에서 고통으로 뒹굴다가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의 시체더미를 상상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누구든지 인간의 악을 피부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상상하기 어려운 악의 실체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것에 놀란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하와 베토벤, 루터와 괴테 그리고 브람스를 배출한 나라가 
어떻게 히틀러, 아이히만, 괴링과 같은 인간들을 배출했을까?」 
그들이 그 시대에 감히 인간의 이름으로 이렇게 잔악한 행동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국가 민족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악을 정당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은 이토록 교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몇 가지 역사적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대답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 속에 언급된 이 악은 이처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6. 악의 원천은 마음 
이렇게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어 밖으로 드러난 악들이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채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악은 잔인한 것이면서 동시에 은밀합니다.」앞에서 말한 이러한 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악한 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악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폭력 음란 영화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 마음에 숨겨진 악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드러난 악도 무시무시하지만 인간 속에 잠재된 악은 
어떤 면에서 더한지도 모릅니다. 
악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이미 상상을 통해서 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악이라는 시한폭탄을 
자기의 마음에 장착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미워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 곧 살인이며,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란 행동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 17:9절) 이라고 했고, 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8절) 라고 했습니다. 
인간 내면의 악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악은 얼마나 그 뿌리가 깊은지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결심하고 마음을 고쳐먹어도 빼낼 수 없을 정도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절)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악은 우리의 내면의 악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7. 악의 인격체, 사탄 
그러나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이 '악'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악은 인간의 악한 행동이나 사회의 악한 구조 그리고 
인간의 악한 마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악은 모든 악 뒤에 있는 사탄이라는 영적인 존재까지 포함합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했을 때 이 악이란 단어는 원어에 
중성 명사도 되고 남성 명사도 됩니다. 
중성 명사로 보면 이 악은 '악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남성 명사로 보면 '악한 자', 즉 '사탄'을 지칭하는 것이 됩니다. 
영어 성경 KJV 와 RSV 는 중성 명사로 생각해서 '악'이라고 번역했고, 
NIV 와 NRSV 는 남성 명사로 보고 '악한 자'로 번역했습니다. 
한글 성경의 번역은 RSV 번역을 따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악한 행위'로, 루터는 '악한 자'로 해석했습니다. 
칼빈은 양쪽 모두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악행과 악한 영적 존재는 
항상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악한 자 사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악한 행위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의미도 되고 동시에 
'악한 자, 사탄에게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도 됩니다.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2차 대전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험 뒤에는 시험하는 자가 서 있고, 
거짓 뒤에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서 있다. 
죽음과 피흘림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서 있다." 
독일의 악한 만행 뒤에서 악한 인간뿐 아니라 
악한 존재인 사탄을 그는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악 뒤에는 반드시 악한 자인 
사탄이 있습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 사람이 잘 모를 뿐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면 그 악은 인간의 개인적 악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 인간의 인격과 삶 속에서 활동할 무대를 마련해주는 것이 됩니다. 
사탄은 악을 행한 사람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여 
마침내 자신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마 12:34절)이라고 불렀고,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악행 뒤에 이미 있는 사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악을 조장하고 악으로 인간을 멸망시키는 이 사탄을 향해서 
'시험하는 자', '원수', '큰 용', '뱀', '살인자',
 '처음부터 범죄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악한 자는 우리의 최대의 원수요, 대적자이며, 참소자입니다. 
그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면 즉각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오지 않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는 무소부재한 존재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전능성을 흉내내어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유혹합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에서 말하는 이 '악'은 곧 악한 자,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적인 사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8. 어떻게 악에서 벗어날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악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악을 그냥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무섭고 잔인하며, 
은밀하고 교묘하며, 파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이러한 악을 통해서 
역사하는 악한 존재를 가리켜서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는 도적(요 10:10절)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악한 자는 반드시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악의 깊은 실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사람이 교육을 더 받거나 교양이 있으면 
악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문명이 더 발전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아예 악이라는 것을 단순히 심리적 문제로 생각하거나, 
사회적 발달 과정에서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악의 심각성도 모를 뿐 아니라, 
악은 원죄처럼 인간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나아가서 악의 배후에 있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합니다. 
「악은 인간의 생명을 속게 하고, 멸망시키고 마침내 파괴시킵니다.」 
악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절)고 했고, 
또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계 21:8절)라고 했습니다. 
악은 반드시 심판과 멸망을 불러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앞 장에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살폈는데,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란 기도와 
연결된 하나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끝없이 시험을 만납니다. 
살아있는 한 시험에서 면제된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시험을 만나서 죄를 짓고 악에 빠지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만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악에 대해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에 빠져 죄를 짓고 악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즉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악에 빠져들어 갔다면, 그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더 늦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9.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옵소서 
그런데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라는 말은 우리를
 '악한 세상과 악한 자에게서 구출해 주소서'라는 
소극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즉 악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절)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악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악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한 후에 보다 적극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절) 
이 세상의 악에서 어떻게 보전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피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말씀의 진리로 거룩한 자가 되어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악에서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원하옵소서'라는 
소극적인 기도는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적극적인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악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선으로 이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롬 12:21절)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세상을 살아갈수록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악한 자 사탄을 이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을 피한다고 사탄이 그 사람을 자신의 영향력에서 
면제시켜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이 말씀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절) 
사탄 마귀는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권세를 제대로 행사한다면, 
우리가 마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를 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가 우는 사자처럼 다니는 이 세상에서 
더욱 기도에 힘쓰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악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세상을 떠남으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 안에 살면서 거룩한 자로 보전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악은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악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고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이 세상의 악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더 심각해져서 요한계시록이 
'바벨론'이라는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이 더 구조화되고 심화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악과는 대조되는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이 없는 세상에서 아직은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악에 물들면서 살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악할수록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더욱 거룩한 자로 
보전되어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한 자로 살아감으로 빛이 되어 어두움을 이기고, 
소금이 되어 부패를 이기고,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은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은 
이런 거룩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출처 : 성령의 감동으로 엮어지는 공간
글쓴이 : ┏미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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