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적 면담기술과 목회
1. 이성(理性)보다 감정(感情)이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어지면서, 또 힘의 논리가 그것의 밑바탕이 되면서, 인간의 여러 가지 속성 중 감정의 부분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억압되고 이성의 부분만이 옳은 것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슬픔, 기쁨, 사랑 등 여러 가지 비논리적인 느낌들은 여성적(女性的)이고, 냉철함, 합리성, 논리성, 정의 등은 남성적(男性的)인 것이라는 편견에 우리는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19 세기말에 인간의 ‘무의식’이 발견되면서부터 인간은 자기 스스로 알 수도 없고 따라서 조절하기도 어려운 어떤 힘에 의해 그의 행동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논리는 수정되어야 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을 대하면서 그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그 상대의 말 내용으로 하기보다는 그의 표정, 몸짓, 말투 등을 통하여 전달되어 오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 이해에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면담과정에 놓였을 때 정신과 의사는 그의 말의 내용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동시에 관찰함으로써 그의 감정상태를 알려는 노력을 하게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논리적인 말보다 비논리적이지만 훈훈하게 다가오는 감성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2. 무의식적인 동기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어떤 교인이 목회 상담을 요청해 왔을 때 그들이 가지고 오는 표면적인 문제보다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것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표면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그 문제에 숨겨져 있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찾아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집 후처인 여자가 아이를 낳은 지 2개월 밖에 안되었을 때 목회자를 찾아와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서 왔다”고 얘기를 했다. 이러한 경우 그녀의 표면적인 이유에만 관심을 두면 그녀를 전혀 돕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녀가 목회자를 찾아온 무의식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그 목회자는 그녀가 죄책감과 자신의 무가치감에 압도되어 있음을 그녀의 비언어적인 여러 가지 표정이나 몸짓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내가 어떤 교회에 나가야 할까요?”라는 질문은 그녀의 억양이나 태도로 보아 마치, “나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뒤이어 “나는 엄마로서 적합한가요?”라는 표현되지 않고 있는 질문이 뒤따르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 가입이 아니라 전문가의 도움이다. 그런 다음 사랑으로 감싸주는 교회의 지속적인 역할이 필요하게 된다.
3. 전이(Transference)현상
목회자에게 각 교인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투사되어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것들 중 하나가 목회자를 ‘아버지의 대리자’로 인정해버리는 묵계적인 기능이다. ‘아버지’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며, 각 개인의 과거에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image)를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목회자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경우 물론 그 상대가 꼭 아버지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 이외에 과거에 중요했던 인물들의 이미지를 목회자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목회자를 과대평가 하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기도 한다.
또한 목회자가 결혼한 사람이면 더욱 더 복잡한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게 된다. 즉 목회자와 그의 사모 사이에서 그리고 사모와 교회 여신도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여신도들은 목회자를 환상적인 아버지, 능력자 등으로 착각하고 자기 자신들은 그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어린 소녀들, 딸 등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모는 목회자의 반려자라는 위치보다는 그들의 경쟁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문제가 여간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은 사모의 언행 하나 하나를 꼬투리 잡기 시작한다. 옷이 너무 야하다느니, 촌스럽다느니, 사모가 되어서 새벽기도를 자주 빠진다느니, 사모가 너무 방정맞게 웃는다느니 등등.. 이러한 교인들의 질투를 사모는 참다 못하여 그녀의 남편인 목회자에게 투덜거리며 털어놓게 된다. 그러면 목회자는 목회자 나름대로 골치 아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불평하는 사모가 괜히 무능해 보이고 미워진다. 그래서 “그런 문제 하나 참고 넘어가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사모 역할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겠느냐?”면서 핀잔을 주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모는 슬픔과 고독감에 휩싸이게 된다. 안과 밖에서 다가오는 긴장과 압박이 너무 지나칠 때 그녀는 우울과 적개심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사모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고 목회자의 일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급기야는 사모에게 다가온 우울과 적개심은 목회자의 설교를 망쳐놓게 되고 목회자의 대인관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어서 심할 경우 목회를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위의 예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선 문제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원인은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갖는 전이현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원래 전이란 환자가 어릴 때 자기의 생활주변에 있었던 중요한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 중요한 사람에게 가졌던 경험을 지금의 치료자에게 옮겨 놓고서는 치료자를 마치 옛날의 그런 사람인 양 대하고 치료자를 통해서 옛날 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그래서 치료자에 대한 환자의 반응과 감정의 일부는 환자 자신의 그런 어렸을 적의 경험에 의해서 이미 사전 결정된 셈이고, 이제 환자는 치료자에게 차차 그런 꼴로 반응하기 시작하고, 그런 식의 감정으로 치료자에게 대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치료자에 대한 환자의 행동이나 반응의 일부는 그 환자와 치료자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권위적 인물에 대한 그 환자의 사전 결정된 내적인 예상이나 반응방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이현상은 엄격히 말해서 정신치료 상황에서 환자가 치료자에게 나타내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이현상을 이용하여 정신과 의사는 그 환자들의 병적인 부분에 대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러한 전이현상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조금 넓게 적용시켜 보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이웃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관찰 가능한 전이현상 몇 가지를 치료상황 대신 목회상황으로 그 장면을 바꾸어서 추측해 보기로 하자.
1) 애정을 주는 사람으로서의 목회자
고통 당하는 교인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이해하는 목회자의 현실적 역할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애정을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칭찬, 공감, 동정 등의 표현에 의한 애정을 원한다. 즉 목회자의 미소, 격려, 별 내용도 없는 간단한 말 자체가 사랑 받고 있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가져다주게 된다. 반대로 목회자가 그들 앞에서 별로 표정이 없거나 지나가는 말도 건네지 않을 때 그들은 실제적인 거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애정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목회자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다거나, 어떤 권면의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하찮은 질문을 자주 한다거나, 불쾌한 상황을 보여서 동정을 얻으려 한다거나, 애정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선물을 하기도 하고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목회자의 사소한 거절에 대해서도 만일 그것이 애정에 대한 갈망의 좌절이라고 느낄 때 그들은 과잉반응을 보이게 되고 심지어는 뒤에 가서 목회자가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평하기까지 할 것이다.
2) 강한 권위자로서의 목회자
목회자가 부모의 모습으로 비추어질 때 그런 느낌(전이)을 갖는 교인들은 어린이가 어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것과 같이, 목회자를 능력 있는 인물로 여긴다. 목회자가 권위 있는 존재로 여겨지면 그를 통해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또한 보상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자연히 권위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 하고 그러자니 조심하게 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자신의 조그마한 불이익을 쉽게 감내하고, 목회자를 항상 최상의 존칭으로 부르며 늘 복종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목회자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기꺼이 충고 받기를 원하고, 정치, 종교,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회자와 의견이 다르면 자신의 견해를 용서해 줄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목회자가 그들과 다른 견해를 표시하면 즉각적으로 자기견해는 거둔 채 그 견해가 물론 옳다고 받아들인다. 이들은 나중에 목회자의 금지적, 권위적 태도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 할 수 없었다고 목회자를 비난할 것이다.
3) 경쟁자로서의 목회자
만일 어떤 교인이 목회자를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어떤 경쟁자와의 경험으로 경험하고 있다면 그는 목회자와 경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목회자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가 직접 질문하여 시험해 보려고 한다. 그는 어떤 상황의 이야기를 할 때 만일 목회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자기가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인생관이 확고함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아무도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4) 마음에 드는 아이로서의 목회자
어떤 교인은 목회자를 그의 귀여운 아이인 것처럼 느끼고 행동한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목회자보다 나이가 많은 교인에게서 종종 일어난다. 이때 목회자는 그런 교인의 보호적인 모성이나 부성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목회자의 건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목회자가 감기라도 들면 몸조심하라고 타이르고, 너무 일을 많이 하면 그러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가 여자인 경우엔 스웨터를 짜 주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남자들은 여러 가지 남자 일들에 관해서 조언을 주기도 한다.
다시 처음 제기되었던 문제로 되돌아 가보자. 교인들이 목회자의 사모를 하찮은 것 가지고 헐뜯고 못 견디게 억압했던 것은 그들의 전이현상 때문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 목회자의 모습에서 어떤 전이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그것은 애정을 주는 아버지이거나 권위적인 인물로 비추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한다면, 목회자는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일단은 긍정적으로 보아줄 것이지만 사모는 사랑을 받는 동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므로 경쟁 대상자가 된다. 그래서 어려서 형제간의 rival의식이 있었던 때처럼 사사건건 헐뜯게 된다.
적어도 이러한 교인들의 전이현상을 간파하게 되면 문제는 오히려 더욱 간단히 풀릴 수도 있게 된다. 만일 목회자 사모가 교인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경쟁의식을 읽고 있었다면, 정말 못 견디게 시집살이시키는 그러한 상황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녀의 경쟁자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제공해 줄 수 있게 된다. 즉 어머니상(mother figure)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신도들의 끈질긴 투정에 흔들리지 않고, 늘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 사모는 그 교인들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어린아이 태도(infantile attitude)를 그들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사모는 오히려 그 교인들이 정서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이거나 사모이거나 간에 그들 자신의 심리적 갈등, 상처, 문제들이 또한 이러한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개입되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사모를 헐뜯는 것은 단지 저들의 전이현상일 뿐이다’라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그런 것들을 생각만 하면 자꾸 마음속에서 본인도 모르게 화가 치민다. 그리고 ‘믿음의 힘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용서하고 참아 나가야지’하고 다짐을 해도 그 억울함은 더욱 커지기만 하여 밤잠까지 설치게 된다. 이런 것들은 사실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어떤 사모에게 있어서 교인들의 모습이 마치 시어머니의 모습처럼 느껴졌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권위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모의 과거력 속에 권위자에 대한 속박의 추억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성격이 아주 강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경우에 그녀의 어머니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아이를 키운다. 그러니까 자신이 기분이 좋으면 마냥 잘 해 주다가도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쁠 것 같으면 가혹할 정도의 벌을 내린다. 그래서 그런 어머니에게 억울한 체벌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도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런 경우 철이 들어감에 따라 억눌려 사는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마저 뼈 속 깊이 느껴져 온다. 한편 그런 어머니가 밉기까지 하지만 어머니에게 불만을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마음만 먹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쩔 줄 모르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참아버리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강압적이고 제멋대로 비평하는 얄미운 어머니의 모습들이 얼핏 스친다. 사실 그런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은 것들인데...... 객관적으로 봐서 그런 교인들의 모습은 물론 어머니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모에게는 그것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교인들의 전이현상일 뿐이라고 이해하면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정리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고 답답증이 까닭 모르게 치솟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그 개인의 심리적인 상황 때문에 악화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 부분적으로는 전이에 대한 반대적 개념으로의 역전이(countertransference)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4.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다음은 목회자의 역전이 현상 때문에 종교상담이 잘 못 되었던 예이다.
결혼한 딸이 도시로 나가 따로 살겠다고 해서 깊은 우울감에 빠진 할아버지 교인이 어느 날 목회자에게 상담을 요청해 왔다. 그녀는 외동딸 이었고 그 노인은 그의 딸과 손자들에게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서 이사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서부터 탈출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즉 그녀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막혀있는 듯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처지를 듣고있던 그 목회자 또한 이 노인과 거의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그 목회자 역시 그의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고 자식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남으로 해서 우울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목회자는 그의 딸을 위해 이러한 변화를 그 노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고 용기를 주기보다는 “요즘 아이들은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른다”며 그 노인의 딸의 입장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 목회자는 그의 딸을 찾아가서 “만일 여기를 떠난다면 너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그 노인네 가족들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서 한 동안 헤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입장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혼란은 끝이 났다.
역전이란, 환자가 치료자에게 가졌던 비현실적인 감정전이가 이제는 치료자에게서 환자 쪽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치료자의 과거에 중요했던 인물에게 가졌던 감정양식이 환자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이니까 치료자는 환자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해서 보게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면담관계에서든지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치료자나 상담자 자신의 문제를 늘 돌이켜 보며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만일 이러한 용기가 없을 때 우리 인간은 자칫하면 자기 자신의 문제를 쉽게 합리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특히 그러한 요소들이 종교의 교리로 덮어질 때 그것은 오히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위험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 주변에 까닭 없이 불편스럽고 대면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를 통해 역전이 감정이 촉발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보다 더 원숙한 인격성장을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을 피하거나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 우리 속에서 일고 있는 역전이 감정을 관찰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만나기 싫고 거북스러운 그들이 오히려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역전이 감정은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긍정적인 형태(사랑 등....)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5. 객관적 태도(Objective Attitude)
정신과의 면담기술 중 환자에 대하여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는 기법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어떠한 도덕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그 환자를 비판하려는 태도를 보류해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과 의사는 도덕적 가치에 상관치 않는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정신과 의사가 이러한 면담 기술을 활용하는 목적은 치료자가 중립적 태도를 보임으로서 환자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왜곡된 범위 및 상태 정도를 환자 스스로 볼 수 있도록 돕는데 있다. 즉 치료자의 중립적 태도는 환자가 현실에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을 개선시키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현상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환자는 현실을 정확히 감지하고 따라서 그 현실에 적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힘을 키우게 된다. 그래서 환자의 왜곡된 상태의 병리가 개선되면 그때에 비로소 규범적 또는 종교적 도덕률 안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그의 능력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의학의 목표와 종교의 목표가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과 의사의 객관적 태도는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이 입증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감정의 성장을 북돋아 주고 병식을 키워 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이해하지 못해 극히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 접근법은 도덕률을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도덕률과 이 객관적 태도를 혼동하면 혼란만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객관적 태도는 목회자의 일과는 전혀 다른 기술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초기 공식에서, 어떤 욕망의 억제가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갈등을 만든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공식에 따라 그 결론은 불합리하게도 정신질환의 제거방법은 모든 좌절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내려졌다. 그러나 임상경험상 그런 경우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과 의사의 객관적 태도가 마치 삶의 한 좋은 방편인 것처럼 처방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좌절을 멀리하는 것이 정신질환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불안, 죄책감, 슬픔, 분노 등...., 이 모든 것이 다 병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상상태란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구별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래서 현실에 직면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경향을 뚜렷이 갖게 된다. 또한 이러한 태도가 목회자의 자세와는 전혀 다른 이유는 목회자의 임무는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보존 및 성장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고, 양심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정당치 못함과 박해를 받음에 있어서 방관자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예언자적 분개를 표현해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허용적 태도 (Permissive Attitude)
허용적 태도 또한 정신과 의사의 면담기술 중 하나이다. 이 태도는 그 개인의 어떠한 말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환자의 감정 덩어리들을 발견하게 되고, 감정의 성숙정도를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전이현상들을 객관적으로 다루어 나감으로 해서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가 정신치료자로서의 태도들, 이를테면 객관적 태도와 허용적 태도를 가지고, 또한 그 밖의 정신치료자의 자세로서 상담을 요청해온 교인을 대한다면 아마도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남편과 사이가 나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자기의 처지를 고백했다고 하자.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 얘기를 듣고 보니 성적 좌절감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목회자는 자신을 정신치료자로 간주하고 그녀의 모든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허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녀의 남편은 성에 관한 한 극히 청교도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런 저런 얘기가 허용되는 마당에서 그녀의 성적 욕망은 그 목회자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 목회자에게 전이감정을 일으키면서 목회자를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가 이러한 전이감정을 효과적으로 참아 나가려면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런 훈련을 받았다면 그는 그녀의 전이감정을 이용하여 그녀의 정서적 성장을 효율적으로 촉진시켜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 자신이 그런 경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역전이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는 그녀의 결혼생활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돕기는커녕 그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것이며 아울러 목회자 자신도 그가 그 동안 쌓아 놓은 자신의 경력을 결단내 버린 채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허용적 태도는 정신과 의사의 면담기술 중 하나이지 목회자의 일에는 적합치 않은 것이다. 앞의 예에서 볼 때 도덕적인 가치를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해 주었다면 그녀는 오히려 희망을 가지고 불행한 결혼생활에 어떤 변화를 모색해 보려는 노력을 시도했을 지도 모른다. 목회자는 그녀의 정서적 폭로를 북돋고 자극해 주기보다는 그런 폭로를 제한할 수 있도록 돕는 편이 더욱 목회자의 입장에 적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감정의 폭로는 정신과 의사가 다루어 주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다음은 목회자가 허용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교인관리에 실패한 또 다른 예이다. 젊은 남자교인이 자신의 결혼생활의 부정, 사업상의 부정직 등을 목회자에게 고백하였다. 목회자는 그러한 고백들을 비판하지 않고 허용적인 태도로 감싸주었고 따라서 자신의 부정직을 고백한 그 젊은 남자는 목회자와 더욱 친밀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젊은 남자의 무의식적인 느낌은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서 경험했던 그런 감정을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재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극히 허용적이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많았지만 자식이 늘 자기 식으로 따라오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는 그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아버지의 과보호에 반항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삶의 태도는 아버지의 바램에서 빗겨나가 있어서 늘 아버지를 난처한 지경으로 빠뜨렸다. 그러므로 그 젊은 남자에게 있어서 목회자의 허용적 태도는 사랑이나 친밀감의 표시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헐뜯는 꼬투리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목회자의 반대자가 됨으로써 그 자신을 아버지에게서부터 방어해 왔던 것처럼 현재에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이런 경우를 다룰 때에는 이와 같은 전이의 공격적인 표현을 정서적 성장의 기회로 전환시키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 젊은 남자의 적개심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끝장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면담 기술로서가 아니라면, 정신과 의사의 허용적 태도를 목회자가 취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만일 목회자가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는 교인들을 위로해 주는 것도 실패할 것이고 종교 안에서 그들을 결속시키는 일도, 그리고 그들을 달리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모두 실패할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가 정신의학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유용한 지식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기술과 지식을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이용할 필요까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는 항상 도덕적 전통과 영적 전통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정신의학의 방법과 언어들은 종교지도자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목회자가 과학자의 자세를 취한다면 그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온 사람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인도를 요청했던 그들에게 빵 대신 돌을 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Clara Thompson,M.D/이형영․이귀행 공역(1987),『정신분석의 발달』, 하나의학사.
2. Paul A. Dewald/김기석 역(1981),『정신치료의 이론과 실제』, 고려대학교 출판부.
3. Kenneth Mark Colby(1951), A Primer for Psychtherapists. The Ronald Press Co., New York.
4. Louis Linn, M.D., and Leo W. Schwarz(1958), Psychiatry & Religious Experience, Random House,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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