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기독교의 본질(II) 구원에 이르는 은혜, 파멸에 이르는 행위
(엡2:8-10)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을 잠깐 복습을 하겠습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내용이 녹음이 잘 안돼서 많이 잘라냈습니다. 그러니까 테잎으로 들으시는 분들은 제대로 앞뒤가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잠깐 다시 review를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29절30절 말씀을 가지고 구원의 서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선택하시고 미리 예정하시고 그들을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라고 과거시제로 그 문장을 마쳤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사랑하신 자들이 있으셨고 그들만을 선택하셨고 그들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고 다시 살리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이 인생 속에서 역사 속에서 부르시는 것이 소명이라 했고 그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 “의”는 단순히 correctness 나 justice가 아니라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위하셨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그분만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었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요구하는 의를 완전히 이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그런 우리를 성경은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배웠지요?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행위를 보태려 시도하는 것은 극악한 죄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공부를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를 의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한번 함께 고민을 해보지요.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 지를 아십니까? 잘 모르시지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30cm 자를 가지고 30만 마일을 잴 엄두를 낼 수 없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이 30cm자라면 하나님은 30만 마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원이라는 넓이와 깊이를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55:8-9)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그 분을 측량해 낼수 없고 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그 분이 얼마나 크시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조금 예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시면서 어떨 때는 하나님이 좀 너무하시다 생각 될 때가 있으시지요?
사무엘 하 6장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빼앗아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법궤를 싣고 오다가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손으로 잡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웃사를 죽여 버리십니다.
(삼하6:6-7)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기서 8절에 ‘베레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페레쯔“는 ’분열, 쪼개짐‘을 뜻합니다. ”웃사가 쪼개진 곳”이라는 뜻이지요. 왜 웃사가 그렇게 쪼개져 죽었을까요? 율법 때문입니다.
(레16:2)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 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 소위에 나타남이니라
이 율법에 의해 웃사는 죽은 것입니다.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사울이 아말렉 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아주 좋은 실한 가축을 남겨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왕을 삼은 것을 후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삼상15:11)
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그게 그렇게 큰 잘못 입니까? 그런데 사실 사울은 이일로 폐위가 됩니다. 또 한 군데 볼까요?
(출19:21-24)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23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 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삼상15:2-3)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젖 먹는 아기까지 다 죽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무서운 분으로 묘사가 되어 있을까요? 그 분은 그처럼 죄와 함께 하실 수 없는 순결한 분이시며, 예를 갖추지 않고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을 구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그러한 묘사들은 우리의 보잘것없음과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경외”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실 “경외”라는 말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사랑의 하나님에 관해서만 듣고 싶어 했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너무나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크시고 순결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피조물과 상의해서 그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역사를 경륜해 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분의 의지대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단4:35)
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시115:3)
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딤전6:15)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잠16:4)
4 주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그 분의 기쁘시고 완전하신 뜻에 의해 때로는 우리가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그 분은 모세의 단 한차례의 불순종에 사형을 선고하셨습니다. 모세는 유예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십니다.
(신3:26)
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히스기야 왕은 사형 선고를 받고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부탁을 들어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왕하20:2-6)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6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왜 하나님은 베데스다 못 가의 수많은 병자 중에 유독 38년 된 병자만 고쳐 주셨을까요?
왜 관대한 마음, 용서하는 심령을 가진 에서는 버리시고 사기꾼 야곱을 사랑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구세주의 탄생을 이방인들인 박사들과 가난한 목동들에게만 알리셨을까요?
왜 산헤드린 공회나 바리새파의 모임에 천사를 보내셔서 구세주가 나셨음을 알리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에서 건져주시고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져주셨으면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놔두십니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그 분은 크신 분이시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어떤 위대한 목적을 가지시고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계4:11)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습니다" 하고 외쳤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목적을 향해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주를 경륜해 나가시고 역사를 주관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무생물과 자연까지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시147:15-18)
15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6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18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암4:7-10)
7 "그래서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리는 비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았다. 또 내가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지 않았다. 어떤 들녘에는 비를 내리고, 어떤 들녘에는 비를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들었다.
8 두세 성읍의 주민들이 물을 마시려고, 비틀거리며 다른 성읍으로 몰려갔지만, 거기에서도 물을 실컷 마시지는 못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내가 잎마름병과 깜부기병을 내려서 너희를 치고, 너희의 정원과 포도원을 황폐하게 하였다. 너희의 무화과나무와 올리브 나무는, 메뚜기가 삼켜 버렸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10 "내가 옛날 이집트에 전염병을 내린 것처럼, 너희에게도 내렸다. 내가 너희의 젊은이들을 칼로 죽였으며, 너희의 말들을 약탈당하게 하였다. 또 너희 진에서 시체 썩는 악취가 올라와서, 너희의 코를 찌르게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역사의 많은 사건들과 자연의 조화까지도 모두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한 남자가 아내의 생일을 맞아 멋진 파티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친구의 아내의 생일에 초대를 받아서 함께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아내와 함께 파티 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내는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파티 장에 서서 그 파티의 주인공을 아주 부러워했습니다.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기에 이렇게 멋진 파티까지 준비해서 많은 이들을 초대한 것일까? 그 때 갑자기 빵빠레가 울리면서 자기가 그 파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내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 모든 신비하기만 한 자연과 우주의 조화와 법칙이 사실은 모두 여러분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셨는데 별로 안 놀라시네요?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어떤 방해도 허락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친척 롯과 아비 데라와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고 롯도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가 버렸습니다. 아브라함만 남은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을 에서에게 주려 시도했습니다만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그들의 가나안 행을 막다가 홍해에서 그의 군대를 모두 잃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매수해서 이스라엘 족속을 저주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목매달기 위해 교수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대에 자기의 목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의지에 저항했지만 결국 앗수르의 니느웨는 회개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작정을 방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크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거기에 무엇을 보탠다는 것이 가당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입니다. 일단 이러한 하나님의 크심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우리 기독교는 풀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우리가 거기에다 대고 “하나님 이렇게 일하시면 안 되지요” 하고 대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임신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 아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다윗이 처절하게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습니다. 아이가 죽으니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밥 차려라 밥 먹자”
(삼하12:22-23)
22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 함이어니와
23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왜 살려주지 않으셨냐고 울고불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하고 우리는 내려앉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병을 고쳐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병이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니까 금방 마음 고쳐먹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하고 물러앉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하나님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역시 ”하나님이 옳으십니다.“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부모님이 구원을 못 받으시고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 왜 내 기도 안 들어 주셨냐고 대드실 겁니까? 하나님의 크심과 엄위하심 아래 고개 숙이고 항복해야 합니다.
설사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이 옳습니다.”하고 이야기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눅14:26)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된 ”미세오“라는 말은 ”덜 사랑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이기적이시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미친 듯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질투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롬11:33-36)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표준 새 번역)
33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35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36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우리는 바로 이런 고백과 찬양을 해야 하는 자들이지 우리의 이 짧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잘 못과 허점을 지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이 골육 친척,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면서도 그는 골육 친척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을 만큼 나는 원한다.“ 라고 강조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들어졌나요? 안 들어졌습니다. 하나님, 내 골육 친척 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런데 왜 안 들어주세요? 하고 따지나요? ”그래도 저는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을 거란 말입니다. 실제로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먼저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먼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 때문에 복음이 온 세계로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편만하게 전해지고 나중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예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과 예정과 섭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절대 대책 없이 임기응변으로 이끌어 가시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400년간 애굽에 노예 생활을 시키십니까?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 아모리 족속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00년 후 이스라엘을 풀어서 아모리 족속을 멸망시키시고 애굽에 심판을 내리십니다.
가나안 입성을 통해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스케일은 이렇게 큽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 400년 이스라엘 왕조 400년 동안 안식일과 안식년을 잘 지키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시면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 70번의 안식년을 한꺼번에 지키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을 애굽에 팔려가게 해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그들을 이용해서 구원의 대 사역을 설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뭔가 잘 못하고 계시다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으신 것이라고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아주 세심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 말년에 모함을 받아 리더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그 분은 “나의 영혼은 그 때 축복을 받은 것이다. My soul was bless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스패포드 변호사가 자신의 네 딸을 한 순간에 폭풍으로 잃고, 시카고 대 화재로 모든 재산을 날렸을 때 쓴 시가 있지요?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영어로는 ‘It is well’입니다.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것이지요. whatever my lot Thou hast taught me to say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It is well. It is well이라고 말할 수 있게 가르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욥1:9-11)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이 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가족들과의 행복, 재물, 좋은 환경을 치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할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럼 사탄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가짜입니다“ 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크신 하나님께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행복을 지켜주지 않으면 ”난 당신 미워 할 거야“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 우리는 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신다 그랬습니까?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자, 거룩한 자, 하나님이 무조건 옳으신 것을 인정하고 무조건 따라가는 자, 그들을 우리는 순종하는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 역사, 인생-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피조물은 그 “복”이 없으면 절대 스스로 행복할 수 없고 원래의 형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생명력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지어진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타락을 했습니다. 그럼 인간의 타락까지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 아니냐?“하고 반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결코 죄의 조성 자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천사들은 죄를 지을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는 천국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 아닌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해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까지 불러 주십니다. 우리를 아들이라고 까지 불러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인격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적인 의지를 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인격과 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만드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인격과 선택권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타락을 하자 피조물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받아 참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깊은 구렁을 건너갈 다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에 살펴 본 “지식체계와 선행체계“ 라는 것입니다.
지식체계 즉, 물질문명, 과학, 이데올로기, 교육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해 오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행복하지 못 합니다.
종교라는 선행 체계를 이용하여 인간은 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행복을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다른 종교는 다 집어치우고 기독교 안에 있는 선행체계, 잘 못된 신앙에 대해 살펴 보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인 “의”가 잘 나타난 것이 바로“율법”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1500년 동안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실패를 해 왔습니다.
율법은 우리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과 동기와 선택에 있어서 항상 완전하고 무결한 선과 아름다움과 참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롬9:31-33)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열심히 그 의를 이루기 위해 선행체계를 따라 노력했는데 사다리가 터무니없이 짧았습니다. 게다가 다 지키다가 한 가지만 못 지켜도 다 못 지킨 것이라고 하니 어떻게 그 의의 다리를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약2:10-11)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게다가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음속까지 후벼 파십니다. 음흉한 생각만 품어도 간음이라 하고 형제보고 “이 밥통아“ 그래도 지옥의 불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요구인 율법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안 하는 것 뿐 아니라 율법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지켜 낼 수는 없었습니다.
(롬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혹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마음속까지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빌3:5-6)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겉으로 지킬 수 있는 율법은 완벽하게 다 지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가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지 알게 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 주랴” 하고 개탄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그 이유가 로마서 7장입니다.
바로 육신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도록 잘 훈련되고 익숙해진 인격과 습성과 경향이 인간을 실패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에게 율법을 들이대면 더 많은 죄를 짓더라는 것이 로마서 7장입니다.
(롬7:8)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어떻게 인간은 타락을 하고 나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동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벽에다가 일부러 구멍을 크게 뚫어 놓고 그 아래에다가 “절대 들여다보지 마시오.“ 했더니 그 글씨를 안 붙여 놓았을 때보다 세배나 더 들여다보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밥을 먹고 설거지를 좀 해 줘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대뜸 아내가 “여보 밥 먹고 설거지 좀 해” 그러면 하고 싶다가도 하기 싫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구인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의”말고 다른 “의”가 나타났는데 그 것이 무엇이냐?
(롬3:21)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완벽한 순종의 삶,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셔서 그 삶을 우리 것으로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다리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입니다.
(롬9:30-33)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죽도록 율법을 지켜왔는데 아무 것도 안 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화가 안 나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매일 새벽기도 가고 선교도 가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성경 공부도 빠짐없이 가고 할 때 허구 헌 날 술이나 마시고 골프나 치러 다니고 도박이나 하고 했던 사람이 어느 날 “나 예수 믿기로 했어” 그러면 뭔가 내가 손해 본 것 같이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땠겠어요?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켰는데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게 아니라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거야” 그러면서 지금까지 야만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라고 폭언을 퍼부으시는 그런 예수를 안 죽이면 이상한 것이죠.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의는 무시무시한 죄입니다.
32절에 보면 걸림돌과 반석이 나오죠?
은혜와 믿음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부딪히는 돌과 걸림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렇게 행위를 보태려는 자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는 극악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교만이라고 하고 그러한 최초의 시도가 “선악과”였습니다.
왜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이 유독 기독교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죄인들은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2장에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의 비유가 나옵니다.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들을 때려죽입니다. 그래서 군대를 이끌고 왕이 그들을 진멸 하고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다 데려다 채웁니다. 그런데 왕이 그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냅니다. 불러올 때는 언제이고 예복을 안 입었다고 내 쫓습니까?
당시에는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할 때는 예복을 다 마련해 놓고 초청하는 사람들에게 한 벌씩 주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예복이 바로 의입니다. 그 예복은 잔치의 주인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못 받은 사람은 쫓겨 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가장 첫 번째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 즉, 의에 절대로 스스로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그 십자가를 제시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인간도 할 수 있는데 왜 십자가만을 의지해야 하는가?” 도저히 못 받아들입니다.
(고전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혹, “그래도 그렇지, 열심히 하는 게 뭐 나빠?” 하고 심중에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왜 그렇게도 극악한, 최고로 악한 죄인가를 로마서 10장에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롬10:1-3)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열심히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오히려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마23:15)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빌3:6)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능멸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몰몬 교도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심을 여러분이 따라 갈 수 있습니까? 이슬람교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폭을 하는 열심을 우리는 봅니다.
그 열심들은 바른 지식을 좇은 열심히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바로 알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도 그렇게 엉뚱한 열심들을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어놓고 믿어야지 성경을 덮어놓고 열심만 내니까 이상한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그 지식이 무엇인가?
(벧후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부서지기 쉬운 복음의 고리가 바로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로마서10장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십계명과 십계명에 따른 많은 세부 수칙만을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 속까지 완전한 순결을 요구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가 그토록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것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시면서 희생 제사를 함께 주셨습니까? 못 지킬 것을 아니까 못 지켰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자기들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만 빼고 어떤 것에도 집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중독,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르러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들의 의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알콜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을 복용한다거나 도박에 빠지거나 하는 중독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육체의 쾌락보다 “자기의“에서 더 많은 안전과 행복을 느낍니다. 열심히 하는 교회생활 선하게 살려고 하는 여러 가지 노력들 남에게 칭찬 받기 위한 여러 행위들에서 사람들은 안전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뭐가 잘못된 거냐?“ 잘못된 것 아닙니다.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그나마 부패의 도를 줄이고 선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에 적용이 되면 그것보다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깊고 정확한 가르침에 관심이 없으면서 교회에서 열심만 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자기의“를 쌓는 사람들입니다. 신비주의 적인 은사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과 차별성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100%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됨됨이보다는 활동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활동에 의존해서 열심히 끈질기게 일하지만 그것을 못하게 되면 금방 초라함을 느끼고 불안해하는 사람
이러한 지식 없는 열심은 식별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 일을 안 하게 해보면 압니다.
“자기 의”로 열심을 내던 사람들은 그 것을 안 하게 되면 못 견뎌 합니다.
성령 안에서 열심을 내던 사람은 안 해도 편안합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심을 느낍니다. “자기 의”를 쌓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안전과 행복이 아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도 남과 경쟁을 합니다.
그래서 쉽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눅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참으로 가증한 일입니다. 60와트전구와 100와트 전구가 밝기가 다릅니다. 그러나 태양 앞에 서면 아무 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쌓는 자들은 “저 40와트짜리 집사 저거 언제 회개 하나?“ 합니다.
“자기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과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 안 해주고 지적을 하면 굉장히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이 자기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정 못 받으면 못 견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면서 다른 사람이 “집사님, 집사님 진짜 죄인이네요” 하면 도끼 들고 달려갑니다. 그럼 하나님한테 가짜로 기도한 거지요?
은혜를 아는 지식, 복음을 아는 지식이 확실한 사람은 자기가 공짜로 “의인”이 된 것을 알기 때문에 ,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자각한 회개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받았을 때 광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에 붙잡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을 많이 의식을 합니다.
(마23:5)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자신의 영적인 미숙함이나 결함을 죽어도 내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들에게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29:13)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자기를 드러내려하는 자기 의를 쌓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을 사랑 못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식에 목말라 합니다. 알고 싶어 합니다. 열심히 일을 했던 마르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얌체 같이 일도 안 하고 염치없이 턱 받치고 예수 님 앞에 앉아있던 마리아를 칭찬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갈1:6-8)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바울이 개척을 한 소아시아의 북부에 있는 여러 교회를 합쳐서 갈라디아 교회라고 합니다.
그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거짓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구원은 십자가 + 행위라는 거짓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바울은 펄쩍 뛰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 다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저주를 받을 지어다“ 너희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것입니다.
(갈2:11-14)
11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12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13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여러분이 정말 구원을 받으신 분이라면 이제 “자기의”는 완전히 버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짜로 거저 주시는 십자가의 의만이 나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 하셔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버리게 되면 우리는 뻔뻔스러워 집니다. 조금 너절하고 지저분한 면이 드러나도 조바심 내지 않고 “그게 나야” 하는 뻔뻔스러움이 나옵니다. 그리고 남을 욕하거나 비하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에 거하게 됩니다.
“자기의”를 가진 사람들은 속박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고..김성수목사..글 옮긴이..서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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