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타락 과정을 보라 !
1. 들어가는 말
타락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진 자”일 것이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그러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물론 그는 여전히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 문제로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 보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입증되었다.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캠벨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모여 앉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니, 이런 일도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문제를 갖고 있다. 성경의 몇몇 구절은 이 문제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0:12은 『그러므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언 16:18도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타락한 사람인가?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께로 향했다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킨 사람이다. 열왕기상 11:9을 보면 『솔로몬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진 까닭에 주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주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지면, 냉냉해지게 되고 그의 첫사랑은 떠나 버린다. 요한계시록 2:4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복음의 단순성으로부터 다른 방법으로의 구원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타락이란 믿는 사람을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한 가지 죄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이런 정의를 내린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주님과 연합되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이성을 잠시 포기해 버린 이단들일 것이다.
영적으로 보면 “타락”이란 용어는 마음이 냉냉해지고 주님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며 성경 읽기와 기도, 교회출석, 증거 및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 관심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 중 95%는 타락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평균적인 그리스도인과 교제할 수가 없는 것은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재타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증거하는 대신 자신들의 은사에 대해 증거하려고 한다.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은 먹고 살기 위해 세상과 교제한다. 그는 그가 세상을 정죄하면 세상이 자기를 정죄할 것을 두려워한다
2. 전개되는 말
우리의 타락 과정을 살펴보자! 성경에서 이미 타락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다. 으리는 이러한 경우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전철을 밟지않겠다는 각오로 싱앙생활을 해야한다. 누가 타락하고 싶어서 타락하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기도 모르는채 마귀와 손 잡고 있는 생활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말씀 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즉 그리스도와 교제가 끊긴게 문제인 것이다.
1.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채워진다 (잠 14:14).
타락이라는 말이 개인에게 적용된 유일한 구절인데(잠 14:14)인데, 이 역시 율법 아래의 구약 시대에 해당된다. 이 용어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타락한 이스라엘"(렘 3:6), "타락한 이스라엘"(렘 3:12), "타락한 자식들아"(렘 3:14), 따라서 "타락한 자"라는 용어는 신약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 15:4) 하여, 우리는 롯의 타락 과정을 공부하면서 현재 우리의 행보를 점검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잠언 14:14-19를 보자,
【14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채워지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 행위로 만족하리라. 15 우매한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총명한 사람은 자기의 걸음을 살피느니라. 16 현명한 사람은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자신만만해 하느니라. 17 화를 속히 내는 자는 어리석게 행하고, 악한 계략을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느니라. 18 우매한 자는 어리석음을 유업으로 받으나, 총명한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쓰느니라.19 악한 자는 선한 자 앞에 엎드리고, 악인은 의인의 대문에 엎드리느니라.】
1)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채워지겠고... 』(14절).
이 구절은 잠언에 나오는 또 하나의 위대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타락자”(Backslider)라는 용어를 개인에게 적용시킨다. 반면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모두 이스라엘 국가를 언급한다(렘 2:19; 3:6; 3:11; 5:6; 8:5 등). <강단 주석>은 단 세 줄의 주석을 쓰기도 전에 재치 있게 이 구절을 피해 버리며, 참조 구절로 내놓은 구절도 본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더멜로우는 이보다 더 적은 분량의 주석을 쓰고는 이 구절을 회피하고 전반절과 후반절 모두 적용하지 않는다. 벌링거는 더멜로우보다 더 적은 양의 주석을 할 뿐이다(1611년 <킹제임스성경>을 습관적으로 거부하는 주석가들은 특정 구절들을 읽을 때 거의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것 같은 인상이 든다).
『마음이 타락한 자』는 “하나님을 버린 자”나 혹은 타락한 주석가들이 모아 놓은 다른 책략들, 술책들, 전략들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서도 타락한다. 기독교 학교들은 하나님(혹은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버리지 않고도 타락하며, 요나와 엘리야도 “타락”했을 때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다. 요나는 설교해야 할 임무를 버렸으며, 엘리야는 영적인 전쟁터를 버렸다. 타락은 더멜로우, 벌링거 등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방황하는 성향이 있는 것, 주여 그것을 저는 느낍니다.”라는 고백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고백이다.
수많은 복과 확실한 기도 응답과 은혜를 보여 주시는 것과 반복되는 징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결코 완전히 “아담의 성품을 극복”하지 못한다(롬 7장). 땅 속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구름 속으로 올라가든지 할 때까지는 결코 극복하지 못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때로 “일어나 벧엘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훌륭하고 위대한 설교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설교를 할 때도 죄를 짓고, 나는 기도할 때도 죄를 지으며, 나의 회개도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나의 눈물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한다!”
타락의 징조는 분명하며 『육신의 일들』(갈 5:18-21)만큼이나 명백하다. 그 징조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어떤 일에 대해 구원받은 것보다 더 흥미를 느끼게 됨.
② 성경 읽기와 기도를 태만히 함.
③하늘 나라에 가고자 하는 소망이 줄어듦.
④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는 일을 즐기는 비판적이고 자기 의적인 태도가 증가함.
⑤ 열매를 맺지 못함. 첫 번째는 구령과 전도지를 나눠주는 일에 무관심함.
⑥주는 것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며, “십일조”에 관한 메시지에 분개함.
⑦보통 때 같으면 성경 공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교회 가기, 기도 등에 보냈을 시간을 TV, 가족, 정원, 차 등에 몰두함.
2) 『마음이 타락한 자는 자기의 행위로 채워지겠고...』
고전적인 예로는 이스라엘 땅 밖에 있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룻 1장)와 이스라엘 땅을 떠난 야곱이 있다(창 28-34장). 탕자의 몸이 먼 나라로 떠나기 전에 그의 마음은 이미 “먼 나라”에 가 있었다. 옛날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면, 그리고 성경보다 다른 책을 더 사랑한다면,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 여러분에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소망이 있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먼 나라’로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 타락한 자에 대한 심판은 예레미야 6:19에 완벽하게 나와 있다. “타락한 자”인가를 점검해 보려면,
① 심방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가? 기도 모임, 복음적인 설교, 성경, 주는 것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가?
② 내가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떤 것인가? TV인가? 스포츠인가? 사회 생활인가? 혼들인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인가?
③ 이 생애에서 나는 누구를 기쁘게 하려 하는가? 나의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군중들인가? 하나님인가? 나의 진정한 보물은 이 땅에 있는가, 아니면 천상에 있는가?
지속적으로 깨어 있지 않다면 혼이 아무도 모르게 썩어 가는 것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타락하고 있는 사람은 타락의 출밤점을 찾아내서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고백하고 필요하다면 보응을 받고, 자신의 행위들을 고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계 2:1-4). “자기의 행위로 채워지는 것”보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다.
3) 『... 선한 사람도 자기 행위로 만족하리라』(14절).
14절 하반부는 타락한 자가 자신의 행위를 보상으로 받는 것과 같이 “선한 사람”도 그 행위의 보상을 받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야.”라는 말과 아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구별을 해야 한다. 성경은 결코 모든 보상과 형벌이 여기서 끝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신약의 계시에서는 구약의 “선한 사람”은 상대적인 선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근본적으로는 『선한 이』가 없으며(눅 18:19)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롬 3:23)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심지어 바울 같은 사람조차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면 메달과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감찰을 받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이사야 3:10이 이구절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된다). 알렉산드리아 서기관들은 모든 것을 마음의 탓으로 돌리고(여느 때 처럼) “... 그의 생각들로부터” 라는 소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훌륭한 아마츄어 심리학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롯의, 타락 일곱 단계를 보자 !
타락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후일 엄청난 죄가 갑자기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때는 놀랄지 모르지만 밥 존스 2세가 정확히 말했던 대로 “인간 성품의 모든 비극적 상황의 밑바닥에는 사악한 생각이 오랫동안 지나왔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작은 사소한 죄들이 이미 들어와 서서히 번지고 난 후에 충격적인 비극이 등장하는 것이다. 롯의 타락 과정은 이점을 우리에게 잘 예시해 주고 있다. 롯이 타락하게 된 일곱 가지 단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1) 탐심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의 온 평지를 바라보니』(창 13:10). 항상 눈이 주님을 떠나는 첫 번째 요소이다. 이 문제는 이브를 무너뜨린 바로 그것이었다. 다윗도 이 문제로 넘어졌다. 아칸 역시 동일한 문제였다. 『내가...보고 탐내서... 취하였나이다』(수 7:21). 이 세상 것들은 매력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대상에 그들의 눈을 고정시키는 실수를 저질러왔다. 바로 이 때문에 욥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내가 내 눈과 더불어 언약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내가 소녀를 생각하랴?』(욥 31:1). 이처럼 탐심은 타락의 첫 번째 원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위해 뭔가 큰 일을 해보겠다는 욕망, 큰 사역을 이루겠다는 욕망, 큰 건물과 큰 땅을 갖겠다는 욕망, 등록 교인수를 늘리고 교회 수입을 크게 늘려 보겠다는 욕망 등이 바로 탐심인 것이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다(골 3:5).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들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8).
2) 선택
롯의 선택은 너무 낮은 곳에 있었다. 그는 산을 택하는 대신 평지를 택하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칼렙과 여호수아는 카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우리가 당장 올라가서 그것을 차지하자. 이는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음이라.』고 말했다(민 13:30). 칼렙은 또한 『이 산을 나에게 주소서』(수 14:12)라고 말했다. 즉 평지가 아닌 산지, 다시 말해 쉬운 곳이 아닌 어려운 곳을 택했던 것이다. 칼렙의 목표는 높이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높은 곳을 보았다. 반면 롯은 낮은 곳을 내려다 본 것이다.
3) 타협
롯은 소돔을 향해 그의 장막을 쳤다. 창세기 13:13을 보면 『그러나 소돔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높은 산지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번성하였다. 아브라함은 분리주의자였고, 반동분자였으며, 고립주의자였던 것이다. 롯은 “사회참여와 인종통합”에 관여하다가 망해 버린 것이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K.O.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연루”(involved)시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연루”란 세상제도에 걸려드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미국 교회가 능력이 없는 이유는 이들이 세상 일에 참여 혹은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고 거듭난 자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하는 것이다. 성경은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눅 16:15)고 말씀한다.
주님께서는 또한 『나는 세상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아니하고...』(요 17: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복지, 게이해방운동, 환경운동, 윤리실천운동, 인권운동, 경제정의실천운동, 공명선거운동 등에 참여하고 연루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구원을 제외하고는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은 무기력한 조직체의 조직원이 되어 그들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의 꽁무니만을 좇아다니는 것이다.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연루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롯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사실 롯은 소돔성의 시의원 혹은 시장보좌관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4) 사로잡힘
롯은 창세기 14:11,12에서 적에 의해 사로잡혔다. 우리가 죄에 너무 가까이 가면 곧 붙잡히게 된다. 구원받은 술꾼은 술가게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구원받은 도둑은 유혹의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만약 당신이 불장난을 하게 되면 불타 버릴 것이다. 만약 당신이 죄에게 손가락을 내밀면 죄는 당신의 손을 붙들 것이고, 곧이어 팔을 붙들 것이며 그 다음은 당신의 몸과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혼을 붙들 것이다.
5) 육신적이 됨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시의회 의원이거나 시의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환경 문제 및 공해 문제 같은 사회 문제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적인 영향력을 얻었다. 그는 그 대신 하나님과 함께 지녔던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 롯은 소돔을 사랑했다. 롯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셔서 불태워 버리실 것들을 사랑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소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짐작이라도 하는가? 그분은 롯과 그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불태우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돔에 대해 생각하셨던 바이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셨지요”라고 말한다. 물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태워 버리실 만큼 사랑하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희한한 주장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다윗의 발언은 이단이라는 주장이다. 『오 주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며 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을 혐오하지 아니하나이까?』(시 139:21).
우리가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 히스테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여섯 가지를 주께서 싫어하시며, 정녕, 그에게 가증한 것이 일곱이니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획들을 꾸미는 마음과, 악으로 달려가는 데 빠른 발과, 거짓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 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니라』(잠 6:16-19). 이 사람들은 소위 새로운 “번역본들”을 50여 개 이상 만들어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자들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신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에 대해 오늘날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은 그것은 이단이라고 한다. 오늘날 배교한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평화, 평화와 사랑만 이야기하면서 마냥 행복해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서 증오, 진노, 심판에 대한 말씀을 대할라치면 즉시 성경을 덮어 버린다. 왜 그런 줄 아는가? 그들은 배교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참으로”(yea, yes란 뜻임)였다. 사탄이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롯은 소돔을 사랑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셨고 그분의 증오를 보여주시기 위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을 어린 아이와, 절름발이까지 포함해서 다 불태우셨다. “그러실 리가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성경을 읽어 보라. 주님은 그렇게 하셨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눅 17:32)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소금기둥으로 변하게 하셨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은사라고 말씀하신 그분께서 5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두 물 속에 수장시켜 버렸다는 사실은 잊어버리는 것같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분명히 보내셨다. 롯은 분명 육신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6) 나약해짐
롯은 도덕적으로 매우 나약해졌고 심지어는 그의 두 딸을 죄에 내어주고자까지 했다.(창 19:8) 이 사실은 어떤 사람이 타락의 길로 빠져 들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지면 그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망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롯이 증거를 하려하자 그는 그의 사위들에게 농담하는 사람같이 보였다. 바로 이 때문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롯은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성읍을 불태우실 것이라고 증거해야만 했다.
만약 롯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에 대해 나누고 싶으니 내 말좀 들어 보게”라고 했다면 사위들은 기꺼이 교제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일어나서 이곳에서 나가라. 주께서 이 성읍을 멸하시리라”고 말했고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그들은 롯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7) 굴속
롯은 굴속(창 19:30)에서 술이 취한 채로 발견된다. 그는 죄를 사랑했다. 그는 죄 가운데 머물렀고 술취함과 부도덕으로 결말이 났다. 롯은 그렇다면 지금 어디 있겠는가? 물론 롯은 하늘에 있다(벧후 2:6-8).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다. 행위와 체험과 감정으로 구원을 받는 줄 아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드로후서 2:6-8에 따르면 롯은 의인이었고 사악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에 그의 의로운 혼이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롯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형제였다. 비록 그가 아브라함의 조카였지만 아브라함은 그를 형제라고 불렀다.
롯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불로 시험을 받게 될 때(고전 3:8-12) 모두 타 버려 모든 것을 잃게 될 그리스도인의 모형이다. 이 구절들을 잘 읽어 보라.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 연루된 채 당신의 감정과 체험을 나누는 상태에 계속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영원히 비겁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당신은 진실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롯과 같은 상태에 있더라도 그는 곧 하늘 나라에 가게 된다.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롯과 같은 상태에 있을 것이며 그런데도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을 염두에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은 이래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면 당신은 이미 롯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3. 마치는 말
우리의 눈이 머물러야 할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바울의 목표도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빌 3:14). 타락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에 시간을 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들이며 이 땅의 지체를 죽음에 넘기고 눈을 조심하는 것뿐이다.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보았을 때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고 6,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다.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머무르라.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당신이 타락했다면 회개하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것이며, 당신의 죄를 잊어버리시고 다시 기회를 주실 것이다. 주님은 삼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 주님은 요나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 주님은 다윗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셨고 시몬 베드로에게도 기회를 주셨다. 주님은 당신에게도 또 다른 기회를 주실 것이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라. 당신의 죄를 판단하고, 그 죄를 자백하여 깨끗하게 된 후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시편 101:3-5,
【 3 내가 사악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타락한 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오니 그것이 내게 붙어 있지 못하리이다.
4 완고한 마음이 내게서 떠나리니 내가 사악한 사람을 알지 아니하리이다.
5 자기 이웃을 은밀히 헐뜯는 자는 누구든지 내가 끊을 것이요, 눈이 거만하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참지 아니하리이다.】
'죄! 악!! 불신앙의 요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귀신이 불신자의 死後靈魂이 아닌 성경적인 증거 (0) | 2014.01.20 |
---|---|
[스크랩] 죄의 종류들 (0) | 2014.01.12 |
[스크랩] 죄란 무엇인가? (0) | 2013.12.20 |
[스크랩] 죄의 종류에 대한 5가지 구분(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해설 정리) (0) | 2013.12.07 |
[스크랩] 성경이 말씀하는 죄들의 목록 (0) | 2013.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