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범세계적 영성(Global Spirituality)의 가능성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12. 8. 10. 16:34

범세계적 영성(Global Spirituality)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웅태 목사

 

 

 
 
 
   
  영성의 의미의 다양성

 

 

    복음주의권 사람들에게는 영성이란 그다지 복잡한 개념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영성은 신학의 생활화라고 볼 때 그 의미는 대개 쉽게 이해되었다. 물론 영성을 펼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하면 그 범위가 한없이 넓은 것은 사실이다. 영성에 관한 책에 대해 예를 들면 리챠드 포스터가 편집한 신앙고전 52선 같은 책들로부터 마질(Magil)이 편집한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Harperrow, Cambridge, 1988)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에 영성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헨리 뉴웬의 책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의 범위는 광대하다. 우리가 평생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영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영성의 의미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특히 영성을 말할 때 좀 더 넓게 보는 사람들 간에는 여러 종류의 영성을 말하고 있다. 불교 영성, 모슬렘의 영성, 힌두교 영성, 일반 사람이 갖고 있는 영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요즘에는 뉴에이지의 영성, 해방신학하는 사람들의 영성, 또 2/3세계 사람들의 영성을 고려한다면 그 복잡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다 검토해보고 영성에 대한 모든 면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통해서는 또 하나의 변수가 될 수 있는 면을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곧 세계화(globalization)와 영성의 연관성이다. 교회의 세계화는 영성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앞으로 이 면은 학자들이 규명해내야 할 것이다. 과연 교회의 세계화가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영성과 신학의 방법론과의 관계

 

 
    영성에 대해 더 이야기 전에 먼저 최근에 일고 있는 몇가지 새로운 신학의 방법론(doing theology)에 대한 조류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또 이것과 영성과의 연관성과 더 나아가서 세계화와 영성에 대해 좀 더 나누기로 하겠다. 최근에 일고 있는 새로운 조류들 중 하나로 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변화들이다. 일부 서구 학자 중에서 서구 신학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지금처럼 지식적인 영역으로서의 신학을 부각시킨 면에 대해서 부족함을 지적한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네스(Dyrness)같은 사람은 이런 신학의 평면화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즉 신학 자체는 어떤 면에서 좀 더 종합적이고 삶과 관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지적으로, 조직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많은 관심이 기울여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소위 지역별 혹은 보통 신학(Vernacular theology)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보통 사람이 살면서 그 삶 속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인격이 변했을 때 그 자체가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예배 중 성경 강해를 듣고 하나님과 만나는 깊은 체험을 하였다면 우리는 곧 신학(doing theology)을 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어떤 서적으로 나와야 신학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꼭 그런 것만이 신학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런 신학은 모든 면을 단순화시켜서 조직적이고 지적인 면으로만 표현한 것이므로 살아있는 신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히려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체험한 삶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곧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글로 옮긴다면 더 바람직하겠지만 설혹 글로 옮기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들 자체가 신학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학과 영성과의 관계는 매우 좁혀진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혹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신학은 영성이 아니고 영성은 신학이 아니라고 생각한 점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정보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성은 신학적이어야 한다. 반면 신학은 반드시 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결국은 신학을 하는 사람 속에서이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속에 이런 신학은 가장 잘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 신학은 영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학이 있는 영성과 영성이 있는 신학의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남미 선교지도자들 대회에서 이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르네바디아 등 몇몇 분이다. 그들의 글은 매우 적절하고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글이다. 지금까지 영성있는 신학의 방법에 대해서는 제시되었지만 구체적인 모델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학을 서구적이고 지식적인 한 평면에 가두어 놓는데서 탈피하여 좀 더 공동체적이며 삶의 영역까지 다루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로써 신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성에 관한 영역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영성과 신학을 잘 조화시켜 서구적인 패턴을 탈피하여 독자적으로 한 쟝르를 얼마나 잘 이루는가에 따라 앞으로 원래 성서에서 의도했던 영성신학 내지는 기독교 영성을 나타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영성의 모델들

 

 
    우리는 범세계적 영성에 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지금까지 나타난 영성의 모델들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기독교 영성에 국한시켜 보겠다. 우선 첫째로, 경건주의적 영성 모델이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 스페너(Spener) 등에 의해 일어난 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종교개혁이후 종교개혁 2세대들이 나타나면서 유럽의 개신교는 신조와 교리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로써 기독교의 훈훈함이 없어지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차디 찬 원론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 이때 스페너 등은 좀 더 성서적인 삶을 생활화하는 쪽으로 운동을 일으켰다. 삶과 신학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유럽과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기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서 선교에도 영향을 주었고, 이들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 현대 선교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서구 선교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반면에 이런 모델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신학과 경건생활의 분리를 가져왔으며, 축소주의적인(reductionistic) 경향을 띠게 되었다. 경건과 사회 책임 및 참여를 구분하는 결과가 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17세기 이후 일어났던 계몽주의와 현대화(modernity)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렸고, 그 결과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 독일같은 곳은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현대적인 사상에 대해 논박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개인적인 영역(private sector)으로 국한되었고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에 의하면 기독교는 공적인 마당(public arena)에서는 후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경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심성에 이런 것들이 꽤 맞는 것 같다.  
     
    두번째 모델은 통합적인 것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영성이란 개인적이면서도 소위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적으로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을 표방한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창조에서 시작하여 구속에 이르는 전반적인 영역을 다루는 것을 영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부부생활, 독신생활, 우리 삶에 대한 관리, 인격, 하나님과의 관계, 대인관계, 예배, 사회생활, 노동, 환경 등 전반적인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가를 다루는 모델이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한다면 성서적 세계관(Biblical Worldview)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성서적인 세계관을 소유하고 세계관을 보다 깊이 소유해서 삶의 각 영역마다 성서적 가치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이 모델이라 볼 수 있겠다. 이 모델은 우리 나라의 경우는 과거 한 십여년 동안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단순하면서도 경건주의적인 영성을 탈피하여 보다 사회적인 영역까지 영성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이런 모델이 갖고 있는 약점이 있다면 초점이 없이 모든 영역을 다 고려함으로 깊이도 없는 형태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주 도덕적인 사람과 이런 영성을 가진 사람과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세번째 모델은 급진적인 모델(unconventional model 또는 political model)이라고 명하고 싶다. 이 모델은 좀 더 정치적이며 더 나아가서는 가난의 관점에서 영성을 생각하는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K.C.Abraham, Bernadette Mbuy-Beya등이 편집한 3세계 영성(Spirituality of the Third world, Maryknoll: Onbis 1994년)에 나타난 영성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 영성은 좀 더 포괄적이며 인간적인 면들을 중시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즉 가난과 불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인 영성이라 볼 수 있다. 이 급진적인 영성은 그 폭만 하더라도 인간성 자체를 영성이라고 보는데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데 까지 다양한 영성들이 이 가운데도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여러 종류의 영성들은 이 세가지 모델과 연관된 것이라 보겠다.  
     
 

상황화와 세계화와 영성의 상관성

 

 
    이상의 세가지 모델은 상황화라는 개념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의 개신교 쪽의 영성을 모델화한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선교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기에는 많은 변수들을 갖게 된다. 즉, 상황 및 신학에 따라서 상황적인 영성도 더 다양하게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종합해보면 위에 말한 세가지 모델로 대충 집약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그 세가지도 상황, 즉 문화에 따라서 매우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무엇인가가 그 예 중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는 무자비한 유대인들과 항상 적대적인 관계 가운데 살아야 한다. 이들에게는 결국 유대인들을 용서하는 것이 영성 중의 중요한 면을 띠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잘못했는데 그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영역에 대한 씨름을 해야할 것이고 그 영역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나갈 때 또 다른 형태의 영성이 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라틴 아메리카대로, 필리핀 사람은 필리핀 사람대로, 한국인은 한국인 나름대로 영성이 다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단순한 세 모델에서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영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곧 다양한 형태의 교회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볼 때 범세계적 영성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범세계적 기독교(Global Christianity)란 것이 가능하겠는가? 또 범세계적 신학(Global Theology)이 타당한 표현인가? 선교학적으로 볼 때 9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초점은 상황화에 맞추어져 있었다. 더 나아가 문화적으로 보아서도 지역신학(local theology)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상황화된 신학과 영성 등이 더 가치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류가 최소한 두가지 이유 때문에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세계화 현상(Globalization)이다. 교회 밖 문화의 세계화, 경제의 세계화 등으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지구촌으로 되어가고 있다. 물론 지금도 문화들이 단일화된 것은 아니고, 주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좁혀져서 과거에 상황화를 강력히 주장했던 때와는 여건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외국적이라고 느끼는 감이 줄어들 것이고 또 인간의 공통적인 필요성 때문에 연관성(relevance)도 대개는 어느 지역이나 공통적으로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상황화를 극대화시키고 세계화 현상에 대해서 눈을 감아도 괜찮은 것인가?  
       
    또 하나는 서구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으로서 소위 현대화(modernity)사상이 힘을 잃고, 포스트 모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 현상이 너무 심화되어 진리를 내세우기 어렵게 되었다. 젊은 세대에게는 유일한 진리(the Truth)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현상으로 되어가고 있다. 바로 이런 조류에 따라서 현대화의 기본이 된 이성주의가 힘을 잃으며 확고부동하게 믿을 수 있는 것도 없어지므로 영적인 진공은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60-70년대 서구에서는 마약이나 각종 향락과 예술 등으로 채워보지만 그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어느 때보다 영적인 공백 상태가 왔고 확고부동한 것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성이 여기저기에서 형성될 것이며 어떤 것도 괜챦다고 생각하고 좇아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서구 쪽에서 과거 상상할 수 없었던 동양종교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이러한 추세의 일면이다. 이럴 때 우리는 범세계적인 영성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것은 이것이다 라고 확실히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를 초월해서 세계 어디서든지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화의 다양성이다. 세계화가 되지만 문화적 정서는 변화지 않을 것이다. 또 문화의 세부적인 면까지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바벨탑 사건 때에 사람들을 나눈 이후 오늘까지 살게 했는데 아무리 한 언어, 영어, 스페인어로 통일한다 해도 역시 문화는 다를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영성, 세계적인 영성을 갖는다는 것은 계속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비록 획일적인 범세계 영성은 지향할 수 없다 해도 다양성 중에 통일성을 살리는 범세계적 영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성은 흔들리고 있는 많은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확실한 진리로써 기독교 영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초문화적인 영성 분야를 우리는 더 넓혀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깊이를 강조하는 영성,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영성,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는 영성,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경배드리는 영성, 각종 자기 연마를 통해 인간의 약점을 이기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영성 등이 이런 초문화적(super-cultural)인 면의 예로 들 수 있다.  
     
 

범세계적 선교학과 범세계적 영성(Global Spirituality)의 가능성

 

 
    범세계적 영성은 범세계적인 선교학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범세계적 선교학(global missiology)은 1990년 중반에 접어들며 그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99년 이구아수에서 열린 범세계 선교학적 이슈에 대한 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21세기를 위한 범세계 선교학(Global Missiology for the 21st Century, Grand Raoids:Baker,2000)이 테일러 박사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이와 같은 시도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첫째는, 범세계적 선교학은 더 이상 선교학을 한 지역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구 선교학이나 비서구 선교학은 범세계 교회의 검증을 받았을 때 범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이제는 보다 균형잡힌 선교학이 나올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지역적 혹은 상황적인 것까지도 범세계 교회 공동체의 검증을 거쳐서 공유하게 될 때 모든 지역적인 것들이 짜임처럼 합쳐져서 보다 온전한 선교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세째로, 범세계 교회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들이 범세계적 해석학적 공동체(Global Hermeneutical Community)의 해석과정을 통해 확정될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다. 이런 과정에는 각각 자신의 독특한 문화적 상황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서로 배우며 서로 보충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선교학이 계속 범세계적으로(global) 되어지며 동시에 지역적인 것도 그 의미를 더하게 된다. 범세계적인 영성도 범세계적 선교학이 갖는 위의 세가지 면을 모두 갖고 있다.  
     
 

범세계적 영성 속의 우리의 영성

 

 
    우리의 영성은 더 이상 우리 것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범세계적 영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성의 범세계적 영성을 형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허심탄회한 희생정신과 항상 기도하는 자세가 범세계적 영성을 증진시키는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세계 교회는 기도에 열심내는 우리의 영성 때문에 한 차원 더 깊어질 수 있다. 반대로 범세계적 영성을 통하여 우리의 영성은 보다 신학적이 될 수 있다. 최근 레네 빠델랴(Rene Padella)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영성을 논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영성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 외에 선교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또 한 사람은( 라틴 아메리카의 영성은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은 영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며 신학과 영성의 통합성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영성은 우리의 영성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 범세계적 영성을 우리가 인식함으로써 더 이상 우리의 영성이 고립된 가운데 서 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서로 배우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영성이 보다 윤택해지게 된다. 이는 더 나아가서 범세계적 영성이 윤택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록 세계는 서구나 비서구 구분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진리를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영성을 종교적인 슈퍼마켓에서 찾고 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가 깊어가며 더욱 더 심화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영성을 더 이상 폐쇄적인 안목으로 보지 않고 범세계적인 관점에서 봄으로 범세계적 교회의 영성과 더불어, 보다 우리 상황에 적중하는 우리의 영성을 형성해야 한다. 이럴 때 이성주의의 포로에서 벗어나 고삐풀린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현대 지성인들을 향하여 진리를 토대로 한 우리의 영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산족선교
글쓴이 : 일오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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