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

[스크랩]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단을 이끌고 하와이에 간 남양교회 홍승하권사의 성령충만하여 귀신을 내 쫒고 전도하여 1년 7교회설립

하나님아들 2013. 10. 1. 14:53

읽을 거리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단을 이끌고 하와이로 간, 홍승하전도사. 당시 권사의 활약상을 쉬운 말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참고 : 당시 홍승하권사는 남양교회(현재는 화성시청이 있는 남양동 남양감리교회)의 권사로, 성령이 충만하여 한해에 7개의 교회를 세우는 엄청난 전도사역을 펼칩니다.(부족한 제가 연구한 내용의 자료입니다.)

 

“...흉악한 사귀들린 남자의 일음은

홍소원이라. 나이 지금 20세인데 7년전부터 사귀들녀 점점 미친 마음이 발하야 밤낮 잠도 자지 않고 낫을 가지고 그 바지와 아내를 해아려하며 음식은 밤에도 두세번씻 먹고 낮에는 수없이 먹어 가며 사람을 보면 낫으로 해하려 하더니 권사 홍승하씨가 믿는 형제 두어분과 같이가서 참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 귀에 들리매 점점 머리를 숙이거늘 모든 집안을 모으고 기도하고 왔더니 몇일 후에 다시 가서 어떠함을 물은데 홍소원씨 말이 밤에 꿈을 꾸니 실신할때부터 항상 같이 있던 여인 셋이 울며 하는 말이 오늘은 홍소원씨가 읍내 회당에 가겠으니 우리는 피하여 가노라 하고 돌아보고 가더니...그 후로 항상 회당에 와서 기도도하고 찬미도 하니 이 엇지 주의 권능이 아니리오...리씬 대과부라 흉악한 사귀들려 밤낮으로 야단하고 제 몸을 제가 상하더니 믿는 형제들이 불쌍히 여겨 잡아다 놓고 찬미 기도할 때 그 여인이 소리지르고 무섭다하고 도망하거늘 즉시 붙잡아 앉히고 홍승하씨가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일음으로 그 여인에게서 나가라 하매 삭귀가 악한 소리로 거역하거늘 가라대 나도 예수만하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고 자기 몸을 심히 상하게 하거늘 홍승하씨께서 다시 꾸짖어 가로대 예수의 일음으로 사귀야 나가고

여인아 거기 엎디어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겠다하니 여인이 순종하야 업디이고 기도할 동안에 조용하더니 기도를 마치고 일어보니정신이 깨끗하여 손으로 스스로 때린대를 만지며 심히 아파하며 그 후부터 영영 깨끗하여 하루 세번씩 찬미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열심으로 회당에 다니니 이는 참신 하나님께서 큰 권세로 남양교회에 주심이니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하오며 둘째는 그곳 모든 형제 자매의 믿음을 치하할만하도다.“(신학월보,1903.2)

 

□초기 남양군 지역 교회설립 (1996년. 최종천)

남양지역의 선교는 1887년에 내한하여 서울과 경기도 제물포와 남양군(지금의 화성시 남양. 사강일대) 선교를 담당한 선교사 조원시(趙元時)의 활약상과 초기 영흥도 신자들과 제물포지역 매서인들의 공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조원시(趙元時)선교사는 제물포지방을 중심으로한 선교와 교육(영화학당 설립)에 열을 올리면서 남양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제물포구역 남양군 영흥군 일대(내평리와 엇벌)는 아펜젤러와 벙커 등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면서 초기 신자들이 생겨났다(영흥도는 1897년 이전에 이 두선교사와 전도인들에 의해 영흥도 내평리와 업벌(당시는 엇벌)리가 복음화되었다고 함).

 

영흥도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로 바다물이 빠지면 바다가 뭍이 드러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통일유적지 당성에서 눈 앞에 펼쳐진 남양군 해안에서 바라다보면 대부도가 바로 눈 앞 보이고 저 지평선 너머로 영흥도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남양군 선교가 초기 부터 영흥도교회의 성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육지와 가까운 영흥도와 대부도 주민들은 남양,사강,마도일대의 사람들과 혼례를 거행하였는데 영흥도에서 시집 온 부인들과 홍승하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초기 남양과 사강,마도교회들이 설립되었다.

 

당시 남양군에 속해있던 영흥도와, 대부도, 선감도가 일찍 부터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서 남양, 사강, 마도 일대가 1900년-1905년 사이에 거의 전지역 복음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02년 봄, 남양계삭회의 상황을 볼 것 같으면, 선교사 조원시와 서원보가 남양읍에 내려와 계삭회를 열었는데 남양읍교회와 남양읍에서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과 섬지역인 영흥도와 대부도,선감도교회가 모여서 사무를 보았다는 초기 기록이 나온다

 

1902년경에는 빽목사가 남양 양철리교회에 소학교를 세웠다(남학도 아홉명,여학도 육명).

 

1901년 부터 본격적으로 남양지역을 복음화시킨 홍승하 역시 영흥도가 고향이며,나중에는 영흥도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

 

남양 송동 김더현씨의 자부도 1903년도에 영흥 친가에서 크게 핍박을 받았다는 기사가 신학월보에 나오는데 시집오기 수년전에 이미 영흥도 친정에서 예수를 깊이 있게 믿어 성령이 충만하여 만나는 여인내들에게 예수의 도리를 증거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월도교회는 남양 앞바다에서 거리가 제법 먼 곳에 있지만 영흥도,대부도,선 감도에 이어 복음이 들어갔다.

 

남양지역(현 화성군) 선교는 이들 섬지역 선교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있다. 따라서 초기 전도가 선교사들의 전도 보다는 영흥도와 주변의 섬지역 선교로 인해 초기 섬지역 신자들이 이 곳 남양지역 일대를 전도화 했거나 초기 교회를 부흥시킨 주요 인물들로 선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교회설립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남양지역 초기선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 섬지역에 대한 사료발굴과 증언 채취등의 작업이 급선무라고 여겨진다.

 

특히 자월도 자월리에는 선교사들이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전주나 목포로 내려가기 위해 숙박을 했던 가옥이 만아 있어 발굴.보존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사강감리교회(위치:경기도 화성군 사강면 송산리로 통일유적지 당성 아래에 있다.)의 설립년월일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사강감리교회는 해당 교회의 연혁에서 교회의 설립년도를 1904년 남양교회 홍승하<영흥도 사람>에 의해서라고만 밝히고 있다.)

한편, 신학월보 1901년 1월호의 교회진보 소식을 살펴볼 것 같으면,,남양읍내에서 3리되는 향갈동에 前죽산군수 김응수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읍에 예수교를 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결과 1900년에 믿는 집이 두집이 생겨났고,당시 인천 제물포교회의 책파는 형제가 여러번 이곳 사강.마산포 일대를 다니면서 성경책을 100여권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1900년 4월 부활주일에 읍교회가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권사 복정재씨가 신학월보에 실은 위 기사내용은 당시의 정황에 맞추어 신중하게 검토해 볼만하다.(활하문 출신 김통달권사가 남양교회가 설립된 해에 출생했다는 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살피자면 1897년이 맞는 것 같다).

 

사강(마산포)교회의 교회설립을 밝힐 수 있는 근거를 1901년 1월호 신학월보에서 살펴보면

 

“마산포 근처 포막동에 다섯사람이 새로 믿는데...1900년 9월 부터 주일예배를 처음으로 실시하였고...여름동안에 전도인 오시기를 大旱에 雲霓를 바라는듯 하였노라 하고....”

 

1900년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기록들이 이 밖에도 여러군데에서 나온다.

 

초기에 이곳에 성경을 전한 매서인으로는 곽응환이라는 인물도 나타나고 있으며, 1906년 7월 그리스도신문 기사에는 교회설립이 5,6년인데 믿는 형제가 오십여명이고 일본인 형제 겸상익과 본교회 조사 송사원이 총순 박준호에게 허락을 받아낸 후 경무청 옥중 죄수에게 매일 전도하고 있는 기사가 생생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한번 쯤은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만한 기사 내용이다.

 

1919년 3월에는 만세시위로 인해 초가예배당이 전소되는 어려움도 있었다.

 

사강감리교회가 위치한 마산포는 뱃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주변에 복음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다. 당성과 화양진을 끼고 있는 이 곳은 당시 선교사들의 뱃길이라는 점에서 사뭇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이 다른 곳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최종천치유사역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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