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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중 강조하는 ‘비지시적 설교’ 창시자 프레드 크래독 1 탁월한 설교를 하라.

하나님아들 2013. 9. 14. 15:33

 

 

청중 강조하는 ‘비지시적 설교’ 창시자 프레드 크래독 1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9
2008년 07월 03일 (목) 00:00:00 권영삼 032kwon@naver.com

지난 해 1월, 한국설교학회와 글로벌 리서치가 목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교에 있어 설교자들은 ‘전달력이 가장 부족하다’(24.6%)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자료 준비 부족’(24.5%), ‘적용’(22%), ‘예화’(1.47%), ‘본문 이해 및 해석’(7.8%) 순이었다. 이 결과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성경 이해에는 별반 어려움을 많이 느끼지 않지만, 설교 전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결과에 대해 총신대 신대원 설교학 류응렬 교수는 “전통적인 설교는 전달법에 대한 강조보다 원고를 충실하게 읽어도 청중이 귀를 기울인 시기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강단은 준비된 성도들보다 세상에 빼앗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시켜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며 설교자들이 느끼는 고충을 설명했다.

한국교회의 지난 한 세기는, 설교가 교회 사역의 중심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원동력인 시기였다. 설교를 통해 교회 부흥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동안,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이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고달파졌다.

 

21세기 청중은 지난 세기의 청중과 여러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활자 문화로 대변되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인터넷, 휴대 전화기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로 바뀌었다.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조금이라도 지겨우면 집중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설교 전달방법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설교자들에게 수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크래독의 설교 방법과 같은 새로운 설교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크래독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통해, 현대의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설교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설교학 이론의 AD/BC로 구분 짓는 잣대


프레드 크래독은 설교 갱신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족장’(Patriarch)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Richard L. Eslinger, A New Hearing: Living Options in Homiletic Method, p.122). 그는 20세기의 마지막 ⅓기간 동안 가장 창조적이고 영향력 있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테네시 주 훔볼트(Humbolt) 태생인 크래독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단(Disciples of Christ)의 크리스천교회(the Christian Church)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3년부터 에모리대(Emory University) 캔들러신학교(Candler School of Theology)에서 설교와 신약학을 가르쳤고, 1993년에 은퇴했다. 현재까지도 에모리대 명예교수로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북조지아(North Georgia)에서 살고 있고, 거기서 체리록 크리스천 교회(Cherry Log Christian Church)라는 조그만 시골교회를 담임목회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크래독은 설교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소요의 기간이었고, 교회에서 설교의 권위는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교회 강단은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시각 지향적이고, 사회적으로 활동적이며,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그 당시 문화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췬 것이다. 게다가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적 성찰이 두드러지면서 설교에 대한 좌절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래독은 설교에 헌신하는 한편, 1960년대의 문화적 혁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이러한 이중적 헌신이 크래독의 출판물들, 즉 설교학 책들과 성경 주석에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크래독이 저술한 대표적인 저서는「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복음 엿듣기」(Overhearing the Gospel, Nashville),「설교」(Preaching)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권위 없는 자처럼」은 과거 설교학 이론에서 타당하고 개혁적인 쟁점들의 윤곽을 보여주는 데 있어 예언자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설교학 이론의 AD와 BC를 나누게 하는 책으로서 설교 형식을 설교학적 과제의 중심에 자리 잡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복음 엿듣기」는 설교 커뮤니케이션 방향을 직접에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이유를 기술하고 있다. 「설교」는 설교학 교과서로서,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과 설교를 공부하는 신학교 학생들을 위해 저술한 책이다.

 

또한 크래독은 성경 주석들도 저술했다. 그 중 대표적인 책으로 제임스 L. 메이즈(james L. Mays), 패트릭 D. 밀러(Patrick D. Miller)와 폴 J. 악트마이어(Paul J. Achtemeier)가 편집자로 수고한 Interpretation 주석 시리즈의「빌립보서」(Interpretation, Philippians: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와「누가복음」(Interpretation, Luke: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설교자를 위한 자료와 많은 논문들을 저술했다.

 

 

크래독의 이론은 시대적 산물


크래독의 설교 이론이 등장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에는 몇 가지 사회적 격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시민 권리 투쟁들, J.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암살, 베트남 전쟁, 도시 폭동, 생태적 관심사들의 정치화, 페미니즘(Feminism)의 등장,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그리고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사임 등이 그것이다.

 

또한, 1960년대의 문화적 변화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이미지로 상징화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도처에 있는 사람들과의 즉각적인 연결로 인해 모든 세대에 다원주의(Pluralism)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도처에 있던 사람들은 공통적인 열망에 자극받았다. 여성들과 유색인들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남성 지배적인 ‘계급적 권력 체계’(Hierarchical)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찰스 캠벨(Charles L. Campbell)은 크래독의 설교 방법론을 형성하는데 끼친 주요한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했다(Charles L. Campbell, “Craddock, Fred B.,” in Concise Encyclopedia of Preaching, p.94).

 

첫째, 크래독의 주석 작업이 설교를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결론 지점에서 설교를 시작하기보다, 귀납적인 주석을 반복하려고 했다.

둘째, 결론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강압적으로 저장시키기보다 청중들 스스로가 결론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 존 듀이(John Dewey)의 교육 철학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크래독이 귀납적 설교를 통해 성취하려는 내용이란 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크래독은 만인제사장 교리를 신학적으로 강화했다. 즉, 청중 각자가 자신의 결론을 도출해내어 그들 자신의 결단에 이르도록 하는 자유와 책임을 제공한다.

넷째, 크래독은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에게 새로운 해석학의 영향을 받아 설교의 언어적 차원들, 예수님 비유의 중요성 그리고 설교의 구두적(Oral), 경험적(Experiential), 사건적(Event) 특징을 강조했다. 또한, 죄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의 간접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귀납적인 방법론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설교자로서의 책임


크래독의 설교론은 크게 세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이전의 그 누구보다 설교자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청중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셋째, 크래독은 설교자의 경험을 중요시하고 강조했다.

설교자의 무한책임을 강조하는 크래독은 거침이 없다.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설교에 담은 것에 대해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설교자를 엄격하게 비판한다. 그는 설교자가 성경의 해석 작업을 마친 후, 그 설교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본문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로 만들지 않고, 단지 본문이 말한 대로만 전했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옳지 않은 자세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설교자가 성경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설교자의 삶에서 그 본문을 다시 재해석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설교론은 그의 설교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그의 설교는, 늘 성경시대와 현대의 교차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이를 악물고 기도하기’라는 설교에서 크래독이 언급하는 사도 바울은 일상생활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과 동일한 인물로 그려진다(Eugene L. Lowry,「설교자여, 준비된 스토리텔러가 돼라」, p.220-228).

또한, ‘믿음과 두려움’이라는 설교에서 폭풍 가운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은 모두 오늘날 주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로 다가온다(Fred B. Craddock,「체리록교회와 함께 하는 크래독의 이야기 설교」, p.68-77). 이처럼 크래독은 성경의 본문을 설교자와 청중이 처한 현실로 가져오는 작업이 설교자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청중의 이해에 대한 강조


전통적인 연역적 설교에서, 청중은 참여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크래독은 이러한 이전 시대의 설교에서 청중의 역할을 ‘창받는 사람’(Javelin Catcher)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청중의 역할이 지닌 수동성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청중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사람 또는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므로 회중은 목사의 주석 작업 끝에서만이 아니라, 목사의 주석 작업 동안에도 목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래독의 ‘귀납적 설교’는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방법론이다. 현대 설교학에 중요한 틀을 제시하면서 중요한 공헌을 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크래독의 이론들은 많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크래독은 과도할 정도로 청중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청중들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자신의 느낌을 느끼며, 그리고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진다. 그렇게 하여 청중들 자신이 메시지의 소유권을 갖도록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피동적인 위치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사실은 귀납법이 ‘열린 결론’(Open-ended)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두드러진다. 이 말은 말하는 사람의 결론이 아니라, 청중 자신의 결론에 도달할 권리를 받는 것을 말한다. 즉, 청중은 설교자의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자신의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결론을 갖고 그 결론에 응답하는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청중의 역할에 대한 관심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 크래독은, 바로 이 점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더 이상 성경의 권위를 전제하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다.

 

 

경험의 추구


크래독은 또한 설교자는 경험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래독이 단순한 말씀 전달을 넘어 현실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청중을 적극적으로 설교에 동참시키도록 노력한 것은 설교에서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형식(Form)과 내러티브(Narrative)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크래독은 형식의 기능으로 “관심을 유발시키고 지속시키기, 그 자료에 대한 청중의 경험을 형성하기, 청중의 신앙을 형성하기, 청중들에게 요구되는 참여의 정도를 결정하기” 등을 언급하면서 형식의 중요성을 다른 설교자들에게 주장하고 있다(Fred B. Craddock, Preaching, p.172-175). 또한 그는 성경 속에 기록된 다양한 문학 형식들- 시, 무용담, 잠언, 찬송, 일기, 전기, 비유, 서신, 드라마, 신화, 대화, 복음 등-에 주목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효과적인 들음을 위해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문학 형식들과 그 분위기를 고려해서 청중들에게 들려지고 제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유진 로우리(Eugene L. Lowry)는 “크래독이 귀납적 설교를 말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내러티브 설교’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의 설교가 내러티브 설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인정하고 있다(Eugene L. Lowry, “The Revolution of Sermonic Shape,” in Listening to the Word: Studies in Honor of Fred B. Craddock, edited by Gail R O'Day and Thomas G. Long, p.94). 캠벨도 “내러티브 커뮤니케이션의 구체적이며 간접적 특징으로 크래독의 통찰들은 내러티브 설교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권위 없는 자처럼」에서 설교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강조, 특히 설교 방법론에 대한 강조로 인해 성경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관심을 크래독이 고조시킨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내러티브의 장점을 언급한 내용은 크래독이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을 저술한「복음 엿듣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를 설교의 행위 속에 참여한 청중의 경험에 두었고, 그 경험은 바로 ‘엿들음’(overhearing)의 경험이라고 보았다. 이런 엿들음의 경험을 유발시킬 수 있는 구조가 바로 내러티브 구조라고 하면서 내러티브의 탁월함을 주장한다.

 

 

상상력 동원한 평범한 진리로 설교한다

크래독의 이론은 보수적인 설교신학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전달 방법은 오늘날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크래독의 설교 전달의 특징을 살펴보자.

 

 

크래독 설교의 전달적 특징

크래독 설교의 첫 번째 특징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반적인 진리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설교학 이론에서는 ‘설교의 귀납적 움직임’(Inductive Movement)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귀납적인 움직임은 청중들이 익숙하고 친숙한 상황에서 출발해서 설교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한다.

연역적 설교는 대개 대지설교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연역적 설교는 설교의 움직임이 단절된다는 단점이 있다. 주로 세 개의 대지가 각자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중심주제에 또 다른 세 개의 주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즉 세 편의 설교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이어 붙어져서 한 번에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크래독 설교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설교 전체가 움직이는 특징을 지닌다. 그 움직임은 설교가 진행될수록, 점차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해지고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 풍성해지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청중들로 하여금 공감력이 더해져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둘째, 크래독 설교는 익숙한 본문도 새롭게 보이게 한다. 이는 문학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브스키에 의해 강조된 개념이다. 자동화된 관습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기계적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의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라는 설교에서 청중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듣게 된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이 요한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모습과 같은 설명들은 결코 생소한 내용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이 설교에서는 처음 듣는 얘기처럼 전해진다.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래독은 이 설교에서 매우 적절하게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셋째, 크래독 설교는 귀납적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이 전체의 통일성(Unity)을 이룬다. 크래독은 ‘단 하나의 개념’(A Single Idea)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은 설교의 각 단계에서 통일성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가지고, 처음부터 결론에 이를 때까지 사건이 모두 인과관계를 가지고 연결한다.

이러한 인과관계를 통한 구성을 연극이나 영화 시나리오에서는 플롯(Plot)이라고 부른다. 플롯은 고리로 연결된 사슬처럼 행동과 태도의 패턴이 묶여 전체성을 보여준다. 플롯은 구조로 작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요소들을 엮어주는 힘이 있다. 크래독 설교는 짜임새 있는 연관성을 갖고 이야기 요소를 엮어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넷째, 상상력의 활용이다. 크래독은 청중에게 성경 내용을 더욱 입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가 설교에서 사용하는 상상력은 청중들로 하여금 매우 그럴 듯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다섯째, 크래독은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단어나 어구, 질문들을 사용한다. ‘요한의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라는 설교에서는 설교 제목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극적인 긴장을 준다. 마찬가지로, ‘이를 악물고 기도하기’라는 설교에서는 ‘쓰라리다’(Bitter)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요한의 설교에 힘을 실어주거나 바울이 처한 상황을 경험하게 한다.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긍정적 효과

제임스 엥겔(James F. Engel)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고 전달은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단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지 전달로서 설교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전한 설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크래독의 주장과 일치한다. 크래독의 설교는 단순히 전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설교는 청중과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 있다.

크래독 설교는 청중이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든다. 그의 설교는 성경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성경 본문이 오늘날 청중이 살고 있는 현장이라고 느끼도록 만든다. 심리학 용어 중 ‘자기참조효과’(Self-Reference Effect)란 말이 있다. 인간이 자기를 생각할 때 여러 가지 성질이나 신체 또는 능력에 대한 일련의 것들을 포함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이러한 성질 어딘가와 관련이 되어 있으면 그 정보는 기억하기가 쉬워진다는 의미다.

 

설교자가 성경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장과 연결시킬 경우, 청중은 성경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느끼는 거리감을 좁힌다. 특히, 새 신자나 비신자는 성경 배경과 용어가 너무 생소하게 느끼는 것이 많다. 따라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단순히 추측을 통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크래독의 전달 방법은 청중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배경과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이 자신들이 사는 세상과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닌, 그들에게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가기 쉽게 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크래독은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가지고 설교를 듣게 한다. 설교에서 의도된 패턴을 가지고 원인과 결과의 플롯을 사용할 경우, 청중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전개될 설교의 내용에 기대감을 갖게 된다.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설교에서도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인과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앞서 분석한 대로, 크래독 설교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언급된 내용들이 마지막 결말과 연관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중간에 언급된 내용들이 결말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때문에 긴장감을 지속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크래독 설교는 한 가지 중심주제에서 결코 초점이 흐려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한 가지 설교 목적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설교에서 언급된 내용은 중심 주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전달방법은 청중들로 하여금 주제에 집중하게 만든다. 삼대지 설교는 종종 설교자가 너무 많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에, 청중이 논점을 놓칠 수 있다. 설교를 마쳤을 경우, 너무 많은 내용으로 설교가 각인(imprinting)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크래독 설교는 대지설교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효과가 있다.

한편, 크래독은 청중이 설교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청중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설교를 듣지 않게 된다. 청중은 설교에서 능동적일 경우, 역동성이 살아난다. 청중이 설교를 따라가면서 기대하고 생각하며 설교의 논리와 설교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진리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중에게 긍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크래독 설교는 감동적인 마무리로 청중에게 설교 내용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설교가 단지 논리적인 흐름으로만 마무리 된다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크래독 설교는 마무리를 청중이 도저히 잊지 못할 감동적인 얘기를 전하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그는 ‘왜 십자가입니까?’ 설교에서, 무릎을 다친 아이가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서 나눈 얘기를 통해서 설교를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눈물 흘리는 엄마의 얘기를 통해서 하나님 무릎에 앉아 있는 우리를 보게 만든다.

‘이를 악물고 기도하기’ 설교에서도, 주인 없는 고양이를 데려다가 잘 보살펴 주었을 때 당한 상처를 통해, 하나님 손에도 우리로 인해 이와 같은 상처가 있다는 얘기는 청중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고 있다.

 

 

크래독 설교론의 비판
크래독의 설교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시도로 보이지만, 신학적인 면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크래독은 전통적인 설교자들처럼 더 이상 본문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오늘날 교회에서 기독교 정신은 이미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목회자들은 더 이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갖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하는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말씀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해석학적인 문제점이다. 그의 설교 이론에 천착하다 보면, 성경해석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회의론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가 성경의 본문을 등장인물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설교할 수 있고, 또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성경 본문이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맘대로 해석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과 같다. 적용의 경우는 설교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해석까지도 설교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셋째, 크래독은 상상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크래독은 설교에서 수많은 상상력을 가동한다. 대부분 그는 성경적인 근거와 배경을 들어서 상상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때로는 연속성이 없는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끼워 맞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넷째, 크래독 설교의 가장 큰 단점은, 결론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에게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점이다. 장신대 김운용 요수는 크래독의 ‘열린 결론’(Open-Ended)은 청중들이 요점을 놓치거나 잘못된 요점을 가질 가능성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설교에서 항상 결말을 제대로 맺지 않는다. 심지어, 설교 내내 다룬 내용과 전혀 다른 말로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믿음과 두려움’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예수의 제자가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을 때 바닷가에서 보여준 행동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 이유가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설교 내내 믿음이 없는 문제를 두려움 때문이라고 밝혀냈으면서도 정작 결론에 이르러서는 당황스럽게 마무리 한다. 그는 어렵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서 별로 관심 없는 어린아이의 얘기로 끝마치면서, 믿음 없이 해안에 도착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크래독의 의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을 가져야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러 갑자기 앞의 설교 내용과 연관시킬 수 없는 얘기로 마무리하기 때문에 청중은 매우 혼란스럽기만 하다.

 

설교의 결론을 청중에게 맡기자는 주장은 성경의 본문에 정확한 의도가 없다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총신대 설교학 류응렬 교수는 크래독의 이러한 주장의 위험성에 대해 “결론과 적용을 청중의 손에 넘기자는 주장은 결국 성경 본문에 대한 절대 진리의 인식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밝혔다(“새설교학: 최근 설교학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 「신학지남」,2005년 봄호, p.205). 이처럼 성경의 본문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여긴다면 성경에는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다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다섯째, 청중에게 분명한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내용에 대한 오해를 일으킨다. 크래독 설교는 청중에게 직접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이 맘대로 성경의 본문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적용을 청중이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까지도 그는 청중의 몫으로 돌린다. 그렇다면, 청중이 성경의 의도와 다른 결론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설교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크래독의 설교방법론이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결론이 불분명하다는 점과 다양한 해석을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해서 적용한다면 21세기의 청중에 적합한 전달방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이 변질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청중에게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늘 시대는 변해간다. 그 시대에 따라서 청중도 변해간다. 그들이 이해하는 방법대로 전해주는 것은 결코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설교는 청중의 필요에 부응하는 청중 중심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말씀 중심이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설교 방법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요구되기에 앞으로도 더욱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출처 : 무학교회 청년사역 셀 G12 제자훈련
글쓴이 : 이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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