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장1-15절(거듭남의 신비)13.5.26
Ⅰ.지난 성령강림주일에는 성령시대의 개막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한마음으로 기도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그들은 다 나가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고, 동시에 그로 인하여 이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임마뉴엘의 삶을 누리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태어난 교회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일을 전하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큰 일임을 들었습니다.
오늘 성령으로 거듭남에 관한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성경에 정통한 학자였고, 당시 시대상황으로 본다면, 또 유대인의 관원으로 산헤드린이라는 오늘로 말하면 국회의원직에 있었습니다. 10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선생, 즉 국가의 지도자의 한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낮에 드러내어놓고 무명의 예수님을 만나러오기는 거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남몰래 밤에 주님을 만나러왔습니다. 밤에라도 구도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지한 구도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은 언제든지 진지하게 만나주시고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도, 많은 지식과 학식을 가진 사람도,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만족은 있지만 내 생명의 주를 만나지 못하면, 결코 참 만족이나,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주님께 나아와야 하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뭐 특별히 다른 것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우려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자를 무척이나 귀히 여기셔서 주님께 있는 비밀스러운 것, 천국의 비밀까지도 다 알려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요?
Ⅱ. 우리는 간혹 다시 태어난다는 말들을 듣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청년의 때에 책임적인 인생을 자각하기 시작을 할 때,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자각과 함께 보람있는 인생을 생각하고 목표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그래서 입지를 세우고 그의 삶의 태도가 달라
지기 시작하는 이러한 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철학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두부를 먹고 이제는 내가 바로 살아야지 하고 정말 전보다는 바르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떠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삶의 태도, 자세가 좀 달라진 것이지 이러한 것은 성경말씀에서 거듭난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다고 하는 것, 즉 重生이란 어떤 것을 뜻할까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난다는 것은,
1. 전혀 다른 씨(種子)로 出生하는 것입니다(3-4,8). 거듭남이란,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무언가를 더하고 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난다(출생)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出生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나중이나 똑같은 나 자신인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출생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날 때는 몰라도 나중에는 본인이 알게 됩니다. 거듭난 우리는 이전과는 본향도 다르고, 아버지도 다르고, 우리 자신도 이제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심오한 진리는 논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냥 믿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씨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타락하면서 씨가 변질돼버렸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씨를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이 씨가 衆多한 민족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계속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의 마지막 왕손인 요셉 대에까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씨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씨’로 오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타락하여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 오셔야 했습니다.‘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요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니라’ 전혀 다른 즉 하나님의 씨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용어자체가 처음으로 등장하므로 이해가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니고데모 같은 그 시대의 첨단을 달리던 엘리트도 잘 이해
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가 거듭나야하겠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질문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 ??
그러면 우리는 거듭난다고 하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듭난다는 것을 지금의 나 자신에다 자꾸 무엇을 얼마큼 더하고 무엇을 얼마만큼 제거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듭이라는 용어의 한문이 重生입니다. 거듭할 重자에 날生자입니다. 이중 삼중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원래의 상태에서 훈련을 더하고, 공부를 더하고, 노력을 더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예를 들면 덧문 덧칠 덧버선 덧입기 라는 말처럼, 어떤 상태에 하나 더 보태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거듭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노아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영이 그들에게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게 되리라.’이렇게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의지도 생각도 말도 다 그 인격이 영성이 다 떠나가버린 육체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사람이 아담의 자손으로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어 납니다. 유전적으로 기질적으로 그렇게 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그 육성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아무리 거기다 훈련을 덧입히고, 지식을 덧입히고, 노력을 더하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아담의 자손이고 멸망의 씨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로다. 하시고, 요6:68-주님도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도다” 그러시쟎습니까? 또 요일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고 합니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자신이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저 집사님을 보면 아무리 봐도 거듭난 새사람이 아닌 것 같고,
또 자기 자신을 보아도 아무래도 자기 자신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러시거든요.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성경이 ‘기다’ 그러면 그런 줄 알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가 바로 새로 출생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믿음의 사건은 믿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어요. 성도님들은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 출생한 거듭난 나 자신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전혀 다른 관계맺기를 하는 것입니다(6-7). 씨가 다르면 당연히 관계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부모, 자식, 부부, 친구, 돈, 집안, 직업, 실적, 인기 등과 다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관계들은 利害關係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관계의 줄이 힘없이 끊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믿음으로 가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모두 새로운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안에 예수안에 거하는 믿음의 관계가 되면 다른 모든 관계는 사명의 관계가 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정상적인 ‘관계맺기’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신 부부관계, 하나님이 주신 자식, 하나님이 주신 돈, 하나님이 보내주신 직장, 학교,,,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 이렇게 다 바뀌어버립니다. 미션의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20:39절에서도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삼백그램을 가지고 왔다고 할 정도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으로 강조됩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아직 무슨 학파를 이룰만한 랍비의 계열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리고 공공연하게 죄인들의 친구라고 부를 만큼 그 시대의 문제아인 세리들이 주님을 쫓아다니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듯 하는 행동을 보여서는 곤란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잘나가고 덕망있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요즘 우리식으
로 말하면, 명문대를 나와 하바드라도 나온 유학파로서 초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체로 탁월한 자들이에요.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라. 이 유대인의 지도자는 밑에 그 각주를 보면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라 그래요.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법관정도 됩니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이면서 산헤드린 공회 회원인 니고데모는 분명 그 시대에는 ‘아주 잘나가는 나’ 엘리트인 ‘나’라는 의식으로 꽉 차있는 있는 사람이에요. 이러한 自意識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니고데모가 지금 시골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와 관계를 맺었다가는, 이 기존의 관계에 충분히 손상이 올 수 있어서 남의 耳目을 피하여 몰래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겁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 덕망, 명예, 그리고 기존의 모든 관계를 튼튼히 잘 지키고, 유지하면서 거기다가 예수님께 밤에 찾아와서 괜찮으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 보태려고 덧입히려고, 찾아 왔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니고데모야 너가 지금까지 이루고 갖추고 관계하고 있는 그런 마음 그런 자신에다 나와의 관계를 보태려고 하느냐? 너 바리세인, 법관 의원 율법학자 너의 그 모든 것에 나를 보태려고 하지말고 거듭나야 한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 부자 잘난 사람, 수재,가문 집안, 이모든 것들이 모아져서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관계들이 송두리째 몽땅 다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욥이 그랬지 않습니까?
예)한 번 말씀드렸듯이 의인 욥이 10명의 아들딸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니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 많은 재산을 역시 하루아침에 재앙으로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니 그 시대 동방의 부자라는 자리가 욥에게서 사라져버립니다. 곧이어 그의 몸이 전신에 심한 악창이 나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건강과의 관계가 없어집니다. 아내가 떠나니 남편이라는
관계가 끊어져버립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며 그의 심성을 의심을 하니 친구와의 관계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그 시대 사회적으로 쌓아온 덕망도 무너져버립니다. 사회와의 관계도 끊어져 버립니다. 지금까지 내게 붙어있으며 나를 이루던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모든 관계가 문자 그대로 無가 되고 맙니다. 낫띵이지요.
그런데 그 욥이 다 없어진 그때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 고백이 욥기42장5절이지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고 욥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친구 가족 건강 물질과의 관계가 새롭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다 끊어지고 그 마음이 완전 무가 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무엇보다 누구보다 처음 만나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생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 그들의 모든 관계가 인생이 종친 것 같은 그 시점에서 하나님 제대로 만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믿음의 열조들의 이러한 일들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예표적으로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같은 것이지요.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 욥처럼 요셉처럼 자식이 죽고, 노예로 팔리고, 건강을 잃고, 하는 그 과정을 다 겪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지요.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출생을 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기 위하여,
3. 십자가의 은혜를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입니다(14-15).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사건을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랫동안 관계해 온 죄악의 중독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내 것으로 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왜 십자가의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까? 거저 그냥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하여 구약시대의 욥처럼 자식잃고 재물잃고 건강잃고 아내잃고 덕망잃고 하는 과정을 다 겪어야 거듭난다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예수께서 나를 위하고, 나의 죄 때문에, 나 대신, 내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분명히 거기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관계하던 모든 것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와, 나와 관계하던 모든 것이 다 십자가에서는 끝났습니다. 종을 쳐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을 나에게 이루어진 일로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자기화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운 출생을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 상태 꼬라지를 보면 영 아닌 것 같은데, 믿음으로 나의 身分 關係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상태는 말하지 맙시다.
14-15절을 다 같이 읽으십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들이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먹는 음식의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하며 원망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물리면 猛毒으로 高熱이 나서 죽는 사막의 고부라 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이 물려서 약도 못쓰고 죽어갑니다. 그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구리로 뱀의 모양을 급조하여 만들게 하시고 장대위에 높이 달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바라 본 자는 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와같이 예수님도 우리들을 위하여, 우리가 되셔서 십자가 장대에 못박혀 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구원의 장치입니다. 나대신 저주받으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영생이라는 말이 새생명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입니다. 주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그냥 믿는 자에게 말입니다.
Ⅲ. 밤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도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부분이 바로 앞의 2장23-25절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적인 일들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주님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즉 그들의 그런 표면적인 믿음을
주님은 믿을 수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에 주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 속에는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니고데모의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처럼(2), 우리도 예수님께 대하여, 아주 좋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구제활동과 기독교 문화에 대하여도 정말 대단하다며, 아주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대하여도 가장 탁월한 말씀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도 칭찬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신앙적인 좋
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과 그의 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장대위에 달려 마귀에게 속아 살며, 죄악의 독에 찌들어 있는 우리 대신 저주가 되신 주님을 믿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은혜를 꼭 붙잡고 성령으로 태어난 이 신비로운 관계 안에 늘 머물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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