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4장13-33절(천국 보행자) 13. 7.7
Ⅰ. 죽기전에 가봐야 할 곳으로 소개된 명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랜드케년, 뉴질랜드 남섬, 나이아가라, 몰디브공화국 등 여러 나라의 명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名所들 중에서 여행을 한 사람들이 꼭 다시 한 번 와봐야겠다고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볼리비아의 우유니라고 하는 소금사막입니다. 지지난주 마침 텔레비전에서 그곳을 방영해주었습니다. 지금부터 그곳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유니는 볼리비아의 산지에 수 십 킬로 사방이 지구상에서 가장 길고 넓게 수평을 이루는 소금사막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11월에서 4월까지 가끔씩 비가 내리는 데 비가 내리고 날이 개이면 바닥이 20센치 정도 물이 쌓입니다. 그러면 수십 킬로 수평에 하늘이 그대로 발아래에 비칩니다. 그곳을 걸으면 사람들은 꼭 바다위에 걸아가는 느낌, 또는 하늘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또 밤이 되면 우리가 보는 그런 별이 아니고 파편이 박힌 듯 한 그런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그대로 발아래에 펼쳐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이 고인 소금사막을 거닐면서 꼭 자신들이 하늘 위를 아주 가볍게 걷고 있는 듯 한 착각 속에 빠진 다고 합니다. 완전 별세계이지요. 그래서 제가 집사람에게 와! 우유니는 꼭 한번 가볼만하네 “우리 한번 가자” 그랬습니다. 그리고서 잠시 후에 저는 “여보 나는 거기 안 갈래” 그랬습니다. 일인당 경비가 ,,900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우유니보다 더 심오한 名所로 인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지역의 광야에서 모인 군중을 위하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사건은 참 유명합니다. 그렇게 큰 기적을 베푸신 후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해가 지자 자신은 산에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바다위에서 역풍으로 시달리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물위를 걸어오시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기겁하였습니다. 주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 시며 곧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그때 역시 나서기 좋아하던 베드로가 대뜸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명하소서”하자,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얼마 못가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치고, 배안의 제자들은 모두 놀라서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고 감격하게 됩니다. 상상만 해도 아. 얼마나 신나는 뱃놀이였을까요!
Ⅱ.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6장1-21절과 같은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물위를 걷게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십시다. 흔히들 ‘떳다’라든지, 그 사람 요즈음 ‘뜬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능이나 스포츠, 또는 정치계나 학계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유명세를 타게되고 인정받게 되고 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우럴어 봐 줍니다. 그 분야에서 대 히트를 친 것입니다. 이게 뜨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것, 그리고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그렇게 뜨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세와는 정반대로 그 마음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서 하늘을 두둥실 보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을 보행하듯이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천국보행자입니다. 이 현 세상에서 뜨는 자들은 뜨면 뜰수록 세상에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뜨는 자들은 천국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술처럼 놀래키기 위하여 물위를 걸으신 것도 아니고, 쇼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삶이 그렇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처럼 산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가벼워져서 날마다 천국을 보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떠서 하늘을 보행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1. 빈들의 식사를 해야 합니다(13-21). 예수님은 빈들에 가셨고, 사람들이 모였으며, 모인 자들은 예수께서 예비한 특별한 식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식탁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증 받거나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이심을 나타내시고,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식탁은 빈들에서 먹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처럼, 우리는 생활속에 빈들을 찾아서 생명양식 예수님을 섭취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양식은 보양식도 특별식도 아니고, 간식도 아닙니다. 천국에 속한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이고 主食입니다.
본문에 있는 빈들의 식사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얼마나 쇼킹한 사건이었겠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은 불과 한 사람 몫의 식사량인데 주님이 받아서 축사하시고 나눠주실 때 그것을 받아서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나눠주는데 나누어주는 그 사이에 제자들의 손에서 그 빵이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가루반죽 으로 수제비 떼듯이 나누어주는데 나누어 주어도 나누어 주어도 자꾸만 커집니다. 그리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도 먹은 자들은 장성한 남자들만 5,000명 정도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빵조각을 모으니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이 현장에서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실감을 못해서 그렇지 실감하면 이것은 보통 충격이 아니지요. 그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먹고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야! 마침내 우리 주님도 떳다 떳어! 하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는 곧 앞으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출세 길이 활짝 열렸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은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깊이 생각하시면서 그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앞으로 자신이 지실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담으시고 그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서 떼어져서 나누어진 빵조각을 사람들이 먹게 되듯이, 그렇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다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요6장5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늘에서 오신 주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믿는 것을 주님은 자신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날마다 섭취하는 것만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가라앉지않고 하늘에 속한자로 뜨는 삶을 살게 되는 비결입니다.
예)예수천당으로 유명하신 최봉석(권능)목사님이 어느 날 장터근처에서 “예수 천당!”을 외치는데 마침 말을 타고 지나가던 일본 헌병이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떨어질 뻔 하였습니다. 그 헌병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몽둥이로 최목사님을 때립니다. 그런데 최목사님은 맞을 때마다“예수천당” 그럽니다. 그래서 그 헌병이 “야 이놈아 너는 이렇게 얻어맞아도 예수 천당이냐?”그러자 최목사님이 “내 안에는 예수님만 가득히 계셔서 심하게 맞으면 맞을수록 예수 소리만 납니다”그랬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 내내 만나를 먹었듯이 기도의 빈들을 마련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날마다 마음으로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된 양식처럼 날마다 믿음으로 섭취하셔서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천국보행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세상의 꿈이 없어야 합니다(요6:15). 오늘 말씀에 이 기적도 놀랍지만 기적 이후는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 표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12광주리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놀라고 감탄할 겨를도 없이 이때의 예수님의 행동이 좀 특이합니다. 22절에 보시면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모인 무리들을 해산하여 보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을 다 보내신 후에 주님은 홀로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너무나 의문이 가는 급작스러운 행동을 취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6장15절을 보시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목격하고,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을 서둘러 바다건너편으로 가도록 재촉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으로 삼겠다는 데 사람들을 해산시키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타고 건너편으로 가게하셨을까요? 이런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어쩌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이제 우리도 떳다! 떳어! 그러면서 그 마음에 헛바람이 들까봐 그들을 보호하시려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건너편 마을로 배태워 보내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은 그들을 뿌리치시고 기도하러 산에 가셨습니다. 해질 무렵에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기를 밤 사경이 될 때까지 장장 6-7시간을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왕의 자리를 제의받고 왜 이렇게 긴 시간 기도하셨을까요?
성도여러분. 王의 자리란 인간의 모든 꿈의 정점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그 頂点을 향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변두리 대신 중앙에 들어가고 싶고, 우두머리가 되고 싶고, 長字가 있는 사장이나 교장이나 장관처럼 다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王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왕의 자리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허락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꿈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마귀가 제의해 왔던 것입니다. 이 세상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네게 절하라 그러면 이 모든 영광을 다 네게 주리라,,.그때도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그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런 영광, 또는 그 부스러기들을 꿈꾸며 성취하려고 목말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도가 헛바람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주님을 날마다 섭취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우리가운데 그런 꿈을 가지고 계신다면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꿈이 있는 동안은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서 수시로 세상 바다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많은 그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져서 자꾸 가라앉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꿈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런 기도는 백날해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서둘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저는 우리 생명시내 교회 성도님들은 한 분도 세상 헛된 개꿈을 꾸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천국보행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29-30). 예수님은 사람들의 제의를 다 뿌리치시고 홀로 산에 가셔서 장시간 기도하시고 바다위를 걸어서 오십니다. 왕의 자리도 이루고 싶은 세상 영광이 마음에 하나도 없으시고 오직 하나님으로 마음이 가득하셔서 바다도 육지처럼 사뿐이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 긴 시간동안 아직도 역풍에 시달려 갈릴리바다 맞은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24절에 보시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주님이 허락하시면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역풍에 심히 시달리는 고난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의 헛바람을 빼시는 시간입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에 든 헛바람이 빠지게 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힘겹게 노를 젖고 있을 때니까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봐도 다 큰 사람들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무서워했겠지요.
서두에서 보신대로 주님은“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시며 곧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을 말씀을 따라 베드로도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런데 한참 가다가 얼마 못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물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던 베드로는 그의 마음의 눈을 오직 예수님께 고정시켜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문명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정욕들로 분주하면 주님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안 보이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세상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서,“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지요.
예)마24:38-예수께서 심판 때는 노아시대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참 부지런하였습니다.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그들의 일에는 대단히 열심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바보스럽게 살았던 노아만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다 비웃어도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오랜 세월에 걸쳐 방주를 건설하였습니다. 때가 차고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을 때 사람들은 다 물속에 가라앉았는데 노아는 세상에서 뜨는 사람이 되었으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이 못박히신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 대신 주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표적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내가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보다 더 귀한 양식이 없으며, 예수님보다 더 귀한 꿈도 없으며, 주님밖에는 정말 사모할 대상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언제나 예수님만 바라시고 갈3:1절 말씀처럼 언제나 예수님이 밝히 보이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Ⅲ. 우리의 마음은 오직 주님을 섭취하고, 오직 주님을 꿈꾸고, 우리의 마음의 눈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들의 생활입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주님 모시고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가벼워져서 뜨는 삶이고 천국을 걷는 삶입니다. 여름 바닷가에 비치볼이 뜨고 츄브가 뜨듯이 날마다 하늘에 속하여,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보행하시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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